2014년 9월 19일 김해 명예의 전당에서 개최된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우연히 국내 만화 및 애니메이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부천에 위치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을 만드는 것과 운영하는 것, 게다가 한국 근현대만화역사에서 원로이신 조관제 화백을 비롯하여, 한국 만화가 중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최규석 작가, 그리고 한국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장형윤 감독까지 있었다. 세미나를 관람한 후, 우연히 세미나 발제자 및 행사를 주관한 분들과 같이 식사할 기회가 있었고, 식사 뒤 뒤풀이로 맥주를 마실 시간이 있었다.

 

그런 자리에 우연치 않게 내 왼쪽에는 최규석 작가가 오른쪽에는 장형윤 감독이 앉게 되었다. 이 두사람의 정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셀마의 단백질 커피>라는 작품이다. 최규석 작가는 같은 대학 출신 친구인 연상호 감독과 더불어 <내사랑 단백질>을 장형윤 감독은 <무림일검의 사생활>이란 작품을 보여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최규석 작가, 연상호 감독, 장형윤 감독 작품을 접해본 것은 바로 그 인디 애니메이션인 <셀마의 단백질 커피>이란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감각과 스토리 전개에서 색다른 요소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유아 내지 초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작품만 나오기에 청소년 내지 성인들을 위한 작품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이 만화책이고, 최근에 라이트노벨이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큰 시장을 열게 되었으며,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에서 그나마 한국에서 제작된 작품을 겨우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인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성인들이 감상하기 좋은 작품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점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지만 결국 시장이 형성된 공간을 고려한다면 유아계층과 더불어 성인들도 같이 볼 수 있는 가족적인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 여긴다.

 

그 중에서 이번에 내가 감상한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전체 관람이 가능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고, 장형윤 감독 작품 중에 <아빠가 필요해>와 <무림일검의 사생활>을 보다시피 그렇게 강한 충격과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보단 잔잔한 요소로서 관객에게 다가온다. 처음 <무림일검의 사생활>을 보았을 때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가 필요해>의 경우 인간여자와 늑대남자 사이에 비추어진 긴장감은 인상적이었다. <아빠가 필요해>의 경우 상영시간이 10분밖에 되지 않은 단편애니메이션이고, 캐릭터의 모습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동물처럼 생겼고, 그들은 동물이나 마치 인간처럼 행동한다.

 

우화적 요소가 매우 강한 점에서 장형윤 감독 작품은 <아빠가 필요해>와 같이 작품 내의 이름이 동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여주었다. 그런 점은 뒤에 <셀마의 단백질 커피> 중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주인공인 진영영은 원래 무림고수였으나, 죽은 후 환생하여 커피자판기로 되었고, 우연히 알게 된 혜미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커피자판기인 진영영의 모습은 영락없이 동화 속에 등장할만한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런다고 자판기라고 해도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미묘한 배치 속에 그의 작품은 뭔가 의미를 두고 있는 게 있다.

 

인간과 비인간적인 등장인물로서 과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보낸다. 그 정답은 아마 사랑일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아빠가 필요해>는 제목 그대로 아빠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고, 어느 여자가 나와 늑대에게 아이를 건네는 모습에서 가족의 재결합이란 독특한 모습이 나온다. 늑대와 같이 사는 사슴은 애인인 것 같기도 하면서 뭔가 위험에 빠진 존재로 비추어진다. 그러면서도 늑대는 자기에게 맡겨진 아이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나온다.

 

가족이란 관계에서 늑대와 사슴, 토끼와 거북이,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이고 서로 같은 조건에 있을 수 없는 존재다. 게다가 늑대는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다. 그는 자신의 일보단 결국 자기에게 맡겨진 영희를 위해 살아간다. 자신이 일을 하고 꿈을 가지고 목적을 향하여 가나, 결국 그 끝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그런 점에서 장형윤 감독이 제시하는 작품적 가치에서 잘 알 수 있는 대사가 나온다. “문학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로 작성된다. 물론 실존했던 일들을 기록한 작품도 있으나, 소설 안의 여전히 허구적 이야기다. 사실이 아니라서 허구인 게 아니라 소설로 작성되는 그 순간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 말하듯 소설은 하나의 시가 될 수 있고, 시라는 것은 그 누구의 이야기로 될 수 있는 하나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삶 그 자체가 오히려 소설보다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인간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기에 그 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대하여 과연 인간에게 자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것이다. 사랑에 대해 내가 잘 말하기란 어렵다. 사랑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여러 가지 모습을 하며, 그 사랑이란 개념을 단순히 정의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아빠가 필요해>는 가족의 구성이 이질적인 존재라도 같이 모이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이고, 가족이 없이는 자신이 어떤 출세나 성공을 하더라도 행복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가족 관계에서 모든 것이 좋은 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이란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빠가 필요해> 이후 등장한 <무림일검의 사생활>은 조금 다른 사랑의 이야기다. 차가운 몸으로 태어난 무림고수는 그저 싸우기 위해 살아왔고, 전생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혜미를 만나 자신의 생에 대한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도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단지 다른 점은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혜미라는 소녀는 원래 인간이고, 검객인 진영영은 인간이었으나 커피자판기로 환생한 존재라는 점이였고,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서 주인공 경천이는 뮤지션 지망생이었으나 얼룩소로 변한 인물이고, 우리별 일호는 본래 인공위성이었으나 소녀로 변신한 존재다. 본래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자로 변한 경천과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으로 변한 점에서 변신이란 소재가 서로 역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경천이가 얼룩소로 변한 이유는 인간인 그는 인간의 마음을 상실해서이고, 인공위성인 우리별 일호는 기계이면서 인간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다. 경천이는 노래를 하는 가수지망생이었고, 예전에 나름 실력이 뛰어나 오디션에서 최종심사까지 간 실력자다. 그러나 그는 점차 음악에 대한 진심이 사라지고, 그가 좋아하던 여자인 은진이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게다가 그녀는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서 상심에 빠지게 된다. 인간인데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이유, 그것은 경천이는 좋아하는 여자를 눈앞에서 그저 보낼 수밖에 없는 좌절감이었다.

 

그가 처음 느낀 그 마음을 담은 노래를 불렀을 때, 분명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노래는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았고, 오직 그 노래를 쫓아 온 우리별 일호라는 인공위성만이 있었다. 인공위성이었던 우리별 일호는 이미 수명을 다하였고, 그저 우주를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고철덩어리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고, 그저 멀리 지구를 바라보면서 일호가 발견한 것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고, 피아노 반주였다. 그 주인공은 경천이었고, 이미 사용할 수 없는 인공위성인 우리별 일호는 경천을 찾아 지구로 내려온다.

 

하지만 지구로 온 일호는 저주에 걸린 얼룩소를 만나고, 얼룩소는 소각자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져있고, 오사장이란 밀렵꾼은 얼룩소의 간을 노리며 공격해온다. 여기서부터 위기에 빠진 얼룩소 경천이를 일호는 만나게 되고, 단지 그의 노래만 듣고 싶다는 마음으로 경천의 주변을 맴돌게 된다. 사랑도 잃고, 가난한 뮤지션인 경천에겐 아무런 미래와 희망이 없었고, 그저 현실 앞에 무력하고, 이제는 얼룩소의 모습으로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소각자는 마음을 잃은 인간이 동물로 변하면, 그 동물을 찾아 자신의 소각로 안에 넣는 괴물이다.

 

괴물의 등장, 그리고 오사장의 밀렵행위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해 이미지로 보여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이 마음을 잃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현실에 놓인 상황이 전혀 마음먹은 것처럼 되지 않은 것이고,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지 혹은 나를 위해 누가 미소를 지어주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그런 것이다. 삶의 의지가 나를 위해서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것도 있다.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가? 그 질문에서 경천이는 오직 자신만을 사랑했고, 다른 사람에 대해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동물로 되어버렸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가지고 있고, 이성으로서 자신 안의 세계만 아니라 자신 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만물을 보고 느끼고 그리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경천이의 경우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가능했으나, 그 세계란 오직 자신안의 세계고, 남에 대한 마음을 없었다. 마음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보통의 동물들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북쪽의 마녀가 경천에게 찾아와 만약 살고 싶다면 자신을 따라 인간의 손길이 없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그렇다면 소각자와 오사장으로부터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렇게 될 경우 경천이는 영원히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하다못해 인간의 기억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려 인간의 모습을 잃은 경천이는 자신이 인간인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아닌 인간, 우리별 일호와의 사랑이었다. 우리별 일호는 사랑이란 단어를 모르고 감정도 모르는 기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남자가 사랑을 모르는 여자와 만나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사랑이란 감정에 눈을 뜬다. 게다가 우리별 일호는 수명이 이미 다 되었기 때문에 언제 멈추지 모른다. 일호의 목적은 오로지 경천이의 노래를 듣는 것, 음악이란 정말 신기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언어가 서로 다르면 이해하기 어렵고 소통이 어렵다. 그렇지만 오로지 음악으로 통해 서로 감정을 나눌 수 있으며, 같이 어울릴 수 있다. 음악의 힘이란 바로 서로 통할 수 없는 존재라도 통하게 해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음악의 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넘어 기계인 우리별 일호까지 마음을 가지게 했다. 마음을 가지게 된 일호에게 서로 의지가 가능한 존재는 얼룩소였고, 얼룩소인 경천이는 이때까지 남들에게 가지지 못한 감정을 가진다. 자신만 생각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일호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런 애절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얼룩소의 모습에서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일호와 마주하면서 일호는 자신이 로봇인데도 괜찮은지? 아니라면 가슴과 등이 거의 붙어 여자다운 매력이 부족해도 괜찮은지 묻는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으나 현실에서 보자면, 일호는 자신이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어도 좋은지? 그리고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도 좋은지 물어보는 것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이질적이고 부족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경천에게 물어본 것이다. 나란 존재, 너란 존재 있는 그대로, 그 모든 것에서 좋은 점과 더불어 불편하거나 부족한 면이 있어도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무림일검의 사생활>과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조금 다른 식으로 전개되지만, 결국 서로 다른 상대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상대방에 가진 부족한 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족한 것들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나, 인간 그 개인은 타인에 대해 척도가 될 수 없다. 단지 인간이 다른 동식물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기에 척도가 되는 것이지 어느 인간 하나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누군가 서로 드러내어 그것을 서로 용인하여 상대방을 아낄 수 있는 게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경천이가 은진에게 바라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심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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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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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은 아직 나에게 참 먼 책인 것 같았다. 나름 신화에 대해 관심이 있고, 신화에 대한 인류학적인 고찰 역시 관심이 많다. 그런 점에서 <백년의 고독>은 신화적인 요소를 이리저리 끌어온 작품이다. 번역자의 부연설명에서처럼 길가매쉬의 모험, 오디세우스의 귀향여행, 연금술사, 성배 찾으러 가는 기사단의 여정, 영원함을 추구하는 점이라든지 더 나아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디오니소스적인 모습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 모든 것이 복선적인 요소로서 계속 운명이 돌고 돌지만, 한편으로 너무 갑작스레 상황이 변화된다. 그 변화의 공간에서 우리는 인간이란 계속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돌고 돌아 마지막에는 파멸이란 이름으로 그 마무리를 주어진다.

 

<백년의 고독>에서는 실제 저주받은 인간의 역사는 백년이 아니라 백년이 넘어 버렸다. 아마 100년의 고독을 지닌 자는 우르술라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호세 아르끼디오 부엔디아의 아내이면서 사촌인 그녀를 말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사촌인 부엔디아계의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그녀는 남편인 부엔디아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 마꼰도로 온다. 오게 된 동기는 남편이 마을의 남자에게 남자구실하지 못한다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그 남자와 대결하기로 약속하고, 그 자리에서 그 남자를 죽인 것이다.

 

시기적으로 아직 20세기 이전이고 콜롬비아 배경인 점에서 국가적인 정치체계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콜롬비아 역시 이전에 강대국에 의해 식민지로 통치 받았을 나라일 것이다. 그들은 스페인어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변에 흑인과 백인 혼혈인, 집시들, 원주민들이 있는 점을 본다면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가 독립을 했더라도 그 이전의 역사적인 흔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늘이 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역자의 부연에서 마꼰도라는 것은 거울로 만든 환상의 도시다. 거울이란 것은 자기 모습을 보기 위해 만든 도구다.

 

하지만 거울 너머에 비추는 자신은 분명 실존하나, 거울 그 자체에 보이는 존재는 실존하지 않은 존재이고, 그 존재는 단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거울 너머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보단 거울 그 자체로 보려 한다. 거울을 보는 것은 잘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거울은 어둡거나 혹은 밝거나 또는 황혼이나 새벽의 언저리에서 비추어지는 모습이 다르다. 거울이 보이는 것을 다 반사한다고 해도, 그 거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정말 그 자체로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빛을 굴절을 직접 볼 수 없으나, 거울은 빛의 굴절을 볼 수 있게 한다.

 

굴절로 어긋난 모습이 바로 우리의 진실이 아니라 어긋난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사실이란 진실처럼 바로 일어난 객관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Fact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모호하고, 그 경계 내에서 사실이란 것은 결국 만들어진 존재이란 것이다. 만들어진 사실과 허구, 그 교묘한 눈속임 내지 은밀함이 아마 <백년의 고독>을 오묘한 세계로 인도했을 것이다. 사실주의적인 소설이란 점에서 사실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나, 내가 본 <백년의 고독>은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너무 달랐다.

 

과장이 넘치는 표현력, 문장의 연결성이 전혀 부드럽지 못한 배치, 게다가 초과학적인 현상들은 과연 이것이 사실주의라는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때마침 사실주의적인 만화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 아이러니한 맛을 느꼈다. 심지어 아트 슈피겔만의 <쥐>라는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동물로 표현되지만, 작품의 설정과 전개에서 보여준 나치 아래의 잔혹함에서 사실주의적인 요소를 인정받았다. 즉 만화적 표현과 묘사에서 의인화로 통해 사실적이지 못한 등장인물로 통해 당시의 사실들을 표현하였기에 사실주의라는 것을 인정받은 점이다.

 

그런데 <백년의 고독>은 사실주의적 요소, 즉 당시 시대적 배경도 어느 정도 관여는 하나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사건으로 변화하게 되더라도, 그 자체가 사건의 중심이 아니었다. 모든 중심은 마꼰도로 시작하여 마꼰도로 마무리하고, 마꼰도 안의 부엔디아 가문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비극의 탄생은 어디로부터 시작하는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도 인간의 예술은 아폴론적인 것보다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더 찬양한다. 정지된 아폴론보다는 계속 죽음과 삶을 반복하여 광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말이다.

 

<백년의 고독>에선 사치와 향락적 요소에서 포도주가 자주 거론된다. 갑자기 부자가 된 부엔디아 남자는 그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향략을 즐기기 위해 포도주를 욕실에 부어넣고 목욕을 한다. 디오니소스가 포도주의 신인 점을 본다면, 술은 인간을 아주 기쁘게 하나, 때로는 미치게 하여 인간의 모조리 빼앗고, 차마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낸다. 디오니소스의 향기로운 포도주야 말로 인간의 그 자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마법과 같은 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마법의 약을 마시지 않고, 이미 마법이 시작된다. 번역자가 마술적 사실주의란 말처럼 마술적인 주술효과가 이미 걸린 셈이기 때문이다.

 

초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자신을 모욕한 남자를 죽이고 마꼰도로 온 것은 소설의 설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죽은 남자는 분명 묘안에 묻혔는데도 부엔디아 앞에 유령처럼 등장하고, 때로는 대화도 하고, 나중에 서로 화해까지 한다.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모습이 이 작품에서 하나의 설정으로 등장한다. 초현실적인 사건이 등장하는 것에서 이것이 사실주의 작품인가? 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그런 사실주의적 요소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마꼰도라는 마을을 만들고 발전시키면서 거기가 쇠퇴하는 과정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꼰도는 콜롬비아 영토 내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산 속 내지 오지의 마을이다. 그곳에 온 부엔디아 가문은 마꼰도를 발전시키고 자식을 낳고, 주민들이 올 때마다 많은 도움을 준다. 따라서 마꼰도는 부엔디아 가문만의 왕국이고 세계이며, 그리고 무덤이기도 하다. 아무도 죽지 않았던 신생마을에 죽음이란 없었고, 단지 마을은 크게 성장하고, 이윽고는 집시들이 그 마을을 오게 된다. 그러면서 호세 아르까디오의 성욕, 그리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모험은 점차 평화로운 세계를 혼돈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혼돈은 자신들의 내부에서 온 게 아니라 다 외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형인 호세는 세계를 돌고, 동생인 대령은 전쟁터를 누빈다. 그들의 동기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었으나 그 결과는 마을을 모조리 흔들었던 사건이 된다. 그로부터 아르까디오의 죽음, 아르까디오의 쌍둥이 아들, 미녀 레메디오스 승천, 한 여자를 두고 형제가 서로 애인으로 차지하거나, 열렬한 가톨릭 신앙자인 페르난다의 시집 등에서 부엔디아 가문은 번창과 쇠퇴의 길을 걷는다.

 

발전과 쇠퇴에서 과학적 기술이 등장하는데, 가령 아주 아름답고 천사 같은 레메디오스의 죽음에서 부엔디아 가족들은 그녀의 모습이 담긴 은사진을 가진 점, 아마란따가 사랑한 남자가 가지고 온 자동피아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본 기나긴 기차, 그의 딸이 결혼한 남자는 비행기를 몰았던 사람이다. 중간에도 과학의 산물이 등장하고, 문명의 발전, 그리고 자본주의 유입, 그로 인해 바나나농장 노동자의 파업과 죽음이 비극처럼 등장한다. 단순히 부엔디아의 가문의 발전과 몰락은 마꼰도의 역사이면서 한편으로 콜롬비아 역사를 비극적으로 보여준 점이다.

 

오히려 그런 비극이 중심이 되는 게 아니라 부엔디아 가문이 겪은 일 중에 하나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더 큰 인상을 남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령의 전쟁이 참전한 이유는 자유파와 보수파의 가치관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모든 집이 하늘색으로 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은 점이었다. 하지만 그가 벌인 전쟁은 분명 내전의 기나긴 슬픈 역사이었을 것이고,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겪은 200량이 되는 기차는 내전에 이어 노동운동의 슬픈 비극일 것이다.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항의하자 군인들이 와서 무참히 사격한 점에서 마꼰도 마을은 이제 삶이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죽음이 존재하는 곳으로 변한다. 디오니소스적인 세계관에서 봄이 부엔디아가 처음 올 때라면 아우랠리아노 세군도는 죽음으로 변해진 가을이고, 마지막 정점은 고모와의 근친상간으로 가문이 파멸되는 아우렐리아노의 슬픔에서 볼 수 있다. 근친상간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욕망, 외부에서 오는 이방인에 대한 배척(메메와 마우라시오 바빌로니아), 다른 여자에 대해 서로 집착하는 형제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과연 그렇게 만든 것인가?

 

그렇다면 콜롬비아의 역사에서 100년이란 시간에서 계속 이어지는 마꼰도 부엔디아 가문은 영원히 그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고뇌로 끝나야 하는가? 첫 단추가 틀리면 뒤에 단추도 어긋나고, 심지어 더 어긋날 수 있을 것이다. 어긋난 운명에서 다시 시작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아우렐리아노는 그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에 혼자 있는 것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근친상간의 욕망에서 초대는 사촌이었으나, 끝은 고모와 아들이다. 하지만 고모는 어머니와 형제이기 때문에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아마란따 우르슬라는 할아버지의 자손, 즉 고모이면서도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인 이모이다. 고모와 이모인 아마란따 우르슬라는 결국 자신의 아들과 같은 아우렐리아노와 몸을 섞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물리친 이유로 아름다운 여왕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2남2여를 슬하에 두나, 자신의 아내가 어머니란 점을 알고, 두 눈을 찌르고 평생 방랑한다.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2남2여 모두 비참한 죽음과 결말을 맞이한다. 근친상간이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비참한 운명으로 보여주는지, 또한 그런 근친상간되도록 만들어내는 배타성이 결국 인간은 계속 돌고 도는 시간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에 두고 보면, 우리는 근친상간을 하지 않는 나라라고 해도, 아니 근친 적으로 다수 촌수가 멀다면 인정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점에서 배타적인 요소는 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백년의 고독> 못지않은 사회적 갈등과 배타적 관계로 멍이 든 것은 분명하다. 그 결말은 부엔디아의 가문 몰락처럼 우리 역시 그런 배타적인 집단주의에 말려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제목이 일단 <백년의 고독>이란 말처럼 인간의 수명은 현재 대략 80년 이상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100년 이상을 살은 사람도 나온다. 100년 어찌 보면 그것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수명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이상을 살아가든지 아니라면 그 이하를 살아가든지 항상 외로운 법이다. 그 외로움은 연애적인 요소도 다분할 것이고, 아니라면 인간적 요소로도 충분히 그럴 것이다. 대령의 인생에서 그는 혼자만의 고독을 찾아 방에 은거하였으며, 많은 가족들도 어둠에서 고독을 영원한 반려로 삼았다. 외로움이 싫은 것이 인간이나, 그 외로움만이 자기에게 남은 것임을 알아낸 자들의 말로가 오히려 우리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고독을 느낀다. 고독이야 말로 실존주의자 내지 혹은 루소가 자기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시작이나, 그 고독이 지속되면 결국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될지 모른다.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자신이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로서 통해 자신을 볼 때 알 수 있다. 사회적 관계가 바로 그런 관계적인 요소이므로 고독에게 선택된 인간들을 보자면, 그들은 영원히 사람들과 이어질 수 없는 벽으로 가려진 존재다. 하지만 고독이 사람을 선택하든, 사람이 고독을 선택하든 그 기점에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원하지 않은 운명이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불운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항상 그대로라면 항상 그대로 비극은 이어진다. 잘못된 점이 있으면 분명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그것이 다시 비극으로 몰아넣고, 고독의 영원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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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를 지배하여 강탈하고 치욕을 주던 시기, 일본에도 다양한 인간들이 존재했다.대부분은 흔히 말하여 군국주의정신 "천황폐하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신들의 우월감에 젖은 인간들이 넘치는 반면, 그러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제2차 세계대전에 강제차출 되면 일본군 내에서 많은 말썽이 있었는데, 일본인은 1등 황국신민이고, 우리는 2등 황국신민이란 딱지에 불평등한 조치가 내려졌다. 물론 다카오 마사오군과 같은 아주 훌륭한 대일본제국의 장교들은 언제나 천황폐하를 위해서라면 초개처럼 부하들의 목숨을 버릴 각오는 되어 있지만, 막상 초개처럼 버려질 운명의 조선인들은 군 내부에서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내부에서 탈영하여 독립군이나 광복군, 혹은 연합군 진영으로 넘어가 반대로 그들의 군사조직에 편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물론 일어와 한국어가 되는 점과 더불어 외국어까지 되는 사람이 있다면 일본군을 상대하는 작전에서 매우 유익한 방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선인들의 탈영 내지 불성실한 자세만으로 일본군 내의 골치만이 아니었다. 일본군 내에서도 일본인 역시 골치가 아픈 자들이 있었다. 일본인 내에 마르크스주의자 내지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의 총구가 적의 진영이 아니라 적의 진영으로 달려가는 일본군에게 향한 채 발포한 경우도 있었고, 무기를 정리하여 일본군이 퇴각할 대 그 무기가 그대로 상대진영에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인인데도 한국 독립군과 같이 연대한 부류도 있고, 한국 아나키스트와 결혼한 일본인 여자도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박렬 열사의 아내는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라는 여자다. 그녀는 일본에 대한 반정부세력으로 낙인찍혀 사형을 당해고, 그녀의 무덤은 한국의 박렬 열사와 같이 모셔져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무조건적으로 일본인에 대한 적대의식은 가지는 것은 바르지 못하며, 오히려 일본인 중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광복,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원한 자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에 대해 직접적인 원조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제국주의 활동에 크게 반대하는 인물 중에 코바야시 다키지란 인물이 있었다. 그의 유명한 소설로 <게공선>라는 작품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노동문학에서 일본의 대표적 작품이다. 게공선은 공장도 아니고, 배도 아니다. 배라면 분명 어선 관련 법을 적용하고, 공장이라면 공장법을 적용받아야 하나, 그 두 가지가 아니므로 이들은 갖은 착취와 억압,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힘든 생활을 한다.


인간이 가혹한 환경에서 노동착취를 당하면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해지며, 육체적으로 파멸한다. 총을 들고 있는 감독대행이란 자는 심심하면 위협하고 같은 인간인대도 불구하고 악랄한 행동만 골라서 한다. 게공선은 실제 있었던 일들을 토대로 만들었으며, 아주 잔혹한 사실은 배가 침몰되어도 배 안의 선원노동자는 아무런 위로와 배상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배가 침몰하여 보험금을 선주가 타는 것이다. 배는 오래 되어 고장이 잦으며, 상태가 좋지 않아 늘 수리가 필요하다.


배가 가라앉기 전까지 노동자들이 고생하고, 배가 가라앉으면 노동자는 죽는다. 그들의 고생과 죽음은 다시 선주의 주머니의 화폐로 이어진다. 그런 모습을 보며, 사조산업의 선원들이 처해진 광경은 왠지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과 유사하게 보였다. 정말 배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하루에 8시간이 아니라 그 배를 일하는 경우도 많고, 안전장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부상을 쉽게 당하며, 조선소에서 용접공들은 사고사로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배라는 공간은 육지에서 멀어져 있어 우리는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들의 거칠고 나쁜 환경은 인간들의 마음을 황폐화 시킨다. 선원이 마도로스라는 이름으로 낭만적인 이름을 르넹상스 이후 유럽에서 달고 다닐 수 있겠지만, 목숨을 담보로 하고, 죽어도 시체조차 가져갈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저 죽을 때까지 일하거나 죽지 않아 하선한다면 가난에 의해 여생이 힘든 경우가 많다. 배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함에 의해 탄다. 가난이 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세상은 그들은 죄인처럼 만들어준다. 배를 타는 사람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처우와 현실을 개선하고, 그들에 대한 보장을 약속하지 않는다면, 외국사람들이 들어오게 된다. 외국사람 역시 한국사람처럼 인간이다. 그들이 피부와 머리카락 색이 다르다고 하여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존엄성을 받지 마라는 것을 우린 주장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배타적인 인간상으로 그들은 배척하고, 그들을 업신여긴다. 과거 미국이나 유럽에 일하러 가면 우리 역시 부당한 억압과 차별에 시달렸다. 왜 인간은 기본적인 중요한 점은 망각하는가?


더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저런 배를 타는 것은 남자다. 나이를 보니 40~50대 사이가 집중적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집안의 가장이며, 집에는 아내와 자녀들이 있다. 그들이 죽어 보상금이 나오더라도 생계수단이 막막해지는 것이고, 남편과 아버지 없는 설움은 그대로 이어간다. 죽는 자가 나오면 죽은자보다 더 불쌍한게 그들의 가족이다. 


아직 세월호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 억지로 찢어진 상처에 바느질을 하여 오히려 상처를 감추려다 더 심각해지는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번 사조산업 선박사고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전불감증만이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없고, 그저 이익만 추구하거나 또는 대다수 국민들은 자기가 안 당하니 상관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배타는 사람은 배를 타고 싶어 타는 것보단 탈 수밖에 없기에 타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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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3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12-03 14:24   좋아요 0 | URL
게공선 제법 유명하더군요. 좋은 책이니 추천드립니다.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
폴 르블랑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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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이 100주년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트로츠키가 지적한 것처럼 빈곤과 착취, 억압을 해결되지 않음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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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지음, 유재홍 옮김 / 울력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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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이미지 소비에 대한 착취를 설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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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2-0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저도 엔날에 봤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거였었는데, 흥미 진진하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12-01 17:45   좋아요 0 | URL
아 그건 현실문화연구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