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 - Seed Novel
맑은날오후 지음, 토브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이제 모두 장기판의 말이 모였다. 단지 부족한 점은 그 장기판의 말을 격렬하게 움직이게 할 방아쇠가 필요했을 뿐이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권은 바로 그런 순간인 것이었다. 전편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인피니티 황제와 48대 용사는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키는 이른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론의 인생과 론의 여동생인 시즈를 하나의 도구로 삼기로 했다. 문제는 자신의 손자와 손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할아버지의 큰 계획을 반대하기보단 그것을 따른다는 점이다.

 

론의 전생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통해 무의식적인 기억에 새겨진 악몽에서 모든 이종족을 죽인 것에서 시작된 기나긴 비극과 고통은 새로운 서사로 이어진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이 라이트노벨 시리즈 1권부터 3권까지 읽어보면서 지적하고 생각한 부분이 이번 4권에 확실히 드러났다. 이종족에 대한 전력을 이미 황제와 주요직에 있는 간부 내지 귀족들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종족들이 인간의 세계에 더 이상 대항할 여유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침범했고, 마왕을 죽여 인간의 세계를 넓혀왔다.

 

그렇다면 마왕군과 인간군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그것은 인류라는 조직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계속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가령 인간의 사회는 비록 왕이 존재하는 군주정이고, 하나의 구체제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문명과 산업은 다르게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피니티 국가를 산업구조를 보면 도대체 어느 체계에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농경산업인지 혹은 공업화사회인지 아니면 상업중심인지 말이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끝없이 팽창하여 토지 영역을 확대하는 점에서 이익을 계속 추구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산업의 기반이 농업, 상업, 공업이 어느 것이 될지는 모르지만 “문화발전의 과정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인간의 생식압력(인구증가압력) → 생산증강과정 → 생태환경의 파괴․고갈 →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이란 구도로서 바라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인류의 역사보단 오히려 마왕군의 역사가 길었고, 인류는 이미 균형이 맞추어진 세계에 마왕의 영역을 넘어본 것이고, 그것이 마왕군과 전쟁이 되었고, 용사는 겉으로는 인류를 지키는 수호신이어야 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영역확대로 통한 이윤 추구였다.

 

끊임없이 미지의 영역을 정복하고, 끊임없이 적군을 파괴해야지 자신에게 새로운 이윤과 특권이 부여된다. 지난 용사의 동료인 쾌속의 검인 다드와 같은 경우 자신에게 이미 많은 권력과 재력, 그리고 명성이 부여되었음에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채 심지어 마왕군의 비밀까지 알면서 론의 일행을 위기에 몰아넣는다. 그가 오직 바라는 것은 자신의 지위를 올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권에서 큰 사건이 되었고, 론과 루리 일행에게 큰 위기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1권에서부터 이미 장수족인 루리는 아무리 강한 육체를 타고나도 아직까지 어린아이다. 보통 사람에겐 큰 위협이 되겠지만, 인류에서 어느 정도 랭크가 되는 전사나 마법사에게 손도 쓰지 못할 만큼 약하다. 게다가 하급 몬스터 하급에게 공격당해 죽어야 했던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적 내지 혹은 적이 되어야 했던 존재들은 정의의 철퇴를 맞는 게 당연하여야 하기에 어떻게든 제거되어야 했다. 인류에겐 평화라는 이름 아래 무력으로 마왕군을 제압하겠지만, 처음부터 마왕군은 인류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러나 마왕군은 영원히 인류의 적이야 했고, 그들의 편을 들어주거나 협조하는 것은 인류의 배신이기에 언제라도 숙청당할 수 있었다. 이종족으로 이루어진 마왕군, 어떻게 보면 그들은 마왕군이란 집단적 부류이지, 그 이면에는 각 소수의 부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연합구조인 셈이다. 연합구조에서 그들이 뭉치는 이유는 자신들 하나가 보통 인간보다 강해도 용사에 비해 상당히 약하며, 이미 많은 마왕군들이 섬멸되었기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약해진 것이다.

 

물론 작품 설정상 마왕군의 간부들로 구성된 이종족 소왕을 보면 대부분 10대라는 점이고, 심지어 외모가 10살조차 되지 않을 어린아이가 있다. 마왕군에서 나이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지능과 유사하게 비례한다. 가령 루리가 장수족에서 어린아이라고 해도 보통 인간보다 오래 살았다. 하지만 루리는 보통 인간족의 어린아이와 같은 지적수준과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개의 나이가 20살이면 노인이고, 인간의 나이로 70~80대와 비슷한 점에서 장수족의 수명 역시 인간의 신체 상태에 비례할 수 있는 셈이다.

 

이종족의 관계에서 그들의 다툼은 그저 생존 그 자체에서 다툼이지 그 이상의 것을 빼앗는 다툼이 아니었다. 힘의 서열을 정해도 그 결과로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지는 않은 것이다. 야만스러운 생활방식이나, 필요이상으로 누군가 죽이지 않은 점에서 인류와 비교하여 더 야만스러운 것은 누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는 인간 그 보편적인 개인으로서 약할지 모르나, 인류의 용사와 동료들을 보면서 필요 이상으로 강하다. 정의라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적 가치이고, 그 도덕적 가치는 권력에 의해 결정된다. 법과 제도로서 정해진 정의에서 인피니티의 정의는 제국의 번영과 평화다.

 

하지만 번영과 평화에는 기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해주는 점에서 그들의 정의를 실천에 당연히 안티테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데올로기만 합당하다면 수단과 방법이 비윤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용납이 되고, 제 아무리 부당하여 세상에 알리게 하더라도 론과 루리, 그리고 린의 입장은 여전히 반역자와 인류를 위협하는 마왕군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도 인피니티 황제와 황제 옆에서 정찰을 하는 제3황녀는 이런 행동들을 다 알고 있었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점은 그들이 원하는 바는 단순히 마왕군을 섬멸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여인처럼 론의 어머니는 이세계에서 초군주형 몬스터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인류와 마왕군이 격전을 펼쳐도 도저히 건들지 못하는 것은 바로 몬스터들이 가득한 세계다. 그곳이 만약 몬스터들이 사라지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 계속하여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이익을 추구하려 할 것이다. 문명이란 결국 인간의 손으로 자연을 파괴하면서부터 시작이다. 파괴할 수 있는 자연이란 언제나 한정적이다. 따라서 미지의 세계를 찾아 정복하면 그 순간부터 그 영역은 발견한 자의 것이고, 거기서 나온 자원과 보물은 그들의 이익이 된다.

 

이런 식으로 용사의 여정은 상부구조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되었지만, 하부구조는 경제적인 이익에 의해 부합된 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끝이 없고, 이익에 대한 열정은 태양을 도는 지구처럼 한 없이 돌고 돈다. 자연에 대한 착취와 농락이 끝이 나면(거기에 대한 흥미가 끝이 나면) 그 후에는 다른 인간들에게 전가된다. 다드와 같이 자신에게 권력과 재력 그리고 명예가 있지만, 그에게 그 명예가 한이 되었다. 서열이 낮아지는 것과 그 서열을 올리기 위해 용사 린을 위기에 몰아넣는 행위 역시 그렇다.

 

인간의 행복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보자면, 자족감이 결국 인간의 행복 그리고 그 행복을 만족하기 위한 욕망의 바탕이 된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식주를 넘어 원하는 물질적인 욕구를 초월하여 더 높은 단계의 목표다. 그 목표에 대한 열망에서 인간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할 가치와 존엄은 모조리 버린다. 하나의 이름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다드의 모습에서 역겨움을 느끼지 모른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다드와 같은 인간들은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고, 옆에 있어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일상적인 생활이 되어 그런 부류들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우리도 당연함을 느낄지 모른다. 도덕과 정의에 대한 판단에서 그 사회의 법과 제도, 그리고 그것을 합리화하도록 하는 힘의 논리가 숨어져 있다. 다드의 행위는 우리 독자의 눈으로 보기엔 악랄하겠지만, 그 인피니티제국이란 가상의 이야기 세계 속에서 당연한 행동이 될 것이다. 단지 린에 대한 협박은 드러나지 않으면 모든 것은 완벽하다. 인류에게 마왕은 섬멸되어야 할 존재고, 마왕에 협력한 존재는 모두 반역자이다.

 

반역자에게 내려지는 것은 구체제에서 참수형 내지 교수형이다. 그나마 한 번에 죽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다행일지 모른다. 봉건사회에는 화형과 능지처참 같은 잔혹한 고문과 사형이 이어진 것이라면 말이다. 이런 도덕과 정의에 따라 루리는 고문당하고, 론과 린은 위기에 빠진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와 48대 용사가 기대했던 순간이 다가왔다. 서사적인 흐름에서 론이 루리를 만난 것은 서사의 발단이 되고, 론이 린을 만나 마왕처럼 착각한 문지기를 격파할 때 하나의 위기와 전개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론의 신변이 큰 위기는 위기를 넘어 절정으로 다가왔다. 그 절정의 순간에 다시 전개와 위기처럼 거대한 서사 안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이때까지 여정을 떠난 론, 루리, 린의 여정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게 이번 4권의 주요 포인트라고 볼 수 있다. 론은 용사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인간이 아닌 자의 피를 이어받았다. 게다가 억지로 몸을 통제하고 있는 수많은 봉인들이 그의 위기로 통해 어떤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 그 열쇠의 키는 루리에게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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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가산점에 대한 부분에서 조금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이란 나라는 왜 서로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가라는 점이다. 결국 그것은 본질을 보지 않고, 본질이란 뒤를 가리고 있는 장막을 열심히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군가산점에 대해 찬성하고 또 지지한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를 넘어 인권과 관련된 것이다. 진보적인 성향은 인간의 권리를 추구하고, 보수적인 성향은 기존의 체계를 지지한다. 그렇다면 군인에 대해 어떻게 보는 것일까? 나 같은 경우 군복무 생활을 좋은 환경에서 한 편이다. 공군을 나와 도시의 비행장에서 하사로 전역한 사람이다.

 

일반 사병과 달리 급여도 받고, 사회생활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일반 사병에 대한 인권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근무한 부대에서 구타 및 가혹행위가 있었고, 물론 이에 대한 처벌도 있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육군 총기사건이나 자살사건이 그렇게 일어나지 않았고, 대부분 대학교 휴학생이 온 곳이라 병사들은 사회적인 결여성이란 거의 없었다. 조금 튀거나 특이한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그렇게 전역하고 사회로 나갔고, 예비군 훈련에서도 만날 때도 있었다. 공군이었기에 나름 편한 군복무 생활이라 해도 그래도 군대는 군대다.

 

군대에 복무하는 청년들은 대부분 20대 남자들이고, 그들은 집과 떨어져 2년 내외를 군대에서 복무한다. 하지만 그들이 복무하는 동안 잃는 것은 그들의 시간이 아니다. 시간은 어느 병사 1명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친구, 주변사람들의 시간도 공유한다. 특히 방송에서 보이는 군의문사는 개인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 가족의 죽음까지 연결된다. 수많은 군인들이 매해 죽어나가고, 게다가 의문사로 죽은 군인들은 명예조차 회복하지 못한 채 가족들의 가슴을 울린다.

 

그렇다면 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보수, 그런 군인에 대해 다른 식으로 보는 진보, 여기서 나는 진보적 성향이나 진보의 착각과 진보가 아닌 진보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우선 한국에 가장 심각한 부류가 페미니즘이 아닌 페미니스트들이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에 대해 논하고 추구하는 점에 대해 옳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타인의 권리를 빼앗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은 문제다. 왜냐하면 대부분 군대를 가는 부류는 대다수의 한국의 남자고, 그들은 대부분 평범한 집안의 사람이다. 한국의 사회가 일부를 제외하면 경제상황이 그렇게 좋지 못한 점을 고려하면 군대 가는 남자의 반 이상은 대한민국 경제사정에서 50% 이하가 가고, 특히 특권층이나 재벌의 면제가 눈에 띄게 높은 점을 고려한다면 힘도 없고, 인맥도 없는 남자가 대부분 가는 곳이 군대다.

 

따라서 군대 가는 남자를 두고 그들에 대한 혜택을 빼앗는 행위가 과연 인권과 여성의 권리에 도움이 되는가? 군에서 의문사가 아니더라도 병사가 죽거나 다치면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그 군인의 어머니다. 어머니는 여성이 아닌가? 여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런 여성에 대한 고려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군인 중에 사병이 한국에서 대략 40~50만 명이라면 그들의 어머니도 대략 40~50만 명 사이 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인권은 무엇인가? 어리석고도 한심한 페미니즘은 다른 페미니스트들까지도 욕먹게 만든다.

 

그들은 타인, 그리고 특히 약자에 대한 보편적 인권의식이 없고, 단지 자신들 엘리트적인 여성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투쟁으로 이어간다. 그들의 투쟁이 결국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익이 여성의 인권증진으로 생각한다. 한국에 비정규직에서 기혼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하고, 그들은 식당아주머니나 우유나 요구르트 배달, 하다못해 공장에서도 일하는 부류가 수 백 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4천원인생>에서 그런 아주머니들이 전국적으로 포진하여 있다면 페미니스트들이라면 그런 아주머니에 대한 인권은 생각하지 않은가?

 

자신의 이익이 결국 여성인권 신장이라 생각하는 멍청한 인간들에게 한국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인구가 감소한 점에서 위기의 순간이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아이를 가지면 이 경제적 상황에서 도저히 아이를 기르기가 힘들고, 설사 기른다고 이 비참한 환경에서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하냐고 말하는 부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이기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4천원인생>에 나온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식들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그녀들이 힘내는 이유는 아이들이 있고, 그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집안 여건문제로 역시 경제활동이 원활하지 못하다. 비정규직의 굴레와 더불어 각종 어려운 환경에서 그들은 결혼을 포기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만약 결혼하면 집은 어떻게 하고,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며, 이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일까?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그저 나라에 아이가 없어서 출산을 해야 한다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구호는 코미디가 따로 없다. 하나 낳으면 몇 십만을 준다 해서 그 돈으로 과연 충당이 얼마나 되는 것인가?

 

물론 있으면 좋겠지만, 그 조건으로 성립불가다. 여성인권을 운운하는 입장하는 사람이고, 그들이 관료조직이나 고위직 내지 전문직으로 가면 물론 한국의 앞날을 걱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타파하는 방안이란 무엇인가? 남자들의 군가산점 문제는 이런 것과 많이 맞물려 있다. 조금 너무 앞서 나갈 수 있는 사고일지 모르나, 한국에서 대부분 남자들은 여성보다 높은 임금과 위치가 되어야지 여성과 결혼할 확률이 높다. 즉 여성이 자신보다 낮은 남성과 결혼할 확률은 매우 낮다는 점이다. 없다는 게 아니라 확률적으로 낮고 그 상황은 현실에서 당연한 세론이란 점이다.

 

남성이 취업하지 못하거나 비정규직이거나 임금이 적다면 그들은 결혼할 수 있는가? 여성들도 원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남성 스스로가 그런 자기에 대한 무기력에 의해 의지를 상실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군대라는 곳에서 돈도 얼마 받지 못하고, 가족과 떨어져서 고생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아무런 보상이 없다. 군대 가는 남자에 대해 성범죄예비자로 보면서 정작 그들이 놓인 인권의 벽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각을 다르게 해야 한다. 군대 가는 남성보단 그들은 그저 힘도 없고 인맥도 없는 서민의 자식이고, 서민 중에 하나라는 것을 말이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100%까지는 아니나 기본적으로 대다수가 대한민국 남자와 결혼할 것이다. 그런데 결혼해야 할 남자들의 조건이 점점 하락하여 원하는 대상을 찾지 못한다면 과연 이것은 누구와 누구에 대한 손실인가? 물론 현실적으로 전문직을 제외하면 여성의 위치가 불리한 것은 맞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해야 하는 점은 대한민국에서 불리한 사람들은 힘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저 그런 서민들이다. 서로 서민이면서 싸우는 모습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처럼 흘러가나, 그 투쟁은 의미 없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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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우 2015-09-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희생을 외면하고 강제성속의 희생의 의미를 인정하려들지 않는 이들이 바로 변질페미니즘 즉 여성이기주의론자들인 거죠.기본적으로 받아야할 권리가 제대군인가산점인 것이구요.

만화애니비평 2015-09-26 11:11   좋아요 0 | URL
국가를 위해 봉사(폭력적인 강제성)하는 사람을 천대하니..어휴
 
딥스 - 세상에 마음을 닫았던 한 소년이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행복한 육아 1
버지니아 M. 액슬린 지음, 주정일.이원영 옮김 / 샘터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딥스>를 읽을 동안 나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고 있었다. 서로 다른 방향과 주제를 다룬 서적인 이 도서에서 뭔가 모르게 큰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딥스>라는 책은 실제 미국에 딥스라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치료한 경험을 정리한 도서로 아동정신 및 심리에 대한 연구, 치료 그리고 아동학에서 큰 역할을 하는 도서다. 이번에 내가 우연히 읽을 때 2판 39쇄라는 점에서 국내에서 상당히 많이 팔린 도서고, 미국을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준 도서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 튀어나오는 이유를 생각하자면 엉뚱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대다수 정신적, 심리적 불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시작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의 서곡에 대한 결과는 새로운 사실과 이해 그리고 판단을 요구한다. 내가 <딥스>라는 책에서 어린 소년인 딥스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그는 저자인 버지니아 교수에 의해 치료를 받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어린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 과정에 대한 노력과 고생을 부정하거나 비꼬고 싶을 생각은 없다. 그래도 내가 이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어서이다. 19세기 중후반의 내용과 20세기에 후반부 정도에 있었던 실제사건은 아무런 연계성을 없을 수가 있다. 단지 내가 조금 가십감이 드는 이유란 딥스라는 아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부분이었다. 딥스는 어머니는 외과의사이고, 아버지는 천재적인 과학자다. 가정에 시중을 드는 관리인이 배치되어 있고, 상당히 좋은 집에 사는 아이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인 중에 딥스라는 아이는 그 많은 어린아이 중에 하나이겠지만, 이 책에서는 전형적으로 아메리칸 스타일이 녹아있다. 마치 미국 영화의 히어로 장르를 보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어느 우연하지 않은 실수와 사건으로 마음을 가두고 세상과 벽을 쌓았다. 하지만 어느 계기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영리한 아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 대한 시나리오는 전형적인 대중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진부적인 스타일, Cliche로 가득한 현실의 이야기다. 사실에 입각한 에세이적인 내용이라고 하나, 그 딥스의 결말은 영재학교로 간 똑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로 된 것이다. 전형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이 보여주는 이야기구조다.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해소 구조가 잘 보여주었다. 물론 딥스는 처음부터 위기의 절정이었을 뿐이나 말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내용과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나두고 비교한 점을 내가 말하고 싶은 이유는 딥스라는 아이가 놓인 환경이었다.

 

어린 시절 어느 화재사건에 휘말려 문밖에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 내지 어머니가 원하지 않은 출산에 대한 후회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그의 집안은 충분히 부유했고, 그가 가진 마음의 상처만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이기에 심리치료가 가능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얻고 가질 수 있었다. <자본>을 읽을 쯤에 나는 어린 소년이 아침 6시에 일어나 밤까지 일하고 평균 노동시간이 12~15시간(!)이란 지옥 같은 환경이었고, 공장감독관이 그들을 만나 상담할 때 이미 어느 아이는 잠을 자지 못한 채 30시간 넘게 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두운 방에 좁은 공간에 숨 쉬기도 어려운 조건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어린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육체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딥스>를 보는 순간, 딥스보단 <딥스>라는 책에서 보이는 환상적인 아메리칸 스타일 드림이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딥스는 가정환경이 어려워가 아니라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고, 정신치료를 담당하는 A선생님으로 통해 놀이치료로 마음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렇게 될 수 있던 것도 충분히 가정 내에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딥스는 만으로 6살이 되어간다. 그리고 <자본>에 있는 가여운 아이들도 6살짜리도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딥스지만, 그는 그럴 기회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소년들도 있었고, 그런 점은 미국 현재에도 많을 것이다. 미국에서 자신의 언어인 영어문법조차 제대로 숙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런 조건에서 과학자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를 둔 영재인 딥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처음 책을 펴는 순간 정해진 스토리란 점이다.

 

딥스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통해 다른 아이들을 치료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너무 위기와 역경을 극복하는 미국인(그것도 백인) 엘리트들의 화려한 부활을 제시한 것 같다. 책 속에 저자는 그런 의도를 비추지 않았겠지만, 의도와 달리 무의식 속에 깊숙하게 박힌 책에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용은 이미 시작한 것처럼 판에 박힌 이야기다. 마음을 굳게 닫은 아이가 있는데, 그는 총명하고 상상력이 뛰어나며,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어느 구원자가 나타나 그를 재기할 수 있도록 조력해주며, 그는 결국 그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스토리에서 무엇을 더 찾을 수 있는가?

 

물론 이해하기 쉽도록 에세이 방식으로 기록한 것은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란 그 대상자의 상황과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점이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소년 중에 특히 후천적인 영향에서 부모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경우는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부모가 너무 일방적인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가 하나가 없거나 혹은 멀리 일을 하러 가야 하거나, 또는 심한 병을 앓고 있든가 하는 다양한 사례 및 케이스가 필요한 것이다. 하다못해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어린 나이에 학대를 받으면서 일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란 만약의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읽으면 큰 감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나는 딥스가 말하는 언어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6살 소년이 보는 세계란 마치 시인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하나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노래하였다. 그것도 아직 완전 치료가 되지 않은 상태이고, 이제 반 정도 되는 분량에서 딥스는 아름다운 말을 구사한다. 이게 과연 보통 6살인가? 딥스는 천재적인 판단력과 탁월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바로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진 내용이란 점에서 내 가슴에 들어올 수 있는 여운이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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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14 - 완결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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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완결되었다. 내 인생에서 만화애니메이션 세계에 빠져든 이유를 무엇이 계기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본 후 애니메이션에 빠졌고, 이후 계속 애니메이션을 감상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감상할 때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나에게 큰 동기나 지속성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에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미 전에도 혹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3가지로 구분된다.

 

1가지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가이낙스 재직시절 TVA 26편과 극장판 2판을 제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리고 그가 가이낙스에서 퇴사하여 카라라는 스튜디오를 설립한 후에 제작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마지막으로 가이낙스부터 카라까지 계속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제작한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각각의 에반게리온이란 이름으로 어느 점은 유사하고, 어느 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점에서 우리는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의 묘미를 각각 음미할 수 있다.

 

물론 <이카리 신지 육성계획>, <학원 타천록>과 같은 번외적인 작품이 있으나, 메인은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3번째의 붐을 일으킨 이 작품은 이미 하위문화를 지나 대중문화에 큰 여파를 주었다. 우리가 모르지만 이 작품에 사용된 장면 내지 OST가 대중방송에서 종종 나오는 경우가 있다. 특히 미사토의 테마송은 많은 CM송으로 나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란 매체가 단순히 하위문화로 볼 것만 아니라 하위문화 내에서 대중문화를 자극하는 하나의 모티브로 작용된 셈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효과는 애니메이션은 단지 애니메이션일 뿐이다.”라는 고정관념과 틀을 깨고 하나의 예술성을 지닌 작품으로 승화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내용이 기존의 작품들과 큰 방향성을 돌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와 똑같은 주제에 지겨움과 친근함을 동시에 느끼며 문화소비를 해왔다. 문화소비의 문제점은 바로 유행에 대한 부분인데, 유행이란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이 기존의 자신과 맞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보여준 작품적 특성은 인간의 이중적 잣대로서 판단할 수 없는 주제로 다가왔다.

 

기성세대에 대한 복종과 긍정보다는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했고, 언제나 아이들은 순종적이거나 활발한 요소를 강조하기보단, 오히려 불안함으로 매일 괴로워했고,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삶의 활력을 잊어버렸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신지의 경우, 그는 이제 중학생에서 어른도 아닌 그런다고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놓인 청소년이었다. 불안한 성장과정과 생활환경,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신지는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회 청소년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신지의 어머니는 실험으로 인해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도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현실에 남아있었다. 가족의 죽음이란 상당히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잔혹한 사건이다. 이카리 사령관이 왜 그렇게 냉혹하고 잔인하고 사람의 마음이 사라졌는지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신지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없는 자신과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는 자신의 입장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만화책을 보면 오히려 아버지인 이카리 사령관 역시 불쌍한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카리 유이가 대학교 시절, 그녀는 매우 우수하고 아름다운 대학생(대학원생)이었다. 거기서 만난 이카리 사령관은 조용하고 조용한 학생에 불과했다.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이 그에게 가자, 이카리 사령관은 유이에게 바꾸어 먹자고 권한다. 별로 말이 없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에 모든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였으나, 유이는 그를 발견한 것이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모습에서 말이다. 유이는 후유츠키 부사령관이 자신의 교수이던 시절, 교수에게 이카리 사령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난다. 그는 아주 귀여운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가 왜 귀여운 것일까? 외모로 보면 이카리 사령관은 표정이 어둡고 깔끔하지 못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유이에게 자신이 받은 음식을 교환하는 것과 교환 후 괜히 부담스러울까봐 피하려는 모습에서 유이는 이카리 사령관이 상당히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란 점을 알았다. 겉으로 활발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여주기보단 실제적인 모습에서 오히려 그가 좋은 사람인 점을 알았다. 자신의 벽에 갇혀 있지만, 그래도 유이에 손길에 있는 힘과 용기를 다해 유이와 가까워지는 이카리 사령관을 두고 귀엽다고 할 것이다. 아마 일본적인 표현으로 가와이이 미학으로 따지자면, 가와이이란 귀엽다란 말이 되나, 단순히 영어의 cute 내지 pretty 같은 의미가 아니라 왠지 보호해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곁에서 같이 지켜주고 싶은 그런 대상을 가와이이라고 볼 수 있다.

 

이카리 사령관은 이때까지 남에게 제대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후유츠키 교수가 그를 처음 만날 때 매우 불쾌한 기분을 느낄 정도로 그의 인상은 호감을 얻을 수 없었다. 단지 이카리 사령관은 유이로 통해서만 모든 인생의 구원과 의미를 부여받았다. 아들인 신지에게 그토록 질투하는 이유는 유이에게 남겨진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듯 남편과 아내는 분리된 존재이지만, 아들과 어머니는 원래 하나의 동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초호기 조종사로 가능한 것은 오직 신지이었다. 초호기 실험가동 중에 죽은 유이의 몸과 마음이 초호기에서 잠들고 있었다.

 

신지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육체와 정신이 모두 에바 초호기에 흡수되어도 강력한 힘으로 보여주었다. 그런 신지를 차갑게 구는 이카리 사령관은 오직 인류구원계획으로 유이를 만나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이용하던 이카리 사령관은 마지막 순간에 유이를 만나 깨닫게 된다. 유이의 몸에서 태어난 신지의 작은 손을 만질 때, 생명의 경이함과 사랑스러움을 말이다. 유이는 이카리 사령관에게 신지는 우리 부부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카리 사령관은 이때까지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자신이 가장 질투하던 신지를 사랑했다는 사실과 이때까지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신지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신지를 나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런 욕심도 없이 자신들이 있어야 할 그 곳으로 가고, 유이는 신지를 영원히 지켜 봐줄 것이라 한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이나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부분은 인류보완계획에서 수많은 레이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그들은 LCL 용액으로 변하게 만든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End of Eva>에서 아스카는 양산형 에바의 공격에 의해 죽는 것으로 나오나, 만화책에서는 그녀가 가장 바라는 카지의 품에 안겨 LCL 용액으로 변한다. 신지가 미사토의 의지를 이어받아 최후에 괴롭고 힘들고 아무도 잡아주지 않을 냉정한 현실에 남아있길 바랄 때 그 옆에는 오직 아스카만이 누워있었다.

 

신지는 아스카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며 죽이려고 할 때, 아스카는 신지의 얼굴을 쓰다며 주면서 기분 나빠란 말과 함께 끝이 난다. 결론이 아주 불안정하고, 마무리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채 끝난 가이낙스 시절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두고 생각해보면 만화책은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진다. 신지가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5~26화에서 자신 안의 꿈을 꾸는 모습이 나온다. 그때 레이는 전학생, 아스카는 소꿉친구, 아버지는 과묵하나 하지만 어머니를 무척하는 애처가, 어머니 유이는 활달한 정치인으로 나온다.

 

그런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신지에게 자신의 꿈은 많은 사람들과 웃는 얼굴로 하루 일상을 보낼 수 있는 평범함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에서는 신지는 그런 꿈을 꿀 수 없다. 모두가 LCL 용액을 변한 후 신지의 선택이 결국 다른 세계로 이어져 마무리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신지에게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의 기억과 신지의 기억은 전혀 다르고, 신지가 가진 시간적 축척과 타인이 가진 시간의 축척은 다르다. 원래의 세계에서 신지는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고독을 느꼈을 것이나, 이제는 아무도 그 치열한 세계를 모르고 자신만이 알기에 고독할 것이다.

 

미사토의 목걸이를 바라보며 신지는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스토리에 대해 상세히 논하기보단 작품이 의미하는 요소를 서술했으나, 만화책은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전혀 다른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에서 인류보완계획 실시 이후 TVA25~26화에서 자신의 껍질 안에서 벗어난 신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으나, <End of Eva>에선 모든 것이 파괴에 이르렀다. 그런데 만화책은 모든 것이 파괴한 것도 지금의 상황에서 새롭게 신지가 새롭게 (자신의 자아로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세상이 리셋이 되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가는 신지가 있을 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작품적 배경에서 4계절이 없고, 단지 여름만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겨울이 시작되어 봄이 오기 전에 신지는 중학생이란 신분을 벗어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살아가고,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아이도 아니요, 아이도 어른의 중간적인 경계점에서 어른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 자신에 대해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힘든 여정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디 길가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이미 과거에 알 수 있을 사람일 수 있겠지만, 그들은 신지를 모르고, 신지는 그들은 알고 있다.

 

모든 게 단절되어 새롭게 시작되는 세상, 자신의 과거의 어둠을 모두 벗어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시간에 대해 비가역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리셋도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인류보완계획이란 수단은 인간에게 태어나는 것은 결국 고통과 괴로움의 시작이므로, 삶의 시작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시작한 프로젝트다. 제레의 의지는 바로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이 태어난 이상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의 선택이고 목적이다. 그 어느 인간이 불행한 삶을 살아가라고 할 권리는 없으나, 현실적으로 인간은 늘 불행한 삶과 마주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다른 세계에 있더라도 조건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존의 세계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본래부터 불리하고 부조리하기에 새로운 조건 제로베이스적인 요건이 필요하다. 자신이 무언가를 원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할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우리는 그런 기회를 잡고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하여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현실의 냉혹함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신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없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다고 그의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게 아니라 그가 접촉할 수 있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세상은 자신의 의지로서 만나고 접촉하고 마주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 스스로를 바꾸고 싶다고 하여도 우리 사회는 그 개인 당사자의 의지를 쉽게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위치란 내가 옆에서 이야기하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방에 불과하다. 그런 상대방에 대해 마음을 나누고, 위안이 되어주며, 서로가 이해해줄 때 우리는 안정과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그 모든 인간에 대해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알 수 없다. 인간 내면에 가려진 무의식이란 세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가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처음부터 부여된 성품 내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주어진 조건에 의해 형성된다. 신지처럼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을 고려하면 당연히 그의 무의식공간에 내재된 불안과 외로움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누적된 그 시간만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시간과 방법 역시 길고도 어려운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보완계획이란 거대한 사건은 신지의 인생을 전환하게 해준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그럴 시간 혹은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흔히 에바 시리즈가 루프물이란 이야기에 대해 조금 다시 생각해보았다.

 

루프란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하며, 시간의 비가역성을 가역적으로 되돌려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면서 에반게리온은 루프물이기보단 어느 한 동일한 조건에서 여러 가지 분기점을 나누어지는 병렬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 부록 편에서 등장하는 마리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등장하는 캐릭터와 똑같은 이름과 외모로 등장한다. 그녀는 아마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한 신캐릭터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인류보완계획이 만화책에서 하나의 결과로 이어지고, 신극장판에 등장한 마리가 존재하려면 역시 루프의 결과보단 병렬적인 세계관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5~26화에서 이미 신지는 자신이 살아가야할 세상에 대해 인지했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 시점에 <End of Eva>의 파국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 보여준 Second impact 이후에 등장한 Third impact<End of Eva>에서 보여준 파국과 맞먹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신지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루프되어 갈 필요는 없다. 이미 1<End of Eva>에서 맞이한 파국을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 되풀이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이 시기적으로 <End of Eva>를 기본으로 이야기로 제작되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제작년도로 하나씩 정리한다면 루프물이란 것은 앞뒤가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리의 등장에서 그녀가 안경을 착용한 점이 유이를 동경한 한 여학생이라면, 병렬적인 흐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만화책에서 마리의 등장 없이 인류보완계획이 끝난 시점에서 루프의 원인이 되어야 할 사건이나 배경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한양대학교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의 <애니메이션 서사구조와 전략>에서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두고 TVA 25~26화와 <End of Eva>를 두고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로 분리된 것으로 본다. 실재하지 않은 것의 복제 내지 또는 실재했던 것보다 더 실재 같은 복제로 구성된 시뮬라크르(simulacre)이고, 그것이 동사형으로 되면서 시뮬라시옹(simulation)로 되었을 뿐이다. 물론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시리즈 역시 시뮬라크르로서 다가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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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2-1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게 아직까지 연재돼고 있었다니!!!! 마지막권이네요...이거 티비판 애니 마지막편 보고 멘붕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게 엊그제 같은데...
엔날 생각납니다. 글 잘봤어요~

근데, 베르세르크 완결은 언제나 날런지...1년에 한권 나오다가 이제는 소식도 감감...헐~

만화애니비평 2014-12-11 17:35   좋아요 0 | URL
오덕력이란 언제나 촉을 세우고 대기를 타야 하는 거지요..
아 아스카짜응이...흑흑
 
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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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을 위한 레퀴엠에서 신해철은 그를 두고 굿바이 미스터 트러블이라 했다. 이제 그 역시 우리에게 또 하나의 굿바이 미스터 트러블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 그들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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