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인적으로 밤에 운전할 때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다. 물론 대부분 운전대를 잡는 분들이라면 자신이 운전하는 도중, 안전운전을 고려하지 않으면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나도 그런 점을 잘 각인하고, 다소 운전을 터프하게 모는 편이나(중형차를 수동기어를 모는 점에서), 신호를 최대한 지키기, 2차선 좁은 도로에서 보행자가 있으면 횡단보도 앞에서 서행 및 멈추기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월요일 비가 올 때 나는 운전 실수를 했다. 다행히 사고로 이어지지 않으나, 직진신호를 가깝스레 넘어간 후에 길이 왼쪽 커브길인데, 신호를 지난 후에 횡단보도가 미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다. 횡단보도 파란불이 켜진 상태서 지나가는데, 이미 차를 멈추기가 느린 상황에서 왼쪽을 보니 보행자가 내 차와 약 5m 간격으로 걸어온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날밤 나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무서움에 치를 떨었다. 보통 사람들은 신에게 감사라 하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단지 우연성과 사실성에서 보행자가 천천히 걸어가는 것에 대해 감사할 뿐이다. 횡단보도를 미쳐 생각하지 못한 상태서 지나가다가 순간 아차 하는 상황이라 나는 비상깜빡이를 켰지만, 기분은 시원하지 못했다. 그날 밤이란 게 중요한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비가 막 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비오는 날 가끔 운전하면 나는 앞의 거리를 순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아주 가끔 있고, 와이퍼로 빗물을 쓸어내려도 잘 안 보이는 경우 상당히 긴장한다. 아니 그런 긴장감에 의해 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 역시 안전운전에 부담될 지 모른다. 



다른 하나는 토요일 책모임 분들과 막걸리 집과 맥주 집에서 술을 마실 때다. 이런 저런 책이야기가 나오고, 철학자 이름이 나오면서 칸트와 플라톤 역자로 서울대학교 철학과 백종현, 박종현 교수의 이름이 거론되고, 플라톤 향연 내지 그리스비극역자로 천병희 교수의 이름이 나왔다. 어려운 외국도서는 번역자의 중요성이 얼마나 크나큰 영향을 주는지 깊게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철학과 교수들이 상당한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철학과 교수를 안 좋아하는 편이다.


철학이란 결국 인간의 인생과 그에 따른 삶의 가치를 논한다. 철학에서 윤리학, 논리학, 종교학 등 다양한 학문과 연결된다. 하지만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학이다. 내가 철학과 교수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은 철학자로서 정치적, 사회적 인간에 대해 논하기 때문이다. 책 속에 번역자로만 있는 게 아니라 서문과 중간 주해에 그들의 입장을 표명한다. 특히 내 입에서 순간 dog란 욕이 나오게 한 인물이 있었다.


그건 황경식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다. 1988년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1987년 6월 항재 이후 민주화로 되면서, 롤즈의 철학이 한국 정치사상에 도움이 되기 바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사회정의론>이란 현재 <정의론>으로 나온 롤즈의 정치철학 걸작을 번역을 한 시기가 1977년이고, 당시 육군사관학교 재직 시절에 번역되고, 옮긴이의 말이 1985년에 나왔다. 만약 롤즈의 철학을 알고, 당시 국내 상황을 알고 이 번역자의 글들을 보는 순간 가식의 절정에 느낄 것이다. 


기본적으로 롤즈의 철학은 자유주의 철학이다. 그런데 칸트주의로서 롤즈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선호했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시작한 시민의 권리를 중요시 했다. <만민법>을 읽으면 그의 칸트주의로서 완결을 볼 수 있다. 시민의 불복종,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생각하면 그가 육군사관학교나 이제 서울대학교에 강의하는 모습을 보면 앞뒤가 안 맞다. 그런 점에서 나는 철학과 교수를 싫어하는 것이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나, 적어도 자신이 번역한 도서에 머리말과 후기에 적는 것에서 현실적 전후관계가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재학 중인 박종철 학생이 고문으로 죽었다. 자신의 학교 학생이 군부독재의 고문으로 죽었는데, 침묵하는 교수, 그리고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에 대해 롤즈를 소개하는 그의 교활함에 그저 한탄만 나온다. 그러다 보니 순간 입에서 욕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 추구에서 롤즈의 철학은 상당히 세련되고 발전된 자유주의철학이다. 철학이 결국 현실 정치학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요소에서 내 입에서 나온 욕은 과연 틀린 것일까 하나, 술자리에서 순간 입에서 욕이 튀어 나온 것은 반성해야 한다. 욕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분들이 그런 욕을 해도 될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욕은 계속 나올 것 같아 보인다. 이래나저래나 인간은 무슨 행동에서 실수나 판단착오를 하면 후회를 하고 반성하고, 재발을 하려 하지 않으나 쉽지는 않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일뿐, 무의식과 감정에 휘말리기 더욱 쉽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조차 인식하고 인정하면 더 좋아지는 것은 분명하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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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08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인상을 잘 설명하기 어려워서 그런데요...아인슈타인 특수 상대성 이론을 보시면...그날 사고의 위험성과 무의식-철학적 회피와 이율배반적인 어떤 이에 관한, 이 두 관점이 왜 모였을까. 다시 한번 생각하시게 될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 모든 동시성들에 대한 조망으로...
일견 제가 하는 말이 저도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이런 말밖에는..

만화애니비평 2015-01-08 14:47   좋아요 0 | URL
누구나 자기 인생을 설명하기 어렵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게 되고, 그러나 양심으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하기가 곤란하고, 인생은 바로 그런 것 같에요. 바로 쉽게 간단히 나올리가 없죠. 단지 위와 같이 가식과 허영심은..차마...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를 읽으면 처음 등장하는 장소는 네미(Nemi)라고 하는 숲 속에 호수가 있는 곳으로 아주 황홀한 풍경을 내뿜는 전설 같은 곳이다.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호수 인근에 어느 미친 남자가 칼을 들고 눈이 붉게 충혈 되어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그는 남자는 그 곳의 왕이면서도 신이면서도 또한 희생양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 인류의 문명을 기원에서 인간은 처음에 자연에 대해 속박당한 존재였으나, 어느 순간 자연이 우리 인간에 의해 속박 당한다.

 

모든 인간은 처음에 자연인이었다. 장 자크 루소의 <emile>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인이란 자연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자연의 이치를 어기지 않고, 문명의 타락과 어둠에 물들지 않은 존재다. 문자문화가 도래 이전, 즉 르네상스 이전이나 혹은 르네상스 이후라도 수많은 인간들에게 문자라는 지식은 거의 제한된 영역이다. 마녀사냥이 일어난 배경에서 모든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있었지만, 자국의 언어로 되지 않았다. 성경을 아는 것은 교회와 국가의 권력관계에서 국가의 권력이 바로 교황에 의해 보장되는 셈이다.

 

종교라는 것은 결국 왕과 귀족, 혹은 지배계급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된다. 종교적인 가치관이란 결국 당시 민중들로 하여금 신앙심 자체가 국가와 교회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어진다. 왕이란 존재는 바로 신으로부터 하사받은 당연한 권력의 좌석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왕권신수설인 것이다. 절대주의 내지 봉건사회에서 왕과 귀족들이 단순히 백성들에게 권력을 행하는 것은 국가권력으로서 통치할 수 있는 지식과 무력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첫 부분에 프랑스 루이15세 시대 궁정하급관리 다미엥에 대한 처벌이 나온다. 고문이 지나치다 못해 거의 예술적인(그로테스크적인) 모습으로 시체가 사라지는 벌을 받은 그의 모습에 근대사상 도래 이전의 인류의 무서운 권력을 알 수 있다. 왕이란 신체는 크게 2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생물학적인 신체로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늙고 병이 드나, 또 하나는 정치적인 존재로서 왕이란 존재는 그 자리에 위치한 것만으로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

 

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다미엥의 경우 왕의 생물학적 육체에 대한 벌이 아니라 왕의 정치적 신체, 즉 신에 의해 보장된 신체를 손상하려 했다. 그것은 국가의 반역만이 아니라 신에 대한 반역이기도 하다. 다미엥의 죽음이 그토록 잔인한 이유는 종교적 권력이 뒷받침 되던 봉건사회의 잔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 언급한 <황금가지>와 다미엥의 죽음, 그리고 지금 적으려 하는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어떤 관계인가?

 

기본적으로 일본의 종교적인 형태를 분석하면 눈앞에 생명이 없는 존재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애니미즘(Animism)의 형태를 가진다. 작품 내에서도 학교에서 경례하는 사람은 선생님만 아니라 신수(神樹)도 포함된다. 신수라고 하여 조금 의아해 할지도 모르나, 우리나라의 경우 신단수(神檀樹)가 존재하는데, 단군신화에서 환웅을 찾아온 웅녀에 대한 이야기에서 신단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신적인 영험을 가진 나무는 박달나무다. 단군(檀君)의 한자에서 박달나무와 신단수의 단자가 같은 한자다. 단이란 한자는 제단(祭壇)에 사용되는 한자어로 나무목과 흙토를 제외하면 같은 한자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한국의 전통신앙이 무속신앙에서 단군은 신의 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 정치인이기도 하다. 신의 아들로서 무당과 정치권력을 가진 군주라는 점에서 그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바로 당시 고조선이 있던 시기가 청동기 시절이고, 한편으로 농경사회다. 농경사회에서 우리나라는 몬순기후로서 여름에 높은 기온과 다량의 강우를 가진 것으로 벼농사가 적합하다. 군주의 임무는 나라의 통치이기도 하나,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단순히 제의적 요소만이 있는 게 아니라 기상관측 내지 달력을 이용한 농경산업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에서 Nemi호수는 어떠한가? 당시 고대국가 이전의 부족국가라면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들의 삶을 유지하는 식량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들인 반인반신인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이다. 포도주라는 것은 인간을 미치게 만들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을 기분 좋게 만들고 한편으로 용기를 준다. 따라서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인들 모두가 사랑하는 신이다. 하지만 그의 힘은 인간에게 삶과 동시에 죽음을 준다. 포도주에 마신 사람들이 지나치면 순간적 충동에 의해 살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에 대한 수확이 필요하다. 포도를 수확하려면 농경사회의 산업구조를 가진다. 농사를 짓는 것은 자연에 대한 변화를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신이란 존재는 자연인 것이다. 단순히 나무, , 물이 아니라 계절이 변화조차 신의 도래인 것이다. 다시 Nemi 호수로 가보자. 그 곳의 족장이 미친 짓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위에서 고대국가나 부족국가의 왕은 신의 아들이고, 그런 요소는 중세유럽을 지나 루이왕정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인간이 수렵 이후 등장한 농경사회는 인간에게 자연적인 조건, 즉 계절적 변화에 따라 농경수확물이 달라질 수 있음을 우리는 판단해야 한다. 농경수확물이 좋을 때는 모두들 기뻐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다. 자연의 움직임이 하나의 신이 움직이는 것과 같다면, 만약 신이 늙거나 원기가 부족하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런 방법이 바로 신을 대신할 인간을 세우는 것이다. <황금가지>에 등장하는 미친 남자는 단순히 미친 것이 아니라 칼을 들고 경계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만약 조금만 긴장을 늦추거나 또는 힘이 빠지면 칼을 가지고 온 남자들에게 암살당하기 때문이다. 왕이 죽으면 그 암살자는 새로운 왕이 되고, 그 왕은 또 다시 경쟁자와 싸워 이기면 목숨을 구제하고, 지면 죽는다. 이것이 바로 <황금가지> Nemi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숲의 비밀이다. 왕은 모두들 통치하는 인간이 된 신이나, 한편으로 인간들 손에 죽어주어야 하는 희생양이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가 일치한 제정일치 사회가 문명의 발달과 사회적 체계에 따라 분리된 것이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그런 점을 본다면 제정일치가 아니라 제정분리의 사회다. 학교라는 공간은 선생님이 곧 정치적으로 통치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신수님이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으로 통치하는 곳이다. 제정분리의 사회라는 점에서 학교라는 곳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학교의 유우나를 비롯한 소녀들은 신수의 힘을 통해 이차원적 공간에서 괴수와 싸운다. 문제는 괴수가 정해진 패턴이나 형태를 가지고 침공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개체수와 모양새로 침투하며, 때에 따라서는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적 앞에서 대부분의 전대물 장르는 주인공들이 성장하거나 급격히 업그레이드를 하는 경우가 많다. 단지 경험능력치를 쌓음으로 적을 무찔려 가나, 여기서는 그에 따른 대가가 있다. 소녀라는 존재가 곧 꽃이다. 꽃이 피기 전의 꽃봉오리에 지나지 않은 소녀전사들이 만개(滿開)를 하면 곧 자연의 법칙에 따라 꽃은 지게 된다. 결국 능력을 눈을 뜨면 몸과 마음이 어딘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죽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으며, 결국 어느 조직의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하나의 신으로 등극한다.

 

결국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인간의 세계에서 문명의 유지가 소녀들의 희생양에 의해 존재했고, 그 적들은 지구라는 공간에 있는 외부의 적이다. 문제는 이 외부의 적들이 일본의 소녀들에 의해 저지되고, 게다가 피해공간은 유우나가 살고 있는 마을과 그 주변지역이다. 자신의 세계가 곧 모든 세계의 근본이 된다는 사고방식에서 상당히 이 작품은 위험한 발상사고를 가지고 있다. 일본을 침공하는 외부의 적은 끊임없고, 소녀들이 결국 계속 막고 막아 희생되어 이루어진 공간이란 점이다.

 

일본 자기중심적 가치에서 토고의 행동을 잘 봐야 한다. 그녀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 모두 일어나 거수경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노래는 군가라는 점이다. 토고의 집안은 전형적인 일본 우익의 가정이란 점을 강조하고, 그녀의 일본이란 정체성에 대한 개념은 이 작품에서 외부의 적은 누구인가? 라는 점을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좁게 작품 내부에서 보자면 지구세계는 이미 단절된 공간에 늘 위기에 봉착해 외부의 적을 싸우는 것이고, 그 역할을 소녀들이 한다. 소녀들은 신이 되어야 하는 것만큼 한편으로 희생양으로 내몰린다.

 

그런데 마지막에 결국 주인공 소녀들은 원래의 몸을 되찾고, 자신의 과업들은 다른 소녀들에게 물려준다. 잘못된 세계가 계속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점에 대한 부분에서 희망을 거는 점, 전체주의적 발상이 보이는 점이고, 토고가 모든 악연의 끊는 점에서 벽을 붕괴하는 점에서 일본을 억압하는 자신들의 딜레마를 부수고, 그 원흉을 모두 파괴하려 한다. 자신들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세계 이외의 모든 것을 파괴하자는 것은 결국 제국주의적인 요소가 보인다.

 

외부에서 계속 적이 오는 것에서 신수를 파괴하는 것으로 토고는 해결하려 하나, 그것이 불가능하여 외부의 적을 끌고 오나, 결국 유우나 일행에 의해 저지된다. 자기 세계를 파괴하여 모든 것을 정리하려 하나, 그 이면에 보이는 유우나 일행의 행동은 외부의 적, 즉 일본의 적이 침공하면 거기에 대한 반격을 정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시기 많은 젊은이들을 전쟁의 재로 만들면서 그들을 용사라 하고, 전쟁사범이 야스쿠니 신사에 묻혀 신으로 추앙받는 일본이란 국가를 생각하면,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어느 대상을 희생양을 만들어 하나의 신적인 존재로 부여하고, 그들조차도 자신의 희생 그리고 미래의 희생을 하나의 정당성으로 보고 있다.

 

이게 과연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와 같은 구조란 말인가? 물론 일본에서 제작한 작품이기에 일본을 중심으로 전개되나, 세계관 구성에서 일본 어느 지역 멸망은 지구세계의 멸망이란 확대사고방식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사고와 유사하다. 그런 점에서 <황금가지>의 연계성은 바로 그 소녀들이 희생되는 게 국가의 이념적인 측면에서 정당하게 만들고, 심지어 가족조차 거기에 승복한다. 결국 국가라는 조직을 위해 소녀들이 희생되는 것도 모자라 본인들조차 납득하는 것이다. <황금가지>에서 소녀들이 희생되는 이유는 그녀들이 가장 죄를 짓지 않은 순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가 없기에 다른 자들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희생양이 된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그녀들은 신으로 잠시 추앙되어 의식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신으로서 인간의 욕망을 위해 죽는다. 인간의 욕망이란 바로 무지와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이 하나의 사회적 도덕이 되어 법적인 제도적 요건으로 변한 것이다. 그런 것들이 <황금가지>에서 제의적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과정들이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되풀이 되는 점이다. Nemi호수 숲의 왕이나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의 소녀들이나 모두 같은 상황인 것이다.

 

계속 끊임없이 대체되는 인간의 신앙의식에 희생양은 모두에게 떠받들어지는 존재만큼 망가진다. Nemi의 왕은 모든 것을 가져 음식과 의상, 심지어 여자들까지 원하는 만큼 가진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이에 반해 거액의 돈을 토고에게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Nemi의 왕은 화폐가 없는 농경사회고,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화폐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자본주의 경제사회이다. 그러나 결국 왕이 된 남자나 용사가 된 소녀나 모든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아 거기에 대한 대가는 돌아온다.

 

그렇다면 이에 반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비슷한 유형의 작품인가? 같은 것은 하나만 있다. 어느 소녀가 특수한 힘을 얻게 되자, 변신을 한 후 강력한 적과 싸운다는 점이다. 싸우는 소녀 이외엔 큰 동일지점이 없다. 우선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 및 여러 도서에서 그의 이론은 문화발전의 과정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인간의 생식압력(인구증가압력) 생산증강과정 생태환경의 파괴고갈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이란 공식을 내세운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에서 인구의 증식이나 증강, 혹은 생산에 대한 내용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현재의 상태에서 적과 싸우며,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인류의 문명이전부터 시작하여 기계 및 정보화 사회의 문명까지 계속 이어진다. 세계관에서 단순히 일본이 배경이라 일본만이 아니라 마법소녀의 영역은 전 세계적인 공간적,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까지 연계가 되어 있다. 큐베라는 속성이 바로 외계인이라 하지만, 그는 인류의 문명에서 보여주는 인류의 욕망에 의한 이기심이다.

 

인류문명의 발달과정에서 자연적 존재에 가까운 인간이 문명의 세계에 가기 위해선 인간의 노동력을 자연에 투하하고, 그 과정에 막대한 노동력이 동원된다. 하지만 거대한 노동력이 투하되기 위해서는 많은 인간들이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가 아는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타지마할과 같은 세계적 유산은 많은 인간들의 노동을 착취해서 생긴 것이다. 결국 인류문명은 인간의 착취로부터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단순히 수렵과 채취, 그리고 부족단위의 농경사회에서 인간은 거의 평등한 수평구조라면, 국가조직이 체계화되면서 인류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분리된 수직구조로 변경된 것이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그런 인류의 문명이 발달되고, 거기에 따른 혜택이 인류에게 올 때마다 그만큼의 반작용이 따랐다. 문제는 그런 반작용은 인간의 대부분의 이기심이 하나의 정의로서 작용한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는 공통의 이익을 생각하는 반면, 전체의지는 사사로운 이익만 생각하는 특수의지의 총화라고 한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큐베는 인간들의 특수의지의 총화로서 어느 불특정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느 소수의 이익은 희생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원인을 인간 본인들에게 찾는 게 아니라 마녀로부터 찾을 뿐이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문제 제공시점을 외부로 찾아가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오히려 내부에서 되찾는다. 따라서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를 동일한 작품으로 설정하는 것은 인류의 문명을 연구하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순전히 엉터리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투쟁의 대상이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내부가 아닌 외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외부가 아닌 내부다. 마도카가 신이 되어 모든 세상의 섭리를 교체할 때, 마녀와 마법소녀들은 사라져도, 마귀의 존재가 나타나 세상의 어둠을 가져가지 못했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나, 전자는 자신들(유우나의 용자부)의 문제만 해결하였고, 후자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소녀만 해결했다. 전자는 용사시스템의 되풀이과정에 참여한 것이라면, 후자는 인류의 문명발전에 따라 계속 확대되어 간다. 그런 점에서 이미 2작품을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상당한 무리수가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문자문화 도래 이전에 인간은 신이란 존재가 현실에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문자문화인 이성 중심문화가 도래한 후 이제 다시 이미지의 세계로 환원되면서 애니메이션은 그저 오락물의 기능을 하는 콘텐츠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의 신화를 다시 이미지로서 보여주는 미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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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5-01-06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카메가 벤다는 인상적이었지만 별로였어요. 로드 오브 만화애니님. 다른거 추천해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5-01-07 08:56   좋아요 0 | URL
인상적인 사실입니다만, 어느 장르나 소재를 원하시는지요?

뷰리풀말미잘 2015-01-08 10:53   좋아요 0 | URL
장르나 소재는 가리지 않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08 14:48   좋아요 0 | URL
그러면 사이코 패스(보였을 것 같기도)를 추천합니다. 제레미 벤담과 미셀 푸코의 판옵티콘 개념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혹은 마음 편하게 보려면 <천체의 메소드>도 좋고요. 아~ 노엘 귀엽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서적은 예전부터 익히 들어본 책이다. 그런 책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온 것은 2013년에 개봉영화 <변호인>에서 나오면서 부터다. 저자 E.H. 카, 정식이름은 에드워드 헬리트 카라는 사람이었다. 본래 영국에서 정식으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역사연구가로 명성을 날린 사람이다. 그의 학교출신인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정식으로 대학의 어디에 졸업했는지 모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영국의 대표적인 학술기관으로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자 에릭 홉스봄이 재직한 곳이다. 아무래도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세계의 대학교라고 하면 보통 미국의 하버드를 비롯한 동부권 대학교를 생각하겠지만, 진실한 학문을 추구한 곳이라면 바로 영국이다.

 

영국의 대학교에서 이미 E.H 카와 같이 역사학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얼마 전에 타계한 에릭 홉스봄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마라크스주의로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기존 전 근대적인 영역에서 새로운 근대사상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것과 같다. 카의 경우 그는 마르크스주의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고찰과 그리고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탄생시킨 헤겔의 변증법으로 통하여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란 단순히 발굴 장소에서 발견된 화석덩어리가 아니라 그의 유명한 명언처럼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라고 밝힌다.

 

사실 역사라는 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판단내리기가 어려울 경우가 많다. 가령 루이15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프랑스궁전에서 일하던 다미엥이란 하급관리는 그의 군주인 루이15세를 암살을 기도하다가 실패로 끝났다. 그의 처분은 가혹한 고문과 고문으로 이어진 사형이었고, 엄청난 고통의 통증과 죽음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다미엥은 결국 모든 육체가 재로 변하는 것으로 그의 몸은 사라졌다. 대신 정식적인 기억에 의해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 맨 앞장에 선두하게 되었고, 카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구조주의 사상가의 대표도서에 거론되었다.

 

그렇다면 다미엥이란 사람이 시도한 암살은 분명 그 당시에는 엄청난 파급을 일으킨 반란행위고, 일반적으로 당시 인간이라면 다미엥은 무조건 용납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루이15세가 지배하던 시기는 중앙집권화가 계속 이루어진 상태서 재정상태가 계속 악화되었으며, 그것은 결국 백성들에게 책임이 전가된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라는 책을 보면, 다미엥의 암살미수에서 처벌받기까지 심문 도중 다미엥의 공범자로서 장 자크 루소가 1762년 에밀을 내기 전에 이미 프랑스 파리에서 유명인물이 되었고, 그가 다소 은둔적인 인간을 추구하는 것과 인류의 역작이란 불릴 <인간불평등기원론>은 1755년에 나왔다. 1757년에 다미엥이 죽은 시점에서 이미 파리에서 루소가 상당한 화제로 된 인물로 본다면 다미엥의 죽음은 기존 구체제에 대한 반항이다.

 

루이16세가 단두대에서 죽기 전에 자신의 왕국을 멸망하게 만든 것은 루소와 볼테르 때문이라 했다. 그런 만큼 역사의 관점으로 보자면 루소와 볼테르는 봉건적인 왕국에 대해서는 크나큰 적이고, 이제 민주주의 국가로 향하는 국가에서 본다면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가치에서 현대 사회, 혹은 카가 살아가던 20세기는 이제 왕국이 해체되어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던 시기다. 지난 19세기는 아직까지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있었고, 물론 왕이 직접적으로 통치하지 않으나 입헌군주제가 존재했다. 현재 영국에서 국왕과 여왕이 존재하고, 왕립기관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다고 하여 영국은 왕이 주인으로 등극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체계라는 점이다.

 

오늘날 그런 국가적 형태와 정치적 체계에 따라 역사를 보는 것은 당연한 관점이다. 한국의 역사를 두고 보자. 그렇게까지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 역사학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없겠지만, 역사적인 가치를 두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로서 과거 봉건왕국이던 사대부 중심이 아니라 1919년 3․1운동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어가는 것이다. 게다가 4․19혁명을 정신을 계승하는 것 역시 민주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렇듯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어느 일정한 공간과 시간에서 특정인물이 일으킨 사건에 치중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지금 현재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생각해본다면 지금 사회에서 과거에서 비롯된 연결고리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지 생각해야 할 점이다. 저자인 카는 그런 시기적인 부분과 관련하여 봉건사회와 프랑스대혁명 시기 이후 유럽에 널리 퍼진 혁명의 시대, 또한 나폴레옹의 제정프랑스, 비스마르크 수상, 파리 꼬뮌, 러시아혁명을 두루 성찰하며 역사에 대해 판단한다. 역사의 원동력에서 과거는 대부분 정치인들, 즉 영국이나 유럽의 경우 귀족과 왕족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들의 정치적 이권과 충돌이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종료다. 귀족들끼리의 권력다툼은 단순히 귀족만의 전쟁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싸움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이 어느 특정 권력자에 의해 결부 짓는 것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특정 권력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민주주의 체계 아래 사회구성원으로 움직이어야 한다. 따라서 유럽에선 과거에 비추어진 역사적 사실에서 명예혁명을 찾아가는 이유는 지금의 현실을 존재하게 만든 가치와 조건을 찾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인간, 국가, 사회 등의 그 존재성에 대한 근본이 되는 것이다. 역사란 바로 그런 정체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프랑스에서 많은 기념일이 존재하겠지만, 7월 14일만큼 가장 거대하고 웅장한 날이 없을 것이다. 그날이 바로 프랑스대혁명이 시작되어 바스티유 감옥을 공략하려한 날이다. 최초로 지배계층이 아닌 피지배계층이 부당한 권력에 향하여 칼을 든 날이다. 그 누구의 명령이 아닌 바로 그 자신들의 명령에서 말이다. 결국 근대사상은 국가란 절대불가침한 존재가 아니라 국가라는 바로 개인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조직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따르는 역사적 진보는 바로 인간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진보적인 역사가 되려면 인간의 눈을 가리고 있는 무지의 장막을 제치고, 그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이성의 판단력이 요구된다.

 

따라서 카는 헤겔의 말을 빌려온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말이 나는 헤겔로부터 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든 나는 그런 관념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때, 헤겔이 그런 말을 한 것을 알았다. 결국 이성적인 것에 의한 현실적 사고방식, 그런 현실적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인간의 지성,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그것은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대다수 인간은 무지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지는 정말 무지하기 때문에 무지한 것보단 그 무지에 대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려 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무지의 장막 너머에 존재하는 현실적 모순에 대하여 이성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은 결국 현실적이지 못한 인간이 되는 것이고, 현실에 대한 무비판성은 결국 자신의 무지를 하나의 당위성으로 연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단지 생각하면 그런 무지의 대다수의 군중들이 하나의 운동에너지가 되어 모든 것을 움직일 힘이 된다는 것이다. 사건과 사고는 단순히 총성을 울리기 위한 격발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격발은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파괴와 혼돈의 시작점이 된다. 우리가 왜 역사를 제대로 보고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의 세상은 우리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타자의 공간의 불일치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공간마저 타인에 의해 모든 것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결국 실존적인 요소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하나의 도구로 전환되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철학에서 루소의 일반의지는 인간이 가진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자신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의지다. 하지만 그 의지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 게다가 그 의지는 개별적 이익을 바라보는 전체의지로 되었다면 그 사회의 현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그에 따른 전체의지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합리성은 부여받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역사적인 흐름을 잡아나갈 것이다. 결국 역사란 자신과 혹은 그 자신에 반대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변증법이란 찬, 반, 정이란 관계는 헤겔의 가르침에서 자신들이 품은 모순, 혹은 지금 모순을 품은 자들이 느낀 현실적 모순에 대한 반발의식이 서로 부딪히면 부정의 부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은 후 주변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카는 여전히 근대사상, 즉 모더니즘을 신봉하는 사람이란 점이다. 최근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어 이제는 전 모더니즘으로 회귀하는 한국을 보면서 지식인들이 활보하던 시기가 사라지고 이제 대다수의 군중들이 역사의 무대로 나왔다고 해도, 이제 그 대다수의 군중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끝없이 표류하는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한국사회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돌이켜본다면 근대사상과 철학적인 요소가 없이 그저 근대산업만 지나간 현재, 국민들에게 이성적 판단력을 제대로 정착된 되기에 너무 짧았다. 따라서 강신준 교수(카를 마르크스 <자본> 번역자)는 근대사상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도래로 통한 모더니즘이 정착되지 못한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는 그저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조차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는 오히려 혼란을 유지시켜줄 뿐이다. 그런데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전 근대적인 현상, 이미지의 도래에서 결국 현실의 지배는 이성이 아닌 미디어라는 정치경제적인 권력에서 시작된다.

 

미디어라는 것은 역사라는 사실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선 어느 시기에 어느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상황에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전반적인 전후관계가 상실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이 되는 단지 OOOO년 O월 O일 OO시 OO분 XX시 XX동에 누가 무엇을 했다는 이제는 의미가 혼선을 빚게 된다. 있지도 않은 사실, 혹은 가정조차 되지 않을 조건이 하나의 fact로 되는 것이다. fact라는 것은 만들어진 사실이다. 원래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뒤에 조작된 사실이란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그때 벌어진 일은 분명 조작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것이 가진 의미, 사실성과 우연성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역사가가 가진 책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은 역사가가 가진 관점에서 비롯되고, 그것은 결국 역사가라는 인물에게 부여된 양심과 지성 그리고 선택에 의한 노선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역사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적 가치에 대한 만남에서 자기에게만 좋을 선택지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책을 만들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역사의 진보라는 것은 역사의 흐름에 의해 조성되는 게 아니라 이성적인 가치의 지속적 추구로서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성이 마비된 세계란 진보는커녕 퇴보와 시대착오적인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을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역사란 과거와 현실의 단절이 아니다.

 

오히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과거는 상상하고, 미래는 기억한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대다수의 어리석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들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미래영구적인 기념을 위해 항상 상상하고, 그에 따른 부당한 권력을 남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멸할 때 미래의 판단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기억한다. 현실은 결국 과거에 의해 존재되고, 그 존재된 현실은 미래를 앞으로 향하여 달려간다. 오늘 내가 하는 행동에 훗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는 모르나, 그 행동 하나가 지금은 역사적 패배자가 되어도 훗날에 역사적인 승리자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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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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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31일, 2014년 마지막 날에 내 사무실에 신해철 유고지 <마왕 신해철>이 도착했다. 퇴근시간이 다 되기 전 아주 아슬아슬하게 말이다. 신해철의 유고지가 도착하는 아침 나는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버스 안에서 왠지 가슴이 아리는 노래를 들었다. 전설적인 락뮤지션, 브리티쉬 하드락에서 절대영역인 Led Zeppelin의 노래였다. 그들의 4집인 stairway to heaven이란 곡이 내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신해철이란 이름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못한 날, 6시 배철수 음악캠프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배철수 씨는 신해철의 죽음에 아무런 말도 이어가지 못한 채, stairway to heaven이란 곡 하나로 모든 심정을 답변하였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 그곳에 가는 방법은 황금이 있어야 하는가요? 하지만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영혼과 자연에 대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천국에 가는 것은 결코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곳에 갈 수 있는 영혼과 자연적인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해철의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가? 지옥으로 가는가? 아직 죽지 않아 뭐라 말할 수 없다. 아니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을 수 있어도 종교는 없다. 단 이것만 말하고 싶다. 그가 가는 곳은 그가 어린 시절 육교 위에 만난 작은 친구 병아리 한 마리가 날고 있는 곳으로 가는 곳만은 분명하다.

 

아니라면 그가 2달 동안 집안에서 은둔하며 술로 보내게 만들었던, Mr. Trouble의 곁에서 서로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소박하게 나누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이 솔직히 아팠다. 신해철과 마지막으로 같이 방송작업을 했던 진중권 교수가 신해철의 죽음을 듣고,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글을 남겼다. 진중권 교수가 죽은 자를 위해 저술한 도서로 몇 권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레퀴엠>,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이었다. 첫 번째 책에는 진중권 교수가 군대시절에 의무병으로 근무하면서 실제 겪은 이야기를 토대로 진행된다. 죽은 병사의 사체, 그들을 보며 통곡하는 어머니, 그의 입에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욕이 나온다.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에서 2009년 5월 23일에 서거한 노무현이란 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글은 참으로 침착한 글이었다. 물론 권력이란 피를 뿌리는 잔혹한 결말에서 역사적인 인용은 아직도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라는 것처럼 노무현의 죽음은 아직도 야만적인 한국의 정치적 현실을 통감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마왕 신해철>에서 보인 진중권 교수의 글은 상당히 인간적이었다. 2007년 신해철이 갑자기 진중권 교수에게 전화 와서 해철이라 인사하고, 서로 만나 의기투합하여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것에서 두 사람은 과연 언제 친구가 되어도 어색하지 않을 사이였다.

 

그런 신해철의 죽음에서 진중권 교수의 글이 인간적 요소가 돋보이는 이유는 아마 인간 신해철이란 남자가 가진 진정한 맛이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보다 더 아련한 맛이 그의 글에서 나왔다. 하지만 왠지 신해철의 죽음은 너무 아련했다. 신해철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3년 동안 거의 폐인 비슷하게 지내다 3년이 지난 후 그의 추모앨범에서 <Goodbye, Mr. Trouble>이란 곡을 만들었다. 강헌 음악평론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제 신해철이 <Goodbye, another Mr. Trouble>로 되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고 나서 2달 동안 술만 마시고, 그의 추모하는 공연에서 삭발을 하던 신해철은 카리스마를 모조리 증발한 것처럼 비참해 보였다.

 

진중권 교수의 <레퀴엠>에서 2003년 이라크 파병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싣는다. 신해철 역시 파병에 대해 비판했다. 하지만 2002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지지하고, 2009년 그의 죽음에 안타까움만 비추었다. 이제는 노무현 대통령과 신해철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그 몫이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왔다. 신해철 그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뮤지션이고, 독설가다. 그의 방송인 고스트 스테이션, 마왕이란 별명, 넥스트 앨범과 싱글앨범 등은 어린 시절 나와 형의 추억이 담겨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도시인’이란 곡과 같이 회색으로 가득한 도시의 고독에서 내 인생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에게 쓰는 편지’처럼 내 자신이 원한 길과 미래 그리고 지금을 바라본다. 그의 노래는 언제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고, 지금의 현실을 비판한다. 노래라는 것이 정말 시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혹은 거친 폭풍처럼 다가온다. 모든 신해철의 노래와 음악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말하며, 언제나 같은 것만을 강요하는 대중음악의 틀을 돌파한다. 그런 점에서 음악이란 것만큼 그 사람에 대해 잘 나오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시각적 효과보단 청각적 효과에 의해 더 자극된다.

 

내 귀를 자극하는 사운드에서 지금 들어도 좋은 그의 감각이 여기서 멈추어 버린 것은 나에게 큰 허탈감이다. 누구와 다른 생각과 삶 그리고 선택을 하던 신해철의 유고란 바로 독특한 한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본다. 세상을 보는 것에서 진정 제대로 보는 인간들이란 그 사회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의 틀에서 벗어난 특이영역의 존재라고 한다. 세상의 법칙을 발견하는 자들은 대다수의 인간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외부로 방황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신해철의 음악은 방황적인 요소가 많다. 특히 넥스트 시절의 음악은 비판으로 가득한 대한민국 보고서라고 말할 수 있다.

 

부조리한 현실 모순으로 가득한 오늘, 그는 그런 것들을 노래로 표현했다. 사랑의 시작과 이별의 아픔이란 노래도 좋을 것이나,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예술이란 현실을 왜곡하는 것으로서 현실의 어긋남을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로테스크한 모양으로 존재하지 않은 현실이라도 그것이 그로테스크한 것이란 사실은 알아야 한다. 신해철이 가진 신념은 그의 인생에서 보인다. 항상 뭔가 파장을 일으키고,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가고, 그런 골 때리는 방식은 다르게 생각하면 그가 생각하는 바가 상당히 논리적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는 어느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의 원인에 대해 “왜?” 내지 “이게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닌가?”라는 말을 싫어한다.

 

모두 꿀이 아닌 쓰디쓴 가루약을 억지로 삼킨 어린아이의 표정처럼 인상이 흩어져 있다. 게다가 핏대가 올라와도 다시 넣어야 한다. 가루약이 아무리 써도 다 삼키고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해철이 지적한 그런 내용들은 현실을 돌아보면 정말 맞는 말이다. 예전에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라는 주제에서 인간의 생존에 대해 말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빵”이지만, 그만큼 필요한 것이 “장미”라는 것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장미”라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장미는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은 살 수 없다.

 

언제나 같은 일만 반복되고 살아가는 것은 상당히 지루하고, 그 자체만으로 고문이란 점이다. 삶의 여유나 의미 없이 아무런 목적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은 행복하지 못하다. 단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즐기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노는 것도 어느 정도 체력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인간이 사는 이유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다. 행복의 조건에서 러셀은 흥분이라 한다. 흥분의 조건은 여러 가지 조건과 동기부여가 존재하겠지만, 결론적으로 인간은 정체된 삶으로 살아갈 수 없다. 즐기는 것은 돈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단지 자기가 행복을 찾고 싶은가 아닌 것인가? 라는 점이다.

 

인간마다 주어진 행복의 조건은 다르다. 그러나 행복을 바라는 인간의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이른바 꼰대와 자잘한 관습에 얽매여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슬에 의해 우리를 옭아매고 있으며, 그런 사회를 바라는 꼰대들은 더 심각한 사슬로 묶여 있다. 되지도 않을 논리와 관습에 부조리는 하나의 정당성으로 지탱되며, 그것을 논하는 것은 강력한 터부로 되어 결국은 인습의 칼날이 되돌아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따라서 신해철의 발언은 기존 사회의 터부에 대하여 강력한 반발을 보여준다. 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나,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 중세유럽 교회의 면죄부가 현대 한국의 기복신앙과 변태적으로 결합한 종교에서 재탄생되고 있다. 인간의 가치란 그저 돈과 권력에 휘말리고, 그 아래 있는 자들은 밟힌다. 그래서 그의 노래 중에 <money>가 있지 않은가? 또한 성적인 부분에 대해 크게 공감하는 바이다. 남자인 나라도 부끄럽고 혹은 여자라도 생각할 점이 있다.

 

남자들은 되는데, 여자들은 안 되는 이유에서 기존 조선시대 인조, 선조 머저리 왕들 옆에서 권력만 탐내는 사대부들의 썩은 유교정신이 아직도 이어진다. 뭐 한국은 조선의 후대이고, 나 역시 조선 사대부집안의 후손으로 본다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런 나쁜 것만 계속 유지한 채 조선 이전에 자유분방한 인간상들을 모조리 폐기한 것에서 전통을 지키는 것이 과연 지키는 것인가? 그저 꼰대를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높은 자리에 있던 분은 여자의 몸을 만지면서 한다는 말이 딸처럼 보여서 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어째든 치졸한 한국남자만큼 또한 속 좁은 여자들에 대해 지적도 좋았다. 한국에서 여성들이 수난당하고 계속 힘든 것은 맞으나, 남자도 당하고, 그 남자들도 힘없고 가진 게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여성들이 더 불쌍한 점은 인정한, 그런다고 힘없는 남자들이 힘들지 않았다는 식은 말하지 마란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 올 때, 갈밭마을 아낙네의 슬픈 비명과 눈물을 보았다. 아직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갓난아이, 이제 해골조차 남지 않을 것 같은 시아버지의 군포세를 내지 못한 이유로 자기들의 유일한 재산인 소가 관청으로 끌려갔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은 아이를 만든 자신의 죄를 탓하며 칼로 그의 남근을 베어낸다. 소나 돼지 불알 까는 것도 불쌍타 하는데 하물며 우리 백성은 어떠랴?

 

나그네 글방에서 책을 읽는 것에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던 다산 선생님의 마음만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불쌍한 사람들은 자기들만 아니라 불쌍한 입장에 놓인 사람이란 점이다. 종교시설에 가서 돈을 바치고 기도할 바엔 차라리 불쌍한 사람들이 모인 고아원이나 노인정에 가서 위로해주고, 혹은 기부금을 위탁하여 그들의 생활을 좀 더 개선해주는 게 인간의 덕목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강헌 선생님이 한국의 마지막 르네상스 뮤지션이란 말이 나온 것은 그렇다. 인문소양, 우리에겐 인문학적 지식, 그 지식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성과 감성, 더 중요한 양심이 없는 게 비극이다.

 

신해철의 독설, 물론 100%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날린 비판은 우리 사회의 비틀림을 더 비틀어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처가 골며, 상처를 찢어내어 고름을 짜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찢기 전에 만지는 것조차 불가하니 참 답답한 것이다. 뭔가 좋아할 수 있는 것을 주지 않은 나라, 억지로 등을 떠밀려 살아야 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다시 자기들이 그런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나라, 연쇄적인 꼰대의 성향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절묘한 배합이라 말할 수 있다. 웃음소리가 자연스레 나오는 게 인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행복함의 성적표다. 그런데 우리는 웃음소리보단 근엄한 가면을 쓰기를 바란다.

 

우리의 마음을 솔직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질문은 “음악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음악 없이는 무슨 재미로 사냐?”라고 생각했다. 유행 따위 이미 접은 시기가 내 나이의 반 이상 넘었고, 사람 목소리보단 기타나 드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일까? 2014년 가요제에서 신해철 추모하는 자리에서 넥스트 밴드들의 연주를 듣다가 갑자기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들으니 허무했다. 기타리스트 김세황의 기타 리프와 중간마다 사용하는 피킹 하모닉스를 들을 때마다 보컬을 맡은 가수들이 전혀 따라오지 못한 것을 보았다.

 

라이브 반주는 MR 테이프처럼 돌아가는 게 아니라 같이 호흡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음악의 묘미란 바로 다양한 악기가 같이 어울려 한데 모여 강력한 에너지로 발산한다. 그것을 통찰하지 못하면 음악이 아니라 그저 노래만 하는 것이다. 신해철은 음악 없이는 살 수 있냐고 물었지, 노래가 없이는 못 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꼰대처럼 가면 쓰고 근엄한 척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또 인상 남는 것은 신해철의 기준에 모두 맞은 것은 아니다. 그가 거론하는 것에는 그의 의도로 생각하면, 여기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시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유도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생각을 100% 옳다고 여길 필요 없고, 물론 그런다고 하여 그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게 아니라 서로 생각을 모아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점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그가 느낀 한국의 꼴불견 남자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연애의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단지 이에 도달할 정도로 아직까지 내 자신이 찌질군이란 점에서 말이다. 단지 아쉬운 것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일본만화이라면 가능할 터이나 현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내가 찌질군에 아직 가까운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의 꼰대성에서 나는 찌질군으로 통용될 수밖에 없음에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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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2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02 23:21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야무님의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기를
 

☞ <아카메가 벤다> 리뷰 목차

① 예술에 대한 비평적 접근과 애니메이션에 대한 비평적 접근

② 앙시앵레짐[ancien régime]

③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④ <아카메가 벤다> 시작, 타츠미의 도성 입성

⑤ 정의에 대한 명제와 허울

⑥ 나이트레이드의 결성

⑦ 지배계층의 문제

⑧ 왕과 대신, 왕과 총리

⑨ 비극을 극복하는 방법

⑩ <아카메가 벤다>, 혁명 이후의 세계

 

① 예술에 대한 비평적 접근과 애니메이션에 대한 비평적 접근

예술에 대한 비평적 접근에서 한국 대표적 미학자인 진중권 교수의 에세이를 참조하였다. “20세기에 들어오면 비평의 논리에 급진적 변화가 생긴다. ‘작품이 기존의 규칙에 얼마나 부합하느냐’가 아니라, ‘작품이 기존의 규칙을 얼마나 일탈했느냐’가 비평의 기준이 된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예술문화다. 과거의 비평이 작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판정했다면, 현대의 비평은 작품이 얼마나 ‘새로운지’를 판정한다. 저마다 새로움을 표방하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새로움이 어느 것인지 가려내는 안목, 그것이 현대의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된다. 문제는 ‘새로움’을 판정하는 뚜렷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면에서는 새롭고, 어떤 면에서는 낡았다. (내가 즐겨하는 농담이 있다. “작품이 새롭다고 말할지, 낡았다고 말할지는 작가가 나를 대하는 태도의 함수다.”) 나아가 저마다 제가 새롭다고 아우성치는 작품들 중에서 ‘진짜’ 새로움과 ‘가짜’ 새로움을 가리는 기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 기준은 사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비평을 통해 사후에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예술에 대한 비평에서 모더니즘 가치에서는 절대적 가치에 부합되는 예술에 대해 그 가치를 인정하였으나,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기존의 규칙, 즉 가치관에서 벗어나 있는가이다. 결국은 우리의 비평적 가치는 흔한 Cliche라는 틀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대안과 관점이야 말로 새로움에 대한 예술적 지평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예술적 대상은 단순히 우리가 예술이란 인식으로 대할 수 있는 미술(동양화, 서양화, 조각, 과 연극 같은 장르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접근할 수 있는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문학 등과 같이 대중문화에서도 예술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술에 대해 20세기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작품을 보면, 그는 마오쩌둥이나 마릴린 먼로의 같은 유명인을 다양하게 복제하여 대중에게 선사한 바가 있다.

 

심지어 그 이전에 마르셀 뒤샹의 <샘>의 경우 남성용 소변기에 그의 사인을 서명한 상태에서 레디메이드에 대한 예술작품으로 큰 역사적 획을 남겼다. 예술적 관점에서 그 시대적 흐름에 다르겠지만, 지금 21세기는 새로운 것에 대해서고, 그 새로움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행의 시대>에서처럼 새로워 보이는 것이나 막상 알고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방영이 끝난 <아카메가 벤다>를 그냥 단순히 보면 반국가적 조직이 활동하고, 그들은 혁명세력을 위해 사전에 암살, 공작, 첩보활동을 한다.

 

보통 혁명을 이야기하면 1789년 7월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을 예를 들 수 있다. 혁명에 대해 기존 혁명을 위한 조직적인 활동에서 전자의 경우 삼부회의 소집에서 부르주아 계급들이 같은 삼부회 계급의 성직자와 귀족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인해 발발한 것이고, 후자는 1917년 러시아 황제 차르정권 퇴각 후 케렌스키 정권의 무능함과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가 얽히면서 발발했다. 혁명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순히 국가전복세력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왜 전복세력이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게 합리적이다. <아카메가 벤다>에서 보면 특이영역이 나온다. 보통 혁명(프랑스대혁명,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시몬 볼리바르의 남미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은 기존 국가의 진보적인 지식인 계층에 의해 주도된다면, <아카메가 벤다>에서는 기존 국가 관료에서 그것도 상당히 높은 직위 내지 특별대우를 받던 대원이 반목을 한 셈이다.

 

따라서 <아카메가 벤다>는 흔히 말하여 전쟁과 내전, 혁명과 투쟁에서 보이는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다른 방식으로 판단해야 함이 옳은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이 다른 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이 매우 큰 전환점이라 볼 수 있다. 일본이란 국가는 아직까지 헌법에서도 천황이 존재하고, 국가의 연호 내지 연도 구분은 서양식 달력인 서기(西紀)로 작성하는 게 아니라 일본 왕의 연호로서 나누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일본이 소화라면 지금은 평성으로 바뀌었다. 일본 왕인 소화는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범죄자 중에 하나이면서도 왕으로서 그 직위를 가지며, 비록 일본이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반영했다고 해도, 총리 그 자체가 극우적인 인물이고, 대다수 정치인들도 야스쿠니 신사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망언을 되풀이하는 점에서 그들은 아직까지 구체제에 대한 망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카메가 벤다>에서 나이트레이드(야습)의 최종 타도 목표는 국가의 정점인 국왕과 대신이란 점에서 상당히 도발적인 작품이 되고, 그것은 기존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움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② 앙시앵레짐[ancien régime]

앙시앵레짐이란 단어는 프랑스어로 구체제라는 뜻이고, 구체제란 “1789년 프랑스대혁명 때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정치, 경제, 사회의 기존 체계”라는 것이다. 구체제의 문제점은 시기적으로 정치, 사회, 경제적 구조가 심각한 모순으로 인해 더 이상 그 국가적 기능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을 때 붕괴가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 만약 그 국가체계가 붕괴되지 않는다면, 붕괴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그 국가의 일원인 국민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앙시앵레짐은 타도되어야할 체계이며, 그 방법은 바로 혁명이란 것이다.

 

문제는 혁명이란 것은 평화로운 방법보단 폭력에 의해 난무한 상태에서 일어난다. 기존의 구체제의 기득권 계층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나 이권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 양보 없는 담합 속에 결국 그 결정권은 사회적 합의로 통한 이행절차가 아니라 폭력이 정당화되는 수단에 의해 저지르게 된다. 따라서 <아카메가 벤다>에서 보여준 제국의 폭력적인 정치수단은 결국 군대에 의해 자행되며, 때에 따라 군인이나 혹은 국가조직원이 자신의 권한을 뛰어넘어 횡포를 부릴 때가 있다.

 

<아카메가 벤다>는 바로 이런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품 1화를 보면 산골 오지마을에서 도성으로 찾아온 타츠미는 레오네의 속임수에 넘어가 자신이 가지고 온 모든 경비를 도둑맞는다. 하지만 운 좋게 아리아라는 귀족의 영애를 만나고, 아리아의 집에 가서 그의 가족들에게 호의를 받는다. 그런 와중 타츠미가 아리아 집에서 묶는 밤에 도성에서 지정한 과격한 범죄 집단 나이트레이드가 습격하여 아리아의 가족과 호위병 그리고 아리아의 성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잔인하게 도륙한다. 타츠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리아를 지키기 위해 아카메와 결투하게 되며, 결국 아카메에게 패배한다. 대신 운 좋게 타츠미의 가슴에 마을에서 준 나무조각 인형이 있어서 타츠미는 죽을 고비에 벗어난다.


 

아카메는 타츠미를 이기고 아리아의 집안을 수색하면서 타츠미에게 아리아 가문의 어둠을 보여준다. 그 가문 가족들은 외지에 온 여행객이나 행인들을 집에 초대하여, 수면제가 든 음식을 먹인 후에 잔인한 고문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게다가 그 희생자 중에는 타츠미의 고향친구인 사요와 이에야스 같은 어린 청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후 타츠미는 도성이란 곳이 얼마나 썩었고, 자신의 제국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패한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리아를 베려던 아카메 대신하여 타츠미는 자신의 검으로 아리아를 베고 만단. 아리아는 타츠미의 검에 베이기 전에도 자신의 죄를 반성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평민들에 대한 모멸감으로 가득한 눈빛과 폭언만 날릴 뿐이다.

 

그것이 제국의 현실이고, 그것이 곧 타츠미가 경험한 현실이었다. 구체제에 대한 타츠미의 분노는 자신에게 닥친 부조리부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런 부조리한 문제는 제국의 도성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은 묵인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아리아의 가족 외의 수많은 관료 및 귀족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투쟁에서 개인 간의 투쟁은 개인의 의사합의 내지 조율에 따라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다. 가게에 가서 하나 남은 물건을 서로 구매하려 한다면 어느 누가 포기하여 다른 것을 구매하면 되고, 싸움이 일어날 경우 상대방에 대한 배상 및 책임 역시 개인 간의 합의로 가능하다.

 

문제는 개인 간의 합의가 되지 않은 보이지 않은 커다란 벽이 존재하면서부터 시작이다. <아카메가 벤다>에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란 바로 구체제 앙시앵레짐이고,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했다. 타츠미가 도성에 넘어올 쯤에 나이트레이드는 활동 중이었고, 혁명군에 가담하거나 혹은 준비한 세력은 있어도 혁명을 위한 실행력은 없었다. 혁명이란 것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등 기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뒤엎는 것이고,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을 뒤집는 것은 결국 봉건왕조를 해체하는 것이다. 즉 혁명이란 피지배계층이 지배계층을 타도함으로서 그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의 진정한 가치는 민중 즉 “백성의, 백성에 위한 백성을 의한 정부”(미국대통령 링컨이 남북전쟁 최대격전지인 게티스버그 전투 연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을 의한 정부’) 정치가 되는 것이 목표인 셈이다. 바로 앙시앵레짐이란 구체제는 그 모든 문제의 발단이고 해체해야할 시작점이었던 것이다. <아카메가 벤다>는 바로 그런 구체제에 대한 대항한 점이고, 마지막 화인 24화에서 황제는 단두대의 칼날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다.

 

③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아카메가 벤다>에서 마지막 화에서 비장의 미는 역시 황제의 목을 내리치는 단두대이다. 우리가 흔히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면 전쟁 관련 작품에서 나오는 물품이 바로 단두대다. 기요틴이라고 불리는 이 장치는 프랑스혁명 시기 많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신속한 처리와 더불어 기존 사형방식이 비효율적인 점에서 고안한 방법이다. 본래 사형을 선고받을 때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앙시앵레짐에서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 처음에 루이15세 살인미수범에 대한 처분이 나온다. 루이15세는 기요틴에 목이 잘려나간 루이16세의 아버지로 프랑스 절대군주 왕권신수설로 군림한 루이14세의 후예다.

 

그런 구체제에서 왕의 몸은 2가지의 몸을 가진다. 하나는 생물학적인 신체, 나이가 들고 감에 늙고 병드는 평범한 인간, 다른 하나는 왕이라는 신분이 가진 신성성이다. 따라서 루이15세 살인미수범인 다미엥이란 하급관리는 매우 잔인한 고문을 받고 또 받아 온 몸이 사라질 정도로 고통 받을 채 죽게 된다. 왕을 죽이려 한 손에 칼을 잡고, 거기에 고문을 가하여 상처를 내고, 뜨거운 수은을 부어주는 등 수많은 고문으로 사형을 집행한다. 그러면 이런 사형이 아니라면 보통 교수형이라 하여 목을 매는 방법이나 또는 참수형, 요참형(허리는 베는), 능지처참, 화형 등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기요틴의 발명은 바로 참수형의 문제로부터 나왔다. 참수형 시 도부수가 도끼를 들고 인간의 경추부분을 찍어내는 방법으로 한 번에 목이 잘리면 모르지만, 어쩔 경우 2번 내지 3번의 추가적인 도끼질을 가하여야 목이 몸에서 분리되는 경우가 있었다. 만약 한 번에 잘리지 않으면 사형 받는 사람은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사형집행과정에 문제로 인해 군중에서 야유가 섞여 나온다. 기요틴은 무겁고 날카로운 쇠날을 떨어뜨려 단 번에 목을 자르게 한다. 그리고 이 사형방법은 프랑스대혁명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까지 프랑스에서 그만둘 때까지 계속 사용해왔다.

 

바로 기요틴이란 도구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많이 사용한 도구이고, 그는 프랑스대혁명에서 대표적인 혁명가이면서도 그 후 대표적인 공포정치의 독재자가 된다. 로베스피에르는 <베르사유의 장미> 후반부에도 나오는 인물로서 본래 부르주아 계급인 법조인이었다. 그는 프랑스대혁명 이전에 삼부회를 소집하여 국가적 재정부족과 국민생활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를 바랐고, 결국 삼부회에서 귀족과 성직자의 우세한 상황에서 프랑스 재정 상태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결국 귀족과 성직자는 특권을 위해 대다수 기득권으로 문제를 방치해온 셈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많은 군중들 앞에서 이런 연설을 한다. “사회의 으뜸가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바로 인간의 불가침 권리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권리 중 으뜸가는 권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생존할 수 있는 권리겠지요. 그러므로 사회법의 으뜸이라면 사회 구성원 전부에게 생존의 수단을 보장하는 것일 테지요. 이 법은 다른 모든 법 위에 존재합니다. 재산도 사실 이법을 견고히 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라는 거죠. 재산이 인간의 생존권에 위배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식량은 사람의 생존 저채만큼이나 신성한 것입니다.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은 모두 전체 사회의 공유 재산입니다. 영여분만이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있으며, 상인이 장사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동료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상업적인 투기를 감행한다면, 그건 결코 거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약탈이고, 형제들에 대한 살해입니다(<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

 

④ <아카메가 벤다> 시작, 타츠미의 도성 입성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카메가 벤다>가 처음 시작된 시점은 타츠미가 제국의 도성에 찾아가면서부터다. 그런데 왜 타츠미가 도성에 갈 수밖에 없었을까? 라는 점이다. 타츠미는 자신의 마을이 너무 가난하여 더 이상 빈곤을 견딜 수 없어 도성에 와서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다. 타츠미는 검술을 배운 실력자이기에 제국의 장군이나 혹은 군대에 입대하여 돈을 벌려고 했다. 결국 타츠미가 도성에 온 이유는 경제적 지원이 필요해서이고, 그 경제적 문제가 발생은 어디서부터이냐는 것이 중요하다. 타츠미의 마을은 경제적 빈곤에서 위기를 맞이한 것처럼 그 위기의 시작은 단순히 마을의 경제력이 하락되어서가 아니라 그 하락의 원인이 어디서부터냐는 것이다.

 

경제적 부분은 결국 식량의 공급에 따라 생존문제가 걸려 있고, 세금을 바치지 않으면 강제로 국가에서 세금징수를 위해 재산을 몰수한다. 그렇다면 그 국가세금이란 것이 얼마나 제대로 되어있는지 혹은 문제가 있는 지에서 그 국가의 존립여부가 바뀐다. 세금이 지나치게 거두어지게 되면 가난하고 빈곤한 사람들은 생존하기 어려워진다. 또한 관료와 귀족들의 사치로 인해 물자가 계속 부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난한 남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계속 힘들고 고된 일을 해야 하며, 여자는 자신의 몸을 팔아야 한다.

 

“누구도 자기를 팔 만큼 가난해서는 안 된다(장 자크 루소 <인간불평등 기원론>).” 작품 내에서 타츠미는 어느 여자로부터 암살의뢰를 받는다. 그녀는 젊은 여성으로 심한 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를 제국의 군인에게 살해당한 것에 앙갚음하기 위해 몸을 팔아 그 돈을 마련했고, 그러는 와중 병에 걸리게 되었다. 자신의 원수를 갚지도 못하고, 국가기관에 항의해보아도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암살전문집단인 나이트레이드에 의뢰하고, 타츠미를 그 의뢰를 받아들인다.

 

타츠미 역시 도성에서 사회적 모순에 의해 친구들을 잃고, 게다가 자신 목숨마저 위험에 빠진다. 타츠미가 바라본 제국의 현실은 그야말로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했고, 나이트레이드 멤버들은 그 원인이 황제가 제대로 정치를 하지 않고, 제국의 대신 오네스트에 의해 유린되어 있다고 한다. 오네스트가 황제의 귀와 눈을 방해하고, 심지어 자신에게 거슬리는 반대자들은 모조리 숙청하는 것이다. 나이트레이드의 최종 타도대상은 바로 이 비참한 현실을 계속 되풀이하게 하는 황제와 오네스트가 된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정점에 가기까지는 너무 멀고 먼 여정이다. 제국에는 강력한 군사조직이 정비되어 있으며,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전투능력자가 있었다. 바로 그들은 제구라는 도구를 가지고 매우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제국의 군인들이었다. 그리고 제구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제구인 점에서 나이트레이드 멤버 대부분은 제구를 사용하여 적을 암살하거나 첩보작전을 수행한다. 제국의 제구사용자들은 매우 강력하고, 간단히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특히 작품 중반부터 등장한 예거즈는 나이트레이드의 최악의 라이벌이 된다.

 

타츠미는 나이트레이드에 입단하여 혁명군 내지 혹은 제국의 백성들에게 암살의뢰를 받아 실행하면서 점차 예거즈와 충돌을 일으키고, 나이트레이드 역시 최후의 순간까지 예거즈와의 대결에서 피할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예거즈나 나이트레이드 활동은 단순히 명령계통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신념 혹은 정의를 가지고 서로의 목을 향하여 칼을 휘둘렀다.

 

⑤ 정의에 대한 명제와 허울

정의라는 이름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다. 심지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서적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적이 되었고,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어 큰 호응을 받은 도서다. 그러나 정의를 그렇게 외치어도 왜 정의는 도래하지 않은 것인가? 정의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신념이 하나의 현상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어느 집단적인 힘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정의라는 것은 어느 신념이나 가치관이 인간집단의 하나로 이데올로기로서 등장하기에 그 집단이 가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에 따라 다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카메가 벤다>에서 정의라는 이름은 단순히 혁명을 준비하는 나이트레이드만 외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예거즈에서도 정의라는 가치관을 말을 하며, 그 중에서 자신의 신체를 개조한 세류의 경우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집착한다.

 


그녀는 평화로운 제국을 위해 안정된 제국을 위해 예거즈에서 고군분투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정의는 모든 것이 국가의 기준으로 보고, 그 국가의 기준에 대한 절대적 가치로서 정의를 매긴다. 정의에 대한 가치가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로서 외치는 것이다. 진정한 정의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들만의 가치 아래에서 그 진실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타인의 관점, 타인의 입장, 더 나아가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보편적인 관점에서 그 가치관을 인정받을 수 있다.

 

“아름다움을 사람의 행동으로 구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라는 것처럼 정의의 실현은 아름다움의 가치를 인간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고, 선이란 것은 goods, 즉 나에 대한 이익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이익을 고려하는 것에서 판단할 수 있다. 가령 칸트의 3대 비판서(<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는 진․선․미(眞善美)에 대해 연구한 도서다. 이중에 <판단력비판>이란 도서는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도서, 즉 미학(美學, esthetics)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가치와 더불어 감성적 감각이 필요하다.

 

대우고전총서에 출간된 <판단력비판>에서 칸트는 루소의 관점을 이어받는데, 그것은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장 자크 루소의 <학문과 에술에 대하여 外>).”

 

라는 글이 주석에 달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정의에 대한 가치가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곧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움 중에 하나라면 정의라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타당한다. 정의에 대하여 논하자면 우리 인간은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으로 보겠으나, 사실 진정한 정의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최악의 선택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어느 가치관이 옳고,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옹호하면 다른 누군가는 선택되지 못한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되나, 문제는 그 대다수의 존재가 자신들의 이익에 관심을 두거나 또는 다른 약자를 희생함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킨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세류의 가치관은 국가와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에 대해서 가차 없는 폭력과 응징을 가한다. 심지어 강도에 의해 인질이 된 사람조차 응징하는 그녀에서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기만족에 불과할 뿐이다. “인민을 정부의 희생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부를 기꺼이 인민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그러나 세류는 오히려 가해자에 의해 공범이 될 수밖에 없는 희생자조차 살인을 한다. 그녀의 광기에서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국가라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국가라는 체계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 인간들에 의해 운영된다. 그들은 법이 있어도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법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법적 집행에 대한 가치는 객관적인 논리가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의지가 반영된다. 국가 관료체계에서 업무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가치, 그 가치가 결국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렇다면 그런 정의는 과연 올바른가? 그것은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서 억압받는 입장에서 분명 그것은 부당할 것이다. 이에 반해 전혀 자신과 관계없으며, 오히려 옆에서 사회 부조리에 대해 불만을 보면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예거즈의 행동에 찬동할 것이다. 정의라는 관점은 결국 자신들이 속해진 집단에 대한 이익, 조건, 상황 등에 의해 결정지어진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에게 정의가 있다고 하며, 그 정의 앞에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용납된다.

 

"오늘날의 바보스러운 사회제도 속에서는, 진정한 공공의 선과 진짜 정의가 표면적 질서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온갖 질서를 파괴한다. 게다가 이는 약자에 대한 압박과 강자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고 보장할 뿐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아카메가 벤다>에서 보이는 제국의 사회제도에서 백성을 억압하거나 혹은 그와 관련된 인간조차도 이런 문제를 현실로부터 외면한다. 예거즈의 세류의 경우 심각한 이유는 그녀의 스승과 주변 인간들이 나이트레이드 일행에게 살해당했다. 살해당한 인간들은 세류에게 매우 친절하고 소중한 존재이겠지만, 대신 그 인간들은 많은 백성들을 괴롭히고 무자비하게 대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살해당해야 할 이유는 분명 윤리적으로 틀린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가의 힘으로서 존재했기에 자신들 행위 그 자체가 하나의 도덕이 되었고, 그것은 하나의 정의가 되었다.

 

정의라는 명제가 필요한 이유는 어떤 집단행동에 대한 의미부여와 더불어 그것을 합리화시켜주는 하나의 이름이 된다. 만약 정의라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을 시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제 아무리 권력의 정점에 도달해도 정의라는 명제에 어긋난다면 그 권력자는 그 권좌에서 쫓겨나게 된다. 폭군이나 독재자들이 강한 힘으로 많은 국민들을 휘어잡은 만큼 그는 목숨의 위험과 퇴각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⑥ 나이트레이드의 결성

나이트레이드는 영어로 night raid로 야습(夜習), 즉 어두운 밤에 습격하는 것으로 암살이나 첩보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나이트레이드의 결성은 바로 제국의 부패와 부조리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나이트레이드의 주요멤버들은 기존 국가에 대한 반발의식을 가진 자들이 모인 집단이다. 국가에 대한 반발의식과 국가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관점에서 그들은 반정부주의 내지 무정의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도성에서 나이트레이드는 그저 살인청부를 하는 흉악한 범죄 집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혁명세력과 연계된 특수조직이란 사실에서 제국이 가장 경계하는 집단이다.

 

나이트레이드가 결성된 최초의 이야기는 알 수 없으나, 나이트레이드를 결성한 자는 바로 제국 장군 출신인 나젠다이었고, 브라트의 경우 제국에서 소문난 용장이었으며, 아카메는 제국의 특수 암살조직의 에이스였다. 게다가 라바크는 나젠다에 반해 그녀를 따라온 제국의 병사였다. 추후에 영입된 첼시 역시 제국의 귀족 밑에서 근무한 지방관료 출신이다. 나이트 멤버에서 나젠다, 아카메, 브라트, 라바크, 첼시가 본래 국가에 소속된 자인 것이다. 다른 멤버로 라오네는 시장골목 출신, 마인은 이방인과 제국인에서 태어난 혼혈아, 세례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 속에 살아온 인간이었다. 타츠미 같은 경우 산골에 온 그저 시골촌놈에 불과하다.

 

나이트레이드 멤버들은 처음부터 나이트레이드에서 활동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서로 달라서 모였던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가에 소속된 멤버들은 자신들이 국가에 소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는 역적이 되었다. 제국에서 자행되는 잔인한 전쟁, 정치적으로 폭정에 의해 죄 없는 국민을 죽이고, 사회적 약자는 계속 핍박을 받기 시작한다. 혁명의 주축멤버를 기존 혁명을 보면 그 사회의 지식인 내지 사회적 계층이 높은 경우가 많다. 단지 국가조직에 소속된 자들이 나와 새로운 혁명세력을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남아메리카에서는 그런 쿠데타로 정권을 뒤집는 사례는 종종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따로 나와 조직을 만들어 암살과 첩보를 자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민중의 혁명을 집결하기 위해 사전에 암살활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이트레이드는 황제와 총리를 타도하고 나서 그 조직이 사라진다. 나이트레이드는 결론적으로 혁명군을 위해 사전에 활동하는 조직이나, 그들이 혁명이후 해체되고, 그곳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은 모조리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져야 한다. 제국의 어둠에 대하여 어둠으로 대하던 이들이 혁명군의 역사에 올라올 수 없는 이유는 혁명이란 이름은 바로 정의라는 명제로서 움직이어야 하나, 암살과 첩보활동이 혁명의 정의로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암살활동을 하면서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죽음의 늪에 빠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암살활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정의라는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 사회적 약자 계층이 지급계층에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폭력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유혈사태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점에 대한 문제점을 인지하듯이 <아카메가 벤다>에서 예거즈 멤버 중에 특이한 대원이 있다.

 

천사의 날개를 가진 예거즈 대원 란은 본래 직업이 교사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예거즈에 들어온 이유는 제국의 부조리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권력을 쌓아 가면 언젠가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에 도달하면 충분히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점이다. “지배받는데 익숙해진 국민은 이미 지배자 없이 지낼 수 없게 되지요. 만일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들은 자유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들은 참된 자유와 반대되는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므로, 혁명을 한다고 해도 거의 언제나 자기들의 족쇄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버릴 뿐인 선동가들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지요(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란은 폭력으로 이루어진 혁명은 결국 피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고, 자신의 그런 피를 보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예거즈에 활동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예거즈에 활동한 이유는 자신의 제자가 아주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도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의 가치관은 매우 평화롭고 옳아 보일지 모르지만, 만약 대신 오네스트나 혹은 그의 동조세력이 계속 권력을 잡고 있다면 란의 계획은 처음부터 실행되지 않는다. 오네스트는 자신에게 반발하거나 거슬리는 귀족이나 관리를 모두 암살한다. 란이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결코 제국의 미래를 바꿀 수가 없다. 그 전에 란은 이미 오네스트와 같은 부류에 의해 숙청당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모순을 알면서도 란은 제국의 편에서 싸우지만, 그의 목적은 언제까지나 약한 자들의 입장이 나아지는 것이지 단순히 국가의 폭력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위치에 올라가는 것까지도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그 사이에도 계속 희생자가 나온다면 결국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나이트레이드 멤버 중에는 제국의 모순과 부조리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입단해 있었다. 레오네는 가난으로 인해 제국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마인은 혼혈인이란 이유로 천대 받고 어린시절부터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해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 타츠미는 도성에 오자말자 고향친구의 시체를 목격해야 했다.

 

제국이 가진 모순과 부조리에서 나이트레이드 멤버는 새로 보충된 셈이다. 이 모두가 바로 제국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결국 그들은 어둠의 살인자로 만든 것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고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다. 그러나 제국에서 나이트레이드를 제거하려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고,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회에 살고 있다. 죄지은 사람은 목매달아 죽을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자들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장 자크 루소의 <에밀>).”


나이트레이드는 바로 목을 매달아 죽이야 할 대상을 죄를 지은 범죄자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람들을 노린 것이다. <아카메가 벤다> 최종 화에서 기요틴이 나온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을 모티브를 삼은 점이 있었고, 루이16세가 단두대 아래 죽은 최초의 왕이란 점에서도 그렇다. 단지 차이점은 사실 루이16세는 무능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국민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이 약한 왕이었고, 주변 신하들의 권력에 의해 비효율적인 정책으로 실패한 것이다.

 

이에 반해 <아카메가 벤다>에서 왕은 백성에 대하여 아끼는 마음은 전혀 없고, 단지 백성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여야 하고, 자신의 말을 거슬리는 것은 곧 신의 말을 거슬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 보았다. 그런 폭군이 되어버린 황제는 오네스트의 아첨과 왜곡으로부터 시작했다. 제 아무리 대신 오네스트의 농간이라고 해도, 그것을 실행한 것은 황제이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 황제가 사용한 제구로 인해 도성의 수많은 백성들이 죽인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인 점이다.

 

⑦ 지배계층의 문제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 이유는 누구의 잘못인가? 그것은 바로 지배계층의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과연 인간은 태어날 때 자연적인 존재로 태어난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 존재보다는 자연적 존재로서 태어난다. 하지만 이미 태어나면서 그 존재는 타인에 의해 사회적 존재로 되어야 하고, 가정여건에 따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존재로 변모된다.

 

자신이 부여된 주변 환경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도 결국 쇠사슬에 묶이게 되는 이유는 인간 스스로 자연적인 존재(원시부족이 아닌 자신의 스스로의 의지로서 판단할 수 있는)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어릴 때부터 억지로 주입되는 교육과 사회적 세론이 계속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의지로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 의해 특히 권력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이 권력을 가진 것에서 남의 주인이라 생각하는 자가 그 사람들보다 더 사슬에 묶인 노예인 이유는 자신의 소유욕과 과시욕에 의해 자신의 것이 아닌 것들을 잃어버린다는 조바심에 더 큰 문제를 자신에게 가져오게 된다.

 

<아카메가 벤다>에서 지배계층의 문제는 인간의 생명이 하나의 존재에 대한 목적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도구와 수단으로 대하는 점이다. 타인의 생명을 죽게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타인의 재산을 빼앗아 파탄을 내어도 전혀 문제처럼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츠미가 제국의 명장 부도대장군에게 포박되어 사형집행이 되려고 할 때 수많은 도성 사람들이 구경하러 나왔다. 결국 그들은 나이트레이드의 활동과 제국의 횡포에서 무엇이 더 문제인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국가의 권력 자체를 정의라고 믿는 것이었다. 그것이 제국의 법처럼 되었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런 것이었다. 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 이 사회와 법률이 약한 자에게 새로운 멍에를,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주어 자연의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 버렸다. 또 사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원히 고정시키고, 교묘한 찬탈로써 취소할 수 없는 권리를 만들어 일부 야심가의 이익을 위해 이후 전 인류를 노동과 예술과 빈곤에 굴복시킨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사회에 대한 성립이 어떻게 모든 사회의 성립을 필수적인 것으로 했는가, 또 단결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스스로도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는 쉽게 수긍할 수 있다. 사회는 급속히 증가하고 넓어져, 마침내는 지구의 전 표면을 덮어 버렸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결국 지배계층의 특권의식, 그들이 가진 공권력, 그런 그들을 의지하여 타인의 고통과 억압을 외면한 채 그 지배계층에 동조하는 게 정의라고 외치는 다른 부류의 군중들, 어떻게 보면 <아카메가 벤다>는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고, 보통 사람으로 할 수 없는 특이능력을 보여주는 액션물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면 상당히 현실적인 요소가 많이 반영되었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그 원작이 만화라도, 만화작가가 이야기를 구성하거나 모티브를 반영할 때 분명히 역사와 문학, 그리고 문화적 조건이 부여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황제가 기요틴 아래 목이 잘릴 때 프랑스대혁명의 루이16세의 죽음이 모티브가 된 점은 분명하고, 군중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 역시 국가정부가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정부의 권력자들의 사욕을 위해 존재한 점이다.

 

이런 모습은 프랑스대혁명 시기와 상당히 유사하다. 게다가 15화인 교단을 베다 부분에서 교단의 종교인을 베는 이유는 국가와 종교가 서로 유착하게 되면 국민에 대한 정치적 헤게모니(지배 이데올로기 정당성 부여)를 정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타락한 가치관을 백성들에게 강요하거나 혹은 현실적 문제를 종교적 교리로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도 있다.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부르봉왕조와 교단은 서로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었으며, 농민들을 괴롭히는 부류는 귀족뿐만 아니라 종교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종교인들의 부패적인 모습은 사드 후작의 소설 <소돔의 120일>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들의 잘못된 판단은 타인에 대한 배려, 약자에 대한 이해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로지 자신의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기에 멸망의 길을 걸은 셈이다. <아카메가 벤다> 마지막 장면에서 세상이 악으로 가득하면 그 악을 처단할 무리가 나온다는 것을 알린다. 즉 신화적인 문학에서 어려운 현실에 영웅이 등장하여 악을 응징한다는 인간들의 해방에 대한 욕망의식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현실적인 조건으로 등가 시키면 재미있는 발상이 된다.

 

⑧ 왕과 대신, 왕과 총리

<아카메가 벤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이기에 일본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일본은 아직까지 헌법에서 왕이 존재하고, 총리가 정치적 수장으로 집권하더라도 아직까지 일본은 천황의 나라이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서기(序記)와 단기(檀紀) 혹은 불교에서는 불기(佛紀)로서 역사를 표기한다. 예수나 단군 혹은 석가모니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신적인 존재다. 그리스도교의 예수, 불교의 석가모니, 대종교의 단군을 생각하면 그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그림과 조각상으로 존재해도 그런다고 현실 그 자체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나 일본은 조금 다르다. 일본의 지난 왕인 소화, 그리고 현재는 평성이 자신의 연호로 일본의 연대를 구분 짓는 잣대가 된다. 따라서 일본은 아직까지 천황의 나라이고, 그 천황 중에 소화는 전쟁전범이고, 평성은 그의 후예다. 만약 <아카메가 벤다>에서 제국의 황제와 대신 오네스트를 일본의 왕과 대신으로 등가 교환한다면 누가 되는 것인가? 바로 일본 왕과 총리다. 물론 작품 그 자체가 자신의 내부적 문제점을 하나의 모티브로서 작품으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왕국을 타도하여 혁명을 추구하는 스토리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 중 그런 작품이 매우 드물다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자신의 왕을 기요틴의 칼날을 맞이하게 한다는 발상 자체가 매우 새롭다는 점이다. 어두운 사회와 악이 지배하여 많은 사람들이 통탄에 빠지면 악을 처단하는 자들이 나온다는 방식은 권선징악의 정의이겠지만, <아카메가 벤다>에서 보인 정의는 나이트레이드와 예거즈 사이에서 서로의 입장만 내세워 다투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다고 하여도 예거즈 멤버 자체가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다. 란은 황제가 제구로서 도성을 파괴할 때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출해주고, 해군에서 온 웨이브는 예거즈 멤버를 매우 아끼는 청년으로 과연 그가 나쁜 사람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전혀 아니고, 오히려 좋은 성격과 올바른 심지를 가지고 있다.

 

제국의 군인이지만 그는 군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군인은 백성을 지키는 것이 일이다”라고 말이다. 군인이란 것은 국가를 지키는 임무를 맡지만, 그 이유는 국가의 그 자체가 되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다. 군인정신이란 바로 내 나라의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을 지킬 수 있는 이유는 웨이브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제구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힘을 가진 존재로서 웨이브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바로 힘을 가졌어도 특권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트레이드와 대적하면서 그들이 벌이는 암살행위에 대하여 문제라고 생각해도 한편으로 광기가 넘치는 세류의 행동 역시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제국의 황제와 대신이 만약 웨이브의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면 나이트레이드는 탄생하지 않았고, 천년의 제국은 계속 이어져 갔을 것이다. 제국이 존재하는 이유는 왕이 지배하는 것이고, 왕이 지배하는 이유는 그가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군주정의 참된 가치는 바로 군주가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의 생활을 도모함으로써 국가운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오히려 간신배의 이익을 위해 폭정만 휘두른 셈이다.

 

<아카메가 벤다>는 매우 과격한 작품이다. 작품 자체에서 기존 국가에 대한 무정부 내지 반정부주의(아나키스트)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자인 아나키스트들은 대부분 1차부터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자국 및 제국주의에 대해 폭력적인 수단으로 대항했다. 물론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와 이회영은 유명한 아나키스트이었다. 아나키스트는 개인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하는 자유주의자들로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주의와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테러, 암살, 공작을 주도하며, 단재 신채호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아나키스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아나키스트들은 한국의 조선인들만 활동한 게 아니라 대만, 중국, 일본인들도 있었고, 일본인 중에서 일본 자국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들도 있었다. 한국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며 독립운동가인 박열 열사의 아내는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였다. 그녀는 일왕을 암살하려한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감옥에서 복역 도중 자살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세상의 모든 억압과 압제를 부정하며 투쟁하는 부류를 말한다. 하지만 국가를 해체 후에도 정치적 제도는 필요하고, 그 제도에서 대표적인 권력자가 통치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민주자유주의로서 운영하는 것을 원한다.

 

조금 특이한 점은 신채호의 사상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특별한 지식은 개인이 가지면 안 되고, 그 지식이 누가 가지면 특권의식이 생긴다고 한다. <아카메가 벤다>에서 제구 사용자인 아카메를 비롯한 동료들은 혁명이 성공하면 혁명의 역사에서 어둠의 그림자로 숨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혁명 성공 후에 자신들이 혁명에 방해될 것이란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런 희생을 자처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혁명 이후에 받는 입장보다 지금의 압제가 더 심각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트레이드는 왕과 대신을 벨 수밖에 없었다.

 

<아카메가 벤다>를 현실적으로 등가 한다면 일본 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가 바로 정치권력을 소유한 자들에 의해서라면 이 작품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고, 일본 내에서 자기 왕을 목을 친다는 발상은 나오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좋지 않은 정부에서는 이 평등이 허울뿐이며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그 평등은 가난한 자는 계속해서 가난 속에서 살게 하고 부자는 계속해서 침탈하게 하는데 이용될 뿐이다. 실제로, 법은 언제나 가진 자들에게 유익하고 못 가진 자들에게는 해롭기만 하다. 따라서 사회 상태는 인간들 모두가 어느 정도씩 갖고, 그들 가운데 누구도 지나치게 많이 갖지 않는 한 유익하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현재의 일본에서 고령화, 니트의 대량 생산, 이지메, 경제문제 등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면서 병들어 간다. 특히 최근에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경우 일본의 대표적인 관료정치와 건설사의 정경유착, 또한 그들의 이익을 공유한 언론과 미디어가 빚어낸 현실이다(물론 한국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게 아니지만, 처음부터 한국에서 이런 작품을 만들 수가 없는 현실임 점을 고려해야한다). 결국 앙시앵레짐의 구체제나 혹은 정치적으로 의회민주주의나 정치가 썩으면 결국 힘이 없는 약자들은 희생된다는 점이다.

 

⑨ 비극을 극복하는 방법

비극을 극복하는 방법은 알기 쉽지만 행동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타츠미로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정답은 사랑이라 것이다. 사랑은 3가지로 나눈다. 남녀 간 혹은 가정이나 친구의 우정까지 포함될 수 있는 에로스적인 요소다. 에로스라고 하여 단순히 남녀의 성적인 상대성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에로스라는 것 자체가 인간을 생존하게 해주는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사랑이라면 가족과 친구까지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제일 옆에 두고 있고 싶어 한다. 그 소중한 사람들이 옆에 있기에 우리는 행복함을 느끼고, 마음이 편안하며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때로는 설렌 마음에 두근거리기도 한다.

 

다음 사랑으로 인류애적인 사랑, 아가페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 즉 자신보다 남을 위한 가치관으로 공공선을 지나 공동선을 추구하는 가치다. 그것도 거짓으로 억지로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서 실행하는 사랑이다. 물론 인간의 감정으로도 충분히 타인에 대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판단 아래 실행하는 선의 가치란 순간적인 감정보다 더 우월한 이유는 그것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신의 의지 아래 타인에 대해 지속적으로 선의를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 철학자처럼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것,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한정된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이유는 모조리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다면 그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모든 문제의 답을 해결해주는 모범답안지는 아니다. 하지만 그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그 문제가 되는 이유를 알려주는 답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을 알았다면 해결의 방안에서 <아카메가 벤다>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묻는다면 사랑이다. 그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보단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타츠미의 사랑은 고향친구에 대한 우정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고향친구가 죄 없이 무참하게 살해당해도 그것 자체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은 사회적 부조리에 분노를 느끼고, 자신의 친구처럼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면서 분노의 칼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결국 타츠미가 칼을 휘두르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사랑, 약자가 부당하게 억압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타츠미가 가진 미소가 그렇게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그의 마음이 언제나 진실하고 사심 없으며 진지하기 때문이다. 도성에서 에스데스가 무술대회에서 타츠미의 미소에 반한 이유는 바로 타츠미가 가진 진심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에스데스는 제국의 군인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잔혹하며 무서운 장군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강자의 힘이 진리고, 약자는 도태된다고 한다. 그런 힘의 논리가 그녀의 정의고, 그 정의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시킨다. 무수히 많은 이민족들을 살해하는 그녀의 무자비와 포로에 대한 거친 고문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괴물이었다.

 

언제나 폭력에 의해 살아온 그녀가 자신의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 황제에게 원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여자로 태어나 한 사람의 남자를 사랑해보는 것이라 한다. 그 사랑은 존재가 정신적인 것도 있으나, 에스데스는 여자라는 존재가 하나의 동물적인 감각에서 비롯된 사랑이었다. 타츠미를 보는 순간 반하여 그를 강제로 끌고 가서 포박하였고, 타츠미에게 동물적으로 육체적 사랑을 원했다. 하지만 타츠미는 그녀에게 육체적인 접촉보단 가난하고 나약한 백성을 위해자고 했다. 타츠미는 이미 사랑이란 가치를 인류애적인 요소로 판단했고, 에스데스는 에로스보단 차라리 리비도라는 무의식적인 성적 에너지로서 타츠미를 원했다.

 

에스데스가 원한 남자는 순진한 미소를 가진 소년이지만, 한편으로 강한 남자로서 한 나라의 장군이 되어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타츠미의 능력은 과연 그 목표지점에 근접했으며, 에스데스는 강제로 타츠미를 끌고 간 것이다. 물론 추후에 타츠미는 탈출하고 에스데스가 지휘관으로 있는 예거즈와 사투를 벌인다. 그리고 타츠미는 황제의 제구를 저지하면서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소진하고, 결국 죽는다. 타츠미의 죽음에서 에스데스는 그가 약해서 죽었다고 하나, 막상 에스데스는 아카메에게 패배하여 죽어가면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타츠미의 시신이 있는 곳에 걸어가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빙벽을 세운 후에 타츠미와 같이 얼음 속에 갇혀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린다. 타츠미의 시체조차 영원히 누가 가져가지 못하도록 오로지 에스데스의 옆에서 영원히 살아가기 바라듯이 육체조차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에스데스는 죽음을 알고 있을 때, 즉 인간이 최후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결정적으로 행동할 때 그녀의 선택은 타츠미와의 사랑이었다. 에스데스는 타츠미가 나약해서 죽었고, 그의 죽음에서 자신이 원하는 남자에서 제외되었다고 겉으로 보여주나 사실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타츠미를 사랑했던 것이다.

 

아마 <아카메가 벤다>에서 비극의 종지부를 찍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었다는 점이다. 단지 그 사랑은 허무하게 이룰 수 없는 또 다른 비극이었다. 타츠미를 비롯한 나이트레이드 멤버는 제국의 압제로부터 무고한 백성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었다. 하지만 만약 혁명이 성공한 후 그들이 다시 일반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혁명이 성공하여 바꾸는 것만큼 중요한 게 바꾼 후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라는 점이다. 만약 혁명이란 목적이 달성된 후 또 다른 목적이 없다면 결국 에스데스와 같은 형태로 되는 것이다.

 

에스데스는 끝도 없이 남을 밟고 또 밟아 자신의 밑에 두어 군림하는 게 목표다. 전쟁이란 그저 국가의 정의보단 자신의 힘의 정의로 이용할 뿐이다. 그런 에스데스의 브레이크가 될 수 있던 게 타츠미이었다. 모든 것을 얻어도 인간에게 반복되는 허무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가 어떤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에스데스의 죽음은 타츠미와의 소멸로서 마무리 된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타츠미에 대한 마음을 제대로 인지했다면 그런 비극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은 나이트레이드 첼시와 마인 역시 그렇다. 첼시는 동료의 죽음을 많이 지켜보았기에 나이트레이드에서 활동하면서 비관적인 태도로 동료들을 대한다.

 

타츠미의 진심어린 행동에 조금 다른 삶을 살려고 하나, 쿠로메 암살에 실패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그녀의 목은 베어져 제국의 광장에 효수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아무런 것도 없다고 여긴 마인의 경우,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타츠미에게 느꼈고, 타츠미도 연애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낀 것 역시 마인이었다. 마인의 죽음을 지켜본 타츠미는 마인이 죽기 전에 키스를 나누는 장면에서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비극적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남녀로 등장한다. 기나긴 고통과 외로움, 상처로 괴로워하던 마인에게 세례라는 친구는 소중했으나, 그 이상으로 타츠미란 존재는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는 추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타츠미 구출작전에서 부도대장군과 전투 후 마인은 죽고 만다. 삶에 대한 이유와 행복에 대한 목적이 생긴 찰나에 맞이하는 비극적 죽음이나 그래서 아름다운 장면이 되었다. <아카메가 벤다>가 프랑스대혁명의 모티브 요소를 반영한 점에서 프랑스대혁명 시기 유럽의 낭만주의적인 풍조가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타츠미 구출작전은 나이트레이드의 사기저하가 결국 혁명에 큰 악영향을 준다는 점이 있지만, 마인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타츠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가면 성공여부도 장담하지 못하고, 상황이 좋지 않을 시 죽을 것을 알면서 가는 점에서 상당히 낭만주의적인 요소가 반영된 것이다.

 

물론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반영되더라고 나이트레이드 속의 이야기는 낭만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 왕국 근위병에게 죽음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민중들은 계속 저항을 하고, 결국 근위병의 총칼 아래 쓰러져간다. 그래도 계속 일어서고 싸우는 모습에서 낭만주의 문학을 그대로 반영한 영화로서 보여준 셈이다. 영화 <레미제라블>도 2가지 사랑이 나온다. 남녀 간의 사랑, 그리고 인류애적인 사랑을 말이다. 결국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쉬운 말이나 그 실천에 대한 부분에서 개인적 사랑을 초월하여 타인에 대한 인류애적인 가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⑩ <아카메가 벤다>, 혁명 이후의 세계

작품 제목처럼 이 애니메이션은 <아카메가 벤다>으로 방영되었다. 작품명처럼 <아카메가 벤다>라면 왜 아카메가 중심이 되지 않고, 오히려 타츠미 중심으로 전개되며, 중간마다 조연들이 중심적 인물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카메가 벤다는 것에서 아카메 중심이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 화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아카메를 제외한 모든 나이트레이드 대원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아카메가 베는 것은 결국 아카메라는 어느 인물로 통해 계속 나이트레이드의 의지뿐만 아니라 나이트레이드에 의해 죽은 제국의 희생자, 제국의 횡포에 의해 희생된 백성까지 모두 포함한 것이다.

 

아카메의 제구는 무라사메, 그 칼은 저주받은 도(刀)로 칼에 베인 자는 저주의 구절에 의해 죽게 된다. 하지만 저주를 내리는 것은 그 칼의 능력이라고 해도 그 칼에 담긴 저주는 그 칼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원망이 깃들어있다. 아카메가 그 칼의 능력을 자신에게 부여할 때 그녀는 인간이 아닌 하나의 괴물로서 서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만 괴물이지 아카메라는 정신적인 근본은 인간을 위한 인간이었다. 이와 다르게 인간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던 에스데스의 경우 겉모습만 인간이지 마음은 이미 파괴의 본능으로 가득했다.

 

에스데스는 아카메에게 패배하면서 그 모든 업보와 한을 짊어지고 가겠냐는 말을 한다. 아카메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계속 살아갈 것이라 말한다. 그 원망에 의한 업보와 한은 아카메 자신의 신체에 큰 낙인을 찍었으며, 그녀는 평생 그것을 가지고 살아간 것이다. 따라서 제목와 같이 <아카메가 벤다>는 그 모든 것을 짊어지며 계속 살아가면서 싸워야 하는 아카메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어둠으로서 아카메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제국이 몰락해도 제국에서 살아온 기존의 인간들이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에서도 역시 루이16세가 실각하고 난 뒤, 프랑스에도 역시 국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혁명 이전에는 왕이 자신들의 주인이었으나, 혁명 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곧 왕이었다. 쇠사슬을 끊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 것에서 혁명이란 새로운 삶을 제공하는 기회가 된다. 그런다고 혁명이 이루었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끝난 후에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곧 국민의 권리와 의무이다. 혁명군이 정부를 설립하면 거기에 알맞은 정치체계를 구성해야 하는 셈이다. 프랑스대혁명의 실패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의 과도한 폭력적 응징이 문제였다.

 

그러나 근본은 경제적 원인이었다. 게다가 프랑스 왕정붕괴 이후 프랑스 주변 국가들이 프랑스 국경을 침범했고, 프랑스혁명군들은 여기에 대항해야만 했다. 계속되는 전쟁, 그리고 혁명 이후에도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회구조적으로 이때 막 전 자본주의 경제체계에서 자본주의로 이전하려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삼부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귀족과 성직자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 그들이 사라진 이상 부르주아 계급들이 이익을 충분히 볼 수 있었고, 그들 일부는 혁명에 지지했으나, 어느 일부는 자신들의 이권만 지키기 급급했다. 프랑스대혁명 후에도 거리에 굶주린 자는 여전하고, 비참한 도시빈민은 거리에 넘쳤다. 그들의 외면 앞에 사회적 불안에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란 기요틴 아래 시대의 불만을 떠넘기는 것이었다.

 

“나는 인류 속에서 두 종류의 불평등을 생각한다. 그 하나를 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 부른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연령이나 건강이나 체력의 차이와 정신, 또는 영혼의 질의 차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종의 약속에 의존하여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정해지든가 정당화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 부를 수 있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은 얼마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침으로써 누리게 되는 갖가지 특권,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부유하다든가 존경을 받고 있다는가 권력이 있다는가, 나아가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복종시킨다는 특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장 자크 루소는 후대의 사상가에 의해 "프랑스의 저술가이자 계몽주의자, 프랑스 혁명 전의 가장 저명한 혁명적 프티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그“라고 한다. <아카메가 벤다>에서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서적을 인용했는데, 프랑스대혁명뿐만 아니라 남미의 혁명, 세계의 혁명사에서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서적은 통용된 것이고, 심지어 최초 인권선언문인 프랑스인권선문, 그리고 세계 민주주의국가의 헌법에서도 큰 영향을 끼친다. <아카메가 벤다>에서 혁명군이 원하는 것은 제국의 타도이고, 제국이 타도된 이후에는 어떻게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새로운 숙제였다.

 

결국 기존 구체제인 앙시앵레짐이 붕괴하면,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고, 그것은 국민을 억압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보편하게 나누어주는 정치체계이어야 한다. 그런다고 딱히 작품 내에서 어떤 정치체계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왕과 대신으로부터 암살위기를 받은 관리에 대해 보호해주는 것도 나이트레이드의 임무라는 점에서 각료체계로 운영될 것이고, 그 대부분은 혁명군의 주요인물일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이왕정 붕괴 후 정치적 체계를 대부분 혁명을 주도한 인물들이 맡았다.

 

만약 이들이 또 다시 특권의식에 눈이 멀어버린다면 또 다시 제국의 비극이 시작할 수 있다. “좋지 않은 정부에서는 이 평등이 허울뿐이며 눈속임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그 평등은 가난한 자는 계속해서 가난 속에서 살게 하고 부자는 계속해서 침탈하게 하는데 이용될 뿐이다. 실제로, 법은 언제나 가진 자들에게 유익하고 못 가진 자들에게는 해롭기만 하다. 따라서 사회 상태는 인간들 모두가 어느 정도씩 갖고, 그들 가운데 누구도 지나치게 많이 갖지 않는 한 유익하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따라서 정치적으로 계속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일들을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카메가 벤다>는 범죄, 액션, 모험 등이 뒤섞인 판타지 세계의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그 안의 이야기는 실제 존재했던 사실이나 혹은 문학이나 문화적 요소들을 반영하여 제작했다. 부조리한 사회구조한 모순적인 사회제도는 작품 안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빈곤과 비참함에 살아가게 만들었다. 이런 사회적 문제를 가진 국가는 과연 옳은 정치체계인가?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부당하게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휘두른다면 과연 정의로운가?

 

그렇다면 이런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법적 제도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폭력적인 수단으로 부당한 억압을 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카메가 벤다>는 결국 그런 부당한 폭력 앞에서 대항할 수밖에 없는 것은 폭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국가에 대항하는 자들은 폭력배 내지 범죄자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자들을 만든 원인제공자는 국가라면 그 국가는 당연히 해체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목표를 위해서는 너무 많은 희생들이 뒤따른다.

 

미국 3번째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역사를 말할 때 과거를 평가함으로써 미래를 판단하게 한다.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연설한 적이 있다. 희생 없는 결과만큼 좋은 것은 없겠지만, 맨 처음 희생자들을 만드는 자들이 그 희생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권을 포기한다면 분명 비극은 탄생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주인이 되기 위해 더 강력한 쇠사슬로 자신을 묶는다. 바로 그런 쇠사슬을 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카메가 벤다>라는 제목처럼 그 쇠사슬을 풀기 위해서는 베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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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1-02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읽을 때 <아카메가 벤다>가 뭐지? 라는 의문점이 들었는데, 읽어 가면서 애니인 걸 알았네요..ㅎㅎ
이거 한 번 봐야 겠습니다. 좋은 작품 소개 감사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02 23:21   좋아요 0 | URL
오덕의세계는 삼라만상의 공간이죠. 볼만합니다.

저는 마인이 죽을 때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란 부탁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루소의 생각이 계속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HG.Chris 2018-10-04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우연히 끌려서 이 애니를 봤는데, 왕도 소년만화의 권선징악 이야기로 시작해서(물론 잔혹함으로 인상을 크게 주기는 했지만) 각자의 정의를 걸고 싸우는 군상극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가장 마음 아픈 장면은 마인이 죽을 때였네요......

원작 미완결 상태에서 제작된 애니인지라, 후반부 스토리는 전체적인 골자는 원작자 제공이긴 해도 상당부분 다른 모양입니다. 예거즈 이외에 슈라 휘하의 부대가 새롭게 큰 비중으로 등장하는 듯 한데다가 나이트레이드 측 생존자도 더 많은 듯 하더군요(마인 역시 이쪽에선 최종적으로 생존하는 모양입니다). 작화면에서도 정지컷이 많은 전투씬과 다소 옛 느낌이 없잖아 있는 애니보다 원작 쪽이 매력적인 모양이라 시간이 되는 대로 원작도 찾아볼 생각입니다.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10-05 08:57   좋아요 0 | URL
악당의 부하도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있었고, 제도의 권력과 치안이란 이중성에서 엽기적 인물이 있었죠.
마인과 남자주인공은 만화에서 살아남지만, 그래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이 완전 드래곤이 되었다는 점에서요...
일본에서 왕을 죽인다는 발상은 참으로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