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일상적인 소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은 장 자크 루소의 대표적인 서적인 <인간불평등기원론>에 가지고 온 내용이다.


조잡하고 치켜세우는 데 넘어가기 잘 하는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서는이런 연설과 비슷한 것조차 필요치 않을 정도였다특히 그들은 서로 해결 지을 사건이 너무 많아 중계자 없이는 안 되었고또 강한 욕망과 야심이 지나치게 많아 오랫동안 주인 없이는 안 되었던 것이다누구나 자기의 자유를 확보할 작정으로 자기를 얽어맬 쇠사슬을 향해 달려갔다왜냐하면 그들은 정치제도의 이익을 느낄만한 이성은 가지고 있었지만그 위험을 내다볼 만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그 폐해를 가장 잘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를 이용하려고 했던 자들이었다그리고 현명한 자들까지마치 부상자가 신체의 나머지 부분을 구하기 위해 팔을 잘라 버리는 것처럼 자기네들의 자유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을 보존하기 위해 희생할 것을 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런 것이었다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이 사회와 법률이 약한 자에게 새로운 멍에를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주어 자연의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 버렸다또 사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원히 고정시키고교묘한 찬탈로써 취소할 수 없는 권리를 만들어 일부 야심가의 이익을 위해 이후 전 인류를 노동과 예술과 빈곤에 굴복시킨 것이다그리고 단 하나의 사회에 대한 성립이 어떻게 모든 사회의 성립을 필수적인 것으로 했는가또 단결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스스로도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는 쉽게 수긍할 수 있다사회는 급속히 증가하고 넓어져마침내는 지구의 전 표면을 덮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부동산 투자에 대해 잘 모르고, 알아도 하고 싶지 않다. 개인적 이익,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익, 생각하면 간단하다. 내가 어느 집을 샀는데, 거기가 언젠가 교통이 좋아지거나 혹은 주변에 상업시설이 도래하여 땅값이 크게 오른다. 그래서 미리 구매하여 다른 곳은 산다. 또 새로이 구매한 곳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변물가는 오르고, 살기는 어려워지며, 세금도 부담스럽다.


이런 과정은 보통 일반인들이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현명한 것처럼 땅이나 부동산으로 통한 이익을 자랑스레 생각한다. 물론 자신보다 자본력이 우월한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것은 알고 있지만, 당장의 이익만 바라보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선택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과 특히 아이라는 미래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다른 생물인 동물과 달리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강한 이유는 인간이 죽음을 예상할 수 있는 시간적 인지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시간은 본능에 의한 것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당장 자신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본능적인 행동이다. 이성적인 영역으로 시간적 판단력이란 없다. 시간의 인지능력으로 우리는 결국 자본에 대한 투자도 가능하다. 아무 것도 없는 땅에 마치 거대한 단지와 빌딩이 자리잡는다는 판단은 우리의 시간과 더불어 공간적 이미지로서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이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집 값이 오르면 주변 상점은 물가가 오른다. 상점의 부동산적인 요소와 가구 및 인테리어 소품들은 기본적으로 불변자본, 한 번 구매하면 반영구적으로 이용한다. 물론 건물이나 가구 등에 대한 보수유지가 필요하나, 특이한 일이 없다면 자신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용된다. 문제는 음식재료와 같은 소모성 유동적인 요소는 모르나, 기본적으로 가변자본 즉 인건비에 의한 요소 역시 물가에 비례한다.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왜 물가가 비싼지를 생각하면 불변자본에 의한 상품구매비가 올라가고, 그 이유는 부동산의 증가다. 게다가 물가가 오르면 인건비도 올라가게 된다. 자신들이 이용하는 상점가게를 운영하는 점장 및 관리자, 밑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그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그들의 월급이 어느 정도 충분하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수단을 유지하지 못하므로 상점의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집에 물가가 비싼 이유는 국가 내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그 계기를 만든 것은 각자의 개별적인 사사로운 이익추구, 즉 장 자크 루소가 말하는 <전체의지>로부터다. 게다가 사람들은 교육을 생각하여 학교나 학원을 골라 생각하는데, 학교가 생길려면 먼저 부지를 구매한다. 최근에 도시개발사업에선 기부채납으로 단지조성 시 학교부지를 지방자치단체에 기증한다고 하나, 그 비용의 전제가 사업자에겐 하나의 자본지출이다. 따라서 그 학교부지 내지 공공부지 역시 자신들의 수지계산에 집어 넣는다.


학원과 같은 경우 여기 역시 건물에 임대해야 하는데, 집값이 비싼 곳은 임대료가 비싸다. 그런 만큼 학원수강료가 올라간다. 그러면 일반 주민들은 아이들 학원비가 비싸서 고민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어디서부터 틀어졌을까? 물론 자신이 아닌 타인들의 이기심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정작 자신도 그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땅값에 의한 차익을 노리지 않는 것을 아쉬워 하고,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안타까워 보겠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면 누가 더 안타까워 해야할지 모를 일이다. 


지금의 자신에 의한 차익을 보겠으나 먼 미래 자신의 후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이가 1명이 아닌 2명 이상이라면 모두 커버할 수 있을까? 자신의 자식들은 잘 사는 집에 보낸다고 하는 계획도 좋지만, 그 상대방이 마음에 드는지 혹은 그 상대방의 가족들이 마음에 들지 생각해 볼 일이다. 개인적 이익이 합계인 전체의지가 만연한 사회에서 결국 당장은 손해보지 않는다는 착각에서 먼 미래는 더한 손해들이 닥쳐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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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대한민국을 보면 붕괴한던 이스터섬 같아요.부족장은 더 높은 석상을 세우며 끊임없이 자신의 위신을 높이려 하고, 부족민들은 굶주리다 서로 잡아먹는 카니발리즘까지 이르죠. 여기 저기서 벌어지는 사고도 그렇고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사건도 많아지는게 이스터 섬이 떠오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2-04 23:31   좋아요 0 | URL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에서 이스타섬의 멸망은 나무를 베어 결국 숲생태계가 없어져 맑은 물과 원목을 엎을 수 없고, 단백질 공급처인 동물들조차 숲이 없어 멸종하니 그야말로 최후의 카니발리즘, 식인축제죠.
우리는 먹는 것도 풍부한데, 사람들은 먹는 것보다 자본에 대해 카니발리즘을 하죠. 자본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차지 않으니 말이죠. 패배자들은 계속 분노사회로 이어지고, 폭력이 일어나고, <에밀>처럼 목을 매달 사람은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드는 자인데, 오히려 그런 자들이 큰 소리를 뻥뻥치니...코미디입니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 2 - Novel Engine
히로사키 류 글, 파세리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 1권을 이어 2권을 읽어보았다. 1권에선 신선하고 상당히 리얼리티한 요소가 반영되어 일반적인 라이트노벨과 다르다는 점이 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2권은 약간 설정이 조금 현실성을 고려했지만, 상황전개는 비현실로 가게 되었다. 물론 라이트노벨이란 장르가 경소설로서 재미 내지 오락을 제공하나 작품 배경이 현대 일본이라면 현대적인 요소가 당연히 반영된다. 상당히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주인공 타카시, 그러나 그 주변에 포진한 여자 인물들이 비현실적 설정 내지 혹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게 특성이다.


기본적으로 어머니가 40대 주부에서 상당량의 수명을 소모한 뒤로 17세가 되고, 할머니가 죽기 전에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17세 되었다. 유카는 집에서 나오지 않은 히키코모리고, 타카시의 여자친구인 메이코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뒤로 새어머니가 17교에 의탁한 여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권에서 17세의 타카시가 17세의 어머니, 할머니, 여자친구와 조우하게 된다. 바로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는 인간의 나이 17세가 과연 어떤 상황을 맞이하고, 자신의 삶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를 다룬다.


1권보다 2권에서 그런 점이 비현실적인 요소로 가는 것은 타카시 자체는 현실적 판단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나 주변인물들의 비현실적 상황과 현실적이지 못한 행동들이다. 유카의 방에 들어간 타카시는 유카가 다른 여자아이와 다른 방식으로 산다고 하나, 유카의 방이 어지러운 모습에서 쌓아둔 책 사이에 여동생과 오빠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책이 나온 것이다. 유카가 바로 친오빠인 타카시에 대한 오빠 여동생의 관계 이상으로 오빠를 원하는 것이 보인다.


1권에서 타카시의 어머니인 카즈미가 타카시에게 충고를 해준 내용이 있다. 만약 타카시의 성욕이 주체하지 못하여 그것이 유카에게 성적 욕망을 느낀다면 그것을 여동생이 아니라 본인인 어머니에게 해달라는 부분이다. 물론 타카시는 그럴 생각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겠지만, 작품 내에서 여동생 유카는 분명 타카시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점이다. 타카시에게 어린 시절 희미하게 아버지의 기억이 남아있지만, 유카에게 아버지의 기억이란 없다. 추억이 없는 것에서 유카에게 아버지는 단지 있었다고 여긴 인물이지 그 이상으로 다가올 수 없다.


타카시의 아버지가 죽고, 타카시의 할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할머니 와카바의 허전한 마음하고 유카가 느끼는 마음은 다르다. 그래서 유카에게 타카시는 오빠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아빠같은 인물이다. 타카시는 여전히 1권부터 그랬던 것처럼 2권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무리 어머니가 다시 17세로 되어 아이도로 활동하더라도 그가 일하는 이유는 가정형편이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카즈미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타카시와 유카에 대한 현실적인 경제문제부터다.


현실적 상황에 대한 비현실적인 상황전개가 이 작품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2권에서 어머니의 소속사 변경, 그리고 메이코가 그동안 계속 사이가 나쁜 새어머니 줄리아에 대한 사연은 조금 아쉽게 여겨진다. 이른바 문학이나 영화에서 사용되는 cliche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17세의 줄리아는 예전에 메이코의 아버지와 사랑하던 연인 사이다. 하지만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야기로 인해 비극적으로 이별한다.


메이코의 어머니가 죽고, 줄리아의 회사가 망해 다시 찾아온 지난날의 사랑에 대한 회한, 그런 와중에 불의의 사고로 다시 태어나던 줄리아, 1권에서 메이코의 시선이 2권에서 이런 방식으로 복선이 드러난 것이다. 비현실적인 조건이 너무 상투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해결한 점이 아쉬운 것이다. 물론 타카시가 보인 결단력과 행동은 작품 전개상 제목은 어머니가 메인으로 나오나, 어머니라는 명칭은 결국 카즈미가 어머니이기 위해 그 어머니로서 성립되어야 할 대상이 타카시다.


타카시의 어머니인 카즈미가 17세가 된 것처럼,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타카시로 시작하여 타카시로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평범한 모습에서 주변 상황은 비현실과 현실적이지 못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의 현실성과 타인이 비현실성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관계에서 상황정리는 너무 아깝다고 할까? 물론 타카시의 시선으로 보는 현실적 조건, 가정환경과 가족관계, 더구나 메이코의 상황은 그에게 계속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시선으로 보기보단 가족간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1권 리뷰 때도 생각했지만, 가족의 파편화와 재결집이란 모티브는 우리 일상과 아주 밀접하다. 현실에 대한 관찰은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제대로 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적 상황과 조건 그 자체가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현실의 상황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거나 또는 상황적인 요소로 보이는 것으로 리얼리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는 분명 비현실적인 상황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르 전개하나 그 이야기의 결론은 언제나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 라는 타카시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가족에 대한 인간의 마음은 어느 특별한 문화권이 아닌 이상,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17세 때 아버지와 사랑의 도피를 한 어머니, 17세 때 할아버지와 결혼한 할머니, 그들의 17세는 지금 타카시의 17세와 다르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은 분명 비현실적일지라도, 타카시가 살아가고 있는 17세의 현실은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나, 2권에서 보이는 것은 당신의 17세는 누군가 진심으로 사랑했었는가? 라는 것이다. 타카시가 바라본 17세라는 시기란 사랑이란 이름으로 맺어진 연인과 가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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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앞 민박집)

 

최근 들어 루소의 서적들을 계속 읽다가 루소가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탄생했고, 그의 저서 중에 <사회계약론>이 1762년에 저술된 것을 알았다.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적이다. 왜냐하면 로베스피에르나 당통과 같은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의 시대정신이 되어준 도서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정신으로서 루소가 저술한 <사회계약론>이 나올 쯤에 한국에서도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탄생한다.

 

 

(다산초당 앞 다신계 찻집 주치장)

 

그분의 이름은 정약용, 본래 그의 호가 다산(茶山)이라고 하나, 사실 사암(俟菴)으로 사용되었다. 어릴 적에 부르던 이름은 귀농(歸農)이라고 했고, 미용(美庸)이라 했다. 귀농이 된 이유는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란 선비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채 배고픔과 갈증으로 죽은 사건으로 인해 시골로 귀향했으며, 이때 정약용 선생이 탄생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배경은 영조시대로 서인들 중에서 특히 노론(老論)이란 벽파가 득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 역시 노론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서다.

 

(다산초당 앞 민박집)

 

어린 시절 영조 아래서 자라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슴깊이 원한을 감추고, 언제나 자신의 암살하려는 자의 위협때문에 새벽닭이 울면 잠이 들었다고 한다. 영조 역시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에 대한 후회로 살아왔으며, 그 자신도 후궁의 자식이란 당시 사대부사회에 대해 환멸과 동시에 권위를 찾으려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벌하려고 할 때 조선 3대 명정승인 채제공 선생이 영조의 옷자락을 붙잡고 사도세자의 구명을 간절히 바랬으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며 머리를 숙인 채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다산초당 주인 윤단의 후손이 운영하는 다신계 찻집)

 

물론 사도세자는 그렇게 죽었으나 채제공은 정조의 신임을 받고 정약용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으며, 정약용의 탁월한 후원자였다. 정약용은 정치적은 남인(南人)이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시파였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시대 철학자이며 사상가이면서도 실학자인 성호학파의 후예였다. 정약용 선생은 성호선생을 평생 존경했으며, 성호라는 호수 위에 다산학이란 큰 학문을 펼쳤다. 한국의 철학사상에서 모든 것은 다산 정약용에 의해 모아진다고 했으니 그 얼마나 큰 영향을 준 인물인가?

 

(다산초당 앞 민박집,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 다산의 자가 귀농인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가? 또한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절에 천연두가 만발했기에 정약용 선생 역시 천연두를 앓았고, 그 후유증으로 이마에 점이 생겨 미용이란 이름이 생겼다. 정약용의 그런 험난한 조선시대 후기에서 정조는 조선군주의 최후의 명군이었다. 학문과 무예를 중시하고, 권력의 암흑에서 백성들의 도탄으로부터 지켜내려 했다. 나는 아직도 이계심 사건을 잊을 수 없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친구 윤서유의 집 안내표지판)

 

정약용 선생이 어느 시골고을의 판관이 되어 부임하는 길에 정약용 앞에 어느 사내가 길을 막았다. 그는 이계심이란 사람으로 정약용 선생이 오기 전에 판관에게 항의를 하던 주동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으로 보면 반국가적 인물이었으며, 운이 좋지 않으면 참수형에 효시까지 당할 수 있었다. 그가 목숨걸고 정약용 선생 앞에 나와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조목 10가지를 보여주며, 울분을 토했다. 정약용 선생은 이계심에게 오라를 하지 말라 지시하며 그를 옆에 걷게 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문제점을 다 해결해주었고,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며 만세 불렀다고 한다.

 

(명발당, 밝음이 시작하는 장소)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일화나 이야기를 듣거나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짠한 느낌이 든다. 물론 이계심이 아니더라도 그가 하려던 정치의 근본, 즉 백성이란 점 백성이 있기에 국가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시기와 질투 그리고 파괴의 조짐이 왔다. 정약용 선생은 기본적으로 성호학파였고, 그 중에서 급진적인 편이었다. 만천 이승훈, 광암 이벽, 선암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성인으로 모실 정도로 큰 업적을 가졌다.

 

(명발당)

 

문제의 시초는 1791년 정약용의 이종사촌인 윤지충과 그의 사촌이 윤지충의 모친상에서 신주를 불사르는 죄로 참수가 되는 일이 생겼다. 당시 윤지충의 가계에서 조선 중기 문신인 고산 윤선도가 있었다. 노론세력에서 고산 윤선도는 최강의 적이었다. 예송논쟁에서 노론 거두 우암 송시열과 말다툼하여 귀양살이를 밥먹듯이 한 윤선도의 후예는 노론 입장에서 반드시 칠 적이었다. 그날의 사건으로 한국천주교회사의 한국의 천주교성인 목록은 생성되었으나, 당시 그 집안은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명발당)

 

그 윤지충의 목이 잘린 곳에 현재 전주 정동성당이 위치해있다. 웃긴 점은 그의 친계의 조상인 고산 윤선도가 태어난 곳은 서울 명례방으로 현재 명동성당이 위치해있다. 그의 후손들은 해남 연동리 비파숲 아래 녹우당이란 가채로 이어져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천주교박해는 신해사옥과 더불어 1800년 정조의 승하, 1801년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로 이어진다. 정약용은 신해사옥 이후 천주교에 대해 마음을 버렸으나, 그것이 평생 자신의 꼬리를 붙잡아 따라 다녔다.

 

 (시조, 매조도)

 

그의 주변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신유사옥과 황사역백서로 주변 친구와 친척들은 사문난적으로 되어 목이 잘리거나 귀양가거나 영영 볼 수 없는 운명의 길에서 사라졌다. 그의 귀양은 18년, 경북 장기현으로 하여 강진으로 올때까지 외로움과 괴로움의 나날이었다. 다산초당은 귀양살이 후에 한참 뒤에 올라간 곳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윤서유 역시 신유사옥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 그렇지만 시간은 서로간의 마음을 녹이고, 정약용이 아무런 해가 없음은 강진 마을주민들이 알게된다.

 

 이때 정약용의 외갓집의 일가가 다산초당으로 모신다. 그리고 귀향살이에서 한국의 문학, 사상, 철학, 의학, 경제학, 법학 등 모든 다산학의 시작이 이제 빛을 본 것이다. 유배지에서 그가 한 업적은 동양 한문학권에서 대단한 발전을 미쳤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귀양살이는 풀어날 기미도 없으며, 그런 와중에 자신의 막내아이가 죽는 변도 당한다. 귀향 후에도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자들도 여전했으며, 그를 예전에 아주 괴롭히던 자가 이제는 마치 안부를 물어 잘 지내냐고 묻는다.

 

조선의 천주교의 도래에서 메시아주의로 인한 피의 분출에서 정약용은 평생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형인 정약종은 신유사옥에 죽어도, 그의 후손 역시 정약종에 따라 죽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한국의 메카시즘이란 공포 역시 다른 형태로 핍박하는 형태를 볼 수 있다. 정약용의 일대에서 유배지의 모습은 인상깊다. 애절양이란 시를 보면서 당시의 농민이나 혹은 남근을 스스로 베지 않아도 의미가 없는 현대사회의 청년들의 모습이 서로 겹쳐 보인다. 

 

예전에 내가 대학을 다닐 적에 천주교재단의 소속이었는데, 그곳에서 다도동아리 회장 활동을 했다. 학교 뒤에 수녀원엔 다도를 하신 수녀님도 계셨다. 그런다고 내가 천주교를 믿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전통사상인 무속신화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래서 신화학에 대한 도서를 읽어보면서 신화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이래저래 보고 있는 것이다. 차문화에 대한 인물로서 조선시대 정약용,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딱히 차를 발전보단 차로서 어떻게 인물들이 서로 문화를 교류했는가이다. 아직도 백련사와 다산초당은 귤동마을에 위치해있다. 귤동마을은 당시 귤이 어느곳에서 안나오고 제주에서 나오나, 강진 귤동마을에서 나오고, 그 귤동마을에 야생차가 많이 서식하여 다산이라 불렀다. 자연의 정취를 좋아하는 정약용 선생이 그래서 다산이란 호를 사용했다. 

 

예전에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절 초당은 초갓집이었다. 60년 전만 해도 그랬는데, 보수와 화재의 문제로 기왓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초당은 아직도 귤동마을의 선비인 윤단이란 사람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 그의 후손은 정약용 선생이 좋아한 다산의 야생차를 달아 만드는 일을 하고 찻집 다신계를 운영중이다. 예전에 맛본 적이 있는데 참 맛있었다. 은은한 녹차의 향이 울려퍼지는 정약용 선생의 마음이 우리 사회에 들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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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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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블로그 활동을 하다가 이웃 분의 포스팅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때 포스팅 하던 주제는 서울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인상파 화가 전시회였다. 이때 전시회 주제에서 메인 그림으로 소개된 그림이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검은 장갑에 양산을 잡고 멀리 떠나는 배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이탈리아 인상파 화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에서 <작별>이란 그림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의상에서 느껴지는 색의 미학도 그러하나 작은 손에 잡힌 양산, 게다가 살짝 접힌 손가락, 얼굴은 옆에 뺨만 보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상당한 품위를 가진 우아한 여성이란 것을 알게 해준다.

특히 등을 반득하게 피며, 검은 여기를 내뿜는 배를 바라보는 그 여성의 눈가에선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마 떠나보낸 사람은 사랑하는 남자인 것 같았다. 그녀의 손에 잡힌 양산이 그런 것 같았다. 뾰쪽한 것을 잡은 여성의 손, 그것은 아마 남성의 상징인 남근인 것처럼, 사랑하는 남자를 태운 배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들을 이래저래 살펴보다, 그 아름다운 선과 색, 그리고 따뜻한 색감들은 나에게 큰 인상을 건네주었다. 미술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없다. 단지 그림을 처음 보며 로코코의 탐미주의적인 요소의 여성도 보이고, 고전주의적인 의상을 입은 여성도 보인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그려진 여성들은 대부분 우아한 아우라를 내뿜는다.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동기는 그의 작품 중에 <꿈>이란 그림이 있다. 어느 한 여성이 벤치에 책을 올린 채 정면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은 없고, 단지 지금 나의 고독인지 혹은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의 드레스와 장갑에서 보이는 우아한 몸짓에서 어떤 생각에 골몰히 빠져 있는 그녀의 모습은 낯선 거리감과 동시에 상당한 매력이 넘친다. 책을 읽는 여자의 느낌인가?

이 그림이 새겨진 어느 신문기사에서 나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란 소개를 받으면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의 겉표지는 에스파냐 출신 화가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의 <무도회 이후>라는 작품이었다. 무도회에 권력과 재력이 있는 속물적인 인간들 사이에 있기보단 차라리 자신의 침실에서 조용히 책을 잡는 여자의 모습은 매우 도발적이면서 자신만의 공간을 찾으려 한다. 물론 그 기사의 소개에 나온 사진으로 매릴린 먼로가 아주 관능미가 넘치는 육체인 상태에서 책을 읽는 것도 있으며, 역시 내가 이끌린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꿈>이 있다. 개인적으로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분수 곁에서의 기다림>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읽는 것은 책을 읽는 여자에 대한 책이다. 개인적 취향보다 소중하지만,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를 읽으면서 생각 드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여성에 대한 느낌이다. 우리 사회에서 책이란 흔한 물건 중에 하나였지만, 19세기까지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은 흔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에 따라 인쇄술이 대량생산과 대량판매로 인해 유통되었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부류도 대다수의 대중보단 오히려 시간적 여유가 있던 중산층 이상의 부류였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20세기 이전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성들은 대다수 어느 정도 경제적 지위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가능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자본>을 본 것처럼 가난한 여성 아니 가난한 남성 그 모든 사람들이 일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으로 정착되던 시기는 아직 130년도 되지 않았다. 독서를 하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에서 사색을 하는 공간이다. 그 자리에서 정신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경제적 조건, 시간적 여유, 공간적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런 조건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다. 물론 이것조차도 호혜일 수 있다.

여자들이 왜 책을 읽으면 위험한가? 책에는 각종 지식이 담겨있고, 인간의 사유를 넓혀 준다. 고대사회부터 중세사회까지 글을 읽고 쓰는 것은 권력계층이 가진 특권이었다. 즉 인간의 언어를 입으로 말하는 것은 가능해도 글로서 쓰고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식으로 얼마든지 현실의 문제를 알 수 있었고, 자신의 통치를 해주는 관리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지식이 대다수 민중에게 퍼지는 순간, 부당한 현실에 반항하고 지배계층에 의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민중 특히 여성에게 책은 금물의 대상이었다.

오직 볼 수 있는 것은 성경과 신학서적, 그것은 당시 중세유럽에선 신앙이 정치적인 제도와 권력을 좌우했기 때문에 종교와 신학에 대한 이념은 결국 지배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더 강력하게 해주는 장치인 셈이다. 만약 여기에 정치학과 사회적, 그 밖에 많은 서적들을 여자들이 읽는다면? 남성과 똑같은 수준의 지성과 이성이 생기는 것이다. 작가인 슈테판 볼만은 이런 점을 잘 지적했고, 특히나 동양에서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실천한 이유도 진시황 자신의 통치방법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당대 지식인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지식인들이 없어지면 자신의 정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없어지고, 책까지 불태우면 앞으로 반대할 사람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책을 읽는 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얻음으로서 현실의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는 시민 내지 지식인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아쉽게도 그런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은 권력을 지닌 남성이었다. 가난한 농민과 여성들은 뒷전이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대다수 사람들 혹은 지나치게 민감한 여성들은 남녀차별로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더 나아가 계급에 대한 차별이었다.

그런 차별이 점점 와해되어 가던 시기가 바로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부터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혹은 근대사상과 근대정치의 틀을 만든 것이 프랑스대혁명이다. 전 근대적인 봉건왕조시대를 넘어 이제 다른 정치체가 열린 것이다. 이때 프랑스대혁명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보수보다 급진까지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들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자크 루소를 존경했고, 그의 저서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국민공회와 헌법체계를 만든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루소의 서적인 <사회계약론> 이전에 유명한 서적으로 <신 엘로이즈> 또는 <줄리>라는 서적이 있었다.

낭만주의 문학이 도래하고, 루소를 이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열광적인 사랑과 더불어 시대적 문제를 공격한 위험한 책이었다. 귀족이나 혹은 상류계급의 여성과 그녀를 사모하는 계층이 남자의 사랑은 낭만적으로 다루었으며, 끝내 이루지 못해 영원한 이별로 긴 여행을 가거나 때로는 베르테르처럼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눈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는 당시 귀족이나 상류여성 또는 막 태어난 지식인 여성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프랑스대혁명 여걸 롤랑 부인 역시 귀족의 아내지만, 루소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그 외에 수많은 여성들이 루소의 책에 흠모를 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19세기 자본주의가 진행되던 시기 책을 읽은 시간과 여유가 부족했다면 18세기까지 책 그 자체가 귀했다.

책을 생산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고, 그 책을 얻을 수 있는 경로 자체가 한정적이니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곧 특권이었다. 책을 소장하는 것은 곧 그의 지식의 보고이며, 또한 그의 지식은 권력이기도 하다. 어떤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지식이 없으면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 소설의 등장과 보급은 엄청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처음 보고 놀랐지만, 18세기 전후로 책 1권이 보통 가족들이 2주 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치란 점에서 책이 귀하고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단 번에 알았다. 하지만 이제 책은 점점 보급되면서 우리 일상생활에 녹아들어가게 된다. 여성들은 처음에 내부 활동만 하게 되면서 순종적인 인생을 강요받다 어느 순간 그 내부 생활에서 책으로 통한 여가생활을 가지게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존 지배계급과 그 지배계급에 의해 다시 여성을 지배하는 (권력층)남성과 남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책 읽는 여자가 위험한 이유는 아마 그런 기존의 이념에 순응적으로 따라가는 여성이 아니라 거기에서 탈피하거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려는 의지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책을 읽는 여성들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자신으로서 있는 모습이 많다. 곧 나는 나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의지와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후기에도 그런 진보적인 남녀관계에서 추천의 글을 남긴 문학가 엘케 하이덴라이히는 여성의 자율적인 인간을 완성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여자들은 표지의 글처럼 책과 나 사이에 당신이 들어올 빈 자리가 없다고 하나, 막상 그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추천의 글을 남긴 엘케 여사의 글을 보면 책을 읽는 여자는 남성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성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근대사회나 근대사회에서나 남녀의 결혼문화에서 여성에게 결정권은 없었고, 그저 시대의 도덕에 따라 흘러간다. 이제는 그녀들이 선택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이 책을 처음 소개받은 기사에선 이 말이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책 읽는 여자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녀들은 좀 더 영리해지는 것도, 이기적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이여, 나이가 들수록 여자로부터 고립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한 권의 책이 돼야 한다. 여자들은 내 남자가 아직도 읽을 게 있는 책이기를 원한다.”

책을 읽는 여자들은 결국 책을 읽는 남자, 아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남자를 원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공유하고, 책으로 혹은 자신의 판단으로 얻은 그 무언가를 서로 나눌 수 있을 때 뭔가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잘 지적하다시피 21세기 시대는 영상의 시대다. 문자문화의 이전 시대는 종교의 관념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지배했지만, 다시 이제 이미지의 세계가 인간의 관념을 지배한다. 그런 와중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속의 흐름에 부유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자신의 항로를 찾아가는 사람일 수 있다.

확실히 밖에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는 여자들은 뭔가 색다름이 있어 보인다. 물론 책이라고 하여 수험서 내지 교과서, 자기계발서 같은 단순히 자기의 이익을 위한 책까지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양식, 당장 돈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찾아 자신만의 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런 매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개성이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이 중요한 것 같다. TV 내지 미디어로 익숙한 삶을 살게 된 현대인들은 도저히 각자의 개성을 알 수 없다. 흔히 미팅이나 또는 모임자리에 가면 대다수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들이 가진 공감대가 잘 형성된다.

왜냐하면 항상 인기 있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이제 막 개봉한 영화를 대형극장가에서 보고, 어제 재미있는 쇼 프로그램을 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은 같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문제는 거의 대다수가 같은 것을 돌고 돌며 이야기하기에 때문에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이야기의 형태는 다르게 진행되어도 결론은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후크 송처럼 들린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취향을 읽거나 혹은 새로운 재미를 찾아 다른 분야의 서적도 읽어본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해보았다. 최근에 읽어본 <서재에 살다>라는 책은 19세기 조선시대 북학파 및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인생과 업적 그리고 서재에 대해 다룬다. 이때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에 전시된 것을 알았고, 간송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다. 지방에 거주하는 내가 서울 쪽에 세미나 참석 후에 잠시 성북동 일원을 거닐고 있을 때 옆에 있었던 분이 이야기해 준 것이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로 통해 새로운 문화와 가치 그리고 다른 재미와 세계를 찾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독서모임 때 새로운 지식과 이야기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로 인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며, 서로 공감도 하기도 하나, 때로는 전혀 다른 반응이 오기도 한다. 그런 타인과 공감과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매력이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성이 있다면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이질적인 존재 즉 책 제목처럼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로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책을 읽지 않는 여자들이 사는 세계는 더욱 위험하다”라고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세상의 물결을 무시하지 못하지만,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남겨둠으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다. 그런 선택을 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을 그저 그래 다루지 않는다. 그 남자가 언제나 한 권의 책이 된다면 자신의 선택지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고, 그것이 그녀들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성욕을 가진 존재다. 프로이트가 남자들은 성욕에 빠진 존재라고 하듯이 나 역시 남자라서 성욕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남자로 태어나 성욕을 가진 평범한 남자라도 여자에 대해 생각하면 성욕의 대상으로 살 수는 없다. 물리적으로 체력의 한계가 있고,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욕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가진 상대만이 정신적이나 육체적인 사랑을 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인간은 한가로움을 추구해도 지루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내가 보통 TV나 유행에 쫓는 여자들에 대해 눈이 갈 수 없는 것은 내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들과 있으면 언제나 지루한 기분만 느낄 것이다. 책을 읽지 않은 여자들만 있는 세계가 위험한 이유는 나라면 그 세계는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라 말할 것이다. 그런 지루함 세계에 있는 여자들은 성과 이름, 얼굴과 형태만 다를 뿐 그 속은 어느 누구 하랄 것 없이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책을 소개해준 분은 분명 여성인 것 같았다. 내가 이 책을 소개해준 것에 대한 소감을 덧글로 남길 때 그분이 나에게 답변내용으로 “요즘은 정말 지성과 감성이 이성이 고루 분배된 여인은 드물죠, 그림도 그렇고. 문학 속 인물들 그렇고, 살기가 바빠서 라고 탓하면서” 말이다. 물론 여기에 기본적인 품위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이란 게 개인적인 소망이다.

 

어째든 책을 읽는 여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그녀들이 위험하다고 하나, 그녀들이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위험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은 자신만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는 정신적인 교감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남자들이 단순히 그녀들을 보는 시선에서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파울로와 프란체스코>처럼 있기보단 차라리 그녀의 손에 든 책에 대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그녀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이 될 듯하다. 물론 이 시대는 그런 그녀들이 존재하게 해주는 것이 정말 힘든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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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통해 주루룩 여성들을 감상용으로 보는 시점이 묘하기도 한데, 아름다운 걸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마릴린 먼로 책 읽는 사진 종종 보게 되면 들고 있는 책이 또 화제 아니겠습니까? 아니, 조이스 <율리시즈> 의식의 흐름을 저렇게 탐독하면서 읽을 수 있다니! 거의 다 읽었기까지! 여기 올려진 사진도 거의 막장 페이지가 보이려 하잖아요ㅎ...마릴린 먼로가 무슨 책들을 읽었나 평전이 읽고 싶어질 정도 ㅎㅎ

만화애니비평 2015-01-21 23:13   좋아요 0 | URL
저도 먼로가 저런 책을 읽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했습니다. 육체적 미, 즉 남성의 눈을 자극하는 글래머에 저런 지적인 매력이라니..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묘한 게 좋습니다. 오덕의 특성상..후후후

AgalmA 2015-01-2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묘한 걸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요ㅎ
간송미술관 성북에 있을 땐 일년에 딱 두번 일주일밖에 개방이 안되는 데다 건물도 일제시대 건물이었나 해서 괴상했죠. 그림을 무슨 죄수들 감옥 들어가듯이 줄줄이 보는 희한한 상황이었는데 ㅎ 동대문 상설관이 생기니 여유부리며 더 안가게 된다는 함정 ㅎ;
김홍도<미인도>를 아직 실물로 못봐서 간송전시는 늘 눈여겨보긴 합니다. 모사로 그린 실물크기액자만 봐도 모나리자 저리 가랄 아우라예요.
서울 오시면 이제 간송미술관 편하게 보시겠네요~

만화애니비평 2015-01-21 23:41   좋아요 0 | URL
요새 미디어는 그랗게 만들죠?
간송은 성북동 지나가면서 본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죠. 서울은 진짜 볼 게 많아 놀랬습니다. 부산에 살면 서울 사람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들이 있지만, 문화적 공간이 부족하죠. 저 같은 특이종자는 아무래도

예전에 서울에 페루애님과 막걸리 마신 적이 있는데, 다음 기회에 동대문 체크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전시보단 제가 남도에서 해남 윤선도 녹우당, 강진 정약용의 다산초당, 정약용의 외손자 방산 윤정기가 기거한 명발당도 가봤는데, 역시 실제 보는 게 좋죠.
다산초당에서 바라보는 강진포구....참...좋죠...

AgalmA 2015-01-22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저 위 기사 ˝남자들이여, ... 여자들은 내 남자가 아직도 읽을 게 있는 책이기를 원한다.˝ 작성 글은 매우 편협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권신장이 많이 돼 그것에 대한 비꼼과 비굴함도 느껴지거니와 기사니 만큼 다분히 선동적인 부분을 포함할 수 밖에 없겠지만 무자르듯이 그렇게 일반화시킬 부분이 아닙니다. 프로이트의 업적 인정하긴 하지만 가장 큰 패악 중 하나가 인류문화에 남성/여성 이분법을 더욱 고착화시켰다는 겁니다. 융이 왜 갈라섰는지 이해할만 했죠. 우산, 파이프 ... 비슷한 모양새만 나오면 너무들 쉽게 남근이라 말하지만 사실 당시의 복장문화부터 따져봐야하지 않을까요. 그 그림이 그려졌을 때 작가는 프로이트 시대였나도 중요한 문제죠. 도상학적으로 그림에 그러한 배치 문화가 있었다는 것도 저도 알지만 프로이트 이론확립 후 모든 기표들을 성적잣대화하려는 경향이 너무 심합니다. 그러한 인식이나 교육이 저변화됨으로서 그것이 또한 역으로 더깊은 무의식화 과정을 밟습니다. 인간의 연상작용이 얼마나 쉬우면서도 편파적인지 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학습된 삶으로 삶을 재단하는 또다른 폐단을 만들 수 있는 거죠. 진화가 진보가 아닌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되도록 사실을 더 거론하되 제가 깊이 검증하지 않은 걸 섣불리 일반화하지 않으려 조심합니다. 거론할 때조차도 누차 검증하려 하고요. 다들 너무 쉽게 담론화 만들지만 사상의 자유 추구라는 명목하에 사회 갈등과 편견의 양산은 아닌지 모든 지식인은 경계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말은, 상대가 그 합을 찾게 만들어야지 내 말을 진짜로 믿게 만드는 답이자 끝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22 09:19   좋아요 0 | URL
우선 답글 전에 제 블로그에 가보면 ˝Das Kapital˝ 자본 오리지널이 있습니다. 1987년 이론과 실천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서적인데, 당시 강신준 교수님이 다른 분과 같이 공역했죠. 한국 최초의 자본 번역서라고 하더군요. 당시 검찰에 고소당했는데, 검사가 이 책을 보고 그냥 풀어주었다고 하던데(어려운 도서이니)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총 9권의 책 중에서 3권을 구했죠. 지금은 5000원에 파나, 앞으로 저 책의 가격은 엄청 비싸지겠죠? 한국 인문학 도서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이니깐요.

http://tomanderson.blog.me/220149863532

아무튼 저는 일단 남성이고, 아갈마님은 여성이시겠죠? 모르겠습니다. 일단 신문기사 내용은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732645&cp=du

같네요.

프로이트에 대한 해석은 제 개인적이고, 우선 이분법적인 요소로 통해 남녀의 차별문제를 인류학적 영역에서 상당히 공격을 많이 하는 부분이죠. 양산이란 이미지 상의 배치가 단순히 그 당시의 복장에 대한 흐름으로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남자)라는 것으로 전 생각했죠. 차라리 우산을 편 채 2~3명의 여자가 있었으면 그저 양산은 악세사리나 생활용품의 기능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유라는 것, 정말 자유란 소중하나, 그 자유가 이성이 없으면 자유로 볼 수 없다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생각나는군요. 편파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은 인간 누구에게 있고, 그 편파적인 요소가 업다고 믿는 것보다 차라리 있을 수 있으니 그것에 대해 망각하고, 혹은 지나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아갈마님의 조언은 여러모로 좋은 의견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죠. 제 자신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이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거나, 약속시간을 정해놓고 지키지 않으면 물론 이 부분에선 강요하겠지만요.~

AgalmA 2015-01-2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요는 아닙니다. 공격도 아니고요. 제 말투가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늘 그 때문에 사과를 하곤 합니다; 저는 혹시 놓치고 계신 부분은 없으신가 염려가 되었습니다. 푸념이나 일상대화의 글을 쓰시는 게 아니니 더더욱.
이성 또한 오류에 빠지기 쉬우므로 그 자유 또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 현재 제 생각입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저도 압니다. 종종 갔었죠. 이젠 없어졌다고 들은 거 같은데. 비싸지겠다는 말씀은 왜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인문학의 책임감을 앞으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서보다 사람의 가치가 더 덧없는 세월이라서 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22 13:56   좋아요 0 | URL
제 답글에 아갈마님에 대해 강요나 공격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지나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의견을 주신 것이 좋다고 한 것입니다.,,아하하하...
보수동 책방골목 규모가 예전보다 많이 적어지게 되었죠.
이론과 실천에서 판매된 도서가 이젠 나오지 않고, 설사 있더라도 완전한 세트가 아니라 분리되었으니 언젠가 마르크스 서적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아마 먼 미래가 되겠지만) 물론 저는 팔지 않겠지만요.

AgalmA 2015-01-22 14:46   좋아요 0 | URL
걱정했는데 그리 말씀해주시니 다행입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없어지면 안되는데...그나마 유지된다니 그것도 다행입니다.
이론과 실천 좋은 책 많았었는데 그리 되었군요.
링크는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드래곤X프린세스X블레이드 1 - Seed Novel
오버정우기 지음, 보라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

 

 

(안젤리카를 구하는 로저)

 

 

이 작품을 보기 전에 먼저 제목과 프롤로그의 시놉시스를 보는 순간 나는 어떤 그림이 생각났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영웅 페르세우스가 바다의 괴물로부터 안드로메다를 구출할 때를 말이다. 그 이유는 그 괴물은 바로 바다의 용이고, 페르세우스가 영웅이라고 하나 이번에 읽어본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를 구출하기 위해 긴 창으로 용을 꿰뚫고, 이에 용은 쓰러진다. 하지만 신화에서 등장하는 안드로메다의 표정은 기쁨보다 조금 허무한 심정으로 페르세우스를 바라보고 있다.

 

또 다른 그림으로 페르세우스 신화에 등장하는 모티브와 유사한 그림인 안젤리카를 구하는 로저역시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와 유사한 상황이 보인다. 기본적인 판단력에서 요구되는 것은 이 작품에서 영웅은 남성, 구출되는 대상은 여성, 타도되는 대상은 용이다. 그러나 잘 알아야 할 것은 영웅의 복장이다. 로저의 복장은 중세 기사의 갑주이고, 페르세우스는 고대 그리스 장수의 복장이다. 페르세우스 복장이 결국 그리스 문화, 그 문화는 철기문화이고, 그리스 문화에서 산업체계는 노예제를 이용한 농경사회다.

 

폴리스국가를 이루던 그리스는 10%의 남성만이 정치적 의결권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점을 미루어 보면 용의 퇴치는 남성중심 정치사회를 완전한 구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용의 존재는 여성으로서 이미 몰락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일 중요한 신은 제우스다. 그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쫓고 헤라와 결혼하여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런 제우스에 대한 연구에서 그의 딸인 아프로디테, 즉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로 들어가면, 비너스의 어머니는 메티스로 바다의 여신이다. 그 여신은 본래 뱀 내지 용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뱀과 용은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페르세우스의 긴 창은 단순히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으로 들어가면 여성의 첫 순결을 뺏는 남근이 되는 셈이다.

 

그런 신화적 요건에서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가 과연 어느 방식으로 갈지 궁금해서 책을 구매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본래 생각하던 안드로메다와 페르세우스 신화하고 조금 거리가 있었다. 드래곤이란 부족이 여성으로 이루어진 부족이라면 좋았을 것인데, 아쉽게도 주인공 히로인 밀레니아는 용왕의 딸인 황녀이었고, 그의 용약의 계약자는 리온이란 드래곤 슬레이어 일족이었다. 용과 인간의 전투에서 안드로메다의 페르세우스의 결투는 남성과 여성의 주도권을 다투는 과정에 남성의 승리였다면, 만약 이런 신화적 요소가 여성이라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또한 환상문학과 많이 연결된 라이트노벨에서 흥미와 재미로 이끌어 가면 어떤 결과로 나올지 생각해보았다.

 

작가는 라이트노벨을 작성하면서 북구신화에서 많은 모티브를 삼았고, 주인공이 드래곤 슬레이어였다면 신화적인 요소를 빌어 현대적인 감각으로 살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신화란 우리 현대인에게 낯선 것일지 모르나, 신화는 집단적인 무의식의 표출이라 볼 수 있다. 어딘가 다르나 각국의 신화는 조금씩 유사한 요소가 많은 것이다. 게다가 신화란 우리 현대인에게 환상이겠지만, 신화는 옛날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서 역사인 셈이다. 그리스에서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위해 축가를 불렀다.

 

그의 영원한 죽음과 삶이 반복되는 점에서 말이다. 북구신화와 그리스신화에서 차이점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신들의 의상과 무기, 타도대상에서 유사한 점이 많았다. 신화가 역사인 옛날, 신화가 환상인 지금에서 현대인에게 신화와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지는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다. 라이트노벨을 토대로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 역시 그렇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최초의 서사는 신화고, 현재 최근에 만들어진 서사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서 근본적으로 인간이 드러내는 욕망에 대한 심리적 근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를 보면서 위의 맥락에 충족되지 않은 것은 분명 필자 개인적으로 아쉽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을 보면서 나름 만족했다. 드래곤이란 소재, 검사의 소재, 그리고 불완전한 소년의 등장에서 많은 cliche를 공유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름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고, 복선 설정 역시 억지로 불어넣지 않았다. 작가가 만든 세계관에서 나름 충실하게 반영되었고, 용인전쟁에서 패배한 인간에게 현재 우리 지구의 중심은 인간이나,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에선 용이 중심이다.

 

세계의 중심이 용이라면 그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에 빠지는 것인가? 게다가 최근 일본에서 방영한 라이트노벨 원작의 애니메이션 <성각의 용기사>와 비교해보면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의 흐름이 훨씬 부드럽고, <성각의 용기사>에서 용기사와 용에 대한 모험이나 그 속내는 하렘장르란 한계성에 갇히나,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는 연애적 요소를 크게 부각하기 보단 하나의 보조적인 역할로 설정했다. 그런 점은 작가가 작품에서 서사를 얼마나 잘 전개하는가에서 독자로 하여금 재미와 흥미를 줄 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생각에서 불평등에 대해 생각했는데, 인간은 불평등은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나이, 민족, 성별에 의한 선천적 불평등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차별에 의한 후천적 불평등이다.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에서 용과 인간의 불평등은 바로 선천적 불평등, 즉 선천적인 불평등이다. 황녀 밀레니아는 다른 용과 다르게 인간에게 매우 관대한 자세를 보인다. 불평등의 차이에서 오히려 상대방과 자신의 존재가 다른 것을 알기에 그런 판단이 가능하다.

 

작품 내에서 다른 용과 계약으로 하나의 우월성을 얻는 자들은 오히려 후천적인 요소에 강하다. 그것은 서로 간의 계약, 사회적 계약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용인전쟁에서 승리한 용의 지배권에 인간과 용의 평등관계를 강요하는 것이나 혹은 그 이전의 불평등을 강요하는 것이나 모두 지배권자의 논리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논리가 논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윤리라는 가치가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밀레이나의 그의 의지, 그녀가 가진 각오, 드래곤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진 리온은 과연 그녀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보면 나름 잘 풀어나갔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과 용이 서로 다르지만, 밀레니아는 항상 나는 나이고, 내가 아닌 다른 드래곤은 나하고 같은 대상으로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상당히 작품에서 실존주의적인 요소가 강하게 풍긴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명확한 인식에 대한 발언은 어느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 자체로서 봐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드래곤 황녀인 밀레니아가 아니라 리온의 친구인 밀레니아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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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1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 무의식이라 할 때 아담-뱀-이브 / 전사 혹은 왕자-용-여자 이 구도는 어떤 연결점이 있을지요?

만화애니비평 2015-01-21 16:41   좋아요 0 | URL
제 개임적으로 뱀에 대한 여성적 상징성을 부정적으로 몰아넣는 것이 예상됩니다. 예전에 마빈 해리스의 서적을 보면 남성의 무의식에 의해 조성된 (문명적 폭력) 것이기보단 문화에 의해 조성된 남성의 것이라고 보더군요.
에덴동산의 뱀은 욕망을 말하고 금기를 어기는 존재로 나오듯이 문명화 된 국가사회에선 여자의 행동을 배제하려는 남성의 심리가 아닌가 합니다.

AgalmA 2015-01-21 16:51   좋아요 0 | URL
음. 남성적 문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기도 하겠군요. 답변이 엄청 빨리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21 16:55   좋아요 0 | URL
사무실에 컴 앞에 있으면, 메일로 바로 알림이 오거든요(아니 알라딘 북플로도).
예전에 제우스, 아프로디테, 메티스에 대한 페미니즘 분석을 귀동냥하면서 신화적인 요소와 인류학(히즈 스토리)에 대한 서적을 보면서 정리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