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엘로이즈 1 루소전집 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책세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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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에서 로맨스는 존재하지만, 낭만주의적 요소는 없다. 그 이유는 연애소설에는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동경하며 정서, 감정, 개성 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단지 자신들만의 사랑만을 중요하게 나둔다. “우리 사랑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를 말이다. 하지만 낭만주의 소설에서도 “우리 사랑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에서 우리 사랑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 사랑이란 이름 앞에 더 막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이 존재한다. 연애소설은 자신들의 연애에 대한 자유이지, 그 이상의 자유는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20세기 자본주의 정착 이후 21세기에도 그런 관점은 유효하다. 사랑이란 이름은 우리가 흔히 보는 TV 드라마나 영화, 혹은 그런 소설조차도 화려한 스펙타클로 가득하다. 사랑이란 이름은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미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력에 의해 좌우된다. 특히 드라마 연출이나 또는 가상결혼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이벤트성 고백이다. 그 고백의 성사는 단순히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개인이 마음이 하나의 물질적인 존재로 통해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로맨스라는 이름이 결국 이벤트의 크기, 즉 자본력의 동원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 모습들은 이미지가 매개로 되는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을 녹아 들어가며, 남녀 간의 사랑, 하다못해 사랑 아닌 개인적 의상과 취미 내지 취향조차 거기에 맞추어간다. 우리의 마음이란 과연 어디에 있고, 무엇을 향하여 가는가? 이런 21세기 대중문화에서 18세기 문학 <신 엘로이즈>는 당연히 색다른 모습일 것이다. <신 엘로이즈>를 읽기 전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괴테의 소설은 낭만주의 소설로서 베르테르가 아름다운 여인 로테를 사랑하지만, 끝내 이룰 수 없기에 권총자살로 막을 내린 비극적 소설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에 절망하는 베르테르, 친구에게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는 그의 슬픈 편지에서 단순히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낭만주의소설로서 사랑만을 논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런 것처럼 괴테의 영혼이 되어준 루소의 <신 엘로이즈> 역시 그러하다. <신 엘로이즈>는 루소가 자신을 소재로 적은 소설이고, 자신의 주변 요소를 통해 저술한 소설이다. 주인 생 프뢰는 우수하고 열정적인 청년이고, 생 프뢰가 사랑던 쥘리는 미덕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러나 문제는 스위스인이던 생 프뢰는 자신의 신분은 소시민이고, 쥘리의 신분은 귀족이었다. 쥘리의 아버지는 귀족의 신분으로 높은 직위에 게다가 장교 출신이란 이유로 생 프뢰에 대해 좋지 않게 여겼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은 비극적인 두 남녀의 운명이 시작되는 점이다. 괴테의 소설에선 일방적으로 베르테르가 계속 친구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루소의 소설은 편지를 등장인물끼리 서로 주고받는 것이 특징이다. 소설에서 보통 등장인물이 같이 그 공간에 나와 서로 말로서 대화하는 게 일반적인 흐름이나, 여기선 자신이 그날 있었던 일이나 자기가 생각한 일에 대해 계속 편지로 주고받는다.


인간은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입으로 통해 전달하기 보단 글로 전달하는 게 더 정확하고 이성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신 엘로이즈>를 보는 순간 오히려 글은 이성으로 가득하기보단 거대한 강물이 굽이굽이 하류로 흘러가듯이 율동과 열정이 숨어있었다. 그런다고 그 열정이 너무 지나치게 강렬하게 도를 벗어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괴테의 소설은 말 하나하나가 매우 강렬했으나, 여기서는 자신의 강렬한 마음을 마치 호수에 큰 파장이 일어난 것처럼 울리게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알 수 있는 것은 <신 엘로이즈>에 담긴 내용은 쥘리와 생 프뢰라는 젊은 남녀의 사랑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시대의 모순과 루소의 사상이 담겨있었다.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대혁명이 동기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공회의 토대가 되었고, 삼권분립에서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우어진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입법권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만약 잘못된 법과 제도가 있다면 고칠 수 있는 것이 입법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보던 프랑스의 정치사회는 모순으로 가득했었다.


프랑스대혁명과 세계 혁명가의 복음서가 된 <사회계약론>보다 루소의 서적으로 사람에게 더 많이 읽혀진 것은 <신 엘로이즈>와 <에밀>이다. 게다가 <에밀>을 읽다보면 사람들은 루소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여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 알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만약 <신 엘로이즈>에 대해 조금 이해한다면 오히려 여성이야말로 남성의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 존경을 받기 위해 여성은 정숙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21세기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사회지만, 적어도 자유연애가 보장된 지금보다 그때의 <신 엘로이즈>의 쥘리와 생 프뢰의 사랑이 더욱 위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신 엘로이즈> 1권을 보면서 느낀 점은 루소가 쥘리와 주변 인물하고 대화하면서 느낀 세상에 대한 관찰이다. 그는 시민의 도덕심을 강조했고, 부당한 권력과 세견에 대한 비판을 날린다. 18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의 거만한 로코코(탐미주의)문화의 특성을 부정했으며(한 여자가 다수의 애인을 거느리는 것), 그 원인이 바로 사랑의 결합이 남녀 간의 사랑으로 인한 동의가 아니라, 여자의 동의 없이 억지로 귀족이나 부호에게 가는 것이다. 사랑 없는 결합에 서로 다른 애인을 찾는 것을 부도덕하게 여기고, 특히 쥘리의 아버지가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쥘리의 어머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다른 여자를 만나다, 이제 나이가 들자 다시 집에 온 점을 본다면 과연 그 시대의 도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루소는 본래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했고, 사고로 인해 몇 번 죽을 뻔했으며, 자연에 은둔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당시 파리 살롱문화를 비판했는지도 모른다. 그대로 <신 엘로이즈>를 읽으면 생 프뢰의 기행에서 발레지방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곳의 주인들은 손님에게 아무런 것을 바라지도 요구하지 않으며, 집안의 하인들과 식사할 때 같은 탁자 앞에 의자를 앉게 해주는 것이다. 신분의 차이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받아야할 그 마음가짐을 루소는 잊지 않은 것이다. 루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미덕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신 엘로이즈>가 단순히 쥘리와 생 프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를 메인으로 다룬다고 해도, 그 이야기의 흐름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미덕은 늘 따라다닌다. 남녀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에 대한 <신 엘로이즈>는 인간의 자연성을 늘 추구하는 것이 보인다. 쥘리에 대한 생 프뢰의 존경은 쥘리가 갖고 있는 미덕이고, 그 미덕은 꾸미지 않은 쥘리의 마음이다. 쥘리의 초상화가 생 프뢰에게 올 때 그는 그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화가가 쥘리의 있는 그 모습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 아랫부분을 정확히 달걀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두 뺨과 턱을 분리시킴으로써 윤곽은 좀 흐트러뜨리지만, 더 귀엽게 보이게 하는 그 가벼운 굴곡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아주 불만이 큽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아니더라도 참 인상적인 말이 많았다. 21세기 화려한 사랑의 미디어가 18세기 소설에서 나온 사랑보단 못한 이유는 “언제나 겸손한 진실한 사랑을 사랑의 표시를 대담하게 내보이지 않아요. 수줍게 숨기지요. 숨기기, 침묵, 거 많은 수줍음은 사랑의 달콤한 열광을 강화하고 감춰요.”라는 내용이 있었다.


미디어로 전달되는 스펙타클은 언제나 대담하게 언제나 웅장하게 언제나 화려하게 꾸미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이 로맨틱하게 보려고 한다. 물론 지금의 시대에 18세기 소설을 토대로 판단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나, 사랑이 인스턴트로 변해버린 지금의 시대에 보면 과연 어느 쪽이 더 시대착오적인가 하고 생각할 점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분명 남녀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혹은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오늘날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고 있을까?


“인간을 만드는 것이 이성이라면, 인간을 인도하는 것은 감정이니까요.” 이 말에 너무 공감한다. 우리는 감정을 너무 쉽게 드러나지만, 감정 그 자체를 가지지 않고 있다. 이성은 오직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이성과 혹은 이성으로 얻어진 지식과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보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물론 그런 일들이 용인되어버린 비극적인 세상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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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2-1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이 책...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보고 만지작 거리다가 그냥 놓고 왔는데...이 리뷰를 보니 후회가 밀려오네요...ㅜㅜ

만화애니비평 2015-02-16 18:08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바로 루소가 저술했기 때문이죠.
 


<순결의 마리아>란 작품은 중세의 가을, 14~15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정확한 배경으로 잔 다르크가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한 후 아직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 도중이다. 당시 사회는 고전주의시대, 즉 가톨릭 종교가 매우 강한 통치력으로 유럽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런 시대에 이단이란 존재는 섬멸의 대상이다. 따라서 <순결의 마리아>는 주인공 마리아라는 마녀지만, 그 시대적 배경은 상당히 역사적인 고증을 담고 있다. 특히 전투장면이나, 의복, 건축양식, 문화적인 요소는 잘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생각난 점은 만약 사람이 아프면 이 뿌리를 드세요. 기도를 합시다. 수술 후 약을 복용하세요. 이 뿌리를 드세요.”라는 점이다. 고대 사회는 지금같이 신약 대신 약용식물로 복용하여 병을 치료했다. 하지만 고전주의시대는 신앙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여기고 기도했으나 그 결과 <순결의 마리아> 4화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4화의 주제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마리아의 위험성이란 바로 기독교 문명과 자연적 조건의 대립이다. 여성 복식문화에서 다들 몸을 감추지만, 마리아의 의상은 노출이 강하고, 서큐버스로 통해 남성의 정기를 빼앗아 전쟁을 중지하려 한다. 그러나 고전주의시대에는 성행위를 대하여 교회나 국가적으로 매우 금지시켰다. 특히 여성에 대해 매우 악랄한 존재로 보거나 남성의 정신을 흔들리게 하는 존재로 보았다. 마리아의 존재에서 서큐버스를 다루는 점이나, 노출이 심한 옷은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에 큰 반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기도로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약을 통해 사람들은 구원하는 것은 신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심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중세의 가을이 도래한 유럽은 십자군 원정 이후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렀고, 그것은 민심에 대해 기존 봉건귀족에 대한 의구심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종교와 국가는 여전히 신의 가호 아래 전쟁을 벌였고, 농민보병군사들은 아무런 군사적 기술과 장비도 없이 희생되어야 했다.

 

<순결의 마리아>란 작품이 15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하나, 시대적 조건과 전쟁의 상황을 보면 매우 현실적이고 21세기에도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 전쟁에서 신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바로 그 시대 지배이념이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도덕이다. 그 도덕이란 이름이 결국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혹은 역으로 되는지 잘 나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역사적으로 그러했다. 마리아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 받지 못하나 윤리적으로 옳은 행위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에서 마리아는 마녀이고, 마녀로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존재인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어느 집단의 이익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받아 어느 소수나 다른 타자를 링 밖으로 내모는 일들은 어디서든 일어난다.

 

마녀사냥에 대한 부분에서 15세기 까지는 마녀의 존재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하지만 16세기부터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존재가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악마와 손을 잡고 있었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한다. <순결의 마리아>15세기의 일어난 배경에서 만든 작품이다. 마녀에 대한 고증에서 조금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그런 마녀로서 보는 당시 사회의 모순은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 점이 연속되는 것 역시 중요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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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日立春日 오늘은 봄이 오는 입추 날이나.

 

降雨 아침을 보니 겨울비가 내리구나

 

木蓮花望 나는 목련꽃을 바라고 있으나,

 

冬現連續 긴 겨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네.


적기는 2월 4일에 적었는데, 이제 여기 올림

그런데 우리집은 주택인데 아직 목련꽃이 피지 않음

오늘 날이 너무 추워 딱 맞는 시인듯

하지만 한자로 된 시는 처음 지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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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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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느 고위공직자 후보자가 과거에 행적에 대해 문제 삼으며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그 일이란 바로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다. 박종철이란 이름은 한국의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상처어린 이름이다. 그는 19871월 젊은 나이에 남영동 고문실 안에서 잔인한 고문과 야만적인 시대의 권력 앞에 사라져 갔다. 그의 죽음이 결국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6월 항쟁에서 이한열 학생은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

 

올해는 6월 항쟁이 발생한지 28주년이 되는 해이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거의 30년이 되었고, 30년이면 거의 한 세대가 교체한 시간과 같다. 그 시간이 지나면서 특별히 뭔가 바뀐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단지 고문으로 죽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고문을 받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아직도 그때의 상처로 인해 고통 받는 점이고, 그들을 고문하거나 고문하도록 사주하거나 또는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람들은 여전히 근엄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아마 후보자 역시 그동안 30년 가까이 그 시대의 흔적들을 남긴 역사의 산물일 것이다. 과거란 결코 자신이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 부정해야할 사실이란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이나 혹은 부조리한 일들을 외면하거나 또는 사주한 게 아니라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가 다시 30년 지난 이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현재란 결국 과거 시간의 축척으로 인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규석 작가의 <100>란 작품은 지금 다시 봐도 매우 섬뜩한 작품이다. 20096월에 발표된 이 작품은 6년이 지난 2015년 현재에도 여전히 강한 인상을 준다.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만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가서 좋은 직장만을 가는 게 목표이던 시절, 부모들의 고생만 하고 내 자식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의 가치, 아마 지금의 부모들은 1980년대의 부모보다 내 자식에 대한 욕심은 더 강할 것이다.

 

주인공 역시 그런 부모 밑에 자라 서울로 오고 선배들하고 만나면서 기존에 알던 자신의 가치관과 전혀 다름을 느낀다. 주변 선배들은 선술집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울분을 토하고,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며, 때로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 지낸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열이 올라 99에 멈추다 어느 순간 100로 된다. 그리고 그것은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물의 비열에 맞춘 <100>처럼 어떤 물질이 양적 에너지를 계속 주입하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현상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변증법으로 작용하여 수학적 수치는 아니지만, 인간에게 가해지는 불만과 분노가 바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화선이 불이 붙기 전까지 너무 많은 희생이 따랐고, 수많은 청춘들이 밤하늘의 별이 되어야만 했다. 이 작품은 이론적인 영역보단 차라리 직접 보고 느끼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성적 사고로서 세상을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나, 그 시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다. <100>란 작품은 한국만화에서 덜도 아닌 더도 아닌 그 시대 그 자체를 그린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사실주의는 일상생활 또는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가 인지할 수 없기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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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10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규석 작가 전작품들이 다 훌륭하더군요. 더많이 주목받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2-10 10:05   좋아요 0 | URL
예전에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2014년 행사에서 바로 제 옆 자리에 앉아 계시던데, 한국만화계에서 국내 대표만화작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대중들에게 알려져야 할 것이죠. 이 분은 만화의 에너지가 억압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라 합니다. 본 작품은 바로 그런 느낌이 강하게 실린 작품이죠

AgalmA 2015-02-1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가장 대중에 밀접한 걸 말하는 작가가 대중 호응도가 떨어지는 게 매우 아이러니합니다. 좋은 소개글 감사합니다
 
레벌루션 No.3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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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독서모임에 일본에서 유명한 문예작가 등단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리는 류노스케문학상, 그리고 나오키문학상이라 들었다. 한국에서 작가로 따지자면 <날개>를 저술한 이상이란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문학 쪽으로 그렇게 많이 읽지 않아 딱히 뭐라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오키문학상을 받은 가네시와 카즈키의 <Revolution No.3>를 보면서 뭔가 모르는 동질감 내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기본적으로 Revolution이란 혁명이고, No.3은 세 번째라는 의미로 한국 영화에서 <No.3>가 있듯이 아마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무시당하며 살아온 별 볼일 없던 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세속이 이리하든지 혹은 세견이 저렇게 흘러가든지 No.3들도 사람이고 자신들도 살아갈 권리도 있고,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들은 단순히 반 재미나 오락을 즐기기 위해 삐뚤어진 자들이 아니었다. 이 사회의 모순과 억압, 그리고 문제들이 만들어낸 이방인들이었다. 마지막에 왕국에 나타난 나그네가 춤을 추자 왕이 다리를 자르고, 머리로 율동을 하자 목을 베고, 이제 마무리로 눈 커플로 박자를 맞추려고 하나 인간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면 살 수 없다. 그렇게 특이한 자들 혹은 이방인들은 이 사회로부터 제거되거나 추방당한다.

왠지 이 이야기들은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나 역시 이방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에 나온 고등학교 친구들 좀비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나 나름 사회적으로 비주류에 위치해 있고, 대중이란 문화적인 권력집단과 어울리지 못하는 부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에 대해 오타쿠라고 한다. 아니 오덕이나 덕후라고 하며, 마치 반사회적 인간상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현실과 괴리된 인간으로 마치 신기한 인간인양 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해본 경험이 있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새겨진 거대한 베개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런 베개를 들고 다니는 어느 사람이 방송미디어의 출현으로 마녀사냥을 당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만화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비주류적인 문화를 즐기지 않고 매이처럼 TV 연예방송 프로그램을 본다면 남들과 어제 TV를 보니 1박 2일이 이렇고, 무한도전이 저런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Revolution No.3> 작품 내에서 주인공처럼 나 역시 TV를 보지 않는 사람이다. 이미 TV를 직접적으로 보는 것을 그만 둔지가 10년이 되어간다. 드라마가 무엇이 유행하는지 가요에서 아이돌스타가 누군지 모른다.

여름방학 2부에 속하던 시기, 주인공이 스토커를 찾아내던 시기, 친구 누나의 친구가 방송국에 취직할 때, 그 누나가 주인공을 의아하게 본 것과 마찬가지다. 반드시 세상에 흐름에 따라야 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지만, 세상은 강요한다. 마치 거기에 해당되지 않은 인간들은 이상한 존재로 낙인을 찍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을 읽어보면 작가가 지금 일본 젊은 세대에 대한 의식에 대한 계몽이란 비판적 의식은 없다. 단지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이란 것을 그들의 입장이 되어 바라보고 있다.

주인공들을 보면 참으로 다양하다. 주인공은 우수한 학생이나 중학교 2학년 시절, 꽃뱀에게 당한 것도 모자라,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이혼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나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본지가 옛날이라고 한다. 결손가정이나 편부모 게다가 불안한 심리가 그를 우수한 중학생 영재에서 골칫거리 고등학생으로 변하게 했다. 옥상에서 담배피고, 남의 여학교에 가서 소동이나 일으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 소동은 생각하면 무엇인가 그들이 틀렸기보단 그들이 틀린 짓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현실에 대한 씁쓸함이 가득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공부를 너무 못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이 8%까지의 학교는 아니나, 나는 내가 다닌 학교에서 성적으로 뒤에서 8%보다 높았다. 공부를 못하고, 운동도 못 하고, 성격도 활달하지 못한 시기이니 얼마나 보이지 않은 차별을 당했겠는가? 학교수업 시간에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은 선생에게 그저 무시대상이고, 그것이 학생들 사이에도 이어진다. 은근히 공부 못 한다고 대 놓고 무시하지 않지만, 뭔가 언저리에 조금 불쾌감이 자리 잡은 것은 있다. 그나마 나는 나은 편이다. 작품에서 재일조선인 순신이, 그는 다른 것은 참아도 자신의 인종차별을 용서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존경하는 그로서 일본이란 사회의 불평등을 고스란히 자신의 얼굴에 훈장처럼 새겨놓았다.

인종차별 발언에 눈 옆자리에 새겨진 상처부분이 붉게 변하는 그는, 상당히 우수한 인재고, 항상 독서를 하는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입만 살고, 곡학아세로 지식 팔이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지켜야할 선도 기준도 명확하게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방인인 자신에게 일본사회는 온통 적이었다. 적이 아닌 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이다. 주인공처럼 파탄 난 가정, 혼혈인 아기, 오키나와 출신 히로시 같은 애들이다. 하다못해 운이 지지리도 없는 야마시타도 마찬가지다. 사회에서 소외받은 이들에게 처음부터 이 사회는 따뜻한 손길을 주지 않았다.

단지 거기에 불만만 토로조차 할 수 없던 문제아들이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이 몰로 선생, 자신의 어머니가 히로시마 원폭 이후 자신을 출산하여 원폭피해 증세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혼 이후 아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은 주인공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어온다. 어른들의 세계에 흔히 말하여 꼰대정신, 내가 살아온 것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도덕을 논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요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몰로 선생과 달리 체육선생은 그런 권위적인 의식만 가진 꼰대적인 인간상이다.

왜 문제아들이 문제아로 될 수밖에 없는지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자라온 성장배경이 다르니 생각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적어도 진짜 학생들을 생각한다면 학생에 대해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몰로 선생에게 진심으로 깍듯이 인사를 한다. 人間이란 단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람이란 존재가 하나의 자연적으로 존재한다면 그는 자연적으로 인성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러 가지 배경적 조건이 따른다.

인간이 형성은 선천적인 불평등보단 오히려 후천적 불평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태어날 때 다른 종족이라고 사회적인 인식과 수용성에서 열린 사회였다면 그 당사자가 흑인이든 조선인이든 여자이든 각가지 사정 따위는 이유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좀비스로 불리는 이 작품 주인공들은 같은 고등학생인데도 차별을 당하고 있다. 오직 사회적 규범이 정하는 공부나 또는 이 사회의 세속적 가치만 따르기를 바라는 가치관으로 그들에게 미래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몰로 선생의 가르침은 큰 충격일 것이다.

가령 열등하거나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우등한 존재나 같은 부류만 모이게 되면 그 사회란 도태된다. 과연 그렇다. 열등한 인간이라고 하여 그들이 진짜 열등한가? 그들의 열등한 선천적 조건이 아니라 후천적인 조건이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인간의 불평등이란 선천적 조건보단 오히려 후천적 조건으로 더 가중되는 셈이다. 그 사회의 도덕성에서 불평등은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결정지게 되며, 그 불평등이 하나의 정당성이 부여되는 사회는 정신병자들이 정상인들처럼 돌아다닌다.

마치 이노우에 누나의 친구가 시바키란 대기업 인사부장에게 스토킹 당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시바키 같은 인물, 즉 꼰대적인 발상으로 자신들의 가치관이 아직도 옳다고 우기는 부류는 우습게도 이 소설에서 제시한 것처럼 혹은 일본 현재나 우리나라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공감보다 단지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정신병자 내지 사이코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이것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인공들은 성화여고를 찾아 간다. 성화여고 축제 때 그들 학교에 침투하여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자신들에게 돈도 권력도 없다. 그러나 사회는 돈과 권력이 있는 남자들이 그에 맞춘 여자들과 계속 이어간다. 그렇다면 가지지 못한 남자들은 돈과 권력이 있는 여자와 맺어지는 게 정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들의 열등함과 여자들의 우등함을 섞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가능하려면 마음이 통하든지 또는 호감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성화여고 축제 때 좀비들은 좀비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해 침투를 시도한다. 1년차와 2년차는 실패하고, 3년차에 비로소 성공한다. 그 성공에서 성화여고의 여학생들이 그들을 인정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낭만적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낭만적인 게 단순히 연애적인 요소만 생각하는데, 물론 연애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위험하고 어째보면 실패의 아픔도 존재한다. 그래도 다시 도전하는 모습에 좀비들은 아주 낭만적인 녀석인 것은 분명하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은 세견에 대한 도전의식, 그리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 상처투성이 영웅, 최근 여자들은 머리가 단단한 꼰대인 체육선생이나 시바키 같은 꼴통 마초들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용기를 내어 위험을 무릎 쓰고 도전하는 남자라면 봐줄 것이라 생각 든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꽃을 찾아가는 것은 나비이지 꽃이 나비로 가지 않는다. 비록 자신에게 도달하기 전에 볼품이 없고 망신창이가 되더라도 말이다. 단 조건은 아직까지 그런 낭만적인 여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전제 아래서다. TV 드라마나 연예프로그램에 내가 거짓된 낭만에 회의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은 방송으로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낭만적인 상황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상의 시나리오로 작성된 낭만이고, 자신이 만든 낭만이 아니다.

감정을 소비하는 것이 현대사회에 종종 보이는 스펙타클이다. 나라는 존재는 결국 스펙타클의 열렬한 추종세력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세론에 빠져가는 것이다. <Revolution No.3>에서 혁명은 단순 좀비들의 반란만이 아니다. 그 좀비의 반란은 그들의 일상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을 철두철미하게 침투하는 현실이다. 책에서 주인공이 말한 것처럼 작가는 아마 1960년대 말의 일본에서 베트남전쟁 반전운동이나 혹은 야스다강당 사건 것을 인지하는 모양이다.

당시 저항에 대한 의식에서 저런 일들로 인해 뭔가 고민이 있는 청춘이라면 분명 통하는 게 있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서로 간의 이야기가 연결된다. 하지만 일본 사회의 경제 고도성장 이후 거품경제 붕괴는 일본 사회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빈부격차와 더불어 핵가족화 등과 같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런데 그 문제는 단순히 학생운동으로 하기에 뭔가 새로운 사건을 만들 수 없었다. 단지 사회에 대한 부조리나 괴리는 일상에 마주치는 사건에 의해 좌우된다. 주인공이 사건을 좋아하는 것은 뭔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바꾸고 싶은 충동이 숨어 있다. 자기의 주변에 사건이 끊이지 않고 거기에 도전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최근에 한국영화 중에 한국전쟁부터 시작하여 근대화와 산업화를 다룬 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서 웃기는 점은 우리가 고생했으니 미래는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지금 한국에서 더 심각한 빈부격차로 이어졌다. 전쟁이후 거의 모두가 배고픈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 사정이 좋아졌다고 하나,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는 부류는 여전히 많고, 그들은 사라져 간다. 그런 것을 두고 사회적으로 감정소비만 하고 뉴스이슈로 사라질 뿐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 생각하면 아등바등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보내는 우리 역시 그런 원인자인데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Revolution No.3>의 주인공들 수준까지 비주류는 아니나 그래도 비주류로 살아왔고, 지금도 비주류적인 요소가 있다. 꼴통학교의 순신이가 <논어> 같이 보통 사람들이 읽지 않는 서적들을 보는데, 나 역시 보통 사람들이 읽지 않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같은 것을 읽고 있다. 세견에 따라 몸 사리는 것엔 어쩔 수 없으나, 거기에 놀아나는 것은 결코 좋은 삶의 방식이 아니다. 차라리 특이영역을 가져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자신이란 실존적 영역을 찾아가는 게 바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존주의 하니 어느 영화에서 등장한 사람이름이 생각난다.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진 어느 대학생의 마지막 비명처럼 우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꼰대들의 세상에 살아야 하는 것일까? 결과론적으로 현실의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그 모순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꼰대들은 여전히 딴청을 피운다. 이런 사회에 <Revolution No.3>은 소설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보단 이런 문제에 대해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을 유도한다. Revolution은 만드는 것은 자신 스스로의 사고 자체를 Revolution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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