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들
에릭 홉스봄 지음, 이경일 옮김 / 까치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에릭 홉스봄이 타계하고 나서 국내 출간된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마크르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란 명제로서 만들어진 책이다. 에릭 홉스봄은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서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초 타계 전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영미권 마르크스주의 학자였다. 그가 저술한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르크스가 살아생전부터 시작하여 21세기 초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적 배경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상적 배경 그리고 역사적 현실을 논한다.

 

 

마르크스에 대해 말하자면 한국에서 여전히 말하기가 어려운 이름이며, 하다못해 도서를 집중적으로 읽고 토론하는 모임조차 꺼내기 힘든 서적이다. 하지만 국내 유수한 대학교, 하다못해 외국의 대학교에서 마르크스의 서적은 꼭 읽어야 하는 인문고전 중에 하나다. 최근에 서울대학교 100대 서적에 마르크스의 <자본>이 등장하고,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하나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이 있었다. 이미 국내 최고의 대학교조차도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이 3%가 반영된 점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가 차지하는 지성의 세계는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 <자본> 전문번역자인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살펴보면 한국은 모더니즘 철학사상을 지나가지 못하고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성이 중심인 학문체계를 가지지 못한 채 바로 오늘 우리 사회가 이룩된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 가치와 더불어 부정적 가치가 큰 부작용이 일어났다. 독일에서 나치의 존재는 명확한 악이나, 네오나치가 자신들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 사상에서 넘어가 반이성적 사고에서 일어난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휴지조차 되지 못할 정의를 외칠 수 있는 현 시점에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온오프라인의 갈등과 심지어 테러행위 역시 이성의 시기를 보내지 못한 부작용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 이후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다시 포스트 해야 하는 새로운 가치 아래 세계를 좀 더 자세히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사상은 볼셰비키혁명으로 통해 성공하는 것 같으나, 레닌 사후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 그리고 트로츠키의 망명과 암살로 스탈린은 사회주의혁명인 10월 혁명을 이젠 <한낮의 어둠>처럼 철권정치를 실행했다.

 

 

스탈린과 자본주의 충돌은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에릭 홉스봄도 지적하다시피 마르크스와 전혀 관계없는 북한이 아직도 한국과 대치중이다. 소비에트러시아가 붕괴하고 마르크스는 그저 역사 속에 사라질 운명일까 싶었다. 하지만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서문에 놀라운 사연이 있었다. 에릭 홉스봄에게 마르크스에 대한 사상을 자문을 받는 사람들이 늘었고, 마르크스에 대한 서적을 새롭게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들이 문의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마르크스에 대해 자세히 아는 부류가 아니란 점이다.

 

 

마르크스의 대표적인 저술서인 <자본>과 <공산당선언>은 19세기에 저술된 서적이다. 19세기 저술한 서적이 21세기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가 도래한 국제사회에 큰 예언서가 된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는 이제 단순히 국가 내부의 문제를 넘어 세계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최근 대두된 문제는 역시 저출산 문제일 것이다. 한 가정에서 자녀가 최소 2인 이상 출산되어야 국가가 운영이 되는데 그것이 무리라는 점이다. 국가와 사회적 기능에서 재생산이란 시스템은 매우 중요하다. 재생산적인 기능이 저하될 경우 정치사회적인 기능이 저하된다.

 

 

당장 산업부문과 경제부문의 벽이 무너지지 않지만, 국방인력의 공급부족으로 이어지고, 추후 국가를 부양할 수 있는 인력이 없어서 고령사회로 접어든 국내경제가 매우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경제적 문제여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경제적인 문제가 결국 정치사회 더 나아가 외교적인 영역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자본주의를 집어삼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봉건영주가 있던 구체제 국가도 아니고, 소비에트연방을 만들어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도 아니다. 자본주의 그 자신이었다.

 

 

자본주의의 탐욕이 결국 인간을 잡아먹게 되고, 그 사회는 계속 쇠락을 걷게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에서 마르크스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의 사상의 조류를 보면서 딱히 답을 주는 것보다는 답을 스스로 찾아가란 식으로 결론을 낸다. 또한 이 책에서는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는데 우선 좌파에 대해 논하자면 대부분 마르크스주의로 볼 수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이외에도 다양한 점이고,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역시 모든 것이 마르크스에서 기원된 게 아니라 마르크스로 통해 보여 진다는 점이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에서 루소는 로베스피에르와 마르크스의 아버지라고 한다. 마르크스가 루소에 대해 딱히 언급한 것은 없지만, <자본1>의 주석을 보면 루소의 <경제론> 내용을 인용한다. 「자본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명령하는 노동에 대한 보수로서 (즉 너희들 수중에 있는 것을 얼마간 나에게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너희들이 나에게 봉사하는 명예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노라(장 자크 루소, <경제론>, 제네바, 1760, 페이지 70)"」

 

 

마르크스를 비롯한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자들도 루소와 특히 자코뱅당 좌파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루소의 사상을 말하면 한국에서 흔히 “자연으로 돌아가라”란 말만 알지 루소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자연적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자유의 절대성을 강조한 루소 여기에 평등의 절대성을 마르크스라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연 속의 인간은 자유와 평등 모두 가진 존재다. 우선 자유를 모두 가질 수 있는 평등이 있어야 하고, 루소의 실패한 아들인 로베스피에르는 자유라는 것은 우리만 가지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골고루 줘야지 그 자유가 유지된다고 한다.

 

 

자유가 없는 나라가 자유가 있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그 자유를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게 옳다는 점이다. 로베스피에르가 루소의 사상을 신봉한 사람인 점을 고려하면 루소의 사상이 마르크스에게 그대로 영향을 준 것은 당연한 말이다.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도처에 야만적인 무관심, 한편에서는 냉혹한 이기심, 다른 한편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 도처에 사회적 전쟁이 널려 있고 모든 이들의 집은 요새이며, 곳곳에 법의 비호 하에 약탈을 일삼은 약탈자들이 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런 문구가 있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런 것이었다. 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 이 사회와 법률이 약한 자에게 새로운 멍에를,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주어 자연의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 버렸다. 또 사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원히 고정시키고, 교묘한 찬탈로써 취소할 수 없는 권리를 만들어 일부 야심가의 이익을 위해 이후 전 인류를 노동과 예술과 빈곤에 굴복시킨 것이다.”

 

 

문장의 느낌은 다르나, 기본적으로 엥겔스의 공장노동자의 비참한 모습을 본 내용과 루소가 당시 농민과 도시빈민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던 시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는 이제까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러시아혁명 당시 많은 혁명가들은 자신들을 프랑스대혁명의 후예로 생각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적 배경에서 자코뱅당 좌파의 사상은 마르크스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 들어간 것은 당연하다. 대신 루소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미덕을 가진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면 마르크스는 그 힘의 원동력을 프롤레타리아로 보았다.

 

 

처음 마르크스 국제노동운동을 보면 지식인보단 노동자와 직접 상대하면서 이끌어 갔다면, 그가 죽고 엥겔스도 죽은 이후 20세기 초중반에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한 점이 특징이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이끄는 2차 세계대전에선 반파시스트 운동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이 참여한 점이다. 마르크스가 저술한 <자본>은 처음 과학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해 파헤친 도서라면 20세기 들어오면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경제학적으로 큰 맥락이 되었고, 그의 사상은 인류학, 역사학, 정치학, 문화사회학 등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의 서적들은 지식인들의 인문고전으로 올라가고, 그의 지식을 고스란히 남은 도서는 21세기에 닥친 위기에 대한 해석이 되었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 주변을 잘 봐야 할 것이다. 대기업이나 좋은 직장에 다니면 물론 좋겠지만, 우리 전체 인구 경제활동에서 그런 곳에 일하는 사람은 100명 중에 하나이다. 대부분 중소기업 직원, 공장노동자, 서비스산업, 소규모 영세상인 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중에 일부는 높은 임금이나 높은 매출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반 이상이 그렇지 못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력이 없어서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여 생계수단을 얻는 자들에 대해 프롤레타리아라고 한다면, 이제 소부르주아인 상인조차도 프롤레타리아 부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내수경제가 불안한 한국에서 자꾸 외국의 수입물에 의존하고, 그 대부분을 대기업(선박이나 항공 운송, 대규모 택배시스템 및 마트시스템)에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된다면 결국 저렴한 상품에 의해 중소 상인들은 몰락하게 된다. 골목상권이나 혹은 사소한 물품에 대한 시장 갈등은 21세기에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은 전자처럼 높은 임금보단 후자에 처해진 자거나 또는 그런 자와 같이 살아가는 부류라는 점이다. 공정한 시장경제에 대하여 긍정하나, 그 시장경제가 자본력에 의한 독과점이 이루어진다면 국내 경제는 하부로부터 붕괴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듣기 싫은 말 중에 “너도 성공해라 저기 성공한 사람이 있자나?”나 혹은 “로또복권 당첨되면 되지!”라는 말이다. 물론 나 하나 잘 되면 이런 문제로 고민은 없겠지만, 결론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발을 내빼고 싶은 것이다. 한국사회의 성공신화에 대한 멍청한 열망은 1명이 성공하는데 반해 2~3명 정도 되지 않는다면 납득되겠지만, 1명이 성공해도 99명 이상 성공하지 못하면 분명 그건 말이 안 맞다. 다행히 성공하지 못한 자는 99명이 아니라 9999명 이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스펙을 쌓으려면 매달 150만원이 필요하다는 뉴스를 보았다. 150만원을 매달 쓰지 않아 높은 임금을 받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활하는데 불안하지 않을 정도가 되는 게 좋지 않는가 싶다. 점차 높아져가는 비정규직으로 인해 내수경제는 축소되고, 1980년대 과소비에서 과소소비로 대체되었다. 부동산 가격 증가로 물가는 해마다 올라가는데(이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자기 집값은 오르고, 다른 집값은 내리기만 바란다. 부동산이 오르면 사회간접자본이 열악해지고, 상가의 상품은 비싸게 된다. 10만원 들고 마트에 가면 살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집값 고민은 매우 충실하다.

 

 

이런 자신들의 이기심을 찾는 게 똑똑하다고 여기기에 자기 살만 파먹고 있다. 때로 생각하면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보인 것처럼 그의 분석도 좋지만, 때로는 루소의 사상처럼 인간에게 미덕을 다시 찾는 것도 매력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미덕을 찾는 것은 거의 무리인 현실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마르크스 말대로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은 것은 그들을 속박하는 사슬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자기 몸 하나이고, 그들의 미래조차 만들 수 있는 여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을 보면 왜 그들이 난폭해지는지 이해하기보단 그저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그 사회에 길들이게 만든다. 당장의 고비는 해결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모순과 부조리는 쌓여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루소의 <에밀>에 나온 내용을 동의한다. 죄를 지은 사람을 목을 매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들게 하는 자들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루소의 말이 과격하다고 하여 그를 부정하면 처음부터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 질서를 위해서라며 힘을 휘두르는 현실에서 세상이 바뀌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꼼꼼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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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가면 자신이 존경하는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들은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어려서 대통령이 될거야 나는 어려서 아인슈타인이 될거야, 모두 어느 거대한 인물이나 위인들을 거론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나는 어려서 꿈이 그렇게 있는 게 아니었다. 엉뚱하고 사고만 치고, 간식을 좋아하고, 오락실을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아이들치고 조금 뒤떨어진 아이다. 달리기 하면 멀리서 힘들게 숨을 쉬며 걸어오면서 끝내 마지막 엔드라인을 끊어내는 그런 인간이다.


그래서 어릴 적에 뭐가 되고 싶은가에서 기억나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대부분 어릴 적 아이들의 꿈은 대통령과 장군에서 점점 갈수록 외교관과 공무원 끝내는 월급이 제대로 나오는 직장인으로 낙향할 것이다. 그게 현실이고 안타까운 우리의 모습이다. 꿈을 갖는 것이 그 하나로 죄가 되는 나라 대한민국인 것이다. 꿈을 가져서 죄인이 되는 게 아니라 그 꿈으로 인해 주변 사람에게 죄인이 되어야 하거나(망상의 극치로나) 또는 그런 점 때문에 허경영 후보와 같은 대반에 오를 수 있다.


직업과 관련하여 아무래도 좋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하고 싶은 직업은 물리치료사였다. 그러나 공부를 못해 나는 물리치료학과를 가지 못하고, 물리치료학과와 같이 교양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의 공대로 진학했다. 지금은 모두 연락이 없어졌으나 물리치료학과에 동기나 선후배들 몇 사람 친하게 지냈다. 뭐 그래도 그곳에 가지 않으나, 친하게 지낸 사람이 있으니 대리만족으로 끝내야지. 그래도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도 전역하고 했으니 다시 꿈에 대해 물어본다면, 지금 총각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같이 인생을 보내는 것이라 본다.


하지만 글제목처럼 가장 존경해야하는 것과 꿈에 대해 말하자면 전혀 다르게 갈 수 있다. 꿈은 되고 싶은 것이나, 왜 되고 싶은가를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우리는 되고 싶은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면 너무 막연하게 좋은 것만 추구하게 된다. 일상과 전혀 관계 먼 우리가 평생 살아도 제대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존재에 대해 말이다. 과거 어느날 나는 버스기사 아저씨가 참 대단하다고 여겼다.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막 입문하여 버스를 타면서 버스기사들의 운전을 보았다.


참고로 내 차는 수동이다. 2006년 마티즈로 시작해 지금의 SM5까지 모조리 수동으로 몰았다. 수동으로 차를 운전한지가 9년이 된 것이다. 이제 자연스레 자동보다 수동으로 모는 게 편한 시기로 왔다. 자동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아 짜증난다. 바로 대부분 버스가 수동인 점에서 수동을 모는 사람으로서 버스기사의 운전은 정말 환상적이다. 요새 오토기어인 버스가 나와도 아직도 버스는 수동이 많다. 5단 기어에서 6단기어를 모는 버스기사는 수많은 승객을 제 시간을 맞추며 거리를 활보한다.


내가 승용차운전하면서 버스운전이 사나운 것은 안다. 하지만 버스가 차선 변경하면 양보하는 이유는 버스기사가 너무 위대해보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모두 엉뚱하거나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다. 대한민국 1% 이내, 그러니깐 자기가 차를 몰지 않아도 남이 몰아주지 않으면 이동하지 못할 경우 당신은 무엇을 타고 다니는가? 하다못해 장거리 운전에서 김여사가 김기사 운전해~ 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가족이라면 누구든지 버스를 타지 않을 수가 없다. 서울에서 부산에 가든 광주로 가든 어디를 가든 KTX가 있어도 지하철이 있어도 버스만큼 목적지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은 없다.


당신이 운전하거나 혹은 당신 옆에 운전기사가 붙어있지 않으면 말이다. 버스가 다니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발이 묶이고, 움직이지 못하며, 대다수 사람들은 고생할 것이다. 자가용이 있어도 그 한계는 있으며, 자가용이 없는 사람들, 운전면허증이 없는 사람들, 더 이상 운전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딱히 버스기사만이 존경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나,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따지자면 버스기사만 존경해야할 존재가 아니라 사실 지하철, 기차 운전수 하다못해 정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에서 대단한 사람들은 국가나 대기업의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유지시켜준 분이다. 기본적으로 부모님과 가족들은 제외해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더 이상 부모나 가족들보다 상위에 존재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내 일상을 유지해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면 존경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중해야 하는 게 너무 많다. 자기 사무실에 누추한 복장으로 청소하는 아주머니, 아파트 경비실의 수위들이 있기에 우리는 편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거기에 안락할 경우 우리는 망각한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만, 그 사소한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차질이 빚으면 고통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상당한 인물로 여기거나 받들어 모시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생활이 과연 어디서부터 가능한가라는 것을 느끼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언제나 인간은 현실을 망각하는 것인가? 일상에 대한 재발견은 바로 우리 삶을 재발견하는 것이고, 우리의 인생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이루어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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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바 마틴 글,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 윌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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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행복의 조건에서 21세기 자본주의 경제구조 사회에서는 아마 돈이 많은 사람들로 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해 돈이 없는 사람들은 아주 불행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라는 것으로 행복 그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인간의 행복은 돈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가능할지 모른다. 경제가 모든 인간의 불평등의 시작점이 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을 속박하는 쇠사슬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간다. 인간의 사회가 존재하는 곳 어디든지 문명의 이기심이 그늘지고, 누군가 부유하면 누군가는 더욱 가난해져야 하는 세계가 되었다.


인간에게 문명의 진보가 과연 도움이 되었는가? 오히려 기계의 발달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기보단 더더욱 착취와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 행복한 사람의 모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조차도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일상의 반복에 의해 기계적인 존재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그것은 정말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된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어본 타샤 튜더의 삶이 녹아있는 그녀의 집과 풍경을 소개하는 <타샤의 정원>이란 책을 보며, 왜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 생각해보았다. 타샤 튜터가 자신이 선택하고 살아온 삶은 돈이나 세견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튜더 가문의 집안, 즉 영국 왕가의 후손으로 영국에 살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녀는 미국에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 인위적인 문명의 손길보단 19세기 미국이 이제 정착민들이 힘차게 살아가던 그 건축과 생활 도구들이 즐비했다.


후기에 나오듯이 그녀의 집은 마치 1800년대 시대의 1800년대의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맨발에 의상도 fast-food가 아니라 자신의 농장에서 자란 과일과 채소로 가득하다. 책에 거론된 것처럼 타샤는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초반까지 가장 자연주의자로서 살아온 인간일 것이다. 나 역시 삶의 가치는 자연주의를 추구하지만, 그녀처럼 살아갈 수 없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는 자연주의자이기도 하나, 그녀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그녀의 집을 바라보는 풍경은 인상주의 화가가 그린 화폭과 같다.


현실의 사물들을 그대로 촬영했지만, 사진으로 보는 세계는 마치 꿈나라의 요정들이 사는 세계와 같았다. 꽃이 계절별로 시기별로 화려하게 피우고, 맛있는 산열매와 들열매는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풍요롭게 해준다. 아무런 투쟁과 혼돈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세계,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것은 나에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자연이 만들어낸 세계라고 할 것이다. 자연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타샤의 책은 당연히 아름답고 희망이 가득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녀처럼 살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그렇게 살기 위한 여유가 없을 것이고, 그런 여유가 된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살아갈 용기도 없을 것이다. 타샤의 삶이 타샤만의 것이 된 이유는 바로 그녀가 선택한 삶이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이 있는 세계에 사는 인간은 모두 평화적이고, 마음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자연 앞에 인간은 그 누구라도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다. 자유와 평등이란 정의적 가치는 항상 우리 인간사회에 이상적으로 논하지만, 실재 그것이 제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결국 인간의 마음까지 파괴하여 인간 그 자체를 파괴한다. 경치가 좋고 전망이 좋은 곳에 사람이 모이더니 결국 가게가 생기고 도로가 생기며, 마지막엔 볼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가게 테이블에 놓여있는 메뉴판이 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다. 자연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말로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으로부터 우리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예전에 읽어본 서적 1권이 생각났다.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이다.


루소는 말년에 파리사람들의 비웃음과 음해를 피하기 위해 시골로 오고, 자신의 마음에 안정을 찾기 위해 산과 들로 나가 식물을 채집한다. 가지고 가는 것은 연필과 종이가 든 가방과 자신의 몸 하나를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 루소는 산과 들로 나가 식물들을 바라보며 그 식물의 효능이나 이용성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자연 속에 있는 식물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세심하게 그린 식물의 잎과 줄기, 그 식물에 대한 묘사와 상상력으로 가득한 글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축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타샤의 집 역시 그렇다. 계절과 시기가 바뀌면, 각종 식물의 색이 바뀌고, 나무에는 많은 꽃들이 만개하며, 그 꽃이 지면 풍요로운 과실이 맺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만 먹는 게 아니라 이웃과 같이 나누어 먹고, 파티를 열어 모두 즐겁게 하루를 보낸다. 나에게 저런 삶을 찾아볼 수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와 같았다. 그런다고 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무를 좋아하는 편이다. 어느 골목길에 콘크리트 담벼락 너머로 나와 있는 목련이나 동백나무의 잎사귀와 꽃을 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봄이 다가오는 자락에 각종 색들이 만발한 산과 들을 보는 것 역시 삶의 여유와 행복을 찾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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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이란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들을 말하나, 사실 장난감은 우리 어린 아이들만이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라 어른들이 가지고 노는 것일 수 있다. 장난감은 영어로 toy, plaything로 사용된다. 다 큰 여성들도 인형을 수집하거나 다 큰 어른도 게임기를 장난감을 사용한다. 장난감이란 단순히 아이들만을 위한 물건만이 아니다. 단지 아이들이 좋아할 뿐이다. 문제는 장난감이 성상이 플라스틱이나 나무, 금속 등과 같은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장난감에 첨부된 성분이 벤젠, 페놀, 카드뮴, 납 등과 같은 매우 해로운 것들이 들어갈 경우가 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장난감을 한자 단어로 적절히 사용하면 玩具 製品이다. 한자어로 되어 있는데 완구제품이라고 하고, 완구세트라고 한다. 그런데 저 제품이 완벽하려면 우선 성분이 전혀 사람들에게 위해성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제조사가 유명한 레고가 아니라 (주)三靑이고, 좋은 나무와 플라스틱으로 장난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나무와 플라스틱으로 (주)三靑의 경비능력을 배양한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장난감으로 통해 성공하기보단 경비능력으로 성공한 三靑은 玩具 製品에 깨끗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제조과정에서 실수로 납과 카드뮴, 벤젠 등을 묻히게 되었다.

그런데 원래 벤젠과 카드뮴, 납 등은 인체에 들어가면 암에 걸리거나 골수에 악영향을 주어 빈혈이나 뼈 조직이 약해지고, 일본의 이타이이타이병은 카드뮴 중독에 의한 병인데, 이타이란 아프다는 일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玩具 製品 출시를 결정한 업체는 (주)三靑이 아니라 거대기업 (주)新世界 주주총회로 통해 판매가 가능했다. 우리 어린이들 같은 사람들은 불량한 玩具 製品에 노출되었네요. 문제는 필요한 사람이 구매가 아니라 억지로 반 강제적으로 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글을 읽는 분들 오늘 뉴스 보시고 느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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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멈추지 않고, 지금도 혹은 앞으로도 계속 흘러가는 존재다. 그 존재라는 것은 공간 위에 의해 처음 생성되겠지만, 이후 시간적인 기능으로 기록된다. 즉 인간의 시간이란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인간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더라도, 인간의 시간을 기록한 영상은 되돌릴 수 있는 기능이 생겼다. 우리가 미디어로 접하는 영상들은 모두 기록되어 녹화되어 다시 처음부터 재생되거나 역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거나, 그 재생된 시간처럼 자신의 시간이 같이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은 자유자재로 변해도, 그 시간을 조정하는 인간과 그 시간이 조정된 콘텐츠를 보는 인간 역시 비가역적인 존재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역사라는 말한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로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지나간 것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연결되어 있는 사슬처럼 연속된 하나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예전에 흥행한 영화 <변호인>에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이 작품 설정상 등장한 적이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아있기에 현재 우리가 다시 접하고 판단할 수 있다. E.H 카는 역사에 대해 역사가의 의무로서 생각하겠지만, <굿바이 E.H 카>에서는 역사라는 것은 역사가에 의해 정립되는 게 아니라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민중에 의해 정립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역사라는 것은 누구나 자신에게 하나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는 가치관이다. 인간이 살아온 현재는 결국 과거의 시간이 축척되어온 하나의 과정인 점에서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역사를 본인의 영역이 아니라 그 이전의 영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현대인들의 정체성에 부딪히는 문제가 아니라 과거 우리 수많은 인류가 부딪힌 문제였다. 하지만 현대사회 인간에게 역사라는 가치는 그저 지루한 소재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통계조사 젊은 세대로 넘어갈수록 우리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언제 일어나고 그것에 대한 경위나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1950년 한국전쟁처럼 동족상잔의 비극이나, 1905년 을사늑약에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탈된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자주권, 그리고 이어지는 1910년 한일병합 같은 일들이다.

이런 근현대사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도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는 현실에서 이제 그 이전의 시대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더욱 더 알 수가 없다. 자신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은 이상 어떠한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린 이런 부분에 대해 깊은 성찰과 비판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최근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장르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금회 네이버카페 애니큐어에서 실시하는 프로젝트 6번째가 “역사적 소재와 만화애니메이션의 만남”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역사적 소재에 의해 만화애니메이션만 논하는 것은 조금 부적당하고 여기고 있다. 만화애니메이션이란 것은 하나의 서사를 가진 매체이고, 문학소설이나 TV 드라마, 영화 등과 같은 다수의 미디어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는 점이다. 역사라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기록한 fact이다. 하지만 fact란 만들어진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실과 진실은 다를 수가 있고, 자신이 속해있는 진영이나 국가, 사회에 따라 기록은 달라진다. 한국의 역사에서 아직까지 고조선에 대해 논란이 쌓여 있고, 통일신라와 발해의 관계에서 한반도 북쪽으로 넘어서지 못한 것이 과연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이다.

한국의 민족에서 원래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라, 북방과 남방이 섞여 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의 시조가 단군이라면, 고조선의 영토를 거의 보존한 국가는 고구려로서 한국의 선조는 북방 계열인가? 아니면 고구려와 백제 멸망 이후 살아남은 남방 계열이 선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인류학적으로 북방민족의 기원은 자신들의 토지가 적합하지 않기에 사냥과 승마에 능하고, 남방민족은 비옥한 토지가 있기에 농경문화가 잘 정착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가야왕국이 김해평야인 점에서 식량과 물의 관계는 문명과 국가 성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역사적인 요소에서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 혹은 문화적 상황, 기후와 토양, 식량 등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오늘날 우리에게 그 역사라는 과거의 유산들이 이어져 내려온다. 당시에는 당연한 것들이나, 지금 우리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바로 역사와 역사의 소산물이다. 따라서 역사적 소재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요소에서 문화콘텐츠 관계는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최근 이런 일이 있다고 한다. 어느 드라마를 방영하거나 혹은 어느 영화를 상영하는데, 누군가 강력한 스포일러를 유발했다는 점이다. 가령 <정도전>에서 조선개국공신이 정도전이 죽고,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죽는다는 점이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각각 등장하는 주인공이 죽는 것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어버린 현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쇼를 보려는 관객에겐 짜증나는 스포일러이겠지만, 일반 상식수준 정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도전이나 이순신 모두 역사적 인물로서 한 사람은 조선개국 이후 왕과 신하의 권력에 대한 이해관계에서 죽어야 했고, 한 사람은 과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대결하다가 죽게 된다. 물론 이순신의 죽음은 왜국과의 전쟁보단 조선 내부의 권력적 암투에 의한 갈등도 매우 크다. 그런 점에서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 관점을 보기보단 다양한 조건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한국 대표 연예인에 일본에서 ‘욘사마’라고 불리는 배용준 씨가 출연한 <태왕사신기>에서 연출한 장면들은 너무 터무니없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한국드라마 중에서 왕과 왕비를 시해하려는 무리가 이상한 요술을 사용해서 암살한다는 설정 역시 상당한 오류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만약 사전에 시청자로 하여금 제대로 된 역사적 인식과 사실을 알릴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제 사극드라마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는 제작진에 의해 설정을 재조정하여 가상의 이야기나 인물, 사건 등을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드라마로는 꾸준히 KBS1방송에서 했고, 그 외의 방송사에서 제작했지만, 최근 극장가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영화들이 계속 이어져 나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콘텐츠에 대해 우리는 그 당시의 역사를 역사도서보다는 드라마나 영화로 통해 판단해 나가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시대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서 영상으로 통해 보는 것이 훨씬 더 잘 이해하기 쉽고,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정확한 문헌적인 정보에 의해 분석한 게 아니라 그저 연출가와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에 우리가 깊이 파고들면 역사적 사실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정보로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드라마나 영화는 대중들에게 친숙하기에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기가 쉽다. <굿바이 E.H 카>에서 모든 사람이 역사가가 되는 것은 좋으나, 문제점은 모든 사람들이 역사가가 되기 위한 사전 지식이 없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그나마 한국에선 대부분 문화콘텐츠가 영화나 드라마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우리 애니큐어가 지정한 것은 만화애니메이션이다. 국내 만화책은 모르나 애니메이션으로 역사적 소재를 제대로 다른 작품은 거의 없다. 해보았자, 위인들을 소재로 한 교육용 애니메이션이지, 그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차라리 web-toon이나 만화를 영화로 만드는 경우가 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나마 만화책에서 몇 편 제작되고 있다고 하나, 한국 만화시장규모와 인식을 고려하면 매우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과 다르게 일본은 어떻게 볼 것인가? 솔직히 말하여 일본의 문화콘텐츠에서 만화애니메이션의 규모는 매우 거대하며, 최근에 라이트노벨, 피규어, 음반 등도 활발하여 일본의 하위문화는 단순히 하위문화 공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을 보면 항상 느끼나, 그들은 자신들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만화애니메이션 내에 반영하고 있다.

언제나 벚꽃의 등장은 자신들의 문화적 요소를 잘 들어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은 그런 문화적 정체성만 드러내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관념도 심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작품에서 대표적으로 나오는 설정이 바로 전국시대와 메이지유신에 대한 이야기다. 전국시대와 관련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 일본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메이지시대의 도쿠가와 막부를 지키기 위한 신선조 그리고 유신자사들의 싸움은 늘 드라마나 영화, 심지어 만화애니메이션에 심하게 반영되어 이따.

전국시대에 대한 소재로 미소녀 모에로 통해 만들거나, <바람의 검심>이나 <박앵귀> 같은 작품들은 메이지 시대 초반의 갈등들을 다룬다. 문제는 그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소재로 하기에 전쟁이란 것은 많은 인간들을 죽이고, 가옥과 밭을 파괴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나, 만화애니메이션에선 위대한 영웅들이 활보하는 거대한 서사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전쟁에서 싸우는 장수들은 엄청난 동경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한 인물로 묘사한 점이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은 거기서 희생되는 많은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처럼 여긴다는 점이다.

전쟁의 목적은 평화 내지 정의라는 이름으로 승부한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정치적 대의는 백성 혹은 국민이란 존재를 위해서라고 한다. 전쟁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과연 그런 것인가? 과거 어느 영주의 싸움은 그 영주의 영토에 사는 주민 모두들에게 부여된 전쟁이라고 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지배계층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사지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죽는 것이 과연 영웅이라고 칭송해야할 전쟁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화애니메이션에서 역사적 소재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미화된 점이 분명한 문제다. 2015년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 <전국시대> 시리즈를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 <전국시대>를 보면 그 당시 장수들을 외모나 성격 등의 설정을 지나치게 미화시켰으며, 그 캐릭터에 반대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저하시킨 점이다. <의풍당당 카네츠구와 케이지>를 보면 주인공 2명과 일부 등장인물을 제외하면 모두 하찮은 존재로 묘사한다.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에서 역사적 소재로 만든 작품들의 문제란 바로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점이고, 그들이 하는 행동들에 대해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는 주요 이용대상자가 젊은 계층과 학생들이다. 그들이 즐기는 만화애니메이션에 역사적 소재는 역사적 인식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큰 문제점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에서 일본열도를 통일한 대업에 대해 큰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이 임진왜란의 실패라는 점에서 하나의 비극으로 볼 수 있다.

서사와 역사의 차이점은 서사는 끝이 나면 또 다른 서사로 이어지는 것이나, 역사는 또 다른 역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사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나,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온 이야기다. 그러나 만들어온 이야기를 단순히 만화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로 통해 충분히 역사적 인식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역사적 사건들을 소설이나 영화로 제작하여 흥행하면 사회적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가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을 때 사회에 큰 충격이 주었다.

장애복지시설에 일어난 폐단이 불러일으킨 사건에 대해 사회적 이슈는 매우 대단했다. 단순히 역사적 소재라는 것은 먼 과거만이 아니라 최근의 이야기도 역사적 소재인 것이다. 영화 <변호인>에선 부림사건이 이외에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나오는데, 현재 대법관 임명 안을 두고 후보자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개입한 법조인이란 점에서 역사적 소재를 이용한 미디어콘텐츠가 생각보다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 점이다. 물론 최규석 작가의 <100℃>란 작품 역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를 전후배경을 삼은 작품이다.

어떤 방식이든지 일본이나 한국에서 제작된 만화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등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역사적 인식을 심어주거나 혹은 반성하게 해줄 수 있는 전환지점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역사적 소재가 콘텐츠로 제작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허구의 서사일 뿐이다. 사실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 아래 스스로 찾아갈 수밖에 없다. 단지 조금 아쉬운 것은 역사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승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패자의 기록은 늘 어리석은 존재로 될 뿐이다. 아니라면 치욕과 모욕 그리고 고통과 억압의 상처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와 죄악, 혹은 부당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외압과 강탈을 좀 더 명확히 찾아내지 않는다면 똑같은 비극은 반복되고, 그 비극의 수혜자는 바로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후예다. 만약 미화되거나 조잡스럽게 조작된 콘텐츠를 비판 없이 수용한다면 과연 제대로 된 미래가 나올까? 물론 보는 그 순간은 재미로 끝나면 모르지만,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따르게 된다. 특히나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장르는 오락이나 재미로 받아들이기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진중권 교수의 <이미지인문학1> 마지막 편에서 재미있는 정리가 나온다.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디지털은 사진의 기록적 성격을 파괴한다. 이로써 조롱당하는 것은 역사,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주의 의식이다. 아날로그 기록사진은 역사에 봉사하는 이미지였다. 그것은 문자로 이루어진 ‘상징계(The symbolic)'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조작사진은 증언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의 의무에서 독립된 순수 자율적 이미지로서 환영과 허구로 이루어진 ’상상계‘의 현상이다. 백남준은 이미 1970년대 초에 더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은 ’이미저리(imagery)'나 ‘비디오리(videory)'뿐이라고 말했다. 역사는 상징계에서 상상계로 거처를 옮기고 있다. 사실은 허구로, 증명은 날조로, 진리는 오락으로 대체 된다.”

우리가 주로 다루는 만화애니메이션을 생각하자면, 이들은 완벽한 이미지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조작된 영상물이다. 최근 영화와 드라마 같은 실사영상물이 아니라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경우 더욱 완벽한 허구와 오락거리다. 게다가 날조된 설정과 인물이라면 더욱 완벽한 상상의 세계가 아닌가? 하지만 제 아무리 상상의 세계 역시 현실적 기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19세기까지는 현실이 상상의 세계를 지배한 시기지만, 20세기부터 점점 역전되어 이제는 상상의 세계가 현실을 지배한다. 역사적 소재로 본다는 만화애니메이션이 주제라고 하나, 그런 주제로 본다면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해 너무 간단히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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