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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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를 한자 사자성어로 말하자면 인생이란 바로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허삼관이 살아온 인생이란 연속적인 희망과 좌절, 아픔과 기쁨, 산으로 올라가다 바다 아래까지 들어가는 다양한 굴곡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허삼관 매혈기>를 단순히 허삼관이란 가상의 인물에 대해 적은 글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이 소설은 시(소설)처럼 당시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요, 그것은 더 나아가 우리 같은 보통 남자의 이야기다.


물론 허삼관만 주인공이라 하여 허삼관만 중요인물만 아니다. 그의 아내 허옥란, 세 명의 아들, 허소용, 임분방, 혈두, 같이 피를 팔아 돈을 받은 사람들 모두 우리의 모습이고 이웃이다. 허삼관은 그렇게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누구보다 위대한 아버지와 남편이었다. 그의 행동을 보자면 소심하고, 때로는 잘 삐치고, 어찌 보면 너무 바보 같은 남자였다. 때로는 과감하기도 하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기도 하고, 상상 이상으로 현명하기도 했다. 모든 인간이 언제나 같은 모습과 같은 얼굴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상황에 따라 인격과 감정이 실시간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모든 것이 변해도 그가 인간적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너무 인간적이라 감정에 말려 들어가는 그는 때로는 충동적이기도 했다. <허삼관 매혈기(許三觀 賣血記)>는 제목을 보면 성이 許씨로 허락하거나 들어주는 것이고, 삼관은 3가지를 보는 것이다. 그의 이름처럼 그가 3가지를 보는 것은 바로 3아들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름은 남편과 아버지로 살아가고, 일락이와 이락이 그리고 삼락이라는 즐거움을 주는 3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은 결국 피를 팔아 가족을 만들고(결혼), 가족을 지키며(대기근), 가족을 살렸다(일락이의 간염).


한 남자가 자신의 피를 팔아 가족 안에서 보인 행동은 인생굴곡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피를 팔아보면서 단 1번도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다. 단지 허옥란과의 결혼은 자신을 위한 것이겠지만, 가족의 탄생은 어느 한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가족과 가족이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키는 것과 같다. 허삼관의 아버지는 잘생긴 남자고, 어머니는 상당한 미녀이나, 아버지 죽은 이후에 어느 대령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한다. 가족이 없던 허삼관에게 가족을 만드는 것이란 자신이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어린 시절 혼자 외로이 걷다가 작은 아버지의 구조 아래 겨우 청년이 된 허삼관은 작은 아버지 넓은 등에 업혀온 기억을 절대 잊지 않는다. 일락이가 비록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지만, 일락이의 모습과 행동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공허감과 일락이에 대한 사랑은 어린 시절 자신의 작은 아버지가 한 것처럼 일락이에게도 보여준다. 낳아주신 아버지 이상으로 길러주는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허삼관은 그래서 그 어디서나 보일 수 있는 아버지, 보통 사람이 가족이란 공동체로 어떤 삶을 사는지 보여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배고픔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피를 팔고, 자신의 생일에 아이들에게 고기를 아내에게 붕어찜을 해주는 그의 모습은 참 애처롭다. 자신의 아내가 창녀라고 모함당해 인민재판을 당할 때, 그 장소가 집으로 옮겨지자, 아들들은 어머니 허옥란 대신 인간 허옥란에 대한 비판을 한다. 그때 어머니의 과거 부정을 모두 지적하자, 허삼관은 자신이 예전에 임분방이란 여자와 정을 통한 것을 아들들에게 고백하여 아내의 허물을 자신의 허물로 덮어준다. 물론 사리로 따지자면 아내의 부정은 아내가 원한 게 아니라 허소용에게 억지로 강간당한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게 일락이었다.


일락의 정체성을 알게 되면서 화가 난 허삼관은 젊은 시절 허옥란과 임분방 사이에 고민한 것을 기억하고, 임분방과 홧김에 정을 통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직접 아이들에게 하고, 아내를 자식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준 모습에서 그의 가족사랑은 처음에 거부와 배타로 시작하나 마지막엔 포용으로 이어진다. 너무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그였지만, 때로는 인간의 감정 아래 연민의 손길을 가족에게 건네준다.


그런다고 하여 <허삼관 매혈기>는 단순히 허삼관란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 가족과 주변만 적는 게 아니다. 문화대혁명 시기와 모택동의 정치적 행위가 시골에 미치는 모습에서 당시 시대적 모순도 보여준다. 집안에 있는 모든 살림기구와 식량을 정부에서 강제로 징발하여 어느 일정한 장소에서 배급하는 점이나, 대기근시절 정부에서 아무런 조치 없이 주민들에게 알아서 해결하라는 점, 일락과 이락이 정부운영에 따라 일손으로 차출될 때 정부 관료의 부패한 모습은 허삼관의 피를 팔게 만들었다.


허삼관이 피를 판 것은 분명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지만, 때로는 피를 국민들에게 훔쳐내는 부조리한 세계도 한 몫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허삼관의 피는 가족의 존속, 국가의 약탈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생명이었다. 그러나 치아가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허삼관의 피는 더 이상 팔아넘기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피를 팔지 못한 것에 대해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눈물을 흘린다. 허삼관의 모습을 본 동네사람들은 그의 아내와 아들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자, 허삼관에게 찾아간 가족들은 그를 달랜 후 허옥란은 허삼관을 데리고 남편이 피를 판 후에 자주 가던 승리반점에 같이 간다. 그리고 허옥란은 남편이 좋아하는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시켜주자, 허삼관은 이때까지 이렇게 맛있는 돼지간볶음은 처음이라 한다.


이때까지 여기서 먹은 것은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먹었던 돼지간볶음이 이제는 자신을 위해 먹는 돼지간볶음이다. 힘들고 고된 시간을 보내고, 가족을 지키고, 아들들은 모두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잘 살아간다. 그런 허삼관에게 자신의 삶은 행복했는지 아닌지는 직접 말하지 않으나, 적어도 마지막 그가 한 말을 다르게 생각하면 그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해주고 있다. 우리 인생도 허삼관처럼 굴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에게 말해주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우리 역시 근엄한 얼굴로 언젠가 그게 인생이 아니겠냐고 떳떳하게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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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엘로이즈 2 루소전집 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책세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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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은 루소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이 있는 계몽주의 청년들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들고 있었고, 여자들은 <신엘로이즈>와 <에밀>을 읽었다. 사실 프랑스공화국이 세우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으나 그 사상적 근본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루소가 유명하게 된 동기는 <신엘로이즈>와 <에밀> 덕분이었다. 특히 <신엘로이즈>의 열풍은 상당한 열기를 만든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보수나 진보진영 그리고 그 누구라도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은 루소에 대해 찬양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인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 당통 같은 자코뱅당원들이 있었으나, 이에 반해 지롱드에서 활동한 롤랑 부인 역시 루소의 열렬한 팬이었다. 롤랑 부인은 귀족의 아내였고, 당시 여성이 정치적으로 배제된 상황이라고 했으나, 그녀는 프랑스혁명의 여걸이었으며, 단두대 아래 목이 잘려 나가기 전에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라고 외친다. 롤랑 부인이 프랑스혁명에 참가할 때 루소의 <신엘로이즈>라는 소설에 빠져들어 루소가 살아생전에도 열렬히 루소를 사모했다.


 

루소의 <신엘로이즈>는 보면 단순히 생각하면 쥘리 데탕주와 생 프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은 연애소설로 볼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소설은 현실의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생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다룬 서적이다. 겉으로 본다면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철학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책이다. 게다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에밀>을 읽다보면 <신엘로이즈>는 루소 저작의 다양한 사상과 가치가 하나의 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엘로이즈1>을 보면 보통 연애소설처럼 사랑하던 남녀가 현실적 운명 앞에 헤어지면, 남자는 멀리 여행을 가는 결말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다시 돌아와서 재회한다면? 게다가 그 재회의 장소가 그 사랑하던 그녀가 남편과 자녀들이랑 같이 사는 집이라면? <신엘로이즈2>를 읽는 순간 운명의 장난 앞에서도 과거 사랑했던 연인이 이제는 다른 인연으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거친 바다로 나간 생 프뢰, 그는 목숨을 몇 번의 위협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다. 거친 바다생활에서 세계를 바라본 생 프뢰는 루소의 자연주의적인 가치관이 그대로 편지 속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산업이라는 것이 개화된 사람을 그에게 부족할 것이 전혀 없는 은둔으로부터 끌어내어 새로운 욕망의 구렁텅이에 다시 빠트리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라고 보낸다. 문명화가 되지 않은 미개한 영토에 가서 그 영토와 그 영토의 주인인 원주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인이란 야만족들의 폭력에 생 프뢰는 깊은 아픔을 느꼈다.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을 한탄한다.


 

“자연은 인간이 눈에 자신의 진정한 매력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인간은 그 매력에 너무 둔감하고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훼손시키지요. 자연은 인간의 자주 찾아오는 곳은 피해요. 자연에 가장 감동적인 매력을 떨치는 곳은 산 정상, 깊은 숲 속, 인적이 닿지 않은 섬들이에요. 자연을 사랑하지만 그렇게 멀리 자연을 찾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자연에 폭력을 쓰게 됩니다. 말하자면 자기들에게 와서 함께 살 것은 자연에 강요하지요. 그런 일에는 어느 정도 환상이 따르기 마련이에요.”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이 파괴되면 다시 인간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말한다. 쥘리의 집을 보면 분명 쥘리는 집 주인 볼마르의 아내이나, 그녀는 먹을 만큼만 먹고 남는 것은 저장하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도와주기를 권했다. 억지로 땅을 사서 빼앗는 게 아니라 자신의 땅을 정성스레 가꾸어 그곳에서 좋은 곡식을 나오도록 했다. 집안에 하녀와 주인의 관계는 명확하나, 그 관계의 유지는 미덕과 포용에 의해서였고, 하인들이 집안에서 일한 뒤 식사를 한다면 같이 식탁을 이용하도록 했다.


 

제 아무리 계급이나 지위가 다르더라도 쥘리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그 자체로서 대해준 것이다.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에서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자라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것이 옳겠지만, 인간의 세상은 이미 사회화가 되었기 때문에 도시에 사는 사람 모두 자연으로 갈 수 없다. 루소가 말한 자연이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고, 그것은 인간의 선한 감정으로 돌아가란 뜻이다. <신엘로이즈>는 인간이 가진 이성을 우외로 두기 시작한 계몽주의 시대에 나온 소설이다. 그 자신이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 반계몽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진 루소는 이성보단 감정이란 것을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가령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감정적인 것을 배제하는 볼마르의 경우, 마지막엔 쥘리의 죽음 아래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분리할 수 없는 존재적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쥘리의 죽음에 볼마르는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성과 감정의 싸움에서 최종승리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 감정에는 쥘리의 마음에 깃든 자연적인 감정 즉 미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신엘로이즈>는 미덕을 상당히 강조한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로코코시대로 탐미주의가 문화적으로 주도했다.

 

여성은 수많은 남자 애인을 두고, 남자들은 여자꽁무니 쫓아 따라 다닌다. 파리의 사교계를 보자면 바보들의 천국이라 볼 수 있다. <신엘로이즈2>에서 “파리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교계를 안락하고 수월하게 만드는 것을 뽐내는데 이 수월성은 다름 아닌 그 거드름에 관한 규칙에서 나온다. 상류사회에는 오직 관습과 규칙밖에 없다. 이 모든 관습은 번개처럼 생기고 사라진다. 오늘날의 관습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해지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다)이 세상을 흘러가게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허망한 욕심과 이기심들이 인간과 자연을 파괴한 것이다. 그 당시 결혼문화는 쥘리의 모습처럼 어린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 시집간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다행히 쥘리는 남편의 인격에 사랑을 느낀다)과 살아가는 것은 결국 지옥과 같은 세상이고, 거기에 많은 파리의 남녀들은 타인의 부부를 탐하고 욕망했다. 이런 욕망과 이기심은 여기에 끝나지 않고, 자기 후손에게 이어졌다.


 

나이가 어린 아이에게 마치 천재로 생각하고, 억지로 밀어 넣은 지식 앞에 아이들은 자기의 본질적인 삶을 찾아가지 못하고, 이기심과 교만심만 늘어만 가고, 나중에 남에 도움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육현실을 보면 루소의 선견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신엘로이즈>에서 쥘리가 말하는 교육가치관은 후에 <에밀>에 이어진다. <에밀>을 읽다보면 쥘 리가 한 대사하고 많은 유관성을 가진다. 진정한 아이의 스승은 아버지고, 그 아버지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아이 역시 제대로 될 수 없다. 아이의 교육은 바로 아이에게 시작되는 게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에밀>과 <신엘로이즈>의 유사성은 <에밀>에서 에밀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는 독신인 남성이고, 친한 친구에게 아들을 위탁받아 교육을 시킨다. 그 친구는 가난한 귀족이나, 이제 아이를 기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친구에게 가정교사를 부탁한다. 그런 점을 본다면 <신엘로이즈>에서 쥘리는 병으로 인해 죽고, 병으로 죽기 전에 생 프뢰에게 자신의 아들을 가르쳐주기 바란다. 원래 생 프뢰는 쥘리와 쥘리의 사촌인 클레르의 가정교사였고, 결혼 후에 자신의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에밀>을 읽어보면 에밀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는 <신엘로이즈>의 생 프뢰라는 점은 그렇게 맞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이에 대한 인권을 존중하고, 아이 그 자체를 자연적 존재로 보는 <에밀>에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동등하다는 평등사상은 결국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에밀>은 인간의 자연적 그리고 도덕적 자유를 위한 도서이다. 남들에 의해 길들어진 인간은 나약하여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아마 그런 완벽한 인간은 <신엘로이즈>의 쥘리였을 것이다. 열정적인 감정과 미덕으로 자연 그 자체를 살려내어주고, 인간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유럽의 여성들은 쥘리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신엘로이즈1>에서 쥘리는 생 프뢰에게 “당신은 ‘우리 서로 사랑하기 위해 살자’라고 말했는데, 그건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아아! 이렇게 말했어야 해요. 살시 위해 우리는 서로 사랑하자‘라고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그저 허례허식과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온 여성들, 특히 로코코 시대의 불륜적인 로맨스는 상위계층 여성들이 주로 즐겼다. 하급계급 내지 가난한 사람들은 늘 생계에 고단함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18세기까지 책 1권이 매우 비싼 물건이었고, 그 가격은 보통 가정이 2주 동안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상위계층 또는 부르주아 계층의 여성 정도였을 것이다.

 

여성은 정치적으로 배제되고, 문자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어려운 시대만큼 루소의 서적은 당시 여가생활을 책으로 찾을 수밖에 없던 여성에게 매우 큰 화제가 된 것이다. 편지에서 보여주는 사심 없이 오로지 진심으로 이루어진 문체와 아름다운 글의 흐름은 그녀들의 눈을 사로잡기가 충분했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그것에 대해 뛰어넘어 보자고 했던 루소의 소설 <신엘로이즈>는 낭만주의 소설의 모태가 되었다. <신엘로이즈2>에서 번역자 김중현 교수의 해설을 읽어보면 “낭만주의자들은 루소를 ‘자연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언자, 감정과 열의 원초적 힘을 재발견하고 이를 사회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사상가’라고 평가하며, 바로 <신엘로이즈>가 그러한 평가의 시발점이 되었다.”

 

 

문명에 의한 자연의 파괴는 결국 인간에 대한 파괴로 이어지는 것처럼 루소의 가치관은 세상의 중심은 권력층이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라의 힘을 가늠할 때 재사(才士)는 군주의 궁정과 항구, 군대, 병기고, 도시들을 보러 갑니다. 반면에 진정한 정치가는 경작지를 돌아보며 농부들의 초가집으로 갑니다. 전자는 그 나라 국민이 무엇을 해 놓았는지 보고 후자는 그 나라의 국민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봅니다.”

 

 

이게 단순히 연애소설이었다면 이런 글이 나올 수가 없다. 낭만주의소설로서 정치와 사회에 대한 루소의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민주주의국가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정치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이런 문구는 평생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글이다. 루소는 시골에 사는 농촌주민들을 자연인으로 보았다. 바로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그 나라의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 본 것이다.

 

 

루소의 <신엘로이즈>를 읽어보면서 이 소설은 18세기 중반에 나온 도서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순간 21세기 인간이 나 역시 많은 깨우침을 가져간다. 물론 종교적 가치관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에 대해 부정할 수 없다. 물질문명에 빠져들어 인간성의 본질적 의식 대신 기계적인 의식만 주입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 스스로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신엘로이즈>에서 이런 대사가 인상 깊다.


 

“우리의 욕구 중 가장 큰 욕구이자 우리가 만족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욕구는 욕구를 느끼려는 욕구이며, 우리가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을 그 비참을 아는 거예요. 지혜로워지기 위해 우리는 강해질 거예요.”, “고통 없이 사는 것은 인간의 상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사는 것은 죽어있는 거예요. 신이 아니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비참한 인간일 거예요. 그는 욕망하는 기쁨을 박탈당할 거예요. 다른 모든 박탈이 이것보다는 더 견딜만한 거예요.” 우리 인간이 자연적 그 존재를 상실하고, 기계적 물질만능주의로 변모하여 스스로 삶의 의지조차 찾지 못한다. 물론 그것을 깨닫는 것은 인간 그 본인이다. 그 본인을 찾아가는 것이 곧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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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대디, 플라이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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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y Daddy Fly>는 가네시로 카즈키의 소설로서 좀비들의 이야기 <Revolution No.3>에서 파생된 작품이다작품 세계관은 <Revolution No.3> 토대로 좀비 친구들이 2학년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들을 스즈키라는 40대 후반의 남성의 하루일과로서 진행되는 이야기다소설의 분량은 불과 200페이지 정도이나그 안에 담고 있는 재미와 감동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날카로운 사회에 대한 작가의 분노와 일침이 숨어 있다. <Revolution No.3>에서도 좀비들은 공부를 못하는 것도 모자라 아무런 인맥이나 힘도 가진 것 없는 청춘이다.

 

가진 것이라곤 잔 머리를 굴리거나 바보 같은 일만 저지르는 친구뿐이다가진 것이 아무 없기에 오히려 더 부자인지도 모른다오히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해 쇠사슬에 의해 속박 당하기도 한다물론 가진 것이 너무 없으면 비참할지도 모른다그런다고 그런 비참한 삶에서도 몸부림치는 좀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이번에 좀비들은 재미있는 아주 흥미로운 아저씨를 발견했다세이와여자학원 축제에서 자신들의 유전자를 품어줄 애인을 만들려는 좀비들은 안타깝게도 그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어떻게든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해 세이와여자학원 축제에 들어가서 어느 여학생에게 연락처를 받아 연애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그런 점에서 스즈키와 좀비들의 만남은 우연 아닌 절대적 숙명이었다사회적 멸시받는 좀비들사회적으로 가진 것도 없이 언제나 떠밀려 살아온 스즈키사실 알고 보면 좀비나 스즈키나 우리 일상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회사에서 일만 하고 집에서 충실한 가장하지만 그 시계 같은 인생이라도 스즈키는 아내를 사랑했고특히 외동딸 하루카에게 언제나 좋은 아버지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인생목표가 틀어졌다딸에게 폭행한 남학생이 유명한 명문학교의 화려한 운동선수라는 점이다권투시합에서 champion 3연패를 거머쥔 남학생에게 스즈키의 딸은 가혹하게 얻어맞았다그런 후 그 학교 지도교사와 교감은 아무 일도 없다는 식으로 대하고마치 스즈키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대했다그런 비굴함딸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스즈키는 새로운 인생을 목표로 한다이 소설에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스즈키의 열망과 즐거운 장면그리고 어이없는 해프닝이 아니다.

 

살아있는 인간이나 언제나 기계처럼 일만 하고상자 안의 꼭두각시로 살아온 중년남성들이 새로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힘이 없고 나약한 삶에서 오직 피하고 숙이는 것에서 일상을 지키는 그들을 말이다비굴할지 모르나 남자가 머리를 숙이며 비굴하게 웃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어깨에 자신이 아니라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가족이 있기에 용감해지고 비굴해질 수 있는 것이 남자다그러나 하루카의 모습에서 용감해질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비굴한 모습으로 가족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는 스즈키의 삶에 심각한 간극이 생긴다.

 

스즈키의 반란은 그렇게 시작한다반란 아니 혁명의 주체는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힘든 훈련을 순신에게 받은 스즈키고등학생에게 맞고 욕먹고 존대조차 받지 못한 그 1달 반을 견디고마침내 원수를 외나무에서 만났다링은 좀비들이 준비하고 그는 그동안의 고생을 토해낸다하지만 단순히 이 유쾌한 반란을 하는 아저씨엉뚱한 짓만 벌이는 좀비들의 모습만 우리는 생각해선 안 된다이 좀비들이 아저씨를 응원하고 도와주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좀비들은 말 그대로 좀비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을 것 같은 존재다좀비 중심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이방인과 같은 존재다일본은 메이지시대로 올라가면 대동아공영정신즉 통일과 화합이란 미명아래 북해도의 아이누족을 무참하게 학살하고그들의 땅을 빼앗아 버렸고전통왕족이 있었던 오키나와마저 침공해 그들의 문화를 파괴해버렸다그리고 조선을 빼앗아 스즈키의 싸움스승인 박순신은 재일교포로 심각한 인종차별을 겪는다대부분 이민족이거나 혹은 섞이지도 못할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사실 어째보면 아무런 힘도 없이 오늘 하루 열심히 시계태엽처럼 돌아가는 스즈키 같은 일본국민 역시 그들 스스로 이방인이었을 것이다강자와 권력 앞에 아무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등을 숙여야 하는 것에 말이다그런 스즈키에게 자신은 살아있음을 알리는 방법은 오로지 자신의 딸을 폭행한 녀석에게 찾아가 한 방 날려주는 것이다비록 권투선수에게 날리는 한 방이나 그 속에는 세상의 부조리와 부당한 도덕까지 날려주는 것이다세상에 나와 특히 남자는 그 누구에게 영웅이 될 필요가 없다남자가 세상에 나와 그를 영웅으로 봐야할 사람은 오직 그 남자의 자녀들일 것이다.

 

그래서 <Fly Daddy Fly>인 것이다아빠 날아라평범한 아버지는 늘 현실의 막다른 길에 부딪히지 않게 계속 힘든 삶을 살아간다물론 모든 사람들이 힘겨워 하나가족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정신적 상실감은 그 어떤 것보다 참을 수 없을 것이다이 소설에서 가장 가슴이 뭉클한 장면은 스즈키가 집에 가는 버스를 탈 때정해진 시간 타는 손님 그리고 버스기사스즈키는 자신이 강해질 때마다 버스와 달리기 경주를 한다언제나 지는 그였지만당연한 약속처럼 싸움 전날에 버스를 달리기로서 이긴다.

 

버스기사는 스즈키를 바라보고 있었다버스기사는 모자 대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눈물을 흘리며 스즈키에 손짓을 한다어째보면 그들 모두 오늘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이다스즈키의 모습에 자신들이 직접 행동하지 않더라도적어도 지금 우리는 살아있다는 표정을 보여주었다죽어있는 자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단지 무표정한 얼굴이 공허한 눈빛으로 보이기도 혹은 보이지도 않은 것을 보고 있다. <Fly Daddy Fly> 언젠가 나도 아버지가 될지 모른다그때 나는 스즈키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글쎄아마 그것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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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인즈 게이트: 부하영역의 데자뷰 - 극장판
와카바야시 칸지 감독, 미야노 마모루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슈타인즈 게이트>는 잘 아시다시피 TV 애니메이션과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TVA에서 오카베가 망상이 심한 과학자로 나오지만, 그의 망상은 하나의 사실이 되는 충격적인 작품이다. 물론 우리는 처음 그의 모습을 보면 분명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처음부터 그의 행동이 작품 내에 다른 캐릭터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관객에겐 그저 중2병 환자라는 것에 동일하게 인식한다. 하지만 그의 가설과 크리스 박사, 가제트연구소에 모이는 인물들 중심으로 신기한 일들이 발생된다. 우연히 시작된 실험, 그리고 마유리의 죽음 등이 이어지면서 오카베는 계속 의문을 품고 시간여행을 한다.

 

그러면서 오카베는 마유리의 죽음에서 구하고, 시간여행 패러독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임머신을 악용한 자까지 찾아내어 크리스까지 구한다. 이야기 흐름에서 플롯의 구조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요약하자면 미치광이 과학자를 표방한 공대생이 자신의 망상이 그대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결국 친구와 세계를 구한다는 뜻이다. 이야기의 요약은 간단하지만,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요소들은 매우 복잡한 게 <슈타인즈 게이트>. 기본적으로 타임머신이란 기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물리학의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가 나온다.

 

우리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서 먼저 1차원은 점, 2차원은 면, 3차원은 공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는 현실은 3차원적인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슈타인즈 게이트>3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1단계 차원이 높은 4차원 세계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캐릭터로 주축은 간단하나, 그 인물이 놓인 시공간적인 조건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과거 <Back to the future>라는 영화로 시작하여 여러 가지 시간여행을 하는 작품이 나온다. 시간여행에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점은 시간을 물리적 에너지로 본다는 점이다. 이런 가설이 등장한 것으로 블랙홀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데, 블랙홀은 빛까지 빨아들이는 것이다. 질량이 없는 에너지조차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화이트홀로 통해 다른 시공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론이 존재한다.

 

현대물리학 이론에서 결국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은 현재 정해진 한 시대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을 내세울 수 있다. 이른바 인간의 사는 세계는 공간인 3차원이지만, 정해진 하나의 역사적 세계에서는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세계만 존재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적인 가설이지 현실적인 실험에서 성공할 리가 없다. 만약 진짜 존재한다면 그것을 누군가 증명해야할 것이나, 단지 이론만 존재하고, 상상에 의한 이야기에 존재하는 가상의 시나리오다. 그런다고 이런 이론이 현실적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만약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시공간 속에 또 다른 내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슈타인즈 게이트>는 그런 인간의 선택에 의해 자신과 주변 그리고 세계의 흐름이 바뀐다. 나비효과라고 하여 나비의 날개 짓이 사이클론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처럼, 작은 변화가 결국 큰 현상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도록 극단적인 발상이며, 단지 실행가능은 역시 공상세계의 이야기다. 그런다고 다르게 보면 사소한 사건이 하나의 발화점을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각 제국주의의 영토 확장과 더불어 지나친 자본주의로 인한 상품의 판로개척을 위한 명분으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저격사건에서 시작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강력한 입지를 가진 황태자 부부라고 하여도 전 세계가 전쟁을 참가해야할 명분은 너무 떨어져 보인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는 1917년 러시아혁명 동기가 되었고, 러시아혁명은 1919년 한국에서 삼일운동의 계기도 되기도 했다. 전혀 연계성이 없어 보이는 결과에서 역사는 의외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슈타인즈 게이트>에서 오카베가 TVA에서 시간여행을 해도 극장판에서 크리스를 만류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역사가 대폭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인간의 간섭은 다른 방식으로 우연적인 사건으로 일어나고, 그것은 좋든 나쁘든 분명 어떤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자로서 양심을 주장하는 크리스의 입장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의 발달은 결국 인간의 문명과 생활 그리고 인간 그 존재적 가치까지 변하게 만든다. 20세기부터 생명공학이 시작되어 유전자조작이 시작되고, 태아를 시험관에 키워 출산하는 일까지 일어난 21세기 현재다. 게다가 시간의 조작은 엄청난 윤리적 문제를 만들어낸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제시한 인간은 시간적 존재다라는 단어가 <슈타인즈 게이트>에서 거론된다.

 

현대물리학과 눈에 보이지 않은 대상을 연구하는 형이상학은 과학과 철학의 관계다. 그런 점에서 <슈타인즈 게이트>는 현대물리학 중심을 소재로 만든 작품이나, 분명히 봐야 할 점은 철학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대상이란 점에서 인간에게 관념에 대한 연구대상을 두고 고민한다. 바로 시간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다. 시간은 우리가 시계로 보는 시, , 초로 구분되어 있지만, 그것은 단지 시간이란 것을 인간이 사용하기 위한 도량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지 시간이란 존재 그 자체는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은 5가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손으로 만지고, 혀로 맛보며, (물체에 힘을 가하면)로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그럴 수 없다. 인간이 시간을 알고 있기에 죽음이란 고통을 생각할 수 있고, 시간을 인지하기에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이 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공간적 한계성이 머물러도 결국 시간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개인의 시간이 상실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오카베에게 리딩 슈타이너라는 인간의 기억장치를 말한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본인의 기억을 말이다. 그것은 데자뷰 현상으로 일어나고, 미래를 예지하기도 한다. 그런다고 하여 병렬세계가 진짜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단지 이론에 의해서만 이야기로 만들 뿐이다.

 

문제는 병렬세계에 존재하는 본인은 분명 현재에 존재하는 본인과 전혀 다르다. 다른세계에 있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만들고 변모하면 결국 다중적인 병렬세계에 리딩 슈타이너에 대하여 인식하는 본인은 다중적인 병렬세계의 간섭에 의해 현재의 세계에 존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극장판에서 오카베 존재의 상실은 바로 현실에만 오카베 그 자신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에 존재하기에 크리스는 오카베의 어린 시절로 가서 강력한 기억을 부여한다.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이 자신이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기억을 남기고, 그것은 곧 시간적 요소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오카베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카베가 사라지는 것일까? 인간의 존재에서 분명 그가 물리적으로 존재하더라도 자신의 관념 안에 그것이 없다면 없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오카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오카베의 시간이 사라지고, 오카베의 시간이 사라지면, 오카베 주변사람들이 오카베와 함께한 시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인간의 존재성에서 자신 안의 영역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부류도 있지만, 다르게 본다면 자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있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기보다는, 자신이 존재하는 사실을 타인이 인지하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할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른 누군가와 시간적 공유로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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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3-03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타인즈 게이트...이거 처음 몇 편 보고 계속 못보고 있습니다. 나름 세계관이 괜찮은 거 같고 물리학에 대한 전문 내용이 많이 나와서 좀 집중해서 보아야 할 듯합니다. 근데, 끝에 가면 막장이라는 말이 있어 전반부만 볼 요량입니다..ㅋ

슈타인즈 게이트의 긴 리뷰를 보다니...참 반갑군요^^

만화애니비평 2015-03-04 08:50   좋아요 0 | URL
크리스티냐~~~
나름 줄이고 줄여 A4로 2페이지 정도 나오더군요.
세계관은 나름 좋으나 물리학과 더불어 형이상학이
기반되지 않으면 어렵죠
리뷰를 보면 전자를 인용하나, 후자는 전혀 고려하지 않아
아마 많이 반가울 것 같네요
 
징비록 - 국역 정본
유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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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사극드라마 <징비록>이 방영되고 있는 시기에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분명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일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정유재란까지 하여 벌써 400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까지 임진왜란이 겪은 상처는 한국의 전 지역에 남겨져 있다. 부산 기장에 가면 왜성이 있고, 그밖에 많은 곳에 왜성이 외로운 담벼락이 되어 남아있다. 임진왜란이 급박한 상황에서 벌여진 전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하면 떠오른 사람이 성웅 이순신일 것이다. 그는 조선 북경지역 오랑캐를 무찌르던 육군 장수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수군에 능한 장군이기도 했다.


 

 

<징비록>을 저술한 서애 유성룡하고 어린 시절 친구이기도 한 그는, 임진왜란 이야기에서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순신 중심으로 흘러간다면, 이에 반해 국내 정치상황과 외교, 경제 상황은 아마 서애 유성룡 중심으로 보는 게 더 적정할 것이다. 서애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학파를 이어받은 동인계 정치인이다. 당시 정치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동인은 후에 북인과 남인, 북인은 소북과 대북으로 나누어진다. 정치적인 흐름에서 훈구학파가 초기 조선의 권력을 차지한 시점에서 사림학파가 조정에 나오고, 훈구에게 억압당한 사림의 유림들이 이제는 서로 아전투구하는 상황이 발발했다.


 

 

전쟁이 나면 무릇 어떻게 하면 적을 제대로 쳐서 멀리 바다 밖으로 내쫓는 것에 대해 궁리하는 게 옳지만,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은 그런 대의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과 사익에 따른다는 점에서 역사는 항상 다른 인물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반복되는 형상을 보여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카를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거론한 것처럼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나온 게 아니었다.


 

 

<징비록>을 보면 가장 첫 단추가 잘못된 것은 일본 해적들이 국내 백성들과 결탁하여 노략질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왜국과 사신왕래를 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점이다. 선조시대에 매우 훌륭한 신하들이 많았으나, 이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임금의 어리석음, 그리고 전쟁이 나서 종묘사직뿐만 아니라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 전쟁이 끝난 후에 개인적 이익에 신하를 질투하는 한심함은 단지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조만이 아닐 것이다.


 

 

이후 등장할 인조나 정조 승하 이후 순조 역시 그러하다. 대한제국이 봉건시대의 국가 즉 왕과 귀족계급에 해당되는 사대부가 있다면,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라도 역시 그런 위와 같은 전례가 존재한다. <징비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 그런 치욕적이고 비극적이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며 후세가 무엇을 보고 배워야 하는 점이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하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악몽, 그리고 그 시기에 있었던 큰 사건을 기록하면서 단순히 기록의 위한 서적이 아니라 후세에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적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이다.


 

 

<정비록>은 생각보다 개인적 감정이 매우 배제된 상태에서 저술한 도서다. 서애 유성룡이 전쟁 시기에 적은 게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 정리한 내용이다. 그러나 개인적 감정이 배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적힌 글을 보면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피난길에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어느 자리에 앉아 홀로 우는 유성룡, 그 모습을 보는 군관과 지역주민 역시 따라 운다. 백성들이 배고픔과 질병에 힘겨워 괴로워하며 죽어갈 때 또 다시 유성룡은 눈물을 흘린다.


 

 

아마 국가정치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녹을 먹는 자라면 유성룡의 눈물만큼 값진 것이 없다고 보겠다.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은 체통과 체면이란 이름으로 눈물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한 부류다. 예기치 못한 전쟁, 계속되는 패전과 후퇴, 죽어가는 백성들, 부자와 부부가 서로 죽여 잡아먹는 행위에서 전쟁은 인륜을 파괴할 만큼 잔혹하고 끔찍했다. 전쟁이 발생하면 가장 고생하는 것은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예비식량이나 무기가 없는 백성이다. 백성을 버리고 가는 국가지도자만큼 못난 인물이 없다.

 

 

 

임진왜란에서 선조의 어리석음과 질투에 대해 논하기란 한숨만 나올 정도지만, <징비록>에선 선조에 대한 원망과 오류를 적지 않았다. 그래도 주변 신하들에 대해 적은 글이 있었다. 일본에 간 김성일이 본 왜정 상황이 적절치 못한 것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이일이란 장군이 용맹만 믿고 지략이 부족해 왜적에게 패배한 일들도 기술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수들의 판단력과 용기다. 하지만 임진왜란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우리에게 바로 지략과 상황판단이다.


 

척후병을 제대로 두지 않고, 소문으로 왜적이 온다고 하여 그 소문을 낸 사람들을 참하는 문무대신을 보면서 한심했다. 아마 이순신 장군이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원인은 바로 그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의 죽음에 많은 백성들이 통곡했고, 중국에서 파견된 진린 장군도 눈물을 흘렸다. 친구로서 장군으로 천거한 서애 유성룡 역시 그러지 아니하겠냐마는, 이순신은 지략과 담력이 뛰어난 장수이기도 하나, 밑에 있는 수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인품과 그릇이 있었다.


 

 

가장 최측근의 장수부터 밑에 있는 장졸까지 전쟁에 대한 정보와 상황판단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여보냈다. 우린 임진왜란에 이순신에 대한 업적을 아직까지 기리며, 현재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이 존재하고, 매년마다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이순신에 대한 영웅심을 대해 찬양하여 영화 <명량>,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흥행하더라도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조건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징비록>에서 유성룡 역시 친구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반영했다.


 

 

우선 그가 갑옷을 진중에서 벗지 않는 점, 쓸데없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은 점, 주변 지형지세 그리고 수군에서 해류와 바람의 형태를 잘 보고 있다는 점이다. 원균 장군은 왜적을 공격한다고 하는 오만에 수군을 출동했으나, 먼 곳에서 노를 젓고 온 병사들이 체력이 떨어져 결국 왜국의 책략 앞에 무너졌다. 전쟁의 승패에서 전술과 전략은 장수나 참모들이 세우나, 정작 적을 치는 당사자는 군졸이었다. 군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신의 계급에 도취된 고위직의 한심함이 결국 대사를 그르치게 만든 점이다.


 

 

<징비록>이 400년 이상에 벌어진 일이고, 지금 당장 그런 구시대의 무기로 싸우지 않고, 군사편제 역시 그렇지 않다. 게다가 일본과 한국은 국가적으로 외교를 맺고, 민간적 차원에서 왕래가 매우 활발한 이웃국가다. 심각한 극우성향의 아베 정권이 들어왔다고 하여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을 일본을 하든지 혹은 그 외의 국가를 한다고 해도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역시 정보력과 지도층의 능력이었다. 사실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 풍신수길이 이미 열도를 통일한 상태이고, 겉으로 완성된 것이었으나, 전쟁 이후의 군사들은 매우 사나운 점을 조선이 간파하지 못했다.


 

 

왜구가 끊임없이 해안을 침범해도 이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수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간첩들이 왜적에게 정보를 건넬 정도로 국내 내정은 엉망이었다. 선조시대 많은 문신들이 있으나 역시 내정에 문제가 있었다.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쌀이란 말이 있다. 서울경기를 제외한 타 지역에 있는 백성들은 가난과 외적들의 침입에 두려워했고, 그들이 국가를 배신하여 적에게 붙는 이유를 생각하면 역시 그렇다. 전쟁이 나더라도 백성들이 안정하지 못한 이유 역시 성을 지키는 수장들이 모두 도망쳐서 그렇다.

 

 

성에 사람들이 없다면 여러 모로 불편하고, 산 속에 숨어 있으면 식량부족과 질병에 고통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징비록>을 보면서 가장 화가 나는 점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판단력 부족이란 점이다. 그래서일까? 유성룡과 이순신의 활약이 그만큼 두드러진 이유 역시 주변 상황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임금 중심에서 별로 활약하지 않은 인물보단 격전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장과 무신사대부들의 공로가 제일 큰데, 등급은 2번째 내지 3번째다.

 

 

 

관료정치의 한계성, 관료들의 그늘 아래 목숨을 걸고 싸운 수많은 장병들과 의병에게 감사한 마음이야 느끼지만, 한편으로 이 모습 역시 현실적인 것 같았다. 군대에서 내가 복무할 때 생각한 점은 지휘관의 지휘란 전장에서 병사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사람의 생명은 단 하나이고, 그 생명을 잃을 경우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전쟁에서 지휘를 맡은 장수가 중요한 것은 바로 수많은 생명을 담보하고 있기에 그렇다. 장병이 전장에서 무너지면 성과 도시가 침범당하고 수많은 양민들이 도륙을 당한다.


 

 

아직까지 교토에서 있는 코무덤은 일본 왜적이 조선 양민들을 도륙하고 코와 귀를 베어 본국에 보낸 것을 모아진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국가는 바로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위정자들의 그 근본을 잊고,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다면 비극은 다시 국민에게 전가된다. <징비록>에서 유학을 신봉한 조선은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 공자의 가르침이란 바로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나, 그 근본을 망각했다. 그러면서 피난길에 비가 억수같이 내리자, 한국의 조상신인 단군왕검, 기자, 동명성왕에게 제를 올리는 모습에 과연 그 조상신들은 이런 생각으로 국가를 세우고 했을까?


 

 

<징비록>에서 서설부분에 번역자의 말에 인상 깊은 부분이 있다. 서애 유성룡은 동인이나, 추후에 남인으로 이어지며, 남인에서 대표적인 실학자인 성호사설을 만든 이익에 남긴 『서징비록후』에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켜 상상을 받는 것은 옛날의 도리다. 세상 사람들은 임진전란에 유성룡 선생이 자신의 힘을 다 쓴 공로가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 일을 유 선생의 경우에는 사소한 이리이고, 그 보다는 더 큰 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충무공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충무공은 한 사람의 부장에 불과했으니, 유 선생이 아니었다면 다만 군졸들 중에서 목숨만 버리고 말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회복시켜 백성을 편안하게 한 공로는 과연 누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인가. 근세에 와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킨 이런 도리는 실행되지도 않았으며, 다만 추천 등용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뒤따라 시기하고 미워하기도 했으니 아아 슬픈 일이다.”라고 한다.


 

 

이순신의 기용은 바로 서애 유성룡이 한 업적 중에 가장 큰 일이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하여 제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것만큼 좋은 정치적 업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단순히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보고 판단해야할 것이다. 정치권에 보는 인물기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품과 행적이다. 이순신의 행적은 강직하고 침착하며, 밑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안전을 고려했다. 진린 장군이 올 때 그가 사나운 것을 생각하여 진린과 그 수하에게 극진한 대우를 한 이유 역시 자신의 군사가 주둔한 지역의 백성에게 침해가 가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을 보면 각종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국민들의 경제생활은 계속 참담해진다. <징비록>에서 가장 일을 그르치는 인물이 사적인 이익에 치중하는 인물, 밑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은 인물, 병사들이 치지고 배고픈데도 진격을 명령하는 인물, 타인의 공을 시기하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징비록>을 보면 생각한 점은 이 책에서 이순신에 대한 유성룡의 마음은 애절함과 고마움으로 가득하다. 이순신이 부각한 점은 1970년대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순신은 일본이 침략할 때 목숨을 걸고 싸운 분이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본의 꼬리 밑에 있던 분이 아니었다. 최근 태극기 계양과 관련된 시사현황을 볼 때 왠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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