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
진중권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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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책 나오는군요! 이건 사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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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네 여자 - 그리스도 기원 이래 가톨릭교회의 여성 잔혹사
기 베슈텔 지음, 전혜정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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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네 여자>를 읽으면 그동안 우리 인류가 가지고 오던 문화유산의 암흑적인 부분을 알게 된다인류문명의 진보는 단순히 문화기술생활양식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게 아니었다때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 이전보다 못한 상황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었다이 책에서는 지금의 세계가 오면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수난을 당했는지그리고 그들의 죽음과 비참한 운명의 기록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알게 해주는 도서였다신에게 필요한 여자란 정녕 신이라고 불리는 관념적인 존재가 요구한 인간이 아니었다.

 

단지 신의 이름으로 향하는 인간들이 만든 치졸한 행위였다인간이 신의 명령에 따라 신의 진리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그 인간이 진짜 신의 말을 들었던 혹은 듣지 않았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그가 말을 하는 순간그것은 신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서 타인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신이란 존재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은 관념적 존재이므로 인간의 무의식적 내면에 있는 존재다바로 신이란 인간의 이성의 영역에 존재하기 보단 인간의 집단 무의식적으로 잔존하는 본능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군중심리에 따른 집단광기는 희생제의라는 독특한 문화적 현상을 만들고이 제의에서는 언제나 대속이란 희생양을 만들게 된다이런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적 요소들은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즉 인간이 수렵과 채취로 통해 살아가는 미개한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들은 서로 침범할 일도 없이남자나 여자 모두 평등하기에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취할 수 있었다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공동체 규모가 커지며가족단위가 부족단위 그리고 더 나아가 민족단위로 이어지면 국가라는 체계가 생겼다.

 

끊임없이 대지를 이동하며 풍요로운 자연의 은총을 받았던 인간들은 이제 그 자연의 한정적인 자원 때문에 서로에 대해 칼과 창을 겨누게 되었다플라톤이 추구하던 <국가>라는 서적처럼 인간사회는 결국 전쟁으로부터 언제나 자국을 지켜야만 했고강력한 정신력과 육체가 필요했기에 남성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이어졌다하지만 그리스폴리스 시대라도 남성중심의 사회라도 그나마 여성에게도 나름 권리가 있었다인류에서 가장 용맹하고 사나운 남성으로 스파르타 전사를 손꼽을 수 있다스파르타 용사들은 그 누구의 명령을 듣지 않고용감하게 전장을 향하여 돌진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유일하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스파르타 용사의 아내였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진정으로 강한 남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더 강한 용사가 아니라그들보다 육체적으로 약했던 그들의 아내였다이 부분에서 <신의 네 여자>는 다소 지나친 오도를 범한 것이다루소의 <에밀>에서 여성은 남성즉 남편에게 복종하게 위해 존재해야 그를 반여성주의적 요소를 드러나게 했으나사실 <에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면가정에서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식탁에서 그 자리의 권한과 관리는 모두 여성이었다.

 

다소 부엌에 권한을 지니게 한 점이 아쉬울지도 모르나, <에밀이전에 루소의 <신엘로이즈>에서 생 프뢰와 데탕주 쥘리의 편지를 읽어보면 과연 루소가 반여성주의적 성향 혹은 남성우월주의라고 생각할 수 없다. <신엘로이즈>는 이성과 감성에서 르네상스 이후 유럽은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서 이성을 절대화를 추구했으나루소는 오히려 계몽주의자이면서 반계몽주의자로서 대변한 것이다. <신의 네 여자>가 아쉬운 부분은 바로 이런 요소다여성이 당하던 부조리와 모순들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비참하고 끔찍하다.

 

그림 한 장도 없는 책이지만여성에게 가해진 고문과 폭력을 텍스트를 읽는 순간 내 머릿속에 흘러 오르는 이미지는 소름이 끼칠 정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나치게 여성피해에 대한 강박관념이 지나치다고 여겼다물론 그 피해가 있었고그 피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여성에 대한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한다하지만 모든 문제를 과거 교회의 시작인 가톨릭 중심에서 시작되지만글을 보면 남녀 차별문제로 지나치게 강요될 가능성이 높다예전에 읽어본 <캘리번과 마녀>의 경우마녀사냥에서 여성이 당한 수모와 고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만그 원인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에 대한 모순에서 극대화되었다고 설명한다.

 

<신의 네 여자>에서도 그런 부분을 인용하고 있으나모든 부조리가 교회에서 시작되고지금의 교회가 그렇지 않더라도 예전부터 전래된 문화적 양식이 계속 덫이 되고 있음을 설명한다책의 끝은 교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하나내가 보기엔 단순히 여자의 억압하던 존재는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가 그동안 결탁해온 권력에 대해 공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책에서도 마녀사냥에 대한 본보기가 단순히 마녀사냥이 광적으로 이루어진 16~17세기만 아니라 고대국가부터 시작하여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현대의 마녀사냥이 아닌 마녀사냥의 대상은 여자들이 많이 당하고 있지만남자들도 만만치 않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의 네 여자>는 이때까지 여성이 당한 억울함을 충분히 짐작하게 되겠지만그 대안방법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현대사회에 여성들이 공직자로 오면서 고위공직에 남성이 틀어막는 모습이 있다는 것은 안다하지만 이와 다르게 계속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직업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 다투는 현실이 되었다이런 부분은 단순히 여자의 인권만 보는 것이 맞는 게 아니라 소외된 중하위층 남녀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과거 왕이 정치하고교황이 정치에 큰 압박을 가할 때는 전 근대적 사회였고이 시기에 부당한 위치에 놓인 여성이라면 그 처지는 분명 99.9% 부당하고 억울하다하지만 지금은 왕이 지배하는 세계도 아니고교황은 세계평화나 인류애를 말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물론 아직까지 꽉 막힌 사고로 말이 통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여성들은 투표권이 있고자유롭게 연애할 권리도 있다연애할 권리결혼할 권리심지어 아이를 낳을 권리마저 박탈된 게 아니라 자신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이 된다면 충분히 결정할 수 있다이 책이 2004년에 번역되었다고 하나 1990년대 말이라도 충분히 위의 조건들은 한국에서 가능했고한국보다 더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유럽이라면 두 말할 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신의 네 여자>는 과거의 여성수난사에 대한 서적으로 탁월해도 미래에 대한 여성에겐 그다지 의미가 없다유럽에서 여성들이 구교인 가톨릭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으며설령 믿고 있더라도 자신들만의 삶을 반영하여 종교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종교라면 아마 미래에 도태되어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지도 모른다여성은 남성보다 생체적 조건에서 불리하나생물학적(추위나 더위가 여자가 남자보다 강하다)으로 불리한 게 아니다경제적 조건에서 극한의 상태가 아니라면 충분히 생계가 가능하고적당한 교육과 환경이 주어지면 좋은 학자도 되고정치가도 될 수 있다.

 

교회가 만들어온 열등한 여자창부성녀바보 같은 여자들은 만들어서는 안 된다이제까지 신이라는 이름을 대는 교회에서 그렇게 만들었다면 이제는 자본주의와 미디어가 생산하고 있다교회가 신의 이름을 대신하여 돈이라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새로운 신이 되었다아직까지 그런 과거의 유산이 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다교회에선 늙은 여성들의 지식과 삶의 지혜를 두려워했다그녀들이 의학기술과 민간요법은 마을의 지도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늙은 노인들을 혐오하게 만든 것은 그녀들이 마을공동체에서 영향력을 박탈하게 하고늙은 여자는 마녀의 이미지화 시켰다.

 

디즈니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인 <백설 공주>에서 늙은 마녀가 나와 독이 든 사과를 백설 공주에게 건네준다독이 든 사과를 만든다는 것은 독 자체가 하나의 약품에서 시작되고 사과는 철분과 비타민이 많은 과일이다독이 든 사과로 독살하는 장면처럼 음식과 약초로 통해 의학기술을 가진 여자들을 악적인 존재로 전략하게 한 것과 같다백설 공주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고생식력을 가졌기에 필요한 존재였다왕자의 키스에서 모든 운명을 맡기는 것처럼 여자는 아무 것도 필요 없고남자에게만 복종하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여준 것이다.

 

물론 신화적으로 백설 공주는 근친상간을 하다 어머니에게 내쫓기고어머니는 백설 공주의 계략 아래 잔혹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신화와 동화는 겉과 속이 서로 다르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내지 민간에서 자신들의 입장에 맞게 금 전해온다문제는 현실에서 우리는 백설 공주처럼 살아가기 바라는 여성이 많다는 점이다한 번 꿈을 꾸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백마 탄 왕자는 현실에서 부르주아고그들은 일부 극소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들이다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남의 권력에 의지하는 여성도 있고아닌 여성도 있다.

 

과거의 여성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자신의 입장을 다지기 위해 여성 자신도 주체적인 존재로 되어야 하나자신의 이익에 치중한다면 마녀사냥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것이다한국에서 최근 극우사이트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일화를 들으면 지나치게 심각하나그 혐오대상이 되는 여성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단지 그것을 너무 확대하여 일반화시키는 것 자체가 논리성을 찾아보기란 무리다이런 현상에서 사회는 남녀의 대립적 관계로 몰아가기 위해 서로를 적으로 만들고서로 골을 상하게 만든다마녀사냥의 토대 역시 그러하다대부분 농민의 토지가 몰수되고한파와 가뭄으로 몰아치면 그 책임에 소재를 자연적 재해가 아니라 대속의 존재를 찾게 된다.

 

대속의 존재가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신의 네 여자>를 보면 부패한 기득권층이 행한 방식과 그 철저한 모습을 보고 반추하여 이에 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이에 대한 대안 역시 누차 강조하듯이 좋은 결말을 줄 수 없을 것 같다광신적인 행동이란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빠지고바보 같은 인간은 여성만 아니라 남성도 적용된다이성적 문명의 유지 아래 비이성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며그 죄에 의해 희생된 여성들에 대한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그런다고 하여 그것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고 해도 그 비참한 역사는 지금의 여성이 아니라 과거의 여성이 받은 것이다과거를 부정하고 잊으라는 것이 아니다그 부당함에 대한 책임에 대한 보상심리를 바라는 것이 문제다부당함 현실은 보상심리로 당장은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나그것은 다시 불화를 일으켜 다른 방식의 마녀사냥으로 도달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마녀사냥의 희생자는 항상 약자이고사회적으로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다그들의 희생을 정당화되는 점에서 그 대상자는 이제 여자만이 아니라 단지 약자인 자들이다남녀차별로 희생당한 여성들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여성의 권리만 보는 게 아니라 약자의 입장을 보는 게 타당하다. <신의 네 여자>에서 억울하게 마녀로 지목되어 참혹하게 고문당한 주부의 유언에서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걱정이 참 안타깝다마녀로 지목된 여자 중에서 처음에 늙은 여자에서 과부와 주부가 많았다그들의 죽음에도 여전히 집에는 그녀들의 아이들은 남아있고아이들은 배고픔과 외로움그리고 광기에 빠진 마을주민에 의해 고독한 삶에 분명 절망할 것이다.

 

마녀사냥이 사라진 지금도 마녀사냥이 아닌 마녀사냥에 희생된 사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그런다고 멍청하게 TV만 보고 인형처럼 살아가는 것 역시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자신의 약한 부분을 이용하여 편리를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결국 여성들은 자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삶의 주인이 되는 게 이 모든 비극을 마무리 지는 길일 것이다물론 그건 여성의 노력만 아니다한국사회에 보면 꼰대 같은 남성들이 여전히 기득권층에 속하며그들의 비논리적인 말과 행동이 하나의 법칙이 된다과거 <신의 네 여자>를 만들고 유지하려 한 자들인 만큼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나 별 반 차이는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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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0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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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고 말한다면 상당히 난감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단어는 도처에 널린 말이고, 늘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들이다. 사랑이란 것을 어떻게 말하여야 하는가? 플라톤의 <향연>은 사랑이 무엇인지 바로 그 에로스가 무엇인지 대해 다루는 철학도서이다. 철학의 모티브에서 서구는 소크라테스로 시작하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체계를 다진다. 그리스철학이 서구사상의 기반이 되고,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부철학이 성립되면서 그 철학의 중심에서 그리스철학이 상당히 깊숙이 자리 잡았다.


물론 견유학파 내지 다른 학파도 존재하겠지만, 형이상학적 관념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플라톤의 철학이 중심적인 역할이 된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서구의 사상 특히 기독교 사상은 이분법적인 가치관으로 나누어, 남성의 우월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종교적 가치관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사회 및 정치적으로 강력한 체계가 된다. 따라서 플라톤의 <향연>을 읽는 것은 사랑이란 것에 대해 다루기도 하나, 그 사랑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플라톤이 철학자이고, 그의 사상이 고대사회에서 나온 점에서 이 책을 많이 어려울 것이라 여기지만, 그래 어렵지는 않고, 오히려 대화식으로 이루어지므로 쉽게 읽을 수가 있다. 물론 <향연>을 읽는 것의 최종목표지점은 플라톤의 <국가>이다.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귀족 중심의 민주제, 즉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국가다. 특히 철인(哲人) 군주로서 이상적인 정치관을 확립한 플라톤으로서 <향연>은 그 이상적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의 기반을 다룰 수 있는 시작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서 군주란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무술을 연마해야 하며, 모든 어린 아이들은 모든 훌륭한 남성과 여성의 아이들이어야 한다. 공화국의 성립에서 가족의 개인적 이익으로부터 멀리하여 소년들은 모두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지만, 모두 형제 같은 우애를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향연>을 읽다보면 우린 문화적 충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을 말하면 가족 내지 연인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가치관을 보여준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면 아이가 생기나, 남자가 남자와 동침하면 지혜가 생긴다는 점이다.


고대그리스에서 여성의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스철학이 남성중심의 사회가 되는 이유는 그 시대는 도시국가 즉 폴리스를 중심이란 점이고, 폴리스 중심으로 각 구역다가 작은 국가들이 있었다. 국가의 존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에서 주요 임무를 담당하는 것은 남성이고, 지금처럼 무기가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전투기를 날리지 않는다. 인간 자신이 칼과 방패를 들고 직접 적 앞에서 달려들어 백병전을 겨루는 방식이다.

 

인구도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무기를 구입하고 지닐 수 있는 계급도 한정적이다. 폴리스에서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는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되는 성인남성만 가능했다. 이들이 직접 전쟁을 수행했고, 정치적인 결정을 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자기 자신이 강해야 했고, 직접 무기를 들고 적진을 향하여 돌격해야 한다면, 강한남자가 가장 이상적인 남성이 되는 것이다. <향연>에서 그런 사랑에서 남자끼리의 사랑 성인남성과 소년들의 사랑은 전투기술과 삶의 지혜를 배우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백병전을 하는 전쟁에서 병사들은 여자를 데리고 다닐 수 없으므로, 소년들을 병사를 만들기 위해 또는 성적인 불만요소를 해결하기 위해 소년을 애인으로 삼았다.


지금 현대인으로 이해할 수 없겠지만, 예술에서 인간의 미를 지금은 여성의 우아한 신체에 집중하나, 그리스시대에는 남성이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특히 헤라클레스와 같은 반인반신인 그는 완벽한 남성이고 그 자체가 미였다. 아름다운 존재는 바로 강하고 이상적인 남성인 점이고, 그들은 모험을 떠나 적들을 이기고 자신의 위용을 과시한다. 그런 점은 <향연>에서 이상적 인간상이 소크라테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던 사내는 소크라테스가 하루 종일 서있어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추운 날 다른 사람들은 온 몸을 옷으로 도배한 대신 소크라테스는 아주 간편한 차림으로 다니고, 심지어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 중에 소크라테스는 전우의 무기를 찾아오기도 한다.


보통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없는 행위들이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해내는 점에서 완벽한 인간이란 바로 소크라테스 같은 자라는 것이다. 그런 소크라테스는 <향연>에서 사랑이란 완벽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가 만나 아름다운 아이를 출산하여 그 아이가 아름다운 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생식기능이란 이상적 가치관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식기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인류의 번영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남녀 간의 사랑에 의해 아이가 탄생한다는 점이다.


그 관점이 두 사람의 사랑인지 아니면 소크라테스처럼 이상적 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랑에서 에로스의 개념이 다르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년에 대한 성인남성의 사랑처럼 우리는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와 특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데이몬이란 개념처럼 인간과 신은 분리되어 있는 존재지만, 인간이 신의 영역으로 가는 중간적 존재가 데이몬이란 말한다. 기독교에서 악마라는 데몬이 데이몬에서 시작되었으나(기독교에서 신과 인간은 완전한 분리), 신은 원래 완벽한 존재이라 더 이상의 변화는 필요 없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 완벽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랑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3가지가 있다. 개인적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에로스, 타인과 인류애적인 아가페,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필로소피아가 있다. 철학이란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고,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과정이란 것이다. 인간이 신이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나, 인간이 어떤 위대한 업적을 수행할 경우 신위를 사당에 모시고 그 업적을 기린다. 신이 된다는 것은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 존재적 위치는 인간이 지혜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모습처럼 그의 지혜로운 모습은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모습이다.

 

그것이 신에 대한 사랑이고, 그 사랑은 결코 멈출 수가 없는 과정이다. <향연>에서 말하는 사랑의 대상자는 바로 자신인 것 같았다. 아름다운 자신, 지혜로운 자신, 모든 것을 초월하려는 철인적인 인간, 그것이 바로 위대한 인간이고, 그런 인간들에게 많은 소년들이 구애를 보내어 그의 지혜를 소년들에게 전수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만든다는 점이다. 지금의 시대라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랑의 개념이겠지만, 적어도 생각해볼 점은 이상적인 삶에 대해 무엇인가에 대해 정도는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사랑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연민이라 하겠다.


철학의 개념이 현대에 오면서 다르게 되었다. 인간의 사랑이란 것은 세상에 불행한 사랑이 없어질 때까지 철학을 멈출 수가 없다고 하듯이,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다. 고통 받고 괴로운 사람이 있어서 그가 힘들어 할 때 내가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게 사랑이 아닌가 싶다. 물론 연민의 정은 내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에게 더 많이 느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후에 당분간 볼 수 없을 때 기다림에 지친 내 자신에게 연민을 느낄 것이고, 늙은 부모님의 야윈 모습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고, 뉴스에서 가난 때문에 전 가족이 죽음을 선택한 기사를 보면서도 연민을 느낄 것이다.


물론 연민의 감정만이 아니라 기쁨의 감정을 사랑에서 느끼겠지만, 연민의 감정이 나에겐 사랑이란 감정이라 본다. 왜냐하면 나와 내 주변 존재만이 아니라 나하고 전혀 관계없는 존재조차도 느끼는 연민의 감정이 있기에 우리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연민의 감정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 타인의 불행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그들의 불행에 빠진 절망을 비웃고 손가락질 하는 인간을 보면 과연 그들에겐 사랑이란 감정은 있을까? 사랑받지 못하면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사랑이란 말은 매우 단순하나 그 행위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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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31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 갈무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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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번과 마녀>에서 캘리번이란 영국의 대표 작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인물이다. 캘리번은 템페스트에 나오는 괴물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식민지 개척을 하던 영국의 당시 시대와 상당히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저자는 대표적인 여성학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노동운동가이기도 하다. 모든 세상의 착취와 폭력이 최종적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공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실비아 페데리치는 단순히 여성에게만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대한 사회적 박탈감이 남녀 간의 갈등으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남녀문제는 단순 남녀만의 성적인 문제, 즉 섹슈얼리티 내지 젠더적인 요소만 아니라 하나의 계급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 텍스트를 충실히 활용하기도 하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가난한 노동자는 각종 노동과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그 노동자의 아내와 딸은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부르주아의 놀이(창부)가 되는 시대상을 고발한다. 하지만 실비아처럼 구체적으로 여성의 지위적인 측면에서 조금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남녀평등에 대한 계기는 프랑스혁명 시기에 거론되었지만, 혁명의 주도권은 남성에 있었고,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을 저술하고, 마르크스는 남녀문제를 단순히 성에 대한 부분보단 단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갈등으로 그렸다. 하지만 너무 계급의식에 치중한 나머지 남녀문제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클로저라는 공공의 재산을 어느 특정세력이 독차지하는 현상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에선 16세기 초에 강렬한 농민의 몰락을 적고, 농민들은 도시로 가게 되어 빈곤층이 되고, 그 문제에 왕국의 처방은 거리의 거지에 대한 무한적으로 노동착취를 할 수 있게 하는 점, 그래도 거지생활을 하면 고문과 처벌하고, 최종적으로 교수형에 처한다. 마녀사냥의 시작 시점은 바로 영국에서 일어난 농지에 대한 인클로저에서 보고 있으며, 이것은 16세기부터 17세기에 광란으로 일어난 마녀사냥과 연결되는 것이다. 광적인 마녀사냥은 아마 인류문명이 시작된 이래 가장 잔혹하고 어리석고 무서운 역사다.


십자군 원정과 페스트 창궐이 유령처럼 지나가자, 인구의 감퇴, 봉건기사단의 몰락, 농지의 황폐화, 그리고 농경산업에서 무역중심의 상공업으로 변경된다. 콜럼버스나 마젤란 같은 탐험가들은 사실 탐험이 목적이 아니라 무역을 위해 세계를 누비고, 그 무역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가속화한다. 농경사회는 봉건영주의 권한이 유지되었다면, 중앙집권적인 절대왕권은 모든 것을 왕의 권한에 의해 결정되어야 했다. 경제에서 주화와 화폐의 관리는 결국 모든 것을 왕이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제공한다.

 

이런 문제는 상부계급과 달리 하부계급에 큰 부담으로 이어진다. 세금의 공납에 대한 갈등도 있겠지만, 농지의 몰수, 대규모집단 농장, 그리고 공업의 분업화는 인력을 감축하게 된 것이다. 인력의 감축으로 제일 끔찍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생명은 소중하나, 인간의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고 우리 인간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그 생명이 나오는 여성, 즉 어머니가 아이를 죽이는 일이다. 유아살해는 인류문명에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죄악 중에 하나다. 하지만 그녀들이 아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혹은 그것에 대한 대안은 여전히 최악인 것이다.


인류의 영속은 바로 어머니의 신체로부터이나, 바로 저 신체를 통제하고 관리하고 억압하는 것이 마녀사냥하고 이어진다. 아이를 죽이는 여자는 국가에서 처음에 일반적인 형벌에서 교수형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인구의 축소는 바로 무역정책을 군사작전과 연결하던 시기에 군사력을 모우는 것에 큰 방해거리다. 대외적으로 파견되는 군인들은 자국민으로 구성되어야 했지만, 그들은 갈 곳 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이었다. 그 후 식민지를 개척하고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잡아와서 노예로 부린다.


노예는 재산이고, 금전적 부담이 없으므로 기존 노동자와 농민들은 그들과 경쟁하는 구도가 된다. 가령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조선인과 중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반항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임금에 대한 갈등으로 서로 대립하게 한 방법도 있었다. 사회적 불만을 구조적인 방법이 아니라 단지 그 분노를 받아줄 대상을 억지로 만들어준 것이다. 일반 민중은 어리석었다.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에서 관념적인 판단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찾을 수 없었고, 단지 형이하학적으로 보이는 물리적 대상에 대해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자본주의 가속화는 이런 부조리를 더 키우고, 모순을 더 골 깊이 만들어버린다. 마녀사냥은 바로 그런 사회적 문제를 구조적 해결이 아니라 그 구조의 상부가 하부의 토대를 붕괴하는 것과 같다. 이 책에서 여성 중에 특히 노인여성에 대한 탄압이 심한 것으로 나오는데, 우선 노인여성들은 노인남성보다 수명이 길고 민간치료사로서 활동했으며, 특히 출산 시에 산부인과 의사 겸 의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민간에서 노인여성의 활동력은 국가지배자 입장에서 거슬리는 존재였다. 15세기에 농민반란과 봉기가 거칠게 일어난 시기다.

 

노인여성들은 그 사회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민간생활의 지혜를 알고 있었기에 국가에 대한 반란이나 봉기에서 그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많은 노인여성들이 빈곤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원한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런 노인들이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우선, 그들이 알고 있는 지혜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토지몰수와 공유지 독식으로 노인여성의 살림을 어렵게 했다. 그녀들은 이웃과 친구에게 의탁하여 생활을 영위했으나, 그것도 부족하면 구호기관에 빈민대장에 올리지만, 그것조차 무너졌다. 기독교 내 신교혁명 이후 그들의 가난을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 태만으로 여겼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뭉치고, 같이 연합하고, 이런저런 일을 돕지만, 의술을 시술했다는 이유로 반국가적인 죄인으로 몰려 사형 당한다. 기술의 발전, 특히 의학은 기존 민간치료사와 산부인의 대리자를 노인여성에서 지식인 남성으로 교대한다. 해부학의 발전, 과학의 발달, 그리고 기계론적인 철학은 인간의 자연성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감정에서 감정은 쓸데없는 것이고, 이성을 중시하며, 그 이성이란 단어는 오히려 야만에 가까운 편집증에 이르게 된다. 마녀사냥이 데카르트, 베이컨, 라이프니츠 전후로 더 심각해진 것을 보면 참으로 어이없어 보였다.


계몽주의 발달은 합리주의 과학철학에서 나오나, 그 자들이 오히려 비과학적인 방법을 유도하게 만들었고, 게다가 마녀사냥만이 아니라 동물의 감정이 없다고 여기는 데카르트식의 이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는 동물을 잔혹하게 다루고, 피지배계급인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 무작위적 착취를 인정하게 된다. 마녀사냥에서 이런 피지배계급에 대한 통제와 관리, 그리고 억압과 탄압은 피지배계급 내의 대립관계를 만들고, 여성에 대한 철저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생각하면 프랑스대혁명 시기 혁명의 운동에서 여성이 상당히 강력했으며, 어떤 헛소문(마리 앙투와네트가 외국에 도피하다 실패하여 궁에 갇히는데, 그녀가 상당히 좋은 음식을 먹고 잘 지낸다는 이야기)을 들은 시장의 아낙네들은 왕비와 근위병이 있는 궁으로 쳐들어왔다.


약 2만 명에 가까운 시장 아낙네들은 생선조리용 칼을 들고 공격하여, 길을 가로막은 근위병을 목을 자르고 궁 안까지 돌격한다. 게다가 프랑스대혁명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러시아혁명에서 혁명의 시작점은 역시 여성들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경제가 침체된 러시아에서 다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식량이 부족하자 2월 혁명이 발발되고, 그 운동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 여성들은 젊은 아가씨가 아니라 아이를 가지고 있던 주부들이었다. 혁명의 시작에서 그들은 경제적, 사회적 모순이 자신의 생명만 아니라 가족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에 과격해지는 것이다.


현실에서 보면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라는 말이 실감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을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출산만이 아니라 양육에 관여하므로 만약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아이들에게 주입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가정 내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 공장, 군대, 병원, 감옥, 회사 등 인간의 눈과 눈이 겹치는 곳에 사회성 내지 단체생활의 이름 아래 사람을 조작하고 개조한다. 감옥의 역사인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 시스템 자체가 마녀사냥의 연계성이란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인간에 대한 감시와 처벌 시스템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전략하게 되고, 과학적 인간은 중세시대 인간처럼 인간이란 신비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기계로 보는 것이다. 노동시간의 길이나 착취강도, 식량배급조차도 척도화 되고, 인간은 인간을 해방이 아니라 더 억압하고 옭아매는 것이다. 마녀사냥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교회의 권력만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주의 관계로서 파악하는 것은 마녀사냥은 16~17세기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식민지에서 원주민들은 감정이 풍부하고 서로 공동체 생활을 추구했지만, 서구사회는 이것을 반대했다.


자발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저항세력이 이어지고, 특히 현대사회처럼 아파트 같은 경우, 공간적으로 인간을 수용소에 집어넣는 효율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의 일반의지가 아니라 개인의지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인 계약이 되는 시점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인간을 분리하여 서로를 이웃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가까운 적으로 두는 것이다. 자기소유애가 강한 자본주의 경제체계에서 타인의 절망은 나와는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자신의 불행은 타인에게 그저 쇼에 불과하다. 그런 것이 마녀사냥과 이어진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발견이다.

 

마녀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마녀사냥은 누구나 마녀심판자가 될 수 있지만, 누구나 마녀로 내몰려 죽을 수 있다. 예전처럼 생물학적인 죽음은 면할 수 있지만, 대신에 사회적인 죽음으로 이어진다. 누군가 하나의 이슈로서 사회적 지탄과 비난이 지속되면 그 대상과 가족들은 살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그 지목당한 대상자가 죄를 지었다면 모르나, 오히려 부당한 일에 처하여 사회적 모순에 반발하다 더욱 더 억압당하는 일들이 넘치는 현실이다. 이 글을 적는 나도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마녀 재판관이자 마녀사냥의 희생양 후보자란 사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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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프레임 -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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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프레임>이란 책을 읽으면서 마녀는 옛날 중세이후 혹은 르네상스 시대 전후까지 존재한 자들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만들어지는 존재다. <마녀 프레임>이란 제목처럼 마녀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마녀는 단순히 선천적으로 하늘을 날고 인간을 유혹하는 무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진 피해자들이었다. 피해자들이 오히려 죄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화형이 처해지는 시대에 우린 왜 그들이 그런 비참한 운명에 쓰러질 수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

 

 

볼테르의 기록처럼 1780년대까지 마녀사냥은 존재했고, 당시 계몽주의자였던 볼테르는 마녀사냥에 대한 무지한 폭력에 큰 비난을 날린 것을 알 수 있다. 마녀는 실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지만 그래도 존재해야만 했던 자들이다. 왜 그런 것인가? 일단 마녀사냥 기원은 십자군 원정 실패와 페스트 창궐 이후 유럽의 암울하고 비관적인 사태는 당대 권력자인 왕권과 교회에 대해 심한 의문과 반발을 일으켰다. 국가가 그 당시 농노나 장인에 대해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제대로 살기가 어려웠다.

 

 

국가와 교회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면서 이단의 존재가 부각된다. 이단의 존재가 도시 한복판에서 나올 리가 없다. 그들은 자연이나 농촌 같이 외부 쪽에서 등장했다. 특히 중세의 겨울과 백년전쟁 전후에 마녀에 대한 환상은 국가와 교회의 지배 권력이 약해지면서 그 책임을 자신들의 체계가 아니라 다른 희생양을 처단하는 것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특히 그 사회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권력을 지닌 자들은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수단이란 폭력의 합법성이다. 그 합법성을 찾는 방법은 자기들만의 법칙을 만들고, 그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것이다.

 

 

특히 반국가, 반봉건, 반교회적 세력에 대한 처단 혹은 그런 대상이 아니더라도 본보기를 위해서라면 군중을 하나로 단결하기보단 그들을 각자 의심하고 불안하게 만들어 모두 권력에 의지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가혹한 마녀사냥에서 처음에 교수형으로 끝날 형벌이 참수, 능지처참, 화형 등 각종 끔찍한 사형 그리고 고문방법이 동원되었다. 지금이야 마녀가 있다고 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마녀를 찾아 처단하는 마녀심판(사냥)을 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미쳤다고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 마녀라는 이름을 가진 마녀희생자들은 사라졌지만, 그 마녀 대신 새로운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단지 그들은 마녀가 아니라 다른 올가미에 엮어 새로운 희생자들이 되어야 했다. 이택광 교수가 <마녀 프레임>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마녀의 역사보단 마녀로 몰아가는 사회다.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그것은 결국 현실 사회에 큰 모순이 새로운 변화와 흐름에 역행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구시대적 발상을 남발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란 과학적 지식이 배제된 신화화된 사회로 이어지고, 이미 검증되지 않았는데도 사회적 분란자 내지 반역자로 몰아세우고,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계속 그들을 적으로 몰고 간다. 이런 방식은 사회적 갈등과 책임소재를 지배계급의 문제점으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반대되거나 또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반대세력까지 끌어당긴다. 한국에서 마녀사냥은 최근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군사독재정권과 한국전쟁에 큰 피해를 일으켰다. 조선시대에 정조가 승하하자 노론세력은 시파인 남인들을 모두 천주교도로 몰아 유배 내지 처형시켰다.

 

 

당시 천주교가 성행한 이유 새로운 문물에 대한 지식인(특히 양반계층)들의 관심이 있었으나, 현실 정치에서 발견되는 모순에서 천주교의 확대가 널리 퍼진 것이다. 게다가 대원군 시대에는 새로운 문물이 유교국가 조선에 큰 혼란을 줄까봐 쇄국정책을 일삼고, 최후에 세계열광의 욕망 아래 집어 삼켜져버린다. 지금 우리사회에 부익부 빈익빈 역시 사회적 갈등과 모순으로 이어진다. 이런 시기에 경제적 불평등을 제기하는 순간 반국가 세력으로 지목하게 만들고, 언론의 공정치 못한 정보는 중세유럽의 마녀사냥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중세유럽처럼 사람의 사지를 찢거나 혹은 불을 태우지 않지만, 대신 육체적 죽음보단 사회적 죽음으로 몰고 간다. 사회적 약자의 몰락과 비참한 현실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현실을 비웃거나 또는 자신이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우월의식까지 느낀다. 사회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으로 과학적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이 올바른 선택지점이나 오히려 미신적 망상에 의해 엉뚱한 길로 걸어가고 있다. 이 책에서는 마녀사냥 효과를 인쇄술의 발달로 보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로 <마녀의 해머>라는 책이 널리 보급되어 과학적인 마녀식별방법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당시에 하나의 과학이라 해도 그 역시 미신적 망상에 의해 만들어진 과학이다. 이런 비과학성이 과학성으로 인정받고, 그것이 다양한 계층에 정보로 이어진다. 문자문화의 보급에서 책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면, 현대의 마녀사냥이 더욱 무서운 이유는 미디어라는 영상매체는 스펙타클로서 현실에 반영된다. 범죄를 공모한 것도 아니나, 마치 그렇게 언론(독재기관에 사주를 받은)에서 조작하여 억울하게 죽거나 고문당한 많았다. 많은 군중들은 미디어로 통해 그들이 마치 세상의 암 덩어리로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살아있으나 죽어 있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최근 21세기 경우 인터넷의 보급과 정보화시대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인터넷 매체에 개인정보 신상이 노출되어 곤혹을 치루는 사람들이 있다면, 극우사이트에는 각종 인종차별과 남녀차별, 비인간적인 욕설들이 퍼져가고 있다.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던 마녀사냥은 거의 끝났을지는 모르나, 아직까지 무고한 사람들이 계속 희생당하는 것은 여전한 비극적 현실이다. 마녀는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정신적으로 존재한다. 바로 이성의 판단과 연민의 감정을 상실하여 광기가 넘친 교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말이다.

 

 

거기서 마녀는 마녀로 지목되어 벌을 받는 자가 아니라 그 마녀를 억지로 만들어 내어 자신들의 정의를 관철하려는 광신도들이다. 전투적 메시아주의는 그런 무리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마치 순교자인양 영웅주의 행세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폭력적 광기는 인간 스스로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넘어설 때 비로소 극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더 심한 광기의 세계로 가고 있다. 정신병원을 만든 이유는 정신병원에 수감된 자가 있어서 마치 정신병원에 밖에 있는 자들이 정신병이 없다고 여긴다고 보나,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거대한 정신병원(精神病院)이 아니라 정신병국((精神病國)을 만드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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