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ED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Revolution No.3>는 좀비들 시리즈로 유쾌한 재미와 쾌감을 날려준다. 다소 카타르시스가 뒤따르는 이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 세계관과 공유하고 있다. <Revolution No.3>가 <Revolution No.0>, <Fly daddy fly>가 연계되고 다시 <speed>와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연애소설>은 좀비들 시리즈와 전혀 다른 소재와 느낌을 다루고 있어서 별개의 소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다시 수정하였다. 이 작품 역시 좀비들과 이어지고 있었다. <연애소설>에서 주인공은 아니나, 주요인물로 다니무라 교수가 있다. 다니무라 교수와 불륜을 맺은 미모의 여대생 아야코는 사랑의 불의와 허무한 자신에 절망하여 자살한다.


<연애소설> "영원의 환"에서 아야코를 사랑하던 아야코 남자후배는 자신이 죽기 전에 친구로 위장한 살인청부업자에게 다니무라 교수 암살을 의뢰한다. <speed>에선 아야코의 제자 가나코는 아야코의 죽음에 대해 진실을 밝히려 한다. 단지 중간 매개에 <Revolution No.3>가 보이지 않았을 뿐, 좀비들의 무리와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 <연애소설> "영원의 환"에서 단순히 남자후배는 사랑하는 아야코 선배를 위한 복수를 원했다면, <speed>는 그 복수가 일어나기 반년 전의 이야기다. 작품에서 아야코를 좋아하는 남자이야기도 있었고, 아야코와 다니무라의 불륜관계도 있었다.


한 미모의 여대생이 선택한 죽음, 석연치 않은 자살 장소는 여러 가지로 의문을 만들게 했다. 가나코는 처음 아야코의 죽음이 타살이라 여겼다. 물론 아야코는 자살이었으나, 타살과 마찬가지이었다. 자살은 사회적 자살이란 말이 있다. 그녀의 죽음은 자신의 의지를 위한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 죽음이었다. 아마 남자후배가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용기를 내었다면 아야코는 자살을 조금 고민했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 남자후배에겐 인생의 절망을 가나코에겐 친구를 잃게 만들었다.


가나코는 아야코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 죽음이 숨은 진실에 대한 의문, 그리고 이상한 에세이대학교의 분위기, 이 모든 것이 별개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여대생의 죽음, 에세이대학교의 축제는 뭔가 이어지는 고리가 있었다. 그 고리의 시작은 가나코가 가진 어느 증거고, 그 증거를 노리는 세력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우연히 좀비들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여기서부터 가나코와 좀비들은 운명의 공동체가 된다. 이미 <Fly daay fly>에선 순신은 40대 아저씨를 인생의 패배자에서 승리자로 바꾸는데 성공한 적이 있었다.


이젠 40대 아저씨가 아니라 10대 여고생이었다. 그것도 자신들이 3년 동안 계속 침입하려한 세이와여고의 우등생이었다. 좀비들의 활약과 주인공의 노력은 물론 모든 문제를 해결하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고를 치는 문제아로 등장한다. 가나코 역시 그런 역할 중에 하나다. 공부에 충실한 여고생이 우연히 불량학교 문제아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하는 시간은 달콤한 꿈만 같은 시간인지 아니면 악몽보다 더 심한 운명의 장난인지 모른다. 단지 가나코를 만난 좀비들은 이태까지 삶에 지친 약자들과 연대했다면, 이번에 얼마든지 위로 갈 수 있는 존재와 만났다.


늘 악운만 따르는 야마시타가 가나코에게 자신은 산하(山下)라는 의미의 성을 가졌다고 말한다. 산 아래에 사는 야마시타는 산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영원한 발바닥 인생이다. 좀비들은 그런 야마시타가 멸망하지 않을 세상을 만드는 게 꿈이라 한다. 볼품없지만, 언제나 맑은 눈으로 친구를 걱정해주는 착한 친구들, 바보 같은 그 꿈을 언제나 비웃고 조롱하는 사회에 대해 좀비들은 대항한다. 단지 이번 대상은 조금 다르다. 권력의 중심은 언제나 대학교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돈과 인맥으로 연결된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그 이벤트를 놓치지 않으려한 엘리트들의 사고방식은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시대정신이 돋보인다.


이 사건들의 원흉에게 잡힌 가네코는 그와 대화하면서 엘리트인 원흉이 되고 싶은 것은 묻는다. 그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을 움직이고, 헌법을 개정하여 군대를 밖으로 보낸다. 전형적인 일본극우의 사고방식이다. 뇌물수수 뿐만 아니라 미성년 매춘행위로 낙인찍힌 전 장관과 결탁한 점에서 지식인의 사회인 대학은 이미 권력을 위한 도구로 변질된 것이다. 과거 1960년대 일본은 학생운동이 활발했고, 그들은 동아리로 자금을 충당했으나,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자본의 공급처로 활용된다.


일본사회는 그렇게 섞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가나코는 그런 현실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좀비와 혁명을 일으킨 것인가? 보통 <Revolution No.3> 좀비들 이야기에선 다소 마초적인 감성을 가진 남학생 중심이야기라면 이번 <speed>는 조금 다르다. 연약한 여고생이 직접 몸을 날려 싸우고, 운전을 배워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장식한다. 가나코의 가족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집안은 가족이 3명이 아니라 4명이어야 했다. 가나코의 어머니는 꼰대적인 가부장인 남편에 대해 실망해서 낙태를 선택한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나코의 어머니가 느낀 소외감, 게다가 아야코와 다니무라의 불륜에서 아야코의 죽음, 원흉이 모든 운동부들을 조직할 수 있던 것은 강간사건을 어떻게 잘 덮어준 것이다. 일본사회가 가진 문제인 성적인 억압이 이 작품에 녹아 있었다. 그 상황에서 가나코는 투쟁을 하였고, 특히 어릴 때 배운 발레를 다시 해보려는 것이다. <Revolution No.3>에서 어느 나그네가 춤을 추자 왕이 질투하여 그의 다리와 팔, 나중에 목까지 베어버렸다. 그는 죽어가면서 눈으로 리듬을 맞추어 마음의 춤을 추었다.


춤을 추지 못한 나그네, 하지만 그 나그네를 본 다른 누군가가 춤을 추어주었다. 아마 가나코는 억압받는 이상한 세계에 새로운 발화점이 될 인간이란 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에 힘이 필요하나, 정말 필요한 것은 그 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의지다. 신호등이 적색과 녹색이 있는데, 만약 그 신호등이 조작된 적색이라면 우린 그 선을 넘어야 하는지 마는지 고민하게 된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달릴 수 있는 자만이 세상을 바꾼다. 그리고 자동차에 차키를 꽂아 넣으면 우린 엑셀 페달을 힘껏 밟아 막혀있는 문을 향해 돌진한다.


안에서 열리지 않고, 밖에서 밀어내는 형식이라면, 그 간극의 틈을 찾아 마주쳐 나가는 게 좀비들의 인생이다. 물론 세상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고, 탐욕에 물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 계속 희생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거부하기보단 그 이익에 붙으려 한다. 우리에겐 정말 그런 사회를 비웃으며 돌파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바로 <speed>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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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벌루션 No.0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좀비들이 탄생한 시기를 알리는 것이 <Revolution NO.0>이다. 1학년 때부터 친구들이 뭉치게 된 동기 그리고 그들이 언제부터 도전이란 단어를 찾았는지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 항상 중요한 것은 선택의 기로다. 누군가 우리보고 "너희들은 할 수 있다 내지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그 말을 듣는 사람일수록 잘 알고 있다. 말하지 못한 이유는 알고 있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이다. 바꾸기 위해선 우리는 단순히 하면 되? 라는 말만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하게 될 수 있는 계기나 상황이나 길라잡이는 되어주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서도 나 자신도 어른이란 범주를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런 연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들의 이익과 사리사욕을 위해 어떻게든 희생시킨다. 희생되는 자들은 안타깝게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른바 문제아들, 사회가 포기하고 학교가 포기한 사람이다. 문제아란 이정표가 붙는 순간 세견이 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길가에 죄 없는 사람을 건들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해코질 하는 사람이라면 비난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 누구에게 해를 주지 않는데도 단지 아웃사이더(out-sider)란 신분에 의해 몰리는 경우가 많다. <Revolution NO.3>에서 좀비들은 자신들이 아웃사이더에서 열등한 유전자를 지닌 것보다 아웃사이더이기에 새로운 바람으로 만들었다. 세이와여고라는 아가씨 학교에 난입하여 그녀들과 사랑을 꿈꾸는 좀비들, 우리 사회는 계층의 구분화가 사회의 고립화를 몰고 왔다.


그렇다면 이 고립을 부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제3의 계급인 좀비들이야말로 그 바람의 중심점이다. 단 조건은 무관계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신들과 같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거나 난자질을 당한 열등이웃이라면 누구나 환영한다. 열등해질 수밖에 없는 나의 의지가 아니지만, 그 열등한 위치란 이유로 무시당하는 것은 역시 잘못된 것이다. <Revolution NO.0>는 바로 그 혁명 이전의 이야기다. 미완으로 이어진 혁명, 그러나 미완의 실패가 있었기에 좀비들은 성공했다.


<Revolution NO.0> 역시 좀비스 시리즈로 매우 유쾌하고 재미난 소설이다. 순수문학보다 장르문학에 가깝고, 가네시로 가즈키 작품은 만화책으로 나올 정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깊은 사회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이 학교에 등교하면서 친구 순신과 만난다. 순신은 항상 손에는 책을 잡고 있는데, 그 책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Fly daddy fly>와 <Revolution NO.3>에서 항상 책을 잡고 있던 순신이다. 그런데 이번에 순신이 잡고 있던 책은 단 1권이었다.


순신은 주인공에게 책 제목을 이야기해준다. <감옥의 탄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 책제목은 프랑스 사회철학자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다. 고등학생이 읽는 것은 물론이거나 대학교 인문사회대학 학부생조차 어려운 서적이 푸코의 서적이다. 이 소설에서 푸코의 서적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학교란 곳이 감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공장, 병원, 회사, 군대, 학교, 고아원 등과 같은 집단수용시설은 인간을 감시하고 그들에게 처벌을 내린다.


감시체계는 판옵티콘 시스템, 즉 일망감시시설로 작용한다. 넓은 산 안의 수용소(학교)는 학생 전체를 감시할 수 없지만, 그 감시를 대신하는 게 사루지마와 선생들이다. 그들은 손에 죽도나 방망이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이 자신들의 시각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한다. 소설후기에 이 모든 폭력적 행위가 있었냐는 말에 작가는 실제 겪은 일이라고 한다. 이런 폭력교사가 우리에겐 생소할지 모르나, 우리 한국사회 역시 익숙한 인물이다. 좀비들만큼은 아니나 비인간적으로 학교교사로부터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진 폭력을 나 역시 당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누군가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모르나, 그들이 진짜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부터 나는 의심을 하기 때문이다. 학생에게 말 잘 들으라고 하지만, 막상 그들의 행동을 보면 모순이 많다. 인간은 동물적 존재고, 때에 따라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도, 나이가 많은 어른도 실수를 한다. 실수를 하는 것에 대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제들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합리적인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Revolution NO.0>에서 좀비들이 당하는 것을 말이다. 억지로 입학생을 느려 입학금을 받고 교묘한 술수로 학생들을 퇴학 및 정학시키는 모습에서 교육의 가치는 인간의 완성이 아니었다. 학교의 이익, 자신들의 편익 이것이 바로 판옵티콘의 시작점이다. 교장을 비롯한 학교선생들은 감시체제에서 처벌을 담당하던 존재지, 진정으로 감시하는 존재는 사회라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말이나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를 생각하면 순신이 들고 다니는 책 제목 <감시와 처벌>처럼 감시의 수단으로 비인간적 폭력을 합법적 처벌로 이어진다.


그래서 좀비들은 <Revolution NO.0>에서 판옵티콘의 학교를 도망치기로 한다. 감옥을 탈옥하여 다시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감옥 안의 죄수처럼 살아가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말이다. 판옵티콘이 이미 작용된 사회는 자기검열이란 무서운 의지가 살아있다. 남의 감시가 결국 하나의 생활적 양식이 되어 그 감시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주변에 자기와 같은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하게 만든다. 인간 사이의 감시와 고발은 사회 대다수 약자에게 속박을 쇠사슬만 안겨준다.


문제가 있는 사회, 불만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면 당연하다면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자신만의 법칙을 구축해야 한다. 법칙이란 힘이 있는 자들이 자기들 편리를 위해 만든 허울 좋은 명분이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자신만의 법칙이 존재해야 한다. 좀비들이 선택은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면 용기다. 그리고 계층이 다른 자들과의 공감과 공유다. 그래서 <Revolution NO.0> 마지막과 <Revolution NO.3> 초반에 똑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생물학 선생이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서 말이다. 좀비들은 우리보다 더 못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다. 우리가 더 추락한다면 어디와 겹쳐 보일까? 좀비는 진화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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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엔젤 - 스탈린의 비밀노트,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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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크엔젤>이란 러시아에 위치한 작은 말이다. 로버트 해리스가 <아크엔젤>이란 소설에서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프롤로그에 소개되고 있다.

 

1. 대천사, 구품 천사 중 한 천사로 국가 통치자의 보호와 특별한 사명을 전달한다.

2. 러시아 북구 백해에 위치한 항구도시, 스탈린의 비밀노트가 가리키는 종착점


소설이라고 하나, 기본적인 세계관은 현실적 기반을 두고 있다. <아크엔젤>은 1990년대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 러시아의 사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러시아, 아마도 우리는 지난 과거의 변화 속에도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크엔젤>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것은 인간이 가진 광기다. 광기가 돌출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아직도 유지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에 옐친과 푸틴이 정권을 잡지만, 아직까지 러시아에선 스탈린과 스탈린 이후의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소설에서도 스탈린의 이름이 계속 언급되고,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많으며, 낫과 도끼가 새겨진 소비에트마크가 달린 물건들이 종종 나오고 기차에도 새겨져 있다. 게다가 모스크바와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넘치고 있다. 스탈린에 대해 다시 돌아가자. 왜 사람들은 스탈린을 그리워하고, 지난날의 향수를 찾아가는가? 인간은 이성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기 위해서 하나의 정체성을 설정한다.


인간의 생명은 생물학적으로 살아남으려는 본능에 치우쳐 있지만, 정체성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인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아크엔젤>에 등장하는 헥소 박사는 자신이 러시아에 방문하게 된 동기가 스탈린 연구발표하기 위해서다. 스탈린은 1936~1938년 4회의 모스크바재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가 죽인 사람 수는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이나 혹은 히틀러에게 학살당한 사람보다 더 많았다.

 

시대의 사이코패스, 광기에 젖은 인간, 스탈린이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아직까지 되살아나는 유령이다. 소비에트연방이라는 나라가 설립될 때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인터내셔널 가와 라 마르세예즈를 혁명 당시 계속 불렀고, 인터내셔널 가는 소비에트연방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그러나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 정권에서 소비에트찬가라는 곡으로 교체된다. 그 곡을 보면 Patina Lenina(Party of Lenin)이란 가사가 나오는데, 그것은 레닌의 당이란 의미다.

 

소설에서 레닌의 당, 스탈린의 당이란 가사는 없었다. 심지어 그 노래(Soviet Anthem)를 찾아 들어보면 영상편집에서 Patina Lenina 가사 부분이 나올 때 레닌과 스탈린이 나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까지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향수가 러시아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영상을 보면서 <아크엔젤>의 연결성은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 러시아에선 기존 소비에트연방이 가진 정체성 그 시대의 향수에서 많은 인간들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크엔젤>에서 헥소 박사가 스탈린의 비밀노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때 라파바와 수부린, 항구도시 아크엔젤의 사람들처럼 스탈린이란 유령에 아직 벗어날 수 없었다. 마만토프 같은 경우, 헥소 박사가 스탈린의 비밀노트를 찾아가는 것을 은근히 방해하면서 그것을 유도했고, 마지막 종착점에 다다를 때 헥소 박사는 자신이 이용당한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지난날 그들만의 영광과 이념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인간이 현실을 벗어난 이념을 숭배하는 순간 그 사회는 병이 든다. <아크엔젤>은 자본주의 문화가 러시아를 강타하고, 자본주의국가와 대립한 소비에트연방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현실에 고민하고 있다.


<아크엔젤>의 시기가 아직까지 늙은 노인들은 1917년 볼셰비키혁명을 기억한 자들도 있고, 1930년대 스탈린이 활발하게 활동할 때도 기억하고 있다. 스탈린에 대한 향수는 과거 자신들이 이룬 업적을 잊지 않은 것이다. 비밀노트의 주인은 스탈린이 아닌 스탈린의 저택에 들어온 젊은 여자다. 그 여자는 결국 죽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헥소 박사가 아크엔젤에 찾아가니 살아있었다. 여자의 어머니는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늙었고, 혼자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에 대한 향수와 광기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에 의해 딸이 모스크바로 끌려가 심한 일을 당했는데, 자기 남편이 딸의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떠나 죽었는데도 늙은 노파는 스탈린에 대해 집착한다. 스탈린은 집권을 위해서 볼셰비키 고참 당원을 모조리 숙청했고, 자신의 친구와 가족마저 잔인하게 죽도록 만들었다. 레닌이 죽고 난 후 레닌의 신격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그 후계자로 스탈린이 되는 과정은 피의 숙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왜 사람들은 스탈린이 음울하고 속이 시커먼 사람인데도 그에게 이끌릴까?


인간에겐 누구나 어둠이 있고, 그 어둠에 쌓이면 인간은 광기에 빠져버린다. 1924년 레닌사후 스탈린은 당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당의 주요간부에 임명하다. 반스탈린주의자들은 모조리 파시스트로 몰아넣었고, 거기에 동조한 인물들은 출세의 가도를 달린다. 그들이 승승장구 올라가면서 스탈린과 맞먹을 정도로 권력을 가지게 되거나 또는 스탈린에 대해 잘 알게 되면 스탈린은 그들을 응징한다. 그렇다면 스탈린의 행동에 많은 사람들은 스탈린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여야 하지만, 반대로 두려워하나 그에게 더 이끌린다.


스탈린으로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 확립, 더 나아가 자신들이 스탈린으로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욕망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비밀감옥지하에서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새로운 진급자들이 탄생한다. 이들이 총에 의해 죽어갈 때 국민들은 파시스트 첩자의 죽음,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응징이라 여긴다. 소비에트연방 해체해도 트로츠키는 아직까지 반역자의 이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미 각인된 러시아의 정체성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기보단 그 과거에 매달리는 이유는 강력했던 지난날의 향수다.


그 시대가 정당한지 아니면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때가 좋았고,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다. 광기와 살인이 넘치는 시대에 대표적인 사이코패스를 많은 사람들이 얽매인 이유는 <아크엔젤> 소설내용이나 후기처럼 우린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인 사고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힘으로 통치하는 시대에 대한 향수는 우리 스스로 억압과 폭력이란 쇠사슬로 엮이게 만든다. <아크엔젤>은 바로 그런 시대적 간극에서 벌어지는 사회상을 하나의 가설을 내세워 만든 소설이다.

 

스탈린이란 인간 그 자체는 사라져도, 스탈린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시 계속 반복된다. 스탈린이란 인물이 죽었다 해도 그런 인간이 다시 나오지 마란 법은 없다. 하지만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그런 인간이 나와도 용납하는 세상이다. 역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인간이 나와도 무방한 사회, 오히려 그런 인간들이 지배하는 것을 용인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음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이어졌다. 소설은 가상의 세계를 구성한 이야기나, 그 이야기는 현실의 실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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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빌이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이런 내용을 거론했다. “그 나라의 정치는 그 나라의 국민들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정치의 문제는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와 국민의 총체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잔인한 독재자인 히틀러나 스탈린의 등장에서 단순히 그들이 광기에 젖은 살인의지가 시행된 게 아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 원동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들이 세상을 암흑으로 만든 게 아니라 그들이 암흑으로 만들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가끔 인간의 선택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상한 지점을 고른다. 그리스 신전에 찾아간 여행객들이 신탁을 듣는 순간 도저히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아도 결국 그 비극적 운명은 도래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이성적이라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차라리 인간이 이성적이지 못하기에 그것을 인지하는 것부터 모든 게 시작하다. 자신이 생각하거나 옳다는 것은 그 본인에게 그 자체만으로 정의다. 정의에 대한 윤리성은 배제되고 오로지 자신의 제도적인 요소와 입지로 통해 정의는 갈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2015416,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지 정확하게 1년이 되었다. 단원고등학교 학생과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 가버린 비극적인 날에서 우리의 현실을 본다. 이 사건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이중성과 잔인성 그리고 욕망을 보았다.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다가 또는 집에서 이야기하다가 보상금을 받는 화제가 나오면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본다. 보상금을 많이 받아 세금도둑이라 하는 자들을 볼 때, 나는 이래 생각한다.

 

저들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바로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요행으로 거액을 받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이다. 만약 평범한 가정에 자녀가 혼자라면 돈을 몇 억 혹은 몇 십억을 받는 무슨 의미인가? 내가 만약 당신들의 애들이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질문에 모두 자신들이 도덕적인 인간인 것처럼 대답을 한다. 나는 그러는데 저들은 그렇지 않는다는 말에서 인간의 추악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세금이 오른 것도 담배 값이 오른 것도 의료보험료가 오른 것도 모두 세월호라고 말하거나 또는 그렇게 인지하는 세상을 보면 우리나라 정치의 부패는 바로 국민들의 인식이란 점을 알 수 있다.

 

남의 고통을 보고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망정, 아직 결정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은 보상 및 배상을 두고 질투하는 모습이란 가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언론에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마치 인 것처럼 흘려 놓는 모습에서 우리 현실을 본다. 돈에 대한 욕망, 그것이 타인들의 고통에서 받은 보상을 질투하는 치졸함, 게다가 세금이나 조세에 대해 계산조차 하지 못하는 무지함까지도 말이다. 만약 3,000억이 총 보상비용이라 하자.

 

담배 2000원이 오른 점에 대해 논하자면 한국흡연인구가 2013년을 기준으로 남자 42.1%, 여자 6.2%이다. 5,000만 명에서 저 정도면 2500만 명인데, 2,500만 명은 과한 것으로 보고 대략 1,000만 명으로 설정하자. 하루 담배 2,000× 10,000,000= 20,000,000,000원이다. 200억이라는 점이다. 담배 1갑을 2일을 핀다고 해도 2개월이면 모두 해결된다. 그러면 2개월 후에 담배가격이 원래로 돌아가는가? 결코 아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판치고 있는데도 세금도둑이란 말을 어디서부터 시작인가?

 

무지와 질투로 어느 것부터 고치야 할 것은 보이지 못한 채 나약한 양심은 그 양심에 비해 훨씬 나약한 사회적 약자를 공격한다. 나약한 양심으로 정의를 말할 수 없기에 그들은 정의는 약자를 내모는 것으로 성립된다. 물론 이런 방법은 현재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대에도 있었다. 당시에는 아주 유용하게 써먹은 방법이나, 후대에 와서는 모진 비판과 반사교면이 되던 실화가 되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작년, 나는 봉하마을에서 제초를 하고, 저녁 먹기 전에 잠깐 막걸리 한 잔 하고 쉬는 도중에 그 소식을 들었다. 내가 그때 생각하던 것은 진도라는 곳은 물살이 급한 곳이고 배가 만약 침몰했다면 시체조차 건져 오르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그 불안한 생각은 거의 들어맞기 시작했고, 아직까지 실종자 9인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작년의 생각에도 나는 분명 시체라도 찾으면 다행일 것이라고 친구와 전화하던 일이 있었다. 내 친구는 나보고 너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세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기 힘들고, 다소 비관적인 관점이 강하다. 마음에서 긍정의 심리를 따르지 않고, 뭐든지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부정적 시각은 사회구조적으로 또는 거시적인 판단을 나에게 주지만, 세상의 재미로서 그다지 맛을 보기 어렵다. 게다가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사회의 깊은 모순과 부조리를 그냥 무력하게 바라보는 나로선, 이 사회의 근본부터 뜯어고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보고 너는 왜 이렇게 세상에 불만이 많니?” 또는 세상을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니?”라고 한다. 솔직히 나는 별 말을 하지 않으나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당연히 너희들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니 그런 말을 하지. 만약 너희들이 그런 일들을 당하면 과연 어쩔까?”라며 지나친다. 모두 자신과 관계없으면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마치 자신들에게 그런 일은 오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여태까지 이런 재난들이 일어난 이유는 바로 저런 사고를 가졌기 때문이다. 416일에 생각할 것들은 너무 많지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들에 추모해도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겐 아직 시간이 있다. 이 세계를 살아갈 시간을 말이다. 그날의 비극 이상으로 더 비극인 것은 이 비극이 계속 되풀이 될 것이란 점이다. 역사는 2번 반복되는 소극에서 우리 앞의 생은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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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인 <Revolution No.3>를 읽으면 웃음과 흥미가 유발되는 작품이다. 좀비스라고 불리는 삼류 고등학교 불량아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우리 사회의 일면의 모순을 불랙코미디적 요소를 보여준다. 진짜 옳고 그른 것은 단순히 겉이 아니라 그 안의 진실성이다. 그런 소설을 쓰는 가네시로가 반드시 유쾌한 글만 적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슴이 시리고 아쉬움만 전해오는 글을 적는다. 우연히 아는 동생 녀석에게 소개받은 소설 <연애소설>, 내가 알던 가네시로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기본적인 그의 작품세계관의 맥락은 많이 연계되어 있었다.


가네시로의 작품이라 하여 재미를 기대한 사람이나, 그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 그 흐름에 기대는 사람 모두 가네시로의 작품 근원은 변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소설 제목이 <연애소설>이니 이 책은 분명 연애에 대한 내용을 적고 있다. 나는 연애에 대해 생각하면 그다지 좋고 아름다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애 운이 없는지 내 자신이 부족한지 모르나, 그저 씁쓸한 기분도 맛 봤을 뿐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날라 가거나 시작하려고 할 때 뒤통수를 맞던지 또는 잘 될 것 같았는데도 불발탄으로 그친 적이 많다.


게다가 성격이나 가치관도 일반인과 많이 동 떨어져 있다. 예전에 어느 사람에게 내 자신을 두고 "Little Comedian"이라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Rialto 밴드에 정규앨범이 아니 싱글앨범이 실린 곡으로 차분한 모던 락으로 노래를 듣는 순간, 뭔가 어눌하고 답답한 기분이 전해온다. 아무런 성과 없이 그저 노력하지만, 끝에는 스스로 체념해야 하는 Little Comedian처럼 내 자신이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정말 그런 일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는 나만의 광대가 되었다.


연애, 그것은 사랑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랑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이라 이야기해야할까? 말은 하기 쉬워도 인간의 감정을 쉽게 무너뜨리고 때로는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만든다. 가네시로의 <연애소설>에 나온 사랑이야기도 내가 느끼는 고독과 허무가 나온 것을 보았다. 주인공이 대학시절 옆에 동기이야기는 그야말로 끔찍한 고독과 허무다.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고, 최후에 사랑하던 여자도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준 여자를 만나 그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죽기 전까지 세상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이야기를 주인공 작가에게 말해주었다. <연애소설>이 일반적 연애소설과 다른 점은 죽음이란 세계를 항상 옆에 끼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연애소설”에선 주인공은 언제나 주변사람의 죽음을 보았고, 두 번째인 “영원의 환”편의 주인공은 암을 선고받아 언제 죽을지 모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꽃”에서 주인공은 뇌질환으로 언제 지금 당장 죽을지 모를 운명이고, 그 주인공과 같이 드라이브를 떠난 변호사 도리고에는 암을 선고받은 초로의 남자였다.


모두 죽음을 바라보고 죽음 앞에 있는 점에서 마지막으로 인간이 죽기 전에 무엇이 하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서 과연 글쎄 무엇일까? 우리는 철학자가 아니라서 스피노자처럼 사과나무를 심으려 들판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다. 결국 그 최종은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인간은 1번 태어나면 죽는 것이 당연한 운명이다. 그 운명 안에서 어떻게 벗어나려 해도 답은 없다. 죽는 모습과 과정 그리고 시기는 달라도 죽고 나면 모든 인간은 평등해진다.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깐.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나를 추모해주며, 그 사람들 마음에 내가 살아있다면,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영원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사실 그 고통과 충격을 깊이 고민하는 것만으로 괴롭지만, 그보다 괴로운 것은 혼자 외롭게 고독과 허무 아래 사라지는 것이다. 마지막에 눈을 감는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연애소설>에선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랑이란 어떻게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거나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오거나 느낄 수가 있다.


<연애소설>에서 사랑의 시작은 정말 우연이고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별의 슬픔과 죽음 역시 생각하기 어려운 선택지였다. 만약 이런 운명 앞에 우리가 그 길을 걸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혼자서는 되는 게 아니라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면 안 될 것이다. 사랑이란 것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 나는 그 사람을 왜 사랑하는가? 그 질문에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 금방 사랑은 식어간다.


내가 사랑에 빠진 것만큼 중요한 게 나는 왜 사랑하고 있는가이다. 아마 그 표현은 “꽃”편에서 가장 잘 보여준 것 같다. 가네시로 작가의 특유의 재미가 잘 나오지 않은 소설이라 해도 그의 인생가치관이 “꽃”편에 잘 나와 있다. 게이코는 남편과 28년 넘게 떨어져 살아왔지만, 남편이 살인범(그는 1970년대 일본에 살고 있는 사회적 약자 - 아마도 징용된 - 조선인의 후예였다)의 변호를 맡은 과정을 계속 찾아 정리하였다. 가난하고 소탈한 남편이나, 남편집안의 이야기인 '도리고에 가의 전설‘은 몇 번이나 들려 달라 했고, 그 전설을 만들어 내었다. 남편의 할아버지는 관동대지진 때 억울하게 핍박받은 조선인과 중국인 친구를 변호하다가 얻어맞아 죽었다.


이에 반해 아내 게이코의 집안은 한국전쟁과 일본 대공업시기에 거부가 된 사람이다. 어울리지 않은 두 사람, 하지만 게이코가 남편 도리고에를 진정 사랑한 이유는 그만이 약한 자를 비웃지 않고 진정으로 위해 뛰었기 때문이다. 바로 신념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만남은 계단에서 떨어진 게이코를 보고 다정하게 감싸준 것처럼 게이코가 바라본 도리에고의 모습은 바로 다정함이다. 그 다정함은 게이코만이 아니라 ‘도리고에 가의 전설’처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내 자신의 이기심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거나(“연애소설”편), 아니라면 그 사람을 위해 누군가를 죽일 각오가 있는지(“영원의 환”편) 아니라면 죽음만이 유일한 화해(“꽃”편) 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꽃”편에 게이코는 남편과 죽은 아들의 묘비에 남긴 꽃은 물망초다. 물망초의 말뜻은 나를 기억해주세요! 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주고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해주어 서로 마음이 아픈 일이 많더라도, 그것조차 넘을 수 있다면 멋진 사랑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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