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산을 옮기다
윤태영 지음, 노무현재단 기획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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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역사란 무엇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인간의 기록에서 역사는 항상 좋은 것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고통과 파괴로 얼룩진 반란과 전쟁 그리고 학살 등이 우리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의 역사란 결국 투쟁과 갈등의 기록인 셈이다. 정치적인 사건이 역사적으로 큰 기록으로 남는다. 어느 개인에 대한 사소한 일들을 역사로 남는 것은 무리한 설정이다. 그러나 그 역사의 공간에서 그 어느 누구라도 역사적 사건에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지, 그 공간에 머문 존재고 분면 역사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분명하다.


역사란 그런 과거의 일들을 다시 찾아내고 해석하여 지금의 현실과 마주보게 만든다.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제기한 것처럼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과연 그러하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역사로서 지나간 시간의 일들로부터 교훈을 얻는다. 우리가 왜 역사를 배우냐는 말에 사람들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왜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가?


인간에게 그런 공감과 이성적 판단능력이 결핍이 되지 않을까 여긴다. 인간은 자신의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 만족한다. 아니라면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고정된 정체성에 머문다. 물은 고이면 썩게 되고, 그 물에서는 생명은 제대로 살 수 없다. 물론 인체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해충이나 병원성 미생물은 서식할 수 있다. 그것은 삶을 위한 환경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환경이다.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여 서식할 수 있는 해충과 병원성 미생물은 자신의 이익만 찾아간다. 주변에 숙주나 희생양은 그래도 사멸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생태학적인 조건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 적용된다. 인간은 문명의 공간에서 온갖 기술과학과 문화제도에 의존하고 있다. 야생의 자연에 벗어나 자신들만의 제국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이란 존재는 만만치 않은 존재다. 인간의 환경파괴로 환경은 그대로 당하고 있지는 않는다. 각종 자연재해나 병충해, 전염병조차도 그런 충격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다. 지구의 공기가 더워지고 오염이 되면 태풍이 불어 그것을 정화하고 온도를 낮춘다. 그렇다면 인간이 계속 지구를 병들게 한다면 지구 역시 인간을 병들게 만든다.


역사적 교훈에서 유럽의 페스트 내지 각종 전염병 사례로 본다면 인간의 위생관리와 정부의 통제능력, 그리고 국민의 인식에서 알 수 있다. 자연은 스스로 일어나는 재앙이나, 그것을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재난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실패와 실수를 보고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같은 사고는 반복되면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근(2015년 6월), 한국에서 MERS라고 불리는 바이러스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다행히 내가 사는 지역은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이 크지 않은 지역이다. 하지만 저 MERS라고 불리는 전염병은 감기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잠복기가 1~2일 정도이며, 고열과 기침 같은 감기 증세를 보여준다. 예전에 사스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할 때 세계 언론은 전염병의 무서운 전파력과 치명적인 증상에 두려워했다. 점막의 침투나 구강의 투입이 아닌 호흡으로 전달되는 병원성 미생물은 참으로 귀찮다.


결국 일이 터지면 이것을 어떻게 통제하는가에서 그 사회의 관리체계나 구조를 알 수 있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이미 사망자가 발생하고, 다수의 감염자가 격리 중이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잠재적인 환자가 얼마나 더 있는가이다. 위에서 언급하듯이 MERS는 잠복기가 1~2일이다. 감염된 직후 바로 증상이 오는 게 아니라 잠복기를 거친 후 갑작스레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어떻게든 역학조사와 질병통제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극심해진다. 가령 수도권에 사는 사람이 기차나 버스를 타고 부산, 광주, 대구, 원주 등과 같이 전국으로 간다면,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병에 노출되고, 그 사람들이 평소대로 활동하면 전국적인 참극이 발생된다.


결국 국가운영 체계에서 얼마나 질병이나 재난통제의 수준이 그 상황을 타파하는 척도가 된다. 2003년 당시 사스가 전 세계를 타격하고, 게다가 그때 태풍 매미까지 한국을 타격했다. 한국에서 태풍은 7~8월인 장마철 주로 오나 가끔 가을태풍이 오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가을태풍은 한국을 위태롭게 만든다. 태풍의 이동경로에서 9월 태풍은 한국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매미태풍은 폭우와 회오리바람으로 많은 재산피해를 일으킨 자연재앙이었다. 그 태풍이 지나가고 그 해 2013년 12월에 나는 군대에 입대하고, 다음해 자대에 배치 받았다.


내가 속한 부대는 공사와 용역설계를 집행하고 관리하는 건설사무소였다. 공사행정을 업무를 보던 나는 하자보수 건으로 외부업체들과 계속 업무를 진행했다. 그런데 공사대장을 찾아보니 대부분 2003년에 공사를 계약하여 그 해 내지 2004년 초에 다 정리된 공사가 많았다. 대규모 보수공사를 정리하면서 계약일과 공사과업을 살펴보니 그것은 태풍 매미로 인해 파손된 시설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공사인 것이다. 빠른 공사 집행과 관리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예산과 관련된 말에서 나는 조금 더 놀랐다.


군대라는 곳은 지방세로 운영하는 게 아니라 국비로 운영한다. 국방부가 예산운영기관과 협의하여 예산을 받아온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예산소요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삼군 참모총장에게 공문을 시달하고, 삼군 참모총장은 다시 예하부대로 그 사항을 지시하여 소요를 보고하게 한다. 그러면 여기서 끝이 아니라 그 예하부대의 소속 부대들은 소요를 제기하여 그것을 집계하여 정리하면 기간이 제법 걸린다. 그러다 보면 예산을 관리하는 담당관조차 그것을 구분해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왜냐하면 예산을 받기 위해 예산운영기관의 관리만 아니라 행정부와 국회 등과 같은 다른 기관에서 협의해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자세히 몰랐으나, 업무를 하고 사회에 나와 계속 건설용역 관련 업무를 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예산은 국가운영의 예산이 아니라 개인의 판공비였다. 어느 공무기관의 부서장이 자신의 업무에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예산이 태풍 매미의 복구예산으로 나온 것이다.


2014년 8월 폭우로 인해 침수피해에 대한 복구 관련 용역 및 공사가 2015년에 한창 진행되는데, 이미 그때는 이미 1달도 안 되어 그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국가재난상황에 빠른 대응과 대처, 그리고 후속 조치가 국가기관 업무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국가라는 조직은 바로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체계를 마련하고 관리해주는 기관이어야 한다. 관리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평시에는 별 상관없으나 전시, 준전시, 재난 시에 그 피해가 극에 달한다.


2014년 4월 팽목항에서 일어난 세월호 선박사고는 수많은 인명을 허무하게 보내야 했다. 국가기관의 재난통제능력은 바로 이런 계기에서 바로 볼 수 있다. 바다에서 일어난 재난사고는 누가 과연 컨트롤 타워가 되어 운영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우왕좌왕한 사이 배를 가라앉았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나, 그 주인은 차디찬 하데스의 신전으로 가야했다. 포세이돈이 등장해서 기적이라도 일으켜 주면 좋겠지만, 기적은 없고, 기만으로 가득한 언론과 여론만 생겼다.


그러면서 과거 어떤 남자가 생각났다. 무능한 것이 아니라 무력한 남자, 그래도 『캉디드』도 아닌데도 낙관주의로서 세상을 보려했던 남자, 노무현이 생각났다. 내가 군복무 할 때 그가 대통령이었다. 재난에 대한 관리체계가 12년 전과 지금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그냥은 아니었다. 『바보 산을 옮기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6주년에 나온 서적이다. 어느 한 인물이 죽어 세상에 없어도 그에 대한 서적이나 이야기는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매년 5월만 되면 계속 끊이지 않은 인간은 아마 노무현밖에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국가적 재난, 피해자가 속출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국민, 국가의 대응체계에 그저 무력하게 바라보는 현실에서 언제나 그렇지만 노무현이란 이름이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이 책은 과거 그의 비서관으로 활동한 윤태영 씨가 작성한 것이고, 그는 이 서적을 만들기 전에 『기록』이란 서적을 출간했다. 처음 <바보 산을 옮기다>를 읽으면 유시민 전 장관이 만든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와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면 어느 위기나 역사적 순간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시선이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에만 의존한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후맥락을 읽지 않으면 편향된 판단력으로 이어진다. 바로 그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가려진 이야기보단 가려질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여기서 잘 알 수 있는 윤태영 전 비서관이 바라본 노무현의 정치관이다. 노무현은 노동자를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변호사에서 변호인으로 되었다. 그가 가진 꿈을 갖고 정치에 입문해도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처럼 이미 세계는 자본의 국경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20세기 그리고 그것이 가속화된 21세기에 자본이 결국 모든 것을 지배했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자본이 모든 것을 가진 것을 인정하듯이 자본이 우선인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자본 그 자체를 무리하게 억제하는 것은 시대적 역행이고, 그것만 우선하면 대다수의 약자인 국민들은 피해본다. 결론은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피해가 오고, 그에게 기대한 사람들은 실망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선임된 순간, 대한민국이 바로 바뀌지 않는다. 단지 바꿀 수 있는 정점만 생길 뿐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다고 해서 바로 프랑스 민중생활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인간들의 실수는 모든지 체계나 정치제의 개편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올 것이 여기나, 그것은 명백한 바보 같은 소리다. 단지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만약 그 기회를 버리면 더 심각한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은 프랑스를 위대한 독재자 나폴레옹의 손으로 가게 만들었다.


민주주의 역사가 시작된 프랑스가 오히려 제국주의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부르봉왕가의 부활, 후에 일어난 혁명을 보면서 역사를 배우는 바로 그런 것이며,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와 계속 대화하는 이야기란 사실이 이런 연유다. 노무현이란 인간은 그런 역사를 알았다. 대통령 노무현은 그런 세상을 이해하고 바꾸려 했다. 하지만 인간은 논리와 이성으로 이루어진 동물이 아니다. 감정이라 해도 연민의 감정만이 아니라 질투와 시기, 우월의식에 고취된 무의식적인 공격성도 있다.


국민이 국가를 위한 일반의지가 아니라 어느 집단의 이기심이 하나의 정치적인 가치관이 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전체의지로 표출된 것이 현재 상황이다. 지역의 차이로 인간을 차별하고 그것이 정치적 갈등이 되어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물론 우리가 아킬레우스 같은 뛰어난 전사가 아닌 상태에서 발목을 잡힌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그걸 바라볼 수 없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고, 그것을 선례로 남겨야 한다. 반면교사의 교훈을 보면 처음 이상을 가지고 뛰어든 전사는 비참한 인생과 최후를 맞이한다.


그가 가진 이상과 반대된 자들은 득세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 반대세력조차 자연의 섭리에 의해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의 이상을 위해 투쟁한 자는 역사의 새로운 안내자가 된다.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혁명가들의 복음서 『사회계약론』을 저술한 루소조차 그렇다. 좌파의 시작인 그가 좌․우파 모두에게 찬사와 비난을 받았으나, 지금 21세기 그는 세계의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2012년 유네스코에 정한 인물). 루소는 아마 산을 옮길 수 있는 설계도면이나 지침서를 주었다면 그 후에 등장한 인물들은 산을 옮기려 했거나 실제 옮겼을 것이다.


『바보 산을 옮기다』를 읽으면서 『사회계약론』이 많이 떠올랐다.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정치인이 아니라 법에 복종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시민들은 오직 법에만 복종해야 하는 점이다. 법 위에 군림하는 자가 나오면 독재가 되고, 많은 시민들은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게 『사회계약론』의 가르침이다. 민주주의는 단지 외적으로 정치체계로서 존재하지 모르나, 진정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성적 성찰과 비판, 그리고 토론과 협의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평가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관료체계는 바로 그런 조직적 힘을 뒷받침하기 것이나, 그게 어느 개인과 집단적 이익관계가 개입되면 법은 모든 인간의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인간만 위에 군림하게 만들게 된다. 노무현이 말한 산이란 바로 그런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을 모두 법 아래로 내려놓기 위함이다. 그 법 위에 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각종 차별의식을 불어넣고 언론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속인다. 물론 노무현의 사상 자체가 모두 옳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바에서 진정 우리가 비판적 자세로 이성적 성찰을 한다면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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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6-0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스때와 메르스의 지금을 비교하면 누가 덜 나쁜지는 자명하죠.노무현이라고 다 최선일 수는 없지만 지금은 최악입니다.
지도자가 무능하면 국민이 어떤 고통을 받는지 고통의 범위가 달라질겁니다. 지금은 정부가 없는 셈이죠.무능은 속수무책을 만들죠.

만화애니비평 2015-06-06 12:31   좋아요 0 | URL
반정부도 무정부도 아닌 비정부가 맞을지도
아나키스트도 아닌 자들이 정부를 해체하고 있으니..아이고...
 

<사이코 패스> TV판을 보면 주제가 바로 감시와 처벌이다. 코가미 신야가 자신의 스승에게 찾아가 마키시마 쇼코를 추적할 때, 스승과 제자는 시빌라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 그리고 그것을 피해가는 쇼코에 대한 추리를 한다. 그때 나온 단어가 푸코와 벤담의 파놉티콘이란 일원감시망이다. 시빌라 시스템이란 모든 정점의 최고에 올라 자신의 볼 수 있는 시선으로 모두 감시한다. 즉 전 지구적인 감시, 인간의 눈이 아니라 신이 준 눈으로 보는 것이다. 시빌라(Sibylla)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시빌(Sibyl)의 원조로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무녀를 지칭한다.

 

그녀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에 의해 축복을 받은 무녀로서 신탁을 내리는 재능이 있다. 신탁을 내리는 것은 곧 신의 말을 전하는 것, 인간의 신체로 인간이상의 존재의 말로서 모든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신화 내지 또는 비극, 특히 위대한 그리스시인 호메로스가 저술한 일리아스를 조금 읽으면 조금 감이 올 수 있다. 시빌라 시스템의 의도를 보자면 곧 인간이 만든 제도이나, 인간 이상의 존재가 만든 체계 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자신들의 원류가 면역체질의 인간, 즉 마키시마 쇼코 같은 인간들의 뇌가 밀집하여, 자신들의 판단으로서 모든 사회를 지배한다. 그들은 육체가 존재하지 않고, 뇌라는 정신적 기능을 수행하는 부분만 남는다. 육체가 사라진 인간에게 필요한 욕망은 무엇인가? 신체를 가진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식욕이다. 음식을 섭취하여 자신의 체력을 유지하며, 그것이 만족하면 성욕이다. 성욕은 자신의 성적 무의식 리비도에 의해 성행위를 나누고, 그것은 새로운 자신의 분신, 후손을 남긴다.

 

그러나 성욕과 식욕이 만족되면 인간을 무엇을 추구하는가? 결국 인간은 문화적 존재로 살아가고, 그 문화에서 문명의 발전과 사회적 진보는 결과적으로 진행된다. 문제는 그 문화적 존재로 살아가는데, 그 정치사회적 체계가 달려있다. 22세기 세계는 분쟁으로 인해 단절되고, 본 작품의 세계에서 일본은 시빌라 시스템이 모든 것을 정한다. 시빌라 시스템이 추구하는 목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이른바 공리주의라는 사회제도로서 이것은 사회주의, 자유주의 이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체계다. 공리주의는 그 자체로서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정치체계를 우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이코 패스>에서 공리주의가 모든 정치제도의 머리 위에 존재한다. 즉 시빌라 시스템이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한 것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법위에 존재하는 통치자, 즉 노모스(nomos)로서 존재하고, 이 통치자는 육체가 없는 정신적 영역만 존재하므로 이상적인 정치사회를 구현하려 한다. 문제는 인간의 정치제도의 이상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은 고대사회부터 현대사회로 이어지는 게 우리의 역사다.

 

이 역사적 흐름에서 계급투쟁이 처음에 족장과 부족(고대 이전 사회), 신화적 왕과 신민(고대사회), 왕족귀족과 성직자와 농노(봉건사회), 다음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본주의 체계로 이행된다. 이런 관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혁명, 반동과 반란의 세상이다. 인간이 그토록 투쟁하며 살아온 이유는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자신의 주인으로 되기 위한 몸부림이다. 시발라 시스템이 일본을 제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저 투쟁의 역사에서 인간은 자신 스스로가 주인으로 살아가기보단 자신의 욕망과 안위를 위해 살아간 것이다.

 

민주주의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국민의 선택이다. 국민이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와 사유로서 이성적 비판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성의 자유를 최고의 자유로 여기는 것은 고대그리스부터 근대사상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인간은 이성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가이다. 오히려 자유라는 의지를 이성보단 자신의 감정과 무의식이란 욕망에 의해 스스로의 자유를 파괴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여 만든 사회화는 자신이란 존재는 군중의 벽 뒤로 숨어버린다.

 

시발라 시스템이 왜 일본에서 최적화되었는가? 마키시마 쇼코가 왜 그런 테러를 준비했는가?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사이코 패스> 1기에서 쇼코의 행동은 분명히 테러이고, () 사회적인 행위이며, 명확한 악으로서 보여준다. 하지만 쇼코의 입장에서 쇼코의 논리로 들어가면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에서 그 역시 정의가 존재한다. 정의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정의는 그 집단이 가지고 있는 의지이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쇼코의 정의는 시빌라 시스템이 인간을 가축으로 길들이고, 결국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에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에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이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런 식으로 쇼코는 인간의 불안한 충동을 실험하고 사회에 대한 공격을 가한다. 시빌라 시스템이 우려하는 것은 사회의 분란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세상에 불순물이 생기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따른 두뇌스캔에서 인간의 심리가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진 것에 따라 그 사회의 불순물이 될지 혹은 그런 가능성이 있는지 분리한다. 인간의 심리란 후천적인 영향을 받지만, 인간의 심리 혹은 영혼 역시 선천적 영향을 받는다.

 

시빌라 시스템에서 운영되는 뇌들은 선천적인 존재이고, 자신들은 선택받았기에 신을 대신 신탁자로서 인간을 통치하고, 모든 것을 감시한다. 그런 시스템이 일본이 아니라 타국에 간다면? 여기서부터 <사이코 패스> 극장판의 본질적 문제가 드러난다. 시빌라 시스템은 동남아시아 연합이 국가적 기능이 붕괴한지 2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 내전만 존재하는 비국가적인 체계다. TV판에서 아카네가 시빌라 시스템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빌라 시스템이 하나의 법적 제도적 체계가 되었다.

 

아카네는 시빌라 시스템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시빌라 시스템이 만들어낸 법적인 체계를 인정했다. 즉 아카네는 법을 존중한 것이다. 그런 TV판의 모습과 극장판 모습에서 아카네 감시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TV판에서 시빌라 시스템을 부정하지만, 그 시스템이 만든 공리주의 사회체계는 긍정한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연합에서의 시빌라는 부정한다. 동남아시아연합은 계속 내전 중이고, 군벌과 반정부 게릴라는 계속된 내전으로 많은 인명을 희생시킨다. 이때 반정부에 대한 시빌라 시스템에 대한 개입을 두고 아카네는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바로 인도네시아의 인민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해라는 점이다. 아카네의 역설적인 반응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아카네가 사회계약론을 토대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카네는 동남아시아 연합의 인민들의 선택에 의한 정치를 만드는 게 합당하다고 했다. 시빌라 시스템이 동남아시아 연합에 개입한 이유는 그것은 군벌에 의한 압제로 인해 하나의 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가적 기능에서 국민이 없으면 국가로 볼 수 없다. 국민이 없는 이전의 사회, 그곳에 주거하는 인간에 대해 인민이라 한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은 오로지 법에만 복종하고,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은 모든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자가 되기 때문이다. 통치자 내지 정치가 역시 법에 복종하여 정치를 실행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아카네의 논리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인도네시아 군벌세력은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으로 관료주의의 폭력성을 정당화하여 인도네시아 연합 주민들을 탄압한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다른 군벌세력과 반정부 게릴라를 섬멸한다.

 

반정부 게릴라는 본래 민주주의국가를 정착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무리다. 인도네시아 연합 수도에 들어가면 일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목에 목걸이를 차고 있다. 그 목걸이는 만약 군벌세력에 복종하지 않으면 바로 처벌할 수 있게 만든 도구다. 감시와 처벌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체계로 군벌세력은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를 지배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던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구절)."

 

군벌은 남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시빌라 시스템을 이용하여 그보다 더 심한 사슬에 묶인 (권력의) 노예였다. <사이코 패스> 극장판에서 TV 1기 실종된 코가미 신야를 쫓아 인도네시아 연합으로 간 아카네지만, 그 스토리 이면에 가려진 작품세계는 인간이 가진 자유와 의지다. 왜 반정부 게릴라는 거대한 군벌의 무기 앞에 무참히 죽어가도 그 총을 놓지 않은 것인가? 왜 코가미 신야의 친구인 게릴라지도자는 죽을 줄 알면서도 옆의 동료 옆에서 적에게 총구를 겨누는 것인가?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구절).”

 

사실 아케네가 일본에서 일어난 테러범들의 출처가 코가미 신야의 연계성을 보고 넘어간 것이나, 그곳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모순, 그리고 아카네와 코가미의 활약에서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에서 가치가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카네 친구의 결혼이다. 그녀는 드레스를 고르면서 상대남자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시빌라 시스템에서 정해준 것이라 말한다. 사랑과 가족관계 역시 시빌라 시스템으로 이어지면 인간은 자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들은 없다.

 

단지 정해진 틀에 의해 기계적인 삶만 살아간다. 그런 완벽하게 돌아가는 인간의 삶을 바라는 것이 시빌라 시스템이다.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 이상의 의지가 존재하기에 그렇다. 글 초반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거론한 이유는 이 작품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들의 의지에 의해 농락당한다. 제우스와 그 주변 신들의 힘에 의해 전사들은 하데스의 신전에 찾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신의 입 바람으로 활과 창이 상대방의 심장과 머리에 박힌다. 이런 신화적 세계관이 인간세상에서 하나의 정당성이 되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쇼코를 죽인 코가미는 오히려 쇼코처럼 되어간다. 단지 쇼코는 개인적 취향, 미적감각에 의해 인간들을 움직이나, 코가미는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위해 싸우는 지성인으로서 투쟁한다.

 

나는 인류 속에서 두 종류의 불평등을 생각한다. 그 하나를 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 부른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연령이나 건강이나 체력의 차이와 정신, 또는 영혼의 질의 차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종의 약속에 의존하여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정해지든가 정당화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 부를 수 있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은 얼마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침으로써 누리게 되는 갖가지 특권,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부유하다든가 존경을 받고 있다는가 권력이 있다는가, 나아가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복종시킨다는 특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이코 패스> TV판과 극장판에 등장하는 불평등은 2가지로 볼 수 있다. TV판에서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고, 극장판은 사회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다. 그래서 전자는 이미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굴레에 살아가고, 후자에서는 투쟁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사이코 패스>에서 일본의 인간들은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배받는데 익숙해진 국민은 이미 지배자 없이 지낼 수 없게 되지요. 만일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들은 자유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들은 참된 자유와 반대되는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므로, 혁명을 한다고 해도 거의 언제나 자기들의 족쇄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버릴 뿐인 선동가들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지요(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이코 패스>는 먼 미래를 사회적 배경을 삼은 SF범죄 장르다. 이 작품에서 시빌라 시스템은 완벽한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는 이상적인 가치관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시민의 자유의지가 아닌 시빌라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소수 인간의 뇌만으로 결정된다. 비록 그 세상이 안정되더라도 어떻게든 인간사회에선 특이한 존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존재에 대해 우리는 배타적으로 대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받아들여 하나의 가치로 인정할 것인가? 시빌라 시스템은 자신 이외의 가치를 모조리 부정한다. 그곳 세계는 민주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이란 존재 아래 자신의 기계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만 존재할 뿐이다. <사이코 패스>에서 쇼코가 가진 책으로 조지 오웰의 <1984>가 있다. 하지만 작품을 계속 보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가고 있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이미 당신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해져 있다 말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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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사상의 이해
박호성 지음 / 인간사랑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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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도시의 지식인으로 살아가던 토마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 자신에게 강요하면 그는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그래야만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최후에는 어느 농촌 시골에 가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도시에서 언제나 수많은 여자의 침대에서 화려한 바람둥이로 살아간 토마스, 하지만 시골에서 그런 모습은 없다. 농촌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고, 트랙터를 고치는 농부로 살아간다.


본래 어릴 적에 토마스는 트럭을 수리해본 경험이 있었다. 다들 화려한 세계에 살아간 전(前) 외과의사인 토마스를 존경했지만, 토마스는 결국 시골생활에 만족했다. 토마스와 결혼한 테레사는 자신이 원하는 삶에 토마스를 이끌고 와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오히려 토마스는 시골생활에 만족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시작은 니체로 시작하는 것이 나온다. 프리드리히 니체, 모든 서양의 형이상학적 관념을 전복한 신을 죽인 남자, 그리고 인간의 관계성보단 실존적인 인간에서 이 소설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따라간 토마스 모습에서 니체보단 오히려 루소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은가 싶다.


토마스의 모습에서 말년은 루소의 <에밀>이 보여주던 이야기와 흡사하다. 자신의 의지로 시골에서 살아가고, 다양한 시골사람들과 관계에서 토마스는 자신의 의지로서 사람들과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실존적인 요소에서 토마스는 그의 아들조차 아들이기보단 차라리 남으로서 대한다. 인간 그 자체로서 자신의 실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그 자체를 외면하고 여자의 품에서 방황한 토마스에게, 시골농촌이란 즉 자연이란 어머니의 품이었다. 자연이란 공간에서 인간은 그 모든 것을 평등하게 해준다.


인간에게 자연성이 왜 중요한가? 루소의 사상을 생각하면 인간은 자유와 평등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도덕적 인간도 아니고, 정치적 인간도 아니었다. 그는 불륜에 빠졌고, 프라하에서 소비에트의 침공 이후 그들의 정치제에 반대하는 서명조차 거부한다. 그러나 그가 완성한 인간상은 자연적 인간상이다. 왜 루소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서로 대조했을까? 루소의 사상에서 인간의 시작은 자연적 인간 내지 도덕적 인간에서 또는 정치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제시한다.


<에밀>에서 제시한 인간상은 도덕적 인간이나 그 본래에 자연적 인간이 숨어있다. 왜 인간은 자연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루소사상의 이해>에 연구한 내용을 본다면 인간은 자애심,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찾는다. 그게 바로 인간의 사랑에서 첫 번째 명제다. 내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애심에 만족하면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찾는다. 자연인들은 자신의 삶을 만족하면 타인에 대해 감정을 품게 된다. 혼자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은 타인과 교류하고, 그들의 입장을 동조한다.


누군가 아프고 괴로우면 자연인은 그것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괴로워한다. 자신이 가진 감정, 즉 연민이란 인간 순수한 감정을 루소는 발견한다. 왜 이런 인간의 자연성 감정, 연민이란 감정이 중요한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으면 루소가 보는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루소가 보는 사회란 오로지 악과 부패 그리고 착취와 억압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고, 자신을 위해 누군가 속박하는 현실에서 <사회계약론>에서 억압이란 사슬을 다룬다. 나를 위한 사슬이 결국 자신을 속박하는 사슬이 되고, 그것은 새로운 사슬을 찾기 위해 도구로 이용되는 점이다.


인간에 대한 불평등에서 루소는 기존 서구와 다른 관점으로 제시했다. 루소는 분명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에서 최고 이상적 국가관은 스파르타와 로마였다. 특히 스파르타 남성에 대한 찬미는 대단했다. 모든 법적 제도나 생활습관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명료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로서 살아간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루소는 플라톤의 <국가> 내지 다른 서적에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플라톤의 사상을 뛰어넘어 다른 식으로 물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책에서 1912년 루소 탄생 200주년에서 루소의 사상은 칸트와 연결하였다면, 1962년에 칸트 대신 마르크스가 그 자리로 들어간 점이다. 루소의 <에밀>은 칸트의 3대 비판서 토대가 되었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처럼 인간의 선험적 판단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인간 그 자체가 자연적인 존재, 즉 모든 경험과 파당적 사유로부터 멀어져야 가능했다. 그리고 <실천이성비판>은 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선(善, goods)이란 바로 자신의 의지로서 실천한다. 하지만 인간이 타인에게 베푸는 선에서 2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근거하는지 혹은 감정이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점이다. 이성과 감성이 올바르게 정립되었다면 그 인간은 자연적 인간이면서 또한 이성적 인간이다. 인간은 언제나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차라리 모순보다 역설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바로 루소의 사상이 위험하고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역설적인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도 그것에 반대(反對)하기도 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열렸을 때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모든 사회적 초점은 진보적 이성과 과학적 기술에 의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루소는 그것이 바르지 않음을 이미 예견했다. 이성의 발달과 더불어 감정이 중시되고, <신(新) 엘로이즈>와 같은 경우 데탕트 쥘리로 보는 인간이란 이성 이성의 자연스런 인간의 마음이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니체가 말한 인간상에서 진정한 강한 사람이 약한 자를 돕는 이유는 마음에 느끼는 약한 감정이나 또는 그 도움으로서 타인의 평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답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을 타고 올라가면 루소의 경우 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조하는가? 이유는 자신이 인간이고, 인간은 본래 선하기에 연민의 감정으로 타인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민에 자만이나 우월심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이나 즐거움이 존재해도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연적 인간을 넘어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에밀>에서 에밀은 자신의 가정교사와 더불어 소피의 집으로 간다.


원래 제 시간에 갈 수 있으나, 길가에 쓰러진 남자를 보고 그를 그의 집에 데려간다. 그리고 가정교사와 더불어 병자를 간호한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다. 의사를 데려오고, 집 안의 식구들이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안정을 되찾아 준다. 하지만 현대인들 즉 문명인에서 타인의 고통은 그저 구경거리로 변한다. 길가에 누군가 쓰러지면 가서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경찰이나 소방서에 신고하여 어서 그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또는 길가에 싸움이 벌여지면 모두 구경하기 바쁘다.


루소는 길가의 신사들이 목숨을 걸고 결투를 벌일 때 그들을 말리는 사람들이란 순박한 시장가의 사람인 점을 말했다. 그에게 이상적인 인간이 에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현실에 에밀이 없다면 어느 인간이 더 소중한가? 지식을 갖춘 높은 분보다 차라리 시골에서 농사짓고 순박하게 살아가는 농민이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역시 인클로저 현상이 제법 지난 후에라 농민들이 집과 농지를 버리고 도시로 이주했다. 도시에 온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로 되어 비참한 노동으로 살아가거나 때로는 강도나 거지로 살아간다.


최후는 병에 걸려 죽거나 사형대에 죽어 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 루소가 지적한 인간을 타락하는 요소는 사회다. 루소의 사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 그리고 그 인간과 신에 대한 관계다. 신이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은 존재, 혹은 인간은 원초적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난 순간부터 죄인이라는 관념을 바꾸었다. 오히려 인간이란 본성을 선하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존재한 사회적 억압이 인간을 타락하게 만든 것이다. 인간이 욕심이 생기고 고통이 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인 불평등이 강하고, 그것을 탐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인간, 즉 자신에게 돌아간 인간에게 탐욕의 손길을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오로지 자신에게 자신의 의지로서 행복을 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인간의 삶을 악덕으로 가득하게 한다. 루소의 이런 사상은 훗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의 토대가 된다.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서적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자코뱅당 좌파와 리카도학파 좌파로 이어진 것에 중점을 맞춘다.


특히 자코뱅당의 사상적 기반이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이고, 좌코뱅당의 대표적인 혁명가인 로베스피에로, 당통, 마라 등은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다. 루소의 사상은 인간을 지배하는 신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원리로 바꾸었다. 신은 분명 존재하나, 그 신은 인간과 자연을 처음부터 만들 뿐이지 그 이상으로 관여하지 않은 이신론(理神論)을 제기한 것이다. 신의 의지란 바로 내가 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신이 부여한 나란 존재가 스스로의 의지로서 살아간 것이다. 덕분에 루소는 자신이 저술한 <에밀>이 불태워져야 하는 비극을 겪고, 프랑스 파리 당국 경찰에 의해 추격당하는 신세가 된다.


평생 권력에 의해 억압과 탄압을 받고, 파리에 돌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야유와 조롱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루소는 인간에 대한 인류애를 포기하지 않았다. 루소의 생애를 보면 그가 시골에 은거할 때 처음 마을주민들은 마치 악마를 본 것처럼 깜짝 놀란다. 하지만 루소의 모습을 보고 안심하고, 루소는 마을주민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이 가진 의복이나 물건 등을 주었다. 그들은 권력자와 상위계급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루소는 산악지방이나 농촌지방에서 그들과 살면서 그들이 주로 먹는 음식을 즐겼다.


야생에서 나오는 과일과 채소, 그리고 강가에서 잡히는 생선, 투박한 맛이나 건강에 이로운 음식들, <에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이 나오는 곳은 농촌이었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은 자연의 공간에서 살 수 없는 것을 알았다. <에밀>에서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은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민에게 복종하는 것은 법이지 그 이상은 없다. 하지만 현실은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루소의 공화주의 국가관은 인간은 법 이외에 그 외는 절대 복종하면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이권에 개입되면 인간은 비참해진다. 인간이 평등해지기 위해선 오로지 법에만 복종하면 된다.


그런다고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에게 복종해도 평등해진다. 모두 다 억압과 압제의 희생자로서 말이다. 만일 그런 인간들만 존재한 나라에 자유가 돌아와도 인간은 살아가는 방식을 모르고, 난폭한 야만인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연적 인간상 대신 남들을 억압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 하는 난폭한 맹수가 된다는 점이다. 루소는 자애심은 인정하고 자신의 재산을 인정한다. 그것은 자신이 비참한 삶을 살면 안 되고, 자신의 쌓아온 성과를 무시당하면 안 된다. 그러나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반대했다.


지금 현실 자본주의에서 개인의 재산은 타인의 재산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루소는 시민들이 누구나 너무 부자가 되면 안 되고, 자신의 몸을 팔 만큼 너무 가난하면 안 된다고 했다. 만일 그 가난이 치중되면 인간은 비참해진다. 루소가 본 파리의 거리는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가 아니라 빈민과 거지의 소굴, 강도의 은거지, 창녀들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사람에 대해 손가락질하고 무시하고 천대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이렇게 되었고, 이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였다.


철학에서 고대 그리스 플라톤의 경우 스승인 소크라테스로 통해 인간의 행복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갈 깊은 사고와 성찰로서 초연해질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니체가 말한 초인도 플라톤이 말한 철인적인 요소와 흡사할 것이다. 이에 반해 루소는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역으로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일반의지가 파괴될 수 없는 이유, 인간은 자연적 존재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루소의 역설적 요소는 바로 인간이 숲에서 곰처럼 살아갈 수 없는 점을 알기에 문명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은 자신의 세계에 자연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만약 거기에 초월한 인간이라면 완벽한 실존적인 자연인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느끼는 세상이란 자신 이외에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호수세계 파동을 느낄 것이다. 루소가 계몽주의만 아니라 자연주의자로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인간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역설적 요소는 책에서 최초의 칸트주의자,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처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아버지로 될 수 있다. 후대에 이르러 교육학의 거두인 존 듀이, 인류학의 거장 레비 스트로스, 그리고 많은 혁명가들의 우상이 되었다. 이 책을 보고 의아한 점은 쿠바혁명에서 체 게바라와 같이 활동했던 피델 카스트로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주의로 알고 있지만, 그는 <사회계약론>을 항상 가지고 다녔고, 피델 이전의 남미의 혁명가인 시몬 볼리바르의 경우 루소에게 영향을 받아 평생 혁명을 위해 살았다.


현대에서 큰 사회적 변동을 마르크스에서 찾지만, 사실 그 원류는 루소에게 있다. 루소가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은 없었다. 물론 프랑스국민들의 분노로 인한 반정이나 쿠데타 폭동, 혁명 등은 존재했어도 그것을 이끌어 주는 이데올로기는 루소의 사상이다. 그 에너지를 흐름을 타고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루소의 사상이란 점이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신은 오로지 자신의 양심과 의지를 알아주는 존재인 것처럼, 오늘 날 우리 인간은 스스로에게 떳떳한가? 약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어긋난 세상에 대해 분노하는 루소의 눈에서 오히려 그런 포악한 자는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자신의 행동이 옳다 여긴다.


선악의 구분은 결국 인간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에서 힘의 대결이고, 그 선악이란 정의는 의미 없거나 비참한 결말로 이어진다. 더 많은 권력을 찾기 위해 권력에 아부하는 세상에서 루소의 자연성을 찾고, 시민의 의무를 생각하는 것은 그나마 우리 인간이 인간이란 이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진정한 자유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연성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만일 이 사회가 비참함과 분노로 가득하다면 그 사회는 자유의 참 된 의미를 상실했다. 진정한 자유가 없다면 그 나라의 시민들은 애국심도 없고, 올바른 판단도 없다. 오직 멸망이란 사슬로 인도될 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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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X프린세스X블레이드 2 - Seed Novel
오버정우기 지음, 보라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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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 1권에서 리온이 교룡학원에 와서 그곳의 주인인 밀레니아와 용약의 계약을 맺는 것이 나온다. 처음에 교룡학원에 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리온은 동생 리에의 배웅으로 우연의 장난에 의해 학교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학원에 입학하였다면, 그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1권은 말 그대로 리온과 리에가 교룡학원에 온 점에서 서사의 발단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2권부터 그 서사의 진행이 되는 전개로 이어진다.


전반적으로 서사는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지만, 그 안에서 1권마다 작은 서사가 담겨있다. 큰 서사 안의 작은 서사에서 2권은 분명 전개로 되겠으나, 그 내부에도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이란 서사구조가 있다. 2권 전체로 보자면 1권에서 드래곤은 오직 밀레니아 혼자라면 2권부터 새로운 드래곤이 나온다는 점이다. 1권에서 주인공 중에서 메인의 등장이라면, 2권부터 그 메인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보조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우선 밀레니아 학교의 주인이며, 학생회장인 점에서 자신의 학생회 소속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그녀들이 바로 3명의 드래곤이다. 1권부터 이상한 계략만 알려주는 샐리, 전투적인 슈, 지적이나 타인들과 벽을 쌓는 페이린이다. 모두 용족이고, 계층도 높은 부류다. 밀레니아가 용왕 중에서 최고 용왕의 딸이라도 나머지 드래곤 역시 용왕의 후예다. 그런 그녀들은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밀레니아와 같이 학생회에 소속된 자들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만물의 기준은 무엇인가 대해 설정한 부분이다. 만물의 영장은 인간이나, 여기서는 드래곤으로 대체된다. <드래곤 프린세스 블레이드>에서 용인전쟁 이후 드래곤이 만물의 영장으로 등장한다. 그런데도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왜 드래곤은 드래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인간의 의복, 음식, 생활 등 문화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드래곤은 인간과 다른 존재이나,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가진 강력한 존재다. 그들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점에서 진정 드래곤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인가? 드래곤의 지배방식은 힘으로 인간을 제압해도 결국 인간을 힘보단 힘을 만들 수 있는 문화적 방식으로 접근한다. 교룡학원에 밀레니아의 방식은 인간과 드래곤은 분명 차이가 분명한 종족이나 불평등한 조건을 인정아래 평등한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진정한 평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평등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불평등적 요소를 인지하여 그것을 새롭게 정립하는 점에서 시작된다.


밀레니아가 과거 자신을 구하려던 인간 남자아이 리온에 대한 최소한의 은혜, 그것이 그녀의 의지다. 드래곤은 인간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력하다. 그들의 힘은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정도로 두려운 힘이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자신의 위치에서 인간을 조정하는 것보다 인간의 높이에서 맞추어야 비로소 공존이 가능하다. 밀레니아의 행동은 바로 인간의 행동방식에 어떻게 다가가는 점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공감과 교감이란 점이다. 왜 용과 인간은 서로 다른데도 이렇게 서로 도우려 하는 것일까? 용이 차라리 인간과 전쟁을 하면서 모조리 섬멸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탄압하여 영원한 속박의 종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드래곤의 마음, 결국 작가의 세계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이나, 그것은 오래전 신화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대략적으로 이 작품은 드래곤, 용이 출현하고, 리온이 드래곤 슬레이어 같은 존재인 점에서 북유럽신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원소의 이론에서 불, 물, 흙, 공기는 지구를 이루고 있는 4가지 원소다. 물론 화학적으로 원소는 수소, 산소, 질소 등과 같은 다양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고대그리스에선 지구를 구성하는 4가지가 있고, 인간의 몸에도 4가지의 원소로 움직이는 것이다. 용도 저 4가의 원소로 힘을 낸다. 단지 조금 놀란 점은 나는 그리스사상으로 4가지를 분류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작품에서 성경의 기준으로 삼았다.


작가의 작품세계관 설정에서 성경 내지 북유럽 신화를 많이 이용했고, 생각 이상 잘 정리했다. 나중에 교룡학원을 침입하는 적이 만든 장치가 아크엔젤(1. 대천사, 구품 천사 중 한 천사로 국가 통치자의 보호와 특별한 사명을 전달한다, 2. 러시아 북구 백해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점에서 성경의 내용을 많이 반영한 것 같았다. 조금 아쉬운 점은 작품설정에서 매우 연구를 많이 한 만큼 작품 내 플롯이나 복선의 배치는 아쉬웠다.


아크엔젤을 사용하는 적의 정체가 너무 쉽게 파악되도록 적은 것이다. 판타지모험으로 라이트노벨은 잘 정리해놓았다. 주인공의 설정이나, 드래곤이란 종족이 가진 특이함이 보여주는 용녀 밀레니아의 행동 역시 잘 정리했다. 그러나 범죄 추리로 가면 아쉬웠다. 작품 자체가 추리물이 아니기에 큰 문제점은 되지 않겠지만, 조금 적의 정체가 쉽게 들키지 않게 배치를 신경 썼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주인공과 페이린 관계에서 좋은 흐름을 보여준 것 같다. 일본에서 드래곤을 히로인으로 내놓은 작품들이 제법 많다.


라이트노벨, 만화, 애니메이션 심지어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과 드래곤은 단순히 적대하는 관계가 아니라 때로는 친구, 동지, 연인 등으로 나온다. 주인공 남성 1명에 다수 용녀들이 모이는 하렘구도가 보이기는 하나, 그 하렘구조에 너무 강조하지 않은 점이다. 물론 그런 구도로 이어지는 이유는 리에라는 여동생의 존재다. 리온에게 리에가 없었다면 그 세계는 자신만의 왕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동생이 있었고, 리온 역시 상당히 여동생을 아끼는 오빠다.


그렇기에 하렘구도가 보이더라도 cliche(반복적인 패턴적인)의 최소한으로 막아주는 리에의 앙탈은 괜찮다고 본다. 만약 리에가 없었다면 아마 리온은 밀레니아와 달콤한 시간만 보내는 것만으로 바쁠 것이다. 또한 라이트노벨 일러스트에서 그 표지의 인물은 책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1권에서 밀레니아라면 2권이라면 페이린이다. 다소 중국계 의상과 이름을 가진 용녀로서 보는 그녀의 이야기는 결코 낯설지는 않다.


단지 종족만 용족이지 용족 역시 보통 인간이 가진 고민이 있고, 때로는 질투도 한다. 기본적으로 라이트노벨 역시 그 기본토대는 신화의 세계다. 신화의 존재는 인간으로 등장하지 않을 뿐이지, 그들은 인간의 심리와 모순을 역설하는 존재다. 페이린 역시 그런 역설을 보여주는 히로인이다. 용녀 공주라고 완벽한 것은 아니다. 완벽해 보이는 인물이라도 막상 그 인물 내부로 가면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다름 점은 특별히 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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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 세상을 읽는 4가지 방법 Great 인문학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 헌법이 자유민주주의국가라고 하는데, 루소의 사상이 그 사상의 기반을 다져놓은 것이라면, 우리나라는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과연 그런 국가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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