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라는 애니메이션은 클리쉐(Cliche)적인 요소가 강한 전형적인 모험물이다이런 클리쉐적인 요소는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만 아니라 영화만화드라마 등에 깊숙하게 뿌리깊이 박혀있다이런 작품들을 볼 때 단순히 소재로 파악하는 것보단 전후맥락 즉 Context라는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물론 작품은 이미 시작과 끝의 진행은 충분히 알고 남을 정도로 단순했다서사의 흐름에서 영웅의 탄생에서 그 영웅이 초반부터 강한 게 아니라 조금씩 강해져 어느 순간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주변에 흔한 이야기다.

 

우리는 그 이야기가 너무 패턴이 보이거나 또는 이미 안 봐도 비디오라는 생각은 아마 당연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정작 알아야 할 점은 그런 이야기가 잘 팔리고 대중이 선호하는 점이다대중의 기대를 벗어나는 작품을 극장에서 발표하는 순간 대중들은 난동을 일으킨다난동이라 해봤자 항의 내지 재미가 없었다는 불평이겠지만그런 모습은 어디에나 있다만약 20세기 최후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예술(물론 아방가르드는 전위예술로서 상당히 파격적이지만)과 대중문화의 사이는 늘 이런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타고 온다.

 

예술과 대중문화를 동일하게 보게 힘들 것이고그런다고 서로 간의 벽을 올릴 수도 없다선택의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미적인 감각이라 볼 것이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는 분명 후자에 속한다너무 철저하게 후자에 속하지만전자의 눈인 예술로서는 뭐라 해야 하는가예술적 요소는 없다고 하나예술의 기원은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인간의 예술 그리고 문학적인 공간에서 신화란 늘 전해지고 읽어지는 보물이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는 바로 그 신화를 작품 내 모티브로서 작동한다.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던전이란 개념은 없지만단지 그 신화의 인물을 던전에 참가하는 파밀리아의 우상으로 내세운다우상의 대상에서 곰이나 호랑이 같은 토템이즘이라 하겠지만그 신들은 올림포스에 거주하는 그리스의 신들이다주인공 벨의 경우 헤스티아 파밀리아에 속해 있다헤스티아는 본래 제우스의 누이이며그녀는 처녀로서 건강과 가정의 불을 담당했다상당히 가정적이고 포근한 처녀여신인 것이다그러나 제우스는 그녀를 아내로 삼지 않고다른 누이인 헤라와 결혼을 했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보면 이상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헤스티아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이고제우스와 헤라의 누이다그런 헤스티아가 헤파이스토스와 친한 것으로 나온다헤파이스토스는 본래 헤라의 아들이었다제우스와 상관없이 헤파이스토스는 헤라에 의해 나온 아들이며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를 태어나자 버리려 했다등장인물 요소로 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토스는 여성으로 나온 것이다헤파이스토스는 그리스신화에서 다리 한 쪽을 절고 있으나,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선 눈 한 쪽을 가린 채로 나왔다.

 

작가가 그리스신화를 잘 이해하고 있지만신에 대한 모에적 요소를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신의 지상의 강림은 신의 존재가 그 이전의 시대보다 약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따라서 신의 절대적인 존재보다는 다소 불안정한 존재로 드러난다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토스가 헤스티아에게 벨의 단도를 제작하여 줄 때신의 권능보단 마치 인간의 노동으로서 제작하기 때문이다단지 신의 노동은 무기에 큰 위력과 잠재능력을 부여한다헤스티아는 벨의 신체가 특이한 것을 알고 있으며그에게 절대적인 힘을 부여하기보단 그의 잠재능력을 끌어올린다일정 수치의 레벨을 올리면 벨의 신체능력과 공격력 그리고 마법능력은 증가한다헤스티아의 철자가 추후에 health, 즉 건강이다.

 

건강을 부여하는 주신 헤스티아에게 주인공 벨은 모험하면서 많이 다치지만빨리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정말 헤스티아의 능력인지 아니면 주인공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해결하는 플롯의 구조로 활용하는 것인지 조금 의아하지만주신의 능력이 결국 파밀리아 일원에게 큰 힘이 되는 점이다헤르메스의 능력 중 하나가 제우스의 전령이듯이 헤르메스 파밀리아 일원 하나가 헤르메스에게 축복받은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나온다하지만 신은 자신의 봉인을 해제할 때 나오는 권위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신의 존재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후에 해당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그리스 신들은 제우스 주도로 한 신들의 전쟁까지와 달리 인간세계에 등장한 반인반신의 등장 그리고 신들이 관여하는 전쟁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시대일 것이다인간의 중심으로 던전을 침범하는 점에서 신은 그저 인간의 힘을 극대화시켜주는 촉매에 불과하다그러나 신은 영원한 존재이고인간은 유한한 존재다특히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란 언제나 시련과 아픔이 있게 되는 마련이다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전쟁에서 사망하고제우스 아들인 사르페돈 역시 사망한다.

 

그리고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 역시 오랜 전쟁과 모험 끝에 집에 도착한다모험이란 서사에서 인간은 언제나 신의 사랑과 시험을 받는다그럼에도 인간은 왜 모험은 포기하지 못하는가그런 요소들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보단 그저 서사적으로 보여줄 뿐이다그러나 많은 인간들은 열광한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아주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승자는 많은 패자 속에서 등장한다신화란 인간의 욕망의 억압 그리고 해방과 은폐에서 생기는 이야기다인간의 숨은 욕망에서 드러나는 이야기에서 패자들의 욕망에서 영웅이 탄생된다쉽게 말하자면 내가 혹은 우리들이 이렇게 쓰러질 때 누구 한 명 나서서 해결해주면 안 될까?”라는 심리다.

 

우리들이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에서 보이는 욕망은 무엇인가주인공 벨은 무척 순진하고 착하고 마음이 여린 청년이다그러나 주변에 많은 미소녀와 미녀들이 모이는 전형적인 하렘 작품의 캐릭터로 등장한다그 내부의 심리는 나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고 착한 사람인데왜 내 주변에 여자들이 모이지 않은 것일까라는 심리적 박탈감이 하나의 신화로서 등장한다대놓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보단 뭔가 어떤 상황의 흐름에 따라 등장하려는 수줍은 마음이 깃들어 있다그러나 현실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고빈곤한 심리적 기제에서 발생하는 상상력이니 언제나 우리는 우리만의 던전을 만들어 그곳에서 만남을 추구하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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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0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 신들이 인간의 성질을 은유화한 거라 해석되듯이, 요즘 그 신들의 힘이 촉매 역할로 약화되었다고 보시는 건 매우 타당한 해석이시네요.

만화애니비평 2015-07-03 08:57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일본이라 그런가 봅니다.
그리스 신도 인간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오나, 이 작품의 헤스티아 너무 노골적입니다. 그들은 인간보다 조금 우월할 뿐, 인간과 거의 별반 차이 없으니, 단지 촉매역할제라는 보조역할이 두드러집니다. 하지만 다들 미소녀란 점이....흠....
 
고백 1 루소전집 1
장 자크 루소 지음, 박아르마 옮김 / 책세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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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지배계급에 의한 세계였다. 지배계급은 자신만의 지식과 권력, 그리고 무력을 이용하여 피지배계급을 지배했다. 철저한 지배계급 중심의 사상인 플라톤주의나 혹은 공자사상이 훌륭한 가르침이 있어도 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플라톤주의나 공자사상은 피지배계급에 대한 통치와 지배를 하더라도 억압과 착취를 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계급의 능력으로 질서 그대로 유지하고, 그 질서 속에서 모순을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그동안 정치사상에서 철학적인 요소는 배제된 채, 하나의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 작용하였다.


그나마 조선의 유학은 공자의 철학이 아니라 주자의 유학이었다. 주자의 성리학으로 인해 공자의 정치사상의 기본적 토대를 버린 채 오로지 주자의 학술에만 주자의 주석에만 의존했다. 주자의 글자 하나 다르게 적거나 해석하면 멸문지화, 사문난적이 되어야 했다. 주자의 철학은 공자사상에서 종교적인 교리를 추가하여 만든 사상체계다. 그런 사상들이 계속 발달하면서 학문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으나 그 학문의 깊이를 두는 의미가 사유는 계속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학문과 사상을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인간은 본래 구석기 이전 시대에는 동물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었다. 인간은 단지 동물 포유류에서 2족 보행을 하는 종이었다. 침팬지나 원숭이와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미개한 족속이었다. 인간에게 자연이란 그저 자신에게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질서였다. 자연의 질서 안에서 인간이 태어나고 죽고 살아가는 것이란 동물적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동물이란 것은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여도 그 죽음이 당연한 것이고 그 죽음조차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에게 이성적 판단력, 그리고 시간적 관념을 가지고 나서부터다.


인간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된 동기는 시간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알게 된 것은 아마 신석기 시대부터가 아닐까 싶다. 그 이유는 벽화에 그려진 그림을 보거나 거대한 돌무덤을 본다면 자연 속의 미개인이던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아주 작은 이성적 능력이 있었기에 동물적인 본능으로 자연을 경험하는 게 아니다. 천둥번개를 보면 신의 분노이고, 가뭄과 홍수는 신의 재앙이며, 풍년과 수확은 신의 축복이다. 자연의 흐름은 과학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했고, 자연의 변화는 신의 능력이라 여겼다.


그런 시기에 인간은 신과 자신을 동일하게 보고, 점차 세력을 넓히고 무기를 들고 빼앗고 약탈했다. 힘으로 통치하던 지배자들은 더 이상 힘으로 지배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들에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정치적 권력이고, 그 권력은 지식과 조직체계다. 인간의 집단적인 행동을 통제시키고, 그들이 자신의 권좌를 노릴지라도 그 권좌에 앉아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깨달게 만드는 것이다. 지식의 역사란 과연 인간을 위해 존재했는가? 아니라면 문명이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했는가? 물론 존재했을지 몰라도 보통 누리는 것보다 어느 특정 누군가가 훨씬 더 좋은 행복과 혜택을 누렸다.


이런 체계를 정당하게 해주는 것은 결국 지배계급의 정당화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나마 용인 받는 이유는 플라톤은 정치가에게 철저히 강인한 육체와 현명한 지혜를 갖추기를 원했다. 오로지 수련하고 검소한 행동으로 용기와 절제를 강요했다. 하지만 지배계급에 올라선 자들을 지켜보면 실제 그런 행동을 한 자는 거의 드물었다. 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이 용감했는가? 죽음이 바로 마주하는 전장에서 그들은 왜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을 따라 트로이아인들에게 돌격했는가? 그것은 식사시간에서 알 수 있다.


모든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제사로 받친 고기를 모두 공평하게 배불리 먹게 해준 것이다. 왕이나 병사나 모두 같은 음식과 술을 마시고, 전리품은 왕보단 부하에게 나누어준다. 그래서 병사들은 용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공물을 위로 몰릴수록 병사들은 겁이 많아지고, 위에 있는 장수와 부장들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인간이 된다. 인간의 문명에서 과연 우린 문명인이라 볼 수 있을까? 분명 기술과 문명은 시대가 흘러갈수록 발전한다. 이런 인간의 문명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과 좋은 인생을 살아온 것인가?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이 바로 장 자크 루소다. 그의 서적은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의 모습은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이 내재되어 어느 편중된 시선에서 보는 것이란 불가능했다. 그런 만큼 루소의 인생은 아주 다양하고 복잡하고 어느 한 가지로 정의내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루소의 인생은 과연 어떤 것인가? 사실 인간 스스로의 자서전이나 또는 그런 평전들은 문학소설(도서관 비치번호 800)이나 역사서(도서관 비치번호 900)에 올려놓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루소의 자서전이란 문학도 아니고 역사서도 아니다. 그의 서적은 100번대인 철학도서다.


처음 나온 자서전인 <고백>, 다음으로 나온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그가 죽기 전에 미완으로 끝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모두 철학도서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생각 그리고 그가 겪는 현실을 적는 것이 자서전이라면 분명 역사도서일 것이다. 하지만 루소의 자서전은 그의 역사만을 기록한 게 아니다. 인간이 가진 온갖 역설과 모순 그리고 비극과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통해 노래한다. 그것은 하나의 비극 시와 같고, 극단적이고 격정적인 글들이었다.


왜 그런가? 왜 루소의 서적이 이래 독특한가? 많은 역사적 인물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리한 부분을 적지만, 결국 그것을 뛰어넘어 하나의 영웅으로 남으려 한다. 그러나 루소는 전혀 영웅적으로 보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시절 영웅처럼 보이고 싶어 하다 곤란한 입장을 놓인 것을 적어 놓는다. 루소는 태어나면서 평범하지 못한 인생을 살았다. 그 동기는 어머니의 죽음이다. 어머니는 루소를 낳자말자 돌아가시고, 루소는 숙모의 손에 큰다. 어머니의 부재, 그 어머니의 산통으로 태어난 루소는 건강하지 못했다. 작은 키에 마른 체구, 체력도 약하고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다.


삶에 대한 회고에서 그는 분명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도 루소는 세상이 자신보고 불우하다 해도, 자신 스스로는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한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루소의 인생을 알려면 단순히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 같은 서적이 아니라 <고백>으로 통해 들어가야 한다. <고백>을 저술한 시기는 루소가 가장 인생에서 가장 불우한 시기에 적은 것이다. <사회계약론>이 왕권 절대주의에 큰 문제가 되는 책이었지만, 더 심각한 것은 <에밀>이었다. <에밀>을 읽게 되면, 신이란 우리 인간을 처음부터 만들고 모든 것을 결정짓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는 이미 신에 의해 완벽하게 태어났고 그 인간 스스로가 삶을 결정짓는 것이 바르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과 마주하는 것은 그가 저승에 가면서부터다. 신은 그저 인간 스스로의 양심을 바라보는 이신론(理神論)적인 존재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가진 것이라 말하는 기존 가톨릭교회로부터 루소는 악마적인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에밀>에서 더 위험한 말은 곧 유럽에서 혁명이 시작된다는 글이다. 실제 <에밀>은 1762년에 출간되고, 그로부터 27년 후 프랑스 바스티유광장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그의 끔찍한 예언은 루이16세의 목을 단두대의 칼로 분리시킨다. 루이16세는 자신의 왕국을 무너뜨린 자가 루소와 볼테르라고 한다. 하지만 볼테르보단 루소에게 더 많은 호응과 열의가 다가왔다.


루소가 살던 시절은 루소의 삶은 매우 불우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자 그는 프랑스의 신이 되었고, 세계 혁명가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좌우 이데올로기를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그런 루소의 삶 자체가 엄청난 모순과 역설이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새로운 가치와 사유를 만들 수 있던 것은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른 삶과 시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보고 느낀다면 그 사회 자체를 읽을 수가 없다. 사회 테두리 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낯선 나그네로서 바라보기에 세상을 알고 바꿀 수 있었다.


루소는 바로 그런 힘을 가졌던 것이다. <고백 1>을 보면 루소가 어머니의 부재에 콤플렉스를 가졌던 점, 특히 나이가 많은 여성에게 관심 받는 것을 좋아했다. 고백 초반에 어린 시절 랑베르시에 양에게 교육을 맡길 때, 그녀에게 혼날 때 루소는 고통과 더불어 쾌락의 감정을 느꼈다. 흔히 말하여 상대 이성에게 성적이나 혹은 다른 식으로 학대받는 것에 성적 쾌락을 가졌다는 점이다. 루소의 성적인 증세는 마조히스트였다. 루소 시대 이후 후작이나 문제가 심각했던 사드는 사디즘을 만들데 한 장본인이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루소의 성적인 결벽증과 돌발적 행동은 그의 심리적 불안에서 기여된 것이다.


그의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행동은 인간에게 이성과 감정이란 세계 말고도 무의식이란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알리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준 것도 루소라고 한다면 근대사상에서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가 중심이었다면 루소는 그들보다 이미 100년은 앞 선 것이다. 단지 루소는 자신의 분석이 자신의 역설적 요소라는 점이고, 그 치부를 그대로 드러낸다. 제일 인상 깊은 것은 어두운 곳에 나와 여성이 있는 것을 목격하면 그녀들이 눈에 뛸만한 곳에 가서 자신의 코트를 열어 놓는다.


그 옷 속에 숨은 자신의 성기가 여자에게 보이게 되고, 루소는 부끄러움과 더불어 여자들의 비명과 시선에 쾌락을 느낀다. 이름 하여 바바리맨이 루소가 보인 행동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엄두도 못 낼 행동을 루소는 실천했고, 덕분에 어떤 건장한 남성에게 잡혀 봉변 당할 뻔도 했다. 루소가 가진 성적인 증세는 지나친 자위로 자신의 심신이 소모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무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다른 여자들을 육체적으로 취하지 않고, 정신적인 상상력과 자기 스스로의 해소는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루소는 수줍음이 너무 지나쳤고,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다.


아주 연약한 마을에 격렬한 감정, 도저히 자신을 자제할 수 없는 소용돌이는 누가 보더라도 루소를 이해가 불가능했다. 루소조차 당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기보단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을 뿐이다. 장점보다 단점이 너무 지나치게 편중된 점에서 루소는 자신을 학대하고 상처 주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으려 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너무 학대하는 사람을 우리가 본다면 더 이상 다그칠 수 없는 것처럼, 루소의 자화상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루소를 보고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루소는 자신의 <고백>에서 자신의 책을 읽는 대단한 사람들이란 문구가 있다.


이 문구를 읽어본다면 나나 다른 분들은 루소에게 있어서 대단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루소보다 대단할 수 없다. 그가 남긴 인간중심의 민주주의,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서 아니다. 루소보다 우리가 더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반성할 수 있는가이다. 그것도 자신보단 주변에 있는 불쌍한 이웃에 향한 루소의 연민에 대해서 말이다. 루소는 파리에 가면서 느낀 것은 거리에 비참한 사람이 넘쳐나고, 시골농촌의 농부는 과다한 세금착복에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이미 그런 비극은 계속된 현실이었고, 어느 그 누구도 그런 문제를 제기하려하지 않았다.


볼테르가 지적한 것은 무능한 정부이지, 무기력한 민중이 아니었다. 루소는 바로 그 민중을 향한 시선을 <고백>에서 처음 나타낸다. 이미 디종 아카데미에서 수상을 받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어본다면 루소가 바라보는 것이란 문명에 대한 인간의 모순이다. 곡학아세(曲學阿世), 학자로서 가장 피하여야 할 그 방식을 예나 지금이나 고수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루소를 보고 더럽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의 입으로 나의 더러움을 말하여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 그 누가 실천할 수 있는가? 이런 현실을 보면서도 아무런 외침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의 나약함에 실망과 좌절을 느끼지만, 루소에 비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간사한 존재다.


루소는 인간의 이중성을 제대로 고발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려 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자신은 그런 인간이 되길 거부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유산이나 연금을 주려해도 거절하고, 명예와 이름을 높이려 해도 거부했다. 자신의 힘으로 책을 저술하여 매출된 서적으로 돈을 받았고, 늙어서도 방에 홀로 앉아 악보를 뺏겨 쓰며 자신의 생계비를 충당했다. 우리의 주변을 보면 다소의 이익에 눈을 밝히며 덤벼드는 사람을 볼 때마다 참 난감하다.


작은 이익은 아니지만, 그 이익이 결국 타인의 주머니를 합법적으로 훔쳐가고, 타인에게 커다란 빚을 안겨준다. 그런 행동에 대해 자신의 양심에 일말 가책도 없고, 좋은 기회에 돈을 벌었다고 주변에 자랑하며, 그런 자신의 지혜로움을 자랑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힘들거나 방송에서 세상물정이 어려우면 남에 대해 걱정하는 척한다.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선량함을 동시에 추구하는 바보 같은 사기에 나는 그들을 비웃고 있는 것을 느낀다.


현실에서 바보처럼 내 이익에 밝지 못한 채, 그런 이익을 충실한 인간을 보며 비웃는 내 자신이 옳은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속에서 그들을 비웃는 내 모습이 있기에 그들처럼 살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나도 그러한데 모든 인간들은 역설적이지 못해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모순에 빠져드는 세상을 보면서 그들에게 과연 진정한 고백이 존재할까? 부끄러움 자신을 알고 반성하는 삶, 그것조차 없는 인생이라면 과연 그의 최후에 어떤 식으로 인생이 질문을 던질까? 차라리 스스로 인정하는 삶 그것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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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네 대화 편 -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3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엮어 옮김 / 서광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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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저술한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칠십 되는 나이 아테네 내에서 고발당하는 지점부터 시작된다. 그가 고발당한 이유는 젊은이들을 현혹하고 신을 모욕한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억지로 밀어붙인 고소는 소크라테스를 법정 앞에 세우게 만들고, 그를 유죄로 심판한다. 그의 유죄선고는 아테네 시민들이 법에 의해 살아가고, 모든 것은 법으로 복종해야 하나 법을 복종하지 않고 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소크라테스를 함정에 빠뜨린다.


그 함정에 의해 관아를 향하여 소크라테스는 발을 옮긴다. 가는 도중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한 에우티프론을 만나고, 그와 대화 후 법정에서 변론하는 소크라테스가 보인다. 플라톤의 대화록인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은 말 그대로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것에서 시작하여 재판과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을 보여준 작품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무고한 죽음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정치인이란 꿈을 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리스철학의 중심이 되어 21세기까지 내려온다.


개인적으로 플라톤주의를 신봉하지 않고, 플라톤의 사상에 다소 위화감을 느낀다. 플라톤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그의 철학에 중심 되는 인물은 소크라테스라고 해도,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분명 알 수 있다. 귀족적인 시민, 또는 더 나아가 철인(哲人)군주에 의한 통치다. 국내 플라톤과 그리스철학 대가인 박종현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중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환상은 우리의 현실을 옭아대는 병이다. 그런다고 철인이 나와 정치를 해도 다 되는 게 아니다. 이미 21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종현 교수가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한 점을 보고, 그가 1970년대 한참 교수에 있던 점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군사독재 시절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논하나, 사실 소크라테스가 무고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그가 참주제 이후 민주제가 도래했을 때 어느 권력자에게 미움을 받아서이다. 2번째 변론의 해제부분에서 번역자가 당대 권력자인 아니토스에게 바른 말을 하던 소크라테스, 그리고 아니토스의 사주를 받은 밀레토스가 소크라테스를 공격한 것이다. 당대의 권력자와 그 법정에 나온 시민들은 권력의 흐름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가 일치된 전체의지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희생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철학사상에서 장 자크 루소는 기존 플라톤주의를 이어 받은 것 같으면서도 전도시켰는데, 루소는 플라톤이 주장한 국가관에서 시민에 의한 옳은 정치를 지지했다. <사회계약론>에서 제시한 이상적 국가정치관이 그리스로마의 공화제였다. 하지만 그 공화제에서 모든 것이 옳은 게 아니지만, 그 이후 인간의 역사에서 그 만큼 옳은 정치관이 없었다. 공공에 대한 이익을 지지하고, 개인의 이익을 뒤로 하는 일반의지는 시민정치에서 매우 소중한 정신이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법이 아니 법을 이용하는 자를 따르게 되면 그 사회는 결국 독재자의 것이 되거나 바르지 않은 정치가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정치철학은 보자면 바르지 못한 권력자에 향하여 옳은 이야기를 하다 화를 당한 것이다. 박종현 교수가 1972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철학교수로 재직했다면, 그가 한참 교수로 있던 시절은 군부독재권력이 판을 치는 시기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을 보면서 철학적 사유를 좋아하나, 번역자의 조언이나 사유를 볼 때마다 조금 불편한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철학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고대그리스인에게 신에게 가장 접근하기 좋은 학문이고, 신에게 가장 근접하는 것은 육체를 벗어나 영혼의 영원성이다. 영혼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타락과 부패로 얼룩진 육체를 벗어나 초현실적 존재로 되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에서 인간이 살아생전 얼마나 올바르게 살아오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그 자신도 올바른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잘못된 게 있다면 말해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용기란 바로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지혜다. 박종현 교수의 고대그리스철학 연구 분야는 한국에서 분명 최고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이 말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말하던 그 분은 전혀 본인 스스로 소크라테스처럼 살지 않았던 것이다. 실천적인 학문이 아니라 이론적인 영역에서 활동한 것이다. 한국 철학이 이렇게 풍부하지 못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행한 지(智)와 행(行)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단지 지(知)와 행(幸)만 추구했을 뿐이다. 자신의 지적인 능력과 그 능력을 토대로 권력과 이익만 탐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전혀 수업료도 받지 않고, 남에게 바른 말만 하던 남자였다. 그런 점에서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을 읽는 것은 모순적 상황에 놓인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던 인생, 우리 같은 소시민 혹은 지혜와 용기가 부족한 이들에겐 엄두도 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란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신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신은 결국 자신에게 끊임없는 시험에 들게 된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왜 신을 믿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제우스께 맹세코! 라는 그 강렬함을 말이다. 신은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관념적인 영역이 있기에 죽음이란 세계를 두려워한다. 물론 죽음과 전혀 관계없는 나이나,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관계가 없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정 두려움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죽음 앞에서도 자신 안에 있는 신을 배신하는 게 더 두려운 것이다. 자신 안의 신이란 양심과 의지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이란 신에게 가장 근접한 이유는 인간으로서 일말 양심의 가책을 만든 짓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내린 배심원을 보면서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죄인으로 심판했지만, 신의 심판은 그들에게 어리석고 한심한 존재로 만들었을 것이다. 신은 없다고 해도 후세의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바라보는 인류에겐 소크라테스는 불멸의 철학자고, 그를 죽도록 만든 시민들은 기회주의자로 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아도 죽음을 선택했다.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파이돈을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고, 크리톤을 보면 탈옥하지 않고 사형일을 기다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가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물론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구분되어 있고, 육체는 한시적이나 영혼은 영원한 점이고, 인간이 죽으면 명부에 있는 하데스의 궁에 초대된다. 그곳에 가면 신적인 존재, 위대한 서사 시인들을 만날 수 있어 소크라테스는 도리어 죽음을 기대한다. 그러나 알아야 할 점은 우리 인간이 선택하는 시점에서 이미 잘못된 것이라도 그 잘못된 몇 가지로 인해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국가를 배반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 등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길러주고 먹여주며, 살아온 날을 보여준 아테네가 사형선고를 한다고 해도 아테네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당시 지식인이나 후대의 인간도 안다. 잘못된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로 모든 것을 배신할 수 없고, 오직 자신 안의 신에게 결백해도 분명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대그리스철학에서 중세를 지나 근대 계몽주의 사상이 도래하면서 시민의 의무란 바로 저런 부당한 사례를 없애는 것이 시민의 의무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에게 충실한 게 시민의 의무라면 그 국가는 관념적인 존재일 뿐이지, 국가란 결국 정부라는 기능이 필요하다. 정부에서 인간이 운영하는 순간부터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정부의 기능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탈옥과 망명을 선택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바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너무 자신을 신용한 것인지? 그래도 지혜로 보자면 소크라테스가 가장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볼 수 있다. 지혜라는 것은 사소한 이익에 매달리지 않는다. 현대인들의 지혜를 보면 사소한 이익에 눈이 빠지도록 신경 쓰며, 결국 남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라도 당장 이익이 있고, 법적인 문제가 없어 보인다면(아니 있더라도) 기를 쓰고 덤벼든다.


우리의 지혜란 바로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지혜다. 물론 사소한 것이라 하여 액수나 권리가 사소한 것은 아니나, 지혜의 가치는 사소하다 못해 치졸한 것이다. 아마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던진 많은 사람 역시 그럴 것이다. 중우주의에 빠진 시민들, 그러나 그런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자 역시 그런 중우주의라는 현실을 알면서도 침묵하다 이제 와서 중우주의를 논하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플라톤의 대화록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지 잘 보여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 하지만 나에게 철학은 나의 지혜를 사랑하기보단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공공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곳이 좋다. 물론 플라톤의 <국가>나 <향연>을 보면 아름다운 사람이 결국 아름다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 나온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이 아주 극소수인 점에서 현대에서 실현 불가하고, 다수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필요하다. 중의주의 요소가 그때보다 더 심한 현실에선 더 어렵고 난감한 일이다. 이미 중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 모순이 드러난 시점이다. 단지 그 현실적 문제는 민주주의 제도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민주주의적인 정신에서 만들어진 게 아닌 점에서 안타까울 뿐이다.


어느 서적 광고를 보니, 마녀사냥에 대한 인류역사를 다루었다. 그런데 책 처음에 등장한 사건이 소크라테스의 죽임이다. 소크라테스가 마녀사냥의 희생자인 점이다.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흐름이 태동하면 인간 역시 그런 시대를 따라 가야 하나, 자신의 이권은 과거를 지향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지점에 충돌이 발생하고, 희생자는 권력과 재력이 없는 사람이다. 15~17세기 마녀사냥이 광적으로 이루어진 유럽에선 그 희생자가 힘없는 여성이라면, 고대 사회는 지식인이다. 고대사회는 노예가 존재하고, 심각한 계급사회다. 물론 중세 이후의 유럽 역시 계급사회지만, 개인의 노예보단, 국가의 농노가 더 많은 시기다.

 

그리스의 노예들은 오히려 그리스 남자성인들 즉 시민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구가 전체 10%인 점에서 말이다. 발언권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점은 그 만큼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시민에게 보장되어 있고, 그 책임 역시 막중했다. 시민은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권력을 통제하는 자다. 그리고 그것이 전도되는 이상 시민의 국가가 아니라 권력자의 국가가 된다. 소크라테스의 시절과 지금의 시절은 다르나, 소크라테스가 적어도 무엇을 위해 희생했는지 본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하늘을 보며 당당히 길을 걷을 수 있을까? 반성과 사유가 없는 인생은 그저 공허한 삶이다. 죽음은 물론 두렵지만, 공허한 인생을 산 자들은 죽음 앞에서 비굴해지고, 맹목적인 믿음과 광적인 언행을 보인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만큼 어려운 말은 없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관념을 생각해볼 점이 있다. 죽음을 한자어로 사망(死亡)이라 하고, 한국인은 귀천(歸天)이라 한다. 영어권에서 죽음이란 death이나, 소크라테스가 말한 죽음은 Thanatos이다. 타나토스는 죽음이기도 하나, Eros와 다르게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Eros는 삶에 대한 열망이란 정신분석적 용어처럼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왜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으로 가는지 생각하면 타나토스란 단어를 생각해 볼 점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고대그리스의 죽음에 대한 관념에서 윤회설은 없을 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으면 호메로스를 만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어도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 영혼의 삶, 내가 세상에 없어도 역사는 나를 기록한다. 소크라테스가 육체적으로 죽어도 정신적으로 살아있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거론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 역시 역사에 남겨질 것이고, 역사적 가치가 없다면 역사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족보에 내 이름이 올라가겠지만). 만약 내 이름이 후대에 간다면 어떻게 보일까? 사람들은 자신이 은근히 욕먹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 거기서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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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14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르스 발언 때문에 박원순 시장이 검찰 고소되었단 얘길 들었습니다. 법의 칼날이 - 그 속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 해괴망측하게 움직이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이재명 성남시장의 시원한 법적 맞대응 문화가 탄탄해졌으면 합니다. 좋게 좋게 처리하는 게 현명하다는 통념이 많이 깨졌으면 합니다. 돈 없어서 이마저도 못하는 억울함도 많지만...

만화애니비평 2015-06-15 08:27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면 먼저 법적으로 고소당할 자는 따로 있는데 말이죠. 자본이 지배한 세계에서 한계인 것 같습니다.

오쌩 2015-06-16 01:09   좋아요 0 | URL
도대체 어떤 근거로 고소를 한거죠.법에 처벌할 명문화된 조항이 없을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개판이네요.법에도 없는 유언비어 확산을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멍멍이들을 보면...

오쌩 2015-06-16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잘봤어요. 플라톤의 철학,저도 별로 좋아하지않아요.
70년대 철학자들이 플라톤의 철인을 박정희에 비유하는 헌사를 바치는것을 보고, 머리를 저었어요.
군국주의 ,반자유주의,전체주의 를 정당화하는 철학의 시초가 플라톤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6-16 08:52   좋아요 0 | URL
아 과연 70년대이군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현대철학자가 존 롤즈인데, 이 양반 밑에서 사사한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있습니다.
이 양반 1980년대 전후로 육군사관학교 철학과 교수에 육군사관학교 교수와 더불어 존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번역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어쩌고 어쩌고 하나, 하는 짓거리가 가관이죠.

민주주의를 말하는 인간들이 과거 권력에 노예에서 이제 자유로우니 자신의 지위에 노예가 되는군요. 어째 루소의 가르침이 그대로 드러나는지.

소크라테스는 시민으로서 아테네를 위해 살아온 점에서 아이러니하죠. 그가 전쟁 3번과 각종 지위를 맡을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나, 그런 그가 민주정에 의해 희생당했죠.

아마 멍청한 중의주의에 의해 뽑힌 정치가보단 처음부터 정치가를 지도하여 양성하는 게 옳다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죠.
공부 잘하고 머리 좋아도 결국 양심이 문제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죠.
머리 좋은데 양심이 없는 자와 머리가 나쁜데 양심이 없는 자 중에서 누가 더 시민에게 악영향을 주는가에서 전자라고 하더군요. 후자는 고의보단 무의식적이 요소고 전자는 고의적으로 악질이니깐요. 박통 시절이 바로 그런 시대죠.

오쌩 2015-06-16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민주주의를 반대해 반민주주의를 추구했는데,그가 역설한 철인정치 아래였다면, 소크라테스는 더 빨리 처형당하지 않았을까요.

알옥 2016-05-15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법정에 고발당했다, 당시 정치인들의 음모에 의해서 였다, 박종현 교수에 대한 비판글 여기서 그냥 글 안읽고 내렸습니다. 플라톤 전집을 읽어보았다면 솔직히 소크라테스는 고발당할만 일들을 여럿 했습니다. 특히 초기와 중기 사이의 대화편을 보면 항상 젊은이들과 함께 있었고,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나 소피스트들이나 거기서 거기로 보였을텐데.. 초기나 중기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지인들 대표적으로 크리톤등이 소크라테스에게 경고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플라톤 대화편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 없는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없는 궤변론이네요.. 참으로 답답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5 22:39   좋아요 0 | URL
걱정마세요. 존 롤즈 번역자인 황경식 교수님은 더 깝니다.
정암학당 향연을 읽었지마는 개인적으로 천병희선생님이 마음이 가네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8 20:56   좋아요 0 | URL
그러면 그런 내용을 저에게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참고로 저는 철학전공자도 아니고, 철학을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독학했습니다.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 없는 궤변론 맞을지도 모릅니다. 공대 졸업하여 독학하면서 님의 그런 지칭 처음 들어봅니다. 답답하면 그렇게 알려주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비꼬는 말투에 대해 님 태도가 바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어린 남자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점, 그리고 여러모로 성격이 강직한 점은 알고 있습니다. 단지 님만큼 알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아는데 남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에 대한 이해도에 부분에 대하여 님이 저보다 많이 알겠죠. 제가 박종현 교수를 겨냥한 것은 플라톤의 철학을 그래 말하면서 그의 지행일치를 논하면서 막상 본인은? 이런 겁니다. 오늘 518인데 황경식 교수는 그 사건을 두고 ˝사태˝라고 하더군요.

아직도 제글에서 플라톤만 잘 알고 모르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시고, 님의 기분이 좋지 못하면 제게 부족한 점을 알려주시고, 그리고 그런 양질의 도서를 소개해주면 되는 겁니다. 이 글이 플라톤만 적어내리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요. 만일 그게 아니라면 님은 오리지널 철학과 전공자가 왠지 허접하게 보이는 사람 잡고 궤변론자이니 답답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그정도의 사람일 뿐입니다. 님의 덧글은 ˝내가 아는데 넌 왜 몰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비로그인 2018-05-1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이글을 읽에 되었습니만 꼭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는 징검다리를 건넘니다.
518이 사태 맞지 않습니까?
어찌 말은 잘 하는데 직시하지 못하는 행동은 어디에서 나오는건지
모택동도 스탈린도 정권을 잡은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말이 앞서기전에 사태의 공정함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차안대를 쓰고 어찌 주의를 바라볼수 있습니까

만화애니비평 2018-05-18 08:57   좋아요 0 | URL
일베하세요?
 
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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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시작하면서 그 가치를 더해간다. 과거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이란 서적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라나고 죽을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은 것들이 이야기다. 즉 스토리텔링이란 것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혹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에게 즐거움이다. 이야기란 즐거움에서 어느 이야기이든지 와전되거나 혹은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거나 또는 그 일을 만든 사람조차도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의 뇌란 그 기억력이 한계가 있고, 어느 특이한 영역이 없다면 기억하기 어렵다.


 

그래서인가? 원래 고대 그리스 비극시를 예전에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전집을 읽으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극시는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대본으로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공연장에 모여 서로 관람했다. 문제는 코러스부터 시작하여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기본적으로 “크로노스의 아드님이시고,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이신 제우스이시어!” 아마 이 대사가 가장 많이 나올 것이다. 제우스란 존재는 보통 사람이라면 어릴 때부터 듣는다. 내가 제우스를 처음 접해본 계기는 어린이 인형극에서 헤라클레스의 모험을 보여준 것이다.


 

헤라에게 지독한 질투를 받는 그가 헤라의 영광이란 말에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인간이면서도 신과 같은 위용과 용모를 가지고 있다. 반신반인(半神半人), 신인지 인간인지 모호한 것인가? 아니라면 둘 다에 속하는 것인가? 그리스의 비극이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이 등장해도 그 인간이 인간처럼 보이지 않고, 마치 신이나 신의 손 안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흔히 동양에서 부처님 손에서 논다는 말이 있다. 어디에 있든지 인간은 신이란 운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 처음부터 내려진 것이다.


 

그런 숙명적 굴레에서 단순히 나는 <일리아스>를 읽고 스토리를 이해하고 나열하는 게 목적이 아닌 것 같다. 인간에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말을 하기 전에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말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은 높은 설산(雪山) 자락에 어느 작은 돌이 눈을 굴리고 내려와 그게 결국 눈사태로 변하는 이치와 같다. <일리아스>란 바로 그런 눈사태가 일어나는 인간의 이야기다. 일단 누군가의 소개를 보자. 신에서 아테네의 경우 두 눈에서 빛이 나고, 아킬레우스는 준족이고, 투구가 빛나는 헥토르 등등,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상징성이 되었다.


 

거기에 말을 잘 길들이는 트로이아족,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을 본다면 특히 그렇다. 왜 신화를 이야기로만 보지 말고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실 <일리아스>라는 작품은 헥토르의 동생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네를 데리고 오면서 비극은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왜 종족이나 국민들의 모습을 저렇게 표현했냐는 뜻이다. 그것은 트로이아족은 말을 잘 길들이는 것으로 보면 그들은 육군전이 능한 종족이고,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은 보병에 능한 종족일 것이란 판단이다.


 

특히 아카이오이족 동맹전사들은 배를 타고 10년 가까이 트로이아족과 전투를 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들은 배를 타고 온 점에서 해상 전에서 백병전을 펼치는 종족일 것이란 점이다. 신화는 그 나라 혹은 그 민족의 이야기다. 물론 신이 진짜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다. 종교가 없고, 단지 이신론(理神論)적인 요소를 인정하고, 그 이신론이라고 해도 다신족적인 요소를 보기에 그 당시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과 무척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일리아스>에서 말하는 요지는 실제 그 당시 전쟁이 있었는가에 대해 의문이다.


 

실제 그 전쟁이 있었다면 왜 그들은 인간의 전쟁에 신의 모습을 드러나게 했을까? 플라톤 서적 중에 하나인 <국가>라는 책을 아주 예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물론 갓 인문학에 발을 들인 시점이라 자세히 이해되지 않았고, 지금은 기억이 한참 남아있지 않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국가>에서 논하고 있다. 인간과 신의 역사에서 황금, 은, 동 그리고 철의 시대가 있다고 말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과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그 당시 그리스가 헬라스로 불리던 곳은 철기문화다. 그런데 <일리아스>는 철기문화 이전의 청동기문화다.


 

청동기문화의 특징은 이제 인간의 역사는 정착이 시작된 점이다. 금속의 발전은 과거 석기시대와 다르게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고, 농사를 획기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 왜 제우스가 강력한 신인가? <일리아스>에서 모든 전쟁의 운명을 제우스가 가지고 있다. 제우스의 심기가 곧바로 영웅의 죽음과 삶, 죽음 이후 비참한 모욕까지도 말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신은 제우스만이 아니라 헤라, 아테네, 테티스, 포세이돈 등 매우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준족의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죽마고우인 파트로클로스 죽음에서 전투를 시작한 지점이다.


 

친구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과 증오 그리고 복수심으로 불탄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아의 모든 남자의 씨를 말릴 작정으로 전장으로 뛰어든다. 그의 놀라운 용맹은 신들조차 분노하고 기뻐하고, 아킬레우스가 무참하게 죽인 트로이아의 남자들은 그 인근에 있던 강에 내던진다. 강에 빠진 남자들은 피와 기름을 내뿜으며 하데스의 궁으로 인도된다. 그들의 시체에 냄새가 시큼한 피가 새어나오자 주변에 물고기가 그 흐름을 따라 모인다. 시체를 뜯어먹는 물로기의 모습에서 하신(河神)은 분노한다.


 

아킬레우스를 제압하려던 하신은 헤라의 아들, 불의 대장장이인 헤파이스토스의 힘에 의해 제압된다. 그는 하늘의 신인 제우스에게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고 한다. 강의 신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리아스>의 시기는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동의 시기도 하나, 사실 농업문화가 꽃피우던 시기다. 제우스가 모든 신들 중에 가장 무섭고 위대한 이유는 그가 천둥번개를 던지기 때문이다.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기상현상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적란운에 의한 집중강우, 소용돌이이나 태풍에 의한 기상재앙, 바다에서 폭우를 동반하는 무서운 기상현상이다.


 

번개가 내려치는 것은 비와 바람이 불고 대지를 모조리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옛날에 과학이란 지식은 없다. 과학이라고 믿은 것조차 사실 비과학적인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과학이고 정당한 사실이다.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은 만큼 그들의 눈에는 기상이변이 신의 두려움으로 느꼈을 것이다. 번개가 치는 이유는 기상현상이 아닌 신의 분노라고 말한다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다. <일리아스> 해설 편에서 트로이아전쟁의 기원전 1200~1500년이라 한다.


 

그리고 호메로스를 지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던 기원전 4~5세기에서 <일리아스>는 하나의 텍스트로 끌고 온다. 1000년이란 시간에서 <일리아스>는 그리스사람들의 삶에 큰 기반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적 기술은 아직까지 번개현상에 대해 밝히지 못했고, 제우스는 영원히 위대한 아버지로 남아있다. 바로 이 아버지란 존재에서 우리는 인류학에 대한 기반 요소를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일리아스>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은 등장인물의 이름 그대로를 적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 누구의 후손이다.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은 아버지 제우스다. 심지어 제우스가 양육하고 제우스가 사랑하고 제우스가 이끌어낸 영웅들에서 <일리아스>는 아버지란 이름이 심하게 강조한다.


 

아가멤논조차 인간의 왕이기도 하나, 그는 아트레우스의 아들로 나온다. 아버지의 이름을 등장시킨 것은 결국 모든 인간, 특히 영웅에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가 필수적인 요소다. 아버지의 이름이란 점에서 당시 사회는 남성중심의 권력이고, 남성들은 자신의 권력을 아버지로부터 승계 받는다. 단지 차이나는 부분은 그리스신화 그 자체에서의 모순이다. 가이아는 아들이면서도 남편인 우라노스에게서 크로노스를 낳지만, 그 크로노스와 합세하여 우라노스를 내친다. 크로노스는 낫으로 아버지의 남근을 잘라버리고, 후에 크로노스는 자신의 누이이며 아내인 레아에 의해 제우스로부터 도망친다.


 

신들의 세상에서 제우스가 신의 왕이 되면서 신들의 전쟁은 종결된다. 더 이상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거세당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가 제우스가 된다. 일리아스는 그야말로 신과 신의 전쟁에서 인간과 인간의 전쟁으로 전환되는 신화다. 단지 신은 직접적으로 신과 싸우는 게 아니라 인간을 매개로 하여 싸운다.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않고, 사랑하는 인간에게 행운을 내리고, 미워하는 인간에게 저주를 내린다. 신이 신과 같은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소심한 소인배로 등장한다.


 

인간에게 위대한 신이 왜 그렇게 인간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는가? <일리아스>는 신과 인간이 동시에 등장하나,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순간적으로 동물과 같은 모습이 나온다. 인간의 왕인 아가멤논이 준족의 아킬레우스로부터 전리품 소녀를 빼앗은 시점부터 신들의 장난이 나온다. 당시 인간의 왕이라면 용감한 전사고, 현명한 지도자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한심하고 어리석은 모습이 나온다. 그런 모습을 나오는 이유는 인간이 의도한 게 아니라 신의 장난이라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행동에 알 수 없는 이유,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 신들이 저지른 업적이란 뜻이다.


 

<일리아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 앞에서 운명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든 발광해도 그 운명의 사슬에서 멈추고 만다. 그리고 인간이 그런 운명 앞에서 죽음을 맞이해도 신과 같은 은총에 길이 명성을 남긴다고 한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인간이 영생의 영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죽음을 생물학적인 사망보단 하데스의 곁으로 갔다고 하고, 하데스의 신전에 가면 예전에 만난 사람도 만날 수 있다 한다. 인간의 필멸하나, 그 필멸 뒤에 하나의 새로운 영생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신화의 매력적인 요소는 바로 인간의 필멸과 영원성에 대한 갈등이다. 신이란 죽지 않고 영원한 불사신이나, 인간은 죽는다. 그런 신이 인간에게 부조리한 장난이 거는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 부조리에 의해 생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전쟁을 보면 그들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서 많은 그리스 전사들은 전투 중에 죽는다. 그들의 죽음은 비참하지만,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그들의 무구를 빼앗기는 것이다. 전쟁영웅의 무구를 빼앗아 가는 것만큼 치욕적인 일은 없다.


 

아킬레우스가 친구에게 자신의 무구를 맡겼는데, 친구는 저승에 가고, 그 무구들은 헥토르가 챙긴 시점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이성을 빼앗을 정도다. 오로지 어머니 여신 테티스의 음성만이 그의 마음을 안정케 하고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친구의 죽음 앞에 복수하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죽음이 앞을 내려 보고 있어도 혼자 도망치는 것은 전사에게 치욕적인 일이다. 날카로운 무기에 의해 베고 찍혀 죽는 것은 잔인하고 비참한 결말이다. 그러나 전사는 그 죽음 앞에서 당당해지는 이유는 자신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는 이유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 아버지에게 누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이미 크로노스의 아들인 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내친 불효자다.


 

그런 불효자를 아버지로 여기는 인간에게 신의 존재는 분명 바뀐 것이다. 신은 인간을 돌고 있지만, 그런 신의 존재는 인간에게 자연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봄이 오면 싹이 트고, 여름 오면 성장을 하며, 가을이 오면 열매를 맺고, 겨울이 오면 죽음이 도래하여 다시 봄이 온다. 하데스의 신전에 갇힌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를 보면 안다. 그녀가 오는 시점은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는 시기고, 그가 하데스의 궁에 갇히는 것은 농사를 할 수 없는 시기다. 인간이 보는 자연의 신이 숨 쉬는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가 모든 아버지로 되는 이유는 농경사회와 고대국가의 설립이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모든 왕들이 보여주는 대인이다. 대인이란 각 마을이나 소국가의 추장이나 왕이 자신의 재산을 모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다. 그들이 주는 선물은 많은 동맹군을 만들고, 많은 이들에게 충성과 사랑을 보장받는다. 아가멤논이 주둔한 병사들은 각각 동물들을 잡고, 고기와 술로서 마음을 달랜다. 이때 모두가 만족할 때까지 음식을 돌아가고, 그것은 모두 공평하게 만족하는 수준까지 제공했다는 점이다. 계급이 왕인 자가 최고의 전사고, 최고의 통치자이나, 모든 전사와 동등한 입장을 가진 점이다.


 

완벽한 계급체계에 그 계급에 대우가 매우 다른 현대 군인에서 오로지 군복만이 평등하게 입고 다닌다. 하지만 저 때는 모두가 공평한 음식과 술을 내어주고, 보상도 충분히 아래 전사까지 이어진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왕과 원로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고, 전쟁 시에 왕 자신이 참전하기에 가능하다. 대인제도로서 전리품은 모든 부하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은 왕을 위해 목숨이 위험한 전장에서 투혼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 왕들은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후예인 점이다. 왕은 신의 후예, 신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과 통치력은 보장받는 셈이다. 농경사회가 처음 정착된 고대국가에서 왕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가는 점은 동양도 마찬가지다.


 

삼국지에서 조조나 유비가 병력을 이끌고, 적의 장수를 향하여 돌진한다. 물론 왕의 신분이 되면서부터는 부하에게 맡기나 왕이 되더라도 전장의 지휘관이란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일리아스>는 바로 그런 영웅들, 왕 혹은 왕과 같이 높은 지배계급이 보여주는 전쟁에서 비참하게 쓰러져도 그 모습을 위대하게 담아내는 것이다. 사실 전쟁에서 사람이 죽고, 사람 얼굴이 터져 뇌수가 나오고, 치아가 사방으로 튀는 모습은 보기가 흉하다. 그 흉한 현실적 비극을 훌륭하고 아름답고 가슴 뛰는 영웅서사시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마 이야기하기의 묘미일까?


 

인간은 과거를 지향하면 자신을 스스로 궁지로 몰게 되고, 미래를 보게 되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부여한다. 미래는 지금의 현실을 다시 보게 해주는 거울이 된다. 신화이야기인 <일리아스>가 실존인물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적어도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신이란 영원한 불사신을 신봉함으로서 자신을 신 앞에 내놓았을 것이다. 신 앞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부끄러운 행동과 비열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다른 이는 모르나 신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게 고대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일리아스>를 읽는 것은 단순히 영웅서사라는 비극시가 아니다. 지금의 인간에게 매력을 끌어내는 이유는 당시 인간만큼 더 인간적인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얼마나 진실적인가? 제우스의 저울은 우리에게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서 우리는 <일리아스>를 읽고 제우스의 저울에 저울질 당하는 영웅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리아스>를 읽으면 보통 소설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노래에 가깝다. 인간이 노래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신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은 노래와 춤이다.


 

무당인 샤먼들이 미친 듯이 뛰고 노래하며 환호하는 이유는 그들은 신과 대화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어가 서로 달라도 노래로서 음악으로서 서로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음률을 가진 가락에서 인간은 미묘한 감정이 생긴다. 그 감정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공통된 감정 내지 무의식적인 영역에 이끌어낸다. 신은 우리의 인간이 만들어낸 욕망의 대리자다. 그러나 그 신이 욕망적인 표현이라고 해도 인간의 공감을 보여주는 존재다. 아카이오이족과 트로이아족이 서로 죽일 것처럼 싸워도 어느 시점에서 인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그들에겐 제우스란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일리아스>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을 받아주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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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
김진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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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고, 누구나 잠시나마 내어줄 수 있는 시간이다. 5분이면 우리 인간은 무얼 할 수 있는가? 직장이나 가정에서 통화를 하며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전달하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이고, 5분이면 성격 급한 나 같은 사람들은 밥 1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다. 차로 운전하면 고속도로에선 15㎞ 이상 나가고, 시내버스로는 정류장 3코스 정도 갈 수 있다. 5분이란 시간을 이렇게 내어보면 아주 일반적인 패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서울부산을 왕래하는 기차에선 5분은 아주 짧은 시간이고, 수험생에게 수험 중의 5분은 황금같은 시간이다.


5분이란 시간은 이렇게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다. 만약 어느 누군가 길에서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치거나 심장마비에 걸려 의식을 잃었다면, 5분은 생과 사가 오고가는 시간이다. 척추에 손상을 입었거나 또는 심장이 정지할 때 그 5분 안에 구급차량의 도착과 의료진의 응급조치가 인간의 생명을 좌우한다. 5분이란 시간은 이렇게도 서로 다른 조건에 놓여 있다. 그런 5분은 상황적 순간이 아니라 그저 우리 안의 인식에서 시작하면 어떻게 전환될 수 있는가? 이번에 뉴스타파 기획에서 제작한 『5분,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은 바로 그런 인식적 배경을 바꿀 수 있는 책이다.


말이 5분이지 앞으로 살아갈 5년 이상의 가치를 바꿀 수 있는 책이다. 물론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바를 이미 오래 전부터 고민을 했다. 하지만 마지막 편에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제시된 이 문구에 많은 감정이 밀려온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이 자유로운 것은 선거기간뿐이고, 그 뒤로는 오로지 노예일 뿐이다." 1762년 프랑스에서 나온 이 서적은 대한민국헌법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토대가 된 책이다.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나라에서 루소의 사상은 큰 바탕이 된다.

그러나 루소의 사상에선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내실적인 요소를 추구한다. 우리에게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란 무엇인가? 5분이란 시간은 잠시 귀를 기울여도 아깝지 않을 시간이다. 그러나 그 5분에 들어간 내용적 가치에서 우리가 모르거나 생각하지 않은 것들은 앞으로 우리 미래를 바꿀 거름이 된다. 인간에게 역사적 순간과 기록이 왜 중요한가? 앞으로 우리는 계속 고민하고 방황하며 결국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과연 어떤 게 최선일까?


사람들의 착각들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고 최고의 선택지라 믿는다. 그 믿음만큼 위험성은 없다. 독일의 나치나 일본의 군군주의를 실천할 때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아무런 의구심을 넣지 않았다. 그 당위성 하나가 큰 대의가 되는 순간 세상은 그들의 이상적 사회가 아니라 파괴와 공포 그리고 죽음의 물결로 이루어진다. 5분이란 시간에 그런 과거에 있던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앞으로 우리에게 놓인 선택을 좀 더 심사숙고한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나는 정의에 대해 어느 책을 보면서 생각한 점이 있었다. 미국 20세기 후반 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정의에 대한 그의 사유에서, 부정의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불의는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부정의는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부정의를 선택하는 일이란 자신이 선택한 부정의보다 더 큰 부정의를 피하기 위해서란 점이다. 어째 보면 악이란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로 보겠지만, 자신의 선의 입장이 타인에게 악이 되고, 타인의 악이 자신에게 악이 된다. 선악의 이분법에서 윤리적 가치가 사라진 이상 그 정의란 선악의 구분이 아니라 단지 세력 간의 다툼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세력다툼에 모든 것을 내던진다. 왜 세상의 이토록 부조리한데 그것을 개선하지 못하는 것인가? 5분이란 시간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와 근본이 그래 잘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화두로서 안내로서 5분의 시간을 주어진다면 어떤 것인가? 작은 5분이 결코 작은 시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선 우리 사회 문제점 18가지를 2가지 테마로 구분하여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사회, 문화, 경제, 정치, 역사, 군사 등등 우리 일상부터 주변까지 다양한 주제로 포괄하고 있다.


개인적 나는 인간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란 논리와 이성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 안의 정체성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체성의 강박관념이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게 되어 자신의 입장에 맞지 않은 가치에 대해 응징의 철퇴를 내리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분명 헌법의 나라, 법치의 나라인데, 이 나라는 과연 법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 자유로우나 사회라는 틀에 의해 쇠사슬로 묶여 있다.


그 사슬에 의해 인간은 그 사슬을 얼마나 잘 활용해야할지 어떻게 그 부조리는 올바른 곳으로 유도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 방법론이 정치다. 정치에서 루소가 말한 것처럼 선거기간에 자유로운 선택권이 있지만, 그들의 인식은 자유가 없다. 그런 인식적 구조가 어디서부터인가? 이 책에서 과거 일제 강점기시대부터 시작하여 독재정부의 통치방법을 거론했다. 다른 가치를 무시하고, 한 가지 목적에 어울리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는 그 무서움을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타협이 중요한 이유는 타협을 해야 한다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왜 타협해야 하는가?


사회 내외부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타협점이란 공통대안을 찾는 것이다. 국론의 분열과 혼란에서 국가가 언제나 평화로운 것이라면 모든 국민이 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평화롭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누적되고 있다는 점이다. 수평적인 폭력관계가 발생되는 이유는 인간은 선천적인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으나 후천적인 요소가 더 크다는 점이다. 국론이 분열되는 이유는 누군가 불이익을 당하는데, 다른 누군가는 어느 누군가의 불이익으로 혜택을 본다는 점이다.


이게 바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성립이다. 겉으로 동일한 법과 제도로서 지키고자 하나 그 이면에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개선할 여건도 없다. 단지 이런 상황에서 이권을 지닌 자들에게 더 이상의 피해가 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이익을 더 증대하려 한다. 최근 세금과 관련하여 자동차세, 담배세, 주류세 등과 같은 세금은 간접세로서 소비자들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종목들은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거나 이용한다. 단지 그 이용자들이 소득 빈부격차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소비하는 점이다.


회사 사무실에서 다른 부서장의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 재미있다고 하나 그것은 하나의 블랙코미디처럼 쓰고 달달한 초콜릿 같았다. 게다가 씹히는 맛이 너무 강하고 오래 가서 지금도 그 초콜릿을 씹는 기분이다. "야! 우리나라에서 애국자가 누군지 아나? 군인, 경찰, 아니라면 정치인? 아니야. 바로 내다. 왠지 아나? 내 술 마시고 담배 피우지, 게다가 차도 중형차지, 세금 제일 많이 낸다." 생각하면 그렇다. 아무리 비싼 차라도 세금은 처음 취득세만 그렇지 후에 자동차세에서 차량 배기량으로 가격을 매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배기량의 차등으로 매긴 세금의 액수도 조금 바뀐 것으로 들었다.


담배와 술, 담배는 피지 않으나 술은 마실 때가 있다. 소주, 맥주, 막걸리 등에 주요 소비계층은 일반 국민이다. 그런 간접세로 충당될 때, 물가가 오르면 간접세 역시 더 수금된다. 그런 직접세를 어떻게 되는 것인가? 기업의 법인세 및 다른 세금, 혹은 증여세, 부동산 등은 가난하거나 평범한 사람에게 머나먼 관계다. 그런 세금을 할인해준다는 황금의 말이 현혹하나 막상 적용의 범위와 효용은 절대적인 차이를 보인다. 허나 사람들은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그 대상에 집중한다. 이런 사회를 조장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선택이다.


그 계기는 언론과 여론이다. 모든 정보의 출처가 미디어로서 전달된다. 미디어는 누군가의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이권이 반영되어 있다. 공공성의 미디어가 결국 사적인 이익에 직결되는 순간, 공정이란 단어는 이미 사라진 의미다. 공정은 누군가 유리하게 만든 룰에 얼마나 잘 따라주는 것이고, 거기서 멀어지면 도태의 대상이고, 거기서 벗어나면 반사회적 인물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만든 리그가 아니라 그들만의 각본이 만들어낸 리그에서 아무 의미 없이 쳇바퀴를 돌고 있다.


하루를 매일처럼 생계를 위해 뛰고 있으니 세상에 대해 보는 눈이 없어지고, 자신의 판단 역시 정해진 루트만 의존한다. 그들조차 자신의 존재에 대해 본다면 충분히 똑똑하거나 지혜롭다고 여긴다. 그런 착각 속에 그들이 선택하는 것이란 정의라고 보겠지만, 이미 윤리성이나 지성에서 벗어난 것이다. 자신들의 선택이 정말 옳은 것인지 생각한 게 아니라 자신들도 옳다고 여긴 것이다. 사회에서 왜 빈곤층에서 부조리한 사회에 가장 피해보면서 개선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5분이 중요하다. 그 5분을 통해 자신의 삶에 어떻게 가야 할지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의 삶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의 주변에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있어서 인간이 인간으로 될 수 있다. 인간의 한자가 人間 사람 사이다. 우리에게 삶이 중요한 것은 현재도 있지만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살아가야 할 내 자신도 있지만, 내 주변 사람들도 있다. 만약 자신에게 가정이 있고, 그 가정에 자녀들이 있으며, 그 자녀조차도 아들딸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옳을까?


한국은 인구가 한국전쟁 때 축소하다 다시 산업화로 인해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증가된 인구는 노년층이 되었고, 새롭게 등장해야할 신규 계층은 노년층의 수만큼 오른 게 아니라 그 반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가고 있다. 2인 부부 출산인구가 1인이 겨우 넘는 시점에서 한국의 미래는 암울한 장마와 같다. 나라에선 계속 인구증가를 위한 결혼과 출산 장려홍보를 내세우나, 홍보와 달리 실제 부부 사이는 생활에 직결된 문제다. 결혼마저 의무보단 선택이 되어 가고 있다. 소외된 인간들에게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린 것인가?


사회적 문제는 사회구조겠지만, 그 사회구조를 보고 문제를 모르거나 혹은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또는 자신과 무관계하다 여기면 그 사회는 계속 무너질 것이다. 그런 위기의 순간의 5분, 위에서 응급환자에게 5분이란 생사를 결정한다. 우리 사회는 그런 생사가 갈림길로 접어들었다. 그 순간 5분은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내려줄까? 판단은 언제나 개인이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판단조차 하지 않는다면 결국 최후는 몰락의 연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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