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이미지 존재론

이미지라는 것은 현대사회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가 존재하느냐 아니냐에 대해 묻는다면 난감할지 모른다. 존재적인 구성에서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게 이미지가 아니라 관념적인 영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영상이 존재해도 그것은 만지거나 느끼거나 할 수 없다. 가상의 투영체가 현실의 인간들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왔다. 흔히 2D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들 즉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지로 존재하는 캐릭터는 현실부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아한다. 한편으로 파생실재(hyper real)의 존재들은 설사 현실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해도 우리에게 과연 그들은 단 한 번이라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린 시절 TV 드라마를 그나마 보던 때 최고의 인기배우가 최진실이었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그의 아이들은 각종 악플과 루머로 시달린다. 그러나 최진실은 육체적으로 소멸해도 영상에서는 존재한다. 그녀는 정말로 죽은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반드시 그녀만이 아니라 많은 연예인조차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도 영상에 남겨 우리에게 전달된다. 영화광이라면 반드시 찾는 히로인이라면 오드리 햅번이나 마릴린 먼로 같은 배우일 것이다. 그녀들은 이미 육체적 존재는 현실은 없다. 하지만 영화광들은 그녀들의 사진을 모우고, 때로는 다른 여배우들이 그녀를 흉내 내는 장면도 종종 볼 수 있다. 영상은 인간의 죽음조차 죽음이 아니라 마치 유령처럼 불러낸다.

 

이미지 존재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강사 분이 갑자기 <공각기동대>를 이야기할 때 그런 존재론적인 부분이 대략 이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실재로 있다고 여긴 게 과연 진짜였는가? 공각기동대 극장판 <Ghost in the shell>에서 인형사란 존재가 등장하여 의체를 가진 인간의 기억을 해킹한다. 어느 남자가 사진을 보며 자신의 가족이라고 동료에게 소개하나, 막상 그 사진은 강아지가 찍혀있다. 그가 이때까지 가지고 있던 기억이란 과연 사실인가? 허구인가? 가상의 존재에 대해 성행위도 마찬가지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후속 극장판 <이노센스>의 경우 어린 소녀를 납치하여 그 소녀의 감정과 무의식적인 요소를 기본 자료로 삼아 섹스로이드의 운영체계로 만든다.

 

인간이 아닌 기계인간을 인간과 성행위를 한다는 설정과 더불어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영상으로 가능하기 시작했다. 이미지라는 가상의 영역이 인간에게 미치는 여파란 과연 어느 정도인가? 반드시 이미지는 위와 같이 배우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이나 공상과학적인 요소만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일상 그 자체가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것이다. 광고를 넘어가면 그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2. 섬뜩한 자본주의의 미학

현대인들에게 신용카드를 가지지 않을 자는 얼마나 있을까? 나도 보통 마트나 술집에 결재할 때 신용카드보단 현금결제를 하려고 한다. 마트에 가서 간식거리나 사고, 술집에 가서 소주 몇 병 혹은 막걸리 몇 통 정도 마시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보단 현금을 우선하려는 이유는 카드의 이용은 물리적으로 자신의 지갑에 꽂힌 화폐의 수와 상관없이 당사자의 통장에 있는 잔액을 소비한다. 현대인들은 화폐를 지폐나 동전으로 들고 다니겠지만, 나머지 재산을 봉건시대처럼 집에 금화나 보석으로 나두지 않는다. 유럽 봉건사회에도 은행은 있었지만, 은행 내에 화폐 역시 금화와 보석이다. 강도가 닥치거나 전쟁이 나면 그대로 사라질 존재다. 현대의 화폐는 지폐보단 은행에 기록된 사이버머니다.

 

공인인증서를 로그인하여 은행계좌에 보이는 금액이 나의 현재 재산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지의 숫자로 보일 뿐, 자신의 손 안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다. 신용카드의 신기루란 바로 그런 식으로 작용하기에 내가 당장 어느 정도 결재해도 많이 쓴 것인지 아닌지를 잘 모르게 해준다. 하지만 1달에 1번씩 우편으로 날아오는 대금청구서는 자신의 소비생활의 비극성을 알려준다. 신용카드의 경제적 패턴이 우리 일상을 깊이 침투할수록 우리는 자본주의의 미학에 빠지게 된다. 원하는 데로 물건을 구입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자유는 오로지 그 개인의 자유이며 권리다. 그러나 뒤에 다가올 경제적 책임은 자유롭지 못한 결박이 된다. 신용카드 광고에서 모든 것이 그 카드 하나로 되는 순간, 우리는 카드로 인해 모든 것이 매개되고, 자신의 생활에 불편함까지 느끼게 된다.

 

예전에 내가 사람들을 내 차를 태우고 대구 팔공산에 간 적이 있었다. 팔공산에 위치한 파이데이아 인문연구소 북 카페를 가기 위해서였다. 가는 도중 같은 도서모임 한 분이 내 차를 보며 놀라듯이 말했다. “어라 중형차인데, 수동이네요. 게다가 하이패스와 네비도 모루 분리되었고요.” 개인적으로 그렇게 된 상태도 있었지만, 일부로 차량을 수동을 구매했다. 기름연료도 아끼고 구매비도 저렴하나, 더 중요한 건 운전은 나의 의지로 하는 것이지 차의 편리성에 기대기가 싫었다. 하이패스를 지날 때 단말기를 이리저리 옮기고, 일일이 하나하나 정리하는 내가 재밌게 보일지 모르나, 나는 “자동에 의존하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안 되면 엄청 불편해요.”라고 했다.

 

신용카드의 광고로 돌아가면 신용카드 하나가 모든 것을 통용하게 해준다. 버스지하철, 식당과 핸드폰요금 결재, 심지어 불우이웃돕기가 카드로 세금도 카드결재가 가능하다. 분리된 기능이 하나로 모이면 모일수록 편리함은 증가하나, 만약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더욱 놀란 것은 모바일 기능이었다. 모바일기능


이 작동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스마트폰 단말기를 분식하고 교체하는 순간 엄청난 수고가 들인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해킹이 만연하고, 스마트폰에 금융기능은 더더욱 금융범죄를 야기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에게 편리한 도구는 인간 그 자체에게 더 불편한 족쇄를 걸게 해주는 함정이 되었다. 문명의 이기와 편리함에 빠진 인간, 결국 그런 일들은 인간 스스로 의존적이고, 시스템에 의해 사육되어가는 수동적 존재로 전략한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도구에 의존하면 할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결국 나약한 인간이 된다고 했다. 루소가 이 책을 저술할 때가 1750년 중반 정도다. 250년 훨씬 지난 지금의 문명에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광고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40대 남성, 실제 그가 찾아야 할 사람은 늦은 나이라도 같이 삶의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미래를 같이 열어갈 사랑을 찾아야 하는 게 바르다. 광고 속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다를 수 있으나, 광고에서는 신용카드의 기능이 모든 일상을 차지했다. 인간의 곁에는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 대체된 것이다. 어째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남녀의 사랑도, 자식에 대한 사랑도 자본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의 만능을 보여주는 광고는 자본주의의 미학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30초 광고는 식당에서 식사할 때 잠시 본 기억은 난다. 3분은 아니다. 3분에 나온 광고는 신용카드의 아름다움보단 차라리 소름이 돋는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였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다가가는 것처럼 말이다.

 

3. 아무 것도 되는 게 없어?

위 제목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책 제목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에게 다양한 문명혜택이 돌아가는데도 인간은 여전히 불만투성이다. 실재 이 책에서는 미국의 1960~1980년대 이야기를 해준다. 제품을 만드는 기술은 늘어나는데, 왜 불량품이 많은지, 소비자가 불량품을 구매하여 항의해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은지 말이다. 이미 우리 사회도 그런 형태로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의 중심으로 가는 점에서 소비사회에 소비자는 권리를 누리는 경제적 주권자가 아니라 단순히 기업의 이윤을 위해 소외되는 존재로 전략했다. 문제는 소비하는 주체들은 거의 대부분 많은 국민이나, 그들은 스스로의 문제를 자각하기보단 그저 그 개인의 영역으로 돌린다. 개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관계에서 자유적인 조건이 이런 식으로 전도된 게 아닌가 싶다.

 

신자유주의 국가 중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도 되겠지만, 우선 미국이다. 자본주의 영역은 자유주의와 함께 겹치어 갔지만, 자유의 조건은 철학에선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 가깝다면, 현실의 자본의 차이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애덤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을 따라가는 것처럼 말하나, 고전경제학의 애덤 스미스나 최후의 보루인 존 스튜어트 밀까지 넘어가면서, 밀의 <자유론>을 보면 인간의 자유란 인간의 존엄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성의 절대적 판단으로 그 사람의 판단과 논리가 중요하며, 타인에 대하여 이타적인 자세도 필요하다. 아마 이런 논리라면 현대에선 보인 신자유주의라는 게 자유주의철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드러난다. 국가가 시장을 간섭하지 않고, 자본의 자유로서 움직이나, 자본의 자유에서 자본 그 자체는 자율성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문제는 자본은 자본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는 점이다.

 

돈을 은행에 넣고 가만히 넣고 있다면 예전에는 이윤이 제법 되었지만, 금리의 조정으로 통장의 이자가 낮아지면서 어느 누군가는 은행에 저금하는 것이 돈을 제대로 굴리지 못한다고 여긴다. 결론은 누군가 계속 돈을 굴리는 일이 생기면, 반대로 누군가는 굴리지 못할 것이고, 돈을 굴리지 못한 사람 중에는 그나마 생계수단을 유지할 수 있는 부류도 있는 반면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부류도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처음에 나온 자들은 빈민의 여성이다.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활보할 때 국가세금을 낭비하는 자들을 매도하고, 그들 대부분이 흑인여성이라고 미디어에서 떠들던 시기를 예를 들었다.

 

전에 TV를 보면서 미국의 어느 백인관료가 흑인 슬램 가를 돌면 젊은 흑인남성에게 군에 입대할 것을 제안한다. 미국은 거대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이며, 군대를 운영하려면 첨단화된 시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군인이 필요하다. 군인을 선발하려면 장군과 장교 같은 지휘관과 고급인력이 필요하나 아래로 부사관과 사병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력으로 본다면 장교와 부사관보단 사병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런 병사를 충원하기 위해 가난한 흑인에게 제안한다. 그런데 흑인여성 특히 아이를 양육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각종 감시와 언론의 매도성은 그들은 계속 그 사회에서 고립 내지 또는 소모되어야 할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고위직과 재벌가문의 후예들은 군에 가지 않거나 면제받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군에 가는 것은 평범한 집의 남성이다. 그런데도 그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군문제를 사회구조적인 부분보다 오히려 남녀 간의 불평등으로 전도시킨다. 특히 미디어가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를 두고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거나 또는 문제가 터지면 그 일들을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은폐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물꼬를 돌린다. 최후에는 이상하게도 그런 문제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반드시 그런 일은 군대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아니라면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망각하게 만드는 일도 많다. 처음 주제인 이미지, 이미지는 TV의 화려한 광고와 드라마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신문잡지, 인터넷, 스마트폰, 심지어 길가에 네온간판과 전단지도 포함이다.

 

우리의 관심사를 우리의 생활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접해도 아무 관계없는 것들로 대체된다. 가끔 연예인 기사가 뜨면, 주변에 사람들이 화제로 삼아 입을 올린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그게 나보고 뭐 어쩌라고?”, 여자연예인들이라면 “내하고 만날 거야? 데이트할 거야? 평생 나하고 손잡을 일도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언론에 접하는 비극적 소식에 대해 논하면 사람들은 “뭐 좋은 일이라고, 나와 관계없자나.”라고 한다. 아무 관계없는 일에 열을 올리는 반면, 타인의 불행한 사고에는 자신의 무관계성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이 있지만, 이제는 언론과 미디어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고가 시보다 더 철학적인 세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중들은 전체화와 개별화란 이중적인 잣대로서 서로의 영역을 관심을 두지 않거나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다. 사실 어떤 A란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 B라는 사람에게 전혀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래 보는 나는 C라는 사람이다. 결국 B가 당하는 상황에서 D라는 인물이 무관심하게 보고, 만약 내가 A의 비극을 논하고 B의 상태를 이야기하더라도 D는 요지부동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좋지 않은 일 대신 어떤 이익에 대한 일이라면 어떨까?

 

4. 비판과 비판에 대한 비판, 대안은 무엇으로?

어떤 부당한 압제에 대해서도 그 압제자와 주변 무리들은 자신들의 테제가 있다. 되도 않은 논리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잘 포장한다. 그렇다면 이에 반대하는 안티테제가 있다. 안티테제들은 그들의 주장과 의도하는 바를 폭로하고 저항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관계에 있던 자들이 서로 위치가 바뀌는 경우가 있고, 압제자이든 아니든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무조건적으로 태클을 거는 일도 있다. 반대를 위한 게 과연 무엇을 위한 반대인가?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인가? 목적보단 집단적인 행동인가? 과거 독재자와 압제자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분명 안티테제의 효과는 정당성이 있었다.

 

세상이 바뀌면서 안티테제만으로 가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무조건 하기와 안 하기의 경계선에서 나오는 것은 힘겨루기고 힘겨루기가 되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 하나를 밟는 일이었다. 주로 우리나라에선 80년대까지라 보면 될 것이다. 경찰과 군인을 동원한 정치적 수단은 무력에 의한 통치다. 그러나 이제는 무력이 아니라 지식과 행정에 의한 통치로 전환되었다. 특히 지식이 무지식의 대중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식은 국가권력과 시장자본과 결탁하기 시작했고, 언론과 미디어에서 지원했다. 지식의 세분화, 관료행정의 책임보단 하위행정에 책임전가로 이어졌다. 지식과 권력은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고, 지식에 대한 폭로 역시 지식에 의해서였다.

 

지식이 인간을 속이는 도구로 되고, 속임수를 파헤치는 도구로 되었다. 강연자분이 말한 것과 뒤풀이에서 나온 4대강 이야기는 특히 그렇다. 4대강은 대통령만이 아니라 정치 관료와 국가행정기관의 합작품이다. 국토부와 환경부를 주도한 작품이다. 마치 거대하게 포장한 이 사업을 만약 우연히 하천 인근을 지나면 허구임을 알게 해준다. 문제는 당시 설계과정 시에 제대로 된 현장조사를 하지 않았고, 지도 위에 선을 긋는 수준이라고 한 점에서 현장과 설계의 관계가 전혀 맞아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국토부가 사업자와 승인권자로 되었다면 협의권자는 환경부다.

 

환경영향평가 협의 시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게 위에 드러나지 않은 점은 사업자와 협의부서, 그밖에 환경관련 학회조차 문제를 제대로 의문시하지 않은 것이다. 행정기관 말단은 이 일을 실제로 담당하나, 이 일에 대한 권한은 없다. 협의과정은 담당자로부터 하나, 사업에 대한 진행은 상부에서 결정한다. 관료주의적 행정은 그 문제의 해결권을 가진 자와 그 일을 수행하는 자가 분리되어 문제가 된 것이다. 말단관료는 관련규정에 따르고 결재권이 없어서 책임회피가 되고, 상부기관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하지 않기에 담당자에게 문제를 제기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핑퐁게임 같은 피해보는 사람만 방황하여 결국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비단 이런 문제는 4대강만이 아닐 것이다. 그마나 4대강은 하천이 공공의 재산이고, 개인이 소유할 수 없고, 개발조차 어렵다. 하천구역은 친수구역으로 설정하여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유도하지 않은 이상 하천은 복원 및 보전구역으로 설정된다. 개발은 주로 이루어진 곳은 도시지역과 도시인근지역이다. 도시내부와 도시인근은 결국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다. 도시의 개발이 머리 아픈 것은 개인의 이익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도시의 개발은 주거환경개선, 교통소통, 공원부지로 통한 자연환경 향유라는 슬로건이 따라 붙는다. 문제는 도시의 땅은 국유지와 공유지보단 사유지에 기반 한다. 특히 부동산의 이익은 나의 영역이 아닌 옆에 있어도 영향이 온다.

 

대규모아파트 주거단지가 오면 모두 환영하고, 만약 혐오시설이 오면 반대를 한다. 강연에서 말한 푸코의 저항을 실현하려면 먼저 그 시설이 오는 기능적 요소를 생각해야할 것이다. 도시에서 아파트단지가 오고, 특히 재개발이 오면 땅값이 몇 배로 오른다. 집값이 오른 사람은 좋겠지만, 나중에 자기가 받은 돈으로 다른 곳에 갈 수 없으면 문제가 된다. 대규모공사는 부동산증가라는 이익과 더불어 공사 시 분진, 소음, 진동, 토사유출이 문제가 되고, 완공 후에는 교통체증, 교통소음, 일조권장해, 빛 반사 등이 문제가 된다.

 

환경적으로 본다면 개발은 이중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개발은 필요하나 막상 그 지역의 주민들의 입장이 배제되는 경우가 많고, 특히나 주변 이권단체와 관련단체가 사업자와 국가세력을 지지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부산에 당초 공원지역이나 공공시설이 유치되기로 한 지역에 대규모 상업시설이나 공업시설로 용도 변경된 경우가 있다. 그 일을 추진하는 자들은 자본가들이고, 그 자본가들은 정치행정과 결탁한다. 문제는 주민이 피해를 보는데도, 그 주민들은 자본가들에 대해 반발하면서 그 자본가와 결탁하고 있는 정치행정들에게 비판 없는 지지를 보여주는 일들이 있다.

 

강의내용에서 계몽이 새로운 억압과 차별을 만들지만, 계몽적인 요소가 배제된 경우 도시의 난잡한 개발이 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도시의 기능은 주거만이 아니라 인간생활 그 자체를 영위하는 곳이다. 도시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고, 인간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다. 그런 곳에 어느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에 의해 점유되어 개발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파괴된다. 도시는 토지라는 개념이 사유지로 되어 있으나 토지 아래의 지하수와 암반, 토지 위의 대기층은 사유화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일정장소의 파괴는 그 장소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 이어진다.

 

물론 도시개발이 중요한 사업이 되어 어느 지역에 큰 발전이 될 수 있겠지만, 때로는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지역의 특성과 지역주민의 입장보단 오히려 반대되는 개념이 많다. 그래서 대안이 필요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는 열쇠는 개발사업자와 관료집단보단 지역주민에 의해서 유도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역주민에게 그런 지식적 배경이 없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이다. 그런다고 반대만 외쳐도 해결이 나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 하는 것과 어느 것이든 반대하는 것은 한계성이 다다른다. 대안의 영역은 삶에서 다른 방식을 구현하기를 바란다. 도시에 대한 예술적 기능이란 바로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을 만들게 해준다.

 

삶의 예술성에서 과거 농촌에서 농번기에 서로 농가를 부르는 농민들은 그게 삶의 형태다. 그러나 지금은 무형문화재 내지 민속 문화로 본다. 과거 어부들이 용왕제를 지낸 것이 근대에 이르러 미신에서 다시 그 마을의 축제 내지 그 사회의 문화행사로 전환된다. 농촌과 어촌의 행사도 사실 도시화라는 이름아래 묻혀간 전통들이다. 부산은 기본적으로 농업보단 어업이 활성화되어 있고, 어항이 있는 마을에선 용왕제 외에도 다양한 민간문화가 남아있다. 그런데 만약 주변이 개발되어 어항조차 존폐위기라면 그 문화의 유지에도 치명적인 위기로 될 것이다.

 

공간의 파괴는 정신적 파괴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에 어느 지역의 도시개발사업에서 당산나무 하나가 있었다. 그 나무는 그 마을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나무로 민간신앙에서 하나의 상징이었다. 아마 몇 십 년 전이라면 그 나무를 베어 다양한 목공용품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환경영향조사로 나무 존치상태를 점검하여 훼손되지 않도록 했다. 환경영향평가 제도로 통한 지역주민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물론 반영되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마을은 원래 울산에 위치했지만, 변두리에 위치했으며, 아파트보단 주택이 많았고, 상업시설도 대규모가 아닌 소규모였고, 어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들이 즐비했다.

 

도시의 발전으로 대규모 주거단지로 많은 인구가 생기고, 이에 대한 인프라로 대형마트로 설립되고, 도로가 넓어진다. 이런 발전은 부동산의 증가로 되고, 세를 들어가는 영세민 입장에서는 그 지역에서 장사를 포기하게 만든다. 만약 그 지역주민에게 적정한 대안이나 혹은 그들이 안심하고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부분 현실에서 그런 상황을 외면했다. 실제 서울수도권에서 전통시장의 상인들이 신축된 대규모 상업시설로 들어갔으나, 그곳의 임대료가 너무 비싼 나머지 결국 나오게 되었고, 그 건물은 추후에 대규모 자본을 지닌 기업에 매각되었다.

 

영세한 지역 상인들에게 고객은 필요하나, 그 고객들이 너무 대규모로 조성된 곳으로 이동하면, 결국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없다는 점이다. 강의를 들으며 전에 읽은 최병두 교수(대구대학교 지리학과)의 <환경갈등과 불평등>이 생각났다. 위천공단 조성에서 당초 경상북도가 지역자치단체에서 대구로 이전되고, 대구시는 위천공단에 대한 문제로 중앙정부와 지역주민과 갈등을 빚어왔다. 대구지역 일자리와 산업시설용지 부족은 산업단지 조성이란 정책적인 방법이 있지만, 그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대규모 단지가 조성되면 사실상 대구주민보단 입주업체에 해당되는 직종과 직렬이 들어온다. 대구지역 주민들이 기계공학 전공자나 자동차학과 전공자가 아니라면 만약 자동차공장이 와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대규모 부지조성 시 곤란한 점은 자본이 중앙정부로부터 나오면 부지공사 시 지방업체가 주도되는 게 아니라 대규모 건설사가 주도되며, 지방업체는 소외된다. 또한 대규모 자본을 지닌 기업이 입주하면 많은 수익이 지역주민에게 가는 것보단 수도권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높다. 부산항의 무역의 이익에서 발생하는 세금이 지방자치단체보다 오히려 중앙정부로 가듯이 기업의 이윤과 국가의 세금이 중앙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 지역주민의 입장에서 단지 오는 것으로 환영하고, 집값이 오른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삶의 질을 저하시킬 우려를 그들 스스로가 만드는 것과 같다.

 

도시의 기능은 뭐든지 환경과 연결된다. 공간의 배치성에는 수질, 대기, 토양, 소음진동 등과 같은 환경적 영역과 충돌한다. 공원녹지 역시 자연환경과의 배치에서 인간생활환경과 밀접한 연계가 되어 있다. 강의 도중 해운대 동해남부선 선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선로 공간부지가 광대하고, 주변지역 철도로 인해 훼손되지 않았으며, 선로구간에서 보이는 경관은 아주 탁월하다. 그런 공간을 공공재산, 즉 시민의 휴식과 여유 공간이 아닌 기업이 호시탐탐 노린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가 해운대 달맞이고개다. 1990년대 정도만 해도 그렇게 많은 가게가 입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맞이고개가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가게가 입주하면 산을 깎고 길을 내어야 하고, 그러면 녹지의 축이 좁아진다. 달맞이고개 도로 밑에 작은 공연장을 만들었는데, 자연석이 아닌 콘크리트 내지 화강암 재질은 녹지의 축을 파괴한다.

 

달맞이고개에서 바라보던 과거의 해운대 앞바다는 자연적인 모습이 농후했으나, 현재는 점점 갈수록 부산시내의 커피숍과 고급상점이 많은 곳처럼 변했다. 게다가 주변에 아파트나 대규모 주거단지의 조성은 더욱 환경적 부담을 키운다. 모두가 보기 위해서 그곳을 보전하는 것이 바르나, 다들 개인적 소유를 하고 싶은 욕망에 자연은 파괴되고, 아름다운 환경은 점차 그 모습을 잃어간다. 공유지의 기능이 사유지화 될수록 환경적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경제적 여유를 가진 자들이고, 그에 반해 빈곤층은 나쁜 공기에 노출되고 불량한 주거환경에 의해 심신이 불편해진다. 도시에서 환경정의는 바로 이런 문제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삶의 예술이란 말은 각 개인의 삶에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민간에서 전해온 예술은 특별히 예술적인 목적이나 예술인이 모인 게 아니라 그 삶 자체가 예술로서 만들어 온 것이다. 단순히 무조건 변화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변화라는 그 자체가 무리한 시도가 아닌 하나의 흐름에 따라 온 것이다. 대안의 선택에서 무조건 시도하려는 것과 반대하는 것에서 대안의 자세에서 다른 길을 보여주거나 혹은 잠시 중단하여 후에 의론을 나누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가기 위해서는 이런 안건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예술인들이 하는 예술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나 혐오시설 신축예정지에 환경오염 피해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또는 퍼포먼스로 하는 것 역시 예술이다.

 

그 예술은 특정한 세계관이 아니라 우리 삶이란 일상에서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경고주의보다. 언론과 미디어는 국민의 눈과 귀를 길들여 미디어에 경제적, 정치적 권력자에게 봉사한다.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결국 문제의 원인을 알아가는 것이다. 강의 자료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것처럼 제작은 그 지역의 자본을 투자하여 이익을 회수하려 하는 이고, 노동은 그곳에 투입되는 노동자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어느 곳을 갈취하고, 갈취당하는 곳에서는 노동으로 착취당한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행위라고 한다면 그 행위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념을 파괴하고 해체하여야 한다. 그 행위는 일회용이 아니라 연속되는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자료 뒷부분에 르페브르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이야기가 나온다. 엉뚱하고 도발적인 행위를 하던 그들은 끊임없이 도시 안의 자본주의에 대해 조롱한다. 그들은 자신들부터 이상하게 보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행위에 대한 목적성을 전달한다. 그들을 접하는 대중들은 그들의 도발에 처음 그들에게 분노하겠지만, 상황주의자들은 그것이 목적이기도 하다. 대중문화라는 거대한 틀에 갇혀 언제나 당연한 것만 받아들이려는 현대인에게 무엇보다 그 인식을 바꾸는 충격이 필요하다. 예술은 미술관에 전시되는 게 아니라 대중들의 생활에서 삶의 주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계수단으로 자본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지만, 자본 그 자체에 종속당할 수만은 없다. 만약 종속당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권력자들에게 평생 소비만 하거나 노동만 하거나 또는 감시만 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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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영화를 보는 순간 내 머리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독립군과 광복군, 그들은 조선의 독립 혹은 대한이 독립을 위해 몸을 투신했다. 가족들이 있어도 홀로 외국에서 싸우고, 하다못해 시신조차 거두지 못했다. 더욱 비참한 것은 독립운동가란 이유로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암살>에서도 그런 모티브가 작용한다. 항일전쟁에서 가장 역사적으로 기억이 남는 것은 청산리대첩과 봉오리대첩이다. 대한독립군에서 가장 위대한 지휘관으로 백야 김좌진과 홍범도 장군이 있다. 이들은 일본군을 대패한 이유로 일본군에게 원한을 샀다.

 

일본군은 조선인 정착촌을 덮쳐 남녀노소 불구하고 모조리 살해했다. <암살> 영화에서 2990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일본군의 총칼아래 꽃처럼 흩어졌다. 그런데 대한민국 독립운동역사를 보면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이 대종교 신도였다. 단군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의 얼을 살리고 자주 국가를 위해 노력한 분이다. 하다못해 우리의 한글이 주시경 선생의 도움이 매우 크다. 그분 역시 대종교 신도다. 조선어학회 사건이나 많은 조선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을 탄압받을 때 그 분 대부분이 대종교 신도였다. 김좌진 장군과 그의 군대 역시 그러하다. 그들이 단군신앙을 토대로 한국의 얼과 글과 문화를 지키려 한 것은 단지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인간이란 정체성에 의해 살아가고 정체성에 의해 죽어간다. 자신이 대한민국의 독립군이란 사실에 부끄러움 하나 없이 빛처럼 산화된 그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역사의 후대에서 그들의 노력은 알아주지 못한 채 오히려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작년 광복절에 나는 백산 안희제 선생을 기념하던 전시관에 갔다. 작은 건물에 얼마 되지 않은 평수였지만, 백산 안희제는 대한민국 독립군의 자금의 젖줄이었고, 대종교의 주요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시대 대종교 신도의 죽음은 순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순국이기도 했다. 순교와 순국이 곁 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임오교변(1942)으로 고문으로 서거한 그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최고의 부자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부자라면 이병철과 안희제였다. 그러나 안희제 선생은 돌아가시고 그분의 후손은 가난을 대물림을 받아 살았다. 영화 <암살>을 보면서 나는 안희제 선생이 갑자기 떠올랐다. 먼 이국에서 독립운동만 하다 돌아가신 분들, 어처구니없게도 많은 독립군들이 해방 후 돌아오니 일제 앞잡이 하던 자들이 그들의 마을에 있었다. 그들은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에게 왜 왔냐는 식으로 말하였고, 경찰과 군인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암살> 영화 마지막을 보면 그런 현실이 드러난다. 반민특위, 반민족을 하던 일제앞잡이를 재판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정치적 입지가 떨어지고, 미군정과 신탁통치의 광기,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을 등에 업고 있는 북한군의 도발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1950625일로 보고 있지만, 1949년에 북한의 도발로 몇몇 전투가 있었고, 전투로 인한 순국자가 발생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나라 잃은 설움과 동시에 민족을 죽어야 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암살> 영화는 그 이전에 나라 잃은 설움을 보여준 영화다. 영화를 보면 2가지 서사가 작용한다. 전에 이순신장군을 다룬 영화 <명량>은 명량해전처럼 이순신의 죽음으로 그의 신화화된 요소를 부각했다. 물론 이순신 장군은 신이 되었다. 사당을 지어 매해 그의 위패에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한국은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된다는 민간신앙이 있다. 하지만 <명량>은 애국서사만 존재했지, 애족서사는 없었다.

 

조선은 결국 명나라와 더불어 왜군을 무찌르고, 조선왕조는 전쟁 이후 300년이나 견뎌내었다. <연평해전> 역시 애국서사만 존재했지 애족서사는 없었다. 전쟁 속에 죽어갔어도 결론은 승리의 역사였고, 그것은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뒤받쳐주는 헤게모니적 요소가 숨어있다. <암살> 영화는 그런 헤게모니적 요소가 해체된 작품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 앞잡이가 반민특위에서 무죄를 받고 귀가 중에 암살을 당한다. 하지만 그만 암살당했지 그 주변의 관료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반민족적인 인물을 국가 법률에 따른 재판에 의해 응징을 당한 게 아니라 개인적인 암살로 통해 응징을 당했다.

 

법적인 절차가 아니라 범죄적 수단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 명령을 내린 자는 김구 선생으로 나온다. 김구 선생은 영화 마지막에서 반민특위가 열린 1949년 장교 안두희에 의해 살해당한다. 안두희 역시 권력자의 손길에 의해 승승장구하다 박기서라는 사람에게 살해당한다. 김구 선생은 총에 의해 서거당하나, 안두희는 몽둥이에 의해 암살당한다. 역사에서 그 당시 패배한 자는 자신의 이상을 펼치지 못한 채 이슬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후대의 역사에서 희비가 엇갈려도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늘이 주어지는 당연한 처사이므로, 후세에 부끄러움 한 점 남기지 않도록 살아가는 것이 선비의 정신이고 지식인의 의무였다.

 

하지만 현실적 배경에선 그게 어려울 경우가 많다. 영화 <암살>에선 조선에 주둔하는 장군과 그 옆에서 아첨하는 친일파 거부를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암살을 주도하는 주인공과 살해대상자 및 주변 인물들은 가상이라 할 수 있지만, 막상 그 요소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었다. 영화는 심각한 내용이나 감독이 전형적으로 영화에 대한 볼거리를 주로 제공하다보니 전개는 경쾌하고 순간적으로 흘러갔다. 특히나 플롯의 전개에서 사전에 복선을 집어넣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뒤 상황을 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해 놓았다. 그런 점에서 대중적인 영화에선 좋은 평가겠지만, 영화라는 예술적 접근에선 미묘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강인국 사장의 딸인 미치코가 죽는 장면은 너무 무리수가 강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장면만 부드럽게 진행되었다면 조금 더 높은 완성도를 보였을 것이라 여겼다. 아마 감독은 영화를 너무 어렵게 여기게 만들기보단 액션 장면을 잘 조합하여 관객에게 재미와 감동을 심어 넣으려 했던 것 같았다(권총으로 사격하여 원 샷 원 킬로 죽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래도 복선에서 주어지는 미세한 조건과 상황설정은 도망자와 추격자의 상태를 잘 보여준 것 같았다. 영화가 기본적으로 독립군에 대한 내용이므로 과거에 장동건이 주연한 <아나키스트>와 비교하면, <아나키스트>는 매우 딱딱한 영화다.

 

우울하고 절망적이며, 배우 장동건이 맡은 세르게이는 절망으로 인해 마약에 빠지고 아나키스트 활동 중에 일본군에게 살해당한다. 당시 동료들도 모두 죽는다. 독립군의 분파와 계파와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영화 <암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시작된 조직이라면, <아나키스트> 영화의 경우 단재 신채호와 이회영 같은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이 해외에서 활동할 때 그들의 사상에 심취된 자들의 이야기다. 테러에 의한 살해와 공작행위, 그들도 자신의 한 일에서 조국이 해방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목숨 걸고 싸우는 이유는 자신의 현실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비참함과 우울증은 충동으로 얼룩져 술, 마약, 섹스로 가득하다.

 

대한민국 독립운동 하던 분들의 특징을 보면 그들은 남루한 옷을 입지 않았다. 멋지게 정장을 차려입고 하얀 와이셔츠에 수염까지 아주 댄디하게 길러 다녔다. 그들은 항상 옷차림에 신경 쓰고 멋지게 꾸몄다. 그 이유는 언제 죽을 줄 모르므로, 그들의 양복은 곧 그들의 전투복과 장례식복이었다. 희대의 멋쟁이로 보여 마치 거리를 활보하는 신사로 보여야 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청춘과 목숨을 민족에게 바치고 사라졌다. 나라를 잃은 민족, 그들은 나라는 없지만 민족은 있었다. 국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국민이다. 국민이 없다면 국가란 없다. 국가가 생기기 전에 그 지역에 살아간 인간들은 인민(peoples)이라고 한다. 하지만 국가가 설립되면 인민은 국민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삶을 살지 못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의 삶의 정신을 만든 그들은 이름도 밝히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을 위해 죽어간 동료들은 자신들을 기억해달라고 했다. 옆에 같이 있던 자신들을 말이다. 역사에서 그들의 이름은 사라져도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한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오늘 내가 여기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그것만을 기억해달라고 한다.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잊어지는 것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미래, 자신이 있었다는 것조차 사라지는 망각, 그들은 그것이 두려워했다. 인간은 개인적으로 죽지만, 그 인간이 살아있던 사회는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해주지 않고 망각하는 세상이란 그들에겐 오히려 철저하게 싸우던 그 때보다 더 서러운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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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baal 2015-08-20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종교라는 부분에 관심이 가는데요.

만화애니비평 2015-08-21 08:49   좋아요 0 | URL
역사학자 위당 정인보,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 시일야방성대곡 위암 장지연, 천연두 지석영 선생도 여기 대종교 인물이죠. 종교적 형태를 현대사회에 갖춘 것 같기도 하나, 조선말기와 광복시기까지는 완벽한 독립군 단체죠...
 
환경갈등과 불평등
최병두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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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생각해보면우리는 기본적으로 환경에 대한 철학적인 혹은 사상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따라서 <환경갈등과 불평등>이란 책을 잡았을 때 일반적인 환경공학 전공자 중에서 학사 내지 석사 급들은 도저히 이해가지 않을 서적이고그나마 박사과정 이상 되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봤다환경공학 전공자들은 기본적으로 화학생물학토목공학 등 다양한 이학과 공학을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운영된다환경공학이란 것은 단순히 환경 그 자체적으로 학문이 완성된 게 아니라 다양한 학문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다.


문제는 그 방향적인 요소에서 공학은 철학과 사상을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다환경공학과를 입문하면 환경공학 개론 정도로 살펴보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그리고 인류 개체수의 대폭발로 인한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로만 볼 것이다예전에 환경관련 교육을 받을 때 강사로 나온 분이 리카도와 애덤 스미스의 내용을 인용한 적이 있었다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애덤 스미스의 이후 고전경제학자인 리카도와 제임스 밀 그리고 영국의 천재적인 자유주의 철학가 존 스튜어트 밀까지 이어본다면 우리가 그런 인물의 이름조차 들은 적이 있는지 아니라면 그들이 무슨 학문과 서적을 남겼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다.


게다가 카를 마르크스가 그렇게 비판했던 <인구론저자 멜서스를 생각해보면 마르크스의 예언도 맞았지만멜서스의 예언도 맞았다인구의 급격한 폭발적 증가는 환경공학에서 제일 먼저 고민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환경을 바라보는데 왜 사상과 학문인가그것은 공학적으로 처리하고과학적으로 원인을 규명하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은 공학으로 설명할 수 없고경제학과 인류학이 필요하며더 나아가 법률과 윤리학까지 이어진다환경은 단순히 폐기된 오염물질을 처리하는 것만은 아니다이제 환경은 후속처리가 아니라 먼저 선행되어야 할 가치로 등급한 것이다.


<환경갈등과 불평등>이란 도서가 나올 때 1990년 후반부였다지금은 2015년이고저자인 최병두 교수가 논문을 집약하여 정리했으니 시기적으로 약 30년 정도 차이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맥락을 살펴보면 내용이 전혀 낡은 것이나 시기가 지난 것이라 볼 수 없었다그 이유는 아직도 그런 문제가 되풀이 되고 있다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단어가 환경정의환경에서 보는 관점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는 인간이 모여 사는 장소에 따라 그 위해도 달라지고들어서는 환경혐오시설도 달라지는 점이다.


최근 밀양에 765KV 송전탑 때문에 말이 많다언론과 미디어는 정보를 통제하고그 지역의 주민들을 무시했다그런데 왜 이런 송전탑을 세우는가이유는 간단하고 복잡하다이런 송전탑들은 한국지역의 남측에서 생산된 에너지를 위쪽인 서울경기지역으로 보내기 때문이다서울경기지역에는 발전소 중에 핵발전소 같은 시설이 없다부산 기장과 울산 그리고 전남 영광 등 한국에서 남측에 위치한 곳에 핵발전소가 위치해있다지정학적으로 북한과의 무력충돌 시 적의 미사일이 발전소를 강타할 때 문제점을 보면 바를 수도 있겠지만문제는 후속대책이 너무 위험한 일이다.


핵의 에너지를 점차 줄여가는 게 세계추세이나 한국에서는 핵에너지 의존도가 증가한다계속되는 푸른 도시와 맑은 공기를 위해 핵발전소의 만능주의를 외치지만사실 핵폐기물 처리와 핵 사고는 치명적인 것을 넘어 국가존재조차 흔들게 만든다일본 후쿠시마발전소의 피해는 이미 그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그 주변에서 나온 음식을 먹은 사람은 암으로 걸려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방사능의 폐해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방사능 오염도 문제거니와 해체적인 요소 그리고 원자력을 대신할 에너지도 필요하다그런 점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어떤 정치적 집단과 경제적인 조직의 이익이 합치되면 국가사업이 움직이는 일이 많다.


핵 발전에 들어가는 원자재나 또는 발전시설을 세우기 위해 일부 독점자본기업가들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노릴 수 있다이런 결과는 바로 밀양아리랑이 서글프게 울려 퍼지는 할머니들의 비명처럼소수약자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진다공리주의적인 방식은 분명 사회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이나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환경갈등에서 관점에서 신자유주의공리주의복지주의가 구분되어 있다한국은 이미 신자유주의국가이고그러면서도 복지국가 선언을 하나복지보단 정지에 가까운 수준이다공리주의에서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관점을 다르지만기본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위해서는 전기 공급은 중요하다하지만 대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점을 문제다.


에너지를 오염시키지 않고최대한 효율적으로 끌어올리는데 최근 대체 에너지가 급부상한다그러나 정보력 부족홍보부족기존 기득권의 이익이 작용되면서 난해한 부분이 되어간다과거 참여정부에서 자동차 연료를 석유에너지보단 하이브리드 기술을 발전을 추구할 때 기존 정유회사와 자동차업체 반대에 무산된 점이 있었다환경정책은 21세기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국과 인류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가치다자본의 권력에 무참히 밟히게 된 현실이 있었다환경정의를 필요성은 환경의 대상은 어디에 존재하느냐이다환경이란 공간은 먼저 생태환경과 자연환경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생활환경이 있다.


여기에 추가하자면 사회적 환경도 포함된다사회적인 환경법과 제도 경제적 권력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가난한 사람일수록 집은 환경적으로 열악하다근대화산업이 빛을 보던 때 한국은 경제성장에 환호했지만대다수의 서민과 노동자들은 좁은 집에 환풍기능이 열악한 곳에서 살았으며수도설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상하수도 이용에서 불편을 겪었다집값에서 좋은 숲과 하천이 있는 곳보단 공장지대와 황무지 쪽에 위치하면서 나쁜 공기와 물을 접하게 되어 환경위생학적으로 불량한 상태가 되었다.


환경정의를 말하려면 우선 최병두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존 롤즈의 철학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에 따른 최소수혜자의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다가난한 자들은 경제적 빈곤으로 교육과 문화적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교육이 되지 않으면 국가경쟁력이 저하되고문화적 혜택이 되지 않으면 인성의 한계성이 온다이런 자들이 정치적 사회적 참여에서 제대로 된 활동을 보일 수 없으며정치적 합의에 따른 국가운영에서 시민들의 자질이 부족하게 된다물론 이 관점은 롤즈가 칸트주의자에서 시작한 것이고칸트를 넘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의거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미 환경적인 불평등을 보고 있었다가난한 자들은 비위생적인 주거공간과 음식으로 병이 들고가혹한 육체노동으로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따라서 이 책에서는 환경과 더불어 인류 불평등적 기점에서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마르크스주의에서 도시기능이 인간을 소외하고 가난한 자들을 계속 외지로 내몰며주거환경정비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연결되는 점까지 말이다환경공학에서 이런 경제적인 정치적인 요소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하지만 사상철학으로 들어가면 환경은 결국 인간의 정의와 칸트가 요구하는 선(, goods)의 가치를 말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영역에서 좋은 환경을 원한다자신의 집 주변에 공장이나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반대를 한다하지만 자신의 그런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환경을 파괴되는 것은 무관심하다심지어 공장 관계자는 조금이라도 비용을 절감하기 폐수와 오수를 무단방류하고대기오염물질과 악취를 여과 없이 내보낸다그 결과 주변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호흡기질환 및 안과질환에 시달리고폐수로 인해 하류에 사는 주민들은 상류에서 공급되는 상수에 대한 불신감이 커진다특히 과거 낙동강페놀사건과 같은 환경오염은 페놀의 화학적 반응으로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낙태될 정도였다.


결국 환경적 처리비용을 두고 기업적 이윤추구는 환경적 공공재원을 소모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환경보건적인 문제까지 확대시켰다환경정의가 왜 정립되어야 하는가그것은 단순히 법과 제도적인 영역을 지나 인간생명과 환경적 기능의 마비로 인한 생활의 위협까지 넘어간 것이다이런 시기에 환경이란 단어는 미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경제발전 앞에 모든 것이 없다고 하는 세태에서 경제민주주의는 이미 21세기가 아니라 <환경갈등과 불평등>에서 언급된 내용이다경제민주화는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내는 것에서 모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투입과 회수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자기 지역에 대규모 공단이 생기면 그 자본의 출처와 투자의 범위 그리고 고용발생과 사후관리방안을 골몰히 생각하기보단 단지 눈앞에 있는 이익에 집착한다대도시에 대규모상점이 입주하면 그 지역의 상권과 문화적 발전이 일어나나기존 골목상권과 더불어 교통체증인구증가에 따른 폐기물증가차량증가에 따른 대기오염 및 소음진동 피해가 일어난다환경이란 것은 처음 경제적 이익에 치중하면 후폭풍으로 다가오는 함정과 같은 존재다눈앞에 신기루처럼 이익의 효과범위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그것을 감당해야할 지역주민이다.


지역주민이 기업과 정부 혹은 환경단체에 지지하는 정도에 따라 그 지역의 환경 분쟁은 새로운 결과를 도출한다하지만 문제는 정부의 입장에서도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와의 갈등이 있다는 점이다그동안 한국사회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중시하다가 점차 지방자치단체에게 업무를 위임했으나업무적인 영역에서 위임했지 권한에 대한 결정권은 중앙정부가 가지고 있다중앙정부의 행정력은 결국 지방자치단체의 기반이 되는 지역주민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공권력을 동원하여 지역주민들의 반대의사를 억지로 무마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노동의 투입이다노동력조차 이제는 인간보단 기계로 대체되고인간은 보조적으로 투입될 뿐이다하지만 노동력의 주요 동력이 인간이든 기계든 그 파괴되는 대상은 언제나 자연이다자연에 대한 환경파괴는 여전히 공공재원으로서 가치를 저하시킨다공동의 재원을 일개 개인이나 업체가 점유하여 개발하는 것은 용이해도 그 이후에 일어난 환경문제에 방관하는 태도도 일부 보이기도 한다환경 분쟁에 대한 해결에서 지역의 빈부격차문화수준학력차이 등이 결국 많은 불평등적 요소를 야기한다그래서 롤즈의 철학에서 보듯이 최소수혜자의 대한 입장배려는 환경정의가 필요한 이유이고환경에 대한 추가적 비용을 부담할 수 없는 자들은 어떻게 하든 환경오염에 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거리에 자동차의 매연이 보도블록 위의 행인에게 덮칠 때아파트 단지에서 떨어진 공단지역에서 악취가 나면 상당히 불쾌해한다심지어 수도관에서 녹슨 물이 나와도 생활에 많은 질적 저하가 일어난다환경피해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평소 환경에 대한 가치나 중요성을 망각한다자신의 편리함만 완성되면 남의 입장을 보지 않기에 환경정의는 매우 윤리적인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하지만 만약 윤리적 조건이 사회적으로 정착되었다면 아직까지 산업재해나 환경오염 피해자가 나올 리가 없다공장 안의 악취매연도 환경오염 중에 하나다환경이란 조건은 우리 인생 그 자체에 존재하고지구 안에 어디라도 존재한다신자유주의에 대한 환경적 정책에서 내가 놀란 점은 환경제국주의다.


기존에 자신들이 이미 다 사용하여 쓸모없는 환경발생 공정을 후진국에 넘겨 그 제조과정에서 나온 상품을 다시 받는 점이나환경오염을 정화하는 기술을 토대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환경산업에 대한 지적이다이들은 교묘히 환경오염을 다른 나라에 떠넘겨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최근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오면서 제3국의 발전을 위협적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많아지고 있다.그들은 19~20세기 산업화 때 오염물질을 이미 지구에 뿌려놓고 이제는 후진국의 발전을 환경오염원인자라 매도하고 있다환경에 대한 국제적인 분쟁은 여전하고우리도 중국에서 발생하는 황사나연안에 불법으로 투기되는 폐기물도 문제다.


환경은 단순히 수질대기토양만이 아니라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식량도 포함된다청정지역의 확보는 식량조달의 기본이다동해 권에서 일본서해 권에서 중국 어민과 마찰을 맺으면서 식량안보에서 환경문제가 기반 되는 것이다오염된 곳에서는 생물체가 살 수 없고인간이 섭취할 수 있는 식량이 나올 수가 없다이런 실태에서 우리는 명분이란 것을 찾아야 하고명분을 위해서는 논리와 사유가 필요하다환경하는데 철학과 사상이 필요한 이유는 더 이상 환경은 인간에게 제외될 수 없는 영역으로 온 점이다환경정의가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공상적인 망상이 아니다지금 우리 삶을 지탱해야할 가치와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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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8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28 14:29   좋아요 0 | URL
허허허

2015-07-28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진실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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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에 많이 듣고 부르던 노래 중 가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이다통일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대부분 군에를 복무한다군대복무가 문제인 이유는 사실 많은 젊은이를 2년 내외의 시간을 무상으로 보내게 하는 것과 더불어 그들을 위험한 곳에 보내야 하는 점이다나는 개인적으로 군대는 있어야 하고남성이 군에 가는 것은 인정한다단순히 남북한 휴전만이 아니라 군사력은 단순히 안보와 평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외교경제 등 다양한 영역으로 판단해야 한다단지 그것을 위해 많은 젊은 청춘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현실이 단지 안타깝다매년 군 안에서 훈련에 의한 사고로 사망 내지 부상당하는 군인이 발생되고구시대의 문물을 청산되지 못해 구타 및 가혹행위로 의문사 내지 자살그리고 극단적인 살인행위도 등장한다인간의 이율배반적인 게 군대는 필요한데 내 자식은 안 되라는 심정을 가진 부모는 많을 것이다그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어찌 해야 할 지 모른다.

 

남북의 긴장감이 군대 내에서 폭발하면 어찌 되는가예전에 북한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수많은 도발과 위기를 주었다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대응하는 것이 바른 것이며그 위기를 넘어서서 다시 안정을 찾는 것이 옳다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부터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면 결과가 있고결과가 있다면 성과도 있어야 한다계속 되는 긴장관계에서 같은 일이 반복된다영화 <연평해전개봉처럼분명 해군장병의 죽음은 숭고하고 안타까우나정작 중요한 일들은 다시는 그런 아픈 일들이 없어야 할 것이고그 원인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전투가 일어나면 국민 입장에서는 군인이 사망하나군인의 가족에겐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잃어버리게 된다그 일로 다들 해군과 해병대를 지원한다고 해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서 너울거리면 집에 계시는 부모님과 학교친구들이 그리워진다.

 

군대서 내가 죽으면 그 본인은 거기서 끝이나 가족들은 영원한 고통과 분노를 안고 살아야만 한다군인도 사람이고군인 이전에 가족이 있는 한국인이다전쟁에 대한 억제는 단순히 연평해전과 서해교전만의 문제만이 아니다우리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고이런 불상사가 터지면 외국자본도 빠져나가 경제적으로 좋지 않다진짜 전반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냉전시대를 지나 이제 국제적으로 고립된 국가는 몇 개가 되지 않는다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고 했던 미국조차도 쿠바와 직항 항공노선을 개설했다게다가 쿠바와 사회주의 영향이 남은 국가조차도 한국과 수교를 맺어 많은 한국인이 그곳에 가서 관광과 경제활동을 한다. 21세기는 이념으로 대립되는 세상이 아니라 경제와 문화의 교역으로 살아가는 세상이다그런 조건은 바로 평화와 소통이다.

 

북한은 외국처럼 우리가 영어일어중국어를 안 배워도 말이 통하는 국가다국가라고 헌법적으로 인정할 수 없겠지만이미 국제법이나 외교적으로 국가로서 활동하는 조직이다항상 북한의 도발과 이데올로기적인 정의노선은 우리 사회의 모태가 되었다반공노선이라 하여 북한 사회주의체제를 부정했지만막상 사회주의 관련 도서를 비교해도 북한은 사회주의도 아니고공산당이 북한을 지배해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다한국에 자유민주주의라고 하여 한국인 대부분이 자국의 헌법을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드물다게다가 자유주의철학까지 연구했다는 사람 역시 드물다한국 플라톤 철학 대가인 박종현 교수가 번역 저술한 <에우티프론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을 읽다보면 중우주의가 등장한다박종현 교수의 해설에서 중우주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물론 1970년대 교수로 있으면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아는 그분이 그런 말을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모순으로 가득하나그가 지적한 문제는 확실하다정보의 전달력에서 한국인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눈앞의 문제를 제대로 보고 판단하기 보다는 자기가 알고 싶어 하고그렇게 여기기 바라는 것만 본다내가 언론과 미디어를 경멸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몽타주의 대가들이기 때문이다영화와 범인수사에서 몽타주와 다르게 그들은 영상보다는 글자와 말소리로 왜곡한다일부 문장만 들고 와서 모든 것처럼 확대해석하여 그 내막을 전후관계로 보는 게 아니라 그런 것처럼 꾸민다예를 들어 그렇다고 보더라이렇게 말하더라.” 등등을 말이다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이데올로기 반공주의다.

 

그래서 올바른 정보에 사람들은 찾아보기보단 그저 눈앞의 영상만 바라보고 신문도 몽타주로 꾸며 진실은 은폐한다후에 문제의 몽타주가 거짓말로 들통 나면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나가지만이미 몽타주를 접하던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자신의 어리석음 멍청함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 믿음을 밀고 간다인간의 정의는 이성의 논리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인 정체성이 기반 된다이성의 사고로 접하지 않기에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신념에 복종한다아마 전에 대선과 총선에서 이게 가장 잘 먹힌 일이 있었다. NLL, 북한한계선에서 참여정부에서 넘겨주었는지 안 했는지가 관건이 된 적이 있었다.

 

일단 나는 당시 이런 생각을 했다정말 참여정부에서 한국의 영토 내지 영해를 주려고 했을까다음 생각으로 만일 사실이라면 왜 저것을 일반 국회의원이 말하는 것일까기본적으로 군대에 복무한 사람에게 군사보안은 제한되어 있다장교들도 2급 보안에만 겨우 통제적으로 접근하고, 1급 이상은 극히 극소수 사람에게만 열람이 가능하다군사보안 1급은 국가에 아주 치명적인 위기를 줄 수 있는 정보다치명적인 안보문제를 아무렇게나 떠벌리는 국회의원그리고 그것을 들은 후에 대선 직접 거리에서 연설하는 현재의 국회의원보안법 위반이다군사보안을 누설하는 자는 국가에 대한 반역죄다.

 

그런데 그 반역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사실 그 발언이 한국이 북한에게 NLL을 주려한 게 아니라 그 수역을 공동어로로 삼아 군사적인 관계에서 갈등을 이완하고어민의 이익을 증대하고 국가경제를 발전하자는 논의였다그 후에 그 발언을 한 현재의 국회의원은 찌라시를 봤다고 한다찌라시종이 쪼가리어디 길거리에 뒹굴고 있는 종이라니 무슨 장난인가논객이 나와 토론을 하는데보수논객이 이겼다그런데 그가 제시한 근거가 사실 거짓말이고그 거짓말로 드러나자 자신의 논파를 부정하면 명예훼손이라 한 일화가 있었다그런데 그런 거짓말이 드러나도 아직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인간의 뇌가 이성적이란 사실보다 단지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란 점이 강한 점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외교 갈등에서 왜 이런 요소가 중요한가북한에 대한 관점에서 통일은 다들 필요하다고 한다그러나 방법론적인 요소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북한의 내부붕괴로 인해 쿠데타 내지 혁명이 일어나면 그 일에 대한 감당을 누가 하는가한국정부와 한국 국민들이다세금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화적인 대립이 일어난다일단 이데올로기에 반대되는 세력을 악으로 규정하여 응징만 하면 정의실현이란 아주 단순히 만화책 내용을 주장하고 있으니 대안의 영역이 없는 게 유감이다통일이 되려면 방법은 북한을 잡아먹든지 아니면 결합을 하는 것이다전자의 문제는 전쟁과 쿠데타로 일어나야 하므로만약 전쟁이나 소요사태로 군사충돌이 일어나면 무슨 재앙이 생기냐는 것이다.

 

북한은 핵실험을 하고핵무기를 보유하려 한다핵이 터지면 적어도 반경 50~100는 초토화다핵이 내린 자리에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없다심지어 동식물 생태계와 수질 및 대기권과 같은 자연공간도 파괴된다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방사능공화국이 되고한국인은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이나 망명을 가야 한다핵이 떨어지면 핵만이 아니다지하에 매설된 기름보관소나 병원의 방사능기계 수많은 위험인자들이 파괴되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주유소 하나가 폭발하면 그 주변을 초토화하는데핵폭발은 광역적으로 반응이 일어난다북한의 외교가 단순히 통일문제만이 아니라 핵무기를 해제하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길가에서 북한의 핵문제를 두고 시위하고 분노해도 북한 독재자의 귓구멍에 들어가지도 않고쓸데없는 일이다.

 

그럴 것이라면 외교적으로 국가가 해결하여 비핵화를 도모하여 동북아시아 평화를 보장해야 하나막상 현실은 이상하게 돌아간다북한의 경제압박이 북한정권을 위기에 내몰 것이라 보나오히려 테러를 일으키거나 국제적으로 문제가 많은 국가에 무기를 팔아먹고 있으니 더 역효과를 내고 있다외교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우리가 손해 보는 점은 분명 많다그런데 북한에서 계속 핵무기와 장거리미사일 실험을 하고전쟁준비만 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연평도 폭격사건에서 사람이 죽고마을주민이 불안에 치를 떨었다방아쇠만 걸면 수 초 안에 무기가 발사되어 우리 땅을 타격하는데그 곳에 사는 주민들은 매일 불안해 떨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화와 소통만이 해결인데지금의 모습은 오히려 적으로 간주하여 국민들에게 불안을 유도하고그들을 적대하는 게 정의라고 말한다면 그 갈등은 계속 지속된다전쟁의 고통과 분노 그로 인해 겪은 피해는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그것을 직접 겪거나 간접적으로 겪은 자들 역시 피해자다하지만 그것에 얽매일 경우 우리는 그 시대의 고통을 뛰어넘지 못한다남북관계는 단순히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문제다외교의 관점은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다자국의 이익과 관련하여 일본의 우경화와 독도 문제게다가 중국과 대만의 영토문제는 우리나라에 불화의 씨를 주고 있다.

 

한국은 자국에서 자원이 생산되지 않고, 2차적 가공으로 원료를 상품으로 만들어야 교역이 가능하다문화적으로 우수성이 있지만그 문화개발과 보존이 취약하더라도 국제관광교류가 활발하다한국이 북한과의 외교문제로 갈등을 빚으면 우리에겐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고경제적인 문제가 발생된다식량과 원자재를 수익에 의존하는 점과 특히 식량안보가 약한 한국에서 평화문제는 한국인들의 생존전략으로 이어진다전쟁이 일어나면 안 되고일어난다고 해도 장기전으로 가면 안 된다과거의 무기는 총칼로 이루어진 백병전이지만지금은 미사일과 핵으로 이루어진 첨단전이다무기의 위력이 강력해지면 군사시설이 아닌 민간인들의 학살이 대규모로 일어난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북외교는 필수적이다그러나 현실에서 그 문제를 두고 정말 100% 있는 것만 보여준 게 아니라 왜곡 및 오류로서 전달된다면 심각한 상황이다. 2013년에 발간된 <노무현 김정일의 246>은 바로 그런 문제를 지적하여 나온 도서다주지 않았는데도 NLL를 준 것을 허위로 폭로하고 군사기밀을 들춘 인간들을 보고그것을 아직도 믿는 사람들을 볼 때 한국의 미래는 과연 청신호인가분명 말하지만최근에 일어난 폭격이나 해전에서는 비교적 근대적인 방법으로 전투가 발생되었다만약 최신현대무기로 전투가 일어나면 그 피해 범위를 예상조차 할 수 없다전쟁에서 이겨도 과연 승리한 게 될 것인가북한의 도발은 아무리 군사적으로 경계해도 계속 일어난다.

 

대안의 대화와 소통이나그 소통에서 어느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는 게 바르나현실은 손보단 서로 칼날 뒷면을 보여주고 있다앞면으로 바뀌는 순간피를 피로 씻는 아비규환만 볼 것이다. NLL와 관련된 진실공방에서 거짓으로 만든 게 사실이 되는 순간사실인 진실은 밝히기 어렵다거짓은 처음부터 거짓이므로 자신의 의견이 사살로 만들기 위해 그럴듯하게 꾸며댄다오해를 푸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인간은 항상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그 이외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게다가 논리성에서 계산적인 요소를 빼고 감정적으로 대한다면 현실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을 채 악화될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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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7-2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좋군요. 이제는 ( 우리에게는 이적 단체이긴하지만) 한계를 인식하고 국가 대 국가`라는 차원에서 접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뭐가 진척이 되든 하지.....

만화애니비평 2015-07-27 14:30   좋아요 0 | URL
같은 방법을 거의 60년 동안 써먹는데 답이 없다면, 방법을 바꾸어야죠. 북한에 있는 사람들을 동포들이라 하여 빈곤과 억압에 당한다고 하지만, 역으로 본다면

한국에서 예비군과 현역이 거의 전체인구의 1/4 정도 된다고 친다면
북한은 현역을 남녀구분 없이 예비군 나이도 우리보다 기니
전반적으로 군사국가죠. 주체와 대상이 분리로 보는 것이니 뭐
결론적으로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AgalmA 2015-07-27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권 유지하려고 도발을 부탁까지 하는 실상이니 더 한숨이 나죠... 국정원은 국내 정치간섭에 혈안이 돼있지 않나....
NLL 문서를 왜 흔드는지 보지 않고 그 내용만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태도들도 많이 고쳐야 할 테고요.

만화애니비평 2015-07-27 20:00   좋아요 0 | URL
총풍을 보면 참 답이 없죠..

qualia 2015-07-2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한민족은 망할 가능성이 큽니다. 단순한 한탄조의 말이 아닙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21세기 세계 역사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현재의 한국/한민족/한반도는 식민지 전락의 전철을 그대로 되밟아가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한국/한민족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나라/민족이 있을까요? 하나의 민족이 두 나라로 갈라져 서로 상대방을 제1의 주적으로 명시하고 극한대결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남한 쪽은 전라부족과 경상부족으로 분열돼, 정권쟁탈전 때마다 부족전쟁에 준하는 지역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분오열된 나라/민족이 망하지 않으면 지구의 역사가 진행을 멈출 것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29 08:51   좋아요 0 | URL
어느 당은 일본자본 유입에 결국 우리가 그쪽에 먹힐 때 다시 과거의 영광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건지.
분노와 증오를 유도하여 다른 문제점을 가리는 실태에서 그저 망해가는 것이 아니라 멸망할 것 같은 한국인의 모습에 한숨이 나옵니다.
중국과 일본은 억지로 역사를 부풀리고 신화를 역사화하는데, 단군역사마저 허구라고 하는 주류사학이라니...답이 없네요
 

도시라는 이름으로 강연을 들을 때 내가 생각난 것은 국내 헤비메탈 그룹 블랙홀 5집 앨범 <City Life Story>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나온 앨범으로 대표적인 곡은 <바람을 타고>란 곡이었다. 뮤직비디오가 막 떠오르던 시기, 많은 대중가수들은 자신의 곡을 인기곡을 포장하기 위해 뮤직비디오에 많은 자금을 투자했다. 그러나 '바람을 타고'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 어느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 “저요? 낮에 일하죠. 가스배달해요. 저는 음식점에서 일해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아무것도 부럽지 않게요. 바람처럼 달리는 거죠.”

 

도시라는 공간은 과연 어떤 공간인가? 블랙홀 5집 그 '바람을 타고'를 듣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옆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존재들을 보게 된다. 길가에 보면 되도 않은 양아치들이 경적소리 내고, 억지로 머플러를 개조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어두운 거리를 달리는 사람들을 본다. 물론 나라도 달린다.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 대신 차로서 달린다. 대신 내 차는 일반적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오토매틱 기어가 아니라 수동 기어로 달린다. 달려도 내 손과 발이 끊임없이 쉴 새 없이 차를 조작한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 어찌 보면 내가 감각적으로 공기의 저항을 맞으며 차가운 도로 위를 달리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는 행위다. 단지 그 행위가 '바람을 타고'에서는 오토바이를 타는 유저다. 단지 그들은 멋진 차를 몰거나 좋은 옷을 입는 게 아니다. 음식점에서 배달가거나 가스통을 맺고 달리는 바이크족, 그들은 현실에서 보자면 소외된 계층이고, 그들 나름대로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을 한다. 하지만 자유롭게 달린다는 그 솔직한 말은 나는 살아있다 라고 말한다.

 

비단 '바람을 타고'만이 아니다. '앵벌이 합장' 같은 경우, 지하철에서 거주하는 거지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새벽의 DJ'는 어두운 밤과 새벽에 고독에 지친 인간이 기대는 것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DJ의 목소리다. 아마 소통이 없는 냉혹한 도시 공간에서 인간은 고독과 고립이란 감정에 좌절한다. 마지막 곡은 노래가 아니라 기타 반주곡 ‘비가 오는 도시 위에는 달의 강이 흐른다’로 마무리 된다. 블랙홀은 시나위와 부활하고 더불어 한국 전통메탈의 선구자다. 그들이 연주하는 앨범에서 항상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과 아픔을 기타와 목소리로 토해내었다. 나이가 먹어도 긴 생머리를 흔드는 그들에게 우리 사회란 그들에게 여전히 아픔의 공간이다.

 

비아트 강의 3번째를 정리하면서 공간이란 시각적 정보를 블랙홀의 음악이란 청각적 정보를 대비한 이유는 인간의 감정은 시각보다 청각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물론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노래한 4집 수록곡 ‘마지막 일기’는 지금도 들어도 애절하다. 한국이란 사회 그리고 그 한국에서 도시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비극은 치유되지 못한 채 계속 이어져간다. 인간의 기록인 역사 안에서 공간은 계속 그 곳에 존재하는 고정식이나, 사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하는 존재다. 영원성과 이동성이 같이 공유하는 공간이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블랙홀의 음악을 내가 화두로 던진 이유는 우리가 바라보는 도시라는 공간은 언제나 세련되고 활기차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장소로 기억된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강의 3번째에서 제시한 주제, “예술과 장소 그리고 공간적 실천”과 적합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완성은 자연의 파괴고, 노동의 착취의 결과다. 노동을 하고 그것을 쌓아올린 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놓았는데도 그것의 주인으로서 행세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노동력만 제공한 것에서 끝나버린 사회적 소외자이다. 블랙홀 5집 ‘바람을 타고’에서 음식점에서 일하는 그들은 우리 도시에서 흔히 말하는 중국집의 철가방일 수 있고, 피자배달도 될 수 있다. 가스배달은 우리 가정에서 사용하는 프로판가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했지만, 우리 사회가 각종 변화가 일어난다. 혁명이든 전쟁이든 뭐든지 말이다.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그 사회의 혼돈을 보겠지만, 그 혼돈조차 유지되려면 늘 누군가의 노동이 필요하다. 겨울이라면 난방시설을 이용해야 하고, 계절을 넘어 하루에 식사를 꾸준히 해야 한다. 나라의 기능이 마비되거나 없어지거나 또는 사라져서 새로 탄생해도 사람들의 입속에 빵은 항상 들어가야 한다. 바로 그것을 제공하는 것은 그 누군가의 노동이다. 우리는 노동을 제공하여 살아가고 노동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노동으로 돌아가는 공간, 그게 바로 도시다.

 

도시가 아닌 농촌과 어촌도 노동은 필요하나, 그 노동의 성과물은 그 나라 정치체제가 구시대적인 발상이 아닌 경우 그 노동을 실행하는 자에게 돌아간다. 노동자와 노동의 산물이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라는 점이다. 농경산업과 그리고 농경산업 이전의 수렵채취산업 시대에는 인간의 노동이 곧 실행자에게 부여된다. 하는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 도시의 노동은 자기가 하는 만큼 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임금의 형태로 돌아온다. 강의주제에서 노동과 임금체계를 말하려던 것은 아니나, 결국 도시라는 공간은 노동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란 점이다. 노동이 가진 의미는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그 사회의 종속적 존재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구조적인 요소다.

 

강의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바로 시간의 개념이었다. 농경산업에서 농부들은 공간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찾아낸다. 비가 오면 집에서 쉬고, 날이 밝으면 논에 나가 어두워지면 집에 와서 잠을 잔다. 인간에게 시간이란 개념은 자연이란 공간에서 시작된다. 자연의 변화가 곧 인간의 삶으로 연결되었기에 인간은 자연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자연적 인간이란 숲 속의 동물처럼 미개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그 누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도시의 발전과 농촌의 파괴 그리고 시간의 개념, 이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조건이었다. 도시의 이야기에서 강의자가 나누어준 자료에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와 앙리 르페브르가 등장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문화비평가로서 길을 걸으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의 학문을 벗어날 수 없다. 특히 공간에서 마르크스주의에서 보는 관점은 인간의 노동이 집중화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가둘 수 있는 주거가 필요했고, 그 공간에서 거주하는 인간은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들 역시 공간이란 점이다. 인간의 존재가 하나의 목적과 대상이 아니라 물적 조건을 성립시키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변모된 점이다. 그것을 확실하게 만든 것은 바로 시간이란 개념이다.

 

도시는 시간이란 개념으로 움직이고, 그것이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시간은 자연적 흐름에 의해 계산되는 게 아니라, 시계의 초침과 분침으로 구분되게 된 점이다. 도시는 시간이 곧 재산이고 법칙이다. 시간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측정하게 되는 척도가 된다. 도시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생계수단을 위해 일을 한다. 일을 하는 것은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노동은 시간으로 측정된다. 시간의 흐름에서 일정시간에서 생산된 것은 곧 자신의 임금으로 가겠지만, 그 임금 이상으로 고용주에게 큰 이익이 돌아간다.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란 도시에서 곧 자본을 움직이는 수단이 된다.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자신에 대한 재생산이 필요하다. 생물학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음식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의상과 주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으니 취미생활과 문화생활이 생긴다. 인간의 시간은 그 누구에게 공평하게 24시간이 주어지겠지만, 인간은 영원불멸로 24시간을 사용할 수 없다. 일정 수명이 되면 사망하고, 사망한 자를 대신하여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 도시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유지는 인간의 재생산으로부터 시작되어 생산되는 것이다. 인간이 생산하는 것은 계속 도시의 팽창으로 이어지고, 그 팽창은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빈부격차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된다.

 

강의하는 분과 강의 자료를 보면 도시에 대한 언급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루소가 생각났다. 루소의 <에밀>을 읽으면 농촌생활이 인간의 심신에 좋고, 도시는 온갖 죄와 병으로 가득하며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공간인 점을 묘사한다. 인간이 태어난 이상 공동체 이상으로 사회라는 큰 조직에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인 점을 감안하여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저술하여 도시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가치관을 제시했다. 그러나 적어도 루소의 사상을 공부하면 루소는 도시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루소가 가장 잘 지적한 말은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는 인간이라고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인간이고,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기 어려우니 그럴지도 모르나, 가장 인간에게 필요한 게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의 가치는 가장 저렴했다라고 말한다. 가장 필요한 것은 가장 소모성이 강하며, 밀과 치즈처럼 일상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소모되어야 하는 점에서 인간의 운명은 비참한 수레바퀴에 영원히 맴도는 비극에 처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가 바라보던 도시는 매우 비참했다.

 

“산업이나 기술이 보급되고 번영됨에 따라 남의 멸시를 받으며 사치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조세를 짊어지게 되고, 더구나 노동과 기아사이에서 일생을 보내게끔 되어 있는 농민은 논밭을 버리고, 본디 그가 그곳에 가지고 가야 할 빵을 구하러 도회지로 간다. 도회지가 백성의 우둔한 눈을 경탄케 하면 할수록 논밭은 버림을 받고, 토지는 황폐해지며 한길에는 불행한 시민들이 우글대는 모습을 보고 한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민들은 거지나 도둑으로 변하여 언젠가는 수레로 찢어 죽이는 극형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시의 발전은 과학기술과 산업 활동에 의한 산물이다. 그게 바로 가난한 자들의 고통으로 이룩한 신기루 같은 현실이다. 참고로 루소의 사상에 대한 연구에서 그의 탄생 200주년(1912년)에 루소가 칸트와의 관계성을 놓고 봤지만, 250주년(1962년)에는 루소를 마르크스와 놓고 연구했다. 루소와 마르크스의 관계를 놓고 보면 관계성이 의아할 줄 모르겠지만,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는 루소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로베스피에르의 아버지라고 한다. 몇 년 전에 타계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역사와 흐름을 설명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설명에서 마르크스의 시점은 헤겔 좌파라고 하나, 막상 마르크스는 리카도학파 좌파와 더불어 자코뱅파 좌파로부터 이어진 것이고, 자코뱅파에서 대부분 인물들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에게 영향을 받지만, 그 안에서 최고인 자는 루소다. 루소의 사상을 토대로 엥겔스 편을 보면, 엥겔스는 영국 맨체스터라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엥겔스는 영국 신흥 공업도시인 맨체스터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비참한 현실을 정리할 때 이미 루소의 사상을 상당히 인용한 점이다. 도시라는 공간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장소는 물질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면서 한편으로 이념이란 시스템이 우리의 무의식마저 지배한다.

 

게다가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관념에 의해 존재하지만,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공간이란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시간착오라는 단어와 더불어 이번에 새로 알게 된 공간착오가 우리 사회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내가 가장 짜증나는 것은 거리에 나부기는 깃발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깃발이 넘실거리는데, 이미 그 당시 새마을운동은 도시화를 위해 기존 낙후된 마을을 산업화의 영향으로 바꾸자는 슬로건이다. 대도시를 비롯한 많은 국토가 이미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채워져 있고, 마천루의 도시는 바벨탑처럼 솟아올라 인간의 욕망은 이미 신을 초월했을지 모른다.

 

그런 도시에서 새마을운동 깃발이 매우 넓은 대로 양쪽 깃발꽂이에 몇 ㎞나 계속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공간착오라는 개념이 바로 저런 것을 알 수 있다. 대도시화된 현실에서 더 이상 1970년대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지만, 아직도 살아가기 바라는 점이다. 지금은 산업화로 인해 파괴된 자연을 복원하고,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여 건강한 자연생태조건이 도시와 어울리는 것이 도시계획의 목표다. 그런 현대적인 도시계획과 다르게 전혀 다른 가치와 구시대적 산물이 여전히 도시를 아우르는 점이다. 문제는 그런 가치들은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단 계몽주의가 아닌 계몽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점이다.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도시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에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법칙이 아니라 도시가 그래던 것처럼 그 사회의 관습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는 당연히 이래야 해라는 가치관마저 도시의 이념에 만들어진 것이다. 도시는 많은 인간들이 상주하고 있고, 도시는 사회적 공간으로 작용한다. 사회적 공간에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눈에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은 약속에 얽매인다. 공간은 인간의 이성과 더불어 무의식에도 작용한다. 가령 부산이란 도시는 1950년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내려와 만들어진 도시다. 그 이전인 일제강점기에는 경제수탈을 위한 병참기지로 활용되었다.

 

서울과 부산을 이어주는 경부선, 부산항과 영도대교 역시 일본이 경제수탈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공간적 재현이 바로 그들의 이익에 연결되었다. 그러나 경부선을 한국에서 가장 이용이 많은 철도구간이고, 부산항은 많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며, 영도대교는 많은 관광객들이 다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온다. 친일적인 사고에서 일본이 만들어낸 근대화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대화가 이룬 성과가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자수탈로 이어졌고, 이익을 본 자는 극히 일부였고, 그들은 일제의 억압에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올라가면 서울이란 대도시는 조선개국 태조 이성계가 도읍으로 정하여 한강과 넓은 평지를 도시적 기능을 살려 왕조로 이어갔다. 서울에 남아있는 지명이나 행정구역은 현대적인 요소가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기능과 지명에 의해 남아진 것이다. 그래서 도시는 움직일 수 없는 고정식이라도 그 형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연속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그 기능은 강연에서 말하듯 공간적 재현일 수 있고, 혹은 재현적 공간일 수 있다.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합리적 공간이 존재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공간도 있다. 부산이란 도시는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도시로 발전하고, 유명한 국제시장 역시 피난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모여든 곳이 그런 명소로 된 것이다.

 

루소가 바라본 파리라는 도시는 처음에 화려한 궁전과 귀족들이 넘치는 아름다운 곳으로 여겼지만, 그가 본 것은 가난한 거지들이 모여 빈민촌이 생겼고, 몸을 파는 여자들이 모인 창녀촌도 있었다. 그들은 결코 원하지 않은 현재의 삶을 살았고, 그것이 공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재현적 공간은 이렇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가들이 활동하여 그들은 자연이란 공간을 보존했다. 도시의 팽창은 공유지를 없애고 사유지로 전환되며, 가난한 자들은 계속 멀리 도시 안에서 외부로 내쫓고, 외부의 공간마저 도시가 점유하기 시작한다.

 

16세기 양모 산업이 영국에서 발전하면서 농민들이 농지를 잃고 도시로 흘러 빈민촌을 형성하고, 빈민들은 거지가 되어 구걸하다 국가에 의해 처벌을 받고, 심지어는 사형을 당했다. 도시에서 바로 자본의 차이에 따라 계급이 형성된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 조금 가진 자,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들까지 말이다. 블랙홀 5집의 ‘바람을 타고’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자유란 물질적인 자본이 아니라 단지 차가운 밤하늘을 가르는 바람이었다. ‘바람을 타고’는 유일하게 그들이 도시에서 가지고 있는 자유다.

 

삶에 대한 애착에서 유일한 해방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공간에서 공기의 저항이란 자연적 조건이다. 도시는 인간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부분에서 보여준 사진이 인상이 깊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나 그 작가는 자신의 아내가 국경 없는 의사회 일원이었고, 아내의 해외봉사를 가면서 그도 따라간다. 그곳에 본 가난한 도시빈민들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었다. 컬러사진 아닌 빛과 조명을 왜곡시킨 흑백사진에서 비참한 그들의 모습은 마치 환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미지의 인간처럼 보였다. 그 중에 인상 깊은 사진 2매가 있다. 광산에서 채굴하는 노동자들이 개미떼처럼 모여 있는 것, 고층건물을 짓기 위해 안전장치 없이 골조비계를 타고 올라가는 나이 어린 노동자의 모습이다.

 

그들의 삶에는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들의 입장을 너무 비참하더라도 불쌍하게 봐달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삶의 기억과 경험은 많은 것을 잡아 댕긴다. 건축은 도시의 승리를 상징하는 물질이다. 건축의 존재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어진 사실은 은폐한다. 회사 다닐 때 옆에 같이 근무하던 동료의 아버지가 어느 대단지 고급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추락하여 사망했다. 그 동료가 상주가 되어 장례식을 지키고 있을 때 나 역시 조문하러 갔다. 그리고 장례식을 마치고, 복귀하여 그 사고를 대해 물어보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런 현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식으로 대답했다. 도시의 승리는 과연 위대했다. 인간의 목숨을 잃어도 그런 비극은 어디서나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현실이 틀려도 인간들은 문제의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나와는 무관하다는 식이다. 도시의 인간은 공동체적인 삶이 아니라 각자가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 소개된 사진 중에 마치 기숙사처럼 보이는 건물에 많은 노동자들이 창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들은 원래 시골에 올라온 사람들이고, 시골에 가면 저녁에 많은 가족과 친구들이 한 방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눈다.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지만, 아무도 자신의 옆에 있지 않았다. 단절에 의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고립되어 고독한 도시를 느끼는 것이다. 아파트 주거환경에서 아파트는 과거 부의 상징이었으나, 아파트는 인간을 분리된 존재로 만들고, 숫자로 매겨버린다. 아파트는 그 사람의 생활수준과 봉급 그리고 계급까지 구분한다. 이런 도시의 모습은 우리 일상생활이 되어 그 자체가 당연성이 되었다. 참고적으로 앙리 르페브르는 프랑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그룹과 상당히 친밀했다. 그 중에 라울 바네겜이란 <일상생활의 혁명>의 저자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동기가 바로 앙리 르페브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골목, 거기서는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커피와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의 터전이었다. 도시계획의 목적은 도시정비와 발전이나, 또 한편으로 가난한 자들을 멀리 내쫓는 것이다. 현대의 인클로저 현상이 도시계획과 많이 연관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정비를 하게 되면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여 좋겠지만, 막상 그 보상금으로 다른 곳에 집을 얻으려도 부족하고, 그 자리에 다시 올라간 집에 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도시의 확장은 계속 빈민을 몰아내는 것이다. 빈민들이 모인 골목에는 다양한 상점이 들어서고 그들의 자리를 없애는 대신 백화점이 들어선다. 골목상권을 지키자 그리고 합리적 소비생활을 하자고 슬로건을 외치는 현실이나, 막상 그런 게 불가능한 것은 도시의 형태가 이미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공간의 배치에서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가는 것이 당연하고, 교통의 흐름을 이용하여 직장과 학교,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그 공간을 누가 배치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생활환경은 크게 변한다. 예술의 역할은 바로 그 공간성을 어떻게 보고 설정할 것인가이다. 예술은 시각적 정보로서 많이 드러낸다. 음악은 재생장치가 없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각적인 정보는 그 자리를 메우는 공간이 된다. 인간 개인 자신의 삶에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란 어렵다. 하지만 그 자신의 의지와 목적을 이룰 수 없더라도 그 가치조차 가질 수 없다면 그 세상은 매우 따분하고 지루할 것이다. 지루한 세상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 권태만 존재한다. 물론 그 권태로움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인간들은 영원한 방관자 spectator가 되어 수동적인 인생을 살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로서 충실하나 그 충실함이 여실할수록 권태의 지배만 받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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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7-1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동안 전 제가 청각보다는 시각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공감각적인 거였네요. 내용이 제겐 좀 어려워 범접하기 힘들지만 생각을 해볼 단초를 제공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벅~(__)

만화애니비평 2015-07-20 10:0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다음에 이햐가 쉽도록 작성해야겠네요

양철나무꾼 2015-07-20 10:14   좋아요 0 | URL
아뇨~, 충분히 이해하기 쉽도록 잘 써주신 좋은 글인데, 다만 제가 그동안 이쪽으로 생각이 고착되어 있어 어렵게 느껴졌나 봅니다. 몸과 마음뿐 아니라 생각도 유연하게 해야겠다 다짐을 해봅니다, 불끈~!

AgalmA 2015-07-20 0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본문 중 말씀하신 사진 작가는 세바스티앙 살가도로 추정됩니다. 말씀하신 사진은 <workers>에 수록되어 있을 거고요. 살가도가 난민과 빈민들 사진 찍다가 문명에 대해 낙담하고 실의에 빠져서 사진 찍기를 포기했었죠. 그리고 다시 재기하여 환경 운동과 함께 그런 사진으로 사람들에게 뜻을 전달하고 있죠.

만화애니비평 2015-07-20 08:51   좋아요 1 | URL
세바스티앙 살가도로

맞네요. 검색하니 그 작가입니다. 환경운동가를 하는 것조차도 강의에서 들었습니다.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참 부끄러워지는군요.

마립간 2015-07-25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에 만화애니비평 님의 댓글을 인용했습니다. 맥락상 왜곡이 있다면 댓글로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7-25 10:00   좋아요 0 | URL
특별히 문제없어요. 저 생각은 저나 신해철씨나 많은 분들이 여기는 부분이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