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쇠퇴했습니다 8 - J Novel
다나카 로미오 지음, 김경훈 옮김, 토베 스나호 그림 / 서울문화사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다나카 로미오의 필력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8번째 시리즈,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7권 이후의 녹나무 마을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 상황에서 보는 현실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주인공의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 로봇이 마을을 초토화하는 바람에 녹나무마을은 점차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마을이 황폐해졌기 때문에도 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버드란트 러셀이란 영국 철학자는 인간에게 가장 즐거울 때는 바로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보통 우리 일상생활에서 흥분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성적인 욕망을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성적욕망을 위해 새롭게 시도하는 각종 행위들은 흥분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흥분은 한계점이 있다. 성적인 에너지인 리비도는 인간이 항상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도 욕망의 분출에서 욕구의 한계로 만족하면 그 다음 욕망을 느낄 때까지 인터벌이 존재하는 것이다.

 

식욕, 수면욕, 성욕과 같은 동물적 기능은 인간에게 한계성을 준다. 밥을 먹는 양도 어느 정도 한도가 있고, 잠을 계속 자면 어느 순간 불면증까지 이어진다. 성욕은 과도한 체력소모로 충분한 휴식과 영양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흥분이 왜 동물적 요건으로 보는 것이 한계라는 점은 도출되었다. 인간에게 육체적인 흥분은 언제나 그 한계가 있기에 결국에 이와 다른 정신적 흥분이 중요한 것이다. 인간생활사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문제 되는 것은 바로 게임이다. 게임은 인간에게 여가생활과 동시에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지만, 한편으로 지나친 중독은 일상생활에 좀을 먹게 만든다.

 

게임중독에 빠지는 이유는 게임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계속 흥분을 하기 때문이다. 뇌에서 전해오는 화학물질이 눈에 보이는 게임영상에 의해 계속 생성된다. 뇌에 작용하는 화학물질로 인해 인간은 극단적인 흥분을 느낀다. 게임을 하거나 혹은 거리에서 운전할 때 주변 차량과 레이싱을 하려는 상황에서 흥분을 느낀다. 인간에게 흥분은 육체적인 조건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영역에 가까운 곳이라 볼 수 있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8권에서는 이런 인간들의 정신적인 흥분을 잘 보여준다. 물론 작가의 시나리오에서는 마을의 재건을 고민하는 조정관 주인공의 모습에서 보이나, 그 주변은 분명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것이라면 무엇인가에서 러셀의 말을 인용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이 즐거울 때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 자신의 자아실현에서 인정받는 것이 사회적 인정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이다. 그 답은 바로 할아버지의 선택이다. 만물박사이며, 유엔 업무담당관 중에서 가장 총명한 그는 사실 영락없는 모험탐락가다. 사냥을 좋아하고, 미지의 유적지를 가는 것도 좋아하며, 특히 골동품(특히 무기들)을 모우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총을 사무실에 걸어놓고 사격연습을 하는 박사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도전정신이 빛이 난다. 과연 그것은 8권에서 어린 시절 아주 말썽꾸러기로 살아갈 때 입었던 알로하셔츠를 거치고 우주여행 모험에 참여한다. 솔직히 작품배경이 의상과 건축형태를 보자면 19세기 정도 보이나, 실제적으로 30세기에 근접한 쇠퇴하는 인류이다. 지금의 최첨단 기술인 우주비행선이 우리에겐 미래를 열어갈 도구지만, 작품에서는 우주비행선이란 과거에 존재했던 우수한 기술이었다. 마치 우리가 미스터리로 가득한 마야문명을 바라보는 시선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위험한 곳인 것을 알면서 우주비행선을 타고 달에 가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다. 일상생활을 보면 특별한 것이 있을 것도 없고, 마을은 늘 분위기가 시골마을을 보는 것처럼 조용한다. 총기를 손질하며 하루를 보내고, 조정관의 업무를 맡은 손녀에게 일만 주고 딴청 피우는 할아버지에게 새로운 이벤트는 눈에 확 들어오는 찬스다. 게다가 주인공 옆의 조수마저 할아버지와 같이 달에 가고 싶어 한다. 다행히 초대권이 없기에 다행이지 만약 있었으면 상당한 골치로 되었을 것이다. 이게 바로 흥분의 시작이다. 소풍 전날 잠 못 드는 아이처럼 뭔가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은 할아버지나 조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주 성향이 특이한 주인공의 학사동기 Y의 경우 남성끼리 연애하는 BL장르에 빠져있고, 자신의 취미를 살려 주변마을에 사는 소녀들까지 녹나무마을에 이끌어 온다. 마을이 침체된 상태에서 주인공은 그런 망상을 이용하여 마을을 번창 하려 했지만, 의외로 골치를 썩는다. 요정의 힘으로 만들어진 약물로 통해 현실에 존재하는 영상이 투과되는 증강현실을 마을에 도입한다. 우리 일상에서는 가장 좋은 예를 네비게이션이다. 네비게이션에는 아주 먼 곳에 있는 지역까지 화면 위에 지도로 나타낸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 전경을 볼 수 없다.

 

21세기 스마트폰, PC인터넷의 발전은 단순히 가상현실만이 전부가 아니라, 증강현실에도 큰 변화를 준다. 그래서 디바이스가 해킹되면 자신이 가야할 길이 아니라 엉뚱한 길을 찾아 갈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진짜가 아닌 가짜가 오히려 진짜같이 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증강현실을 이용하여 마을을 부흥하려 하나, 그것은 도박에 가까웠다. 임신을 한 여성이 의사도 없어서 애태우는 모습은 정말 골치 아프다. 그런 증강현실은 하나의 게임플레이 어플리케이션처럼 작용하여 어느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해진 루트를 밟아 진행하는 것이다.

 

오락실에서 비트 마니아처럼 박자에 맞추어 키보드를 누르면 good & bad가 뜬다. 게임이 아닌 분야에 마치 게임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라 한다. 녹나무마을을 융성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의욕을 줘야 한다. 의욕을 주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나 기회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한 것이다. 21세기가 도래하면서 문화콘텐츠가 중요한 것은 문화적 감성은 결국 인간에게 새로운 감각을 전달해주고, 삶에 대한 만족과 새로운 목적을 준다는 점이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에서 인간은 수동적인 삶보단 능동적인 삶에서 재미를 찾는다. 하지만 수동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바로 동기유발이 없다는 점이다. 마을이 피폐해져도 이미 확보한 군용텐트가 완벽히 주거환경을 제공했고, 주변지역에서 구호물품이 계속 쏟아진다. 마을재건을 막상 하려니 도저히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이 삶에 흥분을 일으킬 새로운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요정이 준 수면제는 이상한 약초로서 꿈을 꾸게 되면 마치 마약을 먹은 것처럼 환각 증세를 일으키는 것이다.

 

꿈이란 세계는 인간이 깊은 잠이 아니라 엷은 잠에 들었을 때 이미지가 보인다. 이미지의 세계인 꿈에서 인간은 자신의 현실에 가려진 욕망을 마음대로 분출할 수 있다. 이상한 모양의 물건을 만들고, 자신의 신체를 특이하게 강화시킨다. 게다가 요정의 수면제는 개인에게만 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꿈이라 그 마을 전체를 꿈의 세계로 이끈다. 꿈의 세계란 인간에게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신화란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많은 인간들이 꾸는 꿈나라는 마치 환상의 세계에 온 것 같다. 신화란 환상의 세계이나, 그것이 현실의 인간을 반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현실에 대한 회의적인 자세는 마을을 떠나는 악순환도 발생하나, 자신이 처한 현실에 빠져 현실도피를 하는 경우도 다분하다. 어느 쪽이든 마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극단적 처방전으로 일시적인 구호물품을 받지 않는다. 물건이 오지 않으니 다들 불만이 쌓이고, 불만 역시 하나의 흥분에 가깝다. 기분 좋지 않은 흥분일지 모르나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녹나무마을을 다시 재건에 이른다. 생각해보면 발전한 마을이나 도시로 사람들이 유입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오는 게 정답이다.

 

그런다고 처음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계기나 동기가 필요하다. 환각 증세와 Y의 BL의 공세는 처음에 마을에 이웃에 사는 소녀들을 대거로 오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욕망의 목적에 치중하지 그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을의 청년과 친하게 지내는 부류도 있었다. 대규모 군중이라도 모두가 같은 인간이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번 8권에서는 요정의 역할이 적은 편이었다. 기억나는 부분은 루이16세를 따라하려던 요정이었다. 루이16세는 같은 세대에 살았던 장 자크 루소를 두고 조롱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의 저서 <에밀>의 영향으로 자물쇠 만들기가 취미였다.

 

자물쇠 만들 수 있는 것은 아주 고급된 숙련공만 할 수 있었다. 요정의 기술은 그런 세세한 손길로 만들어지는 기술이 아니라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기술인 요술과 같다. 단지 인공지능의 전원을 충전시키거나 이상한 수면제만 만들었지 직접적으로 작품의 무대 위로 나오지 않았다. 요정의 특징이 인간의 문명흔적이 집중적으로 모인 곳을 좋아한다. 전쟁의 결과 문명의 파괴이니, 예전 녹나무마을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이 떠나니 요정들의 활동이 더딘 것도 역시 그렇다. 문명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이 기반되지 않으면 성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조→사도세자→정조 이렇게 내려오는 영화나 드라마 소재는 참으로 많다. 조선왕조에서 많은 왕들이 있으나, 그 왕들의 수 이상으로 많은 왕족들이 죽임을 당했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형제와 부자 그리고 많은 인척 사이에 피의 숙청으로 이루어진 눈물의 역사다. 왜 피와 눈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영화 <사도>에서 이미 스포일러 사도가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다. 하지만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사도의 죽음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야 할 점이다.

 

 

영화에서 영조와 사도는 처음에는 좋은 부자관계로 등장한다.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아주 총명했고, 글과 그림에 대한 재주가 남다르게 뛰어났다. 물론 정조 역시 명문에 그림도 잘 그렸다. 게다가 학문의 뜻도 높으니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 학자군주로서 세종과 어깨를 견줄만할 존재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로 불리던 정조 시대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사도의 죽음이 큰 공이 크다. 영화 <사도>에서는 사도와 영조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이유가 부자 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 처음 부분에서 루이15세를 암살하려던 하급관리 다미엥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왕의 신체는 자연적인 신체와 더불어 신분, 권력, 상징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 왕의 신체는 하나가 아니라 2중의 구조를 가진 것이다. 영조의 상징적인 왕이란 2중 구조에서 권력, 신분, 상징을 그대로 반영한다. 사도의 죽음에서 왜 영조는 사도를 몰아갈 수밖에 없는가? 사도세자를 뒤주 안에 넣을 때 영조의 아이러니한 모습이 나온다. 아무도 뒤주에 사도를 가두고 못질을 하지 못하자, 직접 못을 가지고 망치질을 한다.

 

 

망치질 하던 영조의 손은 왠지 모르게 망설임이 보인다. 정성스럽지 못한 망치질은 그의 이중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라는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그린다고 하나, 그 역사적인 맥락을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조는 숙종에 대해 사도에게 이야기를 한다. 숙종을 자신의 아내에게 사약을 내린 왕이다. 숙종이 등급 할 때는 나이가 아직 어린 시절이었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죽자 엄청난 파란이 일어난다. 바로 임금의 상에서 상복을 몇 년을 입어야 하는지를 정해야 하는 예송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예송논쟁은 2번에 걸쳐 일어나고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왜 예송논쟁이 중요한가? <사도>라는 영화를 만약 제대로 보았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여기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효종이 즉위하고, 인조가 겪었던 청나라에 대한 모욕을 갖고자 북벌론을 제기했다. 이때 신하 중에서 가장 소신 있게 밀어 붙인 사람이 바로 백호 윤휴라는 선비다. 효종과 현종에 이어 숙종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다. 그가 예송논쟁의 중심에 있었지만, 한편으로 또 논쟁의 자리에 있던 것이 국가예산과 운영에 대한 부분이었다.

 

 

윤휴는 군포세와 세금의 문제, 그리고 백성의 지나친 생활고를 한탄하며, 당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백성의 시름을 놓아주고자 했다. 백골징포 황구첨정이라 하여 죽은 시아비와 이제 갓 태어난 아들에게도 군적을 올려 세금을 받은 것이다. 많은 백성들이 여기에 눈물을 흘렸고,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살이 할 때는 군포세의 부당함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한 사내는 자신의 성기를 칼로 베어버렸다. 영화 <사도>는 단순히 사도의 죽음과 추후 정조의 즉위로 이어지나, 사도가 죽을 때 많은 사대부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윤은 사도가 뒤주에서 괴롭게 죽자,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그때 태어난 분이 정약용이다. 정약용의 어릴 때 불리는 이름이 귀농(歸農)이었다. 사실 이것도 사도의 죽음과 깊은 상관이 있었다. 사도가 성품이 우수하여 많은 젊은 선비와 우호관계를 나누었다. 대부분 국가의 부정부패에 한탄하고, 배고프고 헐벗은 백성을 볼 때마다 분노를 감출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도가 영조 아래 대리청정을 한다는 사실은 무엇은 말하는가? 영화는 부자관계로 보자고 했지만, 절대 그것은 있을 수 없다. 처음부터 그것만 강조했다면 이 영화는 그저 부자갈등으로만 막을 내린다.

 

 

단지 부자갈등으로 보는 그 세상의 흐름,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에 대해 관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도는 영조에게 말한다. 사람이 있어야 예법이 있지, 예법이 있어야 사람이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조선의 6조 행정에서 예조가 있다. 예를 다루는 것을 관리한다. 특히 왕족들의 행사나 체계를 다루는 부서다. 예조가 중요한 이유는 모든 예가 조선의 통치의 토대가 되었다. 왜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의 유학이 조선을 휘둘렀는가? 사도는 공자의 유학사상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자의 유학은 조선을 잡은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란 주자의 성리학이 잡고 있었다.

 

 

공자의 유학은 인간을 위해 그 기본을 삼아 학문을 정비했지만, 주자의 학문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고, 다시 조선에서 더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윤휴의 죽은 예송논쟁, 즉 상복착용 기간으로 문제가 되었다. 예송논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대부들이 죽임을 당하고, 가문이 몰락했는가? 조선에서 예라는 것이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도 모자라 역적으로 몰릴 수 있었다. 윤휴의 죽음 숙종에서 이어졌고, 당시 정권은 노론에게 돌아갔다. 영화에서 영조와 모종의 관계를 맺은 신하들이 병권에 대한 문제를 운운한다.

 

 

경신환국에서 노론이 득세하고 숙종은 노론과 같이 통치를 하였고, 영조는 아버지 숙종과 무수리에서 태어났다. 중전도 혹은 정식적인 후궁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 무수리의 아들이란 이름은 영조에게 신분적 콤플렉스를 주었다. 영조가 자신의 형을 이어 왕이 되었을 때 병권을 노론에게 위탁한 것은 신분적 한계도 있었던 것도 있지만, 왕권을 둘러싼 반정이나 쿠데타 문제를 조치하려 했기 때문이다. 병권을 잡아 반정을 일으킨 왕들은 자신이 사랑하던 형과 동생 그리고 조카마저 죽이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왕은 군주제도에서 왕권 중심 정치와 신권 중심 정치로 대립했다. 영조가 탕평책을 내놓으나 그것은 신권 중심의 현실에서 그나마 왕권을 부여하려 했지만, 겉모습만 탕평이지 붕당 간의 갈등은 늘 위기의 불씨였다. 사도는 바로 그 붕당정치 안에서 젊은 남인 선비들과 친하게 지낸 이유는 바로 경신환국 이후로 권력을 잡은 사대부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군포세를 낮추고 양반의 세금을 조달하며, 군복무를 백성만 아니라 양반에게 하기를 사도는 처음 시도했다. 공자의 유학에서 선비는 하급 문관과 무관을 수행하던 자였다. 그렇기에 항상 도리를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사도는 인간적 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것이 처음 공자가 생각한 인간의 예인데, 조선에서 다르게 변질되었다. 군포세 같은 경우 윤휴 때 크게 반발을 보였으며, 사도 역시 큰 반발에 벽에 가로 막혔다. 병권 같은 경우 일부 특정 정파가 모두 관직을 독점하여 독재 수준으로 이르렀다. 병권을 잡는 것은 곧 군사를 다루는 것이고, 군사를 다루는 것은 나중에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옹립하여 반정을 꾀할 수 있는 것이다. 노론이 영조에게 압박을 주는 이유가 바로 병권에서이다. 사도가 영조의 심기를 건든 이유가 분명히 모순이 있는 정치적 현실을 건든 것이고, 그것은 영조의 위치를 위태롭게 만든 것이다.

 

 

영조는 계속 나라의 정치적 목적이고, 사도는 인간의 도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유학에서는 선비가 개인의 영역에서 먼저 그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국가의 운영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 영조가 펼친 탕평정책에서 남인들은 열세하고 노론의 강대했다. <사도> 영화에서 정조가 즉위할 때 자신이 어린 시절 많은 고비를 넘어왔다고 하는데, 정조는 어린 시절 새벽에 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항상 그를 암살하려고 했던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사도를 죽이면서 풍악을 울리는 모습은 단순히 아들을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왕이란 신분이 명분만 좋은 자리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도가 죽고, 정조가 다음 왕위로 계승되자,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옆을 떠나지 않으려하던 정조를 따귀를 때리면서까지 보내려 한다. 이후 정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정조도 권력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숙청을 하기 시작한다. 영화 <사도>는 이런 전후맥락을 통해 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부분은 채제공의 역할이 축소된 점이다. 채제공은 사도가 위기에 몰릴 때 영조에게 목숨을 걸고 말린 사람이고, 정조가 왕으로 있을 때는 진정한 충신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왕족들의 이야기는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의 이야기다. 영화는 국가라는 이름을 가진 왕족을 개인적으로 다루고 싶지만, 그것이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

 

 

영조의 아내가 죽고, 나이가 어린 정순황후가 중전으로 온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영빈에게 말을 낮추어 쓰는 현실에서 사도는 자신의 어머니를 외면한 아버지의 무정함에 탄식을 한다. 영조는 뭔가 성격이 다혈질 같아서 영화 대사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영조의 행동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흠집을 잡혀 공격당하지 않으려고 했던 결벽증이었던 것이다. 옷고름이나 용모 하나라도 영조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예법, 즉 조선의 통치기구와 신하들의 감시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사도는 바로 그것이 싫었다. 조금 흐트러져도 아니라면, 중전이 아닌 친모에 대한 행동에서도 그가 바란 것은 인간의 도리였다. 인간의 도리를 위해 만들어낸 예법이 오히려 인간의 도리를 망치는 꼴이 되었다. 영조는 정조에게 묻는다. 왜 영빈에게 절을 4번 했냐고, 정조는 단지 아버지 사도가 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라면 절을 4번이 아니라 천 번과 만 번이라도 할 수 있다고 한다. 공자의 유학에서도 가족관계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관계를 유지하던 마음인 것이다. 정조는 사도의 마음을 이어받았고, 그것을 실천하려 했다. 단지 사도처럼 직접 대놓기보다는 은근히 말을 돌린다.

 

 

영조와 사도의 대결에서 결국 예법을 중시한 영조가 승리했다. 하지만 정조는 예법보단 인간의 도리로서 마지막 장면에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에서 부채춤을 춘다. 부채에 그려진 용의 그림, 사도가 아들 정조가 무사히 자라나길 바라며 그렸던 그림, 영조는 아들을 죽이고 왕을 이어가지만, 사도는 자신이 죽고 아들을 살려내어 왕으로 만든다. 피할 수 없는 가치관의 대립이 결국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사도의 죽음으로 이어져 간다. 그러나 결론은 정조의 마음이 옳고, 정조가 그리던 사도의 가치가 옳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조는 수원에 사도세자 묘지에 종종 방문하고 수원화성을 건축하여 미래를 다지려 했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건축할 때 백성의 재산이 아니라 왕가의 재산으로 이용하고, 최대한 백성의 노역을 동원하지 않으려 했다. 수원화성이 정약용 선생의 기증기로 세운 이유가 바로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전에 실록에서 나온 내용을 보니 조선의 왕 성종은 길가에 다리가 잘려진 소녀를 두고 큰 형사사건을 지시했다. 그 소녀는 천민의 딸이었고, 몸에 병이 들어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범인을 찾아 치조를 하고 그 소녀를 관아에서 보살피도록 지시했다. 무릇 왕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은 백성들조차 걱정하여 정사를 봐야한다.

 

 

신분이 천한 계집아이라고 천대하면 안 된다. 군주는 만백성의 어버이다. 어버이라는 점은 언제나 백성의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억울함이 없도록 항상 정사에 매진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정성스럽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어찌 큰일에 그 도리를 따를 수 있겠다는 말인가? 사도는 작은 것에 시작하여 큰 길로 가려 했다. 하지만 영조는 큰 권력이란 이름 앞에 사도를 가로막았다. 영조가 권력에 무력한 이유는 그의 위치가 언제나 위태롭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노론대신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사도와 정조가 죽으면 왕실 인척 하나를 왕으로 내세우면 되는 점을 말이다.

 

 

실제 그게 정조 이후에 이루어지고, 조선왕조는 몰락의 길로 이어진다. 부자관계의 이야기지만 부자끼리 나눈 대화와 그들의 뜻이 현실의 상황을 비교하여 보자면 참으로 그렇다. 작은 하나, 인간이라면 당연히 생각해야 할 윤리적 덕목을 망각하는 순간 비극은 일어난다. 영조와 사도 간의 대립은 단순히 부자관계만이 아니라 부자관계에서 시작되는 인간적 도리이다. 사도가 인간적 도리로서 아버지 영조에게 다가가야지 그가 원하던 왕도정치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의 꿈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영조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실에 평생 한으로 살아간다.

 

 

죽이고 싶지 않아도 죽여야만 했던 영조는 평생 후회한다. 금등에 자신의 비서를 넣어 세손 정조에게 물려준 것을 소재로 만든 소설 <영원한 제국>처럼, 영조는 자신의 손으로 사도를 죽였으나 자신의 의지로 죽이고 싶지 않았다. 바로 예법, 궁궐에서 말하는 예조의 기능이 비극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세상에는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세상의 법도나 도덕에 의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도리다. 당신이 인간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조차 가지지 못하니 사도는 그 시대에만 존재한 게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상징적 존재다.

 

 

단지 세상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다. 그 의지가 실천되려면 결국 누군가 희생되는 구조로 이어진다. 사도는 단지 사도세자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살아가기 원하는 인간의 의지다. 영조는 그런 의지도 알지만 끊을 수밖에 없는 힘이 없는 강자이다. 자신의 힘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변의 관여로 이루어진 것이다.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의 의견을 윤허하고 책임지는 것이라 한다. 결국 영조는 왕조사회의 군주지만, 당시 사회가 왕권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신권에 의한 정치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고, 명분이 곧 예법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눈물에서 말하지만, 인간이 있어야 예법이 있는 것이다. 현대에서 법과 제도가 있지만, 그 법과 제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 법과 제도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과 제도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무형적 존재이기에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진 정부가 실행한다. 사도는 영조와 부자관계로서 사이좋게 지내고 싶으나, 사도의 죽음에서 보듯이 세상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사도는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현재까지 살아가고 있는 곳이 영도이다. 영도에 살아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나, 여기는 아직까지 지역명과 같이 어둠에 가려져 있는 동네이다. 영도를 말하면 흔히 주변에서 영도구(影島區)라 하지 않고 영도시(影島市)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지방자치단체 관할기관에서 분명 영도구는 부산광역시 안에 포함된 지방자치단체이다. 그런데 영도를 두고 영도시라고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영도가 부산에서도 뭔가 조금 다른 지역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흔히 서울이나 또는 다른 지역에서 한강을 두고 강남지역하고 강북지역이 뭔가 다르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하천이나 해안 혹은 산간지대를 사이로 기후가 대기기상학적으로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부산에서 그런 지역에 몇 군데가 있으니 그 중에 하나가 영도이다. 영도다리 하나를 차이로 뭔가 기상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영도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싼 섬이다. 섬이지만 상당히 부지가 넓은 편이라 교량이 지금 4개를 두고 이래저래 왕래를 하고 있다. 영도(影島)라는 말에서 그림자 섬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장난으로 사람들은 Young Island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영도>를 영문으로 <Shadow Island>라고 정확히 적었다. 그림자의 섬, 왠지 태양을 빛이 보이지 않고, 태양빛 뒤로 가려진 그림자가 음영으로 가득한 곳이 영도라는 점이다.

 

영도지역에 대한 리얼리티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지만, 너무 지나친 감이 적지 않게 있었다. 영도에 거주하면서 방파제에 대낮부터 고등학생들이 담배 피는 것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주택으로 둘러싼 공터에서 담배 피는 학생도 별로 없다. 옥상에 올라간 몰래 담배 피는 것이라면 몰라도 지나치게 미국 할렘의 모습이 생각났다. 뭔가 반은 맞은 것 같아도 반은 아닌 것 같았다. 영도가 과거에 조직폭력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영도와 남포동 중심으로 유명한 조직폭력단도 많았고, 동네 자체가 흉흉한 분위기도 많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다고 영화에서 스마트폰이 등장하는 점에서 과거만큼 동네의 치안이 위험하지 않은 점이다. 대낮부터 조직폭력배가 남항동이나 대평동 일대의 항구에서 사람들에게 찾아가 사기대출로 폭행을 휘두르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단지 영도다리 아래에 위치한 봉래동 일원에 보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종종 길을 가다 보면 스타렉스나 카니발 같은 차량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여자들이 내리는 것은 지나가다 본 적은 있다. 확실히 영도라는 지역을 모르는 부산 밖의 사람들이 보면 영도는 마치 범죄로 넘치는 고담시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라는 설정이 실사영상이란 점에서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현실의 조건으로 따라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SF나 판타지장르가 아닌 이상 현실적 조건, 리얼리티의 요소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조건에서 리얼리즘으로 다가왔다고 해도 현실과 역사적인 맥락에서 너무 동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어중간하게 리얼리티를 부여한 것이다. 사실 영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영도할매귀신 눈에 걸리지 않게 이사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영도할매귀신이란 말은 어째 보면 미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름의 문화인류학적으로 신화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가령 옛날 외국인들이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들어오면 항상 영도를 보게 된다. 밤에 유람선을 타고 온 외국인들이 영도를 보며, 부산이 엄청난 발전한 곳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아마 그때가 1960년대 이후일 것이다. 영도를 보면 높은 곳까지 불빛이 들어와 있는 장면에서 그들은 영도에 엄청나게 많은 고층빌딩이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사실 빌딩이 아니라 영도는 평탄한 섬이 아니라 산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그 높은 곳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사니 불빛이 고지대까지 보인다.

 

영화 <영도>에서 주인공 영도가 사는 곳은 영선동 산복도로가 있는 곳이다. 여기는 영화로 촬영하기 아주 좋은 장소다. 말 그대로 서민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집안에 화장실이 없고, 아파트 내에 공동화장실이 있고, 집마다 평수는 대략 12평 내외로 아주 작은 규모다. 이런 집은 영도 영선동 이외에 부산역에 있는 초량동 위로 올라가면 수정동이 있다. 거기 역시 부산의 산복도로 중에 유명한 곳이다. 과거 부산에 빈곤계층이 사는 곳이 상당히 많았는데, 점점 그런 주택형식은 줄어들고 있지만, 부산 영도 안으로 들어가 태종대가 있는 동삼2동에 가면 수세식이 아닌 푸세식 변기를 사용하는 곳도 있다.

 

영도할매귀신의 이야기는 결국 부산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 중에 하나가 영도이기 때문이다. 불편한 교통, 높은 지역, 삶의 주거가 안락하지 못한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이 많고, 그들이 계속 거기 사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제대로 좋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과 산업근대화 시기에 많은 피난민과 구직자들이 몰려왔을 때 마땅히 갈 곳이 없으니 지대가 저렴한 영도로 몰렸던 것이다. 영화 <영도>에서 영화제목도 주인공의 이름이 영도라는 점, 형사들이 찾아와 영도에게 영도 이외에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영도라는 이름, 영도라는 지역, 영도라는 주박은 결국 인간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론적인 비극을 보여준다. 영도는 태어나 어린 시절에 그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연쇄살인마였고, 도끼로 시체를 토막 내는 것도 모자라 인육을 먹었다. 살인마의 아들, 그것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로 다가왔다. 자신이 저지른 것이 아니지만, 자신에겐 괴물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억압을 당한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영도는 영도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에게 소외와 고독 그리고 차별을 선사했다.

 

그의 친구들은 2명만 나온다. 단짝 친구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사촌형 아래서 자란다. 그러다보니 가정환경에 충실하지 못하여 비행을 저지르고, 학교생활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영도가 왜 불량해졌는가? 여기서 이 영화는 우리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낸다. 조직폭력단에 들어간 영도는 거기 두목에게 불려간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목은 영도의 아버지를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가지고 영도를 가지고 조롱한다. 영도친구 꽁이 영도를 데리고 사촌형에게 가서 그 일을 이야기하자, 사촌형은 장어구이 식당에 가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한다.

 

어둠에 사는 인간들이 사회의 문제와 인권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하나, 거기서 엄청난 불평등을 볼 수 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2가지의 불평등을 제기하는데, 하나는 신체적 자연적 불평등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사회적 불평등이다. 영도와 꽁에게 얻은 불평은 후자이다. 대부분 한국사회이든 혹은 루소가 18세기 프랑스를 살았든지 바로 2번째 불평등이 우리 인간사를 고통으로 내몬다. 영도는 처음부터 나쁜 인간이 아니라 나쁜 인간으로 되어야만 했다. 결국 나쁜 인간이 된 영도는 아버지에 의한 피해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로 인해 망가진 인생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지 그것이 고민이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작중에서 영도는 성적 욕구도 거의 없었다. 물론 형 일도의 아내, 아니라면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부모를 잃은 미란에게 은근히 성적인 환상을 품지만, 이내 그 환상의 세계인 꿈은 악몽으로 변한다. 영도를 누운 채로 위에서 성행위를 하던 미란이 영도의 심장을 꺼내어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도가 성적인 욕구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범죄로 동네에서 제대로 살 수 없었다. 얼굴을 봐도 누구에게 얻어맞았고, 그때 영도의 형을 데리고 가출한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의 죄를 계속 이어받아간 영도에게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그가 우연히 만나고 사건이 일어나는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영도라는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다. 하다못해 어머니가 사는 곳을 찾아 서구로 가는데, 바다 넘어 영도 봉래산이 보인다. 영도를 나나도 영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운명론적인 비극이다.

 

이렇듯 영화 <영도>는 인간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에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을 계속 강조한다. 유일하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영도가 죽어야 가능했다. 안타까운 것은 영도는 방황과 고독 그리고 허무 속에 살아가다 마지막으로 삶의 목표를 찾아가려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미워했으나, 집 앞에 두고 간 커다란 곰 인형은 수배자로 도망치던 아버지가 나두고 간 것이다. 아버지의 죄에 고통스러운 인생이 되어도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그리움이 담겨있다.

 

그래서 어머니의 애인이던 술주정뱅이 노인을 폭행하던 이유도, 그 노인이 어린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를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죄보다 더 분노로 다가온 것은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무책임한 태도였다. 자식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어른들에 대한 분노가 결국 영도를 극단적 행동으로 이어간다. 마지막에 자신의 인생을 조금 바꾸게 된 동기는 미란의 아이 미미 덕분이었다. 일도의 아내 미란은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영도의 심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도는 죽고, 미미는 남았다. 미란은 미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지켰다.

 

다른 사람에게 모두 거칠었던 영도이나, 미미를 건물 밖에 놀게 하고, 노래방에서 일당으로 일하던 미란을 억지로 붙잡아 영도는 자신의 집에서 잠재운다. 미란이 미미를 걱정하고 아끼던 모습에서 다른 어른들과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자신을 버린 여자 영도의 어머니 미미를 끝까지 지키던 미란). 후반부에 영도가 죽기 전에 핸드폰으로 전화가 울려온다. 그 발신자는 미란, 영도는 형 일도가 죽은 후에 미란과 연락하고, 미미하고 사이좋게 지내려고 했던 것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큰 곰 인형을 산 이유는 자신이 가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미미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원과 목적은 무참하게 파괴된다. 자신의 저지른 죄의 대가가 끝까지 따라 붙은 것이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쳐봐도 결국 그는 살 수 없었다. 이때까지 그런 비극적 인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앞으로는 거기서 벗어나 새 삶을 찾으려 해도 세상이 역시 그를 절망의 그늘로 데리고 간다. 영화 <영도>라는 제목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Shadow Island이다. <영도>라는 제목으로 영도에서 촬영하고 영도라는 주인공이지만, 영도는 꼭 반드시 부산에 있는 영도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쇠사슬은 언제나 우리를 짓누른다. 영도라는 말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은 인간 누구라도 가질 수 있고, 괴물은 처음부터 탄생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져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하지만 과정의 연속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의한 선택되어지는 게 비극이다. 영도는 가난과 고독 그리고 절망이란 운명에서 살아간다. 영도에서 살아가는 나도 영화 <영도>만큼은 절대로 될 수 없겠지만, 나만이 가지고 있는 영도라는 운명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5-09-25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둠에 가려져 있는 동네 영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 문장 웃깁니다.
만애비 님 생각할 때마다 항상 뾰족구두 가지고 비오는 날 뛰어다니던 풍경이 떠오르는군요... ㅎㅎㅎ 요즘 왜 네버 블로그는 잘 안 하슈 ?

만화애니비평 2015-09-26 11:10   좋아요 0 | URL
그게 그래 웃기는 겁니까??ㄴㅋㅋㅋㅋ

진격의 오덕이 생각나는군요.요새 공부하다고 정신없어요...
 
망명 - 윤한봉 회고록
윤한봉 지음 / 한마당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최근 어떤 재판에 대한 뉴스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 계엄군에 대항하던 시민들의 유해가 가족 품으로 온 장면이었다. 자식과 형제 그리고 친구의 차가운 몸과 붉게 젖은 천을 바라보며 그들은 원통한 눈빛으로 통곡하고 있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군인이 민간인을 총으로 살해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국군이란 헌법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 나라를 지켜야 하나, 때로는 권력자들의 눈빛을 따라 움직일 때도 있다. 이른바 충정훈련, 공수부대를 오랫동안 훈련시키면서 전투요원의 마음에 진압당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때려죽여야 하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5월 17일 그들의 작전이 시작되고, 18일부터 누군가의 지시 아래 총포가 울린다. 아직도 그 총포를 지시한 지휘관은 누구인지 그 윗선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만약 진짜 518사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총을 쏘게 한 지휘관은 누구고, 그 명령을 내린 상부기관과 상관의 이름이 나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정 국가의 위기를 모면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라면, 분명 그것은 바른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35년이 넘은 지금에도 그 지시를 내린 자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른다.

 

만약 진짜 북한의 음모와 반국가적 폭동이라고 한다면 그 지휘관의 이름과 상관의 이름은 분명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누구인지 모르고, 그것을 전혀 밝혀들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518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전혀 다른 사건이란 점을 반증하게 된 것이다. 진짜 북한의 소행이라고 한다면 희생자 중에서 임신한 여성이나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나, 어린 여중생들이 왜 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해야 하는가?

 

이런저런 비논리와 비이성적 억척은 거짓의 논란과 위증의 말꼬리를 잡고, 그런 것 같더라 혹은 그랬다고 하네요. 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쏟아낸다. 518의 역사, 그리고 최근 정치권에서 광주중심으로 한 정당을 창당, 왠지 모르게 역사의 흐름에서 계속 되풀이 되는 상황이 보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이번에 읽은 책이 518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이 저술한 <망명>이란 책을 읽으면서다. 본래 <똥가방>이란 이름이란 책으로 발간했지만, 내용을 보충하고, 다소의 에필로그를 추가하여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윤한봉은 참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역사에서 빠질 수 없던 인물이다. 1970년대 유신정권이 들어오면서 사실상 대한민국 헌법은 권력자의 무력 앞에 무참하게 짓밟혔다. 이때부터 많은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나 군사정권은 고문과 감금 그리고 심지어 사법사형까지 일삼는 잔혹한 추태를 보였다. 윤한봉은 1970년대부터 유신에 대한 저항으로 체포되어 구형되었고, 출옥 후에도 계속 민주주의운동을 하였다.

 

제3공화국 말, 윤한봉은 강제로 감옥에 끌려와 각종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1026사건 이후 출옥되자, 조만간 1212사건이 일어난다. 군부가 장악하던 시절, 윤한봉은 1980년 5월이 오기 전부터 신군부가 25일 전후로 광주에 유혈진압을 할 것이란 말을 한다. 모두 다 아닌 것 같다고 하나, 막상 18일이 되자 광주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윤한봉의 친구와 동무들은 무참하게 진압부대의 총과 칼 아래 주검으로 변하고, 윤한봉은 수배자로 몰리자 주변의 의견에 따라 외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다.

 

미국으로 가는 배, 35일 동안 더운 방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배고픔, 외로운, 억울함, 죄책감으로 사무쳐 괴로워하며 표범(leopard)호에 탑승한다. 미국에 내릴 때 그는 병든 사람처럼 창백했고, 자유가 없는 고국을 떠나 낯선 타국살이를 시작해야 했다. 1981년대부터 시작하여 12여년을 타국에서 보낸 후 1993년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의 생활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가난도 그런 것이지만, 망명을 받아들인 것은 한참 후이고, 미국정부와 미국 내 한국대사관의 공작으로 계속 억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고, 미국에 한국청년연합회를 결성하여 미국 내 여기저기 흩어진 동포를 모우고 그들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망각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에 있으면서 고국에 있는 친구와 가족들이 남영동 고문실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받는 것을 소식으로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다.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을 보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그들이 자신의 망명 때문에 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거 윤한봉은 자신이 감옥에 수감되고 나올 때, 아버지가 노환으로 사망한 것을 들었다.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점에서 그는 가슴이 무너졌다. 그런데도 미국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고, 돌아간다 해도 무사할지 모르는 것이다. 벼랑이 언제나 눈앞에 있는 그의 운명에서 그는 불굴의 정신으로 미국 LA 한인사회를 차츰 변화시켰다. 지금의 미국 한인동포 모임에서 그가 남긴 업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미국에 온 이민자들, 고향을 잃은 사람과 고향을 등진 사람들, 그래도 한국은 우리의 고향이고 그리운 흙이 있는 곳이었다.

 

이 책을 보며 느끼지만, 약하고 힘이 없는 자들은 어떻게든 바르게 정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도 불리한 상황은 계속 압박하고 때에 따라서는 박해는 지속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을 억압하는 무리에 대해 다른 조직이나 사람들과 연대하겠지만, 그 연대하는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명분이란 이름으로 숨기며 각종 특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가슴이 아팠다. 언제나 겨울의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여름의 더위와 외로움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막상 어느 상자리가 차려질 것 같으면 어김없이 달려 들어와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518재단을 발기했을 때 윤한봉이 처음 공로가 많았지만, 막상 그 행사가 열린 당일에는 윤한봉을 시기하는 무리가 나와 묘소에 참배하는 것을 가로 막았다. 윤한봉이 했던 일 중에 아마 DJ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지자가 있더라도, 만약 지지자들의 비판이 있으면 그것을 듣고, 반성하여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했다. 호남권에서 DJ의 비판은 곧 적이 되어야 했고, 윤한봉은 그것을 바로 실시하던 사람이었다. 광주에서 518의 슬픔은 윤한봉 역시 크다. 그러나 그 슬픔의 공로를 정치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무리에 대해서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DJ정신의 계승에서 김대중 대통령 사망 이후 보이는 정치권의 행태는 왠지 참 안타까웠다. 2007년 윤한봉이 사망했으니 이미 그 전에 <망명>이란 책이 발간되었다. 그런데 벌써 그것을 예측하고 문제가 터졌다. 인간에 따라 공과 실은 나누어지나, 공만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실책을 보고, 그것을 다시 반성하여 새롭게 나가는 게 바른 길이다. 지금 한국 정치에는 전혀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작년에 우연히 광주에 갈 일이 있어서 망월동에 있는 518묘지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이 책을 보고 나니 다음에 갈 일이 있으면 윤한봉의 묘지 앞에 가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9-21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22 08:43   좋아요 0 | URL
아~!
제 전공은 정치와 철학이 아닙니다.
저는 공대출신입니다. 전공이 환경인지라 환경 자체가 아주 조금 인류학이랑 관계가 있다보니 인류학쪽으로 관심을 돌리다가 이렇게 오게 되었군요.

오덕은 진화하는 겁니다!
 
나비의 노래 일본군 위안부 만화
정기영 지음, 김광성 그림 / 형설라이프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최근 일본 아베정권이 일본의 군사력을 확장시키려는 정책을 시도하려 하고, 과거 다른 국가를 침략한 역사를 부정하려고 한다. 침략은 했으나 그것은 그 나라를 억압의 수단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은폐하려 한다. 그렇기에 그 시대 일본이 저지른 행위를 진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을 다른 식으로 말한다. 일본에서 유네스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군함도, 그것은 완전히 지옥의 섬이었다. 조선에서 징용한 사람들을 강제로 노동하여 죽을 때까지 일을 시켰다. 그것도 더위와 피로, 음식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의료의 혜택조차 노동력의 징발여부만 가렸다.

 

그런 과거의 행위가 왜 지금에 논란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누군가 그런다.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그것은 우리하고 상관이 없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일은 당장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의 정치적 형태가 자꾸 과거의 모습을 속이고, 군사적인 요소를 부각한다면 또 다시 저런 문제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영향으로 100% 재현되지 않겠지만, 어디서 모른가 저런 비인간적인 행동까지는 아니나, 많은 인간들을 절망으로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라는 것은 왜 지나간 것만이 아니라 현재와 계속 대화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만약 우리가 어느 위기에 빠지면 일본은 그때도 야욕을 보이며 달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란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고, 그 기억에서는 좋은 기억보단 나쁜 기억이 많다. 좋지 못한 기억이 있다는 것은 기억해야 하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부담을 준다. 과거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단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지지 않는 꽃>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간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실재로 존재했던 일들, 영원히 지옥의 악몽에서 풀려날 수 없는 저주, 사실상 마음 깊이 담아두는 것만으로 상처가 깊은데,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란 상당한 고통이다. 한국사회는 여성에 대한 기준이 참으로 난감하다. 성폭행은 분명 나쁜 것이고, 성폭행은 당한 대상은 약자인 여성이 많으나, 그들의 피해사실을 제대로 말하기가 어렵다. 과거 형사나 경찰이 피해 진술과정에 대해 들어보면, 피해여성에게 상황묘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 해 달라고 한다. 그것은 피해자가 아주 두려워하던 순간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충격으로 인해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해진다.

 

예전에 성폭행 당해본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의 피해과정을 숨기거나 고소를 취하하던 이유가 바로 여기다. 재판과정에서 다시 그 상황을 공개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더 심각하게 찌르는 것과 같다. 위안부 할머니는 아마 그런 성폭행 피해여성에 비교하면 괴로움이 더 심할 것이다. 집단성폭행에다가 잔인한 고문과 살인위협에 항상 시달렸기 때문이다. <지지 않는 꽃>에서 처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할머니가 공장에 일하러 간다는 말만 믿고 따라가는데, 알고 보니 동남아 일본군 진영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으로 계속 패배를 겪고 있었고, 위안부의 공급은 패배의식에 짓눌린 일본군들의 사기를 충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남자의 성적인 욕구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행은 한편으로 정복욕을 충족시켜주는 해결방안이었다. 전 근대적인 사회에서 전쟁이 나면 항상 승리한 침략자는 마을 안에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은 자신의 첩으로 삼는다. 여성들은 전쟁에서 항상 전리품으로 다루어진 것이다(그런다고 여성의 인권만 생각하지 말고, 몰살당하는 남성의 인권도 생각해야 한다). 위안부는 현지에서 약탈이 불가능한 일본군들이 강제로 약탈했다는 인식을 심어준 행위이다.

 

작품에서 사병을 관리하고, 일본군의 복무신조를 지켜야 하는 장교가 오히려 위안부 처소 안으로 들어와서 행패를 부린다. 이미 전쟁에 의한 정신적 외상이 극으로 치닫고, 피해의식과 파시스트의 광적인 요소는 학살과 자살 등과 같은 만행으로 연결된다. 예전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직 16살의 꽃다운 소녀들이 끌려오면 얼마나 두렵고 괴로워했을까? 아직 몸과 마음이 성숙하지 않았는데, 강제로 성노예로서 성폭행 당한 소녀들은 자신의 성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아 강제로 칼로 성기부분을 찢은 만행을 들었다.

 

<지지 않는 꽃>에서도 그 내용은 나왔다. 다행히 더 끔찍한 장면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일본군들이 전투를 벌일 때 자신들의 병력피해를 줄이기 위해 위안부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일부러 진열의 앞에 서게 하여 적군들이 쏘는 총알을 대신 맞게 하는 총알받이로 이용하기도 했다. 한 많은 세상, 희망도 없이 그저 유린당한 채 죽어야 하는 그녀들의 운명에서 일본의 사죄는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 패악을 저지른 자들은 현재의 자는 아니지만, 그것을 잊으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되는 점이다.

 

독일에서 네오나치가 나오면서 많은 지탄이 되었는데, 그것은 인종차별로 이어지고, 인종차별의 극단성은 테러리즘으로 이어진다(물론 그걸 저지르는 광신자들은 정의라고 믿는다). 일본의 사과를 계속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망각하면 망언을 계속하고, 일반 국민들까지 그런 나쁜 정신이 유포되어 한일 양국 간의 우호가 나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조건 사과한다고 해서 사과 받는 쪽이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와 용서로 통해 서로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만행은 저지른 일본은 상당한 젊음들을 전쟁터로 보냈고, 그들의 가족들은 자신의 아들과 형, 친구들이 시체로 돌아오거나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으니, 피해자가 가진 피해의식만큼 가해자에 동조하던 자들의 주변인들도 피해의식을 가진다. 결국 누군가의 이기심으로 인해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야 한 게 전쟁이란 허무이다. 국가정부의 오류로서 전쟁과 전투로 죽은 군인들은 죽을죄가 없이 죽어야 했던 희생자다. 물론 그들이 전쟁 중에 무고한 자를 죽였다면 죄는 된다. 단지 그 죄를 만들도록 한 자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그런 자들의 밑에서 이익을 챙기고, 이권을 이어받은 자들은 용납할 수 없다.

 

아베정권이 오면서 일본전쟁범죄 가문의 후손들이 정계와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자국의 국민뿐만 아니라 타국의 국민들까지 위험으로 몰고 간다. 그들은 자신의 망상이 국가의 존립과 위엄이라 말한다. 피해자를 두고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외면하고 거짓말하고 있다고 발뺌 하는 현실에서 <지지 않는 꽃>을 보는 것이란 바로 우리의 미래까지 지키는 것까지 연결된다. 꼭 위안부 할머니라 하여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자.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소녀들이 거친 남자들 사이에서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게 일어나면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가 저래 당해서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인간이 보편적 조건에서 일어날 현실로서 접근한대도 그건 무서운 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09-21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안부 할머님들 다큐 보니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연을 하고 난 뒤엔 끙끙 앓으시더군요. 잊으려했던 상처를 다시 꺼내 헤집으니 상처가 또 터지는 거지요. 돌아가실 때까지 그 상태를 견디실 거라 생각하니....
시간이 약이 된다는 말, 아픔과는 상관없는 참 쉬운 말이라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21 09:31   좋아요 0 | URL
시간이 약인 것은 아픔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아픔을 망각하게 해주는 진통제일 뿐이죠. 진통제 맞는다고 병이 치유되는 게 아니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