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동무 - 만화가 10인의 마침표 없는 인권 여행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정훈이 외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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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권리,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적정범위, 아니라면 인간이 태어나면 이 이상으로 보장받지 못한 비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절대적인 가치기준 등 인권에 대해 생각하면 정의내리기가 쉬우면서도 어렵다. 지난 인류의 역사란 되돌아보면 인간의 투쟁에 대한 기록이다. 투쟁이란 자연적 조건 혹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에 식량이 부족하거나 또는 날씨가 춥거나, 집에 너무 좁거나 월급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인간의 불평등은 어찌 보면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자연적 혹은 신체적 불평등보단 사회적 혹은 도덕적 불평등이 심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른바 대한민국 헌법 아래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보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은 참으로 애매하다. 헌법은 어찌 보면 국민과 그 국민이 선출한 국가기관의 정부요직 또는 공무원들이 제일 먼저 지켜야 하나, 오히려 헌법이 더 뒤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헌법의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맨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와 정의를 말하는 인간들을 보고 난 뒤에 헌법 조항을 비교대조를 해보면 바로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다.

 

대한민국이 인권의 나라, 자유와 평등의 나라가 되려면 헌법의 정신적 가치를 새겨보는 것이 옳으나, 헌법이 사라지고, 대신 입맛에 맞는 각종 법들이 좌지우지한다. 법만이 아니라 법 아래에 있는 지침과 규정들도 임의로 관료사회집단의 입장에 따라 계속 바뀌어간다. 인권을 말하는 것은 마침표 끝내는 대신 물음표로 항상 질문해야 한다. 여기가 지금 제대로 사람들을 위한 장소인지 제도인지, 그리고 얼마나 제대로 혜택과 보장이 돌아가는지 말이다. 10월 8일 최호철 유승하 부부 만화작가의 강연을 들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에 인상 남는 일화가 지하철역에 있는 엘리베이터였다. 다리가 심하게 불편하지 않은 이상, 나이가 제법 있으신 어르신들도 충분히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올 수 있다. 그런데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나 산모, 병을 앓은 사람들에게 너무 힘든 영역이다. 레드 제플린의 유명한 곡 Stairway to Heaven, 천국으로 가는 계단만큼이나 멀고 험한 길이다. 장애우 한 분이 오랫동안 계단을 오르기가 불편하여 사회에 호소하였고, 나중에 지하철역마다 엘리베이터가 생겼다.

 

남들은 그것이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탑승한다. 그러나 그 장치가 생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너무 길고도 힘들었다. 말이야 쉽지? 이런 말은 바로 여기서 부터인 것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속이거나 외면하지만, 세상에 너무 힘든 사람이 많다. 그들을 돕는 일이란 그저 길가나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전 하나를 주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옳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우리 국민에게 세금을 수금한다. 하지만 그 용도가 제대로 된 것보단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자주 쓰이는 경우가 많다.

 

정작 사용할 곳은 어디인지?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또한 그것을 제대로 관리감독 및 시행을 누가 잘 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우리 개인 하나는 어떻게든 타인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돕기도 힘들다. 아침부터 나가 저녁까지 일을 하는 직장인에게 월급봉투는 너무 잔혹한 숫자이며, 학생에게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시간과 공간조차도 없다. 마치 억지로 시작도 끝도 없이 저 황무지를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처럼 우리는 항상 불안한 운명에 허덕인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약하고 힘든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싼 죽음의 모래언덕에서 발을 움직이려도 해도 다리조차 들어 올릴 힘도 없다. <어깨동무>에서 그런 사람이 나온다. 핵가족화로 인해 가족이 해체된다. 노인 혼자 집에 살고 있고, 옆에 강아지 하나만 있다. 아들 내외는 언제부터인지 소식이 닿지 않고, 옆에 늙은 강아지만 열심히 그 상황에서 주변에 알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개소리에 시끄럽게 여기고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마지막에 개가 짖는 소리마저 없어지자, 그 할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오늘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주변 친척 중에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틴 조금 먼 친척의 이야기를 들었다. 촌수로 대략 6~8촌 사이 정도랄까? 나이가 60 넘은 여자 친척이 혼자 사는 이야기를 했다. 한 분은 자신의 집이 37평, 상당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그 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옆에 아무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옆에 오빠나 동생이 있더라도 언제까지 챙겨줄 수 없었다. 그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의지할 곳이 없는 외톨이가 된 것이다. 최근 노인들의 고독하게 죽는 일들은 종종 뉴스에서 본다.

 

사람이 죽는 것은 축복일 때도 있다고 하나, 대부분 고통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더 고통스러운 일은 죽을 때 자신의 죽음조차 기억해주지 않은 세상이다. 내가 이 세상에 정말 태어나서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물론 가족이 있는 사람들도 슬픈 현실에 처해져있다. 최규석 작가가 그린 편에서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최규석 작가가 매우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그리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극화 같은 그림체는 등장인물에 대해 캐릭터를 부여하는 것보다는 현실의 인물을 보여주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아파트 재건축 사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는지가 나에게 큰 충격적이었다. 건물 철거 중 건물 안에 사람이 있는지 모르고 작업하다 죽은 사건이나, 철거민들이 철거용역업체에게 저항하다 소화기를 뒤통수를 맞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억울함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재산권 침해이란 이름 아래 오히려 외면당한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우리의 인권주소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았으며, 그런 것과 무관하므로 모두 외면한다. 말해도 그런 신경 쓸 필요 없다거나 혹은 너나 잘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치 좋은 사람인양 착실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인 것처럼 보여주는 행동에서 과연 그들도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지옥 같은 세상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긴다. 차라리 이런 세상을 알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뭔가 돌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겠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당하면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해진다. 개인이 이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전태일이 1970년 11월 휘발유를 몸에 뿌릴 때 권력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전태일의 죽음 아래 많은 것을 느꼈다.

 

사회가 힘들게 되면 개인에게 어렵게 되니, 결국 개인 모두가 문제의식을 느끼어 연대의식을 나누거나 혹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작은 이익에 눈이 먼다. 그것에 시선을 고정할 때 이미 자신은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어깨동무>에 등장하는 우리의 이웃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기보단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경우가 많다. 열심히 살아도 도저히 바뀌지 않는 불안한 오늘, 내일이란 이름은 과연 자신에게 빛으로써 비추어줄까?

 

인권은 참으로 오래 전부터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있었다. 노예가 엄연히 존재하고, 여자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권리가 박탈당하고, 인종차별과 종교전쟁이 늘 테러와 전쟁으로 이어져갔다. 결국 인간이 말하는 정의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왜 나는 되는데 남은 되지 말아야 하는가? 인권을 위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타인이란 존재를 위한 것도 되지만, 결국 나에게 큰 이익이 된다. 약자를 위한 시설이 있다면, 언젠가 나나 주변사람이 이용할 수 있고, 보장이 잘 된 복지라면,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지금에 눈앞에 있는 당근을 먹으러가지만, 그 당근을 땅에 심으면 수확물이 열린다. 우리는 땅에 심어야 할 최소한의 당근마저 뿌리를 뽑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 과연 어떤 것으로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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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수 없는 사람들 - 또 다른 용산, 집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평화 발자국 8
김성희 외 5인 글.그림 / 보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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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본 영화 2편이 생각났다. 하나는 <두 개의 문>이고 다른 하나는 <소수의견>이었다. 영화는 실제 사건인 용산참사사건을 토대로 제작했다. 영화에 대한 비교에서 전자는 사실과 영화의 편집을 했다면, 후자는 순전히 가상의 인물과 이야기로 만들었다. 전자는 그래도 르포르타주 형식을 어느 정도 차용했다면, 후자는 영화라는 특성인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반영했다. 후자의 편이 카메라 앵글의 이동과 shot by shot의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재미를 위한 요소에서 추리와 대립이란 플롯구조 장치도 잘 배치하였다.

 

약간의 재미를 주었는지 혹은 재현성에 대한 부분을 중시했는지 위의 영화들은 철거민들의 입장에서 보이는 현실에 대한 부당함을 제3자의 관점을 바라보았다. 카메라의 시선이 결국 어느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어쩔 수 없이 주인공 위주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나, 위 영화는 주인공의 성공보다는 오히려 실패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나의 영웅 신화 서사를 반영한 게 아니라 영웅은 현실에서 나올 수 없거나 혹은 영웅은 나약한 존재로 그린다. 이길 수 없기에 패배적 상황은 오히려 이야기의 비극성을 드러내고, 여기에 대한 관객의 반성의식을 촉구한다.

 

문제는 관객은 영화를 영화로 볼 뿐이지, 그 이상을 기대하는 부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상하게도 드라마의 가상으로 조형된 세계에 빠져들어도 불편한 이야기는 뒤로 담아두지 않는다. 단지 자기들의 입맛에 어울리는 반찬만 찾는 현실이다. 불편한 현실에서 인간들은 불편함에 대한 배타의식이 잠재적으로 숨어있다. 배타적 반발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에게 편리한 것만 추구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이타적인 정신은 이런 모순적 관계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세상의 부조리, 자신이 느끼는 인식의 부조리, 이것들을 찾아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의무인 것 같다. 현대미술과 현대만화는 이미지로서 수용자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미술의 예술성에서 한계는 표현과 사유의 확장이지만 서사의 확장은 없다. 미술이 대중들에게 외면 받은 이유는 바로 서사가 없고, 서사는 없는 것은 공감대를 형성이 어렵다는 점이다. 공감대의 형성에서 만화는 그 힘이 강력한 정도가 아니라 전환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전환점을 불러도 다 바꾸는 행운까지 이어지지 않지만, 적어도 뭔가를 말하여 소통의 세계로 인도하는 노크까지 발전한다.

 

<두 개의 문>과 <소수의견>의 시나리오는 바로 기존 철거민들이 농성하는 상태에서 들이닥친 경찰병력과 대치하다 큰 변을 당한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철거지역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대치하던 것은 경찰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주민들에게 각종 협박과 폭행을 시행하던 철거용역 깡패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업무상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 돌면서 철거업체 관계자와 만난 적은 있어도 그렇게 난폭하거나 위험한 사람들은 없었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서 등장한 철거업체는 조금 달랐다.

 

조직폭력배는 아니지만, 마치 조직폭력배처럼 신속하게 주민들을 내쫓는 모습은 참으로 끔찍했다. 이 원인은 무엇인가? 예전에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물가가 상승하는 이유가 부동산 지대의 상승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여 임대받은 상가가 자신의 기존의 이윤과 임대료를 해결하기 위해 상품의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자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거나, 혹은 다른 친구와 전화통화하면서 물가의 상승이 그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요소가 아니냐고 들었다. 물론 물가의 상승은 복합적이지만, 갑자기 임금이 상승하지 않고, 자재도 갑자기 올라가는 일도 드물다.

 

원자재조차도 처음에 가격이 상당히 오르다가 갑자기 등락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오르는 추세에 신도시단지 계획이나 주택재건축사업이 발표되면 갑자기 그 지역의 부동산이 폭등한다. 1년 사이에 그 부동산의 가치가 30% 이상 증가한다는 점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부유한 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의 자산가치가 늘어나고 투자의 기회가 증대되지만, 중산층에게 부동산 시세 따라 자신의 집을 팔고 이사하는 부류가 아닌 이상 독이 된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부동산의 가격이 오른다고 이사를 늘 갈 수 있는 상황조차도 불가능하다.

 

자신의 생계는 부동산업으로 통해 주택매매가 아닌 임금을 받거나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역으로 손해다. 재산세의 증가와 취득세의 증가는 역으로 세금납부가 부담된다. 그러나 제일 걱정인 부류는 세를 들어오거나 집을 구해야 하는 입주자들이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부담은 주택매매를 통해 이익을 보려는 자들의 호주머니 속에 돈이 오르면 오를수록 심각해진다. 갑자기 증폭된 부동산가격 이전투구처럼 달려드는 투기바람, 한국의 헌법은 인간의 재산권과 생존권에서 안타깝게도 재산권에 손을 들어준다. 예전에 생존권을 찾아 떠난 사람이 어느 순간 재산을 가지게 되면 생존권이 위협받는 이들을 차갑게 외면한다.

 

세입 들어간 사람이나 혹은 그 집을 소유해도 반강제로 철거당할 입장에 놓인 주민에게 이런 사업들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입장에 놓인 사람에 대해 만화작가가 현장에 가서 취재하고 지켜본 작품이다. 르포르타주의 장르인 이 만화책, 한국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이상하게도 나쁜 쪽으로 바라보고 있다. 운 좋게도 르포르타주의 장르의 만화책들은 도서관에 배치되거나 시민단체의 애용품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아니라면 웹툰으로 제작된 콘텐츠이다.

 

코믹스와 같은 재미가 아니라 사실성을 보여준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화폭에 담겨진 철거민들의 아픔은 매우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내었다. 그림체는 만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일지 몰라도 이야기의 흐름과 상황적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겪고 있는 아픔, 현실 앞에서 무력한 약자,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로 변신해 고소장을 날리는 현실, 용역깡패에게 폭행당해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외면당하는 부조리,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만화로 그려낼 수밖에 없는 우리 생활 주변에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은 TV, 라디오, 인터넷 매체 같은 매체로 전달된다. 그러나 그 매체가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외면한다. 오히려 자그마한 소식지로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주민으로 몰고 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를 임신한 임산부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저항할 힘도 없는 70대 노인에게 다수의 용역직원이 폭행하는 모습에서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 라는 생각으로 세상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다.

 

우리 사회는 최근 몇 년 사이 상당히 인심이 흉흉하게 변했다. 계속 인명사고가 끊이지 않은데 그 근본적 원인은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계속 빨리 흘러간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의문을 제기하면 다른 호기심거리와 분쟁거리를 내세워 문제의 안건을 물 타기 식으로 흘러 보낸다. 오늘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계속 그 자리에서 현실의 벽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우리가 당장 도울 수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잘못된 현실에서 미끄러지는 미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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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 세트 - 전5권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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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文學)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그대로 적는 게 아니라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나 혹은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적어보는 것도 문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소설을 읽어보면 문학이 대가들은 언제나 현실에 대해 다른 관점을 보게 해주었다. 18세기 낭만주의를 이끈 루소의 <신(新) 엘로이즈>는 생 프뢰와 줠리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것처럼 보이나, 그 안에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역시 담겨 있었다. 어떤 주제와 인물에 대해서는 진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는 거기에 관련된 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문학의 세계는 반드시 이렇다! 라고 말할 수 없으나, 문학이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서 우리는 새로운 영역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번 주 주중과 주말, 나는 도서관 문학 장서판에 꽂혀있던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았다. 조영래 변호사란 이름을 잘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에서 성폭행당한 권인숙이란 여성을 위해 활동한 변호사다. 그녀가 성고문을 당한 이유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노동운동을 하다 경찰에 의해 구속되었고, 불법으로 자행된 고문과 구금이 그녀를 악몽의 시간을 주었다. 성폭행이 지금이야 죄를 저지른 자에게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이 당연하겠지만(그러나 막상 재판 결과를 보면 어이가 없다), 그 당시에는 성폭행당하는 여성이 일방적으로 피해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여성들이 많이 몰려있던 피복 공장에서 그녀들의 나이는 대부분 20살 전후였다. 거기에 중고등학교에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린 소녀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가난이란 이름에 의해 어린 시절 꿈도 희망도 없이 공장에 나가 고된 노동과 가혹한 환경에 시달리는 비극적 운명에 울부짖었다. <전태일 평전>에서도 외국에 어느 유명배우가 다른 배우에게 구혼을 받거나 혹은 다치는 일만 발생해도 신문에 나는데, 공장에서 힘겹게 일하다 병으로 쓰러지는 소녀들의 죽음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고,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예전에 영화 <국제시장>이 나와 흥행했을 때, 나는 그 영화를 전혀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이유가 바로 당시 사회에 대해 감독과 제작진이 너무 기만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고생해서 자신이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것은 단지 어느 소수의 입장이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는 말이 안 된다. 영화 자체는 대중문화이고, 대중문화는 문화콘텐츠사업으로서 불특정 대다수 군중에게 문화적으로 소비된다. 소비되는 문화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한다. 좋은 모습만 보려하지 불편한 것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문학적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그 불편한 것을 찾아봐야 한다.

 

불편한 그 이야기가 사실적 관계로 이어지고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진실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이야기는 정말 재미가 없다. 남의 고통스럽고 불행한 이야기를 주구절절 듣는 것도 일이다. 웃기게도 남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왠지 고소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전태일 평전>과 전태일 수기나 일기를 토대로 만든 최호철 작가의 <태일이>,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태일이란 인물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아주 무거운 이름이다. 책 제목을 전태일이란 이름에 다른 호칭을 집어넣지 않고, 단순히 <태일이>라고 했다.

 

<태일이>, 왠지 듣기에 이름이 뭔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시장 앞 도로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자살한 그가 40년 정도 지난 오늘 날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역사라는 현재와 지난 과거와 계속 대화하는 것이라 한다. 전태일의 역사가 현대에 와서도 역사라는 매개체 아래 계속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태일이>는 그런 무거운 전태일의 일대기를 만화라는 매체로 통해 쉽게 접근하려 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 총 5편으로 구분되어 있고, 만화책 역시 총 5권으로 이루어졌다.

 

각 책마다 전태일의 모습이 담겨있다. 글로 보는 전태일의 모습과 다르게 만화책으로 읽는 전태일의 모습은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글로 읽는 것을 이미지로 연상하더라도, 시각적으로 만화로 보는 이미지의 흡수는 충격적인 부분이 많다. 게다가 마지막에 와서는 만화가 아닌 사진을 보면 더욱 그렇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노동운동에 소극적인 이소선 여사는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아들이 죽자, 노동당국과 공장업주들이 와서 큰돈을 내밀면서 보상금을 줄 테니 그만 하자라고 하는 모습에서 현실의 도덕성에 한숨이 나온다. 자신의 아들이 여공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분신하여 몸을 날리는데, 그것을 해결해주지 않고 오히려 묵살하려고 한다.

 

만약 거기서 돈만 받고 없던 일로 하면 평생 그 짐은 이어 후회만 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줄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은 삶을 산다. 단지 아들에게 들은 한 마디가 가슴에 화살을 날리는 기분이다. 전태일의 동생은 오빠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학비가 밀렸다고 돈을 달라고 했다. 그때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매우 슬픈 후회를 했다고 한다. 전태일은 공장에 가면 막내 동생보다 어린 소녀들이 손에 물집이 잡혀 피가 나올 정도고, 공장에 공기가 통하지 않아 폐암으로 죽고, 게다가 죽어 가는데 치료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로 때리고 욕설을 하는 모습을 참으로 괴롭다.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내가 살던 지역에 규모가 큰 공단이 몇 군데가 있었기에 그 공장에 일하던 여공들의 비참한 삶을 말이다. 재봉기계에서 바느질하다 졸음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는 것을 말이다. 잠이 오지 않게 하려고 커피나 박카스 정도 먹이는 것은 그야말로 신사적인 행동이다. 강제로 혈관주사를 놓아 밤과 새벽에도 인간을 기계와 같이 돌렸다. 그 어린 소녀들에게 말이다. 배고프다는 것은 엄청 슬픈 일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다고 배고픔과 가난 그 자체가 죄가 아닌데, 왜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전태일이 날린 세상에 대한 분노를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고통 받는 자들의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내가 고생하여 형제와 자식이 성공할 수 있다면 희생하는 것은 우리는 줄곧 보아왔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되어도 자신의 몸이 병들고 정신적으로 죽어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성공한 가족이 있어도 그 가족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족쇄로 안겨준다. 성공도 아주 일부분이 나머지는 자신의 운명을 되풀이 되는 비극에 처해진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늘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운명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죽는다. 오직 자신을 괴롭히는 쇠사슬은 죽음의 순간에 올 때 비로소 풀린다. 죽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도 그 자신의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그들의 죽음이 있다고 해도 남은 후예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면 그들은 살아갔다고 해도 살아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채 그저 사라진다면 너무 슬픈 것이 아닌가? 그래서 <태일이>를 보면서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태일이가 몸을 던진 것이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계속된다는 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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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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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 년 전에 이소선 여사가 세상을 타계하셨다. 아마 하늘 위에서 한국 땅을 바라보는 그분의 아들인 전태일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에게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라 하여 귀천(歸天)이라 한다. 죽어서 사라지지 않았다면 분명 세상 밖의 어디서 바라보고 있다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에 부끄러운 일을 남기면 후회하게 된다. 나라고 그렇게 올바르고 좋은 삶을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려 하고, 만약 했었다고 느끼거나 주변에서 충고를 들으면 거기에 대한 반성을 조금이라고 실시하려 한다. 죽음 그 자체는 무서우나, 더 무서운 것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다.

 

나는 육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타인의 정신 안에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전태일 평전>은 여러모로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책이다. 전태일이란 이름을 중고등학교 시절에 들어본 것 같았다. 당시 상당한 연기력을 가진 홍경인 씨가 드라마가 아닌 영화촬영을 한 것이다. 홍경인 씨가 연기한 배우와 영화 제목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전태일의 연기를 하기 위해 스턴트맨이나 대역 없이 홍경인 혼자서 했었다고 한다. 전태일의 모습을 재현하려면 가장 어려운 고비가 남았다.

 

전태일은 비참한 노동환경에 한탄하며, 이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절망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린 후에 불을 붙여 스스로 화형을 거행하였다. 노동근로기준법을 손에 잡고, 법전이 있어도 아무런 쓸모없는 그 책을 부여잡고 자신의 몸과 같이 불길 속으로 타올랐다. 홍경인 씨가 연기할 때 그 장면은 무척 위험했다. 하지만 그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고 모든 것의 의미였다. 더 이상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희생하여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죽음조차 불사할 수밖에 없던 한 노동자의 슬픔은 우리 사회에 깊은 파동을 넘긴다.

 

사실 한국의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인권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그러나 노동문제가 매우 심각한 이유는 인간은 하루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옷을 입고 다니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결국 삶의 목적을 위해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제적인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현재 우리 사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되어 임금에 대한 갈등이 생기고, 최근 임금피크제도라는 이름으로 신구 간의 갈등이 일어난다. 자신이 일하는 곳이 자신의 가게가 아니라 대부분 고용되어 일을 한다.

 

일을 하면 임금에 의한 인건비가 기업으로서 많은 지출비용에 해당된다. 그래서 대부분 기업은 비정규직을 선호하고, 그들에게 장기계약보다 단기계약을 원한다. 퇴직금이나 휴가, 각종 복리후생 규정에서 비정규직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그나마 현대에 개선된 점은 아동노동이다. 그러나 아동이 현재 가혹한 노동을 하지 않을 뿐이지, 그들이 성장하면 가혹한 노동현장에 투입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자신의 자녀들을 좋은 근무조건에 일하게 하고 높은 수익을 받기 원하여 많은 부모들은 현실의 문제를 뒤로 한 채 자녀들에게 공부를 강요한다.

 

아무리 강요해도 일부 누구는 어려운 환경에서 분명히 일을 해야 한다. 지금은 일부일지 몰라도 전태일이 살던 시절에는 대부분이 그래 했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앞으로 미래에 그런 일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임금의 문제가 계속 사회적으로 문제되어 근본에 대한 해결안이 나오지 않으면 나중에 피해보는 것은 힘이 없는 약자이다. 자신이 겪은 배고픔을 자식에게 주지 않겠다며 공부시켜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구조다. 이런 세상에 희망이란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린 시절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현실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경제적인 임금보단 노동환경에 대한 부분이다. 아버지가 선원 노동자로 일하면서 나이가 연로하여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퇴직금도 못 받는 일도 생기고, 일하던 중에 다쳐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온 몸에 상처와 바늘자국 그리고 눈에는 세상에 대한 환멸감이 가득한 것을 볼 때가 있다. 노동자의 몸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근로조건은 그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것이지 그의 인생과 인간성까지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을 외면하고, 설사 그것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 시끄러운 잡음만 들릴 뿐이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 그런 일을 없을 것이라 믿으면서 세상의 흐름에서 바닥에 내려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에게 그것이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영원히 되풀이는 된다는 점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주변의 도처에 쇠사슬에 의해 묶여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은 것을 쇠사슬 밖에 없다.”라고 했다.

 

인간은 분명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존엄하게 살아가야 하나 이미 세상은 불평등으로 가득하다. 선천적 자연적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거나 또는 특별한 신체능력을 가졌다면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도덕적 사회적 불평등은 분명 문제다.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은 고의적인 요소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 생각났다. <자본>에서 영국 공장 감독관이 작성한 기록이 나온다. 다행히 공장 감독관은 당시 암울한 공장노동자의 현실을 자세히도 기록했다.

 

대부분 공장에 어린 소녀들이 옷을 만드는 작업공정에 투입되었다. 이들에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노동을 시켰으며, 하다못해 잠을 못 자게 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강제노동을 시킨 적도 다분했다. 이제 5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들은 기계의 사이 끼여 있는 불순물을 골라내기 위해 추운 날 맨손으로 쉴 새 없이 일을 한다. 환기가 좋지 않아 신선한 공기도 흡입하지 못하고, 음식도 볼품없다. 게다가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온갖 욕설과 심지어 구타까지 일어난다.

 

이게 인류가 발전했던 원동력 중에 하나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된 성과의 열매는 모조리 기득권에게 돌아갔다. 이것이 우리의 인류의 역사였고, 그 비극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1960년대 산업화란 이름으로 공장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터도 가열되면 고장이 나므로 쉬는 시간은 노동자들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모터가 돌면 노동자도 돌고, 모터는 기계로 이루어졌지만, 노동자는 그 모터의 부품 중에 하나였다. 사람이 휴식을 취하지 않고 일만 하면 몸에 병이 든다.

 

병자를 두고 가련하다고 말 한 마디로 못해줄망정, 그들에게 온갖 야유와 조롱을 퍼붓고, 그런 병자들은 낡은 골방에서 혼자 외롭게 죽어간다. 위선으로 넘치고 폭력적인 권력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비정한 현실에 자신과 세상을 저주하면서 사라진다. 전태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입에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여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나이가 중학교에서 예쁜 교복을 입고 친구들이랑 수다 떨며 지내야 할 그 소녀들이 입에서 피를 닦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그런 노동은 한국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이어졌다. 외국에서 온 노동자 그것은 여성노동자에게 그때보다 설비와 제도가 발전했다고 해도 무서운 세상의 욕심에서 한도 끝도 없는 억압에 시름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전태일과 친구들처럼 당장이라도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거나 몸에 휘발유를 뿌리라고 권하지 않는다. 단지 이것을 읽고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세상이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런 세상에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세상은 언제나 비참한 최후의 비극을 맞이한 후에 깨닫는다. 우리의 앞날에 그런 비극을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전태일이란 이름을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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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이야기 그림
최호철 지음 / 거북이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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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순환선>을 말하면 서울지하철 2호선을 말한다. 지방에 사는 나라도 서울 을지로를 순환하는 지하철을 알고 몇 번 타 본적이 있다. 서울에 가면 중요한 시내를 환승할 때 2호선을 빠질 수 없는 구간이다. 신도림역과 합정역, 잠실역과 사당역, 우리 형이 작년까지 서울 봉천동에 살 때 내가 내리던 역도 2호선이었다. 2호선을 타면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서울의 지하철은 서민의 발이다. 교통체증이 심하고, 인구 대부분이 서울경기도에 집중된 한국사회에서 지하철의 만원사태는 항상 본다.

 

다른 지역과 다르게 서울은 지하철 중심의 교통체계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일반 아파트 단지부터 시작하여 쇼핑센터, 대학교 및 정부 공공기관마저 그렇다. 모든 중심이 지하철로 매개되어진다. 그러나 최호철 선생의 <을지로순환선>은 지하철 내부를 보여주거나 지하철에 탑승하는 사람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을지로라고 하는 것은 지하철 노선이기도 하겠지만, 맨 처음 검은 바탕에 그려진 하얀 실선의 그림들은 서울의 한 바퀴를 돌아가는 것처럼 서울이란 도시를 하나의 유기적인 존재로 보고 그려낸다.

 

여기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거나 혹은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세상은 발전되면 될수록 좋아진다고 하나, 왠진 그것은 꿈과 같은 이야기다. 꿈이라도 좋은 꿈이 아니라 최악의 악몽이다. 남의 입에 들어가는 좋은 떡을 보는 게 정말 행복한 일인가? 내 입에도 하다못해 콩고물 하나라도 들어가 그 달콤한 맛을 보는 것이 좋을지 모르나, 세상은 오로지 그것을 멀리서 부러운 시선으로 보도록 한다.

 

이런 세상에서 매일 같이 일상을 전쟁터로 보는 이들의 삶은 어떤가? 삶에 흔적에 언제나 행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울한 하늘 위에 구름이 잔뜩 끼여 낮에 맑은 하늘과 밤에 반짝이는 별조차 볼 수 없다. 하지만 구름은 언제나 이동하고, 그 농도가 강해지면 비로 내린다. 비가 내린 하늘은 맑고 푸르며,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그런데 왠지 우리의 서울하늘은 언제나 여름철 장마전선인 모양이다. 눈에는 분명 하늘은 맑은데, 마음의 눈에는 언제나 흐림이니 말이다.

 

16세기 영국의 왕국은 국가재정을 탄탄하기 위해 혹은 영주가 자신의 부를 늘리기를 위해 농지에 살던 농민들을 모두 내쫓았다. 농민들은 왕과 영주를 위해 농사를 짓던 농노였다. 그들을 내몬 이유는 그 자리에 목축지를 만들어 양을 풀었고, 양에서 나오는 양모를 팔아 수익원을 삼았기 때문이다. 농지를 잃은 주민들은 모두 도시로 흘러가고, 배고픔과 추위에 시름 앓는다. 운이 좋으면 공장의 노동자나 부잣집 하인으로 고용되나, 대부분 거지나 좀도둑이 되어 마지막에 범죄자로 몰려 고문당하거나 교수형에 처하게 되었다.

 

서울이란 도시 혹은 서울 인근에 위치한 지역이 급격한 성장한 현대사회에서 갈 곳이 없는 가난한 자들은 계속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내쫓기게 된다. 그들은 더 저렴하고 개발이 당장 되지 않을 것 같은 곳을 찾다가 멀리 이동한다. 나쁜 주거환경, 불편한 교통여건, 각종 공공성 재산이 없어 항상 생활은 허덕인다. 우리 이웃은 이렇게 우리의 이기심에 의해 우리의 눈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도 사람이고, 그들 역시 살아가야 한다. <을지로순환선>으로 그려낸 최호철 선생이 바라보는 세상이란 이렇게 아프지만 사랑스럽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힘들게 살아가는 그들이 있는데 말이다. 땅 밑이 있어야 땅 위에가 존재한다. 토대가 있어야 멋진 건축물과 빌딩들이 하늘을 향하여 올라갈 수 있다. 거만한 인간의 욕망은 마치 하늘 위에 존재하는 절대자처럼 되고 싶은지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이런 차가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그것조차 없다면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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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10-0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이 양반은 그림 자체가 스펙타클하잖아요. 저번에 세종문화회간인가 거기서 이 분 그림 본 적 있는데.. 진짜 보니까 후덜덜합니다. 그 크기부터 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10-03 15:30   좋아요 0 | URL
곰발님의 글 자체가 스펙타클합니다..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5-10-03 15:51   좋아요 0 | URL
앞으로는 글자 폰드 34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