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무엇을 찾아가는가?

인간에게 자신이 언제나 고민하고 갈등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것은 자신이란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 존재해야 하고, 누구하고 같이 있어야 하는지 또한 그것으로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영화관에서 관람한 <괴물의 아이>는 전형적인 서사를 갖춘 애니메이션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가진 한 소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발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작품이다. 렌이란 소년은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주변 친척으로부터 외갓집의 후손을 이어가기 위해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나오라고 한다. 아버지는 이미 전에 이혼을 하여 소식조차 닿지를 않는다. 이런 어린 소년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란 무엇인가?

 

2. 서사의 시작

렌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사망했는데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음에 대해 어른들의 사회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부정하게 된다.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현실이란 세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괴로워하고, 죽은 어머니를 계속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깊은 상처는 렌에게 지울 수 없는 짐이 되어 가슴에 큰 구멍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그 구멍이 발생한 이유는 부모와의 이별에서 겪은 흔적이므로, 자신의 비극적 상황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렌에게 현실의 세계는 그저 괴로움으로 가득한 먼 세계였던 것이다. 렌이 우울함에 지쳤을 때 갑자기 덩치 큰 사내가 렌에게 말을 건다. 그의 이름은 쿠마테츠, 강력한 힘을 괴물로 자신의 제자를 찾기 위해 괴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오가고 있었다.

 

렌이 만난 쿠마테츠, 렌이 현실에서 있을 곳은 없었고, 그에게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했다. 그 욕망은 공간적으로 비틀게 되었고, 평범한 인간이 갈 수 없는 괴물의 세계로 갔다. 괴물의 세계를 가니, 현대사회와 다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건축양식은 일본의 근대 초반의 모습을 갖추었고, 시부야의 대도시의 모습보단 그저 과거에 존재했던 일본의 도시처럼 생겼다. 렌이 만난 쿠마테츠는 그 도시에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은 괴짜였고, 쿠마테츠는 수장 자리를 두고 이오젠이란 강한 멧돼지 괴물과 결투를 해야 했다.

 

3. 인간의 관계

처음 만난 쿠마테츠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자신이 정한 일에는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외골수적인 쿠마테츠는 길에서 우연히 시비가 걸린 이오젠과 싸우면서 아무도 그에게 응원을 해주지 않는다.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차가운 반응과 거부감이었다. 렌을 큐타라고 이름 짓고 제자를 삼으려 해도, 그런 성격인지라 렌과 쿠마테츠는 계속 다투기만 했다. 다투기만 하다가 렌은 어느 순간 알았다. 렌은 자신이 부모 없는 외톨이란 점에서 세상과의 단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렌 본인만 느낀 감정이 아니라 쿠마테츠 역시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자라온 외로운 괴물이었던 것이다.

 

부모 없이 혼자서 커야 하는 아이들은 예절이나 사람대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보호받지 못하기에 언제나 다른 자들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고, 상대방에게 억눌리지 않기 위해 항상 거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렌이 쿠마테츠에게 제자로 들어간 이유는 자신만이 혼자라는 슬픔을 가진 게 아니라 쿠마테츠 역시 그런 슬픔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분명 독자적인 주체로서 태어난다. 하지만 태어나기까지 어머니라는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고, 어머니와 분리되더라도 육체가 아닌 정신은 계속 이어져 있었다.

 

바로 가족이란 것은 육체적인 끈과 더불어 정신적인 끈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 끈을 상실한 것은 엄청난 충격이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상처이다. 쿠마테츠와 함께 살아가는 렌에게 가족의 빈자리를 쿠마테츠로 채울 수 있었고, 언제나 혼자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던 쿠마테츠에게도 삶의 지지대가 생겼다. 인간은 분명 고립된 공간에서 혼자 있으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경계심으로 무장한다. 그 긴장감은 분명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자신이 고독하다는 마음에서 깊은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쿠마테츠가 렌을 제자로 삼으면서 강해진 것은 렌만이 아니다. 쿠마테츠도 이전보다 더 강한 무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스스로 강해지는 것보다 옆에 누군가 같이 한다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그런다고 무조건 인간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렌은 강해져도, 렌을 이은 다른 제자들은 강한 제자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옆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본인 스스로가 강한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의 개성과 주체적인 요소도 자신 혼자서 만들 수 없다. 인간은 타인의 존재로서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쿠마테츠와 렌이 수장의 부탁으로 강한 자를 찾아가면서 그들이 말하는 강함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강해질 수 있다면, 그 힘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4. 강함이 무엇인가?

옛날에 사람들은 의식을 치루면서 사회적 공동체를 단결하고,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서로를 지켜내려 했다. 흔히 제사음식으로 동물을 바치며, 그들의 고기를 신에게 올린 후에 마을 사람들이랑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동물로 소와 돼지가 있지만, 보통 양(羊)을 이용했고, 제사에 바칠 양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 좋은 의식이 될 수 있었다. 고기의 양이 많다는 것은 배고픈 고대인들에게 축복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양이 크다는 것이 좋다는 것으로 아름다운 미(美)라는 한자어가 탄생한다. 아름다운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제사에 바치는 양고기만이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미적인 갈등에 의해 살아간다. 미라는 기준은 인간의 이성과 감정에 의해 좌우되며, 그것에 따른 결과로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한다.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는 판단력은 어떤 상황에 놓일 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저울을 잴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아름다운 모습이란 결코 모두에게 일관적인 요소로 될 수 없지만,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윤리적 논리가 존재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기심과 교활함을 이성의 논리라는 무기로써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만 저지를 뿐이다.

 

다소 렌과 여고생 카에데의 만남은 너무 진부한 요소가 반영된 글리셰(cliche)로 가득하나, 렌이 카에데와 친하게 지낼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카에데 역시 강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옳다면 행동하는 모습이 렌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행패를 부리는 학생들로부터 카에데를 구한 렌은 이때까지 친구는 쿠마테츠와 타타라, 햐쿠슈보에 불과했지만, 이제 인간의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 괴물의 세계에 자란 렌은 현실의 세계에서 말소된 인간이 되었지만, 다시 인간이란 세상에 사회적인 존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의 첫 걸음으로 언어의 사용이다. 사회적 약속으로 정해진 언어, 그리고 자신의 연배에 맞는 언어로서 교육과정을 접한 렌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놓이게 된 것이다. 작품에서 현실에서 보이는 것보다 오히려 환상의 세계에 있는 환상이 더 진실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렌에게 현실은 자신에게 진실한 세상이 아니었다. 어른의 사정으로 외갓집으로 가야했던 렌은 혼자 힘으로 집에서 나왔다. 인간의 현실세계가 아닌 괴물이란 환상적인 세계로 갔던 렌에게 자신의 존재적인 진실은 현실이 아닌 오히려 환상의 세계에 존재했던 것이다.

 

인간은 현실세계에서 뭐든지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 그렇게 되는 일들은 없다. 언제나 자신의 주변에 조건과 한계가 따르며,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좌절감을 맛본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 이상적인 공간은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이다. 렌은 괴물의 세계에서 쿠마테츠의 제자가 되어 자신의 모습을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정체성의 혼돈을 의미한다. 행방불명이 되어 다시 자신의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다. 어머니 죽음 이후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던 렌에게 다시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란 오랜 시간을 두고 새겨진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아버지가 과거의 일은 잊고, 다시 새로 시작하자는 말에 렌은 분노한다. 여태까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어두운 기억과 슬픔이 다시 떠올랐으며, 그동안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자신에게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쿠마테츠와의 시간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현재는 과거의 시간을 축척에 의해 존재한 것이다. 과거에 의해 축척된 현재는 다시 또 다른 과거가 되어 미래에서 현실로 전환된다.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의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셈이고, 현실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미래를 향하여 발을 돌리는 것조차도 부정당하게 되는 셈이다.

 

쿠마테츠와 보내면서 렌은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쿠마테츠와 보낸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 아주 소중했으며, 쿠마테츠와의 추억은 자신을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준 계기였다.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의지할 게 없다면 자신의 가슴에 빈 공간이 생기고, 인간은 그 공간에서 나온 깊은 어둠과 아픔으로 세상을 극단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구멍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 인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구멍이지, 마음 안에서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계속 가슴 속을 도려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다.

 

그 상처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결국 자신을 이해해주고, 자신의 속내를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 강해지고, 그 강함은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논리로서 아름다움을 만들 수 없다. 논리라는 것은 자신의 이기심이 반영되어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논리로 말할 수 없는 마음이 강하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카에데는 흔히 볼 수 있는 가냘픈 소녀이다. 카에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고, 렌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공부를 봐주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카에데는 후반부에 가면 위험하고 아찔한 순간에서 용기를 내어 렌의 곁에 서준다.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카에데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서 강한 마음으로 렌과 함께 한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는 억지로 보여주는 것보다 자발적인 모습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쿠마테츠가 이오젠과 대결할 때 처음에 밀리기 시작했다. 옆에 함께 해주던 렌이 인간세계로 다시 돌아간다는 말에 화가 나서 싸워서 렌이 집에서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렌이 다시 무도장에 오자, 쿠마테츠는 렌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후 힘을 되찾은 후 이오젠에게 승리한다.

 

5. 허먼 멜빌의 <모비 딕>

19세기 영미문학 작가로 허먼 멜빌이 있었다. 그가 만든 소설 <모비딕>은 거의 1,000페이지에 가까운 거대한 소설이며, 소설을 읽으면 고래에 집착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괴물의 아이>는 일본의 설화에서 민담이나 전설적 요소를 작품에 반영했다. 괴물들은 수인으로 이루어졌고, 수장으로 나오는 토끼는 자신의 옷에 연꽃을 새겨 넣었다. 연꽃은 불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꽃으로 더러운 연못에도 향기로운 연꽃이 나온다는 점에서 진정 향기로운 인간은 깨끗하기만 한 곳에서 나온 자가 아니라 오히려 깊은 상처와 아픔, 시련을 겪은 인간에게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타인에 대한 진정한 교감이 있어야지 인간은 진실로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소설 <모비 딕>은 그것과 반대되는 소설이다. 9살 집에서 나온 렌이 친척들이 짐 정리하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책이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다. 그리고 도서관에 들렸을 때 우연히 카에데를 알게 된 동기도 <모비 딕>을 읽어서이다. 이치로히코와 결투를 펼칠 때, 이치로히코는 렌이 들고 있던 <모비 딕>을 발견한 후 쿠지라(고래)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이치로히코는 스스로 흰 고래(모비 딕의 한자어는 백경(白鯨)이다)이 되어 시부야의 거리를 파괴한다.

 

<모비 딕>이란 소설을 보면 주인공 이슈메일은 고래잡이배를 탑승하고, 그 안에서 이교도 용사 퀴퀘그를 만난다. 위대한 전사의 후예인 퀴퀘그는 고래잡이배에서 거친 바다를 누비며 고래를 사냥하러 왔으며, 주인공 이슈메일과 의기투합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배의 선장은 에이해브이다. 그는 포경선에서 아주 노련한 선장으로 다리 한쪽을 잃어 목발을 사용하여 걸어 다닌다. 에이해브 선장의 다리를 빼앗은 것은 아주 큰 흰 고래 모비 딕(Moby dick)이었다. 몇 년 동안 복수에 눈을 빼앗겨 미치광이처럼 변한 선장은 오로지 모비 딕을 찾기 위해 머나먼 바다를 향하여 찾아간다.

 

집에 아내와 자식이 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많은 고래를 포획하여 돈을 크게 벌어도 소용없다. 오로지 모비 딕에게 작살을 날려 모비 딕의 배를 가르고 그 살을 씹어 먹는 게 그의 유일한 삶의 목표다. 모비 딕을 알고 있던 카에데는 그 소설에서 인간의 내면이 바로 모비 딕이란 큰 고래이며, 인간은 자신을 파멸하기 전까지 어디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방황한다는 점이다. 실제 소설 <모비 딕>에서 에이해브 선장이 타던 배에 탑승했던 선원은 거의 다 죽는다. 오로지 소설에서 주변사람과 상황을 관찰하는 이슈메일만이 기록의 전달자로서 살아남을 뿐이다.

 

인간을 사로잡은 집착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날린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삶의 목적, 자신의 현재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을 수 없으며,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면 삶의 재미와 의미를 느끼지 못해 매우 비참하고 쓸쓸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옆에 누가 있어도 고립된 자신과 고독으로 가득한 마음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게 된다. 이치로히코가 모비 딕으로 변한 점은 그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점에서 참을 수 없는 고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와 타인을 다르나, 비슷한 공통점이 있으며, 그것은 자신에게 소속의식으로 통한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믿었던 진실로부터 멀어지면서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세상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며, 이치로히코는 그런 자신의 어둠에 갇혀 폭주하게 된 것이다. 자신 스스로 모비 딕이 되던 것처럼 말이다. <모비 딕>과 관련하여 애니메이션 음악을 일본 밴드그룹 Mr. Children이 맡았다. Mr. Children도 제법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들이 음악연출을 맡았을 때, 소설 <모비 딕>이 나온 점에서 Led Zeppelin의 <Moby Dick>이란 곡을 삽입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오지 않은 점에서 조금 아쉬웠다.

 

고래가 되어 시부야 바다처럼 묘사된 아스팔트 도로를 돌아다니는 모습, 고래가 바다에서 뛰어 오를 때의 모습, 렌이 고래와 싸우는 모습은Led Zeppelin의 <Moby Dick>하고 어울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생각하면 소설 <모비 딕>에서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에게 패배했지만, <괴물의 아이>에서 에이해브 선장이 되어야 했던 렌은 모비 딕에게 승리한다. 그것은 렌이 모비 딕으로 변한 이치로히코의 어둠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6. 의지할 것이 없어지는 인간

<괴물의 아이>의 리뷰에서 많이 생각한 점은 우리 인간들은 주변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은 나름 영상 연출과 복선관계에서 잘 배치하려 했지만, 주제의식에서 큰 독창성을 볼 수 없었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독창성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늑대아이>편이 훨씬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과도기적인 청소년을 거친 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일반적인 모험이나 드라마장르의 작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호소다 마모루의 <괴물의 아이>에서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이냐는 점이다. 작품의 절정에 가면 쿠마테츠가 보인 결단은 인간에게 의지가 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바로 신이란 점이고, 그 중에서 정령신이란 점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정령들을 믿는 것을 두고 샤머니즘이라고 한다. 작품에서는 다소 토테미즘적인 요소를 보였다. 괴물들은 동물들이 수인처럼 등장했으며, 토템이란 것은 인간들이 동물을 자신의 조상이나 신으로 모시며, 그 동물의 특성에 따라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문화적 특성이 있다.

 

작품에서 수장인 토끼, 쿠마테츠의 라이벌 이오젠은 돼지, 타타라는 원숭이였고, 렌이 처음 주텐가이에서 마주친 괴물은 말이었다. 이 동물은 주로 12간지에 등장하는 동물이며, 쿠마테츠의 경우 곰으로 등장하나, 일본 북해도 토착민족 중에 하나인 아이누족의 종교문화가 곰을 토템으로 하므로 기본적으로 일본문화권에서 토템적인 요소를 지닌 동물들이 괴수로 나온 점이다. 게다가 이들은 수장이 되면 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토템을 믿는 민족에게 그 토템의 동물은 신이다.

 

인간의 세계와 갈라진 괴물의 세계는 본래 분리되기보단 인간의 사회에서 잊어진 세계의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신에 대한 믿음, 과거에 유지했던 신앙적 체계가 크게 변했다. 그런데 쿠마테츠가 선택한 정령신 형태는 인간에게 신이란 존재가 필요하다는 점으로 볼 수 있다. 마음속의 칼, 쿠마테츠가 언제나 주장하던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진짜 마음속의 칼이 되어 렌과 함께 살아간다. 괴수가 아니라 하나의 신으로써 말이다. 그렇다면 신이 없는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에게 뭔가 집착할 수 있는 상징을 부여하는 것이다. 인간이 어디에 기대지 못한다면 자신의 소지품에 의지하는 경우가 있다. 행운의 부적으로 반지와 펜던트, 인형이나 목걸이는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다. 카에데가 처음 렌에게 건넨 물건은 자신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책갈피였다. 렌이 정체성의 혼돈으로 괴로워하자, 카에데가 그것을 행운의 상징이라 한다. 그러자 렌은 안정을 되찾았으며, 후에 이치로히코와의 결투에서도 그가 가진 고립감을 채워주기 위해 카에데가 준 책갈피를 이치로히코의 손목에 걸어준다.

 

자신의 마음에 의지할 수 없는 존재, 자신만의 신이란 존재가 없다면 어떤 상징적 도구에 자신의 마음을 부여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참을 수 없는 고독을 느끼며, 가끔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사실에 깊은 좌절과 슬픔을 느낀다. 누군가 알아주는 이 없이 혼자 계속 외롭게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외로움을 채울 수 없기에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대하게 된다. 그런데 그 우울한 굴레를 신의 방문과 행운의 상징으로 대체하여 결론부로 보여준 점은 다소 안타깝다고 여긴다. 오히려 다시 재회한 아버지와 혹은 카에데와의 교류,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가는 과정이 좋았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에데는 괴물의 세계를 모르는데 불구하고, 수장과 괴물의 주민들의 초대로 괴물의 마을에 찾아온다. 넓은 세계로 나가야 하는 렌에게, 그가 존재했던 세계를 본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축척된 공간적 기억을 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향하여 한 발을 밟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 축척된 시간에 의존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수 있다. 렌에게만 스스로 돌아보게 함으로 앞으로 나가야 할 새로운 대안으로 반증하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렌은 모두 사건을 해결하고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 검술을 두 번 다시 펼치지 않았으나, 앞으로 새롭게 살아갈 것이라면 더 새로운 모습이 좋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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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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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는 업무적으로 해결할 일이 있어서 회사 우리 부서장을 모시고, 타 지방으로 외근을 나갔다. 외근을 나간 이유는 용역기술자들을 모아 회의를 하는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사는 지역이 지방이고, 다른 회사에서 온 분들은 수도권 쪽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 1분은 다른 장소에서 회의마치고 잠시 본 적이 있었다. 다른 기술이사와 더불어 내려올 때 내가 기차역까지 배웅해드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를 마친 후 마침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식당을 찾다가 우연히 식육식당이 있어서 간단히 전골세트를 시키면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옆에 계신 우리 회사 부서장과 상대회사 기술이사와 대화를 나눈 것을 들으면서 조금 놀라운 부분을 발견했다.

 

2사람은 원래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상대회사는 아마 서울권 출신 공대생이고, 우리 부서장은 내가 사는 지역의 공립대학교 출신이다. 공부로서 엘리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공부를 했었다. 그런 2사람은 같은 회사에 들어갔다. 단지 1사람은 서울 쪽에 다른 1사람은 지방에 있었다. 회사의 지점이 서울은 분점이고, 지방 쪽이 오히려 본사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2사람이 예전에 기사, 대리 시절에 잘 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정도 된 것 같다. 서울 쪽은 부도가 나서 월급을 제대로 못 받고, 지방 쪽은 그나마 남은 용역과 과업을 정리하여 월급을 거의 다 받고, 직원이 나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은 회사가 부도나도 어떻게 된지도 모르고, 자신의 월급에서 어느 정도 받은 것도 모른 채 그저 회사에서 나왔고, 다른 회사에 갔다. 서로 먼 곳에서 과거 저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안 노련한 기술자들이 다시 다른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번에 읽은 소설 장강명 씨의 <한국이 싫어서>란 책을 읽을 때가 딱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이라 하여 제법 읽는데 시간이 걸린 줄 알았지만, 막상 읽으니 1시간 정도에서 끝이 났다. 주인공 계나라는 여성이 한국을 떠나 호주에 가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리얼리티가 넘쳐난다. 사실 소설은 현실적인 요소와 밀접하게 연결되면서도 한편으로 환성적인 요소 혹은 비일상적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 현실적인 요소에서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점이 하나의 비일상적 요소일 줄 모른다. 다양한 경험을 1사람이 겪을 수 있지만, 그런 풍파를 마치 줄줄이 비엔나처럼 엮어갈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최근 뉴스에서 4년제 초봉을 받는 신입사원이 월290만원을 받는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런데 그런 확률은 매우 희박하며, 정규직의 길로 가기도 어렵다. 얼마 전 서울에 가서 한 직장남성을 잠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인턴을 뽑았는데, 처음에 많이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으로 이야기했지만 20명 넘는 직원에서 3명만 되고, 나머지는 탈락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20명도 수많은 경쟁을 뚫고 온 자고, 어느 기업은 인턴의 인턴을 뽑는다고 했다. 인턴에서 정규직 전환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수준인데, 인턴의 인턴에서 정규직은 무슨 코미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씁쓸한 기분이었다. 나보고 물어보면 해마다 계약서를 쓰고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통례 일뿐이지 정규직에 가깝다. 물론 어느 순간 부서에 쓸데없이 인간이 넘치면 운이 없으면 나갈 수 있겠지만, 아직 그것도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고, 나와도 기사자격증이 있어서 적당히 넣으면 구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공대출신이란 공돌이는 자격증이 먹여살려준다. 문제는 크게 먹여주지 못하는 점과 그래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금전적인 혜택은 없다. 사업자가 되려고 해도 이미 엔지니어 바닥은 새롭게 나가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도시계획이 정비되고, 환경과 법적인 절차가 계속 요구되니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짜증이 나는 것은 분명히 있다. 나라에서 고시로 정한 대가기준이 있어도 우리는 그 기준의 반에 가져가지 못하고, 때로는 1할 수준에 일을 처리한다. 나라에서 국가기술경쟁력 도모와 성장, 기술자들의 능력을 운운거리나 현실에서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시한 엑셀로 짠 설계예산서를 보고 있자면 웃음만 난다.

 

그런 웃음이 나는 예산에서 일을 하는 현실은 웃기고, 그런 일을 1인당 프로젝트 소수가 아니라 몇 개씩 잡고 있는 것도 웃기다. 지방과 서울의 중소기업이나 메이저나 상황은 같다. 아니 메이저 쪽은 평일에 제시간 퇴근이란 단어는 없고, 주말에 나와 PC 앞에서 좀비처럼 눈이 퍼렇게 들어가는 것도 다반사다. 계나라는 주인공이 소설에서 호주에서 가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차도를 건널 때의 모습이다. 물론 알고 있지만, 우리는 차 앞에 갑자기 사람이 놀라 짜빠지면 운전하는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욕하거나 화를 낸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어느 늙은 신사분이 쓰러진 계나에게 괜찮은지 묻는다.

 

잠시라도 멈추면 화가 나서 화산이 터지는 상황이다. 요새 많이 등장하는 신문기사로 난폭운전과 보복운전이 있다. 조금 나도 해 본 일이 있는 듯하다. 심각하지 않으나, 1차선으로 유턴을 하려고 천천히 진입하는데, 2차선에서 갑자기 차 한 대가 방향지시등도 켜지 않고 올 때, 그때 친구와 나는 그 차를 보고 욕을 하고, 경적을 울렸다. 문제는 그 상대편도 같이 시비에 말려들어 운전 내내 인상을 찡그리면서 간 것이다. 가끔 운전할 때 창문으로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이 창문을 다시 올리고 가는 일이 많기에 별로 운전하다 그런 일은 없지만, 가끔은 있다.

 

그렇게까지 독하게 굴 것까지는 없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양해를 구하고 오면 되는 문제다. 그것조차 바라지 않고 바로 표출한다. 그만큼 한국사회에 여유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빡빡한 일상과 현실은 여과 없이 닥친다. 아침 출근길은 지옥철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 가끔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왜 내 팔은 위에 손잡이 잡지 않지만, 지하철의 진동에 내 몸은 쓰러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까라는 점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어 만든 한자가 人이라 한다. 한자로 보면 하천을 의미하는 川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대신 짐을 선반에 올리지 못해 2팔이 괴로웠지만 말이다.

 

형이 서울에 살면서 지하철을 타고 교통정체 없이 가느니, 차라리 차가 막혀도 내 차로 간다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과연 그 이유가 왜 그런지를 난 알게 되었다. 보이는 것은 답답한 벽이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바쁜 업무와 골치들이다. 이런 세계에서 과연 청춘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사랑이란 단어에 연애조차 간단하지 않은 것을 안다. 연애는 남자와 여자의 문제지만, 결혼은 가정과 가정의 연결이다. 가정에 부모님과 형제자매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부모님의 형제자매와 주변 사람도 같이 엮여가는 순간 일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최근 핵가족 체계로 되어 그 정도지,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국 어른들의 문화에서 각종 꼰대들이 개입한다.

 

계나가 탈출하는 이유는 사랑도 직업도 꿈도 없고, 집에선 좁아터진 방에 3자매가 서로 엉켜 살아간다. 18평 집에서 재개발로 24평에 간다고 해도 1억원이 이상 소요된다고 한다. 소설의 시점에서 계나가 26살 정도에 호주에 갔고, 6년 정도 있다가 다시 한국에 온 점을 본다면, 유학을 간 시점은 대략 201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그때가 1억이니 지금은 대략 2억은 넘을 것이다. 주택재개발사업에서 예전 집과 새롭게 지어질 집의 가격은 같지 않다. 지대만이 아니라 건축물까지 가격을 정하면 계나의 집은 이사 가지 않은 편이 좋고, 재개발이 오지 않은 편이 좋다.

 

계나의 집에 쥐가 나오고, 어린 시절 아는 친구가 연탄가스에 일산화탄소에 의한 중독사를 당할 정도라면 어느 것이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계나는 꿈은 단순했다. 크고 좋은 집에 훌륭한 차를 몰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저 다리 2쪽을 펴고 잘 수 있는 집에서 소박하게 살고, 가끔 1달에 1번은 외식을 하고 공연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외식이나 공연을 할 여유나 시간이 없다. 그런다고 호주 역시 간단하지 않다. 오자말자 호텔비보다 비싼 숙소에서 불편한 잠을 자야했고, 엉뚱한 인간들로 사고에 말려 전 재산을 탕진하고, 심지어는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하는 비극까지 겪었다.

 

어째보면 상황의 극적인 불운은 호주가 더 강한 것 같은데, 계나는 호주를 선택하고 영주권까지 받아낸다. 그리고 옆에 재인이란 1살 어린 남자도 나름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뭘 해도 안 되고, 뭔가 하려면 뒤가 받쳐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겉으로는 노력하면 되잖아 하면서 뒤에서는 해보았자 그게 그것이지 하는 이중성이 숨겨진 점에서 이 소설을 보는 내내 계나와 같은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생각하면서 의무와 선택에서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선택하는 지점에서 의무적인 요소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 의무를 하기 위한 기본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중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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