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은 민주주의 공화국, 즉 자유주의에 의거한 정치체계다. 이른바 헌정, 헌법정치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토대다. 정치적 자유주의적인 요소에서 진보는 헌법적 가치가 인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보수적 가치는 헌법 그 자체를 지키는 것이다. 


내가 평소 사람들과 정치이야기를 왠만하면 꺼내기 싫은 이유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까지 아니더라도 한번 앞 부분이라도 읽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헌법전문은 답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답을 생각하도록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헌법이 자유주의인 이유는 프랑스대혁명부터 시작한 왕족과 귀족, 성직자 계급에 의해 압제를 받는 시민과 농민, 그밖에 많은 사람들에게 신체적 자유와 인간의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모든 인간에게 이성이 있지만, 이성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나 혹은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어본 근현대의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자유주의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서 본다면 인간은 이성에 근거로 하여 행동하고, 이성의 논리성으로 사회를 움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의 논리에서 논리적이란 단어를 사람들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이성의 영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논리보단 윤리다.


자신의 인간성이나 사회가치관은 마치 도덕적이라 보면서 행동하는 양식은 파시스트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다분하다. 윤리는 사회적 함의가 문제가 있어도 거기에 의문을 품는 게 정당하다. 롤즈의 자유주의 철학을 두루 살펴보면 자유주의 사회에서 부조리에 대한 문제를 시민이 나서서 해결해야 하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사회적 문제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나, 그 문제의 원인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유의 이상이라던지 자유의 가치라는 이름 아래 자유주의를 지키는 것인지 붕괴시키는 것인지 요새 참으로 아리송하다. 철학적 사유가 없는 자유주의란 그저 자유주의의 이름을 겉만 내세우는 파시스트 내지 관료주의 체계의 도구일 뿐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왜 사회주의를 조지 오웰이 그토록 비판했을까? 


돼지 메이저 영감을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 존스의 행동을 따라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를 두고 말한다. 존스 같은 놈이라고 말이다. 요새 조광조에 대한 책을 보는데, 연산군 폭정으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고, 추후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중종이 왕이 되어도 연산군은 사라졌지만, 연산군 같은 공신세력이 남아있었다. 어느 누구를 손가락질 하는 당신이 그 손가락질 하는 사람처럼 된다고 생각하지 않은 일들은 너무 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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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꽃과 부수는 세계>는 SF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지금은 2016년이라면 그 시대는 2100년 기준으로 시작한다. 물론 작중에 등장하는 도로시와 듀얼의 시기는 2100년보다 더욱 더 후에 존재하는 데이터라고 생각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조금 겉모습의 이미지처럼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 3명이 등장하여 뭔가 귀여운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닐까 하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런 소녀로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영상서사로써 흘러간다. 전형적인 스토리나 혹은 스포일러 등보다는 이 영화에서 말해주는 의미하는 바가 뭔지 생각해본다면, 인류에 대한 감독이 바라보는 시각이다.

 

환경, 솔직히 인간은 신석기 시대부터 도구를 만들어오면서 인류문명이란 것을 만들어왔다. 특히 철기시대에 오면서 중앙집권제로 이어지고, 각국에서 전쟁과 더불어 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이루어왔다. 기원전 5~6세기 동양에서 공자와 석가모니가 있고, 서양에서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있다. 이들의 존재처럼 종교와 정치가 어느 정도 학문적 영역에서 큰 발전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쟁의 손길은 모든 인간에게 흘러가고, 20세기 큰 전쟁을 맞이하면서 인간들은 전쟁이란 것들을 줄여가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분쟁국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고, 최근에 이슬람 과격테러로 분쟁이 일어나지만, 과거의 전쟁에 비하면 횟수의 차이는 분명하다.

 

전쟁의 순기능을 인정하기 싫으나, 전쟁은 인간사회를 변화시킨다. 인간의 수를 줄이고,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이 등장하고, 과학적으로 기술이 발전하고, 문명의 수레에서 양날의 검이 되어 자신의 목을 겨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인류가 윤택해지면서 한편으로 비참해졌다. 환경이란 단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길을 나오면서 대기 중의 미세먼지가 코를 자극하고, 눈을 피로하게 만든다. 미세먼지의 농도가 강하면 호흡기 질환이 심해지고, 미세먼지의 입자가 작으면 폐 속으로 들어가 폐기종 같은 질환을 일으킨다. 과거에 결핵과 폐렴에 의한 폐질환이 이제는 대기오염으로 대체되고, 과거 이질이나 콜레라 같은 수인성 질병이 이제는 수질오염으로 인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런 모순에서 인간의 세계를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줄 도구나 시스템을 원한다. 아니라면 어떤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등장하여 신화처럼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고도 때로는 위대하기도 하다. 양날의 검이란 말처럼 검은 자신의 목을 노리지만, 자신이 노려야 할 대상의 목도 노리기 때문이다. 지구환경을 살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오염원의 통제고 오염원의 억제다. 지구를 오염시키고 파괴시키는 존재는 누구인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없으면 지구는 대기오염이나 수질오염에 몸살을 앓을 일도 염려도 없고 숲속의 작은 새들의 서식처를 잃을 일도 없다.

 

지구의 환경이 쇠약함에 따라 새롭게 만든 Mother System, 지구는 대지의 어머니라 하고, 지구를 Earth라고 하나, Gaia라고 하는 이유는 대지에서 만물의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지구를 파괴하고, 지구를 망치는 존재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이 있다. 지구의 대자연은 아름답고 위대하나,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는 지구에서는 인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기계의 사고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인간처럼 감성적이고 느낄 수는 없다. 이게 바로 기계와 인간의 차이다. 기계에겐 윤리라는 것이 없다. 단지 도덕적인 요소를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대체할 뿐이다.

 

그래서 도로시와 듀얼이 사는 세계에는 2차 공간에서 바이러스가 나오고, 그 바이러스의 토대는 2차 가상공간의 데이터베이스가 실현화 된 3차 공간에서다. 3차 공간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불안하고 때로는 오류의 집단으로 나올 수 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슬프고, 아프고, 잔혹하고, 거절하고 싶은 것들이 가득하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소녀가 리모다. 리모는 듀얼과 도로시의 세계에 새롭게 찾아온 인격화된 프로그램이다. 그녀의 등장으로 듀얼과 도로시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프로그램으로 활동하는 그녀에게 인격이란 그저 만들어진 그 자체, 인격이 있다고 해도 감정은 그저 주입된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 느끼고 행동하고에 대해 뭔가 새로운 생각을 품지 않는다. 단지 듀얼은 뭔가 자신의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이 석연하지 않다는 것만 느낀다. 그 환상의 의문을 깬 것이 바로 리모의 역할이다. 리모는 듀얼과 도로시하고 친구가 되어 다양한 경험을 나눈다. 여행을 가고, 요리는 하고, 수다도 떨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때로는 마음이 아픈 모습도 목격한다. 이때까지 프로그램이기에 맛이 있는 음식도, 재미있다고 여기는 일들도 모르고 살아온 도로시와 듀얼에게 리모는 신기한 존재다.

 

그러나 사실 바이러스란 존재는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 혹은 인간 그 자체에서 나온 불순물이다. 인간은 모든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받아들이기 싫은 것들도 있다. 현실세계 인간은 모두 Mother System에게 의존하다 그것이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지고, 다시 Mother System를 저지하려 했지만, 모든 지구의 시스템을 장악한 Mother System을 정지하는 것은 내 폐 속에 암이 있어서 그 폐조차 모두 잘라버리는 같은 행동이었다. 더 이상 인류에게 숨을 쉴 공간이란 있을까?

 

지구를 관리하는 Mother System에서 그런 인간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으려면 그 감정을 부정하는 자신의 구조체계를 변모해야 했다. 그래서 Mother System의 프로세스 백업 프로그램은 스스로를 바이러스로 인정하게 하여 Mother System의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인 듀얼과 도로시로 하여금 삭제되어야 했다. 그것은 지구를 멈추게 한 것은 인간이겠지만, 인간이 없다면 지구가 멈추는지 아닌지도 모르며, 인간만이 현실을 자각하기에 비로소 지구라는 존재가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기쁜 것만이 아니라 슬픈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듀얼과 도로시의 경험에서 듀얼은 자신이 관리한 가상세계에서 바이러스가 된 자, 스미레를 직접 지운다. 아름다운 피아노를 연주하는 꿈이 많은 소녀 스미레, 물론 프로그램의 업무로 본다면 듀얼의 일은 합당하나, 과연 친구였던 자의 꿈을 파괴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그저 주입된 것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슬픈 일일 것이다. 정말 자신이 슬픈 일을 하고 있다거나 혹은 겪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

 

도로시도 처음에 듀얼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대략 19세기 유럽 귀족가문의 딸로 활동하고 있을 때, 도로시는 이때까지 가지지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매를 가졌다. 그곳에서 나눈 정이란 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가상공간에서 경험한 자신의 마음과 기분은 가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Mother System의 의도 아래 태어난 리모는 바로 이것을 노린 것이다. 인간은 시스템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으나, 그곳에 머물려 정체되면 아무 것도 만들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물론 인간이 이때까지 같은 인간에게도, 자연의 동물에게도, 대지의 자연에게 해왔던 잔인한 짓들은 관객의 눈으로 보는 나 역시 많은 것을 생각나게 만든다. 그런다고 인간 그 자체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 세계를 모두 부수는 것과 같다. 작품의 제목처럼 유리의 꽃은 인간에게서 완벽한 모습, 즉 좋은 점만을 말하는 것이고, 부수는 세계는 그런 아름다운 겉모습을 추구하는 세계는 결국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 아름다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새롭게 탈피할 때 태어나는 것이다. 주제성은 물론 이해할만하나, 그것을 어렵지 않게 잔잔히 보여준 점은 감독의 역량으로서 역량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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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니메이션과 철학

애니메이션이란 이미지의 세계이다. 이미지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이 실재 현존하는 공간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세계이다. 우연히 어느 블로거의 글을 보면서 조금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철학이란 것이 돈은 안 되어도 왜 필요한지에서 단지 지금은 철학이 대세가 아니라는 글을 보았다. 애니메이션과 철학, 너무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애니메이션에 철학이 없을 수도 없고, 철학만을 위해 만들어진 애니메이션도 존재한다. 철학은 우리 세계 어디에도 존재한다. 단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를 제기하는 이유는 2016년 1/4분기 애니메이션 <무채한의 팬텀월드>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조금 떠오른 작품은 <바케모노 가타리>이다. 그 이유는 2작품 모두 인간 세상에 과학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존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케모노 가타리>는 괴이(怪異)라는 등장시킨다. 아니 정확히 보자면 신이(神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신이란 모든지 숭배되어야 대상도 되나 때로는 내쳐야 할 대상도 된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신이란 양과 음의 존재성을 띄고 결국 인간의 무의식적 요구에 따라 변형되어 버린다.

 

신화라는 인간이 만든 서사에서 신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이 원래서 만든 이야기라는 점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는 그런 점에서 <바케모노 가타리>의 신이(神異)의 요소를 넘어 상상의 세계까지 확장한 것이다. 즉 인간의 세상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공상과학적 요소, 초능력적인 요소까지 등장한다. 거기에 덧붙여 신화의 세계도 등장한다. 이런 비일상적인 세계가 일상의 세계에 등장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낯선 일이라 보겠지만, 사실 낯선 것이어야 말로 우리 세계에 내재된 숨어있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잊어버린 이야기라고 볼 수 있고, 다르게 본다면 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다.

 

2)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마주해야할 세계는 인간의 외연도 존재하나, 내적인 세계 역시 존재한다. <무채한의 팬텀월드>나 <바케모노 가타리>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팬텀과 괴이 현상들은 외부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외부는 인간의 내부에서 만들어낸 잉여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무채한의 팬텀월드>를 알아간다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고, 인간이 스스로 탐구하고 사유하는 것이란 철학적 자세가 필요하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들 그렇게 어렵고 따분한 것을 왜 하냐고 한다. 모른다고 해서 삶에 당장 무리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을 알면 좋은 점은 어떤 현상에 대해 그 밖의 화제에 대해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 등장하는 팬텀들은 물질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물질적이지 못한 것들이 물질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에 존재하는 이형의 존재, 즉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즉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적 존재이란 점, 형이상학은 철학에서 고대그리스부터 다루어온 학문이다. 그리스 유명한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이란 서적을 저술하고, 그 책은 자연의 세계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다룬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말도 안 되는 비논리성도 있지만, 당시 인간에게 보자면 엄청난 학문적 성과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 있기에 인간 역시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영혼의 존재로 승화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 플라톤의 저서들을 보면 인간이 위대해지면 하데스의 궁에 가게 되면 후세사람들로부터 큰 숭배를 받는다고 한다. 플라톤은 죽었지만, 플라톤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저승이란 세계를 글로 남긴다. 그가 진짜 저승세계에 갔는지 혹은 가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인간이기에 인간은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는 단순히 스토리와 주인공 히로인의 모습을 보고 쉽게 넘어가기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란 이름을 거론한 것처럼 주인공 하루히코고 서사 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이론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소쉬르, 융, 프로이트 등 철학자와 심리학자 이름이 계속 등장한다. 파롤이란 것은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언어학자인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언어라는 것은 langue and parole로 나누어지고, 후자 빠롤이란 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이다. 랑그는 사회적인 개념을 가진 언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3)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의 팬텀

빠롤이란 용어가 나온 것은 목소리를 이용하여 팬텀을 퇴치하는 코이토 때문에 나온다. 그녀가 힘을 발휘하기 전에 주문 같은 영창을 외치고, 그에 따라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위력은 강력해진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에서 기호학은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에 의해 구조주의로 발달하고, 구조주의는 20세기 중후반 세계적인 학문으로 이어간다. 그래서 <무채한의 팬텀월드>를 보다보면 전문적인 용어나 개념이 등장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스쳐가듯이 바라보면 작품에서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게 된다.

 

작품은 어느 연구기관의 사고로 인간의 뇌기능이 변질되고, 뇌의 돌연변이는 인간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존재 팬텀을 등장시킨 것이다. 하루히코가 그려서 소환하던 괴수 역시 형이상학적 존재다. 눈에 존재하지 않은 괴수를 과거 인간이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이미지로 남겨 후세사람들에게 기록으로 전한 것이다. 팬텀이란 존재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세계고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게끼를 전해준다. 그러나 그 시작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미지의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에 부여된 팬텀은 인간의 오랫동안 정념을 들인 존재가 많다.

 

마이가 처음 나올 때 퇴치한 림보게임에서 전신주는 인간에 의해 탄생되고, 인간의 생활을 위해 사용된 것이다. 결국 팬텀은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타의에 의해 출현한 존재다. 인간이 그것을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결국 인간의 정신세계가 만든 것이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중시한 것처럼 신화적 요소를 중시하고, 무의식적 세계를 중시한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 가장 중요한 학자는 융이다. 융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제자이나, 반(反) 프로이트학파를 만든 장본인이다.

 

융은 인간에게 전 지구 내지 혹은 지역적으로 무의식 세계가 공통적인 요소가 있으며, 공통적인 무의식 세계가 바로 신화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이 수면 중에 꾸는 꿈은 개인의 신화이기에 인간은 이성이 있든지 아니면 이성이 없는 수면 중이라면 신화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의 이야기를 보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고, 허황된 세계지만, 그곳이야말로 인간의 본연적 세계가 드러나고, 인간이 숨겨놓은 욕망과 원하는 바가 자리 잡은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사유에서 <무채한의 팬텀월드>는 그 마지막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팬텀이란 결국 인간에 의해 결정된 것이란 점을 말이다.

 

4) 에니그마 등장은 무엇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마지막에 등장한 에니그마는 모든 인간의 초능력을 빼앗으려 한다. 자신이 만약 모든 초능력자의 능력을 가지는 순간 절대적인 존재로 되고, 인간에 의해 탄생된 팬텀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혁명 혹은 쿠데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니그마가 인간에 대한 지배욕구를 품게 된 동기는 그녀에게 가해진 잔인한 생체실험이다. 에니그마는 인간의 비윤리적인 폭력에 악의를 품고 모든 초능력자의 능력을 빼앗으려 한 것이다.에니그마가 흡수한 능력 중에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기능도 있었고, 하루히코에게 특수한 능력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하루히코의 능력을 빼앗기 위해 하루히코의 어머니 몸을 조종한다.

 

인간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이제는 역으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니그마는 인간에 의해 나쁜 감정만 받은 것은 아니다. 거짓의 감정과 거짓의 얼굴로 하루히코와 조우했지만, 하루히코에게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어머니로 등장했다. 어머니의 기억과 하루히코에 대한 관계성을 에니그마 알고 있었기에 충분히 하루히코를 속일 수 있었다. 마지막에 하루히코의 반격으로 퇴치되지만, 하루히코의 생활에 대해 나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긴다.

 

처음부터 팬텀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고, 그 존재의 시작은 아리야식 연구소의 실험에서고, 에니그마의 탄생은 아리야식 연구소의 소정의 목적이다. 자신의 실수와 과오를 반성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아리야식 연구소에 대해 논하면 다른 블로거(천연마)의 글 내용에 상당히 동의한다. 왜냐하면 아리야식 연구소의 폭발사고는 일본의 핵폭발 사고를 의미한다. 핵이 폭발하면 인간이나 혹은 많은 생명체의 DNA가 변질되어 돌연변이가 생긴다.

 

미국의 만화인 X-MAN이나 혹은 많은 히어로 장르에서 주인공이 특수능력을 가지게 된 동기는 방사능과 같이 인간 유전자를 변질시키는 광선이나 가스 등에 노출된 경우가 많다. 즉 핵 사고는 단순히 폭발력과 열에너지만 무서운 게 아니다. 낙진에 의해 떨어진 방사능은 인체에 머물면 반감기 기간이 수십에서 수백년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 방사능의 유해성은 인간 유전자를 변질시켜 새로운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공포심을 심어준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에서 아리야식 연구소가 하는 짓은 마치 그런 짓을 2번 반복하는 것과 같다.

 

5) 팬텀은 새롭게 등장한 게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이 등장한 것

여기에 인간은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가? 아니라면 저지해야 하는가? 아리야식 연구소 간부들은 그 원인을 알고도 문제해결을 위한 단서를 주지 않는다. 결국 권력과 지식이란 서로 재생산하는 것으로 이권을 추구하는 담합을 보여준다. 팬텀이란 존재가 중요한 이유는 팬텀이 나와서 인간 세상이 문제가 되는 것도 있지만, 팬텀 그 자체가 인간의 현재 모습을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팬텀이야말로 인간이 그동안 가려오던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작품의 주인공인 하루히코에게 늘 루루라는 작은 요정 같이 생긴 팬텀이 있다. 아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그래도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귀여운 캐릭터이다.

 

작품 초반부터 생각했고, 나중에 완전히 밝혀진 것이지만, 루루는 하루히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다. 하루히코는 평소 독서만 하고, 성실한 성격에 매사 착실하다. 하지만 그런 하루히코는 많은 하루히코 모습 중에 가장 많이 평소에 드러난 것이지 그에게도 은밀한 욕망 내지 어리광 피우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다. 루루는 하루히코의 아니마(남성성 안의 여성성)으로 기존 남성성의 하루히코는 절제와 단정이라면 루루는 자유분방함과 나태함이다. 에니그마에게 일부 능력을 빼앗길 때 루루의 성격이 원래가 아닌 하루히코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그러나 다시 회복할 때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루히코가 그려낸 루루의 모습은 하루히코가 평소 결핍으로 가득한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남자아이가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피우며 사랑받고 싶은 감정을 대체한 것이다. 루루는 하루히코가 어릴 적에 어머니가 사주신 동화책에 나온 캐릭터와 비슷하게 생겼다. 루루의 모습은 그동안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하루히코의 욕구불만을 드러난 캐릭터다. 하루히코의 슬픈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과 같이 그네와 시소를 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루히코가 어린아이로 변할 때 옆에 마이가 있었고, 하루히코가 마이를 따르는 이유는 마이가 다른 여성 캐릭터보다 가슴이 크다는 점이다.

 

여성이 가진 가슴의 크기에서 단순히 성적인 대상이 아니라 가슴이 가지고 있는 여성성, 어린아이가 가장 원하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인 것처럼, 풍만함 가슴은 모든 인간(남녀 구분 없이)이 가진 원초적인 보금자리다. 물론 마이가 다른 히로인보다 하루히코와 오랫동안 알았던 사이고, 마이가 하루히코를 좋아하는 것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하지만 하루히코의 어머니가 나오는 점에서 하루히코는 어머니에 의한 정신적 안정으로 인해 마이나 다른 여성 캐릭터에게 고백하는 일은 쉽게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6) 팬텀을 이기는 법

이런 요소는 비단 하루히코만이 아니다. 또 다른 히로인인 레이나의 경우를 보면 부유한 명문가정의 아가씨인 그녀는 집이란 공간을 매우 불편하게 여긴다. 부모님이 다정하기보단 다소 엄격하고, 언니가 바이크를 타는 것을 좋아하나 부모님의 반대로 가출하고 만다. 레이나 내의 정신적인 빈곤은 언니의 부재와 부모님의 갈등이 자리 잡았기에 가정문제가 그녀에게 큰 짐이 되었다. 이상한 버스를 타고, 레이나가 원하는 팬텀세계의 부모님은 평소 레이나가 그려오던 환상의 가족이다. 가족문제에서 레이나 그리고 하루히코 역시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 특히 어린 아이거나 청소년들에게 가정문제는 심리적인 박탈감과 동시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마이 역시 자취를 하면서 가족과 떨어져 있고, 코이토 역시 어린 시절 초능력으로 인해 왕따 당한 기억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 있다. 팬텀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부족한 마음일지도 모르나, 그런 팬텀을 이겨내야 하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다듬어가기 어렵다. 인간의 한자어가 人間이다. 사람의 사이가 인간이다. 인간에게 사람이란 존재가 서로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인간이란 존재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팬텀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나타난다. 인간은 이성이란 정신적 활동을 하나, 감정과 무의식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도 가지고 있다.

 

<무채한의 팬텀월드>을 다시 생각해보자면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 모든 것들이 소중한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란 물리학 이론처럼, 단순히 학문적 영역을 떠나 고양이란 생물이 그동안 정들었던 인간과의 추억으로 생긴 것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은 소중한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팬텀은 인간의 마음에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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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 대한민국 네티즌이 열광한 KBS 화제의 칼럼!
박종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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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방송국에서 한국경제를 다룬 박종훈 기자의 컬럼이 <대담한 경제>라는 책으로 나왔다. 본래 경제학 전공출신 전문기자인 점에서 그의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는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일반적인 사람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내용으로 작성되어 있다. 도서모임에서 한 번 소개받은 서적으로 내용이 어느 정도 전문성을 높게 다룰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일반대중을 위한 책으로 보편적이고 쉬운 문체로 작성되어 있다. 따라서 일반인이 보기엔 좋을지 모르나, 깊이 경제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다고 책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책이 말하고 있는 초점이나 대상이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의 설명으로 진행된 점에서 심도 있게 들어갈 수 없는 점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책에서 경제학을 다룬 점에서 기억나는 이름은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 그리고 슘페터이다. 둘 다 경제학자인 점에서 애덤 스미스의 이름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저술 시기는 영국에서 중상주의를 강조하던 시기다. 그런데 지금 경영학자 중에서 중상주의를 표방하는 자도 많으며, 국가정부와 대기업의 행동을 보면 신자유주의라고 하나, 막상 그것은 중상주의에 가깝다.

 

애덤 스미스의 사상이 낡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막상 지금의 국가정책은 애덤 스미스가 그 당시 매우 낡아 빠졌다는 중상주의와 동일한 형태로 되어 있다. 과연 어느 것부터 우선적으로 낡아빠진 정책인가?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면 신자유주의 현실을 비관적으로 본다. 시카고대학, 이른바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하고 매우 관련된 대학교, 시카고학파가 존재할 정도로 시카고대학은 미국 경제학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깊은 연관이 있다. 20세기 아니 21세기에도 하이에크와 밀턴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정치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통화의 정책과 정부의 관여성에서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는 것, 즉 시장자유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의 “보이지 않은 손”과 다른 “보이고 싶은 않은 손”이 되고 말았지만, 적어도 신자유주의는 최소한 시장조율에서 소비자를 바보로 취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소비자와 생산자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자본과의 관계성은 다변적이면서 한편으로 단순하다. 물건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상은 제각각이나 모두들 경제적인 경영적인 마인드는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익에 대한 서로의 관점에서 변수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대상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현실적 조건이다. 중상주의가 문제인 점은 국가와 대상인 간의 정경유착 관계가 물가를 좌우하고, 경제적 현실을 변화시킨다. 심지어 별 것 아닌 제도조차 건축양식과 의복문화까지 바꾸니 경제라는 것은 우리 일상에서 벗어나려도 벗어날 수 없는 필수불가결적인 존재다. 다시금 애덤 스미스를 논하고 싶은 것은 경제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한 경제부분 기자가 말한 것처럼 경제의 필수는 돈만 버는 것만큼 돈이 현실에서 돌고 도는 게 중요하다. 즉 필요한 물건이 제대로 돌아가게 해야 경제가 사는 것이다.

 

중상주의 한계, 잡 집어내듯이 최근 우리나라는 무역흑자를 맞이했다고 한다. 외화관계에서 수출이 수입을 초과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수출입 관계에서 수출의 증대가 아니라 단지 수입이 적게 된 것이었다. 스미스는 수입이란 것을 지나치게 의존하면 문제지만, 수입하지 않아도 문제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필요한 재화를 구할 수 없을 경우 생활의 질이 하락되고, 현재 그 삶의 질이 낮아짐에 따라 사람들이 수입물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면 결국 경제적으로 성장이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다.

 

나도 언제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주변에도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도 버거워 하는 것이 부동산 문제다. 국내는 부동산이 주요 시장이 되었고, 부동산으로 들어가는 국가세금과 국민의 경제력, 토목건설공사로 많은 국가세금이 나라를 갉아먹고 있다. 왜 국내 경제가 어려운가? 그것은 경제라는 것은 생산을 하면 소비가 되어야 하고, 소비가 되려면 임금이 필요하다. 임금을 받아야 하나 취업이 잘 안 되고, 하더라도 비정규직이 되어 임금의 질이 하락하고 있다.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여 기계의 도입은 많은 임금노동자를 거리로 내몬다. 그런다고 공장기계나 도구를 부수는 과거의 행태는 여전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가 밝힌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된다면 새로운 가치관을 맞이하고, 거기에 대한 대응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바둑시합에서 구글에서 나온 알파고 컴퓨터가 바둑9단 선수를 5전 4승으로 이긴 적이 있었다. 뉴스에서 나온 말이 알파고의 기능이 상용화 되면 지구의 일자리가 반 정도가 사라진다. 인간 생활 진보를 위한 도구가 오히려 인간을 삼키는 도구로 도래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던 일화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응책은 새로운 변화를 맞춘 기술이 필요하고, 거기에 많은 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최근 제사를 지내러 시골에 가면서 작은아버지하고 우연히 정수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수기는 기본적으로 막여과라는 섬세한 여재를 이용하여 이물질을 제거한다. 내가 다니는 사무실의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는 도중, 정수기를 살펴보니 정수기에서 흘러내린 물을 모우는 집수통 바닥이 붉은 색을 띠었다. 원인은 아마 물속에 있는 산화철일 가능성이 높다. 수도관이 알루미늄이나 콘크리트도 사용되나 과거에 주철관 같은 쇠를 사용했다. 물의 화학반응은 쇠를 산화시키므로 정수기의 기능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작은아버지는 정수기 교체에서 미국 것을 사용했는데, 과거의 물맛과 다르고, 그 물이 고급 커피숍에도 사용될 정도로 좋은 물건이라 이야기해주었다. 사실 생각하면 물에 대한 설비기능, 환경적인 관점에서 결국 장비의 수준은 신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적 노하우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국내 정수기업체가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따라 만드는 흉내 내기가 가능해도 새로운 기능을 만들어내는 창조성은 없다. 창조경제를 외치나, 창조적인 것은 과연 그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고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21세기에 도래하기 전에 이미 20세기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맞이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서 문제는 대량생산의 기능은 증강하는 반면 대량소비의 기능은 감소한다. 인간이 하루식사 량이 정해져있고, 옷을 입을 수 있는 개수도 한계다. 그런데 웃기게도 먹고사는 것이 걱정인 21세기가 되었다. 생각하면 간단하다. 좋은 먹거리와 좋은 옷을 사야할 돈이 쓸데없는 곳에 사용되거나 또는 억지로 돈을 꼴아 박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누가 원하고 조장했는가? 국민들은 정부 책임론을 말하나, 막상 그런 정부를 만든 것은 국민이다. 심심하면 일어나는 것이 우리 집 앞에 왜 고층 아파트를 세우는지 혹은 왜 우리 동네 주변 산업단지나 대규모 공단이 오는가에서 그것을 만드는 민간업체의 무책임도 있지만, 그것을 허락해주는 정부의 기능도 있다.

 

그런 정부를 만든 것은 국민이고, 그것을 용인한 것도 국민이다. 부동산 경제에 대한 문제는 금리인하 후 무리한 대출로 집에 대한 과다한 가격으로 집이 없는 사람들이나 혹은 집을 빚을 내서 구매한 사람들은 대출이자 원금으로 고생한다. 그런데도 빚으로 구매한 집값이 오르기를 바란다. 집값으로 서민들은 고민하면서도 차액을 남기려고 하니, 결국 집 말고 다른 곳에 사용될 돈이 적어진다. 돈이 없으니 결혼하기도 부담스럽고, 아이를 낳아 길러주는 것은 거의 각오해야 할 수준이다. 한국 인구에서 재생산될 수 있는 인구, 즉 여성 1인당 출산비가 1.1 조금 넘는다. 여성 1명이 아이 1명을 조금 넘게 낳고, 문제는 그 아이들조차 모두 100% 무사히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구가 감소하는 국가는 18세기 이전부터 문제라고 지적했고, 스파르타가 용감해도 인구감소로 모두 멸망했다. 그 원인은 빈부격차이고, 빈부격차는 재생산이란 경제적 시스템을 파괴한다. 새로운 노동인구의 생성은 새로운 시장경제의 원천이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인재다.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시대까지 인구가 급속히 폭발하다 이제 그 당시 인구가 노년화로 되어 노동력을 상실 후, 집에서 연금을 받아야 하나, 점점 이들을 부양할 젊은 계층들이 감소되면서 한국사회는 침하하고 있다. 문제는 이 중요한 안건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본다고 해도 그 객관성이 공공의 영역으로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이익에서인지 혹은 집단적 이권에서 보는 지에서 큰 갈림길이 나누어진다.

 

한국사회의 경제는 단순히 한국만의 입장에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전 세계적인 흐름과 더불어 기존 한국 사회의 변화가 복잡다양하게 얽혀 움직인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자면 그 대안을 어떻게 찾을지 어디서부터 문제가 비롯되는지를 알려면,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역사가 단순히 기록물의 누적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전쟁, 외교,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종훈 기자의 <대담한 경제>는 기본적으로 외국의 역사적 문헌에서 경제적 문제를 찾아내어 현실의 한국사회와 대조한다.

 

누군가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생각할지 모르나, 민주주의 개념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철학적 사상도 없이 일반적인 국가권력 계몽주의는 단지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세뇌시킬 뿐이다. 특히 경제는 그렇다. 어떤 이권이나 이익이라도 그 최종적 형태는 경제적 조건으로 드러난다. 말로만 청년실업, 노년빈곤, 출생률 저하, 내수침체를 말하나 그 기초는 어디서부터인가? 최근 담배와 술 가격이 올랐다.

 

한국의 세금출처에서 간접세가 절대적이다. 술과 담배 가격이 올랐다는 것은 세금이 부족하고, 세금이 부족한 이유는 원래 거두어야 세수가 구멍이 나서 대신 메운 것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대담할지 모르겠다. 어째든 작가는 마지막 말에 희망은 있다고 보나, 희망은 여전히 죽어나가고 있으니 어찌 <대담한 경제>가 아닐 수가 있을까? 물론 저자도 언급하듯이 사토리 세대, 일본의 청년층들의 뭐든지 포기하기(마음이 편하지?)는 당장 불만이 보이지 않은 나라가 불능이 되는 지름길이다.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 마음은 당장 편할지라도 모순의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단지 현실도피라는 마약을 과다하게 섭취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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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혈의 오펀스> 이것은 <건담>인가? 아닌가?

개인적으로 <건담>이란 작품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개인적인 취향이 메카 장르 보단 일상물이나 개그 쪽을 더 선호한다. 그런다고 해도 전쟁물이나 로봇이 나오는 메카 장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메카가 나온다는 것은 전쟁이 필수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문명에서 전쟁은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빠지지 않은 영원한 이야기들이다. 최초의 문학과 서사라고 불리는 신화,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그리스신화에서 처음 알게 되는 인물은 제우스와 그의 가족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시인 호메로스의 의해 만들어진 <일리아스>이다. 트로이전쟁에서 영웅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에서 신인 아테네와 아폴론의 손짓이 전사들의 운명을 가른다.

 

<일리아스>의 거대한 분량의 서사시(詩)가 신화이면서도 전쟁을 노래하는 비극이기도 하고 영웅을 찬양하기 찬미가이기도 한다. 영웅의 등장은 언제나 위기와 갈등의 최고조에 등장하고, 그의 활약은 거대한 세력 안에서 이루어져 하나의 역사와 신화를 창조한다. 이렇게 거대한 세계와 이념 안에서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고, 거기서 등장하는 영웅의 활약을 노래하는 것이 그리스신화의 비극 시들이다. 영웅의 죽음은 자기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불의의 사고로 인해 죽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때 가장 강한 모습일 때의 자신을 남기고 떠난다.

 

이런 점을 <건담>에 비유하는 이유는 사실 건담이 미래공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이기에 SF 장르이기도 하나, 고대 그리스신화와 비교하여 그 기본적 명제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퍼스트건담>부터 주인공 파일럿은 우연의 사건으로 건담 프레임에 탑승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장을 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무로 레이의 같은 경우는 살기 위해 건담에 탑승했다면, <역습의 샤아>에서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탑승한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전투 병기에 탑승했던지 그가 움직이는 의지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보단 자신이 원하지 않은 거대한 조류에 의해 움직인다.

 

<건담>이란 작품은 이른바 거대서사(巨大敍事, Master Narrative)라는 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건담>이란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대표적인 거대서사의 작품이다. 관념적인 이념 안에 인간은 자신의 우월성에 도취하여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집단주의가 전쟁의 시초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많은 <건담> 시리즈에서 그런 요소를 지닌 것과 아닌 것도 있다. 더블Z 같은 경우 자신의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오로지 건담 프레임에 탑승하는 조종사도 있듯이, 각자가 원하는 목표와 방향성이란 무한대이다. 그렇지만, <건담>은 조종사가 자의든 타의든 그 거대한 물결을 따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조종사는 아직 나이가 어린 청소년이다.

 

<Thunder Bolt>의 경우 장교로 임관한 조종사가 나오나, 사실 그가 파일럿으로 활약해도 결국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지구연방군과 지온군의 대립)에서 빛을 내는 장기말 같은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2016년 1분기에 종료된 <철혈의 오펀스>는 기존 <건담>과는 상당히 이질감이 보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작품은 거대서사라는 거대한 틀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거대서사라는 거대한 틀을 부수기 위해 진행되는 작품이다. 그런다고 거대한 서사 밖이나 그것을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사소한 작은 이야기(小敍事, Small Narrative)는 아니다.

 

그 거대한 세력과 이념에 대항하는 다른 방식의 거대서사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철혈의 오펀스>에서 건담 프레임을 탑승하는 미카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 그리고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살인기계처럼 철화단 리더 올가의 명령이나 의지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 단지 자기들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담>의 작품세계를 본다면 관념적인 요소, 즉 상위기관이나 국가적 대립, 세력 간의 갈등권력자들의 이기심들이 인간을 운명의 시험장에 보낸다면 <철혈의 오펀스>는 거기에 휘말리는 인간들이 저항하는 이야기다.

 

2. 마주침의 철학

전에 어느 사이트에서 <건담> 그리고 <케이온>에 대한 글을 보다, 조금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때 등장한 철학자와 그의 이론을 최근에 내가 독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출처 말고 다른 곳에서 그 글이 나올 때는 많이 웃었다. 그 사상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 철학자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이면서도 거기서 철학을 교육했던 사람이다. 20세기 철학과 사상은 1차 세계대전 이후로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하다 나치정권 이후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프랑스로 바뀌었다.

 

21세기 철학이나 사상, 심지어 문화나 예술에서 프랑스가 최고로 된 것은 전쟁과 많은 연관이 있다. <건담>을 알려면 우선 전쟁의 비극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인간은 계몽주의(프랑스대혁명 정신)적 가치관인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품는다. 인간의 의지보단 인간이 가진 무의식적인 세계, 그리고 현재 살아가는 경제적, 환경적, 물질적 조건들이 어떤 식으로 정치나 사회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여기게 되었다. 19~20세기는 그야말로 전쟁과 혁명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갔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자국의 국민과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착취했고, 전쟁은 많은 물자와 인명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전쟁에 의해 혁명이 일어난 유명한 사례로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일어난 볼셰비키혁명이다. 러시아 소비에트가 차르체제와 케렌스키 정권 붕괴 후 최초로 사회주의국가 설립 선언을 했다. 당시 혁명가들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소비에트연방은 마르크스의 실험이 최초로 시행될 수 있었던 나라였다. 시행된 게 아니라 시행될 수 있다는 말은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론적인 조건, 즉 물질적으로 하부에서 일어난 조건에 의해 상부의 체계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소비에트가 독재정치로 바뀌었고, 스탈린의 독재는 많은 이들을 충격을 몰아갔다.

 

문제는 소비에트연방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들어서 그들의 나라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21세기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과 같은 나라에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고, 독일정부 같은 경우 마르크스의 도서가 유네스코 세계인류 문화유산에 등재됨과 동시에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정리하고 있다. 20세기 프랑스에도 마르크스주의자는 여전히 많았고, 우리가 그토록 저주하는 그들 중에서 우리가 가장 찬양하는 천재화가 피카소도 있다. 문제는 소비에트연방의 행보 때문에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순에 빠졌고, 이때 새롭게 이론을 전개한 사람이 루이 알튀세르이다.

 

그의 저서 중에 <철학에 대하여>에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유물론이 아니라 관념론이 되었고, 여기에 다시 새로운 유물론적인 가치관(아니면 본래의 마르크스주의)을 대립시켜 새로운 방향을 나오게 한다는 우발적인 유물론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 이론을 그대로 <건담>과 <철혈의 오펀스>로 대치하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 <철혈의 오펀스>에서 철화단은 어떤 철학이나 사상 그리고 이상에 대한 집착은 없다. 단지 그들이 시작하고 끝을 내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의지이다.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사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자유와 평등적 가치관이 시작된다.

 




3. 갈라르호른의 모순

갈라르호른은 지구방위와 우주평화를 핑계로 아주 오랫동안 많은 권력과 이권을 누리고 있었다. 갈라르호른에게도 건담프레임이 존재했고, 아리아식이 본래 철화단의 소년병이 아니라 갈라르호른의 기술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이 건담을 이야기할 때는 지구평화가 위기에 빠지고,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 등장하는 공포의 기체라고 말한다. 갈라르호른은 건담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이고, 역사를 가진 무장집단이다. 그런데 <철혈의 오펀스>에서 오히려 그들은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여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 명제를 망각했다. 화성을 침공할 때 소년병들이 무참하게 죽은 점, 권력 투쟁, 쿠델리아의 지구 행에서 보인 행위들은 테러에 가까운 만행이었다.

 

화성 인근에 위치한 갈라르호른 조종사가 지구에 왔을 때, 지구 조종사들은 화성 조종사가 지구출생이 아니란 점에서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장면도 나온다. 갈라르호른의 역사가 오히려 갈라르호른이 시작했던 이상을 반대로 가게 되었고, 여기서부터 마주침이 발생된다. 지구의 평화라는 이념, 안위라는 슬로건은 오히려 평화를 파괴하고 자유와 인권을 박탈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지구 근처에 위치한 인공 콜로니에서 노동자들은 쿠델리아와 철화단을 보고 그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위해 도우러 온 조력자로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들이 그런 무장봉기를 하려고 했던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자라고, 죽을 때까지 자신들은 여전히 같은 장소에 있어야 하고, 그 장소는 인간적 대우를 받을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했다.

 

이때 이들의 봉기를 뒤에서 조종하고, 오히려 이들을 반국가세력 내지 테러조직으로 내몰게 만들어 모조리 몰살당하는 비극을 보여준다. 결국 <철혈의 오펀스>는 거대한 세력 간의 다툼이란 거대서사의 일반적인 흐름을 벗어나 거대한 세력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몸부림으로 이어진 것이다. 어떤 전쟁이나 혁명, 큰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은 운명적으로 일어나는 것보단 본래부터 일어날 수 있던 에너지가 잠재되었을 뿐이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기 위한 도화선의 심지에 불이 붙지 않았을 뿐이다.

 

4. 철화단의 운명

철화단은 운명에 의해 쇠사슬로 묶여진 사람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함과 배고픔에 시달렸고,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빠져 나온 자들도 많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란 오로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정한 세계다. 갈라르호른의 침공에서 우연히 얻은 건담 발바토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건담은 위기에 빠진 세계를 구원하는 공포의 병기이다. 하지만 건담 발바토스 프레임은 갈라르호른이 가지고 있던 기체보다 성능이 뒤쳐진(제작년도가 상당히 오래된) 기체이다. 갈라르호른이 가지고 있는 다른 건담 프레임보다 더 건담의 원초적 요건을 갖춘 셈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쥐새끼들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다. 이때 바로 쿠델리아가 등장하고, 쿠델리아는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로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어중간한 정보에서 쿠델리아는 지금의 현실을 바꾸자는 이상이 생긴다. 쿠델리아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이유, 그녀가 혁명의 소녀가 되어야 했던 점은 그녀가 철화단의 소년병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소년병들은 자신의 살 길을 원했지만, 그 길을 어떻게 찾아가야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오로지 올가의 명령에 따르고, 올가는 자신들의 고용주 쿠델리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철화단을 결국 현실에서 갖은 박해와 억압을 당하는 피지배계층이고, 쿠델리아는 자신이 원래 지배계층임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향하는 이상주의자인 것이다. 그녀가 가진 이상은 분명 인간의 윤리적 가치로 본다면 옳은 것은 분명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쿠델리아의 아버지는 자신을 갈라르호른에게 팔아넘기려 했고, 친구라고 믿었던 후미탄은 자신을 이용하려고 했던 자의 첩자였다.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고, 그녀는 자신이 몰랐던 잔혹한 현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분노의 눈물을 흘리면서 진정한 의미로써 철보다 더 강한 마음을 가진 혁명의 소녀로 탄생한다.

 

그녀는 화성에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지구와 지구 밖의 다른 콜로니의 사람까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많은 목숨이 자신에게 맡겨지고, 자신은 절망의 고통이란 이름을 가슴에 품고 희망의 씨앗이 되어야 했다. <건담>에서 쿠델리아의 영향으로 전투 장면보단 그녀의 발언과 정치적 행위에 상당한 시간에 할애되었다. 또한 쿠델리아와 철화단의 움직임이 단순히 그들만의 의지뿐만 아니라 뒤에서 이권을 노리는 자들 역시 움직이고 있었다. 갈라르호른은 부패했고, 그들은 세계 정치와 경제 이권에 많은 부분을 간섭했다. 갈라르호른의 배제는 단순히 인간불평등을 해소하는 길만이 아니라 시장경제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보이지 않았던 손’까지도 움직인다.

 

어떤 큰 사건들은 누군가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것을 움직이게 되는 계기는 잠재된 에너지와 토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쿠델리아의 지구잠입은 어느 마카나이의 정치적 이익, 상회들의 경영이익, 갈라르호른의 부패, 화성인들과 사회적 약자의 분노가 충만한 상태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도착한 것이다. 물론 쿠델리아가 움직이는 것 역시 그 임계점의 도달에서 본 잔혹한 현실을 각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대한 세계에 그녀는 뛰어들었고, 그곳에서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갈라르호른 입장에서 쿠델리아는 지구평화를 방해하고, 세계를 혼란으로 빠뜨리려고 하는 최악의 인물이고, 그들은 쿠델리아의 철화단, 심지어 무장봉기(무기를 일부러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보내주고, 거기에 때맞추어 토벌했던)를 하던 노동자까지 평화를 파괴하는 대상으로 봤다. 평화라는 것은 누군가의 입장, 누군가의 권력, 누군가의 이익에 의해 판도가 바뀐다. 만약 쿠델리아가 뒤에서 방송회선을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면 쿠델리아와 철화단은 완벽한 테러리스트로 몰릴 뻔했다. 이미 갈라르호른은 언론까지 장악한 점에서 부패의 깊이가 매우 심각했다.

 

5. 탈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인 철화단과 쿠델리아

철화단의 소년병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한 고아와 노예였다. 그들은 폭력과 억압에 의해 강제로 노역과 전투를 해야 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직 현재 목숨을 바라보고 산다. 그들에게 내일이란 미래란 있을까? 인간에게 미래와 내일 그리고 희망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으면 살아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철혈의 오펀스> 후반으로 갈수록 철화단은 마치 광기에 젖은 짐승처럼 전장을 누빈다. 아직 사춘기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 소년이 무기를 잡고, 적을 향하여 투쟁한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때까지 자신들은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단지 도구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라는 명제는 생물학적인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선택에서 어떤 이상이나 이념에 구애되지 않았다. 단지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1기 엔딩곡 ‘오펀스의 눈물’을 보면 매우 슬픈 멜로디와 반주가 들린다. 평화로운 넓은 들판에 건담 발바토스가 철화단 멤버들과 평화롭게 앉아있다. 살상병기가 평화의 상징이란 말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그러나 억압받는 자들이 자신들의 살 곳을 찾기 위해서는 현실의 부조리와 투쟁할 수밖에 없는 충돌이 일어난다.

 

갈라르호른이 말하는 질서와 평화라는 이데올리기, 갈라르호른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철화단, 그래서 철화단은 탈 이데올로기적인 모습으로 갈라르호른과 충돌한다. 문제는 여기서 쿠델리아는 탈 이데올로기화된 철화단의 이데올로기로 된다. 쿠델리아의 연설은 철화단이 현실에서 겪는 고통만 아니라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대변해준다. 철화단이 갈라르호른을 거부하여 저항해도 결국은 자신들이 살아간 사회라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그 커뮤니티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길, 이상과 이념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쉽지 않고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철혈의 오펀스> 오프닝에서 쿠델리아가 심각하게 망가진 건담 발바토스의 모습을 보고 있다. 1기 마지막에서 건담 발바토스는 자신의 부하를 견디지 못해 심하게 파손되고, 조종사 미카는 눈 하나를 잃고 팔 하나가 정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들이 철화단이란 이름으로 영원히 꽃이 지지 않은 강한 철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오직 그 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탈 이데올리기의 한계점은 저항의 시작이 되나, 한 번 튀어나간 이상 다시 선로를 찾지 못하면 증오의 광기로 얼룩져 결국 마지막에 파멸하고 만다. 부조리한 거대서사에 대항하나, 결국 자신들 역시 거대서사라는 사회로 들어오게 된다. 단지 그곳에서 갈라르호른처럼 부패하지 않고, 계속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갈라르호른처럼 자신만의 역사에 갇히지 않은 채 자신들의 처음 모습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스스로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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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2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제나 이런 책들 읽어보게 될지...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3-30 09:12   좋아요 0 | URL
저 때문에 북다이제스터님, 북 과식이 되겠습니다!!!! 어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