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비한국학연구총서 14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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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중심으로 보는 조선이란 왜란과 호란에 따른 전쟁의 역사다. 조선 군주 중에서 전쟁의 핵심 가운데 있었던 자로써 광해군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에 읽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에서 다소 여러 가지 생각이 변화되기도 했다. 우선 선조가 참으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군주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정치적인 외교 전략이 있었다는 점이다. 광해군이 가진 독특한 외교능력은 선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고 광해군은 그것을 조금 더 발전시켜 상당히 교묘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이란 서적을 보았다. 그가 폭군인지 혹은 명군인지 명확하게 답을 내리기는 그러하나, 적어도 그를 한 가지로 본다는 것은 엄청난 무리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번에 한명기 교수는 나름 광해군을 평가했다. 외치적인 부분에서 완벽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전략은 현실적 상황을 제대로 간파한 점이고, 내치적으로 명에 대한 군사원조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원인이 조선의 궁핍한 사정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왜란으로 소실된 궁을 복원해야할 이유는 없고, 궁궐 내 수많은 은을 몰래 매장할 필요도 없다.

 

결국 그는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를 세우기 위해 혹은 자신의 왕권을 위해 매우 논리정연하고 날카로운 임금이 되었다. 그런다고 하여 광해군만 욕만 할 수 없다. 광해군의 의외의 모습은 그가 대북의 권력자들을 손을 잡고 있었지만, 대북의 영수 이이첨과 마지막에 갈등이 있었던 점, 남인과 서인 등 다른 파벌과 같이 정국을 운영하려 했던 점이다. 조선시대 남인과 서인의 갈등은 역시 정여립 옥사부터 시작된다. 정여립 옥사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때 남인의 영수로 있었던 이발은 정여립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발의 80세 노모와 10세의 어린 아이까지 모진 고문으로 옥사했다(그래서 아버지가 왜 송강 정철을 나쁘다고 말하는지 이해간다).

 

권력에 대한 욕망에서 선조는 정철을 속아 넘어가주었는지 아니면 선조가 그런 찬스를 노린 것인지를 생각하면, 기축옥사는 매우 무서운 일이다. 선조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당파전쟁의 피 냄새가 진동했고, 조광조를 비롯한 선비를 죽임과 낙향을 만든 기묘사화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런 부분은 임진왜란을 시작하여 정묘호란의 열쇠로 이어진다. 역사란 항상 한 가지로 볼 수 없고, 다변적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역사적인 연구도서를 보면 이른바 변증법적인 관계성이 보인다. 어느 누군가 반응을 보이면 다른 누군가의 반응에 이르고, 그것이 하나의 갈등으로 누적되면, 피할 수 없는 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학봉 김성일이 남인으로 일본에 갈 때, 그와 같이 간 인물 간의 갈등이 조정의 보고에서 희비가 엇갈리며, 율곡 이이의 있지도 않은 10만 양병설이 김장생에 의해 만들어진다. 서애 유성룡은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막상 임진왜란 시 명나라 장군이 와서 양명학을 조정에 이야기하자 선조는 주자 성리학에만 치우쳐 이야기한다. 갈등과 아이러니는 결국 또 다른 갈등과 폭발로 이어지고, 결국에 참극을 일으키는 열쇠가 된다. 이런 내정의 문제는 외교적인 문제로 확장되고, 전쟁 중에는 서로 손발이 맞지 않을 수가 있다. 동인(남인과 북인)과 서인 계열 장수가 서로 갈리고, 동인(남인) 계열의 지지를 받던 이순신은 서인의 지지를 받던 원균에 비해 혹독한 대우를 받는다.

 

사실 임진왜란 의병장 중에 곽재우 같은 경우 북인 계열이고, 충무공 이순신은 남인이었으나 사실 공훈과 비교하여 높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유성룡이 조정에서 내려올 때 이순신의 서거라는 점에서 임진왜란은 왜국과의 전쟁이기도 하나, 사실 내부적으로 정치권력의 다툼도 보였다. 그것의 시발점이 기축옥사이고, 광해군 시대에도 은근 잠재하였으며, 효종의 죽음에 이르러 크게 폭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적 관계, 특히 중국과의 관계성은 매우 재미있다. 이미 한명기 교수의 책에서 명나라가 원군을 보낼 때 우리나라의 실정에 무척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눈에 확 온다.

 

한국은 당시 베나 포 같은 옷을 만드는 원자재로 화폐가치를 했다면, 중국은 은을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다. 은은 중국만 아니라 일본, 포르투갈, 세계 다른 국가하고 무역하기가 편했으며, 은 자체가 녹이 슬지 않는 특성에서 은화로 결재하기가 편했다. 중국의 병사월급은 은으로 주고, 군량의 구매와 죽은 병사의 장례조차 은으로 처리한다. 자본주의시대 이전이긴 해도 자본주의 경제구조 이전의 중상주의적 가치는 이미 실현된 셈이다. 은의 이용은 조선에서 용이하지 않고, 은을 받기를 원하는 중국사신에게는 조선은 어떻게든 흔들어야 했던 존재다.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을 왕위를 올리는데, 많은 은을 뇌물로 받쳐야 했고, 인조반정 후에도 인조의 책봉을 위해 또 다시 은을 바쳐야 했다.

 

은을 두고 뇌물로 활용하는 점에서 지나친 은의 징발은 국가의 존속을 어렵게 했고, 명나라 사신은 은을 찾기 위해 민가를 약탈까지 했다. 일본군이 지나면 큰 빗이 지나가도, 명군이 지나가면 참빗이 지나간다는 말처럼 은의 약탈은 조선으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관계성에서 조선에 놓인 상황은 참으로 기묘했다. 물론 광해군은 양쪽으로 외교를 보내는 것으로 유혈사태를 막으려 했지만, 막상 그것이 불만인 세력이 광해군을 뒤집자 자신들조차 그것에 얽매이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명이 임진왜란을 구해준 재조지은, 8년의 전쟁을 8년 후부터 명나라가 망하는 그날까지 도리를 조선에게 말했다. 모문룡이 와서 행패부리고, 하다못해 명나라에서 도망친 유민까지 설쳐대며, 심지어 그들의 위세를 믿고 약탈을 일삼은 조선인들이 있다고 하니 정말 한숨만이 나온다. 역사의 기로에서 400년이 지난 일들이 현실에 무슨 일이라고 하나, 모문룡의 행동과 거기에 대한 모택동의 발언이 의구심이 든다. 모택동이 모(毛)를 가진 이유로 한국전쟁 시 중공군을 내보낸 이유가 임진왜란까지 이어지니 말이다.

 

모름지기 실리적인 이익도 중요하나, 실리에 대한 명분은 훨씬 중요하다. 실리만 추구할 경우 국가가 망하는 경우도 많고, 명분만 추구하도 망하는 경우도 많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정말 그렇다.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민을 양인으로 만들고, 우수한 무예가를 장수로 기용하는데, 많은 세력들이 반대했다. 중국은 재상만 가정을 거느리는데, 왜 조선은 너나 나나 모두 종을 부리는 것에 비판했다. 하인으로 메여 있으면 군적에 올릴 수 없고, 필요한 군사력을 보충이 불가능하다. 사대부들은 무관에 응해도 병역군무를 기피했다. 오늘날 고위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반정 이전과 반정이후에 대한 모습을 보면 그 구조가 특이하게 변화하지 않는다. 조광조의 죽음이 중종반정 공신들(진짜가 아닌 자까지)의 비리와 부패를 지적한 점, 서애 유성룡 역시 양반의 특권을 축소하려 했던 점도 눈에 보인다. 연산군 시절 폭군 옆에서 권력을 누리는 자는 없어져도, 그가 누린 권력을 고스란히 타인에게 이양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백성의 삶이 나아진 것도 아니고, 광해군이 물러나도 나아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못할 경우도 있었다. 외교적 관계성에서 전쟁으로 인한 여파와 그에 대한 대책과 정책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건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기득권을 지닌 자와 거기에 동조하는 자들의 문제다. 겉으로 명에 대한 재조지은 말하던 이들이 막상 인조정권에선 아무 말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명나라 멸망 후 청나라가 들어서자 겉으로 청나라를 몰아내자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오히려 그런 분노의 감정을 이용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적개심을 심어두어 자신들의 이권에 방해되지 않으려 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바보 같은 한 사람의 말만 듣는다는 비판은 아마 이런 기류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성리학의 주자가 내세운 말 한 자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시기를 계속 놓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계속 그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필요가 있고, 거기에 강홍립 도원수가 있었다. 강홍립의 항복은 대부분 광해군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 해도, 막상 그가 출천 당시 만 명이 넘은 병사 중에 9천 명이 사망한 점에서 그게 과연 약속된 항복이란 점은 잘못되었다는 점을 이 책에서 잘 집어주었다. 자기 혼자 살고자 해서 수하를 몰살시키는 것은 몰상식하고, 그런 몰상식한 자가 책임감을 느꼈다면 계속 광해군에게 서신을 보낼 이유도 없다. 강홍립 장군 진영에 양반 출신 무관들은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양반으로서 자신의 수하무관을 죽는 것을 원하는 것도 사리에 맞지 못한다.

 

역사의 기록은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전해온다. 이기지 못한 자들이 기록을 남길 수 없거나 혹은 이길 수 없었기에 변방에서 원한에 사무친 기록을 남긴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에서 다시 재조명되어 그 당시의 사료와 주변 국가의 사료까지 찾아 다시 재조립한다. 임진왜란이 대부분 많은 한국인들은 이순신의 활약만 있다고 보겠지만, 그 뒤로는 중국과의 외교문제가 엄청나게 많이 작용한 것을 잘 몰랐을 것이다. 중국이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은 맞으나, 실제 그것이 제대로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조금 어렵다.

 

선조는 의병장의 활약과 이순신의 승전을 좋은 표정을 받아들이면서 악의적인 감정을 품었다. 주상은 도망쳤으나 남은 재야신료와 자신에 의해 반죽음에 놓인 명장의 위세에 많은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명군에 의지하던 선조는 결국 재조지은을 강조함으로써 변방에서 목숨을 버린 의사자를 버린 채 자신의 안위를 챙기고, 위엄을 보이려 한 셈이다. 임진왜란 공신에서 사실 그보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잃었다. 그들의 죽음이 인정되지 못하고, 단지 정치적 이익에서 중국의 명군에 의지하려던 그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 현실은 무엇인가? 광해군은 자신의 궁궐을 짓는데 예산이 부족한 것을 걱정했으나, 그가 명분으로 내세운 전쟁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하다.

 

전쟁이 나면 많은 인명이 손상당하고, 거기에 부족한 인원을 보충해야 하는데, 전쟁 후로 부족한 인구를 어떻게 메울지, 그리고 사람들의 식량을 어떻게 정리할지를 생각하면 골치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최근 한국에서도 군사 병력의 부족사태로 방위산업체 요원이나 혹은 해외 이중국적을 가진 남성을 현역으로 복무하고자 한다. 그런데 계속 인구가 감소하는 현실에서 국민들은 공익을 고려하여 삶을 살아야 하나 오히려 개인의 이기심을 추구하며, 정치인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다.

 

부조리에 대한 정리에서 분명 모순을 들추어 내고, 거기에 대한 대책을 내세우나, 현실에서 반응을 엄청난 반발이 쏟아진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 하지만 일반의지를 대신한 사사로운 이기심은 하나의 공공성을 이루어 전체의지로 대변된다. 역사의 교훈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한다. 주변에 강대국과 38선을 경계로 군사가 대적하고 있는 상황에 외교 전략은 한국의 연속적 유지를 위한 방편이다. 극단적인 자세를 취하면 안 되나, 한편으로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그것은 한명기 교수의 서적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21세기가 도래하여 우리는 과연 선진국인가? 경제적 규모로 그 거품의 화려함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거품이 터지면 병속에 음료수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혹은 상해서 버려야 하는지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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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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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권을 읽으면서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에 대한 이야기만 등장한다. 영웅의 존재란 바로 전쟁터에서 무수한 적을 맞이하여 무찌르는 자가 바로 그런 것인가? 전에 영웅이란 무엇인가 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낼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자들, 만약 신이 그렇게 과업을 완수했다면 그것은 신이(神異)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의 육체로 태어난 이들에게 영웅(英雄)이란 말이 칭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 아니기에 신과 같은 활약을 원하는 게 인간의 심리다. 영웅이란 바로 많은 대중들이 뭔가를 원하고 있을 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전쟁에서 크고 작은 전투로 많은 인간이 죽고, 다친다. 전쟁의 승패는 남자들에겐 죽음을 여자와 아이들에게 평생의 노예가 기다리고 있다. 전쟁에서 피할 수 없는 승부를 펼치는 것은 곧 죽음이란 세계에 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노예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노예의 말로는 조금 비참하다. 노예는 인간이란 생물학적 존재로 살아갈망정,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노예는 재산으로 분류된다. 만약 노예가 주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면 매질을 당하고, 범죄를 저지르면 주인에 의해 처형을 당한다. 그리스시대 즉 할로스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오로지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었다. 죽음과 노예, 삶과 번영,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이 급박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영웅은 비로소 그 시대에 부응하여 나타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부와 명예인지 아니면 그들의 도시국가의 공익인지는 각자의 가치관마다 다르나,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한 차례의 통과의식을 거쳐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인물은 2가지로 대립된다. 하나는 원래부터 영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있는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로 말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업적은 제각각이라도 그들이 어떤 신분에 있든지 충분히 영웅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과 그들의 업적은 영원히 칭송받을 점을 나열한다. 단지 모든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에 그런 한계성으로 때로는 영웅들에게 허점이 보이기도 한다. 완벽한 존재는 오로지 신이나 혹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자만이 가능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이나, 그의 인간됨됨이는 남을 시기하는 이유로 로마시민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추후에 추방당했다. 자신이 그렇게 바다 속에 수장시킨 페르시아에 가서 오히려 페르시아왕의 친구가 된다. 그는 단지 남보다 위로 가기를 바란 인물이지 그런다고 목숨 그 자체를 우위에 두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지막에 할라스의 영웅이면서 자신의 라이벌이던 아리스테이데스와 결전을 벌일 때 그는 자살을 하여 마지막을 승화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마지막 최후의 순간은 언제나 비참할 경우가 많다. 물론 그것은 모든 이들의 영웅도 마찬가지다.

 

영웅은 모두에게 칭송받는 존재이기도 하나, 모두에게 경계와 시기를 받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 희비가 갈리는 존재이므로 영웅의 마지막은 모두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게다가 영웅들은 대부분 전장을 누빈다. 전투가 잦은 사회에서는 정치와 군대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정치지도자가 전장을 누비는 경우가 많다. 전쟁의 영웅은 곧 정치적인 입지를 갖추게 되어 평화가 오는 시기에 정치력이 높은 인물은 합당한 찬사를 받으나, 그렇지 못하거나 정치에 관심 없는 자는 타인의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질투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일까? 역사의 기록에서 영웅을 통해 보는 활약보단 주변 정치적 상황이 참으로 급박하다. 2권에서 인상 남은 인물은 다 그러하나 카토가 조금 인상이 깊게 베인다. 그는 부지런하여 노예와 같이 같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게다가 일도 같이 한다. 겉으로 보자면 그는 부지런하고 삶의 열정이 가득하다. 하지만 더 이상 노동력이 없는 노예는 자신의 옆에 두지 않고 팔아버린다. 플루타르코스는 이것을 보고 인간은 이성적 논리도 중요하나,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을 중시했다.

 

인간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변의 조건과 상황에 의해 운이 결정되고, 승부가 갈리기도 한다. 하다못해 말 못하는 동물조차 인간의 사랑을 받으면 그 은혜를 알고 충성을 다한다. 전장을 향하여 떠나는 주인을 그리워하는 어느 개가 주인의 배를 따라 가다 결국 지쳐 어느 섬에 도달하여 탈진하여 죽는 모습이란 참으로 슬프다. 필요 없다고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은 결국 그 자신도 필요의 조건이 사라지면 고장이 난 TV처럼 버리게 된다.

 

다른 기억나는 장면은 아마 카밀루스일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전쟁은 횟수가 줄었다. 고대의 전쟁은 군인에 의한 전쟁이다. 하지만 민간인이나 여성들은 포로로 되고 노예의 길을 걷게 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력을 채울 수 있는 건장한 남자다. 남자아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결혼의 제도로 통해 아이를 가지고 육성시킨다. 그러나 전쟁이 나면 대부분 남자들은 무기를 들고 나가며, 때에 따라서 부상입거나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고대 할라스 시대에 인구가 지금보다 많을 리가 없겠지만, 전쟁에 나가면 기본적으로 몇 만 명이나 출전한다. 운이 좋으면 모르나 아수라장 같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남자가 죽으면 집에 있는 아내는 과부가 된다. 과부는 참으로 안타까운 것 같다. 물론 홀아비도 마찬가지나, 전쟁은 자연의 섭리보단 문화적 과정에 의해 성립되는 경우가 많다. 인구증가, 식량부족, 주거환경 등과 같은 물질적 조건, 오로지 전쟁에서 명예를 얻으려는 상급자들의 목적, 이 모든 것이 혼합되면 전쟁으로 이어진다. 전쟁에서 죽은 자보다 더 비참한 자들은 전쟁에서 생환을 기다리는 죽은 자의 가족이다. 전장에 젊은 남자들이 출전하니 그의 반려자들은 젊은 여자이고, 이들은 꽃다운 나이에 가족을 잃은 슬픔과 사랑을 찾을 수 없는 상실이다.

 

그런데 아마 아리스테이데스가 나이가 많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처음에 설득으로 뒤로 가서 벌금으로 압박하여 과부와 결혼을 해주는 것은 참으로 바른 일이다. 누군가의 영광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고, 그 영광의 크기는 병사들의 장례식 횟수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가 없거나, 병사를 제대로 통솔할 장군이 없으면 적은 항상 넘어와서 약탈과 살인을 저지른다. 영웅의 기지는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게다가 진정한 영웅은 모든 실리와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는 게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전사와 신의 축복으로 바친다. 언제나 신전에 가서 신에게 제물을 바쳐 경건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한다. 물론 신의 제물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 들어가 만족스러운 식사가 된다. 영웅들은 은퇴하거나 전장에 물러나면 이미 자신이 그 도시국가의 공인이란 사실을 자각하는 경우가 많다. 모두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쉴 곳을 마련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 영웅으로 칭송받는 것은 무기를 든 적이 있을 때가 아니라, 배고픔과 가난을 들고 있는 적에게도 대항한다.

 

아마 여기서 카토의 마지막 삶에서 지혜가 부족한 이유가 밑에 사람에게 인식했던 점이고, 아내가 죽어 재혼을 하더라도 아들보다 어린 여자를 들인 이유다. 그가 비록 할라스에 건강한 남자아이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도 좋으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는 소녀가 아니라도 충분히 가능하니 말이다. 권력자가 되기까지 여정은 위대해도 되고 나서부터는 교만해지기 쉬운 게 인간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선 그런 영웅들의 차이점이 너무 잘 드러난다. 물론 말년의 판단착오가 그 업적을 지우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의 인상에 깊은 기억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인이 가져야할 의무와 도덕은 죽기 전까지 계속 가는 것이다. 한국에서 공인의 위치에 있는 분들이 계속 실망을 주는 기사를 보고 있다. 그들에게 역사의 교훈이란 없는 것일까?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인 것이다. 영웅을 시기하고 시민을 우습게보고, 권력과 이권만 챙기려하다 마지막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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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감수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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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으로 남녀 간의 갈등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과연 여성은 약한 존재인가? 아닌가?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인간의 성적인 요소보단 사회적인 요소에서 찾으려 한다. 물론 사람마다 각각 다른 사고방식이 있고, 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만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결국 개인의 판단은 그(여)가 태어나고 자라며 살아온 과정이 축척된 것과 같을 것이다. 군대생활을 나 같은 경우 일반 병사가 아닌 하사로 있었다. 나하고 같이 훈련받은 동기는 290명 가까이 된다.

 

그 중에 여군도 있었다. 군번도 나보다 빠르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내가 있던 훈련소대의 조교 중에 여군하사도 있었다. 육체적으로 여성이 약할 수 있겠지만, 여성 그 자체가 약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완전군장을 한 채 언덕 위에 있는 전투훈련장을 같이 구보로 뛰었던 동기들이 있었다. 키나 몸무게가 남자 동기보단 불리했으나, 그들은 모든 것을 해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했던 사람이 많지 않았을 뿐이지, 충분히 보통 남자보다 더 강한 신체능력을 가지지 못한 법은 없다.

 

이런 사례는 실제 역사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상가는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근대민주주의를 만든 장 자크 루소다. 루소의 철학과 사상을 알아 가면서 그는 언제나 로마의 시대를 역사적 교훈으로 삼았고, 또한 고대 스파르타 왕국의 강인함을 빼놓지 않았다. 프랑스대혁명의 절대적인 도서라면 <사회계약론>과 더불어 <인간불평등기원론>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을 읽어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스파르타 여인들은 남자를 지배하는 유일한 여성들이다.”

 

루소의 정치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스파르타의 전설적 입법정치가 ‘뤼쿠르고스’이다. 그는 스파르타가 아주 위대하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 수 있도록 초석을 만든 인물이다. 뤼쿠르코스의 정치적 체계를 본다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다소 거칠어 보인 점도 있지만, 스파르타는 대부분 사람들이 알다시피 매우 강력한 군대가 있고, 그 나라의 남자들은 매우 용감한 전사다. 그런 전사들은 그 누구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며 전장을 누빈다. 그런데 오로지 스파르타의 용감한 전사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는 그의 아내만이 가능했다.

 

스파르타 어느 여성은 자신들의 국가의 여인에 대해 이렇게 논한다. “그럼요, 남자를 출산하는 것은 우리밖에 없으니까요.” 루소의 철학에서 등장하는 스파르타의 이야기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지금의 그리스와 이탈리아 같이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독재정치를 하거나 또는 국민의식 수준이 저열하지 않았다. 로마의 세계는 양심인과 지성인으로 넘쳤으며, 그들의 관심사는 공명정대한 인물로 통해 공화주의 가치관을 확립하려던 것이다.

 

다소 플라톤적인 가치관이 많이 반영되겠지만, 국가의 지도자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진정한 명예를 아는 자라면 스스로의 위치를 알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전쟁으로 과시하기보단 평화로써 번영을 누리고자 한다. 지금의 정치체계에서 외교적인 부분은 군사적인 무력충돌로 이어지고, 경제정책은 그 나라 생활의 질과 인구수를 움직인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이미 그 당시에도 충분한 답을 내놓는다. 스파르타의 화폐를 금과 은이 아니라 무거운 무쇠로 하는 이유는 빈곤한 자가 나오지 않으려면 사치가 없어야 한다는 점, 밭이 어느 정도 개개인에게 돌아가야 생계에 걱정이 없다는 점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권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은 거의 없어지는 과거의 국가를 뒤로 하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거나, 혹은 기존의 국가의 정치적 체계를 발전시킨 자들이다. 각자 영웅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업적을 보고 있으면, 딱히 뭐라 쓸 수 있는 글이 없다. 각자만의 스타일과 추구하는 방향성은 다르나, 그들이 다른 사람과 차이 날 정도로 비범한 인물이란 점, 그들의 이야기는 플루타르코스가 태어나기 몇 백 년 전에 등장하여 플루타르코스가 죽은 지 2,000여 년이 지나도 계속 전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미술작품에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푸생의 그림 중에 <사비나 족 여인들의 겁탈>이라던가 루벤스와 구에르치노 같은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도 많다. 역사를 기록한 서적이 문학적 가치도 가지고, 또한 미술적 상상력까지 이어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등장하는 그림들은 16세기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 때 활동하던 화가들의 명화를 소개한다. 어디서 얼핏 본 것 같은 그림이 등장하면서 르네상스라는 인문정신이 바로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책을 보고 있으면 영웅의 각 면모는 개성이 넘치는 당시 살아간 인간들은 우리하고 별반 차이 없는 모습을 잘 발견한다. 단지 영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나, 그 영웅으로 통해 보는 당시 세상을 안다는 것은 인류가 이때까지 살아온 흔적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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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05-25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만화애니비평 님.

언젠가 읽어야 할 책으로 항상 염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는 그리스 영웅과 로마 영웅 비교가 빠진 책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 책은 원전의 구성에 맞춰진 책 같습니다. 이 책 번역은 어떠한가요? (요즘 분량 있는 책을 집어들 때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25 10:53   좋아요 0 | URL
제가 번역이 잘 되고 못 되고를 말하기가 어렵지만,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용이 상당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중간마다 삽화나 동상, 그림 등이 들어가서 아주 이해하기 좋게 만들어진 겁니다.

이다희 번역자는 그리스로마 신화로 유명한 이윤기 선생님의 따님입니다. 그분의 영향을 받았으니 내용을 받아들이는 독자에게 잘 포커스가 맞추어진 것 같습니다.
동서출판사 본은 살짝 보니 보는 사람에게 조금 불편하게 편집되었더군요.
2권짜리가 3권짜리 되면서 목차설정이 조금 그렇다고 하더군요.

마립간 2016-05-25 11:33   좋아요 0 | URL
답변 감사합니다. 참고가 되었습니다.

루쉰P 2016-07-17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거 볼라구요 ㅋ

만화애니비평 2016-07-17 19:37   좋아요 0 | URL
오~
 

(자작 단문소설입니다!)서울시 집은 아파트 전세 24평형 사는 평범한 부부, 그들이 어렵게 결혼 후 이제 첫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남편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가장, 아내는 원래 같은 회사에 다녔지만, 출산에 따라 일을 그만 두었다. 육아 퇴직과 관련하여 회사에서 나온 퇴직금과 전송금으로 출산비, 산후조리원비용, 아기 옷이나 예방접종비 등을 계획했다. 병원 산부인과 수술실에서 힘들게 자연분만하던 아내가 드디어 첫 아기를 보았다. 옆에 있던 간호사 선생님이 산모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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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1>

간호사 : 축하해요. 잘생기고 멋진 왕자님이 태어났어요.

아내 : (남편을 향하여) 오빠! 큰일 났어요. 우리 아이 특목고에 명문대를 가지 못하면 삼성에 취직못해 평생 고생하고 솔로로 살 것 같에요. 군대 가서 사고사 당할까 무서워요.


<상황2>

간호사 : 축하해요. 이쁘고 귀여운 공주님이 태어났어요.

아내 : (남편을 향하여) 오빠! 큰일 났어요. 우리 아이 길가다가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당하고, 살해당하면 어쩌죠.


(소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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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내가 읽어본 괜찮은 서적으로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가 있었다. 마녀사냥을 두고 페미니즘 운동가이면서도 노동운동가인 그녀가 저술한 마녀사냥은 여러가지를 함축하고 있다. 마녀사냥은 결국 권력자드이 자신의 권력을 누리기 위해 장치적으로 태어난 현상이다. 과거의 마녀사냥은 용인되어도 지금은 법이 있기에 사법처리된다. 이번 일도 비슷한 사회구조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마음에 드는 이유는 마녀사냥 희생자가 여성도 있지만, 그 여성 중 특히 중년이나 노년의 여성의 희생을 잘 보여준다.


책에서 권력자의 횡포나 전쟁의 상처는 젊은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게 만들고, 그것을 목격하는 살아남은 여성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역사가가 된다.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사건은 언제나 그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부조리에 의해 계속 재생산되어 새롭게 보여질 뿐이다. 신해철의 유고에서 이런 식의 문구가 생각난다. "여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살기에 진짜 X같은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남자도 X같다." 여자들이 진짜 X같이 힘든 것은 인정하지만, 남자도 역시 X같은 일들이 많다는 점이다. 단지 여자들에게 더 많은 X같은 피해가 많을 뿐이다.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즘 학자 매릴린 옐롬의 <유방의 역사>를 읽다보면 여러모로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적 문화를 알 수 있다. 그런다고 그 교수가 남자와의 투쟁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남자와의 이성과 사회적 관계로서 대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남녀가 결혼을 하든지 말든지는 개인의 권리이나, 하지만 사회의 재생산성을 생각한다면 계속 자녀는 필요하다(그분은 자녀가 4명이나 있으니 언행일치).


어디 갈 때 버스와 지하철 타려면 운전기사가 필요하고, 그것을 수리하는 정비사가 필요하다. 어디 가서 커피 한잔 마실 때 응대해주는 종업원이 필요하고, 그것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이번 사건을 두고 미래의 우리사회를 위한 대안으로 가는 것을 원하나, 현실적 문제해결은 필요하다. 그런데 피해의식만 무장하여 외치기만 한다면 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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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05-24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의 꽁트 ; 어느 산부인과에서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 아니고, 자녀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상황 같은데요.

만화애니비평 2016-05-24 11:46   좋아요 0 | URL
이미 현실은 일어나고 있죠. 요새 산부인과에서 만나는 아기의 집안끼리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으니 말이죠.

이번 사건에 다른 추모글보다
자기집 딸 2명을 둔 어느 아버지의 추모글이 짠하고 다가오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진짜 어찌 해야 합니까. 이래도 지옥 저래도 지옥.

만화애니비평 2016-05-24 16:06   좋아요 0 | URL
헬조선인데..
문제는 근본원인을 찾는 것을 계속 놓치고
남혐여혐 서로 가지고 노는 것이죠.

전에 아는 동생과 김치녀 이야기하면서
김치녀를 만드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잘 먹고 잘 사고 남의 입장 따위 개나 주라는
그런 남자들이 만든 것이라 이야기했죠.

솔직히 딸 가진 주변사람 보면 대부분

내 딸은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 보낼거야
이런 마인드부터 시작하니...참...헬헬헬헬..

마립간 2016-05-25 07:56   좋아요 0 | URL
여성들이 `내 딸은 (또는 나는)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 보낼거야 (갈꺼야)`등의 마이드로 남성 중심 가부장제 사회의 형성에 여성들이 기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싫은 것이죠.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만 ...
 

생각해보면 내가 어떤 단어의 개념을 생각한 게 있다. 그것은 공간(空簡)의 지박(止泊)이다. 왜 공간에 대한 지박인가? 최근 서울 강남역에서 일어난 아주 슬프고 끔찍하고 아픈 이야기를 우리는 뉴스에서 접했다.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이 휘둘린 흉기에 의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아직 20대라면 연애나 취업 혹은 결혼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을 선택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살해당한 분은 자신에게 부여된 기회를 박탈되어 억울하게 구천을 헤매게 되었다. 진짜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영혼이 있으면 매우 슬플 것이다. 우선 자신이 죄도 없이 희생당한 점이고, 다른 것은 그 분의 죽음을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분명 평범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애도와 함께 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후폭풍은 그렇게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남성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이에 대한 반발영역으로 여성에 대한 혐오가 서로 엉겨 붙어 진정한 의미의 추모보단 분노를 넘어 광기의 집착과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그녀의 죽음 억울하고, 어느 사이트에서 내건 군인들의 죽음 슬픈 일이다. 하지만 2가지의 죽음은 서로 다른 개념이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추모하고 생각해야 할 점이다.

 

그녀의 죽음은 우리 사회라는 구조에서 볼 일이고, 군인들의 죽음은 우리나라의 국방군사 지휘 및 무기체계, 그리고 대외 정치외교 관점에서 생각해야 해야 하는 점이다. 단순히 어느 한 개인 여성의 죽음과 다수의 남성군인의 죽음에서 어디가 더 무겁냐고 물어보면 그건 참 애석한 일이다. 어느 누구든 다 소중한 목숨이고, 어느 누구나 그 당사자의 가족과 친구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나 만일 어느 것이 사회적으로 더 심각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전자를 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후자의 죽음은 많은 인명을 희생되었고, 국가적으로 큰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그럼에도 전자에게 선택하는 이유는 군인은 처음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고,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이유는 국민들이 적으로부터 다가오는 위기로부터 안전하게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다. 공화주의국가, 대한민국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 공화주의는 그 나라의 국민이 다른 국가에 의해 목숨과 재산의 피해를 입지 않아야 한다. 결국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일반 국민들이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사는 것은 곧 헌법으로써의 권리이다.

 

조금 애석한 사실은 군인들의 죽음은 희생에 비해 그들에게 돌아가는 대가는 적절하지 못하다. 매년 자살하는 군인, 사고로 죽는 군인들이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이다. 인권에 대한 개념에서 어느 특정 신분만을 봐서는 안 되고 전 방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강남지하철역 참사에서 왜 이렇게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가? 극우적인 여성혐오 사이트와 극단적으로 남성혐오 사이트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화제로 떠올랐고, 그들의 행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의미가 왜곡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번 추모에서 서울강남을 시작하여 서울 전 지역으로 또 다시 전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추모에 대한 열기는 나쁘지 않으나,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추모 그 자체에 대한 부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타인에 대한 죽음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슬픔으로 기억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사람다운 맛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지 내가 의문을 제시하는 것은 왜 강남지하철에서 죽은 한 개인의 죽음이 이렇게 큰 이슈로 되었는지 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솔직히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고, 정부를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바닥에 가깝다. 우리들은 흔히 산업재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있다.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 사회에 대한 부조리와 정부행정의 공정성에 심각한 회의감을 느낀다. 내 아버지는 안전사고로 인해 산업재해를 당해 부상을 입자, 회사에서 강제로 퇴사시킨 것도 모자라 산업재해로 인한 병원비를 제공하지 않았다. 어느 회사에서는 비정규직으로 들어가 4개월 전후로 내리게 하여 퇴직금을 지불하려 하지 않았고, 어느 회사에서는 퇴직금조차 주지 않았다.

 

내 친구는 원조파견과 하청관리 부실, 안전관리 미흡으로 인해 변을 당해 사망했다. 장례식장에 가서 화장터에서 화장 후 유골단지를 무덤에 묻는 그 순간까지 있었다. 내 친구의 사고는 인터넷 신문기사 올라왔고, 그는 그렇게 세상의 흐름 속에 사라져갔다. 이런 일을 겪은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 게 옳은 것인가? 사회적 약자가 되거나 혹은 그 약자의 주변인으로 세상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내 친구의 죽음, 혹은 군인의 사고사, 그밖에 죽음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내 억측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바로 공간적 지박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공간이란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다. 땅이나 땅에 매겨진 부동산 가격, 사람, 지하에 매설된 상하수도관로 등등이 모두 공간적 존재다. 내가 서울이든 부산이든 그 어디에 살거나 혹은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공간이란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 공간이 어디에 속해있는지에 대해서는 구분할 수 있다. 신분에 따라 공간적 지박이 작용한다.

 

군인의 죽음은 군부대 영내나, 혹은 육상의 훈련이나 전투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군인의 죽음에서 대부분 군인들은 남성이다. 군인의 죽음은 남성의 죽음과 연결되고, 공장 노동자나 공사장의 노동자 역시 남성들이 많이 차지한다. 요새 군인, 노동자 등과 같은 부류에서도 여성이 많이 등장하고 있으나, 대부분 남성이 많은 인력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일정한 장소, 일정한 직업, 일정한 패턴에서 죽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번 강남역살인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분명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지만, 그 공간적 위치와 그 공간 안의 건축물 용도기능이 작용한 곳이 강남역이었을 뿐이다. 왜인가? 살인을 저지른 자가 여기가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기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곳이 강남지하철역 화장실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공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다. 그가 어느 공간과 상관없이 불특정 대다수의 여성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군인의 사고사나 노동자의 산업재해는 어느 특정장소와 상황이 존재한다. 즉 불특정 대다수가 아니라 특정 다수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이 위험한 이유는 특정대상을 지칭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일본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미야자키 쓰토무라는 일본인은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살인을 저질렀다. 그의 방을 조사하니 그가 가진 롤리타콤플렉스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범죄는 즉 어린아이라는 대상, 특정대상을 상대로 한 범죄이다. 강남지하철역 사건과 비교하자면, 정신병적인 살인자가 무엇인가 살인대상자에 대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무 이유 없이 그저 길에 보이는 사람에게 흉기를 휘둘러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런 일은 과거에 있었다. 의정부역에서 칼을 들고 지하철 이용승객을 살해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묻지 마 범죄이다. 그런데 묻지 마 범죄에서 의정부역은 단지 눈에 보이는 사람을 향한 것이다. 무차별적인 공격성향이 일으킨 범죄고,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은 무차별적으로 행한 것보다 불특정 대다수 여성을 향한 증오에 의한 범죄다. 즉 살인자가 살해할 대상을 두고 목적성은 없지만, 살해하는 목적성은 가진다는 점이다.

 

살해할 대상의 목적성과 살해의 목적성에서 이번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은 사회적 큰 불편한 점을 건들었던 것이다. 만일 범죄자가 눈앞에 보였던 사람이 단지 20대 여성이었을 뿐이라는 우연성이었다면, 사회적 갈등은 증폭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한국의 젊은 여성을 노리고 싶다는 적대의식에 사로잡혀있기에 문제가 커진 것이다. 그런 의식은 언제 어디서라도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이다. 우발적인 범죄는 말 그대로 우발적으로 예상하지 못할 상황이나, 강남지하철역 살인사건을 우발적이지 못한 상황을 만든 비극이다.

 

게다가 강남지하철역은 단순히 공간적 목적성에서 공간의 지박에 의해 저지른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강남지하철역에서 다음은 신도림역으로 혹은 신촌역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공포가 사람들을 자극하고, 추모와 맞지 않은 성적차별로 파생된 혐오가 증폭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분명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살인자에게 있겠지만, 이 사건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자에겐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런데도 혐오감을 표출하는 이유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을 논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신경질적으로 해소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하다.

 

결국 사회적 문제에 대해 논리적인 접근으로 해결하기보단 어떤 특정대상을 공격하여 자신들의 비뚤어진 논조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인간들의 집단군중적인 폭력적 의식은 자신에게 하나의 정의감이란 허울 좋은 쾌감을 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게 누군가 맞장구 치주면 그것이 잘못된 가치관이라도 옳은 게 된다. 왜 독일이 나치에 의해 통치되고 잔인한 행위를 보였는가?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살인을 해도 자신들은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정의를 집행한다고 여긴다. 집단적 광기가 무서운 이유는 윤리적 가치를 떠나 도덕적 가치란 결국 자신들의 광기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사에서 평화롭거나 혹은 아무 이상 없는(허위와 가식으로 얼룩진 그 사회에는 내부적으로 분명 문제가 있다) 세계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외부로부터 받은 피해가 정당하지 못함에 따라 폭력적으로 그들을 응징하는 것이 정당하고 곧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할리우드 영화가 가끔 보면 3류 수준밖에 안 되는 이유는 이런 방식을 그대로 학습하기 때문이다. “너 나 건들었어(하지만 이미 현실에서 자신을 건든 쪽을 확실히 간섭하고 있다는 사실은 은폐)? 그럼 너 좀 다시는 못 까불게 조져야겠어.”

 

이런 내러티브 구조는 인간의 오랜 이야기인 신화에서 시작하여 역사에서도 자주 본다. 이런 방식은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혹은 현실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상대방이 더 악을 쓰고 저항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외치는 정의감이란 허황된 정신은 더 고무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파장을 일으킨다. 이런 식으로 서로 핑퐁게임을 하다보면 사건은 해결이 아니라 이상한 조류를 타고 낯선 바다에 표류한다. 원래 추모의 의미도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생각하자면 이런 죽음을 두고 기억하는 것은 좋으나, 사회적 문제를 두고 공간의 지박에서 벗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강남역지하철역 지나치다 추모하는 사람이나 그 공간과 멀리 있는 자라도 슬픈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공감해주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산업재해로 죽거나 해고로 인한 노동조합투쟁과정에서 재판에 패소하여 거액의 벌금을 갚을 방법 없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 군대에서 사고나 의문사 당한 이들에 대한 추모와 아픔은 약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건을 두고 바로 공간의 지박에 갇힌 한국사회를 생각한 것이다. 무차별적 살해의도가 불특정 대다수 여성을 노리는 것은 분명히 불안하고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특정된 공간에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가는 이들의 희생 역시 슬프고 무서운 일이다. 조금 크게 보자면 세월호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이나, 518에서 학살당한 광주시민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의 희생을 단지 그 공간적 범주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 혐오해야 하는 것은 그저 눈에만 보이는 가시적 요소보단 그렇게 되어버린 과정을 돌이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반성과 성찰 없는 증오는 아무런 대안과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단지 시간낭비에 타인에게 상처만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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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5-2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솔직히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고, 정부를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바닥에 가깝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삼가 친구분의 명복을 빕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22 21:45   좋아요 0 | URL
올해 1월1일 장지로 떠나보내면서 참 뜻깊은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친구가 하늘에서 고통없이 잘 지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