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방된 관객 ㅣ 컨템포러리 총서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현실문화 / 2016년 6월
평점 :
<해방된 관객>은 왠지 모르게 이때까지 내가 읽은 책들을 다시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는 도서인 것 같았다. 물론 여기에 등장한 다른 저자나 책들 모두 읽은 것은 아니나, 많은 부분이 인용되고 연구된 점에서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현대적 미학이 무엇이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랑시에르의 책 중에서 과거 <무지의 스승>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랑시에르의 책은 쉽지가 않다. 제법 난해하고 어려운 개념이 등장하고, 번역자 입장에서 전공자이겠지만, 타 전공자 입장에서 매우 힘든 책이다.
그래도 읽는 이유는 이런 책들을 도전해야지 새로운 것들을 익히고 다른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전해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솔직히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은 내 사고에는 이중적인 판단이 내린다. 하나는 해방된 관객이란 결국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대다수 인간을 말하고, 그들이 바로 새로운 문화적 주체자로 되어야 하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 반대되는 의미는 이 책이 너무 적혀진 것이다. 랑시에르가 말한 지적인 권력에서 이미 이 책도 제법 지적인 권력이 담겨있다.
이런 모순 속에서 계속 우리는 모순과 역설적 관계로서 세상을 대할 수 없다. 만일 대중들이 일반적인 패턴에 익숙해진 이상 그들은 여전히 같은 모습과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Sub-culture 계통 콘텐츠를 좋아한다. 대중문화에 최근 웹툰의 약진과 웹툰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의 재구성에서 새로운 문화적 조류를 일으키는 것이 Sub-culture이다. 하지만 왜 Sub-culture의 등장이 중요한가?
과거 한국만화사 연구에서 문학비평가이신 김현 선생님은 만화란 민중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민중에 의한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분이 말한 것처럼 만화는 누구나 쉽게 만들고 접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인간의 삶을 하나의 굴절된 빛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인간이 가진 모습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전해줄 수 있다. 반드시 예술이 예술가의 자신만의 세계에도 있을 수도 타인의 모습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술은 시각과 청각으로 구성된 매체로 제작됨에 따라 남에게 보이기 마련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이 책의 가진 의문과 검토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그나마 다행인 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어봤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 <해방된 관객>은 현실문화연구 출판사 직원 분에게 운 좋게 받은 도서이다. 내가 <스펙타클의 사회>를 본 것 사실 현실문화연구에서 나온 도서이나, 그 책은 절판되고, 대신 <울력의 책>에서 재출간 되었다. 스펙타클에 대해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관객이고, 관객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상황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다.
이른바 프레임에 갇혀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프레임이란 상황에 묶인 것이다. 그래서 드보르는 상황주의자로서 그 상황을 타파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들이 하는 행동들은 유쾌하거나 괴짜다. 가령 책을 전시하는 책장에 자신들의 책을 나두는데, 그 책의 표지는 사포로 되어 있어서 다른 책 커버를 손상시킨다. 야간에 에펠탑의 빛이 강해 잠을 잘 수 없으니 폭파하겠다는 협박을 한다든지 그렇다(물론 환경공학 전공자 입장에선 최근 경관위락에서 조명에 의한 수면부족 및 생태환경 변화는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미디어의 이미지에 얽매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것에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드보르는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가 되는 사회이고, 이미지는 고정된 게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한다. 따라서 스펙타클의 전복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미지에 의해 붕괴되고, 또 다른 이미지로서 스펙타클의 재정립이 시작된다. 스펙타클은 멈추지 않고 계속 새로운 죽음과 탄생이 반복되는 영원한 굴레이다. 이미 현대인들은 TV, PC,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스펙타클에서 탈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수동적인 인생에 대해 생각하자면 내 가치관의 시작점인 장 자크 루소에서 생각할 수 있다. 루소의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읽은 것은 아니나, <루소의 사상>이란 책에서 루소가 말하는 연극에 대한 글을 연구하는 파트를 보았다. 시간이 몇 개월 정도 지났기에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았으나, 연극이 가진 문제를 비판했다. 연극에서 권선징악적 요소에서 건전한 사회라면 좋은 작품이나, 그렇지 못한 세계에 나쁜 작품이라는 것이다.
즉 관객에겐 하나의 구경거리로 제공되고, 연극에서 나쁜 역할을 맡은 자는 관객에게 야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 보면 된다. 즉 관객이 그런 나쁜 역할을 맡은 사람들 중에 하나의 표본이 될 수 있겠지만, 나쁜 사회는 그런 반성은 없는 것이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으면 루소의 반계몽주의적 요소를 볼 수 있다. 학문과 예술이 인간에게 도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도구로 되는 것을 설파하다. 이런 점은 추후 푸코의 <감시와 처벌>과 같이 지배계급이 지식이란 권력을 이용하여 통제시스템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분석하는 것과 이어진다.
대중문화는 일반 대중을 위한 미디어일 수 있겠지만, 그 안에는 담겨있는 내용은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중을 위한 여가생활보다는 대중으로 하여금 같은 사고를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책에서 나중에 영화로 나온다. 다양한 영상들이 짜 맞추어 육성에서 나오는(나는 불어를 모르니 무슨 말인지 모르고 영어도 잘 몰라 자막의 영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모른다) 내레이션을 따라가면 책을 읽은 것을 상기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각종 미디어에 집착하게 만드는 구조라는 점이다.
그러나 <해방된 관객>에선 재미있는 말이 나왔다. 어떤 군인의 돌격하는 장면을 두고, 우리에게 그것을 비판하기보다는 아방가르드의 반미학 운동가들의 유쾌한 논조가 상당한 아이러니로 다가왔다. 전장의 군인처럼 우리도 이 현실에 대한 수동적인 삶에 대하 돌격하자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돌격하자는 것은 우리 삶의 주인이 우리란 점을 만들기 위해서 관객 스스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의 사회>와 걸맞게 점심시간 돼지국밥 한 사발을 하는데, 뉴스에서 재미있는 기사가 나왔다.
연극을 하는 장소에 관객석이 없다. 관객이 위치하는 곳은 연극이 이루어지는 무대 위에 작은 빈 공간, 10명 정도 되는 관객은 자신의 몸에 하얀 천을 가린다. 마치 그 모습은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보면 코러스가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이 이제 무대 위의 소품 내지 혼자 등장인물이 되었다. 급박한 상황을 구경하고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대변해주는 유기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연극을 몇 번 본적이 있었다. 무대를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말이다. 연극이나 공연은 무대 위의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청중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청중조차 연극에서 필요한 소재로 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의 브레히트의 연극에 대한 글을 보았다. 일반적인 연극이 아니라 연극을 보는 대중에게 충격을 주는 요법, 아방가르드란 반미학적 가치관에서 예술은 어느 일정한 목표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그 목표와 별개로 각자에게 그 목표로 가라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아방가르드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한다. 어차피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이전 모더니스트 단계에서 전환되는 과정에 아방가르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우리 대중은 우리 시선을 자극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는게 아닌가?
작년문화예술 강의를 듣고, 어느 작은 아트갤러리에서 전시회 관람과 강연을 들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추억이다. 다양한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마시고,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더 많은 인간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돌아다니면서 어느 예술프로젝트를 보았냐면, 서울 홍대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 이동식 포차를 움직이는데, 그 포차는 이상한 오브젝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기서 안주와 소주 1잔을 돈을 받아 판다는 점이다.
오브젝트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돈을 주고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었다. 술을 나누는 포차가 하나의 예술적 기능은 무엇인가? <해방된 관객>에서도 비슷한 관점, 아니 우리보다 앞선 관점이 등장한다. 전시회를 여는데, 그 곳은 사람들이 잠도 자고 밥도 해먹을 수 있으며, 소파에 앉아 다양한 사람이 대화까지 나눈다. 인간이란 한자어를 보면 사람의 사이다. 결국 사람들이 모여 자신과 타인의 대화를 나누며 교감이 이루어지는 게 진정한 예술의 세계가 아닌가? 나는 예술의 최종목적을 두고 말한다면 결국 교감이다.
교감은 서로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의사와 판단을 나누는 곳이다. 개인의 의사와 판단은 사회적 고정관념과 편견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간의 입장을 돌아보면 다른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예술의 기능을 두고 다양한 말이 있지만,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새로운 소통방법, 새로운 가치관, 기존 사회의 앞으로 다가온 사회의 대화라고 본다. 물론 나는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모습이 있는 이유는 기존의 역사적으로 진행된 인간들의 축척이 존재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과거가 없다면 현재도 없다. 단지 미래를 위한 것이란 현재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관객이 해방된다는 것은 자기 삶을 무엇을 보고 있느냐이다. 19세기 노동자의 삶에 대해 랑시에르는 생각한다. 자신의 집이 아닌 노동자가 그 집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는 사실, 그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고생이 아닌 하나의 예술(물론 본인은 예술이라 여기지 않는다)을 만드는 과정이라 느낀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결국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과저이라면 예술은 어디에 구속된 것이 아니라 주변에 손을 뻗어 어디든 잡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해방된 관객>에선 자꾸 대중에게 자신에게 갇혀진 세계에 나오라고 한다. 가령 베트남전쟁을 보자. 아직도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을 두고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으로 평가절가 하려고 한다. 하지만 막상 통킹만사건이나 고엽제 같은 일을 보면 공정성은 보이지 않은 것 같다. 어째든 현대전쟁은 주로 폭격과 화생방 작전이 많이 수행되었다. 미국의 어느 부유한 가정에 어느 한 베트남 남성이 목숨을 잃은 딸을 안고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포토몽타주, 즉 서로 다른 사진을 이어 붙여 만든 작품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 사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서도 전쟁은 진짜 이루어진 전장보다 우리가 보는 헐리웃 영화의 전쟁영화가 더 실감나는 전쟁이란 말을 한다. 대중이 보는 매체가 그렇게 만들어 현실적인 비극을 마치 산파극의 정당한 내러티브로 전환해버린다. 해방은커녕 자신이 현재의 스펙타클에 얽매인 사실조차 알기 어렵다. 그런다고 관객이 새로운 눈을 가지도록 하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일이다. 다양한 가치관과 인간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중은 한 가지 틀에 갇힐 수 없다. 누가 그랬던가? 모든 시민은 자신이 예술가와 작가 그리고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해방이 된다고 말이다.
물론 책을 보고 현실을 돌아본다면 무척 어려운 조건이란 것은 안다. 어렵다고 자신 스스로의 해방이란 단어란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처럼 배우는 사람들, 즉 우리 대중은 무엇을 위해 그것을 배우는지 모른다. 그저 권력의 관계성에서 자신이 모르기에 단지 그 이유로 수동적인 삶을 받아들인다. 그게 곧 대중으로 이어지고, 우리에겐 스스로의 삶보단 통제된 삶을 강요하여 현재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선 누가 강요할 수 없다. 칸트의 철학이 모든 게 맞을 수 없더라도 칸트는 계몽이란 자신이 스스로 그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의 알을 깰 수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