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7년 세트 - 전7권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2월
평점 :
품절


조선시대 관련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 고관대신과 일반 신료를 보면 표준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료를 보면 조정대신들이 의논이나 토론할 때 방언이 많이 섞여서 잘 알아듣지 못할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언어의 존재성에서 언어란 사회적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적 관계성이란 비단 국내적 상황이 아니라 지역적 조건에도 관련이 있다. 외지에서 살아오다 이제 조정에 와서 표준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다. 평생 전남지역이나 부산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말투가 새삼 다름을 알게 된다.

 

물론 서울사람들이 지역에 내려가면 자신의 말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일정 기간 지나면 어느 정도 대화는 성립된다. 그 지역의 특성, 그 지역의 사람들, 그 지역의 역사, 그 지역의 아픔까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이순신의 7>이란 소설은 그런 작품이다. 이순신과 관련된 미디어로 제일 유명한 작품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영화 <명량>이 있다. 전자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약간의 픽션을 잡어 넣어 어느 정도 재미를 보여준 드라마이라면 후자는 명량대첩의 이순신을 하나의 영웅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 영화이다.

 

어느 것이 좋다 안 좋다 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전자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의 끈기와 인내심은 분명 높다. 하지만 일방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수하에 많은 장수를 거느린 전라좌수사 겸 수군통제사이나, 막상 회의를 진행할 때 첨사나 만호 같은 상급무관만 아니라 권관이나 주부, 하다못해 일반 수군병졸이나 격꾼까지 모아서 회의를 진행했다. 단순히 위에서 내려보내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수시로 보고를 받고 토의하여 최상의 결론에 도달하는 리더쉽이 2323승의 비결이었다.

 

그런 비결을 보자면 <명량>이란 영화에서 다소 떨어지는 감이 든다. 그나마 <불멸의 이순신>에선 사사로이 병졸 하나하나를 다독거리는 모습에서 이순신 전대의 비결이 나온다. 화살촉 하나 만드는 노인, 배에 올라 열심히 톱질을 하는 목수, 화살을 열심히 날리는 수군 궁병까지 찾아간다. 조선시대 계급사회에서 양반과 상민의 차이는 엄청난데, 거기에 수군통제사라면 당상관 중에서도 상위계급이다.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장수가 일개 군졸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이해해주면 어느 누가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을까?

 

군대생활에서 일개 사병과 대대장의 차이는 어마하다. 이순신은 지금의 직급에서 생각하면 대대장보다 높은 해군참모총장이다. 해군참모총장이 직접 전선에 올라가 총탄이 날라 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사병을 독려한다면 그 선단은 최고의 용사로 거듭날 것이다. 지금의 군대를 보면 위의 참모진은 안전한 후방에서 마치 체스나 장기 두듯이 전력을 움직인다. 그들의 지휘는 곧 사병들의 목숨 1명을 버릴 것인가? 혹은 100명을 버릴 것인가? 하는 숫자 계산놀이만 하는 셈이다.

 

<이순신의 7>을 보면 이순신이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우리가 늘 미디어에서 보던 이순신은 표준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건천동 일원에서 어린 시절을 잠시 보내고, 청소년과 청년기는 충난 아산 외가 쪽에서 보낸다. 결혼은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하여 전남 보성으로 내려갔기에 그가 겪은 언어적 구조는 서울 표준어보다 지방의 방언이 더욱 많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이야 서울 부산까지 거리가 KTX2시간 반, 항공기로 1시간, 자동차 4시간 이상이면 돌파한다. 그 과거시대 걸어서 한양까지 1달이고, 말을 타고 가도 2~3일은 걸린다. 교통적 편리함은 곧 왕래할 수 있는 시간길이를 척도 할 수 있고, 그 길이에 대한 시간은 타 지역에 대한 정보와 이해도까지 이어진다.

 

높으신 양반들은 표준어, 하층민들은 방언을 사용하는 점은 언어에 담긴 사회적 권력을 의미한다. 반상관계의 엄격함에서 전쟁에서 과연 그런 단합력이 나올 수 있었는가? <이순신의 7>은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노량해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마무리는 <이순신의 7>에 대한 후기를 적어준 홍기삼 문학평론가의 글이다. 홍기삼 동국대학교 전 총장의 글을 보면 내가 이 책을 보던 내용과 그가 봤던 부분은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내 감이 맞은 것이 있었다. <이순신의 7>을 작성한 정찬주 작가의 고향은 보성이다.

 

전남지역의 해안가는 부산경남과 마찬가지로 왜구들의 침입이 잦았다. 특히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전남 강진 일대는 큰 위기에 봉착했고, 이순신의 조력자 중 하나인 동고 이준경 선생이 지휘하던 관군은 왜구를 무찔렀다. 을묘왜변은 보통 왜구의 숫자와 규모가 달랐다. 제법 큰 군사규모를 가진 해적군단이었다. 전남지역의 앞바다에 계속 왜구가 출현하고, 임진왜란 이전에도 계속 침입하여 많은 양민과 관군들을 피살했다. 보성 역시 해안가가 옆에 있었고, 보성 좌측으로 장흥군과 강진군, 우측으로 순천시와 여수군이 위치했다.

 

이순신이 처음 부임한 곳은 전라좌도 수군영이다. 전라우도 수군영은 해남에 있었다. 전라지역이 경상지역보다 일본 대마다보다 멀기 때문에 군사들은 경상도 수군기지에 더 많았다. 장비와 재물 그리고 지원도 그렇다. 이순신이 속한 전라좌수영은 수군기지 고을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하고, 전선도 부족했다. 1년 동안 좌수사로 활동하면서 다른 수군기지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갖춘 것은 그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거북선을 축조하고, 군량미를 만드는 것은 혼자서 불가능하다. 그것을 같이 만들어나갈 인재들이 필요하고, 그들의 마음을 잘 알아줘야 했다. <이순신 7> 앞부분을 보면, 진무를 맡은 수군집안에 사람이 죽어 이순신이 조문가는 장면이 나온다.

 

좌수사가 일개 수군 병졸을 위해 조문을 가고, 거기에 필요한 장례음식과 물품을 대주는 모습이 나온다. 전쟁 중에 아군의 병력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작전을 유리한 쪽으로 검토하며, 전투과정 중 사망한 병졸 하나하나 기록하고, 그들의 유해를 집으로 보낼 때 곡식이나 물품을 보내고 위로했다. 특히나 전몰장병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장면에서 많은 수군 장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엄정하고 군기를 세우는 무관인 것은 분명하나, 사실 부하 장병을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어렵다.

 

TV에서 보이는 이순신은 이상화 된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7>은 이상적인 인물보단 서민과 같이 숨을 쉬는 정겨운 모습으로 나온다. 송희립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 이순신은 충청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사투리는 단순히 방언으로 볼 게 아니라 문화와 역사적 공간을 이어주는 전달수단이기도 하다. 홍기삼 문학평론가가 주목한 방언의 가치,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호남이 없었다면 절대로 조선은 없었다고 하는 그 사실에 주목한다. 이 책을 읽을 때 단순히 소설 그 자체도 좋지만, 비봉출판사에서 출간한 <충무공 이순신 전서>, <이순신과 임진왜란>, <난중일기>, <징비록> 모두 같이 보면 좋다.

 

거기에 조금 추가하면 기축옥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은 앞으로 나가지 않은 장수들에게 호통을 친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안위 장군이다. 안위는 거제현령으로 명량의 승리로 정3품 통정대부까지 이르고 후에 수사 자리에도 오른 장수이다. 그는 사실 벼슬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이 안위에게 5촌 당숙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촌형제들의 아이들도 친하게 지내는데, 조선시대라면 상당히 가까운 사이다. 안위는 기축옥사 여파로 귀양 가고, 전쟁 중 풀려나 활약을 했다. 첨사 이응화 역시 기축옥사와 연루되어 귀양가다 다시 이순신의 도움으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기축옥사가 중요한 이유는 기축옥사에서 가장 많은 화를 당한 곳이 호남지역이다.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올 적에 호남에서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은 3~4곳 정도라고 했다. 많은 동인 계열 선비들이 유배나 죽임을 당했고, 거북선 돌격대장 이언량은 광산이씨인데, 광산이씨 중에 이발과 이길 가족과 친지들은 선조와 정철에 의해 가장 많은 화를 당한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동인(북인과 남인)과 서인, 관군과 의병대의 체계가 달랐고, 특히나 북인 위주의 의병, 남인위주의 관군은 전쟁 중에 많은 희생을 받았다.

 

전쟁이 종료될 때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세력은 남인이었다. 이순신이 서거한 날, 서애 류성룡 선생은 파직되었다. 그가 파직된 이유는 탐욕이 많고 시기심이 넘치고, 군왕을 속이고 조정을 어지럽힌 이유이다. 전쟁 중 도체찰사의 업무와 내정, 외교에서 류성룡 선생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게 거품이었다. 이순신의 목숨이 선조에게 위협받을 때 정탁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정탁과 류성룡은 모두 퇴계 이황 선생 문하생이었다. 전장에서 장병들은 죽음과 배고픔에 힘겨워 하는데, 중앙관료와 선조는 권력을 유지하고 누리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만 나온다.

 

홍기삼 문학평론가는 선조를 두고 암군 중에 암군(暗君)이라 한다. 선조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억지로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기축옥사와 인조반정의 특성은 동인의 제거이다. 동인을 제거한 서인의 관점에서 기축옥사는 당연한 일이고, 인조반정에서 동인이 만든 자리를 처리하는 게 제일 급선무였다. 안위 장군이 업적이 있어도, 정묘호란 때 그를 기용하지 않았다. 안위의 동인제거의 기회를 준 정여립의 5촌 조카이다. 광해군과 동인의 후예 북인을 제거한 서인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광해군의 가치를 깎으려면 선조의 입지를 올릴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원균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아주 고약하고 나쁜 모습이다. 같은 조선인까지 잡아 죽여 머리모양을 왜군처럼 만들어 행재소로 보낸 공으로 치부하던 그 모습은 사악한 인간 중에 인간이었다. 이순신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할 때 그가 한 말은 질투에 미친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수군 장병을 수장시키고, 수많은 전선을 침몰시키며, 조선의 백성들이 왜적에게 도륙당할 때, 그를 기용하고 치켜 세운 선조와 윤두수의 행적은 대한민국 역사가 끝나는 그날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의 공적으로 동급으로 취급했고, 원균의 집안에 계속 곡식을 하사하여 그의 공을 치하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업적을 끝까지 인정하기 싫어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원균의 집안에게 내려준 곡식을 금지했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조와 서인들은 원균의 집안에게 곡식을 다시 내어주기 시작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점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어진다. 이순신의 사당을 명나라 장수들이 선조에게 요청했지만, 선조는 끝내 설치해주지 않았다. 홍기삼 문학평론가가 <징비록>의 글을 인용했다. 이순신의 유해가 고향 아산으로 돌아갈 때 많은 백성들이 나와 통곡하고 슬퍼했다고 말이다.

 

그 내용은 비단 백성들만 아니다. 류성룡 선생도 자신이 느낀 슬픔을 백성의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때까지 우리는 이순신의 영웅주의 관점에서 칭송했지만, 인간 이순신에 대한 모습을 잘 몰랐다. <이순신의 7>에서 이순신은 아들과 조카를 똑같이 대해주고, 요절한 두 형님을 대신하여 조카의 생계와 교육, 그리고 결혼까지 챙겨준다. 남솔(濫率)이란 죄가 있다. 부임한 사또가 너무 많은 가족을 임지로 데리고 가면 그들의 부양으로 많은 백성들에게 고통이 온다. 이순신이 남솔에 대해 주변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자, 눈을 흘리면서 답변하길 돌봐줄 사람도 없는 저 어린 것들을 어떻게 내버려두고 갈 수 있냐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이순신의 덕을 인정했다. 그 덕분에 이순신의 조카들은 모두 임진왜란에 활약했고, 노량에서 이순신을 대신하여 군함을 지휘했다. 사람을 감동을 시키면 그 감동을 준 자가 죽어도 그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 명예와 체통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지만, 그 명예에 대한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하면 현대사회에서도 본 받은 점은 있다. <이순신의 7>에서 이순은 눈앞에 바다를 두고 왜적만 싸운 것이 아니다. 눈앞의 바다보다 더 깊고 거친 마음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권력자들은 이순신의 목을 언제라도 물어뜯을 기세를 보여주었다.

 

드라마에서 원균이 사망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될 때 비장미를 보여주지만, 책에서는 비장함을 보여주기보단 공허감으로 보여주었다. 그래도 그가 칼을 잡고 배 위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조선의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임명사령장을 받지 않고, 그대로 병을 핑계대고 물러났다면 조선의 백성들은 모조리 도륙 났을 것이다. 조선이 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조선의 백성이 몰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백성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고, 삶의 목적을 부여했다. 이순신은 백성들의 삶과 희망을 주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 우리의 바다를 지키는 바다의 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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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2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의사소통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5월 23일이 고 노무현 대통령 기일이라서일까요. 충무공의 모습 속에서 노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05-23 21:58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노짱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봉하마을에 가서 제초도 하고 그랬는데, 4~6년 전 봉하마을에서 제초기 돌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평이 아직 좋지 않았으나, 이제 재평가 받으니 마음이 참 착찹하네요...
 


요새 한걸레라고 하고, 한경오의 큰형인 한겨레에서 기사를 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43734.html?_ns=t0


워마드 회원이 바로 홍익대학교 회화학과 누드수업에서 남자모델의 알몸을 촬영해서 인터넷에 유포한 것이다. 만일 그 남자가 포르노 배우나 성인비디오 전문배우라면 어느 정도 감안할 수 있지만, 그런 직업과 무관한 사람이다. 

예전에 내가 계속 메갈리아 워마드에 대해 이건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거론했지만, 나에게 돌아온 덧글을 보면 참 무례하고, 비판적이지 못한 글이 많았다. 

남녀문제를 두고 아직 여성에 대해 사회적 부조리가 많은 것을 알지만, 그것을 빌미로 이런 행위를 정당화한 것에 대해 반성이 없다면 더 나은 사회는 없다.

한겨레에서 지적한 내용은 이미 내가 그전에 블로그에 올린 내용들이다. 꼬리자르기 식의 기사를 보면서 이제사 우려먹기를 다른식으로 전환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연세대학교에서 남학생들이 단체 카톡으로 음란행위를 일삼아 퇴학조치를 당했는데, 이건 어떻게 정리될지 모르겠다. 이런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눈을 돌린 지식인과 페미니스트 학자들, 그들이 예전에 워마드를 지지발언을 한 점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하다.


어떤 사람은 그 누드모델의 몸이 빈약해서 그런 것을 보여준 게 오히려 여학생에게 실례라고 하니 정신건강이 참 의심스럽다. 누드모델의 기준은 모르나, 현대미술에서 미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른 가변성과 다양성 그리고 추의 미학도 존재한다. 미의 가치와 인간의 가치의 차이를 밟는 자들이 설치니 스스로 진보의 길을 몰락시키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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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5-09 09:49   좋아요 1 | URL
혐오에 대해서는 조롱으로 회극화 해야지.
저런 혐오로 누군가를 비극으로 만드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찍는 것도 그렇고, 올린 것도 그렇고, 거기에 조롱도 그렇고...

전에 20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병과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나는데
거기에 조롱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자기 안의 악마를 보지 않는
인간의 무서움이 두렵습니다.


cyrus 2018-05-09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무조건 메갈리아와 워마드를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홍대누드 사건’을 미러링으로 보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미투 운동의 관심이 떨어지고 있는데, 이 사건 때문에 페미니즘과 미투 운동에 대한 비뚤어진 인식이 확산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5-09 12:45   좋아요 3 | URL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분명히 메갈리즘과 페미니즘은 다르다고 했고, 정희진 교수같은 분들이 정말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페미니즘 관련하여 메갈리아 사태를 두고 펼쳐온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들 스스로가 반성하고 이 문제를 두고 어떤 반응을 보여주느냐가 제 관심사입니다.

예전에 그렇게 정리해도 그런 점을 보고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역정내는 분들도 있었죠. 페미니스트라고 다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게 아니나, 주류 내지 진보언론사들이 저기에 편승해여 계속 방치하다 이제 등 돌리며 마치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뻔뻔함에 그저 한심하게 여길 뿐입니다.

메갈리아 워마드가 미러링으로 계속 대응한다고 했지만, 이미 미러링의 차원을 넘어선지는 옛날이라 봅니다.
 

최근 헌법이 개정을 준비하려 한다하지만 헌법이 정말 개정될지 얼마나 그 취지에 맞게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른다헌법전문에 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민중항쟁을 상기시키려 한다대한민국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로 시작하여 419혁명만 아니라 518의 아픔까지 담으려 한 점이다최근 43사건에 대한 재판단이 이루어지려 한다. 43사건 당시 수많은 제주주민들이 학살당하기 때문이다한국의 역사는 민중에게 거의 학살과 착취 그리고 모욕의 역사에 가깝다가진 자와 권력만 추구하는 자에게 한국 그리고 조선은 철저하게 유린 당해온 것이다.

 

최근에 읽은 <호남의 한>과 <지워진 이름 정여립>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기축옥사는 조선시대의 광주사태다광주사태란 결국 518민주화 항쟁을 의미한다광주민주화운동을 군부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광주시민은 군인들의 총칼에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지금도 그 가해자들은 어둠속에서 당시 피해자를 모욕하고최초 발포명령자는 나오지 않아 유족들은 그 원한에 사무쳐 매년 5월만 되면 그 고통의 눈물에 이기지 못한다나이가 60이 되어도 80이 넘어도 눈가에 투명한 피가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20세기 광주의 비극은 그때만이 아니라 이미 16세기 조선에도 있었다이 일은 모르는 이들에게 상관없지만그 땅에 살아온 자이나혹은 그 땅에서 살아온 후손에게 여전히 내려오는 하나의 역사이며 신화이다무의식적 속에 내려온 울분과 억울함에 현세에 나타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2018년 제주 43사건에 대한 추모영결식 기사를 보았다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서북청년단과 군경의 총칼에 잃은 분의 사연이 나왔다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아버지와 함께 죽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비극은 나이 60 중반의 할머니의 가슴을 찌르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한이란 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본인만 아니라 후손까지 이어진다한이란 그런 것이다가족들과 후손은 평생 불순분자 내지 역적그리고 빨갱이란 이름을 받고 살아가야 한다기축옥사 역시 그렇다돌아가신 아버지는 송강 정철에 대해 무척 나쁘게 생각했다그리고 윤한봉이란 인물이 무척 독한 놈이라 했다송강 정철은 선조시대 활약한 정승이고윤한봉은 518 운동의 수괴로 지목된 인물이다송강 정철은 조선시대 서인의 영수이고윤한봉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시절 괴수로 지목된 인물이다.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기축옥사나 518 모두 전남지역에 큰 상처를 주었고조선시대에는 역적이 나오는 곳이 호남이고, 20세기에는 반국가세력이 출몰하는 곳이 호남이다호남의 한은 쉽지 않은 모양이다우연히 어머니 친가인 장흥을 방문할 때 어느 산이 큰 공사를 단행하고 있었다그 공사가 끝나서 알고 보니 동학운동을 하던 농민을 기념하던 곳이었다호남은 농민의 착취와 눈물이 어린 곳이고정약용 선생이 강진 만덕산에서 유배할 적에 불쌍한 백성을 보고 그 안타까움을 잊을 수 없어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를 남긴 곳이다.

 

애절양이란 시는 이미 죽은 시아버지갓 태어난 사내아이가 군적에 올라 세금을 바치라는 관아에 횡포를 고발하는 시조이다군납을 납부하지 못해 농민의 소를 끌고 가는 바람에 사내는 그 울분을 참지 못해 자신의 성기를 칼로 도려내고아낙네는 자신의 남편의 성기를 잡고 관아에 가서 제발 군납을 제대로 해달라고 했지만돌아오는 것은 사나운 관졸의 목소리였다갈밭의 아낙네는 피가 철철 흐르는 남편의 성기를 잡고 그저 눈물을 흐르며 집에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불과 200년 전의 사연이나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그 정도로 착취가 심한 곳이 호남이다호남의 곡창지대는 탐관오리에게 재물을 늘릴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다산이 처음 강진에 올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고 천주학쟁이라 하여 두려워했다하지만 점차 마을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고다산의 자신의 친구와 외가의 먼 친척의 도움으로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다산초당산장의 주인은 윤구로의 아버지 윤단이었다윤단은 관찰사와 안동도호부사를 지낸 행당공 윤복의 후손이었다윤단의 손자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였고윤단의 선조인 윤복은 귤정공 윤구의 동생이었다윤구의 후손 중에 고산 윤선도고산 윤선도의 후손 공재 윤두서공재 윤두서의 손녀는 다산 선생의 어머니다다산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를 해도 그나마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그리고 다산의 오랜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는 다산의 외가 조상 윤구의 아버지 어초은 윤효정의 형님인 윤효례의 후손이었다지금도 재미있는 일화지만다산 정약용 선생의 업적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나주정씨의 영광이기도 하지만한편으로 해남윤씨의 영광이기도 하다다산 선생이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의 묘비명을 작성했다그 묘비명에서 윤서유는 남인이기 때문에 박해를 당했다는 말이 나온다즉 정약용 선생과 윤서유그리고 다산초당의 주인은 모두 남인의 세력인 것이 나온다남인이 왜 중요한가?

 

다산 선생은 호남에 유배할 때 사류의 기운이 모조리 죽었다고 한다남도를 대표하는 사대부 가문은 3~4 정도이고그 나머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했다남도의 사류들이 몰락한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그것은 기축옥사로부터 시작된 점이다다산초당의 주인인 윤단의 10대조 윤복은 안동도호부사를 역임할 때 퇴계 이황 선생과 교유를 나누었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퇴계 선생 문하로 보냈다퇴계 선생 문하에 이름난 인물로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 선생이 있다이들은 모두 퇴계의 수제자이기도 하나한편으로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와 초유사로 활약했다.

 

그리고 윤복의 아들인 윤단중과 그 후예들은 임지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했다윤단중은 이순신 장군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고그의 8~10촌 숙부 내지 형제들도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거나 의병으로 활동했다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적은 왜군만 아니라 조정의 당쟁이었다최근 읽은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읽으면 원균과 서인세력의 견제가 결국 이순신으로 하여금 경질되게 했던 원인으로 나온다그리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활약한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은 학봉 김성일 문하생이란 점도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주변 무관도 서인 내지 동인의 여력이 미치겠지만대부분 동인 특히 남인에 가까운 인물이 많은 점을 알 수 있다임진왜란 당시 의병도 역시 서인과 남인 그리고 북인으로 갈려 활약했다서인으로 조헌과 고경명최경회 같은 창의사들이 있었고북인으로 곽재우와 정인홍 같은 사류도 있었다당쟁은 의병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서인과 동인으로 갈려져 지휘체계가 구성되었다이 모든 원인은 기축옥사의 영향이었다기축옥사 당시 가장 활약한 의병으로 곽재우가 있다곽재우는 남명 조식 선생의 마지막 제자였고그의 아내는 남명 선생의 외손녀였다게다가 남명 선생의 제자인 최영경과 정인홍 그리고 김면과 김우옹과 친분을 나누었다기축옥사 이후 최영경이 죽고정인홍이 파면되고남명학파 모두가 화를 입자 의령에 은거하다 정암진에서 왜군을 소탕했다.

 

최영경은 학문의 수준이 높았고언제나 고고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그가 화를 입은 송강 정철이 자신과 만나기 원했지만송강이 주색이 강하고 성품이 너무 급하므로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가난하지만학문에 깊은 뜻을 둔 최영경은 기축옥사 당시 옥사를 치르다 죽고 만다그것도 농사만 짓던 동생이 먼저 억울하게 죽어 병을 얻게 되면서다기축옥사의 억울함은 동인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특히 남명학파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다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이유도 역시 정인홍을 비롯한 조식 문하생들이 서인에 대한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다.

 

남인 역시 원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최영경은 조식 선생만 아니라 퇴계 선생에게 학문을 연결되고퇴계의 문하생 조대중 역시 기축옥사 당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 중에 하나이다더 심각한 이유는 동암 이발과 그의 동생 이길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고문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기축옥사는 1589년에 일어났고이미 7갑자(420)이 지났지만그 한은 호남에서 사라지지 않았다아버지가 왜 정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을까?

 

오항녕 교수는 나름 설득력이 있는 말을 했지만그 말 자체가 설득이 없다기축옥사에 대한 기록에서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의 사료를 언급했다고산 윤선도의 고모할머니는 동암 이발의 어머니다자신의 집안에 화를 당해 그 원한으로 기축옥사를 추측했다는 말 자체가 논리모순이다자신의 책에 기축옥사 때 화를 당한 동암 이발의 가문 광산이씨의 족보 관련도서에 고산의 후손 윤영선 전 광주시장이 서문을 적었다는 내용을 언급한다중요한 사실 중에 하나가 동알 이발이 태어난 곳은 윤선도의 고향인 해남 연동마을이기 때문이다윤선도 본인은 서울 명례방(명동성당인근에 태어났지만동암 이발은 해남윤씨 득관조 어초은 윤효정이 살아있을 때 태어난 분이다.

 

21세기가 도래해도 광산이씨 문중이 해남윤씨 문중과 서로 교유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다강진 도암면 강정리에 있는 해남윤씨 추원당은 고산 윤선도가 만든 제각이다그곳은 고산의 현조부(5대조)와 그 선대(6대조)를 위해 만든 곳이다여기에는 해남윤시 목각족보가 보존되어 있다강진에는 수암서원이라 하여 동암 이발을 모시는 서원이 있다강진은 동암 이발을 모시는 서원이 있지만이발의 외가 식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이발의 어머니의 남동생인 윤의중은 귀양가던 중 사망했고그는 윤선도의 할아버지다그리고 윤의중의 사촌형제는 윤단중이다윤단중은 퇴계의 문하생이다조선시대 친인척들은 가까운 고을에 모여 살았고설사 조금 떨어져도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서 정철에 대한 원한이 깊이 남은 이유도 그렇다기축옥사 일어나던 시절 고산윤선도는 이제 어린아이지만내 직계 할아버지는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고고산 선생과 10촌 형제다지금의 10촌은 멀겠지만조선시대 10촌은 무시할 수 없다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연루된 인물 중에 병조업무에 밝은 정언신이 있었다그는 정여립의 9촌 숙부란 이유로 고문당한 후 귀양 가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정언신이 없었다면 이순신의 앞길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족보를 읽으면 기축옥사 이후로 벼슬에 나가는 사람이 많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기축옥사 당시 이발의 외가인 점에서 이미 큰 화를 당했고그 원한은 현세까지 이어진 온 셈이다오항녕 교수의 책에서 간과하는 점은 지금도 후손이 정철이 원망하나그것을 너무 작은 것으로 다루는 점이다추국과정에서 팔순 넘은 노모와 이제 10살 채 되지 않은 아이가 고문 중에 죽은 것은 조선시대 미증유의 사건이다원래 조선의 형별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특히 나이가 많은 여성은 고문을 함부로 가하지 않았다기록에서 이발의 어머니와 아들이 고문을 당하자 옥졸이 너무 슬퍼서 울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이가 팔순이 할머니가 압슬형을 당하자 너무 고문이 심하다는 말을 하고이제 10살 밖에 안 되는 아이는 자신은 역적이 아니며아버지는 오로지 충효에 충실히 하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이발의 아들을 말을 들은 선조는 그 아이가 괘씸하다며 머리를 터지게 해 죽였다그래서 기축옥사는 서인에게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나모멸의 역사이다아무리 역모라고 해도 정여립과 관계는 된 인물은 이발로 충분하지굳이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에게 죽음을 강요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북인(이이첨)과 서인(노론)의 대립관계에 있는 기록이다.

 

기축옥사를 두도 한쪽은 서인 특히 정철을한쪽은 선조의 무자비함으로 이루어진 피비린내라고 말한다하지만 둘 다 틀렸다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서로 음모를 짠 잔인한 사건일 뿐이다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 한다주자 성리학에서 공맹의 수사학과 다르게 절대왕조를 위해 성리학은 왕조의 권력과 거기에 기생하는 권신들의 권력을 중시한다하지만 정작 공맹의 사상은 군주가 틀리면 백성은 자신의 군주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왕도주의는 어디까지나 민본주의에 의거한 것이지권력자만을 위한 사상이 아닌 것이다.

 

정여립이 역적인지 아닌지는 어느 책에 따라 다르지만,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올라오면 어는 누구는 영국 크롬웰보다 더 이른 시기에 조선에서는 공화주의자가 있었다고 말한다정여립이 말한 대동사상은 당시 왕조시대 역모일 수 있지만백성에게 달랐다남녀노소를 떠나신분이 양반이건 노비이건 모두 공평히 글을 배우고 같이 술을 마실 수 있었다. 21세기 남녀노소 그 누구 어느 자이건 신분의 제재를 받지 않지만조선시대는 달랐다거기에서 벗어난 인간이 살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 있었고정여립은 거기에 모든 것을 받친 사람이다역적이든 아니든 문제가 아니라 분명 그 마음을 가진 점이다.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장이라 한다면 정여립은 분명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이며 민주주의를 꿈꾼 사람이다그의 꿈이 침몰하고그와 조금이라도 관계있는 자라면 모조리 도륙이 나는 비극에서 우린 어떻게 보는 게 옳은 것인가임진왜란으로 기축옥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문서가 유실되고실록과 그 외 당시 상황을 기록또한 기축옥사와 관련된 인물의 행장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오항녕 교수는 기축옥사의 기억을 두고 정철이냐 유성룡이냐는 말과 함께 당시 추국하던 시스템이라 하나그것은 억지논리이다.

 

집안 족보를 뒤져보며 찾은 것은 기축옥사 당시 억울하게 죽은 이발의 어머니는 퇴계의 제자 윤단중의 사촌누나라는 점이고서애 유성룡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고유성룡에 의해 천거된 수군 통제사 이순신에게 윤단중이 친분을 계속 유지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다시 족보를 찾아보면 이발의 어머니는 윤구의 따님이고윤구는 기묘사화 당시 훈구세력에 의해 화를 당한다나의 직계 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로 정암 조광조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으나기묘사화를 당한 후 향촌으로 내려온다윤구는 내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할아버지의 사촌이다그 당시 할아버지의 작은 할아버지는 윤구 선생이 기묘사화를 당하자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오항녕 선생은 해남윤씨 집안이 광산이씨 집안과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이발의 가족이 참극을 당한 것을 추측이라 하는 표현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다른 서적에서 호남에서 모르는 물고기가 잡히며아낙네는 그 생선의 머리를 몽둥이로 때리면서 증철아증철아!”라고 외친다송강 정철에 대한 원한이 민간에서 계속 내려온 점을 두고 온 점을 본다면 기축옥사의 폐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송강 정철은 나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믿고 살았지만문제는 주색이 너무 심했다그의 부정적 평가가 심한 책은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다선조가 평양으로 파천할 때 평양유지들이 송강 정철을 불러 위기를 타파하라 한다.

 

그가 왕명을 받고 전쟁의 위기를 해결해야 할 때 빨리 이동하지 않고중간에 기생을 품에 안고 자신이 처한 신세를 한탄하며 시를 읊조렸다백성들은 왜군의 칼에 도륙 나고배고픔에 허덕일 때기생을 품에 안고 술을 마시며 풍류나 외던 그 모습을 보자니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다팔은 안으로 굽는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오항녕 교수가 갑인예송을 두고 갑인사화라고 말하며그 원인을 윤선도라 말하는 것조차 오류이다기축옥사 피해자(할아버지가 귀양 가는 길에 죽으니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게 당연하다)가 어느새 갑인예송의 가해자로 둔갑되었으니 말이다.

 

윤선도는 할아버지 윤의중의 죽음이 신원되고거기에 정개청의 죽음을 다시 신원하여 자산서원을 유지하는 게 목표였다하지만 자산서원은 남인과 서인이 교차하면서 언제나 분쟁거리로 되었다하지만 기축옥사 그 자체를 동서 양당의 갈등도 중요하지만그 당사자들과 주변인들이 당시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어떤 업적을 했는지 역시 중요하다백성을 위해 자신의 재력을 나눠주고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권력자에게 목숨을 걸고 대항했는지 말이다광해군을 두고 혼군이라 하고과거제도 엉망이라 했지만이미 선조시대부터 과거장은 엉망이고백성들은 배고픔에 허덕이고군역관리는 엉망이었다.

 

기축옥사로 천명에 가까운 선비가 화를 당했지만정작 중요한 것은 그 선비와 같이 살아가던 조선의 민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는 가이다. <기축옥사 재조명>에서 흥미로운 내용 중에 하나가 나주를 중심으로 동인과 서인의 서원장의 자를 두고 갈등한 내용이 있다조선은 향교가 향촌의 중심이 되어 농민을 관리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부패한 시절 향교는 백성을 고혈을 짜는 곳이고청렴한 선비가 있으며백성의 생활을 어루 만져주고 다독여주던 곳이었을 것이다. 21세기 한국을 두고 헬조선이라 한다헬조선의 시작점은 역시 임진왜란이지만그 임진왜란 당시 유망한 사류는 기축옥사에서 대거 희생되고임진왜란 당시 상당수가 순국했다.

 

병자호란 당시 의병은 전국에서 일어나지 않았고관군조차 눈치만 보고 출진하지 않았다선비의 정신이 완전히 소멸한 시기는 결국 16세기이고, 17세기에 선비가 살 곳은 산속이었다만일 세상에 잘못 나오면 장형을 받고 죽거나 멀리 귀양 가서 고역만 치룰 뿐이다기축옥사는 당쟁론적인 상황에 놓여있지만그것을 당쟁론적인 것으로 치부한 결과 조선은 전쟁의 병화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그 역사의 상처를 반성하고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무고를 풀어주고다시 시대에 부합된 정신을 찾는 것이 먼 후예들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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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08 2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 시대에 많은 사화가 있었기에 역사를 배우는 이들은 ‘그 사건이 그 사건‘이라는 인식을 하기 쉽지만, 만화애니비평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당사자들과 후손들에게는 사건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구원을 풀자는 목적이 아니라,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도 과거 사건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어야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해석의 기반 위에서 헌법 개정과 같은 현재의 변화도 이루어질 때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4-09 13:24   좋아요 1 | URL
4월 2주 토요일 제가 집안 제사로 시골(강진)에 내려가는데, 거기가 합수 윤한봉 선생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 제 위로 11대조 할아버지를 모시는데, 그분 역시 기축옥사가 일어날 때, 살아있던 분입니다.

강진이란 곳이 지금이야 경치 좋은 곳이나, 과거 조선시대 머나먼 벽지이고, 유배오는 사람에게 한양에서 멀면 멀수록 그 죄가 깊다고 하니,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지요. 게다가 왜구들의 침입도 계속 와서 많은 피해를 보던 곳입니다. 그래도 이런 곳에서 터를 내린 것은 세상을 등지고 은거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세상이었나 봅니다.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 기축옥사의 기억과 당쟁론 너머의 역사담론 8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이상한 책이다. 겉으로 당쟁적적 시각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려 하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발의 어머니는 윤선도의 고모할머니이고, 윤선도의 할아버지 윤의중은 기축옥사로 연루되어 귀양가는 중 사망했으니 피해자의 기록 자체를 오버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엄청난 오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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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 백성의 수난사
주돈식 지음 / 학고재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조선시대 가장 비참한 시기가 언제라고 생각해야 할까? 문득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의 전쟁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객관적으로 사료를 뒤져보면 그것은 약과에 불과했다. 임진왜란의 상처는 할퀴고 지나가도 어째든 왜군은 격퇴되었다. 격퇴 후 전후복구 사업이 뒤따르므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전쟁은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 내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멸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이 친목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명나라와 신흥세력인 누르하치의 관계가 심각한 사태로 돌아섰다.

 

동북아시아 세력에 큰 변화를 맞이하면서 조선은 풍전등화의 운명을 겪게 되었다. 올해 2018년은 임진왜란이 끝이 난지 420년이 7갑자가 지나고, 정묘호란은 약 390년이 되었다. 정묘호란에서 청나라는 잠시 스치듯이 지나갔다. 이어 다시 돌아온 병자호란은 그렇지 못하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적어도 병자호란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요새 자꾸 든다. 병자호란 당시 심양에 끌려간 조선인 50만이란 말도 있고, 그 이상이란 말도 있다. 전쟁 당시 죽은 백성의 수가 수십만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매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공납을 요구했고, 그 중에는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라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누군가의 가족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문제가 심각했다. 청나라 여진족은 문호가 전혀 없었다. 야만족의 습성이 몸에 베였고, 특히나 수렵생활은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했으며, 강한 자만 살아남는 힘든 공간에서 힘을 키워왔다. 18세기 이르러 청나라도 제법 문학이 높게 되었다. 청나라가 멸망시킨 명나라 한족(漢族)들이 청나라의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그들은 황야의 들개가 아니라 잘 길들여진 집안의 사냥개가 되었다. 들개로 있을 때는 무조건 달라 들어 그 날카로운 이빨로 상대의 목을 물고, 내장을 씹을 정도로 잔혹했다.

 

임진왜란에서 왜군은 포로를 납치하고 자국으로 데려갈 경우 배를 이용하나, 청나라는 달랐다. 그들은 육로를 이용하고, 먼 길 3,000리를 걸어가야 했다. 추운 겨울 걸어서 조선 땅을 벗어나 이국땅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절망이다. 거기다 추위와 배고픔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목이 날라 가거나 죽도록 얻어터진다. 여자들은 성노리개가 되고, 남자들의 생명은 부지하기 어렵다. 정묘호란은 1627, 정유재란 종전 1598년이란 아직 전쟁의 상흔이 덜 아문 30년이 지나자 발발했다. 그리고 병자호란은 1636년으로 정묘호란의 상흔조차 가릴 수 없을 때 발발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임금과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추운 날씨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항복했고, 그동안 주화파와 척화파는 서로 나누어 대립했다. 그 사이 남한산성을 지키는 군졸은 얼어 죽고, 성 밖에 살아가는 백성들은 도륙을 당했다. 청나라 군대가 몰려와 백성들을 묶어놓고 산 채로 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400년 전의 기록이나,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나로써도 너무 마음이 아픈 일이다. 전쟁의 비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어떤 자비와 희망도 없이 오로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숙명에 놓인 것이다.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를 읽으면 조상들이 겪은 고통과 그리고 권력자들이 행한 위선에 다시금 통탄을 금치 못한다. 호란이 일어날 때 인조가 즉위했고, 인조는 공신들이 준 명검을 지니며 항상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나 인조는 현실을 몰랐다. 조선은 우물 안의 개구리고, 늘 명분만 중시했지만, 그 명분을 의미하는 진정한 실천을 하지 않았다. 광해군을 혼군이라 하여 반정을 일으킬 세력조차 다시 광해군 시대에 보여준 모순들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괄의 난에서 평양감사 박엽이 만든 정예소총부대가 완전 붕괴되었다.

 

청나라는 조선이란 국가가 약하지만, 명나라와 대결에서 조선에 의한 공격으로 후미가 무너질 경우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 내부의 혼란을 이용하여 조선을 공격하고, 우선 명나라와 전쟁에 집중하고, 명나라 붕괴 후 조선을 정벌하고자 했다. 청나라에게 조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청나라의 기병대는 날 새고, 사나우며, 수렵으로 인한 생계로 창술과 궁술이 뛰어났다. 조선군대는 기강도 없고 훈련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더 약한 군사력을 가졌고, 거기다가 지휘관들도 자기 안위만 원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의병들이 창궐하여 서로 목숨을 내놓았지만, 청나라와 전쟁에서 많은 관군들이 눈치만 보고, 의병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병기도 형편없고 군사기강도 무너지니 이미 나라는 끝을 본 셈이다. 광해군을 폐위한 김류를 비롯한 고관대신들은 임진왜란의 재조지은이란 명분 아래 명나라만 바라봤고,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섬겼다. 백성들은 명나라든 청나라든 아무 상관없었다. 제발 군역을 제대로 세우고, 세금을 지나치게 거두는 횡포만 없으면 될 뿐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가고, 인조의 가족과 친척들이 강화도로 들어갈 때 김류의 아들은 자신의 이득을 노렸고, 결국 강화가 무너지자, 사약을 먹고 죽었다. 김류의 첩과 딸이 청나라에 끌려가자 그는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많은 은을 포로 대금으로 지불했다. 돈이 많은 권력자야 돈을 만들 수 있지만, 일반 백성에겐 어림없는 일이었고, 그 돈을 설사 가졌다 해도 늘 순위 밖이었다. 만일 청나라에서 조선인 포로가 도망쳐오면 다시 잡아 청나라로 송환되고, 거기서 모진 수난을 당한다. 나라가 나라다운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권만 챙기고, 더욱더 화가 나는 건 그렇게 척화를 주장하던 고관대료들은 처음에 강하게 반발하다, 이제 청나라에게 몰락하자 태도를 바꾸었다. 청나라에서 척화신을 데리고 와서 심문하려 할 때 목소리 큰 고관대신은 어디가고 이제 중간 위치에 이른 신료만이 자진해서 갔고, 그들은 끝까지 청나라에 저항하다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참수를 당했다. 죽으면 더 이상 모욕은 받지 않으나 죽음은 너무 가혹한 처사이다. 그러나 죽음조차 감내하던 사람이 많았다. 천인 여성은 모르나 양반이나 양인 규수들과 부인들은 몸을 강제로 욕볼 바에 차라리 자살을 선택했다.

 

남자들도 그렇다. 스스로 목을 매거나 칼로 자해하거나, 종을 시켜 목을 조르게 했다. 종은 주인의 명을 받자 눈물을 흘리며 주인의 목을 줄로 졸려 죽였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물건처럼 취급받았고, 홍타이지 죽음 이후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머물면서 받은 설움과 억울함이란 말할 수 없고, 노예시장에 팔려간 조선의 백성을 볼 때마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에서 병자호란과 관련되어 또 다른 사람의 사연이 소개된다. 어느 사대부 무관의 아내가 청나라로 잡혀갈 때 집의 아이가 엄마를 놓치지 않자, 청나라 병사가 아이의 왼손을 잔인하게 잘려버렸다. 아 아이의 어미는 어떻게든 도망쳐 친정집으로 돌아왔다.

 

청나라의 횡포는 심했지만, 조선의 횡포 역시 심했다. 도망친 파로인들이 만일 내려오면 남자들은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여자들은 겁간을 당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성리학의 도의는 사라졌다. 성리학은 정치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이지, 정치적 신념은 전혀 없었다. 어미는 몰래 친정아버지 집에 살았다. 자신의 친정어머니, 시댁식구, 남편 모두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우연히 아들은 살아있었다. 몇 해가 지나고 과거시험이 열렸을 때 어느 선비가 왼쪽 손목이 없었다. 손이 없던 그 선비가 소문이 나자 인조는 직접 그를 불러 손을 잡아주며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잃어버린 손과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축하의 자리가 눈물의 자리가 되었다. 이 소식이 그의 어미에게 가도 어미는 아들에게 찾아갈 수 없었다. 파로인들이 도망치면 그의 후손들이 엄청난 패널티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조차 용서되지 않은 천륜의 관계이다. 이 책을 보니 뭔가 조금 이해되는 게 있다. 우리는 중국인들을 두고 되놈(때놈)”이라 한다. 그 말의 어원이 병자호란에서 시작했다. 성남에 위치한 남한산성 인근 마을주민들은 가끔 떡국을 나누어 먹는다고 하는데, 이는 인조가 정월 하루 겨우 떡국을 먹을 수 있을 때 성 안에 있는 모든 백성에게 떡국을 내렸기 때문이다.

 

400년이나 된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언어로 내려온다. 특히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리는 여성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화냥년이란 말은 심한 욕이다. 그런데 그 말의 어원은 환향녀이고,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정조를 잃은 이유로 시댁에게 버림받고, 친정에서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받아주지 않았다. 억울한 한을 풀어야 하는데, 권력층은 이들은 버렸다. 나라가 약하면 이런 비극을 당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위안부로 끌려간 그 많은 소녀들은 성노예가 되어 죽임을 당했고, 원혼도 달래지 못한 채 그렇게 세상을 하나 둘 떠나가고 있다.

 

힘이 없는 이유로 당한 수모의 역사는 피로써 글을 남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효종에 대한 글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효종은 봉림대군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같이 청나라에서 고생을 한 임금이다. 누구보다 더 가까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보았고, 개방주의자 소현세자와 달리 군권주의자 무관임금으로 임했다. 모두들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말하고, 심지어 청나라에 머리를 숙인 이유로 사대부들이 벼슬을 거부하고 숨는 경우도 많았다. 자신의 벼슬이 판서에 이르러도 누구에게 소개할 때 현감이란 지칭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명나라 황제 만력의 연호에 내려진 벼슬은 인정하고, 청나라 태종의 연호는 거부하는 이들도 많았다. 복수를 꿈을 꾸고 청나라를 치고 싶다면 무관을 우대해야 하나 여전히 문관의 권력이 걸림돌이었다. 병력을 모우기 위해 장정을 모아야 하나 양반들은 군포조차 내지 않고, 죽은 시아버지와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갓난아이들이 군적에 오른다. 병역비리는 곧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징조이다. 사형 찬반론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지만, 병역비리의 죄질이 나쁜 자는 총살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연유이다.

 

군인이 잡은 총이 적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에게 총구를 겨냥해 권력을 탐하고, 장정들은 혹독한 처사에 죽어가고, 농민은 수탈만 당하니 어떻게 희망이 있을까? 작가는 효종의 정신을 다시 찾은 이유는 엄정한 군기를 내세우고, 정예 병사를 만들고 키우기 위해 국가 전반의 부조리를 수정해야 했다. 백성들이 잘 살아야 강한 국력이 되어야 하나, 여전히 사대부들의 반대가 심했다. 서인들의 계보 중에 소론과 노론이 있지만, 이전에 한당(漢黨)과 산당(山堂)이 있다. 대동법과 농민조세 부담 경감이 한당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산당이다. 나라가 청나라에 밟힌 이유가 명확한데, 그 책임조차 외면하고, 남에게서 빼앗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구군분투 하던 그들을 보면, 17세기에 끝나야 할 인간들이 아직도 21세기에도 답습하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치욕의 역사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일으킨다. 피가 끓고, 뼈가 녹는 기분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우리가 잊는다면 다시 역사의 비극을 반복된다. 이 책에서 청나라에 끌려간 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그들이 끌려간 땅에 대를 이어간다는 말을 한다. 조선인들이 구한말 간도로 넘어가거나, 일제의 잔인함에 만주로 넘어가 고국을 등진 분들이 많다. 해방되어도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못한 채 영원히 타국의 주민이 되어 한국인이 되지 못한 조선인 동포들, 그들이 조상을 한에서 이어져온 삶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결코 우연이 아닌 연속적인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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