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아드레날린(ADRENALIN) 01 아드레날린(ADRENALIN) 1
이정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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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을 보면서 미소녀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미소녀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당한 재미가 있다. 그 재미라는 것은 아름답게 그려진 소녀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나 대사, 그리고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남자보다 더 끈질기게 싸우고, 성질도 더럽다는 점에서 말이다. 보통 만화책에서 미소녀들도 전사로서 나오는 장르가 나오는 것은 분명하나,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스토리 전반에서 보이는 상황이란 점이다.

 

 

그런 스토리가 원래 남자인 인간이 여자로 나온다면 어떤 것인가? 한국에서 이른바 TS 장르 즉 trans sexuality라는 성전환이 소재로 된 만화는 그다지 없는 것으로 안다. 이번에 내가 리뷰할 <아드레날린>이란 만화책은 바로 TS물에 대한 만화책이다. 아드레날린이란 것은 명사로는 척추동물의 부신 수질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란 것이다. 인간에게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있다.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면 인간의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한다.

 

 

심장박동이 증가하고, 동공이 확장되는 경우가 있다. 흔히 신경가스를 마시거나 혹은 갑자기 놀라면 교감신경의 반응에 의해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촉진된다. 제목이 아드레날린이라고 하나 딱히 그 제목과 작품의 전개는 어울리지 않은 게 흠이다. 인간의 신경을 자극할 만큼 잔혹하거나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조금 섹시하고 귀여운 캐릭터들이 망가지면서도 개그물로 만들기 때문이다. 작품의 초반은 부산 내지 경남지역에서 올라온 ‘선우희용’이란 남자아이로부터이다.

 

 

이름이 특이하여 주변에서 ‘성희롱’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남에게 미움 받는데 익숙하고, 게다가 순진하여 서울에서 눈뜨고도 코를 베어가는 세상에 딱 걸린다. 나이 17에 서울에 온 것은 지독한 가난이었다. 집에 할머니가 계시고, 그 밑에 자란 소년이 희망이 자신의 집에 없다는 것을 알고 서울로 왔으나, 소매치기로 오해받아 모든 돈을 다 털린다. 조금 상황설정이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운 전개에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조금 기대되는 것은 월 2만원의 하숙집이다.

 

 

집이 상당히 고급인데, 모두 미녀만 있다는 것이고, 한 달에 피 2번을 수혈해주는 조건이다. 모두 환영하나 이상하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은 희용, 게다가 우연히 화장실에 가니 엄청난 미소녀가 속옷차람에 자신의 가슴을 만지면서 이상한 행동을 한다.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도망치나 잡히고, 그 화장실의 미소녀가 란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고, 도망치다가 우연히 문이 열리자 거기에 부딪히고 기절하고 만다. 기절하면서 할머니에 대한 꿈을 꾸자, 란이란 소녀는 희용이를 차마 이 집에 들이는 것은 내키지 않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모두 희용이가 집에 묵는 것은 바란다. 엄청난 미녀와 미소녀들이 왜 희용이를 집에 묵는 것을 바라고, 란이 희용이를 내쫓는 것을 방해한다. 작품의 의문은 바로 여기서 부터이다. 하숙생을 고급스러운 집에 월 2만을 그것도 시기는 2003년이라고 해도 당연히 의문이다. 오는 날부터 환영식에 말이다. 그런 의문 속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으려하나 큰 언니인 샤론에 의해 학교에 가는 희용이, 거기서부터 희용은 운이 없다. 가장 문제아 반에 가서 첫날부터 심하게 맞는다.

 

 

그래서 작품을 보면 거의 희용이의 수난시대로 보일까 싶으나, 중간마다 들어가는 란과 샤론, 그리고 터프한 모습을 상상을 초월한다. 희용이가 7반에서 맞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란이 학교의 짱에게 바로 주먹을 날리거나, 길거리에 어떤 남자가 치마를 올리자 실컷 때린 후에 밧줄을 온몸을 묶은 후에 발로 밟아 꼼짝하지 못하게 모습도 나오고, 후반에 등장한 안예선이란 아이돌 스타가 나오자말자 주먹다짐을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2000년대 초반부에 미소녀가 예쁘게 나오면서도 주먹질을 나누거나 욕을 험하게 하는 장면은 쉽게 볼 수 없는 점이다.

 

 

게다가 학교 싸움 1등도 옆에서 숨어볼 정도로 강력한 이 미소녀들의 행패에 우연히 이상한 꼬맹이가 들어온다. 이름은 ‘렌’, 귀를 보면 인간이 아니라 엘프처럼 생겼다. 란과 란 일행의 주인님이라 불리는 아델리아에게 불만이 있어 찾아왔기에 작품은 갑자기 희용이의 암울한 일상에서 전투모드로 변모한다. 작품의 서사를 전반적으로 보면 일관적인 흐름보단 갑자기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여성이란 점에서 캐릭터들을 보면 다소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생기거나 의상도 그러하다.

 

 

특히 란이 남자일 때 우연히 아델리아에게 흡혈당해 여자로 변신할 때 상황에서 안예선의 모습은 상당히 도발적이었다. 조금 의문이 드는 것은 외국 고급스포츠카를 타는 것은 좋으나 15살에 차를 몬다는 설정에서 약간의 상황적 리얼리티 부족은 피해갈 수 없는 한계점이었다. 작품은 현실적인 상황과 환타지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아무리 환타지가 들어가도 현실의 설정만큼은 고려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가 싶다.

 

 

캐릭터 설정에서 눈매와 얼굴표정, 게다가 의상은 보통 만화책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잘 설정했다. 그렇지만 캐릭터를 미디엄샷이나 클로즈업이 아닌 단순히 풀샷이나 롱샷의 경우에는 조금 대충 그렸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일일이 세세한 표현까지 할 이유는 없겠으나, 조금 그런 부분을 유념했으면 좋았는지 모른다. 작품 중간의 흑백 일러스트들을 봐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문제는 역시 박기수 교수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의 <애니메이션 서사구조와 전략>에서 언급한 것처럼 서사성이다. 이야기의 전개를 부드럽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최근에는 스토리작가와 작화작가가 같이 공동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서로 보완작용을 하는 점에서 좋은 현상이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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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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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말 잘하는 논객으로 3사람을 생각하면 우선 모두 까기의 달인진중권 교수, 한국의 마초주의적 달변가 딴지총수 김어준, 그리고 문재인 의원과 더불어 친노의 쌍두마차인 유시민일 것이다. 다들 말도 잘하고 글도 어느 정도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말의 선동적인 힘에서는 김어준, 필력과 수사학과 논리적인 말투에서는 진중권 교수이나 막상 책을 보면서 가장 읽기가 좋은 사람은 유시민이다. 유시민이란 사람은 정치인이란 인물로서 유명하나 막상 그의 책을 보면 글을 적는 작가로서 혹은 비평가로서의 역할이 더 두각을 나타난다.

 

그의 글을 읽는 순간 분명 철학적이면서도 상당히 가치 있는 글인데 반해 읽기가 수월하다. 대신 진중권 교수의 서적은 생각을 깊이 하면서 봐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게 나도 독설적이고, ‘모두 까기의 달인의 그 모습을 좋아한다. 예전에 본 서적 중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아도르노 편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을 진중권 교수에게 느꼈다. 진정한 자유란 이원화의 흑백논리에서 네 편과 내 편을 벗어나야만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분법적 사고로 살아가지 않으면 이방인 내지 외톨이로 만들어버리는 군중심리의 무서움에서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라는 것은 분명히 달콤하고도 아름다우나, 생각보다 잔혹하고 어려운 길이다. 인간의 역사를 알면 지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의 인생은 언제나 만인 대 만인의 투쟁보단 그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대한 투쟁이라고 봤다. 그 점에서 김어준의 경우는 만인 대 만인 사이에 만인이라면 진중권 교수와 유시민의 경우 그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대한 투쟁일 것이다. 생각해보자. ‘모두 까기의 달인과 언제나 제3선택지를 고른 자의 운명에서 말이다. 정치라는 세계는 항상 더럽고 치사하고 위험천만한 롤러코스터다.

 

그렇지만 정치와 우리와 무관하지 않으나, 사람들은 그 세계를 외면한다. 자신만 더럽히는 것이 싫은 것인지, 아니면 골치가 아프니깐 그런지 알 수 없다. 단지 중요한 것은 언제나 우리들만은 옳아야 하는 것과 누군가는 더러워야 그 정의관을 실현할 수 있다는 천박한 정의관이 아닐까 싶다. 더러운 세계에서 맞서 싸우려면 더러움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언제까지 혼자 깔끔한 척할 수 없다. 문제는 제일 더럽고 질이 나쁠수록 가장 아름답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인간의 오만과 왜곡은 그 더러움과 추악함이 커질수록 자신을 미화시키려고 한다.

 

한국은 영원히 신화의 제국이 될 것이다. 진실 뒤에 가려진 불편함을 영원힌 은폐하고 대체하려는 것들이 신성하니 말이다. 폭력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은 평화적 비폭력이라고 간디가 가르쳤으나 그것은 결국 틀린 답이다. 영국에서 인도는 해방되어도 가난과 내분에서 해방되지 않은 채 간디 역시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내분으로 암살되었다. 원래 경제학도였으나 이상하게 문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까지 글을 적는 유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항상 역사라는 것은 뭔가 실패와 좌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에 관심을 기울이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당통이 프랑스혁명을 주도하였는데, 결국 같은 동지였던 로베스피에르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로베스피에르 역시 같은 혁명가 손에 죽는다. 트로츠키도 레닌과 같이 러시아혁명을 성공하고도 스탈린에게 정치적 패배와 함께 남미 대륙에서 암살당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역사는 성공보단 그 성공 뒤에 보이는 패배와 좌절의 쓴맛을 보고, 더 큰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런 세계의 역사와 우리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위에 3남자는 2009년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과 뭔가 관계가 있는 사이다.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 노무현>이란 책에서 3명의 남자 모두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진중권 교수는 너무 이성적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역사의 굴레에서 정치의 숙청과 피 냄새는 영원히 이어지는 비극에서 노무현의 죽음 역시 그런 비장미를 제공했다. 얼마 전에 읽은 <레퀴엠>에선 전쟁과 전쟁에 관련하여 힘없이 그저 사라져간 군인, 민간인들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때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파병에 대한 진중권 교수의 비판, 레퀴엠이란 죽은 이에 대한 추모에서 이제는 그 비판을 가한 자가 죽어 다른 식으로 진혼곡을 울린다.

 

김어준의 경우 노무현을 남자가 남자로서 좋아했다고 한다. 진짜 사나이로서 말이다. 그러면 유시민은 어떠한가? 대통령 최초 탄핵소추에 의해 임시적으로 업무를 중지당할 때의 이야기다. 유시민 의원은 국회에서 고뇌에 찬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면서 저지하려고 했다. 몸싸움이 격했는지 그의 바지가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20082월 봉하사저에 내려갈 때도 같이 내려가고, 20095월의 그 절망으로 가득한 날에는 죽은 자의 영정 아래 주저앉았다. 그런 그가 정치인을 마무리하고 자유가 없는 자유인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참 인생의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책 본문에서 이 글귀가 인상적이다. “세상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물을 가르고 온 것 같네. 자네는 정치 말고 더 좋은 것을 하게!”라고 노무현 대통령이 유시민에게 한 덕담은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에게 노무현이란 존재는 그 삶과 죽음을 모두 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도대체 이때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아니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내가 살아온 길과 살아야 길은 옳고 그른 것인지, 세상이란 무엇이고 인간이란 무엇인지까지 말이다.

 

엄연히 말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는 유시민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마치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잘한 것과 못한 것에서 후회가 넘치는 지난 일들, 그리고 지금의 자신,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에서 오히려 죽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삶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같이 실존주의적 자세는 약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음이란 인간이 피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종착지, 내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는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란 의문도 준다.

 

개인적으로 락과 메탈, 재즈나 블루스와 같은 음악을 좋아하기에 이 책 처음부터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국내 펑크락을 대중에게 알린 크라잉넛이 나온 것이다. 크라잉넛의 공연에 가서 나도 머리도 흔들고 소리를 지르고, 이래저래 재밌게 즐겼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솔직히 우리가 주인공인적은 없었다. 크라잉넛이란 펑크하는 사람들이 글쟁이로 알아주고, 국회의원과 장관까지 역임한 사람이 부러워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중요한 것은 알고 있으나, 돈으로 인간을 모두 올리면 결국 남는 것은 극한의 허무이다.

 

돈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 자신이 평생 살더라도 남아도는 돈이 있더라도 결국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크라잉넛이 부러운 이유는 그들은 돈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은 곧 놀이이고 예술이었다. 인생은 예술이라고 말하려면 예술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나, 우리의 인생은 예술이 아니라 그저 전시관에 전시된 박제된 동물에 불과하다. 폴 비릴리오의 <소멸의 미학>에서 우리가 진짜 살아있으려면 그 존재가 어느 곳에 머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있는가? 삶이란 그저 박제되어 있는 피조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열정도 없이 꿈도 없이 그저 정해진 틀에 살아가는 인생이란 행복이란 있는 것인가? 사무실에 있는 다른 직원, 나보다 어린 직원이 나에게 아직 철이 덜 든 같다는 말을 들었다. 크라잉넛에 대한 이야기와 그런 밴드를 좋아하는 나, 사실 크라잉넛은 나이 40을 바라보는 중년이다. 그런 중년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음악에 지난 청춘이나 지금도 같이 머리를 흔들고 목소리를 지를 나에게 철없어 보일지 모른다.

 

철이 없다는 것에 대해 나는 이제 오히려 좋겠다고 받아들인다. 철이 들었다란 무엇인가? 과연 그 철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그것은 인생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고 현실의 부정함에 타협하는 것에서 말이다. 나라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 속에서 매우 계산적인 스케줄을 관리하거나 또는 개인적 업무를 한다. 물론 현실의 부정함에 타협할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보고 있다. 힘이 없기에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고 싶기에 철이 없어지고 싶었다.

 

그런다고 내 행동에 책임을 회피하거나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인 유시민도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저자와 책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자유에 대한 책임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의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 의지를 실행하기에는 철드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내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존재적 공감, 나는 정의에 대해 생각하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 현실에 대한 정의란 그저 쓰레기도 못한 허울 명제이다.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고 하나, 사실을 그렇지 않다.

 

병원에서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을 붙잡아 두고 생명장치를 연결하나 그는 다시 말을 하고 걸어다닐 수 없다. 심지어 의식조차 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락사에 대해 반박하고 생명윤리를 논한다. 그러면서도 길거리에 얼어주는 노숙자나 독거노인, 소외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생명윤리를 제외시킨다. 결국 그 논리란 무엇이냐 말인가? 거울뉴런이란 단어가 참 신기했다. 내가 아닌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여 인간이 거기에 대하여 사회적인 고민과 동시에 새로운 변화를 주려는 감정적 반응을 말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보면 인간이 자신이 아닌 타인은 그 수단이 아닌 그 목적으로서 존엄성을 두고 타인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을 주는 것을 정언명령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이는 정언명령이란 어려운 모양이다. 당장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는 것은 인정하나 결국 그 사회적 합의가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 조금이라도 보이는 작은 이익, 그것에 모든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반응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나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연대로서 시작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기에 살아가는 세상을 혼자가 아니라 다수의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존 롤즈의 <만민법>이란 책을 보면서 인간은 공공선이란 정해진 공중도덕을 지나 공동선을 추구하여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딱히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점이다. 그것이 살아가는 길이고, 죽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으면 지난날에 대해 깊이 돌아본다고 한다. 내가 무엇을 했고, 어떤 삶을 살고, 그리고 주변에 어떻게 했는지 말이다. 공부도 싫어하고 오락실 좋아하고 만화책 보기 좋아하고 타인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나에게 마지막 내 모습은 후회로 가득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그런 세상살이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주변에서 너는 아무런 도움과 이익도 안되는 일을 왜 하냐는 말까지 들은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그런 도움과 이익도 안된 것들이 나에게 보물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조금 손해 보는 마음이나 지금은 그것이 있기에 나라는 존재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 단지 조금 비뚤하고 어긋난 것이 흠이나 그것도 나름 매력 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역시 능력이니 말이다.

 

그런 삶을 살아오고 생각하기에 지금이 있어 앞으로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이다. 유시민의 책처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도 같을 것이다. 그런다고 그는 당장 자살하고,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이 올 시기에 죽음에 대한 준비를 위해 옆에 많은 사람을 불러 같이 어울리고 놀고, 축제처럼 만들고 싶다고 하다. 단지 죽음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죽음, 그 죽음에서 나는 안락사를 행위를 찬성한다. 내가 자주 가는 예술영화관에서 유럽영화 중에 <아무르>라는 작품을 상영한다고 한다.

 

노부부의 인생에서 아내가 불치병에 걸린다. 소중한 사람을 옆에 두는 것보다 그저 그 사람이 죽음을 선택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사랑을 실천하는 것 같았다. 고통이란 육체적으로 받는 사람도 괴롭지만 옆에서 정신적 내지 물질적 고통을 받는 사람 역시 괴롭다. 안락사 추구에서 더 이상 가망 없는 자에게 억지로 살아가라는 것은 그 대상자의 존엄성을 정말 생각한 것일까? 차라리 실직하여 절망에 가려진 어려운 사람들을 자살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소중한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2011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자살한 사람이 11,000명 정도라는 점이다. 죽음의 선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고통과 절망의 기로 속에서 방황해야 한다. 하루에 40명 넘는 사람이 죽음을 선택한다. 직업적 원인, 삶의 고독에서 오는 외로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암울한 현실, 게다가 그 자살에서 어린 학생들의 비극까지 들린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보이는 우리의 사회의 어두운 면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 책에서는 유시민의 지난 일과 나가야할 자신의 미래도 담고 있으나, 왠지 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유인으로 돌아가기에 그 자유라는 것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서 그의 자유란 인간의 행복이었다. 인간이 행복해야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보면 하루 3끼 먹고, 청년실업자들이 넘치고 있어도 어떻게든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어서 그나마 행복할 기회는 있을지 모르나, 행복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행복이 무엇일까? 삶의 기로에서 어차피 우리는 일회용 인생이다.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많이 웃고, 많이 울고,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생각하고, 우리는 사실 열정적 인생을 가져야 하나 그것이 정말 어렵다. 나도 당장이라도 만화책을 내 방을 다 채워서 며칠이나 계속 읽고 싶다. 최근에는 어려운 철학이나 사상도서를 접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나 역시 놀이라는 것을 좋아한다. 인간에게 놀이가 소중하기에 나 역시 그 놀이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런 문화를 용서하지 않는다. 언제나 벽에 박힌 것처럼 붕어빵을 만드는 기계 안의 붕어빵처럼 잘 찍혀야 한다. 만약 단팥이 옆에 튀어나오면 팔리지 않는다.

 

오늘 우연히 내가 중학교 시절에 좋아하던 <프린세스 메이커>에 대한 자료를 보다가, 어느 사람의 덧글을 보고 매우 놀랐다. 자신의 아버지가 아주 예전에 하던 게임인데 그것은 자신의 자녀에게 주면서 해보라는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만화책을 보면 핀잔주거나 오락실에 가면 마구 혼내던 지난 일을 생각하면 나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소통과 교감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이방인 같은 존재이기에 모르겠다. 유시민은 자신의 아들이 축구에 빠졌다는 것을 거론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정신적인 부분은 이미 프로급인데, 신체적 조건은 자신의 DNA라는 것이다.

 

축구선수로 되지 못해도 그래도 축구에 관한 여러 가지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니 거기에 몰입하고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그의 결심이 왠지 부러웠다. 물론 부모의 재산에서 자식의 인생은 크게 좌우되나 더 큰 것은 부모로서 가질 태도다. 평소 나는 누가 나에게 말을 걸면 ?”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집에서는 왜는 왜라니 그저 예하면 되는 것이지 하나,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를 부르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니 왜라고 한다. 조금 그 왜는 안 좋은 부분도 있다. 주변 친구나 사람들이 귀찮게 할 것 같아 왜라고 하는 것도 있다. 나 역시 상당히 귀찮은 것을 싫어한다. 그래도 그 왜는 중요하다.

 

왜라는 것은 이유와 그 이유가 된 원인과 그 원인에 대한 결과적 해석이 가능하다. 삶의 발견에서 우리는 언제나 철학적인 자세가 없다. 그저 힘과 권력 앞에서 이유를 불문하고 억지로 따라가야 하는 현실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존립할 수 없다. 삶과 죽음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는 결국 왜 그래야 하는가에서 다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무엇 하러 살 것인가? 라는 다소 회의적 관념이 존재하는 나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현실에서 느끼는 보이지 않으나 마치 넘어갈 수도 지나갈 수도 없는 거대한 벽이 내 앞에 막혀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하니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만 사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이 없으니 삶은 언제나 괴로움의 가시밭길일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어떻게 살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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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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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3년 2월 24일 오늘 나는 하루 종일 잠만 잔 것 같다. 그동안 마음속에서 참고 참은 여러 가지 정신적 고통과 고뇌, 그리고 방황도 있었고, 매일 야근과 잔업, 외근이란 업무 속에 쌓인 스트레스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 내가 서평 할 도서인 진중권 교수의 <서양미술사-모더니즘편>에서 조금 찾아낸 부분일 것이다. 내가 원래 아방가르드에 대해 우연히 맛을 들인 이유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 대해 공부하면서이다. 여기서 미셀푸코, 레비 스트로스, 자크 라캉,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등의 서적들을 찾아보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여러 가지 책을 읽어보았다.

 

어려운 책들이고, 시간적 여유가 한계가 있기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봤다고 할 수 없으나 이들에 대해 알아가면서 프랑스 철학이나 사상이 기본적으로 20세기의 양대 사건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점을 알았다. 특히나 많은 철학자들이 2차 세계대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질 들뢰즈의 경우 2차 세계대전에 자신의 형이 죽었고, 루이 알튀세르와 같은 경우 전쟁 후유증으로 평생 시달렸으며, 정신적 착란상태에서 아내의 목을 졸라 죽였다. 인간에 대해 연구하고 고찰하는 철학자 역시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구조주의 이전에 장 폴 사르트르나 메를로 퐁티와 같은 철학자들 역시 전쟁에 대해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았으며, 전쟁이 곧 사상과 이념 그리고 자본의 유동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스펙타클이란 점에서 사르트르나 메를로 퐁티를 친구에서 학문적 적으로 변했다. 그것도 이 책의 서평과 연결되어 있다. 왜 모더니즘의 예술에서 아방가르드가 위와 같은 철학자나 사상가들과 연결되는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딱히 나는 이 책을 읽어보아도 다다이즘, 표현주의, 극사실주의, 초현실주의, 야수주의, 미래주의, 신즉물주의를 일일이 판단하고 누가 어느 작품을 만들고까지 일일이 파악할 수 없다. 내가 찾는 것은 이들의 작품을 보고 지금의 기준으로 미적 감각을 찾기보단 왜 저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예술이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미학이란 그 예술을 철학이란 칼로서 보는 것이라고 한다. 철학을 알면 결국 미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보인다.

 

미학의 학문적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보더라도 그것은 미에 대한 직접적 판단을 제시하기 보다는 그 미에 대하여 기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 밑바탕은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기초로 한다. 결국 미학은 철학자가 만든 하나의 새로운 영역의 학문이다. 미학이란 딱히 미학으로서 존재하기 보다는 다른 학문과의 조우에서 태어난다. 만약 건축물에 대해 알려면 건축학을 어느 정도 파악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도시미학에서 도시계획을 모르면 불가능할 것이고, 특히 조경을 모르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중앙의 원근법이나 사물배치에서 과학적 지식 역시 중요하다. 빛의 미학에서도 태양의 운동과 기상적 조건 역시 중요하지 않은가? 미학은 미학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미학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왜 모더니즘의 미학에 내가 눈을 돌리는가? 이미 지금 시대는 모더니즘을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 살아간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더니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이런 말이 나온다. 키치에 의해 지배받는 대중, 대중문화는 이미 자신들의 개성이나 주관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도르노가 비판한 것처럼 문화는 대중들을 그저 그 조류에 따르게 하는 하나의 헤게모니가 되었다.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우리는 과연 우리의 의도대로 살아가는가? 스펙타클이 강렬할수록 대중의 열광 역시 뜨겁다. 같은 모습만 찾고 서로 간의 단결력을 키운다. 파시즘의 미학에서 대중들의 영합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오류로 나타낸다. 민주주의만큼 가장 전체주의로 발달하기 좋은 구조는 없는 것 같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아주 민주(民駐)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주인이 아니라 어디에 갇혀버려 자신의 존재성을 그저 상실한 채 같은 것을 모양만 바꾼 것에 열광하는 저들에게 말이다.

 

모더니즘편의 아방가르드란 그런 것들 깨는 것이다. 내가 그런 시기의 작가와 작품을 다 알 수 없고, 찾아볼 수 없으나 그런 연유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 역시 저 당시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인지하는 바이다. 내가 아방가르드에 관심 갖게 된 동기는 바로 구조주주와 후기구조주의를 알아가면서 1968년 5월 혁명에 대한 관한 것이다. 이때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란 특이한 존재가 나온다. 이들은 1972년에 해체한 20세기 마지막 아방가르드이다. 지금 아방가르드하면 패션이나 혹은 공예물에서 허울 좋은 이름으로 통하나, 막상 아방가르드는 다른 얼굴이다.

 

1968년 5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서적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 드보르이 <스펙타클의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라울 바네겜의 <일상속의 혁명>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이런 문구가 인상적이다. “우리가 얻을 것은 즐거움의 세계요. 우리가 잃을 것을 권태뿐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좋은 영화가 있다. “사드를 위해 절규”라는 것이 있는데 대략 런닝 타임이 65분 정도 된다. 보고 난 뒤에 관객들은 엄청난 쇼크를 받을 것이다. 엄청난 기대감과 함께 왔으나 그 기대감을 모조리 망치는 그들의 계획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관객의 행동을 예측하고 원하는 것이다. 스펙타클을 전복해도 어차피 또 다른 스펙타클이 등장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그런 스펙타클의 전복과 생성조차 못하는 것이 “사드를 위해 절규”이다.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듣고만 있었던 나로서도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근무시간에 모니터 2개에서 오른쪽은 영화를 왼쪽은 근무하고 있었으나 말이다. 아방가르드는 바로 당황스러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책의 들어가기 부분에서 잠시 내용을 빌려온다면 이렇다.

 

제들마이어에 따르면, 현대예술이라는 복잡한 숲을 이루는 그 모든 가지는 결국 네 개의 “공동의 뿌리”에서 자라 나왔다고 한다. ’순수성의 추구, 기술적 구축, 광기의 탐닉, 근원의 탐색‘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를 제들마이어는 현대예술의 ’근원 현상‘이라고 부른다. 순수, 기술, 광기, 근원, 이것이 20세기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운동을 추동해온 네 가지 충돌의 이름이다.

 

그래서일까? 아방가르드에 대한 모더니즘에서는 현실에서 보이는 예술가들의 모습이 다소 힘든 상황이 보인다. 예전에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대중 앞에 전위예술가가 나와도 문제인 것은 그가 소통을 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 가이다.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해보자? 대중들이 처음부터 소통할 생각조차 없다면 말이다. 이래저래 보아도 현대미술에서 미국이란 곳에서 아방가르드는 현대미술의 한폭에 걸린 소재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린버드인가?

 

그 자는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한다. 다행히도 전에 아이작 도이처의 <무장한 예언자>, <비무장한 예언자>, <추방당한 예언자>라는 트로츠키 3부작을 읽어보았다.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10월 레닌과 더불어 볼셰비키혁명을 이끈 혁명가고,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끈 사령관이었다. 그리고 스탈린에 의해 꿈이 깨어져버린 망명가이었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차이에서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내세웠다면,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로 이어지고, 지금의 북한까지 영향을 미쳐서 소비에트연방의 공산주의는 결국 독재와 폭력만 난무한 파시스트적인 요소로 되었다.

 

아방가르드에서 5월 혁명가들은 이런 문제를 아는지 소비에트연방에서 낡은 정치사상을 비판하는 전문을 보낸다. 나에게 바로 아방가르드란 존재는 엘리트주의에 대핸 도전의식과 더불어 대중문화에 대한 권태의식을 동시에 이해해주고 새로운 공간으로 보인 것이다. 단지 나는 그렇게 만든 것을 미적 감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감각이 살아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을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역사, 문학, 철학이란 인문정신을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된 것이다. 아방가르드란 끊임없는 현실에 대한 분리를 요구한다.

 

조금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의 욕망을 현실화를 위해 자연주의적 인간상을 추구한 루소에게도 아방가르드는 빚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헤게모니라는 거대한 틀에서 인간이란 정신적 지배를 받아도 그 지배가 자유라는 공간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오는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는 민주자유주의 정신의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차라리 만인 대 만인을 주장하는 홉스일까? 최근에 나온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은 무엇일까?

 

아방가르드 문화는 1차와 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전쟁 전·후 문화현상에 가깝다. 전쟁과 인간의 광기, 오히려 그 광기가 이성이라고 믿는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은 오로지 충격이다. 괴이하고 이상한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이성으로 회유다.아니라면 광기의 초현실주의가 인간의 근원을 되찾을 길인지도 모른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처럼 광인은 그 시대의 현학자이며 시인이며 고상한 능력을 가진 자인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 볼까? 샤먼의 화려하고 알 수 없는 춤과 노래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주게 한다.

 

그들은 보이지도 않은 누군가와 대화하고, 혼자서 모든 한과 열정을 토해낸다. 무속신앙에 대한 진귀함에서 우리의 감추어진 내면의 율동화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언가를 속이고 감추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초현실적인 경험이야 말로 인간이 본연의 모습을 찾는 길 중에 하나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방가르드에서는 그런 것을 여러 길 중에 하나일 것이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 구축주의에서는 유물론적인 가치관인 관념 안에 있는 세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아방가르드 문화가 나오기 어려울지 모른다. 아방가르드의 출현은 어지러운 국제사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니 전 세계적으로 피 냄새가 진동했고, 인간의 광기가 전쟁에 의해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전쟁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아니 진짜 자유와 평화가 왔다. 그들만의 자유와 그들만의 지배에서 누릴 평화가 말이다. 1935년 초현실주의자가 코뮤니스트와 결별에서 그들의 결별은 정해진 것인가? 스탈린이 1936~1938년의 대숙청은 이미 그 전에 전초전을 알린 것과 같으리라. 그리고 러시아에선 아방가르드는 완전히 사라진다. 진취적이고 현실도전적인 사상을 누가 관료주의 파시즘이 용납하는 것인가?

 

지금에 와서 하나의 고착된 세계관계에서 아방가르드는 설자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세계가 변화하는 것은 맞으나 변화에서 더 이상 사람들은 아방가르드를 보고 하나의 정신적 충격이기보다는 하나의 수집품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작품들을 보면 분명히 저항의식이 분명하고, 절대적인 권력자와 착취자 앞에서 희생당하는 약자에 대한 아픔을 간직한 그림이다. 그런 그림을 그런 세상을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수집당하거나 혹은 그것을 용인하는 형태라는 참 신기하다. 아니 아방가르드는 대중적인 세속을 피하려고 했다.

 

키치, 이제는 시뮬라크르로서 피카소의 작품들이 우리 주변에 모사품으로 걸려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나 게르니카와 같은 작품들은 미술교과서에도 실린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저 “아! 피카소이니깐.”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지방에 사는지라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상황주의 전시회에 가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 아쉬운 적이 없었으나, 적어도 우리는 오늘날 개인적 인간으로서 개성과 주관을 가지고 있는가? 왠지 가지고 있으면 이상한 녀석으로 취급당하는 것에서 회의적인 기분이 드는 이유는 어쩔 수 없으나, 적어도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배울 점은 분명히 있다.

 

예술이란 것은 정치적 도구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정치적 수단으로 예술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이야기하기 위해 생각하는 존재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말로서도 할 수 있으나 하나의 사물로서 표현할 수 있다. 캔버스 위로 펼치는 그림이나 혹은 레디메이드(신문)와 놀이(가위질)의 결합이 콜라주에선 삶이 예술로 되고자 하는 것은 놀이를 위한 방법이다. 예전에 강신준 교수님의 강연에서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이 오직 한 가지였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놀이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고전주의는 숭고를 위한 것이라면 모더니즘은 숭고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술의 파괴는 새로운 예술의 출현이다. 그러면 그 뒤에는 예술이 일상이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예술이 너무 흔하고 흔해 넘쳐서 어느 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의 아쉬움은 인간 누구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자에게 주어진 헤게모니의 특권이란 점이 유감이다. 레디메이드에서 마르셀 뒤샹이 서명이 들어간 것이 결국 큰 특권이 되는 것을 알았기에 마르셀 뒤샹은 그 물건을 사진만 남긴 채 실체를 없앴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좋은 소변기가 화장실에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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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보다 쉽고 재미있는 만화 리뷰 쓰기 새로운 글쓰기의 보고 세상 모든 글쓰기 (랜덤하우스코리아) 18
박석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리뷰해보는 입장에서 만화애니메이션 리뷰라는 것에 대해 무엇일까? 라는 고민은 종종 해본다. 나 같은 경우 제법 만화와 애니메이션 리뷰를 쓰기가 제법 기간이 되었고, 최근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고 하는 라이트노벨과 같은 sub-culture에서 대중적으로 사람들이 접하는 소설과 영화까지 리뷰하게 되었다. 게다가 책도 철학, 미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등과 같은 인문사회학 도서까지 서평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부족한 면들이 많은 점들을 인정하고 있으나, 전방위적인 글을 적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리뷰라는 것이 단순히 어느 특정 장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여러 가지 관점으로 통해 보고 듣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 시작이 나에게 sub-culture라는 것이다. 그래도 sub-culture라고 할지어도 만화 리뷰를 쓴다는 것은 결코 만화만 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른바 만화 읽기, 또는 구조주의 기호학으로 통해보는 영화보기에서 영화읽기와 같은 애니메이션 리뷰는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지나 하나의 분석적 텍스트의 해석과 더불어 학술적인 영역으로 구축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담론을 제시하는 문화가 기본적으로 약하다. 게다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그런 담론을 만들 수 있는 공간적 규모나 시간적 흐름이 부족하다. 박석환 선생님도 언급한 부분도 있으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만화라는 것을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만화가 프랑스에서 제9의 예술이라고 한다. 만화 역시 예술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예술적 가치로 인정받을 수 없으나 만화작가라고 하면 프랑스에선 하나의 예술작가로 인정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작가들의 작가정신 내지 다양한 실험정신과 오랫동안 누적된 문화적 소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프랑스 만화책인 <푸른 알약>과 그 후의 <페르세폴리스>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는 코믹스의 개념과 다른 하나의 예술과 사회적 담론,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고발의식이 무척이나 강했다. 만화라는 것이 작가의 손에 의해 상상력과 서사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종이 위에 펼치지 공간이란 것은 무궁무진하다. 그 공간을 우리 독자들은 서로 누리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윤리는 상상력이라고 하지 않은가? 정해진 틀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 우연히 아마 미술학을 강연하는 교수님인듯 싶은데, 그분의 블로그에 우연치 않게 들어가서 예술과 예술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가치관을 적은 글을 보고 크게 공감했다. 예술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해야할 운동이고, 특히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과 예술은 예술로서 머물기보단 예술이 인간의 자유를 위한 저항이란 것을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문학,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을 계속 봐도 어느 작품의 특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기존의 틀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끝이다. 비평가는 그런 새로운 시도에 대해 다르게 보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유의 전환, 사상의 전개란 매우 중요한 것 같았다. 그런데 만화라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에서 <만화 리뷰 쓰기> 머리말 이전에 중요한 어구가 나온다.

 

 

‘만화는 꿈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꿈을 실현하고, 독자는 주인공을 동경한다. 만화 리뷰는 그 꿈을 먼저 경험하고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현실의 답답함을 느낀다. 다소의 내가 도망칠 공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권태감이 밀려온다. 인간에게 놀이와 여가생활은 그래서 필요하다. 하지만 같은 것만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을 접하기에는 뭔가 대중문화에서는 한계성이 보인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리뷰에서 지나 이제는 비평까지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들어가면 문화를 연구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만화 리뷰 쓰기>에서 저자 분은 영국 버밍험대학에서 운영하는 현대문화연구소를 중심된 “문화연구”라는 분야를 언급했다. 문화연구는 단순히 대중문화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현대문화연구소의 도서를 읽지 않았으나, 적어도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로 통해 문화연구는 영미 문화인류학에 큰 영향을 준 점과 본래 나 같은 경우 사상적으로 문화인류학에 관심을 갖고 비평을 했기 때문에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만화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생각이나 무의식적인 사고를 그대로 그림으로 옮길 수 있다. 만화가 예전에 억압이나 탄압이 되는 이유도 만화라는 매체가 다양한 사고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처음 한국에 만화역사를 들여다보면 만화는 그저 오락물이 아니라 시대풍자물이나 혹은 항일정신으로 시작되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은 아주 간단한 한글과 그림만 그려도 대략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시사만화가 대부분 1장으로 된 점과 그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강하게 전달하고 싶은가에 대한 수사학적인 관점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그런다고 만화는 이제 1장 위주에서 혹은 4컷으로 나오지 않는다. 책 한 권에 150페이지가 넘고, 이제 단편이 아닌 장편 서사로 나온다. 그만큼 만화에서도 서사의 전개되어 그 안에서 담론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만화에 대해 보는 것에 읽기 위해서는 다양한 담론은 반드시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문화연구라는 것은 비판적 분석이 요구되기에 많은 학문적 기초가 필요하다. 텍스트가 의미하고 시대적 상황과 거기서 찾아내는 미적인 요소란 무엇인가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만화 리뷰 쓰기>에서도 제시한 것처럼 다양한 학문을 알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아는 문화연구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의거해서 만들었다. 한국에서 아직까지 마르크스주의가 낯설지 모르나, 프랑스의 구조주의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문화산업 이론에서도 마르크스주의는 유용하다. 예전에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서적을 읽다가 그가 한국 하회마을에 방문한 사진을 보았다. 그의 인생에서 3가지가 자신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지질학”이라고 했다.

 

 

프랑스 최고의 학술기관의 교수에다가 세계적인 지식인의 모습에서 우리의 현실은 조금 아쉽기만 하다. 문화비평에 대한 도서는 문화적 분석을 중시하므로 다양한 사상과 자유로운 담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오늘 블로그 활동에서 영국의 철학자 겸 수학자인 버드런트 러셀 경을 좋아하는 같은데, 그 분의 블로그에 이 문구가 적혀 있었다.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고 말이다. 예전에 만화규장각에서 출간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에서 한국 만화문화의 비평을 열어준 분이 김현이라는 문학비평가였다.

 

 

이분의 어록에서 “만화를 어린애들이 보는 유치한 수준의 그림이 아니라 구파라가 새로이 만들어내려 하는 한 예술의 형태”, “단순하게 유치한 것으로 생각하는 나의 사고 자체가 사실은 유치한 것”,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 “만화비평이 가야 하는 것은 결국 그 사회 비평적 성격의 만화적 형태가 대중들의 어떤 심리와 결부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곳이다.”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아마추어로 만화리뷰와 비평을 하는 나에게 만화리뷰나 혹은 만화비평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만화를 읽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의미하는지 찾아내어 리뷰어 내지 비평가가 새롭게 재구성하여 창조하는 것이다. 리뷰와 비평은 제2의 창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만화규장각에서 독자리뷰 게시판에 활동한지 3년 정도 되어가지만, 늘 만화를 리뷰 및 비평하면서 새로운 담론이 늘고 있음을 느낀다. 최근에 아이큐점프에서 연재하고 있는 <금지소년>을 단행본으로 접해보면서 내가 아주 중고등학교 시절에 보던 만화의 내용이나 그림체 심지어 시대적인 조류가 많이 교체되었음을 느낀다. 작가분인 임진주, 임애주 자매가 그런 코믹스를 그리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장르까지 그리는 점에서 한국에도 다양한 만화작가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정부의 규제가 너무 강화되었다는 것이 불만이다.

 

 

만화 대부분은 젊은 계층과 특히 학생들이 많이 본다. 만화를 아직까지 유해요소로 보는 어른들은 아주 많다. 만화가 모든 공부의 방해요소로 보는데, 내가 아직 학창시절만 하더라도 내가 만화를 보기 위해서는 만화방에 가거나 혹은 책을 대여해야 했다. 주간지 만화책을 사면 집에 보관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으며, 보기 위해서 방에 몰래 감추어야 했다. 만화책도 그렇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소년챔프라는 만화였다. 아마 <슬램 덩크>나 <사신전>, <노노보이>와 같은 만화를 아는 분이라면 이 추억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몰래 사서 봐야 한 점에서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풀 공간이나 혹은 잠시나마의 오락을 즐긴 여유조차 어른들을 바라지 않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에 대한 법률이 과거의 아동청소년 보호법의 법보다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조치들은 만화시장을 축소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형태가 되는 꼴이다. 전에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국내에서 19금으로 설정되었는데, 막상 영화를 봐도 진짜 잔인한 요소는 나오지 않고, 성적으로 과격한 부분도 없었다. 외국에서는 <피에타>를 두고 청소년들이 감상 후에 서로 토론을 했다고 하니 우리의 담론문화가 약한 것과 표현의 자유가 부족함을 다시금 느낀다.

 

 

만화를 보고 리뷰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표현적인 영역을 보는 것이다. 특히 소재가 문제라는 것이다. cliche 요소가 강한 것은 그만큼 표현주의적 미학을 가진 만화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점이다. 그래서 분석과 비판이란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좋았는지 말이다. 하지만 만화 역시 표현의 자유라면, 만화를 보고 글을 적는 것도 일련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 만화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어야 하듯, 비평가는 자유롭게 담론을 이끌어 가야 한다. 대신 자유라는 것은 무책임하면 방종이라는 점과 거기에 합당한 책임을 지어야 하는 점이다.

 

 

개인적 작품과 사견들이 공론화되는 순간 그 그림과 글들은 만든 자들이 책임을 져야할 가치관이다. 예전부터 나도 생각했으나 <만화 리뷰 쓰기>에서도 그런 책임의식을 강조한 것 같았다. 만화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이 가까울지 모르나, 화면 위에 문자텍스트보단 그림 이미지만 나열하고 단 몇 줄만 적고 리뷰라고 지칭하는 태도는 책임감 없는 글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애니메이션은 사실주의가 아니라 표현주의이기 때문에 무엇을 나타내고 싶은지가 중요하다. 그것은 글을 적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와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힘들겠지만, 옆에 있는 일본의 경우를 보면 그 나라의 불안한 심리나 사회적 어둠을 소재로 만든 작품이 많다. 보더라도 다소 문제성이 보인 소재도 역시 나와 그것을 비판적으로 대할 수 있으며, 또는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다소 역사주의적 관점일 수 있겠으나, <사기꾼, 우시지마>라는 작품은 작년에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인 <화차>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화차>를 언급해서 그런데 만화는 사실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소재거리가 많다.

 

 

허영만 화백의 <비트>, <식객>, <타짜> 등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 인기를 구사했다. 또는 신영우의 <키드갱>과 같은 것도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했다. 그 외에 많은 만화가 드라마 소재거리로 이용되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 방송작가들의 패턴에 얽매인 매너리즘에 빠진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 시청자도 그런 것에 빠져 있다는 의미이다. 대표적인 한국 드라마에서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작품을 보면 신데렐라 콤플렉스나 캔디 이데올로기가 항상 존재한다. 틀에 박힌 구조에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것은 드라마 <삼순이>를 보더라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문화적 비판에서 일반 국민들이 리뷰어나 비평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단지 소비만 하는 구조에서 그 문화에 대한 비판적 수용은 국민 스스로가 문화적 의식을 전반적으로 상승할 수 있으며, 작가의 매너리즘적인 요소를 바꿀 수 있는 하나의 칼자루가 된다. <만화 리뷰 쓰기>에서도 독자의 리뷰나 비평은 만화가로 하여금 새로운 전환점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순수하게 작가의 작품을 이래저래 건드는 것은 옳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인기드라마 여론몰이에서 등장인물의 출연부분까지 바꾸는 형태가 발생된다.

 

 

단순히 만화를 쓰는 방법에 대한 책에서 왠지 모르게 한국 대중문화와 사회적 비판까지 들어가니 내가 이 책을 읽은 후의 서평이 왠지 모르게 판을 키운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화를 그리거나 보는 사람들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결코 만화가 다른 세상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했다면 만화분서갱유나 혹은 규제해야할 이유가 있을까? 만화와 그 만화문화로 통해서도 충분히 사회와 소통이 가능하다. 그래도 그 소통하는 길에도 분명히 그것을 위한 전과정이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화 리뷰 쓰기>는 만화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를 적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도 조금 권할 만하다. 가장 흔하게 주변에 보이기에 가장 쉽게 혹은 어렵게 담론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만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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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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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슬프군요. 다 잘했다고 인정하지 않으나, 그것을 인정하기에 진정한 글쟁이로 오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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