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스쿨 DxD 8 -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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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7권까지는 1권부터 차례를 지키며 진행한 라이트노벨이라고 한다면 8권을 보면 조금 다른 감을 알 수 있다. 8권의 1화는 1권 후의 이야기, 2화는 2권 후의 이야기, 3화는 3권 후의 이야기, 4화와 5화는 4권 후의 이야기, 6화는 5권 후의 이야기, 7화는 7권 후의 이야기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보충되어 나온 것이다. 내가 하이스쿨 DXD 라이트노벨을 읽으면서 의아한 점은 애니메이션 하이스쿨 DXD

는 라이트노벨의 1권과 2권 분량이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나온 부분 중에 일부 공백이 있었다.

 

그것이 1화와 2화의 이야기다. 가장 재미있으면서 효도가 가장 욕망에 솔직한 부분이었다. 의뢰를 받는 악마, 하지만 소환 술을 부리지 못해 자전거를 타고 밤길을 힘들게 찾아가 의뢰인을 만난다. 하지만 의뢰인들은 못 믿는 기분으로 효도를 무시한다. 그런 효도를 리아스가 직접 데리고 가서 인간과의 계약업무를 맺으려 하는데, 이상하게도 일본 전국시대 문화를 동경하는 외국유학생을 만난다. 그것도 노란 긴 머리를 소유한 키가 큰 여성이나 아주 무섭게 생긴 갑옷을 거친 것도 모자라 장도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에서 밤길에 대학교에 찾아가서 노트를 찾는 장면에서 그 여자 유학생은 밤길이 무섭다고 장도를 꺼내어 여기저기 휘두른다. 갑옷도 무겁고 칼도 제법 무거운데, 그것을 마구잡이 휘두르면서 하는 말이 무서워서 칼을 휘두른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효도의 반응은 “댁이 더 무서워!”라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상당히 개그요소도 강하고, 폰이라는 신분으로 킹인 리아스에 대한 무조건적인 갈망은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이다. 프로이트 이론적으로 인간은 유아기 시절 구강기에서 어머니의 가슴을 빠는 것에 대해 논하는데, 효도는 그것이 유아기에서 항문기 → 남근기 → 잠복기 → 생식기로 이어질 때, 효도가 고등학교 2학년 기준으로 10년 전에 남근기 무렵에 어떤 아저씨를 만나서 그의 성벽이 생겼다.

전설적인 용인 적룡제가 숨 쉬는 효도의 몸이나 이미 그는 적으로부터 찌찌드레곤이란 별명을 얻었다. 효도가 그렇게 가슴에 충실하게 반응한 이유는 3번째 <메모리 오브 젖가슴> 편을 보면, 옛날이야기를 하던 변태아저씨의 인형극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효도가 어린 시절이고, 단지 여자의 가슴을 찌찌푸딩을 먹는 것에서 효도는 여자의 가슴을 빠는 것이 아니라 그저 푸딩을 먹는 것이다. 그가 빠는 가슴은 아기시절 어머니의 가슴이다. 남자들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가슴을 빠는 것에서 더 이상 빨지 못함에 대해 깊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게다가 그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부부관계로 통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자기검열은 결국 어머니를 대신할 여성을 찾는다. 물론 그 여성은 자신의 자녀에게 양보해야 하며, 아버지는 그 자식에 대해 질투를 한다. 여성의 가슴은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효도는 여자의 가슴에 집착하는 반면, 효도의 라이벌인 백룡제 발리는 여자의 허리와 엉덩이로 이어지는 라인에게 관심이 있다고 한다. 생명을 낳는 것과 유지하는 것에서 보는 관점은 다르나, 효도의 성적인 욕망은 이미 한도를 지나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하게 한다.

 

근본적으로 숨어있는 에너지, 리비도를 지나 하나의 삶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는 에로스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단순히 성적인 욕망을 지나 자기 신체적 활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적룡제의 예전 주인처럼 힘에 취해 그대로 자신을 적룡제에게 맡겼더라면 효도의 육체와 정신은 모두 소멸했을 것이다. 단지 적룡제의 주인들은 모두 드레이크의 영역 깊은 곳에서 어둠의 그늘에 쌓여 아무런 구원도 받지 못한 채 죽어도 죽은 것이 되지 못했다. 효도의 힘이 결국 파괴로의 본능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염원이란 점이 형성하게 된 것은 그 변태아저씨의 연극이란 점에서 새옹지마라는 속담이 되는 것인가?

 

하이스쿨 DXD 8권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그저 효도의 수난시대와 바보모습만 열심히 보여주고 있다. 거의 재미를 위한 편이라고 할까나? 특히 <300>에서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 전사들의 용기를 대신하여 효도가 300명으로 늘어 학교 내의 모든 여학생들의 옷을 벗기며 변태행위에 즐기는 모습은 과연 맞는 작품이었다. 단지 아자젤 선생이 모든 것의 원흉이고, 효도는 모든 것에서 본능적이고, 그 본능이 여전히 놀림감이었다. 부원들에게 놀림 받는 효도의 모습은 이때가 가장 치욕적일 것이다.

 

본래의 효도조차 가짜 효도를 보면서 분개하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아케노 선배가 유혹하려고 할 때 그것에 가지 못하고 분신이 가서 사라지는 모습에서 그 아까운 부분을 놓친 것이 더 후회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망가지는 모습은 물론 효도만이 아니다. 리아스의 오빠이면서 4대 마왕인 서젝스가 더욱 심각하다. 그의 메이드이면서도 퀀인 그레이피아가 휴일을 맞이하여 평소의 메이드가 아니라 시누이로서 리아스에게 찾아온다. 피닉스의 혼담에서 사실 속으로 반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행하던 그레이피아는 겉으로 리아스에게 그레모리가문의 시종인으로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나, 알고 보면 매우 무섭고 철두철미한 시누이였다.

 

마왕인 서젝스가 엉뚱한 장난을 치면 쥘부채로 머리를 사정없이 날리는 모습은 레이비탄 세라포르와 맞먹는 악마라는 증거인지? 아니면 생뚱맞은 남편을 보필하는 확실한 와이프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런 남편과 그 남편 주변의 마왕의 상황을 보니 좀 심각하다. 장난이 너무 지나쳐 자신의 권위를 버리는 모습은 색다른 맛이다. 흔히 SF 특수촬영물에서 나올 법한 의상으로 레인저 5인조를 형성한다. 누가 봐도 다 알만 한 사람들, 그런데 리아스는 그것도 모른 채 시련의 3단계를 효도와 같이 돌파한다. 평소에 눈치에 약한 효도도 효도 나름이나 리아스 역시 눈치가 없는 것이 드러났다. 진짜 어울리는 선배와 후배,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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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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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조금 생각한 도서가 <감시와 처벌>이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생물학적인 신체가 있다면 생물학적 이상으로 존재하는 신체가 있는 것이다. 단지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의 다루는 신체는 신성한 존재, 즉 임금에 대한 것이다. 루이15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다미엥이 처참한 고문을 당하면서 죽어가는 사형을 집행할 적에 앙시앵레짐에서 인간의 존재는 전제적인 군주 아래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왕권신수설이 강하여 짐이 곧 태양이라고 말한 루이왕정에서 인간의 신체를 나누는 기준에서 단순히 생물학적 요소가 아니라 영원성을 강조하는 신성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신성성도 영원하지 않았다. 호모 사케르에서 sacer라는 단어는 신성하다는 뜻도 있으나 그것은 이제 더 신성할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호모 사케르는 죽일 수는 있되, 희생양으로 삼을 수 없는 존재다. 루이왕정의 앙시앵레짐에서 17897월 프랑스대혁명 이후 17931월에 루이16세는 사형을 집행 받는다.

 

그의 사형에서 상징적인 요소가 있다. 프랑스 인권은 국민의 대부분이 되는 인민에 대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헌법의 기초이다. 세계 대부분의 헌법이 프랑스 인권선언문을 바탕으로 헌법으로 제정되어 있다. 인권선언문의 기초가 된 것은 로크와 홉스와 같은 근대철학의 기본이 되던 자와 특히 시민사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가장 큰 공헌을 한다. 이런 프랑스 인권선언문의 중요한 점은 루이16세에게도 그런 조항이 해당될 수 있는가이다.

 

루이16세는 외국으로 망명하던 도중 붙잡혀 파리로 붙잡히고, 재판도 없이 그냥 단두대 아래 처형당한다. 당시 국민공회라는 프랑스 혁명위원들의 결정에 의해서다. 따라서 인간의 처분이 결국 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양으로 될 수 없음은 절대적으로 법을 넘은 인간 내지 권력이 존재함에서 가능함이다. 루이16세의 죽음은 인권선언문에서 제7조에 해당되는 법에 의해 규정된 경우가 아니거나 법에 의해 규정된 형식에 따르지 않고서 누구도 기소되거나 체포되거나 구금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 자의적인 명령을 간청하거나 선동하거나 집행하거나 집행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법에 의거해 소환되거나 체포된 시민은 누구든지 지체 없이 그 조치에 따라야 하며, 이에 저항하는 행위는 범죄가 된다.”와 무관계되는 점이다.

 

루이16세는 프랑스공화국의 범죄자가 아니라 프랑스공화국을 부정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프랑스인이면서 프랑스공화국민이 아니라는 점에서 루이16세는 중간적인 존재, 즉 어떻게 되어도 문제없는 인간이 되었다. 노모스에 대한 부분에서 너무 난해한 개념이라 딱히 말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인간은 법아래서 공평하게 지배관계(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다) 명제를 지켜야 하나, 노모스의 관계에서 인간은 오히려 그 법이라는 것에 대한 규칙을 초월하는 것에서 법을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이 모순적이나 현실적이었다.

 

그런 이유를 보면, 우리는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법적인 절차를 법 스스로가 움직이지 않고, 결국 법을 집행하는 준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사람이 법을 이용하여 다른 인간을 통제하는 것에서 인간이 법의 위와 아래에 있게 되는 것은 결국 공평할 것이 공평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음이다. 권력의 관계에서 모순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법을 집행하는 자에 대해서 논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인민들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하나, 그 사회적 공간에 대한 질서를 위해 법을 집행할 경우 결국 모든 사람들이 법의 아래에서 위로 승격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라는 이름이 법으로 행하는 점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가? 그런다고 하여 호모 사케르의 영역은 민주주의 사회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여부와 심지어 끔찍한 독일 나치즘까지 다룬다. 호모 사케르는 말 그대로 살아있어도 살아있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다. 그것은 있음과 있었음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있음은 그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나, 있었음을 그것이 있음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 걷다보면 옆에 사람이 있지만, 그들에 대해 우리는 있음이라 물리적으로 각인해도 그들에 대한 존재성에 대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이 스쳐가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버릴 존재라면 몰라도, 대상자가 인간이어도 인간이 아니라는 인식이 등장하면 어떨까? 이 책에선 매우 끔찍한 이야기로서 독일 나치가 실행한 인간실험을 다루고 있다. 자국의 항공기조종사의 생명유지에 대한 연구를 위해 유대인 포로를 실험실에 넣고 상공 12,000ft의 조건을 부여한다. 호흡곤란을 일으키다가 결국 청색증올 죽고 만다. 이런 잔혹한 방법은 단순히 유대인을 가혹하게 다루는 독일 나치즘만이 아니다.

 

미국 12명의 사형수도 생물학적 실험에 의해 죽는다. 그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만약 실험에서 살아남는 경우 그들은 죄를 사면 받는다. 어차피 죽을 목숨 이렇게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 그들은 모두 실험 도중에 죽고 만다. 사형수의 법적인 절차에 의한 집행은 당연성을 가져도 그런 목숨에 대해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권리를 준다는 것에서 이것이 자유의지인가? 호모 사케르에겐 그런 권리란 없다. 단지 권리라는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권리다.

 

자살이란 단어는 사회적 타살이란 의미다. 사회적 타살을 맞이하는 많은 호모 사케르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파멸할 것인가이다. 그냥 혼자 죽을 것인가? 혹은 옆에 주변사람과 같이 죽을 것인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을 같이 죽을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자. 루이16세의 죄는 분명 크다. 미국독립전쟁으로 인해 영국에 대항한 프랑스의 군비지출에 경제적 제정은 붕괴하고,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을 보면 대부분의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고, 그 세금의 비용부담을 부르주아와 농민에게 전가시킨다.

 

삼부회의 소집에서 프랑스 루이왕조는 국운이 다 한 셈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프랑스혁명 시기에 가장 활발한 혁명가이면서 제일 무서운 공포정치를 펼친 로베스피에르의 말을 상기시키는데, 인민에 대해 2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people로서 생물적 기능, People이란 사회적 기능을 말이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전자의 초점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그가 프랑스 국민에 대해 가엾게 여기는 것은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경제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토크빌의 지적대로 만약 무의미한 제정낭비가 없었더라면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지방자치단체적인 코뮌의 체계마저 허물고 중앙집권화로 되자 예산운용이 더욱 어려워졌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역전의 관계일 것이다.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체제에서 일반 농민의 경우 살아있는 생물체이지 국가적인 존재로 될 수 없다. 그들은 영주나 봉건귀족의 소유물이었다. 그들은 농노와 같이 착취당하다가 혁명 이후 왕족과 귀족이 농민들과의 위치가 역전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왕족과 귀족이 사라지는 대신 그 사회적 통치기능이 분산된 시점에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존재의 한계성이 바로 비정치적 존재의 정치적 존재로 전환이다.

 

법의 취지는 공공선의 추구인데, 그 법의 공공선에 대한 철학적 인식에서 시민의식이 부족한 이유다. 게다가 혁명이 가난이 문제라도 혁명 이후라도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저 사회구조적인 해결보다는 한 순간의 체제전복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혁명이 없으면 그 사회구조 병폐를 해결할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그 체제가 이익이나 이권에 관여되는 다수의 무리가 나타날 경우, 법의 정신은 이제 이권에 개입되는 자들에 의해 움직인다. 홉스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말하면서 그 만인 대 만인에서 한쪽이 강력한 만인일 경우 나머지 만인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익을 위해 결국 희생된 자에서 현대 민주주의에서 한계점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 결합이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구조이지, 정치적 구조는 아니나, 그것이 정치적 구조에 대한 압력으로 결국 호모 사케르는 주권의식에 대한 부분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적 이익에 초점이 맞추어져 나온다. 예전에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프랑스가 시민주의 국가보단 오히려 민주주의 체계를 이용한 전체주의적 요소를 고발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오면 인건비가 하락하고, 노동운동단체는 이들 외국인들에 대해 반강제적 조치를 국가에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자운동을 두고 좌파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우파적인 행위에 가깝다. 사실 전체주의가 가장 되기 좋은 사회는 민주주의국가이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에 대한 의지표출에서 인간은 공통요소를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이 공공선이 아니라 개인적 이익을 위한 카르텔이 될 경우 무서운 일들이 벌여지게 된다. 참고로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에티엔 발리바르는 출산을 앞둔 외국인 임산부가 강제로 항공기에 태운 채로 추방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을 분리하는 공간이 단순히 나치가 만든 실험소나 수용소가 아니라 공황 대기실이나 혹은 그 밖의 많은 공간도 해당된다.

 

생명에 대한 담론에서 그것이 생명이 있지만, 사회적 존재로 용인될 수 없는 사례는 많다. 우리 주변에도 흔하게 본다. 예전에 영화 <두 개의 문>에서 용산참사에 대한 부분을 다루는데, 그 주민들은 보상 문제를 두고 합리적인 절차를 요구했으나, 이내 무시되고 용역깡패가 들어오자 옥상으로 연결되던 출입문을 봉쇄하고, 이후 경찰특공대가 진입하면서 그들이 농성하는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결국 아까운 인명이 죽고 만다. 이들은 생명이 있으나 사회적인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현실에서 호모 사케르는 단순히 수용소의 포로나 참수당하는 왕도 아니라 슬프게도 우리 사회의 만연한 이기심에서 발생된다. 아니라면 그 이기심으로 만들어진 욕망의 대상자가 지시하는 명령에도 존재하는 법이다. 더욱 슬픈 이야기는 호모 사케르의 죽음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한 존재로 여기거나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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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즈
오카무라 텐사이 외 감독, 치바 시게루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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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기억>

인간은 언제나 망상과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화려한 기억은 분명히 소중하고 아름답고 지울 수 없는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언제나 과거일뿐 현재가 아닙니다. 과거가 지나 현재를 만들어 나가면서 그 과정과 결과가 수없이 교차합니다. 그런 과정과 결과가 교차하면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순간에도 과거로 접어들고 미래가 현재로 다가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간 것에 대해 다시 짛어본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의 메모리즈 1번째 그녀의 기억입니다.

 

메모리즈 중에서 가장 내용도 길지만 한편으로 어렵고도 난해한 일본 현대문제를 다룬 작품입니다. 기본적으로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은 일본 전 근현대사에 대한 비판의식이 매우 강렬합니다. 이 작품을 리뷰하기 전에 원래 이 작품은 일본 군국주의 사고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군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도 문제이지만 그런 지나간 허울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비판이기도 할 겁니다.

 

스토리의 골자는 우주에 버려진 우주선을 수거하여 다시 재활용을 하는 것으로 먹고 사는 우주청소부들이 난파된 우주선에 들어가서 거기에 기억된 프로그램에 의해 망상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그 망상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문제의 인물 에바입니다. 그녀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였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저 보통 여자로 보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상당한 미인에다가 이지적인 모습도 갖춘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목소리의 기능을 상실하여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카를로스는 그녀의 목소리를 좋아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음을 깨달아 카를로스를 죽여버립니다.

 

흔히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사랑과 진리를 위해 현재 완벽한 이상적인 대상을 박제화 시킨다는 그런 이야기는 영화와 소설에서도 많이 등장합니다. 완벽한 미녀와 미남을 죽여 박제하거나 혹은 알콜 병에 집어넣거나 인간의 망상은 도가 지나치면 윤리의식마저 흐려지기 때문이죠. 그녀는 자신만의 망상이 영원히 이루어지도록 이 우주선을 자신만의 세계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어이없는 사고관념을 지닌 여자의 우주선에 탑재한 우주청소부들은 그녀가 만든 환영에 시달립니다. 주인공 중에서 우주청소부 하인즈와 미겔이 등장합니다. 하인즈와 미겔이 우주선을 탐사하자 미겔은 그녀가 만든 환영에 빠져 현실을 망각하고 그 세계로 다가갑니다. 그러나 하인즈는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며 미겔을 말리려 합니다.

 

우주선의 화려한 장식은 손을 대자 모두 부스러지고, 화려한 음식은 모두 썩었고, 게다가 화려한 들판초원은 쓰레기와 오수로 가득한 황무지였습니다. 그러나 미겔은 현실을 보는게 아니라 자신이 카를로스처럼 된것처럼 착각하여 가상세계에 살고 있는 에바와 사랑을 속삭입니다. 그러나 막상 에바는 해골과 해골을 덮고 있는 가죽만 앙상하게 남아있습니다. 인간의 지나간 망상은 그대로 버려야 하고 현실로 가야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지나간 망상에 집착합니다.

 

이런 바보같은 일에 미겔과 에바뿐만 아니라 현실을 보는 하인즈까지 위협합니다. 하인즈는 사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을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집에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던 하인즈는 옥상에서 뭔가 하던 중에 자신의 딸이 지붕에서 낙사하여 죽습니다. 그런 충격에 의해 하인즈는 평생 마음의 상처와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미겔을 현혹하던 에바는 그런 하인즈의 과거를 불러옵니다. 죽은 딸이 눈앞에서 행복한듯 웃고 있지만, 그는 처음에 그 환상에 빠지다가 잘못된 것을 알고 다시 현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지붕에서 낙사하여 죽은 모습을 비추면서 하인즈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을 상기시킵니다.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과거의 집착은 미겔, 하인즈뿐만 아니라 전자파로 통해 우주청소부들의 비행선까지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비행선은 에바의 우주선에 향해 광선포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자각을 거부하는 에바와 에바의 우주선은 마치 한 송이의 붉은 장미로 변해 우주를 떠돕니다.

 

이렇게 메모리즈는 인간의 어리석은 집착, 편견, 고정관념에 대해 심각하게 비판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성과 지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물론 감성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어긋난 관념이 마치 정당한 이성과 지성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문제는 이런 달콤한 유혹은 개인만 아니라 사회나 대중들에게도 광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 유행할 때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은 마녀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중과 사회는 죄 없는 사람이나 바른 지식인들을 마녀로 몰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인간은 광기에 빠진 인간들에게 비이성적인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죠. 비이성적 인간들이 만들어낸 망상과 허울 그리고 그런 어긋난 이념이 실제로 벌여지는 현실, 메모리즈는 이런 어긋난 인간의 사고를 비판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최취병기>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의 2번째 작품 최취병기를 적어보겠습니다. 감독은 오카무라 텐샤이로 흑의 계약자를 만든 사람이고, 각본은 오오토모 카츠히로가 맡았습니다. 이번 작품은 메모리즈 3번째편과 달리 현실에 있을법한 장소에서 진행됩니다. 영화서사학이란 도서를 참조하면 서사구조는 크게 3가지로 구분한다고 합니다. 1번째는 신화와 역사 등과 같은 과거의 일, 2번째는 현실세계에서 있을법한 일, 3번째는 미래나 공상세계와 같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만드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메모리즈 시리즈 중에서 2번째편이 가장 현실성이 가깝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타나카 노부오입니다. 그는 한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는 과학자입니다. 그는 작품 초반 감기에 걸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약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감기가 호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에 출근하는데, 본인의 회사는 제약회사라 선임연구원이 연구소장 방에 있는 감기약을 먹으면 좋아질 것이라고 해서 노부오는 소장 방에 있는 약을 먹습니다.

 

여기서부터 사건은 시작됩니다. 연구소 안에 사람이 냄새를 맡으면 참기 힘든 악취가 풍겨져 나옵니다. 이 악취가 얼마나 심한지 다음날 연구소 모든 사람들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러나 노부오만 멀쩡하게 살아있습니다. 소장 방에 가서 이 상황을 본사에 연락하는데, 본사에서는 노부오에게 당장 동경시 본사로 오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 작품 초반에서 독가스로 인해 모든 연구실 사람들이 죽고 그런 독가스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여파가 커지게 됩니다. 노부오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동경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노부오가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들, 아니 모든 생명체가 죽어 버립니다. 게다가 노부오 중심으로 마을 일대가 유령도시가 됩니다. 그런 노부오에게 일정거리에 닿는 사람들은 모두 질식사로 죽어 버립니다. 그래도 노부오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왜 죽는지 생각조차 안하고 계속 동경으로 향합니다.

 

위에서 시킨다고 그대로 따라하기 바쁜 노부오이었습니다. 노부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날씨가 겨울인데 벚꽃과 해바라기가 동시에 개화한 겁니다. 처음에 이 장면을 보면 계절이 이상하여 꽃이 많이 펴서 꽃냄새로 인해 인간의 호흡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알고보면 바로 노부오가 숨을 쉴때마다 내뿜는 가스가 원인이었습니다.

 

그 가스의 원인은 규명하지 못합니다. 단지 그냥 알약은 문제가 없으나 어느 다른 프로세스에 의해 인간내부 화학공장에서 발생된 독가스라고 합니다.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저는 관료주의와 무절제된 약품 오남용도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만든 독가스가 바로 인간이 편하게 하기 위한 알약이니깐요.

 

의약기술의 진보가 오히려 인간을 독가스적인 존재로 만드니깐요. 사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생명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발전을 합니다. 그러나 그 발전만큼 주변에 서식하는 미생물도 강력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황색포도상구균은 단순히 인간주변에 서식하는 세균에서 이제 슈퍼박테리아까지 되었으니 무서운 환경적응력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편익에 의해 자기 스스로를 약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결과가 이런 독가스일까요? 그런 독가스를 내뿜는 노부오는 동경에 있는 고위층의 지시에 따라 자기가 문제발생요소라고 생각치도 않습니다. 인간의 관료화에 따라 인간 스스로를 기계적인 도구로 전략해버린 것이죠.

 

독가스가 동경으로 오자 일본정부는 난리가 났습니다. 노부오를 제거하기 위해 각종 전략을 세웁니다. 바주카포를 쏘우거나 미사일을 날리거나, 그러나 노부오에겐 행운의 여신이 붙었는지 상처하나 못 냅니다. 점점 노부오를 저지하지 못하자 정부에서는 모든 전투 병력을 투입하여 노부오를 죽이려고 합니다. 관료체계에서 시키는 데로 하던 그를 이젠 제거합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데로 시키다가 이제 이용가치가 없거나 불이익이 되면 그대로 제거합니다.

 

 

<대포도시>

전에 어느 분이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 작품을 리뷰해달라고 요청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서 난해한 작품을 만드는 분 중에 한분이 오오토모 카츠히로인데, 개인적으로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처럼 뭔가 독특하면서 개성이 넘치는 애니메이터입니다. 우선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아키라입니다. 오시이 마모로의 공각기동대와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나오기 전에 상영한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키라입니다. 1988년에 제작된 것으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러너 이후 일본에서 제일 먼저 제작된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입니다. 암울한 미래, 방황하는 청소년, 희생되는 어린이들, 과연 미래와 희망이 뭔가에서 그렇게 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재미로 보기보단 한번 작품 감상하다는 느낌을 보시면 좋을 겁니다.

 

1988년 아키라 상영 이후 나온 것이 1991년 노인Z, 그 다음이1995년 메모리즈입니다. 메모리즈는 총 가지의 에피소드를 모은 옴니버즈 작품입니다. 상당한 높은 작품성과 실험도가 돋보입니다. 1편은 그녀의 기억, 2편은 최취병기, 3편은 대포도시입니다. 3번째 작품인 대포도시는 메모리즈 시리즈 중에서 분량이 제일 작지만, 깊은 인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도시는 정말 이상합니다. 모두 군인처럼 군복을 입고 전투 헬멧을 착용하고, 게다가 마스크까지 차고 일을 합니다. 위의 그림처럼 도시 건물에 모두 대포가 달려 있습니다. 적은 누구인지 위험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단지 대포 안에 탄환을 집어넣고 모두 발사하기만 기다립니다. 학교 학생들도 이상합니다. 학교교복이 모두 군복처럼 생겼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모두 무기를 다루는 지식만 배웁니다. 집에 있는 어머니도 이상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쟁이란 현상이 하나의 생활처럼 다가오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누구 하나의 개개인적인 특성보다는 전체적인 구조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기계처럼 움직입니다. 만약 기계처럼 움직이지 못하면 여기서는 바로 아웃입니다. 주인공 소년 아버지는 17번 포대에서 무기를 다루는 엔지니어입니다. 그는 작은 실수로 인해 옆에서 미사일이 날라 가는데 얼굴에 아무런 보호구를 착용하지 못 한 채 가만히 서있어야만 했습니다. 같은 팀 동료들은 그나마 마스크도 쓰고 있었지요. 기계처럼 돌아가는 이 사회에서 뭔가 조금만 실수라도 용납되지 않고, 그 처벌이 매우 잔혹하기만 합니다. 작품을 감상하면 포대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화약에 독성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 맨얼굴로 저 포탄이 앞에서 터지면 산업재해로 인해 소음진동으로 인해 고막이 손상당하고, 정신적인 충격과 신체전반적인 리듬이 깨질 겁니다. 게다가 화약에 나쁜 물질이 함유되었다면 화약가스가 인간의 폐로 들어와서 호흡기적인 증세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개인 존엄성을 무시하고 지휘관은 미사일을 날려버립니다.

 

인간이 만들고 사용하고 도구가 이제 인간은 지배하게 됩니다. 서로 누가 많이 미사일을 날리는 것까지 점검해버리는 사회, 과연 이 세계에 있는 적은 누굴까요? 적의 모습은 한 번도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을 소외시켜버리는 이 어긋난 사회는 어린 소년에게도 그대로 전해집니다.

 

소년과 아버지가 저녁을 먹은 뒤에 식탁 옆에 앉아있습니다. 아버지는 무언가를 마시고, 소년은 하얀 종이 위에 뭔가를 그리고 있습니다. 종이를 들어다보면 칼을 잡고 서있는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게 이 소년의 꿈이라는 것이죠. 꿈속에서 움직이는 소년의 모습은 영락없이 어른과 같습니다. 칼을 들고 적을 대포로 밀어버리고, 강한 전투 병기를 보면서 좋아하는 모습은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잘못된 가치관이 보입니다. 남과 경쟁하고 싸워 그저 올라가기만 바라는 이 소년, 과연 이 소년이 어른이 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잠을 자러 방에 올라가는데 이상한 초상화가 보입니다. 소년은 그 초상화를 보며 경례를 합니다. 자신은 아버지처럼 탄환을 장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탄환을 발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런데 탄환을 쏘아도 과연 탄환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저 쏘기만 바쁜 세상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모른 채 그저 남과 경쟁하여 좋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이 모순된 사회구조를 비판합니다. 그저 남을 밟고 경쟁하는 게 당연한 세계, 그것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 이렇게 메모리즈 3부 대포도시는 현실을 비판하며 막을 내립니다.

 

그런 제거하려는 의도와 달리 노부오의 독가스의 힘은 강력하게 됩니다. 독가스는 인간의 후각과 신경만 건드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기계와 전자시스템도 망설을 일으킵니다. 노부오가 내뿜는 독가스는 이 사회에 오랜 병폐가 쌓여 그 병폐를 숨기면 숨길수록 오히려 역반응은 크게 날뿐이죠. 최후에 미국 첨단병기가 투입되어 가스는 점차 멈춘 듯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노부오가 저기 보이는 우주복을 입은 상태로 작전사령부에 들어온겁니다. 노부오가 상관이 시킨대로 서류상자를 내리고 헬멧을 열자 동경시는 다시 독가스로 물들이며 작품은 막을 내립니다. 단지 시키는데로 했는데 그게 오히려 부작용을 낳게 되버린 에피소드입니다. 우리는 현재 어떻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개인의 의지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게 정당한 자유입니다.

 

 

좋지도 않은 머리로 오늘까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1권을 다 읽어보았습니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조정에 의해 움직인다면 이것이 과연 자유일까요? 메모리즈는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상당히 강합니다. 3편째는 대포도시는 그야말로 어긋난 사회와 교육문제가 거론했으니깐요. 모두를 위해 합리적인 사고는 바르나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자신들의 합리성을 남에게 강요하는 이 사회를 비판하는 메모리즈 2편째인 최취병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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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7 -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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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이스쿨 DXD 작가는 은근히 야한 것을 강조하여 독자의 관심만 끌다가 중요한 순간에 철학적 사고를 유도한다. 아주 도발적인 문구가 등장한다. “네게는 평화라도, 그것을 고통으로 느끼는 자도 있다는 말이다.”, 이 대사는 오딘이란 북유럽 신이 오면서 오딘에게 반기를 들었던 로키라는 신이 한 말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일단 신화적으로 신이란 존재가 먼저인지 아니면 인간이 먼저에서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적 존재이면서 실제로 현실에 살아있는 존재다. 왜냐하면 신화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있는 그 순간에 영원히 이어가는 존재이다. 미신이라고 믿을지 모르나, 우리는 인간의 가진 이성이란 사고로 통해 과학적 사고로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나 딜레마에 포착한다.

 

이 순간, 인간은 자신의 유기적인 존재를 떠나 초월적인 그 무엇에 대해 의존하고 싶은 욕망을 심게 된다. 신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이유는 인간이 만들고 고통스럽게 당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이 죽으면 신이 된다. 안 그런가? 다 그렇지는 않으나 우리나라나 동양권에서는 제사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신이란 존재는 언제나 우리와 곁에 있다.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적 존재라고 보는 것이 신화학적인 요소다. 직접 그 관념적 존재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인간의 눈은 형이하학적인 시각으로서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념적 존재를 눈으로 보는 것은 형이상학적 존재의 관념을 그림이나 혹은 다른 것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이스쿨 DXD는 그런 요소들을 부각시켰다. 처음에 악마와 타천사의 투쟁, 악마와 악마의 투쟁에서 이제는 악마, 타천사, 천사의 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분법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오만 신화와 전설의 존재가 나온다. 마지막에는 삼국지의 영웅 중에 하나인 조조의 이름이 나온다. 어차피 인간보다 신이 우월한 존재라도 인류의 역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적어간다. 신이란 어차피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할까? 아니면 신 그자체일까? 위대한 경전조차도 신의 말이라고 하나, 그 말을 적고 전승한 사람은 인간이다. 신이란 존재 그 자체가 글을 만들고 전승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이 작품의 주요 사건은 오딘의 등장이고, 그 오딘이 왜 동양의 신을 만나려 하는가이다. 그에겐 북유럽 신이란 명칭과 함께 절대적 영역을 가진 자이다. 하지만 그는 절대적인 힘보단 서로 간의 유대감과 공감을 형성하려 했다. 이분법을 넘어 즉 동양과 서양의 관념을 넘는 것이다. 신이란 존재 역시 인간이 만든 문명 중에서 종교에서 다룬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의 사상과 관념을 지배하는 강력한 도구다.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종교이기에 그 만큼 숭고하고도 아름답고 때로는 잔혹하며 냉정하다.

 

기본적으로 하이스쿨 DXD는 악마, 천사, 타천사로 시작하기에 성경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단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온 “신은 죽었다.”에서 정말 이 라이트노벨에서 신이란 없고, 신을 죽일 수 있는 롱기누스의 창과 그와 맞먹은 게 나온다. 라이트노벨이 작가 개인이 만든 이야기라도, 결국 인간이 가진 전설, 신화라는 스토리텔링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심지어 주인공 효도 잇세이의 적룡제마저 드레곤이란 존재이기에 서구의 신화 내지 전설로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을 하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적으로 인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의 발현이다. 말하는 것과 말하는 것을 듣고자하는 것을 말이다. 하이스쿨 DXD의 말하고픈 욕망은 효도 잇세이다. 번뇌대장에 음흉하나 한편으로 자신에게 무엇을 발견하고 싶은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과 삶의 목표이다. 단지 효도 잇세이의 경우에 특이한 것은 적룡제가 젖룡제로 불리는 것이다. 그의 성적인 욕망은 여자의 가슴에 향해 있다. 그 가슴에 대한 번뇌는 그동안 적룡제와 백룡제의 부스트기어에 의존한 자와 다른 길을 걷는다.

 

이때까지 적룡제와 함께 하던 인간들은 자신이 가진 이성을 벗어나 폭력과 파괴의 본능에 빠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인간에게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욕망이 있다. 삶과 죽음,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었기에 삶이란 것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적룡제의 힘에 빠진 자들은 영혼조차 남지 않은 채 어둠에 갇혔다. 죽음은 안식의 종착지나, 그 종착지에 안식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어둠의 굴레에 갇힌 적룡제의 숙주만 있었다. 그런 점에서 효도는 그들과 달리 다른 길을 걸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 삶에 대한 인식이 있는 그 모든 존재에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상, 그 대상이 자신보다 소중하기에 자신의 안위마저 버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이 부서지거나 다쳐도 문제없다. 오히려 같이 앞을 보고 싶은 사람들의 고통을 보는 것이 더 괴로운 법이다. 효도는 그런 친구였다. 여자 가슴에 눈에 팔려 특히 리아스나 아케노 앞에선 그냥 철없는 남자아이나 이 2사람과 옆에 키바나 아시아가 위험에 빠지면 그는 앞뒤를 생각하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날린다. 그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날리는 것만큼 윤리적인 존재는 없다. 그래서 이 라이트노벨은 늘 말하고 싶은 것이 이분법적 사고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악마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나쁜 것이나, 여기서는 악마가 과연 나쁜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천사들의 수장 미카엘조차 악마를 멸하기 보단 마왕 루시퍼와 손을 잡고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 그래서 평화가 평화를 누리는 자에게 행복이라도 그것을 고통으로 느끼는 것은 아마 권태감인가?

 

그런 권태감은 백룡제가 가장 많이 느낀다. 그는 자신의 최고의 라이벌인 적룡제를 두고, 로키를 물리치기 위해 적룡제와 손을 잡는다. 가장 적대한 자이기에 가장 연합하기가 좋다. 서로 간의 목적이 같기 때문이다. 공동전선을 펼치는 자는 가장 위험하고도 가장 사이가 좋지 않다. 서로간의 타도가 서로이기에 그 방해가 가장 배제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작품을 보면 효도의 생명을 길지 않음이 나온다. 악마의 생명은 불멸이라 하나, 자신의 생명을 깎아 버린 금지된 기술에 그는 100년 정도 산다고 한다.

 

100년이면 지금 우리 인간에게 상당히 수명이나, 악마에겐 인간의 나이로 0.5%도 안 되니 사실 효도는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는 계속 굴러가고, 세이크리드 기어를 지닌 자가 늘어나고, 그 자 중에서 밸런스 브레이커의 등장은 삼분법 적인 세계를 지닌 효도의 마을을 위협한다. 왜 평화를 원하지 않은 자가 나올까? 어떻게 보면 악마, 천사, 타천사의 연합은 세력의 안정화고, 그것은 서로간의 멸족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만약 어느 한쪽이 기울게 되는 것은 그만큼 살아남은 자도 세력이 소진하는 것과 같다.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다 어부지리를 원하는 자의 입장에서 위험하다.

 

더 이상 그는 세계의 진입을 하지 못한다. 더욱 연합과 동맹은 견고할수록 어렵다. 그래서 테러리스트가 등장한다. 더욱 강력해지기 전에 모두 날려버릴 심산으로 말이다. 그래서 계속 새로운 등장세력이 나오고, 기존의 라이벌이 갑자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코네코를 납치하고 리아스를 제거하려한 코네코의 언니조차도 효도를 자신의 종족을 보존을 위한 남성으로 여긴다. 효도의 입장에선 계속 하렘의 영역이 넓어진다. 자기의 동료에서 상대편까지 말이다. 이번에 오딘의 부하인 발키리 로스바이세까지 들어온다. 원래 룩은 코네코였으나 이제 발키리 로스바이세까지 영입된다.

 

폰은 8개를 효도가 모두 투입된 상태이기에 레이팅 게임이나 적과의 싸움, 거기에 나오는 다소 하렘적인 구조는 조금 이래저래 이야기를 흔들어 댈 것이다. 그러나 역시 메인은 찌찌드레곤을 각성하게 하는 리아스다. 효도는 킹이 되고자 하나 킹이 되는 것에 생각에서 리아스의 역할을 생각한다. 동료와 권속을 가족처럼 아끼는 그레모리 가문이나 때로는 싸움에서 동료를 버릴 각오도 해야 하는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에겐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도래하기 마련이다.

 

효도가 바라보는 자신의 길이란 점점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선택의 책임까지 커진다. 아이들에게 재미와 희망을 주는 젖룡제도 좋으나, 그 이름만큼 자신의 역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번 7권에서 아케노와 아케노의 아버지 타천사 바리키엘의 관계가 중요했다. 진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욕망덩어리 자신이라도 그 욕망이 상대방을 진심성에 나온 것인 만큼 자기의 욕심도 중요하나 그것보단 그 욕심을 가지고 싶은 상대에 대한 깊은 우정 역시 만만치 않게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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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무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
승효상 지음 / 눌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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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어떻게 하면 인간일 수 있는 것인가? 철학적 의문적 사고에서 레비나스는 제1의 철학은 윤리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윤리와 도덕을 분리한다. 가령 전에 베스트셀러로 팔린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많이 인용했는데, 거기서 번역자의 실수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기전에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윤리 대신 도덕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원래 독일어로 된 칸트의 원전 도서와 영어로 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의 번역을 다르게 봐야 한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도덕이란 단어가 왜 위험한가에서 도덕은 하나의 사회적인 인식이나 관념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에서 미덕이란 단어가 붙는다. 가령 한국에서 시간이 늦어 오는 것도 미덕이라거나 혹은 덤으로 끼워주는 것이 미덕이라거나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미덕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윤리적 판단이나 선험적 기준에서 결코 좋은 것이 될 수만은 없다. 가령 어느 도시에 온 사람이 시골에 와서 마을주민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한다는 고정적 사고가 하나의 도덕이다.

 

단순히 도덕은 어느 국가만이 아니라 작은 소규모 사회나 공동체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이란 것은 위험하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하나의 결정적 판단에 오류로 등장할 수 있다. 특히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자코뱅파이 왕당파를 제거하고, 내부적으로 만든 국민공회의 상징성을 너무 지나치게 부여한 나머지 국민공회를 비판하는 자에 대해 제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영화 <당통>에서 실제 1793년에 일어난 일을 재각색한 팩션으로서 그 당시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국민공회 정부는 제일 중요한 자유의 요건에서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부정했다.

 

같이 자코뱅클럽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내부적으로 지롱드파와 대항하며, 외세침략까지 막아낸 동료들을 어느 순간 기요틴 아래에서 화려한 칼날로 그들의 목과 몸을 분리했다. 그리고 그 시대에서 그것이 하나의 도덕이다. 도덕이란 단어가 위험한 이유는 옳은 일이 나올 수 있어도 옳지 않을 경우가 허다했다. 국민공회의 경우 그들은 모든 법적인 통제 위에 있고자 했다. 국민공회를 무시한 자는 프랑스공화국을 무시하여 국민의 아래에 있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국민의 위에 있었다. 이로서 프랑스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배반했다.

 

웃기는 일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사회계약론>을 항상 들고 다니며, 하나의 상징을 부여했다.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가 루소의 가르침에 가장 반대되는 행위를 했으니 말이다. 도덕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처음에는 옳은 일을 해도 뒤에 지나가면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다고 이런 역사적 모순을 부정만 할 수 없다. 지금 프랑스가 문화, 예술, 철학의 나라가 된 이유는 바로 이런 연유다. 프랑스 파리에 3대 박물관인 루브리 박물관이 있다. 이것이 대중에게 공개된 이유는 국민공회가 국민을 위해 미술관으로 모두 공개한 이유다.

 

모순의 역사에서 그렇게 인간의 역사는 진보적으로 때로는 후퇴하기도 한다. 변증법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과도기 뒤에 도래하는 과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도 크고 잔혹하며 때로는 숭고하다. 영화 <당통>에서 당통은 자기의 목이 잘리기 전에 사형집행인에게 부탁을 한다. 사형집행인에게 자기 목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파리의 수많은 시민들에게 보여 달라고 말이다. 그는 어긋난 프랑스대혁명의 취지를 군중에게 각인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반동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대혁명은 끝이 난다. 영화 <레미제라블>처럼 19세기에서도 계속 혁명은 일어나도 왕당파와의 끊임없는 투쟁을 벌인다.

 

 

그래서일까? 역사란 언제나 힘이 있는 자에게 영광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의 당연한 미덕이 되었다. 힘과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인간 스스로 신화를 만들어내고, 그 신화의 벽에 폭력, 억압, 착취라는 것을 만들었다. 민주자유주의국가에서는 그런 것들을 부정하나, 아직까지 이 3가지 단어는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숭고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란 슬로건은 여전히 빛을 보고 있다. 이 3단어가 아무리 사람들이 외쳐도 타인들은 왜 고통 받고 있을까? 그것에 대한 의문은 곧 윤리적인 철학적 사고로 이어지나, 가끔 그것이 거론되는 것이 바르지 않은 것 같다.

 

 

그것에 대한 의문을 건드는 사람은 마치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들거나 또는 용의 비늘을 건드는 행위와 같으리라. 이익도 되지 않고 충분히 자신에게 불리한 길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역사에 언제나 있는 법이고, 그것을 택하여 그의 생전에는 언제나 쓰라린 패배와 고통, 좌절, 그리고 절규만이 들린다. 때로는 허무하게 죽기도 억울하게 죽기도 한다. 내 인생에 길이 남을 영화 <당통>에서 스스로 기요틴 아래 목을 받친 당통이나, 당통을 죽일 수밖에 없던 로베스피에르가 존경하던 장 자크 루소, 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 편안한 길을 버린 카를 마르크스, 러시아혁명의 영웅이나 스탈린에게 살해당한 레온 트로츠키 등을 보면 언제나 역사에서 새로운 바람을 부는 이에게 비참한 죽음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비참하게 만든 자는 권력을 잡았고, 아주 후세에 이르러는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그런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사회가 과도기란 이유로 그들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도 어렵다. 왜 그럴까?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이 주인이고, 양심의 자유가 있는데 말이다. 헌법에서 제시하는 민주주의정신과 현실의 도덕과는 괴리감으로 가득하다. 바로 그 괴리감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으로 인해 갈등이 생겨 그것을 차근차근 해결해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다.

 

 

민주주의라는 사회구조는 절대로 평온하지 못하다. 오히려 시끄럽고 때로는 논란이 되어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일이 많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회 내부의 갈등을 조율하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스스로 짊어가는 이가 누구냐는 것이다. 말과 행동은 일치될 수 없기에 그 행동의 주체는 항상 모든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즉, 상징적 존재가 되어야 하나 그 상징적인 존재가 신성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벌거숭이가 될 정도로 고통의 굴레를 지나가야 한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그런 짐을 지고 가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하다. 물고문에 전기고문에 죽기도 하고, 살아도 몸과 정신이 성치 않아 고통스럽게 눈을 감는 이들도 있다. 이번에 소개한 승효상 교수의 <노무현의 무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은 바로 그런 굴레의 짐을 스스로 지고 가다 운명을 맞이한 어느 남자에 대한 추모서적이다. 책 본문에 인상 깊은 구문이 있다. 승효상 교수는 네이버캐스트 지식인의 서재에서 2번째로 나올 정도로 아주 박식하고 뛰어난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건축학으로 인정받으며, 한국종합예술대학교 학생들에게 건축을 가르친다.

 

 

그의 건축이 되던 노무현 비석,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술이야 말로 삶이고 정치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고, 미학이란 것은 철학의 칼로 예술을 가르는 것이라고 한다. 노무현의 죽음을 삶의 광학으로 보면 어떤가? 삶의 광학에서 그의 죽음은 그저 허무함과 아쉬움, 그리고 원망까지 섞여 있다. 오늘 회사에서 다른 부서의 상사가 자신은 노무현이 죽어서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왜 죽어야 하는 것이냐고 한다. 그런 말은 아는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던 그의 입장을 내가 직접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의 자살을 두고,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스스로 권력으로부터 추방시키고, 이제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으로부터 추방시켰다. 쓸쓸한 한국의 지식인이던 한 시민주의자는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승효상 교수는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가 저술한 <권력과 지식인>을 두고 노무현에 대해 논한다. “지식인이란 지역성, 주관성, 현재의 시점이라는 각각의 것들과, 보편성이라는 것 간의 상호작용에 반응하며, (중략)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지식인인 한, 스스로 경계 밖으로 추방하며,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여야 한다.”고 했다. 이때까지 프랑스혁명과 역사에 대한 명제로 통해 우리가 인류문명이 오면서 되풀이되는 비극적 인간의 모습에서 무엇이 바뀌고 찾았는가? 그런 노무현의 죽음이기에 그의 죽음은 상징성에 대한 부여가 쉽지 않음이다. 예술에서 그 중에서 특히 건축이란 인간에 대하여 유물론적인 구조이면서 가장 관념적인 부분을 지배하기 쉽다.

 

 

건축물을 보면 우리가 사는 집과 아파트, 빌딩과 조형물, 심지어 오랜 시간을 견딘 유적에도 존재한다. 건축물에 대한 미적인 부분에서 서양에서는 당연히 성당과 교회일 것이다. 그것들은 예술이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하다. 예술에서 숭고함을 너무 추구하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하나의 기적과 같은 신앙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예술에서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 그의 무덤은 작은 비석만 놓여 있다. 높지도 않아 거의 바닥에 누워있고,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여전히 시민주의자였다. 아마 법을 전공하였고, 대한민국 헌법 역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기본 되는 점과 존 롤즈의 <정의론>과 같이 정치적 자유주의를 추구한 대통령이었다. 그것에 대한 상징은 역시 시민이었다. 시민 대 시민, 만인 대 만인의 투쟁보다는 시민 대 시민이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의 비석은 우뚝 서있지도 않고 누워있다. 그의 비석 주변의 광장은 신성한 장소이기보단 누구나 밟을 수 있는 공간이다. 경계로 되어 있는 부분은 그의 작은 비석 주변이다.

 

 

그 누구라도 노무현의 비석에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승효상 건축가가 바라본 광학적인 삶이다. 노무현의 비석으로 가는 길은 독특하다. 입구에서 시작하여 마치 역삼각형이 퍼지는 모습, 그 앞에는 작은 호수 수반이 있다. 물이라는 공간 즉 생명을 말한다. 생명이 깃든 수반, 그것을 시작하여 죽은 자의 비석으로 간다. 노무현의 광장은 살아있는 자의 삶과 죽어있는 자의 죽음을 연결하는 통로다. 단지 그 수반의 모양은 미국 페미니스트 예술가인 주디 시카고의 작품인 <디너파티>와 흡사하다.

 

 

조금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생명의 공간 같기도 하나, 그 종점은 죽은 자가 있다. 하지만 죽음은 한 갈래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퍼진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고,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죽음의 시간 앞에 선다. 그래서 죽었다는 것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실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역삼각형의 공간을 보면 우리는 여러 갈래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 중심에 노무현의 비석이 외롭게 누워있다.

 

 

그 외로운 비석 옆을 걸어가면 많은 직사각형 돌들이 틈틈이 메운다. 그의 삶과 죽음까지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아파하던 모든 이들의 소원과 명복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작은 비석까지 밟고 갈 수 있다. 비석으로 이루어진 길을 밟으며 같이 그들의 마음에 공감한다. 이 광장은 끝까지 시민 대 시민으로 남은 것이다. 스스로 권력 속으로 은폐하여 신화화하지 않으려한 노무현, 하지만 그의 그런 모습이 그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는 신이 되었다.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신이 아니라 인간의 억압을 해방하려고 한 신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사회적 타살이란 자살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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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1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500점이길래 대단하다 했는데 20000점이니 후덜덜하네요....ㅎㅎㅎ

만화애니비평 2013-03-19 22:43   좋아요 0 | URL
이게 다 덕심인겁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