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양창렬 옮김 / 난장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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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구조에서 20세기 말 미소냉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서로 자신들만의 가치관만을 강조했으나, 실제로는 그것을 핑계 삼아 은폐, 조작, 감시, 첩보 등을 상대 국가만 아니라 자신의 국가에게 사용했다. 결국 서로에 대한 이분법적인 적개심이 결국 그 감정의 표출된 수단적 방향을 적대하는 상대방이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조르조 아감벤의 설명과 더불어 기 드보르의 설명을 추가적으로 제시한다. 기 드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구경거리의 세상은 1927년부터라고 한다.

 

스펙타클의 사회가 1967년에 나왔고, 그것에 대한 비판이 20년 뒤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왜 1927년이란 말에 확실히 1927년은 중요한 시기인 듯하다. 미소냉전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각을 세우기 전에 그것의 바탕이 되던 것이 1927년이다. 레닌이 1924년에 죽고,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정치적 대립에서 스탈린이 1927년 트로츠키를 정치적으로 승리한 시기와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프롤레타리아독재국가라는 겉모습에서 관료주의적 국가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시장경제자유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대립각에서 각 나라에 속한 국민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적개심을 느껴야 했는가? 국가와 국가에서 개인적 갈등은 전쟁이 아니라 단순히 싸움에 불과하나, 국가와 국가의 대립은 전쟁이다. 전쟁과 더불어 일어나는 인종청산 내지 인종말살과 같은 비인도적 행위들은 상대국가에 대한 관념에서 국가적인 영역으로 다른 나라의 사람을 대하지 그 사람 자체로서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적이기에 국제법이나 전쟁법을 따르기보다는 내부적 법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에 히틀러의 수하들은 폴란드 점령과 프랑스 및 기타 유럽국가의 유태인들을 수용소에 가두어 심각한 잔혹행위를 빚었다. 그 행위에서 그들의 행위는 인간과 인간으로 대하기보단 그저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통해 다루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합법적인 도구라고 볼 수 있다. 그 도구 속에서 인간은 그 법의 대상에 해당되는 인간과 해당되지 않은 인간으로 분리하고, 그 분리된 공간에서 법의 범주에 벗어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나 그들은 법적인 요건, 즉 시민 내지 인민으로서 자격이 없기에 보호 받을 수 없다.

 

주권의 영역에서 주권은 결국 people이란 생물적 조건과 더불어 People이란 시민권이란 것이 필요하게 한다. 하지만 후자에 속하는 시민권에 속하는 것은 한정된 존재다. 그것은 언어, 문화, 풍습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언어로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존재다. 언어가 가졌기에 그 고유한 문화와 조건들이 형성되어 있다. 언어의 분리된 이질감이 결국 차별이란 것을 둔다. 다시 그 언어로서 이미지들을 형성한다. 예전에는 글을 읽지 못하면 문맹인이나, 지금은 영상을 이해하지 문맹인이다.

 

영상으로 이루어지 20세기에서 이미지로 매개된 사회, 즉 스펙타클이란 거대한 소용돌이에 우리 사회는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의 모든 권력적 요소는 인간의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언어적 기능을 통제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스미스가 일하던 국가기관에서는 새로운 사전을 발간하고, 언어의 실제사용을 제한적으로 두려한다. 그것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미지들로 매개된 사회에서는 결국 대중문화의 연계성이 된다. 민주주의 정치제에서 가장 한계점은 그런 이미지로 매개된 대중들의 전체주의적 요소일 것이다.

 

가장 파시즘에 가까운 정치제는 사실 민주주의 제도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형식적 제도이지 그 제도에 대한 사실적 행동에서 인간 스스로 계몽이 아니라 미디어로 통한 형성된 여론과 상황이 주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과 여론들은 다시 정치적으로 수단화되기도 한다. 근거도 없으나 민주주의 제도의 한계점은 국가적 업무를 모두 국민 모두가 담당할 수 없다는 점이고, 그것을 대신할 관료들이 필요하다. 문제는 관료라는 존재들이 국민의 아래에서 행동하기보다는 국민의 위에서 행동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것이다. 노모스라는 법의 통치적 부분에서 우리는 법의 아래에 있어야 하나, 법의 위에 있는 것으로 통해 하나의 정치적 질서가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법으로서 통제하는 존재는 인간이지 그 법 자체가 아니다. 게다가 기계적으로 수치를 드러낼 수 없으며, 그것을 판단할 이성조차 없다. 판단의 기준은 결과론적 부분이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행위의 근거성과 동기 부여다. 그렇기에 인간 스스로가 법으로서 다른 인간을 통치하는 부분에서 법을 집행하는 인간 스스로가 도덕성의 판단함에 그 판단하는 자의 도덕성이 소유하지 않게 되면 일어나는 것이 수용소적인 통치일 것이다. 그것이 전쟁이라면 전시수용소고, 그것이 내부적이라면 재외국민들의 수용하는 공항이나 보호소일 것이다.

 

민주주의적 요소가 왜 전체주의와 가까운 내용에서 민주주의에서 People이란 조건이 민주주의국가에 해당되는 사람에게 해당될 뿐이지 그것에 해당되지 않은 이들은 법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 법적인 조건은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인간을 나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물질과 물질로서 구분하는 것이다. 법적인 요건에서 그런 일련의 행동들은 여론과 상황이 좌우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런 사건들은 많이 일어날 경우 국내외 인권단체에서는 분명 경고를 내릴 것이나 그것을 실행하는 정부기관과 국민들은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법적인 절차에 의해 행동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고, 민주주의 제도에서 국민이 주인이기에 그들의 주인으로서의 소유권이나 행복추구권이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유지가 결국 민주주의 제도에서 그 나라 국민들의 목적의식이다. 그렇다면 저런 의식은 자유민주주의제도만 있었던가? 아니다. 20세기 소비에트연방 붕괴가 일어나던 러시아에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제도적인 부분과 더불어 미디어로 통해 상대국가의 불리한 점만 편집하여 몽타주화한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하는 것은 스펙타클화되어버린 국가적 인식에서 실제적으로 미소 냉전 시기에 직접적으로 그들이 무력적으로 충돌하지 않았다. 상대국가의 동맹국이나 해보았자 첩보전이었다. 직접적 물리적 충돌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동맹국에게 우위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상대국가의 주권에도 민폐를 주는 것에서 말이다. 어째든 그런 초국가적인 권력과 더불어 한 국가의 내부적으로도 이런 부분은 국가에 대한 권력을 지대한 부분을 공헌한다. 국가권력 중 경찰은 내부적 치안을 해결하기 위해 진실로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기보단 오히려 감시와 처벌의 형태로 발현할 수 있다.

 

국가 내부적으로 긴장감을 형성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심리적 행위에 대한 카타르시스가 필요하다. 결국 그 카타르시스가 해결되는 것은 만들어진 범죄의 소탕이다. 범죄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하나 한편으로 사회적으로 안정을 만들어 놓게 하는 장치다. 범죄의 구조적인 접근은 결국 한 개인의 도덕성 및 정신적 문제에서 그 이상으로 사회적인 조건을 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곧 이것에 대한 제도적 개선보단 오히려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보여줌으로서 미디어의 기능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갈등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조건이 다르므로 발생하고, 국가적 갈등은 그 국가들이 존재하는 지역적, 정치적, 종교적인 부분에 따라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 서로 다른 사회 내부와 국가 외부의 현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부분은 미디어로 통해 매개된 스펙타클로서 알아가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도서에서 이미지의 연속성을 둔 영상이 오히려 파시즘 국가에서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한다. 책자와 같은 것은 분명 계속 집중적으로 읽고 생각해야 하나, 영상물은 눈에 보이는 화면과 동시에 이제는 소리까지 나온다.

 

정보의 전달력이 그만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쉽고 이해하기 좋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발달한 영상물이 이제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터넷으로 바뀌었다. 실시간적으로 늘어나는 정보의 유통에서 이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의 과잉으로 넘쳐난다. 정보가 과잉화 되면서 문제점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와 조작 및 은폐된 정보들이 몽타주로 변질되어 사실이 아닌 거짓이 하나의 사실성을 가지게 되는 simulacre의 연속성이다. 결국 simulation이 스펙타클의 산물로서 결정체인 것이다. 일망감시체제인 판옵티콘에서 이제는 인터넷콘이란 단어가 좋지 않을까 싶다. 네티즌의 해킹과 더불어 정보감시는 그 당사자조차 알지 못할 만큼 교묘하고 지능적이다.

 

문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미디어로 통해 생성된 스펙타클은 신화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어제 봤던 뉴스와 드라마, TV토크쇼 뿐만 아니라 인기유행 중인 극장가의 영화까지 포함된다. 우리는 언제나 스펙타클이란 도구에 의해 모든 것들을 대화하고 사고를 공유한다. 정해진 것만 보는 것에서 인간의 집단적 사고를 유도하고 결국 그것은 인류의 적이 눈앞에 있는 사람들로 대체하게 만든다. 그나마 2차 세계대전의 잔혹한 수용소는 그 자체로서 상징성을 가지고 있으나, 상징성이 없는 수용소에서는 누가 과연 희생되어 가는가? 호모 사케르적인 요소로 보면 그것은 권력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다. 모두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사람들은 받아들이나 사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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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3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한 번 읽어봐야 겠어요. 호모 사케르보다 이 책이 더 좋다는 소릴 들어서 말이죠.
민주주의는 결국 쪽수 싸움이잖아요. 쪽수를 밀고가는게 파시즘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파시즘은 전체주의이지만 쪽수가 전체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죠. 민주주의는 올바른 감시 체제가 작동을 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파시즘입니다. 한국 사회 파시즘적 사회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3-31 21:38   좋아요 0 | URL
호모 사케르보단 이 것이 좋은 듯합니다. 여러가지 모아 중구난방적인 부분이 조금 이어진 부분이라고 할까요?
민주주의라고 하기엔 이성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민주주의로 가장한 전체주의에 불과하죠.
한국 파시즘이죠. 확일화 되니 말이죵
 
과학혁명 - 유럽의 지식과 야망, 1500~1700
피터 디어 지음, 정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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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것은 곧 기존의 어느 특정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혁명이란 것은 반드시 모든 단어에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에 대해 뒤집는 것을 말한다. 가령 혁명을 논하자면 우리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논할 수 있다. 기존의 앙시엥 레짐 즉, 구체제인 봉건사회에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시기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반드시 혁명의 조건은 헤게모니에 대한 전복성이다. 그 전복성은 지배하는 부류 내지 사회적 권력을 지닌 자에 의해서가 아니다. 흔히 권력을 소유한 자가 기존 세력을 뒤집는 것은 쿠데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혁명이란 단어에서 과학혁명이란 단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은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쉽게 요략 짓자면, 이 책은 유럽의 지식과 야망이던 1500~1700년 시대 즉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기라는 점이다. 르네상스는 인문주의와 더불어 과학과 이성이 발전된다. 그 근거는 바로 인간이 가진 이성의 발달이다. 그렇다면 중세시대는 어떠한가? 중세유럽의 시대는 이른바 가톨릭교황 시대다. 물론 그런 요소는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종교가 가진 권위에서 정치적 개입에서 교황이 국왕을 임명하는 행사 내지 각 국가별로 세력을 조정할 수 있었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중세다. 그러므로 헤게모니적 부분을 고려한다면 과학혁명은 바로 종교적인 관념으로 가득한 중세의 인식을 전환될 수 있는 큰 업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서양 가톨릭은 초반에 교부철학에 의해 스콜라철학을 영향 받는다. 그 근거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겸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다. 이 책을 읽으면 다소 이해하고 갈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形而上學), 즉 meta-physics라는 것이다. physics란 단어는 기본적으로 자연학이다.

 

지금으로 보면 물리학에 해당되는 말이 physics나, 당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을 집필 시기에는 physics는 자연과학으로 물리만 아니라 천제, 지구과학, 화학 심지어 생물학까지 포함되어 있다. 실제 형이상학을 보면 인간의 동물적 기능에 대해 적어놓고 있다. 서구사상을 보면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그의 스승인 플라톤의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가톨릭과 겹쳐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부철학으로 발전하여 중세유럽을 지배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종교적 가치관의 중심은 절대적 존재인 신의 영역이다. 신의 중심으로 모든 것이 형성되어있다는 관념론이 결국 과학이란 science로 통해 그 영역이 변화해 가는 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까지를 지나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칸트의 형이상학적 영역에서는 이른바 <순수이성비판>이란 선험적 비판이 중시되었다. 즉 신이란 존재성의 유무보단 그 유무를 벗어난 하나의 비경험적 인식으로 통해 이성의 범주를 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이성의 범주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것이 과학이란 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과학은 경험에 의한 도출에 가깝다. 왜냐하면 과학은 가설을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실험으로 통해 증명해야 한다. 그 실험에서 하나의 결과는 인간의 관념적 영역보단 형이하학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경험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객관적 사실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선험적 판단을 하는 이성에 큰 작용을 하는 이유는 종교적인 권력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령 요한 하우징어의 <중세의 가을>을 보면, 그 당시 종교적인 영향이 그 시대에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12세기 전후 십자군원정은 가톨릭의 권의가 유럽에 모두 미칠 정도로 강력했다.

 

이런 상태에서 지구라는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행성이고, 그 행성은 신이 존재하기에 다른 생물체가 다른 별에 산다는 것을 불가능했다. 게다가 지구는 신이 있기에 모든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는 천동설에 입각했다. 생각해보면 중세시대 인간들은 바다를 보면서 바다 멀리 어딘가 폭포와 같은 낭떠러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구는 둥글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바다를 보면 수평선 너머로 직선이 아니라 타원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그런 지구의 특성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에 대한 반박은 당시 교황권력에 대한 도전이었다. 신이 지구를 중심으로 여기던 당시 종교관에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과 갈릴레오 역시 교황권력에 굴복하여 지동설을 폐기하고 천동설을 주지했으나 결국 지동설로 다시 돌아갔다. 과학의 중요성은 바로 기존 종교적 관념을 가진 사회에 대한 반발이다. 그것은 신을 중심으로 하던 유럽사회에서 인간중심으로 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과학이란 것은 결국 미신이나 관념에 존재하여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추후 뉴턴의 경우 기존 유럽에서 고수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탈피했는데, 과학의 영역에서 과학에 대해 철학적 보편성을 따지고, 그 현상에 대해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다룬다면 과학혁명의 취지는 그 보편성을 떠나 유용성이라고 볼 수 있다. 본래 Art라는 단어는 지금에선 예술이라고 할 것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절에는 기술이었다. 기예의 하나의 창조물이라고 한다면, 과학의 발전에서 새로운 물건들은 다른 물건을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라고 보면 될 것이다. 즉 과학혁명이 도래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공학 전공자 입장에서 자연을 하나의 관찰대상에서 이용대상으로 바꾸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종교적 관념으로 영향 받던 시절에 식민지 개척시절로 넘어가면 선원들이 항해술 및 천문학, 해양학의 발달로 통해 지구과학의 지식이 축척되어 간다. 그러면서 지구는 둥글다는 것과 지구가 자전하고 태양의 중심으로 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할 무렵, 교황권력은 지동설적 발언을 하는 사람에 대해 이단심문으로 통해 화형에 처했다. 신의 절대적 영역을 건들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적 맹목적성이었다. 이런 종교가 국가정치와 관여하는 이상 이성의 판단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1600년대 합리주의 철학을 선구자인 르네 데카르트 역시 그런 한계성을 보여준다. 그의 저서인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나, 자연적인 심도에서 설명하기가 난해한 부분에서 대해 신학적인 요소를 가진다. 방법서설을 실제로 읽으면 수학에 대한 정의와 논리, 게다가 과학적 기술에서도 생물학과 물리학이 등장한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데도 결국 그는 종교적 권위에 따라 과학과 수학을 발전시킨 셈이다. 당시 철학사상가들의 특징은 보면 대부분 과학자이면서도 수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형이상학자이기도 했으나, 정치학과 물리학, 수학자이기도 했다. 심지어 생리학인 의학적 영역도 다루었기에 대부분의 형이상학자들은 철학과 수학, 의학과 과학까지 동시에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과학적 발전은 점차 형이상학에서 과학과 의학을 별도의 분야로 분리하도록 만들었으며, 지금의 21세기에 철학자들이 의사와 과학을 동시에 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에 따라 인간이 알고 있는 범주와 조건이 계속 달라지기에 인식과 관념의 변화가 생긴다. 그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계속 유지하는가? 아니면 변화를 주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기존에 믿고 있던 것이 하나의 거짓이란 점은 그동안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사회적 관념을 해체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룡이 6,000년 전에 있었고, 아담과 이브가 동산에서 사과를 따먹어 공룡이 망했다고 하는 엉터리주장이 나오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그 당시라면 더욱 심했을 것이다.

 

지식이 결국 과학의 발달에 따라 과학은 결국 나라의 부나 혹은 권력의 과시욕이 되었다. 가령 왕이나 귀족의 지원을 받거나 작위를 받는 것에서 궁정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누리는 특권과 동시에 그들의 고용주들은 과학자를 데리고 있다는 권위적 상징을 발휘할 수 있었다. 프랑스 태양왕 루이14세의 경우 그는 과학에 관심 따위는 없었으나, 그래도 과학자를 데리고 있는 이유는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과학자를 보유했다는 상징적인 부분은 지식인들을 소유하는 것 역시 권위적으로 가능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과학자나 그 외의 많은 학자들이 자신을 후원한 주인을 위해 서문에 그들을 위한 헌사 글을 남긴다.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글쓴이들은 연구도 글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과학적 발전에서 인간은 고전주의와 작별을 하고, 구체적인 분야에 들어가게 된다. 대신 과학으로 통해 존 로크나 토마스 홉스와 같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과학이란 분야가 정치학과 사회학에 큰 영향을 준다. 과학의 발전은 곧 인간에게 지금 그것이 일어나는 것이 과연 그 말 그대로 옳다는 것이 아니라 과연 옳은가? 라는 비판적 사고를 유도하는 점이다. 과학적 사고는 결국 합리적 이성의 추구다.

 

과학혁명이 없었다면 아직 우리는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여길 것이다. 지금 그 소리를 하면 헛소리한다고 하나, 불과 600년 전에는 그것이 당연했다. 과학의 발달에서 인류가 이룩한 과학적 성과는 매우 거대하나, 그 기간은 매우 짧다. 최근 복제동물이 태어나고, 인간의 유전자를 이식한 아이도 만들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르네상스 과학은 신의 중심에서 인간의 중심으로 가게 했으나, 지금은 인간조차 조작할 수 있는 세상이다. 물론 잘 이용하면 인류의 발전이 되나, 과학은 이성을 발달시킨 만큼 윤리적이지 못하다. 독일 나치가 유태인들을 상대로 실험할 때, 그 실험한 의사에 대해 양심적인 독일의사도 그들의 잔혹한 행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과학은 증명하기 위해서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혁명인지 반동인지 그것은 오로지 과학자의 양심에 달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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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신데렐라 1
눈미 유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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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콤플렉스는 결국 신데렐라에 대한 신화적 욕망이다. 인간에게는 여전히 욕망이란 무의식적인 구조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신데렐라 신화와 관련하여 한국에서는 콩쥐팥쥐 동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콩쥐팥쥐 동화이야기가 배경적 요소로 따지면 조선시대다. 게다가 농경사회의 요소에서 분명 근대화 시기의 외국문물이 들어오지 않았던 시기다. 그런 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신데렐라 신화는 유효하다. 아니라면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 중에서 <캔디 캔디>와 같은 작품도 좋은 사례다. 한 때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캔디 열풍이 일어났다.

 

테리우스라는 미남이 캔디라는 순수한 소녀를 사랑하는 이야기, 그래서 탄생한 언어가 캔디 이데올로기다. 캔디 이데올로기와 신데렐라 신화는 비슷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신분상승의 꿈을 노리는 여성이 가지는 환상이다. 지금의 환상을 가지고 논하자면 <캔디캔디>와 같은 고전 만화를 보는 것이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 없으나, 그런 구조적인 서사는 계속 돌고 돈다. 단지 스토리텔링의 구성에서 다른 이야기나 소재를 집어넣어 다르게 보일 뿐이다.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신화적 요소는 같다. 지금이나 몇 십 년 전에 흥행한 <캔디캔디>나 구조적인 분석에서 별로 바뀐 것은 없다.

 

작품의 분석대상에서 그런 대상에 대한 구조적 배열은 중요하다. 통시적인 작품을 놓고, 공시적으로 같이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데렐라의 중요한 갈등은 아마 계모와 주인공인 소녀의 관계다. 기본적으로 신화라는 것은 동화로 나오고 신데렐라 이야기나 콩쥐팥쥐 이야기도 물론 동화책으로 나온다. 하지만 동화라는 것은 아이가 읽기 위한 이야기나, 그 이면에는 잔혹하고 끔찍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가령 콩쥐팥쥐에서 콩쥐가 부임한 관료의 아내로 되면서 동화가 아닌 신화의 은밀함을 밝힌 도서에서 팥쥐는 죽임을 당하여 온 몸을 갈기갈기 찢어 젓갈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신데렐라의 이야기에서 실제 이야기는 신데렐라의 언니들이 신데렐라의 구두를 신기 위해 발등과 발가락을 도끼로 찍어 억지로 넣었다고 한다. 덕분에 유리 구두에서 피가 새어 그 거짓말이 탄로 나자, 동화책과 달리 계모와 언니는 도부수 손에 처형을 당한다. 잘 생각해야할 점은 도부수가 목을 도끼로 찍어 벤다는 점에서 기요틴이 보급되기 전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증거다. 신데렐라 신화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고, 언어학적으로 신데렐라는 먼지 옷을 뒤집어 입은 소녀라고 한다.

 

신데렐라의 이야기에서 언어학적인 추적에서 밝힌 것처럼 신분이 매우 낮다는 것이고, 그 신분이 낮은 여자가 신분상승을 위해 남자와의 만남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가부장적인 가족체계에서 여성의 종속을 합리화하는 수단하는 남성지배체계와 더불어 자신의 노력보단 단순히 남자에게 의지하려는 속물근성의 여성들의 이해가 일치하는 것이 신데렐라 신화의 한계성이다. 이와 반대가 되는 신화는 온달신화가 있다. 평강공주가 내려와 바보온달은 대장군으로 만드는 고구려시대의 이야기는 신분상승구조에서 옛날에는 여성들도 만만치 않게 정치적 입지도가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권력의 왕좌나 신분 대신 자본력이 대체되고, 민주주의 요소의 증가로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들이 아예 차단된 것이 아니라 길가에서 우연히 스치기도 한다. 조선시대를 생각하면 높은 신분인 대관관료나 중세유럽의 봉건귀족이 지나가면 모든 농민이나 백성들이 머리를 숙이며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따라서 그런 통시적 조건에 따라 이야기의 구성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읽어본 <절규 신데렐라>는 그런 기본적인 신데렐라 신화에서 보여주는 가난한 소녀와 억압된 자유가 기본적인 명제가 되었다.

 

단지 다른 점은 계모와의 갈등이 아니라 친부와의 갈등이다. 신화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에서 딸은 아버지를 아들은 어머니를 따르게 되어 있으나, 딸의 연적이 되는 어머니는 이미 돌아간 시점이고, 아버지가 모든 생계와 가계살림을 도맡는다. 편집적인 자녀들 관리가 지나치다 못해 정신병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형제관계에서 언니가 2명이 아니라 오빠와 언니가 각각 있다. 게다가 나이도 15세란 점에서 14세의 중2병이란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갔다. , 2차 성징기로 통한 심리적 내적 갈등이 없는 구조다.

 

이런 시기에 주인공은 자신의 내부보다 외부와의 관계에서 갈등한다. 자기만의 공간이 아니라 자기 외적인 공간과의 투쟁이고, 그 투쟁에서 아버지의 권위와 사회적인 도덕과 싸워야 한다. 그 사회적 도덕이란 윤리적 가치나 혹은 법적인 규칙이 아니라 유해인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나공주라는 소녀다. 미모도 그러하나 아버지의 배경에서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 작품을 보면 오디션의 우승은 전반적으로 나공주로 되어 있다. 바로 그것이 도덕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덕이라고 하여 반드시 사회윤리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 사회적 흐름을 쥐고 있는 하나의 세력이나 권력을 의미한다.

 

다라서 해인이의 적은 내부의 관계인 가족이 아니라 가족 외라는 것이다. 신데렐라 신화는 본래 가족 내부의 문제를 가족 외부에서 해결하고 기존 가족은 버리고 다른 가족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그 편입과정이 신분상승이란 점에서 <절규 신데렐라>는 기존 신데렐라 신화와 대조적인 부분을 보여준다. 여기서 또 다른 구조는 신데렐라를 구원해주는 존재이다. 작품 초반에 왕자는 작곡가 강동호로 나오고, 신데렐라의 조력자는 케빈이 된다. 문제는 강동호나 케빈 모두 신데델라인 해인이를 마음에 든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신데렐라 신화는 왕자가 1명에 그 왕자에 대한 구혼자는 다수이고, 여기서는 다르게 2명의 남자로 구성된다. 아직 1편만 봤기 때문에 서사적으로 어떻게 끝을 맺을지는 알 수 없으나, 작품에서 해인이 가지는 갈등은 아버지와의 갈등, 케빈과 강동호와의 삼각관계가 초반에 제시된다. 서사구조에서 발단-전개-위기-절장-해소 5가지 단계에서 이제 전개과정이 모인 것이다. 물론 그 사이의 위기는 있었으나 그 위기는 이야기 구조의 하나의 조건성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서사의 진행에서 아쉬운 부분은 초반에 케빈의 등장에서 너무 급진적으로 친하게 되었다는 점이고, 케빈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를 지나칠 때 역시 너무 우연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가게를 지나가기 전에 미리 사전에 하굣길에 쇼윈도에 비추어진 의상과 그 너머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아쉽거나 혹은 자신의 용모를 조금 가꾸는 모습을 보였다면, 더 부드러울지 모른다. 작품에서 좋은 부분은 역시 표현력인 것 같다. 주인공 소녀가 아버지의 압박 아래 TV도 못보고, 라디오도 제대로 듣지 못한다.

 

낡아버린 워크맨 하나에 동요만 부르는 해인은, 오로지 마음속에 담고 있는 어머니와의 추억이다. 어머니 앞에서 부르는 노래란 아름다운 기억이다. 그 기억만을 담아 오디션에서 부르고, 오디션이 아니라도 길가에 흥얼거리면서 간다. 순수한 그 마음을 토대로 변하지 않으면서 꾸준히 빛나는 장면은 좋았다고 본다. 만화라는 것은 이미지의 세계다. 소리를 내지 않은 종이로 구성된 매체이다. 그 종이에서 소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그림체는 좋았다. 빛이 나듯 음표가 주위를 돌아가는 것과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열중하는 모습은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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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25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입니다. ㅎㅎ. 눈미가 감동하겠어요.
순정만화를 새롭게 보도록 만드는 힘이 느껴지는 리뷰였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3-25 19:21   좋아요 0 | URL
그것이 리뷰하는 사람의 임무죠.
눈미가 님에게 칭찬받고 싶어한데 이참에 칭찬을..ㅋㅋ

제 블로그에 올렸어요! 그리고 눈미도 블로그에 덧글을..ㅋㅋ
 
빨간 바이러스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주변 친구로부터 듣는 이야기가 좀 극단적이고, 너무 강현 선입견이 아니냐고 듣는다. 아마 내가 성격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도 있으며,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도 너무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이다. 일단 내 개인적으로 사소하고 일상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경직된 인간이다. 얼굴을 속일 수 없는 기분, 말로 내뱉어도 그대로 드러나는 나의 심정, 거짓말하면 10번 하여 1번 성공할 수준, 그런다고 하루에 거짓말을 10번을 넘기도 어렵다. 아침에 출근하여 사무실에 오면 대화도 그렇게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대화도 거의 업무상, 나머지는 무얼 하냐고? 당연히 PC 앞에 앉아 한글, 캐드, 포토샵, 엑셀을 가지고 보고서 정리하기 바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부분은 내가 이래 보이지만, 다소 선입견도 없고 극단적이지 않다. 그런 요소는 바로 일상적인 부분을 넘은 그 이상의 영역에서 가능한 부분이다. 지식인 사회에 들어갈 수준이나 상황까지는 아니나, 적어도 지식인들은 일반 세속에 나오면 바보가 된다. 세속의 대중들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범주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서 우리는 대중문화에서 공감대 형성이 너무 잘 되어 있다. 가령 “너 어제 TV에서 그 드라마 봤니?”, 혹은 “그 영화 봤지? 너무 감동적이더라!” 뭐 이런 식이다.

 

다들 그 영화를 보면 특별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비극의 주인공을 보면서 자신을 대입하면서 나라는 존재의 특별함을 느낄 것이다. 물론 인간에 대해 논하면 그 자체로 특별하다. 그러나 그 특별함은 결국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생각이란 점에서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자기가 특별하다고 여기기에 특별하지 못한 것이다. 대중문화에서의 대중들은 이런 의식구조가 팽배한다. 그래서 이런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관계를 엿보면 여기에 합류되지 않은 자들이 오지에 살고 있는 원시인이나 문명화가 덜된 야만인으로 보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런 원시인에 야만인의 범주에 나도 들어간다.

 

나의 모토는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이 아니지만, 당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람들과 만나면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그것에 대한 철학적 언변을 쏟아 놓을까? 다들 그런 것에는 잠이 오고 지겨워한다.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서로 간에 알고 있어야 가능한 대화니 말이다. 따라서 나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활동하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blog나 카페, 그리고 인터넷서점에서는 특별하지 않으나 다소 좋은 우대를 받고 살고 있는데 말이다. 인문학의 정신보다 돈에 모든 것을 거는 이 사회에서는 나란 존재는 그저 이방인에 불과하다. 하기사 이방인이니 이렇게 넘보면서 글을 적는 게 아닌가?

 

아웃사이더의 입장이 되어야 비로소 다른 세계를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머무는 순간 그 세계에 대한 비판적 글을 적을 수 없다. 이미 그것에 물이 들여 어떤 판단력을 내리야 한다는 기준이나 좌표조차 잡을 수 없다. 아니라면 인간의 의식구조 수준일 것이다. 딱히 내가 수준이 높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입도 조금 더러운 편이고, 성격도 급하다. 그러나 그렇기에 적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필수다. 최근 일이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사회에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옆에 같이 마시던 놈이 “그렇게 죽을 것 같으면 그 만큼 하면 뭘 못하겠어요?”라고 한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조금 맞기는 하나 그 상황적 순간이 닥치면 그것도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짜증나는 부분은 바로 이런 점이다. 왜냐하면 남의 불행과 고통은 그래 흘러 보내면서 자신의 신세는 한탄한다. 물론 저런 대사를 날리는 녀석은 뻔뻔하게도 백수이면서 전에 돈 모은 다 썼다고 나보고 담배 1갑을 사기 위해 3,000원을 달라고 했다. 그때 소주를 마신 자리라 그냥 줬지만, 속으로 무척이나 짜증났다. 담배를 피우면 몰라도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회사에 다른 직원의 이야기다. 월급이 적어서 울상을 짓고 있는데, 앞으로 결혼문제에 대해 고민했었다.

 

그런데 자살한 노동자가 생계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냉담한 반응이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특징이다. 내 불행은 말해도 남의 불행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서로 자기가 어렵다고 해도 결국 그 서로가 타인의 어려움을 핑계로 보는 것이다. 적어도 나 같은 경우 내 불행과 남의 불행은 둘 다 말한다. 따라서 나는 주변사람에게 ‘이상주의자’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현실에 대한 문제를 논하는 순간, 그것이 하나의 금기까지는 아니나 ‘이상주의자’란 명칭을 부여받는다.

자신의 기준과 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하는 한국사회, 나도 물론 포함되겠지만 그것조차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재다. 그래서일까? 진중권 교수의 <빨간 바이러스>를 읽으면서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도 든다. 내가 이래저래 인문학을 독학하고, 글을 쓰는 방법이나 전개과정을 고민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문체가 진중권 교수 양식이다. 뭔가 아이러니하면서도 생뚱맞은 것도 결국 큰 조류로 흘러가게 하는 그 풍자와 묘사력, 게다가 글을 읽으면 이 사람이 머리가 차갑지 마음은 뜨거운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이때까지 위에서 왜 이래저래 주절거렸을까? 대중문화와 대중, 거기에 나라는 존재의 미약함, 그리고 주변에 있었던 일화들까지 말이다. 이런 것을 <빨간 바이러스>를 읽으면 이해간다. 미디어사회에서 지식인의 자리에 네티즌이 들어서도 결국 지식인은 필요하다. 지식인이 가진 논리와 지성은 네티즌에게 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그 말대로 물량투입이란 점에서 극단의 성격을 가진다. 개인적으로 나도 다소 진보적 성향이 있으나, 이른바 한국에서 진보라고 뭉치는 행태를 보면 진보에 가깝기보단 신보수주의자에 가깝다. 극단의 좌익은 극단의 우익과 같다.

 

이런 극단적 성향 구보수와 신보수는 양쪽 날개를 펼쳐 곡예비행을 하고 있다. 마치 이것은 누가 그 진영에서 가장 극단적인 행동과 말로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파시즘이란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 파시즘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안티파시즘이 필요하나 그것 역시 파시즘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책에서는 진중권 교수의 정치철학관을 볼 수 있다. 처음에 노무현 대통령에서 나중에 민주노동당, 지금은 진보신당 계열이다. 시민주의적인 정치참여에서 한국에서 시민의식이란 것을 찾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극단적 이분법이 적용하기 때문이다.

 

어느 일정한 프레임에 조금이라도 비켜 가면 몽둥이찜질을 받아야 한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의 존재를 보자. 조선일보의 막말식이나 혹은 한나라당 당시 행동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을 들어주는 것보다 그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한 자들에 대한 공격이다. 덕분에 반사효과인가? 노무현 대통령을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에 비판하면 진중권 교수의 말이 인용된다. 그것을 보면서 당사자는 무슨 생각을 들까? 한국의 언론은 내가 볼 때는 몽타주의 향연이다. 언론은 진실성보다 중요한 것이 공정성이다. 공정성이 없는 진실성에서 분명 누군가 한 대사는 맞아도 그 전후관계는 따지지 않는다. 그렇게 편집된 영상에서 우리는 국민들은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정의가 된다.

 

개인적으로 존 롤즈의 <정의론>이란 도서를 좋아하나, 정의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아마 이분법적인 사회구도로서 점철해야 하는 것일까? 토크빌이란 사상가는 그 나라의 정치수준이 곧 국민의 수준이라고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 역시 수준이 높지 않으나 우리나라 국민 수준이 바닥이라고 여긴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나보고 너무 지식에 맹신하지 않은가 라는 말도 들으나 지식 없는 맹신은 더 무섭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식인의 죽음은 지식이 없는 자들의 포효다. 대한민국 헌법조차 보지도 않고 정치적 행위에 대해 논하는 네티즌을 볼 때마다 참 우리 미래를 맑고 맑아 물고기조차 살지 못 살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조선 중후기 열녀문이 한참 세운 시기가 한국이다. 특히 중세인가? 현대인가? 편에서는 순간 사회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책이 어느 순간 진중권 교수 특유의 미학연구도서 변한 것처럼 느꼈다. 예전에 읽어본 요한 하우징어의 <중세의 가을>이 나오고 움베르트 에코의 고전주의 시대를 다룬 서적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소개하면서 갑자기 미학오디세이인가? 여겼으나 그 이유는 한국이 여전히 계몽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적 요소에서 계몽은 스스로 깨우치고 껍질을 벗어야 하나, 한국에선 전체주의적 상황에 따라가야 한다. 열녀문이 세운 시기의 한국이라 내가 명하는 것은 사고의 우회가 불가능한 경직사회라는 점이다.

 

그런 문제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 기성세대와 신세대에서 마찬가지다. 자동차 연비문제로 나는 어느 회사가 좋아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연비가 좋은 차는 하이브리드인데 말이다. 제3의 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같은 것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해 논하기를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은 망해도 그 정신은 살아있다고 한다. 이해하기 위해 만들기보단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 예술, 때로는 그것이 필요하다. 늘 같은 것만 하려고 하니깐 말이다. 게다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도 말이다.

 

가장 나를 폭소로 만든 것은 뇌물방관 수사로 결국 자살한 어느 부산시장의 목숨을 위해 그 장례식은 부산시장 걸맞은 장례식과 그 죽음에 대한 애도로서 눈시울을 붉히는 그들이 “노동자가 분신을 해도 ‘뽀득뽀득’ 말라 있던 눈이다. 농민이 음독을 해도 ‘말똥말똥’ 굴러가던 눈이다. 서민들이 투신을 해도 ‘맹송맹송’ 시큰둥했던 눈이다. 도대체 그, 메말라 척박한 눈을 촉촉히 적신 가뭄 끝 단비와 같은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듣자하니 수뢰 혐의로 구속되어 수사를 받던 어느 공직자의 자살이라고 한다. 평소에 아끼고 아꼈던 그 고귀한 눈물을 기껏 어느 수뢰 혐의자를 위해 흘린 것이다.”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간단한 사안이 아니나, 한국에서는 그런 것이 참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선거철만 되면 코스프레 의상을 하고 포토제닉에 충실한 이들이 행태를 보면, 우리나라의 코미디언은 우리 국민들이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역시 자신도 그런 게 죽어가는 노동자, 농민, 서민인 주제에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후예들은 자신의 길을 가지 말라고 한다. 가지 말라고 하면서도 과연 그 길을 벗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 모든 법을 망라하여 그 모든 법보다 위에 있다. 한국의 헌법은 인권에서 생존권을 중시하나 한국은 이상하게 재산권을 중시한다.

 

겉으로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공정을 외치나 실상을 보면 재산권에 대해 생계가 달린 자들에 대해 사회적 악으로 만들고, 횡령을 한 어르신에 대한 법적 처분이 부당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2013년 유효하고, 이 책이 나온 2004년에도 유효했다. 물론 조건은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 이라크 파병과 관련하여 참여정부의 기록에선 부시행정부와 외교적 조건이 달려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다른 선택, 수우미양가라는 성적순에서 가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양으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적 입장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극단의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찾지 않은 사회에서 <빨간 바이러스>는 정말 퍼지지 않는 바이러스다. 인체에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운이 없을 사망하고, 컴퓨터는 포맷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바이러스는 퍼지지 못한 것도 모자라 백신도 투여하지 않아도 앓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바이러스가 퍼져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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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24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리뷰네요.
저도 심히 공감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3-24 15:57   좋아요 0 | URL
생각은 많은 반면 아무런 힘이 없는게 심한 우울이죠
 
나만의 공간 - 우리시대 지성 11인의 삶과 시공간 이야기
황인숙 외 지음, 고종석 엮음 / 개마고원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인간이란 혼자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고, 다른 사람들이랑 있으면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타인과의 조화와 더불어 자신과의 조우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있는 시간이나 혹은 자기만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사람이란 늘 마음이나 기분, 심리적 변화가 같을 수가 없다. 때에 따라서 혼자 있고 싶기도 혹은 같이 있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혼자만의 공간은 너무 중요한 것 같다. 자신만의 공간, 즉 <나만의 공간>이란 것은 현재 나를 구성해주는 정체성이다.

 

정체성의 영역에서 나만의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것이 남들을 모를 나만의 추억과 기억이 있다는 점이다. 모두 같은 시간과 공간만 있고, 똑같은 환경적 조건을 주면 그 사람만의 개성과 특유한 인상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내가 나로서 있어야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성립된다. <나만의 공간>은 그런 자신만의 세계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적은 도서다. 그냥 마음 편하게 읽으면 좋은 책인 듯하다. 사회적으로 제법 유명한 시인, 법조인, 의사, 작가, 철학자 등이 나와 자기만의 공간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을 저술한 홍세화 선생, 모두 까기의 달인인 진중권 교수, 법무부장관을 역임한 강금실 변호사 등이 보였다. 나만의 공간에서 다른 이들도 제법 인상적이나 그래도 아는 이름이 있다는 점과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나 혹은 삶에 대한 애착이 인상 깊었다. 홍세화 선생은 15년 동안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했는데, 그 운전을 하면서 생계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위안을 삼은 공간이란 게 인상적이었다.

 

이름 없는 망자들에서 지난 우리 사회의 아픔을 토로하는 그의 심정은 뭔가 시대의 아픔 내지 그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남산이란 것이 어떤지 모르나, 적어도 남산의 어느 한 고문실에서 쓰러져간 많은 사람들의 비명은 아직 우리가 갚아야할 민주주의의, 빚이다. 그런 암울한 현대사에서 좁은 택시운전석이 홍세화 선생에게 편한 공간이었을까? 딱히 편하다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성찰에서 자신만 아픈 과거를 잊고 마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해 그 아픔까지 담고 가야하는 것이 진정한 자신만의 공간이라 여긴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봤을까? 강금실 변호사의 이야기도 독특했다. 서울 명동성당 입구에 세워진 가상감옥을 체험한 이야기는 특별한 것 같았다. 남편이 억울하게 국가보안법으로 신체적 구속을 빼앗긴 적이 있고, 아버지 역시 억울하게 누명의 그 인생마저 파탄을 맞이했다. 그래서 강금실 변호사는 민변에서 활동한 이유가 있었다. 법조인으로 법 위에 사람이 없어야 하나 사실 우리 법 위와 아래에 사람이 있다. 때로는 사람이 법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들을 법으로 다스리려고 한다.

 

예전에 <호모 사케르>의 노모스처럼 법의 정의에서 인간이 법 위에 올라가고 그 사람이 법을 초월하여 예외적 존재이기 때문에 법이란 것이 성립되는 점에서 그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에 의해 다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 살아있는 존재이면서도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인정받지 못한 우리 사회에 있는 낯선 존재들, 법조인으로 그런 사람들이 정식적인 사회적 합의가 아닌 권력의 이름아래 희생되는 것이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체험이 강금실 변호사로 하여금 눈물로서 그 아픔을 상기한다.

 

그래서인지 강금실 변호사는 마당이란 것을 중시했다. 마당에 나온 사람은 그냥 자유로이 이래저래 움직일 수 있다. 갇혀버린 감옥은 마당이 없다. 그저 좁은 공간에 갇혀있으니 사람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답답할 뿐이다. 공간 이란 것은 사람에게 역시 어떤 특별한 그 무언가를 주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성찰과 추억, 아픔과 자유 등등을 말이다. 특히 나만의 공간은 나만의 자유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사람의 자유에서 자유란 혼자만의 공간에서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단지 그 자유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영원히 즐길 수 있다.

 

그래서일까?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는 나만의 공간이 추억과 변덕스런 지난날이다. 개인적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어른의 몸을 가진 아이로선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공책에 그림을 그린 후에 페이지를 계속 넘기면 마치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이런 기법을 애니메이션에서는 페이퍼 애니메이션이라고 한다. 비록 전투기 2기가 서로 싸우고 격추하는 것이나, 참으로 진중권 교수는 개구쟁이인 모양이다. 지금도 경비행기 모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인데,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 그림이나 혹은 비행기 모형을 만든 건 재미난 사실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망상에서 비롯한다. 특히 강의에서 meta-physics에서 형이상학적 세계, 즉 눈에는 보이지 않은 이상과 현실의 분리된 것을 담론하는 것에서 pata-physics 형이상이상학이란 새로운 세계를 말한다. 현실이 아닌 가상이 오히려 현실화되는 것이다. 아마 진중권 교수의 시작은 어린 시절 그 다락방인 모양이다. 모두 까기 달인인 진중권 교수도 별나지만, 그의 2명의 누나 역시 별난 모양이다. 예술도 하고, 노동운동도 하던 누나로서 그들의 기질은 새삼스런 것이 아닌 것 같다.

 

부모와 누나의 눈치전쟁, 거기서 남은 남동생은 후퇴하여 자기만의 공간을 찾는 것이 정답이다. 거기서 사라지는 것은 오히려 나의 존재를 찾기 위한 자아탐험이다. 폴 비릴리오의 <소멸의 미학>이란 도서를 자주 인용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 찾기와 망상에서 시작되는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이다. 혼자만 있으니 정말 다락방은 망상이 현실화되는 기분인 듯하다. 사용하지 못할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오브제들이 그 어린 시절의 개구쟁이 손에서 하나의 콜라주가 된다.

 

심심하면 여기저기 가위로 오려 몽타주를 실현한다. 아니라면 성적인 호기심이 있다면 좋아하는 연예인의 얼굴사진과 야한 옷을 입은 여자 사진을 붙이는 효과도 볼 것이다. 그런 유치한 기억과 추억이라도 그것이 소중한 모양이다. 책의 시점에서 얼마 전 찾아가니 없어진 그 어린 시절의 공간이 없는 것은 슬픈 것이다. 어느 애니메이션을 보면 주인공 소녀의 대사가 기억난다. 자신이 우주로 갈 나이가 되면 자기가 살던 마을의 모습은 없으나, 그 마을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언제까지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사람마다 전부 다 느끼는 것은 아니나, 어린 시절 그 공간이 오랜 시간 뒤에 존재할 리가 없다. 나도 학부시절에 다니던 그 대학교의 모습이 여전하지 않음을 최근에 알게 되면 조금 슬프다. 내가 보던 공간과 시간, 그리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들의 풍경은 이젠 내 마음의 추억이 되었다. 게다가 나무들이 이루는 숲의 세계가 없어지는 것은 더욱 마음이 아프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숲들과 그 중에서 특이하게 큰 나무와 잎이 유독 노란 은행나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서글프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의 추억이나 기억을 가진 주변 사람들마저 흩어지고, 인간이란 영원성이 없기에 때로는 그 학교에서 또는 이 세상에서 존재성이 사라질 수 있다. 그래도 그때의 나나 그 모습들이 여전히 머리에 맴도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나만의 공간>이니 말이다. 일단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나도 나만의 공간이란 것이 있는가에서 떠오른 것은 내방과 오락실이다. 특히 오락실에서 게임만 미친 듯이 한 나에게 딱히 나만의 공간으로 삼기는 그렇다. 만화방도 그렇고 말이다.

 

지금의 나만의 공간은 내방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방에 있는 컴퓨터로 다양한 글도 보고 적으며, 음악도 게임도 영화도 애니메이션도 즐긴다. 그리고 컴퓨터 옆에 있는 책장 안에 많은 책들이 있고, 그 책에서는 철학과 사회과학 등과 같은 어려운 책도 있지만 만화책이나 라이트노벨도 있다. 그저 내 방에서 조용히 내 시간을 즐기는 것도 나만의 공간이다. 단지 그 나만의 공간이 강력한 게 흠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나로 있기 위해서는 필요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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