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 1 - 사도의 습격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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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통 만화책을 발간하는 것에서 판권이 출판사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본사에 있는 경우가 아주 드문 느낌이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판권을 만화책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출판사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출판에 대한 권리를 만화잡지사가 아니라 가이낙스에서 직접 판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안노 히데아키를 비롯하여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직접 그리고 만드는 사다모토 요시유키 작가의 경우를 생각하면, 판권이나 작가 모두 가이낙스 소속이란 점이 특이한 점이다.  

 

가이낙스 작품 중에 다른 만화책이나 라이트노벨을 토대로 만든 것은 있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가이낙스에서 만화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게임 각종 상품에서 판권을 지닌 것을 생각하면 가이낙스의 콘텐츠상품은 다른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와 비슷한 판권을 행사하는 업체로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있을 것이다. 작가가 직접 애니메이션 회사에 소속되어 전반적으로 그 회사에서 중책을 만드는 일은 많지만, 사다모토 요시유키처럼 그렇게 만화, 애니메이션에 모두 관여하는 만화작가 및 애니메이터들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만화로 보는 것과 TV애니메이션으로 보는 것과 심지어 신극장판으로 보는 것에서 각각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제1권에 소개되어 있는 것처럼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입장에서 작품을 전개한다. 본래의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이유는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와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바라보는 작품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애니메이션을 보면, 신지가 제3도쿄시로 올 때 분명히 레이가 신기루처럼 보였으나, 만화책에선 그렇게 나오지 않고, 처음 에바에 탑승할 때도  TVA에서는 레이가 괴로워하는 것과 동일하나, 초호기가 아무런 이유 없이 작동하는 것이 나오지 않았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레이가 신기루처럼 나오는 것 대신하여 초호기에 레이가 탑승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레이가 초호기를 탑승해도 신지가 처음 탑승하는 것에 비하면 싱크로가 떨어지는 것이 에바 초호기가 역시 이카리 유이의 몸과 마음이 담겨진 것을 복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신지가 처음 탑승하는 모습에서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다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의 신지와 유사한 느낌이 든다. 물론 비슷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으나, 신지가 레이의 모습을 보고 바로 탑승한 것과 TVA처럼 전혀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에바 초호기를 타고 제3사도를 격퇴하여 미사토가 신지를 데리고 언덕에 가서 저녁에 제3도쿄시의 전경을 보여줄 때, 신지는 미사토의 위로를 받는 것으로 나오나, 만화책에서는 눈물을 흘린다. 수고했어 내지 잘 했어 라는 칭찬을 미사토보단 아버지 이카리 사령관에게 받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카리 사령관도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본래 애니메이션에서는 이카리 사령관의 안경 너머의 눈빛이 잘 나오지 않으나, 생각보다 만화책에선 이카리 사령관의 눈모양이 자주 나온다.

 

사람과 사람 간의 단절된 세계는 만화책보단 애니메이션이 더욱 강조된 셈이고, 그것은 만화작가인 사다모토 요시유키와 애니메이터 안노 히데아키가 바라보는 작품을 통한 자기 주관이 다르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나리오가 TVA와 비슷해도 주인공이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다르고, 상황이나 대처 역시 다를 것이다. 물론 1권부터 초호기를 탄 레이에서 레이가 초호기와 이중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것보다 차라리 동화할 수 있다는 것으로 추후에 나온 시리즈를 읽으면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레이의 존재, 그 레이를 있게 한 원초적인 존재인 이카리 유이가 초호기에 숨 쉬는 것을 너무 빨리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본래 애니메이션에서는 신지가 초호기를 타고 제3사도를 무찌르기 전에 사도의 공격으로 인해 의식을 잃었고, 그 덕분에 에바 초호기는 폭주를 일으켜 이길 수 있었다. 이때 불안해하던 신지에게 누가 안으려 하는데, 왠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이 신지를 안으려 했고, 신지는 그 두려움으로 비명을 지른다.

 

신지가 병원에 누워 일어났을 때 무의식적으로 기억하던 것을 떠올리기 시작하는데, 그때 에바 초호기가 눈을 떠서 신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류 최후의 보류 인조인간 에반게리온 초호기, 신지를 태울 때부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그 행동은 NERV 요원들을 모두 행운과 더불어 공포를 안겨준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1권을 다 읽은 후에 후기부분을 읽어보면 주인공 선택지를 신지만이 아니라 미사토로 추가한다.

 

신지는 인간관계가 싫어서 모두를 거부하고, 미사토는 인간관계의 깊이 있는 것을 싫어하여 여러 사람들을 이래저래 넓혀가는 타입이다. 모두 외로움을 가지면서 그 외로움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세상과의 벽을 처음부터 쌓은 신지, 세상과의 벽을 쌓았으면서도 쌓지 않은 척하는 미사토, 2사람을 보면 왜 그런가 하나 사실 우리의 모습이다. 아무 이유 없이 에바에 타라고 하는 신지, 그곳에서 제대로 말도 하지 않고 두려움만 떤 채 괴로워하던 신지, 그 나약한 소년은 바로 우리의 주인공이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하지도 강하지도 혹은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실에서 나약하고 무능하고 때로는 절망에 흔들리기도 한다. 영웅을 기대하는 심리에서 오히려 영웅이 아닌 나약한 인간들을 두고 처음에 신지에 대해 많은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지만, 그 누구라도 그 자리에 앉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서적인 시학(詩學, poetics)을 읽으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말이다. 역사는 어느 한 개인에게 일어난 하나의 선택지로 끝이 나나, 시라는 어느 가정의 이야기는 결국 나에게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하나의 개연성 내지 필연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세컨드 임팩트를 맞아 인조병기를 타고 미지의 생물과 싸우는 일들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지처럼 어려운 인간과 사회생활은 말 그대로 일어나는 일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사도를 대항하여 인류가 사투를 벌이나 사투를 벌인 후에나 그 중간에도 인간과 인간은 갈등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나약하다. 그 나약함을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나약한 인간임을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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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자유주의
존 롤스 지음, 장동진 옮김 / 동명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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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유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언제나 투쟁과 투쟁의 공간에서 반복된 갈등으로 살아왔다. 아니 살아가는 것보다 죽어가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기에 그렇다. 인간의 가장 최고의 적은 무엇일까? 고대 선사시대부터 보면 추위, 질병, 맹수, 재해 등이나 결국 인간 그 자신이 인간 최고의 적이 되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지식인으로 유명한 롤랑부인은 단두대 아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자유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파괴하는지에 대한 탄식과 함께 사라졌다.

 

 

자유라는 것은 인간에게 필수불가결적인 존재이면서도 한편으로 과연 이 자유라는 것은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은 것인지 항상 난해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이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상으로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한다. 하지만 막상 자유민주주의국가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려고 하는 적은 없는 것 같다. 헌법이란 인간 그 누구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제도다. 그 평등한 제도가 바탕이 되어야 자유라는 것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이란 상대적인 관념에서 서로 간에 대한 개념조차 되어있지 않은 한국의 비극적 현실에서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는다는 것은 자유주의 철학에 대해 깊은 이해와 앞으로 우리가 나갈 길을 열어주는 것과 같다. 사실 롤즈의 <정의론>, <공정으로서의 정의>, <만민법>에서 <정치적 자유주의>는 롤즈의 정치철학에서 <정의론>과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대한 보충적인 서적이며, <만민법>은 롤즈가 최후에 내놓은 저서로 앞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서가 되어 준다.

 

 

20세기 최고 위대한 정치철학자 중에 하나이며, 자유주의철학에서 우리나라만 아니라 선진국의 민주주의에도 큰 영향을 끼친 롤즈의 정치철학은 이른바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정치적 가치와 판단력을 제시한다. 롤즈의 철학이 자유주의철학이라고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와는 다르다. 롤즈의 철학은 칸트의 구성주의적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존 스튜어트 밀과 토크빌의 자유주의 철학을 계승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민주주의 국가이든 혹은 어느 사회이든 3가지 분류의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선동가, 하나는 시민, 나머지는 군중이다.

 

 

롤즈의 <만민법>에서는 현실적 가능한 유토피아적 자유주의 철학을 제시하는데, 그 요건이 바로 이성적인 합의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구성주의적 자유주의다. 그것은 합리적인 것을 넘어 합당하기를 권장한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합리주의(合理主義)라는 것은 합리(合理)라는 것을 통해 사람들의 의견을 모우나 그것은 이치에 대한 정당한 요건보다는 합리(合利)적인 상황으로 이어진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이라는 것은 공적인 이성이 요구되는데 반해, 실제 우리가 보이는 사회적 현상은 공적인 이성으로 대하기보다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성이 추구된다.

 

 

그것은 공공선에 대하여 무관심하나, 어느 정책이나 정치적 입장이 어느 불특정 대다수 개인에게 이익을 주는 경우라면 합리(合利)가 합리(合理)로 변질되는 경우다. 이들의 특성은 어느 사회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공동선을 추구하기보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다. 이런 무지의 장막에 놓인 자들은 대다수의 군중으로 이루어질 경우가 많으므로, 이들이 가지는 정치적 권위가 막대하게 작용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게다가 자유주의적인 요건에서 자유라는 것은 인간에게 최소한의 생존요건이 갖추어야 하기에 사회적 약자인 최소 수혜자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와 그들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균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롤즈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그런 기회의 평등이란 점이다. 인간에게 부여된 불평등한 상황은 인정하나,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자유라는 것은 양심에 대한 자유와 더불어 그 양심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기 위한 결사의 자유를 중요시 했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자유와 양심은 매우 중요하다고 제시한다. 사실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다보면 분명 칸트의 구성주의적 자유주의, 즉 실천이성에 의한 자유주의가 중시되는 것은 분명하나, 개인적으로 읽으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적인 요소가 방대하다.

 

 

일단 여기서 헌법에 대한 기본적인 의견과 더불어 헌법에 의해 헌법학자들이 자유주의에 대해 이끌기보단 그 헌법에 의해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야 하는 점이다. 프랑스대혁명과 더불어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인권선언문의 작성에 큰 바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2가지는 세계의 헌법의 주축이 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와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장을 보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바로 민주주의 서막을 알리는 거소가 같을 것이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현상과 당시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사회적 현상은 무척이나 다르지만, 그 근본적인 이념적 함의는 매우 흡사하다. 그 안에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추가되고 보완될 뿐이다. 프랑스대혁명에서 삼부회의 요인이며, 국민공회에서 위원을 맡던 로베스피에르도 자유에 대한 파리 시민에 대한 연설에서도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내용과 흡사한 면이 많다. 자신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하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은 자유라는 것은 자신만 가지고 있어서 실현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공유로 통해 비로소 자유로움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철학과 정치사상에서 항상 그것은 역사적인 흐름과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롤즈가 추구하는 구성주의적 자유주의란 바로 현실적인 상황에 맞추어 시민들 간의 합당한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자유를 넓히기 위해 타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인 공적재산이 늘어가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적인 요소를 반영했는데, 사실 자유론을 읽어도 밀의 철학에선 그 사회의 악적인 요소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도 중요하나 그런 악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요건도 역시 중요하다고 했다.

 

 

공적으로 사회적 자유를 위해서는 바로 시민들의 합당한 공동선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그 시민들이 이룩해야할 사회적 정의에서 포괄적인 자유는 회피해야 하면 다원주의적인 요소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상의 자유가 필요하며, 그것이 곧 양심과 언론의 자유로 이어진다. 자유주의에서는 이성이 없으면 자유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저런 이유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위대한 지침서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회계약론>을 읽은 사람은 일부 지식인에 한정되어 있었다. 누구에게나 호칭을 시민이라고 해도 실제 시민의식이 없는 시민은 군중에 불과한 것이 한계성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프랑스대혁명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흑인노예 문제도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헌법적 명제에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것이 하나의 정당한 도덕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미국 역사에서도 자유주의 철학이 빗나가게 된 것이다. 이런 노예해방운동과 관련하여 약간 <정의론>과 비교해보면 종교에 대한 부분이 관대해진 것 같다. 가령 종교가 하나의 정치사회적인 입장을 견고하게 나오는 것은 부당하나,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노예해방운동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경우 그는 분명 기독교에서 종교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그가 진실로 하던 일은 인류평화를 위한 흑인노예해방운동이었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대학이나 교회와 같은 기관들이 정치적인 특권을 누리려하는 것은 반대하나 이들이 정치적인 활동에서 올바른 가치를 제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사회적으로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종교 인사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이념을 강조하기보단 보편적인 인간애를 몸소 실천하는 사례를 종종 보게 된다. 이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로운 시민들에 대해 큰 가르침이 된다. 사실 구성주의적 자유주의에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보다는 <실천이성비판>적인 요소를 더 많이 반영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회는 같지 않고 저마다의 특유한 문화와 정치적 현상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정치라는 것은 그 정치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한 사회에서 어느 한 개인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든 혹은 가지지 않더라도 정치는 그 개인에 대하여 항상 영향을 미친다. 정치라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피할 수도 없으며 피해 갈 수도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나 자유로우나 정치적 사회가 존재하기에 속박에서 피해갈 수 없다는 루소의 사상처럼, 인간이 속박 안에서 최대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결국 이성으로 통한 정치적 자유주의를 실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쉬운 일이 아니다. 무지의 장막처럼 인간은 공적인 이성으로 통해 정의를 실천하기보단 개인적 이익을 위해 실천하려 하며, 특히 이익을 추구하는 대다수의 개인이 존재할 경우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실천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어느 특정 세력이 자신에게 유리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이 될 경우, 누군가는 그만큼의 손실을 입어야 하는 점이다. 자유주의 철학은 자신의 권리를 추구하는 것만큼 타인의 권리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주의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 없는 자유주의만큼 자유를 위협하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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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의 120일 동서문화사 월드북 201
사드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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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더러움과 욕망에서 얼마나 그 잔인함과 냉혹함 그리고 그 처절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인가? 마르키 드 사드가 저술한 <소돔의 120>은 그야 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가 살던 시절은 프랑스혁명 전후가 있던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이었다. 그의 저서가 얼마나 강력한 임팩트를 주었을까? 흔히 우리가 사디스트 내지 마조히스트라는 SM적인 변태성욕에 대한 어원이 바로 사드에서 나왔다.

 

사드에서 사디즘이란 그가 진짜 사디즘적인 가학적 성욕을 즐긴 것보다는 <소돔의 120>이란 소설에서 나온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가학적인 이야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드에 대한 나의 관심은 예전에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감독인 기 드보르의 영화를 찾다가 우연히 <사드를 위한 절규함>이란 작품을 알면서 그 영화에서 사드가 과연 누구이기에 절규한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으로 시작했다.

 

사드는 사디즘의 어원이란 점과 그가 프랑스 후작이란 것과 상당히 문학적 지식이 높은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소돔의 120>에서도 프랑스대혁명 이전의 당대 최고의 명사는 장 자크 루소 외에 볼테르와 디드로가 있었다. 사드의 가까운 친척 중에 볼테르와 가까운 사이가 있다는 점으로 사드에겐 늘 지식인들과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먼저 기 드보르의 <사드를 위한 절규함>이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겠으나, 그 영화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본다면 바로 욕과 탄식이 나올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화면인 검은색에 목소리가 총 5번이 나오고,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전위적인 예술에서 전위를 기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무참하게 파괴함에 따라 이것이야 말로 전위적인 예술을 넘어 예술을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드를 위한 절규가 기 드보르에게 무엇인가와 더불어 그 사드가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까지 영화를 만들어 관객에 충격을 주는가이다.

 

그것은 사드가 저술한 <소돔의 120>이 주는 충격에서 아방가르드가 기존의 담론을 무시하고 큰 충격을 주는 것이므로 사드를 위한 절규란 사드라는 인물이 당대 내지 후세 사람들에게 준 충격을 그대로 자신도 주겠다는 하나의 오마주일 수 있겠다. 하지만 상황주의자인 기 드보르에게 사드의 존재로서 스펙타클로 만드는 게 아니라 사드로서 스펙타클을 전도해 버리는 것이다. 사드라는 인물이 저술한 <소돔의 120>이란 작품은 감옥에서 저술하고 나온 지 230년이 지나도 충분하게 쇼크를 줄 수 있다.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고통과 그 고통으로 통한 욕망충족과 더 큰 폭력적인 행위는 그야말로 소설이라도 과연 이렇게까지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비록 이것이 소설일지언정 그 소설에서 담긴 의미에서 충분히 당대 사회의 개연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금욕주의적인 가톨릭교회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큰 영향을 주고 있을 때에 과연 그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했는가에 대한 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을 읽다보면 많은 프랑스 파리 중심의 귀족들이 타락한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프랑스는 로코코, 탐미적인 요소를 추구했기에 귀족과 그 귀족의 아내는 애인을 두고 있었다는 점과 애인이 없으면 사교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회였다. 루소가 처음으로 성적행위를 한 것은 그에게 어머니와 같은 봐랑 부인이었고, 그가 봐랑 부인과 성적행위를 한 후에 근친상간을 한 것보다 더욱 더러운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런 후에 프랑스 어느 귀족부인과 여행을 가다가 그 귀족부인과 은밀한 정사를 루소는 나눈다. 문제는 루소의 당시 행적이 불량해보여도 루소의 경우 매우 미미한 수준이란 점이다.

 

사드가 즐긴 성적인 파란은 왜 문제가 되었을까? 스스럼없이 은밀히 즐기지 않고, 마구 드러낸 점이다. 자신의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는 것이 마치 당연한 사회라도, 자신의 인척 관계에 있는 처제와 바람난 것은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이고, 그 외에 집단적 성행위도 즐긴 것 역시 엄청난 파문이었다. 하지만 <소돔의 120>에선 사드의 행위는 그마나 애교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선 근친상간만이 아니라 살인까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뒤클로라는 늙은 창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부터 다른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11월에서 2월까지 흐르면 상당히 잔인해진다.

 

처음에는 단순히 성폭행 내지 다소 변태적인 성행위가 보인 듯했다. 억지로 끌려오거나 혹은 생활고에 의해서나 또는 속아서 오는 경우다. 불쌍하게 끌려온 여성들은 대부분은 어린 소녀라 10대 중반이 제일 많았고, 심지어는 10살 채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도 있었다. 이들에게 가한 성폭행과 성추행은 결국 이들로 하여금 타락하게 되어 점점 추악하고 난폭한 인간으로 되게 만들었다. 뒤클로는 자신을 키워준 포주를 배신하고, 그녀의 숨겨진 아들에게 전해줄 유산을 챙기고, 그 가족을 파멸시킨다.

 

등장하는 대부분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주변에 모든 것을 파괴한다. 자연계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문제는 자연적 욕망은 그 욕망을 발휘하는 자만이 아니라 발휘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연적 존재다. 어느 하나가 원하면 다른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하는 부당한 처사가 내리진다. 처음에는 어린 소녀에게 자위하여 정액을 쏟는 성직자와 벼슬아치들을 보면 사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사회에 지도계층의 부정과 타락이 넘치고 넘친 것을 알 수 있다. 수도원장이나 혹은 유명한 백작이 와서 변태적 성행위를 즐기는 것을 지나, 분뇨를 먹거나 먹이거나, 심지어 분뇨를 몸에 바르고 쾌락을 느낀다.

 

쾌락의 조건에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고통의 부분이다. 옛날 일본에서 실화로 일어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감각의 제국>에서 남자는 성욕을 느끼는 것과 여자가 느끼는 조건으로 여자가 남자 위에서 성행위를 할 때 남자의 목을 조르는 것이다. 남자는 결국 교사당해 죽었고,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성기를 칼로 벤 일이 있었다. 성욕이 단순히 성적인 행위가 아니라 폭력을 주고받고 함으로서 쾌락을 느끼는 점이다. 법원장은 죄 없는 사람에게 사형집행을 내린 후에 그 사형집행이 일어나는 순간에 사정한다는 것에서 그의 성적욕망은 성적인 도착증을 지나 하나의 파괴본능에 가깝다.

 

등장인물들은 인간의 생명을 영위하거나 보존하는 것보다 그것을 파괴하는 것을 쾌락을 삼는다. 심지어 자신의 성기를 여성의 성기보단 항문으로 하거나 또는 남성의 항문 내지, 다른 남성이 자신의 항문에 삽입하는 것에 욕망에 대한 쾌락을 느낀다. 이들에 대해서 보면 에로스적인 삶의 욕망보단 오직 타나토스적인 죽음의 욕망만 존재한다.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무차별적인 성욕을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만족함은 오로지 자연계는 생성보다는 파괴로서 이어지는 셈이다.

 

자신들의 노리개로 만든 여자가 임신하자 그 여자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살인한 점은 사드의 <소돔의 120>은 인간의 생명을 만드는 것에 대한 삶의 욕망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욕망이었다. 그런다고 하여 사드 그 자체는 그런 행위를 즐기거나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상상조차 불허하는 가학적인 소설은 감옥에 갇힌 37일 동안 만든 점이다. 그러나 그 막대한 분량과 도저히 일반인들이 만들 수 없는 이야기들은 인간의 내면에 살아있는 폭력성에 대해 거울로서 비추게 한다.

 

뒤클로의 이야기에서 성적으로나 또는 가학적인 이야기에서 나 역시 흥분에 빠진 점을 보고, 순간 나 역시 이들이 벌이는 잔혹한 도락행위에 어느 정도 욕망하고 있음을 느꼈다. 사드의 소설은 인간이 거부하는 것을 적고 있다. 하지만 그 거부하는 사람도 결국 마음 속 깊은 곳에 잔인하고 음란한 욕망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해도 가학적인 폭력성은 정말 끔찍했다. 마지막에 음부에 쥐를 넣거나 혹은 입안에 쥐를 넣어 바늘로 꿰맨 후에 이야기는 참으로 끔찍하다. 쥐가 나가지 못하자 사람의 장을 파먹어 결국 사람이 죽는 것이다.

 

또는 미치광이 살인자가 사람을 무척이나 잔인하게 죽이자 결국 사정함은 우리 인간이 숨겨진 본서이란 매우 잔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거부하나, 인간의 광기가 하나이 정의로 바뀌는 순간 벌여지는 폭력은 <소돔의 120>을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단순히 성적인 욕망은 성적쾌락만이 아니고, 오히려 폭력이란 인간의 본성을 성적인 부분으로 연결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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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0 - 학교축제의 라이언 하트,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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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에서 10권은 매우 결정적으로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것은 이때까지 항상 방황만 하다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효도가 결심하게 된 것이다. 리아스, 효도는 1권부터 리아스에 대한 절대적 갈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진짜 그 시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는 너무 생생하다. 그리고 그 생생한은 10권에서도 나온다.

 

“붉은 스트로베리 블로드보다 더욱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 그래, 그 사람의 아름답고 붉은 머리카락은, 언제나 내 곁에 있던.”

 

인간에게 죽음의 순간이 오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이 있다. 출혈로 인해 의식이 사라져가 눈앞이 컴컴하여 더 이상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끼지도 못해도 인간의 상상은 느끼는 것일까? 하이스쿨 1권에서 타천사 레이나레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효도는 최초로 생긴 여자 친구가 자신을 배신한 것에서 깊은 배신감과 더불어 공포에 시달린다. 죽어가는 와중에 자신이 흘린 새빨간 피를 보면서 자기가 항상 동경하던 리아스 선배를 연상한다. 죽음 앞에 있는 인간의 소원이란 너무나 강렬했을까? 애니메이션 하이스쿨 DXD를 볼 때 효도의 죽음과 더불어 소환된 리아스의 모습은 매우 강렬했다.

 

부장 리아스, 그녀를 위해서라면 왼쪽 팔만 아니라 몸 전체가 적룡제에게 바쳐져도 아무렇지 않게 보는 효도를 보면서 매우 인상 깊었다. 하지만 악마이든 혹은 인간사회이든 어느 무리에서 최고 지휘체계와 더불어 하위체계가 분류된다. 리아스는 멸살공주로 불리는 귀족 가문의 영애이자 차기당주이고, 효도는 이제 막 환생한 악마이다. 환생악마로도 능력이 부족한 효도가 리아스만 바라보고 온 몸에 상처투성이가 되고, 피를 토하고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효도는 리아스만 지키려 했다.

 

그런다고 리아스는 가시덩굴로 이루어진 성에 있는 아련한 공주처럼 있지 않는다. 강한 의지와 타인을 불허하는 노력, 그 모든 것이 효도에게 큰 힘이 되고, 존경을 받으며 지내온다. 효도는 그래서 리아스를 여자로서 좋아하나, 그런 벽이 있기에 좋아하는 표현을 할 수 없었다. 효도에게 그런 벽은 레이나레라는 타천사가 유마라는 소녀로 활동할 때의 그 배신감과 충격과 두려움이었다. 아케노 선배, 친구 아시아, 코네코 후배에게 위로 받을 때 효도의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죽어주지 않으래? 더러운 하급악마가 함부로 내게 말을 걸어주지 말아주겠어? 아하하하! 그래! 너무나도 정석적인 데이트였지! 덕분에 굉장히 시시했어!, 빌어먹을 꼬맹이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잇세군! 제발 살려줘! 이 악마가 날 죽이려고 해! 나 널 정말 좋아해! 사랑해! 그러니까 함께 이 악마를 쓰러뜨리자!”

 

유마가 하던 말과 더불어 효도가 그동안 자기 마음에 새겨진 깊은 상처를 감정으로 드러낸다. 사실 리아스는 효도에게 이름으로 불러주길 원했다. 부장이나 선배라는 것은 결국 사회적인 존재, 남녀로서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효도를 향해 리아스가 적극적으로 대쉬해도 겁먹은 효도의 눈빛과 리아스를 향해 부장! 이라고 부르던 것은 결국 리아스가 여자로서 모욕감을 맛보게 했다. 아마 10권에서 효도의 결심이 중요한 이유는 리아스란 악마는 효도에게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원한 저 공간 너머의 존재라고 여긴 것을 스스로 극복한 것이다.

 

그 동기는 리아스의 사촌인 사이라오그의 싸움이었다. 사자와 적룡제, 누가 더 강하고 끈기가 있는가? 이때까지 투쟁의식이 강하지 않은 효도는 사이라오그의 진정한 남자다운에 자신의 마초적인 의식을 일깨운다. 사이라오그의 폰인 사자갑옷을 착용하지 않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도 온 힘을 다해 그 강적을 맞선다. 사이라오그와 싸우면서 효도는 이때까지 사이라오그와 그 팀원에 의해 무참히 쓰러져간 동료를 보면서 더욱 더 투쟁의식을 일깨운다. 여자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음흉한 생각하던 효도가 키바와 아케노 선배 등이 퇴장하자 상대방의 퀸을 정말로 죽이려 했다.

 

그 퀸이 효도의 공격을 당하기 전에 미리 사이라오그의 퇴장 명령으로 생명을 건졌으나 효도의 분노는 이미 하늘을 무너뜨릴 정도였다. 인간이란 자신의 이익이 손해 봐서 분노하는 것보단 진짜 좋아하는 친구나 동료들의 고통을 보는 순간 분노하는 것이 더 무섭다. 타인의 고통에 의해 폭발하는 분노란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광기와 폭력의 질주로 몰아넣는다. 자기의 목숨을 갉아먹는 저그노트 드라이브, 무한한 생명인 악마에게 그것은 100분의 1정도의 생명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위험하다. 이때까지 적룡제는 모두 저그노트 드라이브로 몸과 영혼이 파괴되었다.

 

게다가 육체는 소멸해도 영혼이라 불릴 그 사념들은 영원히 적룡제의 수갑에 깊이 잠들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자신마저 죽음으로 향하는 절대적 타나토스였다. 그런 타나토스의 세계를 효도가 무의식적으로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리아스에 대한 효도의 갈등이었다. 효도의 삶은 모든 것이 리아스로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음흉하고 변태 같아도 찌찌드레곤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의 영웅이 된 효도에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민하게 만드는 그 큰 벽 아래 있었다.

 

찌찌드레곤에서 어떻게 새롭게 리아스와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리아스에 대한 포기로 죽음과 공포의 광기에 취해 몸과 마음을 파편처럼 흩날리는 것인가? 자신의 인생 앞에서 효도가 사이라오그의 주먹에 의식을 잃고, 그 와중에 스스로 포효하며 리아스를 좋아한다고 선언할 때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주먹을 사이라오그에게 휘두른다. 서로 주먹을 주고받고 하면서 사이라오그는 기절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진정으로 마음으로 주고받을 남자가 생긴 것이다. 효도의 그 솔직함, 그 솔직함은 결국 리아스와 같이 있고 싶다는 강렬한 자기에 대한 권력의지다.

 

작가인 이시부미 이치에이는 니체의 서적을 많이 읽었을까? 그의 이야기를 보면 마치 에로스로 가득한 효도가 미친 듯이 광기에 취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선악의 피안에 누가 나쁜지 착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인간이 서로 싸우는 이유는 그 상대방과 친해질 수 있는지 없는지 알기 위해서다. 사이라오그와의 싸움에서 효도는 진정 사이라오그가 친구가 될 수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효도는 리아스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리아스로 통해 무엇을 하는가이다. 친구인 사지는 회장 시트리와 더불어 악마사회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원한다.

 

물론 군주가 여러 가지라는 점에서 귀족정이 강한 악마사회이나, 마음만 먹고 열심히 하면 출세할 수 있는 입헌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이었다. 효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리아스와 같이 하는 것이다. 리아스는 레이팅게임 1위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것은 목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리아스만 바라보는 효도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각인하고, 그 꿈을 위해 싸움에 뛰어든다. 목표의식이 생기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인간이든 그 무엇이든 삶의 목표가 없다는 것은 슬픈 것이다.

 

찌찌드레곤 특별쇼에서 악마세계의 어린애들이 모두 참석했는데, 어느 아이가 표를 구하지 못하여 울고 있을 때 효도는 특별히 그 아이에 대해 배려를 해준다. 물론 이것은 공평하지 않은 처사이나 한편으로 합당한 처사였다. 누구에게 꿈을 가질 권리와 그 꿈을 지킬 권리를 효도는 주었다. 리아스는 그런 효도의 친절함과 강함이 좋아했다. 니체가 말한 그 강한 인간이란 상대방에게 동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 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내뱉는 효도는 그 자신을 모두 내던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악마가 주변 테러리스트에게 공격당할 때 학교만 아니라 마을이 모두 없어진다는 이유로 필사적으로 싸운다.

 

그에게 악마라는 것은 이기적이고 타인에게 배려할 이유가 없으나 오히려 배려를 하게 된다. 효도는 그렇게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의지만 하던 그가 이제는 동료들이 그에게 의지하고, 아이들도 의지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만이나 교만으로 가기보단 그들과 함께 나아가기를 바란다. 어쩌면 효도의 꿈은 리아스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그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한 발판일지 모른다. 그레모리가문은 하급악마에게 매우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마치 가족처럼, 가족처럼 하급악마라도 서로 잘 대해주려는 리아스의 이상적인 세계를 위해 효도를 불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싸워서 죽이고 없애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삶에 대한 절대적 신념이 결국 그를 강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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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문학으로서 삶
알렉산더 네하마스 지음, 김종갑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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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니체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이미 한 번 니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니체, 문학으로서 삶>, 생각보단 니체에 대한 서적에서 꽤 유명한 서적이고 많이 읽어진 도서다. 한국에 번역이 늦어 이제 출간된 점에서 뭔가 의아한 부분이다. 한국에도 니체학회가 있을 정도로 니체의 학문적 역량은 막강한 것이다. 예전에 질 들뢰즈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저술한 <들뢰즈의 니체>를 읽어보면서 니체의 입문서로 좋다고 하나, 솔직한 생각으로 질 들뢰즈가 저술한 니체 입문서보단 알렉산더 네하마스가 저술한 도서가 더 좋은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이 철학자가 니체를 꾸준히 연구한 점이고, 미국에서 니체와 더불어 실존주의 철학을 오랫동안 강의한 것이다. 따라서 니체를 읽어본 사람이나 혹은 읽어 보려한 사람에게 제법 친절한 도서라는 점이다. 사실 니체의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전에 읽어본 <비극의 탄생>에서 2번 읽어도 난해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니체는 기존의 모든 형이상학을 뒤집기 위해 반형이상학적으로 글을 적었다. 하지만 형이상학을 전도시키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역사의 흔적에서 역대 폭군에 의해 고통 받는 민중이 있다면 그들은 부당한 폭력에 반항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혁명의 방법에서 폭력이란 수단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폭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고, 이와 다르게 사랑을 잃으면 새로운 사랑이 필요하다. 오히려 필요 없다는 것이 더 필요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 살아온 역사적 흐름이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의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기독교를 엄청 비판하지 않았던가? 니체는 오히려 기독교 본질적 요소를 원했을지 모른다.

 

더러움 권력과 물욕에 사로잡힌 독거미 같은 당시 교회권력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신이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신의 죽음으로서 그 믿음이란 절대적 광기를 폭로함으로서 신의 존재성을 부정했는지 모른다.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기 위해서는 신은 죽어야 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이 신으로 되어야할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에선 인간과 신은 이분법적 존재보다는 그 중간적 존재를 인정했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자연 속에 하나로서 운명적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특히 소포클레스의 비극전집을 보면 비극 속에서 우리 주인공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것을 보는 코러스들의 합창, 합창의 엄중한 화음은 그들의 운명적 비극을 위로하고 찬양한다. 희극으로 끝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야 하나 비극으로 되면 다시금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극은 영원한 것이다. 그 영원한 노래 속에는 그 본질적 특성인 항상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 자체가 불변하기에 영원한 것이다. 니체의 사상에 그렇게 원근법적인 시야를 가진다. 절대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다가 그의 이야기를 비틀어버린다. 마치 이때까지 따라온 독자를 우롱하듯이 말이다.

 

니체의 문체는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고 장엄하다 못해 하나의 노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노래를 계속 따라가면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영원히 미로를 헤매고 있는 독자에게 차라투스트라는 그 길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내 멀리 내쫓으려 한다. 니체는 인간 그 스스로가 주인이어야 한다고 했다. 권력이란 바로 자신을 지배하는 인간이다. 니체는 귀족을 추구한 것은 아니나 귀족주의를 추구했다. 인간 스스로 고귀하고 위대해지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위대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을 예술적인 삶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마치 군대행렬의 기수가 되는 전위부대처럼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생각하면 니체의 사고는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것은 예술이란 것은 그 자체로 다른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과 그 구별이 결국 개인에 대한 자아의 형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에 대한 자유로운 의지다. 타인을 지배하거나 지배받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서 말이다. 그런 니체의 서적들을 여기저기 찾아보면 겹치거나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 니체의 도서는 <비극의 탄생>, <도덕의 계보>, <반사회적 고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도이다.

 

<니체, 문학으로서 삶>을 읽다보면 저자는 니체의 많은 서적을 골고루 참조하여 니체가 가진 공통적인 철학을 제시한다. 그러나 철학이기보단 문학이란 것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하나의 서사이기보단 그 서사로서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서사에는 모든 것을 좌충우돌하는 아이러니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그토록 흔드는 이유는 인간에게 절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거부하기에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니체는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한 번 싸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친해질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대할 수 있기에 그 사람의 본질적 요소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화를 내고 웃고 울고 때로는 냉정하고, 다양한 모습에서 인간을 알 수 있다. 니체의 문체는 바로 그런 다양한 감정들이 숨어 있다. 마치 웅장한 연설가가 하늘 아래서 내려 보는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 같다. 누가 선위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한번 니체의 책을 읽어볼 사람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갈지 혹은 어떤 식으로 자기가 읽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제법 매력 있을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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