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명주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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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는 이름은 어디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우연히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푸른 문학이라고 하여 일본 근대문학가들의 작품을 인용하여 만든 작품이 있었다. 그때 말로만 들었던 나츠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달려라 멜로스>를 필두로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이란 작품을 먼저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추후에 그것에 관계되는 소설을 직접 찾아 보았다. 여기서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어보았고, 소설에서 보던 것과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것에 대해 서로 비교하면서 문자서사와 영상서사가 가진 독특한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푸른 문학 시리즈에서 지옥변이란 단편짜리 작품으로 보았다.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다자이 오사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과 이번에 읽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가 나츠메 소세키에게 인정을 받은 문학가란 점에서도 놀라웠다. 가라타니 고진이란 인물이 근대사회에서 벗어나 현대사회로 들어가는 일본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대표적인 문화평론가라면 그 이전에는 나츠메 소세키인 것으로 알았다. 나츠메 소세키는 문학가로서 혹은 문학비평가로서 큰 역량을 보여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나츠메 소세키가 인정한 작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란 인물이 그것도 애니메이션 지옥변으로 알았던 작가를 책으로 본다는 것은 매우 신기했다. 이번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푸른 문학의 <지옥변>이란 작품을 보았다. 조금 내용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히데요시라는 화가가 등장하고, 마지막에 그의 딸이 불에 타서 죽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작품을 원작대로 만든 게 아니라 각본과정에서 조금 수정한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거의 작품과 비슷하게 만든 것은 <인간실격> 정도이고,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은 아주 극히 일부분만 작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어째든 <지옥변>을 보면서 느낀 것은 애니메이션에 화가가 매우 예술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대해 화려한 것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진실을 보고 있었다. 군주는 매우 아름다운 것만 좋아하여 그 아름다운 것에 방해하거나 자신의 미학에 어울리지 않으면 모두 제거하는 인간이었다. 흔히 말하여 폭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폭군이라고 보기에 너무 신화적인 존재였다. 우리는 그 군주에 대해 책임을 돌리나 그 군주 자체가 우리 인간의 대표적인 관념적 한계성을 형이하학적으로 이미지로 생성된 것이다. 자신이 즐기는 배에서 어부들의 배가 부딪히니 그들을 그대로 참수하는 것도 모자라, 마을에 병이 들자 모두 불태워 죽인다.

 

심지어 병사는 자신의 아이가 집에 갇혀 있어서 구해달란 한 중년의 여성을 칼로 베어댄다.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분명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은 필연지사다. 소설에선 그런 애니메이션 설정과 달리 군주는 매우 훌륭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는데, 혹은 아니라면 그의 인품을 두고 역설적으로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히데요시에게 딸이 하나 있으니 그녀는 매우 수려한 용모에 인성도 훌륭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큰 인망을 얻고 있다. 단지 아쉬운 점은 아버지 히데요시와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성의 시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버지 히데요시나 딸 모두 성에서 나와 같이 살기를 바란 것이다.

 

그녀는 효심도 지극한 것도 중요했다. 히데요시는 성격이 괴팍한 만큼 외모도 좋지 않았다. 진짜 원숭이를 성에 들여 그 원숭이의 이름을 히데요시라고 붙여 그 화가인 히데요시를 놀리려고 한 것이 그 성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딸이 원숭이를 길들이고, 게다가 주변에 칭찬받을 만큼 잘 지내게 하자 이제 원숭이는 히데요시가 아니라 원숭이 히데가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마음이 있다면 불온한 마음도 있다. 서술자인 나라는 존재가 밤에 성안을 도는데, 원숭이 히데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게다가 히데요시의 딸이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본 것이다. 군주가 히데요시의 딸을 범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임금은 히데요시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그림 지옥변을 그리라고 하는 명을 내린다. 히데요시는 그 명을 받들어 제자들에게 온갖 해괴한 요구를 하고, 그 모습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 그것도 모자라 사용하지 않은 성에 귀족의 여성이 불타는 모습을 그리고 싶다고 한다. 그 그림에서 아름다운 피부가 불에 타서 뼈만 남고, 아름다운 그 검은 머리는 붉은 화염으로 휘날리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왕은 이상한 생각하는지 당일 그 요구를 받아들여 지옥변의 정점을 찍게 한다. 히데요시는 알고 있었을까? 딸이 비참하게 불에 타 죽는데, 그걸 보고 그림을 그린다. 겉으론 예술에 미쳐버린 화가처럼 보이나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 그는 자살을 한다.

 

지옥 중에서 가장 끔직한 업화의 염화가 타오른 장면을 그리고 싶은 요시히데, 그는 그 지옥 같은 모습만큼은 보지 못하여 그릴 수가 없으나, 그 장면을 그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옥이란 정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나, 작품을 보면 지옥은 이미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옥변이란 그림은 지옥을 그린 그림이니 지옥을 안 보고 그린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나 이미 지옥은 있었다. 자신의 딸이 산 채로 불태워 고통스레 죽을 때 그것을 보는 아버지란 지옥은 곧 현실이었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희생하면서도 그림을 그린 아버지, 그의 모습은 너무 모순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화술은 당대 최고이기에 군주가 몇 번이나 그에게 상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그는 항상 딸과 함께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그가 딸의 죽음을 두고 미치광이처럼 그림을 그려 지옥과 같은 그림을 그렸으니 참으로 허무하고도 비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지옥변을 시작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은 허무주의적인 요소가 많다. 뭔가 아쉽다는 것보다 뭔가 하나가 아니 둘 이상이 빠진 기분이라고 할까? <무도회>에서 소녀 아키코는 키는 작으나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아가씨였다.

 

그런 그녀가 세월이 지나 할머니가 되어 기차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아키코 어느 청년과 만나 어린 시절에 프랑스장교와 무도회에서 댄스를 즐기던 이야기를 했는데, 프랑스 장교의 이름은 쥘리앵 비오라고 하였으나, 그 청년은 그 장교가 국화부인을 저술한 로티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키코는 그저 줠리앵 비오라고 했다. 내용을 보면 시작과 달리 끝은 너무 허무하게 또는 어이없이 끝난다. 작품 마지막을 본다면 줠리앵 비오는 아키코와 지난 이야기를 소설을 내었는데, 본명이 아니라 비오라는 이름으로 냈기에 그 소설을 아직 아키코가 읽어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지옥변과 다르게 시작은 산뜻하고 뭔가 이야기가 새롭게 전개되려다가 위기나 절정도 없이 끝난 이야기는 소설의 전반적인 흐름을 깨는 기분이었다.

 

뭔가 특별하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려는 억지스러운 느낌보단 그저 그것을 해체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보였다. 그런 점에서 뒤편에 나온 <갓파>는 모순과 풍자의 그 자체였다. 그래도 나름 소설의 맛이 느껴질 정도로 분량이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길었다. 어느 한 남자가 갓파를 만나 우연히 갓파나라에 가서 그곳에 겪은 일들을 기록하여 다시 인간계로 왔는데, 그 남자는 정신병원에 갇힌 사람이었다. 문제는 갓파들에 대한 기억이나 그들의 모습은 너무 명확하고, 그가 구사한 언어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갓파들의 언어이니 그가 이상하게도 갓파와 인간의 말을 둘 다 구사한 점에서 갓파나라에 안 갔다고 말하지 못하면서도 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곧 다른 것들이었다.

 

남자는 병원에서 철학자 토크의 서적을 보면서 읽고 있다고 하나 그가 직접적으로 들고 있던 것은 전화번호부였다. 그러나 그 전화번호부를 보면서 “야자수 꽃봉오리나 대나무 속에 부처님은 일찍이 잠들어 계시네. 길가 메마른 무화과와 함께 그리스도도 이미 죽고 만 것 같네. 하지만 우리들은 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예를 들면 연극의 배경 그림 앞에서도.”, 나름 허무주의와 실존주의적인 면이 보이기도 하나 그는 현실에서 보고 있는 것과 자신의 뇌 안에서 보고 있는 것이 달랐다. 예술이란 것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인가?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본래 광인들이란 대현자이면서도 바보이면서도 예언가이면서도 예술가였다.

 

인간이 드러나지 못한 것들 드러내고, 인간이 알지 못한 것을 말하기도 했다. 정상적이지 않기에 정상적인 인간들이 가진 평범하고 일반적인 무지라는 지식적 한계를 벗어난 것이 광인이다. 그래서 남자는 시를 만들고, 계속 사유를 멈추지 않으려고 하지 않은가? 갓파의 세계에서 보낸 그는 갓파의 세계 역시 참혹한 냉정하여 다시 인간세계로 돌아오려 했으나, 인간세계에서는 미치광이 환자였다. 이성을 가지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공상의 세계가 좋은지 아니면 미치광이처럼 있어야 할 현실이 좋은 지에서 어디에도 낙원을 부여되지 않는구나 하는 회의적인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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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1985
정지영 감독, 이경영 외 출연 / 루커스엔터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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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리뷰 시작전에 

본 영화인 <남영동 1985>를 리뷰하기 전에 나는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발췌한 몇가지 문구들을 나열하였다. 왜 그렇게 했는가에서 고문과 고문으로 통해 보여지는 인간의 모습과 그 인간이 살아가던 사회의 현상들을 비교하기 위해서다. 그런 점을 위해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제10장 '빗자루와 악마의 연회', 제11장 '대 마녀광란'이다. 마녀사냥과 그리고 메카시즘이란 이른바 공안정국의 빨갱이 사냥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에서 다음의 문구들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던 민족과 국가를 떠나 공시적으로 통용되는 폭력과 공포의 도구화다.

 

  

(1) 그 당시 마녀광 비평가인 요한 매토이스 메이파라트는 고문실에서 본 다음과 같은 광경들을 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서술하고 있다.  나는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손발, 머리통에서 나온 눈알들, 다리에서 떨어져 나온 발목들, 관절에서 뒤틀린 힘줄, 몸통에서 뒤틀린 견갑골, 부풀린 동맥, 밀려진 정맥, 천정까지 끌어올려졌다가 바닥으로 동댕이질 쳐지고 빙글빙글 회전시키고 머리를 거꾸로 하여 공중에 매달리는 희생자들을 보았다. 나는 고문자들이 피의자들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회초리로 두들기고, '스크루'로 손가락을 찌부러뜨리고, 무거운 물건을 몸에 묶어 공중에 매달고, 굵은 밧줄로 꽁꽁 묶고, 유황으로 지지고, 뜨거운 기름을 온 몸에 바르고, 불로 그을리는 모양들을 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인간의 육체가 얼마만큼 폭행당할 수 있는가를 목격한 대로 묘사하면서 이에 대한 개탄해 마지않는다.

 

(2) '고백서'와 관련된 불행한 것은 그 고백서들이 대개는 마녀 피의자들을 고문하여 받아진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마녀들이 악마와 계약을 맺고 하늘을 날아 악마의 연회에 참석했다고 고백하기까지 고문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또 악마의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처음 자백한 것을 번복하려 하면 그 자백을 재확인하기까지 더욱 악랄한 고문을 당하겠느냐. 대부분의 피의자들은 화형을 선택했다.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회개한 마녀들은, 그 대가로 장작더미에 불이 붙기 전에 교살당하는 행운을 얻을 수 있다.

 

(3) 그 추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고 자백할 때, 수사관은 그녀에게 말했다. "만약 지금까지 자백한 것들을 부인할 의사가 있으면 지금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내가 더 유익하게 하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법정에서 그 사실을 부인한다면, 당신은 다시 내 손아귀로 돌아와 이제까지보다 더 지독한 꼴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돌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다." 마르가레타가 법정에 끌려갔을 때는 그녀의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손에는 포승이 묶여져 피가 배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그녀의 옆에는 간수와 수사관이 서 있고 그 뒤에는 경비대가 무장을 하고 서 있다. 자백서가 낭독되면, 수사관은 그 자백서를 추인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묻는다.

 

(4) "나는 악마의 연회에서 자네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 하지만 고문을 덜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네. 마침 그때 자네의 얼굴이 떠올랐네. 이곳에 끌려오는 길에 자네를 보지 않았었나? 그때 자넨 내가 마녀일리 없다고 말했었지? 용서하게. 그러나 또 다시 고문을 받게 되면 자네의 이름을 또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거네." 그 노파는 다시 고문대로 끌려갔고 거기에서 첫 진술을 다시 확인했었다. 그 희생자들이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 악마의 연회에 참석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믿었다 하더라도 이런 고문 행위가 없었다면, 그 마법광란 속에 그토록 많은 희생자들이 어떻게 생겨났을지 이해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5) 마법광란은 모든 저항할 수 있는 잠재에너지를 분산시켰다. 마법광란은 가난한자와 무산자들의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서로간이 사회적 거리감을 조장시키며, 서로 의심하게 하고, 이웃끼리 서로 싸우게 하며, 모든 사람들을 소외되게 했고,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불신을 고조시켰고, 무기력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했으며, 단순한 지역적인 문제에 모든 사람들이 분노하고 좌절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마법광란은 부의 재분배와 사회계급 타파를 요구하고 교회제도와 사회제도에 대결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더 가난한 자들로부터 박탈하였다. 마녀광란은 과격한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거꾸로 바꾸어놓은 것이었다. 마법광란은 사회 특권층의 마법적 총탄이었다. 바로 이것이 마녀광란의 감추어진 비밀이었다.

 

2. 고문의 시작과 서사의 시작

지나친 고문과 그 고통으로 인해 어느 한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점들은 대상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잔인한 말로를 보여준다. 물론 영화리뷰 함에서는 스토리와 인물, 그리고 카메라 샷과 샷의 전환 및 촬영기법에 대해 조금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영상과 소리가 아무리 효과를 탁월하게 하더라도, 그것은 그 작품의 서사를 돋보이기 위한 것이고, 서사라는 것은 결국 그 내용에서 의미하는 담론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달이다. 영화는 흔히 정치로서의 도구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도구가 되는 영화는 솔직히 말하여 아름답지 못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언제나 진실보다는 진실이 아닌 것에 대해 쉽게 잘 넘어간다.

 

특히 영화는 환상으로 가득한 가상의 현실이다. 현실과 가상이 뒤바뀌어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것 즉 시뮬라크르(simulacre)인 것이다. 그런 가상의 이미지가 단절이 아닌 끊임없이 재생산과 재생산, 그리고 전혀 무관한 의미로 작용하여 어느 것들이 진실로 옳은지 알 수 없다. 진실은 하나이나, 사실은 다수다. 그 사실에 대한 허구는 그 사실의 수보다 더 많은 수를 가지고 있다. 사실에 대해 만드는 것은 구성하기 나름이다. 그 방법이 문학적 재능인지 아니면 육체의 폭력으로 통해 이루어진 재능인지는 선택자의 의해 만들었으나, 적어도 타인에 대한 공격에서는 2가지 다 매우 거칠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전자가 무서울지도 모른다. 육체의 폭력은 항상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상처나 멍과 같은 외관적 흔적, 혹은 각종 신경질환이나 내장손상과 같은 내재적 흔적들로 말이다.

 

 

3. 파시즘과 인간

순수하게 정신적인 속임수는 고통조차 받아들일 수 없기에 더 잔혹하다.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국 나는 인식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실존적 가치를 저하시킨다. 아니 더 잔인한 것은 그 인식의 대상이 눈앞에 있어도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점이다. 인식하지 않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로서 그 대상은 존엄성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도구로 본다는 사실은 정말 끔찍한 것이다. 예전에 나치 수용소 중에서 아우슈비치 수용소가 상당히 유명하다. 거기 소장으로 임명된 아이히만은 매우 끔찍한 홀로코스트, 즉 학살의 악마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히만이 체포되어 막상 그의 재판소에 갈 때 그는 평범한 남성에 어떤 악의도 없이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관료주의체계의 인물이었다. 오히려 악의와 감정을 담아 상대방을 폭력과 억압을 행하는 사디즘의 포효가 아름다울지 모른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은 곧 미움과 동시 애정이란 아이러니한 감정이 오고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남영동 1985>에서는 이런 감정을 담은 폭력과 감정이 없는 폭력의 차이를 보여준다. 차라리 개인의 감정이 담긴 폭력은 상대방이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도구로서 보이는 폭력 마치 라디오를 바라보며 전기공이 테스트를 하는 고문은 더 잔혹하고 끔찍하다.

 

4. 감독과 카메라

이런 상황을 정지영 감독은 카메라앵글로서 놓치지 않는다. 대담한 클로즈업과 그보다 더 대담한 익스트림 클로즈업, 지나친 고통과 비참한 상황은 발가락의 떨림으로 제스처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의 영화는 보통 영화들처럼 인간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보다는 인간이 욕망하지 않고 싶은 것을 욕망하게 한다. 환상의 영웅을 내세우기보단 비참한 희생자를 내세운다. 그리고 그 희생자는 폭력과 고문, 그리고 고독과 절망을 보여준다.

 

따스한 햇살도 허락하지 않은 차갑고 어두운 방에 불려온 김종태의 시선에 보인 백열등의 전구는 마치 대낮에 태양을 보는 듯한 괴리감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인 김종태의 슬픔, 증오, 분노, 아픔, 절망과 거기에 보상되어진 자신의 현 모습에서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을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자막과 한쪽 눈에 비춘 고문증언자들의 모습에서 이 영화의 런닝 타임 106분은 마무리 되어 <남영동 1985>의 서사는 끝이 났으나, 그 서사의 끝은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다.

 

5. 이성의 시대 도래

그리고 그 서사의 주인공은 언제나 관객이다. <부러진 화살>에서도 서사의 결말이 항상 결말 같지 않은 요소를 이번에도 강조한 것이 <남영동 1985>다. 그 강조는 오히려 <부러진 화살>보다 <남영동 1985>에 가깝다. 전자는 법정권력 아래에 대한 의구심이라면, 후자는 우리 사회에 가진 전반적인 역사와 사회 그리고 인권에 대한 의구심이다. 헌법이란 것은 인간이 가지야 할 최소한의 권리, 즉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최소한의 보장이다. 그 헌법이 유린되었고, 그 헌법이 지향해야할 세계인권정신이 묻어지고, 폭력의 하나의 미로 숭배되는 점에서 그 사회는 파시즘의 날개를 피운 것이다. 파시즘은 대중들에 대한 통제와 더불어 권력의 유지가 되는 수단을 이어진다. 나치의 괴벨스가 왜 선동적인 구호로서 대중들을 폭력적으로 만들었을까?

 

위 지문과 생각하여 말해보자. 마녀사냥이 일어난 것은 15~17세기 유럽이었다. 당시 17세기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즉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관념적인 사고였다. 그렇다면 생각을 한다는 이성적 행위에서 인간의 존재성은 바로 자신이 정상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이나, 과연 그 판단이란 것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비판하는 이성을 가정할 교조주의로서 볼 것인가? 17세기에 마녀사냥이 성행했고, 죄 없는 자들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마녀가 아닌데도 마녀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김종태는 고문에 의해 아닌 사실을 말해야 했다. 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인상 깊다. 100% 재현성이 아니나, 내용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김선생, 나는 당신이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소, 나는 당신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 그 사실을 말하기를 원하는 것이오."

 

 

6. 폭력의 미학 

결국 사실이 아닌 거짓이 사실로 되어버린 것이다. 김종태가 실제로 있었던 공간과 거기서 행한 시간적 존재와 달리 다른 시간과 공간을 구성하도록 했다. 문제는 그것이 분명 잘못된 사실임에도 불구하도 거짓자백을 위해 잔인한 고문을 행한 것이다. 복도 옆으로 항상 들리는 남자와 여자의 비명들, 그리고 그 비명이 마치 일상 속에서 들리는 소음처럼 무덤덤한 관료주의자들까지 비정상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아주 침착하게 대응하고 분석적으로 움직이는 장의사의 행동은 소름이 끼치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의 혼을 가져갈 정도다. 그가 가진 죽음의 손길을 대사처럼 "나는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나가 6개월 만에 죽거나 혹은 3개월 만에 죽일 수 있어."는 마치 고문이 하나의 기술이고, 자신의 미를 관철하는 예술인 것처럼 말한다. 폭력이 미적 가치로 올라가는 것은 파시스트들의 특징이다. 이 영화는 결국 파시즘이란 폭력의 정치가 이루어진 시대를 다루었기에 그의 고문은 결국 예술로 된 것이다.

 

 

그가 처음 독불장군 김종태를 고문하면서 옆에 있던 수사관들이 모두 놀라며 심지어 박수까지 친다. 박수가 나온다는 것은 결국 장의사의 고문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폭력에도 미학은 존재하는 것인가? 다시 17세기 유럽으로 가보자. 그 시대에는 그토록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든 마녀사냥이 끝날 생각도 없이 오히려 더 가속화되었다. 마녀사냥 제물대에 항상 희생될 마녀가 필요했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에서 소녀와 부인, 할머니와 장정, 이제는 남녀노소 가릴 것도 없이 말이다. 그들의 몸에서 튀어나온 인간의 신체조직들에서 고문가들은 무엇을 느꼈는가? 이 가여운 자들이 인간으로 보였는가? 아니면 진짜 마녀로 보였을까? 마녀가 아님은 알면서도 마녀가 만들어야 하는 그 사명감은 재정이 부족한 왕궁과 교회의 창고에 먼지조차 들어오지 못할 기회였다.

 

 

7. 가려진 가해자 

그들은 마녀로 몰린 자들의 재산은 모두 국고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재정도 채우고, 국민들도 공포정치로 통제하고, 1석2조의 효과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보이는 그 효과는 마녀사냥의 마녀처럼 권력기구의 정당성을 부여할 빨갱이가 필요했다. 고문자들도 김종태나 다른 인물이 빨갱이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도 빨갱이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결국 그들이 바라는 진급이란 관료체계의 목적과 자신이 가진 자리에 대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보상된다. 이 영화는 그런 그들의 욕망을 현실화하기 위한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즉 욕망의 성과는 고문의 잔혹성으로 등가 된다. 단지 고문에서 장의사의 예술성은 그들의 욕망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욕망까지 채워 주기 때문이다.

 

욕망의 충족에서 억압과 해방 그리고 폭력으로 감추어진 하나의 신화가 탄생한다. 신화(神話)의 탄생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부여한다. 우리 모두가 되고 싶은 화려한 환상의 신화인가? 아니면 우리가 모두 거부하는 희생의 욕망인가? 이 영화의 종말에선 그 신화는 김종태에서 장의사 이두한까지 손을 뻗친다. 이두한은 분명 1985년도에 아주 우수한 고문기술자였으나, 정권교체 후에 그는 범죄자가 되어야 했고, 수배 중에 구속 후에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러나 정작 장의사와 장의사를 부른 자, 그리고 장의사와 함께한 자들의 모습만 비추고 그들의 뒤에서 뒷손 쥐고 숨어있는 자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결코 나오지 않는다.

 

 

8. 등장하지 않은 인물

 

왜냐하면 괴물과 같은 고문기술자는 있어도 왜 고문기술자가 존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존재에 대한 동기유발성에서 또 다른 추리가 시작된다. 장의사는 남영동이 아니라 다른 곳인 지방까지 순회를 할 정도로 바쁜 고문기술자다. 그가 간곳의 반사회적 낙인이 찍힌 자는 누구나 굴복을 한다. 그래서 폭력의 미학이 되었던 당시 시대에 이두한의 모태인 이근안은 고문이 예술인 것이다. 나 역시 그의 고문은 예술이라고 본다. 예술이라고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테스크 적으로 괴상하고 섬뜩하며 인간에 즐거움이 아닌 오히려 즐겁지 아니함을 주는 것이어야 말로 예술이 된다.

 

 

부정하고 싶은 것을 부정하면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부정이 되는 그 괴상하고 비틀림이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대한 사유를 품게 하는 것이다. 저것은 아름답지 못하고 추하고 비틀렸기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가? 행복한 환상 속에는 무엇을 바꿀 의지는 없다. 현실과 환상 그리고 비현실적 상황은 누구나 비정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남영동 1985>는 단순히 고문당하는 김종태만을 피해자로 몰아넣지 않는다. 그의 고문을 위해 집에도 못가고 며칠째 같이 있는 수사관들, 그리고 여자 친구와 헤어지는 이계장의 모습에선 작품에서 보여주는 피해자의 영역은 점차 넓어진다.

 

 

9. 장의사의 미학

 

작품 중간에 김종태가 겉으로 승복한 척하나 다시 한 번 번복할 때 장의사는 그가 끝까지 저항하려고 했기보다는 장의사가 이때까지 쌓아온 관록을 부정해서였다. 단순히 반국가적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미학을 망쳤기 때문이다. 그 분노로 장의사는 마치 김종태를 개처럼 여긴다. 허리띠를 풀어 개목걸이로 걸고 옷까지 다 벗겨 마치 개가 걸어가게 했으며, 음식을 내어 국과 밥을 발로 섞게 하여 먹으라고 한다. 이런 비인간적 행위를 하던 장의사는 김종태를 개취급하기 소총을 가지고 와 겨누고, 자신의 미학을 짓밟은 대가로 총기 개머리판을 김종태의 성기를 내치려고 했다. 이때 이계장이 말려서 위기는 모면했으나, 장의사 이외의 다른 수사관마저 그 공포의 절망 속에서 자신들이 고문당하지 않아도 마치 고문당하는 것처럼 괴로워했다.

 

 

10. 사디즘의 미학

 

이계장이 김종태에게 감정을 품은 것은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그에게 소주를 억지로 마시게 한 것과 개인적인 울분에서 김종태를 구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적감정에 미안했는지 우유와 빵을 주었고, 장의사의 고문에 굴복하지 않는 김종태의 행동에 자신의 영혼이 파탄 나는 것을 느꼈다. 발로 마구 밟고 밟으면서 하는 말이 “제발 말 좀 들어라 말이야!"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감정적인 폭력 즉 상대방에 대한 가학적 행위에 대한 의지를 지닌 것이 더 인간적이었다. 끝에 보면 알겠으나 이계장 이외에 김계장이 김종태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되어 그 옆에서 수행하는 비서관으로 나온다.

 

 

감옥에 자기 대신 갇힌 이두한을 만나기 전에 김종태는 고뇌한다. 그럴 때 이계장은 자기도 같이 갈까요? 하고 물어보나, 김종태는 아니 괜찮다고 한다. 솔직히 자기 자신도 그 상황에 대한 악몽과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결코 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정신과 영혼을 파괴시켰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감정의 기복도 없이 전기스위치를 누르며 휘파람을 불면서 그 중에서 클레멘타인의 멜로디를 부는 그 모습은 정말 장난 이런 장난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장의사는 시간의 할당을 채우는 샐러리맨 같은 모습이었다.

 

 

11. 일상 안의 비일상

 

그러나 당하는 자와 보는 자는 치가 떨릴 정도로 괴로워한다. 전기고문, 물고문에서 김종태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의 떨리고 멈추어버린 발을 클로즈업하며 그를 두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도 클로즈업을 한다. 영화 전체적으로 보면 클로즈업이 거의 절반에 이룰 정도로 많이 나온다. 그 만큼의 급박함, 그 만큼의 고통은 보는 이에게 숨을 막히게 만든다. 특히나 김종태가 아내에 대한 추억과 망상, 고문으로 고통 받는 장면에서 영상이미지가 이중으로 겹치는 르포몽타주는 김종태로 하여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점이 탈피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 상황인데 야구중계, 라디오음악방송의 세상이야기는 그저 평화롭다.

 

 

 

그러나 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김종태의 비명소리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대립이 아니라 사운드와 사운드의 대립이 이어지는 사운드로 연출하는 몽타주다. 고문에 괴로워할 때 고문 후에 지칠 때 옆에서 장난치는 이계장과 김계장의 천덕꾸러기 같은 행동들은 김종태 뿐만 아니라 사실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 있던 것이다. 이계장과 김계장의 장난은 그들이 처해진 고문행위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상생활들이 비일상생활으로 되었기에 그들에게 장난이란 남영동 고문실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유희였다.

 

12. fiction vs faction

 

그 유희 속에서만 오로지 정상적인 인간은 마치 장의사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고문으로 지쳐 영혼마저 소진한 김종태를 바라보며 “지금은 내가 고문하지만, 세상이 바뀌면 대신 네가 나를 고문해”라는 식으로 아주 차가운 미소를 띠운다. 물론 세상이 바뀌고, 이두한은 교도소에서 김종태에게 사과하나, 김종태는 그 사과를 받지 않은 채 나오려 하나, 갑자기 이두한 휘파람에서 클레멘타인의 멜로디가 나온다. 모든 것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끝나지 않았다면 어디서 다시 시작이고, 끝이란 말인가? 계속 언급하나 정지영 감독의 작품은 fiction이 아니라 faction이다. 만들어진 사실과 만들어진 허구가 만나 만들어진 거짓 같은 사실이 나오고, 그것은 더욱 강렬하다.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에 의해 창조되므로 fiction이나 그 영화의 시나리온 도서 <남영동>은 사실이다. 사실을 거짓인 영화로 만들었으나 그 거짓의 세계인 영화가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거짓을 나타내는 매체로 탄생한 것이다. 문제는 항상 정지영 감독은 영화가 신화적인 공간에서 우리가 욕망하지 않은 인물로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개연성이 발휘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하나, 영화 <남영동 1985>는 역사를 전제한 영화다. 따라서 시보다 역사에 가까우나, 오히려 더 시적인 존재로 각인된다.

 

13. 불멸의 마녀사냥

그것은 처음 지문처럼 언젠가 마녀사냥으로 죽게 되는 사람은 당신의 이웃이고, 그 당신의 이웃의 이웃은 결국 당신에게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고문당한 자 중에서 단순히 그 당시 민주화 운동만 아니라 평범한 국민들도 아무것도 모른 채 고문당했고, 잊을 수도 없는 지난날의 악몽이 21세기에 들어오고 나서 겨우 누명을 벗었다는 것이다. 누명을 벗고, 국가로 손해 배상하여 보상받는다고 그들의 지난날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고문이란 것은 저기 스크린으로 보이는 한 인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 영화는 강조한다. 고문의 역사는 단순히 어느 개인을 파멸로 몰아넣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긋난 굴레에서 계속 방황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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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1985
정지영 감독, 이경영 외 출연 / 루커스엔터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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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통한 정치적 수단이 아니라 영화로 통한 정치적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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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
이동형 지음 / 왕의서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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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789년 루이왕정은 미국독립 전쟁 및 내정의 잘못으로 국가재정을 파탄 나게 하는 바람에 이른바 삼부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귀족, 성직자, 시민(부르주아) 대표를 모아 의논했으나 대부분 가난과 세금에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큰 길을 열어주지 않았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삼부회 근처 테니스코트장에서 헌법으로 통한 통치를 위해서 만든 테니스코트선언이 발발된다. 그리고 우리 인류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피로 물들인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 삼부회에서 시민 대표자가 법조인으로 활약한 로베스피에르였다.

 

프랑스 헌법을 만들어 국민공회까지 만들어 민주주의를 만든 그였으나, 결국 혁명을 망가뜨리고, 그도 혁명의 역사 속에 사라져버린다.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국민공회에서 공포정치를 하던 인물로 유명한 자로 생 쥐스트가 있다. 그런 로베스피에르지만, 그의 손에 항상 어느 책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다. 물론 이 책은 가끔 내 손에 들려진 책으로 우리나라 헌법만 아니라 프랑스 인권선언문까지 기초가 되는 명저이다. 오늘 내가 <사회계약론>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점은 민주주의 정치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론이란 점이다.

 

여론이 결국 정치적 함의를 결정하게 되며, 그런 여론이 올바르지 않으면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루소도 그러하나 토크빌 역시 정치제에서 민주주의 약점으로 그런 대다수 의결에 따라 전체주의적 요소를 우려했다. 민주주의가 가장 전체주의라는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정치제가 되기 쉬운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인가? 로베스피에르가 파리를 혁명공화국으로 만들 때, 사람들은 광기에 빠져 단두대에 피를 뿌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공포정치의 문제를 같은 자코뱅당 출신들이 비판하자, 언론의 자유를 몰살하고, 같은 프랑스대혁명의 주도자이면서도 외세침략에서 프랑스를 지킨 당통도 로베스피에르의 방식을 반대하였고, 결국 당통은 단두대 아래 사라져버렸다.

 

그만큼 민주주의 제도권에서 중요한 것은 양심의 자유와 더불어 그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여론이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그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신문이고, 신문기자나 방송언론인들이 망가지면 그 나라의 미래는 암울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계속 100년 가까이 혁명이 일어났으나 언론은 언제나 가진 자의 편이었다. 언론이란 것은 부당한 것에 대한 폭로와 저항에서 부당한 것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언론과 피곤한 관계에 있었냐고 생각하면 노무현 바로 그 남자다.

 

오늘 서평할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를 받아보면서 마음이 참 울적했다. 아니 책을 내 손에 잡는 순간과 그 책을 열어 보는 것과 심지어 글을 적는 지금도 울적하다. 이 서평을 적는 일자가 2013년 5월 23일이다. 그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에서 살아있지 않은 인간으로 된 지가 4주년이 된 것이다. 생물학적인 죽음이란 육체적인 존재가 물리적으로 실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결국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그이나, 생물학적인 이상으로는 죽어있지 않은 것이다.

 

형이하학적으로 드러나는 실체는 없어도 형이상학적으로 우리 관념에 항상 남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존재는 유령일 수 있으나, 그 유령은 당사자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유령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왕자가 죽은 아버지의 영혼을 보고 “그대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햄릿 왕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애증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살아있을 때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아들의 심정이었으나, 한편으로 죽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란 것이다.

 

바로 노무현이란 존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온 햄릿 왕자가 말한 유령이다.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그토록 욕만 먹고 사셨는데,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욕을 하는 지경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욕을 하고 심지어 비인간적인 조롱을 퍼붓는 자도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같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의 고통과 죽음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무겁고, 책 제목처럼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가 아니라 바람도 불지 않아도 생각난다. 변화를 의미하는 바람, 독일의 불굴의 뮤지션인 scorpions는 독일이 통일할 때 wind of change란 곡을 발표했다.

 

그 변화를 의미하는 바람조차 불지 않을 때에 오히려 노무현이 생각나고, 그래서 바람이 일어나길 바라는 소망이 생기는 것이다. 은폐된 진실 아래 억압과 폭력으로 가득한 신화적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인간이기를 바랄 수 있는 자유의 바람을 말이다. 인간의 가치란 무엇일까? 노무현이란 인간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나는 헌법주의자라고 말하고 싶다. 헌법, 분명 대한민국 헌법에서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국가이며, 국민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천부인권, 그것은 빈부를 떠나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권리다.

 

단순히 빈부의 격차를 두고 경제적인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는 평등이고, 모두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평등이다. 사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 공화국에는 세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 그것은 자유, 평등, 박애다. 프랑스 국기가 블루, 화이트, 레드 이렇게 3가지인 이유도 공화국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이든 혹은 민주자유주의이든 이념적으로 민주주의는 공화주의를 모토를 삼아야 하기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가 표창한 “사람 사는 세상”의 의미는 민주공화국이란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하면 과연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물론 사람답게 사는 사람도 있고, 사람 이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람조차 되지 못한 사람도 있다. 가난에 학업에 취업에 결혼에 삶의 의미조차 찾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 길에 점점 부랑자가 늘고 노숙자들이 돌아다닌다. 사람이란 생물학적인 요건은 가지고 있으나, 그들에게 사회적인 사람의 존재로서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서평의 어두에 붙인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일화가 인상이 남는다. 그는 공화국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자유이다. 그 자유라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존재해야 자신에게 자유가 온다는 점이다.

 

자유가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으면 결국 그것이 위험으로 다가오는 점이다. 국가 대 국가에서는 전쟁이고, 국가 정치적으로는 독재이고, 우리 일상에서는 범죄와 연결된다. 사회구조가 불평등이 가열되면 될수록 그 사회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이 결국 터지게 된다. 아직 우리 사회는 공화국의 모토 중에서 자유와 평등도 그러하나 박애라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은 국가이다. 승자독식에서 패자불목은 이기지 못하면 버림받을 수 없는 열기 속에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지역주의와 학벌사회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그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위한 지역주의와 사회의 공적이익을 위한 엘리트의 헌사는 바른 것이나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척하며 그에 따른 반사효과를 노리는 이 사회에서 과연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노무현은 고교출신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학벌로 사람차별하지 말자 지역차별하지 말자고 하나,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그 열기는 장난이 아니다. 좋은 대학교에 가면 줄만 잘 서도 취업잘 된다는 이유로 어린 학생들은 풍부한 감성과 합리적인 이성을 키우기보단 오로지 자기 이익에만 신경 쓰는 기계로 만들어버린다.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줘도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만 없다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그런 제로섬 게임을 말이다.

 

그런 정신은 노무현이 살아오면 지독하게 여긴 적이었다. 같은 당 내부에서도 혹은 진보인사조차도 대학가방 끈을 매지 않은 이유로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차별발언을 하면 안 되나, 적어도 1970년대 전후로 중고교를 다닌 사람들은 대학을 그다지 많이 나오지 못했다. 가난한 상황에 그 가난을 이기기 위해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 졸업 후에 일하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력을 해서 사법고시를 넘어 연수원에 가도 서울권 대학교 엘리트들은 여전히 그를 멸시했고, 법을 가르쳐야 할 연수원 교수들도 그런 행동을 했다.

 

헌법의 가치란 과연 무엇인가?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를 읽으면 다소 감정적이고 억울한 심정으로 적어가나, 나의 글은 담담하게 적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감정이 크게 동요한 만큼 노무현이 겪은 역사적 진통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2번 반복되어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끝난다고 하나, 그 되풀이의 1번이란 끔찍한 악몽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무척이나 감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그 감정에는 단순히 사리사욕으로 채워진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안목이다.

 

그래서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인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을 비록한 명저가 아직도 계속 되지 않은가?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저술할 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어린 시절 여행 중에 너무 배고파서 농가에 들려 그들의 어려움 입장을 보고 크게 분개한 것이었다. 노무현이 항상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바탕으로 하여 객관적인 선택을 하게 된 동기 역시 자신의 역사적 투쟁에서 보는 고통의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극한 현실주의자였으나 한편으로 지독한 이상주의자로 분류되어야 했다. 이상과 현실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인가?

 

그래서 이성과 감정은 무척이나 다를지도 모르나 같이 붙어있는 수평선와 같을 것이다. 그가 모든 결심은 감정적인 격류가 컸다.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과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것조차 묵인하고 참혹하게 억압하는 자들이 미워한 것이다. 그렇기에 논리적으로 강하게 살아온 것이다. 지금 내 글이 너무 딱딱하고 담담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만큼 내 감정이 강하게 충돌하는 것과 같다. 바람이 불어서 오는 게 아니라 바람이 불기를 바라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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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4 - 아스카 오다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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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주인공을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메인 주인공과 서브 주인공으로 말이다. 메인 주인공으로 본다면 신지, 레이, 그리고 아스카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4권은 메인 주인공이면서 히로인 중에 하나인 아스카가 등장하는 편이다. 만화책 1권당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편 분량과 맞먹는 것을 생각하면 아스카의 등장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동일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破)>를 감상하면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序)> 이후에 아스카가 등장한 점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할 모든 주역이 모인 셈이다.

 

 

먼저 메인 주인공인 아스카의 등장했다면 서브 주인공은 누구로 하는 것이 적당한지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신지의 아버지인 이카리 사령관, 신지와 같이 동거하는 사회적 어머니인 미사토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메인 주인공 3명과 서브 주인공 3명에서 애니메이션에서 서브 주인공 3번째는 리츠코 쪽이 강하다면, 만화책에서는 카지 쪽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은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박기수 교수의 <애니메이션 서사 구조와 전략>을 참고하면 서브 주인공을 이카리 사령관, 미사토, 리츠코로 결정하였고, 나 역시 그런 구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화책에서는 카지 쪽이 훨씬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게다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破)>를 보면 카지의 역할은 기존의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비해 매우 약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사토가 제레의 정체와 더불어 에바의 정체와 네르프 이카리 사령관이 무엇을 꾸미는지 알아가는 것은 추적이란 플롯에 중요한 위치를 맡기 때문이다. 그런 미사토가 추적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바로 카지와의 교류다. 카지는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이중 스파이노릇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스카의 등장은 곧 카지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미사토와 아스카의 갈등에서 중요한 입장인 것을 알 수 있다.

 

 

TVA나 만화책이나 비교해보면 아스카가 카지를 좋아하는 모습이 나온다. 남들보다 예쁘고, 키도 클 정도로 성숙하며, 머리까지 좋아 14세에 이미 대학교를 졸업하고, 네르프에서 대위라는 계급으로 통해 에바2호기를 조종하는 아스카에게 보통 남자들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카지에게 이끌리는 모습이 나온다. 카지는 본래 대학교 시절 미사토와 애인이었고, 어떤 이유로 2사람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네르프 본부에서 2사람은 만나고, 그 인연의 고리가 아스카에게 미사토에 대해 갈등관계를 일으키는 요소로 나온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그 갈등관계는 매우 강했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破)>에서는 그런 관계는 아예 제외했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TVA보다 약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아스카의 등장과 카지의 등장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인간관계 갈등과 내면적인 고통을 강조하는 하나의 계기로 볼 수 있다. 아스카라는 인물이 그런 우월주의적 인물로 나오나, 한편으로 억지로 무리하는 모습이 나온다. 처음부터 바다에서 나온 제6사도를 프로그레시브 나이프로 절단하여 격퇴하는 모습은 에바 조종을 신지나 레이보다 훨씬 잘하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 성격인 만큼 그녀의 첫 등장은 사고뭉치였다. 길거리에서 인형 잡는 기계를 하다가 잘 되지 않자 발로 차거나 신지 일행에게 막무가내로 돈을 내라고 하거나 옆 사람과 시비 붙어 싸움까지 한다.

 

 

게다가 신지와 다시 네르프에서 조우할 때 억지로 가면을 쓰고, 카지에게 마치 착한 미소녀인 것처럼 행동한다. 엄청난 내숭의 소유와 동시에 그 내숭 안에 가려진 난폭함은 신지로 하여금 질리도록 한다. 아스카는 다른 것은 모르나 자신에 대해 무시하는 것을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스카는 평소 신지가 인간관계가 어리숙하다 보니 자긱 기분에 내키는 대로 행동하나, 레이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 없거나 왠지 무시당한다는 기분이 들면 매우 짜증을 낸다. 자기편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이 아스카의 결점이다. 자기 스스로의 나르시시즘이 결국 심리적 공허감에 의해 생긴다는 점이다.

 

 

아스카는 레이와 말다툼하던 중에 레이에게 뺨 한 대를 치려고 했으나, 신지가 말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아스카는 도망가듯이 그 자리에 벗어난다. 그 누구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그 누구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싫어하는 아스카이기에 제7사도가 등장할 때, 아스카가 먼저 공격하여 두 쪽으로 내지만, 그 사도는 코어가 2개라 그 코어를 분리하여 동시에 파괴하여야 격퇴가 가능했다.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일방적인 자신의 행동에 작전이 실패하자 신지에게 그 실패를 떠넘긴다. 아스카는 그 붉은색 에바2호기처럼 불타는 성격으로 타인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신지는 타인과 불필요한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성향이기에 서로 지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도 사도에게 패한 것에 대한 분함과 그것을 만전하기 위해 특별훈련에서 아스카는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신지를 구박한다. 이와 다르게 신지의 연습하는 곳에 온 레이는 한 번도 연습하지 않았는데도 신지와 바로 윤무를 잘 맞출 수 있었다. shell we dance?의 의미는 단순히 춤이라는 것이 테크닉이나 화려함을 보여주기 위한 자랑거리가 아니라 그 상대방과 얼마나 잘 호흡이 맞는지 조율해 가는 과정이다. 아스카가 며칠이나 연습해도 제대로 되지 않던 신지였으나, 레이와 단 1번으로 성공하자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고, 그 화가 자신의 반성보단 타인에 대한 공격 내지 회피로 되는 것이다.

 

 

티격태격하면서 신지가 이카리 사령관의 아들이나 아버지와 잘 지내지 못한 것을 두고 파파보이라고 놀리나, 사실 같이 연습하며 잠들었을 때, 아스카는 엄마를 찾으면 왜 먼저 죽었냐고 혼자 울면서 잠꼬대를 한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무의식중에 화장실에 다녀온 아스카가 신지가 자고 있는 곳에 와서 잠이 든다. 신지는 아스카의 얼굴을 보며, 그 입술에 키스하려 하나, 아스카가 울면서 엄마라고 하자 “자기도 애인 주제에”라고 중얼거리며 잠이 든다. 아스카의 정신적 부담에는 어머니의 죽음이 각인되어 있기에 타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런 도중에 아버지도 실제로 존재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정자은행에서 우수한 유전자를 골라 어머니의 난자와 교배한 시험관아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기본적으로 아스카에게 친아버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런 와중에 카지를 만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아이로서 육체적으로나 혹은 심리적으로나 카지에게 귀여움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자기 자신도 애인 주제에 어른처럼 행동하는 소년이나 소녀들은 제법 있다. 그런 방법이 엄청나게 어른인 척하나, 어른은 아랫사람을 내려 보기보단 그들을 포용해주는 것이다.

 

 

아스카의 성인여성이기를 바라는 방법들은 그저 투정을 부리는 여자아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을 거부하는 대상에 대해 반발하는 행동 자체가 도리어 그 사람과 똑같이 되어버리는 점에서 신지가 애라고 생각하는 아스카야 말로 진짜 애였던 것이다. 어떻게 어른 같은 애는 신지에 가깝다. 회피하는 방법은 젊은 학생에게 있어서 별로 좋지 못하다. 그런 아스카가 신지하고 같이 사도를 격퇴하는 것은 에바 조종사를 떠나 자신의 프라이드가 걸려 있었다. 출전 하루 전날에 감시카메라를 부수고, 신지와 아침까지 연습한 아스카는 결국 신지와 함께 사도를 격퇴한다.

 

 

어떻게 보면 평소 마음을 열지 않은 아스카에게 그나마 마음을 열어 보인 사람은 카지와 신지였을 것이다. 사도 격퇴 후에 마무리 착지가 엉성하여 아스카가 신지에게 구박을 주나, 신지가 너무 피곤하다는 말을 하자 아스카가 “너 같이 아둔한 애가 이렇게까지... 정말 잘했어.”라고 한다. 신지도 “네 입에서 날 칭찬하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라고 대답한다. 사실 아스카가 진짜 인정받으려면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이 정답이나, 아스카는 인정해주는 것을 매우 꺼리는 타입이다. 하지만 아스카가 제일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이 아니라 본인이란 점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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