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2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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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이런 구절을 발췌하고 싶다. 게오르크 헤겔이란 독일 철학자가 이른바 변증법이란 것을 발전시켜 19세기 초중반 헤겔학파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 헤겔이 했던 말 중에 “그렇지 않답니다. 오라버니! 헤겔이 주장한 시대정신이란 결국 진보 없이 반복되는 원형의 띠. 우민들은 결국 계몽의 대상이 아닌 사육의 대상에 불과하지요.”를 말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이란 계몽이란 것이 참 중요한데, 막상 계몽이란 단어가 오히려 억압이 되는 현실적 여건을 생각하면 그 계몽이 진보성이어야 하는 오히려 보수를 넘어 수구적인 이용가치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다.

 

계몽주의자 선구자로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저술하였고, 그가 살던 시기에 늘 박해만 받았다가, 그의 서거 후 11년 뒤에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하고, 그 프랑스대혁명의 기반이 된 사상도서가 바로 <사회계약론>이다. 죽음의 신인 생 쥐스트와 단두대의 공포정치를 보여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에서 분명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진보를 위해 저술했으나, 오히려 진보보단 다른 형태로 현실은 망가져갔다. 물론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꾸준히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인류의 위대한 재산으로 내려오고, 자유를 사랑하는 민주공화국의 헌법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반드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계단이다. 대한민국 헌법조차도 루소의 사상에서 기반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진보라는 것은 결국 파괴와 희생, 그리고 투쟁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겉으로 봐서는 말도 안 되는 미소녀가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는 라이트노벨이나, 그 뒤에 보이는 세계관은 단지 라이트노벨의 세계관을 지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결국 헤게모니, 지배계급이 피계급지배에 대한 지배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2권>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논리에 대한 냉소적인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물론 라이트노벨이란 장르에선 당연히 재미를 넘어 성적인 호기심은 분명히 전달할 수 있을 것이나 그 환상으로만 보이는 취미생활 도서가 사실은 매우 잘 만들어진 세계관이란 점에서 이 책을 인정할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2권에서 배경은 미국이고, 미국 국회의사당 안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당에 대해 여자주인공 마리아는 매우 날카로운 공격을 날린다. 그녀에게 무기라는 것은 결국 돈벌이의 수단이고, 그 돈벌이가 무기이기 때문에 막강한 위력을 가진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이란 것은 공간적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나, 그 전장이란 공간을 제외한 다른 세계에서 번영과 발전을 만끽한다.

 

전쟁은 정치적으로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하나의 국가행위이다. 물론 정식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소수민족 및 괴뢰정부, 테러리스트들은 언제나 폭력이란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그것은 아무리 평화적으로 혹은 인도적으로 교섭하려고 해도 돌아오는 것은 무력수단이란 점이다. 2권에서도 중국과 티베트 사이에 벌어진 달라이라마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티베트 민족의 학살극은 20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계속 유지되는 국제분쟁이고, 인종말살이란 제노사이드에서 우리 인간들이 내세운 이념이란 가치는 한갓 허울 좋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서는 비폭력적 평화적인 요건들이 필요하나 그 평화를 얻기 위해 폭력이 필요한 것이 아이러니한 인간의 현실이다. 위에서 루소와 프랑스혁명을 언급한 것처럼 당시 18세기 봉건사회의 구시대적 발상을 깨기 위해서는 혁명이란 폭력적 수단이 필요했다. 본래 프랑스혁명 이전 1789년 6월 삼부회에서 각 계급별 대표가 나와 대책회의를 요구했으나, 그것은 묵살되고, 삼부회가 열린 인근에 테니스코트에서 입헌 국가로 되기를 요구하는 선언이 있은 후 결국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반복되는 시대적 착오에서 끊임없는 희생과 발전에서 인류는 그렇게 흘러온 것이다. 그렇게 된 역사를 과학적으로 고찰해보면, 인간은 결국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현실적 억압과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계몽이다. 그러나 계몽이란 이름은 어느새 하나의 신화(억압)로 되어 그 기나긴 무지의 파도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칸트는 계몽이란 것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어떻게 본다면 인간의 인식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과 동시에 사물에 대한 합리적 사고에서 진정한 시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물의 본질과 세상의 본질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이성으로서 그 구조를 풀어갈 수 있어도 그 해답을 찾아갈 수 없다. 인간이란 필연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연성이란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단지 단순한 선택적 기점이 수많은 인간에게 큰 여파를 주는 것이다.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2권>에서는 바로 그런 세계에 대해 마리아와 백련으로 통해 보여준다. 이미 1권에서도 시영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노암 촘스키의 언어학 관련 강의가 있을 정도이니, 작가 역시 노암 촘스키의 언어학 연구도서만 아니라 그 외의 책을 봤을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해준 것이 마리아가 미국 의회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한 명의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라이트노벨에서는 모든 인물이 가상에 가까운 존재이고, 설사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조건과 상황적 부여가 다르다. 그런데 1명만큼은 완전히 잘 포섭한 것 같다. 미국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나온 공화당 존 매카시가 나온 것이다. 존 매카시는 1950년 전후로 활동하던 실제 미국 공화당의원으로 그는 각종 뇌물, 비리, 스캔들로 인해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고, 그가 그에 대한 대안으로 미국 내에 소비에트 연방 첩자가 있다고 하는 매카시즘을 만든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과 냉전관계에 있던 미국과 당시 1950년 한국전쟁은 그로 하여금 정치적 힘을 주었으며, 추후 그가 퍼뜨린 폭로는 루머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미국정치사에서 매우 악명을 날리게 된 인물이었다.

 

바로 그가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2권>에 나타나고, 마리아는 그에게 정부가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는 이야기하면서 협박으로 대한다.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을 보면 이 라이트노벨이 구성하는 세계관은 확실히 어긋나고 비틀어진 부조리만 보여준다. 문제는 그 부조리에 대하여 그대로 인정하는 것보다 그 부조리에 대해 부조리로 대응한다는 점이다. 헤겔의 발언으로 시작해서인가? 헤겔의 변증법에서 “찬, 반, 합”이라는 것이 있다. 즉 부정의 부정은 합이라는 긍정이라는 점이다. 부조리로 통해 부조리를 이용하는 마리아의 입장에선 긍정보다는 사실 또 다른 부정으로 이어진다.

 

단지 마리아는 그 부정의 부정으로 하여금 자신의 긍정적인 포인트를 올린다는 점이다. 주인공 시영의 눈에는 그런 마리아가 살아가는 세계란 부조리를 넘어 납득하기 어려운 세계인 것이다. 문제는 그 납득하기 어려운 세계라는 것은 매우 비정하고도 합리적이고, 또한 이해득실이 명확한 점이다. 2권에 새로 나온 등장인물인 선우백련, 그녀는 마치 은빛으로 이루어진 머리와 의상으로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의 광기는 마리아를 능가하여 psychopath라는 정신적 착란을 보여준다. 광인이란 존재는 매우 무섭고도 순수하고도 예술적이며 위대한 인물이다.

 

광인이기에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으며, 보통 사람이 발견하지 못하는 법칙을 발견하여 당대 사회의 대표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사실 루소라는 사상가 역시 끊임없이 주변 사람에 대해 의심하고 프랑스 파리 사람들이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 할 것 같다는 강박관념으로 광인처럼 지냈다. 광인이란 존재는 보통 사람이 될 수 없고, 보통 사람으로 보여줄 수 없는 일들을 해낸다. 문제는 광인 중에서 psychopath적인 요소는 범죄라는 극단적 위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점이다.

 

선우백련이 처음 나타난 것은 어느 방송국 촬영, 그녀는 자신에게 오빠가 있다면서 그 오빠에 대해 사랑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마치 그 TV 화면 너머 시영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른바 아우라라고 하는 눈앞에 상대방이 없어도 마치 호응을 해줄 것이란 믿음처럼 말이다. 백련의 등장은 이른바 psychopath적인 광기부터 시작한다. 그녀 주변에 있던 방송국 직원들이 모두 이상하게 보이더니 살점이 떨어져 온 몸이 노출되어가더니 모두 사망하는 생화학 테러를 당한다. 미국의 유명한 학자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보면 인류의 역사에서 무기의 역할은 문명을 가진 국가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 배경은 무기가 되는 쇠로 통해 총과 칼을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균을 이용하여 생물화학적인 무기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자들은 쇠로 만든 총과 칼보단 오히려 생화학 무기에 의해 더 많이 사망했다고 한다. 인간의 전쟁과 분쟁에서 생물화학적 테러는 예전에 미국 탄저균 공포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선우백련은 그런 생물화학적인 무기를 소유하고, 그것으로 통해 의학과 약학을 익혀 세계 최고의 거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직접적으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분명 무기다. 하지만 그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의약기술이다.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인간이 생명을 다루는 것은 상당히 윤리적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런 생명을 토대로 어떻게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대로 가진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세계에서 의학이 뛰어난 국가로 미국, 일본, 독일과 같은 나라다. 그 중에서 일본과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서 실제 살아있는 사람으로 실험을 하던 비윤리적 행위를 한 전범 국가이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의 731부대의 연구 자료를 이용하여 의학기술을 발달시켰다. 인간이 저지른 잔혹하고 추한 행위가 후세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아이러니다.

 

이런 관점은 폭력이 하나의 미라고 여기는 파시스트들에겐 매우 달콤한 사상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폭력으로 만들어진 성과는 결국 후대에 받아도, 그 다음 후대에 받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누군가는 폭력으로 비틀어지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백련은 자신이 살아있는 인간을 수술용 칼로 그대로 해부하는 순간에 재미를 느꼈다고 한다. 마리아의 경우, 오로지 이익을 위해 마키아벨리주의적인 인간이 되나, 그런다고 재미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감정을 제외한 그 모든 것으로 판단하는 마리아와 달린 백련은 감정과 이성도 없이 오로지 동물적인 본능에 의한 파괴였다.

 

그런 본능에서 인간에게 감정이란 무척 소중한 것이다. 윤리라는 것은 이성보단 차라리 감정에서 시작되는 계기가 많다. 인간이 무척이나 이성적일 수 있는 가능성은 그가 무척 감정적으로 반응한 계기가 있어 그것이 하나의 합리적인 수학계산처럼 행동하게 하거나 혹은 감정 자체가 없으면 가능한 것이다. 백련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란 결국 인간이란 아무렇게나 죽여도 무방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죽음으로 수많은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이 인간이 가진 아이러니다. 더 심한 아이러니는 그렇게 삶을 연명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그들을 편을 무조건적으로 든다는 점이고, 한편으로 자신들은 매우 도덕적이고 바른 인간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작품에서 보면 마리아와 백련이 살아가는 세계란 부조리 자체가 합리다. 모든 게 힘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백련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한 시영은 마리아의 도움으로 살아남으나, 그 행위를 한 백련은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때 시영의 억지스러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기계를 조정하는 신처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선택한다. 바로 시영은 이 문장의 위에서 보인 인간이 가진 이중적인 모습에서 탈피하기 위한 모습이다. 로스차일드란 새로운 가문에서 나온 캐서린의 제안은 바로 인간이 가진 오랜 부조리에 대한 시영의 선택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시영은 이때까지 부조리한 세계에 살아가는 여동생을 보고, 그것이 악이란 요소로 각인하나 그 악이란 존재인 여동생은 적어도 자신에게 선이란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인간의 절대적 가치인 진을 뒤로한 채 선이란 가치가 하나의 미적 가치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시영은 선택의 기로에 있던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당주인 캐서린이 제안한 게임은 바로 러시아룰렛이란 권총자살이었다. 러시아룰렛은 총알 1발은 장전하여 6번의 방아쇠에서 운이 없는 사람의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무서운 도박이다. 그러나 이번의 도박에선 총알이 없는 빈 권총이었다. 그 총알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총알이 아니라 시영에게 바라는 세계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총알이었다.

 

마리아와 백련은 살아남기 위해 많은 인간을 희생했으나, 그 희생만큼 그 이상의 혜택이 인간에게 갔다는 사실성이 있었다. 만약 그런 모든 것을 부정하고 혼자 착한 인간이 되는 것보다 그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시영의 선택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정치를 하는 인간은 더럽다.”고 말이다. 하지만 많은 인간들은 자신에게 그런 더러움을 안고 갈 자신도 없이 현실을 외면하다. 그래서 헤겔은 인간의 무지몽매가 계속 이어진다고 장담했던가? 부조리에 대하여 결국 부조리로 대응하는 시영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여동생들이 그 더러움을 안고 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리아는 그 누구에게는 더럽고 악의 화신일지라도 오직 시영에게만 순정적인 여동생이면서 한편으로 사랑의 광기에 빠진 여자였다. 오빠를 자물쇠에 결박하여 자신의 감정을 애무하던 마리아에게 오직 감정적으로 비논리적으로 대할 수 있는 시영이었다. 자신의 윤리적 감정이 배제된 합리성을 세계에 보여줄 때마다 거기에 해당되는 보상심리가 시영에게 갔다는 점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친모를 살해하여 당주가 되었던 이유 역시 시영을 구하기 위한 이유다. 마리아의 아버지가 마리아에게 시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마리아의 어머니는 시영의 존재를 반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우백련의 어머니가 결국 시영의 어머니고, 세계 3대 균형을 가진 권력집단이었다. 그런 2가문의 혈통을 이은 시영은 결코 권력을 유지하고 이들에게 가장 제거하고 싶은 존재 중에 하나일 것이다. 시영이 더러운 세계에 입성하는 것을 아마도 마리아의 사촌언니인 이자벨은 고대했는지도 모른다. 오직 시영만이 마리아가 가진 기계적인 합리성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스차일드 가문이 시영과 얽힌다는 것은 삼각구조의 권력에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면서 또한 생각한 것 중에 하나가 작가가 영화를 많이 본다는 것이다. 백련의 재판이 열릴 때 시영이 갑작스레 돌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시영이가 한 마디를 한다.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요 대사는 영화감독 정지영의 <부러진 화살>에서 배우 안성기 씨가 맡은 김교수가 재판에서 하던 말이었다. 물론 <부러진 화살>이란 영화는 서사의 엔딩이 완벽한 마무리가 아니라 영화관에 들어온 관객에서 그 영화의 뒤를 이어가길 바라는 열린 서사로 마무리된다. <부러진 화살>에서 보인 재판과정도 그러하나 사실 권력이란 이름 아래 벌여진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실제 있었던 일을 각색하여 만들었다고 하나, 일단 영화다 보니 다소의 허구가 들어간 것은 사실이나, 영화의 본질적 가치로 본다면 부조리에 대한 정당한 도전은 결국 부조리에게 패배하고 만다. 따라서 나는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이란 작품이 부조리에 대해 부조리적인 것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설정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문제는 폭력을 부른 원인은 분명 계기와 원인이 있으나 그 폭력을 제공한 당사자는 그 폭력이 하나의 정당성이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영의 선택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2권의 중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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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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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을 처음 소개받을 무렵, 나는 단순히 근친상간 문제를 단순히 재미로 풀어가는 작품일 것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제목 그대로 세계 제일의 여동생이라면 그 여동생을 가진 사람이 주인공이며 화자가 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김월희, 일러스트는 nyanya로 구성된 이 라이트노벨을 처음 바탕표지를 보았을 때 검은색 드레스에 검은 장갑, 그리고 검정색 스타킹에 가터벨트로 연결되어 다소 페티시즘을 요구하여 이 작품의 주인공의 동공은 하나는 푸른색 하나는 노란색 계열이었다.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으나 작품 내만의 리얼리즘에서 생각해보면 라이트노벨 장르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을 통해 작품 세계만의 리얼리즘, 즉 보는 사람의 독자로 하여금 그 독자의 리얼리즘에 맞춘 게 아니라 작품 내의 리얼리즘으로 본다면 설정 상 여자주인공인 여동생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블랙헤이젤이란 아주 거대하고 무서운 무기전문판매의 당주를 여자 주인공 마리아가 맡은 점에서 <세계 제일의 여동생>은 세계적으로 부와 권력으로 어느 국가를 좌우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진 여동새을 가진 남자주인공 시영의 이야기다.

 

화자는 시영이고, 주로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모든 이야기를 진행하나, 가끔 시점이 변경(도로시)되는 구조도 보았다. 작품 시작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학생이 시영이 어느 날 교실에 난입한 외국인 미소녀에게 오빠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루마니아로 가면서부터다. 시영은 본래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과 피가 섞인 혼혈이고, 그의 아버지는 마리아의 아버지로 설정되어 있다. 그는 어린 시절 고아원에 키워지다 입양되었고, 추후 그 입양가정의 가장불화로 가출한 채 혼자 힘들게 살아왔다.

 

과연 작가가 시대적인 흐름과 어려운 경기를 잘 파악했는지 88만 원 세대라는 말을 사용한다. 아르바이트로 통해 일하여 세금과 공제를 제외하면 약 88만 원정도 받는 젊은 세대를 지칭하며, 그는 평소 어려운 가정상황으로 아르바이트 하면서 학업을 수행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월세를 들어갔는데, 집주인에게 월세를 돌려받지 못한 채 뺏기는 수난에서 전형적인 한국 사회의 약자로 표현된다. 그런 그에게 혈연도 모르고, 어렵게 잡초처럼 컸기에 그의 수난은 여전히 마리아의 집에서도 진행된다.

 

마리아와 시영의 첫 만남, 그리고 마리아로 통해 보는 시영의 눈에는 분명 이 작품을 만든 작가가 재미로 만들면서도 재미를 느끼기에는 뭔가 부족하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작품 초반부터 독일 관념철학자 칸트를 이은 헤겔의 문구가 나오고, 선생님과 마리아의 대화에서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내용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대혁명 이전의 앙시엥 레짐(구체제)에 대해 살펴보면 계급구조가 왕족과 귀족, 성직자, 기사, 상인과 농민(공인 및 그 외 하위 계급 포함)으로 나누어져 있는 봉건사회였다. 하지만 17897월 혁명과 동시에 3년 후 루이16세의 목이 단두대에 잘라나간 덕분에 계급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란 것으로 분리되었다. 물론 1830년과 1848년의 혁명으로 부르봉왕가, 오를레앙파, 보나파르트파의 연합에서 모든 것이 부르주아로 넘어간 게 아니나, 적어도 기존의 왕가는 금전소유 부르주아와 토지소유 부르주아로 넘어가면서 프랑스 사회에 여전히 건재한 시절이 있었다(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그런 점에서 마리아는 순수혈통을 지향하는 귀족집안에 엄청난 부자라는 점이다.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는 가문에 더구나 순수혈통을 위해서는 4촌 이하의 근친상간으로 종족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보통 순수혈통을 중요한 집안에서는 부모 내지 조부모의 피가 100%가 아니면 배척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의 조선시대나 이전시대 역시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천한 가문에 태어날 경우 자녀들은 바로 천한 신분으로 낙하된다. 그런 점에서 시영의 존재는 블랙헤이젤 가문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이며, 모든 사건의 발단과 투쟁은 시영에 의해 시작된다.

 

시영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 사회란 그저 부조리였다. 그런 부조리에서 루마니아에 옮겨온 그로서 부조리는 또 시작이었다. 한국사회에는 이른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서 부의 척도로서 인간적 대우 및 생활여건이 결정되었다면, 이제 루마니아에 온 시영은 가문의 일원에서 순수 혈통적으로 부조리를 겪는 셈이다. 거기다가 마리아의 여동생인 도로시는 시영에 대해 적대적이고, 시영의 경호원인 리리 역시 시영에 대해 호의적보다는 악의적으로 학교에서 변태로 몰아넣는다.

 

한국에서 가난이란 부조리에서 계급상향은 자본주의경제구조 속에서 막대한 금전이 오면 수직으로 신분이 올라갈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시영은 작가의 농담조로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에서 부르주아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부르주아 내에서도 역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사실 부르주아도 대부르주아와 더불어 쁘디부르주아라는 단어가 있다. 시영이 다니게 된 학교 역시 부르주아 학생만 다니지만, 그 속에도 엄연한 계급과 위치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시영이 동양인에 신입생, 그리고 불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자 일부 남학생들이 시비를 건다. 이때 도로시가 그가 블랙헤이젤의 하프이기 때문에 시영을 건들게 하는 것은 결국 하프라도 블랙헤이젤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한다.

 

남자아이들은 블랙헤이젤이란 가문의 위압에서 두 손과 두 팔을 모두 바닥에 올리며 개처럼 짖어야 했다. 그 정도로 블랙헤이젤이란 무서운 이름이고, 부르주아 내부에서 최상급이었다. 그런 가문일수록 내부적으로 보수를 지나 수구적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거론하듯이 근친혼으로 통해 계속 세습해온 가문의 내력처럼 가문의 일원이 매우 적다는 점과 서로 친하게 지내기보단 살인위협으로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 선박에서 테러조직이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블랙헤이젤 내부 권력다툼이란 무서운 내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숨을 노리는 것은 마리아일 수 있으나 한편으로 그 원인은 시영이었다. 뒤에서 사주한 이유는 마리아가 근친혼에서 사촌을 택한 것이 아니라 시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친척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경호원인 리리는 헬기선착장의 수상한 남자를 모두 처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잔혹한 가정사는 큰 바다의 하이재킹처럼 리리가 총으로 테러범의 머리를 쏘아 테러범의 머리에서 피와 뇌수가 나오고, 어느 테러범의 목에 나이프를 꽂아 그의 경추를 지나 경추 안의 척수신경을 끊어버릴 정도로 잔인함을 보여준다.

 

시영의 복무를 때린 범인에 대해서는 15가량 바늘을 손가락 10군데에 심어 넣어 두 팔을 불구로 만든 후에 바다에 넣어 수장시키는 행위에서 인간에게 권력이란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큰 도구이나, 한편으로 권력을 가진 것만큼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증오와 광기를 넘치게 한다는 점이다. 피가 튀고 살이 잘라내도 무표정하고 냉정한 얼굴을 가진 마리아에서 인간의 잔혹함은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라면 그렇게 만들게 되는 것인가? 블랙헤이젤 총수이면서도 그녀는 세계 모든 전쟁에서 무기를 팔아먹는 무기상이다. 마피아적인 시장경제 방법 속에서 막대한 권력과 더불어 사설경비 아니 군부대를 지닌 것만으로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 내에서는 그런 비정상적 현실에 대해 그게 마치 당연함을 부여하는 것보다 시영이 화자로 되어 그녀가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 비정상적인 광기는 마리아의 개인적 영역보다는 그녀가 블랙헤이젤 그룹의 총수와 더불어 부모 없이 혼자서 그 난국을 헤쳐나간 것, 그리고 세계 자체의 불균형으로 인해 영향이 미치는 것으로 보여준다.

 

작품 내에서 사상적 양립으로 인한 내전이나 혹은 에너지를 탈취하기 위한 전쟁에서 아무 이유 없이 죽는 어린아이보다 차라리 개발도상국에서 노동으로 착취당하며 사는 아이들이 행복한 편이라고 말한다. 그런 비정상적인 윤리의식 발언에서 마리아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기에 시영의 관점에서 그것인 합리적인 논리일지라도 그것이 납득되지 않은 부분이 나온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는 논리는 논리로서 제시될 때 논리적으로 작용되기보단 그 논리가 윤리적인 토대에서 논리로 될 때 논리적으로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마리아가 윤리적 의식을 찾게 된 동기는 도로시의 실종과 더불어 시영의 행동이다. 그녀는 이때까지 블랙헤이젤의 양식에 따라 삶을 살아왔다면, 시영과의 만남과 바다 위의 하이재킹, 그리고 시영이 도로시가 없어진 상황에서 가장 저돌적으로 나간 것을 말이다. 기존의 마리아는 나는 블랙헤이젤의 가족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블랙헤이젤 가문이기에 같이 산다.”에서 시영은 마리아의 오빠이고 도로시는 마리아의 여동생이다. 그러므로 나는 가족이기에 같이 산다.”로 바뀐 것이다. 삶의 가치 변동에서 결국 도로시는 찾아오고 도로시를 감금한 일족은 제거된다.

 

그의 제거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블랙헤이젤 당주의 오빠를 총으로 쏴서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오빠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관여하지 않은 광기어린 사랑이 처음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과 사고에서 후반에는 상식을 지나친 행동이나 제법 보편적인 인간관계 즉 가족애라는 것이 성립된다. 거기에 다소 하렘구조가 성립되기에 초반에 시영에게 마리아만 달라붙다가 시영이 작품 중반에 리리의 부상을 보살펴준 이유로 리리는 시영의 침대에서 옆에서 달라붙는다. 물론 12살 어린 소녀라고 하나 리리는 살인기계와 같은 무서운 존재다. 그런 살인기계가 어렵게 살아 품위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남자아이 옆에 달라붙는 것을 본다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과 동시에 가장 약점이 되고, 또한 제일 강하게 만들면서 가장 약하게 만드는 정이라는 마음인 듯하다.

 

작품 전반적으로 보고, 작가가 본인이 소개하는 글에서 이 작품은 글쟁이라는 직업적인 작가가 재밌게 적기 위해서라고 내가 언급했다. 하지만 막상 내용전개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내용 전개상 보여주는 배경적 지식은 어렵고도 난해했다. 가령 초반부터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적 내용도 모자라, 마리아의 졸업논문이 소비에트 연방의 독재정부를 만들게 한 스탈린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 작가는 충분히 사상체계에 숙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탈린이란 인물은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을 원조 및 지휘하던 중요인물이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에서 헬기 타고 등교하는 학교가 계몽주의적 성향을 가진 점에서 루소, 볼테르, 디드로와 같은 18세기 사상가들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언어학자로서 비트겐슈타인이나 노암 촘스키의 언급은 그냥 스토리 진행에서 주인공이 자신은 전혀 이해되지 않으나, 옆에 학교 학생들이 모두 다 수업을 받는 점에서 작가가 그런 사람들을 모르고선 그런 내용을 적을 가능성이란 없다. 단지 마리아의 성적인 윤리의식 결여에 대한 에피소드와 도로시, 리리의 시영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혹은 사건이나 위기만 보면 작가가 그저 망상적인 라이트노벨을 만드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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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1 - Novel Engine
정진교 지음, 라티세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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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에 대해 처음 제목을 보면 내가 아니면 누구를 지키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아니면 누가 대신 그 일을 대체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서 다시 표지를 보면 알 수 있을만한 정보가 있다. 일러스트 표지에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미소녀가 상당히 도발적이면서도 강압적인 자세로 한 남학생의 허리를 의자로 삼아 앉고 있다. 문제는 여학생을 받치고 있는 남학생의 표정은 매우 곤란하고, 게다가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다는 점이다. 결국 일러스트 표지에 나오는 남학생은 여학생에게 잡혀 사는 이른바 호구 인생을 증명하는 셈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주민수과 윤무예, 무예는 일본의 한 라이트노벨인 <인류는 쇠퇴했습니다>와 달리 오히려 <인류는 진화했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8대 신인류 중에 가장 힘이 세고 강력한 베히모스라는 자질을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일러스트로 봐서는 혹은 작품 내의 쓰리 사이즈로 봐서는 보통 아이돌스타와 맞먹을 정도의 외모와 스타일이나 몸무게는 보통 그 나이의 키에 3배 정도 무거웠다. 약 120㎏, 몸무게 무거운 경우 보통 신체적 능력에서 민첩함과 순발력이 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나 오히려 몸무게가 늘어난 만큼 스피드가 올라가고 운동 역시 보통 운동선수보다 월등했다.

 

그런 그녀는 언제나 주민수를 부려먹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먹이 배에 들어가거나 손등이 이마나 정수리에 꽂히고, 주로 등 쪽으로 킥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항상 주민수 옆에서 모든 것을 장악하는 그녀에서 9년 지기 소꿉친구, 아니 문루고등학교에 가면서 10년 지기 소꿉친구는 여전히 주민수로 하여금 친구인지 아니면 노예인지 알 수 없는 생활을 하게 만든다. 모든 발단은 민수의 아버지 주경민, 그의 발 빠른 대응으로 아들이 집에 가니 집은 텅 비어있고, 아버지는 이미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것은 지나가는 차를 들어가 날려버리는 괴력의 소꿉친구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전학을 같이 가기보단 무예 혼자 가길 바란 민수이나, 그것은 비참하게도 깨져버린 희망이었고, 무예에 의해 전학가게 된다. 전학 첫날부터 신인류를 위한 학교라고 가보니 어느 평범한 학교에 최고층 5층 구석이고, 안에 들어다보니 학생은 3명만 있었다. 모든 감각이 발달한 키메라 채휘정, 인간의 감정을 읽고 조절할 수 있는 하메룬 이신아, 먹지도 않고 오로지 물과 햇빛으로 살 수 있는 위그드라실 소청연이 있었다. 담임은 이제 막 교사자격을 받은 강명훈이란 방임주의자이니 구인류인 민수로서는 사면초가가 따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인류는 구인류에 대한 반발심과 더불어 자신들의 우월심에 민수에게 좋지 못한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주민수란 이름을 무예가 부르면 민수는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여 저절로 서비스해준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문제가 민수를 하여금 신인류학급에 남게 해줄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연재를 할지 아니면 안 할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단권으로 끝내기에는 에피소드가 아쉽게 끝이 나지만, 작품의 의도는 바로 구인류와 신인류의 벽이란 점이다.

 

인간에게 누구나 평범한 존재 이상으로 특별하다고 여긴다. 즉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가 소중하고 특별하기에, 그리고 그런 마음이 있기에 보편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만약 그 보편성을 깨는 존재가 나타나면 인간들은 혼돈이 오게 마련이다. 신인류의 존재는 구인류에게 의문, 호기심, 두려움, 혐오라는 감정을 가진다고 작품에서 하메룬 이신아는 말한다. 익숙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 인간이라면 분명히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다. 알 수 없는 것은 특별한 존재이기에 평범한 인간은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를 망각과 동시에 보통사람이라는 것은 강조한다.

 

그렇기에 배타적인 표현 내지 호기심에 가득하여 마치 구경거리로 보거나,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만약 어느 계기가 불리한 쪽으로 진행되면 혐오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키메라 채휘정의 경우 그런 혐오의 대상이 되었기에 구인류인 민수에게 반발심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신 무예의 경우 민수가 10년 동안 옆에서 친구로 있었으므로 그녀가 일반 사람들에게 특별한 위협적 존재가 되지 않음을 증명하여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많은 남자들이 고백을 해왔고, 그에 따라 딱지를 놓아 주었으니 무예의 소꿉친구인 민수에게 화풀이가 돌아가는 것은 인간의 심리현상 중에 하나이다.

 

그런 것을 두고 보상심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자신이 특별함에서 그 특별함은 누구나 가지는 감정이기에 그 특별함을 부정하는 것은 평범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해체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신인류는 매우 난처한 존재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인류를 위해 만든 학급에 민수를 보낸 점은 물론 민수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업무의 연장선에 민수가 있었다는 점과 동시에 무예의 부탁이었다. 무예의 입장에서 자신의 친구는 민수만 있었다. 대부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에서 여자주인공이 매우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남자는 대개 평범한 학생으로 많이 나온다.

 

게다가 남자 주인공은 그 여자 주인공에게 항상 휘두름을 당하고, 그 여자 주인공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믿을 수 있는 친구란 그 남자 주인공이라는 공식이 존재한다. 이런 것을 두고 cliche적 요소로 볼 수 있겠으나,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도 그러하다. 의지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역시 인간관계라는 점이다. 구인류는 대다수이고, 신인류는 극히 소수이다. 게다가 신인류 학생은 10~18세 안이고, 그나마 작품 설정에서 2명이 빠져 4명만 학급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존재란 정말 특별하기에 특별대우보다는 그저 구별하는 설정이 더욱 가깝다. 보통 학교에 낡은 교실 한편에 학급기자재를 보면 그들이 특별한 것보다 그저 구별에 가깝다는 점이다. 대신 기숙사는 그들만 생활할 수 있도록 방이 4개인 기숙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학교 안의 공간은 차별적이고, 학교 밖의 공간은 특별한 점에서 학교와 사회의 분리된 처우를 볼 수 있다. 물론 학교 내의 수영장이 신인류를 위해 만들어져도 4인의 소녀가 수영장은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일반학생에게도 더 많은 시간이 부여된다. 체육시간도 5명에서 운동장을 사용할 때 다른 일반학생과의 격리는 오히려 특별한 대우보단 구별을 넘은 차별적 대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작품에서 이 문제를 두고 이야기를 진행하지 않으나 이런 설정이 있기에 이야기가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수영장도 단지 노비로 지정된 민수를 두고 무예와 신아가 대결하기 위해 사용한 것부터 시작하여 학교 인근 수목원 역시 바로 조치할 수 있는 것도 그렇다. 단지 수목원은 학교라는 좁은 공간의 통제권 대신 공공기관에 속하므로 다른 방문자들과 마주칠 기회가 있다는 점이다. 예쁜 꽃잎을 뜯어 자신의 컬렉션으로 삼으려는 어린아이에게 분노하여 달려드는 청연을 생각해본다면 분명 그들은 일상적으로 노출된 경우 문제가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여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기고, 그 특별하다고 여긴 것을 지나 특이한 존재라고 하여도 결국 인간이란 범주에 들어간다. 구인류에서 민수의 역할은 바로 특이한 존재인 그들에게 생물학적으로 인간보단 사회적 교우관계에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이 작품의 결론이다. 처음 무예를 만날 적에 민수는 무예에게 베히모스가 괴물같이 세다는 말을 하여 전치4주의 부상을 입는다. 하지만 그런 부상을 뒤로 한 채 오히려 무예를 안심시키려 했고, 아버지 경민을 설득하게 하여 무예의 마음을 열어 주게 한다.

 

인간은 타인과 정말 친해지기 위해서는 한 번 싸워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싸움보단 일방적인 폭력이었으나, 무예에겐 그것은 육체적 폭력을 넘어 정신적, 심리적 싸움이었다. 무예의 표정이 항상 굳어있고 표현력이 부족한 여자아이가 되어버린 이유는 자신의 힘이 세진 것에 대해 주변이 두려워하고 있으나, 그 이상으로 자신 역시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특이한 인간이란 이유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외로움이란 사실이다. 민수의 전학을 억지로 가게 만든 것은 아버지의 계략보단 무예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어린 시절 무예가 1주일 동안 연구소에 가고 없을 때, 처음에는 좋아한 민수나 점점 불안해지고 걱정하는 무예의 친구였다. 단지 특이하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없다는 것은 상당히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작품에서도 신아는 인간의 감정을 모두 조절이 가능하나 유독 민수만이 감정이 이성으로서 적절하게 컨트롤할 수 있었다. 단지 무예의 손과 발이 날라올 정도로 신아가 귀엽거나 예쁘다는 말을 하지만 말이다. 또한 소청연을 생각하면, 그녀는 위그드라실이라고 하여 자연환경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학생이다.

 

지구가 너무 심하게 파괴되어 환경오염으로 인해 점점 사막화되어가는 지표면과 대기권의 탄소증가로 극지방의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고, 공장과 자동차에서 뿜어나오는 매연은 산성비나 스모그현상을 만들어낸다. 어떻게 보면 위그드라실과 같이 머리카락으로 광합성을 하는 존재로서는 구인류나 신인류 모두 적대적인 관계다. 하지만 그들도 언제나 혼자일 수만은 없다. 민수는 난초와 작은 선인장을 키우는 것은 취미로 하고, 식물원에 갈 때 청연의 돌발행위를 슬기롭게 막을 수 있었다.

 

특이한 입장에 놓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그들도 특이한 것은 자신의 고유성이지 인간적 관계에서 특이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작품의 마지막에 가면 4명의 신인류가 구인류인 민수를 두고 얼마나 마음이 맞는지 퀴즈쇼가 열린다. 그 퀴즈쇼에서 키메라, 위그드라실, 하메룬은 자신의 특이함에 대해 구인류인 민수가 맞춰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모두 10문제에서 9문제는 맞춘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맞추지 못하는데, 그것은 서로 입장을 맞추기보단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수가 무예와 퀴즈문제를 풀어나갈 때 9문제 모두 엇갈리고, 마지막 문제만 맞춘 이유는 한 쪽만 일방적으로 맞추기를 바란 게 아니라 서로 상대방을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신인류에 비해 오랜 유대감이 존재한다고 했으나,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해 얼마나 보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다. 물론 신인류 쪽에 대해 맞춰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대다수가 아니라 극소수이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억지로 맞춰가기란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우정의 손을 건네준다면 물론 특이한 사람들도 일반적인 사람들과 맞춰나갈 필요가 있다. 마지막의 퀴즈는 그렇다. 그것은 자신과 상대방이 어떤 존재라고 인식하고 먼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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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국내에서 미술에 대해 혹은 미학에 대해 일반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그렇게 잘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미학에 관심이 생긴 나라고 하여도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미술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미학(美學)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영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영상매체에 의해서다. 그리고 미학을 알기 위해 우연히 진중권 교수의 <미학 오디세이>를 접했고, 그의 도서 중에서 미학 이외에도 다른 문화평론이나 사회에 대한 의견을 담은 도서를 보았다.

 

 

그런 와중에 미학에서 이번에는 미술사에 대한 책을 냈었을 때, 흥미가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미술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예술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술은 인간의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처럼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일부계층들이 아니면 미술에 대해 접근하기가 어렵다. 대부분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미술은 그저 그림 그리는 사생대회나 점토나 색종이 오려붙이기란 실기로 점수 매기는 것에 치중하고, 미술의 본질적인 미(美)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 시절, 특히 석고상이나 그림이 벽에 걸린 미술교육실에서 내가 배운 것은 미술인가? 아니면 수능을 치기 위한 방법인가? 안타까운 사실은 미술이란 과목은 수능조차도 나오지 않은 소외과목이었다. 그저 내신에서 적당히 시험보기 위해 이론 수업을 하며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손재주가 없는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도 벅차고, 사생대회에 나가 풍경화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 미술시간은 그저 악몽이었다. 그림을 잘 못 그리면 점수가 낮게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미술이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미술은 그야말로 수능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고, 내신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교과과정으로 전혀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것처럼 느꼈다. 어떻게 보면 미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을 알아야 했다. 세계사나 현대사 혹은 윤리도덕 같은 것들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윤리도덕 시간에 비록 짧은 수업시수이나 그곳에 나온 철학가나 사상가 그리고 그들이 저술한 많은 도서들이 결국 예술이란 큰 흐름에 조류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미술이란 과연 나 같은 일반인들과 분리된 존재인가? 라는 의문을 가졌다.

 

 

고등학교 시절 최신 미술에 대한 정보는 거의 피카소에 이르면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단지 피카소가 인상주의 내지 큐비즘이란 입체적인 회화를 쓴 것만 말하지 왜 그가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2~3년 이내였다. 미술 그러니깐 미술을 포함하는 예술이란 것은 우리 인간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같이 흘러가는 하나의 시대적인 거울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요새 깨닫고 있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의 <미학 오디세이>도 그러하나 <교수대 위의 까치>와 같은 도서 역시 그러하다.

 

 

미술이란 예술에서 보인 그림의 한 폭은 우리에게 그 시대에 어떤 사람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왜 그런 식으로 그리게 되었는지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히 외우기 식으로 고전주의 → 바로크 → 로코코 → 신고주의 → 인상주의 등등으로 넘어가는 것이 과연 우리 생활사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에서 없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그동안 <미학 오디세이>나 <서양미술사> 등의 도서로 통해 다르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미술에서 보여준 것이야 말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진 가치를 보여주고, 그것이 그 시대에서 당연한 도덕적인 관념이었을 것이다.

 

 

도덕이란 것은 단순히 윤리하고 다른 것이다. 미적인 가치, 즉 당시 사회에서 가져야 할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근대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다른 것이 되어야 했다. 인간에게 관념이란 것이 있기에 그 관념으로 하여금 거대한 흐름에 순응되어야 한다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예술로 하여금 하나의 숭고함을 부여하였다. 서양의 오래된 성당이나 교회, 회화, 동상을 등을 보면 그것은 예술을 위해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었다. 인간의 지배를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고전예술성을 지나 근대로 오면서 마르크스주의의 도래에 따른 인간은 거대한 관념이란 조류보단 역사적 자아를 가진 하나의 주체로서 보면서 예술이란 것은 기존에 가진 성질과 달리할 수밖에 없다.

 

 

고전적으로 예술의 존재는 지배계급인 왕족, 귀족, 성직자, 기사 등에 의해 유지되었다면, 근대의 유럽에선 모더니스트로 통해 예술은 예술을 위한 것이 되어야 했고, 또는 예술은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딱히 예술사를 논하기에 나의 지식에 한계성이 있으나, 적어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예술은 변모한 것이다. 예술에서 미술은 계속 변해가고 있으며, 예술이 인간에게 정치적, 미학적으로 고정관념을 부여하고 통치자에게 하나의 정당성을 제시한다면 그것에 대해 파괴하는 것도 존재한다.

 

 

아방가르드라는 전위는 예술이면서 예술임을 부정하며, 또한 순수하게도 대중문화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대중문화에서 벗어날 경우 엘리트주의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기에 아방가르드 역시 대중들을 정치적인 해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에 한계성이 있었다. 미술이란 것은 관념에 의한 것을 시각적으로 혹은 이번에 소개된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청각이나 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다다이즘과 관련하여 마르셀 뒤샹의 <샘>에서 예술은 그저 작품에 보이는 미적 감각일까? 아니면 작가의 명세로 통한 것인가?

 

 

미술이란 영역에서 이런 실험들은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령 어느 유명한 작가 및 교수가 있는데, 그의 작품은 늘 많은 관심과 다양한 평들이 따른다. 그가 만약 전화로 오늘 필요한 작품을 목수나 대장장이에게 이야기하여 주문하면 그건 누구의 작품인가? 언제 한번 어떤 미술대학 교수의 블로그에서 재미난 일화를 보았다. 어느 미술가가 거리의 걸인을 데리고 와서 물감이 어지럽게 뿌려진 동판을 닦게 했다는 것이다. 걸레에 모든 물감이 제거될 일은 있을 수가 없고, 대신 아주 이상하게 색이 덥힌 동판이 되었다. 물론 그것은 작품으로 인정받았겠으나, 한편 폭로로 통해 그것은 우습게 되어버린 해프닝이었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가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다”라고 했다. 교수의 이름은 결국 상품이고, 상품은 결국 기호인 교수로 통해 이루어졌다. 미술이란 것도 결국 자본주의 안에서 기호라는 기표에 의해 의미조차 없는 것도 의미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듯 현대사회로 오면서 미술 역시 현대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고,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앤디 워홀이란 팝아티스트를 보자. 그는 마릴린 먼로나 마오 쩌둥이나 코카콜라 등의 이미지를 복제하여 다양한 색으로 펼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코카콜라는 우리 모두가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라도 세계 최고의 부자라도 그들이 마시는 코카콜라는 모두 같은 맛이다.

 

 

옛날 우리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었던가? 걸인의 찬, 왕후의 밥이라고, 단지 조금 유감인 것은 우리는 쌀로 지은 밥만 먹는 게 아니라 반찬도 같이 먹기에 코카콜라처럼 느낄 수 없는 점이다. 코카콜라를 비롯한 많은 인스턴트 식품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이기에 미술적인 요소로 볼 수 있는가? 누구나 간단히 접하기에 팝아트에선 자본주의에 대한 친화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잭슨 폴록을 발견하여 미국 미술평론에 큰 영향을 준 그린버그의 상황을 보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래 트로츠키주의자인 그린버그는 아주 특이한 상황에 놓인다. 1940년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피켈을 맞고 사망한다.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트로츠키와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한 스탈린에서 그린버그는 아주 애매한 상황에 놓였다. 스탈린이란 트로츠키의 적을 따를 수도 없고, 그런다고 마르크스주의자인 트로츠키가 없는 이상 노선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50년대 메카시즘이 미국 내에서 열풍하자 더욱 그린버그에겐 스탈린에 대한 적대적 성격과 동시에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스탈린을 배격하는 기존의 예술정신이 미국의 자본주의적 성향에 따른 것이 아닌데도, 그것이 하나의 미국의 상징이 되어야 했다. 미국은 개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기에 예술은 정치적 입장보단 개인의 역량으로 매겨지고, 그것은 곧 미국의 정치적 자유가 있다고 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이 된다. 정말 그것은 정치적 자유가 있기에 가능한 예술인가? 단지 그렇게 보이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잭슨 폴록은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처럼 그 순수성을 지향하는 작품이 나온다.

 

 

미국의 아방가르드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바로 이해하지 못하나 적어도 유럽의 아방가르드와 다른 점은 분명하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예술과 삶의 경계는 허무는 것이라면, 미국은 자유가 있다고 하는 냉소주의에 대한 이념적 우위를 만들기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은 직접적으로 전쟁을 겪었고, 전쟁에 의한 정신적 충격에서 나올 필요가 있었다. 또한 프랑스에선 드골에 저항한 5월 혁명에 의해 늘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날이란 그룹이 미국의 팝아트에 대한 부정적인 관조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방가르드는 유럽의 아방가르드와 달리 사회전체에 대한 혁명적 기류보단 그저 개인적 만족감이 더한 것 같았다. 미니멀리즘을 보는 순간 나는 특수촬영을 하는 셋트장이 생각났다. 특히 일본의 울트라맨과 같은 외계초능력자가 거인화되어 괴수를 무찌르는 장면에서 소품들이 미니어쳐가 되는 모습을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놓여있는 모순에 대한 혁명적인 구호보다 그저 공간적 배치에 따라 미의 가치가 그냥 있다는 정도로 보였다. 미국과 유럽의 미술은 그런 차이성이 보인 것 같았다.

 

 

현대미술에서 보인 특이사항은 이런 기존에 보여준 예술에 대한 반란이다. 아니라면 원래 상태에서 다른 방법으로 진행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처음으로 모더니즘 이후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후기 모더니즘이란 단어를 보았다. 처음 본 낯선 개념, 그것은 결코 이해가 바로 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미술적 영역이 아니라 미학적 영역에서 사상까지 연계된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미디어의 발달은 실제와 가상의 차이를 벗어나 차라리 가상이 현실을 대체하는 세상이 되었음을 알린다. 미술이란 그저 행위에 대한 결과에서 미술 자체가 행위라는 것도 그러하나, 그것은 세상이 거대한 서사에서 탈피하려는 포스트모던을 보여준다.

 

 

그런다고 그것 역시 한계성이 온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을 가진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전사에 의해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단 어느 누군가에 의해 조장되고 그 누군가를 위한 이익이 된다는 점이다. 열렬한 행위자일수록 가장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지루한 구경꾼이기에 미술로 통해 행위자는 그것을 따르기도 혹은 파괴하기도 한다.

 

 

우리가 예술과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 있는 이유는 팝아트에서 코카콜라가 전시될 수 있듯이 코카콜라 역시 우리가 가까이 하는 존재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기에 가장 예술로 보기 어려운 것이 될 수 있다. 혹은 가장 예술적인 작품 역시 모조와 복제가 있기에 예술작품의 숭고함이 떨어진다. 아니라면 우리 스스로 예술가가 되어 삶과 예술의 경계를 파괴하는 전위적인 존재가 되면 좋겠으나, 그것 역시 스스로가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마저도 잘 꾸미며 예술이 되기에 아이러니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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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6-07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야.. 뭘 이리 길게 쓰셨습니까.. ㅎㅎㅎ 하여튼 성실 그 자체유....
난 슬슬 진중권이 쓴 미학 이야기'가 이젠 다 비슷비슷해서 약발이 좀 떨어진 듯해요...
뭐 미학오디세이에서 햇던 말 서양미술사도 보면 비슷한 말이고...
하여튼 미학을 이렇게 알기 쉽게 흥미쥔쥔하게 소개하는 것도 기술은 최고 기술임..

만화애니비평 2013-06-07 12:57   좋아요 0 | URL
뭐 그건 최고죠...ㅎㅎ
국내에 이런 양반이 없으니 단지 중권이 아찌의 오덕적인 면은 본 받아야 할 가치라고..ㅎㅎㅎ
이전에 공각기동대와 한스 밸머의 관계에서 많은 영감도 받고..
이제 후학을 양성하면 좋겠다고 봅니다..ㅎㅎ
 
고려 무인 이야기 1 - 4인의 실력자
이승한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고려 무인 이야기 1권 째를 보는 것에서 느끼는 바는 역사의 흐름에 그 인물과 배경, 상황과 전세들은 모두 다르나 근본적인 원인과 결과는 유사한 것이다. 대학교 학부교양시간에 한국역사에 대한 강의에서 참 어려운 단어들이 교수님 입에서 나온 것을 기억난다.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그 교재를 찾아 내가 직접 메모한 글들을 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라는 단어를 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마르크스주의가 나오고, 어떻게 하여 마르크스가 역사와 관계가 있는가? 라는 의문에서 최근에 읽어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프랑스 내전>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변증법적인 유물론적인 구조에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된다.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모든 이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특정 인물이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진 정치적인 영향력에 대한 기술이다. 따라서 거대한 서사에서 역사란 항상 대표자에 의한 투쟁의 역사로도 볼 수 있으나, 그 뒤에 숨은 비대표자, 하위계층의 피지배계층 역사 무시하지 못한 영향을 보여준다. 단지 헤게모니적으로 숨은 피지배 세력에서도 대표자가 있는 법이고, 주동자가 있는 법이다. 민중대란에서도 그 민중조차도 대표자가 있고, 그들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기존의 관념이란 벽을 깨는 것에서 또 다른 관념이 되듯이 인류의 역사란 결국 어떻게 하든지 정치적 상황과 그 중심의 대상인물 중심으로 기술되는 게 한계점인 것인가? 어째든 고려 무인 이야기를 보면서 느낀 점은 적어도 그런 인물들조차도 하위계층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가령 무인의 난에서 정중부나 경대승 같이 어느 정도 권력을 가진 세력이라면 몰라도 이의민과 같은 천민 출신들은 상당히 큰 전환점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역사적 이름은 그저 어느 시대에 흔한 하급무장 내지 병사일 것이다. 그런 그들이 어느 순간 쿠데타적 성향이 강한 행동으로 당시 정치권을 좌지우지했다는 점은 하위계층도 상위계층과 정치적 판도에 큰 여파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 흐름에서 그 사회적 흐름은 상위구조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위구조에서도 역시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구조적인 연관성이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큰 역사적 흐름을 일으킨 사람이 그였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처음부터 자신에 대해 살인마, 반역자, 범죄란 타이틀을 쥐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가 원하여 되기보단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환경이란 결정적인 조건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의종을 직접 죽여 연못에 던져버린 이의민의 경우, 그는 분명 키도 크고 힘도 좋았으며, 무장으로 기골이 장대했다.

 

단지 출신이 비천했기에 출세할 길을 찾지 못해 결국 위에 형제 2명과 함께 행패만 부렸다. 모진 고문에 형 2명은 옥사하고, 기골이 장대한 본인은 살아남아 이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문을 집행하던 관리는 이의민을 기특하게 여겨 그를 군적으로 넣었고, 그런 와중에 의종과 의종의 문신들이 무신들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다면 무신의 난이 이토록 피를 부르고 재앙으로 되었을까? 역사는 단순히 결과물로서 우리에게 찾아올 뿐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우리가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적 흐름을 본래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부자연스럽게 해체하는 것과 또는 되돌려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요소들이 있으나, 그것을 증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시작할 수 없으나 다시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나는 점이다. 위에서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나온 이유도 그의 저서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아주 유명한 문구가 나오기 때문이다.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단지 역사의 반복에서 동일한(로 볼 수 있는) 인물이 똑같은 일은 2번 한다면 분명 1번째가 비극으로 되는 것은 큰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반복 1번이 소극으로 되는 것은 이미 그것을 또 다시 재현하는 것은 더 이상 해보았자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나폴레옹 3세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의 계략에 걸려 권력을 실각하고, 파리의 시민들은 1871년 파리꼬뮌으로 천부인권을 외치나 결국 몰살당했다. 비극은 분명 2번 되풀이 되었으나, 단지 그 루이 보나파르트와 주변 인물들은 어리석은 바보가 된 것이다. 무인 정권 이야기도 비슷하다. 만약 똑같은 군사정변을 일으킨 인물이라면 비극과 소극으로 되어야 했지만, 모두 비극으로 되었을 뿐이다. 의종의 죽음과 더불어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결국 자신들의 내부적 권력 다툼에 서로 희생되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역사의 반복에서 인물은 반복할 수 없으나 상황의 반복은 이상하게 계속되었다. 모두 자신의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어 처음에는 정치적 당위성과 명제에 대한 무신정권이라면 이제 그들이 그 정점에 올라가는 순간 자신의 권력을 가시적으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재물만이 필요했다. 중앙에서는 시장과 관련된 관리들과 결탁하여 폭리를 취하고, 농토를 멋대로 갈취했으면, 심지어 임금이나 다른 신료들의 여자들까지 건들고 다녔다.

 

독재자 아니 권력자들이 가장 최후에 목표로 하는 것은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싶은 것은 결국 물질로 이루어진 보물과 땅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우리 사회나 그 시대나 땅과 재물에 미친 듯이 달려드는 이유도 역시 권력을 위해서다. 재물로서 다시 권력을 키우고, 다시 권력으로 재물을 키운다. 문제는 모든 재원과 자원은 한계가 있고, 그 권력이 다투는 정치세계에서도 관직이 있고, 그 관직도 한계지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언제나 정치적 권력에 의해 견제와 음모가 존재하며,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옳은 게 아니라 권력의 힘에 따라가는 것이 옳은 게 되어 버린다.

 

칼을 들고 정권을 잡은 이들이 비참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결국 권력은 누가 더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는 배제해야 하는 점과 그런 와중에 자신의 권력을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은 우월심리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묶여있지 않은 백성들에게 간다는 점이다. 무신정권 이전에도 문신들의 무능한 내정 역시 어지러우나 외지의 지방 역시 어지러웠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자 오히려 무신들이 지방에서 더 큰 부정부패를 저지른 점과 이들의 더 큰 문제점은 문인이 아니라 무인이기 때문에 사납다는 점이다.

 

경대승을 비롯한 이의민 역시 그런 무인이기에 주변에 많은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세를 유지하고 정치적 견제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수많은 사병들을 군집했다. 문제는 이들은 정상적으로 일하고 거주하는 평민이 아니라 무술에 능하고 성품이 불순한 불량집단에 가깝다는 점이다. 경대승의 무인정권에서 그가 실천한 의지는 틀린 것은 아니나, 그것을 하기 위한 과정과 그 과정의 토대가 되는 사병의 존재는 상당한 문제였다. 그들은 인근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관아와 민가에 침입하여 식량이나 재물을 빼앗으며, 심지어 사람까지 죽이는 일을 저지르곤 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경대승과 같은 무신들은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무마시키며, 그런 점을 들추는 행위를 하면 정치적 압박을 가했다.

 

경대승만 아니라 많은 무신권력자들이 폭력적 수단을 사용했으며, 때로는 자신을 탄핵하거나 비판하는 관료에 대해 귀양, 파면, 살인 등을 가했다. 이러니 나라가 어지럽고 기강이 서지 않으니 중앙과 지방의 주민들은 살기가 힘들어지고, 민란이 여기저기 발생한다. 또한 중앙정부와 달리 지방 관료들은 업무의 난이도가 높고 대우는 낮은 반면, 그 지역 세력과 잘 규합했다. 그런 점에서 무신시대에 많은 난이 일어날 때 그 주모자나 세력이 일정한 세력보다는 그 지역의 농민부터 시작해 승려, 불량배, 하급 장교나 군졸까지 넓게 포진했다.

 

문제의 시작은 문신들이 자신보다 나이도 많을 뿐만 아니라 직급도 높은 무신에게 함부로 대한 것이었다. 게다가 왕은 자신의 친위대를 소홀히 하여 마치 잡부처럼 취급하며, 급료가 제대로 지불하지 못해 경제적인 문제로 많은 무인들이 고생했다는 점이다. 결국 무신정권이 탄생한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단지 그 중신축의 인물이 그 당시 직급에 있던 자들이고, 그들이 일으킨 이유는 자신의 성장배경과 더불어 사회적 배경과 시대적 한계가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변에서 남은 것은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더 강하게 되었고, 결국 고려는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빠지며 1170년 의종의 폐위와 더불어 약 220년 뒤에 고려무신인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는 그 자신도 무신이면서 조선건국이념을 유교문화로 변모시켰다. 그러면서 무신보단 문신 위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런 시대적 한계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으키고 말았다. 역사라는 것은 항상 반복되는 이유는 그것을 반성하는 것보단 반대로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증법적으로 다시 똑같은 위기에 봉착한다. 당시는 신분계급이 세습인 봉건사회라고 하나,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여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교과서 무신정권 시대는 정중부만 나오는 짤막한 내용이나 드라마에선 매우 공감되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그 역시 신화적으로 우리의 욕망이나 시대적 욕망이 일치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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