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X소나기 - Seed Novel
류은가람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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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소나기>를 처음 받아보는 순간 나는 황순원 선생님의 단편소설 <소나기>보다는 부활3집의 소나기가 생각났다. 왜 그럴까? 분명히 제목을 보면 <소나기×소나기>이고, 읽다보면 그런 느낌이 물씬 난다. 주인공 김군 역시 시를 읽다가 황순원 작가에 대한 애증의 눈빛과 그의 저서인 <소나기>를 잡고 몇 번이나 보고 또 본다. 그 책이 자신의 손에 떠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소나기는 대부분 국어 교과과정에서 소개되기도 하고, 교과서를 읽는 것에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소설을 읽게 된다.

 

소설을 읽게 되면 알겠지만, 그렇게 좋은 이야기로 마무리가 아니다. 아련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으로 소년과 같이 놀던 옷을 자신의 수의 대신 입혀달라는 소녀의 소원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에 작은 구멍을 내는 것 같다. 그런 것일까? 부활3집에 나온 소나기 역시 그런 감정을 충실히 살렸다. 하지만 더 부활3집의 소나기가 더 가슴을 쓰리게 하는 이유는 그룹사운드 부활의 리더 겸 기타리스트인 김태원 씨가 메모한 글이다. “아! 재기가 바람으로 떠났다.” 부활3집 김재기 씨는 단 3곡의 노래만 녹음하고 사라졌다.

 

그래서 부활3집 1번곡이 소나기라는 점에서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보다는 나에겐 김재기의 목소리에서 소나기를 느낀다. 학창시절부터 꾸준히 듣던 부활3집을 오늘도 변함없이 출근길과 퇴근길에서 들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단편 소설 속에 넌 떠오르지, 표정 없이 미소 짓던 모습들이.

그것은 눈부신 색으로 쓰여 지다, 어느 샌가 아쉬움으로 스쳐 지났지.

한참 피어나던 장면에서 넌 떠나가려하네, 벌써부터 정해져있던 얘기인 듯.

온통 푸른빛으로 그려지다, 급히도 회색빛으로 지워지었지.

어느새 너는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한참 피어나던 장면에서 넌 떠나가려하네, 벌써부터 정해져있던 얘기인 듯.

온통 푸른빛으로 그려지다, 급히도 회색빛으로 지워지었지.

어느새 너는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시작하는 듯 끝이 나버린 그 가사 가절에 담긴 아쉬움과 적막함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하고 싶은 감정들, 부활3집에 담긴 소나기는 그렇게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듣고 있는 노래다. 물론 다른 노래도 있지만, 이 노래만큼 뭔가 아련한 기분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 다시 올 수 없는 그런 허무함이 아닐까 싶다. 라이트노벨 <소나기×소나기>는 분명 작품 속성에 따라 나름 재미를 위해 억지로 상황을 연출하는 모습이 나온다. 학교에 3대 그룹인 학생회, 일진세력, 기숙사를 말이다. 평소 일본에서 나오는 라이트노벨보단 국내에서 나오는 라이트노벨을 읽다보면 뭔가 한국의 라이트노벨에서는 학교생활이 환상적인 공간으로 부여하기보단 항상 억압의 공간으로 보이는 것 같다.

 

이양과 김군이 다니는 학교를 보면 0교시부터 시작하여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 기숙사 생활의 엄격함과 점심시간에 운동장에 뛰어나가려는 젊은 혈기, 그 젊은 혈기를 보충하기 위해 식당에서 붐비는 장면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여기까지 과장되지 않으나, 쉬는 시간만 보더라도 그 짧은 10분 동안 매점까지 뛰어가던 예전의 모습을 생각난다. 1학년 때는 그나마 학교 건물 1층에 있었으나 3학년이 되면서 제 위에 있는 3층으로 올라간 기억이 난다. 계단 1층의 차이라고 하나 그것은 분명 엄청난 페널티가 부여된다. 내려가는 계단은 수월할 줄 몰라도 올라가는 그 시간은 체력을 소비시키기 충분하다.

 

교사건물에서 식당매점까지 뛰어서 왕복 2분, 매점 내의 대기타고 있는 긴 줄, 생각해보면 전쟁은 현실에서 소소한 일들에서도 보인다. <소나기×소나기>에서 그런 치열한 학생들의 삶이라고 할까? 벌써 시기는 입학과 개학이 시작되는 3월인데도 그 치열함은 솔직히 옛날 생각을 나게 만든다. 단지 내가 다닌 학교는 급식자체가 제한적인 게 특징이다. 맛이 좋다고 하나 언제나 병영의 조식, 중식, 석식이 같은 메뉴라면 학교식당의 맛이 좋아도 한계가 온다. 그런 것까지 묘사한 것이 <소나기×소나기>이였다.

 

철저히 학교 안의 생활, 학교 안에서 그 젊은 혈기들이 같이 잠잘 때를 제외하고 같이 있는 것만큼 지루하고도 지겹고 때로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어찌하랴? 바로 그 운명과 같은 만남이 바로 김군과 이양에게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가 네이밍 센스가 없기보단 마치 막 붙인 이름들은 누구나 김군과 이양이 될 수 있다는 개연적인 요소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물론 김군과 이양의 학교에서 보이는 좌충우돌은 왜만한 싸움꾼도 보여주지 못할 혈투였다. 작품에서 김군이 싸우고 와서 교복을 보니 형이상학적 모습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전위적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기보단 눈에 보이나 낯설고 충격적인 모습이 더욱 단어사용으로 어울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그 전위적인 교복이 될 수 있는 김군은 이양과의 격투를 즐기고 있었다고 할까? 수업시간에 시도 때도 없이 그것도 모자라 벌로 화단을 정리하는 도중에서 말이다.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에 좌의정과 우의정인 이양과 김군의 조상 할아버지가 결국 우의정인 김군의 조상님이 영의정이 되고부터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내려오다 이양의 집안 독립운동가로 가문이 몰락하고, 김군의 집안은 거기서 무사히 눈치 보며 살았다.

 

그런 이를 빠득빠득 갈던 두 집안이 시공을 초월해 조선시대에서 대한민국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서로 원수처럼 여긴 2사람이 나온 작품명이 <소나기×소나기>란 점에서 차라리 <로미오×줄리엣, 줄리엣×로미오>처럼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처음에 생각했다. 하지만 복선은 역시 소나기다. 그리고 소나기가 내리는 날인 비가 내리는 날은 뭔가 인간에게 감성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 감성이 때로는 인간의 지난 과거를 다시 찾아오게 한다. 인간은 세상에서 그 무엇을 피해갈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의 과거를 피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양의 과거는 이때까지 자신이 속이고 싶은 것이고, 자신은 그 환상에서 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지는 시간적 흐름은 항상 소나기가 내리는 우울한 하늘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 곧 사건의 연결되는 접점이라고 할까? 김군과 이양의 만남에서 이양의 모습은 자신이 잊고 싶은 과거에서 환상 속에 가려진 현실, 그리고 미래를 기다리는 희망이었다. 인간은 우연에 의해 그것이 우연일지라도 필연에 의해 굴러가는 존재인 것 같다. 이양의 아버지가 노동조합위원장이고, 김군의 아버지가 공장사장이란 점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충돌을 보여준다.

 

<소나기×소나기>를 읽기 전에 김연수 작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라는 소설을 읽었다. 주인공 카밀라 정희재는 잃어버린 자신의 어머니, 정지은을 찾아 한국에 온다. 희재의 할아버지인 지은의 아버지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일어난 것처럼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회사 측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 측에 부른 용역깡패가 지은의 아버지의 동료들을 무참히 폭력을 가해 사람이 죽게 되고, 지은의 아버지는 그런 절망에 이기지 못해 자살을 선택했다. 지은의 아버지는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정희재가 다시 2012년에 한국에 올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이희재의 아버지는 부르주아에서 <소나기×소나기>에서도 그런 비슷한 구도가 보인다.

 

이양의 아버지는 노동조합위원장에서 프롤레타리아였고, 김군의 아버지는 부르주아란 사장이었다. 당시 IMF라는 금융위기로 모두 어려워할 때 두 사람의 아버지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와 같이 대립하기보단 오히려 화해를 선택했다. 그러나 플롯이란 장치란 그렇게 잘 되게 만들지 않는다. 비오는 날 교통사고로 모두 잃어버린 이양, 그런 이양이 이때까지 자신을 속이고 거짓된 환상에서 살았다. 그런 그녀 앞에 김군이란 그 환상을 부수고, 혼자만 보이던 할아버지의 존재마저 부정당했다.

 

라이트노벨치고는 상당히 재미도 부각했었고, 나름 현실적 학교생활을 보여주었으며, 게다가 역사적 사실을 하나의 설정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매우 의외의 느낌을 받았다. 한국적 라이트노벨의 특성일까? 그것은 역사적 사실적 조건들을 많이 부여한 느낌에서 말이다. 환상적인 부분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양의 환상에 살던 할아버지는 이양의 세계만 진실로 존재했던 환상인 것이다. 그 환상을 깨는 것이 속죄인 소년 김군, 그는 원래부터 웃지 못했다. 아니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루게릭병이었다.

 

얼굴의 근육이 마비되어 표정조차 짓지 못하고, 최후에 전신이 마비되어 호흡곤란으로 사망하는 무서운 병이다. <소나기×소나기>이라는 제목과 같이 그 소나기는 2가지로 양분되었다. 두 사람 관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소년이 했다는 점이고, 최후에 관에 담긴 채 이승과 이별하는 사람은 소녀였으나, <소나기×소나기>에서는 소년이야 했다. 자신의 목숨에 대한 미련 없이 그저 3주 동안 추억을 만들려고 했다. 수술에 대한 비관적 태도에 김군은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미련을 버리고 가고 싶었다. 죄책감이란 미련을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양과 싸우면서 김군은 가슴 한편에 살고 싶다! 라는 의지가 들은 것이다.

 

이양에 대한 사죄에 대해 모든 것을 포기한 김군이나 그런 김군에게 유일한 희망은 이양의 정면 돌파였다.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김군, 그는 중학교까지 야구선수생활하면서 죽어라 야구만 했다. 하지만 병이 심각해지면 왼손에 마비가 오고, 그 마비가 자신 스스로에 대한 삶의 의지를 죽게 만들었다. 공항 가는 길, 비가 무척이나 내린 고속도로에서 이양의 던진 야구공에 대해 배트로 휘두른 김군은 희망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황순원의 <소나기>는 미완의 만남이라면, 라이트노벨 <소나기×소나기>는 미완의 이야기로 끝난 것이다.

 

아니라면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것이 아니라 끝이 나듯이 시작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녀는 5월 무더운 햇살을 바라보며 화단 앞에서 미소 짓는다. 비가 오는 만남의 3월의 비와 조금 이를 것만 같은 5월의 장마를 말이다. 비는 대지의 생명에게 생명을 주듯이 흐린 날에 내리는 비는 우울함만이 아니라 희망도 올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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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4-05-02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라노벨 치고는?

하. 문하~악 하시는 분이신가베. 길게 늘어놨지 도통 핵심은 못잡는 글일세!

만화애니비평 2014-05-03 00:08   좋아요 0 | URL
아마 그런가봅니다.
책 내용 자체가 핵심이 없었습니다.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를 모티프로 한 것은 아는데, 결국은
사이 나쁜 아이들이 사이 좋게 된 것..끝...핵심따위 뻔한 걸 잡을 이유 없죠
 
빛 Phos -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우수만화창작 지원작
박흥용 글.그림 / 황매(푸른바람)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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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란 매우 신기하고 재미있는 존재다. 분명 우리의 눈에는 빛이란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빛으로 통해 사물을 비추거나 혹은 반사되어 가는 색으로 통해 볼 수 있다. 빛 자체를 시각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지상에서 인간의 눈에 심한 자극을 준다. 물론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지구 대류권을 지나 성층권과 열권, 그리고 지구 대기권을 지나 우주공간에서 태양을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대기권의 기체가 없이 태양광선을 직접 노출되면 우리의 동공은 파괴된다. 그래서 우주를 비행하는 조종사들은 우주복을 입을 때 안면부위가 검은색으로 코팅되어 있다.

 

태양을 보는 것에서 태양이 뭔가 강하게 내리는 그 순간 뭔가 반사되어 빛의 흔적이 남는다. 빛이 안 보이는 이유는 빛 자체에 색을 띠지 않기에 그렇다. 빛이 보이는 것은 역시 반사에 의해서다. 그런 만큼 빛을 이용하여 인간이 볼 수 있는 것들은 매우 다양하고 흥미롭다. 미학적 영역에서 빛의 예술로서 예술품을 역사에 영원히 기록하는 일이 있다. 렘브란트라는 화가는 <야경>이란 그림으로 통해 가운데는 밝은 조명이 겉으로 갈수록 어둡게 하여 그 미묘한 명도를 조절하여 빛의 마술사라는 호칭까지 붙었다.

 

그뿐인가? 빛을 이용하여 투명유리 대신 고딕 양식으로 이루어진 성당과 교회에 가보면 빛을 투과된 유리창의 색이란 매우 아름답고도 신기하다. 혹은 숭고함을 더하여 예술을 넘어 하나의 신앙적 영역까지 도달한다. 지금도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예술보다는 종교적 가치에 접근하겠지만, 적어도 중세 내지 르네상스를 지나 근대이전에는 그것은 하나의 미적 가치였다. 미적 가치라는 것은 그것이 예술로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도덕적인 관념이란 점이다. 빛을 이용한 세계는 매우 다양한 놀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번에 읽어본 박흥용 작가의 <Phos 빛>이란 작품은 바로 그 빛을 이용한 신비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빛을 이용해 다양한 색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빛의 세기로 통해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외지로 나가 형과 단 둘이 살아가는 한 소년은 언제나 고독하다. 부모님은 집에 계시지 않고, 하나 뿐인 형은 진학준비로 공부하기가 바쁘다. 혼자 집에 앉아 형이 올 때까지 홍길동 그림을 그리는 소년의 모습은 적적함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작가 스스로를 그 소년에 투영한 게 아닐까 싶다.

 

작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1970년 전후로 소년인 시절이 있었을까 하는 기분이 든다. 1981년 만화계에 등단했다면 말이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홍길동이란 장편 애니메이션을 이래저래 길바닥에 그리는 모습을 보면 그림쟁이의 실력은 외로움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무료함에 견딜 수 없어 동네에 TV가 있는 집의 아이하고 친하게 지내려 하나 그것이 쉽지 않다. 집안에 부모님이 없기에 경제적 사정이 밝지 못한 것이다. 눈깔사탕 하나 살 돈이 없어 그저 홍길동만 그린 소년은 어느 날 형으로부터 영사기를 소개받고, 그것에 빠지면서 필름을 구하러 다닌다.

 

처음에 필름을 훔치는 짓을 하다가 우연히 사진관에 한 아저씨를 만나면서 소년의 인생에 큰 즐거움이 다가온다. 만화에서 소년이 살던 시절은 1970년대 근대화라는 시절에서 가난과 몸부림하던 시절이다. 당시 우리나라에 TV는 흑백TV가 보급되었다. 물론 일부 부유한 가정에만 가질 수 있던 TV, 라디오나 전화기도 모두 가지기에도 벅찬 시절이다. 따라서 이 만화책은 빛으로 통해 색을 보는 게 아니라 빛의 명도로서 즐거움을 찾는다. 필름을 구하고 혼자 심심함을 이기고 싶은 소년은 이런저런 필름을 모아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변사 노릇을 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거기에는 황금박쥐의 해골 캐릭터도 있었고, 철인 28호 로봇도 있었다. 이제 막 한국에 애니메이션이 들어오던 시절이다. 물론 자체적으로 만든 것보단 일본에서 제작하는 애니메이션을 하청으로 받아 다시 수입하여 이름만 바꾸었으나, 그래도 아이들에게 애니메이션이란 만화영화는 즐거움의 세계였다. 소년은 아이들에게 필름으로 통해 홍길동, 철인28호, 요괴소년까지 등장시킨다. 거기에 소년과 소년의 친구들까지 주인공으로 만들어 즉흥적인 이야기를 만든다. 이것이 곧 스토리텔링, 인간이란 생각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위해 생각한다.

 

그저 멋대로 설정한 세계에서 소년은 잠시 이야기가 멈추는 감이 오는 것 같아도 다시 이야기를 연결한다. 바로 빛을 이용한 것에서 말이다. 빛이 비추면 사물이나 대상에 의해 그림자가 생긴다. 필름 역시 빛을 비추면 그 선과 면을 따라 그림이 화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림자로 놀아보는 것은 예전부터 인류가 사용한 놀이 중에 하나다. 실루엣이라고 그림자를 비추는 스크린으로 중국과 인도에서 즐겼고, 환등기로 이용한 스크린은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다.

 

이런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은 17세기에 사용한 사람들이 주로 선교활동을 하는 자였다. 그림자와 빛으로 통해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요소로 통해 사람들에게 겁을 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서양은 유일신 관념과 더불어 태양이 하나라는 점을 중시했다. 두려운 존재라고 믿게 하려는 악마의 그림을 클로즈업하면 사람들은 빛의 세기가 줄고 그림자가 늘어 모두 두려워하고, 반대로 악마 대신 천사를 클로즈업을 하면 모두 밝은 화면으로 통해 안심을 하게 된다. 특히 스토리텔링에서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화면의 등장인물로 통해 관객과 동일시하게 하는 관점을 부여한다.

 

소년이 집에서 환등기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 적에 대해 대응하는 정의의 편은 우리 친구들이라고 했다. 스토리 소재에서 적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서사적 이데올로기를 적용하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빛의 즐거움을 강조하기 위해 스토리텔링의 요소를 차용했으나, 빛의 즐거움을 알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이 필수적이다. 작품을 보면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없다. 초등학생에서 어른까지 누구나 공감가고 향유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의 그림체에서 실제 현장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색과 빛을 조절한 배경은 매우 신선하다. 그리고 그 배경 위의 만화캐릭터들이 단순한 표정과 묘사로 금방 페이지가 넘어간다.

 

작품에서 빛을 소재로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듯이, 빛의 세기가 환등기와 사진관 주인이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는 것에서 확실한 명도가 느껴진다. 보통 만화를 감상하다보면 어두움 부분과 밝은 부분 그리고 옷이 접히는 부분까지 명암 처리를 한다. 실제의 빛이 아닌 펜과 연필 그리고 컴퓨터 일러스트로 통한 명암이나 그 명암이 있기에 등장인물은 항상 역동감을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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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4 - Seed Novel, 완결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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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제일의 여동생님 4권>을 읽으면서 보통 사람들이 기대하는 엔딩으로 가지 않았다. 모두가 우려하고 회피하려는 최악의 상황으로 전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을 집필한 김월희 씨 본인의 입장을 본다면 후기에서 나오다시피 마음에 든다고 했다. 왜 그런 것일까? 전에 도서토론 모임에 가서 문학소설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소설은 제법 인지도도 있었고, 작가분도 제법 유명한 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종이로 구성된 책인데도 그 책과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시리즈를 읽으면서 서평에 대한 깊이와 분량 그리고 전개하는 방향은 오히려 문학소설보단 라이트노벨에 더욱 깊이가 있었다.

 

그런 점을 본다면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 결코 수준이나 함량미달이란 꼬리를 붙일 이유는 없다. 그러나 왜 그런 꼬리표가 따라올 필요가 없는지에 대해 조금 고민해봤는데, 주변에 독서광이신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한국 라이트노벨은 기존 문학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작가들의 우울함과 현실적 냉소감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과연 생각해보면 <세계제일의 여동생님>라는 작품 내의 Text를 두고 내가 적은 Context라는 전후맥락은 상당히 날개를 펼친 듯하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단순히 작품만이 아니라 작품 그 이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번 4권에도 1권에서 나온 어구가 반복된다. 19세기 사회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가 1851년 12월 나폴레옹 3세(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조카)가 의회에 무력진압으로 통해 쿠데타로 권력을 쟁취한 일을 대해 책을 적은 적이 있다. 서적 명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거기서 처음에 아주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출판사나 혹은 번역자의 차이에 따라 다른 문구로 묘사되겠지만, “역사는 2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소극)으로”, 이런 문장을 <세계제일의 여동생님>에서 거론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상황이 시영에게 다가왔고, 또한 그가 선택한 것이었다.

 

희극이라 하여 세상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은 일로 가는 게 아니다. 아이러니한 역사적 반복에서 비롯되는 왜곡된 현실적인 자화상이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1권>에서 시영의 여동생인 마리아는 시영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렇지 않답니다. 오라버니! 헤겔이 주장한 시대정신이란 결국 진보 없이 반복되는 원형의 띠. 우민들은 결국 계몽의 대상이 아닌 사육의 대상에 불과하지요.”

헤겔이 주장한 우민이란 결국 대다수의 인간이고, 그들은 오늘날 살아가는 존재이다. 라이트노벨이라고 하더라도 철학이란 학문을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고찰에 적용할 수 있다. 철학이란 세상을 보는 시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철학이 하나의 이상적 가치에서 지나 이념적 현실로 이향되면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들이 철학적인 가치와 삶을 살지 않는 이유다. 그런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가치관이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라이트노벨 장르는 일반적인 문학에 비해 환상적인 요소가 심하고, 인간(작가) 개인적 욕망만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욕망을 공유한다. 대부분 라이트노벨을 보면 미소녀가 등장하는 하렘구조를 지닌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모든 라이트노벨이 작가와 독자의 욕망을 글로 통해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만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결국 많은 작품들이 그런 속성을 충실히 따라가는 점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결말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언제나 처음과 같은 어중간한 인간관계와 더불어 혹은 주인공이 이루고 싶은 욕망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세계제일의 여동생님>에서도 그런 욕망의 성취감을 맛보는 모습이 나온다. 단지 문제는 독자의 입장보다는 그 작품 내의 주인공에 대한 성취감이 더 중시된 점이다. 작가가 그것을 두고 아주 마음에 들고, 헤겔의 계몽에 대한 암울한 현실적 모순은 시영이 가진 모든 가치관과 삶의 정체성에 큰 영향과 고뇌를 던져준다. 2권과 3권에서 보듯이 단 1명이 백련을 구하기 위해 수 백 명분의 백련을 죽도록 내버려둔다. 아니 죽게 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어둠에서 살리는 행동은 분명 보편적인 인간이 가진 도덕관으로 비추어보자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도 한편으로 납득 가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적 부분을 토대로 만든 점과 그런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꾸며 하나의 모티브 내지 상황적 연출로 만든 것이다.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2권>에서 실제 인물인 존 매카시라는 1950년대의 미국 정치인이 나왔다면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4권>에서도 그런 인물이 나왔다. 물론 그 본인은 죽었고, 그것을 대신하는 허구의 존재로 나온 것이 설정이었다. 시영의 여동생 이름은 마리아, 그리고 시영을 납치한 혁명군의 최고지도자 마리아, 똑같은 이름의 마리아가 유럽도 한국도 그리고 미국도 아닌 남미에서 등장한다.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에서 최초로 국민투표로 의해 당선된 대통령, 그는 1973년 군부 쿠데타로 의해 살해된다. 그가 한 업무는 빈곤한 경제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산업의 국유화였다. 흔히 우리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제도이다. 그는 경제적 빈곤과 동시에 마약밀매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살해되고 말았다. 그의 가족들에 대해 자세히 모르지만, 적어도 시영을 납치한 마리아 아옌데의 인물적인 모티브는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점이다. 남미라는 곳은 항상 마약을 재배하는 테러조직과 내전을 펼치며, 마약으로 통해 세계 마피아나 테러조직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마약밀매조직을 소탕하려한 정치인이 이유 없는 군부에 의해 살해라는 것은 솔직히 말하여 배후조직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통령이 군부쿠데타에 의해 살인당한 것과 동시에 칠레에 각종 다국적 기업이 들어와서 경제적 통상을 하는데, 불평등한 임금체계와 세금구조, 게다가 칠레의 영토에 숲이 사라지고 환경오염이 가중되는 문제를 야기했다. 여기서 시영이 보는 것은 그 아옌데의 딸로 나오는 마리아로 통해 보는 세계라는 곳이다. 세계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이기에 칠레의 어느 소녀를 쿠데타군의 지도자로 만들도록 하고, 거기에 모자라 그 소녀가 하려는 일조차도 사전에 준비된 것이라면 인간의 운명은 무엇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표지에는 블랙헤이젤의 당주인 마리아가 아주 해맑은 미소로 손을 잡으며, 시영의 손에 들린 권총의 방아쇠를 기다리고 있다. 작품에서 주인공의 입장은 절대적이라고 볼 수 없으나, 대부분 그 주인공의 시선에서 가치관이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적인 시점이기에 시영의 관점에서 보던 세계는 부조리와 부조리로 엉킨 수라장에 불과했다. 그런데 자신이 선택한 6발의 러시아룰렛의 결과는 피할 수 없는 파국으로 닥친다. 자신을 납치한 마리아 아옌데를 생각하면 시영 개인적으로 엄청난 가해자이나, 그녀의 입장과 그녀의 행동을 보면 정말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남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이란 도서를 보면 인간이 가진 도덕이란 한낱 우스운 것에 불과하다. 절대적으로 자신들이 믿고, 그 사회를 유지하며, 심지어 세계의 가치라고 믿은 것은 결국 기만이란 이름을 정의로 바꾼 것이다. 시영을 납치하고 핵무기를 얻어 미국 의사당에 날리려고 하는 마리아 아옌데의 모습을 보면 정말 우리가 아는 사실과 거짓, 그 진실과 거짓을 넘어 있는 진실이란 무엇인가 대해 생각해보면 그저 우리는 속고만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에 주어진 자유와 평화 뒤에는 누군가 자유와 평화를 박탈당해야 했다. 인간에게 어느 사회에서 너무 당연한 것에 대해 물어보면 그것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이슬람 문화권에 있는 사람에게 돼지고기를 한 덩이를 준다고 보자.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돼지라는 동물 자체를 혐오한다. 그들이 돼지를 혐오하는 이유는 이슬람 문화권에 정한 하나의 규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고서나 인류학의 현지조사에 보면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도 아주 예전에는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단지 돼지는 날이 습한 곳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으므로, 사막이 넓게 분포된 이슬람 문화권에서 돼지를 키운다는 것은 엄청난 비효율적인 일이며, 그런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 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무척 불편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계율이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 실린 내용이다. 100% 옳은 이론과 가설보단 문화인류학이나 혹은 생태자연학으로 보더라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그 문화권에서 그렇게 관찰할 수 없다. 그것은 그 절대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화라는 슬로건에서 우리가 자유와 평화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는 자유롭지 못한 인간들이 공포의 위기에서 평화를 박탈되었기에 확인이 가능하다.

 

자유라는 테제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비자유라는 안티테제가 존재해야 한다. 물론 자유라는 테제도 때로는 자유를 파괴한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단두대 아래 이슬로 사라진 롤랑 부인의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찌른다.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결국 자유, 평화, 평등을 말하는 인권이란 존재는 인간이 제일 먼저 가지는 것이다. 이른바 천부인권이란 말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사회로 통해 살아가기에 자유가 박탈된다. 자유라는 것은 동시에 모든 것에 대한 해방도 포함하여 어느 것에 대한 속박도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어느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자유가 있다는 점이다. 시영이 바라본 그 자유와 평화는 과연 무엇인가? 자신을 납치를 명령을 내린 마리아 아옌데는 마치 천사 같은 미소로 부모 없는 고아를 아주 다정하게 대해준다.

 

그 모습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은 천사가 바로 여기 있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그녀는 세계 언론에서는 악질적 쿠데타 전범이고, 심지어 마약밀매상과 연계되어 죄 없는 일반 국민들을 학살하는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리아 아옌데의 진실은 시영의 눈에는 분명 존재하나 세계라는 곳에서 마리아는 무조건적으로 타도해야할 인간 중에 하나였다. 그녀가 나온 세계 다른 나라의 방송국에서는 전혀 엉뚱한 정보가 나온다. 인간의 인식을 좌우하는 것은 여론이고, 그 여론은 언론에서 시작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도 역시 그 사회의 올바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여론이었다.

 

세계적으로 여론은 살바도르 아옌데의 딸로 나오는 마리아가 아니라 그녀의 목을 조르는 존재였다. 아옌데 죽음에서 예전의 그의 관료들은 국민을 위한 옳은 정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실천할 수 없었다. 세계는 옳은 것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맞추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의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최근에 미국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서적으로 통해 큰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다. 물론 칸트의 구성주의적 자유주의에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로 통해 인간이 가진 이성으로 통해 자유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이성으로서 조절하는 하나의 가치라고 한다.

 

하지만 진짜 정의적 가치에서 인간 스스로 이성을 통해 얼마나 잘 수행하는 것인가? 차라리 이성이 아닌 집단이기주의가 하나의 도덕으로 군림한다. 그 군림하는 도덕 중에서 최고는 세계라고 불리는 권력이다. 인간이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여 정보와 소통이 잘 되더라도 그것을 그만큼 통제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 역시 교묘하고 강력해진다. 인간에게 세상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란 행복을 인식하기 힘든 조건으로 본다. 세계를 직시하는 것은 온갖 부조리를 모두 보는 것이고,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 것은 자신만의 안락함에 빠져드는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인간이 계몽적으로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은 위험한 자유를 택하는 것이다. 노예의 평화에서 마리아 아옌데는 최후의 선택에서 고뇌한다. 그녀의 선택은 미국 의사당에 핵무기를 발사하는 것이고, 그것을 누르는 선택에서도 블랙헤이젤의 마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의 상부의 미국 정치인과 그 아래에 있는 세계 권력의 트라이앵글이 모두 사라지면 자신만 더욱 좋다고 한다. 단지 거기 지하에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도로시라는 복제인간은 마리아의 이름으로서 죽어야 한다.

 

그 도로시의 죽음에 대해 마리아는 다소 유감이나 도로시의 운명은 자신의 역할을 위해 사라지는 것이 최고의 행동이란 것이다. 마리아 아옌데가 만약 핵을 날리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자신만 세계적인 악질 테러리스트로 낙인으로 찍힐 뿐이다. 그런 와중에 블랙헤이젤의 마리아는 아옌데의 마리아가 평소 매우 아끼는 어린 아이들을 인질로 삼는다. 아옌데가 계속 블랙헤이젤 당주의 심기를 거슬리는 그 순간마다 어린 아이들의 머리에 총알이 박히고, 생명 없는 고기가 된다.

 

인간의 의지가 담긴 행동에 정의를 관철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으나, 아옌데의 목표는 바로 자신 옆에 있던 어린아이들이 평화로운 세상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 것이다. 그런 과정에 그들이 살아있지 않는다면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마리아의 승리로 끝이 나나, 한편으로 그런 마리아의 광기는 시영으로 하여금 충동을 주게 한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정의의 이름이 통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으로 하여 부조리에 대해 응징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시영의 답은 바로 자신의 손에 들린 권총이고, 그 총구는 마리아에게 향한다.

 

두 사람 모두 눈물을 흘리며 최후를 마감한다. 아옌데의 마리아는 그 후의 소식은 모르나, 단지 블랙헤이젤의 시영은 마리아를 대신하여 당주가 된다. 게다가 핵무기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지켰기에 그 공로도 인정받았다. 그렇게 하여 블랙헤이젤이란 강력한 무기상인의 왕좌에 오른 시영이나, 그가 평소에 이 모든 세상은 부조리하다고 여긴 그 부정적 시야에서 결국 그 왕좌에 올라와도 그 부조리를 고칠 수 없는 것을 느낀다. 아니 오히려 자신마저 그 부조리라는 어긋난 세계에 맞춰가는 것이다. 단지 마리아처럼 무조건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파괴한다.

 

그가 많이 파괴하든지 작게 파괴하든지 시영에게 주어진 악마의 탈은 결코 벗을 수 없는 영원한 동반자였다. 시영은 총수가 되어 과거의 자신을 봐라본다. 부모 없이 고아로 지내다, 양부모가 있어도 그들의 폭력과 학대로 고통 받다가 양부모를 살해한다. 그때 자아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세상 어디든 희망은 없다와 그리고 있을 것이다. 있을 것이라고 여긴 시영의 자아는 양부모의 지갑에 있는 돈을 들고 나오나 그에게 처한 것은 가혹한 운명이다. 부모 없는 아이, 집이 가난한 아이, 집세 걱정에 일상 자체가 고통인 시영에게 과연 희망이란 존재는 있는 것인가?

 

그가 2권부터 심연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이야만이 어둠에 있는 자와 조우하며, 그들을 어둠과 악으로서 구원할 수 있다고 한다. 상당히 이 말은 냉혹하면서 현실적이다. 자신이 처한 입장에 놓이지 않으면 인간이란 그 아픔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아픔과 고통을 이용하여 시영의 상황을 몰아넣는다. 처음 마리아가 학교에 나타나 시영의 입에 입맞춤하고 루마니아로 날아갈 때, 시영은 옥상에서 자살을 시도하려 했다. 이때 진정한 환상적 존재가 등장한다. 마치 백련과 비슷한 의상을 입은 어느 여인이 나타나 시영에게 희망 없는 세상에 살아가길 바란다.

 

시영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세계란 부조리로 이루어진 허물 수 없는 벽이다. 분명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이면서 인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 우리는 그런 존재를 두고 호모 사케르라고 한다. 학교에서 선생과 급우들에게 무시당하고, 학교 밖에서는 온갖 갖은 생계로 허덕인다. 누구 하나 손을 내밀지 않은 그 비참함을 겪었기에 백련도 리나도 아옌데의 마리아도 말리거나 구할 수 있었다. 대신 그 이상의 희생과 고통을 감수할 수 있었다. 단지 리나는 백련의 의료기술을 다 동원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후유증으로 죽었다.

 

그러나 블랙헤이젤의 당주가 되어 리나의 유언 같은 편지를 받았을 때, 리나는 자신이 죽더라도 적어도 죽는 그 순간에는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었다. 백련과 친구가 되었고, 리리와 자매로서의 의를 풀었으며, 블랙헤이젤의 적이란 이름도 지울 수 있었다.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가는 것과 동시에 어떻게 최후에 마무리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 길에서 시영은 너무 많은 일을 봐왔고, 자신의 무력함을 느꼈고, 자신이 느낀 부조리는 도저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 앞에 바뀌지 않은 숙명의 고리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블랙헤이젤의 당주였다.

 

그리고 3년 뒤에 어느 작은 병원에 침투하여 모든 사람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죽이고, 심지어 거기에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사람까지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어느 이상한 병동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구속된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온 몸이 고통의 흔적이 남아있는지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고문으로 멍든 팔과 다리,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서인지 매우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 여인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희생한 블랙헤이젤 가문의 전 당주 마리아였다. 아무 기억도 없이 백지 같은 그녀는 시영을 몰라보는 것도 모자라, 그 특유의 프라이드와 냉혹함도 없었다.

 

오직 기억을 잃어버려 낯설 병동에 갇힌 가엾은 소녀였다. 블랙헤이젤의 당주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시영, 그리고 그 앞의 마리아, 시영을 마리아를 데리고 블랙헤이젤 가문으로 데리고 간다. 그토록 마리아가 당주로 있을 대 얻지 못했던 시영의 금지된 사랑을 얻게 된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건 3년이란 시간에서 온 몸이 망가지도록 고생해도 마리아는 연기를 한 것이다. 자신이 한 없이 부족해야지 오라버니가 봐주신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마리아도 시영을 봐줄 수 있는 것은 시영이 한 없이 약하고 무력한 인간이었다.

 

단지 시영은 무력함을 숨기지 않고 그 자체였다면, 마리아는 그 무력함을 선택했다. 자신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지고 군림한 것은 시영을 가지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손을 떠나 시영의 손에 들어갈 때 마리아는 세상 그 모든 것을 얻었다. 결말은 매우 부도덕하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로 규정하면 상당히 도발적이다. 작가는 그런 세계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남매의 불행한 해피엔딩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둔다. 아무리 발버둥해도 결국 그것을 대체할 다른 무엇이 대체한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시영에게는 자신이 살아갈 곳과 자신이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은 개인적 성공이나 작품 그 자체는 성공으로 가는 것을 부정했다. 읽으면서 조지 오웰의 <1984>처럼 디스토피아의 세계에는 희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만 느꼈을 뿐이다. 단지 <1984>에서는 스미스는 고문으로 인해 온 몸이 병이 들고, 머리털이 다 빠지며, 2+2=4가 아니라 5라고 대답하는 것에서 그 자신의 불행과 세계의 불행을 동시에 맛을 본다. 그런 흉측한 그로테스크적인 현실을 외면하지 못한다는 문학적 요소에서 역으로 우리는 부정의 부정이 또 다른 부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세계제일의 여동생님>도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 아닌 또 다른 부정과 헤겔이 말한 되풀이로 되었다. 시영은 마리아의 세계를 부정하나 결국 그 자신이 부정한 것을 받아들이고, 근친상간이란 부정적 요소를 긍정했다. 이런 어긋난 것을 보고, 독자 스스로 옳다고 여기기보단 그것이 심적인 그로테스크로 여기길 작가 바랬을까? 개인적으로 매우 악녀인 마리아가 총을 맞은 후에 아무리 연기라도 온 몸이 멍이 들고, 얼굴도 화상에 의해 흉측하게 변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나, 시영에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보는 미, 그 미학적 요소에서 인간의 가치를 변질 적으로 여길 수 있다.

 

작가가 원한 미적인 가치란 바로 부정의 부정으로서 그것이 긍정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에 대한 긍정이나 혹은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으로 이어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둠을 가지고 공유하고 있다. 그런 암울한 담론을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3권>에서 어디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리나의 입에서 나온 점과 시영이 그렇게 인정하는 점이다. 다시 작가의 후기로 보자. 김월희 작가는 이런 문구는 집어넣는다. “저는 작품에 나오는 어떤 사상이나 행동에 대해서 그것이 반드시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한다.

 

겉으로 봐서는 암울한 디스토피아관을 부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물이 대사하는 것에 대해 수사적인 방법을 부정하는 것인가? 김월희 씨의 대답에서 내가 보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100%는 아니더라도 100% 이하는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말 “반드시 실제”에서 “전혀 실제”로 바꾸는 것이 더 부정하는 의미이다. 김월희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해는 불가능하나, 적어도 이런 작품을 적는다는 점은 상당히 어둠이란 심연을 생각하고, 작품 내 소재와 기반이 되는 어느 인물과 대사들이 분명히 실존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결말을 자신이 내리기보단 독자가 스스로 찾아가보는 것을 권유한다. 지금 내 컴퓨터 앞에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4권>과 동시에 노암 촘스키의 <불량국가>가 있는 점에서 심연의 세계는 존재함은 인정하는 바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면 가족관계 부분이다. 시영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부분에서 기억이 흔들리고, 의식이 멍해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백련과 마리아는 어떻게 같이 있었는가? 어머니 선우 가문과 블랙헤이젤의 아버지는 어떻게 만났는가? 결혼했다면 마리아의 어머니 존재는 다소 부자연스럽다는 점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은 어떤 계기인지도 아쉬웠다. 마리아가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은 원인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영의 존재가 위험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을 것이다. 가족관계의 기원에서 시작되지 않은 에피소드는 갈등의 원인조차 풀어내지 못한 채 계속 시영의 과거에 존재한 유령만 불렀을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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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3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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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표지를 보면서 19세 이하는 보는 것을 금지하던 것이 어느 새 15세 미만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 제일의 여동생님>의 1권과 2권의 표현에서 잔혹한 폭력과 다소 윤리적으로 의심하게 할 위험한 발언들이 숨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2권은 폭력적 묘사는 전 권에 비하여 적으며, 물론 성적인 요소도 덜하다. 그런다고 물론 자극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탕화면 일러스트에서 왜 금발의 소녀 2명이 나와 있는데, 2사람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는 점이다.

 

둘 다 금발의 트윈 테일이나 조금 다른 점은 1명은 다소 짧은 치마에 니삭스를 입었다면, 다른 1명은 왠지 mania를 지나 상당히 위험한 의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거의 비키니 수영복에 검은 코트를 걸쳤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뒤를 보면 비슷하게 생긴 금발의 트윈 테일 소녀가 서로 칼을 잡고 싸우는 모습이 나온다. 겉표지의 일러스트에서 나오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이번 3권의 주인공은 바로 2명의 소녀다. 작품의 도입부는 이상한 노출증에 걸린 여자아이가 무기를 들고 블랙헤이젤 가문에 침투한 것과 그 소녀가 마치 리리의 움직임 모두 간파한 것처럼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다가 다시 잡혀온다. 그 여자아이는 리리의 언니인 리나인 것이다. 본래는 리리와 같이 블랙헤이젤 가문의 특수부대 요원으로 있다가 어느 새 모습을 감춘 것이다. 결국 블랙헤이젤 가문에서 그리고 그 당주인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숙청당해야 할 배신자인 것이다. 3권에서 리리와 리나로 통해 본 시영의 행동, 그리고 다소 과장된 상황과 연출이 나타나기도 하나 그런 개인적 에피소드는 몰라도, 리리와 리나의 일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작품에서 리리와 리나의 출생배경이 중요하다. 과거에도 현재도 앞으로 미래도 계속 활동하는 NGO에서 “국경없는 의사회”라는 단체가 있다.

 

주로 의료 봉사업무를 분쟁국가 내지 개발도상국과 같은 제3의 나라에 헌신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이 펼치는 인술이란 매우 존경을 넘어 숭고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 프랑스 예술만화가인 기 들릴의 <굿모닝, 버마>라는 작품을 보면, 미얀마라는 나라에 가서 실제 자신이 겪은 일들을 만화로 만든 작품이다. 작가 본인은 만화예술가이고, 그의 아내는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활동하던 의료진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나온 아이 한 명과 같이 3명이 프랑스에서 미얀마로 간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국경없는 의사회는 그런 미얀마와 같이 독재정권에 의해 의료혜택을 못 받는 빈민을 위해 활동하며, 실제 전쟁으로 고통 받는 나라에도 간다. 그런 점에서 리리와 리나가 부모님을 따라 같이 국경없는 의사회에 따라 가는 것은 전혀 낯설지 않은 설정이다.

 

기 들릴의 작품을 보면 국경없는 의사회의 의료진들은 1번 방문하면 기본 1년 전후로 머물기 때문에 가족과 동행하는 게 선택사항으로 필수다. 문제는 그들이 항상 좋은 환경에 업무할 리가 없다. 전쟁이나 개발도상국, 심지어 독재국가나 분쟁으로 고통 받는 나라에서 의료진들의 이동은 물론, 주변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도 불안요소로 작용하기 마찬가지다. 그래서 리리와 리나는 작품에서 테러리스트에 의해 납치당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설정이다. 게다가 테러리스트나 분쟁국가에서는 어린 아이를 이용해 이익을 채우는데, 남자아이는 소년병으로 만들어 전쟁터로 보내고, 여자아이는 성매매 도구로 이용하여 팔아넘긴다.

 

굳이 그런 나라가 아닌 태국이나 방글라데시의 어린 소녀들은 이미 여성으로서 기능을 다 갖추기 전에 벌써 성매매 활동을 하고, 그것으로 통해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가기도 한다. 세상이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못해 추하고 역겹고 그것이 하나의 진정한 정의라는 가치로 작용하기도 한다. 라이트노벨에서 이른바 어린 소녀들을 가리키는 롤리타와 추억을 만드는 시영이나, 그 시영의 입장에서 보는 세계란 바로 희망이란 없고 오로지 어둠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둠 안에서 희망은 없다보단 그 어둠만이 희망보단 유일한 길이라는 암울한 설정이다. 단지 작품에서 시영이 마리아와 백련, 그리고 일부러 장난을 거는 로스차일드의 당주에게 벗어날 궁리로 신부선택을 리리로 한 점이다.

 

여기서부터 발단을 지나 사건을 시작된다. 리리와 결혼식을 올리는 시영,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 잘 만들어진 각본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리리의 입장에서는 시영이 자신에게 가장 다정한 사람이고, 시영의 입장에서는 리리는 자신을 지켜준 생명의 은인과 동시에 귀여운 여동생처럼 보인 사람이다. 따라서 결혼식 자체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일지 몰라도 서로 간의 관계성에서 부정하지 않는다. 유럽의 산토니아 섬에 도착하자 말자 결혼식에 거기다가 호텔 스위트룸, 이 모든 것이 너무 잘 구성된 이벤트이며, 단지 말장난이 여기까지 번진 것은 왠지 모르게 망상적인 흐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다시 찾아온 인물은 리리의 언니 리나, 겉으로는 호의적이나 속으로 다른 속셈이 있었다. 호텔로 다시 가려고 하던 시영과 달리 리리는 오히려 호텔을 떠나 공항으로 가자고 한다. 공항에 가는 순간에 호텔이 갑자기 붕괴된다. 폭탄테러가 일어난 것이다. 폭탄테러의 준비는 리나, 그녀는 리리의 옆에 있던 시영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예전에 백련에 살리기 위해 시영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은 것이다. 블랙헤이젤 가문에서 마리아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장난감이자 모든 것으로 남은 애완오빠가 아니라 그 블랙헤이젤이란 가문의 피를 같이 나누어 가게 될 일원으로 변모한 것이다.

 

당연히 백련을 구하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맺은 협약은 간단히 일이 아니었다. 6연방 러시아룰렛을 하기 위한 메그넘 권총에서 1발이 아닌 6발의 공이치기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총안을 없으나 그 총알 없는 총은 그 만큼 다른 인명을 대신한다. 1발 총알이 시영을 죽이게 하나, 총알 없는 1발의 장전은 아무 죄 없는 수 백 명 혹은 수 천 명, 때로는 그 이상의 인간을 죽이기는 도화선이 된다는 점이다. 그런 연유로 산토니아 섬의 호텔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혹한 현실이 시영과 마주한다. 호텔이 붕괴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폭탄의 폭발력에 의해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거나, 화재로 화상을 입고, 건물의 잔해에 의해 사망 내지 부상을 입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아비규환의 지옥, 그 지옥이 시영이 택한 여동생 백련의 생명의 대가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가지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량한 가치와 세계관을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서 그 상황에 어떻게 인간은 되는가?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무기는 공포다. 공포는 그 모든 이성을 물거품처럼 만들고, 인간은 가장 무서운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이번 사건에는 로스차일드의 당주에 의한 배려도 있지만, 로스차일드의 당주는 그저 산토니아의 결혼식과 스위트룸에 대해서지 그 이후로부터는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했다.

 

그렇게 테러리스트로 붙잡힌 리나, 하지만 리나는 리리의 언니이고, 그녀 역시 아직 어린 소녀이다. 왜 그런 소녀는 테러를 저지르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치게 하고 계속 죄를 지어야 하는 것에 모든 삶을 거는 것일까? 주인공 시영은 이른바 심연의 세계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은 깊이 아주 깊이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의 세계를 닿게 되면 절망에 갇혀 버린다. 게다가 그 깊은 절망은 희망이란 단어가 그저 쓰레기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인간이란 불신의 존재이다.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그렇게 되어버린 당사자인가? 아니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적 조건인가?

 

리리와 리나의 이야기에서 국경없는 의사회 일원으로 테러리스트에게 당한 이야기가 상당히 현실적인 이야기란 점이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하고, 어린 2자매는 어머니와 운 좋게 살아남으나 문제는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전쟁이란 인간을 광기로 빠지게 하는 하나의 게임과 같다. 차라리 광인이라면 전쟁에서 정상인으로 보일지 모른다. 미쳐버린 세계에서 모두가 공포로 인해 두려움과 파괴의 본능에 즐거워하는 동안 광인들만 원래 자신이 하는 행동을 충실히 이행하기 때문이다. 두 소녀의 어머니는 자신들의 가족을 납치한 범인에 의해 무자비하게 집단강간을 당했다.

 

온 몸이 병이 들어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말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참아낸 이유는 두 딸이 살아있어서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만의 희망일까? 아니면 지금의 현실을 억지로 외면하려고 하는 인식 도피일까? 그렇게 죽은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어둠 외에 남은 게 없는 리리와 리나, 그리고 나타난 블랙헤이젤 가문의 당주 마리아, 마리아는 두 소녀에게 테러범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는 대신 자신의 밑에서 일하라고 한다. 그리고 차례로 두 소녀는 몸에 이상한 것을 심어 넣고, 개인적 이성과 감성 대신 오로지 본능적으로 기계처럼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란 누구나 신체적 한계가 있었다. 리나는 몸의 부장용으로 모르핀을 의존할 정도였고, 죽음을 앞을 두고 최후의 몸부림을 치는 중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파괴한 납치범, 하지만 그들을 모두 죽이고 나니 모든 것은 원래대로 오지 않았고 현실은 여전히 부조리했다. 자시가 그렇게 죽이고 싶은 테러범들도 알고 보니 보통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은 그렇게 만들도록 나둔 보이지 않은 세계의 인간이고, 그 인간은 바로 마리아와 같은 블랙헤이젤 가문이었다. 물론 1번 잡히고, 시영에게 구출된 후 리나는 리리와 시영이랑 같이 떠돌게 된다.

 

거기서 나타난 무장병력 그리고 도주와 피신, 이 모든 것에서 리나와 시영은 생명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함정이었다. 시영을 꾀어내기 위한, 하지만 생각해보면 리나에 대한 행동은 틀렸다 하기 전에 다른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 왜 세상은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밟아야 하는 것인가? 국경없는 의사회도 그러하나 사실 산타니아 섬에서 무참히 살해당한 사람 역시 그렇다. 누구를 위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말려드는 것일까? 문제는 그들은 어느 누구도 건들지 못할 곳에 있다는 점이고, 선이란 절대적 가치가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나 상황은 없었다.

 

오로지 그 악에 대해 악으로 승부하는 것이 정의였다. 악에 대한 응징이 악으로 되는 것에서 부정의 부정이 결국 긍정으로 가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다른 쪽으로 악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결국 세계의 권력이라 불리는 그 깊은 심연보다 깊고 깊은 어둠에서 진정 그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 시영은 그런 리리와 리나를 보면 갈등을 한다. 결국 이 세계란 깨끗하게 사는 것은 그저 위선이고, 오직 악이 하나의 힘이었다. 마지막 희망을 포기한 리나에게 정의의 선은 전혀 그녀에게 손을 내어주지 않았다. 오직 내어준 것은 악이라고 볼 수 있는 블랙헤이젤 당주의 오빠인 시영의 손이다.

 

어떻게 보면 정의라는 이름이 과연 정의에 의해 움직이는가? 정의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힘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자신의 정의는 결국 힘이란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문제는 정의의 가치관에서 그 선이란 기준이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블랙헤이젤 당주 마리아와 선우가의 백련은 그 중심이 시영이었다. 오로지 오라버니만이 절대적 조건이고, 그것을 부정하고 없애는 세력이 나오면 그들에게 내려진 것은 무차별적인 살인과 폭력이다. 물론 도덕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명백한 악이나, 시영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 대한 헌신적 사랑이다. 인간은 그렇게 비뚤어진 존재인 것이다.

 

단순히 마리아와 시영 그리고 블랙헤이젤 가문의 일화가 라이트노벨이란 망상적인 상상력으로 만든 스토리텔링만 그러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나는 일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각종 부조리가 마치 옳은 것처럼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단지 자신은 알면서도 외면하거나 혹은 인식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억울하게 산타니아의 섬에서 폭탄테러로 죽은 이들은 불행하다고 보겠으나, 그들도 그런 부조리에 무관계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에서는 미국이란 나라 이름이 많이 나온다. 세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영향권을 보면 미국은 강력한 나라다. 그런데 그 나라가 여러 가지로 국제분쟁에 관여한 것은 사실이다. 예비군훈련에 가면 제일 우스운 코미디가 베트남 이야기다. 베트남전에서 원인은 통킹만에 정박한 미함정에 타격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미국 CIA가 했다는 것이 이미 문서로 폭로된 사실이다. 물론 그 전쟁으로 죄 없는 난민들은 피해를 입고 심지어 많은 그 나라 사람들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된 것은 말하지 않은 기만이다.

 

리나의 슬픈 이야기를 볼까? “그래서 제가 제 손으로 그들의(부모님을 죽인 테러범) 숨통을 끊어 놓았을 때, 저는 이 세계가 바뀔 거라고 믿었어요.”에서 시영은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세계’가 없어진다고 한들, 블랙헤이젤과 로스차일드, 선우, 미국과 서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이 없어진다고 한들, 변하는 것은 없다. 세계는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온 리라의 말은 “모든 인간들이, 그들의 어둠을 공유하기 때문이죠.”라고 한다. 인간이란 개인적인 욕망과 그 더러운 이면을 자신에게 있는 것을 부정한다. 그래서 자신만은 언제나 착한 인간이기 바란다.

 

그러면서도 그 인간마다의 개인들은 자신에게 큰 이익이 오기를, 앞으로 그런 이익을 줄 그런 존재를 바란다. 결국 신화라는 무지한 자신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인지하지 않고 기만하기에 비극은 되풀이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란 그렇게 심연의 어둠에 보는 것이란 점에서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3권>은 매우 소름이 끼칠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라이트노벨 설정 상 주인공은 세계 제일의 위기와 능력자 혹은 우주 외계인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다고 하여도 현실적인 요소는 배제할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믿는 것은 인간의 존재,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오로지 한 개인이란 점이다. 생각해보면 블랙헤이젤의 마리아나 선우가의 백련 모두 피와 공포를 뿌리는 악마와 같은 존재다. 그녀들이 오로지 다정하고 헌신적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시영이다. 그녀들이 그렇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만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세계를 적으로 돌려도 모든 사람들의 원망을 들어도 관계없다고 한다. 자신의 손에 피가 묻어 얼마나 더러운 인간이 되더라도 시영이 옆에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한다. 결국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사회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나 단지 개인과 개인의 관계다.

 

모르핀 주사를 맞고도 견디는 리나는 오로지 리리, 리리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열게 해준 시영을 보면 답은 개인 그 자체에 대한 실존적 부분이다. 그들이 사회성과 세계에 대한 도덕적 의식을 가지지 않은 것은 이 세계가 그들은 부정했고 버림받아도 내버려 두었으며, 이 사회에는 그들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시영도 그런 심연의 세계를 겪은 인물이다. 1권과 2권을 읽으면 부모 없이 홀로 살면서 온갖 무시와 생계로 인해 고생만 했다. 그에게 손을 내어준 것은 없었다. 빛이란 이름, 정의라는 이름은 그저 허울 좋은 껍질이었다. 그들에게 손을 내어준 것은 어둠이고, 그들에게 살아갈 공간은 어둠이다. 시영의 결심처럼 어둠의 힘으로 절망에 빠진 리나에게 구원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 이번 3권은 결말이다.

 

시영이 두 번째로 좌절하고 있는 리나의 손을 잡을 때 부조리에 대해서는 더 큰 부조리로 대한다고 한다. 이런 느낌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가깝다.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에 대해 부조리로 응답한 뫼르소, 뫼르소는 겉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삶을 사나, 어느 모래해변에서 외국인 1명을 총으로 쏴 죽인다. 그리고 확인사살까지 한다. 왜 그런지 모른다. 단지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그렇다고 한다. 왠지 모르게 중2병과 같은 발언이나 <이방인>은 세계적 문학이다. 부조리에 대해 부조리로 응답한 카뮈의 소설이나, 부조리하기에 그 부조리로서 응답할 수 없는 뒤틀린 인간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우리는 뫼르소나 혹은 시영처럼 그 부조리한 세상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세계적 문학작품과 한국의 라이트노벨을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은가 하나, 적어도 부조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비교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작품에서 롤리타로서 수행하는 리리와 리나, 그들의 이형적 신체기관은 물론 작가의 설정이나 실제 그런 일은 존재한다. 예전에 마르얀 사트라피라는 이란계 프랑스인이 만든 예술만화 <페르세폴리스>를 보면 그녀가 어린 시절 이란에서 겪은 일을 만화로 그려낸다. 어린 소년이 전쟁에서 아무 의미 없이 죽어가는 것을 말이다.

 

이슬람에서 그 소년에게 기념품을 주면서, 만약 천국에 가면 각종 부귀영화와 많은 미인이 둘러싸인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총에 맞거나 폭탄에 맞거나 지뢰를 밟는다. 따라서 3번째 책에서 나온 리리와 리나의 일이란 그렇게 비현실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시 어른이 되어 또 다른 아이들을 찾아 전쟁도구나 성매매로 이용한다. 시영과 리나의 대화처럼 악순환은 막을 수 없는 부조리다. 라이트노벨의 허구성은 소설에서 보이는 이상으로 만들고 환상으로 채울 수 있으나, 그런다고 그 허구와 환상 안에도 현실적 기반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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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의 주제는 마지막에 나온다. 그 주제는 부여된 chapter처럼 “2012년의 카밀라 혹은 1984년의 정지은”, 이 2여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희재라는 남자였다. 아주 선량하고 박식하며 자신의 한계와 고통 그리고 심연의 세계를 보려고 했던 남자를 말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란 소설의 발달은 카밀라, 한국어로 동백꽃이란 영문이름을 가진 여자가 한국에 오면서부터다. 그녀가 이런 계기가 된 것은 양어머니 앤이 돌아가시고, 양아버지 에릭이 재혼하면서이다. 가족의 구성에서 생물학적 죽음과 동시에 마음의 죽음까지 받아들이야 했다.

 

인간이라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니 말이다. 양아버지 에릭의 재혼과 동시에 카밀라에겐 짐이 온다. 거대한 25㎏나 나가는 박스가 6개, 총 무게가 150㎏이니 그녀의 나이가 24살이라면 5.125㎏/년을 가진 박스가 되는 셈이다. 물론 그녀는 1988년에 태어나 2012년 진남시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것은 인간이 다시 고향으로 간다는 것은 삶과 동시에 죽음이란 세계를 발을 밟는 것과 같을 것이다. 처음 간 곳은 진남여자고등학교, 유독스럽게 자신을 증오스럽게 바라보는 신혜숙 교장, 그리고 신혜숙 교장의 남편 최성식, 이들의 만남을 모든 것이 어긋난 시계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그 어긋난 시계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라 생각하나 오히려 그것이 발단이 되어 모두를 절망의 바다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이희재가 마주나온 중학생의 정지은과 어엿한 아가씨인 정희재, 그들에게 다시 시작해야할 이야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소설을 읽다보면 역사적 시간적 흐름과 그 역사적 흐름에서 일어난 개인적 비극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이 이 소설에서도 역시 전혀 무관하지 않은 소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관할지역 도교육감으로 나오려고 하는 최성식, 그에겐 언제나 24년 전의 비극이 뒤를 따르고, 그를 보는 아내 신혜숙 교장 역시 불신으로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은 정지은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정희재를 카밀라로 만들고, 사회에 나가서는 각각의 인생에 충실한 주부, 섹스 프리스타일 커리우먼, 심지어 여성감독까지도 말이다. 그들의 인생은 모두 어느 일에서 시작된 것이다. 1984년 마치 조지 오웰이 만든 소설 <1984>처럼, 그 암울한 시간은 모든 비극의 씨앗이다. 아니라면 미국 선교사 딸인 엘리스가 연못에 빠져 죽어 영원히 부모와 재회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것이 원인일까? 적어도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민담에서 엘리스의 죽음은 단지 소문만 무성하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양관이란 곳에서 엘리스를 보던 사람은 이희재이니깐.

 

그 엘리스를 보고 겁먹은 사람은 이희재의 아버지의 정부였으니 말이다. 모든 비극은 1984년 진남조선의 한 현장이었다. 이희재의 아버지는 조선소의 사장이고, 지은이의 아버지 그리고 지은이를 증오하던 미옥의 아버지는 희재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조선소의 현장노동자였다. 그들은 열악한 근무환경을 개선하길 바라며 시위를 했다. 사장은 당장 용역깡패를 부르고, 깡패들과 대치하던 노동자 중에 4명이 죽고, 그 시위를 주도한 지은의 아버지는 자살을 했다. 모든 비극은 그곳에서 탄생한다. 왠지 노동자의 죽음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 아버지가 노동자여서 그런가? 이 소설을 읽는 도중, 내 방에 들어온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배에 가신 아버지가 다시 온다. 기관실 옆에 있는 숙소 온도가 60~70℃ 정도 된다고 말이다. 우리 동네에도 조선소가 있었고, 이 소설에 등장하던 지은이의 아버지와 그 주변사람들도 그런 비극을 겪는 것을 역사적으로 목격한다. 어느 역사적인 비극이 결국 개인의 비극이 되고, 그 비극은 다시 다른 이들에게 비극으로 되어 평생 자신의 인생에 대한 영향이 된다. 인간이란 결국 자신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 잃은 미옥과 지은, 미옥은 시위주동자인 지은이 아버지를 증오하고, 그의 딸인 지은이를 증오했다. 게다가 지은이를 사랑해주던 최성식 선생님을 보며 질투까지 했다. 매우 낡은 학교도서관에서 그것도 발랜타인데이 때 남몰래 초콜릿을 최성식 선생님에게 주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지은이에게 이길 수 없었다. 따라서 지은이가 매우 미웠고, 그녀의 나쁜 소문과 그리고 그녀를 궁지를 몰아넣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추한 모습은 추후 아들이 발견한 마을 민담, 전설로 통해 스크린 화면으로 비춰진 자신의 동기인 영화감독의 입에서 나온다. 그 동기는 미옥이 보이지 않으나 마치 앞에서 그녀의 과거를 캐묻는 것처럼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아우라를 보여준다.

 

모든 비틀림은 비단 국내만 아니다. 카밀라를 입양한 앤과 에릭, 그리고 카밀라를 사랑하던 유이치까지다. 사실 친부는 정지은의 오빠가 아니나 그렇게 포장된 그곳, 카밀라 아니 정희재는 자신은 사람으로 살아갈 의지를 잃고, 자살을 시도하기 위해 바다로 빠진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만을 위해 바다에 빠진 게 아니라 그 바다에 빠져 평생 만나지 않을 어머니 지은이를 찾아가는 것이다. 바다의 차가운 물결이 희재의 뺨을 스쳐갈 때, 그것은 지은이가 소녀인 자신보다 성장해버린 딸의 부드러움 생명을 느끼고 싶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서 우연히 희재를 구한 지훈, 만약 지훈이를 그렇게 만나지 않고, 정상적으로 진남바닥에 봤으면 동네 누나 동생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지훈은 군에 가기 전에 희재를 위해 스쿠터를 모는 왕자가 되었다. 왕자는 백마를 타는 것이 맞는데, 왕자는 멋지게 등장해야 하는데, 왕자가 되어버린 남자는 오히려 아무 의도도 없이 그저 사람을 구하겠다는 것과 희재의 생명의 은인인데도 오히려 희재의 자아 찾기에 동참해주는 친구가 되었다. 비와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 우산 안에 서로 붙어있는 그들은 친구보다 연인에 가까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 지은이란 어머니의 죽음을,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러나 중요한 건 지은이가 최성식을 사랑한 것을 사실이나 더 중요한 점은 지은이는 자신의 배에 있는 희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점이다.

 

단지 그의 아이가 아니라 나의 아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자살은 엘리스처럼 사라져간 희재를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희재라는 이름이 노트에 새겨진 것처럼 이희재를 생각한 것인가? 이 모든 우연에서 우연으로 되어버린 필연적 숙명은 비틀어져 버린 몇몇 영혼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다. 만약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선택의 기점을 잡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희재는 젊은 시절에 지은이의 구원을 해주는 것보다 같이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 만약 이희재가 아버지 이상수를 말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갓 작은 일들이 엄청난 일들로 발달해 간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처럼 파도는 바다에서 매우 사소한 일에 하나이다. 그 파도가 넘치는 바다에서 바다는 파도가 그저 스쳐가는 일이다.

 

그 스쳐가는 일이 아무렇게 여기지 않은 바다처럼, 만약 바다가 그 파도처럼 스쳐가는 일을 정말 생각했다면 어떻게 될까? 파도는 바다가 있기에 가능하나, 파도가 없다면 바다는 움직이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물론 파도의 원리는 지구와 달의 운동에서 생기는 조석과 간만의 차이고, 기압과 수온 그리고 바다지형도 포함되나 말이다. 그래도 파도가 있기에 우리는 바다라는 것을 눈으로 움직이는 생명처럼 볼 수 있다. 그 생명이 가득하여 모든 것을 삼킬 것 같은 파도! 그것이 바다가 파도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시간의 장벽을 넘을 수가 없다. 후회의 시절, 지은이가 실어증에 걸리고, 마음을 열어준 선생과의 밀애, 그리고 아이의 헤어짐, 오빠의 누명, 카밀라의 회귀 이 모두가 비극의 연속이다. 혼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크나큰 세계, 하지만 크나큰 세계도 작은 세계가 모여진 세계다. 그 작은 세계에 대해 우리는 꿈을 다시 꿀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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