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
박인하 지음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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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이란 나라에 만화라는 것을 말하기란 정말 어렵다. 만화라는 인식 자체가 이미 어린 아이들이 보는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시간 죽이기를 위한 도구, 또는 불량하거나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은 불필요한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텍스트라는 글이 아닌 그림으로 이루어진 서사구조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봐도 이해하기가 어렵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가 가지는 전달력은 매우 효과적이면서도 탁월한 것이다. 만화가 왜 이렇게 탄압을 받게 되는 것일까? 최근에 제정되어 발효 중인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법의 취지로는 아동청소년들을 보호하자고 하는 것이나 막상 뒤돌아보면 사회전반저인 성에 대한 담론이나 표현의 자유 내지 의지를 박탈하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나, 한편으로 생물학적으로 동물이란 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성적인 충동이나 본능적 요소를 부정하기보단 억지로 막는 것보다 합리적인 대안이나 혹은 그 감정을 하나의 예술적인 감각으로 승화하는 편이 더 탁월하다.

 

그런 점에서 성에 대해 무조건 개방적이라든지 혹은 무차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독특한 아이템으로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지나 청소년기라는 제2차 성징기로 통해 남녀들은 자신의 몸에 변화를 알고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상대성에게도 흥미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린 시절 여자의 나체를 보지 않아도 남자아이들은 몽정을 하고 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성의 비밀에서 상상력이 발휘되고, 그 상상력은 청소년만 아니라 우리가 보는 위대한 예술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가령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여자의 음부를 가리고 있는 아프로디테가 큰 조개에서 탄생하는 장면이다. 여신의 음부를 가린다고 해도 유방이 돌출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스시대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예술을 돌이켜보면 그것이 하나의 외설인가? 아닌가에서 이미 예술로 인정받은 바이다. 만화에서 만약 유두가 나오면 그것은 하드코어라는 포르노 그래픽으로 차별당할 뿐이다. 물론 그것을 급격하게 강조하고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은 분명 문제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장면이 필요한 계기가 있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고문을 당하는 민주운동가인 김종태의 역할을 맡은 박원상 씨가 고문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가 드러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모자이크로 처리되었으나 근본적으로 남성의 성기노출이 영화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고문을 하는 과정에서 인권을 무시한 채 옷을 전부 벗겨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했기 때문이다. 상황적 연출이라든지 혹은 그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은 의미를 상기하기 위해서 상상력 내지 혹은 reality한 요소를 부각해야 하는 점이다. 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를 읽으면서 한국의 그런 상상력 부재를 만들 수밖에 없는 한국의 만화문화에서 아깝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이 서평 초반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선 만화에 대해 말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만화란 생각해보면 고대 라스코벽화에서 시작하여 고전주의 이전이나 당 시대, 그 이후의 르네상스 내지 바로크와 로코코, 심지어 아방가르드 예술인 큐비즘까지 만화에 차용되기 때문이다. 박인하 교수도 잘 지적한데로 국내 만화학과 아니 만화학과를 지나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강의 중인 교수진 대부분이 만화가보다는 서양화학과 많다는 것을 인정하다. 국내 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활동 중인 각 대학의 교수들이나 혹은 박사과정을 밟는 분들도 회화를 전공한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만화는 회화처럼 예술적 영역으로 보자면 비슷하기도 하나 다른 부분은 회화는 개인적이고 일부 특정계층을 위한 것이라면, 만화는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것이야 한다. 심지어 예술만화를 보더라도 기법이나 회화구도가 독특해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만화기 때문에 예술적 요소를 더 실감이 넘치게 전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기 위해 기준이나 방법조차 모른다. 이른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제시하는 기준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기준을 정하는 기준의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화에 대해 그저 일반적인 세견으로 정하는 것보다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현상에 따라 context적인 요소로 만화를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만화역사에서 주로 코믹스보단 카툰이 발달했다고 소멸한 이유는 만화라는 것은 그림으로 되어 있으며, 어려운 글을 쓰기보단 누구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역사에서 한국은 풍자만화가 시초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시대정신과 더불어 그것에 대해 탄압하려 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와 군사정권에는 풍자만화는 오히려 규제대상이고, 오로지 명랑만화로 가야만 했다. 만화라는 것은 아이들이나 혹은 시간을 때우는 하나의 유치한 변모한 것이다.

 

우리 만화란 그렇게 암울한 시대와 폭력적인 정치적 이해에 따라 문화적으로 쇠퇴한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억압하고, 그저 주조공장에서 나오는 주조물처럼 되기를 바란 것이다. 만약 인간이 주조물의 원재료인 금속이나 플라스틱인 경우 문제가 없으나 인간은 생물이란 점이다. 동물은 감정을 가지고, 때로는 성적본능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인간의 본연의 욕망은 사회적 통제에 반발하기 마련이다. 그런 반발심이나 또는 자유분방함을 만화로 표현하거나 즐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 내적 심리에 쌓여 있는 스트레스나 억압적 기제를 해방하는 것과 같다.

 

또한 그런 억압적 요소는 인간의 본연보단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태어난 이후 사회적으로 살아가면서 성립되는 것이다. 인간의 불평등은 태어날 때 생물학적인 불평등을 가지기도 하나 사회적인 요건으로 교육정도, 가정경제력, 권력의 현황, 그 인간이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에 따라 불평등적인 요소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어가는 그 순간, 아니 죽어서도 불평등적인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살아가는 것은 늘 자기에게 불안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것을 해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이나 억압을 해방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폭력과 자신에 대한 자해성이면 심각하겠지만,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돌린다는 것은 좋은 이야기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화를 보면서 일본을 항상 생각하는 것은 일본의 만화와 그리고 만화와 관련된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이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넘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요건이 되어 스토리텔링이 형성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겉으로 만화를 무시하나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허영만 화백의 <식객>이나 영화로 상영한 <Beat>는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고, 일본 만화원작인 <꽃보다 남자>나 국내 작가가 만든 <풀하우스>, <궁> 등과 같은 작품도 흥행을 거두었다.

 

만화책의 소재가 결국 드라마와 영화의 세계로 가는 점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요도가 하나의 문화산업으로 큰 효과를 보는 것을 생각하면 만화의 발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만화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문화에서 보이는 한계점에 부딪히나 그것을 제일 쉽게 나타내기 좋은 것이 만화다. 만화는 영화, 드라마처럼 거대한 자본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문학소설처럼 생각한 내용을 글로서 계속 나타낼 필요 없이 생각하는 그 자체를 그리면 되는 것이다. 단지 그리기 위해서는 그림에 대한 실력이 필요하나,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박인하 교수가 인터넷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엉덩국이란 고등학생 만화가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었다. 그림실력이나 이야기흐름은 흔히 속된 말로 병맛만화라고 하나, 그 병맛에 담긴 대중들의 호응이나 그림 뒤에 보이는 한국사회의 모순은 큰 흥행을 불러 일으켰다. 그 덕분에 엉덩국은 인터넷에서 많은 팬을 보유하게 되었고, 최근에 스마트폰 어플까지 등장하여 만화의 새로운 조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분명 정식 만화가도 아니고 만화학과 학생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보여준 만화의 역량은 사회적 이슈로 된 것은 분명하다.

 

만화라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보는 것은 바로 누구나 만들고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점은 누구나 자기의 생각이나 의지를 표현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만화에 사소한 것만이 아니라 사소하지 않은 것들까지 넣어 나온다는 것은 때로는 누구에겐 불편한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책 본문에서 과거 만화문화 탄압이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만화라는 그 자체보단 사회적 흐름과 시대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 만화라는 것은 현실과 별개로 보고 있겠지만, 사실 만화 역시 현실에 의해 가장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영향을 쉽게 받으므로 그만큼 많은 주제와 표현들이 올라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만화를 쉽게 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많은 몸부림이 필요하다. 만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그 만화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것이며 또한 무엇이 있으며,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만화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화라는 것은 쉽게 볼 수 있어도 막상 만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다. 만화는 그 자체를 보면 만족할 수 있어도, 만화라는 것은 무엇언지를 알려면 그 자체를 넘어 메타적인 영역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 다루는 서적들을 읽으면서 생각한 점은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만화 역시 영화나 문학과 같이 비평적 영역에서 다루는 것은 옳겠지만, 비평만이 아니라 대중들까지 읽으면서 같이 즐길 수 있는 입문서가 부족한 점이다. <즐거운 만화가게>의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표지에 있다.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는 이들은 까까머리의 애부터 아이를 돌보는 큰 누나도 있다. 많은 어린아이들이 추억의 만화로 불릴 만화책을 서로 나누어 본다.

 

만화라는 것은 서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왜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면 결론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고, 그 인간다움에는 행복이 있을 것이고, 행복에는 즐거움이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거대한 시장경제구조에 놓인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다. 상대적인 경제적 부로서 우리의 행복의 척도를 부의 절대적 상급자에 맞춰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즐거움을 향하여 살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을 보거나 또는 조깅, 배드민턴, 테니스 등과 같은 운동이나 꽃꽂이나 다도와 같은 여러 가지 취미생활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취미생활이 인간에게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억압으로 인해 지쳐있는 심신을 위로할 수 있다. 만화라고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지 말란 법이 없다. 오히려 만화책처럼 손쉽게 구하고 읽고 즐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경직되고 단순한 것에 지나 상상력을 펼쳐 우리가 알지 못한 것도 알고, 볼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다. 만화라는 즐거움은 새로운 상상력이 있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반전도 있다.

 

조금 슬픈 이야기나 박인하 교수의 아버지 일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자신의 자녀에게 관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져봤다. 그런 관대함이 박인하 교수를 탄생하게 해준 것이다. 그 분께서는 자신의 자녀에게 즐거움과 동시에 추억까지 안겨주었다. 즐거운 만화가게 그것은 분명히 만화라는 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 아니라도 만화라는 것이 얼마든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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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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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라는 영화가 예전에 개봉된 사실을 알았다. 평소 대중영화보다는 차라리 대중들이 기피하는 애니메이션 영화 혹은 예술영화 쪽으로 보는 편이었다. 대중들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들이 보는 영화는 결국 Cliche라는 정해진 패턴을 늘 따라가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게다가 영화내용의 스토리와 더불어 그 스토리 안에 담론하는 의미까지 고려한다면 분명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원작이 내포하고 있는 작가의 숨소리를 제대로 받아볼 수 없는 것이 한계라는 점이다. 작가의 글이 독자에게 문자서사로 통해 이미지를 요구한다면 영화는 그저 이미지로서 관객에게 전달된다.

 

의식적인 사고능력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수용만이 존재하기에 같은 작품이 문자서사와 영상서사로 나오는 것은 상당한 차이점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원작이 있는 영화를 잘 안 보려고 하는 이유는 원작에 대한 충실성과 더불어 그 충실성을 넘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영역도 같이 드러낼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다. 물론 영화 <은교>는 관람하지 않았고, 단지 소설 <은교>만을 읽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에 듣기론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아이에 대한 집착적인 관심과 성불구자로서의 질투심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장면은 소설을 읽다보면 나온다. 그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유서를 적을 때 분명 70에 가까운 나이라고 한다.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것도 모자라 당뇨증세로 인해 각종 합병증으로 죽음의 문턱을 오고가고 있던 한 노초였다. 그런 노초에게 죽기 전에 만난 한은교라는 소녀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소설 제목이 <은교>라서 은(銀)과 교(橋)라는 은으로 만든 다리라고 생각했다. 막상 생각하여 은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이름조차 주변에서 본 적이 없다. 은교라는 작품이 결국 한 소녀의 이름이고, 그 한 소녀에 대해 늙은 시인과 중년을 바라보는 서지우라는 작가가 서로 라이벌 의식을 느꼈을 터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치정적인 부분과 은교에 대해 젊은 남성의 왕성한 성욕을 과시하는 서지우만의 모습만을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내에서 두 남자가 한 소녀에 대해 가지는 마음은 상당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가? 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점이다. 은교라는 소녀는 분명 17세일 때 시인 이적요를 만났다. 이적요는 20대는 혁명을 위해 살았고, 30대는 감옥에서 살았으며, 40대 이후에는 시인으로 살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우리 역사에서 근대화라는 역사적 흐름에서 그 태풍의 주변에 머문 자였다.

 

본래 태풍의 눈은 항상 고요하나, 태풍의 주변은 강력한 바람과 비가 태풍이 지나가는 모든 것을 박살낸다. 군부독재시절 야당 정치인 쪽에 일한 이유로 지명수배자가 되고, 그 이전에는 가난함에 시달렸다. 그는 시인이란 엄청난 이름을 얻기 전까지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자유를 위해 희생한 점이다. 그런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시인 이적요는 <은교>에서 매우 뛰어난 문학시인이었다. 시적 영감과 더불어 그의 명성을 모든 이들에게 칭송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적요는 자신의 이름처럼 적요했다. 아니 오히려 적적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의 인생에 언제나 누군가에게 보상받지 못한 어둡고 깊은 슬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옥에 같이 들어왔는데, 모두 1년이 되기 전에 나가고, 그들이 다시 이적요에게 찾아와 회유하는 장면에서 그의 고집과 더불어 인격이 보인다. 그렇게 이적요는 자신의 청춘을 희생했다. 유일하게 그가 좋은 추억으로 남은 것이 D라는 한 소녀였다. 자신보다 분명히 나이가 많은 D라는 소녀가 어릴 적에 자신이 위기에 빠질 때 구해준 것이다. 부모님은 몸이 불편하여 적요에게 아무런 것도 해주지 못한다. 아마 피가 흘릴 정도로 맞은 적요와 그 적요를 문과 벽을 경계로 병든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의 모습은 병든 아버지란 사실을 복선으로 제공한 것 같았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거세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아버지의 권위에 따른다. 적요의 아버지는 라이오스처럼 권력도 없고 그저 죽어가는 사람이고, 그는 거세의 위험을 적요에게 주지 않았다. 오히려 병이 들었기 때문에 아들을 주변의 폭력에서 구원해줄 수 없었다. 그 구원자는 D라는 소녀다. D라는 소녀의 이미지만이 유일한 적요의 안식처였다. 적요는 평생 D라는 소녀를 만나지 못한 채 외로운 인생을 보냈다. 그런 D라는 소녀가 과거의 존재했으나 현재는 그 시절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과거라는 것이 하나의 사실이기도 하나 또한 과거는 하나의 환상에 가깝다. 우리는 과거로 인해 현재를 구축하기도 하나 현재와 멀어지기도 한다. 그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적요에게 은교가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뜻한 햇빛을 맞으며 평온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은교를 보자말자 늙은 시인의 마음은 마치 17세 은교처럼 17세의 소년으로 간 기분이었다. 은교가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서지우에게 말한다. 할아부지가 오히려 더 젊다고 말이다. 육체적인 나이로 지우가 어리기에 그는 자신의 라이오스인 적요에게 충성하나 한편으로 은교로 통해 거세하고 싶었다.

 

자신의 다부진 몸과 거친 성행위로 은교를 지배할 수 있다는 집착을 말이다. 물론 적요도 은교에 대해 성적인 충동이 있었다. 하지만 지우와 달리 적요는 명곡의 팝송에서 항상 등장하는 eagles의 <Hotel California> 가사와 더불어 은교와의 성행위를 꿈꾼다. 그러나 그가 망상에서 즐기는 성행위는 지우와 다른 모습이다. 그는 은교를 하나하나 모든 것을 느끼려 했고, 지우는 오로지 자신의 페니스로서 남근적인 상징성을 보이려고 했다. 왜냐하면 지우는 자신의 작가로서 등단한 계기가 적요가 만들어준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지우는 재능이 없었고, 적요에겐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었다. 그래도 지우는 적요를 존경하고 사랑했고, 지우는 적요가 부족한 것을 알기에 그를 보살펴 주었다. 게다가 적요는 자신의 사망 이후 모든 자신의 신변을 지우에게 부탁하려고 했다. 20대 같이 혁명을 꿈꾼 한 여성과의 짧은 추억에서 나온 자신의 친아들에게도 그러하지 않았다. 가족이란 인연의 끈에서 피보단 오히려 세월이란 물을 택했다. 아니 물보다는 술이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적요는 소주를 무척이나 좋아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은교는 지우와 적요의 일기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오히려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소외되었다고 여겼으나, 지우의 일기를 넘어 적요의 일기를 보는 순간 얼마나 적요가 자신을 사랑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은교는 적요에게 할아부지라고 부른다. 자신의 친할아버지도 아닌데도, 적요는 그것이 좋다고 한다. 사실 지우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했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 그 두 사람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아슬아슬한 관계가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일정한 틀에 박힌 공간에 부자 같은 남자가 2명이 있을 때는 무척이나 가깝게 지내나, 그 사이에 여자가 1명이 들어갈 경우 그 균형을 파괴된다. 그런 소설이나 혹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에도 많다.

 

어떻게 보면 <은교>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매우 심하게 반영된 것 같았다. 대신 남근중심적인 사회에서 <은교>는 탈(脫)남성적인 권위의식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이지적이고 늙은 남자와 감성적이고 어린 여자는 이분법적인 요소를 지닌다. 인간에게 자연과 문명이란 것은 언제나 자연은 문명에게 속박되어 지배당해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은교는 오히려 자연이란 소녀라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대로 움직인다. 움직이지 못할 때는 오직 강제로 지우의 손에 이끌려 성행위를 할 때이다.

 

소녀에서 이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혹은 자신의 처녀성을 떼어버린 것에서도 할아부지라고 부른 적요의 글이 은교에게 더 크게 닿은 이유는 은교만이 유일한 적요의 어린 신부이고 소녀이고 아름다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아직 어린 중고등학생 아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자아이조차도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같이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나만의 공간>에서 개인적으로 미학자로서 좋아하는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가 인상이 깊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 대해 알몸이 되어 같이 이불에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성행위인지 아닌지 그때는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요새처럼 더욱 발육이 좋은 아이들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은교가 눈물을 흘린 이유, 그것은 은교에 대해 느끼는 적요의 사랑은 몸은 70이란 Seventy일지 모르나, 은교를 만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사랑은 Seventeen이었다는 점이다. 17과 70이란 시간적인 한계는 육체적으로 분명 존재하나 적요는 그것을 넘고자 했으나, 이미 검버섯이 피어나는 썩어가는 자신의 육체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알기에 그 한계를 넘고자 하는 금기를 깨고 싶은 신화적 욕망이 바로 <은교>라는 소설인 것 같았다.

 

<은교>라는 소설에서 다른 맛은 단순히 치정과 질투만이 아니라 가볍게 스쳐가는 우리의 흔적이다. <은교>의 주인공인 적요와 지우는 시인과 소설가이고, 은교는 처음과 달리 시인을 하고 싶어 한다. 주인공이 소설가이고, 소설을 만든 사람도 소설가다. 물론 소설가이기에 소설을 쓰는 것은 당연하나 문학소설에서 반영된 인간의 역사 역시 놓치지 아니했다. 적요라는 한 인물로 통해 그동안 우리가 이렇게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어릴 적에 느낀 그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없어진 것인가? 우리는 과연 진정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을까? 라는 것이다.

 

은교를 만나기 전의 시인인 적요는 세간에서는 기념관을 세우고 시청공무원이 바쁘게 돌아다닐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붙여진 호칭이나, 처음 <심장>이란 소설을 지우에게 줬을 때 자신이 기획하고, 지우의 이름으로 알려진 것에서 문학을 다룬다는 그 지식인의 세계를 비웃었다. 그래서 <은교>라는 작품은 그저 3남녀의 관계만 보는 것은 절대 바르지 못한 선택이라 들었다. 문학은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혹은 시인이라 하더라도 시 자체가 하나의 문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서 “시(詩)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지식인의 책임은 민중의 삶을 보고 끄집어내는 것이지 오히려 민중을 분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문화라는 것은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주입하는 셈이다. 수업시간에 처음 적요의 수업에 들어온 지우에 대해 적요는 우리가 말하고 느끼는 것은 정말 개인이 느끼고 말하는 것인지 혹은 그렇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자신만의 언어가 아니라 강제로 부여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거짓과 위선의 세계에 살아온 적요가 은교로서 자신의 본위로 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은교>를 읽으면 남녀 간의 적나라한 성행위도 많이 표현되어 있고, 이른바 물장사라고 불리는 세계도 나온다. 노골적인 성행위와 더불어 은교에 대한 섬세하고도 시적인 표현에서 오히려 문학소설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본연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 않은가 싶었다. 단지 그것이 그 자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다양한 부분에서 그 중에 하나라는 점을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추악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 추악한 부분을 인정하고 인식하기에 오히려 추악함을 막을 수 있다. 그 추악함을 부정하고 자신과 분리되었다고 여기는 순간 인간의 추악함이 드러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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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메에서 일본을 만나다
조성기 지음 / 어문학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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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메에서 일본을 만나다>를 읽는 순간, 예전에 일본 애니메이션 관련 연구도서를 읽은 것과 상당한 매치와 더불어 아쉬움이 느껴졌다. 미국 일본문학 전공 교수 수전 네피어가 만든 인문으로 보는 저패니메이션인 <아니메>라는 도서를 먼저 읽었고, 그리고 철학 사상 그리고 인문학을 연구하는 수유 너머에서 만든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그리고 한창완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의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 그 외의 저패니메이션의 서적을 읽었기에 이미 읽는 순간부터 <아니메에서 일본을 만나다>는 낯선 도서가 아니라 그 이전의 도서에 비교되는 도서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잘 정리된 내용은 전반적인 context라는 연관성이다. 가령 역사적인 사건부터 시작하여 문화와 관습, 기후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인자를 반영한 점이다. 그러나 그렇게 길게 뻗은 만큼 내용의 주제성은 약간 아쉽게 다가왔다. 일반적인 문화지식으로 다가가면 좋은 입문서일지 모르나 깊이를 들어가기에는 너무 내용 자체가 저자의 생각에 치우친 것이 아닐까 하는 심정이다. 애니메이션이란 단어가 Animation이고, 원래 Animate라는 생명이 없는 존재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기에 애니메이션에서 일본문화의 밀접성은 그 문화와의 특이성이 있다는 것을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경우 전통사상으로 본다면 무(巫)를 기반한 원시적인 문화가 잔존하기 때문이다. 그런 무라는 것으로 통해 샤머니즘과 단군신화의 웅녀를 토대로 한 토테미즘은 전통적인 원시문화가 잔존함을 알려준다. 일본의 경우에는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보다는 차라리 애니미즘이라고 하는 물신숭배에 가깝다. 따라서 물신숭배인 애니미즘이 깊이 반영된 일본인들의 무의식에 애니메이션으로 영상을 표출함은 매우 독특한 문화 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즉, 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를 영상이라는 형이하학적인 시각으로 만들어내는 점에서 일본의 아니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보기엔 어린아이나 혹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그저 즐기는 세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이 서적에는 제법 신화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신화라고 하여 레비 스트로스 내지 혹은 마빈 해리스 등과 같은 인류학자들의 해석하는 신화학 영역보다는 그 신화라는 것을 소개하고 그것이 일본 문화에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치중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일본문화라는 것을 아니메라는 영상미학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것은 분명하다. 단지 아쉬운 부분은 깊이성에 대한 부분이다. 일본의 벚꽃이라는 것은 흩어져서 날라 없어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즉 유미주의라는 소멸의 미학이 일본의 작품 내지 생활양식에 깊이 박혀있다는 것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함이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의 미학 도서에서 일본은 불꽃놀이와 벚꽃놀이를 좋아하는 것을 설명한다. 불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번쩍 빛이 나면서 소멸해가는 모습이다. 큰 불덩어리가 작게 세분화 되어 없어지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고, 벚꽃놀이에서 나무에 달린 벚꽃보단 그 나무에서 바람에 의해 날아가거나 떨어지는 벚꽃이 아름다운 법이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속 5㎝>이란 작품은 초속 5㎝로 떨어지는 것은 결국 벚꽃의 꽃잎이란 점이다.

 

과연 그것은 우리에게 어느 미를 안겨주는 것인가? 미학이란 것은 아름다움을 찾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론 20세기까지 존재한 아방가르드에서는 반미학이라고 하여 기존의 관념을 전복하고 새롭게 보여주는 가치도 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라는 반미학 역시 미학으로 대체되는 순간 아방가르드의 존재의 의미는 사라진다. 20세기 마지막 아방가르드인 상황주의 인터내셔널(IS) 그대로 해체하고 사라지고 만다.

일본의 미학은 그런 반미학적인 요소는 없다. 왜냐하면 일본의 상징에서 예전에 <국화와 칼>이란 서적을 들은 바가 있었다. 화쟁과 전쟁, 그것은 서로 도모하여 친하게 지내거나 혹은 서로를 겨누고 싸우는 것이다. 화를 추구하는 정신에서 벚나무 아래의 차 한 잔은 분명 서로 간의 친목을 도모하나, 사쿠라 라는 벚나무 꽃잎을 일어로 들어보면 왠지 우리는 평화보단 전투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기분이다. 소멸해 가는 것은 아름다운 것인가? 사무라이 정신에서 그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원래 일본이란 섬이 기후적으로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고, 지진이나 해일 그리고 각종 자연재해가 일어나기에 그들은 항상 죽음의 위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일본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면 나무, 돌, 물 등과 같은 자연적인 요소가 많이 내포된 단어가 많다. 자연 속에서 그들의 인간생활은 결국 자연적인 요건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기에 애니미즘이란 물신숭배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요소는 우리가 자주 알고 보는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이 많은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은 탈아시아론에 대한 점으로 자기 민족중심적인 작품과 더불어 옥시덴탈리즘 역시 강하다. 서구가 동양이나 아랍문화권에 대해 가볍게 보는 문화적인 용어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면, 역으로 동양이 생각하는 서양의 이미지는 옥시덴탈리즘이다. 탈아시아적인 요소에서 그들만이 추구하고 만들어내는 유럽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바로 그런 옥시덴탈리즘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일본이란 국가적인 특성과 더불어 민족성 성향, 그리고 역사라는 과정이 문화라는 것에 의해 농축되고 표출되는 것이다. 문제는 애니메이션이란 의식적인 것보단 무의식적 영역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화된 일본인의 사고를 애니메이션 영상이란 것으로 통해 언어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를 하나의 언어로 통하여 일본을 보는 것에서 애니메이션만큼 좋은 것이 없다. 작가나 혹은 애니메이터들이 만들어낸 작품을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결국 작가나 대중이나 모두 비슷한 사고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문학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등장하는 칼과 벚꽃은 일본인에 대해 충분히 공통적인 요소로 도출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모든 것을 귀결할 수 없으나 일본인이란 특징이 본래 옆 사람에 대해 참견하지 않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그 개인적 성향으로 인해 집단주의적 행동도 강하다.

 

그들이 러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광기에 빠진 것이 가능한 이유도 그런 민족적 기질에 가깝다는 것이다. 신화학적으로 신화는 결코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는 과거, 현재, 미래의 대화방법이다. 일본인의 신화적인 요소가 곧 문학적 요소와 더불어 그것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들의 정체성은 하나의 문화적 상품과 더불어 문화적 공격도 생각할 수 있다. 언어는 곧 그 문화의 특성과 더불어 하나의 권력적 요소를 지닌다. 나 역시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나, 그것을 좋아하기에 일본에 대한 호의도가 있는 것은 나 이외의 많은 향유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바이다.

 

그렇게 잘 알기에 우리는 애니메이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일본을 봐야 하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것이 만들어졌던 하나의 과정을 봐야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는 역사와 문화, 기후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가 전제되는 게 당연하다. 물론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좋으나, 이 서적은 너무 과거에 중점을 둔 게 아쉬웠다. 가령 전공투와 단카이 세대에 대해 자세히 다룬 것이 좋았다고 본다. 애니메이션이란 산업이 일본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고, 이때 시대상과 더불어 경제호황과 불황 그리고 사회적 불안이 연결되는 것은 상세히 다루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오타쿠 문화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부분은 저패니메이션 관련 도서에서는 중점으로 다룬다. 이 책에서는 너무 팔을 여기저기 뻗치는 만큼 현대적인 조건과 현상에 대해 약간 아쉬웠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지만, 그 현재의 조건성도 새롭게 추가되는 점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도 다양한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좋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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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5집 - 불의 발견
부활 노래 / PLYZEN (플라이젠)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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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5집 불의 발견은 부활의 앨범에서 새로운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본래 불이라는 것은 인간의 문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에 대해 생각하면 불이 곧 파괴와 생성을 두 가지를 지니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요소이다. 불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나, 때로는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심지어 인간의 근본이 되는 자연조차 파괴한다. 매년 우리나라에 산불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산림이 훼손되고 사라지고 있는가? 불의 발견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편리함과 동시에 불편함을 안겨주는 극단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불의 발견의 테마처럼 연주곡에서 프로메테우스라는 곡이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지혜와 번영을 알려주는 불을 전해준 이유로 그 벌로 절벽에 묶여 맹금류에게 살을 파여 먹히는 벌을 받는다. 인간에게 불이란 것을 준 대가로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고통이란 프로메테우스만 받는 것만은 아니다. 부활5집의 프로메테우스를 듣다보면 전쟁이란 큰 비극이 사운드로 들려준다. 폭탄이 떨어지고, 전투기가 날아가는 소리는 불의 발견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분명 Elga의 희망과 영광의 나라를 기타 에드립으로 들을 때는 불이란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런 것이 고통의 분란이란 점에서 얼마나 부활5집이 서사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가? 서사의 주제에서 마지막은 역시 희망이다. Any time이라고 계속 반복하는 보컬링에서 우리에게 이런 비극의 극복을 넘을 수 있는 미래는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부활의 불의 발견은 그렇게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런 만큼 노래 역시 의미심장하다. 여태까지 부활의 노래를 들었다면 5집의 첫 곡부터 매우 놀랄 수밖에 없다. 보통 전자기타와 어쿠스틱 기타 음이 시작되는 것보단 신디 음이 경쾌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Lonely Night, 내가 처음 듣자말자 엄청나게 쇼크를 받은 곡이었다.

 

부활이 이런 곡을 하다니 말이다. 박완규의 시원하고 터지는 듯한 목소리는 부활의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 서정적인 것보다 도전적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슬픔 바램이란 곡이 있었으나 21세기 불경기나 믿음이란 곡은 상당히 현실에 대한 회의감이 가득한 곡이다. 21세기 불경기에서 가사 하나하나가 공감이 간다. 술잔에 기울이고 낭만 따위는 없이 그저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비애라고 할까나? 믿음 역시 인간의 과도한 믿음이 파멸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불이라는 것은 결국 문명이기에 문명사회라고 하는 현실이 과연 우리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것에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것은 추억 내지 지나간 일들에 대한 단상이다. 부활 2집의 이승철이 부른 회상을 다시 박완규가 부른 것에서 마지막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지나간 세월에 대한 어린 시절의 그리움을 더 그립게 한다. 마치 부활3집에 있는 그리움 그리운 그림처럼 부활5집은 오히려 저돌적이고 경쾌하기에 그리움과 회상이란 아련함을 떠오른다.

 

기타리스트 김태원이 펼치던 부활5집에서 사운드의 세계는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예전에 부활1집에서 김태원의 기타가 붉은색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 5집에선 상당히 비주얼이 돋보이는 ESP 기타를 들고 있는 점에서 신기했다. 조금 5집 이전에는 수수한 차림과 분위기였다면, 5집에선 임팩트가 넘치는 코디와 장비였는지 매우 느낌이 신서했다. 물론 지금도 부활은 다른 스타일과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나, 아마 5집이 최고 혁명적이라고 본다. 기존의 부활의 틀을 제일 심하게 전복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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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Story - 역사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이야기
닉 테일러 지음, 엄연수 옮김 / 글과생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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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단어를 영어단어로 찾아보면 ‘History’라고 한다. ‘History’에 대해 단어를 다시 재분리 및 조합을 해보면 ‘His’와 ‘Story’의 합친 단어이다. 결국 역사라는 것은 그의 이야기를 두고 맞춘 것이다. 단어 선택 점에서 결국 남녀라는 이분법적인 구도가 영어단어에서 나온 것처럼 ‘History’라는 것은 남자들의 이야기고, 거기서 남자가 아닌 여자들은 분리되어 가려진 이야기란 점이다. 여자가 나오는 역사적인 사건들은 많지 않다는 점과 있다고 하여도 ‘History’의 보조 내지 부연적인 내용만 첨부하는 수준이 되었다.

 

 

만약 ‘History’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만약 일어나면 어떻게든 눌러버리려고 한다. 가령 이 책에서 등장한 어느 인류학자인 여성 학자도 영국에서 단지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정당한 조건에서 차지할 수 있는 위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영국에서는 전형적인 백인 금발 남성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남성중심의 문화, 물론 영국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경우, 여성이면서도 여왕이란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그녀는 자신의 여성이길 인정하기보단 남성이 가지고 있는 것이 나에게도 있다고 선언한다.

 

 

남성이 지배하거나 혹은 남성의 지배력을 빼앗거나 공유하거나 협상하는 방법들이 권력이라는 ‘History’에서 늘 다른 모습으로 나왔다. 문제는 이런 ‘History’ 요소들은 과거에도 그렇지만 앞으로 계속 일어난다는 것이 문제다.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남자들은 생명의 탄생과 보장보다는 생명의 파괴와 해체라는 것으로 자신들을 돋보이려 한 점이다. 책 내용은 ‘History’이기에 역사학적으로 보이나 책의 내용을 계속 읽다보면 인류학에 더 가까운 내용이다. 또한 남성의 이야기 뒤에 가려진 폭력과 억압, 착취의 역사 속에서 희생된 여성과 소수성애자들까지 생각하면 여성학적인 부분도 같이 보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환경생태와 생물진화적인 부분까지 나오니 단순히 ‘History’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과 문화 그리고 지구 그 자체까지 담론이 확대된다. 바로 남자들의 이야기가 모든 것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폭력적인 요소에서 피라는 것이 조금 인상 깊은데, 이 글을 적는 나 역시 남자라서 다소 의아한 부분으로 여성들은 임신을 하기 위해 배란을 걸쳐 월경이란 생리적 반응을 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생리혈이 난관으로 빠져나와 몸 밖으로 배출하게 되는 것이다. 생리를 하게 되면 남자인 나로서는 그 고통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피가 나오는 모습조차 알지 못하기에 뭐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여자들이 피를 몸 밖으로 방출하면 남자들은 방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열등의식이 결국 폭력적 행위로 통해 피를 본다는 점이다. 자신의 피를 보지 못하므로 상대방의 피를 보는 것에서 말이다. 자신은 생명을 창출하지 못하기에 생명을 창출하는 여성의 몸, 그것을 부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결국 생리현상에서 생기는 피를 좋지 못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대신 남을 해치지 않은 여자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전쟁에서 타인의 피로 얼룩지는 것은 영광으로 생각한다. 남자는 타인의 피를 보고, 그 피를 보는 과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 그대로 수반된다. 폭력의 결과가 결국 성과라는 것이 남자의 역사라는 점이다.

 

 

물론 생각하면 인류의 역사는 마치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다. 인류는 문화가 생성되면서 끊임없이 전쟁을 해오면서 목숨을 빼앗고, 문명과 자연을 파괴하고,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켜왔다. 덕분에 인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그 중심에는 항상 전쟁이란 얼굴이 있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의학기술, 자동차, 비행기, 심지어 전화기까지 전부 전쟁의 산물이었다. 우리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준 전쟁의 산물인 문명이었으나, 도리어 그것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한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는데, “‘마지막 나무가 죽고, 마지막 강물이 오염되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히고 나면, 우리는 돈을 먹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라고 크리족 인디언의 속담이 잘 설명한다.”이었다. 사실 자연이란 것은 우리의 재산이 아니라 우리가 후손으로 빌려온 부채이다. 부채는 빌리면 원금에 이자까지 상환하는 것이 도리이나, 우리는 그 이자를 역으로 먹고 있다. TV,뉴스, 혹은 각종 미디어에서 말하는 것이 환경오염이다. 우리나라인 한국의 경우도 만만치 않게 그 이야기는 나온다.

 

 

1월부터 전국에 갑작스런 폭설, 3월부터 황사현상, 5월부터 시작하는 여름까지 생각하면 말이다. 봄과 가을이란 계절이 짧아지고, 여름은 점점 길어진다. 벼농사에 적합한 몬순기후인 한국이 점점 아열대기후로 변화하고 있으며, 제주도는 거의 아열대 지역으로 여겨도 무방한 정도다. 이런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결국 환경파괴이고, 환경파괴는 인간의 문명과 산업활동에 의해서다. 자연이란 존재는 같이 살아가고 보호하고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착취하고 이용해야할 대상이다.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자연이란 존재는 인간의 문화와 이성적 존재와 분리하였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명제는 인간처럼 이성이 없는 동물은 잔혹하게 죽거나 이용되어도 문제없다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많은 동물들이 계속 착취당하고, 우리는 고기를 사서 먹을 수 있으나 질 좋은 고기보다 처리과정이 알 수 없는 고기를 먹는다. 예전에 광우병 파동이 일어날 때, 솔직히 생각하여 나는 광우병의 문제보단 도축과정에 대해 더 불안했다. 아니 사육과정이 더 불안했다. 소에게 같은 소를 갈아 만든 사료를 먹이는 것은 인간에게 같은 인간을 먹이는 행위와 같은 것이며, 도축과정에서 오물처리 문제 역시 그러하다.

 

 

닭장 속에 있는 닭의 피부에는 온갖 피부병이 도져 있었고, 돼지는 류머티스나 위장병과 같은 질병은 앓고 있었다. 그런 육질이 좋을 리도 없고, 인간에게 좋은 영양분을 주기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먹어야 했다. 자연적으로 방목하거나 혹은 시골농촌의 농장도 소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시장경제에서 이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심, 그리고 ‘History’는 그런 자연적으로 자라는 동물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의 경제활동에서 개인적으로 내가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토지를 이용한 부동산 경제가 대표적이다. 부동산 경제의 특징은 땅을 개발해야 그 가치가 남는다. 땅을 개발하면 토지개척을 해야 하며, 기존의 숲과 늪, 바다와 강, 심지어 지상이 아닌 지하의 지하수와 토양까지 모두 파괴해야했다. 그 덕분에 식물들의 군락이 사라지고, 동물들은 숨어버렸다. 인간에게 달콤한 꿀과 식물의 생식을 보조하던 벌들도 사라졌다. ‘History’에서는 자연이란 오로지 착취해야할 존재인 것이다. 자연의 착취에서 예전에 읽어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서 인간은 점점 자연을 착취하게 되자, 더 이상 자연을 착취할 수 없게 되어 인간은 인간을 착취한다고 했다.

 

 

자연을 착취는 결국 한정적이나, 인간은 계속 생식만 가능하면 영원히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자연의 착취에서 인간의 감수성이 파괴되고, 인간의 삶의 조건이 퇴락하게 된다.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가들은 바로 이런 문제를 발견했다. 자연의 혜택을 주는 공원과 녹지가 사라지자 인간은 휴식처를 잃고, 심지어 건강까지 나쁘게 되었다. 녹지의 나무에서 주는 맑은 산소와 숲의 수로에서 주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었으나, 최소한의 물과 공기를 공급받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착취는 바로 자연에 대한 착취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그런 착취로 통해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맑은 물을 마시기를 바란다. 예전에 낙동강페놀사건을 생각해도 그렇다. 산업화 과정도 좋으나, 그 결과로 페놀이나 각종 오염물질이 하천으로 방류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피부병에 걸리거나 수돗물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런 현상에서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자연과 감정에 대해 조화를 추구하기보다 자연을 착취하여 파괴하고, 인간의 이성만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비이성적 행위가 바로 그런 세계를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인간은 과연 진화했다고 봐도 되는 것인가? 나는 인류의 문명은 진화했어도 인간 그 자체는 진화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분명 인간은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수명도 전보다 길어졌다. 하지만 그만큼 병의 종류와 규모가 강력해졌으며,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적 진화보다는 문명에 따른 의약기술의 발전이다. 물론 그 대가는 실험실에서 무참히 죽어가는 수많은 척추동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도리어 인간은 퇴화했다고 본다. <진화의 종말>이란 책이름처럼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이 오염되어감에 따라 자신의 몸을 직접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도구로 이용한다. 근력이나 체력은 옛날 사람보다 못하며, 저항력 역시 옛날보다 못하다. 옛날 사람들이 수명이 짧다고 하나, 그것은 면역체계에서 백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신의 개발은 변종 병원균을 만들었다. MRSA 내지 VRSA라고 하는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한 것이다. 메타실린이나 반코마이신과 같은 독학 약물로도 죽일 수 없는 황색포도상구균이 나오면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고, 에볼라나 AIDS, 삭스나 조류독감 등과 같은 이상한 바이러스가 나타나기도 했다.

 

 

인간의 과학이란 이성이 결국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처럼 일주일에 이틀 정도 3시간 이내 일하는 부시맨을 생각하면 문명인이라는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길에 차가 막혀 정체된 도로 위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행복이란 가치를 물질의 혜택에서 찾고, 그것은 착취와 파괴, 환경오염으로 전해간다. 자연이란 가이아라는 대지의 여신은 생명을 주는 에로스에서 이제는 그 역으로 죽음을 전해주는 타나토스로 변해간다.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배제된 여자들의 이야기와 그리고 자연의 이야기, 옛날 마녀라고 불리는 자들은 약초나 민간요법을 잘 알았다고 한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어봐도 마녀들은 자신의 성기나 피부에 각성제를 바른다고 한다. 지팡이를 타고 하늘을 나는 여자들은 아무리 봐도 성적욕망을 품는 여자다. 자연적인 성적욕망을 이성적 규율이란 도덕 아래 모조리 억압을 당했다. 조금이라도 이성으로 무장한 광기에 의심하거나 흠집을 내면 피가 강을 이루는 공포가 역습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지구는 더워지고, 우리의 몸은 더위를 느껴, 선풍기에도 만족하지 않아 에어컨을 작동하여 전기를 사용한다. 그 전기 역시 자연을 파괴하여 만든 에너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계속되는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가 없게 되었다. 자연의 공존은 결국 어머니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이다. 인간의 태초적인 감정을 살리고, 일어버린 기억과 신화도 찾아야 한다. 물론 급작스럽게 되돌리거나 모두 뒤집는 것은 아니다. 조금씩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점이다.

 

 

공존의 길을 열어가는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인식하는 계기가 이미 손을 써도 소용없을 때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위기를 넘어 절망의 인식보다 사전에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책을 보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여자와 남자의 이분법적인 관계에서 매릴린 옐롬의 <유방의 역사>라는 책이 생각났다. ‘His-story’ 속에 잃어버린 ‘Her-story’를 찾아 ‘whole-story’로 되는 것이 답이라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남자의 공격성은 인간 그 본질적인 것보다 차라리 마빈 해리스가 제기한 것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남자가 공격적인 것은 남자의 심리적인 바탕이 공격적인 것보다 문화적으로 공격적으로 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공격적인 것이 문화적이라면 비공격적인 것도 문화적으로 가능하다. 그 가능성은 공존의 세계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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