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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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門)>이란 인간이 살면서 자기의 방이나 집이나 혹은 그 밖에 여러 건물이나 방과 방을 이동할 때 거쳐야 하는 하나의 통과해야 할 공간이다. 그리고 문(門)에 입(口)이 들어가면 문(問) 되고, 귀(耳)가 들어가면 문(聞)이 된다. 문은 분명히 우리가 지나가는 통과해야 할 공간이기도 하면서 과정이 되는 것이다. 문이 열리는 것과 닫히는 것에서 우리는 정말 통과하는 것은 내 방에서 다른 방으로 가기 위한 문인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문으로 되어야 하는 것일까?

 

작품을 읽으면 주인공 소스케는 평범한 남성으로 그 시대에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관공서 직원이었다. 그의 아내는 오요네로서 약간 병약한 몸이나 남편에게 헌신적이고 서로 사랑하며 보담아주는 여성이었다. 이들은 결혼 6년차 부부로서 어느 부부와 별 차이 없이 남편 월급이 생활하기에 조금 힘들다는 점과 기요라는 하녀가 3조(다다미) 짜리 방에 기거하는 점에서 특별한 조건이나 상황조차 부여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보면 주인공 선생 집에 하녀가 하나가 기거한 것이 생각난다. 모든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 그런 것이 아니나, 하녀의 등장은 은근히 재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인지 혹은 등장인물 중에 누가 건강에 문제가 있는지 꾸준히 보조역으로 등장하는 느낌이었다. 나쓰메 소세키 그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점에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주인공인 구샤미군의 위장병이 있다는 점과 영어교사를 맡은 점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는 자신의 인생관을 반영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소재로 통해 여러 인간상을 들어다보고 거대한 이야기보다 거대하지 않은 이야기를 중시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는 구샤미군은 시대적으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지만, 그것에 대해 상당히 무심한 점과 <문>에서도 주인공 소스케는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암살당해도 무관심했다. <문>의 발표시점이 1911년이고,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일병합이 되면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근대일본역사에 대해 시대적으로 마주보고 있으나, 시대적인 흐름에 따르지 않는다.

 

구샤미군이나 소스케는 러일전쟁이나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아무런 이유를 부여하지 않음이다. 단지 나쓰메 소세키는 그런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하면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가 외국 선수와 시합하거나 혹은 그 선수가 외국에 있는 기업에 들어가서 시합하여 우승해도 우리에게 당장 생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우리의 심리적인 만족으로 이어진다. 물론 오요네의 오빠인 야스이라면 모르겠다. 야스이는 소스케의 셋방을 내준 사카이의 동생과 같이 몽골을 돌아다닌다.

 

그렇게 다닌 이유는 조선을 침략하여 점령하여 중국과 몽골에 가기 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주인공 소스케에겐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소스케에겐 지금 당장 월급의 액수가 올라 식사를 제대로 하고, 추운 날에 따뜻한 방에서 쉬고 싶을 뿐이다. 하다못해 지붕의 비가 방으로 새는 것도 막고 싶고, 자신의 치아 내부가 썩어 이가 아픈 것을 어서 빨리 치유하고 싶다. 마치 소스케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런 살림 걱정과 아픈 치아로 고민하는 소스케에게 그저 인생이란 자신의 아내인 오요네와 옆에 하녀 기요와 오순도순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결혼할 때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비뚤어진 것이다. 결혼 6년 동안 소스케와 오요네 사이에 아이라곤 1명도 없었다. 그런다고 아내인 오요네가 임신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요네는 총 3번의 임심을 했으나, 아이들이 유산을 하거나, 출산해도 오래 가지 않아 모두 죽은 것이다. 3번의 실패는 부부의 마음을 어둠에 향하게 하고, 그 어둠 속에 서로 의지하던 것이다.

 

오요네가 건강이 좋지 않을 때의 모습에서 소스케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남동생인 고로쿠에게 큰 소리도 못하는 못난 형이었으나, 아내인 오요네가 아플 때 소스케는 남동생에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어서 의사를 불러오라고 지시한다. 평소 고로쿠는 행실이 좋지 않았다. 공부나 학업에 열중인 것도 아니며, 일을 할 생각도 없었다. 심지어 부잣집 도련님과 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 하여 소스케는 고로쿠에 대해 어릴 적의 자신과 같다고 한다. 소스케의 아버지가 생존할 당시 소스케는 경제적으로 매우 여유가 있었으며, 그런 점이 자신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산을 정리하던 중에 작은 아버지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가산이 점점 탕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1000엔이 지금의 1000만 엔이 넘는 가치라면 다소 의아할 것이다. 고로쿠가 아무리 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는 중고등학생에 이제 대학생이었다. 그에게 투여된 돈이 700엔이란 점은 소설을 보더라도 납득가지 않았다. 작은 어머니는 소스케 사촌이 경영하고픈 회사에 돈을 넣은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따지지도 못한 소스케는 그저 아버지의 유품인 병풍만 챙길 수 있었다.

그것도 처음에 골동품 가게 갈 때는 7엔에서 어느덧 35엔으로 늘었으나, 알고 보니 사카이는 그 병풍을 2배 이상의 가격으로 구매한 것이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보다는 세상이란 사회와 별개로 살아가는 소스케와 오요네 부부에게 조금 어둡고 소외된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어둠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소스케는 교토대학을 다녔을 때 오요네를 만났다. 그가 오요네를 처음 만난 시기는 야스이의 집에 가서 오요네가 야스이와 같이 있을 때였다. 야스이는 오요네를 두고 누이동생이라 했으나,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작품에서는 누이동생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불륜이라고 한 것이었다. 소스케는 야스이 집으로 가끔 놀러갈 때 야스이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오요네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야스이가 없을 때 번역자 해석처럼 소스케는 오요네와 같이 그림자 모습이 나올 때 이미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은 것이다. 만약 야스이와 오요네가 친 남매였다면 야스이에게 말하여 결혼식을 올리면 되는 것이나, 나중에 이 2사람은 모두 야스이를 피해 도망치듯이 사라진다.

 

덕분에 소스케는 학교에 퇴학을 당하고, 야스이 역시 학교에서 나쁜 대우를 받게 된다. 그런 야스이가 사카이의 남동생과 같이 일본 동경에 왔다는 것은 소스케에게 매우 고민되는 일이다. 그는 가마쿠라에 있는 절에 가서 문(問)을 들어가고 나갈 때 스스로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문(問)과 문(聞))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가 들어간 문이란 공간은 그저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흘러간 것이 아닐까 싶다. 돌아와서 사카이에게 동생 고로쿠의 사회공부를 위해 부탁하는 것은 나오나 결국 그 맺음은 고로쿠 스스로가 사카이와 약속한다.

 

추운 겨울이 가고 이제 따뜻한 봄이 온다는 오요네의 말에 소스케는 다시 또 겨울이 온다는 불안한 암시를 던진다. 소스케는 자신의 가정경제의 파탄이란 문제도 있었지만, 결국 오요네와의 불륜관계가 평생 심리적 압박으로 온 것이다. 오요네가 한 번 기회삼아 점쟁이에게 점을 보러 갔을 때 오요네가 계속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 사람에게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것은 결국 소스케의 친구인 야스이에 대한 배반이었다. 과거에 대한 잘못과 회한은 평생 부부의 가슴을 누르고, 서로의 죄책감은 서로를 통해 극복하고 있다고 해도 그 극복은 현재상황이지 앞으로의 인생이 아니다.

 

극복해야할 지난날의 과오가 바로 문(門)이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들의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도 혹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다고 아예 없다고 하기에는 이 소설에 등장한 인물의 모습이 너무 우리 삶과 유사한 면이 많다. 시대적으로 1910년 전후 일본이고, 나는 2013년 한국이지만 인간이 가지는 공통적인 문제나 관심사는 유사하다는 점이다. 인간 개인에 대한 이야기로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과 반성을 보인다.

 

딱히 작품으로 통해 사회비판이나 혹은 시대정신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모순이란 굴레에 우리 스스로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모순에 갇힌 채 속박 받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참 곤란한 경우도 많다. 예전에 읽은 <마음>에서 친구인 K를 배신한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에서 그 선생님은 지난 과거에 사로잡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죽이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사람 모두가 자신의 과오나 죄를 모르거나 혹은 속일 수가 있어도, 그 본인은 그 과오와 죄를 모르거나 속일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속이는 짓은 자신에 대한 오만과 기만일 수 있다. 그런 점으로 인해 소스케는 왠지 넋이 나간 사람 보이기도 하고 소심해 보이기도 한다. 그의 그런 어중간한 행동에는 과거에 대한 죄책감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자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門)을 여는 것은 본인인 것을 작중의 소스케나 우리 모두 안다. 하지만 그 열어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소스케는 보여준다. 인간이 자신의 잘못된 과거와 마주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문(門)은 현재의 자신이 잘못된 과거의 자신을 열어볼망정 끄집어낼 수 없는 벽이 존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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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8-1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허... 역시 항상 성실한 감상문을 올리시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3-08-11 17:34   좋아요 0 | URL
그것이 바로 오덕력의 기본입니다!!
 
하이스쿨 DxD 11 - 진급 시험과 우로보로스,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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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1권은 거대한 적이라고 생각했던 자가 나오면서 이상한 길로 틀어진다. 이때까지 테러와 각종 음모가 우로보로스라는 강력한 허무의 용에서 시작했는데, 오히려 그 당사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나이와 모습은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자신이 원하는데로 모양새를 바꿀 수 있는 우로보로스 오피스는 이제 중학교에 올라갈 정도의 어린 소녀로 등장해 잇세이의 집으로 찾아온다. 오피스란 존재는 그인지 혹은 그녀인지 아니면 어린 사람인지 혹은 나이가 많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허무의 공간에서는 시간과 공간적 관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 논하자면 시간이란 것이 필요하다. 만약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존재하고 있더라고 그 존재에 대한 존재성을 인지할 수 없으면 그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전에 읽어본 철학서적 중에서 이런 문구가 있었다.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오피스란 존재는 저런 의문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 존재는 분명 외형은 인간이나 인간이 아니고, 지능과 판단능력은 어린아이 수준이나 그런다고 우리가 잴 수 없는 시간적인 경과를 지녔다. 비록 재미로 보는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도 결국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보고 즐긴다. 인간의 문화 활동에서 라이트노벨에서 보이는 관념적인 부분은 인간에 의해 관념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오피스의 존재는 인간의 상상력 내지 신화적 존재성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왔다.

물론 악마나 천사 그 외에 등장하는 많은 존재 역시 관념적인 존재에서 시작했다. 그들은 현실의 물질성에서 존재하지 않아도 관념적인 상상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에서 우리의 관념적인 영역에서 물어 볼 수밖에 없다. 그런 관념적 상상과 판단들은 작품 내의 등장인물들이 생각을 좌우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여태까지 백룡제 발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적들이 침공했을 때 우로보로스란 존재에 대해 적대심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이상하게 동맹을 맺은 악마, 천사, 타천사의 세계에서도 오피스의 존재란 매우 위협적이다. 드래곤 중에서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피스가 방문하여 마치 속이 비어버린 눈빛으로 멍하니 가만히 있고, 관찰만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전개다. 단지 오피스는 잇세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찾아온 호기심만 가득한 존재였다. 공격의사나 타인에게 피해를 줄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잇세이나 주변 사람들을 관찰했다.

강력한 적이 오히려 일상적으로 같이 있으니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뒤편에 보면 나오나 잇세이에게 구출된 오피스는 오직 그레이트 레드를 쓰러뜨리고 자신이 그 허무의 공간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그 누구에게 자신의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단순히 도와주겠다는 약속만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를 주변에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이용해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문제는 그 이용하려는 존재들은 오피스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 오피스의 힘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샤르바를 무찌른 잇세이지만, 마지막 편에서 잇세이는 사마엘의 저주로 이블 피스 8개만 남긴 채 사라진다. 문제는 사마엘은 강력한 저주로 드레곤과 관련된 그 모든 존재에게 큰 위험이 된다는 점이다. 적룡제인 잇세이와 백룡황인 발리의 경우 드레곤의 숙주가 되어 있기에 사마엘의 간단한 공격에도 큰 타격을 입는다. 그런 것은 오피스도 마찬가지다.

사마엘의 요소를 보며 생각한 점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연계성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 살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처럼 살다가 어느 뱀이 이브에게 사과를 먹게 함으로서 그 죄악이 내려 결국 인간계에 추방되고, 평생 남자는 노동하고 여자는 아이를 낳게 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서구사회와 유대인 사회에서 본다면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한 지배해도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이나, 그 뱀은 신에게 미움을 받고 용과 뱀은 유사한 존재성을 가지기에 큰 저주를 받을 수 있다.

나름 작가인 이시부미 이치에이가 신화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점은 다시 확인한 결과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신인 아테네의 어머니는 메티스로 되어 있다. 메티스는 뱀의 몸을 하고 있으며, 여신의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페르세우스란 영웅이 안드로메다를 구출하는 장면에서 안드로메다는 나체의 상태로 포박되어 있고,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를 납치하여 감시하는 바다의 용을 창으로 찌르는 그림이 나온다. 이때 안드로메다는 좋은 표정보단 왠지 불만이 넘치는 표정으로 페르세우스를 바라본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입문으로 보자면 페르세우스가 바다용에게 창은 꽂은 것은 안드로메다의 처녀를 잃은 것이란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째든 사미엘의 저주는 남근중심의 성경에서 따온 소재다. 그런 저주의 기원이 이브의 사과이고, 그 사과의 저주로서 용과 뱀에게 끊임없이 내려가는 것이다. <하이스쿨 dxd>라는 작품 자체는 학원물과 판타지와 더불어 하렘계열에 이르는 장르이나, 작품의 모티브나 소재를 생각해보면 나름 신화적인 요소를 곳곳에 잘 배열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드레곤은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동양인 중국에서도 대모라는 존재 역시 뱀이고, 악마라는 존재는 남성적 존재보단 차라리 여성적 존재가 가깝다.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로 본다면 천사↔악마, 남자↔여자, 빛↔어둠, 이성↔감성 등과 같은 요소로 통해 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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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2 - 보충수업의 히어로즈,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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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2권은 주인공인 효도 잇세이가 없는 상태에서 다른 오컬트부원들이 헤쳐 나가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가장 나약하고 한심해 보이던 환생악마인 잇세이가 어느 순간 가장 듬직하고 강하고, 믿을만한 친구이며 동료가 된 순간 같이 동고동락을 하던 부원들에게 잇세이란 존재성이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육체가 소멸하고 리아스의 손에 8개의 이블피스가 남는 순간 모두들 당황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옆에서 그렇게 웃고 즐기며 힘든 과정을 보낸 친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은 그 아무리 강철심장이라도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다.

그런 괴로움을 안고 오컬트부원들은 적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 적들에서 가장 나약한 육체일지 모르나 가장 강하고 무서운 조조와 싸우면서 이렇게 위기에 몰린 적은 없었을 것이다. 하이스쿨 dxd 시리즈를 계속 읽으면 보통 효도 잇세이를 중심으로 싸움이 전개되나, 이번 12권에서는 예전에 키바가 투혼이 빛이 난다. 지그프리트와 싸우면서 팔 하나가 잘려나가는 심한 부상에서 아시아의 치료와 피닉스의 눈물을 뿌려 다시 싸우는 투혼은 예전에 키바를 죽게 만든 바르퍼 갈릴레이와 타천사의 결투가 생각난다.

누구 하나가 쓰러지면 그 누구를 대신하여 그 몫까지 싸우자는 친구의 약속, 하렘 계통의 라이트노벨이라도 나름 소수의 남자가 다수의 여자를 점유하는 구도에서 남자와 남자끼리의 우정이나 의리도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캐스퍼의 역할이 돋보인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받아주지 않은 캐스퍼는 인간과 뱀파이어의 중간이 하프 뱀파이어로 나온다. 본래 영웅서사 내지 모험물에서 가장 불안한 존재가 가장 성장하기 좋고 가장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이미 정해진 힘과 규모라는 틀에 갇힌 게 아니라 그 틀이 불안정하기에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하프 뱀파이어에서 이블 피스도 변종을 흡수했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불안하다. 초반에 리아스가 학교 어느 교실에 봉인하여 나둘 정도이고, 캐스퍼는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 캐스퍼를 잇세이가 계속 돌보고 위로해주고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친구도 없이 외로운 시간을 보낸 캐스퍼에게 잇세이는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줘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잇세이의 죽음을 듣는 순간 정신이 나간 하프 뱀파이어는 마치 모든 것을 삼킬 듯한 강력한 마법으로 적을 공격한다.

(완전하지 않으나) 인간이 가진 것 중에서 감정의 폭발이란 무서운 것이다. 자신의 모든 힘을 극한으로 나오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성적인 요소로서 판단력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 리아스의 공격방법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성의 판단보다는 감정에 휘말려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힘 역시 강력하다. 잇세이의 죽음은 좌절과 절망에서 분노와 절규까지 더해준 것이다.

그런다고 잇세이가 정말 죽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하이스쿨 dxd 시리즈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는 서사구조다. 서사구조 상 중앙에 큰 위기에 봉착하여 다시 해소하는 플롯구조가 존재하기에 잇세이는 적룡제의 갑옷 안에 영혼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사미엘의 독은 무섭게도 육체의 소실만으로 타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소실까지 이르는 무서운 저주였다. 적룡제는 잇세이의 영혼은 자신의 갑옷에 깃들게 하고, 사라지는 잇세이의 영혼 대신 여태까지 적룡제의 힘에 미쳐 날뛴 선배들의 영혼이 대신 잇세이를 지켜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영혼보다는 그 영혼이 적룡제 안에서 탄식하고 고통 받은 기억이고, 사념이었다. 그러나 그 사념들은 잇세이의 찌찌 드레곤을 같이 느끼면서 끊을 수 없는 저주의 시간을 깨고 마음 편하게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잇세이는 영혼을 유지하고 그레이트 레드와 오피스의 도움으로 새로운 육체를 만들고, 기존의 인간인 육체에서 허무의 공간에서 만든 신룡의 선물은 더욱 강력한 육체가 되었다. 신룡인 그레이트 레드도 잇세이의 가슴열정에 빠졌는지 잇세이의 육체를 만들고 현세에 복귀를 도와주고 다시 차원의 벽으로 들어갈 때 “말랑말랑 아이잉!”을 외치고 사라진다. 물론 그런 말은 사라져간 적룡제 사용자들도 마찬가지다.

찌찌 드레곤의 부활에서 찌찌 드레곤 노래에서 들리는 “말랑말랑 아이잉!”이 도저히 빠질 수가 없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해 백룡황 발리의 선배는 여자의 엉덩이도 같이 사랑해주길 바란다고 한다. 인간의 신체구조에서 가슴을 상징하는 유방과 엉덩이가 있는 골반은 여성의 중요한 매력 포인트다. 결국 여자의 매력은 가슴의 크기이냐? 아니면 엉덩이 라인이냐는 것에서 근골계 구조로 본다면 나름 엉덩이가 탄탄한 여자가 가슴이 크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진행과 상관없이 인간의 몸을 유지하는 척추를 지탱하는 것이 골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 하이스쿨 dxd를 라이트노벨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볼 때도 나름 리아스나 아케노의 몸매를 관찰하면 허리라인과 엉덩이라인의 굴곡이 잘 어울린 것 같았다. 보통 만화학과에서 일러스트를 배우더라도 인간해부학을 배워야 그림체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어째든 인간의 육체가 아닌 드레곤의 육체로 부활한 잇세이는 다시 동료의 품으로 돌아가고, 폰 8개를 다시 받아 악마로 환생한다. 남은 것은 조조와의 사투, 전에 잇세이에 의해 눈 한 쪽을 잃은 조조는 이번에 메두사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대체했다.

11권의 사미엘의 저주가 용과 뱀에게 강한 점을 생각하여 잇세이는 사미엘의 피를 조조에게 뿌리고, 그 피로 인해 조조는 강력한 독과 저주를 받는다. 그 모습은 리아스가 억지로 피닉스가문에 결혼가기 전에 라이저와 결투 때 성수를 라이저에게 뿌린 것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조조는 제 아무리 지식과 판단력, 그리고 신마저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가져도 운명의 앞에서는 결국 잇세이에게 패배한다.

조조의 패배는 단순히 그의 야망이 아닌 것으로 나온다. 에필로그 부분에서 제석천인 손오공이 직접 조조에게 가서 제석천 자신이 조조에게 신물을 준 것과 더불어 조조에게 테러의 기회를 준 것을 암시한다. 제석천의 음모는 무엇인가? 솔직히 제석천인 손오공은 불교신앙을 중심으로 만든 서유기에 등장하는 원숭이신이다. 부처님에게 직접 미움을 받아 봉인되어 삼장법사에 의해 교화된 그가 오히려 조조를 돕는 것이라는 설정은 단순히 이야기는 조조만의 것이 아니라 조조를 그렇게 만들도록 사주한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세력의 확장은 서양만 아니라 동양으로 넘어가고, 동·서양 내부에 등장하지 않았던 세력이 추후에 나올 것이란 암시를 던진다.

그리고 대부분 모험이나 전투가 있는 이야기를 가진 작품을 보면 초반에는 큰 구도 속의 적과 대치되는 상황이나, 결국 적은 자신의 동류가 아닌 다른 부류로 시작되나, 결국은 자신의 동류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법이다. 잇세이 친구인 사지와 사지의 주인인 학생회장 역시 악마사회의 계급신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하려고 하나, 기존 악마사회에서는 비웃고 있다는 점이고, 잇세이의 등장과 활약에 나름 불편함을 느끼는 악마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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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만화를 비평하다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 학과 학생들 / 팬덤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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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대학교에 만화애니메이션학과가 같이 있는지 생각했으나, 막상 책을 열어보는 순간 만화학과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만화를 비평하다>라는 제목처럼, 만화만 비평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을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이 책이 네이버에서 지원하는 E-Book 시스템이므로 어느 정도 목차와 차례에 대해 미리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본 결과 단순히 만화만 보기에는 조금 부족하고, 차라리 만화애니메이션으로 묶어 봤다면 더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만화에 대해 비평함에서 상명대학교에서 출간된 <만화비평> 창간호를 읽어본 적이 있었고, 이후에 발간된 <만화비평 2>도 조만간 구입하여 읽어볼 예정이다. 같은 대학교에서 담당교수 내지 대학원 과정 혹은 실제 현직에 계시는 분들의 저술한 <만화비평>과 학부생이 모여 만든 <만화를 비평하다>는 분명히 그 전문성에서 차이가 날 것이다. 대학생들이 도전하여 만든 점이고, 그것을 착안하여 과도한 비판의 날카로움은 자제하는 것이 바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만화를 비평하기보단 말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게 더 좋았지 않나 싶었다.

 

왜냐하면 비평이라는 것은 비판적으로 평론한다는 의미이기에 비평적 가치로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동안 이 서평을 적는 본인도 국내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일어일문학과, 영상미디어학과 등 각종 만화애니메이션 내지 코스튬 플레이 문화를 다루는 논문 등을 읽어봤으며, 심지어 교재로 사용되는 도서도 직접 구매하여 보았다. 전공자도 아닌 비전공자의 입장으로서 꾸준히 만화와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까지 리뷰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전반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에 들어간 내용을 그대로 발췌하여 그것을 정리하고 나열한 정도까지가 아쉬웠다. 특히 모에에 대한 연구에서는 일본 인문학자 겸 서브컬쳐 전문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 대해 읽어봤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모에라는 속성이 이 서적 다른 챕터에 등장하는 <오디션>이란 작품을 두고 연장선상으로 판단하자면, 분명 연관성이 존재한다.

 

대중문화에서 주로 나이가 젊은 청소년들이 가진 팬텀현상에서 아이돌에 대한 환상적인 끌림과 애니메이션 내지 만화에서 나오는 아이돌스타에 대한 작품은 유사한 부분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일본에서 완결된 <아이돌마스터>라는 작품은 단순히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구성될 뿐이지 실제를 생각해보면 리얼TV로 방영되는 실사판 아이돌 특집방송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아이돌이란 대상이라 파생실재이냐? 혹은 현실부재라는 시뮬라크르(simulacre) 요소에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보면 만화로 보는 대중문화 및 매체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석사학위 논문 참고에서 통계표나 그림을 인용하는 것은 좋으나 결국 대부분 자료로서 만들고 비평적인 견해는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고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다른 챕터에서는 이와 달린 좋은 고찰이 있었다. 최근에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통해 웹툰이 갤툰이라고 하여 스마트폰으로 통해 만화를 보는 것이다. 이미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는 그런 웹툰에 대한 부분과 스마트폰으로 통해 게임을 하는 요소까지 연구한 사례와 발표도 있었기에 스마트폰으로 이용한 만화영역에 대한 확장은 좋은 연구라고 생각했다.

 

그런 웹툰과 갤툰으로 통해 기존 만화책과 달리 새로운 시도 내지 패러디까지 연구함에서 만화라는 장르를 좀 더 다양하게 표현하거나 한국만화에 대해 낯선 인상을 가진 대중에게 좋은 기회로 가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방향이다. 단지 인터넷이란 매체는 무료라는 결재시스템을 대중들이 선호하기에 웹툰작가에 대한 경제적 조건이 불리한 점과 또한 웹툰을 그저 웹툰으로 끝내기 보다는 강풀작가의 웹툰처럼 영화 및 연극과 같은 콘텐츠로 전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에 배우 송강호 씨가 출현한 <설국열차>도 유럽 만화의 원래 스토리고, 예전에 흥행에 성공한 <올드 보이> 역시 일본 만화책이 원작이다.

 

스토리텔링적인 요소에서 웹툰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며, 영화도 컴퓨터그래픽으로 통해 충분히 표현이 가능하기에 웹툰에서 주제만 좋으면 대중적으로 효과를 누릴 수 있으며, 또한 새로운 부가가치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일본 문화콘텐츠 사업은 이런 부가적 효과를 노린다. 이번 도서에도 일본 유명만화인 <원피스>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왜 불가능한지 다루고 있었는데, 예전에 필자가 술집가게에 가보니 <원피스> 관련 작은 프라모델 내지 피규어가 있었다.

 

만화로 처음 나온 <원피스>가 애니메이션화로 나오고, 게임으로 나왔으며, 기타 음반이나 코스튬 상품 등으로 제작되어 수많은 콘텐츠상품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 시장에도 다가왔다. 그런 상품적인 요소에서 국내 만화콘텐츠의 차용에 대한 부분이 없는 점이 조금 아쉬웠으나, <원피스>라는 작품이 가진 장단점에서 단점을 어느 정도 인지한 부분에서 조금 좋아 보였다. <원피스>라는 작품은 <블리치>와 더불어 주인공 중심인 소수와 더불어 그 소수에 대적되는 다수의 적으로 구성되어, 주인공 편이 정의라는 가치관과 우정, 명예, 의리를 내세운다.

 

문제는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계속 만화에 몰입하게 되면 다른 관점이나 부분에 대해 맹신적인 부정을 하게 되는 점이다. 만화라는 서사에서 이분법적인 선악 내지 자타적인 관계는 그런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원피스>는 비판적으로 대하는 것이 문제인가? 라는 질문조차 나오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 국내 만화에 대한 비판적인 수용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 개인적 비평에서 색채로 통해보는 <염소의 맛>이 괜찮아 보였으며, 최근 화제가 된 <진격의 거인>도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진격의 거인>에 대해 필자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적인 요소로 통해 문화유물론적인 관점으로 고찰해본 적이 있었다. 이때 청강문화산업대학의 박인하 교수님과 약간 유사한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일본이란 나라의 군국주의적인 요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거인과 인간의 대립이 결국 인간과 인간의 대립이란 내적 갈등에서 시작했을 것이란 점이다.

 

생각해보면 <진격의 거인>에서 계급화 된 사회구조와 그 구조로 통해 쉽게 거인에게 잡혀 먹히는 최하계급의 주거지 사람들을 생각해도 그런 맥락으로 연결 지을 수 있으며, 식량에 대한 위기의식은 더욱 그런 부분을 강조한다. 자본주의구조에서 자본이라면 <진격의 거인>에서는 자본보단 식량에 중요 포인트가 맞추어져 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식량으로 통해 인구통제를 할 수밖에 없는 점에서 <진격의 거인>은 자원이 한정된 사회에서 인구통제가 되지 않으면 그 사회는 붕괴될 수 있을 것이란 불안심리가 보이며, 한편으로 성벽으로 확장하려는 피지배계층의 의지를 지배계층이 원하지 않거나 부정하는 점에서 <진격의 거인>을 보면 정작 주인공이 속한 조사병단의 적이 성벽 밖의 거인인지 혹은 성벽 안의 인간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어째든 평소 취미생활로 만화애니메이션을 리뷰하거나 비평하고, 만화애니메이션 및 코스튬플레이 문화를 적어보면서 실제로 이런 내용이 비록 E-Book으로 발매되어도 대학교에서 발간되었다는 점이 매우 놀랐다. 대부분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가르치는 과정이 주로 만화창작과 그리기 내지 애니메이션 동화작업 위주인 것으로 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만들기보단 만들어진 것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전경이다. 우연히 만화애니메이션 비평이란 검색으로 들어간 블로그나 카페를 보면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상이 가득한 것을 보면 참 유감이 아닐 수가 없다. 만화에 대한 비평은 단순히 만화를 넘어 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담론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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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켜다 - 무도한 세상에 맞서는 세상의 울림
표정훈 지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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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철학 입문서 내지 혹은 철학자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어떤 철학자가 있는지 그 철학자가 살아간 시대적 배경과 상황, 그리고 그가 이룬 업적들을 다룬 것들을 보았다. 문제는 그런 서적을 읽는 순간 그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사상적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번 서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철학자의 서적들을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철학자에 대한 소개나 그 시대적 배경을 다루는 책들을 보면 늘 아쉬운 게 그저 철학교양서적에 불과한 점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을 켜다> 역시 그런 책에서 크게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대부분 철학도서가 그렇듯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마르크스라는 큰 틀에 몇몇 잘 모르는 인물들이 나왔다.

 

그래도 그나마 인상적인 인물은 스피노자라고 할까나? 스피노자에 대해 일반적으로 철학도서에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다. 그의 일생이 항상 고독과 위기 그리고 미완의 저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 업적은 개인적인 부분이 대다수의 대중을 이끌지 않았다. 적어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그들은 당시 그리스 사회에선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했기에 어느정도 연구자료가 전해온 것이다.

 

스피노자의 경우는 그러지 못했다. 하다못해 평생 쫓기는 신세가 되어 말년에 정신적인 피해망상에 시달린 루소조차 많은 지식인들의 심금을 울렸고, 병으로 죽은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국제노동자협회에 글을 적어 보낼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스피노노자는 고독과 고독으로서 살아간 것이다. 예전에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서 나온 내용처럼 스피노자그는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어도 사회적으로 죽은 인간이었다.

 

그가 본 부당한 세계, 그 세계라는 것이 하나의 도덕이고 하나의 진리라는 비틀린 사회가 그의 철학을 일깨워주었다. 철학은 자기비판과 더불어 자기가 속한 세상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프랑크푸르트대학 사상가가 단 1명의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세계는 철학을 멈추면 안된다고 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그 지혜라는 것을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물론 여러가지 종류와 방법이 있을 것이나, 철학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바라는 학문이다. 요새같이 자본주의 논리가 하나의 가치기준이 된 세상에선 인간의 존재조차도 자본에 비례하는 실정에 이르게 되었다. 스피노자와 같이 호모 사케르들은 당시 막혀있는 사회적 규율과 도덕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는 자본에 따라 그 존재감이 희비로 엇갈릴 수 있다. 영화 <두 개의 문>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호모 사케르라는 존재는 그 어디서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도 찾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우리 인간들이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이해는 이미 쇠퇴해질 때로 쇠퇴한 것인가? 생각해보면 중세시대의 소설에서도 황금은 모든 것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두고 보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인간이 타락해서 필요한 게 아니라, 그 타락으로 인해 인간 세상에 큰 위기와 상황이 닥친다는 점이다. 버트런드 러셀과 같은 경우 그의 업적에서 평생 반전, 반핵을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와 같이 충분히 그도 좋은 가문에서 좋은 환경에 좋은 인생을 보낼 수 있었으나 과감히 버리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덕분에 20세기 위대한 철학자 이름에서 러셀은 빼놓을 수 없는 영국신사이다. 하지만 여전히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길은 어렵다. 어렵고 쉽지 않아 누구나 가지 않은 길이기에 그들의 사상이 전해내려오고 그들의 이름이 내려온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당시 가장 배척받고 가장 무시당한 자들이 오늘날에 성인에 이르기까지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인류역사상에 가장 많이 팔린 성경과 동급으로 많이 팔린 서적이고, 19세기 이후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준다. 어떻게 보면 그의 예언이라고 할지 아니면 그의 예상이라고 할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현상을 보면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란 점에서 인간의 선견지명은 분명히 지혜로운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보배와 같은 것이다.

 

철학을 계속 켜고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게 지금 가는 길의 중심에서 현재 위치를 알려면 오직 철학만이 제시할 뿐이다. 철학이란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요술지팡이가 아니라, 적어도 철학이란 어느 문제가 왜 생겼는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도구이다. 원인조차 모르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 인간의 어리숙함에서 철학은 인류가 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하나의 등불이다. 하지만 등불이 있더라도 앞의 성난 파도를 막아주지 않는다. 단지 성난 파도가 오고 있다는 정도만 알게 해주는 것이다.

 

철학을 켜다는 결국 그런 인류의 역사에서 인류가 앞을 보고 갈 수 있는 등불을 켜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나로서는 루소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사상덕분에 우리나라 헌법정신인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 성립이 가능한 것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단지 그 사상과 헌법을 모른 채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이 책에서 소개되지 않은 니체의 사상을 왜 다루지 않았는지 조금 아쉬운 면도 없지 않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 지금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얼마나 현재에 충실할까? 덧붙여서 스피노자의 인상은 아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루이 알튀세르 영향이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자신에 대해 스피노자주의자라고 한다. 부당한 도덕관에 대해 부당한 현실에 대해 끊임 없이 고찰하고 지적하고 대항한 스피노자로 본다면 인류의 스승이라 칭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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