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비평 2
풀빛미디어 편집부 지음 / 풀빛미디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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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직업이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업종이 아닌 상태에서 계속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세계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일러스트, 라이트노벨, 그밖에 기타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로 토대로 직업의식을 가진 분들에 비하면 나의 관심은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 그 세계의 사람들을 알고 따라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튬 플레이 등과 같이 한국에서 이른바 Sub-culture라는 하위문화를 꾸준히 관심을 갖는 것은 여기에 무한한 이야기의 에너지와 소재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본 영화중에서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상영된 <설국열차>가 있었고, 그 이전에 강풀 작가의 원작인 <26년>이 있었다. 전자는 프랑스 예술만화라고 한다면 후자는 한국 웹툰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두 작품에서 어느 것이 더 우월하냐는 말을 가리기 보다는 두 작품으로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만화의 광활한 범위는 어디까지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아직까지 한국 만화산업계의 아쉬움은 소비자에 대한 연구방법이다. 왜 내가 그것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설국열차>를 BICOF 행사 상영장소에 원작 만화작가와 영화제작인 봉준호 감독이 참석하였을 때, 그 자리에 영화인 <설국열차>로 통해 만화 <설국열차>를 가깝게 다가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란 점이다. 게다가 영화 <26년>에서 강풀의 원작만화보다는 영화가 가지는 미디어적인 요소에 더 많은 흥행요소를 일으켰을 것이다. 강풀의 <26년>은 그저 가상의 존재로서 이야기가 진행되나, 영화 <26년>은 실존하는 배우가 등장하여 하나의 허구를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허구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존재하지 않아도 그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인물은 실존인물이다.

 

따라서 파생 실재라는 실사영상의 특성에 따라 대중문화에서 많은 대중들을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영화 <설국열차>도 영화감독 봉준호, 영화배우 송강호 라는 네임드가 엄연히 존재했기에 그 흥행도가 보장될 수 있었다. 물론 흥행적 요소에 담론하고 있는 서사구조와 그 서사구조를 표현하기 위한 영상과 사운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생각해보면 이번에 상명대학교 만화학과에서 2번째로 제작한 <만화비평 2>를 읽으면서 만화비평이 절실한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만화라는 것이 이제는 단순히 사회에서 비주류로서 머물기에는 너무 많이 대중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우리 대중들은 여전히 만화와 만화를 비롯한 웹툰,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너무 경시하는 요소가 보인다. 스마트폰으로 무료로 웹툰과 게임을 하면서도 만화책과 PC 및 콘솔게임을 즐기는 사람에 대한 인식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시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일 곤란한 상황은 일반적인 대중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코스튬 플레이를 즐기는 사람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제일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그 부류에 속한 사람 내부나 혹은 그 내부에서 외부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 자체도 힘든 상황이란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 문제의식은 비단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콘텐츠 향유자만 겪는 문제라면 그들이 처해진 사회적 조건에서 분명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다고 그런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의 업무를 하고 있는 현직 종사자에겐 또 다른 문제이다. 이들에게 시장이 되어야 하는 향유자들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은 상품을 팔아야 만화산업이 발전과 동시에 만화가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만화 비평 2>에 대해 조금 다시 생각하면, 너무 만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지 않았나 싶었다.

 

만화라는 것은 곧 만화가가 만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의미를 주고 싶은 하나의 소통의 공간이다. 소통을 원하는 대상에 대해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고, 반대로 들어야 하는 이들의 사고나 생각, 행동이나 현상에 대해 무감각하지 않나 하는 우려감이 들었다. 물론 <만화 비평>을 한다는 것은 순수하게 만화작품만이 아니라 만화문화와 그에 제반된 사회적 현상까지 같이 담론하는 것이 옳다. 만화라는 것은 결국 대중문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하나의 놀이문화라는 점이다.

 

누구나 쉽게 만들고 읽고 말할 수 있어야 그것이 만화가 가지는 본질적 가치다. 그런다고 너무 쉬운 것만 추구할 경우 만화는 너무 저급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따라서 만화는 한 가지 가치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를 두루 가져야 한다. 이미지에 대한 인간의 판단요소에서 산업디자인과 예술디자인의 차이에서 산업디자인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대부분 동일한 것이라면, 예술디자인은 모든 사람들의 사고와 판단력이 다르게 되어야 한다. 결국 인간이 모두 같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른 생각하는 것이 당연히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는 셈이다.

 

만화란 그렇게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다. 만화가 문학과 별개인가? 혹은 아닌가라는 의문에서는 예전에 읽어본 <서사철학>에서 만화 역시 서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만화는 만화로서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스토리텔링으로 매우 훌륭한 것이 될 수 있다. 만화문학이 될 수 있는 점은 만화에서 보이는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어느 특별한 이야기까지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불운한 현실과 암울한 미래에 대해 만화라고 말하지 마란 법이 없다.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지닌 문학작품인 조지 오웰의 <1984>를 생각하면, 그런 암울한 감시국가의 모습을 만화로 그려내면 더욱 효과적인 전달력을 보여줄 수 있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의 암울한 현실과 비참한 서민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한국만화 역사에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 얽힌 카툰적인 요소가 강했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대부분 한국인들인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간단한 몇 글자와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그 당시 민중들은 쉽게 이해하고 느꼈을 것이다.

 

만화의 무서움과 위대함은 바로 전달력과 파급력이다. 1972년 군사정권 시절 유신헌법 개정 전에 문화정책으로 만화분서갱유 사건이 일어난다. 만화로 통해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만화는 인간이 가지는 욕망과 의지를 그려낼 수 있기에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국가에서는 성적(性的)인 요소를 통제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성적인 담론인 남녀연애가 자유로우면 인간의 기본 권리인 자유와 평등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령 여자는 무조건 돈 있고 능력 있는 남자만 만나면 된다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위치평가 절하 및 사회적인 활동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고, 남성들에게는 자신의 재력이 풍족하지 못한 대다수에게 박탈의식과 더불어 사회 불만을 야기한다. 물론 인간의 삶에서 돈의 가치는 중요하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면 남녀관계는 사랑이 아닌 <섹스와 돈>으로 절하된다. 만화에서 만약 자유연애를 꿈꾸는 여자나, 혹은 성적 호기심이 넘치는 남자아이에 대한 소재를 금지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표현에 대한 자유를 억압한다.

 

만화라는 것은 바로 인간이 평소 자신 안에 부족한 것에 대해서나 혹은 자신의 안에 넘치는 것에 대하여 표현할 수 있는 매체이다. BICOF에서 한국 대표 만화가라고 볼 수 있는 최규석 작가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만화가로 될 수 있는 계기는 고등학교 수업 시간 중에 수학시간에 느끼는 지루함이었다. 1주일 4시간 수업이 잡힌 수학시간에 이해되지 않은 과목을 계속 앉아 듣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 그래서 최규석 작가는 수학시간에 망상을 하고 그것을 하나의 스토리로 응축하여 전개했다고 한다.

 

최규석 작품 중에 <습지생태보고서>라는 만화책은 직접 만화가와 주변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실의 씁쓸함에 대해 재미를 담아내는 작품이다. 그런 작품이 나온 것은 어떻게 보면 그가 어둠이나 혹은 지루함에서 보인 해방의식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그 억압에 대한 반항 내지 저항의식이 작품을 만들 수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단지 작품이 의미하는 내용과 상황은 분명히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 폴리스>와 같은 작품은 작가 본인이 이란에서 살면 겪은 이야기를 만든 작품이다. 그 작품을 보면 상당히 우울하고 슬프고 때로는 절망한다.

 

같은 만화책이라고 해도 분명 거기에 담겨진 내용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전달에서 우리 혹은 나 같은 독자가 보는 만화에 대한 느낌은 분명 다를 것이다. 적어도 만화라는 것은 그리기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리기로 통해 무엇을 말하는 것이다. 만화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은 바로 표현에 대한 의지와 자유에 대한 고찰이다.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진지하게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는 것이 만화다. 하지만 우리에겐 만화는 여전히 진지한 것과 다르게 늘 다른 공간의 세계다.

 

만화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번 <만화비평 2>에서 보인 것은 만화에 대해 얼마나 우리가 알고 있는가에서 만화가에 대한 인터뷰 및 대담을 좋았다고 본다. 만화가들이 다수 나와 무슨 생각으로 만화를 대하고 그리고 전달되는지 듣는 것은 한국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평소 만화와 애니메이션 리뷰를 하는 입장에서 한국 만화독자들이 이 책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보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다.

 

만화가들은 정작 자신의 만화를 두루 보기 원하나, 그런 만화가의 의지와 생각을 담은 <만화비평>은 그렇게 잘 전달되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만화라는 것은 쉽게 접해도 만화에 대한 연구와 비평은 보통 학술지보다 더 어려운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때까지 만화에 대한 비평지가 학회 학술지로서 나오기보단 일반적인 도서로 나온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게다가 1987년 1월 박종철 서울대학교 학생이 고문치사로 죽고, 연세대학교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박종철 학생을 기리는 마음에서 박종철출판사라는 곳이 생기며, 우리의 영원한 벗인 박종철 학생을 기리는 마음으로 생긴 출판사라면, 이한열만화상 역시 만화동아리에서 만화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선배로서 그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 카툰 부분의 <정리해고>와 이야기만화의 <자판기 아저씨>는 우리 시대의 아픈 이야기와 인간 개인이 가지는 본성에 대하여 웃음이 나오면서 씁쓸한 기분을 들게 한다. 한 가지 기분이 아닌 다양한 기분을 들게 하여 다양한 감정을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것과 인식해도 제대로 각성하지 못한 이야기가 바로 만화로 통해 쉽게 접근 가능한 것이다.

 

<만화비평 2>는 기존에 나온 <만화비평>과 다르게 어느 작품에 대해 리뷰와 비평이 들어가 있었고, 비평적인 고찰에서는 미학적인 관찰과 더불어 예술적인 요소로서 만화를 읽어가는 것을 제시했다. 또한 만화리뷰에서는 나 같은 독자가 보는 리뷰가 아니라 만화작가나 혹은 만화지망생이 적는 만화리뷰 역시 독특한 재미였다. 만화를 비평한다는 것은 영화나 미술, 문학 등과 같은 기존 문예계통과 큰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 한국 사회다. 하지만 꾸준히 만화에 대한 고찰로 통해 만화가 가지는 큰 가치를 보여주는 것 역시 만화를 즐기는 방법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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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소년 공주님 2 - Novel Engine
모베 지음, 모브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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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소년 공주님> 2권 표지를 보는 순간 일러스트를 그린 사람에 대해 조금 의문을 가졌다. 왜냐하면 주인공 레빈은 비록 여장을 하고 있어도 남자아이다. 보통 여자보다 몸이 가늘게 말랐으며, 피부도 매우 하얗게 되어 있어서 누가 봐도 소녀 같은 소년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2권은 표지는 1권의 표지와 다른 위화감이 느껴졌다. 1권에서는 호위무사 겸 메이드로 나오는 넬이 레빈을 공주님 안기를 한 후에 가위로서 경계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2권에서는 마왕의 회계사인 리세가 메이드 복을 입은 해 레빈에게 메이드 복을 입히려고 하는 모습이 나온다.

 

단지 문제는 1권의 넬이나 2권의 리세의 메이드복은 치마가 제대로 된 것이라면, 2권에서 레빈이 입어야 하는 치마는 부분이 없이 그저 앞치마 앞부분으로 허벅지를 가려야 했다는 점이고, 그런 의상을 입어야 하는 사실에 레빈은 무척 부끄럽고 곤란해 하는 사실이다. 이미지의 상황으로 따지자면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전체적으로 보이는 작화요소이다. 레빈의 묘사는 소년이지만 보통 소녀보다 더 날씬하고 마른 사람이다. 1권에서 입는 의상에서 보면 다리가 매우 가늘게 그려져 있다면, 2권에서는 그러지 못하다.

 

허벅지 옆 부분이 매우 강조된 일러스트이었다. 보통 만화학이나 디자인학을 수학하는 경우 인체해부학을 배우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작화에서 인물묘사가 부드럽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2권 레빈의 경우 여장소년이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여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신체적 구조가 돋보였다. 남성과 여성의 근골계의 차이는 바로 골반과 대퇴부다. 여성의 신체적 구조는 임신과 출산을 하기 위해 골반과 골바 아래의 대퇴부, 즉 허벅지가 굵은 것이 해부학적인 요소다.

 

레빈의 모습에서 이것은 소년의 구조인가? 아니면 소녀의 구조인가? 최근에 도래하여 발육상태가 양호한 소녀라면 일반 성인여성들처럼 골반이 발달하는 경우가 분명한, 레빈의 입장에서 본다면 레빈이 분명 여장남자라고 하나, 그 여장남자라고 하는 이미지 표상마저 지울 수 있을 정도로 채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작품 중간을 보면 레빈이 남자라는 사실을 레빈 이전에 먼저 마왕 국으로 온 데이지에게 들키고, 마왕의 총사인 리세에게도 들킨다. 사실 진짜 공주를 대신하여 납치된 레빈의 입장에서 남자라는 사실을 들키면 마왕군단을 속인 것과 더불어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기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데이지는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레빈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나온다. 데이지를 몰래 추적하는 레빈에게 데이지는 자신의 우산 손잡이로 넘어뜨리고, 레빈의 배위로 올라가 도발하듯이 레빈을 가지고 논다. 이미 레빈은 넬에 의해 장난감처럼 되어 버렸다. 혹은 상대방에게 괴롭히는 것으로 즐거움을 얻는 사디스트적인 요소가 넬에게 있다고 하나, 넬의 입장에서 레빈을 가지고 노는 것은 호감에 대한 표시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히려 곤란해 하는 레빈의 모습을 보고 넬은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다.

 

단지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는 것으로 친근감과 만족감을 얻는 사디즘의 넬과 혹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면서도 뒤에서 조종하여 자신의 원하는 대로 이끌어내는 데이지 공주는 넬보다 더 심각한 사디스트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왕군단은 새로운 운명을 맞이한다. 그동안 마왕 국에서 요리사를 맡은 데이지가 그동안 마왕국의 빈곤으로 인해 몇 개월 급료가 밀린 것이다. 데이지는 공주이면서도 상당히 머리가 좋은 지략가이다. 그녀가 아무런 미련만 없다면 마왕성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나, 여기서는 무슨 일인지 변덕을 부린다.

 

마왕의 총사인 리세가 경제적인 고초를 해결하기 위해 오히려 옆에서 도와주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다고 하여 곱게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골탕을 주는 것을 전제로 해결하려 한다. 데이지 공주가 아주 우아한 모습으로 미소 지으며 “심지어 저는, 저를 악마라고 믿는 사람들의 믿음마저도 배신한 적 없답니다.” 라는 것은 데이지 공주가 상당한 수완가라는 사실이고, 그녀에게 잘못 대항할 경우 호된 꼴을 당한다는 뜻이다. 아셰트라는 원래 공주인 용사도 그렇게 강하면서도 막무가내라도 데이지 공주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긴장하고 만다.

 

최강의 용사인 공주도 역시 데이지에게 피하고 싶은 존재인가? 마왕 국에서 요리사로 있으면서 오히려 마왕의 부하를 얄밉게 도와주는 것으로 보면 인간은 다른 인간 내지 인격을 가진 존재와 있으면서 변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4년 전의 데이지라면 분명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나, 리세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과 막무가내로 커피숍을 운영하는 아셰트를 도와주는 척하다가 역으로 골탕 먹이는 것을 말이다. 작가의 상상력에서 페티시즘한 연출을 잘 이용하는 것을 좋았다. 가령 넬에게 꽉 끼는 치마길이 매우 짧은 간호사 복을 입히고, 거기에 스타킹을 입힌 후에 사디스트한 요소로 손님에게 대접(여왕님으로)하는 것과 마왕의 여동생님 빈유에게 노랑 원피스를 입히는 전략은 상당히 모에요소를 잘 이용했다.

 

흔히 누님연방과 로리지온(도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건담에서 지구연방과 지크지온의 대립)이라고 불리는 미소녀의 분류에서 넬은 누님연방이 가지는 그 특유한 볼륨감과 의상에서 묻어나오는 페티시즘, 빈유는 키가 작은 것을 이용한 로리지온의 완벽한 요소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누님이 가지는 사디스트적 요소와 로리가 가지는 어벙함을 생각하면 완벽한 조화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리세도 같이 누님연방으로 가세할 때 역시 상당히 LIbido(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주장한 인간내면인 무의식에 존재하는 성적인 에너지)를 자극하는 내용이 많았다.

 

문제는 그 Libido에서 고뇌하는 사람은 여장남자인 레빈이었다. 레빈은 겉으로 보면 완벽한 미소녀였다. 쇄골과 어깨가 훤히 드러나고, 치마가 매우 짧은 메이드 의상을 입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레빈의 모습을 보고 감격했다. 너무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레빈은 그런 민망한 의상을 입을 때 몸은 숙이면 가슴이 드러날까 걱정이고, 치마 위로 팬티가 드러날까 걱정이었다. 보통 여성이라면 성적인 수치심이겠으나, 레빈은 남자라는 사실을 밝혀질 경우 생명의 지장이 있을까봐 걱정인 것이다. 왠지 노출에 대한 부담감이 여성으로서가 아닌 여장으로서의 남성이기에 느끼는 압력이었다.

 

그런 와중에 진짜 공주인 아셰트는 레빈이 야한 의상을 입는 것을 보고, 레빈의 엉덩이를 만진다. 아무리 용사행세를 하고 싶은 것은 이해하나, 여장한 남자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는 남장여자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아셰트의 민폐적 요소는 여전히 용사로서의 모습보단 용사답지 못한 모습으로 코믹요소를 보여준다. 옆에 용사의 전사들이 악마를 무찌르는 사람보단 그저 마왕성 인근에서 아무 죄 없는 마족이나 일반 사람들까지 피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커피콩이 마력이 강한 곳에 있으면, 중독효과가 강하여 마시는 사람들에게 금단현상을 이용해 돈을 벌라는 것도 막무가내였다.

 

도리어 마왕군단이 정정당당하게 색기를 발산하고, 용사군단은 대놓고 반칙을 사용했다. 그래도 마왕이 용사에게 고용되어 일할 줄은 몰랐다. 완벽한 니트에 폐인인 마왕이 그 강력한 마력을 용사 가게의 커피콩 제조에 사용했다는 점과 그 계약조건은 용사인 아셰트를 가진다는 조건이었다. 이 모든 것이 데이지 공주의 책략이었다. 그러나 그 완벽한 폐인이 양복정장으로 깨끗하게 입고 심지어 안경까지 착용하여 우아한 기품을 내뿜을 정도에서 데이지 공주의 지략은 매우 악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면 리세에 대한 의리나 우정일 수도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본 가짜공주인 레빈에게는 리세에 대하여 왠지 모를 벽이 생긴다. 같이 생활한지 오래되었고, 이래저래 도움도 주고받았다. 납치당해 마왕 성에 왔어도 레빈은 포로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막연한 것들이 넘쳤다. 그렇지만 자신의 현재 위치와 신분과 성별을 속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리세와 같이 보낸 시간들이 친분을 쌓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리세도 레빈이 남자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레빈이 리세를 안아주나, 그 안아주는 육체적 촉감과 달리 마음의 거리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1권에서는 왠지 적이나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리세였으나, 2권에서는 멀게만 느껴진 것이다.

 

또한 마왕 국이 빚으로 허덕이는 이유도 리세의 아버지 때문이고, 리세는 마족 혈통을 가진 자가 아니라 인간과 마족의 중간이었다. 자신이 처해진 상황이 불리한 리세는 억지로 자신에게 짐이라는 굴레를 씌우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아마 리세에 대하여 데이지 공주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절대소년 공주님> 2권에서 보면 레빈과 리세는 서로에게 미안한 감정을 드러낸다. 레빈은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리세는 억지로 레빈을 납치하여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말이다. 서로 간의 거리감을 레빈은 느끼고 있으나, <절대소년 공주님> 3권에서는 그런 관계를 호전시키며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데이지 공주의 음흉한 책략과 그 책략에 휘둘리는 레빈과 그것에 된통 당하는 아셰트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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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 데이즈 2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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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2병 데이즈> 2권을 읽은 후에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3권이 생각났다. 물론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3권에서는 블랙헤이젤 당수의 경호원인 리리와 리리의 언니인 리라의 이야로 전개된다. 살인을 위해 살아온 여자아이, 그리고 그 살인기계는 물리적인 기계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지나친 활동은 결국 마모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고장 난 시계처럼 인간 역시 고장 나게 된다. 시계가 고장 나면 필요한 부품을 대체하여 수리하거나 혹은 폐기물로 간주하여 버리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은 폐기물처럼 다루면 안 되나 그렇게 다루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중2병 데이즈> 2권에 새롭게 등장한 소녀인 슈, 그녀는 조직 내에서 베스트 5에 들어갈 정도로 매우 좋은 실력을 가진 암살자다. 그 소녀의 암살기계적 능력은 갈까마귀왕인 연오에게 큰 타격을 줄 정도로 강력하고, 연오의 동생 린조차도 버거울 정도로 강했다. 그런 슈가 조직에서 나와 연오 앞에 나와 대결을 요구하고 있다. 연오에게 나타난 슈는 더 이상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인 조건을 만족할 의식주가 고려해야 하나, 의식주적인 문제를 지나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가문화라는 것을 즐겨야 한다. 다른 동물과 달리 오직 인간만이 여유를 가지고 시간을 이용해 여가생활을 할 수 있다. 여가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취미생활 영위와 능력을 향상시킬 있는 것이다. 과연 슈라는 여자아이는 그런 것이 있었을까? 아니라면 슈가 조직에서 탈출하여 연오에게 찾아갔는데, 그 연오에게도 그런 것을 찾아내었을까?

인간이 인간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분명 의식주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연오는 작은 집에서 기거하면서 예전보다 호화롭지 못한 생활에 힘들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조직에 있으면 카드에 적립된 돈을 원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었고, 임무 중에 허름한 곳이 아니라 좋은 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식사 때마다 편의점에서 김밥, 도시락, 라면 등과 같은 음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생활에 연오는 예전에 큰 대우를 받던 자신과 비교하면서 오히려 지금의 소박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긴다.

연오가 슈에게 한 대사지만,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남의 명령이나 억지로 만들어진 틀에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로봇처럼 살아가는 것보다 조금 힘들고 괴로워도 자신의 삶을 사는 게 행복하다고 여겼다. 아무 것도 아닌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며, 자신도 보통 사람처럼 학교에 가고, 집에 가고, 친구를 만나 어울리는 것이 바로 삶이란 것이다. 물론 연오는 그런 삶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직에서는 오로지 살인과 살인, 자신의 적인 마술사조직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에 의미 따위는 없다.

단지 자신의 조직에서 활동하는 암살기계고, 눈앞에 자신이 죽여야 할 대상만 존재했다.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죽여 자신의 손에 피 냄새가 진동하게 되었다. 왜 연오는 그런 갈까마귀왕이란 암살왕의 호칭을 버리고 이런 삶을 선택했을까? 그건 어떻게 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욕망에 대한 자신과 그 자신에 대한 회한일지도 모른다. 연오가 처음 암살요원으로 되었을 때 자신은 이미 그 세계에서 초짜에 불과했다. 자신을 이끌고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전자가 있었을 것이다. 연오는 그 앞에 있는 사람의 등을 보면서 동경심을 느꼈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대상에 다가가면 갈수록 그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에서 그 대상을 거세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이유는 바로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가고자 하는 욕망이다. 하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나면 바로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양심을 느끼며, 평생 살아가야 한다. 카니발이란 축제는 본래 식인이란 의식이다. 축제는 한편으로 식인행위에 대한 변이된 행사이다. 죽은 자에 대한 추모는 곧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치유의식이다. 갈까마귀왕인 연오가 자신이 동경한 선배와 싸워 이김으로서 남은 것은 성취감이 아니라 허무함이었다.

그 허무함은 연오만 느낀 것이 아니라, 연오의 선배에게도 항상 의문을 가진 숙제였다. 적을 죽이고 또 죽이는 것까지는 좋다. 그렇게 살아가면 결국 그 살인기계는 무엇이 되는 것이고, 만약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이 나면 무엇이 되는 것일까? 슈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오는 선배의 결투와 조직의 이탈로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 떠나간 것이라면, 슈는 아무런 답도 모른 채 그저 뛰쳐나온 것이다. 슈가 나온 이유는 슈 역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연오가 연오의 선배를 동경했다면, 슈는 연오를 동경했다. 그런 연오가 조직에 나가고 슈는 자신이 가고자 한 목표 혹은 동경하는 대상이 없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적과의 싸움도 끝이 나서 평화가 왔다.

평화와 질서를 위해 싸운 이들이 평화와 질서가 돌아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살인기계로 만들어져서 살인기계로 살아온 자들이 살인기계로서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곧 자신의 삶에 대한 목표가 사라진 것과 같다. 아무런 동기의식이나 삶의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슈의 정신오염이 그토록 심각한 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고자 한 목표나 대상이 어느 순간 허무하게 사라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당하고, 심지어 고장 난 장난감이 되었으니 폭주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는 자기 방어 및 공격이다.

슈는 그래서 연오에게 찾아오고, 연오에게 결투를 신청했던 점이다. 조직에서 이미 정신오염으로 처분을 받아야 했지만, 적어도 암살기계 슈는 못되더라도 연오와 슈라는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자신이 자신이고자 한 슈는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3권의 리나처럼 육체적 붕괴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육체 이전에 정신이 붕괴했기에 슈에게 필요한 그 정신적 위기에서 벗어날 상황이 필요했다. 그것은 갈까마귀왕인 연오와의 목숨 건 싸움이었다.

물론 싸움은 시작했고, 연오가 목숨에 큰 위협을 느낄 정도로 과격한 전투가 되었다. 그러나 만약 연오가 이기든 혹은 슈가 이기든 그 결과에서 슈는 승리와 패배로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인간 실존적인 자아에서 슈는 또 다시 자아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할 것이다. 연오는 슈와 싸우기 전에 붕어빵을 사준 적이 있었다. 붕어빵, 생각해보면 대략 1마리에 500원 정도하는 따뜻한 붕어빵은 날씨가 쌀쌀해지면 길가 도로나 혹은 학교 근처에서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간식이다. 분명 요원들이 치열한 싸움에서 늘 비싼 것만 먹었으나 오히려 붕어빵 1마리가 슈나 린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성에 대한 확인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상품의 가치에 따라 결정하면 안되나 적어도 우리는 자본주의 구조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상품의 가치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종종 결정되는 현상을 본다. 그런다고 하여 상품의 가치가 금액의 가치로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연오가 구매한 붕어빵 1마리는 얼마 하지 않은 것들이나, 적어도 연오의 가슴에 품어진 붕어빵 1마리는 린에게 무척 소중했고, 린의 붕어빵 1마리를 삼킨 슈는 린의 공격을 받은 점을 생각하면 500원 때문에 사람의 목숨이 오고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지 상품에 대한 값보다는 그 상품이 의미하는 하나의 가치라는 점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물질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해도 그 물질에 무엇을 부여 하냐에 따라 큰 의미가 부여될 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던 린이 연오의 품에 남은 붕어빵 하나를 입에 물자 잔혹한 살인마는 순진한 여동생으로 변해있었다. 500원의 가치가 인간을 살인기계로 만들고 혹은 그저(?) 오빠와 사이좋은 여동생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아무 것도 아닌 붕어빵 하나에 엄청난 소동을 일으키나, 그 소동 자체가 빤짝임이 있었다.

작은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그 기회가 말이다. 슈에게 이때까지 그런 기회란 없다. 자신의 싸움은 자신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오직 기계적인 싸움으로 변해 있었다. 연오와 결투는 자신을 위한 싸움이나, 적어도 그 싸움은 1번의 싸움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그런 싸움만 바란 슈에게 심각한 중2병 소녀인 흑련, 뱀파이어 소녀 루나와 만났다. 도저히 정상적이지 않고 바보에 망상 병에 시달리는 소녀들을 말이다. 이들에겐 정상적인 이성이나 판단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기가 그래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자신이 피터 팬이 아닌데도 피터 팬이라고 말하고 피터 팬처럼 행동하는 흑련과 그 일행을 보면서 말이다. 그래도 이런 중2병적인 요소가 그렇게 좋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가에 생각하게 된다. 흑련을 입양한 흑련의 어머니는 연오가 과거에 조직에 있던 것처럼 자신도 초대 갈까마귀왕 아니 여왕이었다. 그녀 역시 잔인한 시간과 공간에서 피를 뿌리며 힘들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얻은 것은 무엇일까? 분명 흑련의 집은 부유한 편이다. 흑련의 어머니가 그렇게 부유한데도 흑련을 입양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오 일행들이 배고픔에 지쳐있을 때 장바구니를 들고 찾아와 카레를 해주는 흑련의 어머니는 마치 친어머니처럼 흑련과 흑련의 친구들을 대해 주었다. 그녀 자신에게 빛나는 순간은 아마 흑련에게 어머니로서 조금이라도 해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요리를 해주고, 요리해 준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었을 때 흑련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조금은 빤짝이지 않았나 하는 기분이 든다. 자기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추억을 만드는 것이다.

흑련의 어머니는 연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저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말이야, 언제까지고 반짝거릴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 또한 기관의 기관장으로 활동하는 노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때로는 별 볼 일 없는 평범함이, 가장 위대한 특별함을 만들어 내는 법이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천재가 아니니까요.”,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바보들의 몫이죠.”

비일상 속의 인물들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분명 일상적인 삶을 산다고 볼 수 없다. 그 나름대로 치열한 삶과 어두운 나락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바보처럼 앞을 뛰어나가는 그들의 평범함 바보짓이 빛나는 청춘인 것이다. 흑련의 어머니는 자신의 과거를 보며, 연오에 대한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넘기 위해 흑련을 입양했을 것이다. 솔직히 30대 중반 정도 되는 여성의 딸이 여고생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물론 있을 수 있어도 남편 없이 혼자 키운다는 조건 자체가 성립이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삶을 남들처럼 살지 못해 의미를 찾아 혹은 의미 따위는 모르고 그저 뛰쳐나온 청춘들에게 그저 필요한 것은 나는 지금 여기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이다. 슈에게 다시 돌아 가보면 슈는 자신이 살아갈 목적의식이나 목표들이 없어졌다. 그저 살인기계로서 처분당하는 운명이었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연오를 찾아 왔을 때 붕어빵을 먹고, 카레를 먹고, 게임을 하면서 슈에게 이때까지 해보지 못했던 경험과 추억을 새긴 것이다. 목숨 걸고 싸우다가 어느덧 아침 해를 연오와 바라보며 자신의 현재를 찾아간다.

인생이란 단순하고 복잡하고, 쉬우면서 어렵다. 사람에게 살아가는 것이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더불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삶의 의미조차도 없다면 죽음에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로 이어져 있는 동상이몽이다.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을 보나, 그것은 곧 같은 것이다. 흑련의 난동은 결국 연오조차도 자신이 이때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어차피 인간은 거대한 세상에서 톱니바퀴 불과하다. 하지만 그 톱니바퀴 자체에도 하나의 세상이 있었다. 그 작고 작은 하나의 세상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충분히 만끽하고, 거대한 세상에서도 나라는 존재를 보여줄 수 있을 대 빛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순간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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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에서 과학으로 - 새날 고전 묶음 2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나상민 옮김 / 새날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생각해보면 인류의 역사 천재라는 존재가 나올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천재인 것도 있으나, 시대적인 흐름이 존재함이다. 만약 플라톤이 현세에 태어났다면? 혹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삼국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적인 조건에서 항상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봉착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물론 세종대왕의 한글이야 얼마든지 한국이란 영토 내만 아니라 북동아시아 대륙으로 가도 문자의 능력은 십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현세에 살았다면 아마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극소수에게 민주주의가 선택된 귀족중심의 민주주의라는 꼬리에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란 바로 그런 하나의 과정 속에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 역사적 현실 속에서 오류를 부정함에 따라 새롭게 긍정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소상하게 알지 못하나, 적어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영향을 받은 변증법에 유물론적인 요소를 더함으로 기존의 절대적인 관념에서 변증법적인 가치로 통해 현실을 새롭게 재조명한다. 그래서일까? 유독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이라는 서적을 볼 때면 마치 변증법적인 역사관이 매우 뚜렷하다.

 

왜 사회주의는 반드시 오는 것일까? 세계 어디를 보아도 소비에트 연방 해체이후 그냥 그대로 사회주의 국가는 없다. 단지 덴마크, 스웨덴 등과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 정치경제적인 요건에 따라 운영하고 있다. 이른바 시민사회주의로서 말이다. 사회주의 이념이란 국가는 없어도 사회주의 관련 정치적 조직은 여전히 프랑스 및 독일 등을 중심으로 선진국에서 활동 중이다. 그들이 그렇게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엥겔스가 설명한 <공상에서 과학으로>이란 서적을 보면 우리는 인간의 계몽주의 사상이 도래한 18세기 프랑스를 봐야 한다.

 

몽테스키외, 디드로, 볼테르, 루소와 같은 계몽주의자들이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엥겔스는 사상이 세계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상으로부터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충분히 문화라는 것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나, 오히려 문화로 통해 우리 인간이 형성되어 왔다. 아니라면 문화라는 자체도 본래는 하나의 유기절인 환경조건에 의해 구성되었다가 추후 하나의 문화적 관념으로 고착화 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그동안 살아온 사회구조는 상부구조인 정치적 입지에 따라 형성되어 왔다.

 

생각해보면 왜 다른 나라에 비해 서구가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문명화가 다른 대륙에 비해 빠른가? 중세유럽부터 각 나라의 태어난 사람들이 고국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나라에 가서 신하가 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일정한 영토에 비해 국가들이 많이 연접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가 전쟁을 벌이게 되면, 다른 나라에서 전쟁으로 약해진 나라를 침공하기에 일정한 정치적 권력을 확보한 채 유지하는 편이 더 이익이 될 것이다. 또한 무역거래에서 상인들의 이동이 많은 점과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전략에 따라 상업활동이 발달했다.

 

정치적 조건에서 농경사회에서는 봉건군주 내지 절대주의왕정이 유리할 것이다. 농노나 자유농민들이 대부분 국민이고, 그 위에 왕족 및 귀조, 그리고 전쟁에서 임무를 수행할 기사와 형이상학적 가치관을 내세우기 위한 성직자들까지 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이런 신분계급 체계가 안정화 될 수 있는 것은 최하위계급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이 없는 점과 그 지역의 귀족이 자신의 관할지역의 농민들을 다스리고, 때에 따라서는 결혼 내지 의료 활동까지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이동은 일부 상인에 국한되었으며, 대부분 이송물자는 그 지역의 특산물에 한계였다.

 

하지만 무역거래가 늘어나고, 상인들의 이동이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세력이 늘어가고, 그들은 재력과 더불어 지식까지 소유하고, 그동안 미천한 신분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고, 신분상승을 노린 것이다. 자본주의혁명은 결국 봉건사회의 적이 되어야 했다.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도 루이왕정은 수입에 비해 지출이 심했고, 귀족들에게 세를 거두지 않고 농민에게 거두는 바람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부여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에밀>처럼 당대 지식인들을 자극하던 서적의 중요도보단 그 시대의 국가경제 상황에 의해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단지 그 혁명의 주도세력은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은 왕족의 과소비는 알아도 왜 그런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 따위는 없었다. <사회계약론>에서 언급한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아직도 대한민국 헌법 내지 세계 어느 국가에서 통하는 헌법 문구이다. 하지만 그런 개념조차 당대 사람들에게 없었다. 인간 누구나 천부인권이 있다는 관념조차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상에서 과학으로>는 비록 프랑스대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나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삼색기에서 자유, 평등, 박애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된다고 했다.

 

사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 관념에서 사회주의라는 개념에서 민주주의와 별개로 놓고 보는 것이다. 자유주의 역시 민주주의와 별개로 보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영역이냐? 공적의 영역이냐의 차이점이다. 단지 민주주의에서 고도화로 발달되면 사회주의 요소가 되는 이유는 지금의 북유럽 선진국처럼 대부분 국민들이 굶지 않고 가난으로 허덕이지 않아야 하는 점이다. 물론 그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들이 그동안 근현대까지 해온 식민지국가 침공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영국이 그나마 근로자 수당이 적정하게 책정된 이유는 그만큼의 임금을 인도와 같은 식민국가에서 착취해온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어느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을 희생하거나 문제가 생기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수정하고 극복하여 또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부분은 어떻게 가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결코 유토피아 국가를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나라를 가는 과정에 대해 항상 강조했다. 그 어떤 것의 달콤한 이야기들은 결국 헛된 공상이란 점을 강조했다. 공상에는 과학이 없다. 현실의 상황과 그리고 지금 가야하는 점은 언제나 대립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도 우리가 지금 일반적 받아들이는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속박과 굴레를 해방하겠다고 나온 레닌 사후 스탈린의 소비에트 정권은 결국 오히려 더 인간을 속박하고 폭력의 역사를 물들게 하였다. 어떻게 보면 계몽주의가 관념론이란 봉건제도를 타파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되었고, 계몽주의는 그저 부르주아의 일부 지식인에만 국한 된 것이었고,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양되지 못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은 계몽주의를 스스로 알았을까? 그들은 계몽주의적인 정신 대신 단지 루이왕정을 전복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시민이라 불렀다. 하지만 시민은 그 속에 얼마 없었다.

 

계몽주의자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과 관계없이 그저 그 흐름에 맡겨 공상적으로 계몽주의에 입각한 시민이라 여긴 것이다. 따라서 그런 공상에 휘말린 만큼 추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모든 프랑스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환영했고, 자신들 손으로 왕을 죽인 자들이 이제는 스스로 황제를 옹립한다. 인간의 공상이란 바로 자신들의 한계와 현실을 깨우치지 않기에 늘 똑같은 어리석음에 고통 받는 것이다. 또한 그 고통에 의한 억압이 또 다른 혁명과 쿠데타, 전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민주주의 역사는 피를 마시고 자라는 나무라고 하지 않은가?

 

공상에 빠진 자들은 자신의 무지에 의해 똑같은 것을 반복되고, 또는 새로운 가설에 의해 이끌려 다니기도 한다. 당시 생시몽, 푸리에, 푸르동과 같은 사회주의들은 공상적이며, 현실적 조건과 경제적 판단에 대해 오류를 범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푸르동에게 보낸 <철학의 빈곤>은 푸르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해 반박하기 위한 서적이다. 또한 엥겔스는 위 3명의 사상가만 아니라 다른 사상가의 정치적 노력이 실패했음을 설파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마르크스의 정치사상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실패했다고 하나, 진짜 마르크스의 원전을 읽었다면 마르크스의 실험에서 최종테스트는 성공도 실패하지 않은 채 중간에서 실패한 것이다.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시도를 했다고 치더라도 그 일부의 마르크스주의자만 마르크스를 알았지, 그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그 무리에 속함으로서 하나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공상적인 망상이다. 엥겔스의 서적은 바로 그런 점을 설파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른 사상가의 사상에 대해 비판을 한다. 그런 서적이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후로 나온 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실을 보자. 그때와 지금은 다른 세상이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경제적인 조건과 그 조건에 의해 사회적 약자, 즉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은 비슷해 보인다.

 

제일 놀라운 말은 산업예비군이다. 또한 평소 경제가 호황이면 화폐가 유통되어 물가가 오르고, 임금이 하락되는 결과가 되는 점이다. 경제가 불황이면 근로자들은 언제든지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물가가 오른데 반해 임금은 오르지 않고, 경기가 좋지 않아 실업도 문제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익을 주더라도 일하는 사람에게 일자리는 빼앗는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면 결국 그 사람들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사람이 줄어든 만큼 일의 양이 늘어난다.

 

20세기 수그러질 것처럼 보인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오히려 21세기에 다시 부상되는 이유는 그의 지적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이 책에서 나온 단어나 해설 등은 지금 학교과정이나 혹은 사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와 의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한다고 해도 그들이 만든 개념이나 사상은 충분한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공상이란 허울 좋은 망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하라고 한다. 공상에 빠진 자들은 자신이 공상에 빠진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무지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른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공상에서 벗어나 과학으로 가는 것은 무지의 맹아를 스스로 벗어야 한다.

 

엥겔스는 유물론자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독일 관념철학자인 칸트에 대해 존경하고 그의 철학을 받아들인다. 물론 마르크스 역시 칸트와 피히테 등과 같은 철학자의 가르침을 존중하며, 마르크스가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 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현세의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마르크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가 존재하던 시대에 살았다는 점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름이 지금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읽으면 마르크스의 여러 서적을 요약 정리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읽어보면서 제법 잘 정리된 책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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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 데이즈 1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라이트노벨 <중2병 데이즈>를 일요일 느긋한 일요일 휴일을 이용하여 읽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던 그 <중2병 데이즈>를 말이다. 물론 주말이라고 하여 라이트노벨만 읽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면서 일본 화폐 천엔의 주인공인 나쓰메 소세키가 저술한 <문(門)>이란 장편소설과 더불어 또한 오랜만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인 정치경제학 비판도 읽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균형이 전혀 맞지 않은 주말 독서기록이었다. 그래도 알고보면 다 연관성은 있었다. 왜냐하면 나쓰메 소세키의 문이란 작품제목을 붙이기 위해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감을 받았듯이 제 아무리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 우리 인류의 위대한 인문도서와 별개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김월희 작가의 이전 작품인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스토리 전개나 모티는 전혀 다르다고 해도 <중2병 데이즈>는 기본적으로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하고 조금 연관성이 있다. 주인공 연오를 마치 자신의 구원자인양 바라보는 흑련이란 것이 블랙헤이젤과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의 남자 주인공의 또 다른 여동생인 선우백련과 비교하면 백련과 흑련이란 이름이 각각 다른 시리즈의 작품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김월희 작가의 블로그 보면서 생각하나, 그 작가의 포스팅을 보면 그렇게 나쁜 성격이라 들지 않는다. 정중한 존댓말과 친절한 설명을 붙이려는 그의 노력이 보인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보이는 그의 글은 여전히 유토피아를 추구하기보다는 유토피아에 대한 회의감이 가득하다는 느낌만 든다.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1권부터 그의 인용문은 이미 카를 마크르스와 게오르크 헤겔의 사상이 등장하고, 노암 촘스키 및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언어학자의 저술도서도 소재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중2병 데이즈>에서도 여전히 그런 내용을 인용한다. 아마 그것으로 인해 여태까지 일어난 라이트노벨 세계에서 일어난 화젯거리가 생겼을 것이다. 대부분 어느 현상이나 어떤 사물이나 정황을 볼 때는 그 자체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context라는 전후맥락을 두고 봐야 하는 것이 정론이다. 보통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도 일반 소설과 같이 하나의 서사구조를 가지는 스토리텔링이다. 별개의 장르로 구분하는 mass-culture와 sub-culture의 벽에서 단지 소재와 대상, 재미의 차이만 존재하지 근본적으로 큰 차이점을 없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중2병 데이즈>에선 작가가 주인공 연오의 입장이 되어 서술하는 것처럼 1인칭적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작가는 비록 연오를 만들어 내고 연오로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나, 연오라는 인물이 가진 인식과 상황판단이 곧 작가가 보는 세계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이렇게 작가와 연오에 대한 1인칭적인 시점에 대해 왜 이리도 강조하는 것일까? 나는 분명히 일요일 휴일 집에서 난이도가 높은 책을 읽다가 머리를 식힐 겸 <중2병 데이즈>를 처음으로 열었다.

그리고 그 앞날인 토요일에는 내 방에서 혼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보았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는 다소 실화를 미화시켜 만든 작품으로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강제 침공하여 거기에 주거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가둔 후 노동착취 및 살인 등 인간성을 상실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크라코프에서 일어난 집단학살의 비극에서 이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크라코프 수용소장인 아몬 괴트 소령은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사살하고, 때로는 자신의 저택에서 저격총으로 부지런히 일하지 않은 유대인을 그 저격하여 사살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쉰들러가 크라코프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구출할 때 기차가 잘못 들어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물론 거액의 뇌물을 이용하여 구출하기도 하나, 아우슈비츠는 어떤 곳인가? 저명한 여성 인문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겪은 유대인이다. 그녀는 예루살렘에 가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직접 봤고, 그것을 토대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유명한 서적을 남긴다. 원래 그녀 자체가 군중(mass), 시민(people), 선동가(mob)로 나누어 대중사회에서의 파시즘에 대한 연구를 했었다.

그녀의 연구는 결국 세계적인 좌파와 우파 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잘 생각하고 명시해야 할 점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라는 점이다. 그는 극히 평범한 남성이었고, 집에서 다정한 아버지와 자상한 남편이었다. 집에 오면 가족과 저녁을 먹으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낭만과 예술도 알았다. 그런 점잖은 사람이 나치 수용소에서 가장 유명하고 잔인하고 악랄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인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의 유대인 학살의 특이성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을 죽일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였다.

아우슈비츠의 독가스 대규모 살해는 일제강점기 시절 무참하게 살육을 당해야 했던 우리의 아픈 기억과 더불어 인류의 상처이다. 그런 점에서 <중2병 데이즈>란 라이트노벨에서 나온 김월희 작가의 글은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가? 나치의 악랄한 수용소 아우슈비츠, 그리고 그곳의 소장을 임명한 히틀러와 히틀러가 선동부장으로 임명한 괴벨스, 그런 괴벨스에 대해 이 라이트노벨의 주인공 중에 2명인 흑련과 린은 이렇게 말한다. “미디어 장악은 문화 장악의 기본이니까”, “괴벨스가 했던 말이죠. 참고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이다.

막대한 유대인을 학살하고,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도처에 전쟁의 아픔을 남긴 독일 나치의 선동부장의 말을 따라하고 존경한다는 발언은 분명히 소재로서 판단하면 김월희 작가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김월희 작가 스스로가 과연 그것이 옳다고 여겼을까? 라는 의문이 예전부터 있었다. 가령 라이트노벨에서 주인공 연오로서 보는 1인칭 시점에서 흑련과 린을 바라보며 혼자 생각하는 글이 나온다. ‘두 사람의 뜬금없는 하모니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사실 아무 의미도 없었다.’라는 것이다.

만약 작가 스스로 괴벨스에 대한 미디어 정책이 옳다고 했다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긍정을 했을 것이나 그 어떤 긍정도 없으며, 차라리 아무 의미 없는 한심한 짓이라고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괴벨스 발언과 관련하여 다소 작가가 민감한 부분을 꺼낸 것은 분명히 잘못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발언 자체로 통해 작가가 나치에 대하여 긍정적인 사고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가가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에서 언급한 헤겔의 말이 생각나게 만들기는 충분하다.

“그렇지 않답니다. 오라버니! 헤겔이 주장한 시대정신이란 결국 진보 없이 반복되는 원형의 띠. 우민들은 결국 계몽의 대상이 아닌 사육의 대상에 불과하지요.”라는 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정치적 입지에서 과거에는 분명 왕족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주의 내지 봉건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고, 프랑스대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 경제적 체계로 통해 완전하지 못한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1차 내지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 형식적 민주주의가 도래했다.

세계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미국을 지목하는데, 그 미국조차 여성에게 투표권이 준 것이 불과 100년 전후이며, 흑인에게 사회적 기회를 준 것도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것보다 더 뒤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인간들이 가진 집단적 우월주의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그러고 싶은 인간들에게 계몽 대신 사육이란 이름이 주어진 게 되었다. 생각하면 칸트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그것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계몽이란 칸트가 지적한 것처럼 계몽이란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느끼는 디스토피아적인 정신적 관념은 그래서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이나 <중2병 데이즈>에서도 계속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디어에 대한 논쟁에서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다루기를 영국의 공리주의를 제창한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처럼 이른바 감시라는 사회구조적인 부분을 다루기 때문이다. 최근에 발행된 아르망 마틀라르의 <감시의 시대>처럼 미셀 푸코나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이란 일망감시탑을 지난 다각적인 감시체계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미디어라는 것이다.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는 권력을 만들고, 언어는 또 다른 언어를 생산하여 또 다른 권력을 낳는다. 언어는 이른바 사회적 언어인 langue로 통해 사회적인 통제력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언어의 통제력에서 언어란 비단 말과 글이 아니라 tv, 컴퓨터에서 나오는 영상까지 포함하다. 영상언어로서 군중심리를 지배하는 논리는 이미 20세기에 이루어진 과정이다. 발터 벵야민의 <문예이론>에서도 영화라는 장치가 영상으로 통해 군중을 파시즘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미디어 장악은 문화 장악의 기본이니까”라는 위험한 발언은 충분히 학술적으로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그런 문화라는 곳은 인간이 사상을 만드는 것이 인간이 사상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보면 세계가 사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세계를 만든다고 적혀있다. 문화라는 곳은 인간의 각종 삶과 풍습, 경제, 정치, 사회 등이 얽혀있는 곳이다. 그곳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중의주의라는 단어가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재미와 흥미를 느끼고자 하는 라이트노벨에 대해 언급한다면 너무 깊이 들어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라이트노벨이라 하여 비평적인 접근에서 제외한다는 것 자체가 더 잘못된 점이다. 괴벨스 발언보다 더 관심을 두어야할 부분은 아마 괴벨스 발언 뒤에 나온 두 소녀의 대화록이다.

“그래요! 선전과 선도 이야말로 추악한 정치의 기본이죠!”, “우민들을 다스리기 위해 매스미디어의 활용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으니까.”, “후후. 바로 그거예요! 기원 이래로 인류는 단 한 순간도 발전한 적이 없으니까요!”, “우리들은 과거 이상으로 몇 배나 효율적이고 발전한 통제수단을 갖고 있지.”

위의 단어를 보면 정말 재미로 넘어갈 수 있는 말일까? 솔직히 생각하면 중세 유럽 이탈리아에 유명한 사상가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집필한다. 그때 그 <군주론>의 이상적 모델인 포악한 왕인 체자레 보르지아를 두었다. 그 왕이 로마냐라고 불리는 지역을 정복할 때 많은 주민들이 반항을 했다. 그때 자신의 부하 중에 매우 잔인한 사람을 보내 폭력정치를 했고, 주민들은 그 부하에 대해 지독한 반감을 사자, 어느 날 그 부하는 시체로 발견되고 그 마을주민들의 원성도 조용해졌다. 군중들이 가지는 반감에 대해 통치하는 방법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하듯이 그 이전에도 그 당시에도 그 후에도 존재했다.

지금에 와서 더욱 강력한 것은 미디어라는 것이다. 정보의 전달에서 예전에는 인간이 직접 말을 하거나 친필을 전달하는 수단만 존재했다. 그러나 전기통신기술 발달로 전화가 생기고, 인터넷이 생기며, 핸드폰과 각종 통신수단이 발달했다. 미디어의 통제로 언제 어디서든 마음에 드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보낼 수 있다. spectacle이란 단어는 바로 인간이 이미지로 통해 매개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괴벨스의 논란은 바로 spectacle로서 인간이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논리다. <중2병 데이즈>는 말 그대로 중2병이거나 혹은 중2병처럼 보이는 사람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이미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비정상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비정상적일까? 오히려 비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비정상적일까? 작품의 전후맥락과 동시에 그 전후맥락의 모티브나 여러 가지 상황은 좀 더 생각해보면 다양한 유추가 나오지 않나 싶다. 물론 꿈보다 해몽이 앞설 수 있겠으나, 작가는 이미 라이트노벨을 저술하면서 우리의 일상과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비일상에 대한 동경심과 욕망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비일상적인 세계란 우리가 상상하듯이 그렇게 대단하거나 좋은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일상 이상으로 더 곤혹스러운 상태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안 그렇다면 처음부터 김월희 작가가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처럼 인류역사 중에 최고 금기 중의 하나인 근친상간에 대해 풀어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 블랙헤이젤 당주는 끝까지 친오빠와의 근친상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 그 모든 것을 버리는 순간 그녀는 세계와의 단절을 선언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욕망에는 금기가 많다. 신화 중에 하나인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인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아버지인지도 모른 채 죽이고 만다. 그리고 테베를 괴롭히는 괴물 스핑크스의 문제를 해결하고, 테베의 왕이 된다.

이때 테베의 왕녀인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였고,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이면서 아내인 이오카스테와 더불어 2남 2녀를 낳는다. 그렇게 비일상적이고 금기를 깨고 불길한 이야기인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는 신화로서 남았고, 그것은 단절된 이야기가 아니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으로 통해 아직도 연결되는 공시적인 언어가 되었다. 일상과 비일상의 구분을 할 수 있는 분별력도 좋으나, 우리가 항상 일상만이 아닌 비일상에 동경심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늘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보다는 욕망을 더 바란다. 욕구는 한 번 만족하면 그 순간으로 끝이 나나, 욕망은 한 번 만족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것에 대해 탐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보니 이야기의 세계에서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나간다. 비일상에 대한 동경 역시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환상이란 것은 직접 육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면 정신적 관념으로 느낄 수 있다. 그것이 환상과 비일상이라 하여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일상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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