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외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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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을 읽으면서 루소가 프랑스 철학, 사상, 학문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중에 유명한 사람이 매우 많으나 몇몇을 가려보라고 한다면 분명 레비 스트로스와 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이 나올 것이다. 이중에 레비 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인류학자이고, 데리다와 같은 경우 해체주의를 정립한 학자이다. 또한 자크 데리다의 경우 프랑스 구조주의 이후 후기구조주의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고,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마저 영향을 루소에게서 받았다는 점이 매우 놀랐다. 개인적으로 데리아의 서적이라곤 <마르크스의 유령들> 뿐이다. 그러나 현대철학에서 데리다의 영역이 명확하기에 그의 해체주의 철학이 루소에서 나온 점에서 매우 감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에 루소가 만든 서적들이 현대 철학과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점에서 말이다. 당시 봉건주의 사회에서 왕족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가 절대적 권력을 지닌 시기에 지식인으로서 언어마저도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이나 감정표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방식은 지구의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이라고 말한 코페르니쿠스 전환만큼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루소 자신도 디드로, 볼테르와 더불어 계몽주의 철학자이나, 그는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 철학자 중에서 이성보단 자연의 본성을 중시했다는 점이 매우 특이했다. 인간에게 자연적 요소를 발견하고, 인간의 불평등은 모든 것은 소유에 대한 욕망인 점에서 이성이란 합리적인 도구가 오히려 자연 본성의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계약론>에서 밝힌 것처럼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이나, 인간이 속해진 사회가 있기에 자유를 대신하여 억압이 존재한다. 서로 간의 영역을 위해 사회 일원이 만든 사회계약이란 일반의지는 결국 인간이란 자연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이성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전제가 대체된다.

 

<사회계약론>에 대해 생각해보면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이라고 거론한 것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사회가 존재했기에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왜 루소가 갑자기 인류학의 창시자라고 레비 스트로스가 말했을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언어로 통해 문화와 억압, 착취가 생긴 것을 루소가 지적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학문적인 요소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지질학이다. 그런데 루소의 <언어 기원의 관한 시론>은 구조주의 요소를 상당히 잘 표현했다. 언어에 대한 권력과 사회적인 요소는 미셀 푸코가 지적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서 소쉬르의 언어학을 받아들임에서 언어학 영역에서 루소가 보여준 문명의 발달과 전개과정은 매우 흥미로웠다. 인간이 자연 상태에 그대로 있을 경우 야생이고, 조금 더 발전한 상태가 야만이고, 그 다음에 문명이라고 말한다. 문명이 생기는 점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서 적은 것처럼 유럽이 문명이 발달한 이유는 환경적인 요건이 매우 크다. 지리학적으로 다른 나라와 가까이 붙어있는 점에서 전쟁이 늘 많았다는 점과 영토규모에 비해 주민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야생에서 거주하는 민족들은 문명국가 사람들처럼 식량에 대한 위기가 없었다. 가령 광대한 숲과 강을 가진 어느 지역에 주민 수는 겨우 밴드 하나당 30명이 넘지 않는다. 다른 밴드와 조우할 수 있는 확률은 1주일 1번 정도다. 숲 속에 언제나 나무에서 과일이 맺히고, 벌꿀이 만든 꿀통에서 달콤한 꿀을 찾을 수 있다. 삼림이 넉넉하여 동물들도 많아 사냥을 하여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고, 강가에 물고기도 많아 충분히 잡아먹을 수 있다. 이들의 생활에 특별한 것들은 필요 없다. 단지 짧은 시간에 서로 채집과 사냥을 하여 같이 나누어 먹고 쉬는 것이 전부다. 인간이 수렵과 채집하던 무렵에 키가 크고 영양상태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조건에 살아갈 수 없다. 가령 에스키모 인들과 같이 기후가 매우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적 조건이 워낙 열악하기에 사람들의 성격이 급하고 난폭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반해 열대지방에 사는 부족들은 넘쳐나는 식량으로 인해 성격을 급하게 굴 필요도 없고, 난폭하게 사람들을 대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서로 춤을 추고 노래하고 정답게 지내는 것을 원한다. 모든 부족이 그런 것은 아니나, 가령 어느 부족이 “나를 사랑해줘요”라고 인사하면 에스키모 인들은 “나를 도와줘요”가 인사말이란 점을 생각하면 매우 인상적이다.

 

일본에서 누가 다치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다이죠브데쓰까?”라고 한다. 우리 한국말로 대체하면 “괜찮으신가요?”가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대장부입니까?” 라는 것이다. 왜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가에서 대장부이냐고 묻는 표현은 조금 낯선 느낌이다. 그것은 일본의 자연조건이 열악하거나 혹은 일본의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워낙 전쟁을 많이 한 점에서 언어적인 표현방식이 다르게 될 수 있다. 인간의 생활방식이 하나의 체계화되어 언어로서 표현되는 점은 그 민족과 국가의 구조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소의 야생, 야만, 문명국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분석은 매우 탁월했다.

 

언어가 있는 이유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선 통제와 명령이 필요하기에 언어로서 인간을 조율하는 것이다. 또한 감정이란 것도 직접적인 몸짓도 좋으나, 몸짓으로 표현하고 의사소통하기에는 그 한계범위가 있다. 말로 통해 많은 의미와 상황적 요소를 알리는 것만큼 효율적인 게 없다. 언어는 langue와 parole로 나뉜다. langue의 경우 사회적인 언어로서 언어는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가 사회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요소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언어야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사실 논객들의 대화가 로고스라는 논리로서 전개해도 한편으로 파토스적인 요소가 보인다. 자신의 입장과 감정을 논리라는 이름으로 오용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루소는 또한 감정 대신 욕구로서 인간의 언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하면 배가 고프면 배를 가리키고, 위험하면 비명을 질러도 자신의 의사가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된다. 그러나 심적인 상황에 대해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없으면 힘들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대화로 통해 우리는 상대방의 목소리의 높낮이로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을 귀로서 더 자극되는 점은 영상기호학 내지 영화서사학에서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예술가 칸단스키에 의하면 인간의 감정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대부분이 그 비율이 70% 정도라고 한다. 무성영화보다 차라리 드라마시디로 듣는 것이 더 감정적으로 자극되는 점이다. 그래서 루소는 음악에서 멜로디의 중요성을 알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라는 노래는 음율시인에 의해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이야기에 음악(하프)을 넣고 이야기를 노래한다. 그때 목소리 음 높이와 박자로서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 스토리텔링에서 진정한 기원은 음율시인의 노래가 아닌가 싶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인 예술인 정형화된 것보다 디오니소스의 형체 없이 계속 바뀌는 예술이 더 강렬함을 준다고 한다. 그림은 공간적인 요소 즉 시각이나, 시와 같은 노래는 결국 시간에 의한 소리이다. 소리는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그 강력함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낀다. 사실 문학이란 것도 결국 신화에서 탄생하고, 신화적인 요소에서 영웅의 이야기는 시인의 입에서 전달된다. 노래가 바로 문학이란 점이고, 한국 전통문학에서도 판소리 내지 가사 등과 같은 예술이 국문학의 시작이란 점이다.

 

노래로서 진행되는 이야기, 서사의 시작은 바로 입으로 통한 상대방에 대한 정보전달 내지 감정이입으로 연결된다. 언어가 가진 놀라운 힘은 현대 영상매체시대에도 중요하다. 이미지만 나오고 소리가 동시에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 정보를 이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멀티미디어적인 영상정보매체에서 소리야말로 다시 정보를 제공하는 형태일 것이다. 예전에 대중을 위한 미학 강의에서 인간은 언어의 전달에서 처음에는 말로, 그 다음에 글로 그 다음은 영상이다. 하지만 정보의 제공에서 글이야 말로 이성판단에 도움이 되는데, 영상은 글처럼 이성적 판단이 되지 않고, 대신 영상에서 나오는 소리가 정보 전달로서 효율적이란 점이다. 인간의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결국 다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기원에 대해 적는 루소의 글은 보면서 소쉬르만이 언어학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19세기 이후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큰 변화를 주었다고 해도 그 이전에는 루소가 있었다. 21세기 사상마저도 루소의 사상이 이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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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2 - Novel Engine
정진교 지음, 라티세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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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라 2권>을 보는 순간,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졌다. 1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판단한 것은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 나오는 것일까? 아니라면 나오지 않더라도 1권으로 끝이 나도 좋을 만큼 상황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끝맺음을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베히모스 무예가 전학을 가면서 소꿉친구인 민수가 덩달아 같이 가게 되고 난 후로 벌어지는 상황들은 분명히 하나의 서사로서 그 주제가 명확히 나온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작가의 의도에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예는 민수를 좋아하고 있으나, 민수는 눈치가 너무 느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엉뚱한 대응을 한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봐서는 상당한 미소녀이나, 알고 보면 무서운 베히모스인 무예는 보통 무기에도 흠집도 나지 않을 정도이다. 겉보기에 예쁜 소녀일지라도 그 정체를 아는 순간 모든 이에게 낯설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다. 그런 존재에게 민수만이 아주 오랫동안 친구로 남아준 것이다. 어린 시절에 서로의 집에 찾아가서 놀아주고 같은 방에서 낮잠을 자던 친구로서 말이다. 그런 친구가 전학 가서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론은 이미 “무예는 오랜 친구인 민수를 남자로서 좋아하나, 민수는 눈치가 느려 그것을 알지 못해 무예에게 화만 돋는다.”

 

그렇다면 남은 주제들은 무예와 민수의 관계가 아니라 이 2사람을 필두로 하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문제는 민수에겐 좋은 일이 찾아오기 보다는 항상 새로운 사람으로 인한 시련과 고통만 되풀이되는 운명이란 점이다. 왠지 민수를 보면서 동지의식이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현실에서 민수 같은 남자가 과연 미소녀에게 인기가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라이트노벨이란 장르가 스토리텔링적인 요소에서 재미와 환상을 심어주기에 속성 부여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이미 1권에서 민수의 개고생을 본다면 보통 사람이라면 분명 도중에 그만두고도 남은 일들을 다 해결하는 그의 모습은 과연 민수가 아니면 매우 귀찮고 대하기 어려운 신인류를 대할 수 있을까?

 

그런 민수의 서글픈 운명에서 2권에서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온다. 이미 표지에서 키메라 휘정이 새로 전학 온 정설영에게 마치 유혹하듯이 손가락을 얼굴을 만지는 장면에서 새로운 흐름을 일으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매드 사이언티스트 제갈연광의 등장 역시 만만치 않은 고난이다. 1권과 달리 2권을 보면서 느낀 점은 한국 라이트노벨 특성은 대부분 학교라는 공간에 너무 많은 현실적 요건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티>라는 서적에서 가리키듯이 사실 실사영상이 아니고 허구의 존재가 나오는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도 그 세계관 자체에 리얼리티한 요소는 분명히 존재한다. 인물이나 영상, 그림체만 비현실이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생각해보면 5층 꼭대기에 신인류 미소녀 4명과 구인류 노비 민수가 같이 수업을 받는 것은 상황이 맞지 않으나, 매점에서 먹는 것을 구하기 위해 오고가는 노비 민수의 모습은 충분히 가능한 모습이란 점이다. 학교에 미소녀 스타가 나오면 화제가 되어 갑자기 콘테스트를 하는 것은 억지이나, 그런 미소녀가 학교에 있어서 내부적으로 경쟁의식이 학생들 사이에 붙는 것도 가능하다. 리얼리티한 요소들을 생각한다면 단지 캐릭터 인물에 부여된 속성이 그럴 뿐이지 학교 내의 전반적 상황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권에서는 그런 속성을 넘어 개그와 환상적 요소를 확실히 불어 넣는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1권의 서사적 특성을 생각해보면 narrative(내러티브)적인 요소에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다. 위기와 절정은 무예와 민수의 관계가 전학 간 학교의 다른 학생들에 의해 균열이 가자 마지막 퀴즈에 서로 처음 만났을 때 민수가 무예에게 한 말을 기억하면서 무예와 민수의 우정(하지만 무예에겐 사랑)에 대해 확인을 한다. 이에 반해 2권은 마지막 부분에 다른 식으로 해소하지만, 조금 다른 전개방식을 보인다. 보통의 서사구조에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식으로 전개했다.

 

1권만 봤다는 전제 아래 2권의 상황을 유추해본다면 그저 민수와 신인류 소녀간의 아웅다웅한 비일상적인 현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2권은 그런 요소를 지니지 않았다. 오히려 신인류의 등장에 따라 구인류 속에 가려진 신화, 민담, 전설의 존재가 등장한다는 속성을 부여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현실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한국 라이트노벨에서 조금 비틀어 환상의 공간을 내었다는 점이다. 구인류와 신인류가 있는 것이라면 인류가 아닌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비인류의 등장에 대한 암시는 나름 조금 재미있었다고 여긴다.

 

서사구조가 단순히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서 결말 뒤에 새로운 프롤로그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발단의 이유는 비인류 종족 수장의 딸이 겉으로는 종족의 번영과 유지를 위해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자기의 일종의 목적의식을 거대한 목표를 가리는 것으로 나온다. 뱀파이어 소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면 전혀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은 작품 전개를 본다면 주인공 민수가 있는 고등학교에 전학을 와야 한다는 조건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에서 민수가 지키는 존재는 1권에서는 신인류였고, 2권에서는 돈다발 왕이었다. 3권은 당연히 뱀파이어 소녀일 것이다.

 

그러나 계속 오는 인물들이 여학생이고, 게다가 미소녀의 속성을 다들 지니고 있는 점이다. 소청연의 경우 위그드라실이란 신비한 능력과 더불어 뛰어난 외모와 육감이 살아있는 몸매는 많은 남자를 자극하고, 이신아와 같은 하멜른은 키가 150㎝인 작은 키에 앙증맞은 외모까지 소유하고 있다. 윤무예는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몸매에 생머리를 지녔으니, 단짝 친구인 민수에게 옆에 이신아와 소청연이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런다고 하여 그들과 친해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나, 그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민수에게 응징의 킥과 펀치를 날린다.

 

타격의 규모를 생각하면 턱에 일격을 날려 기절 시킬 정도이니 베히모스라는 신인류의 위력을 서슴없이 보여준다. 그런 윤무예에게 품위가 넘치고 긴 노란머리의 미소녀 뱀파이어가 온다면 분명 민수로선 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3권은 민수가 지키는 대상은 뱀파이어 소녀라는 점이다. 단지 아쉬운 부분은 눈치가 거의 100점 만점에 5점 수준이기에 무예가 아무리 뒤돌려 말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키메라 휘정이가 민수가 교실로 오는 것을 알고 일부로 말을 흘리는 장면에서 윤무예, 소청연, 이신아가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이 온다.

 

다른 사람들의 이상형에서 무예의 말은 솔직히 가슴에 조금 뭔가 오는 느낌이었다. 베히모스는 난폭하고 과격하며 상당히 대하기가 어려운 신인류다. 그들의 경이로운 신체능력은 단순히 일상을 넘어 테러나 전쟁과 같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이니 말이다. 베히모스가 어느 마을주민들을 학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베히모스라는 존재가 가장 골치가 아픈 존재다. 15세 이상이 되면 감시가 붙고, 일상을 언제나 자유롭지 못한 베히모스에게 무예에게 등장한 민수란 유일한 빛이다. 자신이 물건을 파손하지 않아도 언제나 베히모스라는 이유로 남들에게 의심을 받는 차별 속에 자신의 담당관이 오자말자 하는 소리가 얼마면 되냐는 말은 베히모스라는 존재는 인간이기보단 그저 괴물이나 쓸데없는 물건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은 소통이다. 물론 소통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소통이란 것은 다투기도 하고 화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표현하고나 말하고 싶은 것을 누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소통이란 단어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무예에게 유일한 소통공간은 민수였고, 민수로 통해 일상을 보내고, 전학 간 학교에서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히로인의 설정에서 분명 무예는 주인공 민수로 본다면 히로인 당첨이다. 그러나 그녀는 히로인의 역할로서 부족한 점들이 많다. 얼굴표정변화가 적은 점과 말수가 적은 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보호받을 만한 사람은 구인류인 민수인데, 보호를 받는 것은 무예에 가깝다. 단지 그 보호란 인간적 신뢰나 우정일 것이다. 단지 남들과 비교하여 특별히 뛰어난 이유만으로 배척받는 것에서 인간은 더욱 더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런 점에서 민수는 무예의 인간성을 열심히 지키고 있다. 단지 인간성이란 다 좋은 것이 아니다. 감정 역시 인간이 가져야 할 조건이기에 윤무예의 킥과 펀치는 여전히 민수의 복무와 정강이를 아프게 한다. 가장 어울린 직업이 전업주부인 민수, 하지만 민수는 도대체 누가 지켜주랴? 그래도 정설영이 언니인 정하영의 공격에서 모두가 도와준 점을 본다면 민수 역시 보호받는 것은 사실이다. 단 조건은 노비로서 온갖 심부름과 수모를 당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점은 민수에 대해 모든 신인류들이 민수를 신뢰하는 점이다. 처음에 등장한 서리그룹의 영재인 설영이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민수와 친해진 신인류의 마음을 민수에게서 가져가지 못했다. 사람과 사람이 친할 때 몇 가지가 있는데, 아주 눈치가 빠르고 대화능력이 뛰어나 재미있는 사람이든지 혹은 그저 부려먹기 좋은 마음 착한 사람이란 점이다. 민수는 눈치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골탕만 당하는지라 한 없이 후자에 가깝다. 결론은 2권을 보면서 여자보단 남자고, 돈보다는 노비가 좋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대한민국은 헌법상으로 자유민주주의국가이므로 신분상 노비가 있으면 안 되는 점과(물론 현실이나 작품 내에서 동의하지 않지만) 동성친구도 좋으나 확실한 이성 친구 그것도 연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더 필요한 점에서 상당히 동의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에서 나는 민수고, 민수 같은 인물은 작품 내에서 1명이다. 설사 노비제도가 현재까지 이어져 민수가 노비로서 살아가야 한다면 주인은 1명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눈치 없는 민수는 계속 모두의 노비가 되어 괴로운 학창시절을 보내야하는 것이 이 작품이 나가는 주된 설정일 것이다. 그저 민수가 해피한 마무리를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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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3 (잇세 SOS 특별판(BOX)) -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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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3권은 외전적인 속성과 같이 전반적으로 서사적인 흐름보다는 중간 사이의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은 천사, 타천사, 악마 3부족이 평화와 안정을 위해 모두 평화조약을 맺었으나 내부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불만이 가득할 것이다. 평화를 좋아하고 노는 것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는 괴팍한 아저씨인 아자젤이 평소와 다른 모습이 보인다. 그가 천사시절 연구하던 칼이 아직까지 개발되지 않아 놀림거리가 된 것에 대해 원한이었다. 그것도 천사시절 동료였던 천사장인 미카엘의 입에서 나오니 아자젤의 숨은 마음은 폭발하기 좋은 것이었다.

 

아무리 공통의 목표의식이 있더라도 속에 가려진 배타적인 관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축제라는 것은 본래 그런 인간의 마음을 표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지금도 열리는 세계적인 축제의 의미를 보면, 본래 중세유럽이나 계급체계가 엄격한 신분사회라도 축제기간만큼은 모든 것이 해방되었다. 귀족이나 평민이나 천민이 너나 가릴 것도 없이 단 며칠 동안 미친 듯이 망가지면서 논다. 마시고 먹고 싸우고 있는 동안 마을은 난장판이 된다. 질서가 없어 보이는 이 공간이 과연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런 축제야 말로 질서를 유지시키는 하나의 의식이다. 인간의 내면에 쌓인 불만요소를 발산함으로서 오히려 마을의 단결과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축제라는 의미에서 carnival이란 영문단어가 있다. carnival이란 단어를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 Cannibals and Kings>라는 서적을 보면 축제의 어원은 바로 식인이란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식인의 의미는 바로 죄의식을 가진 인간이 서로를 용서하고 구원받기 위한 하나의 행사였다. 이른바 아버지 죽이기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여자를 아들들이 나누어 가지나, 추후 그들 역시 아버지처럼 되어 가면서 자신의 과오를 느끼고, 이에 대한 추모의식을 치른다.

 

그게 바로 축제의 진화과정이다. 축제라는 것은 죄의식부터 시작하여 마음속에 가려진 인간의 감정을 표출하기 좋은 것이다. 축제라는 것은 분명히 말하지만 시작은 결코 즐거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이스쿨 DXD 13권의 삼대 세력의 운동회는 그렇게 즐거운 분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을 위해 개최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유지되기 위해 개최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악마 ↔ 타천사 세력, 악마 ↔ 천사세력에서 악마 × 천사 × 타천사 세력구도에서 분명 겉으로는 좋은 분위기라도 내심 불쾌한 것이 없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운동회가 친목을 위장한 전투놀이로 되는 것이다. 오히려 스트레스와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하나의 비상구라는 개념 속에서 잇세이는 그야말로 휘둘림을 당하는 것이다. 물론 잇세이가 휘둘림을 당하는 것은 비단 운동회가 아니다. 제일 심한 것은 레비아탄의 특촬영화에서 대본과 어울리지 않은 에드립 상황이 오히려 전환되어 뱀파이어가 주인공이 되고, 잇세이는 레비아탄의 진심어린 연기에 시달리는 모습이 나온다. 언제나 당하고 당하는 모습에 멋있는 모습이 그다지 나오지 않은 것이 개그적 요소다. 오히려 계속 골탕을 먹는 상황에서는 아자젤의 쓸데없는 창작욕구가 더 인상적이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성적인 요소를 바꿀 수 없다. 물론 성형수술로 통해 성기나 각종 체형을 조절할 수 있어도 호르몬 그 자체나 생리적인 구조까지 모두 바꿀 수는 없다. 그런데 아자젤의 장난감을 가능했다. 여자를 남자로, 남자를 여자로 잠시 만들 수 있는 도구를 만든 것이다. 대부분 부실이 여자이기에 모두 남자로 변하자 멋지고 잘생긴 사람이 되었으나, 반대로 남자가 여자로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도 관건이었다. 본래 어린 소녀처럼 생긴 남자후배인 캐스퍼는 몸집도 작고 여자로 변해도 절벽 그대로였지만, 키바는 달랐다.

 

본래 미남에 핸섬한 스타일이 여자로 되었을 때, 잇세이는 엄청난 미소녀를 보았다고 하는 점에서 부원 여자 모두가 질투를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들이 남자가 여자로 변한 모습에 더 질투를 느끼는 것은 본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여자는 여자가 만들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환상이나 욕망 속에서 탄생하는 여자라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유혹에 대하여>에서도 언급한 것이나 또는 수많은 TS 계통 작품 내지 소재가 등장하는 작품 역시 본래의 여자보다 남자가 흉내 내지 만들어낸 여자가 더 남자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것은 여자가 만든 여자는 여자의 입장에서의 여자이지만, 남자가 만든 여자는 남자가 원하는 여자인 것이다. 결국 아자젤의 성을 바꾸는 도구는 영구봉인이 된다. 만약 키바가 남자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잇세이는 키바에게 가장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니 원래 여자인 부원들도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금이 가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의 등장은 잇세이가 감기에 걸렸다는 것이다. 이벤트 요소에서 여자부원들이 모두(현실에서 존재하지 않고 마치 야한 비디오에서 등장할 것 같은) 간호사 의상을 입고 잇세이를 병간호를 해주나, 문제는 간호의 방법이다.

 

환자는 편하게 계속 쉬게 해주는 것이 의무인데, 달라붙는 것은 둘째 치고 영양식이 문제다. 왠지 알 수 없는 것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는데, 사람 키만 한 크기인 주사와 거대한 주사바늘은 사람을 쇼크로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당연히 잇세이가 그런 주사바늘에 찔리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고, 이상한 기운이 맴도는 음식도 먹는 것도 당연하다. 덕분에 잇세이는 감기가 아니라 몸살로 다시 드러눕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늘 망신살이만 하는 것은 아니다. 탄닌이란 용왕에게 수련을 받은 잇세이는 왜만한 중급 아니 고급 악마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에 처음으로 큰 패배감을 서로 맛보게 해주었던 피닉스 삼남이 계속 은둔형 폐인처럼 있자, 잇세이는 그 근성을 고치기 위해 피닉스 저택으로 간다.

 

잇세이를 보자 겁을 먹는 피닉스의 삼남, 그러나 리아스의 가슴에 집착하는 피닉스, 이 엉성하고 라이벌의식이 강한 콤비는 엉큼한 망상을 즐기기 위해 오컬트부 여자부원들이 목욕하고 있는 온천에 침투하는 모습이 나온다. 찌찌 드레곤은 역시 찌지에 모든 것을 바치는 남자이기에 피닉스 삼남의 욕망을 용서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존재하는 성적인 리비도인가? 아니면 삶의 목표를 제시하는 에로스인가? 이 엉성하고 엉큼한 콤비는 라이벌의식을 불태우면서 한편으로 뭔가 닮았다는 생각만 든다.

 

13권이 외전으로 나온 만큼 그동안 조용히 지내던 신룡 오피스의 이야기가 꾸려진다. 오피스는 남녀 성별에서 늙고 어리고의 차이가 없다. 오직 무에 가까운 한 없이 공허한 존재이다. 그런 오피스가 무한의 세월을 나와 유한의 공간과 시간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런 만큼 오피스 역시 현실에서 살아가야 할 존재이나, 그(녀)가 느끼는 세상은 그저 무덤덤하게 보인다. 하지만 잇세이와 적룡제 덕분에 호기심이 발동되어 그저 쿨데레 느낌이 나는 어린 소녀로 나온다. 계속 잇세이와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해야 했다.

 

매일 같은 옷만 입힐 수가 없으니 잇세이는 리아스와 같이 백화점 쇼핑을 나가는데, 이래저래 돌다가 사람들과 마주치고, 오피스는 그 와중에 길을 잃고 아동보호대기실에 기다린다. 이때 “머리가 붉고 가슴이 큰 어머니. 음흉한 얼굴을 한 아버지, 가슴이 평범한 정도에 긴 금발인 언니, 바보 같은 얼굴에 힘이 세 보이는 언니, 자칭 천사인 언니.” 쉴 새도 없이 잇세이와 리아스 그리고 오컬트부원과 학생회 사람들을 찾는 방송이 나온다. 오피스의 눈에는 리아스는 엄마, 잇세이는 아빠처럼 보였다. 아니 다시 검은 머리에 가슴이 큰 어머니에서 오피스에게 아케노 역시 엄마라고 여겼다.

 

너무 공허한 것인지 순수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나, 오피스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말하는 오피스의 모습은 너무 오피스 같았다. 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리아스와 잇세이라고 말하는 오피스에서 리아스는 무척이나 행복해 한다. 사람마다 가치 아니 악마라고 해도 인격을 가지고 있으니, 적어도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계속 있으면서 이래저래 시간을 보내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그것은 가족과 친구, 연인처럼 말이다. 가족과 같은 리아스와 잇세이의 하루는 무엇보다 깨어지기 싫은 순간들이다. 그것은 비단 작품 내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 작품을 보는 우리 같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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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에반게리온: Q (30p 화보집) - 디지팩 + 화보집 + 아웃박스
안노 히데아키 감독, 하야시바라 메구미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다. 위대한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만들고 그것을 비극 시로 만든 것은 소포클레스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을 보면 마치 이번 이카리 신지의 앞에서 나타나게 된다. 독일 사회경제학자 마르크스가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에 대하여 “역사적 사건은 반복되는데,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끝난다.”는 말을 남긴다. 그 의미는 바로 신지가 저지른 그 비극의 씨앗이 이미 한 번은 비극으로 나타났는데, 한 번은 희극으로 끝이 난다로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를 보면서 내가 판단한 내용은 ‘You Can (not) Advance’라는 명제에서 신지가 과연 성장했는가? 혹은 하지 않았는가? 라는 변증법적인 질문이다. 이와 반대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에서는 ‘You are (not) alone’에서 결국 신지의 결말은 alone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Advance로 보였으나 그것이 결국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You Can not Advance’라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것은 바로 신지에 의한 서드 임펙트의 시행이다.

  

 

미사토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레이가 사도에게 잡혀먹어 중간에서 고민하던 신지에게 자신의 길을 가라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신지에 대한 경멸의 눈빛을 감추지 못해 증오가 표출된 정도이다. 그것은 미사토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까지 신지와 레이, 그리고 초호기의 비밀을 몰랐기 때문이다. 신지에게 초호기를 비롯하여 에바에 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에바 자체가 신지의 어머니인 유이의 몸과 영혼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에바와 달리 유일하게 초호기만 조종석이 LCL 용액으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에바 시리즈는 LCL용액이 아니라 뇌파와 에바하고 연결하여 신경조직을 연결한다. 즉 <신세기 에반게리온>부터 시작하여 <신극장판 에반게리온>까지 사이버펑크 장르 유효성은 이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신지가 서드 임팩트의 원인과 결과이다. 신지와 초호기의 비밀을 아는 자는 이카리 사령관, 후유츠키 부사령관 그리고 리츠코 박사일 것이다. 그러나 서드 임팩트가 일어난 후 14년이 지나자 리츠코는 이카리 사령관을 떠나 Wille의 미사토와 합류한다. 즉, 리츠코 박사는 초호기와 신지의 비밀을 알았다고 해도 이카리 사령관이 무엇을 꾸미는지 알 수 없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에서도 나오는 장면이고, 먼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온 장면 중에서 레이가 영호기 테스트 중에 폭주를 일으키는 소동에서 리츠코 박사는 이카리 사령관이 레이를 소중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질투감을 느끼는 부분이 나온다. 심지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자기 어머니인 레이코에 대한 질투심과 그것에 대한 모방심리 내지 보복심리로서 이카리 사령관과 리츠코는 불륜 관계를 맺는다. 그런 리츠코가 미사토의 Wille에 갔다는 사실은 기존의 에반게리온에 대한 관념을 모두 흔드는 것과 같다. 

 

신지가 우선 에바 초호기를 타고 레이를 구하는 순간 서드 임팩트로 이어지는 것은 결국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고,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이카리 사령관과 후유츠키 부사령관이었다. 신지가 신으로 가는 것에서 레이라는 존재가 왜 나타나는가? 라는 의문에서 바로 고대 그리스 위대인 시인인 호메로스와 그리고 위대한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신화를 되돌릴 수밖에 없다. 먼저 오이디푸스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에게 버림받고, 추후 다른 나라의 왕의 양자로 들어가 신탁에서 아버지를 죽인다고 듣기에 자신을 양자로 받아주던 나라에서 떠난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느 남자들과 시비가 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남자들의 일행 모두 때려죽인다. 그런 후에 테베이란 나라에서 심한 재앙에 걸렸는데, 몸은 사자 머리는 인간인 스핑크스가 인간을 괴롭혀서 만약 스핑크스의 재앙을 막는 자에게 테베의 왕과 더불어 이오카스테라는 미모의 여왕과 결혼해준다는 엄청난 조건이 따랐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 스핑크스를 처단하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놓는다. 게다가 지혜롭고 용감한 오이디푸스는 덕까지 겸비하여 정치적으로 매우 우수한 왕이었다.

 

 

어느 날 테베이란 국가가 자꾸 재앙이 걸리고, 흉년까지 겹치어 백성들이 몹시 고통을 받았는데, 이때 신탁을 받은 결과 어느 누군가가 천륜을 어기어 신이 노여움을 샀다고 한다. 만약 그 천륜을 어긴 자로 하여금 죗값을 받지 않으면 그 저주는 영원히 이어지게 되어 추후 테베이란 왕국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오이디푸스 왕은 그 저주의 원인을 찾다가 그 원흉이 바로 자신이란 사실을 안다.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난 일행은 아버지 라이오스와 호위병이고, 여왕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였다.

 

 

이것이 탄로 나자 여왕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칼로 찔러 맹인이 되다가 영웅 테세우스의 인도 아래 숨을 거둔다. 하지만 저주는 남아 오이디푸스의 아들 2명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 죽고, 그 여동생인 안티고네 역시 오빠의 시체를 장을 치르려다 죽게 된다. 신지의 죄는 바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윤리인 근친상간이란 죄를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인간의 문명에는 자연적인 흐름을 거슬려 그것을 파괴하는 것에서 문화는 시작된다. 자연의 존재를 문화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다. 인간의 노동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 문명을 만든 주체적 에너지다.

 

 

그런데 그 노동이란 것은 현재 국가경제체계처럼 자본주의체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농경사회라도 존재했다. 농경사회는 중앙집권화를 이룬 왕권을 중시한 구체제적인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임금과 아버지는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임금과 아버지의 옆에 있는 어머니 내지 여왕을 노리는 것은 무서운 죄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신지가 저지른 죄가 바로 근친상간의 시도라는 점이다. 아야나미 레이가 어머니의 분신조차 몰랐으나, 그래도 2사람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이끌린다. 신지의 초호기 탑승도 그러하나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도 이카리 사령관이 다른 인간들은 에바초호기에 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LCL이란 용액이 어머니의 양수라는 점에서 신지는 에바 초호기가 곧 어머니의 자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에바의 에너지원은 물론 코어의 핵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을 무한대로 이끌어내는 것은 에바와 조종사와의 싱크로 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에바 초호기 S2기관을 가진 이유는 에바초호기와의 싱크로가 400%이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도 필요 이상의 싱크로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생존본능 내지 투쟁본능과 같은 무의식적인 기질이 결국 에바초호기에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지가 에바초호기와 높은 싱크로를 보여주어도 그것은 자궁 안에 있는 아들일 뿐이지 레이처럼 물리적인 육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신지가 레이에게 손을 뻗어 직접적인 성적 행위가 없더라도 여성의 육체를 지닌 어머니의 클론인 레이를 원했다는 것이다. 레이와 신지가 비로소 손을 잡아 하나가 되려는 순간 카오루가 보낸 롱기누스의 창에 의해 서드 임팩트가 불완전하게 끝이 난다.하지만 적어도 중요한 점은 신지가 하던 것은 인간이 문명사회에 의해 진행되어온 근친상간 발상을 무의식적으로 시도한 것과 인간의 욕망이 신화로서 구전되어도 그 신화적인 욕망을 하나의 사실로 만드는 순간, 신화는 현실의 터부에서 벗어나는 계율을 파괴한 것이다.

 

 

그래서 신지는 꿈의 세계에서 인정되는 신화를 현실에서 실재로 반영하려는 것이 곧 신화의 파괴, 질서의 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그 질서의 파괴로 인해 기존 세계관은 파괴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오이디푸스왕과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관계가 결국 테베의 붕괴로 이어지려 했다. 신지의 그런 행위가 결국 14년 후에 깨어날 때 미사토를 비롯한 전 NERV 요원들에게 증오와 분노를 산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미사토가 신지에 대해 증오를 하더라도 그 증오가 반드시 신지를 세상에서 말살해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애증이 담긴 눈빛이었다. 신지의 목에 폭탄을 달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는데, 미사토는 새로운 복제 레이가 조종하는 “아담스의 그릇”에게 구출당한 신지를 그대로 보낸다.

 

 

일부러 멀리까지 가는 것을 보고 스위치를 눌러 굳이 신지를 죽일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신지에게 에바에 타지 말라고 권고한다. 미사토가 신지와 대립적인 관계인 NERV로 간다고 해서 미사토 자체가 신지에 대한 절대적 적대감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들은 아스카로 통해 알 수 있다. 아스카는 신지를 처음 우주에서 만날 때 “빠가 신지!”라고 한다. 정말 적이라고 여겼다면 그런 호칭을 아스카가 사용할 이유는 없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적 사건에서 서드 임팩트는 비극으로 끝났으나 포스 임팩트는 희극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변증법적인 논리다.

 

 

카오루의 역할에서 만약 그가 희생이란 극적플롯이 없었다면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의 개별적 역사적 사건에서 비극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만약 되풀이 된다면 그것은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End of Eva>에서의 나오코 박사와 리츠코 박사의 최후처럼 될 뿐이다. 나오코 박사는 어린 레이를 교살한 죄책감에 자살하고, 리츠코는 레이에게 질투심을 느껴 이카리 사령관 앞에서 NERV 본부를 자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카리 사령관에게 살해당한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는 리츠코는 미사토와 같이 있음으로서 어머니와 같은 비극으로 피한다.

 

 

말 그대로 한 번의 비극이 두 번의 비극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작품에서 조금 특이한 점에서 인류보완에 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조금 나중에 다룰 부분이나, 인류가 리린이 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게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선 유이는 인간이 진화하여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점에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예고편에 나오는 수많은 에바들은 결국 서드 임팩트로 통해 인류가 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진화하지 않은 것이 바로 리린이 아닐까 한다. 본래의 릴리스의 주변을 보면 수많은 에바의 유해가 있다. 그것은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진화한 것이 아니라 일부만 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서 리린의 왕은 이카리 사령관으로 나온다. 그가 한 것은 신의 죽음이다. 본래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기존 관념의 틀을 깨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해체주의 미학으로서 당초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지의 어머니와 초호기에 대한 비밀을 풀어간 것은 미사토가 추적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알게 했다면, 이번에는 후유츠키 사령관이 직접 신지에게 설명하여 그 비밀을 폭로한 것이다. 곧 작품의 진행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알게 만들어 작품 내에서 주인공에게 비밀이어야 하는 것이 이미 비밀이 아니게 만든 점이다.

 

 

그런 역할을 후유츠키가 맡고, 그것을 하게 한 것은 이카리 사령관의 인격의 불안정이다. 이카리 사령관은 신지가 NERV에 오고 난 뒤로 모든 시나리오를 관여하고 유도한다. 심지어 신지의 탈출과 더불어 카오루의 죽음까지 말이다. 카오루를 죽이게 금 유도하고, 그 카오루의 동일한 존재인 사도까지 죽이게 유도한다. 네메시스의 등장과 분더의 출동, 롱기누스 창과 더불어 한 짝의 창을 같이 뽑아야 하나, 알고 보니 롱기누스의 창만 2개만 있었다. 덕분에 신지는 그것이 어느 창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임을 부정하기 위해 혼자 뽑는 순간 카오루는 제1사도에서 제13사도 되어버린다.

  

이때 기존 작품과 다른 점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A에서는 인류보완계획에 대해 죽음의 욕망이 아닌 삶의 욕망인 에로스적인 요소를 조금 가미하여 신지가 지금의 세상이 다소 힘들어도 그래도 살만하다고 여기고, <End of Eva>에서는 모든 진화의 최종단계는 타나토스, 즉 죽음의 욕망으로 본다. 제레의 욕망은 바로 타나토스적인 죽음의 욕망이다. 하지만 이카리 사령관은 제레와 같은 시나리오를 가지기보단 유이가 가진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후유츠키와 같이 행동을 한다.

 

 

이미 죽은 유이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자연의 모든 섭리, 혹은 그 섭리가 신이란 관념적 존재로 만들었다면 이카리 사령관은 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도구가 바로 에바 시리즈다. 에바로 통해 인간을 진화하고 신을 넘어볼 수 있는 위협성에서 이카리 사령관은 신을 죽이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신을 죽인 남자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신을 정말 죽인 것이 아니라 신이란 존재를 인간의 신화적 욕망에 의해 탄생했기에 그 인간이 가진 관념을 바꾸는 것이다. 리린의 왕이란 것에서 모든 권력적 힘이 이카리 사령관에게 있고, 그의 책략을 모두를 기만하고 속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른바 프로파간다라고 하여 군중심리나 유도로서 이카리 사령관은 자신만의 신화를 위해 모든 인물을 하나의 도구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희생되는 제물은 당연히 자신의 아들인 신지이다. 서드 임팩트와 더불어 포스 임팩트를 일으킬 수 있는 인간은 신지만 가능했다. 신화적 욕망에 의해 제물로 바치면 제의적 구조에 의해 신화는 은폐로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예고편에서 신의 모습을 따라한 에바가 계속 나온다는 것은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은 별도의 세계관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주제는 ‘You Can (Not) Redo’이다. 이미 한 번의 비극을 겪은 신지가 다시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 결론은 다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 제시될 뿐이다. 작품을 감사하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신지의 손에 들린 워크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선 단지 타인과의 소통을 원하지 않기에 귀를 닫아주는 도구에 불과한 워크맨이 계속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주요한 아이템으로 나온다. 그것은 아버지 이카리 사령관과 아들인 신지를 유일하게 이어주는 도구다.

 

 

신지가 벌을 받은 이유와 죄를 지은 이유는 단순히 그가 오이디푸스왕이 저지른 신화에서 이름을 따온 오이디푸스콤플렉스만이 아니라, 레이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와 다름없다는 점과 같다. 신지가 왜 초호기와 싱크로가 0.00%인 이유는 바로 신지는 어머니를 따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권위에 따른 것이다. 마음속 깊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실생활에선 서로 꺼리는 모습이 나오나, 그 워크맨은 바로 이카리 사령관이 젊은 시절에 자주 사용한 물건이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신지에게 전해준 아버지의 물건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오로지 워크맨으로 이어지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아야나미 레이가 워크맨을 잡고 신지와 결합하려한 점에서 신지가 아버지와 비슷한 인간이 되어 감을 보여주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도 역시 워크맨은 나온다. 워크맨을 잡던 신지는 수리 이후 계속 이용하나 에바13호기 파괴 이후 그 워크맨을 버리고 가는 장면이 나오고, 그 모습을 복제 레이가 본다. 아마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으나 레이가 그 워크맨을 줍는 것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의 레이는 완벽한 인형으로 나오나, 마지막에는 그 인형적 모습에서 탈피한다.

 

 

NERV 본부와 교신이 되지 않아 명령체계를 따르지 못하고, 그런다고 생존적인 조건에서 아스카와 신지하고 같이 활동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전개에서 가장 활약상이 뛰어난 인물은 미사토와 아스카다. 초반에 신지는 주인공의 역할보단 그저 보조에 불과하고, 전체 1/3에선 미사토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런 후에 신지가 탈출하여 2/3은 카오루와 관계, 최후 1/3은 NERV와 Wille의 전투로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기존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와 파>는 신지가 주인공으로 되어 신지를 바라보는 작품인물이 미사토였다면, 이번에는 미사토가 신지에게 바라보고 있음으로 나온다. 

 

그 외적으로 캐릭터를 보면 아스카의 설정이 돋보인다. 고양이귀를 상징하는 빵모자와 모자 앞면에 2개의 버튼이 달려있다. 하나는 해골무늬에 한쪽 눈을 가리는데, 그것은 자신의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 가지의 색이다. Blue, Red, White 이것은 분명 프랑스 국기를 의미한다. 실제로 그런 비슷한 문양을 프랑스에서 사용하고, 특히 1789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에서 프랑스시민이 모두 달고 다닌 마크와 유사하다. 딱히 프랑스대혁명과 아스카에게 프랑스 국기의 의미인 자유-Blue, 평등-White, 박애-Red의 요소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나, 캐릭터에 대한 아이템은 기호학적으로 의미가 있음은 분명하다.

 

 

영상연출에서 돋보이는 것은 우선 초반의 우주에서의 신지와 초호기의 수거이다. 로켓엔진이 분사하는 모습은 여전히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처럼 매우 세심한 작업이 보인다는 점과 마치 실제 우주에서 물체가 유영하는 듯한 연출을 보이려 했다는 점이다. 기억이 또 남는 장면은 신지가 심리적 불안에 의해 괴로워하는 점에서 신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어지럽게 화상이 떨리는 부분과 신지를 중심으로 카메라의 회전으로 왼쪽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walking-outside라고 하며,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그남자와 그여자의 사정>에서 사용한 방법이다.

 

 

또 다른 기법으로 서로 다른 화면이 겹치고 겹치게 보이는 프로몽타주 기법이다. 이것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나오고, TVA 25~26회에서 신지의 얼굴에서 다른 영상이 계속 이래저래 바뀌는 모습이 나오는 점에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통해 이미지의 연출효과는 좋아졌으나 그 근본적 연출이나 혹은 시나리오에서 보이는 작품세계관은 기존 가이낙스로부터 크게 탈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모든 생명의 진화는 멸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은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새로운 생명이 존재하려면 기존의 모든 생명은 멸망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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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는 순간 경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인류학 내지 사회학,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제도에 대한 서적들을 읽어오면서 모든 뿌리가 루소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parole과 langue라는 언어학의 요소에서도 루소의 연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놀라웠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언어학을 가르치고, 그의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강의내용을 모아 만든 <일반언어학> 이전에 언어학에 대한 연구부분에서 이미 루소가 상당히 연구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루소의 서적에서 <사회계약론>, <참회록>,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식물사랑>,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아직까지 읽지 못한 도서는 <인간의 언어기원론>과 <신 엘로이즈> 그리고 이번에 읽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물론 국내외적으로 루소에 대한 연구서적 등은 많은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루소 그 자신이 저술한 도서 역시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이다. 루소의 서적을 펼치면서 지금 우리 사회가 21세기인데도 루소가 저술한 18세기에 비교하여 전혀 떨어지지 않은 내용이었다. 게다가 현대철학자의 서적 중에서도 루소의 사상이 상당히 일치하거나 유사한 내용을 가진 도서가 많았다. 가령 네오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도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중에 하나인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인생이 삶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인간 그 자신에게 잃어가는 것이 많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욕심으로 환경오염과 더불어 쾌적한 환경을 잃게 되고,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까지 탁해진다고 했다.

 

소유보다는 존재로서의 인정이 오히려 인간에게 큰 소유가 된다는 점이다. 가령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인간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의식주이다. 하지만 옷과 음식, 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자연환경이다. 우리 인간은 대기 중의 산소가 없으면 수 분만에 질식사를 할 것이고, 물이 없다면 며칠도 못 가서 치명적인 상태가 될 것이다. 맑은 공기와 물은 인간이 지금 당장 필요한 소중한 자연자원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나친 욕심과 탐욕은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 스스로를 파괴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프랑크푸르트학파 중의 하나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처럼 인간의 문명이 자연을 파괴하면, 결국 자연조차 파괴하지 못할 경우 인간은 인간을 파괴한다고 한다.

 

가령 우리 인간에 파괴는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성이란 고유영역이다. 인간성이란 인간의 이성과 판단도 있으나, 자연적인 부분도 있다. 인간의 자연적인 부분이 자연환경의 파괴로 인해 인간 그 고유한 자연마저 파괴당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착취가 결국 끝에 이르러 인간에 대한 착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 날에도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착취로 물든 불량한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가? 생계를 위해 자유로운 시간과 의지도 없고, 지나친 개발로 인해 숲이 사라지고 새들을 노래하지 못한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다.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의 감정은 점점 사막화되어 가고, 타인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 대신 오히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20세기와 21세기의 철학자들이 고민하고 있다면 루소는 이미 18세기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루소는 볼테르, 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라고 판단한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조차도 루소와 닮아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을 무렵에 나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출판사 길, 강신준 교수 번역> 1권을 다시 읽고 있었다. 읽으면서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일들이 19세기 유럽에 나온다고 마르크스가 말한다. 그것은 하루 12~18시간의 노동시간과 더불어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겨우 2시간 내지 3시간만 잠만 재우고 2일 연속으로 일을 해야 하는 가련한 어린 소녀와 소년의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이게 진짜 지옥이라 여겼다.

 

단순히 일만 한다는 것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나도 대학교 수업과목 중에서 환경위생학이나 보건위생학과 같은 것이 있었다. 환경보건위생에서 일반적으로 사람의 가정환경과 교육환경 뿐만 아니라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 문제점에서 가장 심한 것은 작업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안전문제나 위생문제다. 인간은 물과 공기의 공급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더운 작업장에서 계속 장시간 노동을 하게 되면 건강상으로 매우 좋지 못하다. 공기 중의 산소가 부족하여 졸도할 수 있거나 좁은 공간에 열기로 열사병을 일으킬 수 있으며, 먼지나 유해한 가스등은 기관지, 폐, 호흡기 계통에 큰 위험을 준다.

 

심지어 굴뚝청소를 하는 아이들은 각종 염증과 암으로 시달려야 했고, 중금속을 다루는 사람들은 신경마비, 근골계 장애, 순환기 장애, 혈액질환 등과 병에 시달려야 했다. 예전에 한국에서도 14세 중학생인 문송면 군이 수은공장에서 일하다가 몇 개월 후 수은 중독으로 인해 비참하게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인간이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노동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것은 분명 부도덕한 일이다. 그런 것은 자유주의 철학자인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다룬 것처럼 생계로 인해 일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했다.

 

루소는 그런 자유라는 인간이 본래 가져야 할 권리와 의무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 심지어 우리 헌법조차도 인용되고 있는 <사회계약론> 역시 자유를 위한 연구도서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나, 태어나면서 사회가 존재하기에 억압을 받는다. 하지만 그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합의가 필요하고, 그런 합의를 위해 일반의지를 수반한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있는 곳은 루소에겐 오로지 자연이었다. 자연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문명의 잔재를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는 장소였다. 문명과 자연, 문명은 인간에게 풍요와 부를 안겨주었다. 한편으로 그 풍요와 부는 모두가 아닌 일부에게 돌아갔다.

 

이런 문제가 착취와 궁핍을 부르고, 가난하고 힘이 약한 사람들은 평생 자손대대 그 업을 물려받아 희망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런 문제를 미리 지적한 사람은 루소였고, 그것은 추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 통해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읽으면 마르크스는 루소에 대해 그렇게까지 평가하지 않으나 적어도 프랑스의 공화국적인 요소를 존중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폴레옹 3세인 루이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부와 권력을 노리고 있을 때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인 자유, 평등, 박애는 보병, 포병, 기병으로 무참하게 밟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해도 마르크스는 분명 루소에게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본래 마르크스 헤겔 청년파이기 전에 자유주의 철학을 많이 받아들였고, 또한 칸트나 피히테 같은 철학자의 책들도 많이 읽었다. 그 중에 루소의 책이 없을 리가 없다. 그리고 프랑스대혁명이 1789년 이후 1830년과 1848년에 큰 핵심적 사상은 루소의 것이다. 1871년 프랑스 파리코뮌의 경우 마르크스, 생시몽, 푸리에, 오원 같은 다양한 사상가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프랑스에서 루소의 사상은 여전히 큰 획을 이은 것이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이런 혁명적이고, 추후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만들기 위한 초석으로 다져진 도서다. 심지어 인류학 영역도 마찬가지다.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은 2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선천적인 것으로 하나는 후천적인 것으로 말이다. 선천적인 것은 성별, 나이, 인종 등과 같이 인간 고유의 자연적인 차이라면 후천적인 것은 사회적·정치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다. 문제는 선천적인 불평등에 비해 후천적인 불평등이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다른 점을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인간의 행복은 그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것인데, 그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저마다 남을 주목하고, 자신도 남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재능은 물론 다르다. 그 능력과 재능이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도 있으며, 자연인은 본래 자신의 그 자체를 보여주나, 사회인은 주변 사람들이나 세견에 따라 자신을 맞추어 나간다. 그런 요소에서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된다.

 

자연주의 철학자인 루소에게 <에밀>을 보게 되면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고, 인위적으로 가르치거나 무리하게 바꿔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그런 점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지나친 교육이 인간 자체에게 불평등을 주는 것이 된다고 했다. 이미 21세기에는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왔다. 오히려 니체처럼 불평등을 불평등이라 인정하는 것이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불평등 요소를 루소가 지적한데로 그것 자체가 하나의 평등한 법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도 문제다.

 

인간의 빈부격차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나 그것을 하나의 제도적인 범주에서 당연성으로 가는 것이 문제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유를 늘리는 하나의 방편이다. 프랑스대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는 진정한 자유는 우리만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가 있어야 가능하고, 빵이 고루고루 들어가야 자유를 얻을 수가 있었다 한다. 그런 점에서 롤즈의 <정의론> 역시 경제적 조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개인에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자유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리석게도 굶어죽을 자유 내지 비참하게 일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방종한 오만인 것이다. 루소는 프랑스대혁명 이전에 죽었으나, 그의 사상은 프랑스대혁명의 상징이었다. 그의 호칭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런 루소의 계몽주의 철학은 칸트의 관념철학에도 영향을 주고, 칸트의 철학에서도 계몽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일깨워야하는 것이라고 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제네바 시민에게 보내는 글이 있다.

“지배받는데 익숙해진 국민은 이미 지배자 없이 지낼 수 없게 되지요. 만일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들은 자유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들은 참된 자유와 반대되는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므로, 혁명을 한다고 해도 거의 언제나 자기들의 족쇄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버릴 뿐인 선동가들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지요.”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당통의 죽음과 테르미도르 반동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당시 프랑스국민들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유의지가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로 가게 하였고, 결국 공화국은 군주제로 변해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점은 인간 스스로가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인간은 타인을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해 타인에게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런 문구가 나오지 않은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으로” 말이다. 루소의 이런 선견지명은 아직도 두 번이 아니라 연속적 비극이 소극을 지나 잔학한 제노사이드로 나타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불평등에서 시작된 것이다. 인간에게 불평등은 피할 수 없는 업보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자연주의 철학자인 루소가 왜 사회계약으로 통해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인 요건들을 적어나가겠는가? 그것은 인간이 불평등이 항상 존재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인간에게 서로간의 합의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인 <학술과 예술에 대하여>에서도 나온 내용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연장선상이란 부분을 느끼게 해주는 문구가 있다.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농사를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과 기술을 가진 사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민들은 더 많은 노동과 착취를 당해야 했다. 그 결과 자신이 생산한 농산품을 제대로 먹지도 못해 비참한 생활에 고통 받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불평등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설파했던 루소는 본인 스스로도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국가권력(루이 16세 왕정과 정치관료)에 의해 평생 도망쳐야 했다. 그런 세월에 루소는 누군가 자신을 헤치는 것에서 두려움을 받기보단 자신을 헤칠 것이란 망상에서 괴로워하며 노년을 마감한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계몽주의 사상가 덕분에 우리는 조금 더 낳은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에게 여전히 유효하며,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현재도 미래에도 살아가는 우리에게 꾸준히 노크를 두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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