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Salo Or 120 Days Of Sodom (살로, 소돔의 120일) (Criterion Collection) (한글무자막)(Blu-ray) (1975)
Criterion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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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가 저술한 <소돔의 120일>에서와 달리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기본적으로 가학성을 띄고 있으나, 그 주제가 다른 것을 보았다. 기본적으로 <소돔의 120일>은 사드가 1784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약 37일 동안 혼자 깨알 같은 글씨로 소설을 만든 것이라면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사드가 저술한 도서를 영화로 각본하여 만든 것이다.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제작한 <살로소돔의 120일>은 분명 <소돔의 120일>에서 가지고 온 모티브나 등장인물 요소에서 유사한 점은 있으나 다른 점도 있다.

 

마장의 역할, 즉 4인의 무자비한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뽑은 성기가 아주 큰 남성이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선 도락자를 위해 선발이라면,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파시스트의 부하라는 점이다. 총을 들고 있어서 억울하게 잡힌 사람들에게 위협적 대상이었으며, 때로는 4인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기도 한다. 아니 그들도 즐기기도 한다. 소돔이란 것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부여받은 성적 윤리를 배신한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게이나 레즈비언에 대한 다소의 거부감이 있다고 하여도 그들 역시 인간적 권리를 부여 받을 자격이 그들을 탓할 수 없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과 관계없이 DNA, 즉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본인들도 힘겨워 하는 점이다. 적어도 그들은 타인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악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 등장한 남색을 즐기는 4인방은 자기만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모든 것에 대한 생명력을 인정하기보단 그 생명력을 부정하는 신적 모독에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가톨릭 내지 프로테스탄트도 아니기에 딱히 무엇이라 말하기가 어려우나 적어도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국 정서적으로도 <소돔의 120일>과 <살로소돔의 120일>은 금기를 위반한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20대 아름다운 여성, 그들은 남자 4인방들의 딸들로 그 딸들은 그 상대 남자에 대한 아내로 삼아진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근친상간에 남색까지 인정되므로 어느 사회에서 금기로 다루던 인간의 윤리를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민족과 국가에서는 딸이 아버지와 혹은 아들이 어머니와 성적관계를 갖는 것이 허용된다고 하나 보편적으로 근친상간은 크나큰 죄악이 성립된다. 동성연애라도 고대그리스도 <소돔의 120일>처럼 하지 않는다.

 

에로스란 단어가 사실은 남녀 간의 사랑보단 오히려 늙은 현학적인 남자와 그 남자를 흠모하는 젊은 소년이 같이 자리를 하는 것이다. 고대그리스 사회에서는 동성연애가 하나의 문화적인 권력의 유지인 셈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에로스의 위치는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바뀌고 또한, 에로스는 1968년 프랑스 파리의 5월 혁명에선 하나의 생명력으로 폭발한다.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란 서적을 봐도 그렇지만, 결국 에로스는 생명을 이어가려고 하는 생존욕구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에로스적인 욕구는 인간의 번식에 대한 요건도 중요하다. 생명의 연계성에서 에로스야 말로 우리 인류는 보존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Libido 즉 무의식적인 성적 에너지가 원천적이라고 하여도 에로스란 생명을 이어가게 한다. 하지만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그 에로스라는 것을 모조리 부정한다. 그저 모든 생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파괴의 향연을 즐기는 것이다. <소돔의 120일>나 <살로소돔의 120일>에서 귀족 역할을 한 포악한 자는 역시 어머니를 저주한다. 자신을 이 세상에 나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큰 죄고, 자신의 생명력은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적관계로 통한 성적쾌락으로 만족했기에 보상은 충분하다는 사실이다.따라서 이미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딸을 창부보다 못한 대우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런 4인의 포악한 행위를 4명의 늙은 창부의 이야기로 통해 몰고 간다.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1부가 희생자들의 모아 저택에 가는 것과 2부는 변태적 성욕, 3부는 분비물과 고문에 대한 이야기, 4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소돔의 120일>은 성적쾌락을 위해 1부에서 4부까지를 다룬다면, <살로소돔의 120일>은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그들은 파시스트에 대한 비판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남색을 하고 어린 소녀의 순결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분뇨를 먹이거나 자기 얼굴에 소변을 뿌리라는 이상한 도락에서 벗어나 채찍질과 가학적인 폭력, 그리고 4부에서 보인 육체적인 가해는 영화에서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은 당시 루이16세 즉 앙시앵 레짐이란 구체제 속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감옥의 역사에서 처음 나오는 인물은 다미엥이다. 다미엥은 주군인 루이15세를 살해하려다 체포된 하급관리로 그의 사형은 물리적인 신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왕의 신성성을 내세워야 한다.

 

다미엥의 죽음은 그렇게 쉽지 않다. 상처를 내고 수은 같은 것을 붓고, 최후에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다. 당시 프랑스에도 매우 잔혹한 처벌방법이 있었다. 사드의 원작을 봐도 4부에 나온 잔혹한 고문과 처형방법은 프랑스에서 기존에 있던 방법이다. 4부를 보면 사람을 잔혹하게 죽여 성욕을 해결하는 미치광이 도락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그 4인방은 희생자를 대상으로 눈을 도려내거나 손톱과 발톱을 뽑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며, 최후에 팔과 다리를 자른다.

 

그들이 베어버린 사람의 몸이란 그저 자신들이 자연적으로 물러 받은 생명에 대한 고귀함을 부정하고, 오히려 자연적이란 죽음을 선사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로스가 아닌 타나토스, <소돔의 120일>의 미학적 요소는 바로 타나토스의 극치이다. 파괴와 죽음의 욕망을 희생자에게 전가하여 성적 쾌락을 느낀다. 물론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도 고문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서 4인방은 성적욕망을 느낀다. 법원장은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만든 여자가 형을 집행 받는 순간 사정을 한다고 한다.

 

결국 생명을 부수는 것으로 성적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파괴적이고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쾌락을 추구함이 <소돔의 120일>이다. 그렇지만 <살로소돔의 120일>은 다르다. 그런 요소를 쾌락으로 즐기는 것도 있으나 오히려 파괴와 변태적인 가학으로 통해 파시스트의 미학을 추구한 점이다. 폭력의 미학이란 결국 파시스트가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파시스트이면서 본인이 정의로운 인간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폭력의 미학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정의의 미학으로 여길 것이다.

 

오히려 폭력으로 실행되는 의지가 오히려 정의라는 명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폭력의 이면에는 진실의 은폐와 권력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렇다. 파시스트가 추구하는 폭력성에서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누가 직접 고문과 살해했는지 모르나, 아마 4인방이 직접 할 가능성이 높으나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마장을 비롯한 파시스트 군대가 직접 그 행위를 돕는다. 그 의미는 그들의 폭력성에서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구조가 폭력의 무질서야 말로 오히려 질서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정치적 의미를 목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다. 단지 정치적인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도락자 내지 미치광이 변태들이 성직자, 귀족, 상인들과 같이 당대 상류계층이란 것이다.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에서 당시 사드가 워낙 방탕한 생활을 공개적으로 즐긴 것을 생각해보면 사드는 금욕주의를 내세우며 뒤에서 변태적 성욕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을 비꼬는 것이다. 영화는 상류계층에 대한 비꼬는 것보단 오히려 파시스트들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마지막에 왜 살육의 현장을 망원경으로 보면서 즐거워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폭력을 일으키는 자들이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면 조장하는 것이다. 폭력이어야 말로 오히려 정치적으로 정의를 두는 것이 파시즘에서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정치적인 수단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공포이다. 상대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거나 혹은 폭력을 가해 공포의 도가니로 만드는 것만큼 큰 쾌락이 없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통한 공포로서 인간의 통치에 대해 합리적으로 만들며, 그 공포의 정치로 지배할 수 있다는 하나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사디즘이란 성적 쾌락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타나토스의 미학이라면,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우월주의를 폭력이란 수단으로 보여주는 과정이다. 왠지 보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 퍼지는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본다. 폭력이 정의라고 믿는 하나의 광기에서 그것이 곧 사회적 미학으로 이어지는 것이 파시스트적 요소다. 가십거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대한 각종 폭력적 수단(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이 용인되기에 저런 영화가 지금 봐도 다소 공감되었다.

 

영화가 1975년에 제작된 점에서 최신영화와 비교하여 화질이나 카메라 앵글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해도 영화배우의 능력에서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소돔의 120일>의 1부에서 이야기꾼으로 나오는 뒤클로 역을 바까리 부인이 맡았는데, 그녀를 비롯한 이야기꾼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이야기를 하고 춤도 춘다. 하나의 음률로 통해 마치 뮤지컬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4부에서 분위기가 조금 어두울 때 만담형식을 가진 이야기꾼의 재능은 그야말로 이 영화가 가진 맛인 것이다. 화면의 구도가 세련되지 못함에도 연기를 하는 배우의 연기력은 그야말로 최고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추악하고 잔혹하고 변태적이며 불결한 요소를 어김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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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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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이 책을 본 후에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그 이유는 나는 그다지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고, 게다가 소설 중에서 추리물은 더 읽지 않는다. 추리물이란 탐정물 내지 성룡이란 유명한 배우가 연기한 <폴리스스토리>라는 영화도 있다시피 결국 범인이 잡히든지 안 잡히든지 혹은 경찰이나 탐정이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라는 이분법적인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추리물이나 심리적인 요소가 강한 경찰이야기란 패턴이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수수께끼와 같은 것은 오히려 범인이 가려진 것보다 범인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다.

 

범인이란 존재가 원래 있음으로 하여 범인 자체에 타켓을 맞추는 설정에서 우리는 정말 중요한 벽을 놓치게 된다. 이전에 우로부치 겐이란 아주 실력 좋은 소설가 겸 각본가의 명작인 <psycho-pass>를 보는 순간 말이다. 작품 내의 범인은 정신분석적인 스캐너에 의해 돌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위험이 없다. 그래도 여전히 살인을 하고, 그 살인은 충동적이기보단 하나의 이성적인 자유에 의해서 실행된다. 자유라는 이성의 절대적인 의지는 결국 자유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진행되어 그것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무의식적인 반응 내지 혹은 순간적인 행동은 결국 하나의 미학을 관찰할 수 없다. 미학적인 요소에서 이성이란 광기로 통해 하나의 승화감을 맛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죄 없는 여자의 목의 대동맥을 베고, 그것도 모자라 살인을 옆에서 시키려는 그의 범죄가 말이다. 스노우맨도 마찬가지다. 스노우맨의 범죄는 상당히 미묘하다. 한국과 같이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즈가 말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보다는 포괄적 자유주의에서 더 나아가 한국식 자유주의가 존재한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아주 적합하더라도 솔직히 개인의 자유권에 대해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 한국식 자유주의는 옆에서 오덕질을 하거나 코스프레를 하면 그들이 하는 것에 대한 비난을 할 수 있는 신기한 자유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대다수 남들이 어느 특정인을 신나게 깔보고 놀릴 수 있는 자유를 말이다. 따라서 <스노우맨>에서의 한국식 자유주의는 참으로 어렵다. 근본적 이유를 생각하면 소설을 종점이 되어 다시 의미를 찾아가면 안다.

 

예전에 이슬람 문화권에서 어느 여자가 다른 남자와 풍문이 돌아 그 집안에서는 명예살인을 거행했다고 한다. 한국식으로 보면 남편 잃은 여편네에게 자살을 권고하여 열녀탄생을 했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스노우맨>의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로 당신의 아이에게 아버지가 있다면 그 아버지가 진짜 친부일 가능성은 15~20%일 것이다! 라는 점이다. 한국에서 친자소송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피가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은 저기 15~20%를 지나 0.15~0.2%도 힘들 것이다. 나하고 결혼하기 전에 어느 인간에게 그 다리를 벌렸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스운 사실은 내가 다른 여자의 다리에 들어가도 오케인 게 수컷의 본능이고, 남이 오는 것은 싫은 것 역시 수컷의 욕심이다. 소설에서 물범인가? 바다에 사는 포유류 육식동물이 자신의 새끼를 출산한 암컷을 죽이는 이유가 바로 암컷이 또 다른 수컷이란 교미를 한다는 점이다. 내 옆에 생물학 석사를 졸업한 동료를 입을 빌리자면, 인간도 역시 동물적 기관을 지니기에 동물이나 짐승이나 남자들은 같다고 한다. 단지 그 같다는 점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불안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에서 진정한 자유가 시작되나, 이성의 자유에서 이성 자체가 완벽한 이성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 중에 속한 것이다. 인간의 질투가 정당한 진리와 정의로서 철퇴를 내린다. 정의의 칼을 외치는 영화나 만화에서는 가능하나, 현실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인간들은 최악의 쓰레기들이다. 그런 점에서 <스노우맨>은 최악의 쓰레기가 가장 도덕군자인척 하여 더러운 짓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버럴 잡지 사장놈이나 혹은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와 다른 남자하고 성행위로 자신이 태어난 이유로 살인마가 되는 합리적인 정신병자도 말이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납득을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래 분리된 존재이나, 아들과 어머니는 본래 함께인 존재에서 분리된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였던 존재에 대한 배신과 분노에 모자라 자신에게 쏟아진 신체적 낙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책에서 정말 북유럽은 그런지 안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참으로 남자나 여자나 가볍게 성행위를 하고, 파티에서 그냥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와서 대화를 나누고, 여자가 남자 허벅지를 만진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미 이 소설은 한국의 정서에서 동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이를 죽일 생각도 없이 오히려 잘 키운다. 한국이라면 아마 낙태하거나 고아원에 보낼 가능성이 높다. 작가의 시점으로 따라가면 아마 Sex는 자유롭게 그러나 태어나는 애들은 사랑을 나누는 것 같다. 요나스의 아버지에서 요나스가 남의 씨앗으로 태어났으나, 그래도 요나스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으로 키울 것을 맹세한다. 한국에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보면 가치관이란 기준에서 한국은 가족을 혈연이라면 유럽은 친분인 것이 강할 것 같다.

 

이혼과 재혼문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 여자에게 사회적인 불리함도 없고, 남자도 아이가 있는 여자와 만나 그 여자의 아이들까지 같이 놀거나 친하게 지낸다. 작가 본래가 개방적인 인물인가? 왜냐하면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음악적 지식이 필요하다. 슬립 낫이란 이름이 나올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국 LA메탈밴드에서 Gun's & Roses 멤버인 기타리스트 건이 속한 밴드다(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거기에 슬레이어 같은 스래쉬메탈, 레드제플린과 같은 브리티쉬하드락을 듣지 못한다면 그 느낌을 모른다.

 

섹시한 몸매를 지닌 카트리네 경관이 짝 달라붙는 가죽의상에서 스모키한 화장을 한 것을 보면 작가가 좋아하는 여자스타일이 그 경관이 분명하다. 물론 나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개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나름 지성을 갖춘 사람이기에 지성과 개성을 다 재미있게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가 뮤지션이고, 게다가 글을 보면 미국의 부시나 레이건을 싫어하는 느낌이 강하다. 1980년이나 혹은 2004년 부시나 레이건 대통령 당선을 왜 그렇게 왜치는가?

 

어째든 <스노우맨>은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추리적 요소에서 과학적 근거를 많이 인용한다. 어느 탐정물도 그러하나 사람의 혈액과 정액 그리고 타액들은 DNA라는 생물학에서 펼칠 수 있는 과학수사를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너무 의학적인 요소로 갔기 때문에 중간에 대략 범인이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범인이란 스스로가 나라고 떠벌리지 않은 이상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 수사극이나 탐정극은 처음부터 끝이다. 아니라면 범죄의 추적으로 통해 국가나 사회의 병폐를 찾아 근본적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스노우맨>은 그런 내용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자유로운 성행위를 인정하되, 그곳에서 자라나오는 생명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여자의 부도덕만 잡는 게 아니라 그 부도덕은 혼자만 나온 게 아니라 합작이다. 어떤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가 저술한데로 모든 아이들의 부모는 모든 성인남녀다란 명제가 좋을지도 모른다. 대신 철인군주가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공부와 운동, 때에 따라서는 동성애(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자면 아이가 태어나나 남자와 자면 지혜가 탄생한다고 하니)도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범인은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그 아이에게 더러운 창녀 같은 어머니는 필요 없다고 하나, 어머니 없는 아이는 매우 비참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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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설국열차
CJ 엔터테인먼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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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를 보면서 생각한 점은 어느 정도 사전에 내가 판단하던 내용이 들어맞은 것과 그 이상의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다른 내용이 있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설국열차>에서 제일 중요한 갈등 요소는 바로 계급적 요소로 생각하는 것보다 그 계급이 구성된 원인에 대한 고찰이었다. 시놉시스부터 차량의 제일 뒤편에 탑승하는 승객들이 섭취하는 음식은 재료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든 단백질 블록이다. 인간의 식량 문제에서 단백질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인간의 생체조직을 이루기 때문이다.

 

 

단백질의 영양소는 다른 영양소인 지방과 탄수화물처럼 유산소 운동으로 통해 에너지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은 당장의 생존문제가 달려있으며, 인간 번식에 필요한 정자 및 난자와 같은 생식활동도 단백질의 보충이 필수적이다. 그런 단백질이 <설국열차>에서는 매우 중요한 소재가 된다. 왜냐하면 영화 후반부에 가면 34세의 커티스의 17세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인류의 오만함과 어리석은 환경오염으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했다.

 

 

그리고 설국열차가 등장한 원인은 바로 윌포드가 만든 유람열차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존이 불가하기 때문에 존재한 것이다. 이때 설국열차는 이미 탑승하고 있던 승객이 있는 반면 탑승하지 않은 승객이 있다는 점이다. 빙하기가 찾아온 후에 열차 밖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있는 되기 위해 설국열차에 탑승해야 했다. 승객정원은 천 명 정도, 이 많은 인구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살아남기 위한 숙제이다. 

  

왜냐하면 정해지지 않은 승객이 탑승할 때 이미 탑승한 승객들과 그 승객의 부하들이 뒤늦게 탑승한 승객들의 짐을 모조리 빼앗았고, 식량이 부족한 사태에서 뒤늦게 탑승한 승객들은 생존이 걸린 문제가 있었다. 모든 것을 빼앗겼으니 식량이 존재할 리가 없다. 이때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원인은 최후의 인간으로서 모습을 상실할 때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식량이나 재원을 공급받을 수 있는 정상적인 세계에서 그런 비난을 듣지, 비정상적 상황에서는 인간을 사로잡아먹는다는 것은 이미 문화인류학적인 연구에서도 들어난 사실이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도서는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이었다.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은 자연환경적인 하부구조가 문화적 구조를 만들기 때문에 설국열차에 탑승한 불청객들은 밀림 속의 원시부족이 아니나, 그들이 되어야 했다. 원시민족 내지 혹은 원시부족이 아니더라도 남미의 아즈텍문명의 식인문화는 바로 단백질의 관건이었다. 커티스가 17세가 될 때 어느 산모를 죽였고, 그 산모의 아이를 먹으려고 했을 때 길리엄의 희생으로 그 아이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커티스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에드가였다.

 

 

커티스는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어야 연명이 가능한 지옥과 같은 시기를 견딘 사람이었다. 그리고 길리엄을 비롯한 원로들은 팔이나 다리 일부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당시 아비규환과 같은 식인의 향연을 막아내기 위해서다.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자기희생이란 숭고함과 더불어 불청객 탑승 1달 뒤에 단백질 블록이 난민들에게 공급된다. 그 덕분에 난민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탑승객들 중 일부는 2세를 생산하여 인류를 영속하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아이들에 대해 윌포드는 억지로 인구수를 점호하여 아이들 몇 명을 억지로 데리고 간다. 이들의 생사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윌포드는 인구통제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고,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났을 대 윌포드로부터 설국열차의 비밀을 듣는 순간 그에게 납득 당한다. 이것은 설국열차는 지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류라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 이외에는 그 어떤 인간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새해가 다가오면서 유치원에서 7인의 도주자에 대한 내용을 복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설국열차에서 내려 땅을 밟자말자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얼어 죽고 만다. 결국 설국열차가 아니면 그 어떤 인류는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보호받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설국열차 시스템은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달리는 열차는 영구적으로 달릴 수 있는 영구적인 엔진을 가지고 있었고, 열차 내부에는 물을 만드는 시설, 생선을 키우는 수족관, 고기를 저장할 수 있거나 또는 채소를 키울 수 있는 정원이 존재했다. 결국 승객들에게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교육기관을 비롯하여 여가 및 오락 등과 같은 여러 문화시설도 구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선택된 인간이기보단 처음부터 승객인 것이다.

   

  

그러나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은 2가지로 나오는데, 그것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설국열차의 불평등은 분명 후천적인 것으로 시작(그것은 빙하기가 올 때 미리 탑승한 승객과 그렇지 못한 승객)하여 선천적으로 구분 짓게 만들었다. 그것은 열차의 어느 장소에서 태어났다는 조건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불평등에 대해 커티스는 불만을 느끼고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것의 결론은 결국 생존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열차가 아무리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달려도 물을 정수할 수 있는 능력이 정해져 있다는 점과 식량이 될 식물과 동물 역시 종족 번식 및 성장에 어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식량이 모든 기차 안의 사람들에게 열람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모두 공멸하지 않은가? 결국 인구조절은 필수불가결이고, 윌포드는 마지막까지 자기에게 찾아온 커티스에게 열차의 주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앞으로 자기 수명이 다하면 그 자리를 커티스에게 이양할 계획이었다.

 

 

커티스는 처음에는 윌포드의 제안에 긍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설국열차는 사회구조적인 요소로 보면 식량과 재원이 정해져 있는 밀림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의로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메모를 전해주는 이유는 인구조절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7인의 탈주자와 4년 전의 반란 역시 윌포드가 계획한 내용이었다. 누군가 꾸준히 선동하여 분쟁 내지 투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결국 식량부족에 모두 공멸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불청객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앞 칸에 승객들도 계속 늘어나면 그만큼 인구통제의 영역은 불청객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설국열차는 계급체계가 분명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화폐가 존재해야 하며, 이익과 이윤을 추구해야 하나 그 추구할 수 있는 수단적 요건이 없었다. 식량도 윌포드의 부하가 임명한 사람이 직접 만드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19세기 독일수상인 비스마르크가 독일통일을 이끌던 국가사회주의체계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권력을 지닌 윌포드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인구통제를 끊임없이 시도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가 아니고 대신 문화유물론적으로 밀림의 세계이기에 커티스는 윌포드의 사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열차가 멈추는 순간 인류는 모두 멸망할 것이고, 지나치게 많은 인간들에게 공급할 식량과 물조차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설날 기념으로 인구조절인원에서 74% + 18인은 설국열차 최하층 인간에게 부당하나, 설국열차라는 생태계에서는 필요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에서 제시된 생태 환경적 조건이 자연계가 아니라 문화 생태적으로 인간의 세계에서 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제가 조금 있었다. 열차에 대해 완벽성을 추구한 윌포드였으나, 열차 역시 영구적으로 돌아가기 위해 엔진이 영구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단지 그 관리요소에서 기계부품의 교체만 이루어지면 되나, 사실은 그렇지 아니했다. 설국열차 초반에 소년 2명이 억지로 통제요원에게 잡혀가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원인은 바로 열차 엔진의 기능을 유지해줄 부품이 필요했다. 빙하기로 인해 지구문명은 더 이상 만들 수가 없었다.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하여 인간의 노동을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력이 존재하더라도 그 노동을 할 수 있는 생산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공장은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파묻히고, 시설물들은 동파되거나 눈사태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노동을 투입할 수 없어서 부품을 얻을 수 없기에 윌포드는 결국 5세 미만의 아이들을 하여금 열차의 정비를 하도록 한다.

 

 

워낙 기계가 미세하고 예민하기에 작은 몸을 가진 아이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공간은 마치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어린아이에게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하고 착취하는 공장주가 생각나게 만들었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아니나,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 열차 그 자체가 생태계라고 하던 윌포드는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커티스는 혁명의 중단에서 다시 혁명의 재장전으로 이어지고, 열차의 엔진은 멈추고 모든 열차 안의 사람들은 죽고 만다. 

 

 

오로지 살아남은 사람은 흑인소년 1명과 남궁 민수의 딸인 요나, 서구적인 시각에서 보면 참으로 거북할지도 모를 요소다. 왜냐하면 백인남성중심이 서구사회와 게다가 그 열차의 주인은 백인남성이 윌포드다. 자본가였던 그가 그 생태계의 정점에 있었고, 그의 사상은 결국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어 그것을 부정해야할 새로운 가치가 필요했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2명의 어린 소년과 성숙한 소녀에서 인류는 이 2명만 존재했다.

 

새로운 인류의 기원이 되어야 할 사람이 동양여성과 흑인남성이란 점은 아마 미국 헐리웃 영화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말이다. 설국열차에서 그런 기존 가치관의 붕괴는 이미 작품 초반부터 나와 있다. 지구온난화의 문제를 걱정하여 많은 나라에서 오존층이 형성되어 있는 성층권에 새로 개발한 가스를 살포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문명화에 따른 환경오염은 인간 스스로 자신이 살아갈 터전을 파괴했다는 변증법적인 문제를 보여준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오히려 인간의 생존조차 위협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욕망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실존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자신의 실존 없이 결코 인간은 욕망할 수 없다. 욕망의 주체가 사라진다는 것만으로 인간은 욕망을 누리기 위해 생존을 누려야 한다. 생존하게 되면서 그 자신에 대하여 순간적인 욕망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생존에 대해 투쟁의식에서 남궁 민수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보안설계 전문가였으나, 한편으로 지구환경 시스템에 대해 꾸준히 고찰하고 연구하고 있었다. 같은 궤도를 18번을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추락한 비행기를 보면서 처음에 후미만 보이고, 그 다음에 동체부위가 보인다면 다음에는 분명 비행기 전방도 보일 것이란 점이다.

 

 

인류의 어리석은 빙하기가 자연 스스로 해빙기를 맞이하는 점이고, 지구 지표면을 감싸는 얼음이 녹게 될 정도면 인간은 얼어 죽지 않고 얼마든지 2다리로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남궁 민수가 그렇게 Kronol을 원한 이유는 그것이 환각물질이란 점도 있어나, 한편으로 강력한 인화물질이란 점이다. Kronol이란 물질이 실존하지 않더라도 nol이란 단어가 후미에 들어가면 메탄올, 에탄올, 프로판올과 같은 탄화수소 결합물질인 알코올을 의미한다. 알코올의 경우 인간에게 환각작용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마취제로 사용된다.

 

 

실험실에서 사용되는 알코올램프 역시 탄화수소가 강력한 인화력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그것을 이용하여 설국열차 출입문을 부수고 나가려는 남궁 민수는 인류의 생존에서 대안지점은 설국열차의 생태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해빙기를 맞이하는 지구환경시스템에 맞추는 것이다. 설국열차의 인구통제는 결국 열차 내에서 생기는 에너지의 한계성이다. 그 에너지는 달리는 열차의 동력이다. 동력의 한계와 더불어 그 동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들의 노동착취라는 이율배반 속에서 인간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비로소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작품의 연출적인 요소에서 운 좋게도 2013년 BICOF(부천국제만화축제) 행사에서 <설국열차> 영화제작자인 봉준호 감독을 비롯하여 만화원작가인 쟝-마르크 로셰트(그림)와 뱅자맹 르그랑(글)을 초빙하여 대담을 본 것이다. 영화연출에서 개인적으로 인상이 남는 부분은 커티스가 사람들을 이끌고 정수시설이 있는 곳에 갈 때 윌포드의 부하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도끼를 들고 있던 경비대는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을 보자 생선 한 마리에 도끼로 배를 가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물러나지 않으면 바로 죽을 수 있다는 경고를 말이다.

 

 

그리고 그 경고를 뒤로 한 채 결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커티스를 중심으로 클로즈업이 되어 슬로우 모션으로 찍히는 장면은 생사를 넘어 자신의 실존적 가치를 찾는 그의 여정이 보인다. 자신의 살인과 식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속박된 커티스에게 유일한 그 해방구는 설국열차의 엔진을 점령하는 것이다. 그런 여정에서 그의 격렬한 싸움과 그것을 본 경비대가 터널에 들어갈 때 모든 조명을 끄고, 적외선 스코프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을 무참하게 도살할 때이다. 그 후에 인류에게 최고의 선물과 최악의 재앙을 준 프로메테우스의 선물 불이 도착하자 커티스는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은 불의 발견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처럼 투쟁에서도 문명의 우세(총, 도끼, 적외선 스코프와 같은 도구)를 가진 경비대에게 역시 문명적 조건(횃불)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인류 스스로 멸망은 문명에 의해 시작하고, 그 문명에 의해 인류는 초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문명의 소재적인 요건에서 카메라의 클로즈업, 슬로모션, 적외선 촬영은 인간의 투쟁의 긴박함을 제시해준다. 조금 아쉬운 부분인 점은 요나의 선지능력이다. 왜냐하면 몽타주적인 요소에서 요나의 능력으로 인해 제거되어야 했다. 가령 문 앞에 도끼부대가 있다면 문을 열려고 하는 커티스 일행과 도끼를 들고 커티스 일행을 노리는 부대들의 모습을 각각으로 비춘다면 격렬한 싸움이 되거나 혹은 엄청난 위기가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문을 열면 안 된다는 요나의 대사와 도끼를 들고 생선의 배를 가르는 장면은 몽타주적인 요소를 배제한 미쟝센적인 요소에 치중했다. 좁은 공간이란 열차 속에서 공간적 상황과 어두운 화면, 좁은 통로 등과 같은 요소는 분명 커터스의 위기를 강조하기 좋은 장면이었다. 또한 지배계급이 운영하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경우도 좋은 표현이다.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는 장면은 워킹 인사이드로 통해 윌포드야 말로 자신들의 구세주라는 표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급박한 회전 내지 빠른 전환, 또는 롱샷(주로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한 외부에서 달리는 열차를 촬영하는 장면에 치중)의 비율이 적었기 때문에 좁은 공간의 한계성을 그대로 보여준 방법이었다. 상황은 분명히 급박하나 카메라의 연출은 왠지 모르게 급박한 느낌보단 순서를 꾸준하게 이어가는 느낌이 강한 것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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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2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리뷰 공모작이군요. 이거 나랑 라이벌 관계네...ㅋㅋ 전 이 영화 안 봐서 모르겠네요. 내가 봉준호 영화를 개봉관에서 놓치다니 ....

만화애니비평 2013-12-27 16:32   좋아요 0 | URL
그냥 닥치는대로 올리는 중입니다~!ㅎㅎㅎ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 개정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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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시절인가?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란 도서가 처음으로 나온 것 같았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 다시 1권을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왜 이 책을 도서관에 비치하고 학생들에 추천도서로 선정했는 알 수 있었는데, 내가 다닌 중학교는 불교재단이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기본적으로 불교유산이 상당히 많다. 유흥준 교수는 불교신자보단 문화재를 사랑하고 미술을 사랑하는 미술사학자이다. 본래는 미학을 전공했으나 문화미술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미적인 감각으로 통해 제자들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은 불교문화에 상당히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가령 삼국시대부터 불교가 들어왔는데, 정치제도적인 구조에서 본다면 원래 한국은 고대정치관은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즉 임금이 제사를 직접 지내는 자라는 점에서 건국신화로 통해 보면 그들이 왕으로서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이데올로기 관점을 내세운다. 가령 우수한 문화와 기술을 소유하고, 게다가 무술과 학문을 가지고 있다면 그 당시에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중국 역사 중에 삼국지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에서 제후들이 왕으로 갈 수 있는 이유는 왕 자체가 하나의 장수이기도 했다.

 

삼국지에서 유비라도 황족이라고 하나, 그는 황건적과 동탁, 조조 등처럼 강력한 적과 라이벌을 싸운 하나의 장수이다. 장수로서 무예와 문예가 어울려진 점에서 고대 정치적인 조건에서 필요한 것은 왕은 하나의 정치지도자이면서도 장수라는 점이다. 왕이 직접 전쟁에서 지휘하고, 선두에서 적을 무찌르며, 정사를 직접 관여한다. 그러나 국가제도가 안정되고 왕의 영역과 권력이 넓어짐에 따라 왕이 직접 전선에 나가거나 혹은 지휘하는 것보단 휘하에 장수로 통해 실시된다. 그러나 만약 그 장수가 왕과 같은 출중한 무예와 지략이 있다면 왕에게 큰 위험존재가 아닐 수가 없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말에 모든 군주의 몰락은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장수들의 반란이다.

 

고려의 왕건 역시 장수이고, 발해의 왕 대조영 역시 장수이며, 조선의 이성계 역시 장수이다. 그런 위험한 정치관계에서 불교의 유입은 왕권의 강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부처나 보살을 왕족이나 귀족에 비유하고 중생을 피지배계급자에게 부여함에서 왕권강화와 더불어 지배체계를 도모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크게 번창하고, 숭유억불이던 조선시대에도 왕족이나 많은 양반들도 불교사찰에 큰 지원을 주었으며, 게다가 중으로 출가한 왕족에 학문의 명성이 뛰어난 승려도 많았다.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혹은 학문적이든 철학적이든 어느 것이라도 후세에 다르게 되면 다른 모습에서 접하게 된다. 당시 매우 신성한 종교적인 요소가 깃든 불교 내지 여러가지 제도의 산물이 지금에서도 강한 종교적인 주술적 도구로 되거나 혹은 예술품 내지 골동품, 더 가치가 있다면 문화재로 승급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부정신학이란 단어가 여기서 탄생한다. 신성한 것으로 탄생된 문화재는 당시로는 큰 종교적 위력을 가진 상징적 존재이나, 지금은 종교보단 오히려 문화재로서 예술과 문화로서 접근한다.

 

그런 문화의 숨결이 우리에겐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쉬운 것인지 어려운 것인지 생각해보면 그 나름일지도 모른다.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우리 주변에 넓린 문화재가 얼마든지 많으며, 우리는 사소한 것이 있는데도 그저 지나가는 행인처럼 여기는 점이다. 거기다가 단순히 보러 온 게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역사적인 맥락과 더불어 조형적인 미까지 더 설명하니 이 책은 문화유산에 대한 시각을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지침서이다. 한국문화의 한계성에서 이른바 스토리텔링이 약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 스토리텔링을 살리기 위해 역사를 알고, 문화를 알고, 그 현장에 가서 채취와 온기 그리고 그 미학적 감각을 맛보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스토리의 발단이다.

 

사소한 돌 하나에 담긴 이야기와 그 공간에서 생긴 사람들의 시간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와 별개로 보이나, 그 물질적 존재는 우리에게 아직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제일 1번의 고향은 남도기행이고, 남도 중에 큰 답사지는 바로 강진과 해남이다. 강진이면 누가 어떻게 유명한가? 유흥준 교수도 역시 먹물을 먹은 사람이고, 먹물들을 만드는 지식인이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한국에서 자신들이 지식인이라고 믿거나 혹은 되고 싶은 자들이 뽑는 한국 위인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계신다.

 

물론 나 역시 다산 정약용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 지식인이 되고싶었던 지금이나 지식인이 되는 것과 전혀 무관한 20살 전후 시절에도 그 분을 가장 존경했다. 어려운 다산학에 대해 유학으로서 대하는 것은 나의 역량으로 불가하나, 그 분의 업적과 사상을 들여다보면,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보다 약하고 힘든 농민과 백성을 보면 분노하고 탄성을 했던 그 어진 도량, 특히 애절양이란 시는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을 찌른다. 군포세를 내지 못해 소를 빼앗긴 농민이 관아의 폭정에 참지 못해 자신의 성기를 잘라내고, 아낙네는 자신의 성기를 들고 관아에 가서 군포세 면제를 요청하나 비참하게 외면당한다. 그리고 그 갈대밭의 아나넥의 우는 모습을 본 다산은 그 시를 강진에서 지었다고 하니, 얼마나 강진이 우리 국문학에서 큰 빛을 내었는가?

 

하지만 그 빛은 빛이 나서는 안 될 빛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에 아무런 힘 없이 바라보던 귀향당한 정치인의 비참에서 태어난 시였다. 다산초당이 있는 강진군 도암면 귤동리, 실제로 나도 그 곳에 가서 다산초당도 가고, 혜장스님과 초의선사가 서로 왕래가 있던 백련사(만덕사)에 가보았다. 다산초당에서 보는 강진포구는 아름답지만, 마음에서 우려나오는 그 분에 대한 마음에서 아픔이 스며든다. 강진에서 다산초당을 지나 그분의 외갓집인 해남 녹우당도 나오고, 그런 후에 경주가 나온다.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유흥준 교수가 경주를 알기 위한 3가지에서 신라의 미학을 알 수 있는데, 신라의 본래 예술문화를 보면 단조로움과 소박함이 시작이라면, 후에 갈수록 수려하고 아름다운 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신라는 불교문화를 가장 늦게 받았고, 같은 시기에 백제보다 건축기술이나 귀금속 제조기술이 낮았다. 하지만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불교문화의 유입으로 신라의 천마총을 비롯한 많은 석탑과 사찰의 미는 아주 화려하고 아릅답다.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보이는 건축기술은 세계를 모두 놀래키고, 에밀레종의 울음소리는 매우 아름다워 그 소리를 낼 수 있는 종은 아예 없다는 일본 어느 학자의 말처럼, 우리의 문화는 아름다고 위대한 것이 많다. 자치 하면 민족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나, 급격히 산업화가 된 한국에서 전통문화의 씨앗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이런 책은 우리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서적인 것이다.

 

그런 반성과 사유의 내용이 은근슬쩍 들어가 있고, 일제강점기의 고통과 군사독재의 아픔들이 아름다운 강산에 남겨 천박함을 아쉬워하던 유흥준 교수의 글에서 우리가 과거를 보고 현재를 알아가고,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적 메시지도 던진다. 그런 의미답게 유흥준 교수도 자신의 집필의 실수를 혼쾌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여 그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메모도 잊지 않는다. 해외의 문물경험도 좋으나, 한국의 미를 찾는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다. 물론 모더니즘이란 엘리트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한계성은 있겠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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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건달 (1disc)
조진규 감독, 박신양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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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전형적인 한국의 저급한 3류틱한 조폭영화라는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3류 이상의 재미있는 요소와 학술적인 요소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문제는 결론적인 서사구조에서 보이는 점은 역시 3류는 그렇고 2류에 머물고 2류 중에서도 약간 떨어지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보이는 중요한 요소는 분명 있다. 그것은 건달이 하고 있는 박수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한국에서 고전이나 혹은 주요한 전통문화를 찾아가면 무속신앙에 대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巫라는 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神壇樹(신단수)라는 것에서 신단에 해당되는 나무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박달나무는 檀이란 단자이고, 한국의 최초 국가라는 고조선을 건립한 단군의 단자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그래서 한국의 최초의 왕은 무당이라는 뜻이다. 무당의 의미에서 현대에는 그저 미신에 불과하나 미신의 세계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이유는 그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신앙 내지 문화에서 우리민족의 자화상 내지 존재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20세기 위대한 사상가이자 인류학자인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로 알려져 분으로 그의 저서인 <슬픈열대>와 더불어 명작인 <야생의 사고>를 읽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야만인을 대하는 어리석은 문명의 야만을 반성해야 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야만인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 문명인들은 알 수 없는 미스테리 내지 혹은 미신 내지 미개한 문화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적 조건과 더불어 오랫동안 살아온 문화의 소산이다.

 

오히려 야생의 사고라고 여기는 부분에서 문명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도리어 미개인들이 훨씬 웃돌고 있을 수 있다. 린네가 발견한 식물분류법보다 더 세분화된 지식으로 알아보는 원주민들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원주민에서 문명의 식물학자와 원주민 중에서 누가 식물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물론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으로 원주민들의 에믹의 요소보단 에틱으로 대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문화유물론적인 요소에서도 물질이 문화를 구성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연적, 지리적, 기후적인 요소로서 문화를 이룩한 것이다.

 

박수건달이란 영화로 돌아보면 한국의 문화적, 자연적, 지리적 특성에 대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을 맡은 박신양 씨는 작품에서 조폭건달로 나온다. 그런 그가 무병에 걸려 무당이 되는 것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부산의 어느 어촌마을의 어항을 이전하여 그 자리에 큰 건물을 세울 계획을 세운다. 지금도 부산의 어항에 가면 마을주민들이 모여 용왕제를 열고 한다. 용왕제에 무당을 부르고 어민과 마을주민이 모여 한데 어울려 술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민중문화에서 굿이란 하나의 문화는 공동체적인 문화형성과 더불어 집단의 공동체 정신을 재확인 후에 더 견고하게 다지는 계기라는 것이다.

 

굿이란 것과 혹은 제사를 지낸 이유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무속신앙에서 기본적인 원리는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이다. 위로를 하는 대상이 죽은 자에 대한 위로가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인 것이다. 제사문화에서 한국의 정신이란 바로 공동체적인 정신이다. 그런다고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아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그 소수의 부족과 씨족 혹은 마을주민이 어울리는 작은 공동체로 이루기 때문이다. 박수건달에서 무당이란 자는 결국 그런 의식행사를 진행하고 만들어주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이다.

 

단군신화에서 단군은 제사장과 더불어 임금이란 군장을 맡는다. 그가 왕으로서 제정일치를 추구한 것은 왕권이 결국 주종관계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라는 오이디푸스(거세공포와 더불어 죽은 아버지 죽음에 대한 위로와 슬픔, 살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적인 부자관계로서 국가와 부족을 이끈다. 기본적으로 한국이란 농경문화를 가진 민족이었고, 어민이라고 해도 100% 물고기를 잡지만은 않았다.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가축도 기른다. 농경문화의 자급자족인 생활요소가 결국 공동체의식을 키운 것이다.

 

놀이라는 문화가 노동이 수반되기에 특히 농민과 더불어 어민도 민요를 부르며 고기를 낚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기계의 발달로 좋은 장비로 물고기를 잡는다고 해도, 결국 여러 사람들이 많은 배를 동원하여 집단으로 고기를 낚는 방법도 존재하고, 바다에 나가면 풍랑과 재해로 사고를 당할 수 있으므로 서로간의 연락망을 항시 유지하고, 그것을 위해 친분을 유지한다. 그래서 용왕제 굿판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좋은 볼거리라는 점이다. 작중에서 박신양 씨도 박수건달이 되어 최종적인 위기 전편이 굿판의 모험이다.

 

오이가 위에 떨어지는 바로 두 동강이 나는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무당역에서 위기에 봉착하나, 무당의 신기로 그 위기를 모면한다. 현대과학기술로도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것이 칼 위에서의 무당의 춤이다. 본래 무당이란 용어에서 샤먼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샤먼은 미친듯이 춤을 추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초자아적인 세계에 보이는 현실공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무당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을망정, 그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무속인은 2가지로 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하여 누군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심정이 있다. 그런 무의식적인 불안과 고민이 무당의 존재를 탄생하게 한다.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혼의 존재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기적의 이야기는 신화와 설화로서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당의 문제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그런 욕망의 대변인이란 점에서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또한 개인 대 개인으로서 보자면 어느 개인에 대하여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해주는 존재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우리 현대인이나 과거에 살던 사람이나 정신적 불안을 영원히 떨친 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문명이 시작된 이래 말이다. 그러나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처럼 중세시대 유럽시대에 광인들이 나오면 그들을 분리하거나 제거하거나 혹은 가두지 않았다. 그들이야 말로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무의식적인 억압이나 혹은 표현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정신병원이 생긴 이래로 그런 자들은 더 이상 거리를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광인 중에서 물이 어는 추운 날에도 덥다는 말을 하고 속옷만 입는 자도 있다.

 

인간이 가진 육체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을 모두 무시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무당 역시 현대에서 보면 그저 굿만 하고, 점만 치는 사람으로 떨어진 셈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에서 진정 무당의 존재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건달이고, 무당 남성은 박수라고 하기에 박수건달이란 작명은 분명 어울린다. 박신양 씨가 하는 행동을 보면 죽은 자가 빙의하여 살아있는 자를 만나게 한다.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살아있는 자가 안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억압되어 그것이 하나의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갇혀있는 말을 표출하게 하거나 혹은 과잉행동을 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마음의 병이 있는 인물들은 박신양 씨의 이야기에 모두 울고 통곡을 한다. 하지만 박수건달인 박신양 씨도 같이 울고 통곡을 한다. 무당이란 자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가는 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은 무의식적 공간에 깊숙하게 들어가 공유하는 자라는 것이다. 박수건달에서 보이는 한국인의 恨이란 것으로 통해 원래는 무속문화가 인간을 넓리 이롭게 하는 단군신앙의 홍익인간 정신에서 시작되나, 현실은 그저 자기만족에 취하려는 고객과 더불어 그것을 이용하는 상술이 존재하는 게 대부분이다.

 

구복신앙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 무속신앙의 한계점이고, 지금은 기독교, 불교, 수많은 종교들이 대체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천주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란 존재로 통해 넓리 사랑을 전파하는 박애사상이나, 혹은 불교의 부처님이 자비로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박애정신에서 종교의 시작과 교리 및 기타 문화적 조건을 달라도 철학적 베이스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급격하게 신격화 된다. 보살과 부처를 모신 무당의 집에 기독교 신자가 예수님도 영원하다고 하여 그 무당은 예수님의 조각상을 보살과 부처님과 같이 모셨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보살과 부처 이전에 무속신앙은 도교신앙과 결합하여 장군상과 신선, 동자상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은 자신(들)만이 가지는 불안과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인에게 간다. 그리고 진짜 무속인을 만나면 그들은 울고웃고, 그저그런 무속인을 만나면 웃거나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올 것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진짜 무당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어항을 개발하려고 조폭을 투입하여 이전하고, 그러기 위해 굿을 했다는 점은 폭력조직이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힘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래서 <박수건달>은 한국의 무속에 대해 재밌게 다른 점은 높게 인정하나, 그 전개가 한계라는 점이다.

 

집필시간 :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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