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재장전 - 자본주의와 코뮤니즘에 관한 대담
제이슨 바커 엮음, 은혜.정남영 옮김 / 난장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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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상에서 조금 변화가 도래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물론 국내에서는 그렇게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한국에서 정치사상이나 철학과 같은 학문은 거의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채 그저 정치철학이란 대학교 학부 중에 하나이고, 현실에 그다지 반영되지 않은 학부의 과목에 해당될 뿐이다. 한국에서 철학을 논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한국의 교과서로서의 철학도서는 출간되어도 철학이란 실천적 행위로서는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공간인 듯하다. 철학이란 인간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학문으로 여러 가지 학문과 연계가 될 것이다. 의학, 환경, 생물 등과 같은 과학이나 공학에도 연계되고, 경제와 사회 등과 같은 우리 현실과도 바로 연결된다.

 

철학이란 없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약육강식의 자연생태계 시스템이 그대로 반영된 곳으로 합리화된 야만으로 이루어진 장소로 변할 것이다. 그래도 자연생태계 시스템은 조금 수월할지도 모른다. 본래 자연생태계 시스템은 약육강식이란 시스템과 더불어 자연계 내부의 균형과 자체정화라는 시스템이 추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하버트 마르쿠제나 혹은 많은 학자가 이야기하듯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행위가 시작된 것은 바로 인간이 자연에 대한 착취가 도를 지나치면서 인간에 대해 착취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사에서 인간 스스로들에게 행하는 착취행위는 농경사회에서 하나의 중앙집권화로 통한 권력형성으로 비롯한 사회구조로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원화된 계급체계는 시작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른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계급투쟁은 흔히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 많은 이론이 전개되었으나, 실상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부터 시작된 점과 인간의 불평등한 원리는 인간 스스로의 자연적인 존재가 되지 않고, 자연으로부터 계속 인위적인 존재로 변모하면서이다.

 

그러나 지금 세계 인구가 60억 내외이고, 인간 스스로가 자연주의자로서 자연 본연에 맞추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많은 인구가 식량과 자원이 필요하고, 그것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영토와 원자재가 필요하나, 이미 정해진 규모의 지반과 원자재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의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켜 그것을 하나의 생존수단으로 영위해야하는 입장인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생산과 소비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당초 우리 인간의 경제활동은 물물교환에서 비롯되었으나, 물건의 가치를 결정하는 화폐라는 것이 등장한다.

 

화폐의 등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계구조에서 화폐라는 가치로 통해 사회와 경제, 그리고 정치적인 변화도 움직인다. 화폐는 자본이란 거대한 이름 중에 하나로서 우리가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세계는 자본으로 통해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 이런 관계 속에 아주 유명한 말이 있다. 자본은 국경을 초월한다. 자본이란 거대한 물결은 국가와 인종 심지어 사상을 초월한다.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와 정치적 시스템은 개인사유를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의회정치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2010년 전후로 발생한 미국의 금융위기다. 예전에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미국에서 어느 고위관리자의 실책으로 심각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는데, 그들의 성과를 치하하기 위해 국가에서 수많은 돈을 주었다고 한다. 그들의 잘못된 운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피해를 보고, 가계가 파산하고, 국가는 부채가 늘어났다. 지금 상황에서 다시 생각하면 2010년 전후의 미국에서 소비촉진이란 이름 아래 경제적 빈곤층에서 무리한 대출을 실시한 것도 또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부채를 억지로 늘려 빈곤계급층에게 화폐를 대출하고, 덕분에 그들은 과소비를 하고 파산하였다.

 

갚은 능력도 없으면서도 그들은 계속 생활을 위해 경제활동을 해야 하며, 대출해준 은행은 부채를 상환 받아야 하나, 그것이 용이하지 않다. 그 여파로 국가부채는 100~150% 증가했고, 부채로 늘어난 화폐유통과 대출자들의 소비로 인해 물가 역시 오른다. 그렇다면 은행에서 대출한 돈과 대출자들이 사용한 돈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그 책임은 다시 누구에게로 갔는가?

 

자본주의 경제구조에 대해 생각하면 인간의 이기적인 본심과 매우 잘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약육강식이란 냉혹한 단어도 적용되겠으나, 그 약자나 강자나 자본 앞에서 모두 같은 모습이 된다. 왜 그럴까? 개인적으로 미국도 부동산 문제로 경제적 피해나 손실을 보는 경우가 있었고, 한국에서 부동산에 대한 문제로 재미있는 현상을 목격된다.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집이란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집을 사기 위해 많은 금전과 그것을 충당하지 못할 경우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경우가 많다.

 

집을 사고, 거기서 집의 주인이란 이름으로 권리를 행세해야 하나 집을 사지 않고 전세 내지 월세 등과 같은 대여형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집을 살 수 없어서 못 사는 경우도 있겠지만, 약간 무리하면서도 집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도 사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부동산 가격이 증가하여 집을 샀는데, 그 부동산의 가격이 폭락할 수 있다는 불안심리라는 점이다. 최근 국내 부동산 경기에 대해 분석하기가 어려우나,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주변의 공간(그것이 행정구역으로 구의 단위 내지 시의 단위)을 지켜보면 지난 10년 동안 부동산 가격이 2배가 오른 점이다.

 

부동산이 2배? 보통 1년 물가가 4%가 오른다고 해도 10년 전의 부동산의 공시지가가 ㎡당 100만원이라면 지금의 시점에선 148만원이어야 한다. 그것도 복리적인 계산방법을 취해도 말이다. 그러나 갑자기 부동산 가격은 오르고, 주변 아파트의 가격은 거의 2배 이상으로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또 문제다. 그렇다면 이런 부동산 가격에 따른 소비자들의 경제지수는 어떤가? 우리 국민 총소득은 연간 20,000달러다. 20,000달러를 1,080원/달러로 환전하면 21,600,000원이다. 참고로 경제활동은 20세 미만의 미성년자나 60세 이상의 노인, 그리고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생각하면 경제활동 1인이 벌어들이는 금액은 평균 50,000,000원 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50,000,000원 정도로 벌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물론 내가 듣기론 국내 연봉 1억이란 숫자를 가진 사람이 수십 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사람은 수 백 만 명이란 점이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임금조건은 개인의 성과에 따라 조정되는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지나친 금전적 이익과 거기에 반대에 놓인 임금최저 수준의 사람이 차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미국의 경제적 문제와 금융위기가 놓인 것도 바로 이런 문제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경제능력을 가져야 한다.

 

만약 비정규직 내지 일용직 같이 임금수준이 낮은 사람이 늘어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물론 이들은 생계를 위해 요리를 해먹고, 추위와 더위를 해결하기 위해 옷을 사고 집에서 휴식을 취할 것이다. 문제는 임금수준이 낮은 만큼 거기에 대한 대처방안이 없다는 점이다. 다시 돌아가 부동산 문제로 가보자. 국내에 주택보급률이 늘어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아파트의 보급이고, 개인의 소유로 이루질 수 없는 아파트에 대해 공기업에서 운영하는 임대아파트가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거기에 머물 수는 없다.

 

높은 부동산 구매가격은 중산층(중간 이하기준)을 비롯한 중산층 아래의 빈곤층까지 집을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하여 구매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상황에 웃기는 코미디가 보인다. 다들 자기의 집값이 오르기를 바라는 점이다. 집이 없는 사람의 경우 현재시점에 선택할 수 없겠으나, 평수의 규모가 낮거나 혹은 집의 질이 떨어지는 사람도 집값이 오르면 환영한다. 아니라면 취득세 내지 등록세와 같은 세금이 낮아지면 좋아한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아주 많이 있을 수 있으나,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거나 멍청하다고 여긴다.

 

자신의 아파트의 가격이 올라 그것을 팔고 다른 아파트로 갈려고 하면, 다른 아파트 역시 기존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올라갈 것이다. 규모나 질이 좋으면 ㎡당 금액이 더욱 올라간다. 결국 자신의 집값이 오른다고 좋아하면 자신이 이사 갈 집은 더 심하게 오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 변두리에서 살다가 자꾸 시외 쪽으로 이사 가는 경우가 많다. 집의 가격이 오른 만큼 미개발된 곳의 토지는 그나마 부동산 가격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그곳으로 가게 되면 충분한 인프라 내지 삶의 조건은 보유해도 더 이상 도심지 내부로 진입할 수 없다. 평생 거기서 살아야 하는 점이다.

 

한국과 같이 교육열이 높고, 학군에 대한 문제에서 도심지 외부로 밀려나게 되면 불리한 위치에 상황에 놓인다. 우리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나 왜 자꾸 역으로 되는 것일까?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자본주의가 결국 자본주의를 종언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만이 아니라 일반이론을 저술한 미국 경제학자 케인즈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다고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그 자체를 나는 종언하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살고 있는 인간을 종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쇠퇴의 길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약육강식이란 냉혹한 자연생태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만큼의 회복할 수 있는 정화능력과 번식능력이다. 최고 정점의 포식자가 존재해도 그들은 포식당하는 동물만큼 번식을 많이 하지 않으며,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공급받으면 거기서 중단한다. 하지만 인간의 자본에 대한 욕망은 필요한 만큼의 수액이란 정해져 있지 않은 채 계속 증식하고, 약육강식에 의해 낙오되는 인간은 대체되는 인간이 있을망정 보충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연 속에 위치하고 있는 석유가 계속 사용하면 언젠가 고갈되듯이 낙오된 인간 역시 언젠가는 한계가 온다는 점이다. 단지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재생산이란 출산과 양육, 교육이란 사회적 시스템이 가족이란 소그룹을 어느 정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만약 출산이 줄어들고, 노동인구가 감소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사회 뿐만 일본을 보면 계속 신생아 출산수치가 저하되고, 노인인구가 증가하여 노령화되어 간다. 노인의 노동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노인 스스로의 사회적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 보단 자신의 경제적 궁핍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사회적 시스템은 역시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왜 8명의 정치철학자들은 Marx라는 철학자 아니 사회경제학자의 학문을 재장전하는 것일까? 20세기 초반 볼셰비키혁명과 더불어 러시아의 소비에트는 사회주의라는 공상적 유토피아를 목표로 건립되었으나 레닌 사후 스탈린집권 이후부터 심각한 경제적 문제와 냉전시기의 공포정치 등의 문제를 보였다. 그러나 결국 스탈린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주의는 결국 실패한 것이 보였고, 그것이 분명 마르크스의 의도와 관계없이 만들었으나, 소비에트를 창시한 자가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인 레닌인 점에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세기 소비에트 해체 후에 마르크스는 과연 틀렸는가에서 21세기에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등장했다. Marx Reloaded라는 이 서적은 원래 다큐멘터리 TV방송에서 시작된 영화다. 이른바 현실의 경제문제가 어떤 식으로 문제가 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8명의 정치철학자와 대담을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를 보면 맨 처음 낯선 방에 어느 한 남자가 마르크스를 기다리는 모습이 나온다. 그는 레온 트로츠키, 레닌과 같이 러시아혁명을 일으켰으나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어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당한 인물이다.

 

그가 자신보다 반세기 전후로 활동한 마르크스와 만난다는 애니메이션의 발상과 영화 metrix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보여준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에서 선택이 나누어진다. 푸른 알약은 현실에서 만족한 채 조금 불편한 것은 감수하고 살 것인가? 아니면 빨간 알약을 먹고 괴롭지만 진실을 알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것이다. 알약은 트로츠키가 마르크스에게 던지는 것보다 사실 8명의 철학자에게 돌아가는 화살이다. 이들은 현실의 경제구조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나, 그 거시적인 구조에는 아주 미미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제를 알았고, 거기에 대한 원인점도 같이 들여다본다. 나머지는 여기에 대한 대안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근현대 역사는 혁명의 역사라고 불려도 무방하다. 그런데 최초의 혁명인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새로운 계기가 1871년 파리코뮌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프랑스대혁명이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등과 같은 지식인 내지 부르주아에 의해 만들어진 혁명이 아니라 파리 시민들이 스스로 결집된 행동이었다. 지금의 조건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른바 자본주의라는 잔혹한 현실에서 대안으로 파리코뮌 정신과 같은 코뮤니즘이 필요한 것이다.

 

몫을 가진 자의 몫과 반대되는 몫을 가지지 못한 자의 몫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몫에서 대안은 결국 공동체의식이란 점이다. 19세기와 21세기의 차이에서 이 책에서 반드시 알리는 것은 19세기의 노동자는 공장이나 농장이었으나, 이제는 회사사무실 앞에 컴퓨터를 바라보는 정신노동자와 전화기를 받아주는 감정노동자도 포함된다. 이전에 물건이 화폐의 가치를 따질 수 있었다. 그것은 물에 보이는 물질적인 조건에 의해 화폐가치와 노동가치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물질적이지 못한 노동조건들이 대두했으며, 경제체계는 2세기 전의 농업과 공업이 중심이 아니라 3차 산업인 서비스라는 점이다.

 

또한 경제적 계급분석에서 경제문제의 피해대상자는 최하층의 빈곤계층이 아니라 중간계층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최하계층에서는 임금수준의 미달로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윤이란 극히 제한적이나, 중간층은 아직 얻을 수 있는 이윤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위에서 한국 부동산과 통화유통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중간층을 상대로 충분한 이윤을 낼 수 있다. 그 말은 충분히 착취할 수 있다. 착취라는 것은 마르크스의 노동에 따른 잉여착취도 있으나 이미 루소에 의해서도 증명되었다.

 

마르크스의 착취는 산업시대라는 점이고, 루소의 관점은 봉건사회에서 영주와 농노의 관계다. 단지 이름과 상황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생산에서의 관계이지 소비의 관계에서는 다른 문제다.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스펙타클은 이미지를 매개로 하는 사회다. 즉 인간의 관계는 이미지로 이루어진 미디어로 의해 조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할 때만 노동하는 게 아니라 TV에서 필요 없는 방송이나 광고 등에 의해 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시청료의 관계에서 광고 역시 시청률에 의해 따라 관계되고, 우리는 무리한 광고에 노출되어 정신적 여가노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우리는 필요 없는 소비 내지 더 나아가 과소비를 하게 된다. 흔히 개성시대라고 하여 개인의 취향 내지 개성이 존중되나, 사실 그 개인성의 영역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식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과학의 시대에서 과학의 영역이 너무 앞서면 과학 역시 미신 내지 마술처럼 되어버린다. 우리는 정보의 지나친 과학을 넘어 절대적인 신이 되었다. 누가 그랬는가? TV는 신이라고 말이다. 물론 스마트폰, PC, 인터넷 보급에서 TV만이 아니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미디어란 매체를 보내고 있는 존재다.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 구조까지 미디어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파란 알약과 혹은 이런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빨간 알약이란 선택점이 있다. 물론 이런 선택만이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우리는 항상 파란 알약에 의존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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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O?PASS サイコパス OFFICIAL PROFILING (單行本)
サイコパス製作委員會 지음 / 角川書店(角川グル-プパブリッシン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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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기 전에 간단하게 알아보는 전체적인 서사적 형식

애니메이션 <psycho-pass>는 플롯의 구성이 매우 탄탄한 작품이다. 보통 추리나 범죄 장르와 같은 경우 범인의 존재를 드러나지 않으나 이 작품에서 범인을 처음부터 드러내고, 그 범죄자로 통해 숨어있는 범죄를 우리는 알게 해준다. 플롯의 구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서적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위한 36가지 극적플롯>에서 “구출/탈출, 복수를 부르는 범죄, 도망/추적, 희생자, 대담한 시도, 납치, 수수께끼, 광기, 이상을 위한 자기희생, 혈연을 위한 자기희생,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에 해당될 것이다.

 

주요 갈등과 사건의 전개에서 범죄가 등장하는 점에서 감시관과 집행관 등의 추격자, 그리고 추격자를 피하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은 계속하여 살인과 테러를 일으킨다. 그런 과정에서 범인의 살인동기에서 그는 치명적으로 사회에 위협을 가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그리고 범인인 마키시마, 추격하는 신야의 추리과정은 작가와 감독의 시나리오 설정에서 매우 탁월한 요소를 보여준다. 두 사람의 추격전에서 시빌라 시스템의 요원들과 같이 행동하면서 시빌라시스템의 본질과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나면서 작품은 마키시마와 신야의 이분법적인 추격과정에서 새로운 문제점을 열게 된다.

 

2. 마키시마의 책으로 통해보는 <psycho-pass>

<psycho-pass>를 보면 상당히 내용전개가 쉽지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단지 누군가 공격당하여 위기에 처해있고, 누군가 범인을 잡기 위해 분발하는 모습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 의미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중간을 보면 상당히 전문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나오며, 실제로 전문지식을 요구하는 서적들도 거론된다. 우선 마키시마가 실종된 어느 고교생에게 건네준 도서로 시작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뉴로맨서>, <심야 플러스원>, <1984>가 있다.

 

이중에서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책으로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러너>라는 작품의 원작이 된 소설로 미래SF소설로 상당히 비중이 있는 작품이고, 마지막에 등장한 <1984>는 실제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소설이고,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소설이다. 이중에서 <1984>의 경우에는 영국 문학작가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저술한 서적으로 당시 소비에트연방이 스탈린에 의해 강철통치를 하고 있을 때이다. <1984>에서 주인공 스미스는 오세아니아라는 나라에서 빅브라더에 대한 의문과 골드스타인에 대한 의문점을 시작한다.

 

골드스타인은 본래 빅 브라더과 같이 오세아니아를 만들었으나, 그가 빅 브라더과 오세아니아를 배신하고, 추후에 그가 만든 그 책은 오세아니아를 위협하는 매우 무서운 책이다. 오세아니아 행정기구에 사무원들이 모이면 매일 골드스타인의 영상을 보여주어 야유를 퍼붓게 하고, 심지어는 물건들을 화면으로 던지게 한다. 그런데 이 오세아니아 대륙의 특징은 화면을 관람하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영상을 상영하는 자도 관람하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1984>를 보면 스미스가 뛰어난 외모와 몸매를 가진 어느 여성과 몰래 밀회하면서 오세아니아의 규율을 어긴 점과 사상에 위배되는 말과 행동, 심지어 그 여성과 성행위를 하는 사생활까지 모두 감시한다.

 

그리고 스미스는 오브라이언이란 고급관료에게 심문을 받은 후에 아주 심한 고문을 받아 머리가 다 빠지고, 살이 뼈와 붙을 정도로 학대당한다. 심문과정에서 스미스는 질문을 받는다. “2에 2를 더하면 얼마인가?”, 이에 대하여 스미스는 “2에 2를 더하면 4입니다.”라고 한다. 만약 그런 대답을 하면 고문과 함께 이런 단어가 나온다. “틀렸소. 2 더하기 2는 5이오.”라고 말이다. 결국 스미스는 풀려나고 몸과 육체가 망가진 상태에서 같은 질문을 받은 상태에서 4가 아닌 5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1984>와 <psycho-pass>는 무엇과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3. 감시와 처벌

<psycho-pass>의 주된 내용에서 시빌라 시스템을 돌아보자. 시빌라 시스템은 범죄예방과 동시에 범죄가 일어나면 신속하게 처리하여 대응할 수 있는 최첨단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특징은 각종 CCTV를 비롯한 영상기록장치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동이 가능하다. 이들이 감시하지 못하는 곳은 전파가 닿지 않은 산속이나 혹은 깊은 지하일 것이다. 감시를 하는 점에서 이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우선 <psycho-pass>에서 psycho-pass는 인간의 심리적인 안정지수이다. 이들의 심리조건들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거나 혹은 극단적인 충격을 받거나 또는 위험에 처해지는 상황일 수 있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은 6~8화에서 마키시마에 의해 살인과 악취미인 시신조각을 하는 리카코에 대한 부분이다. 리카코의 아버지는 매우 유명한 예술가였고, 그는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여기에 리카코 역시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비관적인 삶을 영위한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예술이나 예능에서 인간의 독특한 미학을 보여준다. 즉 미학적으로 통해 본다면 "예술을 삶을 광학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이들이라면 분명 일반인들이 보는 시선에서 사물을 보지 않는다.

 

가령 중세유럽 고전주의시기에 실물의 화상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은 상상의 존재인 신과 천사, 그리고 악마 등의 정령적인 존재를 그림에 넣는다. 상상의 존재를 직접 보기보단 그렇게 성스러운 교회나 상징을 보고 그려 넣었을 것이다. 또한 19세기부터 인상주의, 추상주의, 20세기의 초현실주의 등과 같은 미술세계에서는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세계는 인간의 심리가 안정되기보단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온다. 예술의 탄생에서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추의 세계로부터 나오는 그로테스크로부터 보이지 않은 새로운 세계가 나온다.

 

미술에서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그의 그림은 도저히 현실성을 반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비현실으로 그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예술로 승화했다. <게르니카>, <아비뇽의 여인들>, <한국에서의 학살> 등과 같은 작품은 전쟁에서 희생당하는 힘없는 자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보단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그렸다. 결국 예술인들은 일반인들과 같은 인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시빌라 시스템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통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기에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킨다.

 

즉 안정지수가 불안하므로 치료 및 격리를 시킴으로서 사회구성원들에게 접촉을 금지하는 셈이다. 접촉하는 기회가 줄어들면 결국 시빌라 시스템은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 내지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다. “이성도 감정 중에 하나”라는 말과 함께 이성의 영역에서만 인간은 존재할 수 없고, 감정에서도 이성이 태어날 수 있다. 작품에서 신야는 매우 침착하고 일처리가 확실하다. 그의 철저한 사고방식에 아카네 감시관은 많은 감명을 받지만, 사실 신야의 행동에는 감정에 의해 기반 되어 있다. 자신이 감시관 시절 데리고 있던 집행관이 아주 처참하게 살해당하여 마키시마에 대한 분노라는 감정이 그를 매우 냉정한 이성을 가지도록 했다.

 

그 이후 신야는 감시관에서 집행관으로 내려가고, 아카네의 감시 아래 행동한다. 시빌라 시스템의 감정에서 신야의 분노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신야의 분노는 매우 정당하고 옳은 것이다. 하지만 시빌라 시스템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 이유는 신야의 분노란 부당한 것에 대한 의문과 불만이고, 그 의문과 불만은 시빌라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범인은 범죄를 저지른 상태에서도 psycho-pass가 정상수치였다는 점이다. 옳지 못한 부당한 행동을 해도 psycho-pass가 정상이라면 시빌라 시스템의 오류가 분명하고, 그것이 문제가 있다면 시빌라 시스템에 의한 통치체계가 옳지 못한 것으로 연결된다.

 

작품에서 마키시마가 계속 테러를 일으키는 이유는 psycho-pass의 불합리적인 것에 대한 고발이었다. 사람들이 불안에 떨게 되어 psycho-pass가 상당히 높게 치솟으면 시빌라 시스템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거리에 많은 시민들이 항의나 폭동을 일으키면 그들을 바로 제거하여야 하는가? 만약 제거로 인한 대형 참사가 일어날 경우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이 시빌라 시스템은 유지될 수 있는가?

 

4. 시빌라 시스템과 <인간불평등기원론>

<psycho-pass>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등장하는 편이 나온다. 5화 중에서 아카네는 마사오카의 대화에서 마사오카는 아카네에게 책 한권을 소개한다. “그래, 그 사람의 저작인 <인간불평등기원론>”, <인간불평등기원론>이란 도서는 1753년 프랑스에서 기거하던 장 자크 루소가 저술한 도서로 근대사상부터 시작하여 현대사상까지 꾸준히 읽히고 전해오는 도서이다. 이 책을 두고 마사오카는 왜 그렇게 아카네에게 강조했는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전개되는 불합리한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

 

우선 마사오카는 젊은 시절에 매우 우수한 형사였고, 그의 경력은 시빌라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에 큰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형사들은 범죄자를 잡기 위해선 범죄자가 아니지만 범죄자의 생각을 해야 하고, 그것으로 통한 추리 및 직감으로 통해 검거 및 예방을 한다. 하지만 범죄자들의 범죄에 대한 구상은 당연히 시빌라 시스템의 psycho-pass에 감지가 되므로 모두 검거 및 예방이 가능하다. 문제는 시빌라 시스템의 도입과 함께 기존의 경찰체계가 어떻게 되는가이다. 시빌라 시스템을 운영하는 공안국의 요원들은 매우 턱없이 부족한 인원으로 활동한다.

 

기존의 상당한 규모의 경찰병력들은 모두 불필요하게 되었고, 그 이상의 업무를 공안요원들이 부담을 지게 된 것이다. 도미네이터의 사용허가권의 승인과 허가로 통해 범죄자를 즉결심판하나, 1화에서 범죄자에게 심한 폭행을 당한 젊은 여성의 psycho-pass 갑작스러운 위험수치는 현장의 요원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psycho-pass 지수가 아무리 위험한 생각과 행동을 하더라도 검색되지 않고, 심각한 현장을 목격하고 멀쩡한 경우 공안업무에 대한 큰 차질이 빚어진다.

 

마키시마는 아카네의 친구를 납치하여 아카네가 보는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아카네는 도미네이터를 마키시마에게 겨냥해도 psycho-pass가 안정지수고, 친구가 바로 죽는 순간까지 아무 것도 못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타격을 주는 무기가 주어져도 아카네는 망설임 끝에 결국 친구를 잃게 된다. 그런 심각한 상황이 벌여져도 아카네의 psycho-pass는 최고의 안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에 반해 마사오카는 평생 형사일로 자신의 아들인 기노자와 사이가 틀어졌고, 집행관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게다가 집행관 중에 카가리는 나이가 겨우 5살 때 psycho-pass에서 경고등급을 받아 관리대상이 되어야 했다.

 

솔직하게 5살이 사회적으로 위험해질 수 있는 불안요소로 지정될 수 있는가? 카가리의 낙인은 너무 부당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마사오카가 왜 아카네에게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이야기했냐는 점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장 자크 루소는 인간에 대한 불평등을 2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선천적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불평등이다. 후천적인 불평등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에 의해 생기는 불평등인 반면 선천적인 불평등은 신체적 조건, 남녀성별, 나이 등과 같은 생물학적인 요소다.

 

그렇다면 <psycho-pass>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은 선천적인 요소에서 생기는 것이고, 후천적인 불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은 정해져있고, 현실에서 사법고시를 합격하여 검사정도의 직급을 발령받은 아케는 겨우 나이가 20세 정도의 아가씨다. 그녀가 감시관으로 지정된 이유는 어릴 때부터 psycho-pass가 너무 안정되어 이미 출세가 보장되었으며, 특별한 노력에 의해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아카네의 친구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A등급이 아닌 C등급에 머물렀고, 자신의 등급에 따라 직장이 정해지고 사회적 지위가 정해져있다.

 

5. 시빌라 시스템과 사회체계

이런 현실에서 시빌라 시스템이 주어지는 국가체계는 매우 독특하다. 모든 국민들은 농업을 비롯한 1차 산업을 직접적인 활동보다는 자동으로 식량을 재배 및 수확하는 시스템이 있으며, 다른 나라와 교류를 거의 하지 않는 정치체계이다. 덕분에 아카네가 살아가는 사회구조에서 빈곤이나 경제적 문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시빌라 시스템의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에 의해 반영된 정치사회제도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에게 행복이란 조건을 내걸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것이 적용되므로 시빌라 시스템은 최후에 마키시마와 아카네에 의해 정체가 탄로 나도 아카네는 시빌라 시스템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시빌라 시스템을 대행할 수 있는 체계가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아카네는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시빌라 시스템이 정지된다면? 만약 시빌라 시스템이 대중에게 공개된다면? 그 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카네 역시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특권을 부여받은 관료 중에 하나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전산정보 시스템에 의해 처리되는 체계가 아니라 마키시마와 같이 매우 특이한 인간들의 뇌들이 모인 괴이하고도 비정상적인 집단이 만든 체계이다. 단지 이 체계는 보통 사람에 비하여 두뇌기능이 매우 우월하며,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탐지되는 psycho-pass가 변동이 없으므로 이들이 무엇을 저지르든 모든 것은 정당하다.

 

마키시마가 살인사건을 만들고도 집행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시빌라 시스템의 오류이기도 하면서 시빌라 시스템을 구성하는 다수의 뇌들이 자신들의 선천적인 조건을 하나의 선택받은 인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 영위하고 있는 일반적인 생물학적 조건에 의해 사는 게 아니라 반영구적으로 뇌를 보존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연산하여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인간을 지배하려 한다. <1984>의 조지 오웰이 저술한 <동물농장>에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나, 어느 동물은 더 평등하다”고 한다. 결국 인간의 평등이란 자신들의 지배 아래 평등한 것이고, 자신들의 평등은 이들을 지배할 수 있는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라 여긴다.

 

시빌라 시스템이 운영되는 세계에서 시빌라 시스템은 자신들이 법이고 정의이다. 그러므로 시빌라 시스템은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라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믿어져야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감시와 처벌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완벽한 시스템이란 전제가 달성되기 위해 완벽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존재를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psycho-pass로 통해 범죄의 예방과 처리이며, 마키시마와 같은 인물을 포섭하여 자기와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더욱 더 연산능력이 탁월해지고, 다양한 판단력이 생기므로 감시와 통제라는 기능이 훨씬 상승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의 텔레스크린의 기능은 바로 빅 브라더의 실존여부를 떠나 빅 브라더라는 하나의 상징성을 부정하는 존재에 대해 응징의 처벌을 가한다. <psycho-pass>에서 시빌라 시스템은 그런 빅 브라더의 유령이 숨어 있는 세계이다. 문제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알 수 없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인 마키시마 같은 인물에 한하여서이다. 그의 죄는 아주 무겁고 심각하나, 그의 범죄자체에 대한 여부에서 그에게 살해당한 개인으로서는 매우 억울하고 비참한 일이나, 그의 행동에 의한 사회적인 요소에서는 테러리스트로서의 불법행위와 더불어 하나의 전환점이기도 한 것이다.

 

6. 역사는 2번 반복된다.

마키시마의 테러와 더불어 정보수집에서 컴퓨터가 아닌 일반 도서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정보는 디지털 정보에 의해서 운영되나, 그래도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서도 운영된다. 학교에는 선생이, 식량은 농부와 어부, 지식은 책에서 말이다. 마키시마가 책을 읽는 점에서 그는 인간의 삶의 형태가 디지털 정보체계가 감시되어 운영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움직이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 점이다. 가령 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처분은 도미네이터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리볼버식의 권총으로 집행되는 것이고, 더 넘어서 인간의 가치는 태어나면서 psycho-pass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역량에 의해 결정되는 점이다.

 

카가리의 경우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아도 관리대상이어야 하는 부당함과 불안한 심리와 정신세계가 아름다운 예술로 표현될 수 있는데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게다가 자신의 노력도 의지도 관계없이 결정되는 인생이란 정말 재미없는 삶이란 점이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것을 인식할 수 없고,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충격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의 테러는 미학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신야의 손에 의해 사살되지만, <psycho-pass>의 세계관에서 지배자인 시빌라 시스템이란 점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마키시마의 테러는 불발에 끝나고, 마키시마의 테러를 막은 신야는 범죄자로 수배된다. 시발라 시스템에서 마키시마라는 위험인물은 사라지게 되나, 대신 신야라는 새로운 위험인물이 생겼다. 시발라 시스템에 의해 기존의 체계가 사라지는 비극에서 마키시마의 반격을 막은 시점에서 시빌라 시스템의 오류를 드러나지 못하게 되어 <psycho-pass>의 작품관은 시빌라 시스템에게 2번의 승리를 주게 되는 소극을 연출하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 이런 문장이 존재했다.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희극(소극)으로” 말이다.

 

시간의 진행에 따라 사라지는 인간과 새로 충원되는 인간이 생기면서 우리는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보나, 결국 그 이야기 속에서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우선 아카네 감시관이 처음 발령 부임 하던 날과 아카네의 후임이 새로 부임 하는 날의 모습이 겹치는 점이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며, 다시 반복되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한다. 또한 다시 반복되는 새로운 역사란 마사오카와 기노자의 관계다. 2사람은 원래 부자관계이나 1명은 집행관으로 1명은 감시관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마키시마를 마지막으로 추적할 때 기노자는 함정에 걸려 팔이 철근에 깔린다. 마사오카는 마키시마를 체포하려 했으나, 마키시마는 폭탄을 기노자에게 던지고, 마사오카는 기노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이때 죽어가던 마사오카를 기노자가 품에 안으면서 “아버지!”라고 외친다. 그러나 마사오카는 안경이 벗어진 기노자의 눈빛을 보며 “예전에 내가 활약했던 그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기노자는 마사오카의 아들이란 점을 거부하여 안경을 쓰고 머리모양을 다르게 하나, 추후에 마사오카의 얼굴과 비슷하게 나온다.

 

게다가 마사오카가 팔 1쪽이 인조라는 점에서 팔을 잃은 기노자 역시 인조 팔을 착용하여 집행관으로 활동한다. 그런 점에서 <psycho-pass>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부자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기노자가 오히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추모하여 아버지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른바 아들은 아버지에 의한 거세공포를 느끼고 이에 대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하거나 혹은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한다. 혹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도저히 아버지를 칠 수 없는 경우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나, 기노자의 경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아버지를 추모한다.

 

그래서 역사는 2번 반복되었다. 마사오카와 기노자의 모습에서 말이다. 마사오카는 자신과 완벽하게 닮았다는 기노자의 모습을 보고 매우 흐뭇하게 웃으면서 죽는다. 그의 죽음은 그에게 단 1번의 죽음을 가진 인간의 삶에선 비극이었으나, 마사오카와 기노자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희극이란 플롯이었다. 다시 공안요원으로 활동하는 기노자는 아카네와 함께 공안요원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아카네는 어떨까? 아카네는 시빌라 시스템의 오류를 모른 채 시빌라 시스템을 신뢰했다. 하지만 시빌라 시스템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빌라 시스템의 유지에서 <psycho-pass> 2기에서 신야와 아카네가 시빌라 시스템의 오류를 해결할지 못할지는 알 수 없다. 단지 해결할 수 없다면 다시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소극의 모습만 보여줄 것이다.

 

7. <psycho-pass>와 현실세계

<psycho-pass>란 작품은 매우 획기적인 작품이다. 작품세계관이 감시라는 하나의 체계적인 도구가 시빌라 시스템이란 뒤에 숨은 절대적인 지배자들의 권력을 합리화 시키는 체계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어떠한가? 2013년 한국에서 영화 <감시자>라는 작품이 있었다. 상당히 카메라의 무빙워크 불안하고 어지러워 상당한 긴박함을 보여주고, 실제 CCTV가 지나가는 행인이나 범인들을 확인하여 경찰들이 검거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CCTV라는 감시 장치의 영상이 관객의 눈이 되는 경찰들에게 관찰되지 않을 시에 그 상황이란 매우 불안하고 초조하다.

 

즉 감시라는 체계가 하나의 안전을 보장하고, 하나의 정당성을 보장한다. 하지만 감시라는 것으로 인해 우리는 하루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CCTV에 의해 촬영당하고, 심지어 카드를 이용하거나 결제하는 것조차도 모든 정보가 노출된다. 개인정보의 유출은 결국 개인의 사생활의 영역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범죄의 안전에서 하나의 증거와 예방 역시 감시라는 체제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아이러니한 인간의 선택지점에서 <psycho-pass>의 선택지점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의 관점을 손에 들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적어도 1번은 마키시마의 관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그런 극단적인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아주 끔찍하겠지만, 적어도 그런 감시라는 현상이 우리 주변에 항상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공장이나 작업장에서 근로자가 계속 쉬지도 않고 일을 하는지 확인이 가능한 CCTV는 원형일망 감시탑인 판옵티콘은 전체적으로 감시가 가능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내가 일하는 업종과 유사한 업체에서는 사장이 직원이 지금을 무엇하고 있는지 CCTV로 통해 다 감시한다는 소문만 들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어서 잠시 한 눈을 팔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잠시 다른 용무를 볼 수 있다. 그것을 감시하여 하나하나 모두를 감시한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다.

 

또한 우리는 아파트와 같이 집단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건축물에 살고 있다. 하다못해 옆 아파트 내지 건물에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감시당할 수도 있다. 점점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연적인 조건에 의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생활이 축소되고 있다. <psycho-pass>에서는 이미 그런 사생활조차도 하나의 감시가 이루어지고, 때에 따라서는 개인의 존재가 사회로부터 소멸된다. 도미네이터라는 강력한 처벌도구는 개인의 생물학적인 존재만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도 소멸시킨다.

 

마사오카가 아카네에게 질문하면서 거론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이외에도 그의 저서 중에 하나인 <사회계약론> 제1편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사회질서는 다른 모든 권리의 기초가 되는 신성한 권리이다. 그렇다고 이 권리가 자연히 생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약속에 근거한다. 그 약속의 성질을 아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시빌라 시스템은 사회계약에 의해 조성된 사회체계인가? 오히려 그것은 더더욱 심한 쇠사슬에 묶이게 하고, 시빌라 시스템의 뇌들은 대중들의 권리보단 자신들의 권리를 기초가 되는 것이 신성한 권리라고 여긴다.

 

어떻게 본다면 시빌라 시스템에 등장하는 뇌들은 그저 애니메이션이란 <psycho-pass>에 나오는 숨은 권력자들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충분히 시발라 시스템과 같은 보이지 않은 권력자들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감시라는 체계는 감시자라는 존재가 감시당하는 사람 앞에 나오거나 들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 조건이다. <psycho-pass>라는 작품은 하나의 허구의 세계를 만든 작품이란 점은 분명하나, 그 허구라는 세계가 창조하기 위해서는 현실이란 세계에 의해 조성된 하나의 모방세계라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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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소년 공주님 3 - Novel Engine
모베 지음, 모브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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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절대소년 공주님> 3번째 순서를 보고 난 후에 생각이 든 점은 국내에서 이른바 TS물 즉 남성과 여성이 섹슈얼리티(생물학적으로 성) 내지 젠더(사회적인 성)의 바꿔지는 이야기는 그래 흔하지 않다. 과거 한국 만화책인 <아드레날린>에서 흡혈귀에게 피를 빼앗긴 남자들은 모두 여자로 몸이 바뀌는 것을 생각하면 남녀의 역할을 바꾼다는 그런 흔한 소재는 아니다. 물론 일본과 같이 만화시장 규모가 거대한 곳이라면 TS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거리와 소재들이 흘러나온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 최근 <금지소년>처럼 남자고등학생이 카페의 미소녀 종업원으로 나오는 소재는 흔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절대소년 공주님> 이외에도 국내 라이트노벨에서도 남자학생들이 여장을 하고 학교로 가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을 보면 성적인 역할에서 생물학적인 요소보다 사회적인 요소가 더 가중되는 느낌이다. 그런 성적담론과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느끼는 남녀관계에서 예전에는 남성들이 강한 우위와 권력을 가진 반면 최근에 남자와 여자의 대립보단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조건에 따라 계층이 분리되는 점이다. 결국 남자라든지 여자라든지에 의해 구별되기보단 현재 어느 상황에 놓여있는 것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원래 공주이던 이소레비안은 본인의 신분이 공주이고, 게다가 성별은 여성이고도 불구하고 자신의 강력한 힘과 성안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구속감로부터 해방을 맛보기 위해 남장을 하여 용사로 활동하고 있다. 아셰트라는 용사가 계속 활동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자신을 대신하여 공주역할이 필요했고, 그 덕분에 레빈은 공주의상을 하여 영문도 모른 채 혼인식에 갔고, 거기에서 납치되어 마왕성으로 끌려갔다. 자신이 그동안 남자인데도 여자옷을 입고, 여자의 말과 행동을 하며,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

 

그 와중에도 마왕은 계속 용사 아셰트만 찾게 있었고, 매우 복잡한 상황 속에 또 다른 변수로 제국의 군대가 마왕국에 쳐들어왔다. 당초에 이소레비안 공주가 결혼해야할 제국의 왕자, 르엔이 찾아온 것이다. 르엔은 제국의 군부대에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는 장교였고, 자산의 신부인 이소레비안 공주를 찾으러 온 것이다. 문제는 이소레비안 공주를 찾아오기 전에 조우한 용사일행에서 르엔이 만난 용사는 진짜 용사 아셰트인 이소레비안 공주가 아니라 레빈이었고, 진짜 공주는 다시 이소레비안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제국의 군대가 오면 마왕국의 사람들과 제국의 군인들은 많이 죽고 다치게 될 것이고, 레빈과 친분이 있는 리세를 비롯한 마왕국 안에 사람들도 큰 위해를 받을 것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빈은 마왕국의 리세, 빈유, 마왕과 싸운다. 하지만 레빈의 싸움에 대한 능력은 거의 Level 0, 등급으로 따지면 Level 99 풀인 마왕과 싸우는 것은 무리다. 아니 그 이전에 리세나 빈유도 역시 막강한 힘을 가졌다. 레빈은 자신이 용사 아셰트가 아니라 마왕궁에 갇힌 이소레비안 공주의 대리라고 밝혔다.

 

그 덕분에 리세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용사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마왕 역시 레빈의 책략에 그대로 넘어가준다. 운 좋게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르엔에게 포로로 잡힌 레빈은 우연히 넬의 유도에 따라 목욕하는 곳에 가다가 르엔의 정체를 발견하고, 그 덕분에 상황은 급변한다. 사실 르엔도 이소레비안 공주가 용사처럼 행동하듯이 겉과 속이 다른 것이었다. 용사가 되어 자유롭게 방랑하고픈 이소레비안, 암살과 모략 그리고 정치적 숙청이 끊이지 않는 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르엔에서 둘은 뭔가 다르나 상당히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황태자이던 르엔은 세상 그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으나, 자신의 알몸과 같이 있었던 레빈에게만 달랐다. 레빈이 가난한 평민이든 용사의 대리이든 상관없었다. 단지 레빈이 옆에만 있어주길 바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곱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넬, 레빈을 처음부터 납치하여 갖은 고통과 골탕을 주던 넬이 알고 보니 레빈에게 가장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작품 중간에 만약 레빈이 르엔을 따라 제국으로 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작품에서 레빈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소레비안 공주는 계속 자유롭게 살아가고, 마왕국의 사람들은 제국의 의해 살해당하지 않으며, 자신은 가난한 평민에서 한 나라의 권력을 움직일 수 있는 정점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그것으로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주어진 상황이 항상 비합리적이고 부당하며, 심지어 목숨도 보장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에 빠진 레빈이나 너무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좋다면, 그것이 이익이 된다 치더라도 과연 만족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나 레빈은 언제나 힘이 없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그것이 정말 유리하다고 하지만, 뭔가 납득되지 않아도 그 어떤 것에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가장 문제인 마왕과 이소레비안의 공주가 등장했다. 넬이 레빈을 고국으로 데려가는 도중에 공주는 다시 용사로 돌아간 것이다. 르엔과 이소레비안 공주로 모습을 한 레빈의 결혼식장에 사라진 원래 공주는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남편을 데리고 말이다. 남편은 다름 아닌 마왕, 보통 공주님 안기는 남자가 여자에게 해주는 것이 상식이나, 여기서는 신부의 의상은 입은 공주가 마왕을 자기 손으로 안아주는 모습이 나온다.

 

전투력은 마왕은 높았고, 마왕은 원래 용사가 레빈이 아닌 이소레비안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에 왕국과 제국의 적인 마왕이 결혼식에 나타나 공주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단지 이 자리에서 축복의 박수를 치는 사람은 리세와 빈유, 그리고 용사와 같이 모험을 즐긴 일행이었다. 어떻게 보면 실속이 넘치는 겉보기 좋은 결혼식보단 오히려 엉망진창이나 자신들이 재미있는 세계를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세상에는 이런 말이 존재한다.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희극(소극)으로” 말이다. 작품 마지막 결과에서 용사 페티쉬에 걸린 마왕, 그런 마왕과 재미있는 일상을 보내려는 이소레비안 공주, 아끼고 싶은 만큼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넬은 다시 레빈으로 하여금 또 다시 모험(?)을 시작하라고 한다. 문제는 전에는 절대소년에서 ㄴ를 제외한 소녀야 했으나, 지금은 왕자 앞에 여를 붙여 여왕행세다. 처음 공주행세는 비극이라도 뒤에 찾아올 여왕행세는 희(극(소극)이다. 그러나 레빈에게 선택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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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3 - Novel Engine
정진교 지음, 라티세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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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3권을 보는 순간, 아직까지 이 라이트노벨의 엔딩은 약간 먼 것 같고, 어느 정도 연재가 계속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신인류의 종류에서 8가지로 기억하고 있는데, 베히모스 무예, 하멜룬 신아, 위그드라실 청연, 키메라 휘정까지 나왔는데 이제 드디어 다른 신인류 엔젤 안나, 제우스 수연이 등장했다. 보통 라이트노벨을 보게 되면 대부분은 아니나 주요 소비계층이 남성인 점을 고려하여 보통 등장하는 여자등장인물들은 남자 주인공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는 구조를 가진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그런 경쟁하고 구도를 가지고 있으나, 작품에서 보이는 그것 자체가 주요한 포인트가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제와 해소다.

 

단지 문제의 발단에서 그 토대에 대한 부분으로 전개되어가는 것보단 엉뚱하게 흘러가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다. 분명 문학이나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패턴적인 클리셰가 없을 수가 없다. 그래도 이 작품은 그런 클리셰를 너무 우려먹지 않는다. 물론 작품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와 겹치는 다른 이야기가 있지만,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편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자주인공부터 상당히 바보이기도 하나, 그의 입장이 구인류라는 점이다. 신인류의 등장에서 보통 작품에서 세상을 구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편은 신인류에 가깝다.

 

그들이 가지는 특별한 힘으로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고, 곤란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히려 신인류들이 민폐 당사자란 점이고, 그들의 문제를 뒤처리를 하는 사람이 민수다. 라이트노벨에서 시점은 민수의 눈에 보여주나, 실제 흐름에서 민수는 휘말리는 사람이고, 의도하지 않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사실 1권부터 생각하면 민수의 어머니는 멀리 외국에서 근무하고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멀리 외국으로 전근을 가셨다. 전근의 의미에서 타국에서 이용되는 신인류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신의 임무가 신인류에 대한 보호와 지원에서 매우 헌신적이다.

 

문제는 민수의 아버지가 헌신적이면 헌신적일수록 아들인 민수는 비참한 생활을 감당해야 한다. 무예와 어릴 적부터 친구라고 하나, 무예의 강한 힘과 무서운 살기에 모두 접근하기를 꺼려하고, 오직 민수와 지내게 된다. 민수는 무예로 인해 주변에 친구를 사귀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물론 학교에서 웃고 떠들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있겠지만, 같이 집에 가고, 서로 집에 찾아가며, 어려운 일이 있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친구관계는 아예 맺을 수가 없었다. 그런 민수에게 집이 사라진 점에서 신인류만 모우는 학급에 간 것은 무리하게 따를 수밖에 없는 민수의 운명이다.

 

그 운명의 고리에서 민수는 다양한 신인류 미소녀 사이에 끼여 마치 노비처럼 생활을 한다. 이미 무예가 민수라는 이름만 부르면, 민수는 당연히 뭐가 필요한지 알고 찾아가서 해결해주고, 다른 사람마저 가능하다. 그런 덕분에 민수에게 붙은 별명은 매국노다. 딱히 민수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나, 세상의 편견이란 신인류라는 당사자 이외에도 그들과 단지 가깝게 지내는 사람까지 같이 몰아가는 것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3권을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적응한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 학교에 신인류가 올 때 난리도 아니었으나,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순간에 새로운 사건이 터지는 것이 서사의 기본이다.

 

서사에서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에서 결말은 또 다른 발단이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결말이 결국 위기와 갈등의 해소라면, 만약 갈등과 위기가 없다면 이야기가 계속 이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2권에서 마지막 부분에서 비인류인 뱀파이어가 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뱀파이어가 3권에서 새로운 갈등과 위기를 주는 인물로 나올 것이란 단서는 우린 이미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3권에서 보이는 뱀파이어가 주는 위기와 갈등은 무엇인가?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과 같은 생각과 혹은 같은 패턴인 사람을 만났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삶의 목표 그리고 그것을 같이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할 것이다. 그런다고 모든 것이 같으면 좋은 일이 아니다. 뱀파이어 공주인 니제르가 올 때, 이미 갈등은 시작되었다. 신아가 말을 한다. 니제르는 자기와 동류인 존재라고 말이다. 같은 존재가 한 곳에 있게 되면 서로 적이 되거나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고전 중에 고전인 삼국지에서 군웅할거시대에 나타난 인물로 유비, 조조, 손권 등이 있다.

 

이들은 서로 군주로서 최고의 자질을 가졌고, 조조와 유비는 전장을 서로 누비며 그 위세를 떨쳤다. 물론 한나라에 대한 보수적인 가치관인 유비와 혁명적인 가치관을 지닌 조조의 대립에서 누가 더 우위에 두는가에서 어려운 난점을 가진다. 두 사람은 모두 황건적과 십상시를 해결한 인물이나 결국 서로는 같이 양존할 수 없는 적이 되었다. 니제르와 신아가 양존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외모부터 시작하여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점이다. 니제르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에서 찾아온 뱀파이어고, 신아의 어머니는 백인으로 둘 다 노란머리에 귀여운 인상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니제르는 가면 속에 가려진 게임폐인이지만, 학교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인사하고 상냥하게 대하는 인물로 나온다. 신아는 학교에서 최고의 인기인이 되기 위해 매우 신경을 기울이는 부류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바로 충돌이고, 신경전이 발생되는 것이다. 게다가 처음에 비인류인 니제르를 모두가 꺼려했으나, 사람관계에서 처세술이 뛰어난 니제르 덕분에 오히려 신인류인 무예, 청연, 휘정, 그리고 설영이까지도 니제르의 학교생활과 기숙사생활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피곤해지는 것은 누구인가? 결국 민수가 되고, 학교 안에서 요조숙녀인 니제르는 기숙사에 들어가는 순간 게임에 빠진 게임폐인이 되고 만다. 게임덕분에 잠을 잘 수 없는 신아는 계속 니제르와 실랑이를 펼치고, 그런 사이에 눈칫밥도 없고 남 좋은 일만 죽어라 하는 민수가 나와 이야기를 한다. 신아와 같은 방을 쓰자고, 아니면 게임하지 못하여 취미생활이 사람의 피를 빠는 니제르에게 민수가 피를 주겠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말리지 못하는 여자동급생으로 상황은 꼬이고, 결과적은 문제는 해결되나 민수의 처지는 더욱 비참해진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는 기본적으로 하렘요소가 있다고 하나 하렘계열로 보이기에 매우 부적절한 것은 남자주인공인 민수가 너무 당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재미이기도 하며, 작품에서 전하고자 하는 의미도 민수로 통해 보여준다. 니제르의 등장과 더불어 또 다른 신인류인 제우스 수연과 엔젤인 안나의 등장에서 말이다. 솔직히 엔젤 안나 플레이어의 등장에서 최근에 국내에 공연을 하러 온 외국 뮤지션 Radio gaga라는 팀이 생각난다.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하나, 국내에 공연을 할 때 어느 종교단체에 의해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엔젤 플레이어의 등장과 그녀의 공연을 하기 전과 그리고 공연 당일의 사건은 진짜 현실에서 이런 신인류 사람들이 존재하면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리란 보장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가령 제일 유명한 것이 17~18세기 유럽의 마녀사냥이다. 마녀라는 존재는 실제의 존재가 있어서 마녀가 아니라 사람들의 광기와 불안한 심리적 요소를 타인에게 전가하여 그것을 하나의 주술적인 고문과 처형으로 통해 해소하는 극단적인 정치수단이다. 죄 없는 사람을 불러 고문하는데, 그 장면은 매우 끔찍하고 잔인하여 다시는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당 사실을 기록한 사람의 고뇌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안나 역시 그런 마녀가 아니나 마녀로서 낙인찍힐 가능성은 높다. 공연준비로 민수가 있는 학교 기숙사에 올 때 학교 주변에 사람들이 와서 항의를 하고, 심지어는 공연 당일에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다. 그런 일을 당하는 이유는 안나의 속성은 엔젤이란 점이다. 엔젤하면 우리는 천사를 생각하고, 천사가 가진 상징으로서 크고 아름다운 하얀 날개다. 그런 날개를 신적 영적 존재인 천사가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 신인류로 확인된 안나에게 붙은 것이 작품 내에서 말하는 갈등과 위기의 소재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에서 상당히 따가운 말이 나온다.

 

안나의 위기를 구출한 민수와 민수일행에게 안나가 그렇게 심한 일을 당해도 참는 이유를 묻자, 안나는 자신의 행동이 곧 신인류의 얼굴이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차별이란 단어를 좋지 못한 가치관으로 알고 있어도 실제 그 차별을 실제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이나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 차별이란 부당한 행위를 하나의 정의로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광신도 단체들은 자신들이 폭력으로 통해 타인을 해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매우 옳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광기가 하나의 맹목적인 가치관과 이상이 되는 순간 폭력은 하나의 미학이 되고, 그런 폭력의 미학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해 우리는 파시스트라고 부른다. 파시스트란 흔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고, 내 자신이나 혹은 옆에 있는 사람조차도 파시스트로 전환되기가 쉽다. 인간의 불안과 초조, 그리고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이 스스로 폭력을 하나의 미학으로 치부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에서 가장 문제되는 갈등은 차별이다. 차별의 존재에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에 의해 성립되나, 그것은 실제적으로 알아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조건도 필요 없이 단순히 육안으로 소문으로 확인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것은 단순히 차별을 넘어 삶의 정체성까지 흔들어댈 수 있다.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민수와 무예는 어릴 때부터 매우 가까이 지낸 친구고, 그 둘의 가족끼리도 잘 지내는 사이다. 오죽하면 민수의 아버지는 무예를 배려하기 위해 무예와 민수를 같은 아파트에 살게 하고, 민수가 어릴 적에 무예의 집에 놀러가는 것도 모자라 같이 낮잠을 잘 정도로 신뢰하는 사이다. 민수가 무예와 지내면서 무예의 아버지에게 많은 시달림을 받는데, 무예에 대한 무예의 아버지가 보이는 오지랖은 이미 보통 사람들이 가질 상식에서 멀어진지 옛날이다. 하지만 만약 신인류가 태어나서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미움을 받거나 외면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제 아무리 라이트노벨이 웃고 즐기는 오락성 소설이라고 하나, 상당히 그런 의미부여는 매우 신선했다. 사실 신아와 휘정도 부모님과 사이좋게 지내며 살고 싶지만, 부모와 살면서도 그들은 부모라는 틀을 지나 그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조우하게 된다. 가족이란 작은 사회도 존재하나, 가족을 나오면 학교나 이웃이란 사회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받는 그들의 입장은 어떠한가? 작품을 보면 휘정이 여자에게 과도할 정도로 달라붙는데, 그것은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사귀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세상에서 특별하게 되고 싶어도 결국 모두처럼 평범하게 눈에 튀지 않고 같이 묻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신인류의 입장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들은 특별한 존재이지만, 사회에서는 특이한 존재로 되고, 모두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와 미지의 존재다. 따라서 신아 역시 친구가 없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고,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여 조종하는 능력에 은근히 이때까지 차별을 당한 보상심리가 담겨 있을 것이다. 결국 우월한 능력을 가진 것은 분명하나, 그 속성에 의해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차별되어 열등의식이 하나의 열등적 우월의식으로 변모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수의 존재는 아주 신선한 것이다. 안나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민수의 뺨에 뽀뽀를 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안나는 민수를 무예나 신아처럼 좋아하기보다는 그저 감사의 답례 정도다. 그녀가 처음 기숙사에 와서 제멋대로 군 이유는 민수가 처음 안나를 보는 순간 신인류라는 존재를 두고 본 게 아니라 미국인이라는 것을 두고 본 것이다. 어설픈 영어실력으로 “헤, 헬로? 마, 마이 네임 이즈 주민수! 하, 하우 돌드 아 유? 아인 파인 땡큐..”를 안나에게 한 순간 안나는 민수가 신인류와 구인류의 차별하지 않는 사람인 것을 알았다.

 

만약 신인류의 특이조건으로 안나를 대했다면 안나는 자신이 차별당하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물론 구인류들이 신인류 엔젤 안나에게 팬의 감정이나 혹은 미지의 존재로 여겼다면 민수는 호된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호된 고통이 있기에 무예와 신아는 질투의 펀치와 킥을 날리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 자리를 메우는 민수의 처지는 매우 안타깝다. 민수가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집이 사라진 것도 있지만, 어린 시절 무예와의 추어곧 그렇다. 무예와 보낸 시간이 하나의 생활 그 자체가 되었고, 신인류라는 이유로 무예가 당한 것을 다른 신인류 동급생에게 당하도록 원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비인류의 등장에서 민수는 그들은 똑같이 대해준다. 자신들이 가지지 않은 신기한 능력이나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보통사람이라면 모두 경계했을 것이다. 인간은 너무 지나친 자극을 주면 신경이 무디게 된다고 하던가? 민수의 상황을 보면 분명히 그의 신경은 매우 둔해져 있고, 그 이유로 계속 고생을 하고 무예에게 강렬한 타격이 찾아온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나?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처럼 신인류인 그녀에게 친구는 신인류 동급생과 민수와 설영이고, 민수 역시 친구들이란 신인류 그녀와 설영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재밌게 전재하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조금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어째든 신인류 안나와 수연을 돌아가도 비인류 니제르는 아직도 머물고,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 다행히도 니제르는 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다른 신인류 여학생으로부터 라이벌의식을 두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한국에 남아있다는 전제 아래 4권에서 새로운 갈등과 재미를 주는 인자임은 분명하다. 전체적으로 읽어본 소감으로 등장인물 중에서 소청연의 역할비중이 매우 작다. 조용히 물마시면서 일광욕을 취하는 위그드라실은 오로지 따스한 햇살과 자연의 위대한 숨결이다. 물론 안나구출작전에서 상당한 활약을 보여줘도 작품 수면 위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3권에서 가장 기억나는 인물과 사건을 선택하자면 아마 니제르의 등장이고, 니제르가 학교에 온 것과 동시에 신아와의 갈등이라고 생각한다.게다가 니제르를 도와주기 위해 민수가 병원신세까지 졌다. 그런 인물적인 속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은 바로 3권 표지에 그려진 일러스트에 나온 니제르와 신아의 모습이다. 거기다가 칼라 일러스트 4페이지에서 니제르가 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본문에 흑백 일러스트 반이 니제르였으니, 글을 적는 작가와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분의 정성이 확실히 전해져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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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1458 2020-06-15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정이 대단하시네 진짜 정석이 있네요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김정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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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 개요

동학운동으로 시작한 천도교의 조선말기 및 식민지배시기에 전개되는 양상을 파악하여 동학운동 및 천도교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알기 위한 것임

 

□ 동학의 탄생 및 초기 활동

◦ 1860년 포의한사 최제우가 이란으로 상징되는 민심 동요를 “오도”의 수양을 통해 극복하고자 도학인 동학을 창조하였으며, 동학(東學)은 단순히 유학(儒學), 불교(佛敎), 선가(仙家)의 전통을 넘어 서양의 서학인 천주교학까지 섭렵한 동도(東道)를 의미하는 것임

◦ 시대적 배경으로 조선후기 열강들이 식민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제국주의가 열풍이었으며, 경제적 사회적인 조건으로 자본주의산업체계가 도입되면서 자국 내의 상품의 판매 및 원료의 공급을 위한 시장을 찾기 위해 조선 역시 시대적 흐름을 타고 있음

◦ 최제우의 동학사상은 서양에서 넘어온 서학사상에 대비되는 것으로 본래 천주교는 18세기 양반 및 지식인 계열이던 성호학파(정약종, 이승훈, 이벽)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1801년 신유사옥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정치적인 숙청에서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운동으로 넘어가게 되어 동학사상은 서구의 사상 및 농촌의 황폐화에 대한 민중운동으로 시작하게 됨

◦ 천주교 사상은 인간과 신은 이분적인 존재로서 신은 완벽한 존재이나, 동학에서는 신은 인간과 이분법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서로 통하여 인간이 하늘이 될 수 있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설법하여 한국의 본래 사상인 단군신화처럼 민족성과 더불어 하느님 아래 우리도 같이 하느님처럼 될 수 있기에 인본주의 사상이었으며, 추후 이런 사상은 남녀노소, 빈부격차, 신분체계가 엄격한 봉건사회에서 상당히 과격한 사상이 됨

◦ 동학은 계몽주의에 의거한 사상보단 일련의 메시아주의에 의해 탄생한 민중운동이었고, 이런 운동은 1864년 최제우 사망과 동시에 최시형의 교단등극에 따란 새로운 체계가 되었으며, 동학운동으로 인한 교세가 강원 및 삼남으로 이어지고, 전국으로 확장되어 동학조직 내부적으로 정치적인 갈등이 발생하여 동학농민전쟁 중 1894년 8월 기준으로 호남에 기준으로 한 세력을 남접, 호서에 기반을 둔 세력을 북접으로 함

◦ 동학운동에서 전봉준을 비롯한 많은 동학농민들이 처형을 당하고, 동학을 종교적 체계에서 시작되기보단 농민봉기 수준이었으며, 이때의 기준으로 남접은 몰락하고, 호서의 북접의 세력을 중심으로 동학 및 천도교가 세력을 확장함

 

□ 동학운동에서 천도교로 전이과정

◦ 1898년 2월 최시형이 체포되어 6월에 처형되자 동학 내부에서 큰 문제가 되었고, 동학운동의 존속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노선으로 갈등을 빚게 되고, 북접 출신의 지도자로 손병희와 김연국 계열이 양대계파로 주축을 이루고, 북접의 거점이 호서지방이기에 평안도 지역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이와 달리 남접은 북접의 활동노선과 전혀 다른 노선으로 독립운동으로 뛰어들고, 천도교의 본신은 동학의 북접 손병희에 의해 체계화

◦ 손병희의 천도교 집권에 따라 천도교는 기존의 외세침략과 농민봉기 등의 운동보다는 새로운 길로 가기 시작하는데, 손병희는 자민족적인 동학운동에서 시대적 흐름을 따라 문명을 받아들이고, 계몽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시도를 추구하여 일본을 비롯한 외국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추구하며, 일본에 유학가게 되면서 일본 내의 친일세력과 친분을 쌓게 되며, 실제 일본국가의 주요정치인들과 교류를 시작

◦ 손병희가 받아들인 새로운 종교적인 체계는 주로 일본의 근대문명화에 따른 신문화체계이고, 메이지유신에 따른 군국주의 및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며, 실제 그것을 천도교 이념으로 활용하여 신지식인으로서 근대문명을 조선에 도입하여 부국강병이 중요한 사실을 인지했으나, 문제는 단순히 그것을 바라는 것이 하나의 정치적 책략(일본의 조선침략)에 해당하는 것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음

◦ 손병희가 천도교를 정식 종교화로 선포한 것은 1905년 을사불평등조약 이후이며, 천도교 정식 종교선포 이전에 동학은 국가적으로 불법이었으므로 불법 단체에서 합법적 종교단체로 인정받으며 종교 활동을 시작하고, 본래의 최시형과 최제우의 동학사상에 따른 자유와 평등을 기반 하기보단 손병희 자신이 하나의 절대적 종교인으로서 중앙집권화로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천도교대헌 1장에 대도주에 관한 장에서 “제1조 천의 영감으로 계승함, 제2조 도의 전체를 통리함, 제3조 교를 인계에 선포함.”하여 절대적으로 손병희가 천도교의 모든 것을 주도하게 됨

◦ 남녀노소 내지 신분과 관계없이 평등을 추구한 동학운도이나 실제 천도교는 하나의 가족의 작은 그룹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기를 포교했고, 집안 가장이 중심으로 되어 화목과 가정을 중시하게 되는 유교적인 가치관 내지 일본 메이지유신과 같은 천황중심 체계를 손병희 자신으로 연결하여 천도교는 일본적 서구를 지향한 문화체계가 특징이었으며, 또한 그것이 하나의 한계점이었음

◦ 을사불평등조약에 따른 일본에 대한 불만의식에 따라 종교가 새로운 형태를 발생되는데, 나철 및 오기호 중심으로 개설된 대종교는 민간신앙인 단군신앙을 필두로 민족주의 종교체계를 만들었으며, 이후 많은 독립투사들이 대종교 신도로서 항일항쟁을 하게 되나, 천도교는 항일항쟁보단 종교적 구축에 집중 투자하였으며, 특히 종교계몽 운동으로 문맹을 타파하고 지식을 가르치는 근대문화에 큰 역점을 둠

◦ 초반 천도교 활동에서 손병희 및 지도부들은 일본에 대한 신뢰가 속임수란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여 1904년 러일전쟁에서 손병희는 일본군에 군자금을 지원해주고,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큰 외교 및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지원에 따라 일본이 천도교에 대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실제 을사불평등조약에 따라 조선에서 손병희의 활동이 자유롭게 되자, 정치적인 세력으로 통해 천도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송병준과 같은 친일정치인과 연계하여 일본이 조선의 발전이 될 것이라 여겼으나, 그것은 1910년 한입병합이란 경술국치일로 기해 무용지물이 되어버림

 

□ 천도교의 일제강점기 시대의 활동

◦ 천도교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민족이 스스로 만든 종교이며, 또한 계몽주의사상을 발휘하여 보성학원을 설립하여 많은 민중들이 합세하게 되었으며, 천도교 주요인물이며 추후 친일행각에 매우 협조적인 최린이 입도하게 되고, 당시 1916년 일본인 다케우치는 천도교의 신앙인이 107만명이 넘는 것으로 기록되어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

◦ 일제강점기 시대에 천도교는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보다는 주요 활동은 여전히 종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었으며, 초기 조선총독부에서는 천도교가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일반 종교단체보다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간주하였기에 한일병합 이후 천도교는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으나, 손병희를 비롯한 지도부는 친일활동에 따라 메이지신궁 건축비 기부 및 각종 활동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행동을 함

◦ 천도교는 1910년대 주요 활동범위가 주로 문명인으로서 자질과 계몽이 위주였으므로 지식을 전수하거나 산업사회에 어울리는 기술전도, 생활하면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제도적인 요소를 전파하여 근대화적인 요소를 강조했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음

◦ 동학의 2대째 교주인 최시형의 장남 최동희는 손병희에게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요구했으나, 손병희는 이를 거부하고, 세계의 흐름을 계속 주시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과 복잡한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있다가, 미국 대통령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내지 개방화로 통해 들어온 자유주의 내지 사회주의 등 각종 새로운 사상들이 민중들에게 전파되어 민심이 새로운 계기에 기대를 걸자 천도교 지도부 역시 그런 민심을 배제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전환점을 고심하게 됨

◦ “3·1 운동”과 관련하여 일본에서 “2·8 독립선언문”이 발표되면서 민족문제를 외면할 경우 천도교는 조선인들의 신뢰를 잃게 되는 딜레마 속에 “3·1 운동”에 참여하기로 하고, 33인 명단에서 천도교인 명사는 15인으로 거의 반 정도 차지하였으며, 이후 천도교 지도부가 일본에 체포되어 심문할 때 천도교의 입장은 민족의 독립과 자족보다는 조선인들이 일본인과 너무 다른 처우와 불평등한 사회적 차별을 받으므로 거기에 대한 선처를 바라는 정치적 해석으로 일본에게 요구함

◦ 천도교는 “3·1 운동” 이후에 전개되던 무력항일투쟁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이런 개량주의적인 행태는 결국 친일이란 반민족행위에 대한 하나의 연결성을 가지게 되며, 당초 손병희를 비롯한 지도부의 생각은 만약 조선의 독립되어 군주제가 아닌 삼권분립의 입헌국가가 될 경우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주요 지도부를 장관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천도교의 정치적 독립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종교적 맥락으로 활용하고자 함

 

□ 천도교의 내부 분란과 친일행각

◦ “3·1 운동” 이후 손병희는 여전히 실세였으나, 천도교 내부에도 신지식인들의 참여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시작되었으며, 보수적인 관점은 중앙집권적인 체계를 유지를 목표로 하고, 진보적인 관점은 지방에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며, 또한 민족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와 소극적인 태도로 구분하게 됨

◦ 이후 천도교는 구파와 신파로 분리되는데, 구파는 이종린계고, 신파는 최린계로 최린계는 일제와의 타협 속에 자치운동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종린계는 사회주의 내지 다양한 사상을 통합하여 일제와 비타협적인 노선이었으며, 대부분 권력과 재단은 최린계가 독식하고 있었으며, 이후 천도교는 각자의 경로로 돌입하게 됨

◦ 천도교의 혁신파인 구파는 최시형의 장남이자 손병희의 조카인 최동희가 주요인물로 만주를 근거지로 한 무장투쟁론과 외교론을 결합한 민족운동 방략을 주목하고 있으며, 연해주 망명 이후 신채호, 유동렬, 김좌진, 황상규 등과 같은 민족독립운동가와 교류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 자신의 뜻과 어울리지 않아 실망한 후 러시아소비에트 영수인 레닌을 직접 만난 경험을 살리기로 함

◦ 실제 조선인 중에 러시아 소비에트에서 개최한 코민테른에 참석하여 고려혁명당이란 명칭이 있었으며, 레닌을 만나 제3국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받는 일화도 있으나, 1924년 1월 레닌이 뇌일혈로 사망한 후 스탈린이 정권을 잡자말자 레닌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기회도 없어지고, 게다가 러시아소비에트는 1925년 1월 20일 “소일상호관계의 기본원칙에 관한 협약”으로 조선의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철회로 끝냄

◦ 또한 러시아 소비에트는 천도교가 코민테른 지휘 아래 소속되는 게 아니라 자치적으로 활동하기에 지원을 해줄 수 없으며, 일국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주변 식민지국가의 문제와 제국주의국가들의 횡포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게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동희를 비롯한 구파세력들은 러시아 및 중국 등의 연계로 민족운동을 하려는 외교활동으로 통해 민족운동노선이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 자신들의 원칙을 중심으로 활동할 수 있는 큰 의의를 보여주었음

◦ 최린을 비롯한 신파들은 농민들의 생활을 위해 정치적인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구파에서 “6·10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발각되어 검거선풍에 큰 고비를 치루고, 신간회 활동 등으로 꾸준히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으나, 세력의 열세로 인해 신파와 같이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활동하여 멸망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갈등에 놓이게 되면서 친일성향의 신파로 흡수되고 천도교는 민족종교보단 친일의 앞잡이로 전략함

◦ 신파의 친일행각은 초반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나, 현실을 타파하기보단 적절한 타협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나 타협부분이 현실 순응적이고, 일본의 태평양전쟁 이전 검거 및 탄압사태에 대해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그런 행각을 보이기 전에 신파는 국내의 사회주의 진영 및 좌파 언론인에게 친일행각 및 반민족행위에 대한 비판을 받기 시작하고, 사상적 기반이 없는 것에 대해 서로간의 언쟁을 하기 시작함

◦ 신파는 구파를 흡수한 후 친일세력으로 급부상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의례 및 행사를 일본군의 전쟁자금 및 물적 지원을 해주며, 천황에 대한 숭배와 더불어 친일적인 요소를 덧붙이기 위해 손병희가 과거 일본에 가서 친일명사 및 일본정치인과 친하게 지낸 것을 강조하고, 특히 러일전쟁에 전쟁지참금을 준 것을 강조하여 일본 당국에게 호의를 보여줌

◦ 일본조선총독부를 천도교는 계속 감시하고 탄압했으나, 그런 지도부들의 이익이나 이권에 대해서는 용인하며, 친일행위는 천도교의 민족적 종교로서 지도부가 이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한 하나의 유지형태이고, 노골적인 친일행각은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일본에 추수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한 선발대원을 모집했으나, 일본 당국의 거부로 계획이 성사되지 못할 정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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