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제 -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이동언 지음 / 독립기념관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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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 그리고 모든 것을 바친 분들에 대해 순국열사라고 한다. 순국열사라고 해도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판단해야할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흔히 어느 자가 이런 말은 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라고 말이다. 흔히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는 말은 아주 조심해야 한다. 흔히 전체주의적 요소를 지닌 파시스트들이 그런 말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히틀러나 무솔리니 그리고 일본과 같은 침략 국가들도 그런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정말 그게 필요한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 그럴 때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주권이 우리에게 있을 때가 아니고 침략자에게 있을 때에 말이다. 지금을 생각하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란 말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는 것 같다. 조국을 위해서라는 것은 국가를 위해서고, 민족을 위해서는 과연 누구를 위해서란 말인가? 이 모순적인 2가지에 대한 명제에서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모순을 볼 수 있다. 국가를 위해서와 민족을 위해서는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2가지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은 모두 비명횡사 내지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서평을 적는 순간, 삼일절 전을 맞이하고 있는데, 1919년 3월 1일에 그 운명을 넘어 하나의 민족적 존재성을 알리고자 하던 비운의 날에서 백산 안희제 선생에 대한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예전에 천도교 활동에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에서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요인들이 많았는데, 사실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부터 시작하여 천도교를 생각해보면 손병희 죽음과 최린계의 득세로 천도교는 일제 앞잡이 된 점을 생각하면, 불운한 형태다.

 

5월 5일 어린이날을 소파 방정환 선생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겠지만, 천도교 종교의례에서 일본 군국주의적인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나 각종 일제행사의 찬조 등을 생각하면 천도교의 오명이 참 크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을 대조하여 대종교에 대해 조금 조사하다보니,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이 수도 없이 나왔다. 그 중에서 백산 안희제 선생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내가 사는 지역에 백산기념관이 설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지난 과거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가족을 버리고, 재산을 탕진하던 분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리지는 점에서 안타까우나 그 자리를 대신하여 엉뚱한 인간들이 오는 것도 이상하다. 독립운동 중에서 무장 투쟁한 분의 후손이라 주장한 분이 그분을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자들과 같이 있다는 점에서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다. 진짜 독립운동 하던 분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있는가? 아무튼 백산 선생에 대해 조금 책으로 보니 엄청났다.

 

모든 국가나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것은 인력이나, 그 인력을 운영하기 위한 참모진과 자본이다. 자본력이 없으면 식량과 무기, 기타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 자금줄의 반 이상을 백산 안희제 선생이 했다는 점이다. 한국정부의 최초라고 볼 수 있는 임시정부와 한국군의 전신의 광복군조차 그렇다. 백산 상회에서 운영한 상업 활동으로 자금이 독립운동에 사용하고, 언제 한 번 가족들이랑 경주에 나들이로 놀러갔을 때 최준이란 경주 최가 부자 댁에 가본 적이 있는데, 최준은 독립군을 위해 자금을 대어 주신 분인데 그가 안희제에게 건네준 돈과 독립 운동하는 분에게 전달된 돈의 액수가 같았다고 한다.

 

중간에 착복하거나 혹은 많은 변절자가 있던 시기, 그런 세상에 백산 선생은 위험을 무릎 쓰고 계속 활동을 했다. 보면서 참 치밀한 분이었던 것 같다. 변장을 하면서 일본의 옷을 입고 다닌 적이나, 술을 마시면 항상 일본여자를 옆에 끼고 마신다는 점이다. 감시가 살벌한 장소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들키지 않기 위해 비밀경사인 대동청년당을 결성할 때 이름이나 조문들을 남기지 않고 오직 말로서 전달하여 그 누구에게 들키지 않고, 일제의 눈을 피했다. 비밀결사는 결사조직보다 결사운영이 더 힘들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백산 선생의 활동을 보니 매우 철저하게 관리해온 점과 그 와중에도 부산경남지역의 힘없는 서민들의 어려움을 돕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일제강점기는 일제와 독립운동의 투쟁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자본력과의 투쟁도 있었다. 일본이 국내 상권을 잡아내기 위해 경제침략도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친일하던 자들은 조선총독부나 야쿠자, 경찰 등을 이용하여 부당하게 조선 민중을 착취했고, 사기를 쳤다. 백산은 이런 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대대적인 시위와 부당함을 알렸고, 여론을 통해 해결하였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집들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도와주기도 했다.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어려운 동족의 어려움을 보살펴 준 것이다. 생각하면 국가란 땅, 국민, 무력이란 3가지 중에서 가장 무엇이 필요한 가에서 공자나 혹은 많은 정치철학자들은 국민이라고 할 것이다.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 국가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이 없으면 국가를 재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상해임시정부 역시 주권을 상실해도 대한민국 정부의 전신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조직하여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독립군조차 모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로하여 별세하고, 인간의 천수도 누리기 전에 총칼에 맞고, 고문에 쓰러져 갔다. 그런 비탄의 시간조차 억울한데, 지금의 현재시간에서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최근 일본의 극우행동에서 백산 선생님이 힘들게 기울인 노력이 그저 물거품이란 사실은 허무한 사실이다. 진심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민족과 국가의 자유와 평화를 바란 분들은 이슬처럼 사라져가는 대신 그들을 업신여기고 일본과 결탁한 자들은 떵떵거리는 모습은 씁쓸하다.

 

친일하던 자들의 후손이 일제에게 받은 재산을 국가에 반납되지 않기 재판을 하는 모습에서 과연 인간이라면 부끄러움이 없는지, 최근에는 자기 조상이 친일한 것을 자랑하는 인간이 있다고 들었고,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은 한국이 독립하지 않아야 했다는 말도 한다. 개인적으로 일본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만약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그런 만화와 애니메이션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군국주의가 유지되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서다.

 

우리나라 독립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이 놀라는 점은 한국인만을 아니라 일본의 국민조차도 염려한다는 점이다. 죄 없는 일본국민들을 다른 다라의 국민을 괴롭히는 범죄자를 만든 것도 모자라 전쟁의 위기에 몰아넣어 그들을 죽음의 땅으로 집어넣는 것조차 말이다. 아직도 그런 망언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일본의 무리를 볼 때마다 요새 정말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 점에서 백산 선생은 임오교변(1942년) 사건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43년 8월 순국한다.

 

백산 선생이 유언으로 내리기를 “앞으로 2년 후면 일본은 패망할 것이요. 오방은 독립될 것이다. 너희 형제들이 앞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하였을 때에는 너희 등의 양심에 물어 처신하라. 고상의 각 공지 산에 과목을 심으라.”

 

백산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지식인이며 경제인이었다. 경제활동으로 민족의 위해 독립운동을 했고, 어려운 민중을 도움을 주었다. 지금의 경제활동은 제로섬 게임과 같이 승자독식과 패자멸망이란 아쉬운 기로를 생각하면 백산 선생이야 말로 우리가 존경해야할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경제인이다. 근대화라는 것과 근대철학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근대철학이란 근대화의 기본정신이 되었지만, 근대화는 근대철학을 완수하지 못했다. 근대철학은 계몽정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백산 선생의 계몽정신은 합리주의를 넘어 합당한 것을 추구하는 민족의 근대 지식인의 참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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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책만드는집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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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이란 작품은 작가 본인의 작품 중에 상당히 초반에 만든 작품이다. 그 이후에 나온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같은 작품을 생각하면 <도련님>은 장편의 소설보단 중편의 소설에 가까운 분량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몇 권을 읽으면 생각하지만 그의 소설은 등장인물이나 주변 배경적 조건이 복잡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보통 주인공과 그 주변의 가족, 그리고 몇 몇의 주변인물 정도이다.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인물과 공간에서도 그의 소설은 상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작은 세계만을 다루는 것 같으나, 사실 그가 다루는 소설은 그렇게 작은 세상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도련님>이란 작품은 청일전쟁 전후 시대에 어느 한 남자가 물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타지의 학교의 수학교사로 부임 받아 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야기를 보면서 기차가 생긴 것이나, 혹은 학교 미술교사가 마돈나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아 일본에 서양의 근대문물이 막 도입되던 시기에서의 냉철한 그의 눈썰미도 보인다.

 

우선 작품 내에서 주인공인 도련님은 진짜 도련님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어린 시절 매우 말썽을 많이 피우고, 장난을 많이 쳤으며, 장난의 도가 지나치다 못해 자기 손가락에 칼을 베게하거나 장기를 두다가 형을 때리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집안에서 문제아로 낙인이 찍히고, 아버지로부터는 의절선언까지 들었다. 도중에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것 역시 도련님의 행실이 바르지 못해서라고 원망을 듣기도 했다.

 

삶의 목표나 자신의 길을 찾는 것보다 오로지 장난치며 시간을 보내던 도련님은 중고등학교를 졸업 후에 별 생각도 없이 물리전문학교를 진학하고, 졸업하여 수학교사로 부임되면서 그저 주변 상황이나 시대적 흐름과 관계없이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사람처럼 나온다. 그래도 이상하게도 도련님에게도 유일한 아군이 있었다. 도쿠가와 에도시대의 고귀한 귀족의 딸로 태어났으나, 메이지유신 이후 귀족가문이 몰락하면서 도련님 집에서 하인으로 고용된 기요가 있었다.

 

늙은 할머니인 기요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련님에 대해서는 아주 지극정성이다. 다정하게 말을 붙여주고, 필요할 때는 용돈과 간식도 주었다. 도련님을 무엇을 할 때마다 칭찬을 해주었고, 옛날에 태어났다면 매우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격려해준다. 겉으로 본다면 마치 철없는 아이를 두고 오냐오냐 하면서 길러주는 할머니 같은 인물이 기요였다. 그래서 도련님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기요 만큼에 대해 매우 특별히 생각하였고, 시코쿠 쪽의 중학교에 가면서 기요를 두고 갈 순간, 만약 거기 간 뒤에 언제 기요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도 했으며, 가는 날 우는 기요를 뒤로 한 채 떠날 때에도 혼자 마치 눈물이 나올 것 같다고 고백한다.

 

그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한 도련님, 오직 기요에게만 사랑받은 도련님, 이제는 고향의 품을 떠나 낯선 곳에 가서 혼자만의 삶을 꾸려야 했다. 도련님의 새로운 인생에서 그가 살아온 행실은 전혀 좋지 못한 것이기에 잘 지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코쿠에 있는 중학교에 오면서 도련님은 어느 평범한 부임 교사처럼 행동하기보단 다른 행동을 보였다. 튀김우동을 먹고, 경단을 먹으며, 억지로 누군가 같이 할 것을 권하면 응하지 않고, 혼자 원하는 것을 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좋은 인상을 줄 리가 없다. 직설적인 행동과 남의 눈치를 억지로 맞추지 않아 그는 학교 내의 선생이나 학생들에게 좋지 못한 인물로 찍혀 있었다. 특히 잠자고 있는 방에 학생들이 집단으로 장난친 것과 학생들의 장난을 억지로 잡아 해결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평범한 학교선생이 아닌 것으로 나왔다. 또한 같은 수학교사인 센바람에 대해 처음에 잘 지내는 것 같더니, 하숙집의 주인인 이상한 골동품을 강매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하자 하숙집 주인의 앙심으로 처음 소개해주었던 센바람에게 집에서 쫓겨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도 했다.

 

원하지 않는 학교생활과 원만하지 못한 일상에서 도련님이 자신의 학교에 뭔가 있다고 여긴 것은 낚시하러 가면서다. 빨간 셔츠 교감과 미술교사 딸랑이와 같이 낚시하러 가면서 자신에 대한 험담과 더불어 센바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다. 게다가 새로 이사 간 하숙집으로 가면서 끝물 호박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끝물 호박선생은 도련님이 학교 내에서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아니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하던 사람이었다.

 

끝물 선생은 집안이 쇠락하여 약혼녀와 결혼하지 못하게 되고, 억지로 다른 지역으로 부임까지 가야했다. 집안이 쇠락한 것도 모자라 약혼녀와 부임 문제에서 도련님은 그 내막을 알게 되고, 때마침 센바람도 골동품을 강매하려고 하던 하숙집 주인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알면서 다시 도련님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어떻게 보면 도련님은 처세술에는 매우 능하지 못한 인물은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은 남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도 싫어하며 도리어 솔직한 것을 좋아한다.

 

기요가 말한 것이나 스스로 도련님이 귀족집안의 후예라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는 점에서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사회가 어떤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소문을 듣고 흘리고 남의 흉을 보는 좋아하고, 인간이 인간으로 가져야 하는 인간성에서 도련님으로 통해 본 사회란 위선이 가득한 곳이었다. 정규학사를 나온 사람들이 근대사회에서는 높은 자리에 있었고, 기요와 같은 인물은 막부시대 귀족의 후손이나, 몰락한 이상 그저 하인에 불과했다. 근대문명의 유입과 더불어 메이지유신은 과거와 근대의 혼란 속에서 인간의 정신을 발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퇴화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교양인으로서 행동하기보단 오히려 어설픈 지식으로 잘난 척하고, 그것까지 좋다 하더라도 남이 곤란한 상황을 이용하거나 혹은 억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도련님이 있는 마을에서 큰 행사가 있었는데, 중학교와 사범학교 학생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싸움이 일어나면 교사들이 말릴 생각 없이 그저 도망치기 바쁘고, 오히려 말리던 도련님과 센바람이 중간에 맞으면서 싸움 말리던 사람들은 싸움을 끝을 내려고 했다. 덕분에 경찰에게 연행되어 간단히 취조 후에 풀려났다.

 

그런 상황에서 신문에서 도련님과 센바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2사람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이 문제로 센바람은 학교에서 강제로 사표를 쓰게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의 싸움을 말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삼아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을 찍어 내는 행동에서 <도련님>의 소설에서는 시대가 변했다고 하여도 사람들의 이기심과 질투는 변하지 않고, 오히려 지식인이어야 할 이들이 지식을 올바른 곳에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흐름을 보고 <도련님>이란 소설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고, 사람들의 입이 싸다는 점, 타인을 질투하는 것도 모자라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짓, 남의 작은 행동에는 큰 망신을 주면서 정작 그 망신을 주려는 자들은 도덕적으로 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이때까지 자신의 뜻대로 솔직하게 행동하는 도련님이 훨씬 인간다워 보인다. 끝물 호박선생이 다른 곳에 가면 자신의 월급이 올라가는데도, 그 돈을 받지 않는 점이나 혹은 끝물 호박선생을 궁지로 내몬 딸랑이와 빨간 셔츠를 골탕 먹인 것도 그렇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은 매우 작은 공간의 사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이야기가 사소하지 못하게 여기는 것은 시대적 흐름에도 사람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도련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여기저기 일어나는 것이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고, 신시대의 지식인들이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할 도리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오히려 골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지금 만약 도련님이 현실에 있다면 더욱 곤란한 삶을 살지도 모른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으면 딱히 에도시대를 찬양한 사람은 아니나, 적어도 그의 글에서 에도시대의 삶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적어도 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 맞게 노력하려 했으나, 이제는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19세기 한국의 위대한 철학가이면서 정치인이던 다산 정약용 선생 역시 시대의 흐름에서 농민을 괴롭히고 착취하던 양반과 관료들의 특권의식을 비판했다. 그런 점의 그 분의 시조 한편을 보면 문구에 단군의 시대보다 못하다 한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과거로 통해 보는 현실에서 보는 사회와 그 사회에서 보는 인간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인간은 잘 변하지 않은 존재라고 한다. 특히 나쓰메 소세키는 그런 시대의 변화에도 억지로 따라가도 거기에 묻히지 않으려 했다. 고집불통인 도련님과 같은 인물이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하나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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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마 이리야 1.2권 박스세트 (합본판) - 전2권 - Novel Engine
히로야마 히로시 지음, 정홍식 옮김, TYPE-MOON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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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stay night>라는 라이트노벨,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이 있다. 최근에 <fate zero>라는 후속편까지도 나온 인기 있는 작품이다. 그런 작품을 패러디 내지 혹은 새롭게 각색한 작품이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원작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등장인물이나 능력이나 또는 기타 여러 가지 유사점은 있어도 기본이 되는 이야기 전제가 다르게 진행되는 것이다. 흔히 이런 이야기는 스핀물이라고 하나, 기본적으로 원작을 두고 그 바탕을 재미를 추구한 것이라면 이야기의 패러디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원작이었던 <fate stay night>의 주인공은 세이버와 시로였다면, 이것을 새로이 각색한 <프리즈마 이리야>에서는 이리야와 미유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작품 형태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이 중에서 <프리즈마 이리야> 만화는 시리즈가 총 2권, 애니메이션은 10화로 구분되어 있다. 내용을 보는 순간, 전형적인 마법소녀물로 등장한 점이고, 원작과 다르게 인물설정을 조금 다르게 했고, 적대적 관계 내지 혹은 우호적 관계도 조금씩 다르게 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모든 이야기를 지닌 서사구조에서도 무엇이 동기인지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중요하다. <프리즈마 이리야>에서는 처음 장면은 일본으로 건너온 토오사카 린과 루비아젤리타 에델팰트가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서로 다투는 것부터 시작이다. 캐릭터 설정에서 토오사카 린은 검은 트윈 테일의 소녀이고, 에델팰트는 노란 꽈배기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이다. 흔히 전형적으로 츤데레 내지 약간 융통성이 없고, 고집쟁이 캐릭터라는 점이다.

 

출발지점인 영국부터 서로 아웅다웅 싸우던 사이라서 비행기가 일본에 도착하여도 마찬가지다. 그러는 사이에 2사람이 마법소녀의 임무로서 받은 마술봉을 제대로 활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싸우는 용도로 사용하다, 마술봉이 그것을 참지 못하여 각자가 원하는 주인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 주인들은 아직 어리고 어린 초등학교 소녀들에게 간다. 여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내용은 영국에서 온 츤데레 소녀들이 임무를 도와주면서 발생하는 점이나, 작품에서 중요한 인자는 이리야가 애니메이션 중에서 마법소녀 장르를 매우 좋아한다는 점이다. 마법소녀를 동경하고, 그렇게 되고 싶은 이리야였으나, 막상 마법소녀가 되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며, 게다가 토요사카 린이 옆에서 계속 참견하는 바람에 엉망진창인 상황이 된다. 그러나 이리야에게는 마법소녀의 자격이 있다고, 마술봉인 매지컬 루비가 말한다. 그것은 소녀의 깊은 마음에 숨어 있는 연심이라는 점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소녀가 진정한 마법소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작품을 보면 이리야는 자신의 집에 살고 있는 시로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리야는 초등학생, 시로는 고등학생, 나이가 차이가 나고, 아직 어린아이인 이리야의 입장에서는 쉽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짝사랑의 마음이 마력의 근원인가? 어째든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린 아이들의 관점을 새로운 부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느 상황과 정보를 눈으로 통해 받아들이고, 사고하여 받아들이고 행동하지만 아이들의 경우 조금 다를 수가 있다. 아이들은 지금 분명 의식이 깨어있어서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 동공으로 확인될 수 있으나, 아주 미미한 시간에서는 의식이 순간적으로 잃는 경우가 있다. 그런다고 병이 있는 것도 아니나, 그런 짧은 순간에 실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의 모습을 본다. 그때 그 환상의 잔영이 보통 어른이라면 믿지 않을 꿈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어린 아이의 경우 그것이 환상이어도 현실과 구분하기 어렵다고 한다.

 

사라지는 것이 곧 잔영이나 그것이 하나의 기억으로 남게 되어 착각이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잔영의 요소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비록 어린아이지만 어른과 대등한 힘을 가지고 싶어 하며, 그런 존재로 되기를 바란다. 특히 소녀의 경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이 착각이 될 수 있어도 뭔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마법소녀라는 환상은 몸과 마음이 아이지만, 몸과 마음이 어른이 되고 싶은 소녀의 보상심리다.

 

<프리즈마 이리야>에서 이리야는 특별히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초등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소녀이다. 그런 소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시로 오빠에게 특별히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없다. 마법소녀라는 환상의 변신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위한 상징이다. 그래서 이리야는 토오사카 린처럼 마술을 배우지 않아도 초반부터 매우 강력한 마법을 구사한다. 마법을 구사하는 이리야는 모두 의아한 표정에서 그저 마법소녀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자신이 특별하지 못하니 뭔가 특별히 무엇을 하고 싶다. 착각의 망상, 즉 이매진이 하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 현실이고 싶다는 점에서 마법소녀 이리야는 능력을 발휘한다. 마법소녀 장르는 과거에도 그러나 앞으로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장르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어린 소녀들도 자신이 가진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대리적으로 만족시킬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같은 마법소녀인 미유는 제대로 임무를 수행해도 한계점이 오는 것이다. 마법소녀라는 현실의 한계는 인정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망상으로 한계를 뒤집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프리즈마 이리야>는 마법소녀 장르에 매우 충실히 진행하는 작품이다. 우선 코믹적인 요소와 처음 라이벌이던 미유와 이리야가 서로 친구가 되는 점, 시작과 끝이 다시 되풀이 되는 상황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망상과 환상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상상력이 바탕이다. 장르로서 존재하는 마법소녀는 적어도 꿈과 사랑을 전해주기 위한 매개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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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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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식당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저녁을 먹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상이야기 흐름이 나왔다. 나 같은 경우, 약자의 편에 대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가치관은 사람들에게 다소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본래 그것이 헌법이나 혹은 자유주의적인 철학이다. 왜냐하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늘 가지고 다닌 프랑스혁명의 영웅이자 공포정치의 최고에 군림하던 로베스피에르조차도 인정한 부분이다. 그가 파리의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강조한 부분이 있다. 자유란 자신에게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있어야 그 자유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말이다.

 

자유라는 것은 결국 자기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인간의 최고의 가치이며, 진리이다. 하지만 그 자유라는 것이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사항이라고 하여 타인에 대한 입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튼 그 친구는 나보고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라면서 예전이면 한국전쟁 시기에 태어났으면 공산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딱히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분법적인 비난보단 그런 나의 생각에 대해 말한 것이다. 나는 약자에 대한 입장에 대변하는 것이 본래 자유주의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그것은 자유주의 사상이 기본이라 했으나 친구는 아무래도 시대가 바뀌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으나, 실제 자유주의 철학사상으로 이미 18세기 장 자크 루소와 더불어 19세기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그리고 20세기에는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 등과 같은 사상을 일반인들이 알기란 어렵고, 책이 있다고 해도 읽지를 않으며, 읽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미시적인 접근법에서는 나는 무지하고 어리숙하나, 거시적인 구조와 고찰에서 나는 친구들보다 밝다. 자기 앞날조차 제대로 감지하기 어려운 입장에서 큰 구조를 본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생각해보면 많은 학자들이 그렇지 않은가 싶다. 자신의 입장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겪던 사람들이 결국 큰 이름을 날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다고 하여 내가 그런 사람들과 같이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야 말로 오히려 자신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 같은 경우 어떤가? 그렇게 사는 것이 재미없다고 여긴다. 늘 같은 일상과 생활, 대한민국 소시민으로 태어나 그렇게 살아가는 나로서는 일확천금의 기회조차도 없다. 게다가 나는 로또복권과 같은 행운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현실에 낙관적인 기대나 희망도 그다지 가지지 않고, 그런다고 현실에 대해 뭔가 할 수 있다는 의지나 추진력이 없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정말 무기력하고 지루하며 비관적인 관념에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 다소 그런 무기력한 일상에 대해 지쳐있으며, 비관적인 관념이 내 의식을 자리 잡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꼭 나쁜가라는 생각에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는 분명 좋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 못하고 나쁜 것이라고 여긴다.

 

르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는 생각하는 것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라고 의문을 던지면 인간은 자아에 대해 들어가고, 자아에 대해 들어가면 그 자아에 대한 형성의 주변을 보기 시작한다. 즉 인식과 존재에 대해 각인하면서 인간은 본인만 아니라 타인, 그리고 타인들이 사는 사회와 그 사회가 존재하는 국가와 인류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이란 책은 바로 이런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다른 책과 달리 매우 경험적인 저자의 본인을 통해 현실의 모순과 그늘 그리고 그것을 보는 눈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예전에 가라타니 고진이란 일본 문화비평가의 책을 읽을 적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근대문학의 종언>이었다. 읽은 시기에는 상당히 어려웠고, 단순히 문학을 떠나 하나의 사회와 정치 그리고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때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나쓰메 소세키였다.

 

지금 일본의 천엔 지폐의 얼굴이 새겨진 인물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것을 생각하면 나쓰메 소세키는 만엔보다 높은 가치를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서적을 읽는 순간 지식인이 가지는 세상에 대한 인식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의 저서를 읽어보면 일본이 러일전쟁 전부터 하여 1916년 사망 전까지 많은 저술을 남긴다. 그의 저서에 담긴 근대문학에서 무엇을 말하는가? 생각해보면 나쓰메 소세키는 근대문학이라고 해도 근대문학 치고 조금 다른 감이 있다.

 

그의 서적에는 근대라는 것에 대해 같이 조류를 타는 것에 긍정적인 요소보단 오히려 부정적인 요소가 강했다. 특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같은 경우, 작품 소재가 러일전쟁 이후에 나온 것이고, 러일전쟁에 대한 승리로 모두가 들뜬 상태인 반면, 작품 내의 주인공은 오히려 그것에 대해 무관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장병을 위한 모금활동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러일전쟁의 승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눈으로 본 것이다. 바로 근대라는 것은 거대한 서사 즉, 인간이 인간 본인에 대한 가치보단 국가와 사회라는 하나의 거대한 틀에 맞추어 가는 것이다.

 

일본 근대문명이 결국 군국주의의 길로 열렸고, 메이지유신은 에도시대의 도쿠가와 정부를 천황중심의 군사국가로 변모했다. 기술의 발달과 세계의 흐름에 인간이 거슬러 갈 수 없어 거기에 억지로 흘러가는 소시민의 모습에 나쓰메 소시키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좋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런다고 에도시대나 혹은 이전시대를 좋다고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 자본주의라는 근대화적인 경제체계가 들어오면서 인간의 정신세계가 점점 가라앉는다고 본 것이다. 문명이란 과연 인간에게 좋은 방향을 준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인간을 더 망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런 사고는 18세기 장 자크 루소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발견한 것처럼 근대문명이 결코 인간에게 좋지 아니한 것을 안 것이다. <고민하는 힘>의 강상중 씨의 생각대로 그도 느끼는 것이 바로 인간의 근대화와 더불어 인간이 가진 벽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이 결국 인간을 소외와 좌절로 이끄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결국 하나의 도구이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안정성을 위해 낯선 이방인을 외면하고 차별하는 것인가? 강상중 씨는 일단 한국인이었으나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교포였다. 어린 시절에는 일본에서 조선인이라고 멸시받고,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왔다고 낯선 눈으로 보는 것도 모자라 차별당할 수 있다.

 

그것도 어려운 경제여건으로 가난이라는 고통도 짊어지고 살았을 것이다. 차별과 가난 그것이 지닌 강상중 씨에게 다가온 문학가와 사상가가 바로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문학가 겸 문학비평가였고, 막스 베버는 경제학자다. 개인적으로 막스 베버에 대해 읽어본 적은 없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도서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본 자본주의정신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는 영국의 경제학자가 아니라 도덕철학자였다.

 

그의 유명한 경제학의 성서라고 볼 수 있는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는 시장경제에 대해 논하기를 “그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경쟁이 부를 만들고 풍요로운 사회를 실현할 수 있으며, 설사 경쟁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 속에 도덕과 윤리가 존재하는 한, 이른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서 불평등과 불균형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반해 막스 베버는 “마지막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 이들은 인간성이 과거에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이미 올랐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할 것이다.”

 

<고민하는 힘>에서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그들은 바로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즉 인간의 이성보단 동물적인 욕심이 합리적인 이성이 되어버린 존재를 두고 말한다. 생각하면 논리에 의해 작동되는 이성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논리라는 것은 자기의 손익득실관계에서 명확히 자기중심적인 형태로 이어지고,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이기심이 만일 그 논리와 부합될 경우 인간이 주어진 논리란 자기합리화 시키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가령 힘이 있는 자가 약자에 대해 부당한 행위를 하여 사익을 챙겨도 그것은 하나의 논리로 이어지는 합리성으로 이루어진 절차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본래 중세후기의 유럽에서는 근검절약이었지만, 그게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근검절약정신이었으나, 추후에는 타인에게 전가되어 공장의 근로자에게 전개된다. 그런 정신은 타인에게 병들게 하여 처음에 육체가 다음으로 정신이 파괴된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근검절약은 타인에게 강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 물론 타인에 대한 근검절약과 달리 자신에겐 온갖 보석과 고급 의상과 향수로 도배로 한다. 이런 점을 많은 책에서 지적한다.

 

18세기 프랑스대혁명과 영국 산업혁명 이전에는 계급사회가 확연히 존재했다. 그것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계급이 귀족이나 왕족, 성직자라는 신분이 되지 못하면 그런 상징적인 요건을 가질 수 없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많은 제약과 통제가 따랐다. 그런데 이제 계급이 평균화되었다고 하면 계급을 정하는 것은 바로 재물의 차이다. 그래서 갖은 사치가 이루어지고, 그 사치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책에서도 그런 내용은 등장하고, 그런 그들이 누리는 교양이나 품격을 우습게 보는 모습이 나온다.

 

인간의 정신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과 탐구가 아닌 단순히 몸으로 둘러댄 모습에서 가식과 허위의 모습이 보인다. 어떻게 보면 근대라는 공간은 인간에게 개인의 사유와 표현 그리고 의사에 대한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했다. 정작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도 사람들은 어떻게 활용해야할지를 몰랐다. 그렇다면 정말 필요한 것보다는 그것을 대체하는 다른 기준점이 필요했다. 과거에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고 싶다는 욕망과 더불어 그것을 누리는 자에 대한 욕망이 인간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런 세계에 대해 강상중 씨가 잘 보는 이유는 그는 예초부터 이방인이었고, 외부에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놓인 세계가 다른 이들과 놓인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를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사람이 거기에 속한 세계에 있으면 그 세계에 대한 문제와 진실을 알아내지 못한다. 그저 돌고 돌아가는 다람쥐 쳇 바퀴처럼 뛰어갈 뿐이다. 하지만 그런 세계를 알아내고 본다는 것은 재미없고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한 것을 혼자만 알고, 뭔가 아니지만 그대로 흘러가는 모습을 말이다.

 

특히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으면 강상중 씨의 말대로 근대일본시대의 사람이나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매우 친근하고 전혀 남의 일이 아닌 이야기로 다가온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오히려 근대인보단 현대인에 더 어울리는 책인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저서가 근대문학이고,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사상은 거대한 것이 흘러가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현실에 그냥 지나쳐 가는 게 좋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돌아가 내 친구와 저녁 먹을 때 나눈 대화에서 나는 이 책에 대해 어떻게 보는 것인가? 남들에게 딱히 내가 가진 생각을 강조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계속 그런 생각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나라는 사람이 느끼는 무기력과 비관적 관념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 점이다. 막스 베버나 나쓰메 소세키나 혹은 그들을 좋아하는 강상중 씨는 분명 이런 세계에 대한 문제에 대해 염증을 느끼거나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말년의 나쓰메 소세키는 위궤양으로 죽고, 막스 베버는 폐렴으로 죽는다. 둘 다 60살도 채우지 못한 것에서 말이다.

 

지나친 스트레스와 우울증, 그리고 말년의 힘든 고통 속의 죽음, 그들의 인생에서 재미는 있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자신에 대해 자아성찰과 반성에서 그런 것조차 없는 것이 허무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쾌락과 향락도 좋은 재미는 분명하다. 인간은 즐거운 것을 좋아하니 말이다. 그런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을 모른 채 그저 그냥 살아가는 능숙한 모습에 우리는 진지하게 인생을 임하는 것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민하는 힘>에서 강상중 씨는 청춘에 대해 말한다. 청춘은 좋은 말이나, 그것은 정말 나이에 대한 생물학적 수치인가? 아니면 생물학적인 조건을 넘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인가? 그것을 결정은 자기 자신이나, 적어도 그런 계기라도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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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1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리뷰에 핵심을 찌르는 요약이 있군요. 이런 리뷰를 좀 사람들이 많이 읽어야 할 터인데
일단 길면 안 읽더라고요...

만화애니비평 2014-02-10 17:47   좋아요 0 | URL
괜찮습니다. 곰곰발님이 알아주시면 그것으로 만족입니다.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 - 애니메이션과 인문학, 삶을 상상하는 방법을 제안하다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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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애니메이션 방송프로그램 중에서 엄청난 흥행과 성공을 거둔 <진격의 거인>이란 작품이 있었다. 나는 <진격의 거인>을 두고 초점을 식량에 맞추었다. 각 성벽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식량일 것이다. 왜냐하면 식량이란 것은 농경사회와 같은 1차 산업에서 농민에 의해 수확되는 상품이다. 그런데 그 상품은 농민이 물물교환이란 최초의 경제로 통해 상업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모든 식량이 엄청난 거부의 상품 지배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식량은 제일 외곽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난 것이 아니라 가운데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비로소 그 중요도를 인지할 수 있다.

 

물론 제일 외곽도시가 무너지고, 피난민들이 더 안쪽으로 피난오고 나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 식량은 한정적이었고, 피난민들에게 나누어줄 식량은 매우 모자란 것이다. 거기에 대해 피난민 중에 수십 만 명을 거인에 대한 검색과 퇴치, 그리고 식량을 위한 개간지로 내모는 장면이 있었다. 거기에 간 수많은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거인에게 포식당한 채 죽게 된다. 그렇다면 식량이란 가치로 통해 무엇을 볼 수 있는가? 하다못해 사령관조차도 거인의 대규모 습격에서도 만일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모두 잡혀먹을 것이고, 지킨다고 해도 식량부족으로 모두 자멸할 것이라고 한다.

 

이른바 식량이란 것이 경제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고, 국가통제수단에서 제일 중요한 도구이다. 거인이란 존재는 외부의 위험으로 각인되었다면, 식량은 내부의 문제로 들어갈 수 있다. 식량의 보급은 결국 생명과 직결되고, 식량으로서 인간은 만인 대 만인이란 투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식량과 거인으로 가치로 본 문화적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미국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이란 책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의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관념인가? 물질인가?

 

모든 문화가 조성되는 것은 물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당초에는 인간이 생태적 조건, 기후적 조건, 지리적 조건, 지질학적 조건 등과 같은 환경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격의 거인에 대한 논쟁과 담론에서 일본극우성향이 담겨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견해로 작품에서 보여줄 모티프이지, 그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본이란 나라가 가진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현상에서 젊은 세대들이 겪는 사회적 갈등과 좌절이 기초해서라고 본다. 이미 기성세대에 의해 경제구조는 이루어져 있고, 차후 세대는 그곳에 진입할 수 없다. 게다가 <진격의 거인>에서 거인이란 존재는 누가 무엇을 위해 그들을 보내고, 어떻게 거인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근본을 알 수 없는 거인들이 외부에 있다가 어느 순간 내부의 스파이에 숨어있고, 마지막 편에서는 거인이 성벽 안에 숨어 있다. 그렇다면 거인이란 적은 외부의 적인지 내부의 적인지 다시 의문이 생기는 순간이 왔다. 이런 점을 두고 페이스북에서 만화평론가인 박인하(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학과) 교수님은 <진격의 거인>이 단순한 우익적인 요소로 보는 게 아니라 일본 내의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고 여겼다. 그 지문을 보면 아래와 같이

 

“예컨대 진격의 거인 경우 잇쇼켄메이의 정신이 군국주의의 정신일까,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역사성이 있는 것일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고요. 더불어 전 진격의 거인에서 잇쇼켄메이 정신보다는, 울트라맨 이후 익숙하게 반복되는 공포 메타포인 거대한 타자의 내습이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벽에 둘려 쌓인 현재, 그리고 그 안에서 목숨을 건 조사병단. 이게 군국주의일까요, 아니면 현대 무기력한 일본사회의 모습에 대한 메타포일까요? 전 후자 쪽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내가 주목한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에 대해 관심이 보인 이유는 인문학적 관점에서(물론 박인하 교수님은 문학전공자다) <진격의 거인>을 보자는 시선이 무엇으로 연결 되는가이다. 이 책에서는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작품 개인적인 독립개체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사회적인 흐름과 역사적인 조건 그리고 문화적인 현상으로 풀이한다. 진격의 거인에서는 개인과 사회라는 자아와 거대한 타자를 말한다. 개인의 존재성에서 우리 인간은 국가란 무엇이고? 사회란 어느 존재인가? 우리의 가치가 우리를 위한 것이 결국 국가와 사회의 발전이 되는지, 혹은 그것과 상관없이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는 지까지도 말이다.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에서 보인 개인과 타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현대사회의 우리 인간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자기가 살아오는 조건과 현실 그리고 이상에서 말이다. 따라서 시초를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윈피스>부터 시작이다. 알다시피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일본 최고의 오타쿠 집단인 가이낙스에서 만든 작품이다. 엄청난 흥행과 더불어 작품 자체가 열혈이란 점에서 많은 남자팬들을 만들기도 한 작품이다. 문제는 <천원돌파 그렌라간>이란 작품이 말하는 근대성이란 무엇인가이다.

 

거대한 목적을 위한 계속되는 진화에서 인간의 딜레마가 나온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두고 전에 우익적 성향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이 아시아에 대해 서구문명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모두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보면 계속 그렌단의 규모는 주인공을 토대로 규모가 커지고 결국에 나선왕을 쓰러뜨리고, 우주와 은하계까지 넘어간다. 그런 점에서 계속 자기의 영역을 확장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세력과 함께하여 계속 진행되는 진화적인 관점은 대동아공영 전술적인 요소가 반영되었다는 관점은 어느 정도 부합된다.

 

그러나 그런 성향은 일본이란 국가적 특성, 즉 섬에 위치한 나라에다가 주변에 바다로 인해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지정학적인 조건에 기인한다. 그런 성향은 <기동전사 건담>에서 지구인이 지구가 아닌 우주를 선택한 것은 지구환경이 척박해지고, 살아가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란 눈부신 신화에서는 숨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물가는 오르고, 부익부 빈익빈이란 치명적 경제적 양극이다. 이런 양극으로 인해 “몫을 가진 자”와 “몫이 없는 자의 몫”에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몫이 바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소외다.

 

왜 <진격의 거인>이 흥행하고, 국내에도 큰 호응이 오는가? 최근 88만원 세대와 같은 젊은 세대들의 좌절을 어떻게든 뛰어넘고 싶어도 넘지 못한 벽이 되었다. 만약 그 벽에 향하여 전력 질주하다가 바로 쓰러진다. 결국 자기나라에서 이룰 수 없는 조건,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하나, 그것조차 어렵다. 20세기는 1차 및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이미 판도는 구성되어 있고, 21세기에 오면서 다른 국가를 침략하여 식민지를 삼는 것은 국제적인 위협요인이 된다. 그런다고 상대편에서도 호락호락하게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국내적으로 정착된 안정을 파괴할 수 없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는 지하세계의 사람들처럼 그저 위기에 떨며 살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운명이란 타이틀로 투쟁할 것인가? 만약 나선왕이 최후의 적이라면 식민지에 대한 열망일지 모르나, 나선왕 역시 과저에 안티-스파이럴과 싸우던 전사였고, 그는 인류생존을 위해 인류를 지하로 가두었다. 작품에서 100만 명이 되면, 안티-스파이럴이 등장하여 인류를 모두 멸망시킨다고 한다. 일본이란 국가와 민족이 지닌 콤플렉스 요인이 하나의 모티프로서 작용할 수 있지만, 결론은 인간의 진화와 퇴보라는 선택의 갈래였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과 문명의 발전은 과연 진보했고, 인간은 그런 과정을 통해 진화를 했는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분도 아도르노와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자로 통해 인간의 진보는 진정한 진보가 아니라 퇴보라는 것이다. 작품에서도 스스로 희생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앞에 갈 수 있는 것은 뒤에 따라오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결국 진화라는 것은 누군가 희생되거나 퇴화되어야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누군가 사라지기 때문에 진화를 한다. 그런 것은 인류문명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이 더딘 미개부족은 무기와 문명을 지닌 사람에 의해 무참히 죽는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란 서적에서 인간의 문명이 결국 덜 발달된 문명을 가진 부족을 멸망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근대라는 관점은 결국 거대한 국가의 형성에 의해 조건이 되고, 그 조건에서 식민국가와 지배국가로 나누어진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는 그런 근대적인 국가관이 담겨있으면서 한편으로 인간의 진보와 퇴보를 다룬다. 그런 의문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부터 시작하여 21세기에도 계속 의문되는 상황이다. 근대라는 정체성에서 거대서사가 주요관점이라면 근대를 지난 탈근대 즉 post-modern이 도래한 것이다.

 

<윈피스>는 바로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달리 근대성에서 탈근대성이란 개인의 초점에 맞추어져 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는 오로지 나선왕의 타도에서 안티-스파이럴과의 투쟁 그리고 화해이다. 왜 인간은 문명사회에서 억압받을 수밖에 없는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도 반계몽적인 사상을 남긴 장 자크 루소의 <학문과 에술에 대하여> 및 <인간불평등기원론>으로 통해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위적인 존재가 되어 그것이 불평등과 사회적 부조리를 만든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희생한다고 말한다. 특히 루소의 경우 법은 권력자를 위해 존재하는 악적인 존재라고 여겼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가? 독일 심리학자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다가, 자연의 착취가 불가능해지면 인간을 착취한다.”고 한다. 안티-스파이럴이 인류가 멸망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욕망과 이기심, 그로 인한 전쟁과 환경파괴 등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공략대상이 자연이 아닌 인간으로 행해지고, 결국 인간을 지배하는 인간으로서 우월감을 만끽한다. 루소가 지적하는 인간의 지배는 단순히 농노사회나 봉건사회의 계급만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도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역시 자본이란 화폐자본이 아니라 지식, 예술적 취향, 취미생활 등으로 문화자본이 존재한다고 한다(물론 내가 적는 글 역시 지식과 미학적 요소가 있기에 이것 역시 문화자본이다. 권력에 대한 해체에서 지식이 권력을 생산하는 점에서 그 권력의 지식을 해체하는 것 역시 지식이다).

 

인간에게 불평등이란 조건은 영원불멸하다. 그렇다면 불평등이 없으려면 나선왕처럼 압제로 통해 모두 같은 조건에 처하게 하는 점이다. 물론 그 조건 아에서 불평등은 생기는 게 아이러니다. 근대성을 추구하는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모두가 같은 큰 뜻을 위해 싸우는 거대서사로 진행된다. 거대서사와 달리 <윈피스>는 무엇인가? 작가의 의도대로 <윈피스>는 개인적 목적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점이다. 즉 리오타르가 제시하는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해적이란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각자의 목적을 두고 서로 인정하는 조건에서 <윈피스>는 자유분방함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내에서 세계의 국가는 없으나 단지 해군이란 기관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해적과 대립된다. 그러나 해군을 모두 봐도 모두 정의가 있는 게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부당하며, <윈피스> 내의 주인공과 대립된다. 해군이란 조직은 국가권력이다. 어떻게 보면 아나키스트적인 요소로 무정부주의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국가와 사회는 관계없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가는 점에서 매우 낭만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도 지적하고 나 역시 지적한 것처럼 <윈피스>에서 현실적 조건이 없다. 우리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일상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활적 요소가 부재된 <윈피스>는 하나의 꿈과 같은 존재다. 애니메이션이 일반인들에게 유치할지도 모르나, 애니메이션이 나름 깊은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는 원인은 애니메이션의 정의에서 생각할 수 있다. 가령 신화는 그 민족이 가진 집단적 무의식이라면, 꿈은 개인의 신화다. 그런 신화적 요소를 가장 잘 돌출할 수 있는 매체가 바로 애니메이션이다. 일단 애니메이션에서 Anima란 단어는 라틴어로 영혼이고, Animate란 존재하지 않은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혼을 불어넣는 뜻이다.

 

그렇다면 혼이 없는 존재가 혼을 가진 하나의 매체가 되는 게 Animation이다. 참고로 종교사상에서 Animism이란 종류가 있다. 무생물에게 영혼이 있다. 이것은 주로 일본에서 통용되는 민속적인 종교적 관념이고, 한국에도 존재하는 종교적 관념이다. 인간의 의식하는 것과 동시에 무의식적인 요소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다. 거기에 인간이 일상생활에 억눌린 억압에 대한 해방과 더불어 터부의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평상 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영웅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안의 주인공에 열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한다. 역사란 어느 특정 개인의 이야기지만, 시란 특정 개인이 아니라 누구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즉 개연성이란 것이고, 고대 그리스에서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적 이야기를 볼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비참한 얼굴로 탄식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어머니와 성관계를 나누어 아이를 출산하지 않았지만, 자신 역시 그런 비극이 올 수 있다는 하나의 개연성에 대해 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적이고, 자유분방한 <윈피스> 주인공에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현실에서 억압당하고 자신을 드러나지 못한 채 타인에 의해 조성될 수밖에 없다. 예전에 마단 사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서적에 소개된 인물로 자크 라캉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로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떄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인정받기 위해 살아가는가? 근대성에서 현대성으로 넘어갈 때 포스트모던 시대에 도래함에서 개인주의가 활성화되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되었다. 그것은 근대시민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하나, 다르게 생각하면 인간이 근대사회 이전에 농경사회에서는 대가족이라면, 지금은 대가족에서 핵가족이 되어 가족이란 커뮤니티 조건과 능력이 축소되었다. 교육과 출산 등과 같은 크고 작은 일이 가족이나 혹은 부족에서 처리했다면, 이제는 가족 대신 사회에서 처리한다.

 

우리의 존재는 결국 사회생활로 통해 인정받기 원하며, 거기에 대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를 바란다. 결국 기표라는 표상에 의존하게 되고, 장 보드리야르의 의견처럼 인간은 기호를 소비하고, 상품은 기호고, 기호는 상품이게 된다. 기호라는 것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인간은 미디어란 정보에 의해 사로잡히고, 거기에 모든 것이 매개가 된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매개되는 사회다. 이미지란 표상의 기호가 결국 인간을 좌우한다. 우리는 신발을 신는 것이 아니라 나이키를 신고, 차를 모는 것이 아니라 벤츠를 몬다.

 

인간의 가치가 하나의 기호로서 정해지고, 그 기호는 자본이란 매체로 통해 결정된다. 그런 와중에 현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자본에 의해 자기 삶을 구분 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존재성은 무엇인가? <강철의 연금술사>는 저자가 생각하는 가치관인 것 같았다. 자신의 팔은 없고, 동생의 육체는 소멸하여 갑옷에 혼이 들은 채 모험을 하는 형제, 하지만 형제는 그 어떤 정의감이나 혹은 이상을 위해 활동하지 않는다. 단순히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보편적인 도덕에 의해 행동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선의 가치란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타인을 위해 베푸는 정언명령이란 개념이 있다.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보이는 형제의 활동은 거대한 음모나 국가적 위기를 대응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현실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그 공간에서 형제의 우애, 친구와 우정, 주변인들과 화목한 생활을 바란다.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사회에는 의도하지 않은 행복을 준다. 그들이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정의의 사도보단 인간이 가진 감정에 의해서다. 인간이 타인에게 베푸는 이유는 이성보단 감정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성은 논리로서 움직이고, 그것은 자신의 조건과 현실에서 손익을 확실히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손익의 관계를 넘어 그 자체로 하고 싶은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보이는 세상은 분명 허구다. 애니메이션은 현실부재라는 안티-리얼리티이고, 실사영상은 파생실재라는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하지만 실사영상의 문제점은 리얼리티가 오히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하이퍼 리얼리티를 구성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현실부재라는 조건에 의해 보는 세계가 가상임을 인식한다. 물론 지나치게 몰입한 사람의 경우 존재하지 않은 존재가 있다는 여기는 과도한 행위를 하나,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존재성에 대한 고찰이다. 이 책에서 <충사>에 대해 논하는데, 충사만큼 Animism(애니미즘)을 잘 구현한 작품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해 말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고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고찰한다. 가령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에서 흑백으로 구성된 화면에 주인공은 고양이다. 고양이는 주인인 젊은 여성을 보면서 대사를 한다. 고양이가 인간을 본 후에 말을 하고 사고할 수 있지 않으나, 그것으로 통해 보는 것은 인간사회의 소외와 외로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고양이로 통해 보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는 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있다.

 

고양이가 보는 일본 메이지유신 후의 사회란 정말 발전하고 좋은 사회인가? 오히려 인간은 더 비참하게 보이고, 어중간한 요소가 사라져 그것을 풍자한다. 죽은 지식인의 사회처럼 애니메이션은 우화적인 요소와 문학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그런 이런 애니메이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낄 수 있는가? 저자의 도서에서 대안은 역시 애니메이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였다. 미야자키 감독은 항상 작품 내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 그리고 인간과 다른 존재의 부딪힘이었다.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고 거기에 같이 이웃처럼 지내는 <이웃집 토토로>나, 인간과 자연의 갈등을 그린 <원령공주>, 과거(마녀)와 미래(과학소년)의 공존을 그린 <마녀배달부 키키> 등을 보면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가지지 못한 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간의 감수성을 되찾을 것을 전달한다. 물론 그의 전달방법 역시 자본주의적이나 말이다. 인간이란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찾고, 인간적인 요소를 찾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이을 감독으로 최근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언급되었다. 그의 작품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늑대아이>에서 전자는 인간이란 시간적 존재이듯이, 비가역적인 시간에서 가역적인 행동으로 통해 한 소녀가 알아가는 인간관계를 보여주고, 후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을 이을 자연과 인간에 대한 화해와 경계다.

 

늑대아이는 인간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늑대로 살아갈 것인가? 정체성의 여부에서 남매는 다른 길을 선택하나, 그래도 어머니는 모두 좋다고 여긴다. 저자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나, 아니 비슷할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와 더불어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가 존재한다. <늑대아이>에서 아버지는 가장 행복해야할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여 그 자신이 늑대라는 정체성을 드러난 상태이다. 그에 반해 계속 동물원에 살아가는 늑대들은 자신의 생물학적 존재는 늑대이나 늑대라는 자연적 존재로서 드러나지 못한다. 결국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늑대로서 늑대인 채로 죽는 아버지는 일본의 유미주의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가장 아름다울 때 죽는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놀이인 하나비 불꽃놀이에서 불꽃이 터질 때 가장 예쁘나 소멸한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사쿠라, 벚꽃나무 역시 벚나무의 꽃잎이 나무에 붙을 때보단 떨어지는 순간이 아름답다고 한다. 결국 떨어지게 되면 다시 되돌리지 못할 죽음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단지 1년이 지나면 다시 벚나무의 꽃잎은 활짝 피고 새로운 생명과 죽음이 반복된다. 죽음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삶이란 새로운 욕망과 희망을 주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곧 죽는 것과 같다는 것이 인간이고, 죽음이 있기에 인간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하나 밖에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의문에서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나에게 행복하냐는 말을 하면 아마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고 할 것이다.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도 많다. 물론 친구를 만나고,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즐겁고, 그건 분명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만들 수가 없고, 결국 사회적 조건에 의해 변해간다.

 

내일 당장 내 친구가 자동차에 치일지도 모르고, 형제 중에 로또 복권이 당첨될지도 모른다. 그런 조건에서 우리의 삶을 돌이켜본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물론 애니메이션을 인문학으로 본다고 해도 답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왜 그런가? 것과 동시에 어떤 것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는가? 남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보다 자기가 느끼는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행복을 찾는 길 중에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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