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계전선 1
나이토우 야스히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혈계전선>을 읽다보면 전형적인 하드고어가 날뛰는 일본 만화의 한 장르다. 환상적인 세계와 현실의 공간이 뒤엉킨 세계, 그것은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관념 안에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왜 그런가? 이 작품의 배경은 미국의 뉴욕이란 곳이다. 미국의 뉴욕은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도시이다. 뉴욕이란 도시가 단순히 미국의 대도시라고 하여 그런 것일까?

 

미국 뉴욕에 월-스트리트라고 불리는 경제의 중심지가 있다. 월가라고 하면 주식의 무대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주식에 대한 경제적인 지식이 없지만, 적어도 미국의 월가라고 한다면 세계 금융의 중심이 오고가는 큰 요충지다. 현대사회는 이미 경제구조가 자본주의구조에 해당되며, 자본의 증식은 결국 자본에 의해서고, 수많은 자본가들이 움직이는 뉴욕의 월가는 그야말로 황금의 도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황금은 그 모두에게 열리지 않고, 오히려 가려진 채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인가? <혈계전선>의 주인공은 레오나르도 워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면 모르지만, 워치라는 것은 watch라는 시계라는 명사적 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 지켜보다 관찰하다 등의 의미가 있다. 그의 이름은 워치 즉 무엇을 지켜보고 관찰하는 존재이다. 관찰의 존재성에서 무엇을 관찰하고, 감시라는 점에서 무엇을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괜히 그런 이름이 붙인 것도 아니란 점에서 우연히 가족과 미국에 와서 산책을 하는 도중에 거의 신과 같은 존재가 관찰자의 눈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라는 대답에 그 운명의 두 눈을 레오나르도가 받게 된다.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야 하는가? 보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결국 그것은 Justice 정의로 이어진다. 왜 정의인가? 보고 관찰하는 것은 말 그대로 누군가의 편에 일방적으로 드는 것도 아니고, 아주 정확하게 사물을 파악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의 본질은 인간이 가진 다섯 가지의 감각인 촉각, 미각, 청각, 후각, 시각 중에 시각만이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촉각, 미각, 후각은 무의식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쉽고, 청각은 감정에 의해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보는 것만은 관찰하는 것만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하여 거기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판단기준은 그가 살아온 인생과 가치관에 의해 결정되나, 자세하게 보고 명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반드시 정의로 이어진다. 워치의 두 눈은 정의로 이어지나, 그 정의의 수단과 방법은 폭력 내지 비폭력으로 이루어진다.

 

1권의 에피소드에서 음속원숭이와 반쪽 사신의 해결에서는 폭력적 수단에 대한 비폭력적 수단이 발휘하고, 인신매매단에 대해서는 폭력이란 하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방법은 비폭력적인 것은 요구하나, 반드시 비폭력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는 점이다. 왜 이런 것을 담고 있을까? 작가는 분명 일본인이나, 작품 배경은 미국 뉴욕이란 거대한 도시다. 그 도시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사는 만큼 온갖 부조리와 뒤틀림이 존재하는 법이다. 평소 눈에는 당장 보이지 않으나, 눈에 보이지 않은 어둠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눈에 보이는 법이다.

 

헬사렘즈 로트, 실제로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공간이나, 우리가 바라보며 느끼는 관념 안에서는 하나의 악마의 소굴과 같다. 처음부터 은행 강도가 등장하고, 미친 테러리스트가 존재한다. 미국에 은행 강도가 자주 일어나는 것도 그러하나 뉴욕에서 비극적인 테러가 일어난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그것이 하나의 불안감으로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처럼 볼 수 있다. 단지 만화라는 매체가 작가의 상상력에 스토리텔링으로 입혀질 뿐이다. 그런다고 만화는 현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로서 받아들인 것이 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헬사렘즈 로트에서 존재하는 것은 이형의 괴물체와 무서운 사건들, 그리고 거기에 대항하는 비밀결사, 그렇지만 비밀결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없다. 비밀결사에 조직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작가가 보는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다. 주인공 워치로 보는 뒤틀려 버린 헬사렘즈 로트이나, 그것의 토대가 되는 것은 결국 현실의 상황이다. 왜 뉴욕이 그렇게 뒤틀려 보이는가?

 

뒤표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뉴욕 붕괴 후 하룻밤 만에 구축된 도시, 헬사렘즈 로트, 이계와 현계가 뒤섞인 이 마도에는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암약하는 비밀결사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뉴욕은 현실에서 붕괴되지 않았지만, 이곳에 무엇이 뒤섞여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원래 실천해야할 도덕적인 사회와 더불어 그렇지 못한 세계가 놓여 있고, 그 모순된 공간에서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이 작품은 나쁜 요괴 퇴치로 끝날 작품이라면 워치에게 모든 것을 보는 눈을 줄 이유는 없다.

 

음속원숭이를 죽이는 것만 생각한 대다수 사람과 달리, 워치는 원숭이에 숨은 장치를 찾아내어 위기를 막는다. 위기를 막는다며 무조건 달려드는 것보다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파악하여 처리하는 것,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은 어두운 세계를 워치는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관찰하는 눈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은 judgement라는 판결로 이어지나, 그는 육체적으로 강력한 힘이 없기에 옆에 동료를 의지하는 것이다. 물론 동료들도 그의 눈을 의지하여 그의 판단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눈이란 외부의 물리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것만 본다. 물리적 존재의 그 너머에 존재하는 그 사람의 의지와 사고는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판단은 눈으로 하지만, 눈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혈계전선이란 표지제목에서 보인 워치의 보스는 비밀결사를 운영하는 리더이나, 한편으로 그 무엇을 알 수 없는 깊은 살기를 가지고 있다. 정의의 수행이 정의로운 의지로서 이어지는 게 아니다. 처음 워치를 찾으러 온 사나이도 하는 짓이 건달에 민폐를 일삼는 사람이다. 민폐를 일삼는 사람이 정의 따위를 생각할까? 우연적인 기회로 통한 자신의 심심풀이 내지 기분전환으로 정의를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만화의 액션은 박진감이 넘쳐야 한다. 조용히 끝낼 상대도 아군도 아니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멘션 더블유 Dimension W 1
이와하라 유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인간의 존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그것은 없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다소 종교와 철학을 넘나드는 담론에서 인간은 죽음 이후에 그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관념론적인 요소와 더불어 인간은 죽으면 단순히 시체와 같다는 유물론적인 요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예전에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이란 작품이 있었다.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1990년대로 하여 사이버펑크라는 장르가 흥행했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이하여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는 그다지 잘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본 <Dimension W>에서는 어떻게 나는 생각해야 할까? 우선 Dimension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단위를 나타내는 차원, 크기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W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책 뒤표지에 보면 이런 단어가 나온다. “X·Y·Z에 이은 차원축 'W'의 비밀에 다가가는 운명의 만남?” 아무래도 W라는 것은 어느 공간이나 차원에서 그것을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체라 볼 수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면 어느 지점과 지점의 포인트가 있어서 공간과 면적을 이루지만, 그것을 이루게 하려면 선이라는 하나의 매개체가 필요하다.

 

공간의 매개체라는 의미처럼 이 작품의 1권에서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는 모른다. 단지 여기서는 먼 미래 세계를 그린 공상 과학적 요소와 더불어 사이버네틱스란 독특한 신체기관으로 풀어나간다. 여기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란 생물 및 기계를 포함하는 계(系)에서 제어와 통신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주인공 소녀인 미라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지닌 로봇이다. 그녀의 사이버네틱스적인 요소에서 단순히 기계인간이란 인공지능으로서 명령을 받아 그 명령에 대한 계산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인간들처럼 자신의 의지로서 행동한다.

 

로봇에는 단순히 논리라는 기계적인 요소만 있지, 윤리나 감정은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나 미라는 그 감정과 윤리를 지니고 있었다. 기계를 전혀 의존하지 않은 마부치와의 만남에서 마부치는 기계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마부치의 입장에서 마리라는 존재는 영 마음에 들지 않고 왠지 친하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이 만든 기계문명의 진화는 인간의 신체마저 기계화로 만들었다. 그리고 기계로 인한 전 자동 시스템으로 일상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마부치는 자동차도 기계를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한다. 그의 생활요소는 21세기 초반에 살고 있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 시대는 21세기 초반이 아니라 먼 미래라는 설정이다. 기계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것에서 제일 중요한 경제 산업 기반은 기계를 다루게 하는 에너지, 즉 전기에너지인 셈이다. 작품 초반의 프롤로그에 위대한 발명가 에디슨만이 아니라 니콜라 테슬라라는 사람을 거론한다. 전기에 대해 자세히 모르나, 테슬라를 찾다보면 자기력선속 밀도의 단위라고 되어 있다. 자기력이 왜 중요한 것일까? 인간에겐 감정을 전달하는 것에서 뇌에서 시작하여 중추신경을 타고 인체 전반에 이어진다.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바로 신경의 전달에 의해서다. 신경이 전달될 때 뉴런이란 전기를 전달하는 세포가 있기에 가능하다. 인간은 전기적 신호에 의해 신체를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나 기계인간이나 전기적 신호로 움직이는 점에서 유사한 존재일 수도 있고 다른 존재일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 처음에 <공각기동대>를 다룬 것은 인간의 신체적 조직을 제외한 순수 이성으로 본다면 만약 판단력을 가질 수 있는 지성과 감정만 지닌다면 인간이든 기계인간이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런 사고의 방향은 주인공인 미라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기계인간이고, 살아온 역사적인 시간도 2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라는 자신이 기계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만든 박사 부부에 대해 아버지와 어머니로 여기고, 유리자키 박사가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미라가 돌보는 이유는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윤리와 이성에 의해서다. 어느 것이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아무튼 이 작품은 분명 사이버네틱스라는 인간과 기계의 이원화가 아니라 그 이원화의 해체지점이 보인다.

 

그렇다면 사이버네틱스와 저항적인 의미를 가진 펑크(Punk)의 결합은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유리자키 박사의 아내와 친딸이 살해당한 시간에 미라는 그 범인의 흔적을 메모리장치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 영상장치에서 미라는 마로치와 일행들에게 범인의 단서를 알려준다. 첫 번째 미라의 진술에서는 ‘뉴 테슬라 차원관리국 DAB’과 미라의 영상장치에서는 ‘상대는 국가보다 더한 힘을 가진 세계 최대의 독점기업’인 'NT Energy'로 나온다.

 

정부와 다국적기업의 이름이 거론된 점에서 사이버펑크 장르는 이미 형성된 것이다. 가령 <신세기 에반게리온>나 <아키라>와 같은 경우 그 사회의 주도층인 어른에 대한 반항이고, <공각기동대>는 인간이란 존재가 완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하다는 것으로 휴머니즘(인간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요소를 보인다.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점에서 <Dimension W>의 소재에 대한 접근성에서 이 작품에서 부정하는 것은 자본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말처럼 그 국경을 넘어 세계적으로 횡포를 부리는 다국적기업과 거기에 기생하는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리의 아버지 유리자키 박사는 분명히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지만, 그 결과는 정부와 다국적기업의 음모에 의해 살해당하고, 결국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절망에 의해 세상은 어둠으로 물든다는 저주와 함께 사라진다. 그가 저주를 하던 세상은 무엇이 잘 못된 세상이고, 올바르지 못하며, 게다가 그런 문제점을 만드는 사람에 의해 은폐 및 조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라가 아버지 죽음에 대한 기사가 엉뚱한 것으로 나온 것을 보고, 이미 이 작품은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투쟁으로 변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3차원이란 부피를 나타내는 X·Y·Z를 이어주는 W의 존재는 무엇일까? 각각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 서로 연결해주는 마음이면 좋을까? 인간은 순간의 전율로서 짜릿함을 느낀다. 그 짜릿함을 느끼기 위한 마음, 그것이 W가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호인
양우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가이며 사상가인 토크빌은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이란 도서를 내었다. 그 책은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원인과 근본을 찾은 책이며, 앙시앵레짐이란 이름에 대한 구체제의 모순을 지적했다. 구체제가 모순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방자치단체의 영주지배력이 소멸하고, 점차 프랑스가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국가예산이 부족하고, 지방의 농민이나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며, 도시에 몰려도 도저히 국가적인 가난은 해결되지 않은 점이다. 이에 대한 루이16세는 온갖 노력은 기울이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차디찬 날카로운 단두대의 진한 키스였다. 키스가 너무 깊고 깊어 그의 입이 아닌 목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지고, 목은 광장의 군중에게 하나의 구경거리로 전략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는가? 루이16세는 심약한 왕이나, 악랄한 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백성의 가난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가엽게 생각했으나, 자신의 조롱거리 중에 하나인 장 자크 루소의 소문을 듣고 웃었지만, 장 자크 루소의 서적 <에밀>이란 영향으로 루이16세는 열쇠와 자물쇠를 만드는 것이 취미였다. 그리고 그 사치가 심하여 나라의 살림을 휘청하게 만든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전의 작은 밭은 가꾸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부부가 노력해도 왕 자체가 나라를 바꾸기가 어려웠다. 이미 군주정은 자신의 지배력이 미쳐도, 그 지배력이 미치는 곳에서 모두 다 동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루이16세의 목은 사라졌고, 그 후에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목도 사라졌다. 이렇게 민주주의 역사에서 세계적으로 첫 문을 두드린 프랑스대혁명은 매우 잔혹하게도 사라져 버렸다. 그런다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그들의 영향은 전 유럽으로 퍼졌고, 오늘날 세계가 자유주의 내지 민주주의라는 헌법국가로 된 것도 루소와 프랑스대혁명의 영향이 컸다. 그런 흐름은 우리나라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아니 우리나라도 1948년 제헌절을 맞이하여 정식적인 헌법이 정립되었고, 헌법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국가정부의 전신으로 보았다.

 

헌법이 존재하는 곳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민주주의의 주인과 권리는 모두 국민이다. 대한민국 헌법 조문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나라 제1의 법이고, 제일 높은 법이며, 그 누구도 건들 수가 없는 신성한 법이 바로 헌법이다. 헌법을 보면 어디를 봐도 국민이 주인이고, 국민이 모든 것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 대한민국 법률의 으뜸이다. 그러나 현실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아주 비극적인 일에 말렸을 때 이 책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가 과연 헌법을 수호하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의문을 품었다. 헌법을 보면 국민만이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 인류공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진리이고 철학인데, 오히려 그것을 추구하는 게 이상한 존재로 되는 것이다.

 

철학사상적으로 헌법을 수호하는 것이 보수주의 철학이나, 보수주의 철학이 없는 보수주의는 자신의 이름을 버린 것과 같다. 가령 미국 링컨 대통령이 흑인을 백인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조치한 것은 남북전쟁 역시 있으나, 그가 하려던 과업이 미합중국의 건국이념과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 초대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미합중국에 대한 자유롭고 평등이 존재하며, 그 누구에 의해 자신들의 주권을 침해받지 못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체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어떠한 부당한 불평등 내지 부당함을 강요할 수도 혹은 강요받지 않을 권리를 미합중국의 국민이라면 부여해야 했다. 천부인권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흑인인신매매가 시작되고, 가혹한 노동착취와 인종차별이 이루어졌다. 신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은총과 평화를 내리기 바라는데, 정작 그들은 신의 은총과 평화 대신 몽둥이와 채찍으로 선사했다. 그런데도 자기끼리 모이면 은총과 평화라는 헛소리를 내뱉는다. 링컨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진보적인가? 보수적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보수적이라 보며, 그의 당은 현재 미국에 존재하는 공화당이다. 그런데 그의 공화당은 보수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의 건국이념, 즉 미합중국의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보수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헌법의 가치처럼 국가는 3가지의 기관으로 나눌 수 있다. 입법, 행정, 사법으로 말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국가는 3가지로 나누며, 그것은 서로의 권력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그 견제로서 독재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한다. 3권 분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입법이라고 한다. 입법이 중요한 것은 그 나라의 모든 근본적인 법적인 근거와 그 근거로 통해 자국민과 세계적인 평화와 번영을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들의 이익과 가치를 위해 상대방의 가치와 인권을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의 인간이 아니라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정신을 파괴하는 반국가적인 존재다.

 

웃기지만, 우리는 그런 헌법파괴자가 도리어 큰 소리를 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도 있고, 과거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떤 국회의원 자제가 한 말이 생각난다. 국민의 니즈(Needs)를 만족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 말은 분명 사실이다. 국가라는 커다란 조직이 국민 하나 소수에 대해 모두 만족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 소수 하나 하나가 모인 것이 국가라는 것이고, 그들을 당장 만족하지 않더라도, 만족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헌법의 규정처럼 그들에게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기한 것처럼 인간에게 superego(초자아)와 id(무의식) 사이에서 ego(자아)가 나온다. 그 국회의원은 평소에 아마 대중매체로 통해 superego를 보여주었다면, 대중매체가 은폐된 그들만의 공간에서는 id로서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id적인 발언을 할 경우 어떻게 될까?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비난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런 id라는 무의식적인 솔직함이 아들의 입에서 나왔고, 그 아버지라는 분은 대국민 사과를 했으나, 그 실상의 뿌리는 결국 누구인가? 이래저래 다시 생각해본다면 그 아들의 발언은 개인의 신념과 자유에 대해 권리가 있었다. 단지 권리만 생각했을 뿐, 그 자유와 권리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지 않았다.

 

자유주의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왜 이렇게 생각나는 것일까? 자유주의 철학사상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은 무척 크다. 자유주의 철학과 통칭 자유주의를 말하는 사람의 간극에서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자는 서로 상극이 되는 코미디로 보여준다. 더 코미디인 이유는 대한민국은 대학생이 되면 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 선거권에 대한 권리는 바로 정치제에 대한 권리로서 이어진다. 정치제에 대한 권리를 이제 막 가지거나 혹은 가질 수 있는 단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발언의 권리는 존중한다. 단지 책임의 대가는 무거울 뿐이다.

 

아마 프랑스대혁명의 불을 붙인 볼테르의 말처럼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에서 생각하면 그렇다. 이제 그의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고, 그 말을 했다. 하지만 국민의 민심은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이런 유명한 문구가 나온다. “민주주의는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싶은 체제이다.”로 말이다. 사실 프랑스대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실행하고, 그 뒤에 나폴레옹과 루이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프랑스를 민주정이 아닌 군주정으로 만들었을 때, 프랑스 국민들은 미개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프랑스란 나라는 세계적으로 철학과 예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로 되었다. 세계적인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프랑스에서 배출하고, 프랑스가 가진 문화유산은 그 어떤 나라보다 찬란하고 위대하다. 그 미개한 인간들이 처음에는 갈 길을 잃고 방황하여 계속 미로에 갇힐지도 모른다. 그 미개함에서 자신들이 있는 자리는 결국 미개한 인간들에 의해 존재한 것이다. 미개한 인간들의 대표로서 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상식과 지식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면 나는 상식보다는 지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상식은 편한 데로 생각하고, 어려운 부분은 제외하려는 인간의 나태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은 지식을 생산하여, 그 지식을 독점하면 권력의 중심에 있게 된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대중들은 기피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모른 채 당할 수밖에 없다. 지식의 권력화에 대항하는 것은 지식인 점에서 지식과 권력은 모순된 관계로 보인다. 왜냐하면 내가 읽은 소설이 지식과 권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아니 더 나아가 민주주의와 헌법에 대해 논하게 되는 작품이다. 2014년 1,100만 명의 관객 수를 돌파한 영화 <변호인>이 다시 소설 <변호인>으로 다가왔다. 영화를 보면 진보적인가? 보수적인가? 그런 질문을 받거나 고민해야 한다면 참으로 답답하다.

 

헌법을 수호하고, 헌법의 정신으로 변호인이 법정 앞에서 서는 것은 헌법의 정신을 수호하는 보수주의 철학이다. 링컨이 조지 워싱턴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은 당시 공화당이 추구한 헌법정신이다. 헌법정신을 지키고, 헌법에 명시된 발언을 하는 것이 틀렸다고 한다면 도대체 반국가인사는 누구로 되어야 하는가? 물론 행정부의 권력이 사법부를 휘어잡고, 입법부까지 통제되면 그 나라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국가이고, 그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단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천국일 뿐이다.

 

소설 <변호인>은 현존의 인물과 사건은 각색하여 새롭게 작품이다. 현대소설이나 영화에서 배고픈 과거와 배를 주리면서 힘들게 살던 서민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재는 좀처럼 없다. 한국영화를 보면 대부분 조폭 내지 느와르, 코믹섹시 내지 멜로물일까? 별로 알고 싶지 않거나 또는 별로 떠오르기 싫은 이야기를 이 영화와 소설에서 다룬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아니 소설 <변호인>은 많은 이야기와 생각을 준다. 변호인의 무대가 되던 1980년대의 부산, 그곳은 분명 내가 살아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직 나이가 어려 국민학교(國民學校)라는 곳을 막 다니기 시작한 시절이니 말이다.

 

물론 그것은 송변이 최루탄을 먹던 시기다. 공안정국이던 시절에 멋도 모른 어린 나이의 나는 어른들로부터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다. 잘못하면 끌려가서 개죽듯이 맞고 병신으로 된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죽음이라는 생물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즉 죽음이란 관념이 무엇인지 모른다. 단지 본능적으로 죽는 것에 대해 느끼나 죽는다는 의미 자체는 모른다. 그런데 죄 없는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구타와 폭행에 시달리고,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까지 한다.

 

1987년 1월 박종철 서울대학교 학생이 형사의 심문 중에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는 소리에 죽었다. 아마 이런 형사가 존재했다면 바로 특수공작부대로 투입되어 내공으로 장풍을 쏘아 북한의 군부수뇌를 제압하면 정말 북한은 붕괴할지도 몰라, 북한 내의 쿠데타가 일어나 대박의 통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해본다. 하지만 장풍을 쏘는 것이 가능한지 다시 알아봐도 그것은 거짓말로 탄로 났다. 조금 아쉽겠지만, 박종철 학생은 고문으로 죽은 것이다. 그는 어떤 이적행위도 하지도 않았고, 증거도 없었으나, 이른바 헌법 제12조에서 금지한 고문이란 것을 받아 그래 된 것이다.

 

헌법 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국민이다. 그런데 국가의 녹록을 먹는 자가 국가보다 위에 있는 국민을 잡아 폭행과 고문으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날에 가진 역사고 현실이다. 역사라는 과거의 시간이나, 현실은 지금의 공간적인 상황이지만, 그 무섭고도 차가운 비극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 대법원 판결에 의해 억울하게 고문당하고 형벌을 받은 사람들이 무죄선언이 된 것을 보았다. 사법사형의 불법성이 헌법의 가치 아래 부당함이 제기되었으나, 그렇게 당한 사람은 여전히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헌법이 국민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데, 헌법의 이름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참 궁금하다.

 

소설 <변호인>은 영화 <변호인>처럼 속물 변호사가 우연히 자신이 즐겨가던 국밥집 가게아들이 부당한 폭력에 희생되는 것을 보고 속물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변모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조금 가슴이 저리는 이유는 인권 변호사란 말은 너무 잘못되었던 것이다. 법의 정신은 원래 약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변호사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변호하나, 그 변호 자체도 인권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인권을 위해 존재해야 하나 인권 변호사만이 인권을 존중한다. 그 나머지 변호사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여전히 그렇지만 <변호인>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되는 부분은 페이지 177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 아들 건우, 연우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로 브레이크 안 걸리는 세상에서 살게 할라고예, 사무장님 아들 병국이도 이런 세상에 살게 하모 안 된지요.”이다. 자신에게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참을 수 있지만, 자신의 아이들에게 미래를 지켜줘야 한다. 그런데 지키는 것 자체가 어렵고, 그것이 틀린 것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예전에 읽은 도서 중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내용이 생각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 하시다가 일본군에 잡히어 감옥에서 고문과 병으로 인해 순국하신 분이다. 그분의 일대기에서 이런 내용이 생각한다. 조선은 바로 가족주의에 병이 걸려 있다고 말이다. 자신의 가족의 안위만 보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것을 말이다. 확실히 그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의 이익은 챙겨도 타인의 존재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한국의 현실이다. 단재 선생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이 국가를 병들게 한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렇다.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 우리는 끊임없는 비극을 피하고도 남았을 터이다.

 

소설 <변호인>을 읽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영화 <변호인>이 생각나고, 그 영화의 모티프가 되던 인물, 그리고 그가 하려는 것을 되새겨봤다. 모든 니즈를 만족할 수 없더라도 그 니즈를 만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하지 못한 것과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여 반사교면 정신으로 더 좋은 내일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가치고 숙제다. 읽으면서 계속 심리적으로 불편한 내 가슴 속에서 희망이란 단어를 생각해봤다. 과연 있을까? 없다고는 하지 않겠다. 단지 그 희망이란 단어보단 단지 절망적인 현실이 생각날 뿐이다. 그런다고 현실도피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속에 항상 분노가 존재한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기도 하나, 감정의 동물이다. 인간의 분노는 이성보다 감정에 가깝다. 감정에 휘둘린 인간은 이성을 잃은 채 돌발행동을 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무시하여 정말 이성이라면 어떨까? 위에 있었던 그 발언의 문제점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판단력 미스다. 가령 이성의 영역에서 다루자면 독일 관념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 이성에 대한 연구에서 칸트의 연구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니 자신이 진짜 이성적으로 탁월하고, 지성이 넘친다면 칸트의 서적을 읽어봐라.

 

그러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런 내용이 나올 것이다. 이성이 이성으로서 이성을 보여주는 것보다 이성이 윤리로 통해 이성을 보이는 것이 진실한 이성이란 점을 말이다. 윤리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다. 윤리는 이성보단 감정에 의해 조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길가다가 어린아이가 다치거나 혹은 아직 고등학생이 아무 죄도 없이 바다에서 가족과 재회하지 못한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는 이성에 의해서일까? 감정에 의해서일까?

 

소설 <변호인>에서 송변은 매우 감정적인 날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그런 분노라는 감정이 있었기에 가정 이성적인 법을 다루는 변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도 영화에서 하나의 가상이고,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처럼 그 당하는 당사자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억울한 사람이 힘이 없다면 단지 죄인이 되는 것이 현실의 도덕이라면 그것은 옳은 세상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대한민국은 헌법의 조문대로 민주공화국이고, 국민이 주인이어야 한다. 읽는 순간 그 생각만 들었던 소설 <변호인>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 - 요희전기 1, Novel Engine
크레파스 지음, Mx2J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국내 노벨라이트 출판사 중에서 시드노벨과 노블엔진에서 나온 각각의 작품에 대해 생각하여 보았다. 우선 시드노벨에서 나온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와 그리고 노블엔진에서 나온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를 말이다. 두 작품을 비교검토해보자면 기본적으로 환타지 속성 갖고 있는 경소설로서 전쟁을 소재로 사용하여 어느 특정인물이 주인공이 되어 그 시대적 흐름에서 헤쳐 나가는 하나의 영웅서사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단지 영웅의 서사에서 영웅이란 존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는 영웅보다는 오히려 반영웅에 가까운 존재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의 남자주인공은 용사의 손자이고, 현시대에 용사로 인정받은 자와 대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지 마왕으로 선발된 어린 소녀에 대한 입장을 생각하여 마왕소녀와 같이 행동한다. 이번에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에서 남자주인공인 흑록은 월하에서 태어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월하를 망하게 만든 화선의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화선이 월하의 저항군을 토벌할 때 같이 참전할 정도로 이율배반적인 인물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있어야 자리에 있지 않고, 오히려 반대의 자리에 있었다. 단지 차이점은 전자는 반대의 자리로 간 것이라면, 후자는 반대의 자리에서 다시 원래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유는 모두 한 소녀 때문이었다. 그 소녀는 너무 연약하지만 강한 마음을 가진 착하고 다정한 사람인 점이다. 마왕소녀와 월하공주라는 존재는 분명히 여왕과 공주라는 지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나약한 존재다. 그에 반해 그녀들과 같이 엮이는 남자주인공은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유사한 조건으로 남자가 편을 든 세력은 상당히 미미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전자의 경우에도 마족은 수많은 용사들에 의해 인간계에 침략할 생각조차 못하는데, 오히려 왕과 그의 군사들은 마족들을 토벌하러 온다. 토벌로 인한 제노사이드라는 학살극은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의 화선이란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용병까지 고용하여 철저하게 월하라는 국가를 넘어 월하라는 국민조차 멸살하려고 한다. 국가가 필요한 것을 생각하면 한자어 나라 국(國)처럼 땅 안에 인간이 있고, 무기가 있다.

 

국가라는 것은 결국 영토가 필요하나, 그 영토가 영토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영토로서 기능을 할 수 있는 인간이 필요하다. 무기는 무기로서 존재하나 무기 그 자체로서는 무기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만이 무기를 다루고, 인간만이 영토의 기능하도록 할 수 있다. 결국 국가의 기본은 결국 인간이고, 민족이 있으면 비록 영토가 당장 상실해도 다시 건립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혹은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독일에 의해 점령당한 프랑스도 역시 그렇다. 한국이나 프랑스나 영토를 다른 누군가에게 박탈당해도 다시 그 나라의 국민이 있으면 국권을 찾을 수 있는 경우 나라를 세울 수 있다.

 

만약 한국인이나 프랑스인 모두 학살당한다면 그 나라는 복귀가 불가능하고, 또한 국가를 세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국가의 가치인 헌법이다. 헌법은 국가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상징이고, 현대 세계에서 민주주의국가에서 헌법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국가는 그저 독재국가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이번에 읽은 라이트노벨인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은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다. 화선이나 월하나 둘 다 왕족이 통치하고 있으며, 왕족이 곧 국가 그 자체라는 군주정이 운영되고 있다. 군주가 있는 월하와 화선, 거기에 왕인 군주가 사라지면 그 나라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므로, 국가 그 자체가 국민의 것이라는 하나의 상징이라면, 군주정의 모든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왕이 없어지면 그 나라의 상징이 모두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작품을 읽으면 화선은 어떻게든 월하의 공주인 월영을 제거하고, 월영을 제거한 뒤에는 월영의 동생인 월린을 죽이려 한 것이다. 작품의 저자는 분명 21세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작품에서 보이는 세계관은 삼국시대 이전의 시대와 같고, 기술력은 22세기 정도 되어 보인다.

 

융(戎)이란 병기의 특징을 보면 전자동 시스템에다가 조종사의 능력과 감정에 따라 자신의 기능을 올릴 수 있는 점과 게다가 레이저 광선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동력 에너지를 전자 광선으로 전환하여 병기로서 상용화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기술력이다. 그래서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은 과거시대의 정치적 체계와 미래의 기술력, 그리고 의상은 서양과 동양의 혼합물이다. 의상에서 머리장식이나 옷감을 보면 분명 동양이나 오버니삭스의 착용이나 여자가슴이 아슬아슬하게 가릴 정도의 복장은 분명 한국의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크로스오버 내지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의 세계관을 생각해봐도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월하라는 국가의 정치적 체계가 그렇다. 우선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의 스토리가 전반적으로 그렇게 인상이 깊지 않아도 다소 높은 평가를 줄 수 있는 이유는 한국의 고전적인 요소를 상당히 반영했다는 점이다. 라이트노벨만을 전문적으로 읽는 독자는 아니나, 이 정도 내용이면 최근 국내에서 나오는 문학소설조차 잘 다루지 않는 한국의 전통성을 다루었다.

 

시대적 배경이 삼국시대 이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정일치 사회라는 점이다. 군주는 하나의 왕으로서 통치자를 맡으나 또 한편으로 종교인으로서 활동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제정일치의 군주는 왕이면서도 제사장이란 위치에 있는 것이다. 월하라는 국가는 제정일치의 국가사회다. 한국의 제정일치 사회는 삼국시대 이전에 대부분 존재했다. 삼국시대에 초반에는 샤머니즘이란 무속신앙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으나, 지방호족 내지 신세력이 등장하면서 그들조차도 하늘의 자손 내지 신의 후예라는 상징성을 부여했기에 추후에 삼국시대는 불교를 정치적인 요건으로 반입한다.

 

작품은 불교 유래 전의 한국시대라는 점이고,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 천주교 유입되더라도 여전히 한국은 무속신앙적인 요소가 남아있다. 단지 불교, 유교 등이 기존 토속신앙과 융합되어 다른 식으로 표현될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요소들이 국내 라이트노벨에 잘 등장하지 않았다. 예전에 만화책으로 나온 <사신전>에서 환웅(작품에서 “한”)이 호랑이족을 물리치는 내용이 나왔는데, 모티브로 따져본다면 환웅이 배달국을 만들면서 호랑이와 곰을 인간으로 변화하기 위해 동굴에서 근신하도록 했는데, 호랑이는 도망치고 곰은 남았다. 그런다고 실제로 곰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본다면 환웅은 우사, 운사, 풍백 등과 같은 농경문화를 주관하는 신하를 데리고 있는 점에서 호랑이는 육식이고, 곰은 잡식이므로 농경사회의 주요 식량인 쌀을 먹을 수 있는지 또는 없는지 로서 연합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우리가 보는 환타지세계의 전쟁물을 생각하면, 일상적으로 서양문화 유입으로 보는 것은 낯설지는 않으나, 정서적으로 이질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환타지 장르는 현실이 아닌 비현실이란 환상에 의해 진행되는 이야기나, 그 근원은 인간의 현실성을 기반으로 한다. 단지 일상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으로 통한 이성적인 영역이므로 평소 인지할 수 없지만, 분명 인간에게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 어디인가 숨어있는 깊은 심연의 공간이 존재하고, 그 세계는 결코 드러내지 못할 욕망이 살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단순히 인간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의해 조성되므로 욕망은 때로는 부러움과 질투, 시기, 억압과 해방이란 다양한 형태로 신화로서 태어난다. 환타지 장르를 보면 대부분 인간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존재는 현대에 있는 인간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살았던 인간도 상상으로 존재했던 존재다. 즉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관념에서는 그것이 반드시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한다고 인식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물질적으로 존재해도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된다.

 

모순적인 인간의 인식에서 존재성을 스스로 결정하기도 한다.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문구처럼 말이다. 작품은 그런 한국적 전통적인 문화적 요소들은 사용한다. 용병의 체계에서 갑을병정부터 이름도 흑록, 유하, 월린, 가람, 백경이란 한자어 내지 순수한글이 사용된다. 한국어는 기본적으로 명사가 한자어를 차용하기에 대부분 한국어 한자로 된 명사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단지 여기서 가람이란 강(江)이라는 하천을 의미한다.

 

물론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와 더불어 동양적인 사상도 나온다. 동양철학까지 자세히 알지 못하나 주자학의 요소가 조선시대에 들어오는데, 퇴계 이황의 주리론과 율곡 이이의 주기론이 조선유학의 양대로 나오고, 조선 후기 당파구분에서 주리론은 남인으로 주기론은 노론으로 이어진다. 이(理)라는 것은 잘 설명하기 어렵지만, 인간이 순행할 수 있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작품에서 백경이 만든 융을 탄 10명에서 8명은 모두 폐인이 되거나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하지만 신이와 흑록은 무사했다. 8명의 사고자들은 모두 정상인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신념이나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신이는 월영이 죽은 후로부터 정신이 죽었고, 흑록은 아버지가 죽고 나라가 망하며 어머니가 돌아가고 나서 정신이 죽었다. 흑록은 작품을 볼 때마다 삶의 의지나 목표가 없으며, 유하가 아무리 설득해도 마치 전쟁터에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일상에서 삶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나, 죽음이 기다리는 전장에서는 삶에 대한 의지를 찾는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관계다. 이때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찾지 못하고 계속 방황하던 흑록에게 월영이 죽은 후 신이의 반응과 그리고 월린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문제는 백경이 만든 융이라는 거대한 병기는 의지가 살아있는 인간을 망쳐도 의지가 없는 인간은 망치지 못한다. 아무 의지도 없고 삶의 이유도 찾지 못한 흑록이 갑자기 월린을 지키는 이유는 자신에 의해 망가진 신이와 그 신이가 동경하던 월영의 이름을 지키려던 월린이 있어서이다. 월린은 겉보기에는 매우 몸매가 좋고, 머릿결은 마치 비단 같으며,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사용하는 마음 여린 소녀다. 하지만 그 여린 마음은 이미 상처받을 만큼 받았으며, 억지로 자신의 게슈탈트(쉽게 말하자면 육체와 정신 그리고 심리)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월린은 월영이 죽었는지 혹은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실종되었는지 운명의 그날에 월영이 없어졌기에 자신이 월영이 만든 저항군을 조직하여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고, 사실은 언니의 죽음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 무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날 언니인 월영을 죽게 만든 제공자인 흑록이 등장하고, 그는 월하의 백성이었으나 화선의 용병이 되어 앞에 등장한 것이다. 흑록의 등장에서 흑록이 월하와 화선에서 무엇을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

 

이야기의 흐름은 결국 흑록이 월하의 기사가 되어 월린을 돕는 것이나, 한편으로 그는 월린의 제일 가까운 사람이고, 또한 그는 남자로서 월린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월린을 만나기 전에 화선의 용병시절 같이 활동한 유하라는 관제사다. 그녀는 본래 화선 왕족의 공주이나, 항상 암살의 위험을 받았으며, 용병으로 활동한 점에서 왕실 내에서 상당히 심한 배척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술에 취한 어느 날 흑록에게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게 해준다는 말에서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면 왕족이면서 왕실을 뒤집어 놓는 혁명 내지 쿠데타를 일으킬 심산인 것이다.

 

하지만 유하는 월하의 포로가 되었다가, 화선의 공격을 막는 대가로 월린의 주인이 되기로 한다. 다시 화선의 왕실로 갈 수 없는 입장이 된 셈이다. 결론적으로 화선과 월하의 공주가 서로 같은 편이 되었고, 저항군은 소수의 군력이나 결국 월하를 화선으로부터 독립하여 군주국가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며, 최후에는 그것을 방해하는 화선이라는 국가. 그 국가 자체의 상징인 화선의 왕족을 제압할 수밖에 없다. 월린이 처음부터 타격이 된 이유는 마지막 왕족이고, 월하의 모든 백성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상징이었다.

 

흑록에겐 그런 상징성을 가진 자가 2명이 있었다. 월린과 유하, 유하는 처음부터 흑록이 무슨 이유로 마음에 들었는지 몰라도 오로지 흑록을 위해 활동했으며, 월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남자는 흑록이란 점과 흑록의 아버지가 월하의 장군으로 활약하다가 패배한 전쟁에서 전사한 점에서 애증적인 관계가 놓여있다. 월하의 왕족이 패배하여 흑록의 아버지는 죽고 흑록은 비참하게 살아야했고, 흑록의 활약으로 월영은 월린으로부터 떠났다. 삶에 대한 의지가 사라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자신의 목적이 없어지는 것은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시체와 같다.

 

그래서 제목은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처럼 달의 공주는 월하의 공주인 월린이고, 죽지 않는 병기는 바로 흑록을 말할 것이다. 죽지 않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물리적인 공격을 직접적으로 받으면 흑록은 사망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란 개념은 물리적인 개념보단 백경이 만든 융을 탑승 때의 흑록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범상치 않은 검정색 융을 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융은 살아있는 자가 어떤 의지를 품으면 그 의지로서 에너지로 기동하여 결국에 탑승자를 시체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살아있는 시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지 않는 병기라는 것은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정신적인 죽음이다.

 

죽어있는데, 이제부터 죽지 않기 위해 죽은 자가 타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이유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은 월린을 위해서 말이다. 작품은 그렇게 서막을 알리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이 작품 역시 신화적인 요건을 잘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으나 주인공이 어느 누군가 혹은 선택하지 못해도 그럴 가능성은 있다. 참고도서로 계명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직 중인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을 참고하면 영화라는 것이 영상이라도 기본적으로 문학과 같은 문자서사와 같이 서사적인 요소를 갖춘 것으로 본다.

 

여기서 프로프에 의해 정리된 것에서 이야기의 31가지 기능 중에 1번과 31번이 인상이 깊다. 1번은 “가족 중에 한 명이 집에서 멀어진다.”와 31번 “영웅은 결혼하여 왕좌에 오른다.”이다. 흑록은 가족의 죽음으로 월하에서 떨어져 화선으로 온 점과 그를 좋아하는 유하, 유하가 라이벌로 여기는 월린의 삼각관계적인 구조에서 둘 다 공주라는 점이고, 누구를 택하던지 주인공은 왕좌에 오르게 된다. 월린은 마지막 왕족이고, 유하는 배척받은 외톨이 공주다. 물론 다른 선택지점 내지 그런 연애적인 요소는 미완으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행이 단순히 전쟁이라면 제목에서 달의 공주가 처음 나올 이유는 없다.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이란 제목처럼 월린과 흑록의 이름보단 하나의 칭호로 드러나기에 두 사람의 상징이 드러났기에 로맨스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권과 정의 - 위기의 시대에 읽는 인권과 정의의 투쟁 역사
정경환 지음 / 이경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인권과 정의>라는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갑자기 국내에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안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여객선을 탑승했는데, 선박운항 중에 중심을 잃고 선박이 침몰한 것이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470명 전후로 추정되고, 생존자보다 사망자 내지 실종자의 수가 더 많았다. 우리나라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생긴 몇 안 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그 희생자들은 아직 미래조차도 열어보지 못한 고등학생이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생각하면 이번 비극은 단순히 끝날 일은 아닐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과 죽은 자의 주변사람들은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정신적 외상증상으로 우울증 내지 각가지 신경정신 병적인 증세를 안고가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trauma는 눈으로 드러나지 않은 눈에 보이지 않은 관념적인 세계이므로 억지로 고칠 수도 없고 가릴 수도 없다. 오히려 보이지 않은 내적세계이므로 계속 안고 가야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왜 <인권과 자유>라는 책이 이 사건을 두고 나는 연결을 짓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인권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고,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하거나 도구로 삼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린 세상 때문이다. 인권과 선박사고의 연계성에서 이 비극의 시작은 단순히 선박안전을 지나 그 근본이 되는 사회적인 요소로 보는 것이다. 왜 그럴까? 만약 선박을 운항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경험으로 통해 운항을 잘 한다고 해도 세상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을 수 있다.

 

인지의 불찰은 어떻게 될 것인가? 결국 대형사고가 아닌가? 조금이라도 안전을 생각했다면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왜 안전을 중요하게 해야 하는 것인가? 안전이란 것은 무슨 사고로 인해 어느 인간의 생명과 재산에 위험이 가지 않기 위해 사전에 예방하고, 설사 사고가 나더라도 신속한 조치로 통해 최소한의 피해로 줄이기 위한 절차다. 안전을 지키는 것은 사고가 나지 않거나 사고가 나더라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다. 안전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안전이 부실하고 무너지면 누가 다치게 되거나 또는 누가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닥치기 때문이다.

 

안전을 위해서는 결국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위해서고,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 실천하는 행동이다. 배에 달린 안전도구가 부족하거나 관리가 부실하고, 안전을 위한 선원교육도 그렇고, 승객의 안전을 고려해야할 선박 내의 승무원들과 또는 그 선박을 고용한 회사도 그렇다. 그들은 승객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돈이었다. 물론 시장경제를 생각하고, 이익을 생각하면 승객유치로 통한 이윤창출은 기업의 목적이다. 그러나 기업은 기업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 내지 의무가 있었다.

 

최소의 경계를 무너뜨린 이상 상업에 대한 도리란 사라진지 옛날이다. 한국 불감증 중에 몇 가지가 있으나 안전과 환경이 더욱 그러하다. 이런 것에 생각하는 인식은 기업의 이윤을 깎아먹고 오히려 기업의 재정에서 쓸데없이 낭비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참사가 일어나고, 큰 환경오염이 발생했다. 진도 앞바다에 죄 없는 어린 영혼이 자기가 찾아가야 부모의 품에 가지 못하고, 추운 바다에서 들리지 않을 진홍곡만 울리고 있다. 배가 침몰하고 안에 들어있는 많은 물품들을 바다를 오염시킨다. 만약 이런 사고가 없었다면 인간의 생명과 소중한 자연을 망쳤을까?

 

나는 그 문제의 근본을 인권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왜 태어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에서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존재한다. 물론 인간의 존재론적인 고찰에서 살아가는 것은 또한 죽어가는 것이다. 죽는 것이 있기에 살아있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아야 한다. 만약 선박회사와 선장이 조금이라도 타인을 생각했다면 과연 저런 사고부터 나왔을까? 하다못해 저런 사고가 터져도 허무하게 대처했을까?

 

지금 TV와 신문에서는 하루 종일 저 사건에 대해 다룬다. 선박회사의 회계에 나와 있는 지출내역이나 선박 내의 안전장비, 승무원들의 심문 등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전초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예전에 삼풍백화점 사건이나 페리호 사건이나 대구지하철 사건도 그렇다. 그것뿐만 아니다. 외국의 어느 유명한 자동차 회사는 부품 하나 더 보강하는데 몇 백 원만 투자하면 교통사고를 줄일 수 있는데도, 부품비용이 아까워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세계적으로 명작영화 중에 하나인 <타워링>에서도 건축자재만 똑바로 사용했다면 대형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소한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 이익으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안전을 무시하다가 그 이상의 피해를 남에게 안겨주고, 그 가해자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남을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돈이 아니라 기본에 충실했다면 어떻게 흘러갔을까? 내가 정말 안타까운 것은 저 학생들이 죄 없이 죽어가는 것보다 왜 죽어갈 수밖에 없냐는 것이었다. 시간을 흘러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다시는 이런 비극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심어주어야 한다.

 

위에서 내가 정신적 외상이란 단어를 거론했는데, 저런 사고를 당한 사람과 주변 사람들은 평생 그 충격으로 심리적, 정신적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이번 일이 지나가고 똑같은 사고나 유사한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 예전의 충격이 다시 떠오르게 되어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게 된다. 그런 일들은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어릴 적에 성폭행 당한 여성은 남성이 옆에만 와도 공포에 질리며, 군인들의 의해 학살당해 죽은 사람의 가족들은 군복만 봐도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 그리고 실제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조차도 정신적 외상으로 우울증에 걸려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평범한 인간으로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당하게 되면 정신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건강한 신체만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과 심리도 필요하다. 건강한 세상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물론 자유와 평화라는 기본적인 명제가 필요하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인권이다. 인간의 권리가 소중하고 필요하기에 자유와 평화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인권이 무시된 인간에게 자유도 없고 평화도 없다. 오로지 억압과 불행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인권과 자유>라는 책을 읽으면서 인권이 무엇이고, 정의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 깨끗한 입으로 말하는 정의가 아니라 실질적인 정의를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인권이 없는 인간의 정의란 과연 통용되는 것인가?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가? 인간의 권리는 이른바 천부인권이라고 한다. 하늘이 부여한 인권,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인권, 대한민국 헌법도 다 인권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도 인권을 유린하고, 짓밟으면 심지어는 생명조차 아무 망설임 없이 파괴하는 사례도 있다.

 

인권이 왜 중요할까? 인권은 우리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이며, 인권이 없는 국가는 세계화가 된 현실에서 매우 도태된 국가라는 점이다. 세계에는 UN이라는 국가연합이 존재한다. 물론 UN이 모든 국가분쟁과 세계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도 최소한 UN의 존재성에 따라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UN총회에서 선언문으로 채택된 글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태어났으며,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1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나타난 모든 권리와 자유를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국제적 질서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28조), 모든 사람은 종족, 피부색, 성별, 언어, 종교, 정치적 혹은 기타 의견, 민족적 혹은 사회적 신원, 재산 가문, 혹은 기타 지위 여하로 인하여 하등 차별을 받음이 없어 본 선어에 발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을 가진다(2조).”이다.

 

만약 인권을 무시한다면 UN에서 정한 선언문을 무시하고, 국제연합의 정신을 무시하기에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이야말로 세계평화를 어기고 인류발전을 더디게 하는 해로운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권보다는 오히려 이권에 치중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은 본성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고, 그런 이기적인 조건이 부합하여 공리주의적인 요소가 드러난다. 인간이 이타적인 이유는 그 자체로 실천이성적인 정언명령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정언명령보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언명령에 의해 수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정언명령이든 가언명령이든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그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인권을 위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많이 따른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으로 통해 인간에게 인권이 존재하지 않으면 많은 인민(people, citizen)들이 피해를 받게 되며, 그것은 결국 그 나라의 근원마저 흔들리게 되는 알 수 있는 것이다. 1789년 7월 프랑스 바스티유감옥의 함락과 더불어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은 귀족과 왕족, 그리고 종교인들의 지나친 욕심과 향락으로 인해 국고는 줄고 국민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비참한 생활을 하는 원인은 결국 지배계급의 부조리한 정치체계였고, 그런 부조리가 혁명을 봉기했다. 혁명의 근원에너지는 민중의 분노였으나, 그 화살의 도화선은 루소였다. 루소는 자연주의자로서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이므로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지닌 존재나 사회에 소속되므로 억압의 사슬이 묶인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슬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제도로 통해 “모든 국가의 권리는 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은 각자 하나의 존재이어야 하고,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루소는 계몽주의철학자이면서도 한편으로 반계몽주의철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사회계약론>이 프랑스인권선언문부터 시작하여 UN선언문, 심지어 대한민국헌법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 루소를 생각하면 최근에 어떤 사람이 지은 책을 보면 웃기지 않을 수가 없다. 뒤에 생 쥐스트에 대해 나와 있는데, “자유주의의 적은 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유주의를 억압하는 것은 이른바 본인이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인권과 정의>에서 그런 자유주의자를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생 쥐스트를 생각하니 그의 옆에 있던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이 생각난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실행한 인물이나 본래는 자코뱅파에서 프랑스대혁명 영웅 중에 한 명이다. 그런 그도 자유는 우리만 아니라 상대에게 줘야 그 자유가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법조인이 적은 책 내용에서 생 쥐스트를 말하기 전에 로베스피에르나 장 자크 루소를 말하면 어떨까 싶다. 왜냐하면 <인권과 정의>의 저자는 다소 보수주의적 성향이 있다. 보수주의라도 우리가 아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철학에서 말하는 의미다. <인권과 정의>에서 보수적 관점은 헌법의 정신에서 말하는 인권으로 저자의 보수적 성향은 민족주의자라는 점이다.

 

백범 김구 선생을 추모하고, 김구 선생이 말하는 민족주의로서 자국민이 스스로 국가를 세우고 통치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생 쥐스트를 거론한 사람은 민족주의보단 국가주의에 가까워 보였다. 자신은 모르나 자유란 국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 부여받아야 하는 점인데, 몇 페이지 밖에 읽어보지 않았지만, 충분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째든 <인권과 정의>라는 책을 보게 된 동기는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철학자가 장 자크 루소 이외에도 카를 마르크스, 그리고 존 롤즈라는 사람이다.

 

<인권과 자유>에서는 존 롤즈의 내용이 나와 있다. 존 롤즈는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것을 드러내서 시민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만민법>으로 통한 세계적인 시민으로서 만민이 되는 것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하던 정치적 철학사상은 거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나, 그는 그런 유토피아적인 가치를 현실 구현 화를 위해 집필했다고 한다. 실제로 무척이나 책인 <정의론>에서는 다소 이상적인 내용이나 정의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현실에서 균등한 기회라는 것은 모두 똑같이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최소수혜자에 대한 권리보장에서 그들이 정치적 자유주의에 참여하기 위해 경제적인 보장과 최소한의 교육을 보장받아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인 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은 자본주의국가이고, 루소는 자본주의경제체계가 들어오나 아직까지 루이16세가 지배하던 왕정이었다. 롤즈는 시장경제국가라면 루소는 봉건왕정국가의 차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인간의 권리를 중시하는 점이 분명하고, 인간에게 권리가 없다면 그 나라는 잘못된 나라인 점은 분명히 인정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비판하고 싶은 것은 자유라는 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고, 그 자유를 존재성을 인정하기 위해 비자유라는 것을 대비하는 옳지 못한 일이며, 비자유로운 상대에게 자유를 주어 자신들의 자유를 같이 지키고 넓게 포섭해야 한다. 한국의 전통사상은 단군왕검께서 홍익인간 사상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소 민족주의적인 가치이기나 백범 김구 선생은 그런 사상을 잘 이해했다.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강한 나라보다 아름다운 문화가 있는 나라이기를 바란 점에서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는 평화의 노래와 자유의 율동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복을 더 누리기 위해 다른 이들과 행복을 누려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행복하다는 기분을 그렇게 잘 느끼지 못하는 성향이나 그래도 행복이란 것이 저런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 것은 충분히 실감한다. 인간의 목적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인간에게 행복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권리인 인권이며, 그 인권이 곧 진실한 진리이며 정의다.

 

물론 그런 말은 쉽게 나오나, 막상 실행은 어려운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오히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여 누리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자유라고 여기는 오만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행복을 짓밟고, 타인의 생명을 짓밟으며, 그러면서 그것이 하나의 정의라는 위선의 가면을 씌워 합리화 하는 인간들을 보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없는 것이다. 폭력으로 약자를 억압하는 세상에 인권이 제대로 존재할 리가 없고, 그것은 진장한 자유민주주의국가가 아니다.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국가라면 그 나라의 국민은 자유를 가진 주인이다. 모두에게 그 권리가 없다면 그것은 파시스트 국가에 불과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