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 문제적 인간 10
로버트 서비스 지음, 양현수 옮김 / 교양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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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은 러시아혁명에서 나는 2월 혁명보단 10월 혁명에 더 신경을 쓰는데, 그런다고 하여 볼셰비키혁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관점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말하고 싶은 것은 볼셰비키혁명이 가지는 의의와 가치에 대해서는 충분히 긍정적인 가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읽어본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를 읽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가 저술한 책들이 코뮤니스트 즉 공산주의자들을 다루면서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실패 원인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적어도 관료주의 타도와 독재정치를 타도를 외치다가 순간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혁명이란 것이 무조건적으로 평화로서 된다는 식이 그의 머리에 꽂혀 있는 것인가? 너무 기만한 자세로만 나오는지 한 번 다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트로츠키의 해온 볼셰비키혁명 이후부터 러시아내전, 정치국 다툼들에 대해 모두 옳다거나 합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상황과 조건, 그가 추구하는 설정에서 정작 그가 제대로 짚은 것은 트로츠키란 인물이 연설이 매우 훌륭하고 뛰어난 두뇌와 문장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기 고집과 착각이 심하며, 인간관계가 너무 업무적이란 사실이다. 트로츠키는 첫 번째 아내를 자신이 러시아 인민주의자(Narodniki)이던 시절 만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그런데 혁명 활동으로 인해 아내와 함께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고, 자신은 혁명을 위해 떠나면서 아내와 헤어진 것을 두고 사적인 영역으로 지나치게 끌여 당겼다.

 

분명 트로츠키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많은 사람들이랑 친분을 유지하지 않은 점은 분명하고, 특히 당파적으로 스탈린과 대결할 때 다른 반 스탈린 분파와 협공을 하지 않은 것 역시 트로츠키의 오류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가 개인적인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두고 서로 비교하여 다른 것이 러시아혁명을 두고 보면 확인이 가능한 사실이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해 계속 은폐, 날조, 왜곡되어 트로츠키의 이름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금기로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서비스의 책에서 바로 트로츠키와 스탈린 서로 추구하는 성향과 방법은 달라도 같은 공포정치가로 봤다는 점이다.

 

바로 이 부분이 Non-Sense로 작용한 것이다. 마지막에 트로츠키의 유언장이 문제였다. 로버트 서비스의 책이 균형 잡히지 않은 것은 처음과 끝을 보여준 게 아니라 처음에서 중간으로 끊었기 때문이다. 그의 졸렬한 필력에 웃음이 나왔다. 트로츠키가 러시아혁명에서 그 자체가 트로츠키의 이야기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100% 옳은 것이 아니란 점에서 적어도 100% 아닌 그 나머지 %를 생각해야 했다. 단지 가치관에 따라 좋고 나쁘고를 판단할 수 있으나, 유언장을 보면 <트로츠키>란 책이 전혀 공정성이 없는 사족으로 얼룩진 책이란 점은 내 생각에서 버릴 수가 없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유언장을 이렇게 작성했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 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를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거리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나탈랴)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을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ㅂ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1940년 2월 27일 멕시칸 코요아칸에서 레온 트로츠키”

 

로버트 서비스는 위에서 트로츠키 2번째 아내 나탸샤(나탈랴)의 모습을 관찰하던 부분은 아예 텍스트 위로 표현하지 않았다. 페이지는 부록과 색인을 포함하면 1,000페이지 가까운 책이다. 그 두꺼운 책속에서 유언이 차지하는 부분은 한 페이지에 반 페이지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이미 공정성이란 정확성은 잃은 책이다. 처음부터 나는 아이작 도이처의 책을 봤으나, 그것보다 오히려 영국 에식스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스티브 스미스의 <러시아혁명-1917년에서 네프까지>가 객관적으로 저술했다.

 

당시의 사료와 사진들을 인용했으며, 사견을 넣는 것은 마지막 맺음말 부분에 강조했다. 로버트 서비스는 중간 본문마다 사견을 넣었고, 정확하지 않은 자신의 생각을 이래저래 섞어 넣었다. 트로츠키의 책 중에서 <배반당한 혁명>, <레닌 이후 제3인터내셔널>을 읽은 후에 로버트 서비스의 책을 읽어 보면 뭔가 일치하지 않은 점을 분명 인지한다. 로버트 서비스는 트로츠키에 대하여 그는 똑똑하나 한 마디로 외곬적인 혼자 잘난 사람 바보라는 점이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은 분명하고 하다못해 러시아내전에 보여준 잔인한 대응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극단성에서 어느 진영이나 마찬가지고, 그 외적인 부분으로 같이 역사적 흐름으로 살펴보는 게 아니라 스탈린과 동급대우라는 자체가 엉망인 점이다.

 

그의 저서에도 보듯이 분명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문제점은 관료주의와 폭력적인 공포정치도 있지만, 그 원동력이 스탈린이 고의로 흐름을 만든 쇼비니즘적인 요소다. 러시아민족이 소비에트연방을 지배한다는 논리가 바로 일국사회주의로 이어진 동기로 작용했다. 그래서 그는 관료주의로서 권력을 잡고, 그 권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개인적 이기심과 개인적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은 분명히 다르고, 그 방법의 동원과 수단 역시 다른 점이다. 독일나치와 소비에트 러시아이 비밀조약에서 트로츠키의 예상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가 멕시코에 가서 다른 여자와 바람난 것은 문제나 그것을 고질하게 잡고, 그 외의 업적은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로버트 서비스 자체가 쇼비니스트에 가까웠다. 지금 세계에 코민테른은 해체하고, 이제는 제4 인터내셔널이 아주 희미하게 존재하는데, 제4 인터내셔널은 트로츠키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특이하게도 미국에서 활동적인 요소가 돋보인 점이다.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이며, 트로츠키의 서적을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자가 맥스 이스트먼이란 미국인이다. 로버트 서비스의 서적에서 맥스 이스트먼을 비롯한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맥스 이스트먼을 아주 훌륭한 인물이라 평했다. 분명 뛰어난 인물이고 훌륭한 업적을 한 것은 사실이나, 미국인에 대한 앵글로 잭슨적인 요소는 조금 짜증이 났다.

 

빅토르 세르주나 앙드레 지드와 같은 역사학자에 대한 업적에서 제대로 다루주긴 보다 그의 사생활적인 요소에 강하게 집착한 것이다.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와 비교하여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쇼비니스트적인 요소가 잘 보인 이유는 바로 미국인들에 대한 그의 옹호성이다. 물론 민족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못했지만, 트로츠키가 가장 배제할 것이 민족적으로 뭉쳐 그 민족이 권력을 장악하여 다른 민족을 시기, 질투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 사실이다. 자신이 유대인이란 점을 이용하여 어떤 이익을 챙기지 않으려 한 점과 유대인이든 아니든 그가 해온 업적과 능력으로 소비에트 내의 정치활동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점이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어리석다는 말을 피할 수 없다. 단지 어리석지 않은 인간은 이 세상이 없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로버트 서비스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역사학을 전공하여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도 했지만, 그는 미국의 후버연구소의 일원이었다. 후버대통령을 기념하여 만든 연구기관이니 그의 입장이 책에 고스란히 담긴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쓴다는 것은 그의 자유이나 적어도 조금은 다시 생각해야 했다. 결론은 트로츠키는 고집만 세어 러시아혁명을 성공해도 결국 스탈린과 같이 소비에트연방은 공포정치로 가득한 독재국가 된다는 식으로 이어졌다.

 

스티브 스미스 교수가 지적한 정통주의적인 관점이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이었다. 만약 트로츠키의 마지막 유언에서 다른 것은 둘째 치더라도 악과 억압, 폭력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로버트 서비스는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평화라는 것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된 적은 결단코 없다. 러시아혁명을 두고 사람들이 오류를 저지르는 요소는 러시아혁명은 단지 러시아혁명이 아니라 1789년 프랑스대혁명부터 1871년 파리 꼬뮌까지 다양하게 봐야한다는 점이다. 그 중간에 1830년과 1848년 혁명, 그리고 나폴레옹의 1799년 쿠데타와 1851년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까지 말이다.

 

기본적으로 러시아혁명이 볼셰비키에 의해서만 아니라 계몽주의자도 다수 있었다. 프랑스 국가(國歌)인 라 마르세예즈가 볼셰비키혁명에서 인터내셔널가(歌)와 더불어 같이 불러진 사실이고, 볼셰비키혁명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의 단어만 나온 게 아니라 프랑스대혁명 당시 활동했던 당통과 같은 혁명가들의 말도 나온 점이다. 러시아혁명과 프랑스혁명이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면 결코 러시아혁명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을 읽는다면 러시아혁명이 된 원인에서 공통성을 찾는 것이다.

 

전쟁에 의한 경제침체, 식량부족, 지나친 남성의 징집에 농촌과 도시 노동력 부족, 가족들의 분노 등등을 말이다. 그래도 적어도 프랑스혁명과 달리 러시아혁명은 세계열강들의 1차 세계대전에서 비롯된 사건인 만큼 그 원인과 문제점, 과정을 살펴본다면 과연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을 가지게 한 요소가 옳은가? 아무튼 예전에 읽은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을 다시 떠오른 점에서 나름 재미는 있었다. 그렇다면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결코 좋은 책이 아니다. 트로츠키의 공적인 영역과 실적인 영역을 잘 구분하지 못한 점이 있었지만, 세계정치변화에서 움직인 트로츠키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세계정세에 대한 비판성은 없었다.

 

트로츠키의 적은 트로츠키란 말은 맞다. 인간의 적은 인간이고, 자신의 적은 곧 자신이다. 타인을 적으로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이기심과 고집적인 부분에 의해서다. 그것은 어느 인간이라도 가지고 있는 딜레마다. 알고 있어도 고쳐지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습관이다. 관성적으로 인간은 반복하고, 그것이 어느 순간에 합의점에 도달하나 그 과정이란 정말 어렵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책이 엉망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트로츠키를 관찰하던 로버트 서비스 자신에 대한 관찰이다. 그는 자기 자신도 객관성을 잃고 있다는 사실조차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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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보내야 한데, 요새 사회를 보면 더욱 생각나게금 만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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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
폴 르블랑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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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책의 비판이 되는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를 읽고 있지만, 예전에 읽은 스티븐 스미스의 <러시아혁명(1917년에서 네프까지)>를 읽다보면 로버트 서비스의 책이 참으로 제대로 쓰여졌다고 생각할 수 없다. 스탈린과 거의 동급이란 설정자체가 다소 치킨인듯, 나중에 한 번 요 책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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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2014-05-1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로버트 서비스는 좌파에 대한 악의적 왜곡과 공격을 업으로 삼고 있는 우파 자유주의 저술가입니다. 그의 책 <코뮤니스트>를 읽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날 지경이죠. 아마도 '공정성'이란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저자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와 비슷한, 아니 이보다 더 심한 저자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폴 존슨이죠)

만화애니비평 2014-05-13 13:47   좋아요 0 | URL
따악 하고 동물농장 흰색돼지인 스노볼이군요. 끝과 처음만 읽어보니 악의적인 책이라고 생각만 들더군요. 마르크스주의자까지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책들을 읽다보니 이것은 무슨 러시아혁명을 알로 보는 기분이더군요.
트로츠키가 스탈린과 같다는 말에서 웃음이 나오더군요. 물론 트로츠키가 성격이 거만하고 인하무인격인 것은 알지만, 최소한 자신의 이기심으로 움직이지 않은 사람인데, 너무 비하하니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요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 1 - Novel Engine
히로사키 류 글, 파세리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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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문학이라고 해도 근본적으로 현실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이란 공간을 문자서사로서 만든 세계이다. 그런 세계가 나오는 것이 현실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아도 문학에서도 현실적 조건을 기반으로 만들게 된다. 단지 신화라는 것은 문학에서도 인간이 보이지 않은 욕망을 토대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런 적나라한 인간의 욕망을 현대적 신화로서 재미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라이트노벨이 아닐까 싶다. 라이트노벨에는 보통 현실적 리얼리티가 존재하기보단 환상이란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그래도 계속 내가 강조하는 것은 제 아무리 환상세계고 몽상으로 가득한 망상공간이라도 그것은 현실에 기반 하여 만들어진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실을 토대로 작가가 새롭게 보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은 것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욕구불만 내지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간이란 물리적으로 현실에 속해 있으며, 제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고 하여 그것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도저히 가늠하기 힘든 상태라도 그런 상상조차도 현실의 육체가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제 아무리 컴퓨터의 능력이 뛰어나 인간을 초월한 연산능력을 갖추어도 인간과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조력은 없다. 단지 환상에 지나치게 열중한다는 것은 현실과 자신의 존재성이 격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할 수 자신의 존재성이 격리된 것이라 볼 수 다.

 

자신이 속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에 젖어 거기에 매진하는 것이고, 그런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자신이 현실에서 만족할 수 없는 것이고,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여기서 남은 것은 선택은 제한적이다. 억지로 사회에 적응하든지 혹은 사회와 단절하든지 아니라면 어중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니라면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현실과 환상 모두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다. 어중간한 선택과 비슷하기도 하나 그것은 아니다. 어중한 것은 자신에 대한 명확한 위치를 잡지 못한 채 이래저래 흘러나가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라이트노벨을 읽다보면 작가의 글은 결국 작가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이고, 그런 글이야 말로 작가가 위와 같이 작가 자신이 세상과 대하는 모습이라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딱 좋다 내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사고방식이 다양한 이야기와 기발한 소재가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단지 작가가 스토리텔링으로 라이트노벨을 보여준다면, 이와 대조적으로 작가의 라이트노벨 속에 담긴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독자가 있어야 한다. 작가가 글을 쓰고, 독자가 글을 읽는다면 서로 직접 마주보며 대화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으로 통해 서로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만약 독자가 어느 작가의 글을 보고 나서 그것에 대해 공감을 한다면 작가와 독자는 서로 교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에서 미묘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라이트노벨이란 것은 재미와 오락요소를 위해 만들어진 경소설이다. 경소설이라고 해도 문학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문학소설에서 읽을 수 있는 심도 있는 세계관을 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다고 하여 라이트노벨이 우리 독자에게 뭔가 작은 의미를 넘어 큰 감동을 주지 말란 법은 없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를 읽는 순간 재미와 더불어 나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조금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대 주부가 혼자서 아들과 딸을 키우는데, 남편은 14년 전에 병으로 죽고 아들은 부족한 살림을 돕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남편 없는 주부란 참으로 가혹하다. 아무리 설정이 17교에 입교하면 17세의 외모와 신체적 조건을 가진다고 해도 그 대가란 자신의 수명이다. 자신의 생명을 줄여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원,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작가의 눈이 되는 주인공 타카시는 매우 상식적인 인물이다. 평범한 고등학생이나 어머니를 돕기 위해 집안일도 돕고 게다가 아르바이트로 돈을 받아 가계에 도움을 준다.

 

때로는 상식을 떠나 그가 매우 어른다운 사고를 지닌 것도 알 수 있다. 자신의 할머니가 준 1만 엔의 가치를 그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1만 엔은 13시간이란 노동으로 통해 얻어지는 대가라는 것을 말이다. 왠지 노동에 대한 가치를 고등학생의 입으로 나올 것이라 내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야말로 고등학생이면서 청춘을 누리지 못하고, 힘들게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에게 본 작품의 히로인인 어머니 카즈미의 자식사랑은 왠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래 전 27년 전에 인기 아이돌이던 카즈미, 그녀는 어느 계기로 인해 아이돌을 그만 두고 타카시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타카시의 아버지는 평범한 청년이었고, 단지 어머니를 아낀 분이었으나 카즈미는 타카시에게 아버지에 대해 별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아버지 없는 어머니, 그것은 외로움과 괴로움의 연속이다. 카즈미가 왜 17세로 되어 아이돌이 되었을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정주부와 아이돌뿐이었다. 아들인 타카시가 집안일을 거들어주어도 타카시와 유카는 계속 성장하고 있고, 거기에 따라 가계지출은 늘어간다. 그런데 40대 중반에 이른 카즈미에게 더 이상 일자리는 나오지 않았다. 17세가 된 이유는 2달 전에 일자리에서 나간 것이 계기라고 볼 수 있다.

 

타카시의 어머니가 40대 주부에서 17세 소녀로, 그것도 몸매가 아주 좋은 아이돌로 갔다는 것은 환상적 세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환상이란 공간을 단지 환상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환상이란 구조가 존재하는 이유는 환상이 아닌 현실적 벽에 의해서였다. 아이돌이 되면서 자식이 아닌 타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카즈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팬이 아니다. 자신의 팬에게 3번째로 사랑한다고 선포하는 이유는 바로 타카시와 유카에 대한 사랑이었다. 타카시와 유카가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이기에, 그 가족이 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27년 전에는 자신이 힘들어서 아이돌에서 나왔다면, 이제는 자신이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가족이 있기에 아이돌로 있을 수 있었다. 처음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은 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40대 주부에서 17세 미소녀로 변한다면 과연 남자주인공인 아들은 성적인 충동이나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까? 물론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타카시는 집에서 나오지 않고 혼자 방안에 박혀 있는 유카의 속옷과 맨살을 보면 얼굴을 붉혀지면 고개를 돌리는 부분이 나온다. 정말 여동생이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면 봐도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동생이 여성이란 점을 인식하기에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다.

 

타카시를 보면서 카즈미는 만일 여동생에게 욕정을 품는다면 대신 자신에게 그 욕정을 풀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래서 17세가 된 어머니로 인해 타카시는 미묘한 상황에 놓인다. 근친상간에 대한 욕정은 없어도 그런 상황에 내몰린 그에게 학급 동급생인 메이코는 새로운 해방구이면서도 걸림목이다. 이 작품에서는 감추고 있는 인간의 욕망을 작가 스스로 감추고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발설하는 것이 특징이다. 메이코는 유카가 느끼는 감정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한다. 메이코의 아버지는 유명한 대기업을 운영하는 부자나, 메이코의 어머니는 병으로 별세한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 옆에 17교의 입교로 새로운 여자가 자신의 새어머니로 들어와 메이코와 아버지의 부녀관계를 모두 망쳐놓았다.

 

그런 과거를 가진 메이코가 타카시와 유카 관계에 들어와 마치 메이코가 증오한 새어머니와 같은 위치를 자신이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신화에 인용한 엘렉트라콤플렉스로 딸이 아버지를 무의식적으로 사랑(육체적인 관계도 포함)하고 싶은 심리로서 그 자리를 새어머니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아버지로부터 거세(멀어지게) 된 것이다. 유카에게 아버지는 14년 전에 별세했으니 유카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오빠인 타카시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 셈이다. 아빠와 오빠라는 단어에서 우리 인간은 어느 점을 바라보는 것인가?

 

물론 다 그렇지는 않으나, 여자들 중에서 어린 시절 자신은 아버지에게 시집가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혹은 아버지(대신 그 아버지는 그 딸에게 매우 좋은 분이야 하나)와 닮은 사람에게 결혼가거나 또는 이끌리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남자라면 자신의 어머니와 닮은 여자에게 끌리는 경우가 있다. 특별한 정신적 외상이 없다면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17세의 어머니가 등장한 점에서 유카는 어머니가 외적 조건으로 어머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조건이 17세이기에 오빠랑 동갑이기에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환상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어머니, 그리고 그 환상에서 현실의 도덕에서 오빠가 그 선을 넘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말이다. 다행히 카즈미는 일에 바쁘고, 대신 메이코가 그 자리를 차고 왔으니 유카로서는 불만이 아닐 수가 없다. 유카는 작품 내에서 어머니에게 질투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카즈미가 타카시와 둘이서 찍은 셀카가 유카의 메일로 오자 유카는 잘 씻지 않은 자신의 몸을 정리하면서 타카시와 셀카를 찍는다. 그래서 만약 메이코가 들어오지 않고, 카즈미를 이어 타카시의 할머니인 우메노가 17교로 입교하지 않았다면 타카시의 일상은 수라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 라이트노벨 원작으로 만든 <MM>이란 애니메이션을 보더라도 남자주인공 사도 타로는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가 자신을 일반적인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남자로 보고 계속 성적 구애를 하자, 여기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성적으로 큰 문제점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에서는 이에 대해 다른 식으로 전개한다. 어머니인 카즈미는 아이돌이 된다는 것은 곧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사회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가져야 할 도덕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그 도덕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은 그런 점에서 환상이란 설정 뒤에 매우 현실적인 요소가 녹아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17세로 된 것도 그러나 메이코가 17세의 여사장이란 설정도 환상적인 설정 중에 하나다. 그래도 제대로 잘 설정한 것은 몸이 비록 17세가 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인격조차도 17세가 된 것은 아니다. 카즈미는 17세의 아이돌로서 활동하나 모성애가 매우 강한 사람이고, 우메노는 17세의 소녀가 되어도 옛날 말투와 옛날 복장을 하고 다닌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적 요소를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배제할 수 없는 점이다. 그리고 할머니 우메노에 대해 생각하면 이 라이트노벨은 전형적으로 일본의 유미주의 요소가 잘 보인다고 생각했다.

 

유미주의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라질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늙어서 병든 노인이다. 며느리인 카즈미는 혼자서 두 자식을 키우고, 타카시는 고등학교 청춘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마 타카시의 아버지가 죽자 자신의 남편이 살아생전 타카시와 유카를 많이 옆에서 보살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옆에서 짐이 된다는 생각에 우메노 자신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했고, 카즈미에게 카즈미의 남편 대신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사는 “몰골스레 죽기는 싫었단다.”였다.

 

노인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약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자신 스스로 의지할 수 없고 주변 사람의 도움을 계속 받아야 한다. 병으로 인해 노환이 겹치면 가족들에게 큰 짐이 될 것이고, 가족에게 힘이 되지 못한 것도 모자라 힘들게 한다면 어떨까? 몰골스레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늙어서 병이 들어 죽는 것보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에게 슬픔을 주는 것이 싫어서 아닐까 싶다. 게다가 우메노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17교에 입교했으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입장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만큼 가족들과 건강한 모습으로 미소 짓고 싶은 것이 그녀의 소원이다.

 

작가가 결혼했는지 아니면 했더라도 가정을 꾸린 가장인지는 전혀 모른다. 적어도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사람은 변한다는 것은 분명 사실인 것 같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이 존재하듯이 어떻게든 타키시와 유카를 지키기 위해 17세의 아이돌이 된 카즈미는 분명 환상적인 존재이나 그 존재성에 대한 현실적인 요소는 큰 공감이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현대에 들어와 가족이란 이른바 해체되어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그 옛날 대가족을 이룬 시대와 달리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 간의 사랑은 중요하다. 일본의 대부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을 보면 가족이 단절된 경우(혹은 다른 가족들이 등장하지 않거나)가 허다하나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는 그런 상황에서 매우 독특한 설정을 지닌 작품이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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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틸 어쌔신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AnZ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기존의 김월희 작가의 라이트노벨을 읽는다면 세계관 자체가 역시 디스토피아적인 요소가 강하다. <세계제일의 여동생님>과 <중2병 데이즈>도 그렇다. 세상은 과연 한 개인에게 친절한 곳인가? 그것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세상은 개인에게 가혹하고 잔인하고 심지어는 환상의 세계에 있는 곳과 같다. 라이트노벨이란 장르가 환상적인 요소에 재미와 오락요소를 집어넣은 하나의 콘텐츠다. 콘텐츠라는 미디어로서 하나의 자본력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 상품이다.

 

그런 상품적인 가치가 라이트노벨과 부합되므로 라이트노벨은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으로 재편집 되어 상품으로 나오기도 한다. 한국의 기존 라이트노벨을 아직까지 많이 읽은 편은 아니나, 마치 이것을 영화 내지 애니메이션에 접목하면 어떤 것일까 생각하면, 영상연출 기법에서 몽타주(대립되는 것을 상반되어 보여주거나, 또는 같은 장면을 계속 보여주는 방법 등)와 같은 표현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흔하지 않을 것 같다. 한국 라이트노벨은 액션적인 요소보다 일상적인 요소가 강하고, 설사 액션이 강한 요소라도 역동감이 넘치는 글은 많지 않다.

 

이번에 김월희 작가의 신작인 <블랙스틸 어쌔신>은 그런 점을 조금 뛰어넘을 느낌이 든다. 작가 후기에도 그러나, 여러 가지 영화나 게임의 장면을 하나의 모티프로 삼아 작품 내의 상황이나 묘사를 잘 적용했다. 내 개인적으로 작품을 보니 마치 홍콩영화 중에서 느와르 장르를 소설로 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스포츠카로 고속도로 위를 전력 질주하여 총을 발사하는 스타일은 미국 할리우드 스타일이나, 여자 주인공인 유나의 전투를 보면 오히려 홍콩영화에 더 가깝게 느낀다.

 

좁은 건물에 더러운 계단에서 보는 세상에서 미국식보단 차라리 홍콩식이 가깝게 느껴진 것이다. <블랙스틸 어쌔신>의 제목처럼 흑철의 살인자, 살인자를 의미하는 어쌔신은 미국 할리우드보단 오히려 홍콩이나 일본하고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어둠에서 살아가는 자객, 그 자객은 혼자이고, 세상과 싸우는 고독한 자다. 그들에게 조력자는 없고, 강력한 적들과 싸워 나가야 한다. 김월희 작가 작품에서 <중2병 데이즈>가 있는데, <중2병 데이즈>에서는 주인공 연오는 다른 학생들의 눈에는 중2병 학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작품은 자신이 중2병 환자로 낙인이 찍힌 것을 주인공 자체가 인식하고 있으며, 그 인식 자체가 라이트노벨 자체가 중2병에 대한 내용인 만큼 세계관은 오히려 중2병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설정 자체는 작품 내의 화자인 주인공이 1인칭 시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블랙스틸 어쌔신>은 중2병적인 요소를 매우 강하게 반영했다. 정의가 불의의 악이란 대결하여 결국 패배하여 모든 세상은 악으로 물들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에서 정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의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정의라는 것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 정의가 하나의 가치관으로 옳고 그릇된 것을 판단하여 그 정의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윤리적 가치에 의해 정립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정의라는 이름에는 철학적 가치가 뒤따르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나, 사실 현실에서 보는 정의라는 이름은 단지 자신들의 입맛과 상황에 적당하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황된 명분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 즉 희망이 없고, 암울하고 절망적인 세계에서 말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라이트노벨에서 그런 설정은 충분히 등장할 수 있다. 암울한 현실에 영웅이 나타나 역경과 시련을 겪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거기서 마주치는 불의와 현실의 타협에 상처받고 때로는 좌절도 하나, 끝까지 밀고 간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신화부터 시작하여 최근에 개봉되는 영화 <헤라클레스>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만약 악에 대해 악으로 처단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블랙스틸 어쌔신>에서 주인공인 유나와 레이는 악에 대해 빛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악으로 싸우는 모습이 나온다.

 

작품에서 암살 5대왕에서 가장 높은 자가 레이가 가진 칼을 생각하면서 그 칼에 대한 은근한 암시가 나온다. 왜 악은 악을 공격하는 것일까? <블랙스틸 어쌔신>에서 나오지만, 암살자 집단들이 암살행위를 하고 세상에 공포를 안겨주는 일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런데 그 이익을 가져갈 수 있는 영역이 어느 순간 가득하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고착될 수밖에 없는 포화상태에 이른다. 유나는 처음에 악과 선의 이분법적인 대결에서 악이 이겼다고 한다. 하지만 악이 이겼다고 세상이 끝난 것이 아니다. 단지 악이 선이라는 가면을 쓰고 세상에 군림할 뿐이다.

 

그 군림하는 자들에게 밸런스라는 것이 존재한다. 왜 흑철이란 저주받은 검이 레이에게 잘못 배달되었지만, 처음부터 누가 유나에게 그 흑철을 배달해주었으며 그것은 어떤 이유로 하였는가? 유나는 세상에 자신을 도울 아군은 없고, 오직 혼자만 싸움을 하고 있었으며, 그런 와중에 저주받은 검이 도착했다. 그 검은 세상의 모든 악과 적의를 품은 것이다. 악이 악으로 섬멸하는 것은 결국 그 악 자체 내부에서도 보이지 않은 대립이 있다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흑철의 존재는 악에서도 하나의 시스템을 유지해주는 것과 같은 자동장치라고 생각한다.

 

파과점이라고 하는 일정 수위를 지나면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암살자 집단이 계속 활동을 하다보면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자신들의 공통된 적이 존재하지 않으면 서로 자기 살을 깎아 먹게 되는 행위를 하는 셈이다. 이런 유명한 속담이 존재한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공통된 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와 유나는 단순히 거대한 암살집단과 싸우겠지만, 암살집단 내부에서 가장 강한 자들만 골라 보내 싸운다면 간단하게 처리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정의라는 것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어져 있겠지만, 적어도 악이라고 불릴 자들도 그 나름에는 자신만의 정의와 가치가 있다. 악이란 존재가 추구하는 정의는 바로 자신들만의 이익이다. 그러나 막상 우리 현실에서 우리 인간이 항상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베푸는 이타적인 존재였는가? 나의 이익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 나의 이익이 박탈당할 수 있는 공간에서는 모두 냉정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이 모인 집단세계에서는 그런 마음이 하나의 정의다.

 

<블랙스틸 어쌔신> 첫 장을 열다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세상의 마지막 빛이라는 교만(驕慢)에 사로잡혀 싸우다가 어느새 깨닫는 거야. 나 역시 어둠과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을..” 이런 세계관에서 악이 이긴 세상이지만, 세상은 잘 돌아가고, 누군가 죽지만 아무도 그 이유는 모른다. 그런 세계가 이상하겠지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다소 중2병 세계관이나 어떻게 보면 우리 현실도 이런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르고 스쳐가기에 중2병적인 세계관이 작품에서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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