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 이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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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살인>이란 책을 소개받았을 때, 처음에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제목 자체가 소설과 같아 보여, 마치 살인이나 미스터리 혹은 탐정물에서 나올 것 같은 제목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순간 이 책은 단순히 소설로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문학적인 요소를 다루고 있지만, 단순히 문학에 대한 도서만은 아니었다. 차라리 사회학적인 요소로 통해 인류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경제와 더불어 범죄가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고, 그 뒤에는 범죄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 추리 및 탐정소설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는지도 보여주었다.

 

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만화의 기원을 대해 먼저 다루고 싶은데, 그 이유는 만화의 시초가 거의 당시 풍속에 대한 민중의 시선 내지 또는 풍자로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만화의 시초에서 당시 사회의 그림을 보면 특이한 것이 사형에 대한 장면이다. 사형 이전이나 사형 집행 순간 또는 사형이후의 모습이다. 사형에 대한 그림으로 내가 생각나는 것은 루이16세가 바스티유 광장에서 기요틴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는데, 그 루이16세의 목을 어떤 남성이 잡고 군중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많은 귀족들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인상 깊은 장면은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혁명 이후의 성난 민중들이 왕비의 지인이던 어느 귀족부인의 잘린 목을 창으로 꽂아 왕비에게 보여준 그림이다. 예술이란 것이 결국 당시 시대적인 흐름과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당시 그리는 사람들에겐 예술이란 관념이란 보단 하나의 재미 내지 기록에 가까웠을 것이다.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서 어느 대상을 그리는 것은 신성한 인물임을 부여하기 위해 예술작품이 태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대혁명 전에 로베스피에르가 삼부회 소집이후 입헌제를 여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라거나 또는 위에 언급한 루이16세의 처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비드라는 화가가 그린 테니스의 코트의 서약은 미술가가 미술로 그린 것이나 당시에는 기록에 가까운 그림이다. 그러나 지금에 보는 그 그림은 위대한 문화재일 것이다. 그렇듯이 당시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적 상황이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문화나 제도, 그리고 우리 인간이 즐기는 문학이나 예술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학이나 예술운동에서 로코코에서 낭만주의,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기는 것 역시 시대에 따라 흘러가는 하나의 조류다. <즐거운 범죄>에서는 바로 그런 문학의 흐름에서도 범죄에 대한 문학에 대해 저자인 에르네스트 만델은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변증법적인 상황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문학이나 혹은 문화라는 것이 인간의 생활을 변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생활 그 자체가 문학이나 문화라는 것을 변모시키는지 다소 난해한 요소가 있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으로 본다면 문화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경제적, 환경적 조건에 따라 변한다.

 

이와 달리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현대 사회는 스펙타클, 즉 이미지가 매개된 사회에서 우리 인간의 생활은 이미지에 의해 즉 있지도 않은 가상적 존재에 의해 현실적으로 구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즐거운 범죄>를 작가의 의도가 어떠한들 초반에는 문화유물론적으로 간다면 후반에는 스펙타클로 이어지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다. 그것은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의 도입에 따라 자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대혁명 시대를 거론하는 이유는 당시는 자본주의 도래하던 시절로, 수많은 부르주아들이 제 아무리 능력과 자산이 있어도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봉건주의라는 모순 아래서 그들이 열어갈 수 있는 시대는 한계적이다.

 

또한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보면 맨 처음 루이15세를 암살하려던 하급관리관 다미엥의 일화처럼 다미엥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당시 봉건사회의 범죄자들은 범죄자로 취급당하기보단 오히려 민중의 대변자로 통하기도 했다. <즐거운 살인>에서 목록을 보면 영웅에서 악당으로 혹은 악당에서 영웅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인간은 개인에 결정에 의해 살아간다고 해도 결국에 인간은 그 사회의 거대한 조류에 부딪히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차이가 있지만, 그런 요소도 사회적인 조건에 부합되어야 움직이는 것이다.

 

범죄로 인해 교수형이 처해진 사람이 광장 앞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설파한다. 그는 왜 이런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며, 광장 앞의 많은 군중들은 그에 대해 어떤 때에는 조롱과 비난을 퍼붓기도 하나, 때로는 교수대를 탈취하여 범죄인을 구하기도 한다. 범죄인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단죄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 범죄의 단죄보다 더 큰 범죄자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당시로서 분명 납득이 가는 상황일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계몽주의사상가의 지식에 의해 일어난다고 해도 그 힘의 원동력은 파리의 성난 군중이었다.

 

성난 군중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은 1789년, 1830년, 1848년, 1871년에도 이어진다. 혁명의 원동력이 일어난 것이 분명 계몽주의철학에 의해서인 것은 분명하나, 그 이전에 중요한 것은 민중의 생활에서 보인 비참함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보게 되면 절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식량을 구할 수 없기에 저지른 생계형 범죄이고, 그 대가는 아주 긴 교도소 수감과 수감 이후의 감시다. 감시의 대상은 일을 할 수 없고, 또 다시 범죄의 길로 빠진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을 보게 되면, 사드가 만든 이야기도 하나, 당시 권력층의 부패나 하층농민들의 생활을 다소 알 수 있듯이 누가 더 나쁜가에서 개인의 존재보단 오히려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범죄소설이 처음에는 개인적 원한이나 증오, 이익을 위한 하나의 개인적 영역이었다면, 시대가 흐르면서 범죄자라는 존재가 처음에는 단지 붙잡혀야 할 존재, 모든 소설의 시점은 탐정 내지 일부 영웅이다. 중요한 점은 작가가 잘 지적한 것처럼 탐정이나 주인공인 사람은 생계에 대한 부담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탐정업무나 추적하는 것은 평소 자신의 생활이 업무로 인해 자기 하루일과가 간섭받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범죄자는 처음에는 그런 대상을 피해 도주하겠지만, 결국 상황적으로 몰리게 된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경우 주인공의 시점은 자베르 경감을 비롯한 경찰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자인 장발장에게 부여된다. 장발장이 처해진 시점은 비참하고 억울하며,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계이다. 장발장은 항상 세계에 대해 증오를 가지게 되나, 자신을 용서해준 신부에 의해 새로운 인생을 걷는다. 하지만 자베르 경감의 추적에서 결국 둘은 만나고, 장발장은 자베르를 헤치지 않고, 오히려 용서로서 그를 대해준다. 그래서 자베르는 자신이 믿은 법의 정의에 모순을 느껴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범죄라는 것이 왕정시대에는 개인의 이기심 내지 원한, 질투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자본주의 시대로 오면서 범죄는 단순히 생계에 대해 이루이지고, 개인적 목적이 아니라 생계에 대한 문제이었기에 결국 범죄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인 조직성을 띠게 된다. 마피아의 구성에서 그들이 범죄자로 된 이유는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서였으나, 그 생계 부분이 해결되면서 거대한 범죄조직으로 형성된다. 당초 피난민 내지 외국군에 의해 억압당하던 원주민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었기에 비정상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이런 대립구도는 계속 세력 확장으로 이어지고 결국 범죄조직은 자신의 생계가 아니라 조직의 이익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범죄라는 것이 개인적 영역에서 집단적으로 이어지면 그들은 처음에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폭력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간접적인 폭력으로 동원하게 된다. 미국이 밀주법을 시작할 무렵 범죄조직들은 밀주 내지 혹은 밀주가 어려울 경우 마약, 매춘 등에 손을 대었으나, 추후에는 합법적인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범죄조직이 공공사업, 건설사업, 식품산업 등 많은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방법은 제대로 된 방법이기보단 기존 시장체계에 들어오기 위해 로비를 벌이거나 로비가 통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가령 일본군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 중에 하나가 자국의 경제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헌병과 야쿠자가 결탁하여 조선인들의 상업을 고의로 방해한 점이다. 범죄조직이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등에 업을 때 심각한 폭력이 이제는 폭력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이런 방식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계에 동원되고, 이제는 합법적인 기업도 범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나온다.

 

특히 정경유착이 하나의 이슈로 떠오르고, 특히 대규모 병참산업이나 건설사업, 또는 공공사업에서 투입된 요원이 처음에 이용당하다가 오히려 제거되는 소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예전에 윌 스미스의 주연의 <enemy of the state> 같은 경우에는 국가가 불법적으로 국민을 불법도청 내지 감시를 하는 것에 대한 음모를 특수요원이 저지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영화로 나온다고 해도 영화 자체가 소설이란 텍스트를 문자서사에서 영상서사로 전환했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국가 내지 대규모 자본기업의 범죄를 다룬 영화는 계속 나온다. 범죄의 방법이나 수단, 그리고 그 규모에 따라 소설이나 혹은 그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가 변화하는 이유는 사회적인 요건에 따라 움직인다.

 

범죄소설이 초반에는 인간 개인에 맞추어졌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개인적 영역을 떠나 대규모로 이어지고, 특히 국가의 개입은 피할 수 없는 소재다. 국가 그 자체보다는 그 국가조직을 움직이는 관료들의 이익이 범죄소설의 흔한 소재로 등장했다. 인간의 법이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겠지만, 그 법이 법으로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의 사고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고, 인간의 사고를 결정짓는 것이 이성의 판단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라면 결국 국가관료 조직이 범죄조직 그 자체가 되거나 혹은 범죄조직에 의해 움직이는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상황이 일어난다.

 

특히 미국이나 해체 이전의 소비에트연방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가 자신과 다른 세력이나 혹은 제3국가에 무기나 자금을 부여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혁명 이후 백위군에 지원한 외국군이나, 베트남전의 통킹만사건,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경우 군부 쿠데타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그 군부 쿠데타 세력이 다른 국가에게 군사훈련과 지원을 받은 것이다. 범죄적인 부분으로 보면 그것은 분명 국제법의 위반이고, 폭력적 방법으로 합법적 정부를 전복하는 것 역시 불법이다.

 

쿠데타와 혁명의 차이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전복하는 것이나, 폭력적 수단을 가진 자들은 결코 피지배계급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력에 의한 수단에서 범죄, 스릴러 소설은 이제는 국가와 국가, 그리고 그 중간에 등장하는 요원과 스파이로 통해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지만 스파이물의 특징은 자국의 주인공이 다른 국가에 의해 자국의 위험을 지키기 위해 투입되므로, 상당히 내용이 보수적이란 점이다. 이런 범죄소설을 보면 결국 죄라는 것을 다루게 된다. 물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같이 당시 사회의 비판적인 견해를 다룬 작품이 있지만, 대부분 범죄소설에서 등장하는 범죄인들은 특수한 이익이나 목적을 가진 점이다.

 

개인적 영역에서 이렇다면 집단적 영역에서는 범죄가 하나의 사업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실제로 폭로나 수사에 의해 국가가 범죄를 일으키거나 용인하는 경우가 분명한 사실이다. <즐거운 살인>에서 미국 항공기제작 기업인 록히드 마틴이 일본 정치인에게 거액의 뇌물을 준 점에서 뇌물의 수여자는 단순히 그 정치인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된 사실이다. 국가 내지 대규모 범죄가 하나의 스펙타클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은폐되어야 할 조건이고,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미디어의 장악 내지 미디어의 왜곡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영국비밀첩보기관을 소재로 한 007 시리즈는 국가차원의 지원과 대규모 자본, 그리고 첨단기술과 주인공의 마초적인 요소와 더불어 로맨틱한 모습은 남성으로 하여금 동화의식을 여성으로 하여금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유발한다. 특히 범죄소설의 경우 단순히 괴도에 의한 절도, 미치광이의 살인을 지나 대규모 집단이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집단학살까지 일어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범죄소설은 매우 인기가 많아진 장르이고, 많은 대중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대중들은 단순히 이야기의 소비로 통해 동물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 이면에 가려진 현실적인 과정의 축적은 외면한다.

 

소설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인 만큼 자신도 그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를 죽고 죽이는 이야기에 빠져 자신 안의 가려진 살인충동을 소설로서 풀어내는 심리적 작용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현실은 부조리함이 숨어있고, 처음에 등장한 범죄에서 범죄자는 단순한 물욕이나 질투에 의해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부조리에 대한 저항 내지 반항이다. 그런 비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여전히 하층계급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의해 고통을 받는 점이다. 범죄의 대상이 처음에 개인적 동기에서 이제는 국가적 비리와 부조리라면 이제는 그가 비화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예전에 이런 농담 같은 유머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누군가 아프면 그 치료 수단이 “식물의 뿌리를 드세요 → 기도하면 되요 → 약을 드세요 → 수술하면 되요 → 식물의 뿌리를 드세요”, 어떻게 보면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결국 부정의 부정에 따른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식물의 뿌리 대신 다시 기도로 이어지니 어느 것이 딱 옳다고 할 수 없으나, 최초의 이야기가 되돌아오는 것은 분명하다. 범죄구조가 자본주의사회 이향에서 앙시앵레짐(구체제)의 모순에서 자본화로 통해 개인의 물욕, 이제는 자본주의 그자체가 앙시앵레짐으로 대체되었다면 범죄이야기 역시 바뀔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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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주 금요일 부산대학교에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학술대회 즉 세미나가 개최되었습니다. 행사가 종료 이후 저녁 뒤풀이로 횟집과 호프집에 가서 그날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 소속된 여러 교수님과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연락처를 받아 나중에 연락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에 제가 어느 한 교수님에게 안부문자 드리니 답변은 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한 답변은 오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올 것이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기분은 영 좋지는 못합니다.

 

왜  좋지 못하는가? 그날 회식자리에 가서 많은 교수님들에게 제가 이야기드리는 것이 만화애니메이션 산업문화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제일 심각한 문제가 바로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를 구매하는 소비자에 대한 연구와 그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이나 세계나 자본주의경제구조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기에 바로 이 소비자들을 무시하면 한국만화애니메이션문화산업에 좋은 미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주 건방지게 제 자신이 오타쿠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가령 최근 많은 대중들은 대중문화 중에 웹툰이 무료에 접촉하기 쉬우므로 그냥 공짜라는 횡재에 의지하려고 하나, 이른바 오타쿠라는 불리는 사람들은 웹툰의 무료에 기대하는 많은 분과 달리 직접 만화나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콘텐츠를 구매해주고 있습니다. 일반 대중과 달리 이쪽 계통의 소비자는 일시적으로 디즈니나 미국의 거대한 애니메이션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즐기기 위해 콘텐츠를 구매합니다. 그런 소비자에 대한 요건들을 아무런 정보도 모르고, 3년 전에도 제가 이런 저런 이야기했지만, 역시 지금도 같다는 점에서 참으로 짜증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답장문자에 왜 제가 기분이 좋지 못하는가? 그것은 다음 학회에서 보면 좋겠다는 것이죠. 물론 다음 학회가 어디서 열리지 언제 열리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화가 나는 이유는 저는 만화애니메이션학과의 교수님도 아니고, 만화애니메이션 제작업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누구도 저에게 금전적이나 학문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차라리 오타쿠 커뮤니티에 있는 분들이 저에게 도움을 줍니다. 기껏 저에게 지원보다는 격려나 의지를 주는 분은 부산대학교 교수님 정도죠. 얼굴 아는 교수님은 간단히 대화 정도만 하고요. 물론 오타쿠를 떠나 인문학적 발상과 영상비평에 대한 지식에 큰 도움을 주신 교수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개인적인 발전이지, 제 관심은 그것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 만화애니메이션 향유자에 대한 환경개선입니다. 제게 주어진 것은 항상 부족하고, 저에게 지원이 오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짜증이 나는 겁니다. 지금 제가 논문을 적고, 투고를 할 것인데, 만약 되면 좋겠지만, 떨어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겠지요. 그래도 논문을 작성하는 이유는 학회에서 말만 떠드는 녀석이 아니라 학회 정규논문에서 비평논문으로 합격하여 학회 세미나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발표하는 겁니다.

 

저라는 존재가 아직 학회에서 있으나 마나한 존재이니, 그 만큼의 가치를 올리는 게 정당하죠. 그래서 건국대학교 김윤아 교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길, 모든 것은 결과에 의해 보여주니, 열심히 적어 한 번도전해보세요. 대신 논문심사는 제가 들어가니 쉽지마는 않을 겁니다. 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되는 한에서 해보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제가 여기서나 혹은 다른 곳에서 몇 번이나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님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언제나 학술대회나 포럼에 가면 느낍니다.

 

그날 학술대회에서 부산국제영상포럼이 있었는데, 부산영상산업과 관련되어 무슨 진흥원 내지 연구원의 원장님이 오셨는데,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1년 2000명의 애니메이션 관련 학과에서 졸업생이 배출되나 국내에서 5%만 된다. 그렇다면 왜 5%인가? 자신들의 시장조건에서 교수님들의 제자들은 몇 년동안 공부하고 노력해도 국내에서 되지 않아 다른 직업을 하거나 또는 외국으로 갑니다. 그렇다면 사회구조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있겠지만, 적어도 구매자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가차없이 날렸습니다.

 

교수님들은 제자들이 취업이 안 되더라도 계속 그 교수자리에 앉아 일을 할 수 있지만, 제자들이 나와서 작품을 만들어서 누가 사주지 않으면 결국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교수님의 제자들이 만드는 것을 사주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오타쿠들이다.

 

라고 했습니다. 물론 오타쿠라도 교수님이 저는 어디에 속하냐는 말에 저는 논문에서 나오는 오타쿠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소비만 아니라 글을 적어 리뷰를 적기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계속 소비자를 생각하지 않으면 한국애들은 한국 것 없어도 대다수는 일본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1달에 라이트노벨이 일본에서 백권정도 국내에 들어오고 있는데, 라이트노벨이 뭔지도 모르시는 교수님들, 이미 국내 라이트노벨사인 시드노벨이나 노블엔진을 가진 출판사들은 소비자와 직접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시장을 만드는데,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학회에 가면 학술적 논의와 토론이 중요하나, 결국 산업과 문화의 발전입니다. 소비자 없는 문화산업의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참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 국내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렇게 글적는 것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나, 그냥 눈 딱 감고 상대하지 않고 싶을 떄도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이 직접 나와 피드백을 해야 한다고 하나, 아마 국내에 이런 학회가 있고, 교수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게다가 있다고 해도 감히 갈 수 있을 것 같나요? 제가 가도 반응이 뒤에 보면 별로인데, 일반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은 눈에 보일까 싶습니다.

 

다 그런 분만 계시는 것은 아니나, 솔직히, 짜증납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페이트 십덕후 분이 화성인 바이러스로 나오면서 많은 홍역이 치루었습니다. 저같은 경우에도 직장 내에서도 조롱을 받았는데, 어린 학생들은 절교 내지 왕따 같은 일도 당했다고 합니다. 학회에 가입한 동기도 그 사건 이후 너무 짜증나고 답답해서 어떻게 가입되었지만, 그뒤로 나아진 게 있을까요? 아마 많은 사람들은 애니메이션 보면 씹덕후라고 비웃으면서 G-star 게임축제에 가면 몸매 좋은 코스튬 플레이하는 여자 앞에서 침이나 흘리면 사진찍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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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2 - Seed Novel
맑은날오후 지음, 토브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2권을 읽은 후에 예전에 이 책의 1권을 서평 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서평에서는 내가 적은 것도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적은 글도 있었다. 거기서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나도 나름 의문이 든 것이 하나 있었으니, 주인공 론이 아주 강력하고 무서운 힘을 가졌는데, 그는 왜 용사예선대회부터 실격 처리 되었는가 이였다. 전반적인 서사를 훑어보면 그의 탈락과 마왕 루리를 만나 린을 비롯한 용사일행을 만나도 그는 약한 탈락자가 아니라 용사 린조차도 은근히 능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2권을 보면 더욱 그런 것이, 그의 머리는 금발과 파란 눈을 지녔지만, 론의 동생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론은 분명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였다. 검정이란 색은 아무 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기도 하고, 무의 공간이 있기에 유의 공간일 수도 있다. 그가 가진 어둠의 세계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나 모른 것을 무로 만들어버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즉 무(無)로 향한 강한 힘의 유(有)였다. 그가 처음에 어이없는 패배의 순간, 그것은 이 작품이 내세우고 있던 설정 중에 하나고, 복선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이런 부분이 조금 마이너스로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권 후반부에 다소 이런 의문요소에 대한 복선이나 암시를 주었다면 1권에서 보인 부정적 의견에 대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으나, 1권 분량에서는 도저히 그것을 찾지 못했다. 2권에서 그나마 찾은 것이 다행일 수가 있겠지만, 2권에서 암시가 노출된 점에서 서사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게 된 것이다. 작품에서 본다면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다”라는 말과 함께 론의 존재는 시간적인 진행이 다른 곳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금 루리와 여행 중인 세계에서 론은 루리와 동행하는 마왕의 기사이나, 이전의 병렬세계였던 공간에서는 론은 그 자리에서 용사가 되어 루리의 언니인 루나와 더불어 마왕국을 무너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용사로 되었던 론은 마왕을 쓰러뜨리지 않았고, 대신 마족들의 영역에 있던 루나는 킹 울프에게 습격당해 큰 부상으로 죽는다. 루리의 죽음을 보던 론은 루리의 육체가 그대로 식는 게 아니라 공중의 빛처럼 사라져 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어떤 사건의 계기, 그 사건은 론의 할아버지와 인피니티 황제의 준비된 예정에 모든 인류는 전멸하고, 오로지 론만 살아남는다. 론은 어떤 수수께끼 인물에게서 마지막 소원으로 자신이 소원은 용사가 되지 않아 이종족들을 살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종족들의 힘은 매우 우월하고, 루리는 마왕으로 억지로 된 소녀이지만, 그녀의 신체적 능력은 보통 인간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이종족과 그리고 이종족들이 있는 마족들의 세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 세상 모두가 지옥으로 변하고, 용사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파괴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용사라는 존재는 인간의 신화적 욕망에서 태어난 존재다. 즉 인간이 욕망이란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거대한 무의식이란 소망으로 용사라는 이름으로서 대체하는 것이다. 세계를 제패하거나 마왕을 죽이거나 또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여 그 세계의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는 기존 우리가 아는 환타지 문학에서 등장한 마왕․용사가 등장하는 서사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구조를 지닌 서사는 상당히 많이 도출된다. 단지 그것으로 통해 무엇을 보여주는지 또한 무엇을 제시하고자 하는 지가 중요할 것이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2권에서 보이는 서사는 1권에서 내가 지적한 것처럼 인피니티 국가의 황제가 겉으로 용사와 함께 마왕을 제거했기에 위대한 왕으로 보이나, 그 뒷면에는 상당히 위험한 일을 꾸미는 점이다.

 

론의 할아버지인 48대 용사는 자신의 손자에게 매우 좋지 못한 것을 강요한다. 그것은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전체주의라는 파시즘은 결국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인종, 국가, 사회, 존재 등을 하위부류로 보고 그들을 억압하거나 탄압한다. 또한 자신들이 배척한 존재에 대해 하나의 악적인 존재로 부여하여 집단 자체적으로 하나의 광기가 형성되어 그 광기가 마치 정의로운 가치관으로 대체된다. 군중심리학적으로 나치독일 시대에 히틀러의 주요참모인 괴벨스가 선전한 방법 역시 그렇다. 인간의 도덕성의 유무에서 괴벨스가 외친 방법들은 매우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에는 크리스천들이 많았으며, 그것도 아주 독실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잔인한 소장인 아이히만의 경우 그는 아주 냉혹한 사람도 아니고 매우 평범했다. 단지 그는 관료주의적인 사고에 의해 매우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선택에 의해 학살을 했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키는 파시즘이란 결국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의 기계 내지 병기 그리고 그 자신마저도 도구로 전락한다. 론의 꿈에서 나온 또 다른 론은 아마 그런 가치관에 의해 자신이 모든 것을 제패했겠지만, 결국 자신의 최고의 적은 본인의 모습이었다. 용사란 세상을 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파괴하고 많은 사람과 생물들을 비탄의 나락으로 끌고간 것이다.

 

이때 등장한 의문의 인물은 과거에 인간을 비롯하여 세상을 만든 창조신이라고 한다. 그는 인간에 의해 그 신의 자리에서 떨어져 그저 방랑하는 나그네가 되었다. 마지막 힘으로 론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것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주입한 가치관을 고수한 론이 아니라 다른 가치관을 가지기로 결심한 론이었다. 처음에 루리를 지키기 위해 누구라도 벨 수 있고, 심지어 용사일행들과 유대조차 맺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린과 티나, 스팅과 이래저래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전혀 원하지 않은 길을 걷게 되는 론, 하지만 그 론이 만약 원하지 않은 길을 걷지 않았다면 최악의 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작품에서는 다른 길을 선택한 론이었기에 다른 시련을 준다. 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론은 세상과 적이 되어야 했고, 자신의 할아버지와 인피니티 황제의 기대를 배신했다. 특히 론의 할아버지인 48대 용사는 매우 특이한 존재다. 그는 나이가 이미 60살 정도이겠지만, 외모는 30대의 건장한 남성이다. 그가 어떤 힘으로 그런 모습을 유지하는지 모르지만, 할리 가문 대대로 수명이 긴 점과 48대 용사인 론의 할아버지는 황제와 더불어 붉은귀 여우족을 잔인하게 토벌할 정도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

 

론이 상대해야 하는 대상이 모호한 설정이 된 것이다. 론의 아버지는 론이라는 린이라는 용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아들을 두었지만, 론의 아버지 본인은 용사의 길 대신 포도주를 만드는 일을 선택했다. 론의 아버지보다 오히려 론의 어머니가 더 강한 힘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론의 아버지는 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용사가 되는 길을 포기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론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론의 할아버지)에 의한 거세공포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서로 대적할 수 없기에 론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론의 할아버지)와 아들(론)하고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론은 론의 아버지를 오이디푸스왕 이야기에 나오는 라이오스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라이오스는 이제 론에게 론의 아버지가 아니라 48대 용사가 라이오스로 되어야 했다. 그 이유는 론은 이제 자신의 할아버지가 주입한 인생관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삶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모적 관찰에서 론의 할아버지는 론의 아버지와 유사한 나이로 보인다. 그리고 론이라는 반영웅이 인피니티 국가의 영웅의 동료이며 지배자인 황제와 대립해야 한다. 그래서 1권부터 내가 지적한 것처럼 새로운 서사로서 론은 오이디푸스 혹은 오디세우스가 되어야 했다. 기나긴 여정에서 그가 가고 싶은 곳은 왕이나 용사의 권좌가 아니라 그저 루리와 같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일상이었다.

 

일상으로의 초대가 결국 론에게 주어진 최후의 과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간단한 모험이 될 수 없었고, 심지어 완료한다고 해도 장수족의 소녀인 루리는 수 백 년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 반면 인간은 100년도 살지 못하는 종족이다. 종족 간에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은 존재하기에 론에겐 또 다른 고민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남녀의 관계를 넘어 인류라는 거대한 존재로서 다른 종족과의 대립과 마찰이 어떤 세상으로 이어져 가는가에서 마족의 멸망은 결국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의 균형이 붕괴되고, 그 붕괴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이종족이나 인간까지 위험요소가 된다.

 

마족이나 이종족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황국의 군대 앞에서 인간들이 정복지가 인간이 아닌 미확인의 자연이라면, 그 자연이 정복되는 경우, 인간이 정복하는 대상은 결국 인간 그 자체다. 인간의 이분법적인 논리에 의한 서사전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해오던 cliche이다. 정해진 패턴과 틀에서 인간은 서사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보다 하나의 소재 내지 모티프, 또는 등장인물에 대한 매력이다. 모두 달라 보이나 결국은 같이 되는 것은 스토리텔링의 결말이지만, 그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결론을 같을지 몰라도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다르고, 과정 내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사건으로 통해 무엇을 보는 것이다.

 

인간의 시간은 비가역적인 것이나, 이야기로 만들어진 서사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비가역적인 시간도 가역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시간도 있다. 단지 그 가역성을 따지는 이야기에서 독자는 이야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물리적인 비가역적인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래도 물리적인 시간은 흘러가도 이야기를 읽은 후 머리에서 진행되는 이미지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결국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 비가역적인 존재인 론이 어떤 인물을 만나 과거로 돌아가는 점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등장은 이 이야기가 서사 내에서 2번째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분명한 사실이다.

 

운명을 절망의 끝에서 거부하던 론의 마지막 절규에서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는 이분법의 논리로서 용자 VS 적이라는 구도를 넘으려 한다. 그리고 그 운명이 공간에서는 론만이 아니라 린, 스팅, 텐드, 티나, 그리고 론의 여동생까지 휘말린다. 게다가 과거 용사를 죽게 만든 하얀 마녀의 미스터리, 전반적으로 이번 2권을 보면 발달을 지나 전개라는 서사적 흐름이 보인다. 그러나 그 전개는 아직까지 발단에 가까운 것 같다. 아직 등장인물들이 완전히 모이지 않았고, 그 등장인물이 모두 모인 상태에서 론의 할아버지가 준비한 거대한 위기가 봉착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론이 선택한 결과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등장하기 이전의 론이 선택한 결과는 서로 다르게 전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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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
폴 르블랑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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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서비스가 저술한 <트로츠키>를 비판한 도서인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을 읽는 순간, 여러 가지 판단을 해보았다. 왜 로버트 서비스는 트로츠키의 인생에 대해 설명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면서 인용한 자료를 전부 사용하지 않고, 설사 인용하더라도 그 문구를 반 정도 잘라 먹는 것을 생각하면 객관적인 자료를 혼자서 너무 주관적인 사족으로 가득했다는 판단을 버릴 수가 없다. 우선 내가 트로츠키가 해낸 업적과 더불어 그가 실수한 부분을 다 본 만큼 그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분명히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실수로 가득했다고 해도 그의 실수는 자신의 이기심에 의한 실수보다는 자신의 완고한 타고난 성격에 의한 실수였다.

 

그런 실수라도 그 개인에게 책임이 부가된다고 해도 비판의 과정에서 그의 실수를 비판해야 할 것이지 그가 나쁜 의도로 했다는 비판은 도가 지나치다. 그 로버트 서비스의 책에서 비판은 정당해도 그 비판의 언사는 주관적인 사족이 지나치다 못해 너무 거슬렸다. 아이작 도이처 같이 차라리 공과 실을 다 다룬 것을 여기서는 트로츠키는 뛰어난 연설가 웅변가라도 결국 완고한 고집불통에 이기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은 웃긴 말이다.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한 평생 스탈린과 적대하며, 다른 강대국의 지배 권력조차 스탈린에 대한 비판적 언사를 함부로 날리지 못했지만, 트로츠키만 달랐다.

 

혼자 안위무사를 위해 꽁무니 빼는 것에서 비판의 대상에게 비판을 날리지 못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당시 유럽사회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은 그야말로 비겁하다고 여겼다. 유럽이 1930년대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들끓고 있었고,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여 많은 유대인을 고통스럽게 죽였으며, 프랑스에 침범하여 수많은 프랑스국민들을 괴롭혔고, 레지스탕스에 대한 응징 역시 잔혹했다. 제일 잔혹한 것은 아마 스페인 내전이었을 것이다. 프랑코가 지배하던 반민주세력이 독재 군부로 민주주의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파시스트들은 권력을 위해 다른 국가의 권력과 손을 잡아 무기를 도입하여 권력을 손에 넣었다. 독재자 프랑코와의 대전은 스페인내전에서 통일노동자당으로 참전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유명한 감독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이란 영화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리아 찬가>를 보고 만든 영화라고 들었다. 스탈린과 GPU가 저지른 그 오만한 행동은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일국사회주의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가리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때 유일하게 계속 그 스탈린에게 비판을 멈추지 않은 자가 트로츠키다. 가진 것이라고 그의 입과 글이었다. 언어로서 폭력에 대항했던 자였다. 물론 미국을 비롯한 자유시장주의자들도 스탈린이 눈에 가시거리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트로츠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트로츠키의 글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세계에 파시스트가 넘쳐 결국 나치와 스탈린을 연합을 할 것이고, 그것이 일국사회주의 관료주의 체계가 되어 국민을 억압할 것이란 점이다. 왜 나는 로버트 서비스의 글을 보고 이렇게 비판하는 것일까? 트로츠키는 이런 글을 <배반당한 혁명>에서 남겼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오세아니아 국가에서 금지하던 그 책의 원조인 도서에서 말이다.

 

“관료 지배의 토대는 소비재의 빈곤과 이에 따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있다. 상점에 물품이 충분히 있으면 구매자는 원할 때는 언제든지 상점에 들려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물품이 거의 없을 때는 줄을 서야 한다. 이 줄이 아주 길어지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관을 임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련 관료 집단이 누리는 권력의 출발점이다. 관료 집단은 누가 어떤 물품을 가져야 하고 누가 줄에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이런 글은 딱히 트로츠키에 의해 만들어진 비판도, 트로츠키가 추구하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마르크스로부터 나온 것도 아닐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으면 이런 문제를 이해할 수 있으며, 루소 리옹에서 학술상으로 받은 논문인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이런 문구는 특히나 인상이 깊다. 루소의 사상이 결국 칸트로 이어져서 칸트도 이런 부분을 미학적인 요소로 받아들인다.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관료주의는 어떻게 보면 근대정치의 모순현상이나, 그런 요소가 이미 봉건사회에서 귀족에 의해 착취당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소수의 권력 특권층과 반대되는 시골 농민, 그 사이에 중간에 끼여 있는 관료집단들 어떻게 보면 트로츠키가 말한 것은 20세기만 아니라 21세기도 유효한 말이다. 관료집단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희생자만 아니라 다수의 국민조차도 희생되어야 할 때가 있다. 로버트 서비스가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은 그가 경솔한 실수를 해야 하는 것이지 트로츠키가 가지고 있던 큰 흐름은 제대로 봐주어야 했던 것이다.

 

자유주의 철학사상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는 인간이 비참한 경제적 상황에 놓이면 안 된다고 한다. 롤즈의 <정의론>에서도 인간이 정치적인 활동을 위해서 최소한의 경제적인 요건이 필요하고, 그들이 정치적 판단을 위해 문화적, 교육적인 혜택이 뒤를 따라야지 기회로서의 공정한 자유와 평등이 완수되는 것이다. 단지 개인주의적 자유시장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단지 그 개인의 이익에만 치중되기 때문에 공적영역에 대해 의미가 없으면 공적인 요소를 말하고자 하는 행위만큼 모순이 없다. 가령 인간은 개인 스스로 잘 살기 위해 노력하기에 타인의 이익에 누가 관여할 의미는 없다. 그러면서 그런 행위를 방해가 사회적인 악이라면 그것이 진행되고 있는데 계속하여 사회적으로 경제사고가 터지면 누가 어떻게 보고 판단하는 것일까?

 

이들의 관점이 틀린 이유는 개인의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이 간섭을 배제하는 게 공정영역에 이롭다면 그 공적영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어서 여기저기 모순이 터지면 그 개인에게 책임이라고 하여, 만약 그 개인들의 인생에 대한 파산선고로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것인가? 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놓지 않는 것도 개인의 자유고 권리라고 주장하면 누가 어떻게 조율을 할 것인가? 난해한 담론이 아닐 수가 없다. 로버트 서비스의 관점은 바로 이런 모순에서 답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개인성 추구하는 사람이다.

 

러시아혁명이 결국 모순으로 인해 냉전시대와 공포정치로 물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누가 왜 그렇게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한 교훈을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대혁명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신들은 인권의 자유라고 외치면서 왜 타인의 인권에서는 무지하고 야만스러운가? 자신들만의 자유만 있으면 모든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자위적인 행동이야 말로 제일 위험하다. 왜냐하면 나치 역시 자신들의 민족의 영광과 자유만이 허락되었기에 범죄국가라는 낙인을 찍게 만들었다.

 

역사라는 교훈에서 비판은 당연히 필요하나 그 비판은 역사의 당시에서 벗어나 그 흐름에서 이어지는 현재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하는 점이다.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을 읽으면 로버트 서비스 당시 국제사회에서 일어난 끔찍한 전쟁과 파시스트들의 잔인함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는 점이다. 인간 자신은 개인이나, 그 개인은 국가와 사회 더 나아가 국제정세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관점이 생략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는 졸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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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2014-07-3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시대의 전반적 상황에 대해 정확한 판단과 날카로운 비평이 아주 탁월한 서평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31 16:12   좋아요 0 | URL
악! 감사합니다

NamGiKim 2018-09-07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점은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 평전에서도 그러합니다. 내전시기 백군 반동들이 한 짓은 언급치 않으며 볼셰비키들의 잔인성만 강조하죠. 그게 바로 서비스 같은 우익들의 한계라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9-07 08:55   좋아요 0 | URL
백군 장교들의 잔혹성은 언급하지 않고 적군파의 무력충돌만 말하니 참 가소로운 글이더군요
 
가와이이 제국 일본 - 세계를 제패한 일본‘귀요미’미학의 이데올로기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장영권 옮김 / 펜타그램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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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문화를 알려고 한다면 단순히 대중문화나 또는 유명명소를 보기보단 차라리 하위문화로 보는 것이 좋다. 인간의 근본이 나오고 사소한 것들이 튀어나오는 하위문화로서 상위문화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새로운 바람에서 그 결정적인 계기가 나오는 것 은 대중문화에서 나올 수 없다. 이미 고정된 클리셰와 매너리즘에 의한 방법은 새로운 것을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유지되기만 한다. 그런 점에서 고급문화 내지 저급문화 또는 하위문화에 들어있는 다양성은 새로운 히트의 요소가 된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대중문화를 넘어 거기에 숨어있는 문화적 의미를 알려면 결국 하위문화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하위문화로 간다고 하여 하위문화만 보는 게 아니라 다양한 기존문화와 전통문화 그리고 외래문화까지 결합된 하나의 콤플렉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와이이 제국 일본>을 읽는 것은 단순히 일본 내의 하위문화를 알아가는 과정일까? 전혀 아니다. 그것은 하위문화로 통해 보는 일본인들의 문화적 특성과 그 속에 숨어있는 그들의 성향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전형적인 성향을 밝힘으로서 현대 일본인들의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책 뒤에 나와 있는 경희대학교 영미문화 전공교수로 계시는 이택광 교수의 소개추천이 인상적이다. “‘가외이이’를 알면 일본이 보인다. ‘가와이이’ 현상이 일본을 대표하는 상품미학으로서, 그리고 글로벌화한 세상에서 강력한 신화로서 군립하게 된 사정과 그것이 지닌 이면을 역사적, 정치적, 성적 맥락에서 천착한 이 책은 한국의 대중문화 연구자에게 뛰어난 전범이 되리라 확신한다. 물론 일본 하위문화에 열광하는 수많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문제의식을 던져줄 것으로 기대한다. 연구서이면서도 내용에 저도 모르게 빨려들게 하는 지은이의 필력 또한 매력적이다.”

 

책을 읽는 순간 모에라든지 가와이이라든지 그런 말이 여기저기 튀어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미소녀 캐릭터에 대한 모에는 결국 가와이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만든다. 미소녀에 빠지게 되면 그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작가인 요모타 이누히코는 인문학자로 일본의 전통문학과 근대문학, 일본의 태평양전쟁 이후의 이야기까지 풀어 넣는다. 그것이 당연하다. 인간의 문화라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느 기회로 통해 계속 변화해 가기 때문이다.

 

가와이이라는 것은 과연 어느 것인가? 일본에서 가와이이라는 단어가 귀엽다는 것도 되나 일본어를 전문적으로 구사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가와이이의 발언을 잘 못 들으면 귀여운 것이 아니라 불쌍한 것이라는 말이 들려온다. 최근 2014년 일본애니메이션 중에서 <우리 모두 카와이장>이란 작품이 있는데, 가와이라는 것이 귀여운 것인지 아니면 불쌍한 것인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카와는 강을 의미하는 하(河)로 나온다.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귀여워 보인다. 그것이 가와이이의 시작인 것처럼 보였다.

 

가령 우리는 너무 완벽한 사람에 대해 심적으로 부담스럽고 친해지기가 어렵다. 너무 깔끔한 결벽증이 다소 강한 사람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기 어렵다. 뭔가 인간으로서 다가가기 위해서는 다소의 약점이 필요한 것이다. 약점이 많은 인간이기에 그 공간을 틈새로 같이 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사람이 때로는 안타까워 보이고 거기에 대해 뭔가 잘 해주고 싶다는 생각, 그것이 가와이이의 시작이고, 모에요소의 하나이다. 너무 완벽하면 다가서는 것도 부담스럽고, 옆에서 지켜주고 싶은 것도 없어진다.

 

가와이이에서 왜 미소녀 캐릭터가 좋은 것일까? 그들은 어딘가 약해보이고 부족해보이며, 너무 강한 여자라도 어느 부분에서 매우 약하면 그게 하나의 모에요소로 될 수 있다. 모에요소는 애니메이션, 만화, 라이트노벨, 게임 등과 같이 현실적에서 존재하지 않은 존재에 대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이 그 캐릭터에게 마음을 품는 것이다. simulacre 즉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것처럼 모에 대상은 현실에는 없는 존재나 마치 현실에 있는 존재만큼 강력한 존재감을 형성한다.

 

미소녀 캐릭터에 보이는 가와이이는 결국 이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뭔가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그 부족함이 일본의 미학과 무슨 관계인가? 미학에서 일본은 유미주의적인 것도 있으나 빈틈의 미학이 있다. 즉 가득 차는 것보다 다소의 빈 공간을 만들어 여유라는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국화와 칼을 지나 소우주적인 공간을 추구함에서 화(和)라는 사상을 위해 여유적 공간을 만드는 것은 미백의 미학이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일본 다실에 작은 다다미방에서 있는 것은 작은 꽃병 하나에 다구와 몇 권의 책이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작은 방에 창문을 열면, 햇살이 따듯하게 비추고 시원한 바람이 불며 새소리가 지저기는 아름다운 화음에 곧 방을 채우게 된다. 아무 것이 없기에 채울 수 있는 미학, 가와이이 미학은 부족한 대상에 대하여 채워주고 싶은 마음, 즉 그것이 하나의 상품전략이라 볼 수 있다. 일본 소녀들에 대해 이런 말이 기억난다. 일본에서 여고생은 최고로 높은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여고생들의 문화에서 가와이이적인 요소로서 그들은 자신을 꾸민다. 귀여우면서도 뭔가 마음에 이끌릴 수 있도록 말이다.

 

모든 여고생들은 아니겠지만 여고생들이 자주 구매하는 인기잡지의 콘텐츠를 보면 여고생이 원하는 것과 혹은 하나의 스펙타클로서 그들을 상품적 전략으로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서적들이 계속 발매되는 점에서 일본의 가와이이 문화는 나이와 사회적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초반 소녀들은 최대한 귀엽게, 20대는 자기중심의 사랑인 나르시시즘 자세, 50대는 여유라는 것으로 통한 포용력에서 각자의 나이에 맞는 가와이이를 실천한다. 가와이이 문화는 나의 주도적인 개성보다는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존재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쉬운 도서가 아닌 점을 밝혀두는 이유는 중간마다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의 이론이 등장하는 점이다. 가령 이 책을 본다면 가와이이 현상에서 보이는 일본 여성들에 대한 점은 자크 라캉이 말하는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가와이이 문화에서 현존하는 여성들에게 욕망의 대상에 대한 자신의 욕망함을 보여주기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런 여성들에 대해 환상적인 요소를 극대화로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기에 상상적 존재로서 현실을 대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부족함에 대한 동정심 내지 혹은 거리감이다. 이 책에서 일본 근대문학가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인용하는 게 인상적이다.

 

방과 후에 ‘나’는 친구인 긴코와 함께 미장원에 몰래 간다. 그런데 새로 한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아무래도 귀엽지(가와이이)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친구 긴코가 들떠서 “이대로 맞선에라도 나가볼까나”라는 식으로 말을 하기에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귀여운(가와이이) 사람”이라는 느낌을 품는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저녁노을이 진 하늘을 물끄러니 바라보다 아버지 생각이 났고, 기분이 고양되어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다’라고 읊조린다. 집에 돌아와 보니 키우는 개 자피가 우물가에 떨어진 보리수 열매를 먹고 있기에 “갑자기 깨물어 주고 싶어질 정도로 자피가 사랑스러워(가와이이)”진다. 이번 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대목은, 그 뒤 자기 방에 돌아간 ‘나’가 거울 보고 말하는 감상이다. 그 뒤에는 ‘나’는 부엌에서 쌀 일며 “어머니가 애처롭고(가와이이) 안타까워서 소중하게 대해 드려야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한다” 그녀가 밤에 이불 속에 들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드는 대목에서 이 단편은 끝난다. <여학생>은 짤막한 단편이지만 “가와이이”와 관련된 다양한 용례가 등장한다.

 

결국 가와이이란 단지 귀여운 것일까? 보기 좋은 것이 아닌 그로테스크적인 요소에서도 가와키모로서 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가령 한스 밸머의 작품에서 무참히 부서진 인형들을 보면 뭔가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가와이이란 미의 미학과 더불어 추의 미학이 동시에 숨어 있다. 왜 이런 것일까? 일본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하다. 강한 만큼 개인에 대한 사생활을 침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나, 집단적인 생활에서는 매우 예의바르고 튀지 않은 행동을 하려 한다. 그런 집단생활에서 서로에 대한 벽은 하나의 욕망적인 대체물로서 가와이이라는 문화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즉 가질 수 없는 인간관계에 대한 대체물로서 가와이이라는 단어적 현상이 생기고, 거기에 맞게 문화를 조성해 가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격식에서 일본에선 같은 동급생이라도 여자에겐 성씨 뒤에 상(氏)을 붙이고 남자 뒤에는 군(君)이란 단어를 붙인다.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성으로 부르지 아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친분이 생기면 이른 뒤에 Chang이란 단어를 붙이지만 어른의 세계에서는 정말 위험한 일이다. 결국 누군가에게 마음을 쉽게 열어줄 수 없는 사회적 문화인 점에서 가와이이 현상은 자신만 열어주고 싶거나 또는 보여주고 싶은 욕망의 자리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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