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 윤태영 비서관이 전하는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
윤태영 지음, 노무현재단 기획 / 책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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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시간을 내어 나는 볼테르의 서적 <캉디드>를 읽었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낙관주의자 같이 그냥 살아가는지 혹은 <캉디드>에서 등장하는 버림받은 학자인 마르틴처럼 다소 비관적인 요소가 보이는 것일까? <캉디드>라는 소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프랑스 루이15세가 집권하던 때에는 다미엥이 몇 시간 동안 고문을 받으며 죽어가던 때이다. 마녀사냥이 일어나고, 더러운 매독이 여기저기 음탕함에 흘러들어가던 시기다. 도저히 현실에서 희망이란 단어 내지 긍정이란 단어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캉디드>의 주인공인 캉디드는 낙관주의자로서 살아간다.

 

우리에게 낙관적인 요소를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과연 현실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 낙관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오히려 캉디드와 논쟁을 하던 마르틴처럼 현실에 대한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거기에 대한 근본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문제의 해답을 주지 않으나, 그 문제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지 답을 찾아준다. 근본적으로 무엇이 틀렸는지 알아야 이후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이정표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관이자 제1부속실장을 맡았던 윤태영 씨가 저술한 <기록>을 보면서 나는 <캉디드>로서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

 

볼테르의 <캉디드>는 현실의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이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형이상학적인 이분법을 나누는 방법에서 그 기준이 윤리도덕적인 영역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냥 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거기에 부조리가 하나의 당위성을 가지게 되었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낙관론적인 태도를 보이는 캉디드와 달린 <기록>에서는 보이는 노무현이란 이름은 <캉디드>에서 찾아보면 그 어떤 인물에 속할 수는 없다. 단지 캉디드와 다르면서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실에 대한 부조리와 비판적 관찰은 놓치지 않고 받아들이고 투쟁했으나, 그런다고 미래에 대한 비관론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나는 아마 캉디드와 같이 논쟁을 하며 여행하던 마르틴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대하려는 내 생각이 마치 마르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지도 모른다. 마르틴은 사실 볼테르를 <캉디드>란 소설에 등장시킨 하나의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마르틴으로 보는 세상은 온갖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였기에 마르틴은 부정적인 세상관념으로 통해 캉디드와 논쟁했던 것이다. 부정적인 비관과 긍정적인 낙관, 그 어떤 것이든 포기할 수 없을 인간의 판단력이다.

 

윤태영 씨의 <기록>은 볼테르의 <캉디드>로 통해 보자면, 18세기 중반의 프랑스나 혹은 21세기 초반의 한국이나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했다. 대신 캉디드는 그 곳에서 있는 그대로 맞추어 살던 무비판적 낙관론자이고, 노무현은 있는 그대로와 맨얼굴로 싸우던 비판적인 낙관론자였을 뿐이다. 어느 한 인물로 통해 보는 소설이나 혹은 수기 내지 역사는 분명히 우리에게 특이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인물이 살던 시절에 모든 관점은 그 인물을 중심으로 보여주나, 그 인물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적 흐름과 현재적 상황이란 조건이었다.

 

조건에 의해 그 당사자가 선택하거나 혹은 선택하도록 강요받은 상황에서 늘 인간은 희비가 엇갈리는 운명에 처한다. 윤태영이란 사람이 보는 인물, 노무현은 어떤 사람인가? <기록>이란 서적은 어떤 한 인물이 다른 인물과 만남과 이별을 기록한 책이다. 대개 어떤 인물에 대해 기록한 도서를 보면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이나 입장이 매우 강렬하게 반영되는 편인데, 이 책은 오히려 그것을 최대한 배제하였기에 그 강렬함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기록을 맡은 윤태영 씨가 당시 있었던 상황을 묘사하기보단 당시 있었던 말이나 글을 그대로 텍스트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기록이란 것은 분명 입장의 차이에 의해 갈림길이 나눌 수 있지만, 타인이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었다는 것은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기록은 후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정치라는 것은 참으로 난해한 이름이다. 정치를 두고 정치철학으로 들어간다면 정치라는 것은 상당히 인간에게 필요한 제도이고, 때에 따라서는 정치가 없으면 우리 사회조차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적인 제도이다. 그렇지만 정치철학이란 말을 우리 사회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철학이란 이름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정치라는 것은 더러운 진흙에서 몸을 서로 뒹굴며, 자신과 다른 상대편을 어떻게든 밀어내어 그 진흙탕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의 모습이다. 진흙에서 벗어난 인물은 진흙이란 더러운 장소에 나왔지만, 문제는 진흙탕 밖에는 모두 늪과 같은 어둠이다. 인간은 권력의 맛을 보면 절대로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일까? 정치가 철학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정치판은 진흙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다고 더럽고 치사하고 보기 싫어도 우리는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이란 인간에 대한 기록은 스스로 추방되면서까지 그곳에서 투쟁하던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기록>이란 책을 보면서도 노무현이란 인간을 어떤 인간과 비교하면 좋을지 다시 한 번 떠올려보았다. 이전에 게오르크 뷔히너라는 독일 연극작가가 저술한 <당통의 죽음> 그리고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 <당통>이란 작품이 있다. 노무현을 보면서 왠지 당통이란 사람을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프랑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투쟁하던 한 혁명가가 자신의 동지이었던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죽음을 받아들인 것을 말이다. 노무현이 당통처럼 보인 이유는 그의 죽음을 앞두고 같은 진영에 있던 사람들도 혹은 진보라고 불리는 이들도 버렸다.

 

그리고 진보라는 이름은 계속 패배해갔다. 당통 뒤에는 수많은 자코뱅당이 뒤를 따라 오지 않았던가? 왜 하필 당통이라고 나는 생각하는가? 기록에서 보듯이 노무현은 검찰이나 경찰 같은 권력조직을 활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비판했다. 노무현은 당통처럼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권력을 행사하는 기구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노무현이 한 번은 로베스피에르처럼 확실하게 칼을 빼는 것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뭐든지 대화로서 풀어가려는 그의 노력, 하지만 그 대화의 장이 서기 위해서도 로베스피에르의 결심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늘 여론과 언론에 공격만 당하면서도, 국민이 기분을 풀기 위해 대통령인 자신을 두고 욕을 한다면 그것조차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그 태도에서 그는 결코 로베스피에르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연설문 적고 그것을 발표할 때는 로베스피에르와 같았다. 왜 연설은 로베스피에르처럼 했어도 진짜 로베스피에르처럼 한 번은 칼을 날리지 않은 것이 큰 안타까움이었다. 자신 앞에 거대한 적을 두고는 그렇게 당당한 그의 모습에서 그에게 지지를 보낸 사람들은 많은 기대를 보냈을 것이다. 역사의 청산, 사실 지나간 세월을 잡고 다그친다고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시기를 놓쳐 영원히 미래에 영향을 준다면 1분 1초라도 먼저 수술 칼로 도려내야 할 것이다. 그 도려내지 못한 상처가 아물지 못한다면 병원균에 의해 감염되어 나중에 사지를 베어내거나 목숨을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윤태영의 <기록>에서는 그런 모습보단 대통령의 일상적인 모습에 대해 많이 적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작은 모습에는 그의 인격이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었다. 내가 가장 인상 깊은 정치적 판단은 누구 한 명이 없다고 해서 그 국가나 사회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안 된다는 점이다.

 

국가나 사회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 시스템만 제대로 갖추면 누구라도 다시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란 존재는 정치적으로 가장 위에 있을 사람이기도 하나, 그가 진짜 해야 할 일은 그 시스템이란 체계적인 구조에 대해 기반을 닦고 운영을 하는 것이다. 시스템에 모순이나 에러가 생기면 거기에 대해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란 점이다. 문제는 그 시스템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현재 시점으로만 인스톨을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운영되던 체계까지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

 

문제가 있는 시스템의 한 요소가 있다면 다른 시스템까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일까? 기록이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있었던 정황을 정리하여 추후에 누군가 그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캉디드>의 이야기를 거론한 것은 당시 프랑스의 부조리와 모순을 볼테르가 자신의 소설로 통해 풍자했기에 그 동기로 인해 프랑스 혁명가들은 루소와 더불어 볼테르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 문제점에 원인, 그리고 그것을 정리한 기록, 혹시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을 기록을 남기는 것이야 말로 계속 사회가 발전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지만, 계속 민주주의라는 역사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 그 자체로서 계속 변증법적으로 후퇴와 더불어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리 후퇴한다고 하여 비관적인 마르틴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 상황조차도 만족하고 따르는 캉디드가 되어야 할 것인지 혹은 제3의 길을 찾아야 할 것에서 볼테르는 캉디드와 마르틴의 논쟁처럼 다른 길을 바랬을지도 모른다. 노무현에 대한 평가에서 그가 모든 것을 다 잘했다는 것과 못했다는 것만을 떠나 공과 실을 나누어 볼 필요는 있다.

 

그런 점에서 기록이란 무척이나 소중하다. <성공과 좌절>이란 자신의 회고록이나 혹은 <여도 나 좀 도와줘>에서 보면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노무현은 자신의 유리한 점을 내세우기보단 오히려 자신이 부족한 점을 내세운다. 특히 <성공과 좌절>에서 자신이 실수한 점을 반사교면으로 삼아 후에 자신의 실수를 모델로 삼아 그 문제점을 파악하여 다른 길을 찾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록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의 기억이 컴퓨터 하드디스크처럼 반영구적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기에 언제라도 그 문제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데이터베이스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똑같은 상황이나 비슷한 사건이 터져도 우리는 볼테르의 <캉디드>처럼 멍하게 그냥 당하기만 할 것이다. 문제는 캉디드처럼 당해도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그것마저도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선택에 의해 모든 것이 좋은 것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최선의 선택이란 지금의 상황보다 조금 더 좋게 만들거나 혹은 덜 나쁘게 만들 뿐이다. 정치에서 말하는 결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부분은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밝히고 있다. 정치가 모든 것이 정의로울 수 없다면 때로는 부정의를 택해야 할 상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부정의를 피하기 위해 다른 부정의를 택하는 것도 하나의 정의론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상황이 도달하는 것은 우리의 삶 어디에나 볼 수 있다. 그런다고 선택을 포기하는 것도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록을 남긴다면 누군가 똑같은 문제를 풀고 그 돌고 도는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겠지만, 그 생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모순과 부조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분명 윤태영 씨는 故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한 비서관이었고 제1부속실장이었고, 퇴임 후에도 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다. <기록>이란 책으로 본다면 노무현에 대하여 그가 어떻게 보고 있기보단 그와 있었던 시간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노무현이란 인간이 처음 국회의원으로 나올 때부터 윤태영 씨는 그와 같이 있었다. 노무현이란 인간을 본다면 우리나라가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어떤 사회였고, 그 사회에서 노무현이란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인간이고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보는 사람의 관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기 위해서는 기록으로 통해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윤태영의 <기록>을 보면서 느낀 점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내가 <기록>을 다 읽으면서 노무현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은 그는 캉디드가 아닌 캉디드이었다. 혹은 마르틴이 아닌 마르틴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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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23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장문이군요. ㅎㅎㅎ. 밥 먹고 나서 읽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6-23 12:42   좋아요 0 | URL
식사 맛나게 해용~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열린책들 세계문학 54
볼테르 지음, 이봉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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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머릿속은 21세기 사상이 아니라 18세기 사상이 박혀져 있다. 물론 시작은 20세기부터 시작이었으나, 그 종착지점은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가 등장하던 시대이다.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발견자>라는 책이 있다. 루소 연구에서 아주 중요한 도서로 정평한 그 도서에서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삶과 더불어 그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조건 아래서 사상과 철학이 새롭게 등장한다. 물론 세상이 사상으로 연결되나, 다르게 보자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것처럼 세상이 사상을 만들기보단 사상이 세상을 만드는 것이 더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상이 도래한 것이 바로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도래와 더불어 18세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이다. 따라서 내 머릿속의 사상이 18세기에 멈추어버린 이유도 다 18세기 사상이 아직도 유효하며, 심지어 21세기 철학의 선두주자라고 볼 수 있었던 자크 데리다 같은 사상가조차도 루소의 사상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그의 사상을 새롭게 이어갔다. 20세기 최고의 인류학자 겸 사상가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역시 루소에 대해 큰 평가를 했다. 인간에 대한 연구에서 인류학의 최초 연구자가 루소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아무튼 20세기를 지나 21세기로 지나오면서도 루소의 사상은 끊임없이 이어간다.

 

그런 루소와 더불어 당대 계몽주의 사상가를 든다면 누구를 볼 수 있을까? 물론 루소는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도 반계몽주의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모순되는 행동에 대해 생각한다면 마치 광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천재는 본래 그 시대에 대해 엄청난 박해나 모욕에서 살아가야 할 경우가 많다. 그런 운명인가? 루소의 유해는 현재 프랑스 파리 판테옹 신전 안에 잠들고 있다. 루소의 무덤 건너편 주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볼테르가 잠들고 있다. 볼테르와 루소의 관계에서 사실 볼테르가 18세기 프랑스에서 차지한 비중이 더 컸다. 그의 계몽주의 사상이나 기발한 착상이 당대 최고의 문인이란 호칭이 내려졌다.

 

이에 반해 루소는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발표하고 나서 프랑스 정부를 비롯한 수많은 적들에게 도망치거나 놀림당해야 했다. 부유한 볼테르와 가난한 루소, 살아생전 볼테르는 계속 국가에 의해 압박을 받으나 그가 죽기 전에 환대받은 모습에서 루소와 사뭇 다른 모습으로 인생의 종지부를 마감했다. 그렇지만 볼테르가 루소와 같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루이16세가 자신의 목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가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와 내 왕국이 사라지는 것은 루소와 볼테르 때문이라고 말이다.

 

프랑스대혁명이 가지는 의미에서 루소와 볼테르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고, 게다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가 남긴 것은 비단 철학이나 사상뿐만 아니라 문학과 음악, 그리고 연극과 오페라 등 수많은 예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에 의해 우리 인류는 상당한 수준까지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발전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내 머릿속이 18세기 사상으로 가득하다고 하여 그것이 결코 시대착오적이지 않은 것은 알아주기를 바란다. 헌법이 정립된 것도 18세기이니 말이다.

 

그러지만 헌법의 정립과 더불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영광은 아쉽게도 볼테르가 아닌 루소가 이어졌다. 만약 당신이 1789년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을 조사하면 그 마지막 사진에 루소의 동상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의 소개에서 루소가 등장한 이유는 루소가 만든 <사회계약론>이 헌법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도서이고, 루소의 사상이 결국 18세기부터 시작하여 19세기 그리고 20세기까지 발발한 혁명의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20세기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던 러시아 10월 혁명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인 볼셰비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계몽주의자들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국제노동자연합에서 만든 인터내셔널 노래가 페트로그라드에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라 마르세예즈까지 울려 퍼졌다. 참고로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의 국가이며, 1792년 마르세예에 외적에 대항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기념하며 만든 곡이다. 왜 볼셰비키혁명에 라 마르세예즈가 울려 퍼지는 것인가? 심지어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마라와 로베스피에르하고 같이 활동한 혁명가 당통의 연설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물론 혁명의 실패로 끝났지만, 계몽주의 사상은 아직도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고, 그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든 계몽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영광은 루소에게 돌아가도 볼테르에게 크게 돌아가지 못했다.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발견자>에서 루소에 대해 로베스피에르,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아버지라고 칭한다. 심지어 니체가 말한 사상을 100년 이전에 주장한 사람 역시 루소다. 루소가 죽고 나서 그 명성이 올라갔으나, 살아생전에 볼테르가 훨씬 우세했다. 그런 점에서 볼테르는 모차르트라는 벽에 가려진 살리에르인가? 그런 점에서 볼테르가 프랑스 판테옹 신전에 잠들고 있었다고 해도 우리의 인식에서는 그렇게 친숙한 인물은 아니다.

 

그래도 그의 업적은 역시 프랑스대혁명의 위대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지식인이란 이름에 걸맞게 목숨을 걸고 다른 이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 죽은 자의 누명을 벗어내기도 하였다. 단지 그 역시 프라이드가 높은 지식인이었고, 그런 점에서 살아생전 루소와 보이지 않은 마찰을 일으켰다. 그런 볼테르의 불멸의 소설인 <캉디드>를 나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캉디드>란 소설을 예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내용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캉디드>라는 제목처럼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볼테르가 지적하고 싶은 대로 캉디드라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멍청이로서 당대의 현실을 비판한다.

 

특히 라이프니츠라는 사상가에 대해 깊고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담고 있는데, 그런 이유는 바로 과학적인 사고와 주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령 같은 허울에 목매인 당대 사람들을 무비판성을 비판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잠시 사드 후자의 <소돔의 120일>을 생각했다. 사디스트의 말처럼 사드의 책을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 18세기 귀족과 살롱문화는 매우 음란하고 추잡했다는 점이다. 사드의 <소듬의 120일>에서 어린 소녀들은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관료들에게 성노리개가 되었고, 이제는 그 성노리개가 새로운 포주와 악당이 되기도 한다.

 

몸에 시체냄새가 날 듯 한 그들에게서 볼테르의 <캉디드>를 읽는 순간 딱하고 생각나는 것이 있다. 매독을 가진 퀴네공드의 하녀 파세트가 왜 매독이 걸렸는지 알아가는 순간 사드의 이야기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독의 원인이 수도승과 백작부인, 후작부인, 육군대위, 젊은 하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구멍과 구멍을 채워주는 관계가 되자 그런 운명이 되었다. 그런 운명은 캉디드의 스승인 혼자만 똑똑한 철학자 팡글로스의 몸에 옮아져 갔다. 매독의 시발점은 수도승과 어린 소년의 관계였다. <소돔의 120>에서 어리고 예쁘게 생긴 미소년들은 동성연애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능욕 당한다. 그런 소년이 매독을 품고, 자신을 고용한 후작부인과 뒹굴고, 그 후작부인은 육군 대위와 음탕한 짓을 벌이고, 육군 대위는 늙은 백작부인에게로, 그리고 백작부인은 또 다른 고리를 가진 사람들과 관계하고, 최후에 젊은 미녀인 파세트에서 팡글로스에게 이어져갔다.

 

매독이 성병이란 말처럼 매독은 또한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선사한 선물이기도 하다. 또한 매독은 전쟁 중에 3만 군사 중에 2만이 걸렸으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서 보여주듯이 인류는 전쟁에서 총과 칼보단 균에 의해 더 많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더러운 학살과 음모를 두고 영웅적인 행동으로 치부한다. 과연 캉디드의 세계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전해오는 이유는 그렇게 낯설지도 않을 듯하다. 캉디드의 운명은 바로 그런 바보 같은 사고방식에 매달린 현실로부터 시작했다.

 

캉디드는 퀴네공드의 아버지인 툰더텐트론크 남작의 여동생의 배에서 나온 사람이고, 남작의 여동생은 건너편 귀족 청년을 사랑했지만, 단지 자기 집안의 뿌리보다 1대가 낮아서 결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캉디드가 태어나고, 그는 어째보면 자신의 외사촌 누이를 사랑하게 된 셈이다. 이미 처음부터 근친상간이라니? 물론 사촌끼리 결혼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이 남작에게 마음에 들지 않아 캉디드는 운명의 방랑을 떠나게 된다. 그러면서 마주하는 다양한 사건과 인물, 그 속에서 죽거나 미쳐버린 사람들, 또한 기가 막힌 인연과 재회는 한 편의 거대한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다.

 

볼테르가 칼로 찔려 죽일 수밖에 없던 자가 사랑하던 사람의 오빠고, 그가 추후에 노예선에서 만나 구해주었지만, 자신이 오랜 가문의 귀족이란 이유는 추녀로 변한 여동생과 결혼조차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이란 참으로 답답한 기분이다. 문제는 아직도 이런 답답한 모습은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퀴네공드의 운명은 그녀의 것이나, 옆에서 그것을 방해했고, 캉디드가 전혀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아닌데도 단지 남작집안의 명예 때문에 떼를 쓰는 퀴네공드의 오빠를 보며, 자신들이 정해진 운명에 끝까지 고집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는 주체임을 망각한다.

 

물론 운명의 선택적인 사항에 대해 사회적 조건이나 상황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캉디드가 남작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불가리아군대에 강제로 징집될 일도 없었고, 리스본의 항구에서 지진을 만나는 것이나, 미치광이 종교재판에 끌려갈 이유도 없을 것이다. 자신과 아무 상관없이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면서 그 세상의 모든 것이 잘못되어도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캉디드처럼 현재까지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캉디드처럼 무한한 낙관주의자일 터이다.

 

캉디드의 결말을 보면 캉디드는 진짜 아무 것도 없고, 단순하게 땅을 파고 열매를 수확하는 늙은 노인으로 통해 결론에 이른다. 열심히 자신이 노력하고 거기서 얻는 것이 최고라고 말이다. 땅에서 열심히 농사짓는 사람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여 오리려 전자가 행복하다고 말이다. 허황된 욕망에 의해 재력과 권력을 노린 자들은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가족과 친구까지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18세기 중반의 <캉디드>라면 가능할 것이다. 당시 사회는 전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고, 왕이 지배하는 전제군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에 부르주아인 볼테르가 왕정시대의 산업기반은 농업과 같은 1차 산업을 택한 이유는 당연한 처사다.

 

적어도 자신이 노력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볼테르가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어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 인근에 땅을 사서 볼테르만의 왕국에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캉디드가 농부로서 땀을 흘리며, 스스로 노력하며 선택하는 삶을 원했을 것이다. 캉디드는 계속 어리석게 남의 말만 듣고 사기당하고, 사기꾼의 속임수로 고생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이 되는 이유는 당시 봉건사회와 종교적인 이유가 크다. 봉건사회의 왕족과 귀족은 음탕한 짓을 좋아했고, 어느 유명한 귀족부인에게 여러 명의 애인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시대의 로코코 화가 그림을 보면 어느 귀족부인이 애인으로부터 볼에 키스를 받으나, 집안의 누군가 그 모습을 볼까나 두려워하는 모습이 나온다. 탐미주의적인 로코코가 음탕한 당시 프랑스사회라는 점에서 <캉디드> 역시 놓치지 않았다. 그런 점에 비해 성직자 역시 겉으로는 좋은 말만 하나 뒤에 가서는 여자를 능욕하고, 어린 남자들을 동성연애의 희생양으로 삼는 점에서 타락한 도덕관이 결국 사회를 병들게 했다. 하지만 도덕에 대한 수치심 대신 오히려 겉으로 친절하게 대하다가 뒤에 가서는 뒤통수를 날리는 모습에서 볼테르가 생각하던 당시 사회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이들이 오히려 타락하고, 그 타락함이 이미 모두가 알지만 겉으로 진리를 추구한다는 모습에서 정치와 종교의 무능한 부패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 이미 몰락의 수준에 온 것이다. 그래서 이미 결정된 것에 의해 아무런 의심을 해서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팡글로스의 이야기는 요새도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쉽게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이란 가장 좋은 목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미 그 목적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미가 부여되었기에 그 자체로만 당연한 진리로 여기는 맹신적인 행위는 그 사회의 병폐로 이어지게 한다. 그 맹신에 대해 진리로 여기가 그 맹신에 대한 근본적 사유를 포기함으로서 죄를 지어도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 죄마저 하나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엉뚱함이란 결국 우리 인간 스스로 무지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스스로의 계몽을 찾아가야 하는 점이나, 그것이 쉽지 않으며, 오히려 계몽이라는 이름 아래 실천되는 교육은 도리어 새로운 이름의 억압으로 변질된다.

 

캉디드가 만나던 늘 새로운 사람들이 제기하는 진리와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도 정당한 부합성은 없지만, 없어도 있는 것처럼 된 점에서 캉디드의 낙관주의는 볼테르가 보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진짜 앞날을 위한 사유와 비판 없이 그저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이 그 자체가 목적의 시작이고 완료라는 점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캉디드는 그나마 억지로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으나. 우리 시대의 캉디드들은 남에게 폭력을 처음부터 휘두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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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앤드루스 지음, 서남희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말하여 나는 이 책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란 없다. 코카콜라의 이사나, 대기업의 CEO나 또는 장군이나 방송국 프로듀서 등등 말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좋고, 교훈 있는 이야기는 좋다. 하지만 문학적 예술을 논하려면 결국 그로테스크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좋은 놈이 좋은 놈으로 되려고 하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악당이나 적이 있어야 한다. 윈스턴 처칠의 명언 중에 “뒤를 멀리 돌아보면 볼수록, 앞을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라는 것으로 이 책에서는 처칠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요소로 본다.

 

처칠을 대해 내가 아는 정도는 소위로 임관하여 전쟁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큰 활약을 하여 나치 독일을 무찌른 철의 남자다. 하지만 그라고 하여 모든 게 완벽한 것은 아니다. 철저한 앵글로색슨족의 우월감에 빠진 남자였고, 그가 영국에서 벌인 정책 중에 인종차별 행위는 그야말로 경악할 수준이다. 강도가 외국인이란 이유로 그들이 있는 건물이 화재가 났는데도, 처칠은 오히려 그들을 불타 죽어도 마땅하다고 여겼다. 철저한 인종 차별주의자에 노동자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행동을 했다.

 

물론 어느 한 정치인에 대해 모든 것을 두고 판단할 수 없으나, 적어도 공과 사를 판단하려면 그에 대한 어느 정도 판단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작은 아람어를 새겨진 것이라고 하니 결국 아랍문화권이라고 보겠지만, 그것이 진짜 아랍에서 말하는 알라라는 신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본래 이스라엘의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땅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처음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그리고 사막이 배경이란 점에서 어느 민족인지 모르겠다.

 

단지 의상이 무어인들이 입는 것이 나오기에 아랍문화권이란 점만 가늠케 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단 1화에서 끝난다. 단지 죽은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아들만 남겨두고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 차라리 아들이 살아남아 어떤 과정을 지나쳐 20세기 미국에서 새로운 사건이 흘러가는지 보여주는 편이 더욱 개연성이 높게 보여주었다. 이 소설은 흔히 History라는 역사와 더불어 소설의 Fiction 개념을 반 정도 섞은 Faction을 추구하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20세기 미국에서 18세기 미국과 19세기 미국까지 이어진다.

 

내가 보이는 미국이란 국가가 어느 돌을 가진 인물에 의해 큰 영향을 끼쳤고, 그나마 다른 인물이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에서의 쉰들러가 유일하게 미국인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비중은 너무나도 약했다. 물론 인종이나 피부를 모든 것을 차별한 것만은 아니나, 흑인과학자의 이야기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고, 과학이란 학문이 관념적인 이론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넘어 물질적, 생물학적, 화학적 객관성이 토대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뉴턴이 왜 사과가 떨어지는가? 라는 질문에 그것은 지구의 중앙부에 위치한 핵과 맨틀이 가진 중력에 의해서라고 우리는 대답하겠지만, 그것이 모두 신의 뜻? 이란 대답은 농담도 아주 나쁜 농담이 될 뿐이다.

 

단지 과학자인 조지는 단순히 배부르게 해라, 존 애덤스는 자유롭게 하라, 또는 저명한 부자는 살아가게 하라, 식으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물론 내용은 인간의 자유, 평등, 박애라는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되지만, 현실에서 분명 도움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지금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생각하자면 너무 심한 갭이 보인다. 세상을 위해 조국과 우리 민족을 위해 또는 타인을 위해서는 고귀하나, 너무 아름다운 행동에만 치중하기에 이 소설은 나비효과가 누구라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누구는 너무 알려진 인물이다. 이 소설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서 정의한 것처럼 “시(詩)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명제와 어긋나 버렸다.

 

이미 미국의 대통령의 이름이 거론되고, 저명한 과학자, 실제 일어나던 사건까지 보여준 것만으로 모순에 대한 문제점을 알려주기보단 그 모순에 의해 생긴 문제로 새롭게 탄생한 영웅만을 다른 식으로 부각시킨 것뿐이다. 왜냐하면 아랍인이던 아버지가 존경을 받는다고 하나, 그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에 대해 전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의 행방에서 떠나온 운명처럼 어느 한 사람에게 다가가자, 그 돌을 가진 것만으로 어떤 고귀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돌은 어느 시대에 유명한 인물이 가지고 있었고, 그 돌을 가진 예전 주인은 매우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그 돌을 물려받은 후계자는 예전의 주인과 비교할 수 있는 업적을 남긴다.

 

어떻게 보면 돌의 가치를 알고 찾아낸 인물이 단지 운명과 같은 만남에서 영웅 같은 인물이 되었다는 설정은 겉으로는 모두가 대단한 인물이 될 수 있고, 어디선가 작은 행동이 큰 물결이 되어 나비의 날갯짓이 사이클론을 만들어낸다는 나비효과를 말하고 있다. 나비효과가 전혀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 확률은 너무 낮다는 점이다. 모르겠다. 전에 어느 섹시한 여자가수가 해고된 노동자를 위해 자신이 먼저 노란봉투에 월급을 대신 모금하자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차라리 나비효과라면 그것이 더 좋지 않을까?

 

잔 다르크가 신의 소녀라고 하여 많은 백성을 구했지만, 결론은 왕족과 귀족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잔 다르크를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모든 승리의 열쇠가 되었을 때는 위대한 성녀지만, 전쟁 후에는 마녀로 취급당해 화형을 당했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을 나는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단지 그 전쟁에서 참전한 용사는 잔 다르크만이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잔 다르크의 용맹과 그 위상은 찬양할 만해도 그런다고 그녀만이 모든 것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앤디 앤드루스 <선택>은 바로 그런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책이었다. 단지 알 수 없는 돌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는 것으로 그 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적 믿음으로 업적을 남기고, 대단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결과론적인 요소였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모든 인간에게 가져야할 정신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돌에 의해서라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는 인간의 운명이 결국 보편적으로 다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으나, 그 돌을 마주하는 점에서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돌이 선택한 것으로 연계된다.

 

그렇다면 돌에 의해 연계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은? 굳이 그 돌이어야 하는가? 돌에 새겨진 가치는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도덕이다. 그 도덕에 은근히 미국의 독립정신을 말하고 있다. 미국독립정신은 나도 존중하나, 그 독립 이후로 보이던 노예문제, 작가는 노예문제에 대해서도 부당하고, 노예에 대한 문제를 변호한 인물도 등장인물로 나오게 한다. 심지어 조지라는 흑인이 어렸을 때 자신을 구해준 백인에 대해 일화를 보면 분명 그러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개인에 의해서 된다고 하지만, 개인이 밀집된 것은 사회이지, 사회가 개인 그 자체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역량과 노력이 사회를 바꾸나, 그 가능성이란 누구나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과 조건이 갖추어야 가능한 것이다.

 

왜 추천자들이 대부분 어느 기관의 높은 분들같이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인가? 차라리 저널리스트나 평론가 혹은 시민들이 그 의견을 내놓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단순히 영웅에 대한 업적이 돌과의 만남이란 자체가 너무 현실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만나야했던 운명일까? 개인에게 선택이란 주어진 것이고,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정치적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면, 선택은 최선의 결과보다는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결정하는 최소한의 피해라고 본다. 좋은 선택 그 자체가 좋은 결과는 주는 것은 당연하나 그 모든 선택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선택에서 도덕적 관념이 중요하다. 그 관념은 그 사회에 순응하는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야 한다.

 

이래저래 포장되어 있지만, 자유의 국가를 만든 백인, 죽을 위기애 처한 흑인아이를 구해 그 아이가 후세 큰 업적을 만들도록 했던 백인, 20세기 위대한 경찰관인 마크로 이어진다. 이야기가 분리되어 있지만, 결론적으로 마크와 도리 부부가 돌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가면서 마크가 최연소 경찰서장이 되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결론은 마크가 어떻게 성장하여 어떤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상관없이 범인을 잡고 사라진 아이들을 찾은 것은 훌륭하나, 그것이 자신의 노력보단 돌의 계시라는 것은 마치 신의 계시가 이어져온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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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시나리오 구성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진들이 직접 구성하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 만화, 라이트노벨, 게임 등과 같은 콘텐츠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런 콘텐츠 이외에도 역사와 문학이나 신화, 민담, 전설과 같은 설화 등과 같은 이야기들도 이용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의 독특한 미학은 실사영상에서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제작할 수 있는 점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정령이 이미지로서 구현하고, 말을 할 수 없는 동물들도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과 같은 경우 농장주인 존스와 존스 이외에도 다른 농장주들이 실제 인간으로 등장하지만, 매너농장에서 사육하고 있는 돼지, 말, 당나귀, 양, 닭들과 같은 동물들도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물들이 인간처럼 말할 수 있는 점은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이 우화적인 요소를 지닌 작품이며,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란 점에서 알레고리적 배치로 통해 풍자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다.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이 제작된 시기는 1954년 영국으로 당시 국제사회는 자유주의 국가와 공산주의국가로 분리된 냉전시기였다. 미소 냉전과 관련하여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자유주의 국가인 영국에서 적대국가인 소련에 대한 비판적인 요소를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 할라스가 제작한 <동물농장>의 원작은 영국작가 조지 오웰이 저술한 <동물농장>으로, 조지오웰은 1944년 2월에 <동물농장>의 탈고를 마친다.

 

존 할라스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각각 비교해보면 처음에는 비슷한 이야기로 진행하다가 서로 다른 내용으로 전개된다. 조지 오웰이 저술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존 할라스의 경우에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만들었다. 따라서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둘 다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관점이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두 작품을 비교할 때 가장 많이 차이나는 점은 외양간전쟁 이후 스노볼이 나폴레옹에 의해 공격받을 때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은 나폴레옹이 키운 개에 의해 도망쳤다면,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는 개에 의해 암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원작인 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이 동물농장 내에 좋지 않은 일들이 발생하거나 혹은 다른 동물들이 반항할 경우 스노볼과 그의 추종자들이 꾸민 계략이라고 거짓말을 하나, 애니메이션에서는 나폴레옹이 다른 동물들이 반항할 경우 그 동물에 대해 존스와 스노볼 같은 존재로 취급한다.

 

그런 점에서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는 원작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등장하는 스노볼에 대해 상당히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물농장>은 본래 러시아혁명과 러시아내전, 그리고 신경제정책 NEP와 모스크바재판 등을 농장 내의 동물들로 통해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한다. 나폴레옹이란 돼지는 스탈린이란 독재자라면, 스노볼이란 돼지는 트로츠키라는 인물이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더불어 볼셰비키에서 활동하던 러시아혁명가로서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스타인이며, 1879년에 태어나 1940년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된다. 따라서 본 리뷰는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 등장하는 스노볼이란 캐릭터에 대해 고찰하고, 스노볼의 알레고리 인물인 트로츠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다룰 것이다.

 

첫째, <동물농장>에서 스노볼

둘째, 트로츠키의 죽음과 동물농장재판

셋째, 트로츠키에 대한 재평가

 

2. 본론

2.1 <동물농장>에서 스노볼

<동물농장>에서 처음 이야기는 매너농장의 수퇘지인 메이저 영감이 죽기 전에 모든 동물을 소집하여 유언을 이야기할 때부터이다. 메이저가 모든 동물들 앞에서 연설할 때 스노볼이 가장 맨 앞자리에 앉는 장면이 나오며, 메이저가 하는 말에 대해 매우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는 모습으로 듣는 모습이 나온다. <동물농장>에서 돼지영감 메이저는 독 일 사회철학자인 카를 마르크스이며, 스노볼은 돼지와 더불어 러시아 볼셰비키 일원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중에서 레닌, 플레하노프, 보그다노프, 바자로프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다. 트로츠키는 1897년부터 남부러시아 노동자동맹을 조직하여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에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한다.

 

<동물농장>에서 러시아혁명이 동물농장혁명이고, 러시아내전은 외양간전쟁이다. 동물농장혁명에서 매너농장주인 존스에게 처음으로 반항한 캐릭터가 스노볼이었고, 외양간 전쟁에서 지휘를 맡은 캐릭터도 스노볼이었다. 볼셰비키혁명에서 트로츠키가 레닌과 더불어 사전에 준비하고, 혁명 이후 소비에트 건립에서 역시 트로츠키가 직접 관여한다. 볼셰비키혁명이 발발할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혁명으로 인해 쫓겨난 귀족과 장교로 이루어진 백위군과 연합국들은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를 침공하려 한다.

 

이때 트로츠키는 적군을 모집하고 지휘하는 군사인민위원을 맡으며 직접 열차를 타고 전쟁 현장에 가서 전술을 짜고, 전쟁을 지휘하여 러시아내전을 승리로 이끈다. 그 후에 러시아 경제정책인 NEP에서 사회주의국가를 추구하던 소비에트가 내수시장과 경제성장을 위해 자본주의 경제체계를 도입할 때, 트로츠키가 제안한다. <동물농장>에서 외양간전쟁 이후 동물농장의 살림을 꾸준히 성장시키던 스노볼은 자신의 권력보단 계속 동물농장의 미래를 생각하고, 다른 농장에 동물농장의 소식을 알리며, 교육에 큰 심혈을 기울인다.

 

트로츠키와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 캐릭터의 원초인 스탈린이 대립되는 지점은 볼셰비키혁명 이후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과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의 충돌이었다. 트로츠키는 레닌에게 경고하기를 “처음에는 당 전체를 대신하게 되고, 다음에는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대신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중앙위원회를 대신해 한 사람의 ‘독재가’가 등장하게 된다.” 결국 트로츠키의 예언대로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을 사회민주주의국가가 아닌 독재국가로 만들게 된다. 볼셰비키혁명 이전에 볼셰비키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수 천 명에 불과했으며,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자 내지 계몽주의자들이었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정치적으로 갈등을 빚을 때 볼셰비키 내지 소비에트에 활동하던 사람들 중에서 마르크스주의 내지 계몽주의 사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던 초등교육 수준 교육이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소비에트라는 평의회에서 활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료집단에 들어가 벼락출세를 꿈꾸는 자들이 많았다. 결국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의해 정치적으로 축출이 가능했던 점은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이 다른 동물들에게 교육으로 통해 의식개혁을 시켜보려고 해도 불가능했던 점이고, 오히려 권력의 이익을 보고 따르는 볼셰비키 내지 코민테른 회원들이 많았다.

 

레닌이 뇌일혈로 사망한 후에 스탈린은 소비에트의 서기장으로서 권력을 잡으면서 트로츠키를 정치적으로 견제했는데, 1925년 트로츠키를 군사혁명평의회에서 해임시켜 토론하지 못하도록 하고, 1927년 소비에트 공산당에서 축출당하고, 1929년 소비에트에서 추방당해 망명의 길에 오른다.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도 스탈린이 트로츠키에게 그랬던 것처럼 비밀경찰인 게페우를 상징하는 개들이 스노볼을 내쫓는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는 그냥 내쫓는 것으로 스노볼은 등장하지 않으나,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는 개들이 스노볼은 공격하여 암살하는 것으로 나온다.

 

2.2 트로츠키의 죽음과 동물농장재판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이 게페우로 상징되는 개들에게 살해되는 것으로 나오나, 실제 트로츠키의 사망원인은 1940년 8월 20일 스탈린이 보낸 자객인 라몬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의 머리에 피켈을 가격하여 트로츠키는 뇌출혈로 일해 8월 21일에 사망한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자객에게 살해당한 이유는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추방되기 전에 스탈린에게 가장 정치적으로 큰 방해세력이었고, 볼셰비키 및 소비에트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레닌에게 큰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1922년 테러로 인해 부상을 입게 되고, 1924년 뇌일혈로 사망한다. 레닌은 자신이 사망하기 전에 스탈린이 소비에트 지도자로서 부적당한 사실을 인지하여 스탈린을 견제하려 했으나, 뇌일혈 증세로 일해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레닌 사후 레닌의 유언장을 공개하려고 했으나, 소비에트 당 대회에서 유언장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났었는데, 레닌의 유언장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스탈린은 서기장 직에서 해임돼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이 사망 전에 볼셰비키혁명 이전부터 같이 활동한 볼셰비키 중에서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트로츠키였고, 가장 경계하던 인물이 스탈린이었다. 스탈린 입장에서 볼셰비키혁명과 러시아내전에 가장 최전선에 있었고 레닌의 신뢰를 받은 함부로 트로츠키를 죽일 수가 없으므로 정치적으로 숙청하여 망명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망명 후에도 스탈린과 스탈린주의에 대해 계속 투쟁하고 있었으며, 1936년 <배반당한 혁명>이란 도서로 통해 스탈린과 그의 관료주의에 대한 문제점과 그리고 스탈린으로 인해 인근국가에서 일어날 일들을 분석하고 예언하였다.

 

그 결과 스탈린은 1939년 나치독일과 독일·소비에트연방 불가침조약을 맺게 되었고, 1941년 나치독일은 2차 세계대전 시 불가침조약을 어기고, 소비에트연방을 침공한다.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을 집필 이후와 때맞추어 스탈린은 1936년부터 1938년까지 4번에 거친 모스크바재판으로 통한 대숙청을 시작한다. 이때 스탈린은 자신이 레닌의 후계자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레닌과 같이 활동했던 많은 볼셰비키 인물들을 숙청하였으며, 스탈린을 가장 옆에서 보좌하던 부하린까지 처형하게 되었다.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의 압제로 인해 다른 동물들이 불만을 느끼자, 나폴레옹은 그 동물들에 대해 매너농장주인 존스와 스노볼 같은 존재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폴레옹의 개들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4회나 걸쳐 이루어진 모스크바재판에서 대부분 희생자는 러시아혁명 전부터 활동한 볼셰비키들이란 점이고, 그들을 모두 트로츠키와 내통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했다. 게다가 히틀러가 집권하고 있는 나치의 대두에 따라 트로츠키를 독일 나치 내지 차르세력의 앞잡이로 매도하였다.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달리 무장 세력이나 막대한 권력이 없었으며, 오로지 연설과 집필로 통해 스탈린에게 대항했다. 스탈린이 집권하던 시기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탈린과 소비에트연방을 사회주의 국가로 인정하고, 스탈린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 덕분에 트로츠키와 관련된 많은 인물들이 스탈린이 보낸 자객이나 스탈린주의자에 의해 암살이나 숙청을 당하기도 했다.

 

스탈린이 저지른 모스크바재판과 트로츠키의 암살은 스탈린이 세계 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지지와 코민테른의 정치적 도구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볼셰비키혁명이 세계 최초로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한 혁명이란 점에서 전 세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탈린이 지배하고 있는 소비에트연방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거나 또는 스탈린의 행동에 대해 회의감을 품은 사람들은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2.3 트로츠키에 대한 재평가

트로츠키의 악평은 그가 죽어도 계속 이어졌다. 스탈린이 처음에는 트로츠키를 차르나 나치의 협력자로 활동하는 것처럼 비난하다가 어느 순간 트로츠키라는 이름 자체를 소비에트 내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심지어 스탈린 사후에 소비에트 공산당 서기장 및 총리를 맡은 흐루시초프가 1960년 마오쩌둥에게 했던 말과 1956년 마오쩌둥이 흐루시초프에게 했던 말은 모두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스탈린이 사망 이후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잡아 모스크바재판 시기에 처형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어도 트로츠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지 않았다.

 

그나마 트로츠키의 억울한 누명과 그의 업적을 제대로 본 사람 중에 <동물농장>을 저술한 조지 오웰이 있었다. 조지 오웰의 경우 1937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경험을 살려 저술한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스탈린의 게페우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트로츠키 지지자 및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투옥하거나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에서 트로츠키 지지자들이 억울한 희생에 대해 다루었으며, 1948년에 저술한 <1984>의 경우 정보미래사회에 등장하는 빅브라더의 캐릭터를 스탈린에 맞추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빅브라더와 오세아니아를 위협하는 인물로 골드스타인으로 등장시키는데, 골드스타인은 한 번도 작품에 나오지 않고, 단지 스크린 영상에서만 등장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는 염소 같은 수염과 안경을 꼈으며, 본래 오세아니아를 창립 당시 빅브라더와 같이 세웠으나, 반역죄로 숙청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골드스타인이 저술한 그 책은 오세아니아에서 금지도서로 지정되는데, 그 도서는 바로 <배반당한 혁명>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가 지배하는 소비에트 연방을 이상적인 국가라는 환상에 빠져있었는데, 프랑스 현상학자인 메를로 퐁티는 <폭력과 휴머니즘>을 저술하면서 스탈린의 공산주의를 비판했으며, 스탈린이 지배하던 공산주의를 옹호하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 스탈린주의에 대해 독일, 영국, 프랑스 등과 같은 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비판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공산주의를 자신들이 추구하던 마르크스주의에서 결별을 선언했다. 마르크스주의의 흐름에 따라 영화나 서적 등으로 통해 트로츠키에 대해 다루거나 혹은 트로츠키를 등장시키는 콘텐츠가 등장했다.

 

1972년 영화감독 조셉 로지가 제작한 <트로츠키 암살사건>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힘없이 살해당하는 노인으로 보여주어 인간 트로츠키 본연의 모습을 강조했다. 그러나 몇 번의 암살기도가 있었음에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스탈린에 맞서는 인물로 보여줌에서 한편으로 트로츠키가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최근 철학자 제이슨 바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영화 <맑스 재장전> 영화포스터 및 도서표지에서는 트로츠키가 화면 중앙에 빨간약을 들고 서 있으며, 그 옆에는 영화에서 실제로 등장하는 슬라보예 지젝, 안토니오 네그리, 자크 랑시에르 등과 같은 세계적 석학 8명이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등장한다. <맑스 재장전>은 실사와 애니메이션영상이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영화로 작품 내에서 캐릭터로 등장하는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로 통해 현대철학자들의 관점에서 트로츠키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 스탈린의 폭력정치의 문제점을 드러나면서 이와 반대로 트로츠키의 업적을 재평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3. 결론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토대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 냉전시기에 독재정치를 하고 있는 공산권 국가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 만든 우화적 작품이다. 특히 등장인물에서 스탈린을 상징하는 나폴레옹과 트로츠키를 상징하는 스노볼의 대립에서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스노볼이 개들에 의해 암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 트로츠키는 게페우에게 바로 살해되는 것이 아니라, 망명 중에 암살로 인해 살해당한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더불어 볼셰비키혁명을 주도한 혁명가고, 러시아내전을 승리로 이끈 정치인이었다. 그가 스탈린에 의해 당에서 축출되면서 스탈린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을 해왔으며, 스탈린에 의해 오명을 쓰게 된 마르크스주의를 계속 지켜오던 인물이었다. 특히 <배반당한 혁명>으로 통해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로 인해 독일나치 및 파시스트 국가들에 대해 스탈린이 동맹조약을 맺을 것이란 예언이 적중하면서 스탈린에게 정치적으로 견제한다.

 

러나 조직과 권력이 부족한 한계로 인해 스탈린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의 이름은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으나,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그의 명예는 회복되었으며, 그의 저작들은 다시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20세기 소비에트 연방 및 공산진영국가의 모순과 문제점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하나, 그것으로 인해 볼셰비키혁명 그 가치를 훼손시키면 안 된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스티브 스미스가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에 의해 훼손된 볼셰비키혁명의 가치를 다시 복원하는 점에서 스탈린이 철저하게 검열했던 트로츠키의 재평가는 필요하다. 트로츠키의 재평가에서 그가 이룬 업적인 볼셰비키혁명 이외에도 트로츠키가 가장 강조한 부분은 관료주의화로 인한 독재정치다.

 

 

 

트로츠키는 레닌에게 경고한 것처럼 “처음에는 당 전체를 대신하게 되고, 다음에는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대신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중앙위원회를 대신해 한 사람의 ‘독재가’가 등장하게 된다.”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관료주의적 정치행태가 되풀이될 수 있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배신당한 혁명>에서 스탈린에 의한 정치적 숙청이 프랑스대혁명에서 1794년 7월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똑같은 사건으로 보았고, 프랑스대혁명을 주도했던 자코뱅당에 가입했던 나폴레옹이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했다.

 

스탈린 역시 레닌과 같이 활동한 볼셰비키이면서도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정치를 실시한 것을 보면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서 사건이 발생했으나,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나온 문구처럼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프랑스대혁명에서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의해 목숨을 잃은 로베스피에르나 스탈린에 의해 추방된 트로츠키를 보면서 프랑스대혁명이나 러시아혁명 에서 기존의 독재자를 대체하여 새로운 독재자가 나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은 단순히 보면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에 의한 공포정치를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으나,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스노볼로 통해 트로츠키가 지적한 것처럼 단순히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만이 아니라 관료주의적인 정치로 인해 국가는 독재정부가 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독재정부에 의해 핍박받는다는 사실이다. 존 할라스의 <동물농장>에서 등장하는 스노볼에 대해 다룬다는 것은 단순히 러시아혁명과 내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좀 더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4. 참고문헌

존 할라스, 한창완 역, 『존 할라스 유럽 애니메이션 이야기』, 한울, 1999.

조지 오웰, 도정일 역, 『동물농장』, 민음사, 1998

조지 오웰, 정희성 역, 『1984』, 민음사, 2003

조지 오웰, 오증자 역,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0

아이작 도이처, 김종철 역,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5

아이작 도이처, 한지영 역, 『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7

아이작 도이처, 이주명 역,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7

루이 알튀세르, 서관모 역, 『철학에 대하여』, 동문선, 1997

레온 트로츠키, 김성훈 역,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 1995

필 에반스, 타리크 알리, 정연복 역,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 책벌레, 2002

스티브 스미스, 류한수 역, 『러시아혁명-1917년에서 네프까지』, 박종철출판사, 2007

카를 마르크스, 최형익 역,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비르투, 2012

모리스 메를로 퐁티, 박현모 역, 『폭력과 휴머니즘』, 문학과 지성사, 2004

<동물농장>(Animal Farm, 1954, 존 할라스)

<맑스재장전>(Marx Reloaded)

<트로츠키 암살사건>(The Assassination Of Trotsky,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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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올림픽이 열렸을 때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응원하지도 않았다. 인터넷 뉴스홈에서 그저 메달 몇개 순위만 알았다. 밤새가면서 한국 응원하지 않았다. 거의 이번달에는 일메나 메여있었고, 게다가 주말에도 이런 저런 일로 계속 밖에 나가있었다. 그리고 시간나면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았다. 게다가 이번에 월드컵 축구 경기 역시 매한가지다.

 

그런 나에게 한국이 사랑스러운가? 애국심은 있는가에서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군입대전에는 그랬다. 군입대후에는 일에 찌들렸고, 전역 후에는 논문으로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면 왠지 군부대 있을 때부터 것에 대해 생각하면 나도 부끄럽고, 주변도 부끄럽다.

 

 

 

참고로 기본적으로 나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필두로 한 자연주의와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지향한다. 그래서 헌법의 기본적인 이념에 대해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 이후, 프랑스 인권선언문이 작성되어 그것이 21세기까지의 헌법의 틀이 된다. 우리나라 헌법을 볼까? 다 볼 수 없어도 1조 위를 보아도, 대략적으로 프랑스인권선언문과 비슷하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근데 보면 조만간 삼일절인데, 나는 조용히 지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것이 조금 그렇다. 내가 어설픈 민족주의에 대해 짜증나는 것은 그렇게 민족주의라고 하면 어느 때 민족주의냐는 것이다. 대놓고 나는 민족주의이오! 라고 하는 것도 뭔가 이슈가 있을 때이다. 내가 조금 부끄러운 것은 내가 사는 지역에 백산 안희제 선생의 기념관이 있는 것은 알았는데, 이제 무엇을 한 분인지 알았다.

 

상해임시정부 자금 60%를 지원했고, 언론을 세우고, 지금의 상고를 만들었다. 그런데 뭐가 짜증나기 시작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민족의 단결이라 하면서 진짜 민족의 근본이 뭔가 싶은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고, 사상의 자유? 역시 보장되는 게 맞으나, 단군신앙까지 믿으란 것은 아닌데, 제대로 챙기고 있는가이다.

 

상해임시정부 요원이 대부분 대종교란 사실, 그리고 단재 신채호,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 지석영, 주시경 선생 등이 대종교 인물이란 사실을 알거나 혹은 인지할 때마다 쇼크다. 대종교가 임시정부, 혹은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광복군 역시 대부분 대종교에서부터다.

 

대종교를 믿겠다는 것이나 믿으라는 것은 아니나, 민족주의에 대한 열기와 광기를 띄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평소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은 있는가? 없다. 그런다고 해도 독립군 투사로 보는 대종교 인물들에게 파시스트 요소는 없다. 다른 민족을 억압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애를 낳으면 삼신할매가 점지해준다고 하는데, 삼신은 사실 三神으로 세명의 신이다. 애를 낳을 때 물을 받아 기도하거나, 또는 미역국을 끓이거나 우리 일상과 문화에 녹아있다. 축구 찰 때만 붉은 악마라고 하여 단군의 아들 나간다는 뻔한 클리셰를 생각하니, 같이 응원하고 거기에 빠져들기가 짜증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한국에서 헌법조차 1번 읽어본 국민들은 몇 %일까? 헌법의 기원을 아는 사람은 그 %에서 %일까? 내가 어릴 때 그러니깐 지금은 초딩학교 그때는 국민학교, 응원가나 행사에 꼭 나온 노래가 있다. 한국을 빛낸 100인위인들

 

결국 코메디인 노래인가? 아니면 월드컵에서는? 딱히 강조하는 것은 아니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작 그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들에서 처음 나온 이름을 두고 제대로 실천한 사람들은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니 말이다. 사회시간, 역사시간, 국어시간에 그들이 대종교란 사실을 아무도 알리지 않았다. 한국인이고 한국인데, 왜 한국을 배우라고 하는데, 안 가르쳐주는 것이지?

 

어차피 한글날, 개천절, 삼일절은 노는날이고, 나도 쉬기에 좋아한다. 딱히 기념일에 기념이 중시되는 게 아니라 한 번 정도 이렇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최근 일본 극우들이 망언과 독도문제를 걸고 넘어지는데 흥분하면서도 정작 그들과 투쟁한 사라져간 사람들은 까먹는다. 본도전말의 상황에서 일본 극우들은 전범을 기리고 참배한다. 우리는 무시한다. 그러니 한심하다는 점이다. 참배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무엇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면 알아주면 좋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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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6-18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을 종북좌파로 국정원에 고발하거임....(국정원 시계 타야지..ㅎㅎㅎ ) 바그네 만세...

만화애니비평 2014-06-18 09:06   좋아요 0 | URL
만세~ 천황폐하 만세(그분의 아버지가 혈서로 적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