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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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변증법을 다룬 내용이 기억난다. 양이 일정량에 도달하면 질로 변화하는 것을 말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유물론적으로 사회적 현상을 하나의 과학적인 연구로서 접근했다. 바로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분야는 매우 크며, 사회과학은 보통 사람들에게 다소 마음속으로 꺼리는 말일 수 있으나 사회과학은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심리학, 지리학, 법학 등이 있다. 따라서 사회과학이란 단어는 결코 낯선 단어는 아니나, 마르크스의 <자본>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연구에 의해 사회과학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만큼 사회라는 인간이 모인 공간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인 논리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말하고 있다. 물론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의 법칙도 나온다. 그런 요소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이다. 예전에 내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던 중, 공장법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령 영국에서 하루에 노동자에게 권고하는 노동시간은 10시간이나, 사실 실제 노동시간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이고, 때에 따라서는 9시를 넘고, 더 심하면 그 다음날 아침까지 일을 할 때도 있다. 그러니깐 아침 7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일하는 경우도 있다는 의미다.

 

사람이 하루 노동시간을 두고 말할 때 과연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좋을까? 참고로 이 소설의 토대가 실제 일본에서 있었던 하쿠아이호를 소재로 했다고 한다. 게공선이란 이름처럼 게를 잡아 가공하는 이 선박은 해양관련법규나 또는 공장관련법규에 전혀 저촉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2가지 법에 해당되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중간으로 빠져 나갔다. 이런 문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은 법에 의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근무하는 장소가 육지가 아닌 바다라는 점이다. 바다에서 근무하게 되면 교통수단의 문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누가 어쩌다 죽게 되어도 그저 사고사로 위장하면 그만인 것이다.

 

문제는 사고사 내지 의문의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멈추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게공선>처럼 어류를 잡는 선원이 아닌 화물을 나르는 선원이다. 하루 노동시간이 12시간을 넘을 경우도 있고, 선박이 워낙 노후 되어 가스배관에서 연기가 새어나와 일과를 마치고 나서 정리할 쯤에 세수하다보면 코에는 그을음이 생기고, 목은 가래로 가득하다. 게다가 악독한 노동환경으로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고, 온 몸에는 상처와 화상이 가득하다. 이것이 내가 본 우리나라 노동자 1명에 대한 시선이다.

 

그만큼 선박에 타고 있는 노동자, 선원들은 매우 가혹한 환경에서 일을 한다. 허먼 멜빌이 만든 소설 <모비딕>을 보면 알겠지만, 배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버림 받거나 또는 갈 곳이 없어서 몰려든 사람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처럼 비참함을 계속 이어가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리고 심한 노동 뒤에 아무리 대가가 온다고 해도 과중한 노동에 의한 육체적 손상, 기계적인 일상과 비인간적 대우는 인간의 가치관을 긍정적이지 못하게 바꾼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하나 그것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부조리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런 세상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습은 솔직히 말하자면 안타까울 분이다.

 

그런 점에서 <게공선>에서 보인 일본 게 낚시 선원들은 비참함을 넘어 죽음과 마주보고 있다. 선박의 환경은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고 바닥은 언제나 악취로 가득하며, 감독이란 자는 고용주에게 직접 고용되었다는 것만 믿고 횡포를 부린다. 제일 기억나는 장면은 파도가 일어나는데 그 모습이 마치 흰색의 토끼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다는 언제나 위험으로 가득하고, 특히 기상조건은 재해사고로 이어진다. 폭풍이 불어오면 배는 육지 근처에 정박하거나 혹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하나 감독인 아사카와는 무리하게 배를 움직인다. 그리고 게공선에 달린 통통배를 보내어 그 배들이 폭풍에 휘말려도 배 안의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 대신 배들이 없어지는 것이 더 큰 걱정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로 취급당하며, 그것도 고정적인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의 베어링 내지 벨트로 취급당하면 매우 심각해진다. 만약 당신이 자동차를 타고 운전하고 있다면 차 그 자체는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차 안의 타이어나 와이퍼는 쉽게 바꾸고 버릴 수 있다. 그런 자동차의 부품처럼 인간이 동원된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끔찍한가? 그런 상황에서 계속 인간은 참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받고, 증오를 품을 것이다. 그 고통과 증오가 일정 라인을 돌파할 경우 인간은 자신의 인내력을 잃어버린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말하던 질과 양의 교환법칙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몰리면 성향이 바뀌기 시작한다. 단지 그 바뀌는 순간까지 관성의 법칙이라는 습성으로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계속 비관하면서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고착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상황이 바뀌게 되며, 그 상황은 다른 상황과 전재로 이어진다. <게공선>에서 잔혹한 노동착취로 한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장례식조차 제대로 진행시켜주지 않은 아사카와에 대한 분노가 결국 선박 내부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아사카와가 해군전투함에 신고하여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두 번째는 파업이 성공하여 배가 다시 항구로 돌아오자, 파업을 하던 선원은 경찰서에 수감 후 풀려났으나, 아사카와와 그의 일당들은 돈 한 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쫓겨난다. 결국 권력의 앞자리가 된 자 역시 그 상황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버림 받는 것이다. 이런 소설을 보면서 권력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는 권력에 충성하여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자는 소수이고, 권력을 찾으러 오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찾으러 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 가는 실처럼 이어진 권력의 끄나풀을 잡기 위해 달려들고, 결국에는 버림을 받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래도 계속 인간들은 달려든다. 아니 오히려 그 끄나풀이 잘리면 그것을 대신할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려고 경쟁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사회는 아사카와 같은 인간들이 넘치는 것이 아닌가 했다. 권력에 아부하여 자신보다 불리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을 말이다. 작가인 코바야시 다키지는 일본인으로서 일본 노동자의 현실만 고발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고통 받는 대만과 한국도 같이 거론했다. 특히 조선인들이 겪는 고통이 매우 심하다고 기술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동포인 일본인 중에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일본은 전쟁을 멈추고, 다른 민족을 자유로이 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자본과 권력이 결탁하여 노동자를 착취하는 이데올로그가 결국 국가라는 이름에 의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게공선> 내에서 처음 일본군함을 보던 선원들은 모두 환호성을 외치나, 처음 아사카와 감독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 일본군함에서는 무장한 일본수병을 보트로 태워 보내 파업을 주도한 9인을 체포하였다.

 

결국 군함이란 국가라는 권력은 약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게공선의 사장인 국회의원에게 협조한 것이다. 게공선의 선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훗카이도 위의 소비에트연방 국경으로 향하고, 일본군함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국경으로 향한다. 게공선과 같이 동행한 이유는 선박보호 차원도 있지만, 해양측량 및 기상관찰이란 명목으로 첩보를 펼친다. 결국 군함이 보호하는 것은 게공선의 선원이 아니라 게공선의 게가 든 통조림인 셈이다. 초반에 하쓰코호가 근처에 있던 다른 게공선이 선박이 너무 노후 되어 침몰하자, 하쓰코호에게 구조요청을 보내지만 아사카와 감독은 반대한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악마 따위나 하는 말이 흘러나온다. “어이 도대체 이게 누구 배지. 회사가 돈 내고 빌린 배잖아. 뭐라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회사대표 스다님과 여기 있는 나뿐이야. 당신, 선장이라고 잘난 척을 하는데, 그 까짓 건 똥간 종이만도 못해. 알기나 해. 그런 일에 상관하지 마. 일주일을 허비할 수 있어. 하루라도 늦기만 해봐. 게다가 지치부호는 과분할 정도로 큰 보험에 들어 있어. 다 낡은 배야. 가라앉으면 오히려 이익이야.”

 

생각하면 아사카와 감독이 타던 배도 매우 오래되어 언제 침몰 되도 이상하지 않은 배인데도 그런 말을 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되는지 상관 없다와 오히려 그런 일로 보상금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왠지 요새 우리 사회를 보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란 착각에 빠진 게 우리 사회의 모순처럼 아사카와 같은 인간은 국가와 기업에 충성심에 빠져 그것을 망각한다. 물론 소실이지만 치지부호라는 게공선은 SOS가 닿지 않은 채 배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죽었다.

 

왠지 이 모습을 보면 2014년 대한민국 최고의 악몽인 세월호 사건이 생각난다. 아마 선장이나 선주 그리고 정부기관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에 무책임하게 도망치는 것을 말이다. 물론 선장과 선원들은 아사카와의 말로처럼 비참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게공선의 하쓰코호를 만든 자들은 아직도 근엄하게 큰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에 억눌린 자들은 매일 힘들게 일을 하나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늘 병마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타락한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고통과 착취가 가해지면,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시킨다. 즉 피해자가 가해자로 되는 일들이 생긴다. 이런 모순적 구조를 바꾸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서 <게공선>에선 연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폭력적 방법으로 되어서도 안 되고, 그 자체도 불가능하다. 결국 작은 변화를 꾸준히 모아 해결갈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상징하는 인물로 의사가 있는데, 그는 아마 인도주의적인 자일 것이나, 결국에 현실의 모순을 바꿀 수 없었다. 당시 현실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법학자, 의사, 언론인 등과 같은 엘리트 들이었다. 하지만 상류계급에 속하는 이들의 인도주의는 번역가의 지적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동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인도주의자조차도 참 드물지 않나 싶다. 아직까지 인간이 대체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하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 도구가 없다면 사회조차 원활히 돌아가지 않는다. 재생산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이른바 88만원 세대에서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이길 수 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변증법이란 질과 양의 관계처럼 단순히 한 번에 모든 것을 뒤집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바꾸어 가는 길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알아야겠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거나 혹은 거부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확신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몇 %일까? 매년 자살로 또는 산업재해로 또는 혼자 외로이 죽는 사람들이 꾸준히 나오는 현실에서 <게공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던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우리는 자신의 시라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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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 2014-07-23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배우의 출연작 중에 [게어선]이란 영화가 있어서 메모해 두고 있었는데 읽어보니 이 책이 그 원작이겠군요. 가능하면 책을 읽도록 해야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3 15:34   좋아요 0 | URL
게어선이면 딱 그렇군요

lmicah 2014-07-2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인상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작품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를 다룬 TV교양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이 책의 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호쿠사이의 작품에는 후지산이 등장하고 이 책의 표지에는 게공선이 등장하지요.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출간된 지 80년이 지난 책임에도 현실의 문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책입니다. 리뷰도 기가 막히게 잘 쓰시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7-24 22:39   좋아요 0 | URL
호쿠사이의 그림이 저 책 표지로 사용하였지요. 리뷰는 다들 도움이 주시니깐 이렇게 적는 것이죠. 좋은 덧글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7-25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 직장을 어서 서울로 옮기시지요 !

만화애니비평 2014-07-25 08:19   좋아요 0 | URL
일자리가 없고, 집도 문제고!!..ㅠ.ㅠ
 
교육사유 - 실천하는 교사,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함영기 지음 / 바로세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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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란 것은 참 어렵다. 왜 어려운 것일까? 사실 인간은 인간을 스스로 키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이란 인간에 의해 사회적 그룹으로서 성장할 수밖에 없다. 현재 21세기가 과거 조선시대 내지 봉건사회였다면 농경산업으로서 살 수 없으니 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어린아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오히려 어린아이 내지 청소년들을 가리켜 작은 어른이라고 했다. 단지 몸이 작을 뿐이지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업무나 책임을 이미 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정에서 요리를 하는 소녀나, 논과 밭에서 추수하는 소년들이 있었고, 심지어 10살 내외의 아이들도 나름 잔잔한 심부를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가장 행복은 그 인간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고,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이라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작은 아이였던 청소년들은 지금의 청소년처럼 단순히 보호받고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나름대로 삶의 한 영역에서 열심히 일을 했던 것이다. 중세유럽부터 근대유럽까지 학교라는 곳은 모두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귀족이나 왕족, 그리고 일부 부유한 사람에 한하여 가능했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산업구조는 농경사회가 아니라 경공업으로 변모되면서 노동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공업이란 특성에 인간을 맞추어야 했다.

 

가령 옷감을 만드는 기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물과 석탄 그리고 재료의 배합을 알아야 했으며, 장거리 수송을 위한 교통에서도 말과 소보단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도구를 다루거나 수리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적 기술이 요구되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자본주의 산업체계에서 지식은 농업을 하는 것과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가 능률이 좋아지는 만큼 세분화된 작업구조와 그 기계에 대한 작업능력이 요구되므로 공장에서 근로하는 사람들에게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시작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글이 되었는데, 사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에서 감옥의 역사에서 감옥은 단순히 법적인 조치로 만들어진 물리적 감옥 즉 교도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학교, 병원 등 다양한 공간에 머무는 인간 역시 감옥 같은 감시체제로 이루어진 셈이다. 제레미 벤담의 일망감시탑인 판옵티콘에서 감시와 통제로서의 기능은 결국 인간에게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라기보단 그저 그 감시와 통제로서 이익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교육이 교육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나 교육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인 권력에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기존의 노동인력이 빠지면 새로운 노동인력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대체되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그 사회는 계속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국가조직이란 하나의 구조에서 본다면 국가의 운영과 존립에서 하나의 토대를 이루는 하부구조로 되는 것이고, 국가라는 전체적 틀에서 떠나 개인으로 본다면, 교육으로 통해 인간의 자아성찰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바라보면 그저 감시와 처벌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제시스템으로 이어가고 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교육사유>로 생각해보는 한국의 교육이란 항상 위기의 연속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근대에서 넘어 탈근대로 이어져야 할 단계이나 아직까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려 있다. 이른바 계몽이란 것이 진실한 계몽이 아니라 계몽이란 이름의 새로운 억압으로 등장한 것이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으로 되는 것일까? 우리는 헌법에서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자유와 민주주의는 인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같이 좋은 삶을 살아가야할 가치관이다. 민주공화국이란 단어에서 공화국은 결국 그 나라의 국민이 전쟁이나 위험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단순히 국가외부의 적이나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그 내부로부터 등장할 수 있다. 그런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것이 나는 교육이라 생각한다. 비행청소년 내지 각종 왕따 사건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도 일어나는 각종 문제들은 결국 교육에 의해 일어나는 인간의 재해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원래 인간으로 된 게 아니라 인간은 후천적인 요건에 의해 인간이란 존재로 사회로 나오는 것이다. 물론 태어날 때 두뇌가 우수한 아이나 또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할 수 없기에 결국 인간은 교육으로서 자신의 인생이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교육사유>를 읽기는 했지만, 먼저 이 책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 한국사회에 전반에 일어나는 교육문제를 다룬 것은 맞다. 그 문제에 대한 원인 역시 언급한 것까지도 인정하다. 그러나 깊이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어느 사례에 대해 구체적이고 종합적이면 적용이 가능한 사례를 들어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물론 존 듀이라는 미국 교육사상가에 대한 거론은 좋으나, 존 듀이의 이론을 어느 정도 구체적인 설명보다 일반적인 설명으로 끝난 것이 아쉬우며, 차라리 존 듀이의 서적들과 그 연구결과 그리고 존 듀이의 연구를 계속 진행하는 사상가들을 소개하여 우리가 어떤 서적을 보는 것이 좋은가 하는 안내가 없던 게 아쉬웠다.

 

기본적으로 교육에 대해 생각하자면, 교육학이나 교육철학을 직접 공부하거나 수업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정치․사회학․철학․문학 등을 접하면 교육에 대한 사유와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령 교육의 기회에서 균등배분은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등장하는 내용이다. 롤즈의 경우 최소수혜자로 하여금 그들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혜택이 경제적인 문제로 배제되는 것이 안 되며, 그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기회를 부여하여 스스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고 거론했다. 그렇다면 교육사유에서 그런 부분이 등장하고, 그런 중요한 사안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것은 학생과 교사 개인적인 영역에서 학교와 사회 그리고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로 이어간다.

 

교육이란 것은 누가 임의로 정하여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교육행정에 의해 이루어진 체계이며, 아쉽게도 우리는 교육을 인간의 성장으로 통한 미래투자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경제적 이익을 생각하는 투자라는 점이다. 그런 투자가 인간의 성장에 대한 투자가 아닌 경제적 조건으로 연결되니 학생들은 인격이 아니라 자본적 가치로 보는 것이다. 국가는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큰 효율을 보는지, 혹은 학교는 얼마나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보는지, 부모는 얼마나 애들이 성적이 올라 좋은 대학에 들어가 대기업에 취업하여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말이다.

 

아니라면 공무원 중에서 고위직이나 또는 전문직으로 수익이 월등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국가에서 돈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모든 것이 돈으로 보기에 인간을 돈에 대한 효율성으로 따지므로 학생들 역시 효율적인 것만 따지고, 그 효율적인 요소는 이기심에 의해 조성된다. 왕따 내지 폭력문제가 발발하는 것은 바로 그런 조직사회라는 은폐공간에서 학생들 스스로 인격체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 그저 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도구로 보기에 타인의 고통이나 상처에는 연연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자신의 목표는 좋은 대학과 일자리, 없으면 오늘 하루 어떻게 견뎌 무사안일하게 지나가는 것이다.

 

이런 학교구조 누가 만들었나? 학교는 그 사회의 축소판이다. 사회라는 규모에서 국가가 가장 큰 규모이니 학교는 그 나라의 현재 상태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학교는 보이지 않은 은폐공간에 계속 집단적으로 격리되어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지 때문이다. 문제가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어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은폐 및 조작으로 이루어진다. 최근에 자살한 어느 중학생의 경우 집단폭행에 괴로워 다른 곳으로 전학가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것은 교사와 어른들이 학생들끼리 잘 지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수수방관에 그 피해학생은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단지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자신들에게 책임이 오는 것부터 걱정하는 것이다.

 

안심하지 못하고 학교강단에 서는 선생, 그리고 그 선생을 믿을 수 없는 학생, 집에 가면 학생들은 더 감옥이 된다. 왜냐하면 집에서 바라보는 교육이란 시험 후에 돌아오는 통지표로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가정이 평온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가시바늘이 돋는 감옥처럼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을까? 물론 돈 잘 벌고 좋은 직장에 가면 좋겠지만, 모든 학생에게 그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어떻게든 누군가는 덜 좋거나 더 힘든 일을 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좋은 조건으로 보이는 자리가 과연 몇 %가 되는가?

 

아무리 바득바득 따라가도 갈 수 없다면 제3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학생의 자유고, 그것을 유도하는 것이 선생이고, 그것을 배려해주는 것이 부모다. 안 그래도 프랑스대혁명 발생 225주년인 올해 7월, 나는 다시 루소의 서적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에밀>이 너무 생각났다. <에밀>이란 서적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함께 세계적인 도서이며,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존재하게 만든 정치사상도서다. 그런 <에밀>에서 교육에 의한 방법론적인 요소를 단순히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적인 요소로 이끌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생은 부모고, 부모가 아니더라도 그 어른은 아이에게 너무 미리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아이로 하여금 자연과 어울리게 하여 그 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불어넣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세상은 아이에게 자유의지를 불어넣는 것보다 강제로 의자에 앉히기를 바란다. 교육을 하는 것은 인간의 성장이나 오히려 인간의 폐쇄성과 이기심만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위인과 문호들은 왜 루소의 <에밀>을 보고 큰 전환점을 얻었을까? 아이에게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는 또 다른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이고, 그들이 아직 인격적으로 부족해도 그것을 억지로 누르는 게 아니라 그 인격을 새롭게 이끌어가게 해주는 것이 진실한 교육이다. 예전처럼 1인의 천재가 10,000인의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니라 10,000인의 사람이 10,000 인을 먹여 살리는 것이 옳은 것이다.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생존할 수 있는 세계야 말로 진실한 교육의 가치가 드러나고, 그것이야 말로 헌법과 교육법에서 말하는 민주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민주적인 인격체로서 성장하는가? 결국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그 어른이 되기 전에 그 당사자가 어떤 가치관을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가치관은 누가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보는 관점과 아이들이 보는 관점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항상 기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풍조에서 우리는 창의적인 인간이 될 수가 없다. 20세기 산업은 레드오션이라고 하면 21세기는 블루오션이란 말이 있다. 게다가 21세기는 이미 문명적으로 개발이 다 되었기에 새로운 산업은 문화라는 거대한 인간의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1달에 책을 얼마나 읽는지, 그리고 그 책은 어느 종류인지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우리에게 보이는 책은 단시간 내에 성과를 내려는 자기계발서 내지 주식투자서 등과 같은 도서다. 그런다고 모두 그 책을 보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는 그 본인의 역사이지 우리 모두의 역사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 하는데, 개인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게 해줄 가능성은 과연 0.01%나 될까? 아니라면 주식투자 역시 주식시장의 변화, 국제사회의 변동, 시시각각 움직이는 정국에서 그 흐름조차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이 계속 주식투자에 집착해보았자 결국은 망하게 되는 점이다. 우리는 조금 더 느리게 생각하고 판단해야하는 것을 빨리 자각해야 한다.

 

어차피 21세기는 다양한 업종과 다양한 사회가 조성되어 있기에 어느 일정한 것으로 모두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나 주입식 교육만 추구하는 현실에서 사교육은 언제나 공교육의 앞에 전제되었고, 사교육의 부담은 가정살림에 부담이 오며, 가정의 살림이 압박이 오면 인구까지 감소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국가적으로 교육이 중요하나, 그 교육정책과 흐름이 역으로 한국에서 젊은 인구가 줄고 있는 것이다. 재생산적인 가치로 따지자면 우리 사회 역시 또 다른 모순과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투자는 당장 실적이 이어지지 않겠지만,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교육 실태는 차가운 복도와 막혀있는 창문, 그리고 숨 막히는 경쟁의식에 학생들은 깊은 나락에 삼켜지고 사라진다. 세계에서 가장 청소년 자살이 많은 국가로서 아직 꽃도 피워보지 못한 이들의 비명에 우리의 미래는 과연 빛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그 나라의 정치적 흐름에 맞물려 있다. 교육에 대한 사유는 비단 내 아이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 대한 문제다. 내 아이는 다르다는 생각은 버려야한다. 어차피 그 아이도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와 사회 안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할 줄 모른다. 내가 피해가고 싶어도 피해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공간적 안식처를 만들어가야 한다. 전에 지방자치단체 투표하기 전에 우리 회사 직장동료에게 이 말을 들었다.

 

자신이 지지하는 당은 그다지 있는 것은 아니나, 어느 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나, 자신은 거기에 투표할 것이라 했다. 그 이유는 거기 지역에 출마한 후보자가 자신의 친척이 되는 것이란 점이다. 나중에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무슨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말에 나는 참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도움이 되는 일이 몇 번인지 혹은 그 도움을 준다고 해도 얼마나 만족할 수 있는지, 제일 중요한 것은 진짜 도와주는 지였다. 나라면 그런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의 자식이나 앞으로의 미래를 위한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다. 진짜 교육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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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 - Seed Novel
온점 지음, 모밍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을 읽으면서 전에 읽은 1권과 2권을 생각했다. 최근 들어 일본이나 한국에 마법소녀를 중심으로 만든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라이트노벨이 활발히 발행되고 있다. 게다가 용사와 마왕장르까지 나오면서 기존의 마왕용사와 마법소녀의 일반적인 형태를 해체하고 있다. 문제는 해체라는 것이 기존의 틀에서 해체된다고 하여 그 해체주의적인 작품 역시 또 다른 틀이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틀과 흐름의 물길을 돌린다면 그 물길 역시 다른 틀과 흐름에 잡힌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전개는 틀린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 계속 유지되어 일종의 패턴주의적인 형태로 간다는 사실은 그렇게 좋게만 볼 수 없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가장 맨 처음 다른 해체적 시도는 마법소녀가 다소 폭력적이란 점과 동시에 여고생보단 오히려 남학생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1권부터 심지어 2권 그리고 최후의 3권에서는 남자의 의상을 입고 있다. 그것도 나비넥타이를 목에 걸고, 옆에 악당조직 중간보스인 주인공은 차이나드레스로 요염하게 포즈를 하고 있다. 여자와 남자라는 생물학적 관계는 역시 일러스트로 하여금 의미가 없어지게 만들었다. 라이트노벨의 작가와 일러스트를 그린 작가는 서로 다른 인간이기에 각자의 인식과 방식으로 적거나 그림을 그린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에서 주인공은 남자인데도 아주 가늘고 마른 남성이나, 제 아무리 남성이 몸이 가늘고 야위어도 대퇴부 근육과 골격이 그렇게 형성되지 않는다. 라이트노벨 작가는 마르고 성격이 유약한 주인공으로 표현했다면, 일러스트 작가는 주인공을 여장남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여자로서 그린 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처음과 끝까지 마법소녀의 모습과 악당 중간보스의 모습 계속 반대로 한 것이다. 설정을 본다면 그것은 좋고 나쁘다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단지 작가가 설정한 세계관의 일종일 뿐이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은 주인공의 요염한 자태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점을 암시했고, 주인공 역시 선머슴이란 사실을 각인했다. 남자교복 상의를 계속 입어야 했던 마법소녀의 아이러니에서 마법소녀가 마법소녀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충분히 깰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작가본인의 의도는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아쉬운 부분은 전에 2권을 지적한 것처럼 점장의 여동생이 붉은 이리집단에 속했던 것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이 작품은 현실에서 물가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고기뷔페 중에 가격이 저렴한 곳은 1인당 10,000원 정도하는 것은 현실성이 있고, 돼지두루치기를 12,000원에 파는 것도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그런 리얼리티에서 점정과 붉은 이리의 삽을 든 악당이야기는 아쉽게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3권도 역시 아쉬운 눈으로 바라봐야 했다. 2권은 너무 쓸데없이 늘리고 늘렸다면, 3권은 너무 줄이고 줄여 결말이 다소 명확히 끝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작가가 3권이 발매될 무렵에 국방의 의무로 군입대를 해야 하는 점이다. 군입대를 하고 제대까지 걸리는 시간은 거의 2년이다. 그동안 라이트노벨을 집필하지 못하는 점에서 3권은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3권은 2권보다 설정이나 전개가 좋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갈등, 그리고 비밀과 그 비밀 속에 가려진 마법소녀의 정체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1권부터 마법소녀 같이 안 보이는 하춘식이 악의 조직 중간보스인 주인공과 Lovely 하게 흘러가는 것은 처음부터 알 수 있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어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그로 인해 무엇을 전달하는지가 중요한 셈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이아> 이야기를 보면 주요인물이 처음 등장하여 모험을 떠나면 그 모험을 마치고 결국은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가는 것이 전형적인 이야기다. 그렇다면 엇갈린 두 남녀의 이야기라면 마지막은 결국 연애적인 요소다. 마법소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흔히 말하여 마법소녀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라고 한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을 읽는다면 하춘식 사랑과 우정까지 그렇지만 마을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만은 분명하다. 단지 보통 마법소녀처럼 마법(魔法)보단 마력(馬力)적인 힘으로 F-Killer의 주인공을 아주 쉽게 무찌를 뿐이다. 3권 역시 전혀 마법소녀에 상대되지 않은 주인공이 계속 하춘식에게 쩔쩔 매는 모습이 나온다. 그래도 조금 실마리가 풀리는 것만은 좋은 전개라고 생각했다. 단지 그 전개과정이 3권으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에피소드로 통해 최소 5~6권 이상 되는 게 좋지 않았나 싶으나, 국방의 의무를 생각하면 아쉬울 뿐이다.

 

이때까지 등장인물 중에 있어도 그만 혹은 없어도 그만이던 조나단의 위치가 이번 편에는 확고했다. 철제 양동이를 머리에 쓰고 눈앞에 있는 대상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도 잘만 보고 심지어 대화까지 유능하게 하는 주인공의 참모, 그 참모의 정체가 의외로 쉽게 드러나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F-Killer가 있다면 그 만든 총장이 있었을 터이다. 아무리 봐도 총장의 정체는 양동이를 쓰고 장난 같은 헛소리만 늘어놓는 조나단이란 사실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마법소녀가 순결을 잃으면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처럼 과거 최고의 마법소녀이던 딥 블루가 10년 전의 전쟁을 종식시켜주던 이야기에서 그 중심에 조나단이란 사실을 조금 의외였다.

 

아니라면 작가는 복선을 깔아두고 싶었지만, 군입대로 인해 제대로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3권이 2권보다 내용적으로 조금 더 발전한 사유는 악의 조직과 마법소녀의 대립관계에서 과연 악이 무엇인가이다. 혹은 F-Killer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다. F-Killer는 남들이 가지진 행복을 가지지 못한 존재다. 어떻게 보면 흔히 불쌍하다거나 또는 무시당하는 존재다. 자신들의 정체성에서 남에게 폭력과 강제적인 힘으로 이권을 찾는 악당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여 행복하지 않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여기는 소시민적인 가치관이다.

 

덕분에 대놓고 범죄조직 같이 활동하는 악당보다 이런 어중간하고 목표자체가 의미 있는 악당이 더 위험하다고 마법소녀 관리부에서 판단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기존에 활동했던 마법소녀들은 대부분 중고등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존재고, 주인공은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다. 이미 사회적인 불평등 내지 또는 자기희생에 의해 구축된 일상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흔히 인간들은 전쟁 당시의 참혹함만을 기억하나, 막상 전쟁은 끝난 후에 더 잔혹할 수 있다. 누군가 죽는다면 누군가는 살아야 하고, 그 산자들은 기존에 같이 있던 망자들의 몫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라그나로크의 방문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 생각할 수 있다. 라그나로크는 딥 블루의 동기로서 강력하지 못하나 그나마 죽지 않을 정도로 마법소녀 세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베테랑이다. 라그나로크는 마법소녀가 10대에서 끝내야 하나 계속 20대까지 활동하고 있었으며, 악의 조직에 대해 일체의 자비나 용서가 없던 마법소녀다. 이와 다르게 딥 블루의 모습은 술에 빠지고, F-Killer 총수 만나 헤어진 뒤부터 계속 처녀라는 말을 한 것처럼 중간에 일탈적 행위가 있었다. 마법소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 소녀의 순결이란 말도 있다.

 

딥 블루는 그것을 버리고 총장과 단합하여 전쟁을 종결한 대신 라그나로크는 10년 넘게 변신을 풀지 않고, 계속 마법소녀 모습을 활동했다. 자기가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새로운 계기를 찾지 못하고, 옆에 있던 동료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인해 분노가 증오로 바뀌고, 증오가 다시 정의라는 이름 앞에 폭력이 합리화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으나 정작 자신은 구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영희라는 소녀로서 새로운 자기 자신을 찾아갔다고 볼 수 있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3권을 보면 결국 이 작품의 목적은 성별역할을 전환한 점에서 기존의 마법소녀의 틀을 깨려고 한 부분만큼, 악당이란 불리는 조직은 단순히 악의 조직이 아니라 세상에 악(보기가 좋지 못하거나 왠지 가까이 가기 싫은 존재)적인 존재로 되어야 한 사람들이다.

 

편의점에서 힘들게 일하는 주인공이나, 맨날 게임이나 하는 점장과 승희를 보면서 악당의 정체성보단 그저 소시민적인 자들이 몸부림치는 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쁜 짓이라곤 처음 주인공이 하춘식을 유혹하여 마법소녀의 힘을 잃게 만들려는 수작이었으나, 처음부터 주인공이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작가의 후기만큼 등장인물의 가족이나 과거사들이 제대로 엮어가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제대하면 작가는 다른 소설을 쓴다고 했으니 그때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여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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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학술총서 5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 들어가기 전에

한국의 역사는 침략을 하기보단 침략을 받은 역사이다. 단군조선부터 시작하여 후기 조선까지 이어져 항상 중원대륙의 한족(漢族)에 의해 국가의 위기를 맞이했다. 21세기인 지금에 중국에는 황제라는 사람이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란 국가는 항상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까지 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게다가 글로벌리즘이란 이름 아래 중국 역시 관료주의적인 사회주의형태에서 국가 내부적인 정치성향은 관료주의는 택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자본주의국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미 자본주의 VS 공산주의(국가자본주의 내지 관료주의국가) 대립구도는 해체되었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아마 그 이전의 중국보다 더 강력하고 위기로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다고 중국을 과거 한국전쟁에서 이북 위로부터 넘어온 적대국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대외 무역에서 절대 제외할 수 없는 국가다. 특히 등소평의 개방정책은 중국의 상품이 외국으로 넘쳐흐르게 되면서 중국은 어느 순간 우리에게 적대국가가 아니라 한국 주변에 있는 무역국가 중에 하나다. 게다가 중국에서 매년 한국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한국 역시 중국으로 유학 내지 관광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추세다. 그런 국제사회의 관계적인 요소에서 중국에 대한 역사적인 관점을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우리가 수 십 년 내지 수 백 년 전의 일이라도 그것이 지금의 우리 실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분단되었다고 해도 대한민국 지도는 조선시대의 영역과 거의 흡사하다. 조선의 탄생이 결국 대한민국 영토의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선시대 개국군주는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다. 그들은 본래 고려의 신하였으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국을 멸망시키고, 조선이란 새로운 국가를 설립한다. 당시 원나라 이후 중원은 명나라라는 강력한 한족국가가 있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대신 명나라라는 국가였다. 한족이란 국가체계는 뛰어난 문인들을 위주로 하였기에 제 아무리 무력이 강한 국가라도 해도, 그 지배논리 내지 국가운영체계에 한족의 문화적 기반을 따라갈 수 없었다.

 

현재 중국은 공산화된 국가라고 하나, 실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들어가자면 중국은 마르크스의 가르침에 전혀 따른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예전의 봉건사회에서 계급 대신 자본이나 권력의 소유에서 새로운 지배계층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은 세계 어디든 존재하는 국가에서 경제적인 조건만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갈 수 있다. 그렇지만, 빈부격차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 전혀 빈부격차를 줄이지 못하는 지난 세기의 공산주의국가 진영의 모습에서 단순히 우리는 공산진영의 국가이던 중국으로 보는 게 아니라 단지 공산주의라는 이름이 국가정치에서 겉으로 표방하지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은 아직까지 우리가 마지막 왕을 가진 조선이 있듯이 그들도 명나라와 청나라의 중국이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전쟁의 배경

전쟁이란 단순히 감정이나 순간적인 판단에 의해 진행되는 게 아니라 단지 그 단순한 감정과 순간적인 판단이 촉발제가 될 뿐이다. 전쟁의 이유는 바로 국가 내부적으로 경제적인 조건과 환경적인 조건이 중요하며, 특히나 청나라 이전의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전쟁이란 이름을 단순히 기마민족의 위상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계성에 의해 진행되었다. 우선 영토의 분류상 한국은 몬순기후로 쌀농사가 매우 적합한 국가이며, 중국은 다양한 기후가 섞여 있으나 대부분 농업이 가능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다르게 후금이던 청나라는 대부분 몽골이나 조선함경도 이북에 위치하고 있기에 농업이 매우 부적합하므로 식량문제가 항상 심각했다. 그들이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선 식량의 공급이다.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우선 직접 수력이나 채집으로 유지 하던가 혹은 농업이나 축산업을 일으키거나 또는 침략으로 통해 식량을 훔쳐오는 것이다. 후금 인근에 위치한 몽골을 비롯한 대부분 오랑캐부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일정한 터전도 없이 계속 이동을 하면서 가축을 키워 가축의 우유와 고기로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식량을 가져올 수 없기에 후금의 입장에서 조선이나 명나라의 식량무역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식량외교는 유리한 게 아니다. 물물교환 내지 상품을 화폐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되는 가치로서 교환해야 한다.

 

문제는 화폐로서 사용되던 것은 지금과 같은 달러 내지 유로 같은 종이화폐가 아니라 금, 은, 보석 등과 같은 귀금속이다. 물물교환이 가능한 것은 가축, 식량, 약재, 무기 등과 같은 그 나라의 살림에 필요한 도구들이다. 화폐의 기준이 되는 척도가 존재하지 않기에 상당량의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화폐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상품 내지 귀금속이 필요하겠지만, 기본적으로 후금의 입장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약탈에 의해 자행되는 물자의 귀속에서 물자를 약탈하면 할수록 이에 대한 새로운 물자가 필요하다. 전투에 필요한 물자만큼 그 전투에 참여한 장병과 가족까지 혜택이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후금이 초반에 가난한 국가이고, 전투가 용이한 점은 그들이 문화적인 과잉이 정치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과 달리 병자호란이 괴로운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런 호족들이 가진 문화적인 역량이었다. 홍타이지를 살펴본 조선 사신들은 홍타이지가 매우 호탕하고 남성적이며, 밑의 부하들에게 엄하지만 백성들에겐 매우 관대하다고 한다. 그러나 병자호란 시기에는 후금이 아닌 몽골족의 용병술로 정묘호란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 것이다. 홍타이지는 초반에 조선을 침공할 때 거리의 양민들을 손대지 않도록 했지만, 병자호란 시기에는 몽골족들이 약탈과 살인을 즐겼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전쟁의 시초는 외교적인 갈등이 시작되나, 그 외교적 갈등에는 국가 내부나 혹은 국가이전의 부족에서 자원의 충당에서 시작된다. 물자부족에 대한 충당과 그 충당과정에서 보상이 일어나고, 그 보상 이후 새로운 인원과 물자를 보급하게 되면서 더 큰 물자와 보상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면서 세력은 확장되었고, 전쟁의 대상은 국가차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몽골족의 칭기스 칸의 경우 본래 몽골의 작은 부족에서 시작한 점에서 청국 황제인 홍타이지 역시 후금의 부족에서 하나의 족장에 불과했던 점이다. 전쟁의 원인은 결국 부족국가에서 물자의 보충과 더불어 그 과정에서 상대진영과 반목된 계기라고 볼 수 있었다.

 

문화가 물질에 의해 지배받은 것이 청국의 시작이라면 문화가 물질을 지배하는 것이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다. 조선의 경우 이성계 이후 명나라에 대한 사대사상에서 중화주의를 논하면서 소중화 국가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이른바 사대부들은 공자로부터 시작하여 주자학이 결국 한족의 유교문화였고, 자신들은 그 문화의 후계자란 사실을 토대로 주변에 있던 일본과 만주족 등을 우습게보았다. 문인들이 중심이 되던 조선사회에서 무인들의 위치는 문인보다 아래였으며, 도원수나 대장군이 위치해도 병조판서와 같은 문인 사대부들이 지금으로 따지면 국방부장관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인들의 정치적 성향은 소중화 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어버이국가 명나라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충성을 기하여 할 것이며,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절대적으로 용납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는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광해군의 경우 처음에 후금과의 관계성에서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하기보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이에서 중립외교로서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경제적, 물질적, 환경적인 조건보다 문화적인 기반이 우위인 사대부에겐 큰 반발이 되었다. 강홍립이 후금과의 전쟁에서 고의적으로 싸우지 않고, 오히려 진형이 불리하여 투항한 것은 광해군은 정치의 우위는 문화보단 물질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조선의 팔도는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그 와중에 우방국인 명나라는 도독 진린을 파병을 보내나, 그들은 왜와 진정으로 싸우려 하지 않았고, 뒤에서 왜와 교섭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구원을 토대로 어버이국가에서 아들국가인 조선을 도왔다는 이유로 충성심을 표한다. 일본이 민가를 약탈하면 큰 빗 하나가 스쳐지나갔다고 하면, 명나라의 군사는 참빗 하나가 지나갔다고 한다. 빗의 날이 세세하고 미세한 참빗처럼 명나라가 조선에 기거하면서 하는 일이라곤 노략질과 병량미를 축내는 것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명나라에 대한 우방의식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정치적 무능력을 보여주며, 이와 더불어 그런 후금에 대한 견제성에서 군사력의 한계성과 반정공신들의 이익만 보다가 결국 호란을 당한 것이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1627년에 후금의 요구사항은 그래 과다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내쫓겨나도, 결국 후금은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전선에 눈치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운은 조선을 버리고 또 무시했다.

 

□ 외교적 상황

조선이란 국가의 한계성은 바로 실리외교를 무시한 것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아무런 방도도 세우지 못하고 당파싸움에 결국 부산 동래와 한양을 함락당한 선조는 아무리 유능한 신하를 두어도 당파논쟁 및 화이론(華夷論)에 지나친 몰입에 현실적 감각을 상실했다. 북인계통의 이순신 같은 무장이 전쟁을 승리를 이끌어도 반역자로 몰린 이유도 당파논쟁에 큰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북인의 경우 이후 광해군 시대에 외교정책을 효율적으로 다루어 전쟁의 원인을 피하려고 했다. 처음부터 홍타이지도 조선에 대해 강압적인 침공을 하려던 것은 아니나, 결국 명분이란 것이 실리의 모든 것을 우월할 때 전쟁이란 극단적 상황이 도래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광해군은 가도에 위치한 명나라 장수인 모문룡에 대해 견제를 했다는 점이다. 모문룡이 탐욕적이고 자국의 수도에서 멀리 있는 가도에서 변방황제라고 불릴 정도로 재력과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후금, 조선이 필요한 무역의 모든 이권을 챙긴 모문룡은 후금에게 큰 가시거리이고, 조선으로 본다면 막대한 예산을 요구하는 간신배였다. 모문룡에 대한 광해군의 정책은 모문룡을 견제하고 후금과의 중립노선을 지키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인조가 반정에 오르자, 모문룡의 세력에 속한 상관이 인조의 정치적 기반이 약한 점을 이용하여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교섭을 강화했다.

 

인조는 본래 광해군의 조카이며, 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기에 명분이 필요했다. 명나라의 사록에서 인조는 정상적인 왕이 아니라 변란으로 왕이 된 사람이고, 그가 왕위의 안정성을 가지려면 명나라에 의해 책봉을 받아야 하는 점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일개 대군이란 점에서 명나라의 모문룡의 상관으로부터 인조는 자신의 아버지가 왕으로 추숭되는 것을 성공한다. 덕분에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외교 사다리타기에서 명나라로 가면서 추후에 조선은 홍타이지의 침략을 받고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외교의 실리적인 부분에서 명분이란 결국 자신을 옭아매는 아킬레스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명분 뒤로부터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외교정치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의 조선에서 외교정치를 잘 하는 것은 결국 자국을 보존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쇼군으로 되면서 일본 내의 모든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척결한다. 그 덕분에 일본 막부는 전쟁보단 에도 중심의 내정위주의 정치로 옮겼으며, 도쿠가와 막부와 더불어 조선의 교역과 외교회복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일본에는 아직까지 강력한 왜병이 있었고, 조총의 경우 살상력이 매우 높았으며, 항왜(降倭)와 같이 항복한 왜인들은 다른 조선병사와 달리 매우 강한 무술과 돌격능력을 갖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왜관을 동래에 설치하여 일본과 외교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로는 명과 후금 아래로는 왜국이 있었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침공해온다면 국가존립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기초는 광해군부터 닦아오고, 인조는 후금의 세력이 강하고, 혹시라도 있을 전쟁을 대비하여 왜국의 조총과 염료, 화약을 구입한 것이다.

 

모문룡 사망 이후, 명나라에서 후금에 대한 전반적인 전투태세에서 중간에서 눈치보단 조선이 명으로 붙은 조선에서 일본의 외교는 중요했으나, 문제는 명나라의 국가 존립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명나라는 외교적인 문제보단 자국 내의 정치적 세력의 분할로 인해 파가 갈리어 있었고, 그 이점을 노려 홍타이지는 자신에게 투항한 명나라 장수로서 이간질 작전을 세웠다. 덕분에 중요한 장수가 처형당하는 일을 당하자, 명나라의 군사력은 점차 약해져 갔고, 이 와중에 자국에서 보충 내지 합의에 대한 보완보단 그저 그대로 흘러가는 추세인 것이다.

 

□ 이신의 존재

이신이란 하나의 왕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두 명의 왕을 섬기는 자를 가리킨다. 즉, 원래 명나라의 장수나 인물이었으나, 후금으로 투항하여 홍타이지를 보필한 자들이다. 명나라는 기본적으로 조선에 대한 정치적 상황이나 외교적 방술을 잘 알았으며, 전쟁은 반드시 무력으로 인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문인들로 통해 정치외교적인 압박과 실리를 넘은 명분으로서 조선을 굴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제 아무리 실리가 중요해도 명분이 존재하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되지 않거나 혹은 압력을 주어도 한계성이 따르기 때문이다. 명분성에서 인조의 반정 역시 명분에 의해 명나라와 친교외교로 맺은 것처럼 후금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들은 바로 그런 방법으로서 조선을 압박했다.

 

본래 인조가 병자호란 패배로 청국황제인 홍타이지에 삼배구고두례를 할 이유는 없었으나 이 모든 것이 명나라의 이신에 의해 조정되었으며, 조선과 후금의 전쟁에서 밀고 당기는 상황에서 조선에 대해 심한 압력을 주었다. 심지어 척화파에 대한 검색이나 투항 이전 명나라와 밀통하는 자까지 속아내는 효력을 발휘한다. 인조반정의 공신 중에 공신인 승상 최명길이 바로 명나라와 밀정을 나누다가 그 밀정을 나눈 명나라 장수가 청에 투항하는 바람에 실각하게 되는 사례를 알 수 있다.

 

이신의 존재가 그토록 강한 이유는 조선이란 국가가 이때까지 소중화 이었기 때문에 문장력이 부족한 후금이 무력지배로 갈 수 있어도 문화지배가 어려운 부분을 이신들이 보완했고, 때에 따라서는 우수한 성과도 낳았다. 청나라로 연호가 시작되자말자 명나라 이신들은 청나라의 문화 및 정치권에 큰 역할을 맡으며, 홍타이지의 세력을 확장시킨다. 홍타이지 역시 본래 후금에서 버일러라는 한 부족장에 불과하며, 다른 부족장들을 통합하기에는 자신의 세력이 부족하므로 이신들의 존재로서 자신의 세력을 늘리는 것이었다. 이들의 존재는 청나라가 일본에 의해 망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청국에서 문인이 배출되고, 조선으로부터 아버지국가라는 역할을 하면서 특히 강희제 때에 이르러 더 이상 명나라에 의한 그늘에서 초조하게 굴지 않았다. 인조와 효종 시기에 이신들은 끊임없이 조선을 압박했고, 주변에 스파이를 배치하고, 사소한 문제로 시비를 걸었으며, 특히 남한산성 보수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 조선의 피해

개인적으로 조선시대에 북벌론이든 혹은 북학론이든 어느 하나라도 무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효종이 북벌론을 내세우려다가 못한 것이나 혹은 인조 시대에 북학론을 하지 못한 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라 볼 수 있다. 인조반정은 결국 사대부들이 가진 성리학적인 중화주의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다. 이 시기에 인조반정 이후 후금을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 병자호란으로 모조리 굴복하게 되면서 조선 사대부의 정점에 오른 임금이 오랑캐의 수장에게 머리를 숙인 사건을 충격을 피하지 못할 일이었다. 시대적인 흐름을 보지 못하여 명으로부터 인조반정을 인정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변란으로 간주된 것은 큰 오명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실리나 정도보단 이름이나 명분에 집착하던 사대부들은 병자호란의 패배와 명나라의 수복불가능에서 청국이 명국의 모든 것을 대체하면서 자기논리에 대해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 청을 부정했으나 청이 명을 흡수하여 명의 문화조차 가지면서 명나라의 소산이 청국에게 맡겨지면서 자신들이 청국을 견제하기 위한 행동이 결국 청국이 어버이국가로 되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인조반정에 당위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날조로 광해군이 모문룡과 친하게 지냈다는 거짓말과 광해군이 실리외교를 추구한 것에 대한 문제점보단 폐비살제(廢妃殺弟)라는 명분만 내걸게 된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일구어 놓은 결과에 대해 부정하면서 광해군이 이룩한 업적 자체가 있었기에 자신들이 무사한 것을 알게 된 지식인들 사이에선 광해군이란 존재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전쟁의 패배는 수십만 명의 조선 백성들이 후금으로 끌려가고, 가는 도중에 살해당하거나 추위나 배고픔에 죽고, 또는 가서도 병으로 죽게 된다. 도망치다 걸리면 잡혀 죽고, 혹은 도망쳐도 이른바 환향여(還鄕女)가 화냥년이란 이름으로 창녀취급 당하는 것이다.

 

억지로 간 것도 모자라 집안에서 파문당한 여성들을 본다면 피해의 양상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컸다. 남성들은 그저 살해당하겠지만, 여성들은 강제로 겁탈당하거나 또는 후금에 끌려가서 장병들의 첩이 되어 고진 생활을 당하여야 했다. 원처가 있는 후금 집안에 갈 경우 원처가 조선여인에게 못된 짓을 하는데, 뜨거운 물을 얼굴에 뿌리는 행위 등 심하게 괴롭힌 점에서 홍타이지조차도 질투하는 아내에 대해서는 남편이 죽을 경우 같이 순장할 정도로 엄히 다루었다. 수십만 백성이 끌려가고, 그것도 모자라 왕의 아들부부 그리고 대신관료의 아들조차도 볼모로 끌려가면서 심한 고통을 겪는다.

 

명나라 토벌에서 조선인들을 징병할 때, 만약 전쟁의 결과가 용이하지 않으면 청국에 잡힌 세자에 대해 압박을 가했다. 그런다고 청나라와 명나라 전쟁에서 조선병사의 활약이 돋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도정벌 시에 청국은 조선병사의 사격기술을 인정했는데, 명나라 장수는 자기가 패배한 이유는 후금이 아니라 조선의 조총병사라고 힐책했다. 가도의 명나라 관리들이 가도인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 대해 심하게 착취하여 이에 대한 불만이 전쟁에서 보이게 되었다. 물론 명나라와 전쟁 중에 아버지국가라는 사상이 백성에게 뿌리박혀 일부 포수는 허공에 사격하거나 혹은 공포탄을 발사하여, 후금의 감독관들은 이들을 적발하여 처형했다.

 

후금에 의해 임금은 욕보이고, 임금의 모습에 실망한 사대부들은 왕을 무시하는 경우가 늘었으며, 아들들을 볼모로 보내지 않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며, 인조는 반청을 고집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준다. 광해군에 대한 반발심에 의해 일어난 인종반정에서 인조의 행동과 인조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보낸 신료들을 보면 그들의 관심사는 정치의 안정보다는 자신의 명분만 내세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집착의식은 후로 갈수록 강해지는데, 당시 광해군을 인정하지 못하는 명분은 영조시대까지 흘러가면서 인조반정이 변란이 아니라는 것으로 돌리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 조선을 보면서 명나라에 대한 충성과 그것에 대한 집착성에서 강희제는 당근과 채찍에서 조선이란 국가가 의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 덕분에 조선은 19세기 일본이 침공하고, 서양이 다가오고 있을 때 청국과의 외교정책만을 고수하려 했다. 사실 처음부터 우방은 없었고, 단지 우방을 가장한 적군 내지 동맹국만이 존재한 것이다.

 

 

□ 독서 이후 감상평

어리석은 사대주의 사상은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흘러올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과 미국에서 친미와 친일의 의미로서 외교적 방도라면 모르지만 친일파는 국가를 좀 먹게 하여 나라를 몰락하게 하였고, 친미파들은 본래 미국이 가진 정치적 가치보다는 그저 미국의 눈치만 보게 되었다. 외교에서 상대국과의 관계유지는 매우 중요하다. 전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의미가 없다. 우선 한국은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한 금속류의 광물이 없다는 점과 무기를 운영할 수 있는 석유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군대에서 비상용 내지 전투용 보급물품들은 분명 비치하고 있겠지만, 항공기와 해상운송이 계속 유지되지 않으면 힘들다는 점이고, 최근 전쟁무기는 한 번의 공격으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다는 점이다. 전쟁이 나게 되면 상대 국가만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국민조차도 적대감을 가질 수 있으며, 한국의 경우 대부분 남자들이 징병대상이므로 수많은 현역만이 아니라 예비역 내지 보충역, 민방위까지 전쟁의 희생양이 된다는 점이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나 국가비상 시에 동원령이 반포되면 국민은 더 이상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국가조직의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남자 대부분이 예비역으로 전쟁에 참전하면 대한민국 전체인구 1/4 이상 될 것이다. 결국 현재 안보상황이나 국가운영에서 외교적 실리를 명분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논리다. 전쟁에서 이기면 본전이고, 패배하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는 것이다.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에 북한 위의 중국은 우리의 무역 국가이면서도 한편으로 북한에 강한 압력을 불어넣는 국가이며, 일본은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자위대 군사력 합헌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미국과 서양국가의 우방적인 역할에서 무력충돌 내지 그 상황을 만드는 일은 오히려 우리에게 마이너스라는 점이다.

 

실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서 지금의 무력을 생각하면 양쪽 다 심한 피해를 받고, 어느 정부라도 그 명분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실각하게 될 것이다. 북한에서는 쿠데타 내지 혁명, 한국은 투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이란 책은 단순히 우리에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중원의 명과 청의 교체만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조선에서 어떤 외교정치를 보이고, 그 와중에 다른 국가와 어떤 외교행위를 했고, 그 다른 나라에서 어떤 상황이었냐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정치적인 결정이 국가 존망을 결정하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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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 - Novel Engine
무기상인 지음, hakusai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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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장르를 대해 생각하면,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의 박인하 교수가 학술논문으로 저술한 글이 생각난다. 마법소녀라는 존재는 어린 소녀가 현실에서는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나, 어떤 특이한 조건과 상황에 맞이하게 되면 마법이란 환상적인 힘으로 일상에서 보여줄 수 없었던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로 말하자면 현실의 여성은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비현실이란 환상적 공간에서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장소에서는 그런 논리는 통할 리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을 적들이 존재해야 한다. 마법소녀의 변신은 2가지로서 작용한다. 하나는 현실에서 여성은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에 결국 남성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고, 또 다른 특징은 마법소녀라는 존재로 통해 평소 자신에게 부여되지 않은 요소가 부여된다. 작은 소녀가 성숙한 여성의 몸을 가지게 되거나 혹은 의상이 아주 독특하여 남성으로 하여금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다. 흔한 클리셰 중에 하나가 여자 주인공이 마법소녀로 변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앞에 다가가면, 그 남자는 그 마법소녀에 대해 반한다는 점이다.

 

평소에는 서로 잘 지낼 수 없으며, 여자주인공은 멀리서 바라본다. 즉 변신이란 이름 아래 소녀는 소녀가 아니라 여성이란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그건 남성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1990년대까지의 마법소녀 장르를 살펴보면 대부분 이런 패턴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법소녀 역시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은근히 욕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에겐 순응적인 여성, 혹은 여성에겐 자신의 성적매력으로 통한 사회적 지위 향상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법소녀 이전의 평범한 소녀이던 여자주인공이 옛날 마법소녀 장르처럼 약하지 않고 오히려 강하다면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이번에 읽어본 라이트노벨인 <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는 기존의 마법소녀 장르를 새롭게 변모하여 나타났다. 물론 마법소녀 장르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 우선 작가인 무기상인부터 일본 만화애니메이션부터 라이트노벨까지 어느 정도 파고들어갔다는 점이다. 남자주인공인 유청명이 남자인데도, 마법소녀의 의상을 입어야 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좀비입니까?>라는 하렘 애니메이션이 생각났다.

 

마법소녀가 아니라 마장소년이 되어버린 좀비 소년은 자신의 주변에 괴기스러운 미소녀들이 찾아온다. 남자주인공이 좀비설정과 미소녀 괴물들이 모이면서 겉으론 괴기와 모험으로 가득하지만, 속은 여전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하는 남성이었다. 일단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멀리 내쫓고, 형제인 헤라와 결혼한 것도 모자라 수많은 여자들을 범한다. 단지 제우스는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면, 하렘계통 작품들은 주인공이 가만히 있어도 온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망각 속에 정신적 자위는 착각의 자유라는 말도 있겠으나, 결국 그런 작품으로 통해 읽혀지는 것은 한계성이 드러날 뿐이다. 어째든 그런 작품이라도 <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에서는 열심히 패러디로서 차용한다. 게다가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에 나오는 남매처럼 오빠는 늘 여동생에게 무시만 당하고, 심지어는 심한 꼴을 당하기도 한다. 게다가 같은 반에는 마이 페이스인 미소녀 세별이의 등장까지 말이다. 작품에서 원래 마법소녀로 등장하는 루다의 입을 빌리자면 주인공의 여동생인 유아영은 츤데레라고 한다. 겉으로 심하게 차갑게 굴지만 속은 엄청 부끄럽고 좋아한다고 말이다.

 

라이트노벨 표지에서 보다시피 아영이란 인물은 마법소녀의 의상을 입었지만, 뭔가 특이점을 볼 수 있다. 보통 트윈 테일이란 헤어스타일로 등장하는 마법소녀는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일단 주인공 캐릭터가 표지에 나왔으니 그 모습을 분석하면, 원 피스에 고등학생치고는 제법 큰 가슴의 위 부분이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어깨부위에서 손목까지 연결되는 상의, 그리고 무릎 위에까지 올라오는 부츠, 마법소녀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트윈 테일과 부츠 끝에 날개가 달려있다.

 

하지만 마법소녀에 가까운 복장보다는 오히려 총잡이인 건너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런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역시 왼손에 매그넘 모양의 권총이 잡혀있다. 최근에 들어 마법소녀의 무기는 상당히 변해온 것을 알 수 있다. 본래는 마법 봉이나 지팡이에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처럼 칼이나 창, 그리고 활을 사용하고, 심지어는 m-16이나 수류탄도 사용한다. 그런데 아영이는 권총을 들고 있고, 화가 나면 기관총을 들고 싸운다. 사실 총과 칼이 마법소녀 입장에서 중요한 위치가 있는 이유는 본래 칼이나 총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의미한다.

 

그러니깐 여자가 여자로서 그냥 있기보다는 여자가 남성으로서 있고자 하는 것이다. 성적인 요소로 들어가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르게 본다면 남성이 가진 권력을 이제 여성이 가지고 있겠다는 의미도 같을 것이다. 그런 요소는 작품 내에 다분한 모습을 보여준다. 원래 과거의 마법소녀들은 평상시에는 매우 귀엽고 순종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아영이는 순종적이거나 혹은 고분고분한 모습이 아니다. 나이 20세 이전까지 애인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뛰어난 외모인데도 남자축구모임에서 활약할 정도로 매우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다.

 

최근의 마법소녀 장르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구조는 달라도 신체적인 조건과 정신적인 조건 더불어 사회적인 조건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남성보다 더 우월하여 남성의 위에도 군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동생인 아영은 오빠인 청명보다 문무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인간관계도 좋다. 이에 반해 오빠인 청명은 2D 소녀에게 푹 빠진 오타쿠란 존재다. 물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등장한 오타쿠와는 조금 다른 개념일 것이다. 적어도 1982년의 오타쿠는 상대방을 가리키는 의미이나, 현재의 오타쿠는 청명처럼 인간실격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실제 아영은 오빠가 롤리타 콤플렉스라고 하면서 변태 취급을 한다. 게다가 오빠가 전혀 되면 안 될 마법소녀가 되면서부터 더 곤란해진다. 마법소녀 장르에서 남자에게 환상의 세계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금기였지만, 이제는 오히려 남자가 환상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오타쿠라는 존재도 있지만, 청명이가 2D 로리(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옆에 있던 아영이란 존재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가령 <가와이이 제국 일본>이란 책을 보면 가와이이라는 것은 단순히 귀엽다는 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다.

 

만일 여자가 아주 괜찮다면 남자들은 우츠쿠시(아름답다) 내지 키레이(예쁘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와이이는 단순히 귀엽다는 것을 넘어 자신의 손에 의해 지켜줄 수 있거나 혹은 소유하고픈 욕망이 드는 대상을 가리킨다. 아영이란 여동생은 이미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슈퍼우먼이었고, 이어 등장하는 7세 기계소녀인 여리 역시 강력한 힘을 가진 어린 소녀다. 도저히 청명에게 여동생이나 여리에게 가와이이 즉 귀엽다고 여길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안하고 잠을 자는 여리라면 모른다.

 

주변 동급생인 세별이의 경우, 그녀는 분명 외모도 출중하고 스타일도 좋으나, 마이 페이스에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보자면 <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에서는 평범한 사고방식을 지닌 등장인물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라이트노벨에서 특이한 인물을 내세우거나 혹은 특이한 상황을 설정해야 이야기가 흐르고, 재미를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왜 모든 사람들에게 특이한 속성과 일반적이지 못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청명이로 보는 세계관은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나 속으로 뭔가 자신의 취향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예전의 마법소녀 장르라면 대개 주인공은 옆에 좋은 친구나 다정한 부모님이랑 보내는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탈근대적인 현대사회에서는 인터넷의 발전과 개인 사생활의 중요성으로 가족과 학교라는 공간의 커뮤니티가 단절되기 시작했다. 주인공 역시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즐기고, 세별이는 인간형 인형을 고르는 것을 좋아하고, 아영이도 토끼 인형이나 곰 인형을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아영이의 팬티가 곰이 새겨진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여중생이나 여고생이 되지 않아 그런 말을 하기가 그렇지 않을까 하나, 적어도 그런 속옷은 사춘기 이후부터는 착용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특히 생식기가 도래하는 제2차 성징기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이 아직 어린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즉 몸은 점점 커지는 만큼 자신이 초등학생 같은 어린이로 취급당하기를 거부하는 점이다. 문제는 여동생은 고등학생이 된 점과 신체적으로 이미 거의 성숙한 점을 본다면 어린아이보단 오히려 어른에 가깝다. 오타쿠인 오빠와 달리 우등생인 그녀에게 탁월한 이성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곰이 새겨진 속옷을 입는 점은 아직까지 정신적으로 보자면 마음 속 깊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있다는 점이다.

 

평소 오빠를 두고 인간취급도 하지 않은 아영이가 은근히 어떤 상황에서 집착을 보이고, 때에 따라서는 매우 부끄러워한다. 별로 부끄러울 상황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세별이와 만남은 조금 의미가 있다. 둘 다 인형에 대하여 안목이 높다는 점과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콜렉터라는 점이다. 또 그게 서로간의 인격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특히 아영이의 경우, 그녀는 분명히 마법소녀지만, 기존의 마법소녀는 어린 소녀가 어른여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그녀는 반대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리가 적에서 어느 순간 적이 아니게 될 때의 모습이다.

 

여리에게 옷을 입히는 아영은 마치 여리를 인간이기보단 살아있는 인형으로서 옷을 입히는 모습이었다. 즉 자신이 인형을 제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어도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 없었으며, 대신 자신이 인형 같이 꾸미고 싶어도 꾸밀 수 없기에 여리로서 욕망을 대체한 것이다. 이와 다르게 세별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형이 여자형인데도 남자라고 한다. 인형이란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소유물처럼 집착한다. 이쁜 것은 남자인형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주변에 있는 동급생 여자보단 자신의 소꿉친구인 청명이가 더 소중하고, 청명에 대한 소유욕이 인형으로 대체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법소녀의 욕망이 아직 어린 여자아이가 어른이 가질 수 있는 특권에 대한 동경이라면, 여기서는 마법소녀들로 통해 욕망이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시작되지 않은가 싶다. 청명이는 2D라고 하나 결국 어린소녀를 원하고, 다 큰 아영은 아직까지 곰이 새겨진 속옷을 입고 다닌다. 두 남매가 지금은 서로 원수처럼 지내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예전처럼 잘 지내고 싶다는 게 드러날 뿐이다.

 

또한 마법소녀 하면 선과 악의 이분법이 중요한 플롯인데, 여기서는 그 플롯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선의 사도여야 할 루다는 의무감도 없고, 악의 존재인 여리를 가지고 노는 모습만 나온다. 아니 오히려 여리가 아영과 청명을 위기에 빠지게 하자, 여리를 공격 후에 치료까지 해준다. 악의 역할로서 여리가 등장해도 여리는 자신의 의지로서 악의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니라 로이드라는 자에 의해 억지로 인스톨이 되었기 때문이란 점이다. 게다가 루다는 마법소녀이면서도 청명에게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그저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여준다.

 

적과 아군이 원래 그래야 하는 이분법적인 요소는 해체되어 버렸다. 최근에 들어와 많은 작품들에서 이분법적인 요소가 해체된 만큼 마법소녀 장르 역시 해체되는 형태를 보여준다. 정의라는 절대적 가치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절대적이지 못하거나 그게 더 가치로서의 존립하기가 어려워진 셈이다. 게다가 마법소녀가 소녀의 것이 아니라 소년에게도 부여되었다. 그러면서 루다는 이렇게 말한다는 마법소녀는 소녀이든 소년이든 중요하지 않아 라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겠지만, 작가가 받아들이는 세계에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청명과 아영을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이것을 본 우리는 남자가 불행해서 세상이 불행질 것이라 보지만, 중요한 것은 남자가 불행해도 여자가 불행해지고, 여자가 불행지면 남자도 불행해진다. 남자주인공의 불행이 결국 여동생의 불행이 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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