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루소를 읽는다 - 자유와 평등, 다시 시대의 광장에 서다
김기의 지음 / 다른세상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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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루소를 읽는다>를 읽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루소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연구하고 생각할 것들이 많은지 생각하게 해준다. 물론 이 서적을 집필한 작가도 그렇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루소가 제시한 그 사상이 정말 옳았다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루소는 기독교를 믿었지만, 기독교 안에서 세상을 보지 않았다.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 반계몽주의자였으며, 자연주의자였다. 오히려 신이란 이름 아래 자행되던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기보단 그 민중의 고통을 같이 짊어지려 했다.

 

그래서 그는 광인이 되어야 했고, 불안감에 미쳐 의심병에 걸려야 했다. 루소가 그런 힘든 상황에서 잃지 않은 것은 당시 도시 빈민과 시골의 농민에 대한 인간애였다. 그의 인간애적인 모습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볼 수 있다. 이성과 문명이 인간에게 유익한 존재인지 혹은 아닌지를 밝히는 연구에서 루소는 오히려 학문과 예술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이 핍박받고 배고픔에 허덕인다고 했다. 지금처럼 예술이 누구나 혼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당시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들은 자신들의 위용과 업적을 남기기 위해 막대한 예산과 물자를 낭비해야 했다.

 

그 낭비는 단순히 가지고 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향수 하나를 생산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했고, 치장하기 만든 가발에는 많은 식재료가 필요했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어보면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루소가 바라보던 농민의 힘든 삶에서 그의 인간애적인 정신을 볼 수 있었다. 처음 그가 파리에 입성할 때 파리는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빈민, 거지, 창녀, 도둑, 병자로 가득한 곳이었다. 모두 가난에 의해 내몰린 자였고, 누구 나하나 그들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려 했다. 루소와 더불어 당대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와 디드로 역시 그러했다. 오로지 루소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했다. 예전에 <에밀>을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나는 루소를 읽는다>에서 정말 놀라운 문구를 발견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고,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회에 살고 있다. 죄지은 사람은 목매달아 죽을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자들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작가도 그렇지만 나도 전에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장발장이란 이름의 사나이는 오로지 집에서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조카를 위해 빵 하나를 훔쳤다. 그 죄로 그는 오랜 시간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했고, 그의 조카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추후에 장발장이 감옥에서 나와 신분을 속이고 살아갈 때 판틴의 딸인 코제트를 거둘 때, 코제트의 생활은 어느 사기꾼 여관 주인집에서 제대로 된 인간대우를 받지 못했다. 추운 날에 먼 거리까지 물을 길러야 했으며,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이런 비참한 생활을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또는 범죄를 저지를 것인가? 하지만 범죄자의 말로는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는 몸을 팔아야 하고, 남자는 몸을 버려야 했다. 오늘 날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최근에 개봉되었던 영화 <레미제라블>은 영국에서 만든 뮤지컬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 영화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먹을 식량이 없어서 걱정하고, 공장에서 감시원들의 부당한 행위에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버려진 고아, 이런 모습은 루소가 프랑스 파리에서 보던 그 장면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하지만 도처에 사슬로 묶인 것처럼, 그 사슬이란 고리는 바로 인간의 가난과 굶주림이었다. 루소가 가진 인류애적인 가치는 “아름다움을 사람의 행동으로 구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라는 말처럼 루소는 인간 스스로 인간성을 찾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루이왕정 시기에 핍박받았으며, 수구세력에 의해 그의 사상은 무참히 짓밟혔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은 논란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루소의 사상이 되돌아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사상이 18세기 낭만주의, 19세기 관념철학과 마르크스주의, 20세기의 다양한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유명한 학자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란 서적을 보았다. 거기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면서 더 이상 자연을 착취하지 못하게 되면 인간을 착취하게 된다. 문명이란 세계는 자연에 대하여 인간의 노동력으로 변화하여 만든 장소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문명의 역사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고대에서는 지식을 이용한 치수관리와 화술, 고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물리적인 폭력과 무력을 이용한 계급, 현대는 자본이란 이름의 경제로 이어진다.

 

계속되는 인간의 억압과 고통에 대해 루소는 그 굴레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마르크스보다 100년 전부터 그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게다가 실존주의적으로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한 존재성까지 고민한 그에게 오히려 학문에 대해 파고가면 갈수록 루소의 영향은 막대했다. 루소가 그렇게 원한 것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었다. 민주주의 역사에서 루소는 “누구도 자기를 팔 만큼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기의 몸을 파는 여자만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 파는 인간들도 존재한다.

 

또한 산업화의 가속화로 도시는 계속 인구가 모여들고, 시골은 황폐해지며, 소득의 불평등은 이제 인구까지 감소하고 있다. 현재 부부 2인당 출생되는 자녀수는 1.2명, 여기에 사회는 점차 노령화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국방군사력 기본이 되는 젊은 남성 수가 감소하여 비상 시 국가존립조차 위협이 되고 있다. 인구가 줄면 당연히 기업이 생산되는 상품을 소비가 축소되고, 기업의 생산력이 감소되면 그 나라의 경제가 위태롭다. 우리는 매일처럼 정치권에서 경제문제를 두고 이슈로 삼지만, 그 경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참 어리석게 보인다. 인간이 경제위에 있는지 아니면 그 아래에 있는지 구분조차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구의 감소는 인간이 계속 그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재생산되어야 하겠지만, 그 생산에 의한 2차적 생산이 부족한 이유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남성, 중앙과 지방의 경계선상에서 경제력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태어날 2세의 인생에 미친다. 교육비용의 증가, 생활에 불충분한 급여는 점차 국민생활의 질을 떨어뜨리며, 그것이 결국 인구감소로 이어진다.

 

경제를 살린다고 하여 민생이 사는 것이 아니라 민생이 살아야 경제가 일어나는 것을 그들을 모르고 있을까? 루소는 진짜 필요한 것에 대해 너무 가치가 낮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했다. 가령 우리 인간은 의식주에서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농촌과 바다에서 나오는 식량이 없다면 우리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허나 현재 우리는 식량의존국이 되었고, 농촌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노고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모든 농민이 해당되지 않으나 적어도 쌀과 같은 식재료는 우리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또한 인간에게 식량만큼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과 인간이 존재하기에 사회라는 공간도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이 가장 필요하기에 인간이 가장 하등하게 취급당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물을 싫어하거나 학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무한한 애정을 바라면서 타인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게 여긴다. 애완동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바로 자신의 인간성을 보여주듯이 행동하는 그들의 가식과 협소한 생각이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어느 인간이 애완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기도 하는가? 물론 대다수의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해 타인을 위해주는 것보다 그저 애완동물로부터 애정을 받으려하는 인간을 두고 어떤 생각이 들까?

 

억지로 동물을 키워, 그들의 성기를 자르고, 혹은 강제로 수정하는 것이 동물에 대한 사랑인가?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의 주인이란 오류와 심지어 인간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어리석음에 계속 시련은 되풀이 된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자연적인 것을 파괴하고, 거기에 자신의 이기심의 공화국을 만든다. <나는 루소를 읽는다>에서 비판한 것처럼 4대강 공사처럼 아무런 효과도 없이 그저 국가의 세금을 낭비하여 어느 특정인에게 이익이 가게 한 일을 보며,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가 되지 않은 것이 참 안타깝게 여겼다.

 

이미 도시사회생활에 익숙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나, 그 공간에서도 자연의 세계를 보호하고 가꾸며, 아름다운 것들을 보존해야 하나, 이 모든 것이 돈으로 볼 뿐이다. 그래서인가? 예전에 잘 살아보세 라고 외치며, 강과 개울을 콘크리트로 바르더니 강물의 수질이 악화되고, 인간이 마셔야 할 물도 오염되어 식수걱정을 하게 되었다. 잠시 이익을 보려던 것이 오히려 그것을 원상 복구하는 것으로 몇 십 배에 가까운 예산을 소모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하는 일이 모르겠다.

 

오로지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고, 그 이기심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이끌려 새로운 사슬의 고리가 되는 우리들의 현실에서 우리의 마음은 병이 든다. 인간성의 형성에서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 우리의 교육은 인간이 한 사람의 존재로 만들기보단 그저 기존의 사슬에 적합한 인간만을 만든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자신 내지 그 단체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희생조차 마음의 양심조차 느끼지 못한다. 최근 육군28사단에서 벌어진 구타사건이나 혹은 다른 군부대에서 일어난 자살사고나 총기사고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은 병폐에 빠졌는지 알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평등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나, 도리어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게 된 것이다. 그 억압하던 자도 분명히 타인이나 혹은 어느 사회에서 억압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받은 고통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보상심리는 정말 최악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사회현상이다. 왜 그럴까?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루소가 말한 것처럼 오직 자연적인 인간이고, 그 자연에서 인간의 영혼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파도가 치는 바다나, 혹은 넓고 푸른 하늘, 시원한 강줄기가 흐르는 하천, 바람이 부는 넓은 평야에서 인간은 그저 자연의 하나가 된다. 모든 것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서도 그들이 맑은 땅과 물을 지키려한 것은 단순히 도시사람들의 건강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갉아먹는 도시의 척박함에서 영혼을 다시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자연에 대한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의 문장이 거대한 강줄기처럼 굽이치는 이유는 자연에 대한 겸손함이다.

 

인간 역시 그 자연적 존재로 본다면 서로 다를 것도 없으나, 계속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하나라도 더 빼앗기 위해 살아간다. 강자의 논리로 하나의 정의를 만드는 것은 고대 노예를 만들고 착취하던 자들의 부조리한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루소는 “힘을 정당성으로 만드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바꾼 것이다.”라고 한다.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사회계약론>처럼 인간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에 대한 권리로부터 시작이다. 나의 자유가 소중하면 타인의 자유가 소중하고,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평등이 필요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공적재산의 영역으로 보겠지만, 최소한 존 롤즈라는 정치철학자는 알고 있었다. 정치적 자유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소수혜자가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인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정치적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참여자가 판단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고, 그것은 교육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인 성공은 교육에 의해 결정되고, 그 교육은 기회의 균등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공적교육이 무너진 이상 경제적 조건이 없는 자에겐 오직 같은 운명을 되풀이된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 것이다.

 

루소는 인간의 교육을 인간 스스로 살아가고, 자연에 대해 같이 살아가게 함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이 되는 과정이기를 원했다. 인간이 도구로 되는 것은 결국 인간이 감옥과 같은 학교에서 감시와 처벌로 통해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제 아무리 좋은 대학과 좋은 일자리,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이라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패륜을 저지르고, 또한 자기인생에 대한 허무함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비정규직과 실직자 같은 사람들은 더욱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멀어진 세모녀의 자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삭막한지 잘 보여주는 단적이 예다. 그러나 우리는 브레이크가 없는 벤츠처럼 계속 어둠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자신들은 벤츠에 타고 싶어 하나, 막상 그들은 벤츠 타이어가 밟고 지나가는 아스팔트에 불과한데 말이다. 벤츠를 타고 그저 어디에 추락하든지 또는 충돌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차를 타거나 먼 길을 걸어가는 다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눈앞에 있는 위기와 고통을 잠시 잊는 힐링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대안이 필요하다.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여 현실은 바뀌거나 나아지지 않는다. 개인의 성향과 개성에 의해 개인적 삶은 바꿀 수 없으나, 그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의 삶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개인의 문제는 개인으로서 끝이 나지만, 사회의 문제는 각자의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안 일어날 것이란 믿음과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현실에서 언젠가 그 칼날은 자신의 목을 향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이것을 망각하기에 계속 비극은 되풀이고 매일 새로운 소극이 탄생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理性)을 가진 존재이나, 인간의 이성 내에 윤리가 없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기심(利己心)이고, 인간은 감정(感情)을 가졌다고 하나 거기에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정(無情)한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개인보다 더 못한 야만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개인들은 자신들의 먹고 자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 이상 문제를 삼지 않지만, 문명과 미개의 중간단계인 야만은 자신의 배가 부르고 잠을 충분히 자더라도 멈추지 않고 약탈과 착취는 반복한다. 진심으로 문명인 혹은 이성적 인간이라면 타인을 공격하거나 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루소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배운 가르침에서 "의무와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 타인의 불행 속에서 자기 이익을 찾는 일은 피해야 한다."라고 했다. 타인의 불행에 빠뜨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경제적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현실은 마치 야만의 사회처럼 보인다. 그 야만적인 공간에서 루소가 제시하는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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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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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라는 인물은 독일 근대문학의 거두를 지나 독일 그 자체를 나타내어주는 대문호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독일이란 국가는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국가에 비해 언어적 표현력이 떨어지는 국가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언어는 마치 산 위에서 흐르는 강물이 계곡을 따라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강물은 거대한 하천이 되어 바다와 마주하는 연안과 같은 느낌이다. 거대한 물결이 강물을 타고 밑으로 내려오고, 그 강물을 받은 바다는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거대한 파도가 반대로 올라가 주변에 있는 모든 땅을 삼킬 것 같은 기복이 찾아온다.

 

괴테라는 대문호의 글이 이렇게 아름답고 가슴이 뛰며, 그의 글을 정체되어 있지만, 그의 글을 읽는 나의 머릿속에는 큰 영상이 올라온다. 일단 출판사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괴테는 Strum und Drang라는 질풍노도 문학운동의 중심지였다. 그의 글은 낭만주의이었고, 계몽사상과는 전혀 다른 글이었다. 괴테가 논하길 볼테르로서 한 시대는 끝이 나고, 루소로서 새로운 세대를 맞이한 것처럼, 괴테는 자신의 손에는 셰익스피어를 그리고 영혼 속에서는 루소가 있었다. 낭만주의 운동이 시작되던 19세기의 유럽에서 루소의 사상이 문학적으로 움을 튼 것이었다.

 

그런 낭만주의적인 글이었는지, 또는 괴테가 루소를 무척이나 동경했는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순간 루소가 생각났다. 처음 베르테르가 주무관 집에 방문하였는데, 그 집안은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서 제일 큰 딸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동생의 수는 여덟 혹은 아홉 정도 보였다. 그 귀엽고 천사 같은 아이들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로테 옆에 앉아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에서 루소가 우드토 백작부인에게 열광하여 그것에 대한 사랑과 좌절로 인해 <신 엘로이즈>를 만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이 아름다운 마음과 열정적인 감정과 그리고 숭고한 이상을 가진 베르테르는 안타깝게도 로테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사모했고 존경했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작품은 괴테가 아마 2번의 사랑에 실패한 이력이 있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베르테르가 가장 처음 사랑한 여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으나, 병으로 일찍 죽게 되었는데, 그것은 괴테가 처음 약혼한 여성과 약혼이 파혼되어서 그런 감정을 어쩔 수 없이 베르테르가 땅 속 깊이 사랑하던 여인의 관을 묻은 것 같은 것이다.

 

로테와의 사랑은 해설서에 나온 것처럼 2번째로 사랑하게 된 여인이 자신과 알고 지낸 남자의 약혼녀라는 점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에게 슬픔과 절망 그리고 죽음을 이르게 할 수밖에 없었던 로테, 사실 괴테가 2번째로 사랑한 여인의 이름은 샤를 로테 부프라는 점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히로인의 이름은 곧 괴테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자신의 슬픔으로 인해 자살을 택한 것이고, 괴테는 마음을 죽인 것이다. 서양사상에서 기본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된 것이란 이분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인간의 육체나 영혼이나 서로 다름없다는 점에서 육체적 베르테르의 죽음은 정신적 괴테의 죽음을 승화시킨 것이었다.

 

낭만주의 문학으로서 괴테가 선보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삶과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면, 사랑을 위해서라면 또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바칠 수 있는 열정과 도취가 숨을 쉬고 있던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는 1774년에 출시된 점을 보면, 아직까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계몽주의라는 이성적 인간과 그에 반대되는 반계몽주의 또는 낭만주의는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과 감정 앞에서 무엇이 우선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괴테의 작품의 낭만주의는 루소의 <에밀>에서 표현한 것처럼, 베르테르가 로테가 살고 있는 지역에 이사를 오면서부터다. 베르테르는 로테의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순수함과 솔직한 모습을 두고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로테가 정말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그 순수하고 선한 아이들이 로테의 손에서 자애롭게 성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형제들과 서로 장난치고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베르테르는 매우 기쁜 표정을 짓는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로서 보여주는 것이 자연적이고 당연하다는 것이다.

 

베르테르는 매우 열정적이고 감정이 풍부한 청년이다. 그는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흠뻑 취하기도 하고, 마을에 처음에 올 때 마을 어린아이에게 매우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베르테르는 높은 귀족집안의 아들은 아니지만, 집안 자체가 일반 농민보다 신분이 높았기에 베르테르를 처음 본 아이들은 두려워하거나 경계했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진심을 알자, 어린 아이들은 모두 베르테르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또한 베르테르는 마을 우물가에 어떤 처녀가 물을 기르러 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물통을 들고 갈 수 있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마을처녀는 베르테르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이란 점을 알고 있었으나, 베르테르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을처녀는 베르테르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베르테르의 그 자연적인 감정이란 바로 단순히 괴테가 베르테르로 통해 위험하고 허무하며, 애타는 사랑만 적은 것이 아니었다. 소설 내에서는 순간적으로 베르테르로 보는 당시 사회상을 비판하고 있었다. 베르테르가 사랑하던 로테는 사실 이미 알베르트라는 혼약자가 있었고, 베르테르는 로테를 너무 사랑하기에 잠시 그 마을에서 잠시 떠난다. 그리고 베르테르는 공사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우연히 백작을 알게 된다. 그 백작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으나 아주 쾌활한 사람이고, 베르테르와 마음이 맞았다. 또한 베르테르는 그곳에서 어떤 아름다운 여인 B를 만났는데, 그 B양은 마치 로테와 같이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그리고 우아한 마음까지 가졌기에 베르테르는 B양과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베르테르는 자신과 친한 공작과 같이 무도회에 갔으나, B양은 베르테를 보고도 안절부절 못한 채 떨고 있었고, 백작도 난처한 표정을 지은 후에 베르테르에게 미안하다면 무도장에서 집으로 가길 부탁했다. 그 이유는 당시 공작이 살던 사회는 귀족들의 상류계급 문화가 존재했고, 베르테르는 그곳에 합당하지 못하여 배척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베르테르는 거기서 나온 것이 홀가분했고, 그런 사람들이랑 있는 것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좋았다. 하지만 B양의 불친절함에는 마음이 아팠다. 그 이유는 B양은 원래 귀족집안의 후예고, B양과 같이 사는 숙모는 그런 베르테르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다.

 

결국 베르테르로 보는 귀족사회에 대해 그들이 무능하거나 재력이 없거나 또는 교양이 없어도 단지 귀족의 이름을 달고 있으면 그것에 안주하여 교만 방자한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인간 간의 평등이 되지 않았지만, 평등해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베르테르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바로 인간의 평등을 말이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고,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 역시 좋은 사람인 것을 알고 좋은 친구로 여긴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무척이나 이성적인 인물이고, 베르테르는 이성적 지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이성보다 자연적인 인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어떻게 보자면 알베르트는 기존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나 디드로 같은 인물이고, 베르테르는 루소와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볼테르는 프랑스대혁명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는 사실 민중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왕정만 비판할 뿐 그 외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프랑스 정치권력에 대한 문제점을 말하지, 그 이상의 문제를 고민하거나 대안을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이성적인 지배에서 권력은 지식을 동반하고 지식은 권력을 생산하므로 지식이 없는 평민들에게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알베르트와 베르테르의 말싸움에서 베르테르는 인간의 감정에 의한 극단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베르테르의 말에서 “절도는 물론 죄악입니다. 그러나 굶어 죽으려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의 물건을 훔쳤다면 우리는 그를 동정해야 하나요, 벌을 주어야 하나요? 놀아낸 아내와 그 원수 같은 유혹자를 격분한 나머지 죽인 한 남편에게 누가 맨 처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도취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몸을 맡긴 처녀에게 누가 맨 먼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냉혹하기 짝이 없는 법률이라는 이름의 계측기일지라도 필시 감동되어 그에 대한 형벌을 보류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인간이 순간적으로 저지른 죄악이 단순히 자신의 욕심보단 정열에 의해 몸을 던지 인간을 나쁘다고 볼 수 있는가 이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그런 사람을 두고 미쳤거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자살에 대해서는 위대한 행위에 비교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오히려 나약한 인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지지 않고 대답한다. “당신은 그걸 나약함이라고 말하는 거요? 표면만을 보고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오. 폭군의 압제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드디어 궐기하여 그 사슬을 끊어버릴 경우, 당신은 그들을 감히 약자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무거운 짐짝을 척척 운반하는 사람이나, 남에게 모욕을 당하여 분통이 터지 나머지 여섯 명이나 상대해서 보기 좋게 때려 눕히는 사람을 약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봐요 인간의 노력이 힘이라면 어찌하여 이러한 극도의 긴장이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거요?”

 

베르테르는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물결에 움직인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움직이기에 자신을 위해 혹은 남을 위해 싸우고, 특히나 폭군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의 궐기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 맨 첫 장에 나오는 문구가 생각난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

 

괴테의 마음 즉 영혼에 루소가 숨 쉬는 이유는 바로 저런 계몽주의와 반계몽주의적 성향이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열정적인 사나이고, 자연을 사랑하고 찬양하던 시인이다. 그런 시인인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는 강렬하고 아름답고, 보는 내내 마음이 여기저기 움직이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나오는 문체는 아직까지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하지만 현대에서 말하는 낭만과 낭만주의의 낭만은 다르다. 그 시대의 낭만은 자신의 진실을 몸과 마음으로 다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굳은 결심이다. 그러나 지금의 낭만은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 TV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를 위해 비싼 차를 끌고 와서 성대한 이벤트는 그의 노력이 아니라 그의 자본력에 의해 움직인 것이다.

 

진정한 낭만주의는 베르테르처럼 자연을 찬양하고, 시를 열정적으로 부를 수 있으며, 거짓 없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우리는 진정 베르테르처럼 한 여자를 사랑하고, 혹은 여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베르테르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고, 그의 죽음이 애절한 것은 베르테르의 하인이 보여주던 행동이었다. 주인인 베르테르는 죽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한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듯이 그저 여행을 가기 위한 나그네처럼 말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추억이 있는 곳에 발길을 옮기고, 자신에게 소중한 장소에도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12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갖다 댄다.

 

아침에 일어난 하인은 죽어가는 베르테르를 보자 부둥켜 않고, 알베르트와 로테의 집에 찾아가 통곡을 하면서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베르테르는 하인과 사용인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준 것을 소설 내에서 알 수 있으며, 자기가 죽기 전에 가난한 사람에게 얼마의 돈을 주기도 했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 달리 이성적이지 않지만, 인간을 사랑하던 낭만적인 인물이다. 그런 베르테르이기에 로테라는 여성에 대해 열정적으로 사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보면 베르테르는 미래인에게 가까운 유형이었다. 계급과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과 서로 친분을 나누고, 비록 약혼했지만, 로테가 진심으로 베르테르를 사랑했었고, 용기가 더 있다면 알베르트의 약혼을 파기하고 베르테르와 같이 사랑할 선택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나는 광기에 젖은 베르테르가 사랑해서는 안 될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세상에 살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슬픔은 겉으로 보자면 로테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격렬한 키스를 나누려했지만, 그마저 무산되어 다시는 로테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슬픈 각오에서 베르테르는 시대적 벽에 갇혀 절망한 것이다. 베르테르는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자신의 어머니와 로테의 어머니는 베르테르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고, 자신은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로테와의 재회를 기대한다. 그리고 기꺼이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격발한다.

 

아름다운 낭만주의 소설은 누구나 보면 마음이 두근두근하고 설레겠지만, 누구나 그것을 실천할 각오는 없다. 그래서 낭만주의 문학과 미술, 그리고 그 낭만주의적 이상을 향하던 사람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엄청난 고통과 눈물이 있었기에 위대한 것이었다. 알베르트에게 격정적인 감정으로 인한 죽음, 그것은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니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낭만주의 화풍이 강력한 이 그림에선 민중이 봉기하여 자유와 평등을 향하여 전진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있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외침은 보는 내내 내 귀에 들린다. 그 그림에서 여신의 뒤에서 권총을 들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베르테르가 선택한 것은 자연적인 인간이고, 알베르트가 선택한 것은 이성적 인간이다. 인간의 본연의 자리를 찾지 못해 죽음을 선택한 베르테르, 그의 죽음이 비극적이기에 낭만적이고 더 아름다워 보인다. 왜냐하면 베르테르의 사랑이란 자연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을 사랑하기 원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서평을 적고 있을 때 영화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s를 들어서인지 마음에서 격동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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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 (특별한정판) - 요희전기 2, Novel Engine
크레파스 지음, Mx2J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은 <달의 공주와 죽지 않는 병기>를 이은 요희전기다. 일단 이 작품을 보면서 생각하지만 작가인 크레파스라는 인물은 동양철학에 깊은 조예가 있다는 점과 그가 적은 글을 본다면 깊은 조예성과 더불어 부실한 요소도 같이 있다는 점이다. 즉 라이트노벨이란 특성이 경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문자적 서사를 가지고 있기에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문자서사에 만화나 애니메이션 포스터와 같은 일러스트를 첨부함으로써 라이트노벨이 만화와 같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라이트노벨의 주요 특성 중에서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은 설정이 미소녀 하렘이란 Cliche이다. 주인공 남자 주변에 많은 여자가 존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많은 여자들이 그에 대한 애정공세를 멈추지 않는 것은 내키지 않다. 왜냐하면 문학의 시작점은 바로 신화라는 것이다. 신화(神話)란 신이란 존재를 내세우나, 그것은 정말 신이 아니라 인간의 무의식적인 요소에 잠재된 욕망 내지 억압심리로부터 탄생한 캐릭터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만큼 좋은 현대적 신화는 없다. 그 캐릭터는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나 남이 하고픈 이야기를 대신 해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만들어진 이야기이므로 누군가 거기에 자신 내지 혹은 남의 이야기를 끼워 넣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만든 이야기가 자신의 욕망과 억압에 비롯된 하나의 왜곡이라면, 그 왜곡되어버린 이야기가 타인도 역시 같이 빠져갈 수 있다. 그래서 미소녀 하렘 계통을 좋아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자기 현실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갇혀 자위하는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다고 이런 장르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방식이 하나의 대세라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점이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되고, 너무 부족하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적당한 선에서 여러 가지의 종류가 다양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이야 말로 문화콘텐츠로서 라이트노벨 장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작품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렘 요소 내지 또는 미소녀 캐릭터와 이벤트적인 요소에서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은 조금 지나쳤다고 할까? 아니라면 부드럽게 이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흔히 성적 묘사에 대해 논하자면 문학에서도 충분히 그런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문자서사가 영상서사로 변모될 때 문자서사 안에 있는 베드신 내지 성적으로 강렬한 모습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가령 볼테르의 <캉디드>에서 캉디드가 사모했던 퀴네공드 양은 아직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나 그녀는 무척 순진했다. 하지만 캉디드의 스승인 팡글로세가 퀴네공드 가문의 하녀와 성행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따라하고 싶어 캉디드와 성행위를 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쫓겨나는 장면이 나온다. 혹은 20세기 대표적인 소설가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자신의 여자 친구와 성행위를 나누는 모습이 소설에서 나온다. 그러니깐 단순히 라이트노벨이나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이 선정적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인류가 만들어온 많은 문학에서 성적행위나 묘사 등은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 단지 문학에서 그런다고 해도 문학과 만화적 속성이 섞여 있는 라이트노벨이란 특성이 그런 성적 묘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듯하다. 불의 공주라고 불리는 국가 화선의 공주, 유하는 자신이 화선의 황녀이면서도 화선을 떠난 이유는 권력다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용병단은 화선에게 고용되었으며, 그 용병단은 월하라는 국가의 1번째 공주인 월영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2번째 공주인 월린이 황녀의 자리를 물러받아 레지스탕스와 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유하와 월린의 만남은 서로 적이면서 어떻게 보면 같이 운명을 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유하가 월하의 국가를 구해주는 대신 월린은 유하의 하녀가 되어야 했다. 유하는 기가 세고 똑똑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이나, 그 성격에는 지나치도록 심각한 편집증적인 정신병이 보였다. 유하는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것도 알고 있으며, 자신의 가족들이 언제나 피로 물든 권력다툼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 만큼 유하의 삐뚤어진 성격은 월린에게 대하는 모습에서 나온다. 자신의 손가락 하나 내지 혹은 두 개를 월린의 입에 넣는다는 점이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 월린이 유하의 손가락이 들어오고 나서 뺀 후의 장면이 책 중간 흑백 일러스트로 나오는데, 그 모습은 마치 여자와 남자가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게다가 월하는 자신의 큰 가슴 위에 자신의 두 손목을 올리고 있을 정도였다. 노골적인 성적묘사가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의 가장 큰 오류이지 않나 싶다. 적어도 이 책은 19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서사적인 흐름을 읽고 세계관과 인물에 대한 갈등과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리뷰의 목적이기도 하나, 적어도 리뷰 한다는 것은 비평적 관점을 배제해서는 안 되므로 이런 문제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표지나 일러스트가 다소 여성의 성적인 요소를 부각하여 모에속성을 노리는 것을 두고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책 내용에서 그런 노골적인 요소는 좋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Critical한 비평은 독자로서 분명히 생각하고 판단하여 반응해줘야 할 의무인 것 같다. 어째든 책의 내용을 읽어보자면, 이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우선 월하의 국가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갈 것은 없다. 단지 그들은 위기에 처한 국가이고, 월하의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 상징성인 월린이 어떤 운명을 겪을지 모르는 작품이다. 월린이 죽거나 또는 유하가 죽거나 혹은 흑록이 죽게 되면 이 작품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다. 그들이 끝까지 생존하여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스토리텔링의 맛이다. 적어도 이제 주요 인물들이 모였다면, 다른 식으로 보자면 진정한 적과 그 적에 대항할 수 있는 연합세력 및 지원군이 나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향이란 나라의 공주인 수희가 등장한다. 만약 요희전기가 국가별로 공주의 존재를 두고 작품시리즈를 붙인다면 다음 작품은 물의 공주라고 말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혹은 부록에 나오는 화율의 어머니의 고향은 화령이듯이 꽃의 공주로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공주 내지 황녀라는 인물을 달, 불, 꽃, 물로 통해 나가는 것은 각 나라마다 존재하는 속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불을 상징하는 화선은 강력한 무력, 달을 상징하는 월하는 신비한 존재(신선), 꽃은 아름다운 자연, 물은 풍요로운 국가로서 말이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은 그 풍요로운 경제대국인 물의 국가 수향의 공주가 나온다. 그녀는 화선에 의해 고국은 멸망했어도, 수향의 상징성이란 수희로서 존재한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는 강력한 화선을 대응하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필요하고, 그 군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사람은 수향이란 국가였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법처럼 수향의 군주인 수희를 만나는 것은 화선의 책략이 존재했으며, 유하의 최대의 라이벌인 태화가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유하가 어떻게 하여 화선의 황궁에서 나왔는지에 대해 상세히 나오지 않으나, 단편집인 <작열 & 유하등>을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화율의 어머니인 화이는 산 채로 아궁이로 버려져 백골이 보일 정도로 타버렸고, 화율은 유하와 같이 여행 가려는 도중 유하의 수석 호위관의 책략에 의해 죽게 된다. 수석 호위관은 화이의 죽음으로 화이를 존경하거나 사모하거나 또는 측은하게 여기는 이들이 언젠가 문제를 일으킬 것을 알고, 화율을 꾀어내어 모두 섬멸한다. 그런 수석 호위관의 책략도 모른 채 자신의 배 다른 동생인 화율의 죽음을 모르는 유하는 돌아가면 화율에게 과자라도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하에게 과자를 사주고 싶은 배 다른 동생은 사라지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잔인한 권력다툼의 상처뿐이었다.

 

황궁을 나온 황녀, 그녀가 선택한 용병생활에서 자신을 숨길 수밖에 없는 유하는 그 누구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흑록에게 말이다. 흑록에게 집착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흑록은 단지 죽을 곳은 찾고 있었다. 삶의 미학을 알지 못하는 흑록, 그는 누군가를 믿지 못하고, 누군가를 믿는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으며, 남에 의해 배신당하여 상처받는 것조차도 두려워했다. 철저히 자신의 마음에 벽을 쌓는 흑록에게 유하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대화나 상황설정은 매우 좋았다고 보았다. 유하가 명령을 내릴 적에 직접 흑록이 아니라 월린으로 통해 내린 점에서 말이다.

 

만약 단순히 흑록과 명령을 내리는 것과 작전을 위해 대화하는 사이가 되어버린다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사이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월린이 중간에서 중재하던 모습에서 이 작품은 1권에서 삼각관계적인 요소에서 월린이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3권에서 어떻게 변할지 혹은 수희와 그녀의 비서인 연서로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흑록에게는 유하가 모든 것이란 점이다. 흑록은 1권부터 나오지만 아버지는 월하의 장군이나 전쟁에서 죽고, 자신은 월하가 패배하여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용병 생활하는 내내 망해버린 월하의 백성이란 이유로 무시당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즐거움과 희망을 품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그저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것이 흑록의 현실이었다. 그런 흑록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것이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이다. 제목처럼 불의 공주로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흑록으로 통해 인생의 전환점은 결국 자신의 주변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혹은 자신을 찾아 떠나는 기나긴 여정에서 말이다. 부록에서 등장하는 <작열 & 유아등>에서 수향의 고아로 태어나 뒷골목의 이리처럼 살아온 희는 아무런 삶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망해버린 수향, 그리고 버려진 고아, 자신이 주변을 인식할 때 자기가 눕고 있는 침대자리에 어떤 여자가 남자를 안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게를 전전하다 결국 뒷골목의 창녀촌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각종 허세와 거짓, 그리고 도둑질과 싸움질, 그에게 주어진 삶은 항상 피 냄새와 빛조차 외면하는 그림자였다. 화선의 용병이 될 때, 상대 가리지 않고 싸움만 즐겼으며, 전투에서는 미친 듯이 총과 칼을 쏘고 휘둘렀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오직 어깨에 메어진 큰 가방이었다. 그 가방 속에는 이때까지 용병활동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이다. 돈이 가방을 다 채우고 있을 정도니 얼마나 많은 피 냄새를 맡았을까? 그는 사나운 이리였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좋았다. 단지 칼로 심장을 찌르고, 총으로 상대방의 뇌수를 박살내면 말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항상 유령과 같이 잠재되어진 무의식적인 요소가 있었다. 그는 수향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수향에 대하여 원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말 수향에 대해 미워하고 싫다는 것은 그만큼 수향에 대해 마음속 깊이 담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가 자신의 그늘로부터 나오기 위해서는 수향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 그는 수향에 대해 겉으로는 부정해도 속으로는 내심 수향에 대한 애증관계에 사로잡힌 것이다. 마지막에 수향의 왕이 도피생활하면서 자기만 편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은거하고 있었던 것을 알았다.

 

이때까지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수향이 그토록 증오만 하고 살았지만, 그 증오의 정점이 되어야 할 수향의 군주는 오히려 자신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끝까지 화선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싸웠던 것이다. 이때까지 그 누구에게 진지하지 않았던 희는 왕이 없는 허물어가는 왕궁에 거수경례를 하고, 그 마을을 침범하는 용병 출신 산적을 치러 간다. 거기서부터 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길을 간 것이다. 전쟁이란 공간에서 인간은 자신의 모든 터전을 잃거나 또는 타인의 터전을 모조리 부수거나 빼앗는다. 그런 전쟁이란 정치적 함의가 무력으로 동반될 때 그 모든 것이 악몽으로 변한다.

 

그렇기에 전쟁에서 이때까지 가진 것을 모두 소멸하게 만들고, 혹은 아무 것도 없는 자를 다른 방식으로 채우게 된다.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흑록이나 또는 부록에서 보인 희, 그들은 화선에 의해 고국을 잃고, 삶의 가치도 잃었다. 그런 만큼 요희전기에서는 전쟁이란 공간에서 던져진 인간의 삶을 역경과 위기 속에서 보여줄 것이다. 언제나 유하를 믿지 못한 흑록이 유하를 믿을 수 있던 것은 그녀가 죽을 위기에 처한 것과 그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내부의 갈등이 외부의 위기로부터 극복하는 것이라는 Narrative라는 전형적인 서사적 속성은 다음 3권부터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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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
앤디 메리필드 지음, 남청수.김성희.최남도 옮김 / 이후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이 책을 잡게 된 동기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저술한 기 드보르를 검색하면서이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감독이며, 사상가며, 선동가이다. 그는 최후의 아방가르드운동의 마지막 주자였다. 그가 속한 KOBRA는 1970년대에 해체되면서 이 세계에서는 아방가르드 운동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방가르드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입방정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으며, 스펙타클이란 용어는 심심하면 광고나 미디어 내의 쇼 프로그램이나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등에서도 튀어 나온다. 생각하자면 정확한 의미나 용어를 모른 채 마구 이 단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드보르가 추구하던 상황주의자처럼 살아가지 않지만, 그가 제시한 상황주의적인 판단은 나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조차도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고리로 연결되었다는 점을 말이다. spetacle이란 용어는 이미지가 매개가 된 사회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이 세상(그러니깐 하다못해 본인의 집에 나와 길가의 도로를 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은 그야말로 스펙타클이란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 지역은 도시라는 거대한 문명과 산업이 밀집된 공간이다.

 

이제는 점차 바뀌어 도시는 산업화에서 탈산업화로 이양되고, 대신 금융과 서비스로 대체되고 있다. 그리고 산업화가 밀려난 비도시인 농촌지역이 서서 도시화가 되어가고 있다. 산업활동과 더불어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신과 자연을 파괴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점을 염두 하면 앤디 메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는 도시와 인간, 그리고 그 곳에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마르크스 내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야기로 통해 어떻게 우리가 도시를 생각해야하는지 알려준다.

 

먼저 이 책은 단순히 맑스주의 즉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다루기보단 마르크스주의로서 도시라는 공간에 살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상과 삶, 그리고 거기서 얻어낸 도시라는 기능과 현실을 알아가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정체된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우리 인간과 도시를 비교하면, 도시는 정형적인 건축물과 시설물이 존재하는 곳이나, 그 도시 안에는 인간이란 유동적인 존재가 있다. 따라서 도시는 고정적인 존재고 인간은 유동적인 존재다. 하지만 고정적 존재는 유동적 존재를 담아두는 매체이다. 따라서 인간의 유동성을 고정성으로 바꾸어 버리고, 인간은 건축물이란 고정성이 존재하나 건축물의 양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시켰다.

 

즉 고정성과 유동성이 서로 변화를 주는 변증법적인 요소에서 도시란 것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그들의 삶과 흔적을 찾는 저자와 다시 저자의 서적을 읽고, 그 서적을 보고 생각하는 나로 통하여 고정성과 유동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우선 나는 최근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했다. 인간의 유동적인 흐름은 고정적인 지리와 자연에 영향을 주며, 그 영향을 받은 지리와 자연은 도시적 기능을 갖추면서, 인간 자체를 도시 안에 가두어 버린다. 내가 살던 곳은 섬과 육지로 교량으로 연결된 곳에서 육지와 많이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도로가 확장되면서 차량의 이동이 증가되고, 뒤쪽의 산을 밀게 되면서 아파트단지가 형성되며, 집 근처에 큰 가게가 생기면서 생활환경의 질이 하락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문화적 구조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그 사회의 경제적, 환경적 조건을 보므로, 내가 살아가는 동네에 대한 변화는 결국 도시와 인간에 대한 관계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일상생활의 변화에 대해 내 자신이 느꼈다면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와 만나다> 역시 그런 변화를 당시 사람들을 지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만일 어떤 도시나 다른 국가에 대해 알고 싶다면 3가지의 장소로 가보라고 했다. 장소 1개소는 기억나지 않으나, 1개소는 도서관이고, 다른 1개소는 시장(market)이란 곳이다.

 

흔히 시장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팔며,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시장의 공간성으로 통해 그 사회의 커뮤니티와 사람들의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시장이란 것은 누가 일부러 만들어준 곳보다는 사람들 스스로 만들어낸 하나의 집합장소다. 그렇기에 시장이란 곳을 알아가는 것은 그 사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치관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것이며, 삶의 질까지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강력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예전에 읽어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이라는 도서였다. 호크 하이머와 아도르노, 하버트 마르쿠제 등 다양한 학자들이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인문학자로서 어떤 삶과 어떤 학문을 했는지 알려주는 가이드역할을 맡은 도서였다.

 

그리고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고대 카빌라의 신비와 마르크스주의를 합친 발터 벤야민을 보게 되었다. 벤야민은 이미 <문예이론>과 <모스크바 일기>로서 접한 인물이었다. 그가 본 도시의 환경은 매우 특이하다고 할까? 특히 국내 미학자인 진중권 교수가 제일 먼저 미학으로서 드러내는 인물이 바로 벤야민이다. 기존에 예술적 대상이 사물 즉 조각상이나 그림이었다면, 영상복제가 일어난 시대부터는 영화로 바뀐 점과 그것이 아우라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한 점이다.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라 복제품들이 오히려 원래보다 더 원래 같은 느낌을 주는 simulace의 도래에 벤야민의 사상은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읽었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이던 라시스란 여성을 만나면서, 그녀에게 빠진 후에 그녀가 살던 모스크바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벤야민은 자신이 러시아에서 가면서부터 오기까지 일기를 적었으며, 그 중에 대부분이 라시스라는 여성에 대한 자신의 관찰과 감정이었지만, 한편으로 러시아의 모스크바라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도시의 시장은 많은 사람들이 가득했으며, 거기에는 러시아 전통인형과 장난감으로 가득했다. 벤야민은 그런 시장에 있는 사람들에 취했으며, 어린이와 같은 감수성으로 러시아 전통인형과 장난감을 사서 가지고 가는 내용을 보았다. 물론 배고픔과 추위는 언제나 러시아 사람들에게 큰 걱정이었으나, 적어도 시장에는 인간의 생동감이 살아있는 것이다.

 

벤야민이 이런 관찰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다시 돋보이는데, 내가 이때까지 접하지 못한 개념 이른바 파사주라는 것이 튀어나온다. 프랑스 파리의 19세기와 20세기에 존재하던 건축물 양식으로 거대한 유리천장을 거리를 둘러싸며, 그 거리 안에는 술집, 옷집, 아틀리에와 같은 상점이 입주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상업적인 흐름을 따라 가게만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창녀와 포주, 그리고 불량배들이 함께 숨을 쉬던 곳이었다. 모든 인간들이 다양한 얼굴로서 돌아다니며, 파사주라는 공간은 마치 거대한 구경거리를 주는 재미난 공간이었다. 보들레르의 산보자라는 댄디처럼 산보자들은 거대한 구경거리를 지닌 이 파리의 파사주를 돌아다니면 인생의 낙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다. 일단 파사주 안의 가게들은 상점과 더불어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원래 전통적인 수공업자 내지 또는 상점을 운영하는 가게들은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 안에 잠을 잘 수 있는 생활공간이 있었다. 즉 경제활동과 가정활동이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동일한 공간이었고, 생활공간이 있으면, 당연히 그 생활 활동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상가들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거리는 하나의 유기체적인 공간이 되었으며, 거리를 중앙으로 두고 양 옆으로 때로는 골목으로 이어진 상가들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마주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보들레르의 산책이 이어지는 길가에서 자리 잡은 상가들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 내지 혹은 18~19세기의 유럽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변혁되고 있었다. 토지가 대부분 몰수당한 농민, 대규모공장에 의해 몰락한 수공업자와 영세자본가, 그리고 도시에 사는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의 자녀 등이 끊임없이 도시에 몰려들고 그 주변을 배회했다. 그래서 초반의 도시는 냄새로 가득하고 쓰레기가 즐비하며, 많은 사람들이 타락해갔다. 18세기 낭만주의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가 그토록 동경하던 파리에 갔을 때 그에겐 열광과 희망의 이름 대신 실망과 회의감이었다.

 

인간의 생활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이다. 루소가 지적하다시피 사유에 대한 지나친 차이는 인간의 불평등을 초래하고, 그것이 인간의 자유에 억압을 준다고 했다. 물론 서적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이나,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의 발견자, 루소>처럼 루소는 마르크스의 사상적 아버지이기도 하였다. 만약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읽는 순간, 머리에서 번개가 내려꽂히는 기분을 것이다. 두 책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유사한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루소가 보던 파리라는 도시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영국에서 보던 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르크스는 독일 출신이나 그의 정치적 운동 때문에 프랑스와 벨기에로부터 추방되어 최후의 망명지인 영국 런던에 안주하게 되었다. 그는 런던에 있는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면서 <자본>을 집필하였으며, 도시라는 공간에서 노동자의 모습을 보았다. 도시라는 곳은 자본주의 이전에는 권력자들의 왕궁이 있는 곳이라면 자본주의 이후로는 빈민과 창녀의 소굴이었고, 착취의 악마가 사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 매력은 인간이 사는데 필요한 문화적 인프라가 있었다는 점과 인간들의 밀집소란 점에서 새로운 모험이 있기도 한 곳이었다. 마르크스 친구인 엥겔스는 멘체스터의 밤을 돌아다니며, 도시의 역동성을 보았다.

 

도시는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병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생기도 있었다. 아무렇게 만들어진 건물들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사람들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한국에서 소문난 맛 집과 유명한 가게는 대로변에 있는 곳이 아니라 대부분 골목 사이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서 시작했다. 그런 가게들이 대규모로 신축하여 큰 거리로 나오게 되면 그때의 그 맛이 사라지는 마술과 같은 일들이 생긴다. 인간의 미각을 자극하는 음식은 단순히 음식재료와 조리방법으로 결정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골목들이 이어진 시장에서 인간의 다양한 문화가 생기고, 서민들의 이야기가 꽃 피운다.

 

그런 공간을 없애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갈 공간을 없애는 것과 같다. 가령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는 전형적인 관료주의로서 프랑스를 통치한 독재자로서 그의 세력 중에 오스망 백작은 파리의 거리를 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하는데, 먼저 기존의 파리상가들을 철거하고 거기에 거대한 도로와 그 도로 주변에 거대한 건물, 공공시설, 상징물 등을 집어넣는다. 파리의 거리가 파리시민의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 상징적인 도시정비는 거리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을 변방으로 내몰게 되었고, 일을 하는 가게와 거주하는 가정을 분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물론 현대에서도 가정이 상가와 같이 겸용하는 가구도 있지만,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실태다. 그런 이유는 대규모 자본유입으로 통한 공업화와 관계가 있다.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서 많은 집들이 필요했다. 그들을 가두는 것으로 통해 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라는 것은 어느 순간 노동자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그 노동자로 통해 이윤을 내려고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감옥이 필요했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처럼 감옥은 학교, 공장, 직장 등만이 아니라 주거시설도 역시 감옥이 되어야 했다.

 

대규모 단지 아파트를 가보면 인간이 사는 공간과 형식이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같은 평수와 같은 방 구조, 같은 경치까지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집은 마치 죄수번호가 새겨진 감옥처럼 규격화되어 버렸다. 아파트라는 대규모 집단주거단지는 이웃이 옆에 있어도 이웃보다는 남으로 대해야 했다. 파사주처럼 거리의 건너편에 있는 가게사람을 볼 수 있는 낭만적 요소도 제거되었으며, 아파트 안을 보는 것은 개인의 영역에 대한 침해였다. 이런 감옥과 같은 아파트계획은 노동자를 수용하기 좋은 공간이었고, 그들은 단순히 노동시간만 노동하는 게 아니라 노동시간 외에도 노동하게 되었다.

 

드보르가 제시한 스펙타클처럼 TV나 미디어는 곧 대중문화로서 노동자들의 생활에 침투하고, 그들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만 생각하게 유도했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던 시장과 달리 아파트문화는 그렇게 획일적인 문화가 형성되고, 아파트단지 생활을 위해 대규모 마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시장은 대규모마트로 인해 점차 소멸되어가고, 대자본가들은 아파트단지로서 자신들의 노동자를 가두고, TV로서 사유의 전환을 막으며, 대규모점포로서 또 다시 이윤을 얻는다. TV라는 것은 상품이 이미지라는 것으로 통해 전달되므로 TV시청은 휴식이 아니라 단지 또 다른 소비로 이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이런 프롤레타리아 부류가 도시중심에서 살다가 도시 외부로 추방되면서 부동산 경기는 치열하게 뛰어오르며, 부동산 투기로 한 몫을 노리는 부류도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부동산이 참 걱정인 이유는 보통 한국인들은 아파트를 전세 내지 구매하면 계속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일단 자신이 구매한 집의 평균 수명이 30년인 점을 감안하면, 지금부터 30년을 살고 난 후에 집을 이동할 때 재건축계획에서 그 재건축되는 집과 자신의 집의 가격 차이를 보면 절대 100% 이내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도 주택을 소유하고 것은 70%가 되지 못한다. 최근에는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여전히 재건축현장은 늘어나는 추세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집은 늘어가는 반면 그 집을 가진 사람들이 줄어가는 것은 심각한 현상이다. 이른바 부동산에서 내 집은 비싸게 팔고, 남 집은 싸게 구매하려는 소비자의 심리가 계속 자극하면서 부동산에 동반되는 화폐유통은 엄청난 것이다. 이미 한 사람이 10년 동안 벌어도 집 구매가 어려운 현실에서 도시의 착취는 바로 주택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대규모산업단지 있는 곳에 노동자를 오게 해놓고, 집을 안정적으로 제공하지 않을 경우 그 지역은 반드시 큰 문제점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지역의 산업단지가 사라져도 문제가 된다. 실직자의 대량생산은 그 지역의 상권을 모두 절멸시키는 도미노현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도시라는 것은 결국 유기적인 존재이나, 그 도시의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적 기능에서 도시계획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가? 그래서일까? 최근 환경경제학자의 강의를 듣는 도중 도시의 생태적 기능을 부여하고, 도시의 공간이 자연적인 요소를 되돌려 인간 커뮤니티를 발전시키는 도시계획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대단지 주택이나 자연적인 조경을 나두고, 건축배치는 직사각형으로 나열하여 도로로 중간을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중앙지역은 대규모 공원과 문화시설을 설치하고, 그 중심으로 원형으로 건축물을 배치하여 그 안에는 차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에게 공원과 문화공간을 향유하고, 부모들은 공동그룹을 구성하여 서로 음식을 구매하거나, 아파트단지를 운영하거나, 아이들의 학습과 놀이 프로그램을 개선하기도 한다. 기존의 도시에서 아파트라는 곳은 감옥과 같은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도시적 기능을 다른 식으로 보완하여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협동조합이란 기능은 자신들의 주거지역만이 아니라 그 주거지역이 형성된 지역까지 확대되어 다양한 볼거리와 문화공간이 형성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이런 일들이 국내에서 당장 실천되지 않지만, 그런 기능이 어느 정도 중요성을 보는 것 같다. 도시의 지역주민이 만든 커뮤니티는 그 지역사회의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고, 특히 범죄나 사고로부터 예방해 줄 수 있으며, 생활환경의 개선대상은 소외된 이웃까지 혜택을 볼 수 있다. 삭막한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둘러싼 도시에 인간의 마음 역시 삭막하게 변해간다. 인간의 비인간화, 그것을 눈치조차 챌 수 없게 하는 미디어, 드보르가 주장한 스펙타클처럼 도시의 잉여적 존재조차도 도시에서 당위적인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도시가 팽창하고 확장되며 건설되기 바란다. 이 책에서 (분명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한 서적이지만)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나온 문구를 인용한다. “자신의 집이 불타고 있을 때, 사람들은 점심 먹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맞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중에 잿더미 위에서 그 점심을 먹는다.”, 망각의 동물인지 아니면 현실을 볼 수 없는지 또는 보려고 하지를 않은 것인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적어도 가족주의라는 현실에 매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그 가족주의가 자신의 아이의 목을 옭아매는 것은 이해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자본력을 가진 자들은 바로 그 가족주의야 말로 완벽한 사업의 밑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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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1 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1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황봉모.박진수 옮김 / 이론과실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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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을 읽는 순간, 너무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 그의 저서엔 <게공선>은 1930년 실제 게잡이 공선의 일을 토대로 계속 연구하고 조사하여 만든 소설이다. 그 안에서 누구의 이름은 없다. 오로지 아사카와라는 감독이란 이름만 나온다. 몽둥이를 들고 혹은 권총을 들고 무력으로 선원들을 잡아대는 무법자, 그런 무법자는 자신에게 밀어준 권력에 빌붙어 마치 자신이 제왕으로서 군림한다. 그는 제왕보다는 그저 독재자고, 폭력만 추구하는 불한당이다.

 

하지만 현실이란 세계에선 이런 불한당이 하나의 정당성이 부여된다. 여러 곳에 글을 적을 때마다 하는 말이나 나는 개인적으로 정의라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정의실현, 정의를 위해라는 슬로건만큼 쓰레기 같은 것은 없다. 정의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나 모든 것을 다 외면하고 박대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의라는 것은 그저 자신이 편할 때 얼마든지 우려먹을 수 있는 좋은 단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수재들에게 정치철학을 가르치는 존 롤즈의 <정의론>을 읽는 순간 정의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정의는 오히려 상대적인 가치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적인 가치란 즉 상대편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하고,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을 넘어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기에 비로소 가능하다.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을 읽는 순간, 그런 인간적인 가치가 무너지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보통 나는 베스트셀러라는 도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나 아무나 읽고, 소장하여 그 책의 본심과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또는 찾을 수도 없는 책에 얽매이는 부류에 대하여 그냥 냉소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이 책 <게공선>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일본에서 150만부가 팔린 이 도서, 처음 나오던 때도 3만 이상 팔린 이 도서가 베스트셀러로서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것은 이 책이 그만큼 잘 만든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 책에 보이는 색깔은 전혀 밝은 빛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비참한 분노를 보여주는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 이외에 그의 다른 서적이 읽고 싶어졌다. 그의 책에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는 전혀 없으며, 있는 것이라곤 분노에 찬 작가의 본인이었다. 후기를 읽어봐서 더욱 심한 인상이었지만, 그가 자신과 친하게 지낸 동료들이 경찰서에 가서 무척이나 심한 고문과 학대를 받고, 그 후유증으로 죽거나 심한 고통을 받은 자가 있다고 한다. <게공선>이 <게잡이공선>으로 나온 <코바야시 다키지 선집> 제1권은 그야말로 악의가 가득한 인간의 눈빛이 보인다.

 

<방설림>이란 작품을 보면 모든 것을 잃은 겐키치의 분노도 선하고, <1928년 3월 15일>에는 고문취조실에서 고통스러운 노동운동가들의 비명소리도 들린다. <게잡이공선>은 순수하게 게를 잡아 가공하는 배에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면, <방설림>은 삿포르에 떠난 연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아버지가 일꾼 땅을 빼앗긴 것에 분노하는 겐키치의 분노가 보였다. <1928년 3월 15일>에는 일본에서 군군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다나카가 총리로 선출되면서부터 자신들에게 반대되던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억압하는 모습이 나온다.

 

안 그래도 오늘 이 책의 서평을 적으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본 성우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았다. 유키노 사츠키라고, 40대의 여자성우가 있다. 한국에서 흔히 <이누야사>라는 작품의 카고메나 <풀메탈패닉>의 치도리의 목소리로 유명하다. 그 성우가 일본의 유사법제라는 것이 2003년에 일본 국회에서 통과할 때 치안유지법에서 국가총동원법이 다시 살아나오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한 글을 찾으면서 국가총동원법은 일본이 1938년에 만든 법으로 일본에서 가장 부끄럽고 더러운 역사인 위안부 및 강제징용의 근거가 되는 법이었다.

 

일본에서도 그런 암울한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그 시대에 대한 반민주적 반평화적 반자유적인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른바 국가보안법이 발목을 잡고 있지만, 일본 역시 그런 문제가 되는 법에 대한 심각성을 잘 각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 새로운 기분이었다. 바로 그러한 것이 <1928년 3월 15일>이란 작품에서 저런 내용이 생각나는 문구가 있었다. 노동당을 결성하고 노동운동을 하던 류키치가 순사에 의해 잡혀갔을 때 하던 이야기가 인상 깊다.

 

‘류키치는 흥분해 있었다. “그런데, 보라구 헌법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 헌법에 말이다. - 일본 신민은, 법률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심문,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말이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정신 법률 수속을 밟아 체포, 감금, 심문을 받은 적이 있나? - 이 속임수와 순 거짓말!”

 

실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사실적이라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고문 기술자나 또는 고문을 하는 기술이 마치 독립군을 고문하던 일본 순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얼굴표정이 마치 내 눈앞에서 둥둥 떠내려 오는 기분이었다. 고문에 대한 이야기에서 얼마나 심하게 구타했으면, 정신상태가 망가지는 경우가 있었고, 고문을 할 때 사람의 목을 졸라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일제의 군국주의는 비단 우리만 아니라 일본의 자국민까지 이어지고, 특히 힘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이어진 것이다.

 

코바야시 다키지의 책을 보는 순간 그들과 왠지 모를 공감이 형성되었다. 암울한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비참함에 시달렸나? 우리나라에서 산업화의 일꾼이라고 하던 자들은 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시간과 끔찍한 근무환경에 병들었다. 잠도 못자고 일하다 재봉틀 바늘이 손가락에 찔린 여공, 프레스기계에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에 왠지 모르게 송곳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기서도 안타까운 내용이 소설에 나온다. 작가가 괜히 아픈 신음소리를 내며 만든 소설이 아닌 이유는 롤링에 2사람이 끼여 배출구에 나온 사람들은 아주 얇은 쥐포처럼 나온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하나, 그 소설 자체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정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인간에게 철학이란 말은 여기서 바로 나오는 것 같았다. 일본의 1920~30년대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1960~70년대를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나라에 대해 외국의 문물을 본 사람들에게 들어보면 일본의 30년 후의 모습을 우리가 밟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깐 지금 우리는 1980년대의 일본이라고 할까나?

 

부동산 투기와 버블경제로 인해 침체된 서민경제, 그리고 국가는 부유하나 국민은 가난하며, 여전히 권력은 못사는 사람을 위해가 아니라 못사는 사람을 쥐어짜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설림>에서 겐키치의 연인이던 오요시의 죽음은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그녀는 삿포르에 일하러갔으나 처음에 일을 하려고 했으나 어느 부자 아들의 애인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임신하자 버림받았다. 집에 와서도 제대로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고, 만삭의 배로 추운 겨울 창고에서 잠을 청하다 산통이 오자 이내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녀가 남긴 유언의 편지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겐키치를 떠나온 그녀는 삿포르 도시에서 부자 아들에게 있는 그대로 다 버림받은 것도 한이 맺히나 자신이 사랑하던 겐키치와 결혼하지 못한 것이 더 한이었다는 점이다. 삿포르를 원해서 간 것도 아니고, 자신의 입을 챙길 수 있는 가정형편이 못 된 것이었다. 훗카이도의 무서운 추위를 이기고 개척하러 간 농민들이었으나, 그 농민이 만든 땅을 모두 지주가 채가고, 그들의 지주의 농노로 전락했으며, 이제 그 소작조차 못하게 될 상황이었다. 심지어 강가의 연어조차 모두 독차지한 장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 어떻게 그 상황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푸성귀에 된장을 넣고 끓인 국은 먹다가 토할 것 같고, 쌀은커녕 감자와 호박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들의 식단,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해지는 그 시간까지 일만 하는 농민들의 얼굴을 까맣게 타들어가고, 손은 소나무 껍질보다 더 거칠었다. 가지지 못한 자에게 어디에 가서 호소할 수 없는 것만큼 더 서러운 것은 없었다. <게공선>도 그렇고 <방설림>도 그렇다. 선원과 농민이 있는 힘을 다해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비참한 생활일 뿐 더 나은 미래는 없었다. 단지 일하고 일해 오직 해방되는 순간은 죽음이란 말처럼 너무 끔찍했다.

 

<1928년 3월 15일>에서 개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강가에 빠져죽을지 알면서도 향한다고 한다. 그 미래를 위해 자신이 희생되어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렇게 희생하고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면 얼마나 한이 맺힐까? 코바야시 다키지 선집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암울한 상황과 거기에 대한 저항의식이었다. 아무리 고문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노동운동가들은 실제 일본에서 보여준 민주주의 역사였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는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다. 인간의 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피로 끝난다.

 

물론 그 당시보단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결론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비정규직으로 인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2개 내지 3개를 하는 바이트족도 생겼다.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이며, 그렇게 일하는 자리도 서로 경쟁자가 몰리는 상황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게공선>이나 <방설림>에서 그런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그 가혹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젊은 사람들이 흘러온다는 사실이다.

 

당장에는 국가적으로 부를 축척하고, 기업가들에겐 큰 이익은 되겠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 나라에는 미래와 희망을 죽이고, 스스로 살을 깎는 일로 되는 것이다. 단지 살이 깎는 것을 폭력으로 해결하는가? 아니면 덜 폭력적으로 해결하는가이다. 물론 비폭력적이라고 해도 그 상황에서 처한 약자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국가에서 국민은 헌법 위에 있어야 하나 헌법이든 인간이든 모두 돈이 위에 있다는 점에서 그저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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