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이용대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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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미(Nemi)라는 아름다운 작은 호수가 있는 숲 속은 지금도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아주 무서운 일들이 벌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칼을 든 남자가 커다란 나무 앞에서 아주 위협적인 행동을 주변의 적을 막고 있었다. 바로 그 나무는 황금가지가 달린 참나무고, 황금가지는 겨우살이라는 식물로 다른 나무에 기생하는 종이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바로 유럽과 인도, 조선과 일본, 심지어 러시아와 태평양 군도에 자리 잡힌 식민지에 있는 신화와 문화들을 수집하여 인류의 역사를 다시 말하고 있다.

 

본래 인류학이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오래 전의 문화 내지 혹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원시부족이나 원주민들만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인류학은 인류의 기원부터 시작하여 최근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인류학을 연구하게 되면 원시부족에 대한 연구부터 과거에 살았던 인류에 대해 상세한 연구를 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현대문명이란 과학기술에 의해 미개한 사회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다. 아마도 말이다.

 

우리는 도시화된 지구에서 거대한 주거시설과 산업시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나, 그렇게 된 시기도 얼마 되지도 않으며, 설사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우리 인류가 현재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지성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인 영역에서 책으로 통해 얻어지는 지식은 또 다른 경험이며,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지식이란 자신이 살아온 시간적 축척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극히 단순하고 편협한 경험주의적인 요소는 인간 스스로를 착각과 편견에 빠지게 하는 마법약과 같다. 문제는 그 약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산하여 스스로 복용하고, 이제 그 마법약은 독약이 되어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 눈을 가리게 하는 마약이 되기도 한다.

 

지식으로 통해 얻어지는 책의 가치에서 바로 우리가 알 수 없던 것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인류의 삶을 더 가치 있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읽는 것은 단순히 고대사회부터 시작하여 근대까지 있었던 원시부족과 미개 및 야만부족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설사 고대사회에 살았던 야만족이 존재하여 100년 전 인류가 그 야만족에 대해서도 분명 야만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우리는 100년 전이란 인간들과 현재 우리의 차이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인류는 현재 야만적이지 않은가? 아니면 우리는 언제나 지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모든 일에 대해 올바른 가치관으로서 풀어내는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엄청난 오만과 편견, 그리고 치명적인 실수다. 인류의 잔혹하고 비윤리적인 범죄는 바로 그런 점을 망각하면서부터 시작이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영혼아래 숨겨진 원시적인 요소를 더듬어 찾음으로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황금가지>에 나오는 이야기는 현재 우리가 본다면 참으로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또한 어이 없는 이야기가 터질 것이다.

 

저자인 제임스 프레이저 역시 그런 점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 안 될 것이다. 그도 역시 많은 제보자와 기록을 찾으면 원시문화와 혹은 전통문화에 새겨진 과거의 미신을 찾아내어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보니 <황금가지>에는 우리의 조상인 조선이란 국가를 나타내었다. 현재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나, 산모가 태아를 놓게 되면 3·7일이라 하여 즉 21일 동안 집 앞에 고추를 묶은 금줄을 치는 것을 볼 수 있다. 21일 동안 산모와 태아를 외부와 격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역사 혹은 그 역사의 왜곡된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신화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 시조라고 불리는 단군왕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아버지인 환웅천자는 배달국의 임금이기도 하나, 인간이 된 곰과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고 한다. 곰이었던 웅녀가 인간이 되기 위해 3·7일간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난 후에 인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전통신앙은 하늘을 조상으로 여기는 무속신앙으로서 샤머니즘, 그리고 곰을 숭배한 토테미즘이란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는 곧 한국인의 신화와 더불어 존재한 것이다. 생각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4400년 전에 있었던 신화로서 제시된 역사적인 기록에서 웅녀가 인간이 되기 위한 날과 현재까지 민간신앙으로 전해오는 금줄의 관계에서 신화는 계속 그 민족의 역사와 삶에서 남은 것이다.

 

또한 신화적 특성, 또는 신이 되는 존재, 또는 토템의 대상인 동물과 식물, 하다못해 일상생활의 패턴조차 계속 이어져 온다. 우리는 왜 미신을 두고 유치하다고 여기면서 계속 이끌리는가? 그것은 인간이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이성과 지성에 의존하기보단 그 너머의 감각과 무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통적인 요소가 <황금가지> 내에서 자주 등장한다. 제일 놀란 부분은 일본 훗카이도에 거주하였던 아이누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누족은 본래 몽골계통 부족으로, 처음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된 동기는 일본 애니메이션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에 의해서다.

 

<원령공주>에서 하나의 모티브로 설정된 것이 남자주인공으로서 그는 아이누족의 젊은 청년이면, 그가 입은 의상은 우리 한국이 조선이란 국가로 있을 때의 일본인들이 입은 의상과 전혀 다른 점이었다. 작품 내에서 조총이 나온 점을 두고 본다면 17세기 정도로 보이며, 아이누족의 청년은 당시 도쿠가와 막부시절의 의상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현재 일본 기모노는 당시 막부로부터 이어져 온 의상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활을 사용했으며, 부족은 아주 공평한 계급체계에 늙은 부족장이 부족을 이끌어가는 형태였다. 그런데 이 아이누족이 사실 곰을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곰은 신적인 대상이나 그들에게 곰은 아주 맛있고, 유용한 동물로서 죽임을 당하는 동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곰이란 존재를 토템적인 요소를 부여한 점에서 그들의 원류가 몽골족이란 점에서 토템적인 원형이 단군신화의 요소로 본다면 상당히 흥미 가는 부분이었다. 당시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실제 곰이 아니라 곰을 토템으로 삼는 종족이고, 범은 곧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는 부족이다. 문제는 곰과 호랑이는 다 무섭고 사나우며 사냥에 아주 능한 맹수다.

 

그들을 토템으로 설정한 것은 그들의 강함을 그대로 부족에게 이양하여 사냥을 잘 할 수 있도록 스스로 주술을 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방법은 곰과 호랑이와 같은 맹수 어느 하나를 두고 자신과 같은 존재라 여기며, 그 맹수와 자신은 영혼을 나눈 사이로 볼 것인지, 아니라면 맹수를 잡아 그 맹수를 잡아먹음으로서 자신에게 맹수의 용맹성이 들어온 것처럼 여기는 것인지 또는 맹수 그 자체를 신처럼 받들어 인간 희생양을 보내어 인신공양을 하는 것인가에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만약 나에게 그런 선택을 한다면 1번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대안일 것이다. 인신공양이란 점은 누군가를 계속 희생해야 하며, 언젠가는 분명 한계점이 올 것이다. 한국의 설화 중에서 <심청전>을 보면, 심청은 인당수에 빠져 용왕에게 보내진 것으로서 인신공양을 합리화한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문화적 형태를 설화로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어린 소녀를 희생한 점에서 남성지배 이데올로기를 확고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용왕이야기처럼 바다마을이 있는 지역에서는 매년 일정기간이 되면 용왕제를 벌인다. 마을 어부들과 주민들이 모여 서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노래와 춤을 추는 행사는 만선의 기원을 바라는 주술적 행사다.

 

우리가 유치하고 미개한 행동이나, 아직까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분명 존재하고 있는 행사이고, 앞으로도 열릴 행사다. 해양환경으로 판단할 경우 바다의 수온과 COD, pH, 각종 중금속을 통한 화학적 요건, 조석과 조위 같은 물리적 요건, 플랑크톤에 의해 적조발생 등과 같은 생물학적 요건들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분명 생선은 계절적으로 영향을 받아 어장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만선을 기원하면 풍어를 바라며 용왕제를 열고, 무당을 부르고 춤판을 연다. 미신으로 가득하나 현재 굿을 할 수 있는 일부 무속인들은 무형문화제로 남고, 또한 그런 굿판이나 각종 전통행사 역시 무형문화제로 등록되기 시작한다.

 

정말 미개한 것들이 이제는 하나의 문화적 유산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에서 자리 잡은 신화와 민담,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들의 드러나지 않은 언어로서 드러나는 점이다. <황금가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령 위에서 아이누족은 곰을 잡는 것에서 토템이 되는 동물을 다른 민족과 부족들이 잡는다는 점이다. 단지 조금 아쉬운 점은 이 책은 유물론적인 요소를 상당히 배제한 느낌이 강하다.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의 저자이기도 한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인 관점에서는 그 문화적 행사나 각종 의례가 단순히 미개부족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환경과 경제적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이면서도 인류학의 거두인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책을 보면 원시부족이 우리로서 이해하지 못하는 괴상한 행동이 그들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행위이며, 그 무의미하게 보이는 행동 그 자체가 언어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황금가지>의 주요 대상이 되는 부족들은 농경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고, 그 농경문화에서 계절적인 변화가 결국 신이란 존재를 관념 속으로 만든다든 점이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봄-여름-가을-겨울의 흐름에서 봄은 모든 생명을 열게 하고, 여름은 그 생명이 가장 성장하며, 가을은 생명을 수확하며, 겨울은 생명이 모두 잠을 자게 된다.

 

그 계절적 변화가 바로 자연의 이치를 하나의 신으로서 만드는 것이다. 계절의 신을 어느 관념적 존재에게 부여하고, 그가 바로 인간과 같은 이름과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신은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인간의 여자에서 태어난 반신으로서 그는 사지가 모두 분해된 채로 죽지만, 다시 태어난다.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에서 죽음은 겨울은 가리키고, 탄생은 봄을 가리킨다. 결국 죽음이 있어야 생명이란 이름의 봄이 오는 것이다. 신의 죽음과 부활 혹은 탄생에서 판단해보면 분명 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에게 보인다고 믿으며, 그 믿음은 바로 꿈과 몽상 또는 간질에서 나오는 환상이다.

 

꿈은 인간이 수면 중에 꾸는 생리적 현상이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사람에게 꿈은 예지며 하나의 계시다. 꿈이 곧 인간의 무의식적인 요소로 통해 인간에게 보여주는 현상이듯이 그들은 그런 무의식에 존재하는 인간, 많은 인간들이 공유하는 그 무의식으로 신을 만든 것이다. 신화란 그 사회집단 인간들이 가진 집단적인 무의식 내지 공통성이란 말처럼 오히려 그 신화적인 이야기가 하나의 과학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자신들만의 과학성에서 미개함을 넘어 폭력적인 야만이 존재했다. 신은 절대 죽지 않아야 하므로 그 신을 대신할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대상은 동물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들이 여기는 신의 존재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 동물과 식물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인간이 공작해 놓은 도구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만큼 가장 신에 부합한 존재는 없으며, 오히려 인간이기에 다른 인간들에게 신의 계시 내지 집행 그리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설사 동물을 신으로 모시거나 희생양으로 올려도 결국 그 결과적 판단은 인간이 한다. <황금가지>에선 바로 네미숲속의 사제의 죽음부터 시작하여 각종 인간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가장 잔인하고도 야만적인 죽음은 후반에 나오는 북유럽 쪽의 사형이었다.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과 전쟁에 사로잡은 포로를 식물줄기로 만든 거대한 동물인형에 넣어 거기에 각종 가축과 동물을 같이 들어가게 한 후 불로 태우는 것이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상황에서 죽음으로부터 절규하는 동물들과 사람들은 서로 비명을 지르고, 동물들은 다른 동물과 사람들을 할퀴며 뒤엉키며 죽어간다. 이 잔혹한 행위에 두고 <황금가지>에서는 그들의 주술적 행위로 보겠지만, 문화유물론적인 요소로 본다면 식량을 포로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아깝거나(부족하거나) 또는 그런 식으로 사형을 처하게 하여 상대부족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줄 수 있는 경제적인 방법이다. 만약 그 불길에 타버린 불쌍한 영혼의 육체를 식사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만약 식사용으로 한다면 2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이다.

 

식물식량의 절약과 단백질의 보충, 물론 이런 식의 논리는 너무 잔혹하거나 억지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아즈텍 문명의 심장 가르기는 분명한 처사를 보여준다. 인류학 도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시대나 그 지역의 기온과 습도, 강우량과 식생조건이다. 게다가 지형과 지질적 요소는 인간에게 적합한 생활이 될 수 있는지 또는 곡식을 재배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가정에서 기르는 가축 그리고 들판이나 숲에 있는 야생동물은 얼마나 존재하는가? 남미의 국가는 대부분 높은 지대이며, 사나운 맹수는 잘 없었으며, 주로 토끼나 쥐 같은 작은 동물이 많았다. 그리고 옥수수 재배에서 옥수수신에 대한 경배는 식물이 아니라 인간을 희생한다는 점도 이상하다.

 

옥수수의 신은 식물의 신이지 동물의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로를 죽이거나 혹은 희생양을 지정된 슬픈 인간이든지 그의 죽음으로 옥수수의 신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차라리 옥수수를 위해서라면 들판의 옥수수가 물의 흐름이 잘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 수로정비나 밭에 거름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다고 죽은 인간의 시체를 잘게 부수어 토질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인간의 심장을 꺼내어 신상에 바치고, 목을 베어 그 인간의 고기를 모두 나누어 먹는다. 1년 중에 자연사하는 인간보다 제의로 통해 죽는 인간의 수가 많다는 점은 결국 제의는 경제적, 환경적 조건이 따르는 점이다.

 

많은 인구를 가진 왕국에서 옥수수와 같은 탄수화물 섭취는 단백질의 보충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살인은 어떻게든 합법적으로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신이란 이름은 어떠한가? 모든 죽음은 합법적이지 않으나 유독 영화나 소설에서는 이런 죽음을 정당화 시키는 방법이 있다. “신과 정의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희생은 그 어떤 부조리에서도 정당하다. 신이 곧 정의이기에 정의라는 이름 역시 그런 폭력적인 희생을 무마시킨다. 아니 그 죽음을 당하야 하는 희생양조차도 오랫동안 준비된 존재이기에 자신들의 희생은 아주 기쁘고 위대하며 좋은 것으로 인지되도록 교육시킨다.

 

<황금가지>에서는 바로 저 죽음을 두고 영원한 생명, 풍요로운 삶의 혜택을 위해 의식을 치룬 것으로 보나, 그것으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은 자세히 연구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각 문화와 국가, 그리고 민족과 원시사회의 신화를 연구하고 떨어진 국가라도 그 연접한 곳에 있는 지역이라면 뭔가 유사함 요소를 발견한다. 이름은 다르나 신의 역할과 신이 처해진 운명, 그리고 그 신을 받드는 인간의 생활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그 미개하거나 또는 야만스러운 행동은 단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교나 가톨릭과 같은 큰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점이다.

 

이해가지 않을 수 있겠지만, 한국은 삼국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이며 대승불교국가로서 그 문화적 유산을 이어져 온다. 본래 인도에서 불교는 소승불교로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역사와 고려시대처럼 국가통치이념으로서 불교를 영입한다. 그러면서 점차 민간에 퍼지면서 불교가 한국의 대표종교로 부상하나, 그 속에 분명히 민속 문화와 무속신앙이 잠자고 있다. 불교에서 백중에 방생하는 행사는 분명 오리지널인 인도종교에 없는 점이고, 죽은 자에 대한 49제나 100일제 역시 없다. 오히려 그런 요소는 무속신앙에서 전해져 온 것을 불교에서 흡수한 것이다.

 

가톨릭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가령 추수를 하는데, 마지막 추수를 하는 사람을 두고 곡식어머니로 치부하여 놀림거리나 각종 행사의 대상으로 삼을 이유는 없다. 이런 행위는 가톨릭문화가 자리 잡은 지역에서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 앞 광장에서 그런 행사를 계속 한다. <황금가지>에서 초기 가톨릭은 기존의 민속 종교와 경쟁해야겠지만, 그들을 흡수하게 되면서 문화적 제의가 다르게 된 것이다. 글을 적는 지금이 2014년 8월 17일로서 한국에 가톨릭의 최고 수장이신 교황님이 방문했다.

 

한국에 와서 한국 천주교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123인에 대해 시복식을 내리는 가운데, 본래 윤지충이란 사람은 1791년 진산에서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워 역적이 되어 참수당한 사람이다. 본래 가톨릭에서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오면서 중국에 신앙을 퍼뜨리기 위해 god이란 신을 동양권의 천주로 대체하여 문화적 차이를 줄이려 했다. 하지만 당시 신해박해가 있던 시기에 교황청에서는 그런 동양의 문화를 일체 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것에 대한 사건이 성호학파 선비의 죽음이다. 지금이야 다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조치했지만, 유럽에서는 신에게 두 무릎을 꿇어도 군주에게 한 쪽만 꿇는다.

 

문화적 차이와 종교적 관념, 그리고 그 시대적 조건이 비극적인 역사가 탄생하는 점이다. 물론 당시 윤지충의 죽음은 천주교의 신앙심도 있었지만, 그가 정조 시대에 노론과 대립하던 남인 세력이었고, 그의 조상은 남인의 영수이며, 거두였다. 그의 죽음에는 신앙심이란 계기가 있지만, 당시 정치적(경제적) 이익에 따라 처형된 역사적 사건이다. 정조 이야기가 나와 그러나 <황금가지>에선 정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몸에 종기가 생겨 치료를 받아야 했으나, 종기가 결국 치료되지 않아 죽고 만다. 임금의 몸은 일반 인간의 몸이 아니고, 신성하기에 함부로 만질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다른 조선임금들도 종기가 날 경우 의원을 불렀고, 침술로 통해 종기를 치료했을 것이나, 정조는 그렇게 하지 않은 점에서 의아한 점은 많다. <황금가지>의 한계점은 단지 신성한 것과 그 신성함에 대한 인간들의 이야기만 초점을 맞추었지, 그것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판단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책이 계속 유효한 이유는 4가지 편에서 숲의 왕, 신의 살해, 속죄양, 황금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속죄양이 아직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제의라는 것은 누군가를 희생하여 그 희생에 따라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기 마련이다. 이성적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데도 계속 억지로 약자를 희생시키는 그 야만은 아직도 사회 저편의 문젯거리로 등장한다.

 

주술에서도 주술은 분명 이로운 것도 있으나 남을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도 있다. 21세기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미디어가 각종 TV 및 인터넷, 신문잡지 등으로 퍼진 공간에서는 사실 있지도 않은 거짓은 사실로 만들거나 사실조차 은폐하거나 왜곡한다. 주술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여기므로, 언론과 주술이 무엇이 다른가? 주술로서 희생양을 만들고, 그 희생양이 조직과 사회의 불온요소 만들어 광적으로 변하는 인간들을 보면 <황금가지>는 21세기에 도저히 유효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단지 아쉬운 것은 네미(Nemi)의 숲속에 있는 왕 대신 우리는 죄도 없거나 무관한 사람이 희생된다. 물론 <황금가지>에서 인신공양 되던 인간을 보면 죄 없는 인간이 많다는 점이었다.

 

죽음과 부활에서, 희생양이 죽으면 그에 해당되는 신은 계속 죽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영원히 젊음을 누려 그 사회집단의 인간들에게 계속 혜택을 준다고 한다. 우리는 가상의 세계로서 사람들을 기록하여 죽지 않게 한다. 물론 육체적 존재는 죽어도 그의 잔상이 남는 이미지는 계속 남아 그의 육체적인 죽음에서 사회적인 삶으로 부활하고 있다. 특히 역사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 자나 혹은 큰 역할을 기여한 자들도 현대인들의 생활에서 부활한다. 안 그러면 우리는 죽은 자의 이름에 사로잡혀 갈등하는 현실을 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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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화사 1 - Novel Engine POP
정연 지음, R.알니람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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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 아니면 인연인지 모르지만, 내가 읽어본 <유랑화사>를 읽는 순간, 이 책을 읽기 전에 읽고 있던 책과 뭔가 연계성이 있어서 놀라웠다. 그 책은 제임스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라는 책이다. <황금가지>는 네미(Nemi)라고 하는 숲 속에 호수가 있는 곳으로 아주 황홀한 풍경을 내뿜는 전설 같은 장소다.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에 어느 미친 남자가 칼을 들고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외치고 있다. 왕인 그는 신이면서도 또한 희생양이기도 하다. <황금가지>라는 책을 반 정도 읽을 쯤에 인류의 문화에 대해 조금씩 맛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황금가지>와 <유랑화사>를 같이 나는 다루는가?


기본적으로 <황금가지>는 인류학 관련도서이고, <유랑화사>는 노블엔진에서 만든 pop으로 만든 라이트노벨이다. 하지만 라이트노벨로만 보기에 어려운 이유는 pop이란 것은 popular, 즉 대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 <유랑화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내내 컬러 이미지는 표지 일러스트와 책갈피 정도였다. 겉은 환상 세계를 안내하는 라이트노벨인 것처럼 보여도 속은 완전히 소설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반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소설로 말이다. 내가 소설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소설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문자서사로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나, 그 이야기가 전혀 색 다른 세계가 아니라 지금 우리 한국인과 한국의 문화를 말하는 것과 같다.


예전에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을 읽으면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에서 서사의 가장 머리는 신화(神話)다. 신화는 신의 이야기라고 하나, 신은 정말 종교학이나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신이란 존재보단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에서 드러난 인간의 집단무의식이다. 신화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으로 통해 나오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로서 나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일상이나 혹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대사를 볼 수 있다. “있잖아! 이것 비밀인데, 이 이야기는 내 친구의 친구의 이야기야. 그래서 이 친구에게 어떤 일이 있었냐면...”


신화의 이야기는 바로 저렇게 인간이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자신이 드러낼 수 없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 사회의 사람들이 모두 생각하는 이야기도 드러낸다. 신화라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보단 왜곡되거나 은폐되거나 새로이 탄생하기도 한다. 신화라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고, 지금도 신화는 이루어지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가진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을 따라간다. 그런 점에서 <황금가지>라는 아주 무서운 살인 이야기가 실린 인류학 도서를 꺼내는 이유는 <황금가지>는 인류학이란 영역이 결국 신화와 경계로 마주보고 있다는 점이다.


신화는 미신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인류학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풀어간다. <황금가지>를 읽은 상태에서 <유랑화사>에 대해 딱하고 느낌이 오는 것은 바로 주술이란 점이다. 인간의 언어에 대해 논하자면, 인간의 언어는 주술성을 가지고 있고, 언어로서 나오는 글과 말은 상당한 힘이 있다는 점이다. 아니 과학적으로 내가 어느 사람에 대해 “재수 없으니 제발 없어주면 좋겠어!”라고 외쳐도 실제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위해는 없다. 하지만 <유랑화사>에서는 그런 일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로 지어내어 있고, <황금가지>에서도 그런 내용이 드러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런 주술이,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행위가 실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가령 어느 부족에서 터부(금지)되는 행위 중에서 사람이 걸어간 자리에 새겨진 발자국에 칼을 찌르거나 혹은 불길한 주술을 외치면 정말 그 사람에게 불길한 일이 닥치고, 어느 부족에서 터부시 되는 일을 겪으면 실제 그 터부에 접촉된 사람이 죽게 되는 경우도 있다. <유랑화사> 1권에 제4회에 해당되는 목각인형은 완벽한 주술의 세계였다. 그래서 <황금가지>를 읽는 동안, 그런 인류의 역사 중에서 미신에 대해 집착하는 인간은 비단 그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다.


왜냐하면 당시는 주문과 같은 주술이라면 지금은 유희적으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유희적인 주문이라도 아직도 그것은 주술적인 힘을 발휘한다. 작가의 글에서는 전통문화 요소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 살아있는 그 모든 것 혹은 살아있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신성성, 다소 애니미즘(Animism)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애니미즘은 눈앞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에 대해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원시종교 형태다. 애니미즘이 아주 원시적이고 미개하다면 곤란하다.


애니메이션 즉, Animation이란 단어에서 Anima는 영혼, Animate는 영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살아있지 않은 것에 대해 살아있는 것은 결국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믿음이고, 그것은 환상이란 영역으로 이어진다. 환상이 비현실적이지만, 결코 비현실이 아닌 이유는 환상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평소 드러나지 않은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시나 문학, 그림조차 그렇다. 무의식적으로 잠재된 집단적인 심리나 혹은 개인적으로 억압된 심리조차 드러난다.

<유랑화사>는 그런 환상 내지 미궁 속에 가려진 왜곡된 진실은 그림으로 통해 그것도 환상의 세계로 통해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존재하지 않은 자, 신령과 도깨비, 어떤 사건을 마치 조감도를 보듯이 그려내기도 한다. 공중에서 항공기나 인공위성도 없는데, 어떻게 그 상황을 정확하게 찾아날까? 인간의 내면에 가려진 이야기를 그림으로 환상적 공간을 연출한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인간은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스토리텔링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며 이야기할 때 인간은 그 이야기를 미리 생각하여 만드는 것보다 이야기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유랑화사>에서 보이는 이야기의 모티프는 바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생각한 게 아니라 후기를 보듯이 작가가 이야기를 보거나 들을 것을 자신이 이야기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소재 자체가 우리 전래동화(전설 속의 신화나 민담이 변형된 경우가 대부분)나 전설 속에 찾을 수 있는 이야기다. 인간이 아닌 여우가 인간으로 둔갑하는 것이나, 처녀귀신이 가진 잊을 수 없는 사랑이야기, 남을 위해를 가하는 인간, 심지어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까지도 말이다. 물론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문화는 인류학에서 그렇게 낯선 일도 아니고, 20세기까지 있었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유랑화사>는 이미 오랜 전부터 있던 이야기를 현대적인 관점으로 다시 그 시대의 배경을 맞추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서 대감이나 진사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며,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무당이나 무당을 사투리로 말하는 당골네가 등장한 것처럼, 문장에서 단어의 선택에서 한글의 고유명사를 등장시킬 정도 민담과 무속문화에 대해 깊이 보여주었다. 굿을 하는 무당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무속신앙에서 무(巫)라는 단어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그 중간 매개체에 인간이 있다. 즉 무당이란 존재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세상을 연결지어주는 매개체다.


위에서 말하던 <황금가지>에서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무참히 칼에 찔려 죽어야 하는 어느 늙은 남자의 행보는 바로 무속(巫俗) 문화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신은 눈앞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들은 존재한다고 여기고, 눈에 보이지 신의 존재를 있다고 만들기 위해서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인간을 내세운다. 인간에게 신과 사제 그리고 왕이란 이름을 내리면서 중요한 특성은 농경문화다. 봄이 되면 푸른 새싹이 돋고, 여름에 무성한 숲을 이루어 가을에는 수확을 하나, 겨울에는 모든 것이 죽음에 이른다.


겨울에 이르는 죽음은 결국 우리 모두의 죽음이고, 신은 영원불멸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여 새롭게 태어나기에 그 죽음을 대체하기 위해 인간의 살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니라면 왜 단군신화에서 왜 단군은 하늘의 자손이고, 그는 단군왕검으로 불려야 하는 것인가? 단군왕검은 결국 제사장과 군주의 2가지를 합한 것이다. 고대국가는 왕이 곧 신인 것이다. 왕과 제사장이 분리되면서 제사장의 역할을 무당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무당의 업무는 <유랑화사>에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들어주는 것이라 한다.


그 말은 인간은 누군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망자 내지 혹은 보통 인간들 안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구할 수 없다. 오로지 가능한 것은 광인만이 새로운 이야기나 혹은 세계의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독일 철학가인 니체는 현대철학에 매우 중요한 철학가이나, 그는 기본적으로 광인이었고, 광인이었기에 그런 저서를 남겼다. <황금가지>를 읽은 후에 <비극의 탄생>을 읽어본다면 느낄 수 있다. 위대하고 자애로운 디오니소스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가진 신이고, 포도주는 인간을 기쁘게 만들지만 인간을 미치게 만든다.


<비극의 탄생>처럼 고대 그리스는 거의 모든 인간이 시인이고 광인의 기질이 있었다면 이제 그 광인은 현대에 오면서 없어지게 된다. 즉 광인들이란 새로운 이야기와 혹은 기존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을 노래한다. <유랑화사>를 보면 세상을 이리저리 왕래하는 화사는 겉으로 보면 세상의 이치를 원래로 복구해주는 존재이나, 그를 두고 정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를 광인으로 보는 것이 맞다. 작가는 화사로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나, 화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고,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게 해준다.

 

광인이기에 작품 내에서 무당들이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을 그는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소설이지만, 소설이라도 한국의 구비문학 요소를 현대적으로 다시 되살린 작품이다. 인간인데 귀신이나 신의 이야기를 못 듣는 무당이란 점은, 신의 이야기란 결국 인간의 내면에 갇혀 있는 억압된 심리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화사는 바로 인간이 드러내지 못한 이야기를 계속 찾아다닌다. 물론 시대배경이 조선시대고, 비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해도 그 이야기의 중심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보통 우리 같은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이야기다.

 

한국의 민담에는 치명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그것은 권선징악이란 단순한 진리이다. <유랑화사>에서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 대해 4가지 이야기 중에 반을 차지하며, 그 모티프가 작용하여 배나무 꽃 같은 여우소녀가 화사와 여행하게 된 동기다. 여우소녀는 인간의 존재에서는 괴이한 존재다. 괴이한 존재가 괴이한 사건을 맞이하면서 풀어가는 이야기는 민담의 기본적으로 적용되는 권선징악 이외에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찾아가기도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 담겨진 것이 있다. 바로 억압, 은폐, 왜곡이란 신화란 바로 거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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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 2 -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2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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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 2권, 분명 이 책은 진중권 교수가 일반인들 중에서 미학이나 인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을 위해 만든 책이 아니라 정말로 미학이나 인문학에 깊이 들어간 사람을 위해 만든 책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동안 <미학 오디세이>, <생각의 지도>, <아이콘> 등과 서적을 보면 그렇게까지 어렵게 적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미학이란 것은 아름다움에 대해 연구하기에 기본적으로 미학을 알기 위해서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서적으로 통해 볼 수밖에 없다. 미학의 아름다움이란 그 가치를 찾는 것이고, 미학에서 찾는 가치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서 뽑거나 혹은 현실이 아닌 이상이나 관념에서도 존재한다.

 

가령 고전주의 미학을 찾아보면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모멘트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처럼 교회의 권력에 의해 유럽이 지배되는 정치적 구조에서 내세 내지 선악의 이분법은 군주와 종교 세력의 결탁에 따라 백성들(민중으로 판단하기 어려움)을 지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성이 중시되고, 신의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으로 가면서 과학적 근거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현실적인 시각과 관점이 예술에 반영되고, 미학적인 틀을 반영되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보면 매우 과학적인 구조로 보이는데, 작품을 만들면서 물리적인 계산과 생물학적인 해부학으로 통해 완벽한 동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즉 눈에 보이지 않은 대상을 신성하게 만든 고전주의적 미학과 현실의 존재를 모방하는 과학적인 미학은 계속 대립되거나 혹은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사고를 중시하는 계몽주의 사상이나 또는 더 나아가 휴머니즘은 20세기의 2번의 큰 전쟁으로 인간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초현실주의 내지 반미학이란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2번의 큰 전쟁의 원인은 제국주의적인 성향과 더불어 자본주의에 대한 급가속적인 팽창으로 인해 상품의 판로와 재료의 구입이란 경제적 조건이 정치적 이익과 결합되어 터진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란 것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 체계에 드러난 비인간적인 모습, 전쟁에서 보이는 비이성적인 인간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지에 대해 인문학을 접근한다는 것은 바로 이미지가 가진 매체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활자문화가 도래하지 않은 시기에는 과학적인 사고와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전쟁이란 것도 귀족이나 기사 중심으로 벌였으며, 일반적인 농민을 최대한 휘말리지 않도록 했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다보면 군주는 모두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어야하겠지만, 한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그것은 일반 백성들을 건들지 말고, 상대국가의 군주나 정치세력만 제거하라는 것이다. 백성들을 건드는 순간 민심을 잃게 되어 정복자인 군주는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를 20세기에서 전투는 군인과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조차 살해하고, 20세기 중후반부터 21세기는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격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최소한의 보편적 윤리의식이 결여된 사건을 보여준 계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저지른 행위가 비도덕적인 것을 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미디어로 통해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접한 것은 무엇을 통해 우리는 보고 들었는가? 그것은 촉각이나 미각, 후각으로 정보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청각과 시각으로 멀티미디어 내지 또는 이미지라는 시각적 정보로 알게 된 것이다. 특히 뉴스나 인터넷 매체의 전달력에서 우리는 시각적인 정보로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전쟁의 학살대상이 군인에서 민간인, 정보의 전달력이 중세시대 때는 그림이나 말, 문자문화가 도래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시대에는 신문이나 잡지 등이었고, 이제는 신문과 잡지보다는 TV와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폰까지 주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때까지 정보를 얻은 문자중심에서 탈피하여 영상중심으로 이어지고, 영상문화는 단순히 눈보다는 청각적인 매체로 통해 탈문자화 하였다. 문자의 탈피는 이미지에 대한 정보력을 더 강하게 부여했으며,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 자체가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미지의 구축은 아날로그 시대나 그 이전처럼 분리된 정보로서 대중에게 전달되는 게 아니라, 이미지의 복제와 복제로 통해 그 이미지가 모두에게 같은 조건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지의 세계는 살아있는 자에 대해 가둠으로서 이미지의 공간에 찍혀진 피사체는 죽은 존재로 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도 아니므로 사진 속의 존재는 기록된 죽음일 것이다. 사진은 기존에 가진 기록기능을 대체하는 방편에서 최고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인물의 초상화를 그릴 이유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초상화보단 사진기로 촬영된 사진이 훨씬 더 실물을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기술의 발달은 회화의 새로운 길을 제공했으며, 눈에 보이는 실물보단 초현실적인 요소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전쟁에서 보인 비인간적 행위는 인류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은 우리에게 무섭고도 충격적인 느낌을 전달해준다. 그 충격이란 단순히 공포와 낯설게 보이려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것으로 통해 우리가 간과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과 같은 경우 다다이즘으로서 레디-메이드란 20세기 초반 생활양식을 비판했고, 가장 인상적인 영화장면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준 기계와 인간의 결합성이다.

 

기계와 인간은 본래 이원적인 관계이나, 테일러주의 혹은 포드주의라는 경제적인 시스템은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로서 보는 것이다. 기계 톱니바퀴를 돌리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은 상당히 우스꽝스럽게 연출되어 보이나, 그 모습은 살아있는 인간보다는 살아있지 않은 인간으로 보인다. 인간인데도 인간처럼 보이지 않은 섬뜩한 느낌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20세기 2번의 전쟁에서 인간의 대량학살은 정신적 외상이란 트라우마를 낳기 시작했다.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인간은 삶에 대한 열망보단 죽음에 대한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의 죽음은 항상 원하지 않는다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나, 무의식적인 영역에서 죽음에 대한 욕망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죽음은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낯선 존재는 아니지만, 인간 그 개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낯선 행위다. 단지 그 익숙한 낯설음에 대해 억압하므로 죽음의 순간에서 벗어나지만,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은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간극 사이에 만들어진 예술품을 본다면 한스 밸머의 인형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신체형식인 인형이 매우 괴기스럽게 보이나, 그 괴기스러운 모습에 색다른 매력을 느낀다. 낯선 것이나 왠지 낯설지 않게 보이거나, 또는 낯설지 않은 것 같아도 낯선 것을 보는 것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게 애매모호하게 될 때 우린 언캐니라고 부른다. 언캐니의 존재에서 인간은 실제 존재하는 인간 또는 존재가 아니라 새롭게 구성한 인간 내지 존재를 만들어낸다.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은 무존재를 만들어내서 새롭게 존재성을 부여한다.

 

내가 평소에 즐겨보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본다면, 그것들은 분명 실존하지 않은 존재이나, 마치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는 각 캐릭터에 대한 특징과 속성을 중시했으나, 어느 순간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실재 인간과 비슷한 외형과 얼굴모양을 가지게 되었다.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모습은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최대한 반영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실존하는 인간과 다르게 생겼으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와 전혀 다르게 생겼기에 섬뜩한 느낌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3D영상의 구축과 더불어 실재 인간의 외형을 따라한 캐릭터들이 나오면서 우리는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을 받기 시작한다.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속성이 사라진 캐릭터가 외려 인간이 닮은 모습에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보이기에 언캐니로 받아들인다. 캐릭터를 바라보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인간에 의해 주시당하는 캐릭터의 간극에서 인간은 자신보다 더 완벽한 인간처럼 보이는 캐릭터에 대해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과 같은 존재가 있기를 바라나, 막상 그 존재가 눈앞에 등장한다면 오히려 적대적으로 변해 매우 낯설고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이 낯설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 스스로 가진 가치관의 변화와 시대적 흐름에서다. 우리가 이성적인 존재라고 여기고 만들어온 문명사회가 오히려 인간을 파괴하면서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오히려 언캐니하게 된 것이다. 그런 언캐니의 요소에서 <이미지 인문학> 2권에서는 재미있는 요소가 나타난다. 바로 그 언캐니가 처음에는 매우 낯설고 불안하게 만들지만, 이제는 언캐니가 하나의 친숙성으로 되돌려지는 것이다.

 

이 부분이 너무 새로운 개념이고, 막상 생각하면 현실에 적용된 내용이니 많이 놀라웠다. 몇 년 전에 개봉된 <아바타>의 경우, 분명 외계인은 우리 인간과 유사하게 생긴 종족이나, 그 모습에 대해 불안감 내지 낯선 모습만으로 다가온 게 아니었다. 오히려 후반으로 갈수록 아바타의 캐릭터가 친숙하게 여기게 된다. 또한 언캐니하던 3D 영상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가령 오락실에서 인기 있는 게임으로 <철권> 시리즈가 있다. 철권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오락실의 오프닝영상이나 혹은 영화로 만든 영상을 본다면 그다지 낯설지 않게 보인다.

 

3D 영상에서도 인간처럼 작고 섬세한 근육이 보이고, 얼굴표정과 몸의 움직임이 매우 흡사하다. 본질적으로 인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과 같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아니라면 인간이 언캐니(그것이 언캐니인지도 모르면서)의 이미지들을 계속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그것이 정말 언캐니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못하여 낯선 것들이 낯선 게 아니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 최초의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열차>다. 이 흑백필름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실제 시오타 역에 도착한 열차를 촬영한 시퀀스로, 약 50초의 롱 테이크로 보여준다.

 

당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진짜 그 열차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처럼 보여 극장 내부는 혼란으로 쌓였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1960년대 한국에 흑백 TV가 보급될 때 처음 TV 드라마를 보던 사람은 TV 안의 사람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하는 질문을 TV에서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TV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지만, TV에 나오는 사람에 대해 마치 옆에 있는 사람이나 또는 그 대상에게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있다. 하이퍼리얼리티한 공간을 만든 TV 이미지의 아우라는 여전하다. 그렇지 않으면 왜 TV 드라마의 연예인을 두고 많은 팬들은 열광하는가?

 

이미지의 세계는 바로 저런 대중매체로 동시다발적으로 정보가 전달되므로, 설사 실존한 인물이 피사체로 담겨도 그 인물은 진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가상의 존재 내지 이미 그 모습은 사라진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이미지는 실존한 인물을 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존재조차 만들어낸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는 이미 존재한 것을 이미지로 기록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것을 창조하는 것과 같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에서 “신은 죽었다.”로 변화하면서 이제는 인간이 신화의 공간에 잠든 환상을 과학의 힘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로 이끌어낸다.

 

낯선 것들에 대한 현실화는 인간에게 큰 가능성을 부여하기도 하나, 인간 그 자체를 기계 내지 또는 가상의 영역으로 가려진 존재로 은폐할 수 있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처럼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사실로 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란 세계에 아무 것도 없지만, 그 아무 것도 없기에 하나의 진실로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조차도 우리는 이미지로서 알아갈 수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는 이미지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문맹인이라고 한다. 이미지 자체가 의미하는 정보는 알겠으나, 그 의미하는 정보의 숨은 의도는 읽지 못한 경우가 많다. 미디어에서 등장한 이미지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정보이므로 그 정보는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조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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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이 책에 대한 호응이 별로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대중적이지 않아서 그런가요 ?

만화애니비평 2014-08-07 14:07   좋아요 0 | URL
정말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어려운 개념도 나오고, 새로운 개념도 나오고, 게다가 새로운 예술작품도 많이 나옵니다. 진중권 교수 이 양반 국내가 아니라 독일이나 프랑스에 있는 편이 훨씬 본인에게 이익이 될 듯합니다.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지음, 유재홍 옮김 / 울력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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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사야할듯, 드보르의 저작들이 아직 번역 되지 않은 게 많지만..
현실문화연구에 물어보니 책의 원본이 없어졌다고 했는데, 다른 출판사로 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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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닝기미, 이거 10만 원에 중고로 팔라고 할 때 팔았어야 했는데............. 새책이 나오다니 억울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8-06 10:46   좋아요 0 | URL
10만원 까지 올라갔습니까?
조금 아깝군요...ㅎㅎ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1 - J Novel
마미야 나츠키 지음, 시로미소 그림 / 서울문화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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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이상한 사람의 정신인지 혹은 낯선 사랑의 정신인지? 아무튼 제목으로 봐서는 분명히 교복을 입은 두 사람이 서로 교차하는 장면에서 학원물과 연애물이 등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분명 이 작품은 라이트노벨이지만, 라이트노벨로 하기에는 뭔가 큰 갭이 보인다. 작가인 마미야 나츠키는 어떤 인물인줄 모르지만, 그가 보고 있는 관점과 시각은 분명 이 작품 표지에 나오는 소녀인 사이케테이 리코로 대체된다. 사이키델릭이란 정신에서 그 말을 살짝 바꾸어 사이케테이, 즉 사이키한 인물로서 리코를 등장시킨 것이다.

 

역시 제목부터 정신이란 것을 내세울 때부터 조금 이상했지만, 막상 책을 열어보니 역시 그 예감을 틀리지 않았다. 책 안에서 지그문트 프로이드와 그의 제자이자 배신자인 칼 구스타프 융이란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정신분석에 대해서 논하자면 기라성 같은 존재이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한 연구는 20세기에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구조주의에 영향을 끼칠 정도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제목인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의 소유자는 리코가 되는 것이고, 그녀는 마치 프로이트와 융을 꺼내면서 일러스트 표지 주인공 중 하나인 유우진을 자꾸 파헤치고 꺼내려 한다.

 

가령 이것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파리정신분석학회에서 파문되어 프랑스정신분석학회를 만든 라캉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물론 라캉에 대한 것은 구조주의 내지 후기구조주의를 소개하는 책으로 만나고, 대략적인 이론만 봤을 뿐이나, 그가 치료하는 방법 중에 환자의 뺨을 손바닥으로 치는 것이다. 만약 환자가 뺨을 맞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다면 그 치료는 성공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환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로서 타인과의 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즉 어느 문제대상이 감추고 있는 그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서는 충격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라캉이 아니더라도 정신분석적인 방법으로 리코는 유우진의 방어기제적인 요소를 간파하여 그의 벽을 허물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기인이란 별명과 함께 상당히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유우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문제로서 파괴한다. 기존에 갇혀있는 유우진의 고립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행동하는 리코의 관계에서 리코의 정이라면 유우진의 반이고, 그 둘의 대립은 합으로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되는 셈이었다. 그 부정을 부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리코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방어기제에 대한 공격이었다. 감추고 싶은 것에 대한 재생이고 회상이었다.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나 알 수 없는 깊은 아픔을 지니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그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기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그 아픔을 밖으로 드러내어 해소시키는 것이 정신분석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이다.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면 결국 곯아 썩는 것이 인간이다. 육체적으로 세포가 균에 침식당해 몸이 곪아 가고, 정신적으로 더욱 고립되어 극단적 행위를 하게 된다. 유우진의 자살충동은 바로 정신적인 고립에서 발생되는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리코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가령 대표적으로 정신분석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다.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남자 오이디푸스는 인간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는 인간은 근친에 대한 터부의식과 반드시 근친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정신적으로 가족에 대하여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유우진이 부모를 잃은 것은 8살, 그의 누나인 유우키는 초반에는 16살이고, 후반에는 17살이다. 작가가 실수한 것인지 번역과 편집과정에서 실수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남매는 아직 마음이 여릴 때 부모를 잃는 충격을 맛보았다.

 

그런 상태에서 어린 유우진는 누나인 유우키에 대해 친누나이지만,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우키는 달랐다. 그녀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동생도 잘 돌보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었다. 유우진에게 어머니를 대신한 유우키 자신이 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대체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직장 상사와 불륜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라면, 반대로 엘렉트라콤플렉스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서 된 것이다.

 

하지만 누나인 유우키가 아버지 같은 직장상사에게 마음이 빼앗기면 어머니 같던 누나 유우키를 잃어버린 것처럼 유우진은 질투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종말은 비극적인 살인사건과 자살로 이어진 것이다. 유유키의 친구이며, 리코의 친구이자 부활동교사인 마호 역시 이 사건을 두고 계속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드러나기 싫은 과거의 기억이 계속 그녀의 그림자에 숨어 유령처럼 머물고 있었다. 유우키의 죽음에 대해 마호 역시 유우진에 대한 죄의식과 깊은 슬픔이 남아있었기에 리코는 유우진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 그 악몽을 상기시키며, 이제는 유우키를 대신하여 리코라는 이름을 유우진에게 넣어 주려고 했다.

 

결국 유우키는 가족이란 이름의 누나에서 사랑이란 이름의 누나(선배)로 대체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도는 오토마톤처럼 유우키는 죽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죽음으로서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보였다. 유우진은 자신의 존재를 두고 실존주의적 모습은 세상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와 분리되어 있기에 고독을 추구하는 한 마리의 늑대와 같았다. 그렇지만 유우진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에서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를 추구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간 누나처럼 자신도 사라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코가 유우키의 죽음을 모방하여 유우진의 트라우마를 부수려 했다.

 

유우키는 유우진을 사랑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 점과 그 유우키의 죽음에서 얻은 고통의 사슬을 끊고, 리코라는 한 사람을 위해 살아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이런 용어들의 사용에서 상당히 인용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이 나에게 도착하기 전에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있었다. 기인처럼 문학가이자 시인인 괴테의 명언을 남기는 리코에서 리코가 보여주는 행동은 결국 유우진의 사슬을 끊어주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자신이 사모하던 로테의 집에서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와 논쟁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베르테르는 “폭군의 압제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드디어 궐기하여 그 사슬을 끊어버릴 경우”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베르테르가 말한 사슬과 리코가 말하는 사슬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사슬이란 말은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온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로 묶여 있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을 것은 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라고 말이다. 리코가 유우진에게 계속 말하는 사슬은 결국 유우진이 세상을 살아가야 인생의 자유고, 그 사슬은 유우진의 고뇌에 자리 잡은 누나의 죽음이고, 그것을 이겨낼 방법은 사랑이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을 읽다보면 문학, 영화, 철학, 정신분석에서 나온 내용들을 많이 인용한다. 라이트노벨이란 재미를 넣은 경소설이지만, 보통 일반 시중에 나온 왜만한 소설보다 더 깊이 내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때에 따라서는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을 읽는 순간 나는 프랑스의 유명한 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의 색>에서 <Blue>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Blue>라는 영화는 프랑스 삼색기에서 푸른색으로 자유가 무엇인지 다룬 것으로 여자주인공은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고 스스로 고립하기로 한다. 혼자만의 방랑 속에서 남편의 물건을 정리하던 중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 바람피운 여자는 아이까지 임신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친구인 남자가 여자주인공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나,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같이 남편이 남긴 악보를 정리하던 중에 서로에 대해 사랑하면서, 여자주인공은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 인간은 본래 자연적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결국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사랑이란 감정을 두고 원시시대의 인간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즐겼다면, 사회가 생기면서 사랑은 인간의 사회성으로 이어진다. 결국 사슬이란 존재는 인간의 도처에 묶여있기 때문에 그 사슬을 끊을 방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감이란 점이다. 고립된 유우키는 자유보단 방종에 가까웠으며, 그것은 자유보다는 자신만의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하지만 감옥은 유우키만 것이 아니었다. 유우진에게 말은 건네주는 이안과 유이, 유이는 과거 중학교 시절 어떤 여자아이를 왕따 시키는 집단에 속해있었다. 당시 유우진만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자 반대표로 억지로 끌려나와 유우진에게 협박적인 말투를 내뱉다 오히려 역으로 자신이 공포를 맛본다. 인간을 속박하는 사슬은 도처에 있다는 것은 결국 그런 인간의 집단주의에서 비롯되는 비이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은 정신분석에 대한 내용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작가는 알고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연애 카운슬러로 활동하는 마호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모습으로 옷을 입는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자크 라캉이 남긴 말 중에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와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가 있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남긴 것이다.

 

그런 명제에서 리코는 항상 튀는 행동을 한다. 자신이 여자임에도 여자인 리코를 좋아하는 엔마 사나의 지나친 장난에서 리코는 옷이 물에 젖어 브래지어가 노출되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다. 만약 보통 여자라면 가슴을 가리고 수줍은 얼굴로 피하려 했으나, 오히려 당당히 자신의 몸매를 뽐내는 그녀는 참 특이하였다. 아니라면 엔마 사나가 아방가르드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것처럼 리코 자체가 아방가르드, 즉 반미학적인 전위성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렇기에 유우진을 구하였을 것이다.

 

인간이 가진 사회성에서는 인간 스스로가 규격화 일반화 획일화를 강요한다. 상대방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다른 언행을 보여주면 바로 낙오시키거나 차별한다. 이런 것을 두고 집단주의의 한계성인가? 자신들이 옳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틀려야 하고, 어긋나야 한다. 인간은 겉으로 예외의 존재를 부정해도 속으로 나오기를 바란다. 그래야지 자신들이 단합되어 정의의 이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에서 이안은 제대로 헤쳐 나오지 못했고, 유이는 그들의 일부가 되어 유우진을 공격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 사고방식을 부수는 색다른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은 사랑으로서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책 제목이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이 아닌가 싶다. 1권에서 유우진에 대해 리코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그를 사회적 존재로 변모시켰다. 남과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는 유우진에서 2권에서는 유우진의 새로운 인생과 그 주변에 있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이 책에서는 현재 기성세대 관념적으로 매우 위험한 부분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유우진 옆에 계속 머문 이안과 리코 옆에 계속 있던 사나에 대해서다. 리코 친구 사나는 남자처럼 행동하나 사실 여자였고, 이안은 남자인 유우진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안은 감정적인 모습이 드러내고, 사나는 매우 차갑고 냉혹한 모습이 보인다. 작가가 융이란 이름을 드러낸 것처럼 남자와 여자는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지고 있으나 무의식적으로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 있고, 여성성 안에도 남성성이 존재한다. 이안이나 사나의 모습은 그런 인간의 상대적인 성별에 대한 심리적 왜곡이 내재되어 있다. 라이트노벨이라도 환상과 마법, 공상과학을 배제된 평범한 학교공간에서 다루어지는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다소 과장되어 있을지 모르나, 그 이야기에서 차용된 모티브들은 분명 지금이라도 어디에선가 숨 쉬고 살고 있을법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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