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하위문화는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본의 하위문화에 어느 순간 알게 모르게 접하고 만다. 대부분 한국에서 방영하고 드라마 중에서 일본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원작을 토대로 제작된 작품들이 몇몇 존재한다. 하위문화라는 설정에 우리는 이른바 오타쿠문화, 즉 오덕 내지 덕후로서 경멸하나 사실 일반 대중조차도 그 오타쿠 문화에 어느 순간 휩말려 자신조차 오타쿠 문화 일부에 신세지고 있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대중문화의 대다수로서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이런 부분에서 무지한 자들의 박식함이란 칭호를 부여하고 싶다.

 

특히 대중들은 이른바 문학에 대해 자주 감수성을 느끼려고 한다. 베스트셀러나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이 원고를 찍으면 거기에 열광하여 마치 자신이 문화교양인 것처럼 책을 사서 본다. 하지만 정작 그 책에 적혀있는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고, 작품 내의 주인공에게 몰입한다. 물론 즐기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나, 적어도 자신이 뭔가 있다는 생각을 버렸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째 보면 이런 대중문화현상을 두고 지적하고 비판하는 나 역시 그런 우월감에 젖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는 많은 대중들은 근본의 진실과 원인을 찾아가기 보다는 그저 겉 테두리에 묻어진 빛나는 상표를 치중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보다 더 잘 알고 잘 깊이 들어가는 사람도 충분히 많을 것이다. 단지 얼마나 깊이 접근하고 이해하고 관심 있게 보는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런 차이가 그래도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나 더 본다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하나 더 본 후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선생님의 가방>에서 이런 거창한 문장을 주절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선생님의 가방>에는 쓰키코(아마 한자로 월자, 月子인듯)라는 여자가 바로 일본 특유의 하위문화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작가 본인이 하위문화에 접했는지 아니면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지 모른다. 하위문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대중들이 바라보는 시선 중에 하나인 경멸, 모멸, 우스운, 또는 즐거움 혹은 새로운 경험 등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위문화는 단순히 대중문화 아래에 있는 별다른 세계의 문화가 아니라 대중문화라는 상부구조가 존재하기 위해 하위문화라는 하부구조가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평소 드러나지 못한 영역이 하위문화 콘텐츠에서 엄청난 폭풍과 쓰나미를 일으킨다.

 

폭풍과 쓰나미 같이 강한 힘도 있지만 때로는 산들바람이나 밀물처럼 물러가는 경우도 있다. 바로 <선생님의 가방>이 그렇다. 중년남성에 대해 소녀가 가지는 연정, 혹은 중년여성이 가지는 노년남성에 대한 연정, 이것이 조금 새로워 보인다고 생각하면 착각일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문학이 아니라 이미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생님의 가방> 역시 만화책 상하권으로 출판된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미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인 <토끼드롭스>를 보면 알겠지만, 주인공 남자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딸과 같이 사는 모습이 나온다.

 

문제는 할아버지는 죽을 때 그 따님은 초등학교 정도 소녀라는 점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형제이면서도 나이는 그 남자주인공보다 어리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남자주인공 연배와 비슷하다. 그러면서 그 소녀의 어머니는 주인공 남자에게 조금 더 나이 들면 자신이 사랑하던 그 노인과 비슷해 보이겠다고 한다. 물론 여기만 아니다. 일본 만화책으로 나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최근에 일본 내에서 실사영화판으로 제작된 <해파리 공주>에서도 여자 오타쿠들이 모인 여관장에 미중년 내니 미노년을 좋아하는 여성도 있었다. 다른 여자 오타쿠들은 삼국지에 아주 빠져 있거나 히로인 본인은 해파리에 빠져있다.

 

이런 상황을 토대로 만든 작품에서 <선생님의 가방>에서 보이는 쓰키코와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낯설지 않다. 단지 위 작품과 다른 점은 전자는 로맨틱한 분위기보단 개그요소로 반영하거나 혹은 가족 간의 사랑으로써 관계를 보여준다. <선생님의 가방>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같이 데이트하는 모습은 없다. 물론 전자나 후자 역시 모두 소박한 일상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현실적으로 전혀 낯설지 않을 모습이란 점이다. 국내 TV에서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어느 택시기사의 아내가 여고생이었다. 택시기사는 거의 40에 가까운 아저씨, 그러나 2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충격적인 현실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어느 정도 현실적 기반을 둔 리얼리즘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의 가방>을 읽어보며 생각하던 바는, 소설 제목이 바로 <선생님의 가방>이듯이 그 가방이란 존재란 무엇인가 대해 생각해본다. 가방이란 무엇을 담아둘 수 있어 급할 때 보관하여 꺼내어 사용할 수 있다. 쓰키코가 처음에는 선생님인 마쓰모토 하루쓰나라는 인물에 대해 단지 고교 시절에 국어선생이란 점만 기억한다. 그러나 2사람은 계속 선술집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잔을 나누며, 2년 동안 계속 만남을 유지하고, 2년이 다 된 시점에 정식교제를 한다. 선생님과 쓰키코는 행복한 애인으로서 시간을 보내지만, 시간의 흐름이란 그 어떤 인간을 비켜나가지 못한다.

 

책 제목처럼 <선생님의 가방>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가지는 선생님이 사용했던 물건이라는 물질적인 조건 ①, 다른 1가지는 선생님이 그 가방을 계속 들고 다니면서 선생님이 운명한 후 그 가방이 쓰키코가 보관한다는 것은 가방이 곧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상징적인 조건 ②, 마지막으로 정신분석적으로 가방이란 것은 모자나 구두와 같이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성적인 요소 ③이다. 선생님이 들고 다닌 가방은 선생님의 것이나, 이제는 쓰키코의 것이 되고, 쓰키코의 것이 되었기에 쓰키코는 2사람의 시간을 그 가방으로서 되새길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가방>에서 가방이 쓰키코의 것이 되었지만, 다르게 본다면 쓰키코 자체가 선생님의 가방이 되어주었다. 과거의 스승과 제자, 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에서 가방의 주인이 누가 되었는가? 이 작품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쓰키코의 심정이다. 2사람은 여행을 가고, 오랫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은 쓰키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았던 선생님, 그 섬의 여행은 아주 특별했다. 쓰키코는 집에 가면 아버지가 안 계시고, 늙은 어머니만 계시며, 오빠는 결혼하여 조카까지 두고 있다. 쓰키코는 예전에 사귀던 애인이 있었으나 뭔가 맞지 않아 헤어진다.

 

쓰키코라는 여자, 아니 여성작가로 통해 보는 인간의 욕망은 어머니를 근친상간하고픈 오이디푸스의 욕망이 있다면, 반대로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두고 엘렉트라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보였다. 아버지 없는 중년에 가까운 여성,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있을 곳을 찾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방황하나, 오직 선생님만이 자신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 성욕을 느낀 것은 츠키코였다. 자신의 가슴을 만지면 부드럽지도 아니 딱딱하지도 않은 그 어중간한 상태, 복부를 지나 아래를 더 내려가니 자신의 손으로 만지기가 어색한 그녀에게 선생님의 손길이 필요했다.

 

처음 선생님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정식교제에서는 그것을 오히려 나누어야지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다. 사랑의 조건은 정신이 우선이고 육체는 따라온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젊은 남성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젊은 남성이 아니 노년의 남성이다. 아마 그런 세월의 연륜에서 비롯되었을까? 적어도 그 힘든 고비를 맞은 이유는 선생님을 떠나간 사모님이 묻힌 섬을 찾아서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의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트라우마 내지 상처, 그리고 과거의 흔적이다. 그것과 마주하고 부딪히지 않은 이상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과거의 흔적들과 앞으로 맞이해야할 앞 현실의 상황이 서로 부딪히는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새로운 결론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쓰키코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계속 약간 특이한 말과 행동을 하던 선생님, 하지만 선생님은 쓰키코를 배려하여 아주 섬세하게 그녀의 주변을 받아준다. 쓰키코를 예전에 좋아했다던 남자동창, 그는 분명 멋진 남성일 것이나, 선생님보다 못했다. 육체적으로 남자동창의 어깨가 넓었을 것이나, 정신적으로 선생님의 어깨를 무한의 세계이니 말이다.

 

왠지 누군가에게 귀여움을 받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응석을 받아달라고 원하는 것인지 쓰키코의 행동은 분명히 응석을 당장 부르지 않아도 어느 순간 응석을 부린다. 그런 응석을 받아주는 선생님의 행동은 여태까지 엉뚱했다. 그런 만큼 여유와 침착함, 당당함이 있었다. 책 안에 다쇼라는 말이 있다. 다생(多生)이란 말에서 많은 삶을 사는 것이란 말도 있지만, 불교적인 철학에서 윤회로 통해 그 이전의 삶까지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이렇게 스승과 제자지만, 그 이전에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 몰라도 다른 형태로 서로를 만났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인연이란 운명에서 쓰키코의 과거의 남자친구는 쓰키코의 친한 친구와 만나 결혼한다. 그것도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말이다. 이때 결혼식장에서 친구와 옛날 애인의 결혼은 마치 운명이라고 나온 말이 쓰키코에게 운명이란 그저 어디에 갖다 붙이면 그대로 되는 편한 이름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운명은 갑자기 번개처럼 오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운명처럼 되어버린 하나의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웠던 사랑하던 이는 자연의 진리처럼 자연으로 보내버렸다. 그래도 쓰키코는 선생님을 자연의 영원한 품에 보내도 마음은 보내지 아니했다. 가방 안의 어두운 빈 공간을 보며 다시 쓰키코는 되새긴다.

 

[“선생님, 하고 부르면 천장 근처에서 가끔 쓰키코 상,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일이 있다. 유도후에는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대구랑 쑥갓을 넣게 되었어요. 선생님, 언젠가 또 만납시다. 내가 말하면 천장의 선생님도 언젠가 꼭 만납시다. 하고 대답한다.” 그런 밤이면 선생님의 가방을 열어 안을 들여다본다. 가방 안에는 텅 빈,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그저 망망한 공간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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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간 -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지음, 류한수 옮김 / 교양인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추석연휴에 남들처럼 맛있는 음식도 먹고, 보고 싶은 애니메이션도 보고, 그리고 주어진 논문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런 추석연휴를 남들보다 더 잉여적으로 보낸 나에게 이번에 서평을 적은 책 마지막에서 무척 놀랄만한 사진 1장이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홍범도 장군의 사진이 보였기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하면 김좌진 장군과 더불어 대한민국 항일운동에서 큰 활약을 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전쟁사를 만든 투사다. 독립군 투사 대부분이 민족종교인 대종교 일원 중에 하나이었으나, 그는 전형적인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내가 읽고 있던 <혁명의 시간>이란 책에 나올 줄 몰랐다.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 부분, 즉 번역자인 상명대학교 류한수 교수가 개인적으로 적을 글에서 나온 사진이다. 홍범도 장군은 1919년 삼일운동을 확인하고 만주와 러시아 이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36~1938년 스탈린의 모스크바재판 기간 중에 강제로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되었다. 까레이스키, 러시아어로 조선인을 의미하는 바로 그 슬픔을 간직한 명칭이 생기고 말았다. 오늘 낮에 카자흐스탄 한국인들의 후예가 나온 것을 보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내지 또는 조선말기 잔혹한 가렴주구를 피하여 먼 이국땅으로 밟은 해외동포들, 그들은 까레이스키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독특한 문화를 유지했다.

 

이미 한국어를 잊어도 벌써 잊을 해외교포 후손들, 그런 후손들을 보면서 <혁명의 시간>에서 나타난 홍범도 장군은 모습을 참으로 기이했다. 그는 러시아혁명사에서 혁명운동에 참여했고, 그를 위시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볼셰비키혁명에 가담했거나 또는 그 혁명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조차 놀라웠다. 홍범도 장군은 볼셰비키당원으로 분명 1920년 “극동의 볼셰비키 정치 지도위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게다가 홍범도 장군의 사진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홍범도 장군은 소비에트연방 최초의 총수이며, 볼셰비키혁명을 지휘한 레닌에게 권총을 직접 받았다는 점이고, 그 권총은 평생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예전에 러시아혁명에 대한 공부로 TV 다큐멘터리를 보는 도중 코민테른이란 제3 인터내셔널 모임에서 조선인이 참여한 것을 보았고, 일제에 의해 지배받던 제3국인 조선의 독립을 위해 레닌이 원조하기로 한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런 모양새로 홍범도 장군이 1920년 잊을 수 없는 국군 전쟁사 청산리 전투에서 이미 볼셰비키로서 활동했다는 점은 참으로 기이하고 씁쓸한 일이다. 한국전쟁 전후로 좌우이데올로기 문제점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 모순은 사회구조적으로 큰 문제를 보여주었다. 어느 유명한 대학교의 명예교수는 당시 중산층은 대부분 친일파라는 말에서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당시 중산층의 기준은 어느 정도로 재산을 가졌고, 사회적 지위는 무엇이고 자신은 그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 천재적인 독문학자인 전혜린 교수는 자신의 아버지가 대표적인 악독한 친일파란 사실에서 고통스러워했고, 그런 부분에 대해 젊은 시절 양심에 대한 가책을 느낀 모양이다. 양심의 가책마저 보이지 않고, 지나간 오점에 대한 반성하여 새로운 길을 찾기보단, 그것을 두고 하나의 터부적인 속성을 넘어 이제는 보편타당한 논리로 이끌어내는 현실을 보면 과연 역사란 왜 중요한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분명 러시아혁명사에서 1905년 피의 일요일부터 시작하여, 1917년 2월과 10월은 잊을 수 없는 세계사이다. 서양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면 분명 근대이전 사회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이고, 근대사회부터는 러시아혁명일 것이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을 읽지 않고서는 오늘날 존재하는 나 자신만 아니라 우리 모두, 더 나아가 세계라는 큰 영역조차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사람들은 프랑스혁명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프랑스혁명에 대한 개념과 원인 그리고 그것을 발동하게 된 사상조차 이해할 수 없다. 지식의 맹신은 오히려 독이라는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장 자크 루소가 거론했지만, 그런다고 지식의 맹신조차 없이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론의 허영심만큼 더 위험한 것을 없으리라.

 

<혁명의 시간>을 읽으면서 볼셰비키의 모든 것이 옳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문화적 현상은 무엇에 의해 이루어져 지는가? 그것은 경제적인 조건이란 물질적인 조건만 아니라 환경적인 조건까지 덧붙이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밝히다시피 처음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의 힘은 아주 미약했다. 단순히 1917년 2월에 발발한 혁명은 차르체제를 무너뜨리게 한 일이었으나 그 원동력은 볼셰비키만이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코르닐로프 장군과 정치적인 라이벌로 되어야 했던 케렌스키도 처음에 정치범으로 고발당한 혁명가를 위해 변호해주던 법조인이었다. 2월 혁명 후 그는 법무장관에 임명되다가 7월 사태를 맞이하면서 총리로 된다. 그러면서 한쪽에는 볼셰비키, 그리고 한쪽으로 코르닐로프와 같은 능력도 없는 전쟁지휘관에 위기를 맞이한다. 국내에 어떤 경제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토대로 정치학에 대하여 글을 작성하는데, 그 글에 케렌스키 정부를 전복하던 볼셰비키에 대한 비판이 아닌 근거도 제대로 구성되지 않은 비난 같은 글이 있었다.

 

그 책에서는 코르닐로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무능하고 거만한 멍청한 장군이 케렌스키와 임시정부를 타도하여 군사정권을 내세우려 했던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역사는 반드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구성해야 하며, 되지도 않은 어설픈 지식을 인용하여 일방적이고 편견만 사로잡힌 글을 작성한다면 그것만큼 자신이 지식인이란 이름을 내걸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런 내용을 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혁명의 시간>을 읽기 전에 류한수 교수가 번역한 <러시아혁명, 1917에서 네프까지>를 읽어보면 안다.

 

외국의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토대로 전문가의 판단으로 작성한 글과 철학적 깊이도 없이 어설프게 진영논리를 대놓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따라서 <혁명의 시간>을 읽어보는 것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화제인 러시아혁명이 어떻게 일어나고 그 배경이 무엇인지 잘 봐야 한다는 점이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을 읽다보면 사회적인 현상을 두고 그 원인과 배경을 알았고 하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요소도 확인해야 한다. 러시아혁명에서 단순히 볼셰비키혁명을 두고 군사쿠데타라고 하는 자도 있지만, 솔직한 말로 군사쿠데타로 되려면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한 집단이 있어야 한다.

 

볼셰비키는 물론 그들에게 군사력이 있었지만, 적어도 장교와 같은 지휘관보단 아래에서 지휘 받는 병사들, 농민들, 노동자들 같은 일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지지 세력은 강력한 국가기구가 아니라 강력하지 못하나 그 무엇보다 더 강하고 위대한 민중이 있었다는 점이다. 볼셰비키혁명이 된 것은 단순한 군사쿠데타로 본다면 페트로그라드 같이 거대한 도시는 물론이고, 그 도시를 이어주는 많은 교통과 정보를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에게 지지하는 무리가 생겼는가?

 

이 책의 저자인 알렉산더 라비노비치는 처음부터 볼셰비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자다.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태어난 저자는 본래 자신의 아버지가 러시아 물리학자이었으나, 볼셰비키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 그는 볼셰비키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증오를 품었지만, 러시아혁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 할수록 기존 러시아혁명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점을 인식했다. 러시아혁명을 연구하면 자꾸 프랑스혁명사에 대해 연계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당통이 외국군대가 프랑스를 침입한 것에 대해 연설한 것이 인상적이다.

 

당통은 “우리는 대담하고 대담해야 하며, 더 대담해야 합니다.”라는 강력한 언변술로 프랑스 의용병들이 자국을 보호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혁명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르던 인터내셔널가만 부른 것이 아니라 현재 프랑스의 국가이기도 하면서도 1792년 프랑스대혁명 기간 중에 만들어진 라 마르세예즈를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불렀다는 사실이다. 하다못해 루이 보나파르트의 관료정치, 1871년 파리 꼬뮌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러시아혁명사를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만을 볼 것이 아니라 계속 혁명사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볼셰비키가 대중을 사로잡은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대중을 잘 지휘한 것보단 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은 케렌스키 정부의 무능함과 2월 혁명 이후 인민을 위해야 하나 인민을 위하기보단 그저 1차 세계대전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 전에는 러시아제국의 국민인 병사와 러시아 사람들이 이제는 혁명 이후에는 봉건군주의 신민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주권자로서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개념은 본래 국가가 존재하던 곳에 살았던 사람보다는 새롭게 탄생한 국가 내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케렌스키 정권 실수는 2월 혁명이 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과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에서 시작된 것을 망각한 점이다. 그가 내각의 총리로 부임하면서 전쟁에서 빠져나와 휴전을 하고 병사들을 어서 빨리 집으로 보내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는 점과 전장이나 혹은 러시아 내의 장군들은 전쟁의 종료보단 전장으로 더 나아가 승리하기를 원했다. 전장의 총알받이가 되는 것은 병사들의 운명이다. 고위 장교들은 후방에 안전한 곳에서 편하게 앉아 포도주나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냐고 계속 부하를 닦달하고, 도망치는 탈영병에 대해 무자비하게 총살을 집행했을 것이다.

 

물론 탈영병에 대한 처우는 그러하나, 처음부터 전쟁에서 가지는 의의조차 파악하지 않고, 단지 부하로 하여금 목숨을 버리게 하여 거기서 얻는 영광의 훈장만 바란 지휘관들에게 볼셰비키혁명의 씨앗은 이미 볼셰비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힘을 부여한 것이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수립된 소비에트연방은 어느 순간 독재와 공포정치의 대표적인 공간이 되었고, 하다못해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인 <1984>가 탄생한 것도 그렇고, <1984>와 더불어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비판적 3대 소설인 <수용소군도>, <한낮의 어둠>이 괜히 탄생한 것은 아니다.

 

악덕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유언으로 남긴 <동물농장> 메이저 영감의 가르침에서 오직 악덕만 본받아 끔찍한 사건을 탄생하게 되었다. 이 서평 본문 위에 홍범도 장군 역시 볼셰비키에서 활동한 인물이고, 레닌에게 권총을 받을 정도면 그가 레닌에게 얼마나 많은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한 대이주 그리고 대숙청이란 사건은 역사의 비극으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보다 찾아내지 못한 유물처럼 되어버렸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부터 시작하여 어째서 그렇게 길을 꼬였는지 우리는 항상 다시 생각해야 한다.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자인 만큼 그는 지금도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하나로 인정받는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억압하는 사슬로부터(사슬의 이름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부터 나온다.) 모두 자유롭게 되고자 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으킨 볼셰비키혁명 이후의 러시아는 오히려 어긋난 길로 가버렸다. 어떻게 보면 마르크스주의자인 레닌의 거대한 도전이 문제보단 그 사회시스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정치제도나 혹은 사상을 들고 와도 그 사회 구성원 자체가 그것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지 말이다. 겉만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가 존재해도 그 시스템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자각하지 못하면 결국 관료주의 폐단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도화선이 되게 해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은 프랑스 사람들이 과연 몇 %인지 혹은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를 제외한 수많은 군중들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사람이 과연 %인지 생각해보면 다소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한민국 내에서 헌법을 찾아보고 읽은 자 역시 과연 몇 %나 되는 것인가? 역사의 가르침을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료로서 판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역사의 위조는 결국 그 사회의 인간의 정체성마저 기만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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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9-1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아직도 만애비 님이 준 정의론을 아직도 읽지 않고 있네요. 이거 빨리 읽어야 하는데.. 마음이 무겁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9-10 21:41   좋아요 0 | URL
아직 저도 쥐를 읽지 않았습니다~! ㅎㅎㅎㅎ
도서관에서 꼭 빌려볼 도서를 보고 난 뒤에 바로 보려고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9-11 00:08   좋아요 0 | URL
아니, 그재미있는 쥐를 아직 안 읽으셨다니 실망이지만, 셈셈이니 대만족이네요.. ㅎㅎㅎㅎ

만화애니비평 2014-09-11 08:35   좋아요 0 | URL
어느 인물이 생각나서..ㅋㅋㅋ

어제 집 근처 대학교에서 산책 및 운동하러 가는데

거기 학교입구부터 학교정문까지 그분이 그려져 있더군요.

국부와 레닌의 서적
 
에밀 한길그레이트북스 57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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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을 예전에 돋을새김 출판사에서 나온 보급판으로 읽은 적이 있었다. 처음 내가 <에밀>을 읽었을 때는 어렵지 않고 매우 이해가 잘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좋은 도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읽는 내내 <에밀>이란 책을 소개한 부분이 상당히 눈이 가기 시작했다. “인간 혁명의 진원지 된 교육서”라고 말이다. 사실 돋을새김에서 출간된 <에밀>을 읽는 내내 어떻게 그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어떻게 아이에 대한 교육을 매우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루소가 가진 철학적 문학적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돋을새김에서 나온 도서들은 물론 가격도 저렴하고 읽기가 수월한 편이나, 사실 깊이 들어가고자 할 때, 그 서적들 일부는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게 아니라 편집자와 번역자로 하여금 쉽게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든 서적이다. 따라서 이 서적들은 처음 독서를 시작한 분들 중에 조금 심도 있는 서적을 찾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겠지만, 만약 그 이상의 깊이와 사고를 요구한다면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도서가 좋을 것이라 여긴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한길사의 <에밀>을 읽었다.

 

이전에 읽은 <에밀>과 달린 한길사에서 출간된 <에밀>은 상당히 책이 두꺼우며(거의 900페이지에 이름), 편집자의 작업 시에 책 안의 편집용지 여백공간이 매우 좁다. 따라서 보통 같은 사이즈의 A5 도서에 비해 본문 한 페이지 내의 글자 수가 더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목차가 같은 5가지라고 하더라도 전개방식이 조금 달랐다. <에밀>은 다소 소설과 같은 형식이 취해져 있지만, 소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적혀 있다. 문학적으로 적힌 것이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철학, 사상, 교육, 정치, 사회, 경제 등 수많은 학문적 소양이 담겨있다.

 

당초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 내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밝힌 것처럼 지나친 학문에 빠진 인간들을 대해, 그 학문과 예술에 너무 의존하여 인간의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더 나아가 그런 형식적인 틀에 얽매여 지나친 과소비와 악덕을 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고 했다. 루소가 가지고 있는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에밀>에 와서 더욱 증폭된다. 왜냐하면 루소는 자기 자신이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속해 있으면, 그것에 대해 반계몽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그 계몽주의에 대한 지식의 맹신을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지식을 가진 것은 대부분 일부 사람들이고, 그 외의 농민이나 도시의 평민들은 글을 읽고 쓰는 지식이 없다. 따라서 글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은 당연히 자신을 위한 방도로 사용할 것이며, 예술이란 것은 일련의 사치품으로 그 예술품 하나를 구경하기 위해 예술가를 고용하여 무수히 많은 자원과 금전을 소모하게 한다. 그 소모에서 가난한 농민과 도시의 빈민들이 먹어야할 밀가루나 음식조차도 필요하게 된다. 그토록 가난한 사람들은 빵 하나를 먹기 위해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치나, 부자들은 그 빵을 만들 수 있는 밀가루를 자신을 위한 놀이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밀가루가 필요했다. 밀가루의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기보단 밀가루가 취향에 의해 가져가는 부류가 더 많았다. 생계를 위한 사람은 가난으로 구매할 수 없지만, 취향에 의해 구매하는 자들은 경제적 부를 소지하였기 때문이다. 가장 저렴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식량이다. 하지만 루소가 보던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이 매겨진 것은 인간의 생명이었다. 이 얼마나 슬프고도 분노가 넘치는 말이란 말인가! 루소가 인간의 생명을 저렴하게 취급한 게 아니라 당시 그런 사회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글로서 잘못된 것이란 점을 남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은 모두 선천적인 불평등보단 오히려 후천적인 불평등에 의해 고통 받는다고 말한다. 후천적인 불평등 가난과 신분이란 사슬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비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군가 이익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그 이익으로부터 멀어져만 했다. 사회생활하면서 가장 인간의 자기당착에 빠지는 경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절대적인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루소도 인정한 것처럼 인간의 제1의 사랑은 자기보존에 대한 자기애다. 하지만 그 자기보존이 이루어지 위해서는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조차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모조리 부정하고, 그들을 존재성을 인식하지 않으나, 그들이 가진 부나 명예들을 갉아먹어 자신의 부와 명예를 증가시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이 가장 몰려있고 서로 악취와 오물을 내뿜는 도시는 그야말로 악의 소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자연적인 존재이지만, 도처에 있는 사회적 굴레와 제약에 의해 사슬로 묶여있다. 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모두 펼칠 수는 없다. 오로지 그 사회적 계약 안에서만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에밀>은 바로 위와 같은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이 살아가야하는지 알려주는 도서이다. 그토록 <에밀>이 당시 프랑스사회나 현재 지금에 와서도 권력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 경계되는 도서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는 사회라는 큰 사슬에서 길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 사슬로부터 자유로이 살 수 있거나 그 사슬조차 인간의 고귀한 영혼을 지배할 수 없기에 그런 것이다. 이미 <에밀>은 현대 모든 인문학의 구심점처럼 보일 정도로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전에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란 도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상당히 어려운 도서이면서도 그 책에서는 아이들로 하여금 무지한 스승이 필요한 것처럼, 학생들로 하여금 강제로 주입하는 교육체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무지한 스승> 이전에 이미 <에밀>이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어린 시절의 자신이 없을 수가 없다. 지금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란 존재조차 자신에게 어린아이라는 육체를 가진 적이 있었다. 어른이 가진 가치관은 모두 어린 시절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 성장해가지만, 그 성장의 토대가 되는 영양분은 결코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좌우된다. 즉 그 인자는 부모, 스승, 주변 사람에 의해 결정되게 만든다. 문제는 그것은 상당히 편향되어 있으며, 아이에게 주어진 것만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아이들이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보다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가기 전에 말이다.

 

학교 교육이나 사회적인 시스템에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강요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 강요는 결국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론이란 여론몰이로 결정된다. 자신이 원하는 가치가 아니라 세상이 결정되어지는 구조는 한 마디로 스펙타클한 사회라는 점이다. 루소가 살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세론이나 여론이 결국 미디어로서 전달되어 그 미디어가 이미지라는 형태로 제작되므로, 우리는 이미지로 매개된 사회로서 스펙타클을 구축하고 또 구축한다. 자신의 존재는 소외되고 결국 남의 욕망에 의해 살아간다.

 

인간의 욕망은 자신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사회적인 입지를 높이려 한다. 물론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목표로 삼는 것도 인생의 큰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좁은 시선으로 만들어진 인생의 목표가 완수되면 어떻게 할 것이고, 그 것보다 규모가 더 큰 목표를 달성하여 더 이상 무엇을 찾아가야할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뭐든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원하게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자기의 의도를 무시한 채 결국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걸어온다. <에밀>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인간은 자신의 삶을 알기도 전제 죽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인생을 안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메여있기에 루소는 늘 자연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 그 자체를 포기하고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원래 물리적인 요건에서 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문명발전에 의해 호흡할 때마다 매연과 먼지가 내 코를 찌르고 내 목을 아프게 하며, 내 눈은 탁해진다. 마시는 물은 정수기를 놓아도 안심하지 못할 경우도 있으며, 땅에서는 각종 오염물질로 가득하다.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자연, 그 자연을 인간이 부수고 망가뜨리고 정복하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최종적으로 정복된 것은 인간 바로 자신이었다. 인간 자신이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고 육체를 나약하게 만들었으며, 정신은 온갖 사악한 정신으로 가득하다. 인간이 바라고 있는 것은 가장 자신의 이익이고, 다음으로 타인의 파멸이다. 자신의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타인의 이익에서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루소가 그래서 약자의 재물을 강자가 삼키는 이유는 강자들은 자신의 쓸데없는 권위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자로부터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어쩌나? 루소는 분명 18세기 인간이나 21세기 역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에밀>을 읽는 순간, 당대 사회에도 파장을 일으키나 지금도 파장을 주는 이유는 <에밀>에서는 인간은 주어진 것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 행동하라는 점이다. 자연적으로 키워진 에밀, 그는 누군가에게 억지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이란 불리는 아버지 친구로부터 같이 성장한다. 그 스승은 에밀은 자신의 학생이지만, 그를 학생으로 대하기보단 같은 시선으로서 친구로 대한다. 스승과 제자는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인 것이다. 학생에 대한 인격과 자유의 존중은 결국 그 제자 역시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부모나 사회적 세론에 의해 아이들에게 닦달하듯이 교육하고 억지로 강요하는 모습은 오히려 아이들을 망치는 지름길이며, 아이들로 하여금 눈치만 보고 거짓말을 하게 만들어 어른이 되어서 비굴한 행동을 일삼게 하는 패악 질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처럼 자라고, 뭐든지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물론 그 당시와 지금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차이가 있어서 루소의 사상이 모두 옳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루소가 주장한 것처럼 한 사람의 인간을 만드는 것만큼 정말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오덕 내지 덕후라고 불리는 오타쿠라는 사람이다. 오타쿠라는 나라도 인간사회에서 보이는 모순과 문제점을 모르거나 단시 구경만 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하면 좋다는 것 역시 생각하게 한다. 문제는 판단력이란 것이다.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우리는 인간 본인에게 그런 권리를 부여하지 않은 채 단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왜 내가 오타쿠라는 점을 여기서 아무 망설임 없이 밝혔을까? 예전에도 지금도 계속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그 요소를 알 수 있다.

 

주인공 파일럿 소년에게 세상의 어른들은 그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이 그 소년에게 원하는 것은 어른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행동하기를 바란다. 소년은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그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을 원망하고 책망하여 심지어 자신을 파멸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아이의 고민을 알아주지 않은 어른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어른들이란 존재 역시 지난 어린 시절에 힘든 삶을 살아온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인생을 배운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인간이란 자신과 혹은 그 집단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자유롭고 관대한 어른만이 오로지 자유롭고 관대한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게 <에밀>을 보던 마지막 모습인 것 같았다. 아이는 어른들의 거울과 같은 존재다. 아이들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게 해준 어른의 책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자신의 기대나 목적을 바라고, 그 이면에 가려진 책임과 의무는 회피한다. 아이들에게 좋은 인간이라 되라고 말만 하면서 정작 좋은 인간이 되는 방법과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정해진 틀과 형태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식이다.

 

그래서 사람의 정신적 관념들은 결국 현실의 육체적인 요소까지 아이들에게 작용한다. 아이들에게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배내옷이나 침대를 주지 않고, 그대로 온 몸은 감싼 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좁은 침대에 그를 감옥의 죄수처럼 나둔다. 아이들이 자유로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움직일 자유도 주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인형처럼 꾸며대기만 한다. 또한 루소의 시대만큼 지금의 시대에 아이들에게 자연이란 공간을 제대로 알게 해주지 않는다. 농촌이란 시골에 살기는 어려우나 아이들에게 농촌이란 흙을 어촌이란 바닷물을 알게 해줘야 한다. 인간의 강인한 신체와 정신은 단순히 성능 좋은 약과 조기교육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자립성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다면 결국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의는 결국 어떻게 죽는 것인가라는 양면적인 의문이 되는 것이다. 죽음이란 이름은 너무 두렵고 무서우며 때로는 공허하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태어나서 자라고 병들어 죽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린 죽음에 대하여 진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단 그저 그 죽음에 대해 어떻게 도망치려다 결국 두려움과 좌절에서 사라져간다. 물론 죽는 것은 두렵지만, 그 두려운 마음을 줄이기 위해서 인간은 자연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의 육체는 죽어도 그에 대한 기억은 주변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인간애를 가져야 할 이유는 자신의 생명이 끊어져도 주변사람들에게 그가 베풀었던 진실한 선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조선시대에 가난한 백성을 위해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위해 노력하던 지식인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영원한 스승이 되어 좋은 교육의 본보기로 활용된다. 자신의 창고에 쌀이 쌓이는 것보다 주변사람들의 가마솥에 쌀이 들어가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것이다.

 

<에밀>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인간 본인은 그렇게 대단하고 뛰어난 존재이기보단 그저 평범하고 보통 사람들 같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범해 보여도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자유로운 영혼과 따듯한 인간애를 가진 것이다. 따라서 에밀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의 일상에서 주변과 보내는 즐거운 시간은 행복함으로 이어지고, 그 행복함을 나누는 것으로 그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와 잘 지낼 수 있는 에밀은 그렇게 사람들과 잘 지내라는 교과서적인 도덕관념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러고 싶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선을 실행하는 것은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가능하다. 정언명령이 되는 그 근본은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가치에서 발견된다. 인간은 윤리적 가치는 타인을 위한 것처럼 보이나, 그 최종적인 이익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왜냐하면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도 역시 자신에게 큰 고통이고 상처가 될 것이고, 길가에 괴로운 사람들이 넘치면 그 마을과 도시는 점점 쇠퇴하여 온갖 범죄와 흉흉한 소문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애적인 가치는 타인의 이익이 아니라 결국 자신도 같이 이익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타인의 이익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타인의 삶까지 박탈하고 그 생명까지 앗아가 버린다. 정말 두렵고도 무서운 일이다. 그런 인간들이 있고, 그런 인간들을 허용하는 사회가 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들도록 허락한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강요된 삶으로 얼룩진 그들은 단체와 조직에 속하면서 오로지 거짓과 위선을 배운다. 순수하게 아이들의 입장을 고려한 게 아니라 억지로 만들어진 어른 같은 아이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어른들이 되면 아이들보다 못한 어른이 된다.

 

그래서일까? <에밀>은 종착편은 에밀이 소피를 만나 결혼하여 그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에 대한 맹약과 복종이 보여준다. 에밀과 소피가 애를 낳아 에밀의 아이를 맡는다면, 에밀은 분명 그 에밀을 만들어준 친구 같은 스승처럼 애를 키울 것이다. 하지만 에밀에 대한 교육은 끝나지 않는다. 에밀에게 아이에서 어른으로 키운 스승은 필요 없을지 모르나, 에밀이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그 아버지로서 가져야할 자세를 에밀은 또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배우고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 배움은 무리하게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하게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에밀>이란 서적은 모순 아닌 모순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편견을 이기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자연적으로 살아가게 하여 그 편견으로부터 지켜주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을 지키는 어른은 누구로부터 방어책을 얻을 수 있을까? <에밀>이란 책은 쉬운 책이 아니다. 특히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은 그야말로 인간의 종교와 철학이 그대로 담겨진 내용이다. 아마 지금 21세기에 본 나라도 루소의 관찰력에 감탄을 숨길 수 없다. 종교는 간단해야 하며, 어려워서는 안 되며, 종교는 그 나라와 문화 그리고 인종에 따라 다르면 그 차이에 그 자체로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그것은 존중해야하며, 절대적으로 자신의 종교만 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신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선을 베푸나, 그 선을 실행하는 것은 인간이고, 어떤 종교가 있더라도 그것을 강요하면 안 되며, 신의 가르침은 오직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를 돕는 것임을 알기에 루소의 <에밀>은 당시 종교인들에 의해 박해받는다. 루소의 박해는 <대화>편이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힘들었다. 루소는 광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누가 남을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그 망상적인 피해의식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던 실존주의 선구자이며, 가난하고 배고픈 농부를 사랑하던 인도주의자였다.

 

<에밀>은 바로 루소의 사상이 모두 담긴 서적이다. 왕이나 귀족, 농민이나 노예 상관없이 모두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 했으며,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 조화로운 삶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에밀>은 <사회계약론>을 적는 밑바탕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에밀>의 마지막 부분은 <사회계약론>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나온다. <에밀>은 인간에게 자연적 존재가 되어 이기심과 시기심으로부터 멀어져 인간 그 자체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린다면, <사회계약론>은 자연적으로 살아가야할 인간이 자연적으로 살아가지 못하여 사회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안내한 도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루소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 대상은 언제나 억압받고 가난함에 지친 약자의 편에 있었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개인의 의지, 집단의 의지, 그리고 일반의지로 나운다. 인간은 자기애가 1번째이기에 그렇고, 국가라는 조직을 이루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집단이기주의, 그리고 그것을 넘어 공공의 이익을 원하는 일반의지, 하지만 일반의지가 가장 실행하기 어렵다는 점을 루소는 안다. 개인들의 이기심이 하나가 되는 전체의지가 너무 강력하고,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가치는 결코 남이 강조하는 것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아래 탄생하기 때문이다. <에밀>을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연적으로 살아가야하나 살지 못하더라도 인간의 본연의 감정과 이성 그리고 윤리를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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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2 - J Novel
마미야 나츠키 지음, 시로미소 그림 / 서울문화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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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서평을 나열하기 말하자면, 나는 정의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의는 윤리라는 가치관이 없다. 단지 정의라는 이름은 힘과 권력이란 개입을 정당화시키는 악적인 수단이다. 어느 작품에서 나온 것처럼 정의라는 이름은 악이란 이름을 질투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것일까? 아닌 것인가?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 것은 정의라고 말하는 자와 정의라는 것에 매달리는 자는 자신의 정의론에 대해 생각해 볼 의무가 있다. 문제는 그런 자신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대한 성찰 없이 단순히 정의는 그 자체로서 의문을 가지게 해서 안 될 극단의 성역인 것이다. 성역이란 이름이 되어버린 정의가 하나의 관념처럼 돌아다녀 눈에 보이지 않은 대기 중에 떠다니는 공기라면 문제가 없을지 모르나, 그것은 인간의 관념 안에 숨을 쉬고, 때로는 인간의 숨을 끊어주게 만든다.

 

그런데 그 정의라는 이름은 분명히 어떤 조건 안에서 타당해야 하는가? 우리는 살아오면서 자신의 정의로운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것만큼 가장 큰 착각과 오만, 그리고 편견이란 인간이 가진 그 어떤 죄보다 더 무겁고 지독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정의라고 믿는 것은 자신들이 믿는 가치관이나 도덕관이 옳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점이다. 가령 최근에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과 총격은 두고 우리는 그것을 정의라고 논하는가? 물론 정의의 철퇴라고 말하는 부류도 있지만, 국제연합 UN에서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두고 비인간적인 처사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라고 비난했다.

 

정의라는 가치를 두고 저 사건을 생각하면 무엇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전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의 갈림길, 그 갈림길 속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은 결과를 볼 수 없었다. 더 나아가 마이클 샌델이 강의하는 하버대학교 정치철학과에서 강의하던 존 롤즈의 <정의론>에선 이렇게 인간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논한다.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손해나 피해가 적은 것으로 선택한다고 말이다. 정의에 대한 가치는 결국 인간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의라는 그 자체로서는 도덕적이고 사회 관념에 따른 힘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대다수의 판단에서 비롯되는 다수결, 문제는 다수결이란 것은 인간의 보편적 사고이기도 하나, 그 보편적 사고를 지배하는 인간의 사고방식 역시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왜 라이트노벨 1권을 읽으면서 이런 정의와 도덕 그리고 인간의 선택이란 난해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가? 이번에 읽은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라는 라이트노벨은 그런 인간의 딜레마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고, 그 딜레마를 어렵지 않게 그저 라이트노벨이란 경소설이란 장르에 맞게 재미로서 이끌어 간다. 중간마다 보여주는 플롯과 또한 그 플롯을 배치하기 위한 복선은 기본적으로 암시하거나 또는 생략하기도 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1권에서는 카미우치 유우진의 자살심리에 대한 저지에 반해 2권에서는 사나 엔마에 대한 성정체성에 대한 열띤 토론을 펼쳤다. 하지만 그 복선의 구조가 어디서 나오는가에서 1권에서 이미 사나 엔마의 고뇌가 시작되었다. 2권에서 검도부 1학년이 목격한 엔마의 몸은 단순히 발화의 시작점에 지나지 않았다. 1권부터 사나 엔마는 이미 밀폐된 공간에 방치된 가스처럼 언제 어디서라도 스위치가 눌러지면 폭발해야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2권에서 보여주었고, 그것으로 통해 리코와 리코 일행들이 보여주는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투쟁을 보여준다.

 

왜 정의와 도덕 그리고 선택이 따를까? 기본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은 단순히 생각하면 아직 미성년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훈육기관이다. 학교 그 자체적인 기능을 생각하자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은 학교라고 하여 그 자체로 분리된 공간이기도 하나, 때로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는 학생이란 존재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학생이란 이름 뒤에는 사회적인 배경과 조건이 따른다. 학교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회구조로서 움직이는 조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사회구조 속에서 정치적인 맹점과 정치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투표라는 것은 결국 참여에 대한 인간의 권리다. 그 참여라는 것이 하나의 선택지점을 지정하고, 그 선택은 그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사나 엔마가 처해진 상황은 바로 그 정치적 상황 그 자체였다. 따라서 리코는 1권에서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정신분석학자의 이름과 이론을 내세웠다면, 2권에서는 왜 니체의 이름과 그의 말을 따라 했는가? 리코는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가 보낸 강력한 도전장을 두고 니체의 말을 인용하였다. “저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지. ‘정의는 거의 동등한 힘의 상대를 전제로 하는 보상과의 교환이다.’라고, ‘정의’는 정정당당하게 부를 때가 아름답지 않은가? 적어도 약한 상대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태에서 철퇴를 내리려는 행동은 삼류 행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군. 그런데 하라 사이토 군, 자네는 몇 류지?”

 

저 말은 어렴풋이 내 기억에서 돋아났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출판사 책세상)>에 나오는 문구 중에 하나일 것 같다는 점이다. 니체의 서적은 당시 도덕관이나 정의관에 대해 무척이나 비웃고 깨부수려고 했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를 읽다보면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가 왜 유치한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니체는 본래 민주주의를 혐오하던 사람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에서 대다수의 군중으로 이루어 있으며, 그들은 충분한 판단력과 이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중심리에 의해 자행되는 일들은 그것이 분명히 틀린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인간이 가진 광기의 폭발이 정당화 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도덕과 정의라는 이름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내가 발췌했던 글 중에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라고 한다. 결국 집단과 시대라는 특성 아래 사이키델리코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하나의 집단이 구성된 조직이고, 현대적인 상식이란 이름을 가진 시대적 요건도 갖추어져 있다. 학생회는 학교학생들의 대표이기도 하나, 그것은 정말로 대표인지 아니면 하나의 권력을 가진 존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조직과 집단 또는 국가조차도 법과 제도가 있다. 법과 제도는 그 자체로 공정하고 공평해야 하나, 그 공정성과 공평성의 이름을 가진 법과 제도는 자신의 이름으로 집행하지 않는다. 어느 특수한 인간으로서 공정성과 공평성을 실행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 개인에게 공정성과 공평성이 완벽하지 않을 경우 어느 특정한 이해관계나 사적인 감정이 녹아들어가는 순간 이미 법과 제도라는 자체는 공정성과 공평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2권에서 바로 그 공정성과 공평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에서 결국 권력이란 이름의 도덕과 정의는 정당한가라는 리코의 반격이 시작되는 점이다.

 

1권부터 복선을 깔라놓은 사나 엔마, 그는 아니 그녀는 원래 여자지만, 남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여자인데도 남자로 살아가야할 이유는 단순히 엔마가 변태적인 성욕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녀가 자라온 환경이었다. 즉 학교라는 것이 사회구조고, 모든 사람들은 같은 조건 아래 성장할 수 없고, 같은 상황에서 살아갈 수 없다. 바로 개인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외압적인 조건에 의해 자신의 현재가 갖추어지는 점이다. 엔마의 아버지는 뛰어난 무술가이고, 게다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여행을 다니는 방랑무술가였다. 어머니도 없이 아버지 아래 아버지 같은 생활을 했다면 분명 평범한 여성으로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섹슈얼리티라는 생물학적인 조건에서 엔마는 키도 크고 날씬한 소녀였지만, 젠더적인 요소에서는 그녀는 여자보단 남자로 살아야 했다. 결국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엔마의 집안사정에 따른 문화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분명히 여자가 여자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남자라는 존재로 학교를 다니는 것은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하라 사이토는 엔마의 약점을 두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퇴학을 내리려 한다. 퇴학의 조건에서 일반적으로 학교 내 교무위원들이 의론을 걸치고 나서 결정해야할 사안이나, 먼저 학생회에서 의론을 결정하였기에 학생회의 대회의로서 결정지으려 했다.

 

그 목적은 엔마의 퇴학이나, 그 이면에 학생회에서 눈에 가시거리로 비추어지는 리코의 기압제선이었다. 학교에서 기인으로 소문난 리코에게 리코의 주변인들을 쳐내는 것으로 충분한 반격이 될 것이고, 리코가 학교 내에서 유명인이지만 확실한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리코의 약점을 노려 리코를 눌러 버리는 것이 하라 사이토의 목적이다. 하지만 리코가 분명히 특이하고 단정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단지 리코가 어느 특정인에 대해 특별한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선에서 말이다.

 

하라 사이토와 같이 결백증이 강한 입장에서 리코는 자신의 미적인 감각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예전부터 계속 마찰이 있었다는 점에서 어떻게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방법이다. 책을 읽는 독자로선 하라 사이토의 방법이 매우 치사하게 보이겠지만(물론 치사하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편집자의 후기에서 분명 나타냈기도 했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여론으로 통해 마녀사냥하기가 참 용이한 곳이다. 더구나 학교는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군중심리를 자극하기가 참 좋다.

 

왜 리코가 메이드복을 입고, 퍼포먼스를 펼치는가? 대중은 왜 그런 리코를 기대하는가? 한 마디로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나, 또는 학교 내의 대의회 역시 하나의 쇼라는 점이다. 쇼라는 이유는 이미 학생회에서 엔마에 대한 불리한 판결이 내리도록 사전에 수를 쓴 것과 동시에 정의라는 이름을 들먹인 것으로 모든 학생들을 피해자처럼 만들었다. 특히 검도부 1학년 후배는 그때 엔마의 모습을 본 것으로 큰 충격을 받아 더 심각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조용하고 정체된 사회에서 어느 외적인 침략자 내지 혹은 내적으로 반역자가 나올 경우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단결력이 강해져 더 큰 결속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흔히 서사에서 말하는 Narrative적인 요소다. 쉽게 말하면 누군가는 나쁜 사람이 필요하고, 그 나쁜 사람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으로 인식되어, 그 적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대중들은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고 믿게 된다. 그게 바로 니체가 가장 증오하는 모습 중에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또 인상적인 말은 “우리의 가장 강항 충동, 우리 안의 있는 폭군에게는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굴복하게 된다.”라고 한다. 양심 그것은 무엇일까? 이미 대회의 이전부터 대회의 진행 도중까지 엔마는 자신의 초라하고 나약함에 두려움을 떨었고, 그는 사나운 염라대왕이 아니라 그저 연약한 남장여자였다.

 

이미 전교생에게 알려진 마당에 계속 학생회로부터 내려오는 비수 같은 폭언은 그녀로 하여금 심한 정신적 붕괴를 유도했다. 그러나 그런 비정상적인 존재는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물론 그들에 대해 다소의 불쾌감 내지 이질감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으며, 그들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은 이상 그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지 그렇게 사는 것 자체에 대해 우리는 방관해주는 것이 오히려 자유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주지 않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단지 성별을 속이고 부활동을 하고, 연습까지 했다는 점에서 충분한 자숙과 근신을 처하는 것이 옳다.

 

리코의 행동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엔마의 탈의모습을 목격한 1학년 여학생이 큰 충격을 받아, 그것으로 인해 엔마가 퇴학을 당하여 학교에서 떠나면, 과연 그 1학년의 충격은 모두 없어지는 것인가? 뒤에 가서 분명 자신 때문에 엔마가 퇴학당하여 불우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학할 것이다. 대신 그녀가 자학할 순간에는 정의와 도덕을 외치는 자들은 무관심하게 그녀는 방치하고, 오히려 지나간 일에 매달리는 그녀를 두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정의와 도덕이란 이름을 보여주면 그 후에 일어나는 남의 일은 그저 개인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리코가 엔마의 퇴학을 막은 이유는 3가지다. 1번째 엔마는 자신의 친구이기에 친구를 위해서고, 2번째 엔마가 자신의 처음 친구이기에 엔마가 없으면 외로워지므로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고, 3번째는 검도부 여학생이 나중에 겪게 된 양심의 가책에 대해서였다. 그 1학년 소녀는 자신의 괴로움과 검도부를 위해 검도부장과 상담하여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했으나, 한편으로 그 이유로 어느 개인이 비참한 상황에 맞이하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쇼가 이루어지는 대회의 시간에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란 없다. 단지 이분법적인 대립관계에서 어느 한 쪽 세력을 지지하여 잘나지도 않은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은 다른 이유는 윤리는 약자의 입장과 더불어 소수자의 상황을 고려하지만, 도덕이란 이름은 절대적인 대다수의 입장만 견지한다. 엔마 같은 소수자들은 어느 사회에서 환영하지 못할 존재다. 또한 리코나 유우진 역시 그렇다. 리코는 부모가 없고, 유우진은 부모 없이 살다가 누나마저 눈앞에서 자살했다. 인간이 비틀어지는 이유는 처음부터가 비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비틀어지는 이유가 있다. 어느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결과론적인 요소로서 사람들은 판단하나, 그 이면에 가려진 원인에 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은 결국 어리석은 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본문에서 리코의 반론을 잘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에게 “윤리의 중요성을 부장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도덕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정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천차만별, 시대와 문화, 이들은 외적 요인에 쉽게 좌우되는 애매한 가치관이거든, 획일적인 가치관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사물의 본질을 간과할 수 있다니까?”라고 말이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사회적인 요소가 인간의 개인을 지배한다. 결국 인간이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을 지배하고, 문화로 통해 하나의 사회적 양상까지 좌우되는 것이다.

 

문화적인 요건에서 상대방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번역자인 MOEX의 후기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과거 시대라면 인간을 나누는 것이 조선시대에 사농공상, 군주정인 유럽에는 왕족, 귀족, 평민, 농민, 노예라면 이제는 자본의 소유다. 자본이란 것은 단순히 경제학적으로 말하는 화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사회적 조건, 그리고 문화적 자본까지 고려해야한다. 문화자본이란 개념이 존재하듯이 사나 엔마의 문화자본은 여성의 삶을 강탈된 삶이었고, 그런 삶에서 고교생이 되는 순간 억지로 여자로서 삶을 강요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질과 양의 변증법에서 사나 엔마라는 존재가 살아온 시간에서 그녀는 여자보단 남자로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여고생이란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대회의의 사건과 그 사건이 원인이던 비밀의 노출, 사나 엔마는 대회의라는 계기가 하나의 통과제의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통과제의 과정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상식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의 생각을 옭아매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큰 편견과 고정관념이 되는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식이란 것은 결국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는 사고방식이나 그 사고방식이 되는 기본적인 정보가 일방적이거나 획일적인 가치라면 인간의 판단은 올바른 길보다 어긋난 길로 간다는 점이다. 사나 엔마가 마녀사냥 당해야하는 것처럼 인간의 판단력은 언제나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2권까지 읽다보면 분명 리코는 기인이고, 특이한 인물이다. 절대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기에 그 사회구조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틀에 갇힌 인간이 가진 사고방식으로 그 사회의 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잡을 수 없다. 오히려 그곳에서 벗어나는 인간이어야말로 그 사회의 틀을 보거나 바꾸어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도 리코에게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는 있었다. 친구는 소중하다고 말이다. 단지 상식적인 시선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고, 그래서 리코는 사나 엔마의 모든 것을 감싸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정의와 도덕이란 이름으로 무장한 편견과 오만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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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비평의 쟁점 - 잃어버린 만화 문화의 자리찾기
김성훈 지음 / 니들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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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구한말 아니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만화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만화같이 단순히 애들이나 보거나 또는 시간 때우기 용으로 이용되는 오락도서만이 아니란 점이다. 물론 오락적 기능도 중요하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즐길 수 있는 휴식시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런다고 만화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만화라는 것은 단지 그림으로 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 안에는 엄연히 이야기가 존재하고, 그 이야기 내에는 상대방에게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기호적인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만화문화는 단순히 재미와 오락을 생겨나기 보다는 시대적인 흐름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서 생긴 문화다. <한국 만화비평의 쟁점>에서 처음 소개된 대한민보에 실린 최초의 만화가 나온다. 긴 모자에 양복과 구두, 그리고 지팡이를 잡고 있는 중년남성을 보면 무엇인가에 대해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만화는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삽화로서 만화의 역사와 더불어 만화라는 매체로 통한 비판적인 요소, 그리고 민중적인 요소를 반영하여 그 문화적 명맥을 유지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화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그래 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만화이기 때문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대 지식인이며 언론인이던 최성수는 만화로 통해 언론적 기능을 강화하고, 만화라는 매체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프랑스혁명사에 관심이 많지만, 그 혁명적 배경에는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한 정보와 홍보 수단으로 만화가 중요한 수단이었다. 최성수 언론인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통치와 나폴레옹 이후 다시 부르봉 왕가가 통치하고 또한, 나폴레옹3세가 집권하기 이른다. 이런 와중에 권위적이고 비자유적인 통치에 대해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반발하자, 프랑스 만화작가 오노레 도미에는 시민들의 편에서 만화를 그린다. 그의 작품 중에 <봉기>는 분명 만화라기보다는 혁명을 위한 그림에 가까우나 그래도 만화가라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들이 대부분 시대적 문제를 풍자적인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하면 만화라는 매체가 효과적인 이유는 억압받는 민중계급 부류들은 대부분 글자를 몰랐으며, 글자를 모르는 것은 그런 문제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판단력 내지 그런 개념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과 같다. 가령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의 불꽃과 심지어 전 세계의 헌법조차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개념을 알려면 받아들이는 상대방에게 정보력을 각인 시키야 하는 점이다. 정보의 각인에서 기표가 되는 그림이 상대방에게 이해가지 못한다면 정보매체로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만화라는 그림은 상대방에게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만화가 가진 언론적인 기능은 곧 누구나 보고 이해할 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점에서 만화는 민중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민중에 의한 문화라는 것처럼 매우 민주주의적인 문화라는 점이다. 특히 보는 이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시사만화의 경우, 누가 보더라도 이해가 빠르면서 한편으로 미소와 더불어 씁쓸한 맛을 베어나게 만든다. 그렇지만 시사만화라는 것은 시대적 문제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이슈를 부각시키고, 그것으로 하여금 대중들에게 관심을 유도하므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국의 만화역사에서는 결국 시사만화 내지 민중의 삶에 스며든 민중의 대변자라 볼 수 있다. 그런 만화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비평적 쟁점이 되고, 만화로 통해 보여주고 그것에 대한 고찰로서 만화비평은 성립된 점이다.

 

한국의 만화비평문화는 결국 언론의 기능으로서 즉 민족독립에 대한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일제로부터 착취와 억압에 시달린 민중의 한을 내보인 것이다. 최성수의 그런 가치는 그가 남긴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첫째는 조선의 저널리즘이 먼저 만화를 알고 또 저널리즘이 가져야 할 만화와의 동반성을 잘 인식하는 동시에 세계 저널리즘과의 만화대세를 거울삼아 거기서 조선 저널리즘이 가져야 할 위치를 깨달아 그 깨달은 바를 하루바삐 이루어져 할 것과 둘째로는 민중이 만화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가져야겠고 마지막으로 만화가는 좀 더 만화다운 만화를 창작하여야 할 것이다.”

 

만화이기에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프랑스에서 9가지 예술에서 만화 역시 예술의 한 범주에 들어간다. 미학에서 예술이란 것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만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대해 작가로 눈으로 통하여 새롭게 해석하여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이 만화작가의 소임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만화의 가진 가치를 논하는 정신이기에 한국만화는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내재한 근대적인 문화였다. 그렇지만 만화는 그 누구에게 열린 세계이며, 특히 한국전쟁 이후로는 그 대상이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게 된다.

 

아마 만화가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인식은 군사독재정권 이전에 한국전쟁 전후로 근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닥치면 어른들은 밖에서 일을 하게 되면, 집에는 어린 아이들이 남게 되고, 또한 전쟁고아와 같이 누군가를 의지할 수 없는 사람들도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어린 아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만화였고, 새로운 만화가 나오면 아이들의 손에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며,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는 만화에 대한 작품적 가치를 다루기보단 대량적으로 만들고, 재미위주로 가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 만화에서 물론 시대적인 배경과 시사정신이 빠질 리는 없지만, 만화가 그런 가치에만 몰입할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일본 문화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은 이미 쇠퇴하고 이제 그것을 대체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란 문구를 보았다. 문학평론가와 언론인에 의해 우리나라 만화문화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할 상황이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만화는 여전히 자유로운 사고와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해줄 수 있는 매체였다. 그런 만화에 대한 평론은 만화가 단지 저속한 문화로 인식되는 것에서 좀 더 넓은 관점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김현, 오규원 선생 같은 문학도의 출현은 매우 중요한 의미인 점이다. 만화규장각에서 발행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에서 김현 선생은 자신이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가진 민중예술성을 재발견했다.

 

위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문구처럼 지식이 없다면 자신이 처해진 위치나 상황조차 파악할 수 없다. 글을 모른다는 것은 지식을 축척할 수 있는 방법이 어렵다는 것이고, 지식의 축척은 곧 지식이 없는 대상으로 하여금 우월한 위치에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따라서 지식은 권력으로 이어지고, 권력은 지식은 생산하는 것처럼, 만화의 기능은 지식이 없는 자에게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만화를 보고 그는 처음에 자신인지 모르지만, 그 만화를 보고 나서 뭔가 잘못된 점을 느끼고, 그 만화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가치로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만화가 예술적인 요소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을 하나의 시학(詩學)처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 내지 필연성이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다. 하지만 생각하게 되는 것과 그 생각으로 인해 사회적 문제를 알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억압하거나 은폐, 조작, 위조를 하려고 한 것이다. 한국에 대표적인 만화분서갱유는 유신체계에 대한 권력독재화의 산물이다. 만화가 자유로운 사고로서 그것을 제작하고 보는 이들은 매우 귀찮은 존재가 아닐 수가 없다. 따라서 만화의 검열과 제한된 이야기, 그리고 사유의 폭을 제공하는 만화를 억압함으로 만화문화는 그저 아이들이나 보는 단순한 오락물로 치부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1980년대로 오게 되면서 만화비평에 대한 도서도 나오고, 1990년대에는 신춘문예에서 만화비평도 하나의 비평가의 등단기회로 올라가게 되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만화비평으로 통해 정식으로 만화평론가로 등단할 수 있는 신춘문예에 만화부문은 빠져있다. 그렇지만 만화가 가진 이야기의 전달력은 신춘문예가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만화비평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만화비평의 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1990년 국내 최초로 공주대학교에서 만화학과가 창립되어 만화라는 것이 단순히 오락이 아니라 학문적 기능을 유지하며, 만화에 대한 평론가협회 내지 만화를 연구하는 만화학회를 창립하여 만화라는 것이 하나의 학문적,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었다.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만화가 지금처럼 하위문화로 간주된 게 아니라 만화가 차지하고 있던 한국사회의 여가생활에서 TV의 보급과 극장의 설립이 멀티미디어매체로 인해 만화가 한국 대중으로부터 저절로 멀어지게 되었다. 하위문화가 된 만화가 계속 대중문화와 그것을 이용하는 대중으로부터 저질문화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만화 그 자체에 대한 가치를 올릴 수밖에 없다. 만화비평은 처음에는 시대정신과 저항의식, 그리고 민주화 열기로서 발전해왔다. 하지만 만화라는 것도 역시 하위문화라고 해도 대중문화에 포함되므로, 만화가 보급되면서 만화라는 위치가 영화나 문학과 같이 예술성, 작품성을 인정받는 것이 사회적인 조건에서 유리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만화비평가인 위기철의 글에서는 만화의 대중성을 결국 사회적으로 보급되면서 자본과의 관계를 제외할 수 없다. 그래서 위기철가 남긴 글로 “한 작품이 성실히 작가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상업성의 산물일 때 그 비평적 접근은 당연히 작품 생산의 동력이 되는 ‘상업성’을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되며, 또한 이 상업성이 비단 만화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일 때 비평의 접근방식은 당연히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는 만화책, 최근 그 만화책의 토대가 되어가는 게임과 라이트노벨, 위의 이야기들로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 역시 상업적인 요소가 반영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중에 대한 상품적 가치로서 만화관련 콘텐츠는 사회구조적인 요소로 보지 않을 수가 없고, 대중에게 만화가 전달되는 것 역시 자본을 매개로 하기에 만화비평 역시 사회적인 구조와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단순히 보자면 작품적인 가치 높고 낮고를 떠나 어떤 작품에 대해 비평을 할 때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기능과 정치적 현황 또한 사람들이 최근 가지고 있는 인식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점이다.

 

물론 만화 혹은 서브컬처로 같이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등과 같은 부류는 그 역할과 기능을 인정받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보이는 문제로는 대중문화는 획일적인 가치관을 강요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낯설게 되는 것이다. 만화비평이 모든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한 문화의 공존성이다. 만화가 만화라는 부류에 갇히게 된다는 것은 결국 고립된 부류로 낙인찍히고, 당초 만화는 즐거움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교감이란 목적성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점이다.

 

예술이란 것은 정치적인 요소와 멀어져 보이겠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동물, 곧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라는 것이 단순히 말하여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 앉아있는 고위관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행동하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는 것조차 정치다. 아니라면 자신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조차 정치적이다. 그 정치성을 논하는 이유는 만화라는 것으로 통해 자신의 삶을 윤택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 역시 정치적인 논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료로 보는 웹툰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작가들과 출판사들의 수익을 거두게 하는 출판만화의 무관심 내지 편견은 어떻게 보면 만화를 즐기는 부류에게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만화비평이 필요한 점은 만화가 프랑스에서 제9의 예술이란 말처럼 그 예술적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국 그것을 즐기는 부류가 스스로 앞장을 서야 하는 점이다. 프랑스 부르봉왕가에 대해 풍자를 날린 프랑스 화가 오노레 도미에는 먼저 그림을 그려 대중에게 알렸고, 대중들은 그 그림으로 통해 시대적 현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프랑스는 1848년 2월 혁명에서 영원히 군왕을 추방한다. 물론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이 된 후 의회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혼란에 빠졌지만, 계속 저항을 하던 그들이 있었다. 근현대적으로 저항이 있는 곳에 풍자만화 내지 시사만화가 뒤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다.

 

만화비평은 단순히 만화를 보고 비평을 남긴 것으로 만화비평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그 자체에서 만평을 통한 비평일까? <한국만화비평의 쟁점>에서 다루고 있는 사안에서 기존에는 엘리트들이 만화비평문화를 이끌어왔다면 21세기 온라인 문화에서는 대중들이 만화비평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단순한 리뷰 내지 감상에 머물러 있기에 그 작품에 대한 활발한 논의에서 깊이를 논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소개된 만화비평가들 중 최근에 소개된 사람들은 만화작가 내지 대학교수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화는 분명 하위문화인 서브컬처이다. 그렇기에 가장 밑자락에서 즐길 수 있다. 만화를 즐기는 점에서 단순히 보다는 개념에서 읽는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시도되어왔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문학평론가와 문학도 혹은 만화전문비평가 내지 교수들에 의해 주도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다. 대중 스스로 만화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만화의 기능이 이제 만화만이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로 점차 번지기 때문이다. 만화는 대중문화이기도 하나 하위문화이기에 다양한 이야기와 소재들이 위로 떠오른다. 기존의 대중문화는 계속 대중의 대다수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같은 이야기와 소재를 반복한다.

 

따라서 새로운 전환점이나 가치관의 정립이 매우 어렵다. 만화라는 것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처럼 대규모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분야다. 작가의 개인적 특성을 반영하므로 어느 특정 개인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는 점이다. 물론 한국의 만화작가를 보면 열악하다. 사회적 인식, 생계에 대한 부담, 그리고 이 어려운 여건 속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열망, 실제 만화작가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쉬운 길을 택한 사람들이 아니다. 만화비평적인 요소에서 그들과 대화하면, 자신의 작품에 들어오는 의견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꼼꼼하게 평해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만큼 자신이 만든 작품을 열심히 보고 생각했다는 점이 그리는 입장, 즉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결과일 것이다. 만화비평은 만화문화의 저질성이란 인식개선에 큰 전환점도 되나,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만화비평은 단순한 리뷰쓰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미학적 판단을 함으로써, 일반적인 문학과 영화를 보고 있다는 조건 아래 시작해야 한다. 영화나 문학이나 다 좋은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영화, 문학, 만화가 있고,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만화비평이 어려운 점은 이런 사회적 인식과 개인적 역량의 향상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만화를 그리는 것은 작가에게 이윤을 남기지만, 만화비평은 이윤이 오지 않은 것이 한계성이다.

 

대학교단이나 또는 문화관련 단체에 소속된 일부인사들을 제외하면 만화비평을 한다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취미생활로만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한국처럼 대중들에 의해 수행되는 비평문화가 거의 전무한 곳에서는 만화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만화를 좋아한다면 그 만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즐거움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어 남는 시간에 여가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가시간에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으나 만화만큼 짧은 시간에 즐거움을 주는 매체는 많지 않다.

 

우리 사회는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이란 문화를 단순히 위해요소로 되거나 또는 아동이나 유아용으로 사용하려고 하며, 특히 교육자재로서 기능을 수행하려 한다. 만화작가와 만난 시간에서 많은 만화작가들이 교육자재에 필요한 그리는 것으로 수익을 본다고 한다. 물론 교육을 위한 교육자재에 만화를 그리는 것 역시 만화를 익숙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나, 만화작가가 본래 원하는 목적은 아니다. 결국 만화문화의 밝은 미래는 자유로운 창의성과 깊은 토론이 오갈 수 있는 문화정착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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