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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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는 중간에 읽다가 잊어버린 듯하나,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라는 서적에서 나온 문구를 존이 말한 것 같다. 일단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세계3대 디스토피아 중 예전에 읽은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생각이 났다. 조지 오웰의 소설 풍은 전형적인 전체주의라는 파시스트 정치체계를 비판했다. 특히 관료주의적인 권력자들의 이익이 중시되는 독재정치를 비판하였다. <1984년>은 정치적으로 자유가 없고, 언론의 정신이 상실되었으며, 모든 언어와 지식은 통제되어 일정한 단어 외에는 나올 수가 없었다. 이른바 오세아니아의 언어만이 모든 빅 브라더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빅 브라더!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마치 신의 눈처럼 오세아니아의 대륙을 마치 최고의 유토피아인 것처럼 포장한다. 텔레스크린 너머 모든 것을 감시하고, 모든 것을 감청하는 세계에 진정한 자유란 없다. 어떻게 보면 <1984년>이나 <멋진 신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자유다. 자유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고, 그 자유는 철학부터 시작하여 각종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의 사슬에 묶여 있다.”와 같이 항상 인간은 자유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은 언제나 세상이란 거대한 세계다. 그 세계 안의 인간은 그저 작고 나약하며 거대한 무리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 대다수의 사람들 속에 자신의 존재는 그야말로 소소한 것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자신과 더불어 그 대다수의 군중 역시 하나의 개인이기도 하다. 개인은 대다수의 군중이기도 하고 군중은 또 다시 개인 그 자체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의지는 언제나 사슬에 묶인 노예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낭만주의적 정신은 물질의 만능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약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자유 그 자체에 대한 매력은 여전히 버릴 수 없다.

 

인간의 자유가 성립해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인간은 이미 사회에 나온 이상 자기 자신만의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끊임없이 속박당해야 하고,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존재해야 하며, 더구나 자신의 원하는 길이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사회에 보여주고, 그 욕망으로 대체함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세울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행의 시대>처럼 계속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과 더불어 그것을 접함에 따른 고독이 서로 대립되어 새로운 유행의 물결에 휘말려간다. 자신의 존재는 사라지는 이상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보고 듣고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의 판단이 중요한 이유는 판단력이란 것은 결국 인간이 가진 이성으로서 사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행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나라는 존재가 현실에 존재하고, 그것이 없다면 실존적인 자신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자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의지로서 표현되는 인간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 행동이 정말 자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억지로 주입되어 그것이 하나의 억압인데도 불구하고 자유롭다고 여기는 노예정신인지는 그 자신조차도 깨닫기도 어려울지도 모른다.

 

노예를 부리고 있다고 여기는 고용주조차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본인의 영혼과 정신을 파괴하여 정신적 자유를 망각하고 있다. 로베스피에르가 제 아무리 공포정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바스티유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 아래로 보내어도 기본적으로 자유라는 것은 나만이 자유를 가지는 것으로 자유가 되지 않고, 모두에게 자유가 가야지 내 자신이 자유롭다고 한다. 자유로운 공간이 조성되지 않으면 그 자유가 없는 곳에선 자유를 파괴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가 만들어진 시기는 프랑스대혁명 이후 외국군대가 프랑스로 침입하면서 거기에 대항하던 의용군들이 모이게 되어 만들게 되었다.

 

자유는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로서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인 것을 보여준 사례다. 물론 그 자유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사라지어도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서 그 누구의 노예가 아닌 자신의 주인으로 행동하기에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나의 자유로운 의지로서 타인의 자유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의지로서 자유를 찾는 것은 내가 나로서 행동하고, 그것이 단순히 타인과의 교류를 단절하는 고립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그런 자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태어나기 전부터 정자와 난자로서 알파, 베타, 감마, 델타, 하등하고 열등한 엡실론이 나누어져 있다. 그것도 각각의 수정체에서도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존재하고 있다. 이미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그 운명을 위해서라면 생명에 대해 무슨 짓이라도 해도 상관없는 그 냉혹함에 <멋진 신세계>는 생명윤리에 대한 어긋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작가는 어떠한 사고를 가지고, 어떤 과학적인 사건을 토대로 작성한지는 모르나, 적어도 과학의 발달로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문명과 과학기술의 운영에 모든 것을 의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만들어가기보단 그 자신이 하나의 기계처럼 되어 완벽한 사회계급체계를 만든 셈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신이란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신이란 존재가 정말 현실적으로 보이고 존재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정말 있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더라도, 신이란 존재는 자신의 관념 안에서 정신적인 환상에 있다는 것조차도 없다. 그 신이란 이름 대신에 포드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포드는 말 그대로 자동차의 황제라도 불리는 포드다. 자동차 상표이름을 만든 거부 포드는 결국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입에 빠진 인간이 결국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인간 자체를 기계로 만들어 버리고, 인간이 기계가 되어 이루어진 세계가 바로 <멋진 신세계>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자본의 운동과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을 제작하여 팔아야 하며, 그 생산과정과 판매과정으로 통해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상품 이전의 물체가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듯이, 상품의 등장은 결국 인간의 노동력에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노동은 결국 물질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드나, 인간은 스스로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적 한계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피로와 더불어 정신적인 스트레스다. 그렇다면 그런 소모품이 아닌 인간이 노동만 하는 소모품으로 처음부터 만들고, 그 소모품들이 여러 공정과 업무를 나누어 계속 유지하게 한다면 그 노동력을 바탕으로 여가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은 상당히 편할 것이다.

 

그런 편한 생활에 빠진 자들은 알파계급, 그 아래 일정지식이 갖춘 자들이 베타계급이다. 알파계급은 다른 계급에 비해 무척 똑똑하고 지성적이며, 상시 자극을 주어 자신 안의 충동을 다른 쪽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나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인간이 가진 리비도(libido)를 자극해서인지 모르나, 적어도 판단할 수 있는 사무적인 것과 모두가 평화롭기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유토피아고 멋진 신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보일 뿐이다. 감마, 델타, 엡실론은 수 십 명, 아니 수 백 명이 모두 같은 얼굴로 떼를 몰려다니며,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만큼 각자가 보이는 행동도 같다. 같은 유전자로 나온 아기들조차 계속 파블로프의 개처럼 끊임없이 조건실험을 시행하여 그 사회의 톱니바퀴에 어울리는 도구로 만들어낸다. 그들은 늘 세뇌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세뇌당한 가치관과 사고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사고할 수 있는 영역이 겨우 어린아이 수준이기 때문에 이성이란 없다. 생명력도 짧기에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충당할 수 있다.

 

루소가 <에밀>에서 거론한 것처럼 곡식이 가장 싼 것은 인간들이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고, 도시에서 가장 싼 것은 인간의 생명이라 한다. 공장 안에 부품처럼 정확하게 단체로 움직이는 하등계급 인간들은 가장 저렴한 존재다. 누가 죽어도 다른 누군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당연하기에 죽음의 고뇌조차 초월해 버렸다. 인간은 나이가 먹어도 외모는 전혀 바뀌지 아니하며, 오히려 외모가 바뀌는 일조차도 없다. 그런 세계를 처음 방문은 존의 눈에는 이 완전하게 만들어 버린 곳이야 말로 <멋진 신세계>라고 말할 뿐이다.

 

인간에게 자유의 영혼은 없고, 단지 알파의 리비도의 방임적인 태도,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자유로운 섹스를 하여 리비도를 분출한다. 인간의 리비도를 계속 충족하는 것은 인간이 자극적인 쾌락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게다가 소마라고 불리는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 1㎜짜리 알약은 1g을 0.5g으로 나누어 1개 내지 다수를 복용하면 아주 기분이 좋아지고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현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갱단이나 혹은 권태감에 사로잡힌 자들이 섹스와 약물에 빠져 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섹스와 약물에 찌든 사람은 금방 몸이 망가지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그것조차도 권유하기에 문제없이 돌아간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고, 항상 완벽해야 하는 <멋진 신세계>는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지옥이었다. 존은 자신에게 영혼을 밝혀주는 책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그는 자신의 영혼이 타락하는 것을 거부했다. 문명의 이기심에 빠져들기보단 스스로 쟁기를 잡고 농사하기를 바랐으며, 인간이란 존재가 죄가 있다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등에 채찍을 강하게 내려친다. 그의 행동은 전형적인 성악설에 의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그 누구도 닮은 게 아니라 자신의 영역이 있어야 하고, 약물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존은 모두의 두려움이기도 하고 신기한 하나의 자극제이기도 했다. 처음 존의 행동에 모두들 놀라움과 충격에 벗어날 수 없었고, 심지어 존이 혼자 살아가려 할 때조차 그의 폭력적인 행동에 두려워했다. 이제는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행동이 마치 즐거운 쇼로 보였으며, 그가 행동 하나하나 <멋진 신세계>의 재미였다. 심지어 그가 스스로 벌을 주는 고통의 시간마저 촉감영화 소재로 만드니 이것보다 더한 스펙타클의 사회는 없다.

 

존의 사고와 의지가 아니라 그의 행동이 하나의 영상매체로서 강한 자극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존도 처음 촉감영화를 볼 때 입술에 강한 느낌을 받았다. 손에 타고 오는 전기적 신호가 인간의 뇌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극적인 쾌락과 미디어로 모든 사람들은 길들여져 갔다. 그런 이들과 유일하게 다르고, 이 상황을 알고,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은 세계총통이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이유는 그 평등한 자 위에 누군가 군림하는 노모스 같은 존재였다. 그도 셰익스피어와 여러 고전을 알고 있었다. 그만이 위험서적을 보유하고 그 지식을 알았지만, 누구에게나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게 위험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곧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은 세계, 아니 그런 단어는 처음부터 실제 존재하더라도 언어적으로 관념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세계다. 인간은 모두 포드님에 의해 포드님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하느님이란 신 대신 포드님이 들어간 모습을 보고 참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계문명을 만든 인간이 신이 되어버린 세계는 결국 문명의 이기심만 남았다. 모든 자연적인 문화는 소멸되고,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은 야만의 세계가 되어야 했다. 야만과 문명의 사회,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과학 기술력이 발달한 문명의 혜택이 돌아가는 곳인가? 아니라면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야만인은 인간을 억압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존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기술문명국가가 오히려 더 야만의 세계였다. 하지만 야만의 세계는 자신들의 야만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 야만성조차가 하나의 합리성으로 둔갑해 버렸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에선 오로지 효율성과 합리성이다. 논리만 존재하고 윤리는 사라졌다. 사회질서는 논리적인 것만 추구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논리를 지적하며, 인간이 논리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그 논리 속에 윤리가 선행되어야 하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는 윤리는 없다. 인권도 그렇고, 성윤리의식(여성의 성적 억압을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자궁이란 생명의 공간을 필요 없는 것으로 보기에 여성성 그 자체도 의미가 없고 단지 성행위를 하기 위한 생체조직으로 되었다)도 그렇다. 과학기술의 효율성이란 사슬에 묶인 인간은 결국 노예가 되어버린 채 자신의 인생을 기만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은 무병장수하고, 편한 인생을 원한다. 세계총통은 어느 섬에 20,000명의 인간을 보내 살게 했더니 모두 서로 싸우면 결국 반 이상이 죽고, 추후에 지배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 실험이 된 인간들은 알파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편리만 추구했지, 상대방에 대한 윤리적 의식은 배제되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윤리의식이 없이 이성적 능력이 알파 플러스를 그 이상을 보내도 역시 그렇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라는 것은 공공의 이익으로 통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침해받지 못하는 기능이 있다. 하지만 그 실험에는 일반의지 대신 전체의지만 남을 뿐이다. 전체의지는 많은 인간들이 자신 내지 그 자신과 부합되는 사람들의 이익에 추구했기에 생긴 의지다.

 

그건 우리 현실에서 타인의 고통과 부당함에 대해 개선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회를 좋게 바꾸고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삶을 돌아온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대신 자신의 부동산 이익이나 차액만 노리고, 일획천금을 노리거나 어떻게든 남들을 밟으면서 올라가는 게 목적인 야만의 세계다. <멋진 신세계>에서 충돌을 피하고, 모든 것은 경직된 것을 추구하나, 사실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는 곳은 충돌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사회가 완벽하지 않은 점과 그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단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만 있을 뿐이다.

 

유토피아라는 환상은 폭력과 통제, 억압이 조건이 되어야 하며, 그 거짓된 혜택은 일부 누군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귀결성이 따른다. 그런 세계에 모두가 자신이란 존재 대신 만인은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게 홉스의 이론(본래 만인은 만인에 투쟁한다)에 비틀어 버린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아라는 것은 이성과 더불어 자신의 욕망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되지 않은 세계는 그저 광기조차도 존재하지 않은 무미건조한 세계이다. 존의 마지막 모습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면, 적어도 자신이 인간이라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있었다는 것으로 마감해야 했다. 물론 이 책을 보며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런 <멋진 신세계>가 판을 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서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新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져 마치 <1984년> 마지막에 2+2=5라고 대답하는 스미스로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스미스는 과도한 폭력과 고문으로 정신적인 히스테리로 된 것이지만, 처음부터 우리는 스미스로 되어야 하는 세계가 아닌가 싶다. 미디어와 언론이 과연 우리의 눈을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는가? 마치 촉감영화처럼 자극적인 것만 보여주고, 아무런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존이 소마를 마구 버릴 때 델타계급은 모두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델타계급 같은 외형적 인간은 없으나 델타계급 인간의 정신은 여기저기 보인다.

 

노예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면 투쟁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알고 분노하고 어떻게든 머릿속으로 기억하여 자신의 현재를 알고 괴로워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인간처럼 보인다. <멋진 신세계>는 단순히 올더스 헉슬리 세계만이 아니다. 현실에도 존재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트로츠키, 바쿠닌 등과 같은 혁명가 이름이 나온다. 그들조차 세계를 바꾸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들의 이름은 단지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 내지 불완전한 인간으로 나온다. <멋진 신세계>에선 과거에 투쟁하던 이들의 이름을 올리면서도 바꾸지 못한 세상을 말한다.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보면서 SF적인 요건에 전혀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두려워하며 읽을지도 모른다. 사실 무서운 재해 수준이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예술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아주 두렵고 무서우며 모든 것을 앗아가는 재앙이다. 그 재앙을 공상소설로 만들어냈다고 하여 그게 단지 스쳐가는 이야기로 흘러가겠지만, 그의 소설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런 경고를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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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의 시대 -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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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의 시대>를 읽어보면서 거론하던 서적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였다. 원래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석학이다. 부르디외는 본래 도시가 아닌 시골출신이었으나, 우수한 능력으로 프랑스 명문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입학하던 대학교에서 그를 대하는 학생들은 냉소적이었다. 부르디외는 시골출신이고, 그들은 도시사람이란 점이다. 결국 인간의 사회적 생활에서 가지고 있는 삶의 흔적 내지 축척된 인생의 보이지 않은 재산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구별짓기>는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로서 더 확장해본다면 좋은 도서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살아온 공간이란 문화적인 공간에서 터득한 삶의 축척이고, 그 축적된 것은 그 사람의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게 해주고, 앞으로 그가 살아갈 인생을 결정되게 만들어준다. 쉽고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그런 인간이 가진 삶의 흔적이 문화적 취향과 취미로서 나타나고, 그것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자본이란 매체가 화폐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를 넘어 하나의 생활양식이라는 문화적 요건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문화자본이라고 불리는 이 생활양식의 축척들은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그의 지위와 위치를 보여주며, 단순히 경제적인 요소를 지나 직업과 사회적 입지까지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반적으로 미디어로 통해 문화생활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내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제기한 문화산업처럼 육체적 노동이 끝난 후에 집에서 다시 정신적 심리적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라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인 입장이 반영된 매체이므로, 미디어가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은 단순히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으로 통해 누군가 이익을 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중문화라는 것은 결국 군중을 위한 문화 아니 군중들이 즐기도록 만든 문화다.

 

같은 사고방식과 같은 가치관을 조성하고, 여기에 대한 미디어적인 요소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방송이나 정보로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입장을 넣을 수 있다. 이런 요소는 현재 우리나라의 미디어 방송 상황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현재도 그 폐단은 심각하다. 그렇다면 대중문화가 존재한다면 대중문화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가 있다. 그것은 곧 고급문화 내지 하위문화, 반문화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위문화와 같은 것은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혐오하거나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며, 반문화는 사회적으로 문란한 것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다. 대중문화의 현실적 비판에서 대중문화는 인간에게 다양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파괴하고, 획일화를 바라며, 대중들이 미디어에 길들여져서 자신들의 의지로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흔하게 이런 말을 한다. “TV는 바보상자이고, TV를 보기만 하면 공부가 안 된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바보상자와 정신적 박약한 것은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이다. 왜 아이들은 안 되고, 자신들은 된다고 생각하는가? 공부하는 것은 결국 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교육과정의 일환만 생각하지 인생 그 자체에 대한 공부와 학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 역시 미디어의 영향이다. 바보상자를 영향 받는 자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바보가 되지 말자는 이야기만큼 아이러니가 없다.

 

이에 반해 고급문화 같은 경우 무엇인가? 전에 미혼여성이 선호하는 남성의 취미가 바로 승마 내지 요트 같은 게 나왔다. 승마나 요트 같은 취미를 하려면 상당한 경제력이 받쳐주어야 하며, 그런 재력을 가진 남성을 여성이 원하고 있다. 남성은 돈, 그 돈을 가진 남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여성은 섹스, 결국 섹스와 돈이라는 공식이 형성된다. 문화자본 중에 하나인 취미나 취향이 결국 상대방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까지 연계되는 점이다. 적은 경제력으로 큰 효율을 볼 수 있는 독서 같은 취미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결국 지적인 사색이나 연구보다는 오로지 물질적인 욕망만이 문화적인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생활에서 문화라는 것은 이제 우리가 생산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가령 1차 산업이 중심이던 농업과 손으로 만드는 가내수공업을 하지 않은 이상 우리 대부분은 소비의 사회에서 삶을 영위한다. 우리의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술가들처럼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지 않은 이상, 소비에 의해 문화를 즐길 수밖에 없다. 결국 문화의 소비는 자본의 소비이고, 그 소비의 문화로서 사회적 가치를 매기는 것은 소비의 대상이 무엇이냐? 것이다. 왜 취미생활이 승마나 요트를 원하는 여성들이나 또는 그들이 원하는 가방은 왜 집착하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누구와 동일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은 욕망도 있으면서도 다른 누군가보다 특별해지기를 바라는 갈등이 존재한다. 그런 갈등과 욕망은 유행이란 단어를 생성시키고, 다른 누군가보다 조금 특별하면서도 누군가와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려고 한다. 문제는 자신이 그 동질감을 느끼려는 사람보단 자신의 모습을 남들이 따라오게 유도하다가 어느 순간 그 모습에서 탈피한다. TV에서 가장 문제되는 요소 중에 하나가 바로 저런 유행이란 것으로 통한 상품 또는 사회적 현상이다. 마치 이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존재로 낙인찍히게 만들거나 또는 사회적 현상이란 조류를 타지 않으면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기 힘들게 만드는 점이다.

 

가령 나 같이 TV를 일체 감상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런 갈등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류와 상품구매에 눈이 멀게 될 경우 처음에는 그것에 따라잡기 위해 어떻게든 사람들은 몸부림치겠지만, 자신들의 능력에 한계가 오는 순간 그것을 따라잡지 못한 채 도태되고 만다. 유행이란 것에 대해 내가 논하면 정말 고급문화는 다른 문화이지만, 고급문화가 아닌 상품이 고급문화로 둔갑한 문화적 현상이라 생각한다. 가방, 시계, 신발, 의상 등과 같이 고정적인 성향이 적은 물품들이 그러하다. 자동차의 경우 1년에 1번 이상 바꾸는 일이 흔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한 집은 고정적인 존재이기에 더 그렇다.

 

유동적인 물품일수록 유행의 흐름을 타고, 사람들의 정신을 거기에 몰두하게 한다. 문화적 유행은 상품을 팔기 위한 하나의 미디어적인 현상이며, 그 문화적 현상에 몰두하는 사람일수록 가장 스펙타클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그렇듯이 문화라는 것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억지로 조장되기도 하나, 이와는 다르게 다른 집단과는 다르게 우월의식 내지 정의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부르디외의 학창시절 일화처럼 시골출신 학생은 도시학생에 비해 소외되고, 모두들로부터 무시당한다.

 

그 무시를 당하면 당할수록 시골학생의 소외감과 불합리적인 처우는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나, 그 모습을 보고 안도하거나 우월감에 취한 사람들은 서로 단합을 느낀다. 문화적인 구별로서 문화의 벽과 차이로서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보거나 또는 자신의 이익에 전혀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익이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 무의식적인 거부의식은 문화적인 요건으로서 차별한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문화는 경제적, 환경적, 생태적으로 형성된다고 한다. 즉 인간의 문화형성에서 단순히 사회적 현상보다는 그 이면에 경제적, 환경적, 생태적 조건이란 것이 상부구조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상부구조인 문화가 하위구조에 영향을 받는 점에서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을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부르디외의 경우 후천적인 불평등이고, 최근에는 후천적인 불편등인 문화적 차별인 선천적인 요소가 근본이 되어 나타난다. 부르디외는 후천적인 조건이나 환경적인 조건이 뒤따라오므로, 인간의 불평등은 결국 겉으로 보이는 문화자본 뿐만 아니라 경제력과 인종, 민족 등과 같은 선천적 요소가 아주 복잡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이런 불편한 사회적 현상을 왜 일어나는가? 아니라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드는가? 이른바 진짜 고급문화를 즐기는 부류에 의해 일어난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적 생활을 위한 경제적 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조건들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로 하여금 계속 대립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이런 문구가 있다.

 

「리처드 로티는 현대에 이 유서 깊은 전략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클리포드 이어츠의 표현으로) ‘중층기술’을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목표이다. 미국인의 하위 75%와 전 세계 인구의 하위 95%가 민족, 종교적 적개심, 성적인 관습에 관한 논쟁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것이다. 가끔 일어나는 짧은 유열 전쟁을 포함하여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의사사건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주의를 자신들의 절망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은 별로 두려울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과연 정의로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자신의 생각이 옳고 정당한 것만을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의 윤리적 가치로서 철학적 사고로 비판을 하기보단 그저 자신들과 같은 연대적 단체들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의 이용은 효율적이다. 왜냐하면 일방적인 정보에 유출되어 거기에 매달리는 대중들은 그 이상의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정말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그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이런 문화적 집단의식은 공동체 조직들에서 자주 보이며, 이런 조직들은 때때로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대상은 자신들이 배제하고픈 대상으로 하여금 배타적 행위를 보여준다. 그 배타적 행위에 대해 그들은 잘못된 행동이기보단 자신들의 정의와 가치로서 행동한다고 여긴다. 그런 행동을 부추이게 하는 상황은 그들의 의지보단 조장된 정보와 상황이다. 많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한 심리를 자극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강박관념에 벗어나게 하면서 폭력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낸다. <유행의 시대>에서 이런 말이 등장한다.

 

「가장 강한 의미의 공동체는 사실 자신들의 집단적인 존재의 기본 전제를 찾아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로부터 저항력과 권한을 가졌다는 강한 느낌을 제공하는 동질감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될 가능성이 크다. 겉으로는 보기에 그들 자신을 찾는 사회적 관계를 통계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세상을 자신들의 공동체 크기로 줄여 버리고 그것을 기초로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그것은 대부분 강박적인 애국심을 만일의 사태에 대항하거나 포용하는 수단으로 삼는 결과를 낳는다.」

 

문화의 차이에서 결국 누군가는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박탈감을 느낀다면, 결국 그 박탈감을 대체할 존재들이 소외된 자 내지 이방인들이다. 그들의 외적인 요소가 결국 문화적인 이질감을 형성하고, 다문화주의라는 겉치레적인 문화현상에 맛이 들여 상대방의 문화가 그대로 그 문화로 남아주어 자신들의 문화영역에 침범되지 않도록 경계한다. 만약 자신들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과격한 폭력과 응징이 시도된다. 가령 과거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여성을 그냥 봤다는 이유로 심하게 린치당하는 일들이 벌여진 것처럼 인간의 문화는 사회적인 요소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여줄 뿐이란 점이다.

 

이런 일들은 계속하여 인간 스스로를 구별하고 차별하고 투쟁하도록 하여 정작 사회적 모순과 문제점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고급문화를 즐기면서 대중들의 투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지킬 수 있는 방도는 서로 적을 만들어 싸우게 하여 각자의 정의라는 것이 있다고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인 요소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세계가 사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세계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낭비가 심하고 겉치레가 심한 예술은 많은 농민과 도시사람들 굶주리게 하는데, 그 고통이 가중되는 원인은 누군가 그 재원을 착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술의 가치를 두고 미학적 가치보단 단지 자기 과시용 내지 지위의 상징으로 만들어진다면 그 사회는 이미 병폐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고급문화는 진정한 고급적인 미적 기준보다는 고급적인 상품적 가치로부터 나온다. 이미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한참 지나가는 시대에 예술이란 어느 일정한 선에 지향하기보단 그 선에서 비켜가는 것을 예술적으로 가치를 매긴다. 그것은 우리가 이때가지 느끼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못한 것을 환기시켜주는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단순히 가격으로서 상품적인 가치만 올려놓은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그저 권력을 소유하는 이들의 자만심에 가까울 것이다.

 

<유행의 시대>를 읽으면서 유행과 대중문화보단, 유행의 문화는 그저 목차 중에 하나일 뿐이고, 실제는 다문화주의와 문화우월주의에 따른 폭력적 현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동적이지 못한 것이 오히려 그 사회가 불안하다는 점이다. 사회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자유로운 사회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적인 가치관이 정립된 사회는 조용한 일상이 아니라 늘 시끄러운 일들이 발발한다. 그것은 그 사회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나기에 그것을 확인함에 따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와 문화현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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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 마왕의 결단 1 - S Novel
미즈구치 타카후미 지음, 이재경 옮김, 나베시마 테츠히로 그림 / ㈜소미미디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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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 마왕의 결단>을 읽기 전에 먼저 생각나던 도서가 제임스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이었다. 왜 많고 많은 책 중에 황금가지인 이유는 마왕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게다가 책을 사기 전에 마왕의 딸이 인간계에 찾아온 이유는 역대 마왕의 힘을 가진 「질리언․디마이즈」를 찾기 위해서다. 과거 마왕의 딸은 2명이 있었다. 1명은 주인공 에모토 코키의 할머니인 아크마리나, 그리고 다른 1명은 이 작품의 히로인로 등장하는 에밀리다. 그런데 왜 황금가지가 생각나는 것일까?

 

에밀리의 아버지는 마족세계에서 아주 강력하여 모두에게 두려움을 사던 최공최악 마왕 갈무트 일솔저 어셈블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등장한 마왕은 그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으로 인자한 말투에 상냥한 행동, 그리고 마왕이라고 보기에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무서운 마왕이란 점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조차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그의 무서운 능력은 과거 초대 마왕과 더불어 유일하게 「질리언․디마이즈」를 사용하지 않은 마왕이다. 그만큼 그가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왜 「질리언․디마이즈」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를 내 개인적으로 추론하자면, 선대마왕인 갈무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거나 혹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무슨 사단이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황금가지>에서 북유럽 네미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숲속에 칼을 들고 있는 남자 미친 듯이 주변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른다. 그가 지르는 이유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오는 도전자를 물리치기 위해서다. 도전자가 그의 칼에 쓰려지면 그의 자리는 계속 지속되는 것이고, 상대방의 칼이 그를 베면 그는 왕이라는 권좌에서 내려온다. 마왕 갈무트의 모습은 마치 왕의 자리를 놓고 싸우던 한 늙은 왕의 모습과 같다. 그는 이때까지 가장 많은 마족을 학살했고,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인간세계에 와서 딸인 에밀리와 딸의 손자인 코키를 찾은 왕의 모습은 영락없는 평범한 노인이고, 학교수업 참관까지 할 정도로 다정한 분이다. 그런 다정한 사람이 왜 죽음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는가?

 

끊임없이 자신의 권좌를 노리는 부류가 있고, 자신이 만약 그 권좌에서 내려오게 된다면 자신의 딸들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마왕의 목숨을 노린 자객들은 바로 마왕을 암살한 후에 그의 딸인 에밀리조차 죽이려 했다. 에밀리가 살아 있으면 언젠가 화근이 되어 자신들을 향해 칼이 돌아오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늙은 왕은 자신의 위치인 마왕이란 자리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 딸을 지키려 했다. <황금가지>처럼 늙은 왕은 마족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고 강한 마족이 통치한다. 그것은 단순히 마족의 논리가 아니라 <황금가지>에서 등장하는 미개 내지 야만인들의 논리다. 자연이 곧 하나의 생명이고 신이라고 여기는 관념적인 요소가 강한 시대의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에서 겨울이 되면 모든 생명이 죽으나 봄이 오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고 보았다.

 

그런 자연의 변화가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왕이란 존재로 통해 자연의 변화로서 대체하고, 자연이 늙은 겨울이 되어 생명력이 넘치는 봄이 된다는 것은 자연의 신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인간도 그러하다. 그래서 왕의 목숨이 곧 자연의 순환이고, 늙고 병든 왕은 죽어야 했다. 강한 왕이 선발될 때마다 피를 물든 아름다운 네미 숲속에서 인간의 신화와 문명의 이야기가 빛과 그늘로서 나타난다. 문명사회와 관련하여 야만의 시대는 문명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문명인으로 가져야 할 지성과 사회적 형태를 덜 갖추었을 뿐이다. 마족의 세계에서 갈무트의 죽음이란 바로 마족 그 자체가 기독교 이전의 사회와 연계되기 때문이다.

 

마족과 천사, 단순히 마족이 악마라는 거대한 악의 존재보다는 하나의 종족으로 설정된다. 그들이 마족이라 하여 인간계에 피해를 주고 있는가? 주인공 코키가 처음 마족인 공주를 만날 때도 허무하게 죽어야 했고, 마계에 가서 공주를 찾아갈 때 하급마족에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정도다. 마계는 마계 그 자체적으로 야만이란 공간이었고, 인간계와 별개의 관계였다. 아니라면 천계의 천사들이 인간들을 지켜주고 있었을까? 천계의 무리에서 또 다른 히로인으로 등장하는 미카의 경우, 그는 200세나 산 천사의 환생이었다. 육체는 인간이나 영혼은 천사인 것이다. 작품성에서 인간은 육체와 정신(관념적 영혼)은 분리되어 있다는 것처럼 보이나, 정신은 육체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관념적으로 보면 코키는 25%의 마족의 피가 섞여있고, 그것도 마왕의 혈족이다. 마왕의 후예로서 반인반마인 아버지 같은 존재도 아니고, 오히려 반인반마인 아버지가 더 마족의 모습이 약했다. 아니 교통사고로 돌아갈 정도로 연약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학교 시절에 죽었다는 사실은 일본이란 나라의 특유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욕망이다. 서양에서 그리스신화와 같은 신화에서는 아들들이 아버지를 죽이거나 추방하고,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가 작은아버지에게 살해당하나, 사실 자신의 내면에서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손이 아닌 우연한 죽음인 사고 내지 병사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그 자리에 앉고 싶다는 이중적인 욕망과 갈등이 섞인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이란 욕망은 이제 대신 다른 자리로서 대체된다. 그것은 사촌이란 존재다. 일본에서 촌수가 삼촌 이내이면 결혼이 불가능하나 사촌끼리는 가능하다. 그렇다면 에밀리는 언니의 손자인 코키와 합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하다. 연배는 비슷하게 보이나, 사실 에밀리는 언니 아크마리나와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다. 언니에 대한 배신감이 곧 언니의 부재로 인해 그의 손자인 코키에게 대체된다.

 

하지만 사랑의 크기가 큰 만큼 증오도 커지게 되나, 그 증오의 세기만큼 역으로 사랑이란 마음이 존재한다. 식당에서 코키가 말하던 가족사들, 특히 할머니는 매우 활달하고 밝은 분으로 가족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여고생 시절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따라 다녔고, 둘은 연애를 한 후 결혼을 하였다. 「질리언․디마이즈」를 훔쳐간 이유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할머니가 무척 가족들을 사랑했다는 것은 코키는 기억하고 있다. 마왕조차 딸인 아크마리나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딸이 「질리언․디마이즈」를 훔쳐 달아난 것에 대해 오히려 더 잘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질리언․디마이즈」에 숨은 힘과 비밀이 마왕의 가족에게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이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동생을 두고 아크마리나는 인간계로 찾아와 자신의 가족을 위해 가족을 떠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그 가족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을 마무리한다. 아크마리나는 가족을 위해 떠나 가족을 이루었고, 그 가족이랑 보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손자인 코키에게 전달한 것이다. 「질리언․디마이즈」의 정체는 정확히 뭐라 말할 수 없겠지만, 마력은 마족의 마음을 담은 것이고, 그 마음이 강할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 비밀의 상자는 역대 마왕들이 가진 강한 집념이라 볼 수 있다. 죽음 이후 남겨진 마음, 인간이나 마족이나 모두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은 잊을 수 없는 아쉬움과 분노, 슬픔, 그리고 즐거움과 의지를 품고 있다. 「질리언․디마이즈」를 사용하지 않은 갈무트조차 「질리언․디마이즈」를 남기에 증손자인 코키에게 전해준다.

 

「질리언․디마이즈」의 정체는 마왕이 가진 집념과 마음 그리고 그것을 이루고 싶다는 욕망이다. 즉 인간의 무의식적으로 숨겨진 욕망으로서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마왕의 소망이다. 그래서 그 소망은 죽은 자가 이룰 수 없기에 누군가로 통해 대신 이루게 하여 대리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처음 코키가 죽을 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마치 언제 마음을 누가 알았는지 작은 상자가 자신의 몸 주위에 등장하여 코키를 소생한다. 마왕이던 자가 자신이 살고 싶다고 빈 것이다. 다른 마왕은 음식을 맛있게 먹고 싶다는 것에서 음식이 맛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음식을 마음 편하게 즐겁게 먹고 싶다는 점이다. 또한 다른 마왕은 살육을 원했다.

 

자신의 욕망 아래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나, 그 정신은 비단 마족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기도 하다. 에밀리를 죽일 수 있었던 상황에서 바로 인간의 이드(id)라는 무의식적 요소에서 공격적 성향으로 바뀐 것이다. 폭력으로 인한 파괴본능, 게다가 리비도(Libido) 역시 존재했다. 그것은 마왕의 리비도가 아니라 코키 본인의 리비도였다. <고교생 마왕의 결단>에서는 기존 다른 라이트노벨과 다르게 그런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를 마치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 게 아니라 그 요소 자체를 스스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또한 리비도를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적용했다.

 

코키의 소꿉친구이면서 천사의 환생인 미카의 경우, 본래 천사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천사의 영혼은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하나, 그녀가 가진 성향은 전형적인 사디스트적인 요소였다. 코키에 대한 애정이 마치 소유권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코키의 누나처럼 행동하던 그녀는 나이는 만15세나 정신연령은 200살이 넘었다. 그래서 인간의 몸으로 살고 있지만 삶의 과정 자체에 대해 어느 정도 통달했으며, 천사의 영혼을 지녀도 여성의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리비도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코키를 노리는 이유는 처음에는 코키의 「질리언․디마이즈」이었지만, 미카의 가치는 그저 코키의 감시를 넘어 코키와의 우정과 사랑으로 전환된다.

 

처음에는 감시자였지만, 이제는 감시하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리마 증후군에 빠진 셈이다. 즉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관념인가? 아니면 육체인가? 어느 쪽이든 모두 다 지배하고 있었다. 천사가 육욕에 대해 눈을 뜨고, 리비도라는 무의식적인 성적에너지를 사랑으로 형태로 에로스로 전환하는 것이다. 에로스라는 삶에 대한 욕망이다. 삶에 대한 욕망에서 단순히 코키와의 성욕만이 아니라 코키와 같이 아이를 낳아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란 형태를 이루고 싶은 것이다. 즉 미카는 처음에 코키를 수단을 위한 존재로 접근했지만, 이제는 수단을 위해 삶의 목적으로 변했다.

 

에밀리도 처음에 코키를 증오와 원망으로 바라보았으나, 가족애와 더불어 근친상간이란 금지되지 않은 금기를 넘어보면서 수단에서 삶의 목적이 되었다. 그러나 코키는 가족 그 자체로만 상대방을 대한다. 코키가 이미 정신적으로 성숙하기 전에 가족들을 모두 잃고, 그 충격으로 가슴 한편에 큰 짐을 지고 있다. 그가 쿠몬지 절의 스님으로 되고 싶은 것은 모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도 존재한다.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의 자리를 받고, 그 절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가 절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 이름을 받고 싶은 것이고, 그의 결단 중에 마왕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이때까지 혼자라고 생각하던 코키가 자신에게 또 다른 가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왕이던 갈무트는 외증조할아버지고, 에밀리는 이모할머니다. 게다가 갈무트는 이제 막 보는 것 같더니 그의 딸 무덤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만큼 불효는 없다는 마왕의 말에 코키는 마족이란 존재를 그저 이질적인 존재를 떠나 보편적인 존재로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사실 때문에 더욱 슬프고 화가 나고 가슴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다.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만큼 가장 괴로운 일이 없다고 한다. 가족은 평생 자신의 옆에 있던 사람들이고, 그들이 같이 있는 게 당연한 것이나, 그 당연성이 사라지는 것은 과연 인간 개인에게 어떤 고통인가? 코키에게 외증조할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자신을 노리던 자가 이모할머니란 사실에서 남은 혈육을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마왕이 되어야 했으나, 학생도 되어야 했다. 학생이란 신분이 결국 속박된 자신을 보여주며, 그 속박은 결국 자신이 인간으로 사회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고, 한편으로 사회는 속박의 사슬이다.

 

이에 반해 마계는 오로지 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야만의 세계다. 그래서 <고교생 마왕의 결단>에서 고교생은 사회적 인간으로서 이성적인 존재이고, 마왕은 무의식에 이끌리는 본능적인 인간이다. 음식에서 날것과 익힌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불을 이용하지 않는 점이고, 그것은 곧 문명의 사회가 도래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작품에서 마족공주가 먹던 음식은 동물의 피와 살이었다. 음식을 불을 이용하여 요리하지 않은 채 식사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 먹어본 요리를 먹은 에밀리는 맛있다고 한다. 그녀는 이때까지 야만의 사회에서 문명의 사회에 들어온 셈이고, 인간의 사회에서 대화란 중요하다.

 

대화라는 것은 사회적인 언어로서 서로 간의 사회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요건이다. 그녀가 처음 학교에 올 때 전혀 사회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나 점차 사회적인 존재로 변모해 간다. 에밀리가 야생의 본능에 강한 것은 코키가 「질리언․디마이즈」의 힘에 잠시 각성할 때 알 수 있다. 코키의 친구인 미카가 심각한 사디스트라면, 에밀리는 심각한 마조히스트다. 그녀가 마조히스트적인 요소를 보인 것은 강한 힘에 의한 굴종이다. 코키에 대해 강한 태도에서 반대로 코키의 각성에는 순종적인 모습을 지나 변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에밀리의 변태적은 모습은 그녀가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같이 잠을 자주지 않으면 제대로 자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어머니가 없는 시점에 시녀가 같이 잠을 자주지 않았다면 잠을 제대로 못잔 점에서 매우 심성이 여린 소녀이다. 그녀의 마조히스트적인 요소는 자신의 어리광적인 모습에 대해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 억지로 강한 척하나 그 내면 이내에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자신을 처벌해주는 것으로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부록으로 딸려온 포스트카드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미카의 경우 사디스트적인 요소에 교복을 입을 때는 도발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강조하고, 천사인 상태도 교복을 입은 상태의 표정과 별로 변화가 없다.

 

이와 다르게 에밀리는 마족의 복장에서는 도도하고 프라이드가 높은 공주지만, 교복을 입은 상태에서는 아주 어리고 연약한 소녀로 나온다. 미카는 겉과 속이 같은 인물이라면, 에밀리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마족의 공주와 천사의 환생에서 코키의 목적은 지금의 목표인 가족들의 공간인 절을 다시 계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살아있는 가족과 죽어있는 가족에서 어느 것을 택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모두 놓치지 않는다는 결단을 내린다. 그러나 결단은 또 다른 결단이 필요할 것이다. 서사의 시작에서 주인공은 완전하지 못한 불완전 존재로 시작되어 안정된 존재로 변해가고, 과업의 완료에서 영웅은 최종 통과의례는 바로 혼인이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가족인 에밀리, 후천적으로 꾸준히 함께 자라온 미카, 원래 가족이었던 사람과 가족처럼 지낸 사람의 관계에서 코키는 과연 누구를 선택해야할지? 아니면 둘 다 포기해야할지 혹은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작품을 보아서는 하렘으로 가는 게 바르지 못한 것 같다. 코키가 수행해야 하는 것은 「질리언․디마이즈」의 찾는 것이고, 그것으로 통해 자신이 어린 시절 행복한 추억을 남겨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찾는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과거를 찾아간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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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R 2014-09-26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디게 잘쓰시내

만화애니비평 2014-09-26 08: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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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의 표지를 처음 보았을 때, 어느 검은 머리색을 가진 백인여성이 뭔가 은밀한 느낌을 전해주는 미소가 보였다. 그리고 그 미소 앞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비밀을 가진 여자가 주인공이라 생각했다. 그 전에 들은 바로는 동성애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고 하였으나, 책의 표지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나오는 장면은 교도소에 수감된 몰리나와 발렌틴이 서로 시간을 죽이기 위해 몰리나가 예전에 밖에서 보았던 영화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이런저런 작품에 대한 스토리가 나오고, 거기에 대한 발렌틴의 평이 들어가고, 또한 밑에 주석에 달린 채 프로이트를 비롯한 각종 정신분석학자의 이론 내지 실험의 연구내용이 들어간다.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이 작품에서 여인은 작품 내에 직접 나오지 않는다. 단지 거미여인으로 되어야 하는 몰리나가 대신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몰리나가 거미여인이 되어 발렌틴과 키스를 나누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단순히 이 작품에서 동성애적인 요소로 이어가는 것만은 아니다. 왜 그렇게 되어 가는가에서 후반부에서 나름 의아한 느낌이 나온다. 가령 이 작품에서 발렌틴이 1972년에 파업을 주도하다가 임시재판을 기다린 후 1974년부터 수감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남미에서는 격동의 시기였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운동을 위해 게릴라활동을 한 직후였고, 쿠바에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하고,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1973년 아옌데 대통령은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결국 피노체트의 집권이 시작되었다. 발렌틴의 수감과 감옥생활은 단순히 역사적 흐름을 찾아보면 아옌데 대통령의 죽음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아옌데 대통령은 본래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최초로 칠레에 투표로 인해 선발된 국민대통령이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국민의 빈곤을 해결하기보단 국민의 빈곤으로 이익을 보려고 하는 자들에 의해 어려운 정치생활을 겪었다.

 

게다가 전투기까지 동원되어 대통령 관저까지 공격하는 쿠데타의 과격함에서 피노체트 같은 인물은 단순히 아옌데 같은 인물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까지 숙청한다. 가령 발렌틴의 수감과 관련하여 교도소 소장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그 전화송신자는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이고, 그들은 발렌틴이 어서 혁명조직을 자백하기를 바란 것이다. 수단은 매우 잔혹했다. 발렌틴이 있는 감옥 방에 식사를 보낼 때 옥수수죽에 뭔가 약을 타서 보낸 것이었다. 옥수수죽을 먹은 발렌틴은 심한 복통에 시달려야 했으며, 며칠 동안 기력을 찾지 못한 정도로 심한 고통을 당해야 했다.

 

발렌틴이 옥수수죽을 먹으면서 몰리나까지 먹어야 했는데, 복통과 설사로 인해 두 사람은 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나 발렌틴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의무실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의무실에 가면 치료라는 이유로 주사를 투여하나, 그 주사는 바로 마약을 넣은 것으로 발렌틴으로 하여금 자백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이 마르크스주의자인 것처럼 발렌틴 역시 마르크스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발렌틴은 이제 독립되어 새로운 공화국으로 가려고 했던 칠레의 노동운동가였다.

 

대부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이 기반 되었기 때문에, 아옌데와 그의 정부요직은 무력으로 빼앗은 칠레에서는 어떻게든 노동운동그룹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발렌틴은 자신이 의무실에도 가지 않으며, 전에 정치범인 비센테 아파리시오가 고문으로 인해 죽자, 거기에 항의하여 단식투쟁하기도 했다. 고문으로 죽은 비센테는 바로 정치범이란 점이고, 그가 정치범이 되어야 했던 점은 아옌데 정권과 관련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옌데가 관련이 있든지 없던지 마르크스주의자인 발렌틴을 고문한다고 해서 정보가 바로 오지 않았기에 다른 방법으로 발렌틴을 노렸던 것이다.

 

만약 발렌틴이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채 죽는다면 감옥소와 정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약물을 옥수수죽에 투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감옥에서 같이 있던 몰리나의 경우 발렌틴처럼 정치사상이나 노동문제로 구속된 사람이 아니라 그는 순수하게 자신의 욕망에 의해 체포된 사람이다. 발렌틴의 경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된 이성적인 존재라면, 몰리나는 자신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여성이라고 말하는 동성연애자였다. 그와 동성애를 나눈 사람은 일반 성인남성이 아니라 미성년자였다. 미성년자에 대한 동성애행각으로 그는 7년을 언도받았으나, 소장이 몰리나에게 발렌틴을 감시하고 정보를 검색해주길 은밀히 지시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서로 계속 대화를 나누지만, 오히려 발렌틴은 단지 몰리나를 인간적인 존재로 받아들이지만 그의 동료들에 대한 정보는 단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발렌틴에게 온 편지조차 사실 암호로 된 편지로 발렌틴이 아니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런 정보로는 소장과 간수에게 엉뚱한 정보만 줄 뿐이다. 그래서 소장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발렌틴의 정보를 캐려고 했는데, 그런 최후 수단 중에 하나가 몰리나의 출감이었다. 문제는 처음에 몰리나는 자신과 교도소장의 거래로서 발렌틴을 대하려고 했으나, 어느 순간 바뀌게 되었다. 몰리나는 자신을 여자라고 한다. 그런 만큼 발렌틴은 몰리나를 남자가 아닌 여자로 대해주었다.

 

즉 동성애를 위해 발렌틴은 몰리나의 항문에 자신의 성기를 삽입한 것이다. 이런 동성애적인 요소에서 사람들은 많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에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인간의 DNA 자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정신분석학에서는 어렸을 때 인간이 우연한 계기일 수도 있다고 한다. 호르몬의 강약에서 오히려 동성애자조차 정상적인 호르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상대방의 호르몬을 투여하면 여성 같은 경우 수염이 나오고, 남성들은 가슴이 부푸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동성애는 단순히 호르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으며, 차라리 인간의 무의식적으로 새겨진 자국에 의해 발동하거나 또는 그리스처럼 그 시대적 문화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칠레의 당국에서 동성애자인 몰리나를 감옥에 장기수옥을 시킬 정도로 관대하지 않았다. 결국 몰리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남자이면서 여자라고 생각하게 되어 결국 발렌틴에게 여자로서 인정받는다. 그리고 자신은 거미여인이 되고, 섹스만 하고 키스를 하지 못한 발렌틴으로부터 거미여인이란 칭호를 받는다.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거미여인은 바로 몰리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동성애자인 몰리나가 교도소에서 발렌틴만을 만나는 소설로만 생각하기에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누엘 푸익이 저술한 <거미여인의 키스>는 시대적으로 배척받은 동성연애자와 노동운동가의 만남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두 사회로부터 감시와 처벌을 받은 사람이다. 서로 대립된 가치관과 방향성에서 어느 시점에서 승화한(동성 섹스) 시점에서 배척된 자들의 화합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다. 몰리나는 처음에는 출옥을 원했지만, 발렌틴과의 승화로 인해 오히려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발렌틴에게 이야기한다.

 

감옥에 나오는 순간 몰리나는 영원히 발렌틴을 만나지 않게 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이라고 한다. 몰리나는 사랑하는 늙은 어머니가 있지만, 어머니는 어머니의 인생이 있으나, 자신은 자신의 인생에서 발렌틴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긴다. 발렌틴은 몰리나가 나가기 전에 뭔가 이야기하고, 몰리나는 뭔가 이야기를 듣고 출옥한다. 출옥한 몰리나는 매일 실시간으로 첩보감시단이 달라붙으며, 몰리나가 전화하면 감청하여 듣고, 누군가를 만나거나 이름이 나오면 그 인물이 누군지 찾아본다. 심지어 그 주변까지 모두 조사되어 불법적 감시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몰리나로 통해 발렌틴의 측근세력을 모두 섬멸하려 하나, 어느 날 공원에서 몰리나는 누군가의 총에 의해 살해당한다. 살해를 주도한 사람들은 분명 교도소장과 정부기관의 행동이 아니다. 그렇다면 발렌틴의 일행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죽음은 발렌틴의 이야기로 통해 죽기 위한 암살인가? 어째든 몰리나가 죽은 후 발렌티는 심한 고문을 당하고, 고문의 고통을 줄이면서 효과적으로 자백하기 위해 교도소에서 마약을 투여한다. 하지만 발렌틴의 입에서는 아무 정보도 얻을 수가 없고, 거미여인이 정글에 가면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발렌틴의 입에서는 마르타의 이야기가 나오고, 몰리나가 했던 영화이야기가 자신의 입에서 이래저래 섞여 나온다.

 

그러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번역자의 후기를 보면 분명 위에 덧붙일 수 있는 내용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 서평은 번역자의 글을 참고적으로 할 뿐이지 그 자체로 인용하지 않기로 했다. 심지어 수잔 손택이란 저명한 학자의 글을 인용했는데도 말이다. 번역자의 글에서는 단순히 몰리나와 발렌틴의 관계로서 영화이야기를 활용했지, 칠레의 아옌데를 거론하지 않았다. 몰리나가 마지막으로 살해당하기 전에 몰리나는 신변정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0분 동안 공원에 아무런 행동도 없이 있다면, 체포하라는 당국의 지시에서 시대적인 배경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피노체트의 잔혹한 탄압을 말이다. 번역자의 도움을 받아 그나마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역시 번역자의 생각으로 적은 것이 아니다.

 

단지 영화이야기를 나누는 감옥소의 두 죄수가, 영화이야기가 단순히 심심풀이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시대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에 스릴러 미스터리가 연애로 인해 벌여지다가 나치시대의 이야기, 그리고 착취당하는 원주민, 그리고 흉악하게 얼굴이 바뀐 미남과 태어날 때부터 못난 여자의 사랑은 발렌틴과 몰리나를 메타적으로 배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배치로서 서로에 대한 감정과 자세가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에 가서 심하게 다친 청년은 발렌틴, 못생긴 하녀로 나오는 처녀는 몰리나라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소외된 자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는 의미다. 발렌틴은 몰리나의 가치를 인정했기에 그와 섹스를 하였고, 몰리나는 발렌틴의 가치를 인정했기에 암살을 당한다. <거미여인의 키스>의 표지에 거미여인이 나온 것처럼 거미줄이 쳐져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죽음의 미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죽음은 고통보단 영원성을 찾기 위한 유미주의적인 요소를 반영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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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미학 - 묘사 기법과 예술 표현
김용훈 지음 / 일진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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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미학>을 읽게 된 동기는 사진을 잘 찍고 싶어서 읽은 것이 아니라 사진 그 자체에 담겨진 이미지를 읽기 위해서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앞으로 우리는 이미지를 읽지 못하면 문맹인이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많은 정보와 지식은 글자라는 텍스트보단 영상과 그 영상에 어울려진 소리로서 접한다. 처음부터 우리가 접하는 것은 책 속에 있는 글자일까? 아니면 TV, PC, 핸드폰 같은 전자기기들인가? 부모의 선택에 의한 교육방법에 따라 책을 먼저 읽을 수 있겠지만, 인간이 처음부터 문자를 읽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책을 주어도 그저 미로와 퍼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림이 그려진 책이나 또는 영상은 다르다. 하다못해 어린아이들은 글자를 읽지 못해도 자기 동공에 맺혀진 상이 이미지로서 받아들인다. 2D의 영상이 아니라 3D의 공간조차도 사실 이미지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현실에서 3D이나, 사실 우리 눈이 원근감을 인지하고 있기에 3D로 보일 것이다. 3D로 보이는 세계를 화폭에 옮기면 원근법과 명암에 따라 멀고 가까움의 차이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런 것처럼 인간의 눈은 모든 정보를 공간을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점에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

 

눈이 인간의 정보력 습득에서 약 87%라고 한다. 거의 대부분을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귀가 들리지 않으면 답답할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더 답답할 것이다. 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고, 귀로 받아들이는 정보는 결국 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눈은 자신이 선택하여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귀는 그렇지 못하다. 귀를 막고 눈을 감긴 채 있을 경우 사람은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게다가 귀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듣는 소리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 판단해야 한다.

 

선택과 판단 사이에 시각은 선택과 판단이 가능해도 소리는 선택의 방법이 없다. 자신이 듣기 위한 대화내용도 주변 소음에 의해 그대로 묻히기 때문이다. 시각의 정보는 빛의 반사에 의해 좌우되나 소음은 움직임이 있는 모든 생명과 사물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눈이 보는 어느 대상이 단지 보는 사람의 눈에 의해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사진이란 정보적으로 혹은 기록적인 기능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진이 등장하기 전에 모든 정보는 글과 그림으로 저장할 수밖에 없었다. 매체에 의한 정보에서 인간의 기억력은 정확하지 않다. 인간의 눈에 맺혀진 상은 어느 일정기간이 지나면 자신의 뇌로부터 소거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눈에 비추어진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손을 이용하여 그림으로 남긴다. 그림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의 관점, 그리는 시간과 위치 그리고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나마 우리가 옛날 사람들의 의복과 생활양식을 알 수 있는 이유 역시 그림에 의해서다. 그림으로 기록된 점에서 글로서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것보다 이미지라는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더욱 정확하게 정보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런 저장과 기록을 유지하던 매체인 회화가 이제는 카메라 등장에 의해 그 기능을 잃고 만다. 몇 시간 동안 어느 인물의 모습을 그리는 것보다 단지 카메라 1대가 사진을 촬영하는 게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효과적이다. 게다가 더 정확하고 보관도 용이하다. 불과 몇 십 년 전에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를 이용할 시기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로서 모든 사물을 담을 수 있다. 사진파일을 jpg, bmp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장할 수 있고, 또한 복사와 수정까지 가능하다. 얼마든지 원본의 사진이 이제는 사본으로 제작되고, 그 사본조차 하나의 원본으로 가능하다. 사본이 원본이 되고, 원본 그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는 그 순간 simulacre의 세계에서 현실이 아닌 새로운 가상적인 현실, 파생실재를 만들어낸다.

 

그 파생실재를 만들어내는 카메라는 그 모든 것을 담아둔다. 시간의 흐름으로 따라 그 사진에 찍힌 대상 자체가 지금 현재의 대상이 아니지만, 그 기록을 유지함으로 우리는 과거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사진에서 보여주는 사실성과 우연성은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여 미쳐 우리가 볼 수 없었거나 모르던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로서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이란 것은 사실 그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서 승화시킬 수 있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사진이 많다. 네이팜탄 소녀라는 것으로 베트남전쟁에서 어린 소녀가 나체로 길가를 뛰어다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 소녀가 옷을 다 벗은 이유는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는데, 네이팜탄이 옷에 붙었고, 그 네이팜탄은 계속 옷이나 사람의 살에 붙어 연소를 한다. 따라서 네이팜탄에 맞은 사람은 심한 화상으로 인해 큰 부상을 입게 되고, 심각할 경우 사망에 이른다. 네이팜탄을 맞아 옷을 다 벗은 채 대피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종식을 요구했다. 이런 사진들은 많이 존재한다. 특히 종군기자에 의해 찍혀진 사진들은 죽음의 순간을 항상 그리고 있으며, 이런 사실과 우연을 사진가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들이 곧 세계 모든 사람들의 눈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저널리즘을 입각하여 공정한 것이어야 말로 진실을 담은 것처럼 카메라의 시선은 결국 관점과 입장을 달리한다. 따라서 <사진의 미학>을 읽는 것은 그 사진이란 매체로 통해 정보를 제공하는 사진가들의 작가의식 내지 저널리즘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작가 본인조차도 사진작가로서 예술을 논하며, 또는 저널리즘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이야기한다. 단지 조금 난해한 요소는 그는 이 나라의 아픔과 고통을 알고 있다는 점이고, 그것은 화해하기보단 어긋난 모순처럼 뒤섞여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고통 받는 조선인을 위해 또는 가혹한 착취에 고통 받는 노동자를 위해 사진은 참혹한 있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술이 되기도 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어렵다. 서적을 저술한 김용훈 사진작가는 약간 모더니스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2010년에 제작된 책으로 현재 이미지를 사진으로 촬영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없는 존재를 컴퓨터로서 만들어낸다. 사진가의 손에서 세상의 이미지가 탄생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존재한다. 가상에 존재하던 것이 현실에 있는 것처럼 증강하거나 또는 현실을 침범하고 있다. <사진의 미학>은 리얼리티 이미지를 예술로서 승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시대는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작가의 눈에 시대의 흐름은 숨길 수 없었다.

 

5․16을 두고 쿠데타와 혁명의 갈림길에서 혁명이라 했지만, 5․18 당시 사진과 국민의 정부 시절 북한과의 수교를 하던 대통령의 모습을 걸어놓은 점에서 시대의 모순과 아픔이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 본인이 625전쟁 중에 위협에 처해있었고, B29 폭격기의 폭격에 죽음의 손결을 피했고, 빨치산의 총알에 상이군경이 되었다. 오히려 동족상잔의 비극과 아픔을 논하던 그의 문장에서 진실한 사진작가란 곧 시대에 대한 관점이 필요하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게 결국 예술이 되는 것 같았다. 예술은 현실을 광학적으로 본다고 했다.

 

회화를 그리던 화가들도 화폭에 담긴 인물과 사물은 있는 그대로인 정물화로만 그리지 않는다. 인상주의자나 초현실주의자의 그림을 보면 전혀 우리는 그것이 바로 그 사물이란 말인가? 라는 의문을 준다. 그렇지만 예술이란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혹은 있는 그 자체의 사실성과 우연성에 의지하기도 한다. 예술이란 전달력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전쟁이란 이름은 이미 그로테스크로 가득하다. 과거의 신화나 역사에선 전쟁에 나가는 장군과 영웅 그리고 전사에게 영광의 이름으로 가득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시로서 전해온다. 그중 비극시라는 것은 그리스의 대표적인 예술문화로 내려온다. 그렇지만 거기에 동원된 병사와 도중에 피해를 본 민중들의 삶은? 예술이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게 하고, 때에 따라서 충격을 주어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게 해준다. 인간의 자기기만적인 요소가 강하기에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돌아볼 수 있는 판단력도 가지고 있다.

 

바로 사진의 힘이란 그런 리얼리티 속에 존재하던 가려진 일상 내지 사건을 예술 내지 저널리즘으로 승화되게 해준다. 작가정신으로 왜 교양과 철학, 그리고 신념이 필요한 이유는 사진은 보는 이의 눈이고, 보는 이의 생각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의 미학>은 내가 원하는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 책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하나의 정신적 수련이 되는 책이지, 사진으로 통해 세상과 현실을 읽어내기 위한 비평적인 도서가 아니다. 미학에서 철학이란 칼로 예술을 가른다는 것처럼 어째보면 예술 자체가 진실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그저 그런 무관심으로 지나가나, 그 무관심이던 대상이 하나의 예술이 되는 순간 우리 삶과 밀접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자신의 옆에 있더라도 그 자체를 각인하고 인지하고 보여주고 싶다는 순간적인 포착은 사진기를 잡고 있는 자의 몫이다. 물론 이 책에서 작가나 그 작가 주변 사람들은 현재 사진기를 들고 폼만 재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다. 카메라는 기계적인 조건에서 물질적으로 기계의 성능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고, 그것은 개인적 자본력에 따라 좌우된다. 하지만 사진의 가치는 카메라의 자본력이 아니라 그 자본력조차 올릴 수 없는 내용의 가치이다. 사진기로 비추어 촬영된 이미지는 곧 그 사진을 찍는 사람의 시선 그 자체다. 그 시선은 의식적으로 드러나거나 또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그 사진으로서 사진 찍는 사람이 그 사진에 대한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진에 대하여 생각하면 왠지 형식에 의해 좌우되는 사진들은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물론 단순히 깔끔히 예쁘게 재단된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은 사진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적 가치나 미적인 가치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사진의 미학>을 저술한 김용훈 교수는 제법 연로하신 사진예술가이나, 예술의 혈기에서 나이보다는 그 마인드가 중요한 것 같다. 그냥 디카 수준만 들고 있는 나에게 <사진의 미학>에서 요구하는 카메라는 무리다. 난 말 그대로 사진미학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기를 사랑하고, 사진에 대한 뭔가 유달리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분에게 추천하고 싶다. 카메라의 기초이론부터 시작하여 카메라 촬영으로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계속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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