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볼리바르 -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 서해역사책방 17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조재선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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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볼리비아라고 하는 나라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남미에 위치한 나라, 이름은 분명 어디서 들었지만 잘 알 수 없는 나라, 혹은 조금 더 잘 알 수 있다면 1960년대 아주 유명한 혁명가 체 게바라의 마지막으로 발을 들였던 곳으로 알 수 있다. 체 게바라는 혁명을 위한 투쟁 중에 볼리비아 산중에서 총에 맞고 죽는다. 그의 한 손을 잘린 채 그의 시체는 볼리비아에 묻힌 셈이다. 체 게바라가 활동하던 그 냉전시기 이전에 아주 명망 있는 혁명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시몬 볼리바르, 볼리비아라는 국가이름이 된 이유는 볼리바르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이름으로 통해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볼리바르의 이름과 얼굴은 남미 세계에서 상당히 많이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위대한 혁명가였다. 남미의 혁명은 서유럽과 북미대륙과 다르게 조금 뒤에 일어난 혁명이다. 그 혁명의 발원지는 서구사회도 아니고, 게다가 백인종이 주류가 된 국가도 아니다. 오히려 백인들이 와서 인디오나 인디언을 무참히 학살하고 나서 노예로 만든 비참하고 슬픈 역사가 숨은 나라들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서 남미국가가 보인 지난날의 상처들을 보여준 편이 있었다.

 

자신들의 문화가 소멸하고, 억지로 터전을 잃은 가난한 원주민들의 이야기에서 남미는 그야말로 한이 서린 국가라고 볼 수 있다. 북미에 아메리카가 건설되는 것과 달리 남미에서는 처음부터 식민지로 되었기 때문에 독립국가 도래는 상당히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게다가 북미의 독립과 남미의 독립은 개념이 달랐다. 북미의 경우는 기존 아파치를 비롯한 수많은 인디언 부족들을 내몰고 독립 국가를 세웠다는 점이고, 남미의 경우는 원래 원주민들이 다시 자신의 국가를 되찾으러 간 것이다. 자신들의 낙원을 찾기 위해 타인의 낙원을 파괴한 역사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세계역사는 서구중심사회이므로 유럽의 혁명은 매우 대단하게 다룬다. 물론 프랑스대혁명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조차 만든 거대한 사건이나, 사람들은 그것 외에 다른 것을 보려 하지 않는 점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왕정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다면, 남미의 혁명은 식민지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했다는 점이다. 혁명이란 기존의 체계를 전복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프랑스대혁명은 프랑스 공화국 이전의 왕정을 국민들이 무너뜨린 것이기에 프랑스 그 자체의 주인만 바뀌었다면, 남미의 혁명은 식민지에서 노예로 살아야했던 원주민들이 이루었기에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혁명의 시대를 만든 사람이 바로 시몬 볼리바르라는 인물이다. 19세기 후반혁명과 18세기 후반의 혁명에서 사상적 근본에서 19세기부터 카를 마르크스가 주도했다면, 그 이전에는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이 주도했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 발견자, 루소>를 읽다보면 마르크스조차 루소의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루소의 사상이 남미까지 흘러오게 된 동기는 이 책의 저자인 핸드릭 빌렘 반 룬이 밝힌 것처럼 루소의 <emile>을 시작하여 <사회계약론>, 그밖에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철학을 남미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 구체제의 낡은 사상은 시대적 흐름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사상들이 계속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상을 변화하려 했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을 했으나, 정작 중요한 것은 철학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틀렸고, 무엇이 문제고,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노예근성이 생기는 이유는 타성에 길들여진 이유도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고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지배받는 것을 하나의 정당성으로 여기게 만드는 사회에서 어떻게 피지배계급이 그 문제를 생각조차 할 수 있을까?

 

세계의 역사, 그리고 인류의 문명을 들여다보면 온갖 착취와 폭력 그리고 억압으로 가득 찬 사슬의 세계이다. 그 사슬로 묶인 공간에서 오로지 사슬을 풀려고 한 사람들은 피지배계급들이나 그들을 항상 앞에서 이끈 자들은 지식인 내지 권력을 충분히 가졌던 사람이다. 그들은 사고를 통해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추었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에 대한 윤리적 의식이 있었기에 혁명이 가능했다. 사상적 중심과 행동하기 위한 냉철한 이성이 갖추지 못하면 그저 민중의 봉기는 단순한 난으로 끝날 수 있다. 따라서 지식인의 양심과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이유는 그들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안다는 점이고, 어떻게 하면 하나하나씩 실타래를 풀어 문제를 정리해 나갈 수 있는가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항상 좌절과 시련 그리고 비참한 운명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당통도 그러하고 로베스피에르도 그러하다. 마르크스는 가난과 질병, 가족을 잃은 고통에서 먼 이국에서 죽었으며, 수많은 혁명가들이 그런 운명으로 사라진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비극과 고통에 후회보다는 늘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힘들게 걸어간다. 시몬 볼리바르 역시 그러하다. 아주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부유한 스페인 후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과 달리 똑똑했으며, 학교선생이나 가정교사에 대해 항상 골려주는 것을 좋아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삼촌인 시몬 로드리게스라는 친척은 볼리바르에게 새로운 바람이었다.

 

자연인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로드리게스는 루소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자신이 배운 지식을 볼리바르에게 전해준다. 루소의 사상에서 자연주의적인 철학은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유로우며, 그 누구에게 속박 받아서는 아니 되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사상은 볼리바르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볼리바르는 우연히 만난 혁명가 미란다를 만나 혁명군 장교로 시작하여 계속 베네수엘라를 시작하여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5개의 나라를 해방한다.

 

그 해방을 위해 자신은 귀족 집안인데도 또한 거대한 재산이 있음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이성으로 입각하여 평생을 헌신했다. 많은 나라를 해방했으나, 같은 편에서 벌어진 배신과 소중한 친구의 죽음은 그로 하여금 병들게 했다. 최초의 남미 대통령이면서도 가장 가난하게 죽은 대통령, 그가 죽을 때 깨끗한 셔츠조차 없다는 말에 혁명가는 평범한 죽음조차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한다. 그가 죽기 전에 한 말인 “꺼져가는 생명이여, 이제 너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는 죽음뿐이구나.”라는 것은 볼리바르가 그동안 해놓은 일들이 거품처럼 사라진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는 해방된 남미가 다시 분쟁으로 가면서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이 세상 모든 것과 화해하기로 한다. 즉 죽음의 안식을 기다린 것이었다. 볼리바르의 죽음은 매우 애석한 영웅의 뒷모습이었다. 그러나 20세기를 지나 21세기로 오면서 남미 역시 자유와 평등의 물결이 일어나고, 국민들은 항상 억압받는 자에서 자신의 인간임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물론 이제 막 시작한 걸음마이나, 그런 기반에 시몬 볼리바르의 영혼이 숨어있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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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코치 K 2 - 내 안의 불협화음
이진 지음, 재수 그림, 조벽 외 감수 / 해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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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말하는 꿈이란 무엇일까? 지금 당신들에게 나는 질문 1가지를 던지고 싶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혹은 그 대상이 어른이라면 당신의 아이들의 꿈은 무엇입니까? 참 어려운 질문이다. 꿈이란 것은 우리가 잠을 자면서 수면 중 이미지로 보는 환상이 아니라 자신이 언젠가는 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이다.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지 뒤로는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1번뿐인 인생에서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인생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것이어야 했다.


‘것이다가 아닌 것이어야 했다.’라는 말은 결국 우리는 꿈을 꾸기는 하지만, 우리의 꿈이 아니라 타인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해야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뿐이다. 따라서 취미생활을 하는 것은 직업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꿈이나 또는 자아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정해진 틀에만 끌려가면 항상 우리의 마음은 촉박한 시간관념 아래 자신을 감옥으로 내몰 것이다.


<감정코치K> 2권에서는 그런 학생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공부를 잘하고 외모도 단정하며, 심지어 아버지는 국문학과 교수, 어머니는 학교 교사이다. 그리고 그 부모들은 하나뿐인 딸에게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기보단 더 좋은 곳을 보라고 한다. 보는 순간 참 답답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딸은 그러면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은 타인에게 도덕적이고 존경받는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하면서 정작 중요한 상황에서 결국 자신의 이익으로 가게 된다. 그런 부모의 이중성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다른 부모라면 몰라도 교육자라는 부모들은 그런 도덕적 가치를 떠나 더 윤리적인 가치를 요구되는데 말이다.


그 교육자의 아이인 학생은 공부를 최고이나, 자신의 친구 중에 춤을 좋아하는 학업성과가 부진한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외모는 볼품이 없더라도 항상 뭔가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힘으로 방송출현까지 한다. 그런 소녀를 보면 우등생 친구는 질투를 한다. 자신은 아무 것도 정한 것도 없이 이렇게 고민하는데, 뭔가 이루는 그 소녀를 보면서 말이다. 그 소녀의 질투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계속 자신을 다그치는 상황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 즉 동경과 질투의 대상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부족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알기에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학생에게 꿈을 꾸게 하기보단 오히려 꿈을 부정하고, 정해진 성공이라는 출세만 요구한다. 성공의 인생은 무엇인가? 문학과 고전에서 위인들의 업적들을 보여주면서 그 위인들이 그렇게 될 수 있던 이유는 막상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가치이지 단순히 공부만 하는 기계로 만들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망가뜨리는 교육방법에서 18세기 철학자 루소의 <Emile>이 전해주는 바는 정말 큰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은 그 당시와 다르지만, 학생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 불편함에서 아이들은 강요만 당한다.


어른들은 지성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나 감성적인 공감성은 없고,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냄새를 맡을 수 없다. 단지 풍기는 것은 향수나 화장품 냄새 또는 담배냄새 정도일까? 아이들은 자신의 고민을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 고민을 터는 순간 돌아오는 것은 위로와 이해보다는 다그침과 강요뿐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더욱 교활해지거나 또는 더욱 반항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민은 더 심해지고,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내몰린다. 이 책 다른 편에서 아주 뚱뚱한 여학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겉보기에 너무 뚱뚱하고, 신체검사에서 100㎏을 넘을 정도도 매우 심각한 건강상태였다. 그 학생이 그렇게 된 이유는 가정환경이었다. 그런다고 부모와 가족을 나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청소부 일로 지쳤으며, 남동생은 아직까지도 어린 아이다. 그러나 그 학생은 어린 시절 삼촌과 같이 살았는데, 대한민국에서 남자친척이 여자가족에게 성추행하는 게 1/3이란 점이 매우 놀라웠다. 보이지 않는 가족사회의 어두운 부분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학생은 과식을 하게 되었다. 스트레스성 폭식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내몰리면 반사적인 조건에 의해 계속 음식을 먹게 된다.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의 심리를 되찾으려 하나, 막상 신체가 변하면서 또 다른 심리적 위축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과거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여긴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쉽게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은 것이다. 깨진 유리를 다시 복원할 수 없지만, 그 깨진 유리의 파편을 치워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강조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마치 그런 부당한 일을 보면서 당연히 그래야지 혹은 마치 자신이 좋은 사람인양 말을 하겠지만, 막상 상황에 닥치면 그렇게 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또 다른 이야기지만,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동성연애에 대하여 다소 혐오적인 눈으로 보고 있지만, 그런다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동성연애를 하는 것 자체를 막을 권리는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면 동성연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을 제대로 건네주고 있는지도 궁금할 정도다. 자유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무엇을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용납되지 않은 것은 사회라는 여전하고, 그런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라면 더욱 심하다.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은 법적인 처벌로 바로 처리할 수 있지만, 학교 안의 폭력은 상당히 미묘하다. 동성연애에 눈을 뜬 남학생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 대상은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다고 그런 학생의 마음을 짓밟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 상태로 계속 살아야 한다면 참 어려운 삶일 수밖에 없다. 사회라는 공간에서 우리 인간은 언제나 남과의 경쟁을 강요받아 왔다. 하지만 천재가 아닌 이상, 혹은 경제적․사회적 조건이 현저하게 차이나지 않은 이상 거기서 거기인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보았자 우린 우월함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자신의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체 내에서 소수의 약자를 선발하여 억압하여 거기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왕따현상이나 학원폭력에서 단순히 제왕적인 일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군중심리 자체도 더 심각한 문제다. 일진은 따로 격리하여 다른 방식으로 교육방침을 내리면 되지만, 집단 내의 폭력이란 하나의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학생을 게이라고 왕따 시키는 학생들의 모습에선 자신의 부조리를 인정하는 것보단 차라리 정의의 가치로서 사회악을 근절하는 정의의 사도처럼 보인다.


그런 왕따를 하는 학생에 대해 어른들은 분명히 나무라 하겠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어른이고, 어른들조차도 그런 왕따현상을 더 심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소중하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이익에 치중하는 모습에 어떻게 학생들에게 인생의 가치를 논할 수 있으랴? 계속 그런 가치관에 물들여진 학생들의 모습에서 언젠가 또 다른 가면을 쓴 어른이 되어 억압의 사슬은 계속 묶여질 뿐이다. 감정코치K에 나온 상담자는 그런 세상을 이미 맛을 본 사람이고, 그런 세상의 일원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따라서 상담이 가능한 것은 그 자신조차 방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황하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면 계속 억압의 사슬은 더 심하게 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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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코치 K 1 - 진짜 얼굴, 가짜 얼굴
이진 지음, 재수 그림, 조벽 외 감수 / 해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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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나 같을 수가 없다. 인간 그 모습 그대로의 자연적인 모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람은 운동을 어느 사람을 글 쓰고 사색하는 것을 어느 사람들은 분석하는 것을 특기일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아쉽게도 그런 개인적 소질과 적성으로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단지 그런 선택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효용적인 즉 자본력과 권력을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추천한다. 인간의 사회성에서 한계성이란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로서 보는 게 아니라 타인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나의 타인은 당신일 수도 있겠지만, 그 타인이던 당신이 자신조차도 타인에게 타인이다. 우리는 타인과 타인 속에서 본인조차도 타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와 욕망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과 거기서 생겨난 틀에서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있는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 소실되어 간다. 그런 점에서 감정코치K는 우리 사회에 보여주는 이런 단면적인 모순이 결국 사회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하게 왜곡되어 다양한 형태로 문제점을 일으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학생에게 증폭되어 보여준다. 학생들은 아직까지 이성적인 판단력이 완성되지 않고, 심지어 감정적인 조율 역시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 그런다고 학생만이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그 학생들을 가르치고 돌보고 책임지어야 하는 어른조차도 더 심각한 판단력 부족과 감정의 부적절한 통제로 일을 더 크게 만든다. 아이들이 왜 힘들어 하는가? 대부분 어른들은 아이들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문제를 당장 없애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인가?

 

어떤 문제인 부분만 제거하면 그것으로 끝이 날까? 학교폭력으로 얼룩이 진 사람을 다른 곳에 보낸다고 그 학교 자체에 폭력이 종결되는 것인가? 아니라면 폭력의 발생원을 다른 곳에 보내면 거기도 생기지 않은가? 극단적인 살인이나 강간 같은 범죄가 아닌 이상 분명 아이들의 비행행위나 또는 거기에 대한 피해는 원인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는 악독하고 도저히 인간의 윤리의식으로 저지르면 안 되는 행위지만, 후자의 경우 감정의 기복이나 무의식적인 충동에서 순간적인 사고가 발생한다.

 

나도 지금은 학생이란 신분에서 한참 멀어진 사람이나, 그런다고 하여 이 책에서 보인 학생들의 고민에 공감하지 않을 수도 없겠지만, 다소간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되었다. 우리 시대나 지금 학생시대나 학교라는 공간은 꿈을 키우는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꿈을 버리고 억지로 주형틀에 넣어 기성품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라 생각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처럼 학교는 하나의 감시체계가 존재하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요건으로 인간을 키우는 것보다는 인간 그 자체를 재생산하는 공장처럼 느낀다.

 

아이들의 감정과 마음은 자연적이나, 그 자연적인 요소를 억압된 공간에서 나두게 되니 당연히 뭔가 어긋나고 비뚤어질 수밖에 없다. 처음 이야기에서 투명인간인 학생은 자신은 그림을 좋아하지만, 그림만 그리다보니 남들에게 존재감이 없다. 그런 자신의 존재감 부족과 타인들로부터 왕따현상은 개인적 문제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다. 자기가 가진 특기가 드러낼 수 없다면, 결국 이것을 하나의 기예로서 당당히 올려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신의 특기가 인정받게 된다면 타인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른바 기죽이지 말고 기를 살려줘야 하는 교육방법이다.

 

기를 살린다는 것은 오만과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정해진 규율과 틀에만 고정시키는 협소한 교육방법이 아니다. 어차피 머리가 좋든 나쁘든 또는 시험을 잘 보든 못 보든, 학교시험을 보면 1등부터 꼴등은 정해진 자리이다. 어느 누구에게 성적이 떨어져 고민하고 있다면 다른 누구는 고민하지 않으랴? 공부 못한다고 하여 결국 다 같이 공부 열심히 해도 꼴찌는 존재하는 법이다. 꼴찌에게 따뜻한 손을 내어주지 않는 불친절한 세상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물질적인 혜택이 도래했지 마음에 대한 혜택은 일절 없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시대적 상황에 모든 것을 판단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른 세계를 보고 있고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다못해 일진인 애들도 최소한의 정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정조차도 없다. 인간이 철저하게 감정이 메말라 단지 학교의 아이들은 나의 적 혹은 이익이 되는 친구로 가고 있는 현상이 심한 것이다. 이런 책임은 아이들에게 몰아넣는 어른들의 무책임이 아이들을 더욱 스스로 감옥에 가두고 있다. <감시와 처벌>은 감시에 의한 통제력이나, 우리 사회는 어른들의 무책임한 관심에 의한 처벌로 이어지고 있다.

 

몸의 상처는 피가 나면 닦으면 되고, 상처가 남으면 연고를 바르고, 자국이 심하게 남으면 성형수술로 복원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눈에도 보이지 않고, 나체의 육신을 감추고 있는 의복을 다 벗기어내도 알 수 없다. 맨몸의 인간 신체 역시 마음을 알 수 없다. 마음의 깊이는 1㎜보다 낮으면서 1㎞보다 멀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기에 마음의 고통은 인간에게 트라우마 내지 스트레스, 노이로제 같은 행동을 보여준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과 말을 하고 저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의문에서 그 치료가 시작된다.

 

타인의 기준에서 그런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타인이 되는 그 자신조차도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이성과 지성을 갖추어도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감정과 무의식적인 요소가 오히려 이성적인 척하는 모습도 다분하다. 어른들의 모습에서 어른들은 자기들이 그런 요소를 가진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게 문제다.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화도 내고 짜증도 부린다. 그런 자신이 있다는 사실부터 알아가야 타인을 대할 수 있다.

 

문제 학생들을 만드는 것은 학생들 자신의 자질도 있겠지만, 그 자질을 만들어내는 환경이 문제다. 옛날 초등학교 시절 좋은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면 이상하게 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는 환경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하지만 생각하면 겉보기에 날라리처럼 보이는 애들도 알고 보면 좋은 녀석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리어 겉으로 우등생이 더 짜증나 보일 때도 있다. 마지막에 부모의 문제, 선생의 문제에 크게 공감이 갔다. 뭐든지 좋은 것만 강요하고, 불리한 것은 제외하는 어른들이 보일 때마다 학생들은 자신이 도망갈 공간이 없다. 사이코 패스처럼 동물을 학대하는 애나, 그 동물을 사랑해주는 불량소년에서 누가 더 인간적인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길가에 버려진 연약한 동물을 괴롭히지 않고 사랑해주는 인간이 근본 자체가 나쁠 리는 없지만, 단지 그가 공부도 못하고 반항하는 이유로 몰아가기에 더더욱 심하게 불량해지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도 방법론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다. 우리 역시 학생일 시절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의 이익을 사랑하는 것만 강요했기 때문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맞다. 하류의 물이 상류로 올라갈 수 없다. 그것은 과학의 법치이고, 인간이 과학으로만 판단할 수 없지만, 사회과학적으로 인간 역시 과학적 판단으로 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중요한 점을 더 망각하고 있다. 감정코치는 아이들만 받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어른들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망가지는가? 망가지는 것은 아이들이 시작한 게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만든 공간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삶의 여유를 빼앗고, 인생의 즐거움을 빼앗고, 자연적인 인간성을 파괴하면서 사회적 목적만 강요하는 공간에서 과연 감정코치를 한다고 해도 완성될까? 그런 것부터 같이 조금씩 바꾸면서 감정코치를 하는 게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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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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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는 순간 작가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본래 로맹 가리는 유명한 문학 작가이도 하고, 연극 각본가이도 하며, 또한 뛰어난 외교관으로 활동한 우수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에서는 프랑스 공군대위로서 하늘을 길동무를 삼아 전장을 누비었다. 그런 인물이 왜 굳이 에밀 아자르라는 인물로 대중에게 얼굴을 비추었는가? 나는 그의 책은 잘 알지 못했고, 실제 로맹 가리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만은 알아도, 그의 작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로맹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는 순간, 그는 로맹 가리라는 실존적인 인물이었으나, 적어도 이 책에서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나오려는 것은 분명했다.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어떤 식으로 글을 쓰고, 어떤 내용을 다루고, 그것으로 통해 무엇을 전달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지금으로도 알 수 없다. 단지 소개 편에서 그가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온 이주민이고, 이후 평생 프랑스의 시민으로서 살아간 점이다. 시민(市民)이란 이름은 서울특별시나 혹은 부산광역시 또는 성남시에 사는 시민인 citizen이기보단 이른바 peoples라는 시민이 어울릴 것이다. 그가 살아온 업적과 그 업적에서 보이는 그의 이야기가 말이다. 하지만 내가 로맹 가리보다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에 시민이란 peoples이 어울리는 이유는 바로 <자기 앞의 생>이란 책이 그가 바로 시민이란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로맹 가리는 모르겠다. 단지 나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그의 작품세계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생각난 영화 한 편이 있었다. 프랑스 빅토르 위고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다. 그 영화에서 나오는 판틴이란 아름다운 여성이 떠올랐다. 물론 <자기 앞의 생>에서 판틴이 될 만한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판틴 같은 여자가 죽은 후 그녀에게 남은 아이 같은 소년 1명이 나온다. 단지 그 소년은 안타깝게도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낭만주의 요소를 제외하여 진행한 작품인 것 같았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벗어나 보이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는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작품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혐오스럽고 지저분하고 비천하고 한탄스러운 사연들만 쏟아져 나온다. 문학이 왜 예술로서 인정받는 것인가? 프랑스에서 9가지 예술 중에 해당하기 때문에? 아니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신 muse의 9자매에 해당되기에? 혹은 그 이상이라도 있는 것만은 아닌가? 삶이란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기만과 속임수를 강요한다. 눈앞의 현실을 항상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회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인간의 삶은 10살로 알았던 모하메드 아니 모모라는 소년이 알고 보니 14살이란 깨닫는 아이러니한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항상 피해온 이야기 내지 또는 알고 싶지 않거나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다. 인간에게 전해주는 불편한 기분과 마음속에서 움트는 어두운 기분이어야말로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것을 알게 해준다. 원래 있던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자기 앞의 생>의 등장인물들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 분명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이 소설에서 전해주는 이야기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기에 우리의 평범한 인간들의 평범한 가치관으로서 도저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앞의 생>에서 보여준 작품세계에서 작가인 로맹 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는 불평등한 세계와 부조리한 사회,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속 그 공간속에서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일상적인 부조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져준다. 세상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눈을 현실을 보지 않고 있다. 우리는 항상 화려한 영상만이 나오는 스펙타클의 사회의 열렬한 소외된 군중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내가 왜 에밀 아자르가 시민 peoples로서 보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러시아 출신이면서도 프랑스 시민이지만, 프랑스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시작되는 배경은 1970년 전후의 프랑스다. 프랑스의 지리를 잘은 모르나 정상적인 사람들이 살기보단 범죄자, 불법이민자, 마약중독자, 위조된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이 소설 주인공 모모는 바로 그런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세계에 살아가는 소년이다. 그의 출생은 모른다. 단지 그가 이슬람교의 교인으로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의 출생민족처럼 그는 이슬람교의 문화를 다행히 익히고 있었다. 눈이 아주 나쁘나 아마 이슬람민족의 국가에 가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하밀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분명 이슬람문화를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즐겨 읽었으며, 게다가 건강이 너무 좋지 못할 때 모모를 두고 빅토르라고 말할 정도였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는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이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테르미도르 반동에 의한 실각, 이후 1799년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로 인해 다시 민주주의국가에서 왕정국가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장발장이 살던 세계는 온갖 가난과 질병 그리고 비참함으로 들끓는 세상이 되었다. 비참한 사람들이란 <레미제라블>, 그러나 우리가 그 비참함을 다시금 생각해야 할 점은 비참함은 자신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져서 자신의 아이들까지 이어지고, 또 그 아이들은 자신의 먼 미래의 아이들까지 이어진다.

 

작가 이름이 에밀 아자르라는 점에서 그가 왜 에밀이란 이름을 사용했을까? Emile이란 이름은 장 자크 루소가 1762년 만든 아동교육철학도서 <Emile>과 같은 철자다. 정말 로맹 가리가 그런 것을 생각하여 이름을 지었고, <자기 앞의 생>에서 빅토르 위고의 책을 생각했다면 그는 분명 인간의 불평등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자기 앞의 생>은 분명 가상의 인물이기도 하겠지만, 실제 있었던 사건들과 사람들을 토대로 만든 소설일 것이다. 이슬람문화권인 모모로 통해 이런저런 프랑스의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부분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가 식민지로 지배하던 알제리란 국가가 나오면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도 뫼르소가 살인사건을 저지른 배경조차 알제리 해변이었다. 알제리는 프랑스에 식민지로 속해 있었지만, 한편으로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갈등을 빚은 바가 있었다. 프랑스 대표적인 지식인이던 장 폴 사르트르는 알제리가 자신의 국가를 위해 독립전쟁을 벌인 것에 대해 프랑스인(그는 나치가 프랑스를 지배할 때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이었으나,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다. 로맹 가리가 진실로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적어도 주인공 모모가 이슬람문화권 사람인 점에서 알제리 사람일 것이며, 혹은 알제리든 유태인이든 세네갈이든 많은 외부사람들에 <자기 앞의 생>에 다룬 것처럼 적어도 프랑스 내의 인종차별 내지 또는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주려 한 것은 분명하다.

 

나치 수용소에 갇히어 평생 히틀러의 초상을 침대 아래 숨겨놓고, 자신이 나약해질 때마다 히틀러의 얼굴을 보는 로자 아주머니를 보면서 왜 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단 에밀 아자르의 <Emile>이니, <에밀> 혹은 루소의 많은 사상중에 <사회계약론>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그 누구도 타인을 돈으로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해서는 안 되고, 그 누구도 자신을 팔 수 있을 만큼 가난해서도 안 된다."

 

왠지 내가 적어 놓고도 무안해지고 조금 가슴 아픈 말이다. 루소는 식량이 가격이 저렴한 이유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격이 저렴한 것은 도시의 사람들이란 점이다. 인간만큼 가장 필요한 존재가 없기에 그들은 언제나 비참한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자기 앞의 생>에서는 루소의 가르침이 그대로 드러나는 책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모모의 어머니는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파는 창녀였던 것이다. 창녀들의 역사를 보면 고대사회로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적어도 고대사회에서 여성은 자연과 같이 보았기에 그녀의 다산성을 존중하고,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보면 북유럽 고대부족 중에 신을 모시는 사당에 일하는 무녀들은 사실 창녀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팔아 신에 대한 조공을 받쳤으며, 부족국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성(性)이란 단어를 성(聖)이란 말로 장난 칠 수 있다. 아마 창녀에 대한 문화적 차이가 발생한 것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간 것에 대한 것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수렵을 하던 시기에 식량이 충분하므로 여자들도 몇몇 무리지어 충분히 삶이 가능했다. 풍부한 식량과 자원에서 한정된 식량과 농경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도시국가체계는 전쟁이란 필요적인 문명을 만들었다.

 

따라서 과거 성생활은 단순히 인류생명의 연장이라면 현대로 오게 되면서 노동력을 위한 재생산, 그리고 노동력이 목적이 아니라면 쾌락을 위한 목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문제는 성행위 후 임신될 경우다. 남자는 한 번 사정하면 끝이지만, 여자는 상황이 다르게 된다. 아이를 가지게 되고, 지금과 같이 피임기술 내지 낙태기술이 발달한 것이 아니다. 아이를 낳게 되면 버리거나 혹은 자신이 키워야 한다. 문제는 그대로 빈민구제소나 고아원에 위탁하는 어머니도 많지만, 이에 다르게 아이와 다시 만나 자신만의 인생을 살기 바라는 여자들도 있었다.

 

모모의 어머니는 이미 죽었지만, 모모 주변에 있는 아이들은 어머니가 계속 창녀일을 하면서 돈을 보내오고, 그 돈으로 로자 아주머니는 보육한다. 모모가 사는 동네 경찰서장의 어머니도 그런 인물이었고, 경찰서장은 로자 아주머니로부터 자라났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법의 체계를 수호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법의 체계로부터 벗어난 사람에게 은혜를 받았고, 이제는 그 은혜를 생각하여 로자의 행위를 눈감아준다. 불법체류자에 위조증명서, 게다가 창녀들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자로 국법에 정해져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아이를 위해 살아가고, 그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인간에게 주어진 꿈과 미래란 과연 지금의 고통과 현실조차 감내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인가? 아무튼 그녀들이 보여주는 모성애에 마음이 참 안타깝게 느꼈다. 지금은 물론 다르겠지만, 당시 인간들에게 자신이 수익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이 매우 한정적이고, 그러나 딱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인간의 비참함에서 경제적 빈곤은 계속 이어져 간다. 굳이 마르크스의 <자본>을 들이대지 않아도, 그것은 알 수 있다. 자유주의 철학에서도 경제적 성공은 학력이 필요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알 수 없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모는 어머니가 죽은 것을 알았고, 아버지조차도 발작 증세를 가진 범죄자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나마 자신을 돈 때문에 맡았지만, 이제는 오직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던 로자 아주머니만 남았다. 로자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안락사라는 제도를 찬성한다.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으로서 그가 살아가는 마지막을 주는 선물이라 생각한다. 복잡한 병동에서 고통스러운 매일매일 하루를 맞이하는 것도 모자라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산송장처럼 살아있는 것은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로자는 불법체류자고 위조된 증명서를 가지기에 병원에 가는 순간 모모는 바로 빈민구제원에 들어가야 한다.

 

프랑스의 빈민구제원이 어떤 공포의 대상인지 모르지만, 모모는 거기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로자를 하루 빨리 생을 마감하는 게 로자를 위한 것이라 보았다. 살아있을 희망도 없이 고통스럽게 약물에 의존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만약 병동에 누워있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모든 것을 보장해준다면 어느 정도 고려할 수 있으나,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사회에서는 환자 본인이나 가족들에게 큰 고통과 상처다. 가족 하나가 불치병이나 심한 중상에 빠지면 그 가족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큰 부담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보면 모모의 행동이 그래 옳은 것만이 아님은 볼 수 있다. 길가에 물건을 훔치거나 로자 아주머니에게 마약을 놓게 하는 생각을 하거나 또는 뚜쟁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모모는 그렇게 되고 싶어 된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런 비행청소년인 모모가 오히려 다른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나온다. 죽어가는 로자 아주머니를 지하실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아니 시체가 부패할 때까지 옆에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도 로자 아주머니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언제나 자신의 고독을 두려워하고, 그 고독을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래도 고독한 존재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예전에 하밀 할아버지가 해준 말을 회상하는 게 인상적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인간은 정말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모는 자신의 태생과 자라온 환경, 그리고 주변사람들이 받고 있는 부조리 속에 사회적 가치가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데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성우로 일하는 라딘은 재생된 화면에 목소리를 더빙한다. 그리고 그 더빙된 화면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시간이란 비가역적 존재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모는 거꾸로 가는 세상, 즉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기를 자신은 바란다. 마지막에 아르퇴르를 좋아할 사람은 없기에 모모는 그것을 걱정해야 하나, 그 아르퇴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르퇴르는 모모가 우산으로 만든 인형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양은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모모 자신 그 모습이며, 자신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부자연스럽고 또한 슬픈 모습(이슬람문화에 따라 얼굴모양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그런 모습이라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남도 사랑해야 한다.

 

어느 애니메이션에 이런 말이 나온다.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한 인간은 남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부터 사랑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 자신이 이기심이 있다고 여긴다. 물론 자기애라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위한 동물적 본능의 자기애로서 이기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내 자신은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상당히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다소 냉소주의적인 인간형이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Yes라고 할 수는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이성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기 앞의 생>이란 결국 사랑하는 사람, 즉 사랑이란 남녀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처럼 인간이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적어도 이 작품에서 그런 주제를 던지면서도 계속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유태인이든 이슬람인이든 관계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모모가 나온다. 실제 이슬람문화와 유태인문화는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이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같이 웃거나 울거나 또는 짜증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도 이 책에서는 모모의 주변사람처럼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보여줌으로 시대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가난과 질병 그리고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들로부터 소설이 시작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이 작품 번역가는 좋은 대학교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것은 분명하나, 그분이 적은 후기에는 단지 비참한 삶을 사는 모모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인생의 이야기를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빌려 사용한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 대해 단순히 모모의 모습, 로자의 아우슈비츠수용소에 갇힌 창녀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생각하면 왜 이들이 그렇게 되었을까 라는 점이다. 처음부터 창녀는 창녀가 아니었고, 어느 청춘의 여성이 창녀로 되어만 했다. 단순히 자기 허황된 욕심이라면 몰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레미자라블>의 판틴 같은 사람에 대해 생각해볼 점이다. 그녀들이 계속 모모와 모모 친구들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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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3 - Seed Novel
맑은날오후 지음, 토브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3권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이전에 나온 1권과 2권을 읽어보았다. 재차 읽으면서 그동안 론이 자신의 신분을 숨긴 것과 동시에 마왕의 진실, 그리고 론의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장치의 신)의 시간조작이 보인다. 외전에서 린의 모험에서도 등장한 텐드 역시 론과 같이 노란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소녀를 만난 것이 나온다. 결국 복선의 연장은 단순히 론에 의해서만 보여준 게 아니라 텐드도 역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전개 속에서 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는 단지 자신의 할아버지 48대 용사와 황제의 숨은 공작에 있을 것이다.


공작에는 노엘 인피니피 황비, 론의 동생인 시즈도 역시 끼여 있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 숨은 계획이 세계를 파멸을 이끌어가는 것이고, 그 원인은 알 수 없겠지만, 이종족의 몰락과 매우 긴밀하다는 점이다. 왜 황제와 군대는 붉은여우귀 종족을 몰살하였을까? 그것은 론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라면 공동의 적인 이종족을 몰살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인가? 인피니티 제국은 모든 대륙에서 최고 강한 제국이고, 용사도 그렇지만, 황제 그리고 황제의 수호대는 사실상 마왕군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그렇다면 무슨 계획을 세웠기에 론에게 봉인이 붙어 있는가? 전에도 리뷰하면서 생각했지만, 황제와 용사는 바로 신이란 존재 그 자체를 없애고 새로운 신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나의 추론이기도 하나, 적어도 악령과 언데드들이 득실대는 던전에서 론은 이상한 석상을 발견한다. 신이 인간에게 검을 하사하는데, 그 검이 할아버지에게 받은 검과 매우 똑같은 모습이고, 할아버지는 신이 다룰 수 있는 검을 모두 다룰 수 있는 존재다. 할아버지의 능력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능가할 수 없는 신의 영역까지 올라간 존재다. 그런 상태에서 론의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된 유물에서 발견한 여인을 론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한다.

유전부터 론은 다른 인간과 다르다는 것은 그가 노엘 인피니티가 봉인한 힘 일부를 해제할 때 악마가 말한 장면이 중요하다. 악마는 론에게 소멸하기 전에 이런 말을 한다. “크크으...이 힘. 그 검은 머리와 눈.... 설마 네놈의 정체는... 웃기는 일이군, 나와 너 중 누가 더 악마란 거냐...” 결국 론의 비밀은 어머니 고대유물에서 발견된 불가사의한 존재란 점이고, 그녀는 유물에 발견된 것처럼 봉인되어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흔히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명칭이라면 판도라의 상자라고 보면 될까?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힘을 가졌다는 것은 론이 이미 태생부터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고, 게다가 론은 인간의 마음조차 버리도록 키워진 것이다.


산적, 현상수배범, 역적과 같이 처벌대상자라도 해도 인간인 그들을 론은 6살부터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목을 베었다. 즉 같은 인간이라도 용서가 필요 없고, 인간을 죽이는 것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수라의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론은 할아버지로부터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것은 결국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론은 할아버지가 제시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이라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론의 과거, 즉 예전 세계에서 그는 이종족들을 무참하게 죽이는 것부터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이라 여긴 것이다.


신이 거의 소멸하지만, 마지막 론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상황, 결국 론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해서 안 될 행위를 한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작가가 복선과 숨은 시나리오로서 남겨 두었지만, 적어도 론의 행위는 인륜 내지 천륜을 어길 수 있는 것은 3권에서 은근히 내비추었다. 그것은 론의 동생인 시즈의 행동이 다소 지나친 점이다. 시즈는 린과의 전투에 기억을 잃은 론에게 충격요법이라 하여 키스하려고 한다. 제 아무리 오빠와 여동생이 친해도 볼이나 이마 정도 키스도 솔직히 부담스러울 것인데, 론의 입술을 향하여 돌진 한 것이다. 시즈는 린과 티나 그리고 루리를 보면 자신의 오빠는 오직 자신의 것이고,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다는 집착을 보인다.


게다가 자신은 할아버지가 말한 계획의 대의를 위해 충분히 그릇이 될 각오는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도 추후의 일을 위해서 말이다. 할아버지가 말하는 어느 계획과 그리고 시즈가 보이는 과도한 브라더콤플렉스는 근친상간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여동생이 필요 이상으로 남자형제에게 스킨십과 그 형제의 주변 여자들에게 과도한 질투와 경고를 보내는 것을 본다면 결국 시즈의 근친상간의 욕망이 인피니티를 비롯한 세계를 멸망으로 도래하게 할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근친상간의 욕망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처럼 그는 어머니와 부부가 되어 자신의 형제요 남매인 딸과 아들을 각각 2명씩 얻었다.


그 죄목으로 테베는 신의 노여움으로 질병이 휩쓸고 사람들은 고통에 빠졌다. 인륜을 져버린 인간의 비극적 종말은 모든 것을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다. 론이 할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인륜을 져버린 행동을 했으니 그의 마지막은 후회와 원한만 남을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리셋이 되어 황제의 용사가 아니라 마왕의 간부가 되었다. 이전 세계에서 린과는 용사일행이지만 이제는 린이 용사가 되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시간적 문제일 것이다. 그런 시간적 문제에서 작가는 어떻게 하면 론의 정체가 드러나고, 루리가 마왕이란 사실을 용사일행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에 대해 디오니소스적인 방법을 택했다.


디오니소스라는 신은 제우스와 인간인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이다. 포도주의 신으로서 인간은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난폭해져서 인간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한다. 물론 론이 난폭해진 게 아니지만, 술로 인해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에 린에 의해 밝혀진다. 술을 마시면 강한 인간이라도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의 통제성을 잃게 되므로 론의 본 모습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왜 시즈가 린에 대해 경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이다. 용사 린은 가슴의 압박에 의해 단추가 날아가고, 단추총알에 맞았던 스팅은 기절을 하고 만다.


린의 가슴이 엄청 큰 것과 미녀, 그리고 좋은 가문이란 점에서 시즈에게 상당히 거슬리는 존재다. 용사라는 직책에서 사회적 지위와 더불어 강력한 힘까지 겸비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론이 술에 취해 방 안에서 정신이 없을 때, 린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때 론은 린에게 어머니라고 한다. 린이 자신이 어머니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론은 어머니 알겠어요. 라고 한다. 단순히 린이 몸매만이 아니라 뭔가 론에게 조금 그리운 느낌을 들게 해주는 뭔가가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를 닮은 점에서 론은 린에게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단지 루리의 등장으로 론의 제일 우선하게 되는 것은 루리였으므로 린은 루리의 뒷전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나마 시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충분히 마음 편하게 론을 대할 수 있겠지만, 시즈의 등장은 가시 돋친 날카로운 장미가시처럼 론 주변에 날카로운 가시가 둘러싸인 장미나무 숲처럼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린은 론이 이때까지 있었던 일을 알게 되면서 시즈를 같이 모험에 동행하게 된 셈이다. 시즈의 등장은 린과의 충돌으로 계속 이어지고, 처음에는 무력충돌이 나중에 여자들의 싸움으로 변했다. 어떻게 보면 시즈의 등장은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에서 모험적인 요소로서 몬스터와 싸움, 악령과 싸움, 추후에 있을지 모르는 황제와 왕국 혹은 신과의 대결이란 거대한 서사에서 론 일행 사이에 항상 끊이지 않을 티격태격한 요소를 부여한 셈이다.


작품 내에서 개그요소를 부여하더라도 결국 모험물이고, 용사와 마왕이 등장하기에 진부한 개그를 넣기에는 한계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론 주변에 시즈가 등장하는 것은 질투의 화신이 강림하기에 충분히 개그를 넘어 왠지 생동감 넘치는 개그를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독한 브라더콤플렉스 여동생과 지독한 프라이드를 가진 부잣집 딸의 만남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신경전이 펼쳐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주변에 있는 루리와 스팅, 티나의 모습은 또 다른 요소로 등장할 것이다.


이번 편에서 조금 인상적인 모습은 무력으로 제압된 세계라면 그 이상의 것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결국 그 진실의 결과는 귀여움이었다. 용사는 자신이 좋아하던 팀의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역시 그 언니처럼 귀여움에 대한 열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린을 무척이나 귀여워해주던 쉐어, 그리고 루리의 볼이 닳을 정도로 비벼대는 린, 심지어 린이 루리에게 천사 고리와 날개를 달아주자 루리는 이에 신나 엉성한 춤을 춘다. 그 모습을 본 용사인 린은 자신이 마왕의 최고의 적이면서도 어린 마왕에게 무릎을 꿇는다.


인간에게 먹고 살아가는 것, 즉 의식주를 해결하는 순간 문화생활을 추구하게 된다. 문화라는 것은 인생을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린이 선택한 귀여움에 대한 열의는 루리로서 그 성과를 맺은 셈이다. 게다가 장수족은 인간의 수명에 비해 거의 10배에 가깝다. 용사가 나이가 들어 수명이 다 되어 죽을 때도 루리는 아직 그 모습에서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8세 소녀가 대략 12세 소녀로 될 정도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황제는 매우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루리가 용사와 더불어 황제의 성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한 기회가 있었는데, 황제는 루리가 처음 보자말자 마왕군에 가담한 장수족의 아이라는 것을 알아본 점이다. 그런데도 황제는 마왕군 무리 중에 하나인 루리를 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나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마왕군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혹은 루리가 아주 어린 소녀이기에 그런 작은 아이에게 억지로 신경쓸 것도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황제는 론의 할아버지 48대 용사와 더불어 공모한 것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루리가 이종족이란 사실보다 루리가 론의 기억상실에 무슨 짓을 했는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권부터는 론의 기억상실과 더불어 원래 목적을 가진 황제와 48대 용사의 계획에 대한 수정조치 내지 손길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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