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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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4천원 인생>, 2010년 나온 도서이고, 불과 5년 전에 아주 어려운 환경에 취업한 신문사 기자들의 기록을 담은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나는 개인만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 이유는 결국 자기합리화 내지 자기자랑만 내세우고, 내가 되는 것에 대해 남도 될 수 있다고 하나, 그 조건이란 한 마디로 억지와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4천원인생>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찾아갔다.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것, 실사 옆에 있어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거나 않으려 했던 것을 찾아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의 현실에서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영웅적인 존재가 나와 강한 힘으로 계속 적을 싸워 나가는 파워 증가식 이야기를 싫어한다. 누군가 그렇게 강해져서 진화하여 이기는 방식은 약한 자들의 몰락은 그저 있어야 할 당연한 사실이다. 정의란 가치는 결국 주관적인 힘들이 모여 객관적인 지표를 나타낼 뿐이지, 그 정의라고 말하는 하나 그 자체가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입으로 정의를 타령하는 자들이어야 말로 제일 정의롭지 못하다. 정의의 가치는 오히려 명확한 것보다 불명확한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르다.

 

결국 정의의 사자는 어려운 도탄의 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나는 인물이겠지만, 정작 그런 인물이 우리에겐 존재하는가? 그 영웅은 자신만의 영웅이지 우리의 영웅이 아니다. 그가 우리의 영웅처럼 보이는 것은 TV나 신문, 각종 미디어로 장식되어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남의 영역을 과다포장 내지 은폐, 조작, 허위로 보여주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선 그것들이 흔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문제는 그런 흔한 이야기는 우리 일상에서 전혀 흔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옆을 보기보단 항상 위를 보려고 한다.

 

위를 보고 노력하는 것은 좋으나, 위를 보고 가기 위해서는 아래에 있는 길과 계단을 보고 가야 한다. 위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결국 계단 위를 하나씩 걸쳐 가는 것이고, 그 단계를 거치어 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 <4천원인생>은 우리 개인의 삶 자체를 위로 가기 위해 만든 책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장하기 위해 만든 책이다. 개인은 사회구조를 바꿀 수는 없으나, 사회구조는 개인을 멋대로 농락한다. 사회구조의 문제를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마지막엔 그 무관심한 대중들에게 그 책임이 전가된다.

 

전가된 책임의 문제는 결국 타인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서 온 책임과 고통의 분담은 처음 시작은 본인의 의식부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 마디로 누굴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더 생각하면 간단하다. 생각하면 되는 것 자체는 간단하다. “무슨 고민이 있어? 그러면 생각해보고 해결하면 되라는 충고는 매우 간단하게 타인에게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고민에 대한 문제와 원인,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는 결과는 쉽지 않다. 여기서 결과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결과라는 마지막 종착점이 아니라 발단의 시작점이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시작점을 찾아가지 않고, 도중에 있는 이력만 보려고 한다. 시작은 눈으로 들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중간에 등장하는 문제들은 현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천원 인생> 아니 그 이전의 <88만원 세대> 이야기처럼 우리는 현실의 이야기를 피해 계속 화려한 이야기와 환상만 꿈을 꾼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천원 인생><88만원 세대>들과 밀접하게 조우하고 있다. 길가다가 우리는 편의점에서 간단한 용품을 구입하고, 배가 고프면 회사나 학교 근처 식당에 들린다. 하다못해 빌딩 안의 화장실을 가면 무수히 많은 얼굴을 만난다. 아파트나 대형건물 입구에는 경비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조차 말이다.

 

그들은 우리와 옆에 있지만 결코 옆에 있는 인간들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은 인간으로 대하는 그 자체적인 목적인 아니라 하나의 도구 내지 물품처럼 물화되었다. 따라서 물화된 인간은 자신 스스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언제나 자신의 존재적 존엄성을 가지지 못한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에 묶여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사슬에 의해 매여 살 수밖에 없다. 태어날 때는 포유류에서 인간이란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뒤에는 어느 지역의 집안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 등에 의해 차이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롤즈의 <정의론>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불평등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불평등으로 인해 최소수혜자라는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으로 아무런 성공이나 혜택을 받지 않으면 결국 그것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완수할 수 없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조건은 기회의 균등이고, 그 기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교육이다. 정의라는 것은 최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피해 최소한의 손실로서 끝내는 것이라 보면 된다. 어느 이익이나 가치가 누군가에게 돌아가면 다른 누군가에게 그에 대한 역효과가 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는 그런 효과를 받아야 하는 자와 받지 않아도 되는 자의 정당한 균등관계가 무너진 지 옛날이다. 따라서 <4천원인생>이 발생하는 것이다. 대부분 가난한 자들에 의해 메우게 되는 경제적 굴레는 우리 사회의 큰 우환거리가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착취할 수 있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다. 문제는 인간의 시간은 늘 24시간씩 매일 채워주겠지만, 24시간이 무한대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생산의 조건은 바로 생산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점이고, 그 생산조차 재생산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다.

 

<4천원인생>은 후천적 불평등에 의해 시작되는 책이다. 대부분 가난한 자들은 시간당 4천원에 10시간에서 많게는 15시간에 이르는 고압적 노동에 시달린다. 공장 노동자들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는 기계부품처럼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안전장치도 미비하고, 휴식공간이나 여유시간도 부족하다. 화장실에 가는 몇 분과 담배를 피우는 그 몇 분도 아깝다. 물을 마시고 잠시 앉아있는 시간도 아까운 것은 바로 그 11초가 생산품을 만드는 노동과정이란 점이다. <4천원인생>에서 공장노동자들은 기가 빠질 때까지 일하고, 마치 시간이 1초가 지나가는지 또는 1시간이 지나가는지 모른 채 일에 죽어라 빠진다.

 

그러다보니 정신적 파괴로 이어지고, 자신들의 입에서 거친 말과 상스러운 말만 나온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 명제는 그가 생각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 안에서 가능하다. 식당아주머니 같은 경우 잠시라도 앉을 여유가 없고, 앉아있는 것은 반찬 만들거나 양파, 마늘 등을 손질하는 경우다. 감자탕 집에 뼈다귀가 넘치나, 자신들은 뼈다귀조차 만질 수 없다. 무엇이든 인색한 주인의 방침이 그렇다. 주인은 자신의 자본력이 아닌 은행 빚에 대출받거나 건물주에 세를 들어 하기에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누가 더 경제적으로 위협에 놓여있는지 생각하면 답을 내리기 어렵다.

 

단지 아전투구처럼 만인 대 만인이 아니라 덜 심각한 빈자 대 더 심각한 빈자들의 대립구도가 바르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식당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밑천 파먹을 수 없는 가게주인도 그러나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도 그렇다. 물론 자재와 식료품들은 물리적으로 줄어들어가겠지만, 인간 그 자체는 물리적으로 줄어들지 않고, 시간적으로 되돌아간다. 업무의 과중은 건강에 치명적이고, 결국에 가서는 오히려 병원비가 늘어나는 형태가 된다.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조건은 노동자가 가진 것은 몸이기에 그들의 고용권한을 잡고 있는 가게점주들은 마치 종업원들은 자기 노예처럼 부린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 법적인 요식행위이지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을 지탱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그 자체를 지탱하는 것이다. 정치철학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일반적인 민주주의보다 더 발달된 민주주의체계이다. 하지만 이름에서 보이는 철학적 개념과 현실적 상황은 언제나 같을 수가 없다. 민주주의 정치체계를 만든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을 정부의 희생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부를 기꺼이 인민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인민이란 개념은 국가의 설립 이전에 살던 사람이다. 프랑스대혁명 전에 대부분 국가들은 봉건적인 왕국이었다면, 그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국가가 붕괴되고 새로운 국가가 탄생해도 그 지역의 주민들은 여전히 살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민이란 개념이 탄생했다. 그래서 헌법에서 국민은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으로 등장한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4천원인생>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4천원인생>이 아주 극소수의 개인에 불과하면 문제가 아니지만, 식당아주머니로 일하며 시급 4천원정도 받는 분들은 전국에 200만 명이란 점에서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 이들이 일하는 이유는 본인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미래를 위해서다. 그들이 고된 노동을 하는 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자녀 역시 가난을 이어받아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고통 받는다면 우리 사회는 양극화로 인해 인구가 계속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력의 부족은 인구의 감소에서 비롯된다. 그것을 대체할 만한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단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대체할 대안이라면 그것은 대안이 아니라 변명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는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들을 유입한다. 하지만 집단적 배타주의가 강한 한국에서 외국인들은 불평등한 처사에 고통 받는다. 임금도 부족하고, 심지어 온갖 욕설에 성추행 그리고 폭력에 의해 몸과 마음이 병이 든다. 철학자 레비나스에 의하면 그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알려면 고아, 외국인, 장애인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들의 미소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미소를 항상 짓을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들이 숨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약자의 얼굴에 그늘이 찰수록 누군가는 이익을 볼 것이다. 뉴스와 신문을 보고 사회문제에 대해 말만 많은 사람들은 넘치고 넘쳐 나지만, 그것에 대한 근본적 원인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이들은 정말 부족하다. 결국은 정치적인 법률과 제도로 해결해야 하나 막상 당하는 자들도 자신의 처해진 현실을 괴롭다고 말하지, 그 근원을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는 없다. 역시 지식이 기본으로 갖추어야 바꿀 수 있는 것일까?

 

사회생활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 오늘 하루 내가 출근하여 가는데 버스타려면 버스기사가 있어야 하고, 버스기사가 버스를 운전하려면 정비사가 필요하며, 처음부터 버스를 몰려면 버스를 만드는 공장이 필요하다. 공장이 운영되려면 철, 플라스틱, 유리, 나무 등의 재료가 필요하고, 그 재료를 만드는 공장, 그 재료의 원자재를 캐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작은 일상 하나가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오고가는지 우리는 항상 인식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언제나 하나의 일상이 되어 그것을 망각하여 누군가의 고통과 착취는 잊어지기 마련이다.

 

요새처럼 물가는 올라가고, 임금이 정체되어 취업률은 저조하고, 실업은 해결이 어려운 지경에 계속 저임금 고노동의 3D 산업에 계속 사람들은 몰려가야만 했다. 거기조차 어느 정도 안정된 환경과 근무조건이 붙는다면 문제가 없으려만, 그것이 되지 않아 문제다. 마트에서 일하던 사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 일상 속에 있는 그들을 어째 대하고 있는가? 솔직히 나 역시 가진 여유가 부족하고, 마트에서 사는 것만 사기에 마트 상품 진열대에 있는 판매원의 이야기를 계속 들을 이유가 없다. 그런다고 하여 무시하거나 천대하거나 불필요하게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이른바 진상손님, 마트뿐만 아니라 최근 아파트 수위의 자살사건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얼마나 파탄이 났는지 다시금 알게 된다. 그런다고 하여 내가 아주 성인군자나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내 자신도 과오를 저지르고,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실수로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멋모르고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켜지자 다른 사람들의 불만이 서린 눈빛을 보고 부끄럽게 여긴 적이 많다. 적어도 그런 실수를 최소화하고, 줄이는 것만이 혹은 그럴 의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그 생각자체에서 자기권리만 주장하는 이들은 남에 대한 이목을 고려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런 부류가 더 체면에 신경 쓴다. 자신의 얼굴을 뻣뻣하게 세우는 것을 남을 깔보는 것에서 찾는 아주 불쌍하고 어리석은 종족일 뿐이다.

 

언젠가는 그런 부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 살아갈 뿐이다. 인간의 가치는 결국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돈으로 보여주기도 하겠지만, 돈 그 자체로 해결이 불가능한 것들이 존재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없는 게 아직까지 존재하기는 하나, 단지 너무 작고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4천원인생>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몸과 마음을 소모시켜 가고 있고, 우리는 그 소모와 착취로서 살아간다. 언제나 식당이나 청소부 아주머니를 보면 수고합니다. 라는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짜증을 부리지 말자. 그들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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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복 입고 홍대 간다 - 한복을 청바지처럼, 28살 전주 아가씨의 패션 창업기
황이슬 지음 / 라온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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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문화와 사회학에 대한 관심이 많기에 이래저래 많은 분야를 접하게 되고, 다양한 관점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특히 사회와 관련하여 영화와 문학,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천대하는 sub-culture 영역까지 두루 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베이스라인이 sub-culture이고, mass-culture에 대한 관심은 이미 사라진지 옛날이고, 단지 서브컬처 내에서 mass-culture로 진입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점은 mass-culturemass-culture로서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니라 계속 내부적으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Cliche의 연속이란 점이다. 따라서 상당히 진부하고 뻔히 보이는 이야기이므로 처음에는 많은 대중들은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만, 자신들의 내면에는 자기들이 바라는 전형적인 패턴주의를 완성시키는 형태로 전락한다.

 

따라서 유행에서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에 대한 간극의 차이가 새로운 형태가 나오고, 그 형태에 따라 이야기가 파생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파생의 원천은 sub-culture 영역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대중오락물 내지 예술로서 바라본다면 기존의 mass-culture로 통해 전혀 새로 보일 수가 없다. 따라서 그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콘텐츠는 뿌리 깊은 잠재의식 속에서 돌출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가 언제나 같은 이야기로 무색해지는 이유는 바로 mass-culture의 한계성이고, mass-culture의 간극을 채우기 sub-culture를 도입하는 것이다.

 

최근 드라마 중에 <식객>이나 <내일도 칸타빌레>는 한국의 웹툰과 일본의 만화책에서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내일도 칸타빌레>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내지 영화,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OSMU라는 one source multi use는 바로 저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클래식이란 장르는 극히 대중적이지 못한 점과 그것을 만화로 제작한 것은 매우 maniac적인 요소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작품 내 전개는 상당히 이해하기가 쉽고 재미를 유도하며, 클래식이 그렇게 낯설지 않을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일본의 만화, 게임, 라이트노벨, 애니메이션의 sub-culture 잠재력의 무서운 점은 mass-culture에서 나오지 않은 잠재적인 요소를 드러냄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하나의 상품이란 콘텐츠를 유발한다.

 

따라서 21세기 산업구조는 더 이상 20세기의 공장에서 바쁘게 돌리는 산업구조가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가 요구되는 탈() 산업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post-modern이란 점에서 기계적인 요소보단 차라리 기계적 요소보단 이미지의 대두와 이야기의 감성이 우리의 시장을 형성된다. 막노동을 하는 아저씨나 하다못해 식당에서 죽어라 고생하시는 아주머니들도 드라마를 본다. 우리는 휴식시간에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결국 여가 내지 취미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취미라는 것은 문화산업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본주의 시장구조와 매우 밀접할 수 있다.

 

단지 자본이란 점은 경제적 조건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문화적 조건, 사회적 조건, 정치적 조건, 지역적 조건 등이라는 다양한 인자들이 따라 붙게 되는 마련이다. 문화자본에 대한 관심에서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돋보이거나 혹은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문화자본에 투여할 수밖에 없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가 자신의 지갑만 두둑하게 하는 것 외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 그는 단지 그 사람일 뿐이다.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기 위해 다양한 상품과 기호들로 가득하다. 프랑스 사회철학자 보드리야라는 인간의 상품에 대한 가치에서 현대 사회는 기호로서 이루어져 있고, 기호 그 자체가 상품인 셈이다.

 

기호는 단순히 메이커 이름, 기업이름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름조차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가 탈() 산업화에 따른 새로운 산업구조에서 결국 새로운 가치를 나올 수 있는 것은 이미지 메이킹이란 점이다. 상품의 가치는 대부분 비슷한 기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이 냉난방공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우리나라 에어컨 기계가 어느 회사가 더 좋고 나쁨을 확실히 말 하기가 어렵다. 정보력과 기술력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우리는 결국 어느 회사로, 어느 상품으로 또는 누구를 통해 신용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복입고 홍대 간다>를 저술한 황이슬 씨의 책은 21세기 탈() 산업화된 사회구조에서 대표적인 성공한 CEO. 한국이란 사회에서 본인의 가정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한 경제상황, 가정에서 여러 자매와 같은 방을 사용한 점,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정해진 패턴에 따라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믿었던 소녀라는 점에서 많은 불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하여 그녀는 누구에게 자랑스럽게 성공했고, 자신의 노력과 정성으로 이 자리에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누군가의 성공이야기와 자기계발서는 정말 싫어하지만, 나름 재미는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주 재미있는 베이스라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뒤에 있는 배경이나 조건이 은밀히 따라 붙었다. 혹은 시대적인 조건이 있었다. 갑자기 재료의 공급이 급증하거나 또는 상품의 가치가 급작스레 올라가거나 독점에 의해 시장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되거나 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황이슬 씨는 한국의 전통의상인 한복이란 점을 이용했고, 이것을 자신의 생활에서 접목하여 일으킨 점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노력과 능력을 치하해도 정작 그녀의 베이스라인에 대해 생각했을까 의문해본다.

 

조금 짧게 지나가는 말이나 그녀는 지금으로 말하면 조금 게임 오타쿠인 점과 대학동아리에서 코스튬 플레이를 할 정도로 sub-culture에 어느 정도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mass-culture는 이미 한계에 차여 있어서 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고 다른 모습으로 나와도 구조는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게임을 했다는 점, 그 게임으로 통한 아아템 수집과 게임적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현실에서 유감없이 발휘한 점이다. 이야기를 붙이고 떼는 실력은 결국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어린 시절에 나온 유감 없는 손놀림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런 그녀의 잠재력과 노력은 칭찬하나, 한편으로 조금 아쉬운 점은 모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마란 점이다. 세상에 힘든 일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우연히 계기를 통해 발견하여 큰 성공을 가진 자는 극소수다. 그녀가 언급한 것처럼 어느 대단한 강사나 상업인이 성공하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쳐 왔다. 하지만 그 실패는 기회의 공정한 부여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책을 보면서 황이슬 씨의 노력은 개인적 공부만 아니라 독서까지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독서에서 니체로부터 칸트, 루소, 키케로 같은 기라성 같은 이름이 나온다.

 

하지만 루소의 이야기에서 실수한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었다면 자신의 성공담에 대한 비교에서 타인의 기회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기질이 있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녀의 실천력과 노력은 인정하나, 그렇게 하려도 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프로로서 아름다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자신이 팔아주는 옷을 사지 못하는 식당아주머니들은 그녀의 상품은 필요 없을 수 있겠지만, 식당아주머니나 혹은 청소부 같은 잡무를 하는 분들이 없다면 저자분이나 혹은 나, 많은 분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일이 소중한 만큼 남의 입장도 조금 고려해보면 좋겠다는 점이다. 저자 분이 대학시절에 한복을 입을 때 처음 남에게 상당히 낯설어 보였을 것이고, 자기 자신 나름대로 좌절이나 사회적 배타성을 경험을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어째든 그녀의 성공적인 한복 라이프에서 내가 처음 본 것은 역시 코스튬 플레이 문화였다. 가끔 인터넷 sub-culture계통에서 코스튬 플레이는 다른 콘텐츠를 지닌 sub-culture와 다르게 사람이 직접 활동하는 점과 의상수주와 대여로서 생계를 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복을 만드는 것보다 그녀가 <>이란 만화와 드라마 주인공을 코스튬 플레이 했다는 점에서 이미 놀이가 하나의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보여준 셈이다. 황이슬의 업적에서 가장 높은 것은 놀이 그 자체를 자신의 노동력을 부여하여 상품적 가치를 창출한 점이다.

 

앞으로 21세기 이미 산업화로 살아갈 수 없고, 계속 블루오션으로 통해 산업구조를 찾아가야 한다. 물론 블루오션 자체도 기존 사회적 생산구조를 토대로 하므로 블루오션이 무형의 존재로서 나오는 게 아니라 무형의 관념이 유형의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다. 창의력을 원래부터 가진 사람이 계속되는 중고등학교의 주입식 교육은 오히려 자질 있는 사람을 억지로 망가뜨리는 결과만 나오게 된다. 자신의 열정을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과 상담하는 사람에게 친절히 정성스레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한국의 교육현실을 다르게 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스펙을 쌓아도 결국 1등부터 꼴찌까지 정해져있고, 대기업과 공무원도 결국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단 %만 들어간다. 나머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하면 간단하다. 중소기업에 가거나 또는 새로운 산업체계를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적 구조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결코 간단하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 역시 아니어도 그 모든 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계발서 내지 성공담에서 가장 중요한 실수사항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순간 이미 그 사회는 붕괴 되는 것이다.

 

길거리에 보이는 피자집, 통닭집, 맥주가게들은 단 몇 m 간격으로 계속 줄지어 가고 있다. 소비 그 자체를 위한 가게, 누군가 생산한 후 임금을 받아 그 가게의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상업구조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듯이 주식이나 재테크 같은 허무맹랑한 성공신화는 결국 거기서 끝이고, 그 이면에는 수많은 실패와 고통이 은폐된 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분명 직접적 내지 간접적인 실패를 우리는 너무 무신경하게 피해가는 것이고, 단지 잘 된 것만 보려고 한다. 결과론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결과만 바라보지, 그 과정에서 담긴 문제나 구조를 보지 않는 것이 큰 골치다.

 

다행히 이 책에서는 과정의 고통이 잘 드러나 있었다. 평전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에 대한 열정을 토대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복은 아름다운 옷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외래문화에 치여 한국문화는 이미 소외되어 가고 있다. 교회라는 기독교종교를 가진 황이슬 씨가 한복문화에 대한 열정과 관심에 어찌 보면 나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전통이란 것은 항상 가만히 웅덩이 속에 고인 물처럼 있으면 안 된다. 고인 물은 썩어 들어가고, 결국 그 처리비용과 인력에 더 큰 적자를 남기게 된다. 새로운 흐름과 과거의 산물을 적절하게 발전해 가는 것이야 말로 문화산업에서 새로운 아이템이다.

 

한국의 전통문화인 한복의상 sub-culture은 아니지만, 한국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하위적인 문화로 되었다. 조선시대에 한복은 당연한 것이나 지금의 시대는 한복은 당연한 게 아니다. 상품의 기호성은 결국 그 자체로 당연한 게 아니라 당연하지 않았던 게 당연한 것으로 되는 것에서 가치를 눈에 뜬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에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나, 자동차 중에서 벤츠 자동차가 매우 고급이다. 벤츠라는 상품이 본래 가진 내구력과 안정성 등과 같은 기계적인 조건이 갖춘 것은 분명하지만, 벤츠라는 상표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되는 것이다.

 

TV에서 이런 말이 많이 나온다. 나는 운동화를 신는 것이 아니라 Nike를 신는다고 말이다. 그런다고 나는 이런 것들이 당연시 되는 사회라도 꼭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상품과 아이디어가 새로운 상품을 유출하여 이익이 되겠지만, 그것 역시 누군가의 노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IBM의 횡포에 맞선 apple사의 기계도 결국 많은 노동자들의 착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겉만 보지 말고, 그것을 이루는 구조로서 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결국 성공이란 왜 그런지 보고 판단하고 자신에게 맞는 틀을 찾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 열쇠는 열정이 필요하나 모든 게 열정만으로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점이다.

 

황이슬 씨의 책에서 그녀의 성공은 많은 베이스라인이 동원된 것이고, 그것을 위한 경제적 조건은 열악해도 시간적 조건은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이며, 자신의 시간이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지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시작하는 점에서 그 노동을 하는 시점이 중요한 것 같다. 황이슬 씨에게 상담해오는 학생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고 여겼다. 능력개발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역시 생계부담이 없는 시절이 제일 좋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놀이, 예슬 그리고 상상력이 원활히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다. 상상력이란 미래의 윤리라는 말이 있듯이, 상상력으로 통해 새로운 세상은 구현하고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앞을 만들기 위해 체계를 개선해야 하나 계속 앙시앵레짐 같은 구체제에 물들어가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놀이가 하나의 예술과 상품이 되는 순간, 기계로부터 계속 잠식당하는 우리의 일자리를 다른 쪽으로 대체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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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자본』을 읽다 동아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총서 1
강신준 지음 / 길(도서출판)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내가 아직 어리다고 여긴 시절, 그러니깐 대학교 다닐 때까지 세상에 대한 의문을 전혀 모르고 살적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가난하게 된다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결국 그것은 사회 전체적인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만화로 된 사회교양도서에 많이 버는 사람과 적게 버는 사람 모두 세금을 100만원 씩 납부하는데, 많이 버는 쪽은 “적당하군.”라고 하고, 적게 버는 쪽은 “왜 이리 많이 나왔지?”라고 한다. 결국 돈을 얼마나 버는가에서 같은 돈을 납부하는 것은 서로 간의 입장 차이와 상황적 요건이 뒤 따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들면서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를 읽은 후, 19세기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 뒤흔들고, 21세기 지금도 다시 유령처럼 등장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말하는 것은 상당한 금기 내지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철학과 사회학, 인류학에서 마르크스를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거푸집을 설치하지 않은 채 레미콘을 부어버리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기본이 되는 사상에 마르크스의 위치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과 단어, 법적인 요소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하루 노동시간이 18시간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18시간의 노동시간과 그 시간이 지나친 시간이 아니라 18시간까지 제한해달라는 조건까지 따라 붙으면 충격일 것이다. 우리는 주5일에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이 기준이다. 물론 업체와 직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평일출근에 9시 출근과 6시 퇴근이 정상적인 직장인 라이프스타일이다. 그런 생활양식에 맞추어 18시간 노동은 거의 죽음을 이어지는 착취다. 1주일 시간은 164시간이다. 그 시간 중에 80시간 이상 일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보는 것일까?

 

마르크스보고 악마 내지 나쁜 놈이라고 하는 인간조차 하루에 12시간 이상 계속 일을 한다면 마지막에 악마가 과연 누구로 보이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우리 세계에 미친 영향은 아주 막대하다. 세계를 뒤흔든 도서로 성경과 마르크스의 <자본>이라고 한다. 하나 더 하자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도 있다. <사회계약론>은 18세기 왕정시대를 무너뜨리게 한 근본이 된 책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시스템과 정치적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경제적 구조는 큰 변화와 혁명을 불어오게 한다. 기존 헤게모니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시대적 흐름에 맞추지 못할 경우 결국 도태된다. 단두대 아래 목이 잘려진 루이16세 같이 말이다.

 

사회가 바뀌고, 정치제도 바뀌어도 문제는 바뀌지 않은 것들이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코제트다. 판틴의 외동딸로서 어머니 판틴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고, 공장노동의 수익으로 딸을 부양하기 어려워 자신의 몸까지 판다. 그래서 <레미제라블>, 불쌍하고 가여운 인간이다. 그 가엽고 삶조차 괴로운 연속인 자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 미래는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 자신의 분신과 같은 후예들의 미래다. 자신들의 자녀들이 비참하지 않기 위해서 그 비참함을 자신으로 마무리하려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래 쉬운 것만은 아니다. 결국 비참한 생활은 다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도처에 사슬에 묶인 채 살아가야 한다. 그 사슬이란 후천적 불평등, 자연적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이 겪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이런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큰 고민이 되고, 인간 개인에게 파멸을 불러온다. 고전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국부론>을 저술하나, 그 근본은 어느 국가에 존재하는 국민들이 굶주림과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경제생활은 결국 국가의 이익이 되겠지만, 그 원천은 국민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는 것은 국민이고, 그 노동의 가치로서 임금을 받아 우리는 생활수단으로 삶을 영위한다. 만약 그 시스템 구조가 붕괴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미 그 문명의 붕괴로 이어질 것 같은 암울한 내일이 다가오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사회경제적 불안감은 국민 생활에 큰 지장을 안겨준다. 과거에 우리의 슬로건은 흔히 말하여 과소비를 추방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과소소비를 추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전처럼 뭐든지 아끼고 절약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경제적 토대는 결국 과학기술과 장비의 발전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화장지가 과거 기계 1대당 100롤을 생산할 수 있다면 지금은 1,000롤을 생산할 수 있으며, 그 기계를 운영하는 사람이 과거에 5명이라면 이제는 2명으로 족하다. 그만큼 장비가 발달하면 할수록 인원은 축소되고, 생산물량은 증대된다. 그렇다면 이래 생산 된 상품이 누적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자본의 융통에서 자본을 투자하면 거기에 대한 자본이 회수되어야 한다. 문제는 생산과 소비가 일치되어야 하는데, 생산은 계속 지속되나 소비가 지출되지 않으면 상품은 재고물량으로 남게 되어 결국 업체는 자본의 압박으로 도산하게 된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노출된 업체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같은 작은 업체이며, 이런 업체들은 대기업처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재력이나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다. 사실상 한국에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인원이 많을까? 대기업이라도 그 회사의 정규직으로 하청이나 비정규직을 제외한다는 조건을 내세운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계적인 문제로 고민을 안고 있을까? 국내 경제적 민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거의 근대화 내지 산업화가 가진 경제적 체계인 시대는 주요 경제적인 전략이 해외수출이었다.

 

해외수출로 외화를 모우고, 외화유치로 통한 자재구입, 산업시설 유치가 주된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시장규모가 해외가 아니라 국내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미 무역을 하는 세계시장에서 어느 나라에서 어느 상품이 나오고, 그것이 어디로 수출되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게다가 전에는 국내에서 생산했다면, 이제는 해외에서 공장을 설립하여 직접 당사자에게 판매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재화와 상품은 해외만 사업대상지로 볼 것인가? 아니다. 결국 해외에 간 기업도 국내에 모태가 되는 계열사로서 활동하는 것이고, 국내기업이 상주하지 않으면 한국기업이란 의미가 없다. 국내에 시장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야지 재고를 조정할 수 있으며, 상품적인 요소를 더 새롭게 변모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국내시장이 계속 위축되어 결국 과소소비로 이어지고, 과소소비가 시장에 큰 타격을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 이런 문제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큰 적은 스탈린에 의해 조작된 공산주의 내지 봉건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로 귀결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이 만들어져서 판매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상품이 팔리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다고 모든 것이 팔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생필품들은 어떻게든 삶에서 제외할 수 없는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지만 많은 기업들은 생필품들만 파는 것은 아니다.

 

그 외의 상품이 나와 팔리지 않는다면 산업이 발전할 수 없으며, 산업이 결국 문화적인 요건도 담당하므로 문화적 콘텐츠 역시 축소된다. 물질적인 토대로 생활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곧 국민생활이 어렵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국가경쟁력까지 저하된다. 국가경쟁력 저하로 소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국가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간접세가 줄어들고, 그 보충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악수를 두고, 그것은 국가부채의 증가와 더불어 그 빚을 갚는 것은 국민이 되는 것이다. 악순환의 연속적 고리는 끊이지 않게 되고, 결국 국민생활 수준 하락, 인구감소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오늘날 한국은 이런 문제에 직면했고, 아이들의 수가 줄어들고, 거기에 따른 산업들이 위축된다.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결국 시장규모가 축소하고,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상품을 더 이상 판매할 수 조건이 되지 못하는 셈이다. 이런 문제를 누가 만들었는가?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 붕괴에서 마르크스의 실험은 실패했다고 하나, 처음부터 마르크스의 실험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사상적 체계와 학문적 연결성을 우린 너무 늦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문제를 기존 경제학의 입장에서 도저히 문제가 되는 실마리조차 풀 수 없다. “그래도 자본주의는 옳다”라고 말하는 현실도피이상자의 헛소리만 나올 뿐이다.

 

문제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은 그 문제로 인해 누군가 이익을 보았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또한 그런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만든 도서다. 19세기 유럽에 불어 닥친 대공황은 유럽은 큰 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희생되었다. 그 문제를 만든 것은 희생된 자들과 전혀 무관했다.

 

그 문제를 바로 찾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나, 그 문제의 근본을 알면 추후에 다른 방도가 떠오른다는 점이고, 그 원인을 찾아 더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상황이 발생되면 심하면 심했지, 그 이상 호전될 기미는 없다.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읽는 것은 마르크스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성한 <자본>이 어떤 도서인지 그것을 어떻게 읽으면 좋은지에 대해 아주 친절한 방법을 안내하는 책자이다. 처음 자본 Ⅰ~Ⅲ까지 읽는 것은 3,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어려운 책을 무작정 도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본>을 읽으면 단순히 경제학만 거론되는 게 아니다. 문학과 철학, 각종 인문학적 지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자본>을 읽는 것은 경제학을 단순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인류의 오랜 정수가 담긴 인문학을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무단히 접근하는 순간 큰 산과 깊은 바다를 만나 쩔쩔 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추천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연유다. 과거 강신준 교수의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보다 더 자세하고 이해하기 좋게 만든 도서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의 자칭 진보라고 말하는 분들이 한 번 다시 고민할 것들이 있다.

 

과거 경희대학교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읽다보면 자칭 좌파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문제점을 거론한다. 그것은 술집과 카페에서 잡담을 나누기만 하는 좌파에 대해서다. 기본적으로 좌파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루소가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저술할 때도 그렇고, 마르크스가 <자본>을 집필할 때도 그렇다. 근본적 원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 결국 결과에 대한 가십거리만 늘어놓는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지식인에 대한 조롱으로서 표현하자는 좌우도 아닌 좌우라는 존재들의 한계는 결국 자신들의 행위에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말할 수 있다면, 그 뒤에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고,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계속 종알거리기만 할 것이다. 강신준 교수가 가장 중요한 말은 변증법이다. 변증법에서 현실적 토대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 현실적 토대로서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것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실패한 이유는 바로 그 토대에 의한 것이다. 삼부회 조직 이후 왕정을 무너뜨려도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고, 시민혁명이라고 해도 그들은 시민이 아니라 그저 군중에 불과했다.

 

이런 현상을 보듯이 무작정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해도 그것을 통째로 뒤집는다고 해도 결국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인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그 이후 1799년 브뤼메르18일 같은 일들은 생길 수밖에 없다. 현실적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변증법적으로 거쳐 서서히 고쳐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혁명은 모든 것을 뒤집어도 결국 다시 돌아오는 이유가 바로 그 토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부의 혁명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판단의 혁명이 사실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다고 국가와 사회를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부정적인 요소를 토대로 조금씩 개선해 가는 것이다. 변증법적인 시대에서 희생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희생이 싫다면 더 큰 희생이 다가오고, 그보다 더 큰 희생을 우리의 미래들이 짊어가는 일들이 생긴다.

 

역사란 늘 과거의 흔적을 기록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제 아무리 개별적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항상 뭔가 일정한 규칙과 형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새로운 인물이 나올 뿐이지, 인간이란 근본적인 본질이 크게 비켜나가지 않는 점을 각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서부터 인지하여 <자본>을 읽는다면 당장은 아니나 조금씩 변해갈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다. 무조건 단결과 투쟁을 외쳐도 결론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고, 문제의 골만 깊어가고,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와 고통 그리고 희생이 뒤따른다. 그것은 비록 남의 일이고, TV에서 보이는 하나의 Show라고 여겨도 언젠가 당신이나 혹은 당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마치 점쟁이가 “당신은 아주 위험한 일이 닥칠 겁니다.”라는 엉뚱한 미래주의 같은 게 아니라 현실 사회구조로서 통해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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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투 2016-02-24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본을 읽지 않고 생태를 말하고, 자본을 빠뜨리고 진보를 말하는 것은 우물도 없는 사막 상태에서, 가마솥도 만들지 않는 살림살이에서 숭늉을 복제하려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에 산다면 마땅히 자본론을 읽어야 한다!
 

1.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을 두고 말하기란 참 어렵다. 인생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의 가치는 결국 시간적 축척에 의해 현재 조성된 본인의 지금으로 통해 결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생을 그 누구의 판단으로 결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타인에 의해 보이게 해야 하는지는 정말 어렵다. 가령 우리는 우리의 판단 아래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기보단 타인의 관점에 의해 결정된다. 남들보다 좋은 차, 남들보다 좋은 집, 남들보다 좋은 여건 등에서 말이다. 물론 물질적인 만족에서 인생의 출세라는 목표는 보통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도 남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갈 미래 그 모두가 인생이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이트노벨 원작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인생>은 참으로 독특한 소재를 차용하여 만든 작품이다. 인생이란 말은 쉽게 사용하면서 막상 논하자면 매우 어려운 내용이다.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시작하면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일까? 인생은 사랑이라든지 혹은 고통이라든지 고독이라든지 다양한 말이 나온다. 철학에서 결국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 역시 인간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것 역시 인간의 삶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서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들은 지혜를 사랑했다. 단순히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은 남녀의 사이도, 부모의 사이에도 존재하듯이 사랑이란 이름은 어떻게든 여기저기서 사용되는 말이다. 하지만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앎을 알아가는 것에 대해 사랑이다.

 

알고 싶은 것은 그저 보고 외우는 암기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을 넘어 인간 그 자체를 과연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인간은 시간을 흘러 그 시간의 축척에 의해 현재의 모습이 결정화된다. 그런 만큼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이며, 비가역적인 시간으로 인해 살아있음이 있다면 분명히 죽음이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결국 죽어가는 것이고, 인간이 죽었다는 사실이 있었기에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삶,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인생에 대해 논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아마 철학책 수백 권이 들이대어도 난해한 문제다.

 

2. 애니메이션 <인생>

결국 인간에 대해 생각하면 마지막에 본인으로 돌아가고, 그 자신에 대한 실존적인 존재를 의문하고, 거기에 대한 답은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루소의 자연주의적인 요소일지? 아니면 타인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지는 각자마다 다르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윤리학이란 결국 인간의 삶을 다루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말해주는 학문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삶이란 바로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지금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행복을 위해서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만족을 위해서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고, 그 인간의 시간들이 곧 인생이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 <인생>은 바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들이 오고, 그 고민을 위해 해답을 내는 것이 제2신문부원들의 업무다. 인생 상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자? 만약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혹은 가지고 싶은 것이나 모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도저히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으로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분명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나이가 10대든, 20대든, 혹은 그 이상이 되어도 작은 문제가 발생하여 해결하지 못한 채 계속 주변을 방황하고 있다면 일상생활이 원만히 지나갈 수 없다.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다. 동물들은 무의식적인 본능과 순간적인 감정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자신의 이성에 의한 판단력으로 살아가지 않는 존재이다. 인간이 가진 판단력이 있기에 인간은 동물이면서 사회화된 존재다. 인간은 사회화된 존재이기에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은 단순히 자신의 단순한 무의식과 감정으로 채울 수가 없다. 인간이 가진 미적 감각 즉 쾌 내지 불쾌라는 판단력이 존재하고, 바로 그 때문에 취향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 아주 동물 중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참새처럼 배고프면 모이를 먹고, 잠이 오면 잠자고, 때로는 번식활동을 하는 것에 모든 삶을 바친다면 인간으로서 인생이 존재하지 않는다.

 

3. 등장인물들

인간에게 인생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여가생활, 즉 자신이 어디에 얽매여 기계처럼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다. 때로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서 타인의 목적과 부딪히기도 하여 갈등과 고통이 수반되기도 한다. 인생이란 어떻게 보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도 보여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완벽하게 배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 노력하고 새로운 운명을 찾으려 한다. <인생>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민 상담상자 속에 이런저런 사연을 보내준다.

 

다들 처음에 별로 없을 것이라 여겼지만, 점차 질문 횟수가 늘어나고, 제2신문부원에서 이과계열 리노, 문과계열 후미, 체육게열 이쿠미가 상담을 맡아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결과들을 제2신문부장의 사촌동생 아카마츠가 정리하여 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아카마츠는 모든 경계선상에 해당되지도 그리고 접점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이과, 문과, 체육계는 서로 극성인 분야고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추후에 들어오는 예술계 에미까지 말이다, 왜 인생에 대해 이렇게 서로 다른 4명의 소녀가 모여 이야기 하는 것일까? 우선 이과에서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존재하고, 지식과 과학기술에 의해 삶을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이과의 리노가 선택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기록을 문자로 남기고, 특히 역사서적으로 남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상상력으로 문학을 펼쳐 인간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후미가 선택되었다. 인간은 이성과 감정 앞에 무의식이란 것에 의해 더 작용을 많이 받는다. 조건적으로 반사하는 점에서 체육계 이쿠미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예술이라 했던가? 사실 인간의 삶은 그대로 바라보면 절대로 우리는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을 광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어느 한 대상으로 통해 여러 가지의 시선을 남겨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에미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하는 조건이 성립된다.

 

4. 제2신문부의 설립

이들이 펼치는 고민 해결 상담은 문제를 받아본 상담자로서 혹은 그 문제를 안고 있는 고민하는 자로서 차근차근 숙제를 해결한다. 즉 우리 인간 그 누구도 고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없으며, 그 고민을 상담 받는 사람도 역시 고민이 있어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이란 애니메이션에서 4명의 미소녀가 내놓는 답은 생각 외로 생뚱맞고 극단적이나, 그런 극단적인 요소가 서로서로 맞물리면 새로운 결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결과의 마지막 숙제를 정리하는 것은 아카마츠다. 아카마츠의 역할을 보편적인 존재, 보편적인 사람, 보편적인 인생이다. 다른 부원과 달리 아카마츠의 장점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제11화에서 아카마츠의 사촌누나이며, 제2신문부장인 아야카의 말을 빌려보자. 11화에서 아야카는 학생회장의 부정을 밝히기 위해 제2신문부를 만들고, 자신만의 영역을 확대하려 했다. 그리고 새로운 학생회장으로 바로 아카마츠를 내놓으려 했다. 그런 점에서 아야카의 대사를 잘 들어야 하는 점이다. “각성해! 네 안에 잠든 사자의 혼을 깨워! 유우키는 질 가능성이 높은 싸움에서도 해야만 할 때는 결코 물러서지 않아. 그런 남자지(아카마츠는 여기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야. 그것은 시라카와 학생회장에게 깨질 각오를 일하라는 이야기지?’라고 대답)? 어째든 평소의 유우키는 눈에 띄지 않고, 물개성에 공부나 운동도 못하고, 특기도 없고, 재밌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여자애를 좀 엉큼한 눈으로 보지만, 여차할 때에는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일 걸 알아.”

 

5. 아카마츠의 가치

이렇게 말한다. 아야카의 말에 아카마츠는 “플러스 치고는 너무 마이너스 평가다.”라고 대답한다. 아야카를 다정한 미소로 사촌동생인 아카마츠에게 “자신감을 가져. 유우키가 그런 성격이라 모두 안심하고 활동하는 거야. 엉뚱한 짓을 해도 유우키가 마지막까지 어떻게 해주니까. 리노도 후미도 이쿠미도 에미도 모두 그렇게 생각할거야. 사실은 의지하고 있을 거야. 나도 그래, 나 때문에 학생회장이랑 대립하게 되었는데, 불만 하나 없이 오히려 나를 지지해주잖아.”라고 말이다. 결국 학생회장과 싸우게 된 아야카는 다른 4인의 미소녀처럼 속성을 가지지 않은 미소녀지만, 1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저널리즘이란 기자의 정신이다. 신문부원인 그녀가 학생회장의 비리를 폭로로 인해 강제로 퇴출당하고, 제2신문부를 만들었으며, 다시 그 문제를 밝히기 위해 아카마츠와 4인 소녀를 부원으로 맞이한다. 저널리즘이란 결국 사실에 대한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공정성이 중요한 것이다. 기자의 업무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폭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발에서 기자정신이 나온다. 5명의 미소녀들이 아카마츠를 의지하는 이유는 아카마츠가 너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카마츠가 유일하게 가진 것은 보편적인 가치관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통 사람과 같다는 점이다. 합숙훈련 연습을 부실에서 할 때 자신이 가진 야한 책을 어디에 숨기는지 이야기할 때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남자고교생이었다. 보통 학생이고 자신에게 아무런 특기와 내세울 것이 없다. 그래서 유우키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곧 자신이 아무 것도 내세울 것도 없으니 그만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남의 말을 경청하거나 최대한 이해하려 해주는 것이다. 다른 부원들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 고집하고 주장할 때 오직 아카마츠만 중간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최후의 답변은 그가 작성한다.

 

6. 아카마츠의 행동

물론 제대로 채택된 답변자의 코멘트도 올라가지만, 아카마츠가 모든 고민을 정리하여 부원들에게 알려준다. 그래서 리노가 친구를 사귈 수 있었고, 리노와 아카마츠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아카마츠는 내세울 것은 전혀 없지만, 1화부터 리노의 말을 잘 경청해준다. 이때까지 리노는 그 누구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진 지식은 일반 고등학생이 가진 지식을 넘어선 것이고, 특히 이과계열에서 일반과학이 아니라 전문적인 물리학, 지구과학, 화학, 생물학으로 파고들어갔다. 이쿠미의 경우 운동을 좋아하므로 야구나 축구, 농구 등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후미 역시 평소 성격이 부드럽고, 문학계열이므로 다양한 소재로 통해 타인과 대화가 가능했다. 에미는 미술부에 원래 있었기 때문에 나름 부활동을 열심히 한 셈이다.

 

그러나 에미는 예술계로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광학적으로 바라보기에 그녀가 붓을 잡으면 광인이 되어 예술인으로서 새로운 세계가 등장한다. 물론 에미 역시 고립된 존재이기도 하나 자기만의 세계가 너무 강하여 감히 누가 옆에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런다면 에미 그 자체는 타인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개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 뿐이었다. 이에 반해 리노는 타인과의 교제를 무의식적으로 하고 싶으나 어떻게 할지 몰라 억지로 멀리하려 했다. 그런 공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관심거리인 과학에 대해 귀를 기울여준 아카마츠가 등장했다.

 

아카마츠는 그저 처음에는 남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나, 사실 리노와의 사건으로 인해 점차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아카마츠가 혹시라도 다른 여자아이에게 관심을 주거나 뭔가 이상한 행동들이 보이면 리노는 무의식적으로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추후에 자신이 제일 귀엽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투표를 할 적에 아카마츠는 리노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리노에게 가장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다수의 미소녀에 남자 1명이란 하렘구조가 외부로 드러나지만, 사실상 애니메이션 <인생>에서 하렘적인 요소를 제거되었다. 게다가 리노와 아카마츠의 관계를 보면서 오히려 옆에 친구들이 응원해주는 모습과 고교생이 되어도 여자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못한 아카마츠를 두고 설교하는 아야카의 모습에선 이 작품이 보통의 애니메이션처럼 미소녀를 간판으로 내걸지만, 결코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이나 하렘 같은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았다. 따라서 <인생>이란 제목과 같은 작품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7. 시학(詩學)

아카마츠가 결코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나, 그가 구심점이 되는 이유는 바로 위에서 거론한 것처럼 그가 보여준 보편적인 정신이고, 그 보편성은 윤리적인 의식이다. 타인에 대한 절대적 가치에서 공공선, 최소한으로 지켜주는 선이 아니라 그 이상의 공동선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가 학생회장에게 맞선 것과 골치 아픈 일들을 도맡는 것에서 아카마츠의 인격이 나온다. 그리고 아카마츠 중심으로 부원들이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그 일상생활이란 남들의 고민을 듣고 해결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들어오는 고민들은 너무 거창하거나 너무 대단한 것보단 언제 어디서 누구나 생각할만한 고민 상담들이다.

 

따라서 <인생>은 거대한 이야기를 중심이 아니라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구조를 이룬다. 물론 최종목표는 학생회장의 타도이고, 그 과정에서 제2신문부의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상담활동을 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 아주 유명한 문구가 있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시는 바로 그 누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역사는 어느 특정인물의 기록이다. 물론 <인생>에서 어느 누구의 고민 이야기는 작품에서 하나의 역사로 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적 가치는 주류적으로 정치적인 큰 영향력이 있을 경우 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책에 소년 A가 소녀 B를 사랑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춘향뎐>에서 나올만한 이야기다.

 

<인생>의 고민 코너는 우리가 살면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우리의 고민이 저런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었지!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고민을 상담하여 해결하는 과정에서 너무 누구나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요소도 있었지만, 이른바 정론이란 것이 존재했고, 단지 정론으로 풀어나갈 상담에서 좀 더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것을 강조했다. 우리 인간은 거대한 문제로 고민하기보단 오히려 사소한 것들로 고민한다. 아주 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손을 쓸 방법도 없고 바꿀 수 있는 여지도 없다. 국가경제나 세계평화 같은 큰 문제를 우리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소한 것들은 얼마든지 생각하고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소한 것에 짜증을 내고 웃고 울기에 고민하는 것이다.

 

8.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인가?

<인생>이란 제목처럼 이 작품은 인생에 대하여 상담을 받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결국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질문에서 그 해답은 행복이다. 행복이야말로 인간이 최종적인 목표고 희망사항이다. 여기에 덧붙여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에 이 글에서 인간은 재력과 권력의 척도로 행복으로 연결될 수 있겠지만, 결국 그것도 타인의 존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고, 인간 그 자체가 사회화로서 자기의 실제적인 모습을 은폐되고, 허례허식적인 모습만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그 행복은 어떻게 해야 나오는가? 그것은 <인생> 5화에서 나온다. 5화에서 제1신문부와 제2신문부의 통폐합 승부에서 각 팀에서 3명씩의 발제자가 나와 서로 토론을 벌인다. 처음에 리노와 땡중, 이쿠미와 제1신문부, 그리고 마지막이 후미와 후미의 할아버지다. 제3파전의 후미와 할아버지의 대화는 이 작품에서 나오는 <인생>이란 제목을 정확하게 알게 해주는 것이 나온다. 후미와 할아버지 대화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어느 질의한 사람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갈 수 없는 꿈이라면 바로 그 목표인 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을지에 대한 질문을 시합에 의뢰한다.

 

토론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십자창을 휘두른 후에 정신집중으로 얻은 답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꿈을 가지지 않아도 결과를 낼 수 있다고 했지? 하지만 꿈이란 성과를 내기 위해 갖는 게 아니다. 꿈이란 사람의 삶의 모습 그 자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 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 꿈이 있는 게다. 결과는 꿈을 갖는 것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후미는 “저도 집중할게요. 마치 최종화인 것처럼. 지금까지의 경험과 기억을 전부 불러들이겠어요. 너무 집중해서 떠올릴 범위를 좀 넘어버렸지만,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은 꿈만이 아니에요.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은 사람이에요. 소중한 사람과 보낸 시간이 인생을 빛나게 해줘요. 니노, 이쿠미, 아카마츠, 소중한 사람들과 보낸 나날이 제 인생을 빛내주고 있어요! 물론 할아버지와의 시간도요. 할아버지 늘 고마워요.”

 

9. <인생>의 목표는 행복

<인생>의 작품 외적인 결론은 11화에서 아야카가 아카마츠를 차기 학생회장으로 추천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적인 결론, 즉 <인생>이란 애니메이션 인생이란 타이틀로서 말하는 결론은 5화에서 나온다. 바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서 꿈이

중요한지 아닌지에서 결국 꿈은 없어도 살 수 없지만, 인간이 인간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요소는 프랑스 문학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란 가명으로 적은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이란 단순히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남녀의 사랑만이 아니라 자기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 꿈이 없어도 행복하고, 그 공간에서 꿈과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그 목표는 이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다는 것이다.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들이 그 고민이 해결하는 순간 얼굴에 미소가 만발하여 다시 일상생활에 돌아온다. 그렇지만 또 다시 다른 고민에 빠지고 또 거기에 대한 근심이 생긴다. 인간은 한 번 태어난 이상 고민과 근심을 버릴 수 없는 존재다. 물론 힘들기도 하나 그것이 해결되면 하나의 성취감으로서 큰 행복이 온다. 그렇지만 행복은 혼자만 즐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옆에 아무도 자신의 감정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결국은 외톨이란 점이다. 위에서 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다 리노와 아카마츠가 나왔는가? 리노는 이때까지 자신의 생일을 한 번도 챙기지 않은 소녀이고, 거기에 대해 아카마츠와 친구들은 리노의 생일을 챙겨준다.

 

생일을 챙겨주는 이유는 단지 리노가 친구로서 좋아하기 때문인 것이다. 친구들이 서로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기분 좋은 행복이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행복함을 느끼기보단 모두 나누면 그 배가 되는 것이다. <인생>에서 리노의 첫 모습과 마지막화의 모습을 보면, 처음에 차갑고 외로운 소녀이나, 마지막엔 사랑에 빠진 평범한 소녀로 등장한다. 자신에게 아무 것이 없다고 생각한 리노가 자신에게도 의지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후미가 말한 것처럼 사랑, 우정은 소중하다.

 

10. 우리들의 삶과 <인생>

그것은 우리 인간들을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그 존재 객체로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최근 산업화 이후 자본주의 급속화로 세상은 모든 것은 물질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친구 사이에도 손익분기점을 따지면서 가린다.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물화(物化)되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적인 요소로서 대해주는 게 아니라 계속 도구적 가치로 남아버린 것이다. 남을 도구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조차도 도구로 전략하고, 인간이 도구로 된다는 것은 결국 소외되어 고립되는 셈이다.

 

그런 인생이 과연 재미있을까? 물론 물질적인 부와 권력이 넘치면 좋겠으나, 마이다스의 왕처럼 자신의 손에 닿은 모든 게 금이 된다면 그는 영원한 외톨이로 살다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 인간이 가장 필요하기 때문에 가장 저렴한 존재가 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인간을 착취, 억압, 방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다른 것은 모르지만 친구의 소중함은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인생>이란 애니메이션은 후미의 버스트 무빙(여자의 몸과 가슴이 따로 움직이는 장면) 내지 판치라(치마 아래 팬티가 보이는 장면)가 종종 보이지만, 예고편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후미가 좋아하는 이야기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인 <달려라 메로스>가 중요하다.

 

<달려라 메로스>는 고대 그리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메로스가 난폭한 왕에게 반항하다가 붙잡혀 며칠 후에 처형된다. 그런데 메로스에게 하나뿐인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고, 그 여동생은 어느 남자와 결혼한다. 죽기 전에 메로스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왕에게 간청하나, 왕은 그것을 보장하기 위해 메로스의 친구를 대신 감옥에 갇히게 하고, 만약 메로스가 기일에 오지 않으면 메로스를 살려주나 친구를 대신 처형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메로스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다 본 후 다시 처형장으로 가야 하나 마지막까지 고뇌하고 방황하지만 결국 친구와의 약속을 지킨다. 메로스를 믿어준 친구, 그 친구를 살리기 위해 달린 메로스의 우정이 <인생>이 보여준 작품의 테마가 아닌가 싶다. 친구는 역시 소중하다. 그것은 나이가 먹거나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되어도 유일하게 받아줄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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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2014-11-1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니코윤리학을 보게 될 줄이야!! ㅎㅎㅎ

만화애니비평 2014-11-11 12:45   좋아요 0 | URL
오덕력은 뭐든지 통합니다
 
현대인의 교사 루소 - 루소는 에밀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김상섭 지음 / 학지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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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에 대해 생각하면 보통 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인권을 주장한 사상가로 생각해왔다. 물론 그는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와 <인간불평등기원론>으로 통해 인간사회가 가진 억압과 고통에 대하여 진지한 비판과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문장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곧 하나의 철학이 되었다면, 카를 마르크스가 제기한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를 읽게 되면, 루소는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드,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사상가와 혁명가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런 루소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경우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에 나온 이 문장에서 이때까지 철학은 세상을 계속 해석해 오는 것에 충실했다면, 그 해석을 하는 철학이 결국 탐구하고 보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탐구대상의 영역이 무언가 오류나 잘못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거기서부터 단순히 비판하여 고찰만 해야할 철학에서 실재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실천철학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철학은 당시 사회인 프랑스 계몽주의 물결에서 볼테르나 디드로 같이 단순히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기보단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계몽주의 철학자와 달리 루소는 엘리트이면서도 엘리트인 것에 치중하지 않았다. 사실 볼테르와 루소가 프랑스 파이에 있는 팡테옹이란 신사에 나란히 묻혀 있다고 해도 두 사람의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그 만큼 달랐다. 볼테르는 지식인 중 뛰어난 사람들에 대한 우월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면 루소는 그들과 달리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결국 마르크스가 제기한 것처럼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위에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이 세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핍박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서 변증법적으로 물질이 사회구조를 변화한다는 것처럼 당시 프랑스 사회는 빈곤한 하층민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했던 것이다. 루소의 사상이 왜 그렇게 변화를 주었는가? 사실 왕정사회에서 국민이란 그저 왕에 의해 통치를 받는 사람이고, 그들의 재산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얼마든지 수탈당할 수 있는 위치였다. 심지어 목숨조차도 왕이나 귀족의 노여움에 의해 보장받지 못할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은 단지 권력자들에 의해 모조리 박탈당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루소의 <에밀>을 읽게 되면 그가 본 사회는 참으로 위태로운 것은 분명했다. 왜냐하면 <에밀>이 발간된 시기는 1762년 당시 유럽 어느 사회든 왕이 통치하지 아니한 국가는 거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프랑스 루이16세가 지배하던 왕정국가에서 그 이전의 루이14세는 태양왕으로서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왕권신수설까지 도래한 시기다. 무너지지 않을 듯한 철벽같은 왕정시대에서 <에밀>에서 이제 곧 혁명이 도래할 것이란 위험한 말이 등장한다.

 

지금에 와서 역사적인 흐름을 본다면 혁명이란 것은 최근에 한국에서도 일어난 운동이고, 세계적으로 혁명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혁명의 원인을 찾아보면 민주주의 국가체계에서 헌법을 명시한 국민이 곧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이란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소가 살던 시대에는 국가의 주인은 곧 왕이었다. 왕이 모든 것의 주인이던 시기에 루소의 발상은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상이었다. 바로 그런 사상이 세계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18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그의 사상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고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정치철학 내지 사회혁명으로서 루소의 가치를 보는 것에 대해 내가 개인적으로 주안을 두었다면, 이번에 읽은 도서는 조금 다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연적이고 그 존재는 자유로우나 이미 세상 도처에 널려 있는 사슬에 의해 억압의 사슬로 묶여 버린다. 인간이 태어나는 이상 사회화라는 것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이다. 인간이 사회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인간은 또 다른 야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야만의 세계란 무지몽매하고 물리적 폭력이 난무하는 미개한 야생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잔혹한 야만성이 가득한 사회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에서는 폭력에 의한 물리적 타격은 없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말과 그리고 오묘하게 숨어있는 질투, 시기, 모함 등이 존재한다. 루소가 왜 그토록 인간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을까? 루소가 말한 자연이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을 보듯이 루소가 아주 평화로운 들판을 걸으며 발견한 식물을 채집하여 그 식물이 무엇인지, 그 식물의 외형은 무엇인지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편지처럼 자연 그 자체가 존재하는 세계 1가지가 있다. 이에 반해 다른 1가지는 인간 사회의 자연성이었다. 인간에게 수렵이나 채집과 같은 농경산업 이전의 비문명사회로 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마음에 접근하여 인간 그 자체로서의 본질에 다가가는 자연성이었던 것이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물들여 살아가고 있다. 세속에서 하나의 도덕으로 작용하여 그게 가끔 좋은 것으로 비추어질 때도 있겠지만, 대부분 세속적인 가치가 인간에게 유용한 게 아니라 하나의 허례허식 내지 남을 깔아뭉개거나 혹은 차별하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루소는 바로 그런 세속적인 인간에서 인간의 사회성이 결국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본 것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인간이 가진 잔잔한 재주는 어쩔 수 없더라도 자신이 가진 재주 내지 재산, 권력을 뽐내기 위해 억지로 자신만을 돋보이려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재물과 재화를 소모시키는데, 그로 인해 많은 가난한 농부들이 밀가루를 구할 수가 없어 빵을 먹을 수 없는 것도 지적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밀가루는 당장 급하게 구입해야 하나, 그들에게 가진 가난함은 오히려 절실하지 않으나 얼마든지 밀을 살 수 있는 자에 의해 그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밀이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만큼 밀이 아니더라도 다른 것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여유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런 여유만큼 얼마든지 구매하고 소모시킬 수 있으므로, 절실하게 원하는 자에게 밀이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회에서 인간이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나, 인간이 가장 필요한 존재가 인간이므로 결국 가장 비참하고 저렴한 존재는 인간으로 되는 것이다. 루소가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본 것은 어린 시절 농부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던 때이다. 굶주림과 긴 여행으로 허기진 루소는 어느 농부의 오두막에 가서 먹는 것을 달라고 하자, 농부는 아주 형편없는 빵과 음식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루소는 그것을 아주 맛있게 먹어치우자, 농부는 자기가 숨겨둔 좋은 치즈와 음식을 내어주었다. 루소가 보통 농민과 달리 좋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자신의 재산을 빼앗으려 온 줄 알았지만, 루소가 단지 배가 고픈 사람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경험으로 루소는 자신의 인생가치를 바꾸게 되고, 후에 가서는 귀족적인 의상에서 아주 간편하고 소박한 의상으로 바꾸게 된다.

 

루소가 경험한 사회에서 이런 농부들의 행동, 파리 도시에 가서 본 비참한 거지와 빈곤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결국 루소는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점과 거기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루소가 그것을 인지한 지점에서 인간은 어떻게 하면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게 바로 <에밀>인 것이다. 이미 그가 추구한 자연적인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신이 자연적인 인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문학적 요소로서 만든 교육철학 도서가 <에밀>이고, 그것은 프랑스대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혁명이 되게 하는 큰 구심점이 되었다.

 

에밀은 어느 귀족의 아들로서 부모는 없고, 오로지 에밀의 후원자 한 사람인 장 자크가 맡게 된다. 에밀에 대한 교육방법은 지금과 다르게 매우 혁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인 현재에서 에밀에 대한 교육방법은 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매우 잘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계성은 에밀을 두고 일대일이란 교육시스템은 어려우나, 그런 시스템적인 요소를 조금 다르게 해결한다면 인간을 두고 새로운 가치관을 부여할 수 있던 것은 분명했다. 가령 20세기부터 경제성장과 물질문명의 지나친 발전은 인간이 가져야할 인간성을 파괴하고, 가족관계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이어지고, 가정환경은 자녀들에게 학교라는 단체교육기관에 위탁하도록 만들었다.

 

옛날 교육체계는 학교나 혹은 학교 이전의 교육기관이 있더라도 집안 자체가 대가족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심지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 고모 등이 같이 살았기에 얼마든지 교육의 경로가 존재했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배워야 하는 교양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적 요건의 변화는 모든 가족의 해체로 이어지고, 아이들은 더 이상 가족의 보호가 아니라 타인의 위탁으로 이어진다. <에밀>에서 에밀은 자신의 가족이 아닌 가상의 후원자에게 맡겨지나, 적어도 그들은 피가 이어지지 않을망정 하나의 가족과 같았다.

 

가족의 중요성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심리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심리적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뭔가 집착하거나 또는 불안해진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그런 불안한 아이들에게 계속 억지로 주입하거나 틀에 맞추어지는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은 청소년들의 비행이나 왕따, 그리고 소외다. 그런 청소년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면 그들이 경험한 것에 의해 새로운 고통이 반복되고, 그 영원한 고통과 고뇌의 순간을 단절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대안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의 자연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회복은 인간이란 비록 완전하지 못해도 그 인간성 자체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학교생활은 그저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와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할 수 없이, 그저 주어진 것만 받아들이어야 하고, 그것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면 처벌로 이어진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처럼 이미 우리 인간은 학교라는 공간조차도 수용소의 한 자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인간에게 그런 사회화란 것은 누구에게 속박당하고, 거짓과 위선으로 상대방을 속이는 기술만 배운 것이다.

 

정작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말이다. 단지 사회에서 정해져 준 가치란 결국 성공이란 것인데, 그 성공은 출세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삶에서 우리의 성공의 가치는 결국 인간이 가진 재력과 권력으로 측정되어 버렸다. 루소가 가장 안타까워한 것은 결국 재력과 권력이 중심이 되면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오늘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 <레미제라블>의 정신적 토대가 되는 루소의 사상 역시 지금도 묻고 있다.

 

<레미제라블>에서 비참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만 비참한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그 비참함은 대를 이어 계속 물려주고 언제 끝나지도 않을 것만 같은 시간지옥 같았다. 인간은 자신을 누군가에게 팔리지 않을 정도로 가난하면 안 되는 것인데,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언제라도 버려야 하는 그런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루소는 그런 사회가 결국 인간의 자연성을 찾지 못한 것이라 보았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자연성이란 숲과 강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본연의 마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누가 아프거나 다치면 그것을 보고 당연히 도움을 주어 그가 제대로 생활해야 한다는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는 점이었다.

 

<에밀>에서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에밀이 사랑하는 여인 소피가 에밀을 기다리고 있는데, 에밀과 에밀의 스승이 약속시간까지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본 바, 어느 누가 심하게 다쳐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할 때, 에밀은 그를 간병하고, 의사를 부르러 갔으며, 그의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위로한다고 늦었던 것이다. 결국 타인이 처한 어려운 처지를 보고 당연히 도와주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좋아하는 즐거움조차 포기했다는 점이다. 그런 판단력을 갖출 수 있는 인간,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라 보는 인간이 루소가 추구한 <에밀>의 내용이었다.

 

물론 이런 내용이 아니더라도 <에밀>에서 보여주고 들려주고 생각해야 할 내용들은 너무나 많다. 에밀은 자신이 부유한 재산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마을의 이웃과 즐거움 삶을 살기를 택했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하고, 때로는 타인을 위해 같이 힘을 합치며 모두와 조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루소가 바라는 이상적인 삶이란 바로 저런 것이 아닌가 싶다. 단지 루소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본연의 자연적 모습이라면, 더 나아가 칸트와 롤즈는 이성적인 요소로서 사회적 자유를 본 것이다.

 

물론 루소 역시 이성을 중시했다. 그의 저서인 <사회계약론>은 인간은 동식물이 위치한 자연에서 살 수 없기에 사회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그 주인이 되어 일반의지로서 자신의 자유를 찾아가는 것을 원했다. 결국 인간의 교육은 사회화라는 흐름에 가겠지만, 그 사회화에서 자연적 본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의 평가로부터 관찰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로서 평가하여 판단하는 게 타당했던 것이다. 이성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게 결코 이성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성을 활용하는 방법에서 자신의 이기심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대다수 군중의 이기심은 전체의지로 변하여 일반의지를 대체하게 된다.

 

일반의지란 결코 모든 것을 바꾸는 절대적 힘이 아니라 어느 방향을 향하여 길을 제시하고 안내해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전체의지로서 일반의지를 파괴하고, 그것이 하나의 도덕적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그런 전체의지를 두고 니체는 군중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나기 바란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실존주의적인 인간상은 니체 이전에 이미 루소가 정립하였으며, <에밀>을 읽더라도 인간은 자연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 것조차가 실존주의적인 인간상이었다. 실존적인 존재이므로 자신의 판단력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하지만 그런 인간을 만드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다.

 

그런 점에서 루소는 인간을 만드는 것은 타인의 손에 의해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찾아가도록 길을 제시해야 주는 것이었다. 그 경로에는 처음에 인간은 자기애에 의해 이기심이 발동하지만, 그 과정조차도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이어지도록 유도한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본인이 가장 소중하다. 이런 자아와 타인에 대한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에서 인생의 참모습 그리고 더 나아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있다. 그 작품에서 주인공 이카리 신지는 14세의 중학생으로 아직 개인의 자아가 확립되지 못한 채,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무관심, 어른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 강요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신을 스스로 몰아넣고 외로움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본다면 우리 사회의 청소년과 이카리 신지의 모습은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인간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사회라는 전체적인 구조가 인간을 형성하게 만든 것이다. 에밀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던 계기는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자 하는 어른이 존재이고, 그 존재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지난날의 모습이 옳지 못한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소의 서적에 나온 문구들은 너무나도 훌륭하여 <현대인의 교사 루소>에 나온 루소의 글들을 보는 내내 나는 감탄을 마지못했다. 왜 칸트가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는데(칸트 동네 사람들은 칸트가 산책 나오는 시간을 보고 현재 시간을 알았을 정도였다.), 루소의 <에밀>을 읽는 것 때문에 몇 번 그 산책하는 시간을 깜빡했다고 한다.

 

<에밀>만 아니라 다른 서적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구와 너무 인상 깊은 단어는 내 가슴을 움직인다. 루소는 다른 철학자와 달리 그의 서적을 읽으면 마음에서 뭔가 불타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철학은 차가운 이성으로 볼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루소는 뜨거운 영혼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저자는 교육철학자이기에 다소 책 내용이 어려우나, 제4장에 나온 그의 테제는 아주 인상 깊었다. “사상가 루소는 유명한 제자 에밀을 창조했지만, 학습자 에밀은 휼륭한 교육자 장 자크를 창조했다.”

 

우리는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단지 교육자란 이유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려고 하지만, 사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 역시 학생들로부터 충분히 교육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직 학생들의 이성적 수준과 지성의 범위가 넓거나 깊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나, 그들이 품고 있는 상상력과 창의력은 교사보다 더 월등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죽이는 것만 권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인 모습을 파괴하고 억압하고 파멸시키고 있다. <현대인의 교사 루소>처럼 루소가 현대인들의 교사가 되어야 할 점은 인간이 인간처럼 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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