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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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은 아직 나에게 참 먼 책인 것 같았다. 나름 신화에 대해 관심이 있고, 신화에 대한 인류학적인 고찰 역시 관심이 많다. 그런 점에서 <백년의 고독>은 신화적인 요소를 이리저리 끌어온 작품이다. 번역자의 부연설명에서처럼 길가매쉬의 모험, 오디세우스의 귀향여행, 연금술사, 성배 찾으러 가는 기사단의 여정, 영원함을 추구하는 점이라든지 더 나아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디오니소스적인 모습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 모든 것이 복선적인 요소로서 계속 운명이 돌고 돌지만, 한편으로 너무 갑작스레 상황이 변화된다. 그 변화의 공간에서 우리는 인간이란 계속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돌고 돌아 마지막에는 파멸이란 이름으로 그 마무리를 주어진다.

 

<백년의 고독>에서는 실제 저주받은 인간의 역사는 백년이 아니라 백년이 넘어 버렸다. 아마 100년의 고독을 지닌 자는 우르술라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호세 아르끼디오 부엔디아의 아내이면서 사촌인 그녀를 말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사촌인 부엔디아계의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그녀는 남편인 부엔디아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 마꼰도로 온다. 오게 된 동기는 남편이 마을의 남자에게 남자구실하지 못한다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그 남자와 대결하기로 약속하고, 그 자리에서 그 남자를 죽인 것이다.

 

시기적으로 아직 20세기 이전이고 콜롬비아 배경인 점에서 국가적인 정치체계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콜롬비아 역시 이전에 강대국에 의해 식민지로 통치 받았을 나라일 것이다. 그들은 스페인어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변에 흑인과 백인 혼혈인, 집시들, 원주민들이 있는 점을 본다면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가 독립을 했더라도 그 이전의 역사적인 흔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늘이 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역자의 부연에서 마꼰도라는 것은 거울로 만든 환상의 도시다. 거울이란 것은 자기 모습을 보기 위해 만든 도구다.

 

하지만 거울 너머에 비추는 자신은 분명 실존하나, 거울 그 자체에 보이는 존재는 실존하지 않은 존재이고, 그 존재는 단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거울 너머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보단 거울 그 자체로 보려 한다. 거울을 보는 것은 잘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거울은 어둡거나 혹은 밝거나 또는 황혼이나 새벽의 언저리에서 비추어지는 모습이 다르다. 거울이 보이는 것을 다 반사한다고 해도, 그 거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정말 그 자체로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빛을 굴절을 직접 볼 수 없으나, 거울은 빛의 굴절을 볼 수 있게 한다.

 

굴절로 어긋난 모습이 바로 우리의 진실이 아니라 어긋난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사실이란 진실처럼 바로 일어난 객관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Fact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모호하고, 그 경계 내에서 사실이란 것은 결국 만들어진 존재이란 것이다. 만들어진 사실과 허구, 그 교묘한 눈속임 내지 은밀함이 아마 <백년의 고독>을 오묘한 세계로 인도했을 것이다. 사실주의적인 소설이란 점에서 사실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나, 내가 본 <백년의 고독>은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너무 달랐다.

 

과장이 넘치는 표현력, 문장의 연결성이 전혀 부드럽지 못한 배치, 게다가 초과학적인 현상들은 과연 이것이 사실주의라는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때마침 사실주의적인 만화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 아이러니한 맛을 느꼈다. 심지어 아트 슈피겔만의 <쥐>라는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동물로 표현되지만, 작품의 설정과 전개에서 보여준 나치 아래의 잔혹함에서 사실주의적인 요소를 인정받았다. 즉 만화적 표현과 묘사에서 의인화로 통해 사실적이지 못한 등장인물로 통해 당시의 사실들을 표현하였기에 사실주의라는 것을 인정받은 점이다.

 

그런데 <백년의 고독>은 사실주의적 요소, 즉 당시 시대적 배경도 어느 정도 관여는 하나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사건으로 변화하게 되더라도, 그 자체가 사건의 중심이 아니었다. 모든 중심은 마꼰도로 시작하여 마꼰도로 마무리하고, 마꼰도 안의 부엔디아 가문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비극의 탄생은 어디로부터 시작하는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도 인간의 예술은 아폴론적인 것보다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더 찬양한다. 정지된 아폴론보다는 계속 죽음과 삶을 반복하여 광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말이다.

 

<백년의 고독>에선 사치와 향락적 요소에서 포도주가 자주 거론된다. 갑자기 부자가 된 부엔디아 남자는 그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향략을 즐기기 위해 포도주를 욕실에 부어넣고 목욕을 한다. 디오니소스가 포도주의 신인 점을 본다면, 술은 인간을 아주 기쁘게 하나, 때로는 미치게 하여 인간의 모조리 빼앗고, 차마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낸다. 디오니소스의 향기로운 포도주야 말로 인간의 그 자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마법과 같은 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마법의 약을 마시지 않고, 이미 마법이 시작된다. 번역자가 마술적 사실주의란 말처럼 마술적인 주술효과가 이미 걸린 셈이기 때문이다.

 

초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자신을 모욕한 남자를 죽이고 마꼰도로 온 것은 소설의 설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죽은 남자는 분명 묘안에 묻혔는데도 부엔디아 앞에 유령처럼 등장하고, 때로는 대화도 하고, 나중에 서로 화해까지 한다.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모습이 이 작품에서 하나의 설정으로 등장한다. 초현실적인 사건이 등장하는 것에서 이것이 사실주의 작품인가? 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그런 사실주의적 요소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마꼰도라는 마을을 만들고 발전시키면서 거기가 쇠퇴하는 과정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꼰도는 콜롬비아 영토 내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산 속 내지 오지의 마을이다. 그곳에 온 부엔디아 가문은 마꼰도를 발전시키고 자식을 낳고, 주민들이 올 때마다 많은 도움을 준다. 따라서 마꼰도는 부엔디아 가문만의 왕국이고 세계이며, 그리고 무덤이기도 하다. 아무도 죽지 않았던 신생마을에 죽음이란 없었고, 단지 마을은 크게 성장하고, 이윽고는 집시들이 그 마을을 오게 된다. 그러면서 호세 아르까디오의 성욕, 그리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모험은 점차 평화로운 세계를 혼돈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혼돈은 자신들의 내부에서 온 게 아니라 다 외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형인 호세는 세계를 돌고, 동생인 대령은 전쟁터를 누빈다. 그들의 동기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었으나 그 결과는 마을을 모조리 흔들었던 사건이 된다. 그로부터 아르까디오의 죽음, 아르까디오의 쌍둥이 아들, 미녀 레메디오스 승천, 한 여자를 두고 형제가 서로 애인으로 차지하거나, 열렬한 가톨릭 신앙자인 페르난다의 시집 등에서 부엔디아 가문은 번창과 쇠퇴의 길을 걷는다.

 

발전과 쇠퇴에서 과학적 기술이 등장하는데, 가령 아주 아름답고 천사 같은 레메디오스의 죽음에서 부엔디아 가족들은 그녀의 모습이 담긴 은사진을 가진 점, 아마란따가 사랑한 남자가 가지고 온 자동피아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본 기나긴 기차, 그의 딸이 결혼한 남자는 비행기를 몰았던 사람이다. 중간에도 과학의 산물이 등장하고, 문명의 발전, 그리고 자본주의 유입, 그로 인해 바나나농장 노동자의 파업과 죽음이 비극처럼 등장한다. 단순히 부엔디아의 가문의 발전과 몰락은 마꼰도의 역사이면서 한편으로 콜롬비아 역사를 비극적으로 보여준 점이다.

 

오히려 그런 비극이 중심이 되는 게 아니라 부엔디아 가문이 겪은 일 중에 하나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더 큰 인상을 남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령의 전쟁이 참전한 이유는 자유파와 보수파의 가치관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모든 집이 하늘색으로 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은 점이었다. 하지만 그가 벌인 전쟁은 분명 내전의 기나긴 슬픈 역사이었을 것이고,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겪은 200량이 되는 기차는 내전에 이어 노동운동의 슬픈 비극일 것이다.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항의하자 군인들이 와서 무참히 사격한 점에서 마꼰도 마을은 이제 삶이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죽음이 존재하는 곳으로 변한다. 디오니소스적인 세계관에서 봄이 부엔디아가 처음 올 때라면 아우랠리아노 세군도는 죽음으로 변해진 가을이고, 마지막 정점은 고모와의 근친상간으로 가문이 파멸되는 아우렐리아노의 슬픔에서 볼 수 있다. 근친상간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욕망, 외부에서 오는 이방인에 대한 배척(메메와 마우라시오 바빌로니아), 다른 여자에 대해 서로 집착하는 형제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과연 그렇게 만든 것인가?

 

그렇다면 콜롬비아의 역사에서 100년이란 시간에서 계속 이어지는 마꼰도 부엔디아 가문은 영원히 그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고뇌로 끝나야 하는가? 첫 단추가 틀리면 뒤에 단추도 어긋나고, 심지어 더 어긋날 수 있을 것이다. 어긋난 운명에서 다시 시작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아우렐리아노는 그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에 혼자 있는 것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근친상간의 욕망에서 초대는 사촌이었으나, 끝은 고모와 아들이다. 하지만 고모는 어머니와 형제이기 때문에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아마란따 우르슬라는 할아버지의 자손, 즉 고모이면서도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인 이모이다. 고모와 이모인 아마란따 우르슬라는 결국 자신의 아들과 같은 아우렐리아노와 몸을 섞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물리친 이유로 아름다운 여왕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2남2여를 슬하에 두나, 자신의 아내가 어머니란 점을 알고, 두 눈을 찌르고 평생 방랑한다.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2남2여 모두 비참한 죽음과 결말을 맞이한다. 근친상간이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비참한 운명으로 보여주는지, 또한 그런 근친상간되도록 만들어내는 배타성이 결국 인간은 계속 돌고 도는 시간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에 두고 보면, 우리는 근친상간을 하지 않는 나라라고 해도, 아니 근친 적으로 다수 촌수가 멀다면 인정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점에서 배타적인 요소는 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백년의 고독> 못지않은 사회적 갈등과 배타적 관계로 멍이 든 것은 분명하다. 그 결말은 부엔디아의 가문 몰락처럼 우리 역시 그런 배타적인 집단주의에 말려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제목이 일단 <백년의 고독>이란 말처럼 인간의 수명은 현재 대략 80년 이상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100년 이상을 살은 사람도 나온다. 100년 어찌 보면 그것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수명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이상을 살아가든지 아니라면 그 이하를 살아가든지 항상 외로운 법이다. 그 외로움은 연애적인 요소도 다분할 것이고, 아니라면 인간적 요소로도 충분히 그럴 것이다. 대령의 인생에서 그는 혼자만의 고독을 찾아 방에 은거하였으며, 많은 가족들도 어둠에서 고독을 영원한 반려로 삼았다. 외로움이 싫은 것이 인간이나, 그 외로움만이 자기에게 남은 것임을 알아낸 자들의 말로가 오히려 우리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고독을 느낀다. 고독이야 말로 실존주의자 내지 혹은 루소가 자기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시작이나, 그 고독이 지속되면 결국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될지 모른다.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자신이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로서 통해 자신을 볼 때 알 수 있다. 사회적 관계가 바로 그런 관계적인 요소이므로 고독에게 선택된 인간들을 보자면, 그들은 영원히 사람들과 이어질 수 없는 벽으로 가려진 존재다. 하지만 고독이 사람을 선택하든, 사람이 고독을 선택하든 그 기점에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원하지 않은 운명이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불운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항상 그대로라면 항상 그대로 비극은 이어진다. 잘못된 점이 있으면 분명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그것이 다시 비극으로 몰아넣고, 고독의 영원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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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
폴 르블랑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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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이 100주년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트로츠키가 지적한 것처럼 빈곤과 착취, 억압을 해결되지 않음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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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지음, 유재홍 옮김 / 울력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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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이미지 소비에 대한 착취를 설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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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2-0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저도 엔날에 봤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거였었는데, 흥미 진진하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12-01 17:45   좋아요 0 | URL
아 그건 현실문화연구 것이죠
 
물의 공주와 잊지 못한 상처 - 요희전기 3, Novel Engine
크레파스 지음, Mx2J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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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희전기 3번째인 <물의 공주와 잊지 못한 상처>를 보며 1권과 2권이 달과 불의 공주인 점에서 다시 공주라는 인물이 메인 표지 일러스트로 등장했다. 그 인물은 수향의 이사장 외동딸인 수희, 전형적인 자본력의 토대가 되는 화폐의 운영으로 움직이는 나라다. 이곳은 왕은 대주주이며, 모든 자본가보다 더 많은 나라의 주주를 가지고 있다. 단지 일반적인 부르주아와 다른 점은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 보여준 것처럼 수향의 이사장은 다른 곳에 망명하면서 치사하게 혼자만 몸은 보전하려고 한 게 아니라 가난과 고통 안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 충분한 책임감을 느끼고, 화선으로부터 침공당한 수향을 위해 스스로 힘든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의 딸인 수희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수향을 위해 월린과 유하와 손을 잡게 되었다. 동맹을 임시를 맺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동맹 이후에 진행되어야 할 상황 전개다. 지나칠 만큼 강한 화선의 공격 아래 무력한 월하의 게릴라전은 이미 의미 없는 것처럼 되었다. 화선의 왕자이며 유하의 라이벌인 태화는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월린과 월하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들에 대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라 한다. 일부러 모조리 죽이지 않고, 자기 진영에 빈틈을 만들어 서로 대치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의 스토리설정에서 숨은 복선과 플롯은 드러나지 않겠지만, 전반적으로 화선이란 국가를 보면 내부적으로 권력다툼이 매우 심한 곳이란 점이다. 요희전기 2권 별권부록에 나온 꽃의 나라에 온 황비와 그녀의 아이가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둘 다 아무런 힘도 없었고, 그저 가만히 인형처럼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녀들의 죽음은 화선이란 국가가 얼마나 많은 권력이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단순히 황제와 황제의 자제인 황녀와 황자만의 다툼만이 아니다. 그 뒤에서 움직이는 세력들 스스로가 알아서 권력다툼에 참가하여 원하지도 않은 죽음을 만들어낸다. 그런 세계에 있으려면 보통 사람의 정신으로 견딜 수 없다. 그 잔혹한 타성이 길들여져 같이 파멸 속으로 달려가거나 또는 거기서 나올 수밖에 없다. 아니라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자신의 현재 위치를 지키며 어둠의 타성에 빠지지 않게 살 수밖에 없다.

 

화선의 황자인 태화는 그런 존재인 것 같았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냉정한 그의 군사작전은 천재소녀인 유하 이상으로 능력을 보여준다. 월린이 있는 월하국가와 대립으로 그가 얻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니, 살아가기 위해 싸운다는 말은 결국 그에게 어떤 운명적인 흐름에 몸을 담아가는 셈이다. 그래서 월하에 최고의 전사인 산신의 반응은 재미있다. 산신이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변에 위치한 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다. 바로 흐름에 따라 움직이고, 그 흐름에 따라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제는 그 흐름을 누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신의 국가일 수 있고, 타국의 존재일 수 있다. 화선의 황자 태화는 바로 자신들이야말로 화신이고, 화신은 산신처럼 흐름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한다.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정체된 상태에서 멈추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존에 멈추어진 큰 벽이 있다는 뜻이다. 화선의 황자는 남들이 모르게 큰 계획을 꾸미는 것이다. 억지로 월린과 유하를 곤경에 빠뜨리고, 그러면서도 바로 죽이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기도 한다.

 

단지 그의 계획에는 흑록과 큰 관계가 있다. 또한 유하가 왜 그렇게도 흑록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뭔가 숨어 있다. 흑록은 분명 월하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월하가 망하면서 그의 고국을 등졌다. 그렇지만 그가 등진 것은 사실 국가만 아니라 또 하나가 있었다. 바로 동생의 존재였다. 태화는 흑록에게 흑록의 동생 흑비가 자신의 옆에 있고, 그녀는 완벽한 화신이라고 한다. 화신의 존재에서 흑비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 전란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는가? 단순히 3권은 그런 새로운 상황만 암시해주고 막을 내린다.

 

이런 상황을 정리하면 전체적인 흐름 화선으로부터 수향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주주총회를 열고, 주주총회 과정에서 시량의 방해, 그리고 계속되는 대립, 그 와중에서 주주총회의 패배, 그렇지만 단순히 태화가 노리는 것은 월하를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월하가 화선과 비등하게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국가적 차원, 정치적 상황에서 간단해 보이는 공식이 성립되나 그 상황에 놓여있는 인간에게 간단하지 못한 것이다. 국가라는 것은 눈앞에 당장 보이는 게 아니라, 그 국가조차도 인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에서 국가 그 자체가 관념적 존재에서 하나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국가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국가의 사람들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많은 군인들은 전투 중에 무참하게 사라져 가버린다. 그래서 잊지 못할 상처란, 흑록만 그런 것만이 아니라 월하에서 활동하는 전장지휘관 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매우 힘든 전투상황에서 군사 반 이상을 탈환하여 무사히 퇴각했다. 퇴각에서 그는 많은 병사를 살릴 수 있었지만, 그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그의 선택은 결코 남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지시하는 과정에서 실제 그곳이 함정인 줄 알면서도 부하에게 가라고 명령하거나, 또는 그 과정에서 위험한 것임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여 상황을 타파해 나갔다. 자신과 많은 군인들은 살아왔지만, 대신 누군가를 희생하게 만든 셈이다. 전쟁에서 누군가의 희생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그 레퀴엠을 울리게 만들 상황에서 지휘관으로서 휘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족감, 즉 자신에게 대한 만족하는 것이다. 그 만족감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성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휘는 그런 성과를 내면서도 자신의 기만적 행위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

 

휘의 죽음으로 살아난 흑록은 그런 기분을 알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은 중요하나, 그런 삶이란 행복과 동시에 허무함과 후회로 가득하여 복잡한 심정이 되게 마련이다. 흑록이 가진 그런 허무함과 순간적인 위기에 놓인 생존본능, 인간은 자신의 무력한 현실 앞에 지루함을 느끼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죽음의 경계로 간다. 죽음의 공간이 펼쳐지기에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시 자신에 대한 삶의 의지가 없다는 점과 그 의지가 없다는 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린 이유는 자신에게 한가한 평온함이 상실된 셈이다. 요희전기 2권에서 유하와 사이가 서먹했던 흑록의 모습은 자신이 언제나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 있어서이다. 휘의 죽음에서 자신만 살려던 휘의 과거에서 휘는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후회가 상처가 되었고, 타인과의 관계를 더 나아갈 수 없는 벽이 된 것이다. 전쟁이란 인간을 극한의 상황과 위기를 주며, 극단적 인간을 보여준다.

 

거기서 망가지거나 망가지지 않거나, 망가지더라도 단지 어떻게 망가져 가서 최후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는 것이다. 전쟁이란 많은 인간들을 비참하게 만들어내는 재앙 중에 재앙이다. 그런 재앙에서 인간은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그런데도 전쟁을 계속 원하는 자는 있고, 그 전쟁을 계속 유지하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내는 자도 있다. 그 안에서 흐름을 따라가는 산신이나, 그 흐름을 만드는 화신이나, 또는 거기에 사라지는 인간들의 운명은 결국 불행이란 것을 알면서 그 속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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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 / 한권의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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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하면서 단순명료한 것이 인생이란 것이다. 내가 그 누구에게 물어본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무엇을 위해 지금 그 어떤 것을 하고 있는가? 구체적인 활동으로 본다면 학생이라면 공부를, 직장인이라면 일을, 백수라면 직장인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우리는 항시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놓여 있고, 그 위치에 있으면 다시 새로운 목표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나, 그 목표의 굴레 안에서 계속 회전하고 만다. 우리의 인생은 빌딩 건물 안에 들어갈 때 자동문으로 들어갈 수 없거나 혹은 손잡이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 어렵다.

 

360도로 회전하는 회전문 안에서 투명유리로 너머 보이는 출입구 안만 보다가 다시 계속 돌고 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서 위에서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하면,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인가라는 철학적인 요소로 가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기 쉬워도 그 정의에 대한 과정과 흐름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즉 결과로서 보여주는 것을 생각해도 그 결과 안에서 진행된 프로세스나 구조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최근 내 친구와 통화하면서 있은 일이다. 내 친구는 자영업자이고, 나는 월급쟁이다. 내 친구는 요새 경기가 어려워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하고, 나는 그 원인을 두고 과소소비에 대하여, 물가의 증가에 대한 인플레이션, 그 원인은 화폐의 유통이 지나치고, 특히 부동산이 근본적으로 심하다고 했다.

 

지대가 오르면 물가가 오르고, 세를 들어가는 사람들은 지대의 상승만큼 이익을 내야하며, 그 이익이 결국 소비자로부터 나오나, 지금 경기가 좋지 못함이 연쇄적으로 나온다고 했다. 그런 나의 분석에 너무 그런 쪽으로 가지 않고, 복합적이지 않느냐에 물론 그것을 염두하다고 있다고 했으나, 적어도 내가 주장하는 논리는 너무 협소하고,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복합적으로 다양한데, 그것을 어떻게 명료하게 나올지에 대해 혹은 그런 거시적인 요소에 눈을 두는 것보다 미시적인 게 옳지 않느냐고 이야기 들었다. 거기에 대하여 내 친구도 알겠지만, 개인이 사회를 바꾸지 못하나, 사회는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여 바꿀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에 대한 근본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점과 이렇게 구조적인 분석을 들어가면 이해하기 어렵고,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조건을 생각하면 사실이고, 한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전체의지가 하나의 당위성을 만들어내지만, 사회적인 재화와 화폐에 대한 수요자로서 찾아가는 사람은 결국 한정적으로 될 뿐이다. 국가의 운영에서 세금의 부족에 따른 세수의 증가, 소비세 증가에 따른 부가가치세 증가,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기업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현실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가?

 

우리는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 요약하여 말하자면 소비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다. 우리가 소비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바라는 만족을 위해서다. 그 만족감에서 누군가 이런 곳에 가고, 이런 상품을 사고, 이런 것을 보지만, 이에 달리 다른 자는 그렇지 못한다면 그로 인한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새로운 상품과 기호의 소비는 언젠가는 자신의 경제력과 시간조차 갉아먹는 해충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게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때까지 경제학적인 고찰과 사회구조적인 요소, 더 나아가 친구와 있었던 일과 개인에 대한 생활과 삶에 대한 인생고민, 전혀 고리가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어져있으며, 충분히 우리는 조금 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학생이 공부하는데 왜 공부하는지 물어보면, “좋은 대학교 가려고요”, 좋은 대학가면 무엇이 좋은데 물어보면, “좋은 기업에 취업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 돈을 벌면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 돈으로 친구와 재밌게 놀거나 여행하거나 사고 싶은 것을 사려고요.”라고 할 것이다.

 

물론 그 중에 결혼이나 가족을 위한 여러 가지 목적들이 있을 것이나, 결국 우리는 즐거움 인생을 위해 일을 하고 공부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시간만큼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그 죽음이 없다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종언의 종착점이 있기에 우리는 시작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의 연속에서 우리 시간은 매일 24시간이란 물리적으로 공통된 조건이 부여된다. 그런다고 모든 사람이 그 24시간이 같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침 일찍 우유배달과 신문배달을 하는 사람과 밤늦게까지 커피숍에 일하는 사람, 심지어 술집아가씨조차도 다 24시간을 주어져도 전부 다른 24시간을 살아간다.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 각각 다르기에 우리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거기에 따른 자신의 삶을 꾸며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지? 아니라면 만족하지 않고 불행한지 물어본다면 과연 어떨까? 나는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자연주의자에 가까운 인간이라 지금의 삶이 행복하냐고 물어본다면 행복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밥을 굶는 사람, 전쟁에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나와 비교하면 참 어리석을 것이다. 사람의 행복의 기준을 그렇게 극단적인 요소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극단적 요소를 보여주는 것이고, 비교한다면 대기업 총수 2세 내지 3세 역시 비교한다면 그럴 말을 하는 사람도 기가 찰 것이다. 누구나 자시만의 논리가 있지만,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리로서 다가가면 납득을 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내가 한국 경제문제, 그리고 해외 정치현황을 논해도 사람들에겐 그렇게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단지 자기 입맛에 맞는 이야기다. 물론 나도 그럴 것이나, 적어도 그 입맛 맞는 이야기에 대한 근본을 찾아가기 않는다.

 

그래서 강신준 교수는 한국은 포스트모던이란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그 과정이 되어야할 모던의 시대는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모던적인 요소, 즉 계몽주의에 대한 한국의 접촉 기회는 없다. 계몽주의 정신은 지식인으로 한정되고, 그 지식이 뿌리 내려 퍼지기 전에 이미 모든 주관이 객관이 되는 포스트모던이 되었다. 극우성향이 비윤리적 사이트조차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하나의 당위성을 외치는 이유 없이 그런 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에서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는가? 인간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닌 소유자나, 혹은 나처럼 다소 부정적이고 불만의 눈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삶에 항상 휘둘리며 살아간다. 학생은 정해진 시간 안에 교실에서 억지로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고, 공장노동자는 딱딱한 자세로 계속 동일한 작업을 계속 해야 한다. 같은 자세로 같은 일을 계속 하면 인간은 기계를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 조작되는 인간이 된다. 시간관념이 무척이나 지루해지고, 더 심해지면 시간관념조차 없어져 버린다. 어째보면 공장노동자가 아니지만 아침에 컴퓨터 앞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을 맞이하는 나 역시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제1의 지루함, 즉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의 시간을 그저 소모해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성에서 하나의 상황을 부여한다. 지루함이 느끼는 인간은 소외의식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넘어 육체적으로 부담이 온다. 지루한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가장 많이 오는 증세는 신경쇠약증세 내지 노이로제다. 게다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대부분 술과 담배에 깊이 빠져든다. 자신의 무력함을 순간적 자극으로 그 간극을 채우려는 것이다.

 

인간은 사고하고 생각하는 것에서 이성의 존재로 되겠지만, 이들에게 이성이란 그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정도만 볼 것이다. 감성이 메말라져 가기에 늘 머릿속은 흥분상태이며, 다른 누군가와 충돌이 일어나면 과격한 행동을 보여준다.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았기에 잠재적인 공격성향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지나친 피로와 무기력감은 죽음에 대한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은 루소가 말하는 인간이 가져야 할 자연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문명의 사회에 살게 되면서 자연적 조건을 상실했다. 루소가 인간에게 자연적 존재로 되길 바라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사회계약론>의 저술동기도 그렇고, <에밀>에서 에밀조차 자신의 판단력으로 사물을 판단하나 사회 안에서의 인간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회 안에서 자신의 삶은 자기 스스로의 자연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인간이 자연에 의지하고자 하는 이유는 왜 필요한가? 더 나아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통해 생각해보자, 마르크스는 노동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그 자체의 지나친 시간을 줄일 것을 요구했다. 어차피 물질로 가득한 문명사회에서 기술의 유지와 혜택이 없다면 인간은 1분 1초로 제대로 생활하기 어려울 것이다.

 

단지 그 노동시간을 줄여 자기만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가 영화에 대한 글을 적는 것이라, 누구나 그것이 하고 싶다면 하는 것이다. 바로 여가시간의 활용이고, 그 여가시간으로 통해 인간이 즐기고 싶은 취미와 취향,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먹고 자고 더 나아가 성욕을 지나, 여가시간을 활용하는 점이다. 동물적 본능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 본능 이외의 그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문화여가생활을 향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여가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면, 바로 인간은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가령 당신이 집안 내지 회사일로 장거리 출장을 가는데, 그 시간은 출장으로서 일을 하고 있으나, 그 시간 동안 상당히 지루할 것이다. 운전대만 붙잡고 몇 시간 동안 운전하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러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옆 자라에 대화상대를 나두거나 혹은 음악을 듣거나 전화통화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은 운전에 집중하더라도 그 지루함은 이길 수 없다. 귀로 통해 전달되는 신호가 결국 지루함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 음악도 계속 듣고, 이야기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결국 다시 지루해진다. 인간은 본능적인 생존조건과 싸우는 시간을 지나 이제 지루함이란 시간을 싸우는 것이다. 반복하여 강조하나, 그 투쟁이 되는 지루함이란 시간은 매일 24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도 없이 계속 싸워야 한다. 그 종지부는 인간의 죽음 외에는 없다. 인간의 죽음은 무엇이든지 굴레를 해방할 수 있을 것이라 개인은 여기나, 안타깝게도 그 개인의 주변은 계속 이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일한 것은 죽음이고, 죽음과 같은 취침 역시 한계가 있다.

 

취침시간이 길어지면 그 역시 지루함의 연속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 조건이 되는 것은 작가의 마지막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바라자! 삶은 장미로 꾸미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빵이란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도구이고, 장미는 생존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즐거움이 되는 대상이다. 인간은 더 이상 삶에서 즐거움을 빼고 살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처음부터 어느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비교하여 행복을 논하기가 비논리적인 이유는 행복은 잘 먹고 안전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 자신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향유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자기에게 그게 아니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늘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원한다. 단지 자기가 원하는 것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늘 새로운 기호만 소비할 뿐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바라는 삶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작가는 소비가 아니라 낭비를 하는 삶이 되라고 한다. 소비는 계속 소모하지만, 낭비는 어느 일정 순간이 되면 더 이상 소모하지 못한다.

 

우리 앞에 천해진미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해도 결국 접시 몇 개 안에 질리고 만다. 그러나 소비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것을 계속 찾아가고 구매한다. 어느 방송에 나온 구경거리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소원해진다. 기 드보르가 말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열렬하게 소비의 사회에 추종하는 이야 말로 가장 소외된 존재다. 그것은 자신이 그것이 아니고선 그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찾아가는 여정을 주어지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 사회는 인간을 계속 기계처럼 예속화하고, 지루함을 선사한다.

 

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시간적 절약을 선사해도, 시간적 만족을 빼앗아 버렸다. 아프리카 원주민 부시맨은 하루 몇 시간 일하고 일주일동안 일도 하지 않고 자기 여가시간에 즐긴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 반나절 일하고도 가난에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여기저기 본다. 그들이 즐기고 싶은 여가생활에선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도대체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지루함과 피곤함만 넘쳐 얼굴에 깊은 주름만 새겨져 갈 것이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나와 조금 비슷한 생각을 하던 자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 혁명을 일으키자고 한다면 분명 국가에 의해 체포되겠지만, 그 혁명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이런 부분은 중요하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이 18세기와 20세기를 흔들고 오늘 우리 현대사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혁명 그 자체를 성사해도, 혁명은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왜 그럴까? 답은 단순하다. 현재 상황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현재 상황을 바꾸고 난 후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적 주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것에 대한 답으로서 인간은 고민이란 것을 다시 찾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고민하는 삶을 살기보단 쉬운 답을 찾고, 간단히 지나가는 지름길을 찾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니 항상 우리는 같은 굴레에 빠져 회전문 유리너머로 보이는 출입구 안을 계속 들여다볼 뿐이다. 때로는 회전문에 의해 안이 보이고, 밖이 보일 것이다. 유리문 너머의 밖이 우리 현실인데,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래서 계속 돌고 도는 매일 24시간의 지옥에 살아간다. 인간에게 24시간은 평등하게 주어지겠지만, 그런다고 그 24시간이 주어지는 횟수는 균등하지 않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지금에 와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나, 언제나 우리는 지루함에 의해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은 과연 몇 %인가? 그 일조차 하는 사람도 그 일에 의해 지루함을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상태에 계속 몸을 맡기는 매너리즘으로 무장하기보단 더 깊이 자신의 세계를 파고들거나 그 옆으로 퍼져가는 것이 즐거운 인생이 될 것이라 여긴다. 그렇다면 빵을 먹은 후에 장미로 가득해질 인생이 될 것이고, 그 장미가 잘 자라면 자신에게 새로운 빵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길 역시 열어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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