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 - Seed Novel
맑은날오후 지음, 토브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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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 모두 장기판의 말이 모였다. 단지 부족한 점은 그 장기판의 말을 격렬하게 움직이게 할 방아쇠가 필요했을 뿐이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권은 바로 그런 순간인 것이었다. 전편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인피니티 황제와 48대 용사는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키는 이른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론의 인생과 론의 여동생인 시즈를 하나의 도구로 삼기로 했다. 문제는 자신의 손자와 손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할아버지의 큰 계획을 반대하기보단 그것을 따른다는 점이다.

 

론의 전생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통해 무의식적인 기억에 새겨진 악몽에서 모든 이종족을 죽인 것에서 시작된 기나긴 비극과 고통은 새로운 서사로 이어진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이 라이트노벨 시리즈 1권부터 3권까지 읽어보면서 지적하고 생각한 부분이 이번 4권에 확실히 드러났다. 이종족에 대한 전력을 이미 황제와 주요직에 있는 간부 내지 귀족들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종족들이 인간의 세계에 더 이상 대항할 여유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침범했고, 마왕을 죽여 인간의 세계를 넓혀왔다.

 

그렇다면 마왕군과 인간군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그것은 인류라는 조직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계속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가령 인간의 사회는 비록 왕이 존재하는 군주정이고, 하나의 구체제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문명과 산업은 다르게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피니티 국가를 산업구조를 보면 도대체 어느 체계에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농경산업인지 혹은 공업화사회인지 아니면 상업중심인지 말이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끝없이 팽창하여 토지 영역을 확대하는 점에서 이익을 계속 추구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산업의 기반이 농업, 상업, 공업이 어느 것이 될지는 모르지만 “문화발전의 과정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인간의 생식압력(인구증가압력) → 생산증강과정 → 생태환경의 파괴․고갈 →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이란 구도로서 바라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인류의 역사보단 오히려 마왕군의 역사가 길었고, 인류는 이미 균형이 맞추어진 세계에 마왕의 영역을 넘어본 것이고, 그것이 마왕군과 전쟁이 되었고, 용사는 겉으로는 인류를 지키는 수호신이어야 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영역확대로 통한 이윤 추구였다.

 

끊임없이 미지의 영역을 정복하고, 끊임없이 적군을 파괴해야지 자신에게 새로운 이윤과 특권이 부여된다. 지난 용사의 동료인 쾌속의 검인 다드와 같은 경우 자신에게 이미 많은 권력과 재력, 그리고 명성이 부여되었음에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채 심지어 마왕군의 비밀까지 알면서 론의 일행을 위기에 몰아넣는다. 그가 오직 바라는 것은 자신의 지위를 올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 4권에서 큰 사건이 되었고, 론과 루리 일행에게 큰 위기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1권에서부터 이미 장수족인 루리는 아무리 강한 육체를 타고나도 아직까지 어린아이다. 보통 사람에겐 큰 위협이 되겠지만, 인류에서 어느 정도 랭크가 되는 전사나 마법사에게 손도 쓰지 못할 만큼 약하다. 게다가 하급 몬스터 하급에게 공격당해 죽어야 했던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적 내지 혹은 적이 되어야 했던 존재들은 정의의 철퇴를 맞는 게 당연하여야 하기에 어떻게든 제거되어야 했다. 인류에겐 평화라는 이름 아래 무력으로 마왕군을 제압하겠지만, 처음부터 마왕군은 인류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러나 마왕군은 영원히 인류의 적이야 했고, 그들의 편을 들어주거나 협조하는 것은 인류의 배신이기에 언제라도 숙청당할 수 있었다. 이종족으로 이루어진 마왕군, 어떻게 보면 그들은 마왕군이란 집단적 부류이지, 그 이면에는 각 소수의 부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연합구조인 셈이다. 연합구조에서 그들이 뭉치는 이유는 자신들 하나가 보통 인간보다 강해도 용사에 비해 상당히 약하며, 이미 많은 마왕군들이 섬멸되었기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약해진 것이다.

 

물론 작품 설정상 마왕군의 간부들로 구성된 이종족 소왕을 보면 대부분 10대라는 점이고, 심지어 외모가 10살조차 되지 않을 어린아이가 있다. 마왕군에서 나이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지능과 유사하게 비례한다. 가령 루리가 장수족에서 어린아이라고 해도 보통 인간보다 오래 살았다. 하지만 루리는 보통 인간족의 어린아이와 같은 지적수준과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개의 나이가 20살이면 노인이고, 인간의 나이로 70~80대와 비슷한 점에서 장수족의 수명 역시 인간의 신체 상태에 비례할 수 있는 셈이다.

 

이종족의 관계에서 그들의 다툼은 그저 생존 그 자체에서 다툼이지 그 이상의 것을 빼앗는 다툼이 아니었다. 힘의 서열을 정해도 그 결과로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지는 않은 것이다. 야만스러운 생활방식이나, 필요이상으로 누군가 죽이지 않은 점에서 인류와 비교하여 더 야만스러운 것은 누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는 인간 그 보편적인 개인으로서 약할지 모르나, 인류의 용사와 동료들을 보면서 필요 이상으로 강하다. 정의라는 것은 그 사회의 도덕적 가치이고, 그 도덕적 가치는 권력에 의해 결정된다. 법과 제도로서 정해진 정의에서 인피니티의 정의는 제국의 번영과 평화다.

 

하지만 번영과 평화에는 기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해주는 점에서 그들의 정의를 실천에 당연히 안티테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데올로기만 합당하다면 수단과 방법이 비윤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용납이 되고, 제 아무리 부당하여 세상에 알리게 하더라도 론과 루리, 그리고 린의 입장은 여전히 반역자와 인류를 위협하는 마왕군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도 인피니티 황제와 황제 옆에서 정찰을 하는 제3황녀는 이런 행동들을 다 알고 있었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점은 그들이 원하는 바는 단순히 마왕군을 섬멸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여인처럼 론의 어머니는 이세계에서 초군주형 몬스터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인류와 마왕군이 격전을 펼쳐도 도저히 건들지 못하는 것은 바로 몬스터들이 가득한 세계다. 그곳이 만약 몬스터들이 사라지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 계속하여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이익을 추구하려 할 것이다. 문명이란 결국 인간의 손으로 자연을 파괴하면서부터 시작이다. 파괴할 수 있는 자연이란 언제나 한정적이다. 따라서 미지의 세계를 찾아 정복하면 그 순간부터 그 영역은 발견한 자의 것이고, 거기서 나온 자원과 보물은 그들의 이익이 된다.

 

이런 식으로 용사의 여정은 상부구조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되었지만, 하부구조는 경제적인 이익에 의해 부합된 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끝이 없고, 이익에 대한 열정은 태양을 도는 지구처럼 한 없이 돌고 돈다. 자연에 대한 착취와 농락이 끝이 나면(거기에 대한 흥미가 끝이 나면) 그 후에는 다른 인간들에게 전가된다. 다드와 같이 자신에게 권력과 재력 그리고 명예가 있지만, 그에게 그 명예가 한이 되었다. 서열이 낮아지는 것과 그 서열을 올리기 위해 용사 린을 위기에 몰아넣는 행위 역시 그렇다.

 

인간의 행복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보자면, 자족감이 결국 인간의 행복 그리고 그 행복을 만족하기 위한 욕망의 바탕이 된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식주를 넘어 원하는 물질적인 욕구를 초월하여 더 높은 단계의 목표다. 그 목표에 대한 열망에서 인간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할 가치와 존엄은 모조리 버린다. 하나의 이름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다드의 모습에서 역겨움을 느끼지 모른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다드와 같은 인간들은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고, 옆에 있어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일상적인 생활이 되어 그런 부류들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우리도 당연함을 느낄지 모른다. 도덕과 정의에 대한 판단에서 그 사회의 법과 제도, 그리고 그것을 합리화하도록 하는 힘의 논리가 숨어져 있다. 다드의 행위는 우리 독자의 눈으로 보기엔 악랄하겠지만, 그 인피니티제국이란 가상의 이야기 세계 속에서 당연한 행동이 될 것이다. 단지 린에 대한 협박은 드러나지 않으면 모든 것은 완벽하다. 인류에게 마왕은 섬멸되어야 할 존재고, 마왕에 협력한 존재는 모두 반역자이다.

 

반역자에게 내려지는 것은 구체제에서 참수형 내지 교수형이다. 그나마 한 번에 죽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다행일지 모른다. 봉건사회에는 화형과 능지처참 같은 잔혹한 고문과 사형이 이어진 것이라면 말이다. 이런 도덕과 정의에 따라 루리는 고문당하고, 론과 린은 위기에 빠진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와 48대 용사가 기대했던 순간이 다가왔다. 서사적인 흐름에서 론이 루리를 만난 것은 서사의 발단이 되고, 론이 린을 만나 마왕처럼 착각한 문지기를 격파할 때 하나의 위기와 전개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론의 신변이 큰 위기는 위기를 넘어 절정으로 다가왔다. 그 절정의 순간에 다시 전개와 위기처럼 거대한 서사 안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이때까지 여정을 떠난 론, 루리, 린의 여정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게 이번 4권의 주요 포인트라고 볼 수 있다. 론은 용사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인간이 아닌 자의 피를 이어받았다. 게다가 억지로 몸을 통제하고 있는 수많은 봉인들이 그의 위기로 통해 어떤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 그 열쇠의 키는 루리에게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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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스 - 세상에 마음을 닫았던 한 소년이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행복한 육아 1
버지니아 M. 액슬린 지음, 주정일.이원영 옮김 / 샘터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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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딥스>를 읽을 동안 나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고 있었다. 서로 다른 방향과 주제를 다룬 서적인 이 도서에서 뭔가 모르게 큰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딥스>라는 책은 실제 미국에 딥스라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치료한 경험을 정리한 도서로 아동정신 및 심리에 대한 연구, 치료 그리고 아동학에서 큰 역할을 하는 도서다. 이번에 내가 우연히 읽을 때 2판 39쇄라는 점에서 국내에서 상당히 많이 팔린 도서고, 미국을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준 도서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 튀어나오는 이유를 생각하자면 엉뚱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대다수 정신적, 심리적 불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시작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의 서곡에 대한 결과는 새로운 사실과 이해 그리고 판단을 요구한다. 내가 <딥스>라는 책에서 어린 소년인 딥스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그는 저자인 버지니아 교수에 의해 치료를 받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어린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 과정에 대한 노력과 고생을 부정하거나 비꼬고 싶을 생각은 없다. 그래도 내가 이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어서이다. 19세기 중후반의 내용과 20세기에 후반부 정도에 있었던 실제사건은 아무런 연계성을 없을 수가 있다. 단지 내가 조금 가십감이 드는 이유란 딥스라는 아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부분이었다. 딥스는 어머니는 외과의사이고, 아버지는 천재적인 과학자다. 가정에 시중을 드는 관리인이 배치되어 있고, 상당히 좋은 집에 사는 아이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인 중에 딥스라는 아이는 그 많은 어린아이 중에 하나이겠지만, 이 책에서는 전형적으로 아메리칸 스타일이 녹아있다. 마치 미국 영화의 히어로 장르를 보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어느 우연하지 않은 실수와 사건으로 마음을 가두고 세상과 벽을 쌓았다. 하지만 어느 계기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영리한 아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 대한 시나리오는 전형적인 대중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진부적인 스타일, Cliche로 가득한 현실의 이야기다. 사실에 입각한 에세이적인 내용이라고 하나, 그 딥스의 결말은 영재학교로 간 똑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로 된 것이다. 전형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이 보여주는 이야기구조다.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해소 구조가 잘 보여주었다. 물론 딥스는 처음부터 위기의 절정이었을 뿐이나 말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내용과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나두고 비교한 점을 내가 말하고 싶은 이유는 딥스라는 아이가 놓인 환경이었다.

 

어린 시절 어느 화재사건에 휘말려 문밖에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 내지 어머니가 원하지 않은 출산에 대한 후회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그의 집안은 충분히 부유했고, 그가 가진 마음의 상처만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이기에 심리치료가 가능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얻고 가질 수 있었다. <자본>을 읽을 쯤에 나는 어린 소년이 아침 6시에 일어나 밤까지 일하고 평균 노동시간이 12~15시간(!)이란 지옥 같은 환경이었고, 공장감독관이 그들을 만나 상담할 때 이미 어느 아이는 잠을 자지 못한 채 30시간 넘게 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두운 방에 좁은 공간에 숨 쉬기도 어려운 조건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어린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육체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딥스>를 보는 순간, 딥스보단 <딥스>라는 책에서 보이는 환상적인 아메리칸 스타일 드림이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딥스는 가정환경이 어려워가 아니라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고, 정신치료를 담당하는 A선생님으로 통해 놀이치료로 마음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렇게 될 수 있던 것도 충분히 가정 내에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딥스는 만으로 6살이 되어간다. 그리고 <자본>에 있는 가여운 아이들도 6살짜리도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딥스지만, 그는 그럴 기회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소년들도 있었고, 그런 점은 미국 현재에도 많을 것이다. 미국에서 자신의 언어인 영어문법조차 제대로 숙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런 조건에서 과학자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를 둔 영재인 딥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처음 책을 펴는 순간 정해진 스토리란 점이다.

 

딥스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통해 다른 아이들을 치료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너무 위기와 역경을 극복하는 미국인(그것도 백인) 엘리트들의 화려한 부활을 제시한 것 같다. 책 속에 저자는 그런 의도를 비추지 않았겠지만, 의도와 달리 무의식 속에 깊숙하게 박힌 책에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용은 이미 시작한 것처럼 판에 박힌 이야기다. 마음을 굳게 닫은 아이가 있는데, 그는 총명하고 상상력이 뛰어나며,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어느 구원자가 나타나 그를 재기할 수 있도록 조력해주며, 그는 결국 그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스토리에서 무엇을 더 찾을 수 있는가?

 

물론 이해하기 쉽도록 에세이 방식으로 기록한 것은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란 그 대상자의 상황과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점이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소년 중에 특히 후천적인 영향에서 부모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경우는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부모가 너무 일방적인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가 하나가 없거나 혹은 멀리 일을 하러 가야 하거나, 또는 심한 병을 앓고 있든가 하는 다양한 사례 및 케이스가 필요한 것이다. 하다못해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어린 나이에 학대를 받으면서 일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란 만약의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읽으면 큰 감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나는 딥스가 말하는 언어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6살 소년이 보는 세계란 마치 시인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하나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노래하였다. 그것도 아직 완전 치료가 되지 않은 상태이고, 이제 반 정도 되는 분량에서 딥스는 아름다운 말을 구사한다. 이게 과연 보통 6살인가? 딥스는 천재적인 판단력과 탁월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바로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진 내용이란 점에서 내 가슴에 들어올 수 있는 여운이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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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14 - 완결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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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드디어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완결되었다. 내 인생에서 만화애니메이션 세계에 빠져든 이유를 무엇이 계기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본 후 애니메이션에 빠졌고, 이후 계속 애니메이션을 감상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감상할 때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나에게 큰 동기나 지속성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에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미 전에도 혹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3가지로 구분된다.

 

1가지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가이낙스 재직시절 TVA 26편과 극장판 2판을 제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리고 그가 가이낙스에서 퇴사하여 카라라는 스튜디오를 설립한 후에 제작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마지막으로 가이낙스부터 카라까지 계속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제작한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각각의 에반게리온이란 이름으로 어느 점은 유사하고, 어느 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점에서 우리는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의 묘미를 각각 음미할 수 있다.

 

물론 <이카리 신지 육성계획>, <학원 타천록>과 같은 번외적인 작품이 있으나, 메인은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3번째의 붐을 일으킨 이 작품은 이미 하위문화를 지나 대중문화에 큰 여파를 주었다. 우리가 모르지만 이 작품에 사용된 장면 내지 OST가 대중방송에서 종종 나오는 경우가 있다. 특히 미사토의 테마송은 많은 CM송으로 나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란 매체가 단순히 하위문화로 볼 것만 아니라 하위문화 내에서 대중문화를 자극하는 하나의 모티브로 작용된 셈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효과는 애니메이션은 단지 애니메이션일 뿐이다.”라는 고정관념과 틀을 깨고 하나의 예술성을 지닌 작품으로 승화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내용이 기존의 작품들과 큰 방향성을 돌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와 똑같은 주제에 지겨움과 친근함을 동시에 느끼며 문화소비를 해왔다. 문화소비의 문제점은 바로 유행에 대한 부분인데, 유행이란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이 기존의 자신과 맞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보여준 작품적 특성은 인간의 이중적 잣대로서 판단할 수 없는 주제로 다가왔다.

 

기성세대에 대한 복종과 긍정보다는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했고, 언제나 아이들은 순종적이거나 활발한 요소를 강조하기보단, 오히려 불안함으로 매일 괴로워했고,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삶의 활력을 잊어버렸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신지의 경우, 그는 이제 중학생에서 어른도 아닌 그런다고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놓인 청소년이었다. 불안한 성장과정과 생활환경,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신지는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회 청소년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신지의 어머니는 실험으로 인해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도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현실에 남아있었다. 가족의 죽음이란 상당히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잔혹한 사건이다. 이카리 사령관이 왜 그렇게 냉혹하고 잔인하고 사람의 마음이 사라졌는지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신지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없는 자신과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는 자신의 입장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만화책을 보면 오히려 아버지인 이카리 사령관 역시 불쌍한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카리 유이가 대학교 시절, 그녀는 매우 우수하고 아름다운 대학생(대학원생)이었다. 거기서 만난 이카리 사령관은 조용하고 조용한 학생에 불과했다.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이 그에게 가자, 이카리 사령관은 유이에게 바꾸어 먹자고 권한다. 별로 말이 없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에 모든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였으나, 유이는 그를 발견한 것이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모습에서 말이다. 유이는 후유츠키 부사령관이 자신의 교수이던 시절, 교수에게 이카리 사령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난다. 그는 아주 귀여운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가 왜 귀여운 것일까? 외모로 보면 이카리 사령관은 표정이 어둡고 깔끔하지 못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유이에게 자신이 받은 음식을 교환하는 것과 교환 후 괜히 부담스러울까봐 피하려는 모습에서 유이는 이카리 사령관이 상당히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란 점을 알았다. 겉으로 활발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여주기보단 실제적인 모습에서 오히려 그가 좋은 사람인 점을 알았다. 자신의 벽에 갇혀 있지만, 그래도 유이에 손길에 있는 힘과 용기를 다해 유이와 가까워지는 이카리 사령관을 두고 귀엽다고 할 것이다. 아마 일본적인 표현으로 가와이이 미학으로 따지자면, 가와이이란 귀엽다란 말이 되나, 단순히 영어의 cute 내지 pretty 같은 의미가 아니라 왠지 보호해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곁에서 같이 지켜주고 싶은 그런 대상을 가와이이라고 볼 수 있다.

 

이카리 사령관은 이때까지 남에게 제대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후유츠키 교수가 그를 처음 만날 때 매우 불쾌한 기분을 느낄 정도로 그의 인상은 호감을 얻을 수 없었다. 단지 이카리 사령관은 유이로 통해서만 모든 인생의 구원과 의미를 부여받았다. 아들인 신지에게 그토록 질투하는 이유는 유이에게 남겨진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듯 남편과 아내는 분리된 존재이지만, 아들과 어머니는 원래 하나의 동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초호기 조종사로 가능한 것은 오직 신지이었다. 초호기 실험가동 중에 죽은 유이의 몸과 마음이 초호기에서 잠들고 있었다.

 

신지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육체와 정신이 모두 에바 초호기에 흡수되어도 강력한 힘으로 보여주었다. 그런 신지를 차갑게 구는 이카리 사령관은 오직 인류구원계획으로 유이를 만나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이용하던 이카리 사령관은 마지막 순간에 유이를 만나 깨닫게 된다. 유이의 몸에서 태어난 신지의 작은 손을 만질 때, 생명의 경이함과 사랑스러움을 말이다. 유이는 이카리 사령관에게 신지는 우리 부부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카리 사령관은 이때까지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자신이 가장 질투하던 신지를 사랑했다는 사실과 이때까지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신지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신지를 나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런 욕심도 없이 자신들이 있어야 할 그 곳으로 가고, 유이는 신지를 영원히 지켜 봐줄 것이라 한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이나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부분은 인류보완계획에서 수많은 레이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그들은 LCL 용액으로 변하게 만든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End of Eva>에서 아스카는 양산형 에바의 공격에 의해 죽는 것으로 나오나, 만화책에서는 그녀가 가장 바라는 카지의 품에 안겨 LCL 용액으로 변한다. 신지가 미사토의 의지를 이어받아 최후에 괴롭고 힘들고 아무도 잡아주지 않을 냉정한 현실에 남아있길 바랄 때 그 옆에는 오직 아스카만이 누워있었다.

 

신지는 아스카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며 죽이려고 할 때, 아스카는 신지의 얼굴을 쓰다며 주면서 기분 나빠란 말과 함께 끝이 난다. 결론이 아주 불안정하고, 마무리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채 끝난 가이낙스 시절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두고 생각해보면 만화책은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진다. 신지가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5~26화에서 자신 안의 꿈을 꾸는 모습이 나온다. 그때 레이는 전학생, 아스카는 소꿉친구, 아버지는 과묵하나 하지만 어머니를 무척하는 애처가, 어머니 유이는 활달한 정치인으로 나온다.

 

그런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신지에게 자신의 꿈은 많은 사람들과 웃는 얼굴로 하루 일상을 보낼 수 있는 평범함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에서는 신지는 그런 꿈을 꿀 수 없다. 모두가 LCL 용액을 변한 후 신지의 선택이 결국 다른 세계로 이어져 마무리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신지에게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의 기억과 신지의 기억은 전혀 다르고, 신지가 가진 시간적 축척과 타인이 가진 시간의 축척은 다르다. 원래의 세계에서 신지는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고독을 느꼈을 것이나, 이제는 아무도 그 치열한 세계를 모르고 자신만이 알기에 고독할 것이다.

 

미사토의 목걸이를 바라보며 신지는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스토리에 대해 상세히 논하기보단 작품이 의미하는 요소를 서술했으나, 만화책은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전혀 다른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에서 인류보완계획 실시 이후 TVA25~26화에서 자신의 껍질 안에서 벗어난 신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으나, <End of Eva>에선 모든 것이 파괴에 이르렀다. 그런데 만화책은 모든 것이 파괴한 것도 지금의 상황에서 새롭게 신지가 새롭게 (자신의 자아로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세상이 리셋이 되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가는 신지가 있을 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작품적 배경에서 4계절이 없고, 단지 여름만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겨울이 시작되어 봄이 오기 전에 신지는 중학생이란 신분을 벗어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살아가고,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아이도 아니요, 아이도 어른의 중간적인 경계점에서 어른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 자신에 대해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힘든 여정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디 길가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이미 과거에 알 수 있을 사람일 수 있겠지만, 그들은 신지를 모르고, 신지는 그들은 알고 있다.

 

모든 게 단절되어 새롭게 시작되는 세상, 자신의 과거의 어둠을 모두 벗어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시간에 대해 비가역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리셋도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인류보완계획이란 수단은 인간에게 태어나는 것은 결국 고통과 괴로움의 시작이므로, 삶의 시작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시작한 프로젝트다. 제레의 의지는 바로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이 태어난 이상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의 선택이고 목적이다. 그 어느 인간이 불행한 삶을 살아가라고 할 권리는 없으나, 현실적으로 인간은 늘 불행한 삶과 마주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다른 세계에 있더라도 조건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존의 세계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본래부터 불리하고 부조리하기에 새로운 조건 제로베이스적인 요건이 필요하다. 자신이 무언가를 원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할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우리는 그런 기회를 잡고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하여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현실의 냉혹함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신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없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다고 그의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게 아니라 그가 접촉할 수 있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세상은 자신의 의지로서 만나고 접촉하고 마주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 스스로를 바꾸고 싶다고 하여도 우리 사회는 그 개인 당사자의 의지를 쉽게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위치란 내가 옆에서 이야기하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방에 불과하다. 그런 상대방에 대해 마음을 나누고, 위안이 되어주며, 서로가 이해해줄 때 우리는 안정과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그 모든 인간에 대해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알 수 없다. 인간 내면에 가려진 무의식이란 세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가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처음부터 부여된 성품 내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주어진 조건에 의해 형성된다. 신지처럼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을 고려하면 당연히 그의 무의식공간에 내재된 불안과 외로움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누적된 그 시간만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시간과 방법 역시 길고도 어려운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보완계획이란 거대한 사건은 신지의 인생을 전환하게 해준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그럴 시간 혹은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흔히 에바 시리즈가 루프물이란 이야기에 대해 조금 다시 생각해보았다.

 

루프란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하며, 시간의 비가역성을 가역적으로 되돌려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면서 에반게리온은 루프물이기보단 어느 한 동일한 조건에서 여러 가지 분기점을 나누어지는 병렬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 부록 편에서 등장하는 마리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등장하는 캐릭터와 똑같은 이름과 외모로 등장한다. 그녀는 아마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한 신캐릭터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인류보완계획이 만화책에서 하나의 결과로 이어지고, 신극장판에 등장한 마리가 존재하려면 역시 루프의 결과보단 병렬적인 세계관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5~26화에서 이미 신지는 자신이 살아가야할 세상에 대해 인지했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 시점에 <End of Eva>의 파국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 보여준 Second impact 이후에 등장한 Third impact<End of Eva>에서 보여준 파국과 맞먹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신지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루프되어 갈 필요는 없다. 이미 1<End of Eva>에서 맞이한 파국을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 되풀이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이 시기적으로 <End of Eva>를 기본으로 이야기로 제작되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제작년도로 하나씩 정리한다면 루프물이란 것은 앞뒤가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리의 등장에서 그녀가 안경을 착용한 점이 유이를 동경한 한 여학생이라면, 병렬적인 흐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만화책에서 마리의 등장 없이 인류보완계획이 끝난 시점에서 루프의 원인이 되어야 할 사건이나 배경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한양대학교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의 <애니메이션 서사구조와 전략>에서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두고 TVA 25~26화와 <End of Eva>를 두고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로 분리된 것으로 본다. 실재하지 않은 것의 복제 내지 또는 실재했던 것보다 더 실재 같은 복제로 구성된 시뮬라크르(simulacre)이고, 그것이 동사형으로 되면서 시뮬라시옹(simulation)로 되었을 뿐이다. 물론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시리즈 역시 시뮬라크르로서 다가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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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2-1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게 아직까지 연재돼고 있었다니!!!! 마지막권이네요...이거 티비판 애니 마지막편 보고 멘붕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게 엊그제 같은데...
엔날 생각납니다. 글 잘봤어요~

근데, 베르세르크 완결은 언제나 날런지...1년에 한권 나오다가 이제는 소식도 감감...헐~

만화애니비평 2014-12-11 17:35   좋아요 0 | URL
오덕력이란 언제나 촉을 세우고 대기를 타야 하는 거지요..
아 아스카짜응이...흑흑
 
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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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을 위한 레퀴엠에서 신해철은 그를 두고 굿바이 미스터 트러블이라 했다. 이제 그 역시 우리에게 또 하나의 굿바이 미스터 트러블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 그들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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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9일 김해 명예의 전당에서 개최된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우연히 국내 만화 및 애니메이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부천에 위치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을 만드는 것과 운영하는 것, 게다가 한국 근현대만화역사에서 원로이신 조관제 화백을 비롯하여, 한국 만화가 중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최규석 작가, 그리고 한국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장형윤 감독까지 있었다. 세미나를 관람한 후, 우연히 세미나 발제자 및 행사를 주관한 분들과 같이 식사할 기회가 있었고, 식사 뒤 뒤풀이로 맥주를 마실 시간이 있었다.

 

그런 자리에 우연치 않게 내 왼쪽에는 최규석 작가가 오른쪽에는 장형윤 감독이 앉게 되었다. 이 두사람의 정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셀마의 단백질 커피>라는 작품이다. 최규석 작가는 같은 대학 출신 친구인 연상호 감독과 더불어 <내사랑 단백질>을 장형윤 감독은 <무림일검의 사생활>이란 작품을 보여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최규석 작가, 연상호 감독, 장형윤 감독 작품을 접해본 것은 바로 그 인디 애니메이션인 <셀마의 단백질 커피>이란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감각과 스토리 전개에서 색다른 요소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유아 내지 초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작품만 나오기에 청소년 내지 성인들을 위한 작품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이 만화책이고, 최근에 라이트노벨이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큰 시장을 열게 되었으며,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에서 그나마 한국에서 제작된 작품을 겨우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인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성인들이 감상하기 좋은 작품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점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지만 결국 시장이 형성된 공간을 고려한다면 유아계층과 더불어 성인들도 같이 볼 수 있는 가족적인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 여긴다.

 

그 중에서 이번에 내가 감상한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전체 관람이 가능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고, 장형윤 감독 작품 중에 <아빠가 필요해>와 <무림일검의 사생활>을 보다시피 그렇게 강한 충격과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보단 잔잔한 요소로서 관객에게 다가온다. 처음 <무림일검의 사생활>을 보았을 때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가 필요해>의 경우 인간여자와 늑대남자 사이에 비추어진 긴장감은 인상적이었다. <아빠가 필요해>의 경우 상영시간이 10분밖에 되지 않은 단편애니메이션이고, 캐릭터의 모습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동물처럼 생겼고, 그들은 동물이나 마치 인간처럼 행동한다.

 

우화적 요소가 매우 강한 점에서 장형윤 감독 작품은 <아빠가 필요해>와 같이 작품 내의 이름이 동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여주었다. 그런 점은 뒤에 <셀마의 단백질 커피> 중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주인공인 진영영은 원래 무림고수였으나, 죽은 후 환생하여 커피자판기로 되었고, 우연히 알게 된 혜미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커피자판기인 진영영의 모습은 영락없이 동화 속에 등장할만한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런다고 자판기라고 해도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미묘한 배치 속에 그의 작품은 뭔가 의미를 두고 있는 게 있다.

 

인간과 비인간적인 등장인물로서 과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보낸다. 그 정답은 아마 사랑일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아빠가 필요해>는 제목 그대로 아빠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고, 어느 여자가 나와 늑대에게 아이를 건네는 모습에서 가족의 재결합이란 독특한 모습이 나온다. 늑대와 같이 사는 사슴은 애인인 것 같기도 하면서 뭔가 위험에 빠진 존재로 비추어진다. 그러면서도 늑대는 자기에게 맡겨진 아이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나온다.

 

가족이란 관계에서 늑대와 사슴, 토끼와 거북이,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이고 서로 같은 조건에 있을 수 없는 존재다. 게다가 늑대는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다. 그는 자신의 일보단 결국 자기에게 맡겨진 영희를 위해 살아간다. 자신이 일을 하고 꿈을 가지고 목적을 향하여 가나, 결국 그 끝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그런 점에서 장형윤 감독이 제시하는 작품적 가치에서 잘 알 수 있는 대사가 나온다. “문학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로 작성된다. 물론 실존했던 일들을 기록한 작품도 있으나, 소설 안의 여전히 허구적 이야기다. 사실이 아니라서 허구인 게 아니라 소설로 작성되는 그 순간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 말하듯 소설은 하나의 시가 될 수 있고, 시라는 것은 그 누구의 이야기로 될 수 있는 하나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삶 그 자체가 오히려 소설보다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인간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기에 그 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대하여 과연 인간에게 자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것이다. 사랑에 대해 내가 잘 말하기란 어렵다. 사랑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여러 가지 모습을 하며, 그 사랑이란 개념을 단순히 정의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아빠가 필요해>는 가족의 구성이 이질적인 존재라도 같이 모이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이고, 가족이 없이는 자신이 어떤 출세나 성공을 하더라도 행복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가족 관계에서 모든 것이 좋은 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이란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빠가 필요해> 이후 등장한 <무림일검의 사생활>은 조금 다른 사랑의 이야기다. 차가운 몸으로 태어난 무림고수는 그저 싸우기 위해 살아왔고, 전생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혜미를 만나 자신의 생에 대한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도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단지 다른 점은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혜미라는 소녀는 원래 인간이고, 검객인 진영영은 인간이었으나 커피자판기로 환생한 존재라는 점이였고,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서 주인공 경천이는 뮤지션 지망생이었으나 얼룩소로 변한 인물이고, 우리별 일호는 본래 인공위성이었으나 소녀로 변신한 존재다. 본래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자로 변한 경천과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으로 변한 점에서 변신이란 소재가 서로 역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경천이가 얼룩소로 변한 이유는 인간인 그는 인간의 마음을 상실해서이고, 인공위성인 우리별 일호는 기계이면서 인간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다. 경천이는 노래를 하는 가수지망생이었고, 예전에 나름 실력이 뛰어나 오디션에서 최종심사까지 간 실력자다. 그러나 그는 점차 음악에 대한 진심이 사라지고, 그가 좋아하던 여자인 은진이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게다가 그녀는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서 상심에 빠지게 된다. 인간인데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이유, 그것은 경천이는 좋아하는 여자를 눈앞에서 그저 보낼 수밖에 없는 좌절감이었다.

 

그가 처음 느낀 그 마음을 담은 노래를 불렀을 때, 분명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노래는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았고, 오직 그 노래를 쫓아 온 우리별 일호라는 인공위성만이 있었다. 인공위성이었던 우리별 일호는 이미 수명을 다하였고, 그저 우주를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고철덩어리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고, 그저 멀리 지구를 바라보면서 일호가 발견한 것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고, 피아노 반주였다. 그 주인공은 경천이었고, 이미 사용할 수 없는 인공위성인 우리별 일호는 경천을 찾아 지구로 내려온다.

 

하지만 지구로 온 일호는 저주에 걸린 얼룩소를 만나고, 얼룩소는 소각자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져있고, 오사장이란 밀렵꾼은 얼룩소의 간을 노리며 공격해온다. 여기서부터 위기에 빠진 얼룩소 경천이를 일호는 만나게 되고, 단지 그의 노래만 듣고 싶다는 마음으로 경천의 주변을 맴돌게 된다. 사랑도 잃고, 가난한 뮤지션인 경천에겐 아무런 미래와 희망이 없었고, 그저 현실 앞에 무력하고, 이제는 얼룩소의 모습으로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소각자는 마음을 잃은 인간이 동물로 변하면, 그 동물을 찾아 자신의 소각로 안에 넣는 괴물이다.

 

괴물의 등장, 그리고 오사장의 밀렵행위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해 이미지로 보여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이 마음을 잃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현실에 놓인 상황이 전혀 마음먹은 것처럼 되지 않은 것이고,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지 혹은 나를 위해 누가 미소를 지어주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그런 것이다. 삶의 의지가 나를 위해서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것도 있다.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가? 그 질문에서 경천이는 오직 자신만을 사랑했고, 다른 사람에 대해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동물로 되어버렸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가지고 있고, 이성으로서 자신 안의 세계만 아니라 자신 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만물을 보고 느끼고 그리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경천이의 경우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가능했으나, 그 세계란 오직 자신안의 세계고, 남에 대한 마음을 없었다. 마음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보통의 동물들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북쪽의 마녀가 경천에게 찾아와 만약 살고 싶다면 자신을 따라 인간의 손길이 없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그렇다면 소각자와 오사장으로부터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렇게 될 경우 경천이는 영원히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하다못해 인간의 기억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려 인간의 모습을 잃은 경천이는 자신이 인간인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아닌 인간, 우리별 일호와의 사랑이었다. 우리별 일호는 사랑이란 단어를 모르고 감정도 모르는 기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남자가 사랑을 모르는 여자와 만나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사랑이란 감정에 눈을 뜬다. 게다가 우리별 일호는 수명이 이미 다 되었기 때문에 언제 멈추지 모른다. 일호의 목적은 오로지 경천이의 노래를 듣는 것, 음악이란 정말 신기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언어가 서로 다르면 이해하기 어렵고 소통이 어렵다. 그렇지만 오로지 음악으로 통해 서로 감정을 나눌 수 있으며, 같이 어울릴 수 있다. 음악의 힘이란 바로 서로 통할 수 없는 존재라도 통하게 해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음악의 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넘어 기계인 우리별 일호까지 마음을 가지게 했다. 마음을 가지게 된 일호에게 서로 의지가 가능한 존재는 얼룩소였고, 얼룩소인 경천이는 이때까지 남들에게 가지지 못한 감정을 가진다. 자신만 생각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일호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런 애절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얼룩소의 모습에서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일호와 마주하면서 일호는 자신이 로봇인데도 괜찮은지? 아니라면 가슴과 등이 거의 붙어 여자다운 매력이 부족해도 괜찮은지 묻는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으나 현실에서 보자면, 일호는 자신이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어도 좋은지? 그리고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도 좋은지 물어보는 것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이질적이고 부족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경천에게 물어본 것이다. 나란 존재, 너란 존재 있는 그대로, 그 모든 것에서 좋은 점과 더불어 불편하거나 부족한 면이 있어도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무림일검의 사생활>과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조금 다른 식으로 전개되지만, 결국 서로 다른 상대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상대방에 가진 부족한 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족한 것들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나, 인간 그 개인은 타인에 대해 척도가 될 수 없다. 단지 인간이 다른 동식물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기에 척도가 되는 것이지 어느 인간 하나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누군가 서로 드러내어 그것을 서로 용인하여 상대방을 아낄 수 있는 게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경천이가 은진에게 바라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심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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