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엘로이즈 1 루소전집 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책세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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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에서 로맨스는 존재하지만, 낭만주의적 요소는 없다. 그 이유는 연애소설에는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동경하며 정서, 감정, 개성 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단지 자신들만의 사랑만을 중요하게 나둔다. “우리 사랑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를 말이다. 하지만 낭만주의 소설에서도 “우리 사랑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에서 우리 사랑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 사랑이란 이름 앞에 더 막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이 존재한다. 연애소설은 자신들의 연애에 대한 자유이지, 그 이상의 자유는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20세기 자본주의 정착 이후 21세기에도 그런 관점은 유효하다. 사랑이란 이름은 우리가 흔히 보는 TV 드라마나 영화, 혹은 그런 소설조차도 화려한 스펙타클로 가득하다. 사랑이란 이름은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미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력에 의해 좌우된다. 특히 드라마 연출이나 또는 가상결혼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이벤트성 고백이다. 그 고백의 성사는 단순히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개인이 마음이 하나의 물질적인 존재로 통해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로맨스라는 이름이 결국 이벤트의 크기, 즉 자본력의 동원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 모습들은 이미지가 매개로 되는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을 녹아 들어가며, 남녀 간의 사랑, 하다못해 사랑 아닌 개인적 의상과 취미 내지 취향조차 거기에 맞추어간다. 우리의 마음이란 과연 어디에 있고, 무엇을 향하여 가는가? 이런 21세기 대중문화에서 18세기 문학 <신 엘로이즈>는 당연히 색다른 모습일 것이다. <신 엘로이즈>를 읽기 전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괴테의 소설은 낭만주의 소설로서 베르테르가 아름다운 여인 로테를 사랑하지만, 끝내 이룰 수 없기에 권총자살로 막을 내린 비극적 소설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에 절망하는 베르테르, 친구에게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는 그의 슬픈 편지에서 단순히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낭만주의소설로서 사랑만을 논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런 것처럼 괴테의 영혼이 되어준 루소의 <신 엘로이즈> 역시 그러하다. <신 엘로이즈>는 루소가 자신을 소재로 적은 소설이고, 자신의 주변 요소를 통해 저술한 소설이다. 주인 생 프뢰는 우수하고 열정적인 청년이고, 생 프뢰가 사랑던 쥘리는 미덕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러나 문제는 스위스인이던 생 프뢰는 자신의 신분은 소시민이고, 쥘리의 신분은 귀족이었다. 쥘리의 아버지는 귀족의 신분으로 높은 직위에 게다가 장교 출신이란 이유로 생 프뢰에 대해 좋지 않게 여겼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은 비극적인 두 남녀의 운명이 시작되는 점이다. 괴테의 소설에선 일방적으로 베르테르가 계속 친구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루소의 소설은 편지를 등장인물끼리 서로 주고받는 것이 특징이다. 소설에서 보통 등장인물이 같이 그 공간에 나와 서로 말로서 대화하는 게 일반적인 흐름이나, 여기선 자신이 그날 있었던 일이나 자기가 생각한 일에 대해 계속 편지로 주고받는다.


인간은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입으로 통해 전달하기 보단 글로 전달하는 게 더 정확하고 이성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신 엘로이즈>를 보는 순간 오히려 글은 이성으로 가득하기보단 거대한 강물이 굽이굽이 하류로 흘러가듯이 율동과 열정이 숨어있었다. 그런다고 그 열정이 너무 지나치게 강렬하게 도를 벗어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괴테의 소설은 말 하나하나가 매우 강렬했으나, 여기서는 자신의 강렬한 마음을 마치 호수에 큰 파장이 일어난 것처럼 울리게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알 수 있는 것은 <신 엘로이즈>에 담긴 내용은 쥘리와 생 프뢰라는 젊은 남녀의 사랑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시대의 모순과 루소의 사상이 담겨있었다.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대혁명이 동기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공회의 토대가 되었고, 삼권분립에서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우어진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입법권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만약 잘못된 법과 제도가 있다면 고칠 수 있는 것이 입법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보던 프랑스의 정치사회는 모순으로 가득했었다.


프랑스대혁명과 세계 혁명가의 복음서가 된 <사회계약론>보다 루소의 서적으로 사람에게 더 많이 읽혀진 것은 <신 엘로이즈>와 <에밀>이다. 게다가 <에밀>을 읽다보면 사람들은 루소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여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 알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만약 <신 엘로이즈>에 대해 조금 이해한다면 오히려 여성이야말로 남성의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 존경을 받기 위해 여성은 정숙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21세기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사회지만, 적어도 자유연애가 보장된 지금보다 그때의 <신 엘로이즈>의 쥘리와 생 프뢰의 사랑이 더욱 위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신 엘로이즈> 1권을 보면서 느낀 점은 루소가 쥘리와 주변 인물하고 대화하면서 느낀 세상에 대한 관찰이다. 그는 시민의 도덕심을 강조했고, 부당한 권력과 세견에 대한 비판을 날린다. 18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의 거만한 로코코(탐미주의)문화의 특성을 부정했으며(한 여자가 다수의 애인을 거느리는 것), 그 원인이 바로 사랑의 결합이 남녀 간의 사랑으로 인한 동의가 아니라, 여자의 동의 없이 억지로 귀족이나 부호에게 가는 것이다. 사랑 없는 결합에 서로 다른 애인을 찾는 것을 부도덕하게 여기고, 특히 쥘리의 아버지가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쥘리의 어머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다른 여자를 만나다, 이제 나이가 들자 다시 집에 온 점을 본다면 과연 그 시대의 도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루소는 본래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했고, 사고로 인해 몇 번 죽을 뻔했으며, 자연에 은둔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당시 파리 살롱문화를 비판했는지도 모른다. 그대로 <신 엘로이즈>를 읽으면 생 프뢰의 기행에서 발레지방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곳의 주인들은 손님에게 아무런 것을 바라지도 요구하지 않으며, 집안의 하인들과 식사할 때 같은 탁자 앞에 의자를 앉게 해주는 것이다. 신분의 차이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받아야할 그 마음가짐을 루소는 잊지 않은 것이다. 루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미덕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신 엘로이즈>가 단순히 쥘리와 생 프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를 메인으로 다룬다고 해도, 그 이야기의 흐름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미덕은 늘 따라다닌다. 남녀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에 대한 <신 엘로이즈>는 인간의 자연성을 늘 추구하는 것이 보인다. 쥘리에 대한 생 프뢰의 존경은 쥘리가 갖고 있는 미덕이고, 그 미덕은 꾸미지 않은 쥘리의 마음이다. 쥘리의 초상화가 생 프뢰에게 올 때 그는 그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화가가 쥘리의 있는 그 모습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 아랫부분을 정확히 달걀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두 뺨과 턱을 분리시킴으로써 윤곽은 좀 흐트러뜨리지만, 더 귀엽게 보이게 하는 그 가벼운 굴곡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아주 불만이 큽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아니더라도 참 인상적인 말이 많았다. 21세기 화려한 사랑의 미디어가 18세기 소설에서 나온 사랑보단 못한 이유는 “언제나 겸손한 진실한 사랑을 사랑의 표시를 대담하게 내보이지 않아요. 수줍게 숨기지요. 숨기기, 침묵, 거 많은 수줍음은 사랑의 달콤한 열광을 강화하고 감춰요.”라는 내용이 있었다.


미디어로 전달되는 스펙타클은 언제나 대담하게 언제나 웅장하게 언제나 화려하게 꾸미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이 로맨틱하게 보려고 한다. 물론 지금의 시대에 18세기 소설을 토대로 판단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나, 사랑이 인스턴트로 변해버린 지금의 시대에 보면 과연 어느 쪽이 더 시대착오적인가 하고 생각할 점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분명 남녀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혹은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오늘날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고 있을까?


“인간을 만드는 것이 이성이라면, 인간을 인도하는 것은 감정이니까요.” 이 말에 너무 공감한다. 우리는 감정을 너무 쉽게 드러나지만, 감정 그 자체를 가지지 않고 있다. 이성은 오직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이성과 혹은 이성으로 얻어진 지식과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보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물론 그런 일들이 용인되어버린 비극적인 세상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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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2-1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이 책...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보고 만지작 거리다가 그냥 놓고 왔는데...이 리뷰를 보니 후회가 밀려오네요...ㅜㅜ

만화애니비평 2015-02-16 18:08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바로 루소가 저술했기 때문이죠.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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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느 고위공직자 후보자가 과거에 행적에 대해 문제 삼으며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그 일이란 바로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다. 박종철이란 이름은 한국의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상처어린 이름이다. 그는 19871월 젊은 나이에 남영동 고문실 안에서 잔인한 고문과 야만적인 시대의 권력 앞에 사라져 갔다. 그의 죽음이 결국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6월 항쟁에서 이한열 학생은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

 

올해는 6월 항쟁이 발생한지 28주년이 되는 해이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거의 30년이 되었고, 30년이면 거의 한 세대가 교체한 시간과 같다. 그 시간이 지나면서 특별히 뭔가 바뀐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단지 고문으로 죽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고문을 받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아직도 그때의 상처로 인해 고통 받는 점이고, 그들을 고문하거나 고문하도록 사주하거나 또는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람들은 여전히 근엄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아마 후보자 역시 그동안 30년 가까이 그 시대의 흔적들을 남긴 역사의 산물일 것이다. 과거란 결코 자신이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 부정해야할 사실이란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이나 혹은 부조리한 일들을 외면하거나 또는 사주한 게 아니라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가 다시 30년 지난 이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현재란 결국 과거 시간의 축척으로 인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규석 작가의 <100>란 작품은 지금 다시 봐도 매우 섬뜩한 작품이다. 20096월에 발표된 이 작품은 6년이 지난 2015년 현재에도 여전히 강한 인상을 준다.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만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가서 좋은 직장만을 가는 게 목표이던 시절, 부모들의 고생만 하고 내 자식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의 가치, 아마 지금의 부모들은 1980년대의 부모보다 내 자식에 대한 욕심은 더 강할 것이다.

 

주인공 역시 그런 부모 밑에 자라 서울로 오고 선배들하고 만나면서 기존에 알던 자신의 가치관과 전혀 다름을 느낀다. 주변 선배들은 선술집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울분을 토하고,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며, 때로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 지낸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열이 올라 99에 멈추다 어느 순간 100로 된다. 그리고 그것은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물의 비열에 맞춘 <100>처럼 어떤 물질이 양적 에너지를 계속 주입하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현상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변증법으로 작용하여 수학적 수치는 아니지만, 인간에게 가해지는 불만과 분노가 바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화선이 불이 붙기 전까지 너무 많은 희생이 따랐고, 수많은 청춘들이 밤하늘의 별이 되어야만 했다. 이 작품은 이론적인 영역보단 차라리 직접 보고 느끼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성적 사고로서 세상을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나, 그 시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다. <100>란 작품은 한국만화에서 덜도 아닌 더도 아닌 그 시대 그 자체를 그린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사실주의는 일상생활 또는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가 인지할 수 없기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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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2-10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규석 작가 전작품들이 다 훌륭하더군요. 더많이 주목받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2-10 10:05   좋아요 0 | URL
예전에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2014년 행사에서 바로 제 옆 자리에 앉아 계시던데, 한국만화계에서 국내 대표만화작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대중들에게 알려져야 할 것이죠. 이 분은 만화의 에너지가 억압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라 합니다. 본 작품은 바로 그런 느낌이 강하게 실린 작품이죠

AgalmA 2015-02-1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가장 대중에 밀접한 걸 말하는 작가가 대중 호응도가 떨어지는 게 매우 아이러니합니다. 좋은 소개글 감사합니다
 
레벌루션 No.3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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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독서모임에 일본에서 유명한 문예작가 등단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리는 류노스케문학상, 그리고 나오키문학상이라 들었다. 한국에서 작가로 따지자면 <날개>를 저술한 이상이란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문학 쪽으로 그렇게 많이 읽지 않아 딱히 뭐라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오키문학상을 받은 가네시와 카즈키의 <Revolution No.3>를 보면서 뭔가 모르는 동질감 내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기본적으로 Revolution이란 혁명이고, No.3은 세 번째라는 의미로 한국 영화에서 <No.3>가 있듯이 아마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무시당하며 살아온 별 볼일 없던 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세속이 이리하든지 혹은 세견이 저렇게 흘러가든지 No.3들도 사람이고 자신들도 살아갈 권리도 있고,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들은 단순히 반 재미나 오락을 즐기기 위해 삐뚤어진 자들이 아니었다. 이 사회의 모순과 억압, 그리고 문제들이 만들어낸 이방인들이었다. 마지막에 왕국에 나타난 나그네가 춤을 추자 왕이 다리를 자르고, 머리로 율동을 하자 목을 베고, 이제 마무리로 눈 커플로 박자를 맞추려고 하나 인간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면 살 수 없다. 그렇게 특이한 자들 혹은 이방인들은 이 사회로부터 제거되거나 추방당한다.

왠지 이 이야기들은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나 역시 이방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에 나온 고등학교 친구들 좀비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나 나름 사회적으로 비주류에 위치해 있고, 대중이란 문화적인 권력집단과 어울리지 못하는 부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에 대해 오타쿠라고 한다. 아니 오덕이나 덕후라고 하며, 마치 반사회적 인간상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현실과 괴리된 인간으로 마치 신기한 인간인양 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해본 경험이 있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새겨진 거대한 베개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런 베개를 들고 다니는 어느 사람이 방송미디어의 출현으로 마녀사냥을 당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만화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비주류적인 문화를 즐기지 않고 매이처럼 TV 연예방송 프로그램을 본다면 남들과 어제 TV를 보니 1박 2일이 이렇고, 무한도전이 저런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Revolution No.3> 작품 내에서 주인공처럼 나 역시 TV를 보지 않는 사람이다. 이미 TV를 직접적으로 보는 것을 그만 둔지가 10년이 되어간다. 드라마가 무엇이 유행하는지 가요에서 아이돌스타가 누군지 모른다.

여름방학 2부에 속하던 시기, 주인공이 스토커를 찾아내던 시기, 친구 누나의 친구가 방송국에 취직할 때, 그 누나가 주인공을 의아하게 본 것과 마찬가지다. 반드시 세상에 흐름에 따라야 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지만, 세상은 강요한다. 마치 거기에 해당되지 않은 인간들은 이상한 존재로 낙인을 찍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을 읽어보면 작가가 지금 일본 젊은 세대에 대한 의식에 대한 계몽이란 비판적 의식은 없다. 단지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이란 것을 그들의 입장이 되어 바라보고 있다.

주인공들을 보면 참으로 다양하다. 주인공은 우수한 학생이나 중학교 2학년 시절, 꽃뱀에게 당한 것도 모자라,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이혼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나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본지가 옛날이라고 한다. 결손가정이나 편부모 게다가 불안한 심리가 그를 우수한 중학생 영재에서 골칫거리 고등학생으로 변하게 했다. 옥상에서 담배피고, 남의 여학교에 가서 소동이나 일으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 소동은 생각하면 무엇인가 그들이 틀렸기보단 그들이 틀린 짓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현실에 대한 씁쓸함이 가득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공부를 너무 못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이 8%까지의 학교는 아니나, 나는 내가 다닌 학교에서 성적으로 뒤에서 8%보다 높았다. 공부를 못하고, 운동도 못 하고, 성격도 활달하지 못한 시기이니 얼마나 보이지 않은 차별을 당했겠는가? 학교수업 시간에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은 선생에게 그저 무시대상이고, 그것이 학생들 사이에도 이어진다. 은근히 공부 못 한다고 대 놓고 무시하지 않지만, 뭔가 언저리에 조금 불쾌감이 자리 잡은 것은 있다. 그나마 나는 나은 편이다. 작품에서 재일조선인 순신이, 그는 다른 것은 참아도 자신의 인종차별을 용서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존경하는 그로서 일본이란 사회의 불평등을 고스란히 자신의 얼굴에 훈장처럼 새겨놓았다.

인종차별 발언에 눈 옆자리에 새겨진 상처부분이 붉게 변하는 그는, 상당히 우수한 인재고, 항상 독서를 하는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입만 살고, 곡학아세로 지식 팔이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지켜야할 선도 기준도 명확하게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방인인 자신에게 일본사회는 온통 적이었다. 적이 아닌 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이다. 주인공처럼 파탄 난 가정, 혼혈인 아기, 오키나와 출신 히로시 같은 애들이다. 하다못해 운이 지지리도 없는 야마시타도 마찬가지다. 사회에서 소외받은 이들에게 처음부터 이 사회는 따뜻한 손길을 주지 않았다.

단지 거기에 불만만 토로조차 할 수 없던 문제아들이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이 몰로 선생, 자신의 어머니가 히로시마 원폭 이후 자신을 출산하여 원폭피해 증세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혼 이후 아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은 주인공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어온다. 어른들의 세계에 흔히 말하여 꼰대정신, 내가 살아온 것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도덕을 논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요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몰로 선생과 달리 체육선생은 그런 권위적인 의식만 가진 꼰대적인 인간상이다.

왜 문제아들이 문제아로 될 수밖에 없는지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자라온 성장배경이 다르니 생각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적어도 진짜 학생들을 생각한다면 학생에 대해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몰로 선생에게 진심으로 깍듯이 인사를 한다. 人間이란 단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람이란 존재가 하나의 자연적으로 존재한다면 그는 자연적으로 인성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러 가지 배경적 조건이 따른다.

인간이 형성은 선천적인 불평등보단 오히려 후천적 불평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태어날 때 다른 종족이라고 사회적인 인식과 수용성에서 열린 사회였다면 그 당사자가 흑인이든 조선인이든 여자이든 각가지 사정 따위는 이유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좀비스로 불리는 이 작품 주인공들은 같은 고등학생인데도 차별을 당하고 있다. 오직 사회적 규범이 정하는 공부나 또는 이 사회의 세속적 가치만 따르기를 바라는 가치관으로 그들에게 미래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몰로 선생의 가르침은 큰 충격일 것이다.

가령 열등하거나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우등한 존재나 같은 부류만 모이게 되면 그 사회란 도태된다. 과연 그렇다. 열등한 인간이라고 하여 그들이 진짜 열등한가? 그들의 열등한 선천적 조건이 아니라 후천적인 조건이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인간의 불평등이란 선천적 조건보단 오히려 후천적 조건으로 더 가중되는 셈이다. 그 사회의 도덕성에서 불평등은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결정지게 되며, 그 불평등이 하나의 정당성이 부여되는 사회는 정신병자들이 정상인들처럼 돌아다닌다.

마치 이노우에 누나의 친구가 시바키란 대기업 인사부장에게 스토킹 당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시바키 같은 인물, 즉 꼰대적인 발상으로 자신들의 가치관이 아직도 옳다고 우기는 부류는 우습게도 이 소설에서 제시한 것처럼 혹은 일본 현재나 우리나라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공감보다 단지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정신병자 내지 사이코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이것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인공들은 성화여고를 찾아 간다. 성화여고 축제 때 그들 학교에 침투하여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자신들에게 돈도 권력도 없다. 그러나 사회는 돈과 권력이 있는 남자들이 그에 맞춘 여자들과 계속 이어간다. 그렇다면 가지지 못한 남자들은 돈과 권력이 있는 여자와 맺어지는 게 정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들의 열등함과 여자들의 우등함을 섞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가능하려면 마음이 통하든지 또는 호감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성화여고 축제 때 좀비들은 좀비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해 침투를 시도한다. 1년차와 2년차는 실패하고, 3년차에 비로소 성공한다. 그 성공에서 성화여고의 여학생들이 그들을 인정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낭만적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낭만적인 게 단순히 연애적인 요소만 생각하는데, 물론 연애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위험하고 어째보면 실패의 아픔도 존재한다. 그래도 다시 도전하는 모습에 좀비들은 아주 낭만적인 녀석인 것은 분명하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은 세견에 대한 도전의식, 그리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 상처투성이 영웅, 최근 여자들은 머리가 단단한 꼰대인 체육선생이나 시바키 같은 꼴통 마초들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용기를 내어 위험을 무릎 쓰고 도전하는 남자라면 봐줄 것이라 생각 든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꽃을 찾아가는 것은 나비이지 꽃이 나비로 가지 않는다. 비록 자신에게 도달하기 전에 볼품이 없고 망신창이가 되더라도 말이다. 단 조건은 아직까지 그런 낭만적인 여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전제 아래서다. TV 드라마나 연예프로그램에 내가 거짓된 낭만에 회의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은 방송으로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낭만적인 상황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상의 시나리오로 작성된 낭만이고, 자신이 만든 낭만이 아니다.

감정을 소비하는 것이 현대사회에 종종 보이는 스펙타클이다. 나라는 존재는 결국 스펙타클의 열렬한 추종세력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세론에 빠져가는 것이다. <Revolution No.3>에서 혁명은 단순 좀비들의 반란만이 아니다. 그 좀비의 반란은 그들의 일상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을 철두철미하게 침투하는 현실이다. 책에서 주인공이 말한 것처럼 작가는 아마 1960년대 말의 일본에서 베트남전쟁 반전운동이나 혹은 야스다강당 사건 것을 인지하는 모양이다.

당시 저항에 대한 의식에서 저런 일들로 인해 뭔가 고민이 있는 청춘이라면 분명 통하는 게 있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서로 간의 이야기가 연결된다. 하지만 일본 사회의 경제 고도성장 이후 거품경제 붕괴는 일본 사회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빈부격차와 더불어 핵가족화 등과 같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런데 그 문제는 단순히 학생운동으로 하기에 뭔가 새로운 사건을 만들 수 없었다. 단지 사회에 대한 부조리나 괴리는 일상에 마주치는 사건에 의해 좌우된다. 주인공이 사건을 좋아하는 것은 뭔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바꾸고 싶은 충동이 숨어 있다. 자기의 주변에 사건이 끊이지 않고 거기에 도전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최근에 한국영화 중에 한국전쟁부터 시작하여 근대화와 산업화를 다룬 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서 웃기는 점은 우리가 고생했으니 미래는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지금 한국에서 더 심각한 빈부격차로 이어졌다. 전쟁이후 거의 모두가 배고픈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 사정이 좋아졌다고 하나,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는 부류는 여전히 많고, 그들은 사라져 간다. 그런 것을 두고 사회적으로 감정소비만 하고 뉴스이슈로 사라질 뿐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 생각하면 아등바등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보내는 우리 역시 그런 원인자인데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Revolution No.3>의 주인공들 수준까지 비주류는 아니나 그래도 비주류로 살아왔고, 지금도 비주류적인 요소가 있다. 꼴통학교의 순신이가 <논어> 같이 보통 사람들이 읽지 않는 서적들을 보는데, 나 역시 보통 사람들이 읽지 않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같은 것을 읽고 있다. 세견에 따라 몸 사리는 것엔 어쩔 수 없으나, 거기에 놀아나는 것은 결코 좋은 삶의 방식이 아니다. 차라리 특이영역을 가져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자신이란 실존적 영역을 찾아가는 게 바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존주의 하니 어느 영화에서 등장한 사람이름이 생각난다.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진 어느 대학생의 마지막 비명처럼 우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꼰대들의 세상에 살아야 하는 것일까? 결과론적으로 현실의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그 모순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꼰대들은 여전히 딴청을 피운다. 이런 사회에 <Revolution No.3>은 소설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보단 이런 문제에 대해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을 유도한다. Revolution은 만드는 것은 자신 스스로의 사고 자체를 Revolution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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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 2 - Novel Engine
히로사키 류 글, 파세리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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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 1권을 이어 2권을 읽어보았다. 1권에선 신선하고 상당히 리얼리티한 요소가 반영되어 일반적인 라이트노벨과 다르다는 점이 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2권은 약간 설정이 조금 현실성을 고려했지만, 상황전개는 비현실로 가게 되었다. 물론 라이트노벨이란 장르가 경소설로서 재미 내지 오락을 제공하나 작품 배경이 현대 일본이라면 현대적인 요소가 당연히 반영된다. 상당히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주인공 타카시, 그러나 그 주변에 포진한 여자 인물들이 비현실적 설정 내지 혹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게 특성이다.


기본적으로 어머니가 40대 주부에서 상당량의 수명을 소모한 뒤로 17세가 되고, 할머니가 죽기 전에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17세 되었다. 유카는 집에서 나오지 않은 히키코모리고, 타카시의 여자친구인 메이코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뒤로 새어머니가 17교에 의탁한 여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권에서 17세의 타카시가 17세의 어머니, 할머니, 여자친구와 조우하게 된다. 바로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는 인간의 나이 17세가 과연 어떤 상황을 맞이하고, 자신의 삶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를 다룬다.


1권보다 2권에서 그런 점이 비현실적인 요소로 가는 것은 타카시 자체는 현실적 판단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나 주변인물들의 비현실적 상황과 현실적이지 못한 행동들이다. 유카의 방에 들어간 타카시는 유카가 다른 여자아이와 다른 방식으로 산다고 하나, 유카의 방이 어지러운 모습에서 쌓아둔 책 사이에 여동생과 오빠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책이 나온 것이다. 유카가 바로 친오빠인 타카시에 대한 오빠 여동생의 관계 이상으로 오빠를 원하는 것이 보인다.


1권에서 타카시의 어머니인 카즈미가 타카시에게 충고를 해준 내용이 있다. 만약 타카시의 성욕이 주체하지 못하여 그것이 유카에게 성적 욕망을 느낀다면 그것을 여동생이 아니라 본인인 어머니에게 해달라는 부분이다. 물론 타카시는 그럴 생각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겠지만, 작품 내에서 여동생 유카는 분명 타카시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점이다. 타카시에게 어린 시절 희미하게 아버지의 기억이 남아있지만, 유카에게 아버지의 기억이란 없다. 추억이 없는 것에서 유카에게 아버지는 단지 있었다고 여긴 인물이지 그 이상으로 다가올 수 없다.


타카시의 아버지가 죽고, 타카시의 할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할머니 와카바의 허전한 마음하고 유카가 느끼는 마음은 다르다. 그래서 유카에게 타카시는 오빠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아빠같은 인물이다. 타카시는 여전히 1권부터 그랬던 것처럼 2권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무리 어머니가 다시 17세로 되어 아이도로 활동하더라도 그가 일하는 이유는 가정형편이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카즈미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타카시와 유카에 대한 현실적인 경제문제부터다.


현실적 상황에 대한 비현실적인 상황전개가 이 작품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2권에서 어머니의 소속사 변경, 그리고 메이코가 그동안 계속 사이가 나쁜 새어머니 줄리아에 대한 사연은 조금 아쉽게 여겨진다. 이른바 문학이나 영화에서 사용되는 cliche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17세의 줄리아는 예전에 메이코의 아버지와 사랑하던 연인 사이다. 하지만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야기로 인해 비극적으로 이별한다.


메이코의 어머니가 죽고, 줄리아의 회사가 망해 다시 찾아온 지난날의 사랑에 대한 회한, 그런 와중에 불의의 사고로 다시 태어나던 줄리아, 1권에서 메이코의 시선이 2권에서 이런 방식으로 복선이 드러난 것이다. 비현실적인 조건이 너무 상투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해결한 점이 아쉬운 것이다. 물론 타카시가 보인 결단력과 행동은 작품 전개상 제목은 어머니가 메인으로 나오나, 어머니라는 명칭은 결국 카즈미가 어머니이기 위해 그 어머니로서 성립되어야 할 대상이 타카시다.


타카시의 어머니인 카즈미가 17세가 된 것처럼,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타카시로 시작하여 타카시로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평범한 모습에서 주변 상황은 비현실과 현실적이지 못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의 현실성과 타인이 비현실성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관계에서 상황정리는 너무 아깝다고 할까? 물론 타카시의 시선으로 보는 현실적 조건, 가정환경과 가족관계, 더구나 메이코의 상황은 그에게 계속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시선으로 보기보단 가족간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1권 리뷰 때도 생각했지만, 가족의 파편화와 재결집이란 모티브는 우리 일상과 아주 밀접하다. 현실에 대한 관찰은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제대로 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적 상황과 조건 그 자체가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현실의 상황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거나 또는 상황적인 요소로 보이는 것으로 리얼리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 엄마가 17세가 되었다>는 분명 비현실적인 상황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르 전개하나 그 이야기의 결론은 언제나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 라는 타카시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가족에 대한 인간의 마음은 어느 특별한 문화권이 아닌 이상,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17세 때 아버지와 사랑의 도피를 한 어머니, 17세 때 할아버지와 결혼한 할머니, 그들의 17세는 지금 타카시의 17세와 다르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은 분명 비현실적일지라도, 타카시가 살아가고 있는 17세의 현실은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나, 2권에서 보이는 것은 당신의 17세는 누군가 진심으로 사랑했었는가? 라는 것이다. 타카시가 바라본 17세라는 시기란 사랑이란 이름으로 맺어진 연인과 가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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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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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블로그 활동을 하다가 이웃 분의 포스팅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때 포스팅 하던 주제는 서울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인상파 화가 전시회였다. 이때 전시회 주제에서 메인 그림으로 소개된 그림이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검은 장갑에 양산을 잡고 멀리 떠나는 배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이탈리아 인상파 화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에서 <작별>이란 그림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의상에서 느껴지는 색의 미학도 그러하나 작은 손에 잡힌 양산, 게다가 살짝 접힌 손가락, 얼굴은 옆에 뺨만 보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상당한 품위를 가진 우아한 여성이란 것을 알게 해준다.

특히 등을 반득하게 피며, 검은 여기를 내뿜는 배를 바라보는 그 여성의 눈가에선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마 떠나보낸 사람은 사랑하는 남자인 것 같았다. 그녀의 손에 잡힌 양산이 그런 것 같았다. 뾰쪽한 것을 잡은 여성의 손, 그것은 아마 남성의 상징인 남근인 것처럼, 사랑하는 남자를 태운 배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들을 이래저래 살펴보다, 그 아름다운 선과 색, 그리고 따뜻한 색감들은 나에게 큰 인상을 건네주었다. 미술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없다. 단지 그림을 처음 보며 로코코의 탐미주의적인 요소의 여성도 보이고, 고전주의적인 의상을 입은 여성도 보인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그려진 여성들은 대부분 우아한 아우라를 내뿜는다.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동기는 그의 작품 중에 <꿈>이란 그림이 있다. 어느 한 여성이 벤치에 책을 올린 채 정면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은 없고, 단지 지금 나의 고독인지 혹은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의 드레스와 장갑에서 보이는 우아한 몸짓에서 어떤 생각에 골몰히 빠져 있는 그녀의 모습은 낯선 거리감과 동시에 상당한 매력이 넘친다. 책을 읽는 여자의 느낌인가?

이 그림이 새겨진 어느 신문기사에서 나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란 소개를 받으면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의 겉표지는 에스파냐 출신 화가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의 <무도회 이후>라는 작품이었다. 무도회에 권력과 재력이 있는 속물적인 인간들 사이에 있기보단 차라리 자신의 침실에서 조용히 책을 잡는 여자의 모습은 매우 도발적이면서 자신만의 공간을 찾으려 한다. 물론 그 기사의 소개에 나온 사진으로 매릴린 먼로가 아주 관능미가 넘치는 육체인 상태에서 책을 읽는 것도 있으며, 역시 내가 이끌린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꿈>이 있다. 개인적으로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분수 곁에서의 기다림>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읽는 것은 책을 읽는 여자에 대한 책이다. 개인적 취향보다 소중하지만,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를 읽으면서 생각 드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여성에 대한 느낌이다. 우리 사회에서 책이란 흔한 물건 중에 하나였지만, 19세기까지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은 흔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에 따라 인쇄술이 대량생산과 대량판매로 인해 유통되었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부류도 대다수의 대중보단 오히려 시간적 여유가 있던 중산층 이상의 부류였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20세기 이전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성들은 대다수 어느 정도 경제적 지위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가능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자본>을 본 것처럼 가난한 여성 아니 가난한 남성 그 모든 사람들이 일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으로 정착되던 시기는 아직 130년도 되지 않았다. 독서를 하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에서 사색을 하는 공간이다. 그 자리에서 정신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경제적 조건, 시간적 여유, 공간적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런 조건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다. 물론 이것조차도 호혜일 수 있다.

여자들이 왜 책을 읽으면 위험한가? 책에는 각종 지식이 담겨있고, 인간의 사유를 넓혀 준다. 고대사회부터 중세사회까지 글을 읽고 쓰는 것은 권력계층이 가진 특권이었다. 즉 인간의 언어를 입으로 말하는 것은 가능해도 글로서 쓰고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식으로 얼마든지 현실의 문제를 알 수 있었고, 자신의 통치를 해주는 관리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지식이 대다수 민중에게 퍼지는 순간, 부당한 현실에 반항하고 지배계층에 의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민중 특히 여성에게 책은 금물의 대상이었다.

오직 볼 수 있는 것은 성경과 신학서적, 그것은 당시 중세유럽에선 신앙이 정치적인 제도와 권력을 좌우했기 때문에 종교와 신학에 대한 이념은 결국 지배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더 강력하게 해주는 장치인 셈이다. 만약 여기에 정치학과 사회적, 그 밖에 많은 서적들을 여자들이 읽는다면? 남성과 똑같은 수준의 지성과 이성이 생기는 것이다. 작가인 슈테판 볼만은 이런 점을 잘 지적했고, 특히나 동양에서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실천한 이유도 진시황 자신의 통치방법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당대 지식인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지식인들이 없어지면 자신의 정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없어지고, 책까지 불태우면 앞으로 반대할 사람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책을 읽는 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얻음으로서 현실의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는 시민 내지 지식인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아쉽게도 그런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은 권력을 지닌 남성이었다. 가난한 농민과 여성들은 뒷전이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대다수 사람들 혹은 지나치게 민감한 여성들은 남녀차별로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더 나아가 계급에 대한 차별이었다.

그런 차별이 점점 와해되어 가던 시기가 바로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부터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혹은 근대사상과 근대정치의 틀을 만든 것이 프랑스대혁명이다. 전 근대적인 봉건왕조시대를 넘어 이제 다른 정치체가 열린 것이다. 이때 프랑스대혁명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보수보다 급진까지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들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자크 루소를 존경했고, 그의 저서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국민공회와 헌법체계를 만든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루소의 서적인 <사회계약론> 이전에 유명한 서적으로 <신 엘로이즈> 또는 <줄리>라는 서적이 있었다.

낭만주의 문학이 도래하고, 루소를 이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열광적인 사랑과 더불어 시대적 문제를 공격한 위험한 책이었다. 귀족이나 혹은 상류계급의 여성과 그녀를 사모하는 계층이 남자의 사랑은 낭만적으로 다루었으며, 끝내 이루지 못해 영원한 이별로 긴 여행을 가거나 때로는 베르테르처럼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눈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는 당시 귀족이나 상류여성 또는 막 태어난 지식인 여성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프랑스대혁명 여걸 롤랑 부인 역시 귀족의 아내지만, 루소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그 외에 수많은 여성들이 루소의 책에 흠모를 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19세기 자본주의가 진행되던 시기 책을 읽은 시간과 여유가 부족했다면 18세기까지 책 그 자체가 귀했다.

책을 생산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고, 그 책을 얻을 수 있는 경로 자체가 한정적이니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곧 특권이었다. 책을 소장하는 것은 곧 그의 지식의 보고이며, 또한 그의 지식은 권력이기도 하다. 어떤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지식이 없으면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 소설의 등장과 보급은 엄청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처음 보고 놀랐지만, 18세기 전후로 책 1권이 보통 가족들이 2주 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치란 점에서 책이 귀하고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단 번에 알았다. 하지만 이제 책은 점점 보급되면서 우리 일상생활에 녹아들어가게 된다. 여성들은 처음에 내부 활동만 하게 되면서 순종적인 인생을 강요받다 어느 순간 그 내부 생활에서 책으로 통한 여가생활을 가지게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존 지배계급과 그 지배계급에 의해 다시 여성을 지배하는 (권력층)남성과 남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책 읽는 여자가 위험한 이유는 아마 그런 기존의 이념에 순응적으로 따라가는 여성이 아니라 거기에서 탈피하거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려는 의지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책을 읽는 여성들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자신으로서 있는 모습이 많다. 곧 나는 나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의지와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후기에도 그런 진보적인 남녀관계에서 추천의 글을 남긴 문학가 엘케 하이덴라이히는 여성의 자율적인 인간을 완성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여자들은 표지의 글처럼 책과 나 사이에 당신이 들어올 빈 자리가 없다고 하나, 막상 그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추천의 글을 남긴 엘케 여사의 글을 보면 책을 읽는 여자는 남성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성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근대사회나 근대사회에서나 남녀의 결혼문화에서 여성에게 결정권은 없었고, 그저 시대의 도덕에 따라 흘러간다. 이제는 그녀들이 선택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이 책을 처음 소개받은 기사에선 이 말이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책 읽는 여자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녀들은 좀 더 영리해지는 것도, 이기적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이여, 나이가 들수록 여자로부터 고립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한 권의 책이 돼야 한다. 여자들은 내 남자가 아직도 읽을 게 있는 책이기를 원한다.”

책을 읽는 여자들은 결국 책을 읽는 남자, 아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남자를 원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공유하고, 책으로 혹은 자신의 판단으로 얻은 그 무언가를 서로 나눌 수 있을 때 뭔가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잘 지적하다시피 21세기 시대는 영상의 시대다. 문자문화의 이전 시대는 종교의 관념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지배했지만, 다시 이제 이미지의 세계가 인간의 관념을 지배한다. 그런 와중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속의 흐름에 부유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자신의 항로를 찾아가는 사람일 수 있다.

확실히 밖에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는 여자들은 뭔가 색다름이 있어 보인다. 물론 책이라고 하여 수험서 내지 교과서, 자기계발서 같은 단순히 자기의 이익을 위한 책까지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양식, 당장 돈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찾아 자신만의 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런 매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개성이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이 중요한 것 같다. TV 내지 미디어로 익숙한 삶을 살게 된 현대인들은 도저히 각자의 개성을 알 수 없다. 흔히 미팅이나 또는 모임자리에 가면 대다수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들이 가진 공감대가 잘 형성된다.

왜냐하면 항상 인기 있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이제 막 개봉한 영화를 대형극장가에서 보고, 어제 재미있는 쇼 프로그램을 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은 같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문제는 거의 대다수가 같은 것을 돌고 돌며 이야기하기에 때문에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이야기의 형태는 다르게 진행되어도 결론은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후크 송처럼 들린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취향을 읽거나 혹은 새로운 재미를 찾아 다른 분야의 서적도 읽어본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해보았다. 최근에 읽어본 <서재에 살다>라는 책은 19세기 조선시대 북학파 및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인생과 업적 그리고 서재에 대해 다룬다. 이때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에 전시된 것을 알았고, 간송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다. 지방에 거주하는 내가 서울 쪽에 세미나 참석 후에 잠시 성북동 일원을 거닐고 있을 때 옆에 있었던 분이 이야기해 준 것이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로 통해 새로운 문화와 가치 그리고 다른 재미와 세계를 찾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독서모임 때 새로운 지식과 이야기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로 인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며, 서로 공감도 하기도 하나, 때로는 전혀 다른 반응이 오기도 한다. 그런 타인과 공감과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매력이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성이 있다면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이질적인 존재 즉 책 제목처럼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로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책을 읽지 않는 여자들이 사는 세계는 더욱 위험하다”라고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세상의 물결을 무시하지 못하지만,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남겨둠으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다. 그런 선택을 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을 그저 그래 다루지 않는다. 그 남자가 언제나 한 권의 책이 된다면 자신의 선택지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고, 그것이 그녀들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성욕을 가진 존재다. 프로이트가 남자들은 성욕에 빠진 존재라고 하듯이 나 역시 남자라서 성욕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남자로 태어나 성욕을 가진 평범한 남자라도 여자에 대해 생각하면 성욕의 대상으로 살 수는 없다. 물리적으로 체력의 한계가 있고,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욕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가진 상대만이 정신적이나 육체적인 사랑을 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인간은 한가로움을 추구해도 지루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내가 보통 TV나 유행에 쫓는 여자들에 대해 눈이 갈 수 없는 것은 내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들과 있으면 언제나 지루한 기분만 느낄 것이다. 책을 읽지 않은 여자들만 있는 세계가 위험한 이유는 나라면 그 세계는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라 말할 것이다. 그런 지루함 세계에 있는 여자들은 성과 이름, 얼굴과 형태만 다를 뿐 그 속은 어느 누구 하랄 것 없이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책을 소개해준 분은 분명 여성인 것 같았다. 내가 이 책을 소개해준 것에 대한 소감을 덧글로 남길 때 그분이 나에게 답변내용으로 “요즘은 정말 지성과 감성이 이성이 고루 분배된 여인은 드물죠, 그림도 그렇고. 문학 속 인물들 그렇고, 살기가 바빠서 라고 탓하면서” 말이다. 물론 여기에 기본적인 품위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이란 게 개인적인 소망이다.

 

어째든 책을 읽는 여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그녀들이 위험하다고 하나, 그녀들이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위험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은 자신만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는 정신적인 교감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남자들이 단순히 그녀들을 보는 시선에서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파울로와 프란체스코>처럼 있기보단 차라리 그녀의 손에 든 책에 대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그녀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이 될 듯하다. 물론 이 시대는 그런 그녀들이 존재하게 해주는 것이 정말 힘든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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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통해 주루룩 여성들을 감상용으로 보는 시점이 묘하기도 한데, 아름다운 걸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마릴린 먼로 책 읽는 사진 종종 보게 되면 들고 있는 책이 또 화제 아니겠습니까? 아니, 조이스 <율리시즈> 의식의 흐름을 저렇게 탐독하면서 읽을 수 있다니! 거의 다 읽었기까지! 여기 올려진 사진도 거의 막장 페이지가 보이려 하잖아요ㅎ...마릴린 먼로가 무슨 책들을 읽었나 평전이 읽고 싶어질 정도 ㅎㅎ

만화애니비평 2015-01-21 23:13   좋아요 0 | URL
저도 먼로가 저런 책을 읽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했습니다. 육체적 미, 즉 남성의 눈을 자극하는 글래머에 저런 지적인 매력이라니..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묘한 게 좋습니다. 오덕의 특성상..후후후

AgalmA 2015-01-2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묘한 걸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요ㅎ
간송미술관 성북에 있을 땐 일년에 딱 두번 일주일밖에 개방이 안되는 데다 건물도 일제시대 건물이었나 해서 괴상했죠. 그림을 무슨 죄수들 감옥 들어가듯이 줄줄이 보는 희한한 상황이었는데 ㅎ 동대문 상설관이 생기니 여유부리며 더 안가게 된다는 함정 ㅎ;
김홍도<미인도>를 아직 실물로 못봐서 간송전시는 늘 눈여겨보긴 합니다. 모사로 그린 실물크기액자만 봐도 모나리자 저리 가랄 아우라예요.
서울 오시면 이제 간송미술관 편하게 보시겠네요~

만화애니비평 2015-01-21 23:41   좋아요 0 | URL
요새 미디어는 그랗게 만들죠?
간송은 성북동 지나가면서 본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죠. 서울은 진짜 볼 게 많아 놀랬습니다. 부산에 살면 서울 사람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들이 있지만, 문화적 공간이 부족하죠. 저 같은 특이종자는 아무래도

예전에 서울에 페루애님과 막걸리 마신 적이 있는데, 다음 기회에 동대문 체크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전시보단 제가 남도에서 해남 윤선도 녹우당, 강진 정약용의 다산초당, 정약용의 외손자 방산 윤정기가 기거한 명발당도 가봤는데, 역시 실제 보는 게 좋죠.
다산초당에서 바라보는 강진포구....참...좋죠...

AgalmA 2015-01-22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저 위 기사 ˝남자들이여, ... 여자들은 내 남자가 아직도 읽을 게 있는 책이기를 원한다.˝ 작성 글은 매우 편협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권신장이 많이 돼 그것에 대한 비꼼과 비굴함도 느껴지거니와 기사니 만큼 다분히 선동적인 부분을 포함할 수 밖에 없겠지만 무자르듯이 그렇게 일반화시킬 부분이 아닙니다. 프로이트의 업적 인정하긴 하지만 가장 큰 패악 중 하나가 인류문화에 남성/여성 이분법을 더욱 고착화시켰다는 겁니다. 융이 왜 갈라섰는지 이해할만 했죠. 우산, 파이프 ... 비슷한 모양새만 나오면 너무들 쉽게 남근이라 말하지만 사실 당시의 복장문화부터 따져봐야하지 않을까요. 그 그림이 그려졌을 때 작가는 프로이트 시대였나도 중요한 문제죠. 도상학적으로 그림에 그러한 배치 문화가 있었다는 것도 저도 알지만 프로이트 이론확립 후 모든 기표들을 성적잣대화하려는 경향이 너무 심합니다. 그러한 인식이나 교육이 저변화됨으로서 그것이 또한 역으로 더깊은 무의식화 과정을 밟습니다. 인간의 연상작용이 얼마나 쉬우면서도 편파적인지 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학습된 삶으로 삶을 재단하는 또다른 폐단을 만들 수 있는 거죠. 진화가 진보가 아닌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되도록 사실을 더 거론하되 제가 깊이 검증하지 않은 걸 섣불리 일반화하지 않으려 조심합니다. 거론할 때조차도 누차 검증하려 하고요. 다들 너무 쉽게 담론화 만들지만 사상의 자유 추구라는 명목하에 사회 갈등과 편견의 양산은 아닌지 모든 지식인은 경계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말은, 상대가 그 합을 찾게 만들어야지 내 말을 진짜로 믿게 만드는 답이자 끝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22 09:19   좋아요 0 | URL
우선 답글 전에 제 블로그에 가보면 ˝Das Kapital˝ 자본 오리지널이 있습니다. 1987년 이론과 실천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서적인데, 당시 강신준 교수님이 다른 분과 같이 공역했죠. 한국 최초의 자본 번역서라고 하더군요. 당시 검찰에 고소당했는데, 검사가 이 책을 보고 그냥 풀어주었다고 하던데(어려운 도서이니)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총 9권의 책 중에서 3권을 구했죠. 지금은 5000원에 파나, 앞으로 저 책의 가격은 엄청 비싸지겠죠? 한국 인문학 도서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이니깐요.

http://tomanderson.blog.me/220149863532

아무튼 저는 일단 남성이고, 아갈마님은 여성이시겠죠? 모르겠습니다. 일단 신문기사 내용은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732645&cp=du

같네요.

프로이트에 대한 해석은 제 개인적이고, 우선 이분법적인 요소로 통해 남녀의 차별문제를 인류학적 영역에서 상당히 공격을 많이 하는 부분이죠. 양산이란 이미지 상의 배치가 단순히 그 당시의 복장에 대한 흐름으로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남자)라는 것으로 전 생각했죠. 차라리 우산을 편 채 2~3명의 여자가 있었으면 그저 양산은 악세사리나 생활용품의 기능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유라는 것, 정말 자유란 소중하나, 그 자유가 이성이 없으면 자유로 볼 수 없다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생각나는군요. 편파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은 인간 누구에게 있고, 그 편파적인 요소가 업다고 믿는 것보다 차라리 있을 수 있으니 그것에 대해 망각하고, 혹은 지나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아갈마님의 조언은 여러모로 좋은 의견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죠. 제 자신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이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거나, 약속시간을 정해놓고 지키지 않으면 물론 이 부분에선 강요하겠지만요.~

AgalmA 2015-01-2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요는 아닙니다. 공격도 아니고요. 제 말투가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늘 그 때문에 사과를 하곤 합니다; 저는 혹시 놓치고 계신 부분은 없으신가 염려가 되었습니다. 푸념이나 일상대화의 글을 쓰시는 게 아니니 더더욱.
이성 또한 오류에 빠지기 쉬우므로 그 자유 또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 현재 제 생각입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저도 압니다. 종종 갔었죠. 이젠 없어졌다고 들은 거 같은데. 비싸지겠다는 말씀은 왜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인문학의 책임감을 앞으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서보다 사람의 가치가 더 덧없는 세월이라서 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22 13:56   좋아요 0 | URL
제 답글에 아갈마님에 대해 강요나 공격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지나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의견을 주신 것이 좋다고 한 것입니다.,,아하하하...
보수동 책방골목 규모가 예전보다 많이 적어지게 되었죠.
이론과 실천에서 판매된 도서가 이젠 나오지 않고, 설사 있더라도 완전한 세트가 아니라 분리되었으니 언젠가 마르크스 서적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아마 먼 미래가 되겠지만) 물론 저는 팔지 않겠지만요.

AgalmA 2015-01-22 14:46   좋아요 0 | URL
걱정했는데 그리 말씀해주시니 다행입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없어지면 안되는데...그나마 유지된다니 그것도 다행입니다.
이론과 실천 좋은 책 많았었는데 그리 되었군요.
링크는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