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대디, 플라이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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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Fly Daddy Fly>는 가네시로 카즈키의 소설로서 좀비들의 이야기 <Revolution No.3>에서 파생된 작품이다작품 세계관은 <Revolution No.3> 토대로 좀비 친구들이 2학년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들을 스즈키라는 40대 후반의 남성의 하루일과로서 진행되는 이야기다소설의 분량은 불과 200페이지 정도이나그 안에 담고 있는 재미와 감동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날카로운 사회에 대한 작가의 분노와 일침이 숨어 있다. <Revolution No.3>에서도 좀비들은 공부를 못하는 것도 모자라 아무런 인맥이나 힘도 가진 것 없는 청춘이다.

 

가진 것이라곤 잔 머리를 굴리거나 바보 같은 일만 저지르는 친구뿐이다가진 것이 아무 없기에 오히려 더 부자인지도 모른다오히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해 쇠사슬에 의해 속박 당하기도 한다물론 가진 것이 너무 없으면 비참할지도 모른다그런다고 그런 비참한 삶에서도 몸부림치는 좀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이번에 좀비들은 재미있는 아주 흥미로운 아저씨를 발견했다세이와여자학원 축제에서 자신들의 유전자를 품어줄 애인을 만들려는 좀비들은 안타깝게도 그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어떻게든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해 세이와여자학원 축제에 들어가서 어느 여학생에게 연락처를 받아 연애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그런 점에서 스즈키와 좀비들의 만남은 우연 아닌 절대적 숙명이었다사회적 멸시받는 좀비들사회적으로 가진 것도 없이 언제나 떠밀려 살아온 스즈키사실 알고 보면 좀비나 스즈키나 우리 일상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회사에서 일만 하고 집에서 충실한 가장하지만 그 시계 같은 인생이라도 스즈키는 아내를 사랑했고특히 외동딸 하루카에게 언제나 좋은 아버지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인생목표가 틀어졌다딸에게 폭행한 남학생이 유명한 명문학교의 화려한 운동선수라는 점이다권투시합에서 champion 3연패를 거머쥔 남학생에게 스즈키의 딸은 가혹하게 얻어맞았다그런 후 그 학교 지도교사와 교감은 아무 일도 없다는 식으로 대하고마치 스즈키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대했다그런 비굴함딸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스즈키는 새로운 인생을 목표로 한다이 소설에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스즈키의 열망과 즐거운 장면그리고 어이없는 해프닝이 아니다.

 

살아있는 인간이나 언제나 기계처럼 일만 하고상자 안의 꼭두각시로 살아온 중년남성들이 새로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힘이 없고 나약한 삶에서 오직 피하고 숙이는 것에서 일상을 지키는 그들을 말이다비굴할지 모르나 남자가 머리를 숙이며 비굴하게 웃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어깨에 자신이 아니라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가족이 있기에 용감해지고 비굴해질 수 있는 것이 남자다그러나 하루카의 모습에서 용감해질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비굴한 모습으로 가족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는 스즈키의 삶에 심각한 간극이 생긴다.

 

스즈키의 반란은 그렇게 시작한다반란 아니 혁명의 주체는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힘든 훈련을 순신에게 받은 스즈키고등학생에게 맞고 욕먹고 존대조차 받지 못한 그 1달 반을 견디고마침내 원수를 외나무에서 만났다링은 좀비들이 준비하고 그는 그동안의 고생을 토해낸다하지만 단순히 이 유쾌한 반란을 하는 아저씨엉뚱한 짓만 벌이는 좀비들의 모습만 우리는 생각해선 안 된다이 좀비들이 아저씨를 응원하고 도와주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좀비들은 말 그대로 좀비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을 것 같은 존재다좀비 중심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이방인과 같은 존재다일본은 메이지시대로 올라가면 대동아공영정신즉 통일과 화합이란 미명아래 북해도의 아이누족을 무참하게 학살하고그들의 땅을 빼앗아 버렸고전통왕족이 있었던 오키나와마저 침공해 그들의 문화를 파괴해버렸다그리고 조선을 빼앗아 스즈키의 싸움스승인 박순신은 재일교포로 심각한 인종차별을 겪는다대부분 이민족이거나 혹은 섞이지도 못할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사실 어째보면 아무런 힘도 없이 오늘 하루 열심히 시계태엽처럼 돌아가는 스즈키 같은 일본국민 역시 그들 스스로 이방인이었을 것이다강자와 권력 앞에 아무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등을 숙여야 하는 것에 말이다그런 스즈키에게 자신은 살아있음을 알리는 방법은 오로지 자신의 딸을 폭행한 녀석에게 찾아가 한 방 날려주는 것이다비록 권투선수에게 날리는 한 방이나 그 속에는 세상의 부조리와 부당한 도덕까지 날려주는 것이다세상에 나와 특히 남자는 그 누구에게 영웅이 될 필요가 없다남자가 세상에 나와 그를 영웅으로 봐야할 사람은 오직 그 남자의 자녀들일 것이다.

 

그래서 <Fly Daddy Fly>인 것이다아빠 날아라평범한 아버지는 늘 현실의 막다른 길에 부딪히지 않게 계속 힘든 삶을 살아간다물론 모든 사람들이 힘겨워 하나가족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정신적 상실감은 그 어떤 것보다 참을 수 없을 것이다이 소설에서 가장 가슴이 뭉클한 장면은 스즈키가 집에 가는 버스를 탈 때정해진 시간 타는 손님 그리고 버스기사스즈키는 자신이 강해질 때마다 버스와 달리기 경주를 한다언제나 지는 그였지만당연한 약속처럼 싸움 전날에 버스를 달리기로서 이긴다.

 

버스기사는 스즈키를 바라보고 있었다버스기사는 모자 대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눈물을 흘리며 스즈키에 손짓을 한다어째보면 그들 모두 오늘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이다스즈키의 모습에 자신들이 직접 행동하지 않더라도적어도 지금 우리는 살아있다는 표정을 보여주었다죽어있는 자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단지 무표정한 얼굴이 공허한 눈빛으로 보이기도 혹은 보이지도 않은 것을 보고 있다. <Fly Daddy Fly> 언젠가 나도 아버지가 될지 모른다그때 나는 스즈키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글쎄아마 그것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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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인즈 게이트: 부하영역의 데자뷰 - 극장판
와카바야시 칸지 감독, 미야노 마모루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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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슈타인즈 게이트>는 잘 아시다시피 TV 애니메이션과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TVA에서 오카베가 망상이 심한 과학자로 나오지만, 그의 망상은 하나의 사실이 되는 충격적인 작품이다. 물론 우리는 처음 그의 모습을 보면 분명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처음부터 그의 행동이 작품 내에 다른 캐릭터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관객에겐 그저 중2병 환자라는 것에 동일하게 인식한다. 하지만 그의 가설과 크리스 박사, 가제트연구소에 모이는 인물들 중심으로 신기한 일들이 발생된다. 우연히 시작된 실험, 그리고 마유리의 죽음 등이 이어지면서 오카베는 계속 의문을 품고 시간여행을 한다.

 

그러면서 오카베는 마유리의 죽음에서 구하고, 시간여행 패러독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임머신을 악용한 자까지 찾아내어 크리스까지 구한다. 이야기 흐름에서 플롯의 구조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요약하자면 미치광이 과학자를 표방한 공대생이 자신의 망상이 그대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결국 친구와 세계를 구한다는 뜻이다. 이야기의 요약은 간단하지만,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요소들은 매우 복잡한 게 <슈타인즈 게이트>. 기본적으로 타임머신이란 기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물리학의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가 나온다.

 

우리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서 먼저 1차원은 점, 2차원은 면, 3차원은 공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는 현실은 3차원적인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슈타인즈 게이트>3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1단계 차원이 높은 4차원 세계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캐릭터로 주축은 간단하나, 그 인물이 놓인 시공간적인 조건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과거 <Back to the future>라는 영화로 시작하여 여러 가지 시간여행을 하는 작품이 나온다. 시간여행에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점은 시간을 물리적 에너지로 본다는 점이다. 이런 가설이 등장한 것으로 블랙홀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데, 블랙홀은 빛까지 빨아들이는 것이다. 질량이 없는 에너지조차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화이트홀로 통해 다른 시공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론이 존재한다.

 

현대물리학 이론에서 결국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은 현재 정해진 한 시대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을 내세울 수 있다. 이른바 인간의 사는 세계는 공간인 3차원이지만, 정해진 하나의 역사적 세계에서는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세계만 존재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적인 가설이지 현실적인 실험에서 성공할 리가 없다. 만약 진짜 존재한다면 그것을 누군가 증명해야할 것이나, 단지 이론만 존재하고, 상상에 의한 이야기에 존재하는 가상의 시나리오다. 그런다고 이런 이론이 현실적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만약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시공간 속에 또 다른 내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슈타인즈 게이트>는 그런 인간의 선택에 의해 자신과 주변 그리고 세계의 흐름이 바뀐다. 나비효과라고 하여 나비의 날개 짓이 사이클론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처럼, 작은 변화가 결국 큰 현상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도록 극단적인 발상이며, 단지 실행가능은 역시 공상세계의 이야기다. 그런다고 다르게 보면 사소한 사건이 하나의 발화점을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각 제국주의의 영토 확장과 더불어 지나친 자본주의로 인한 상품의 판로개척을 위한 명분으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저격사건에서 시작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강력한 입지를 가진 황태자 부부라고 하여도 전 세계가 전쟁을 참가해야할 명분은 너무 떨어져 보인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는 1917년 러시아혁명 동기가 되었고, 러시아혁명은 1919년 한국에서 삼일운동의 계기도 되기도 했다. 전혀 연계성이 없어 보이는 결과에서 역사는 의외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슈타인즈 게이트>에서 오카베가 TVA에서 시간여행을 해도 극장판에서 크리스를 만류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역사가 대폭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인간의 간섭은 다른 방식으로 우연적인 사건으로 일어나고, 그것은 좋든 나쁘든 분명 어떤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자로서 양심을 주장하는 크리스의 입장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의 발달은 결국 인간의 문명과 생활 그리고 인간 그 존재적 가치까지 변하게 만든다. 20세기부터 생명공학이 시작되어 유전자조작이 시작되고, 태아를 시험관에 키워 출산하는 일까지 일어난 21세기 현재다. 게다가 시간의 조작은 엄청난 윤리적 문제를 만들어낸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제시한 인간은 시간적 존재다라는 단어가 <슈타인즈 게이트>에서 거론된다.

 

현대물리학과 눈에 보이지 않은 대상을 연구하는 형이상학은 과학과 철학의 관계다. 그런 점에서 <슈타인즈 게이트>는 현대물리학 중심을 소재로 만든 작품이나, 분명히 봐야 할 점은 철학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대상이란 점에서 인간에게 관념에 대한 연구대상을 두고 고민한다. 바로 시간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다. 시간은 우리가 시계로 보는 시, , 초로 구분되어 있지만, 그것은 단지 시간이란 것을 인간이 사용하기 위한 도량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지 시간이란 존재 그 자체는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은 5가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손으로 만지고, 혀로 맛보며, (물체에 힘을 가하면)로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그럴 수 없다. 인간이 시간을 알고 있기에 죽음이란 고통을 생각할 수 있고, 시간을 인지하기에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이 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공간적 한계성이 머물러도 결국 시간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개인의 시간이 상실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오카베에게 리딩 슈타이너라는 인간의 기억장치를 말한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본인의 기억을 말이다. 그것은 데자뷰 현상으로 일어나고, 미래를 예지하기도 한다. 그런다고 하여 병렬세계가 진짜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단지 이론에 의해서만 이야기로 만들 뿐이다.

 

문제는 병렬세계에 존재하는 본인은 분명 현재에 존재하는 본인과 전혀 다르다. 다른세계에 있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만들고 변모하면 결국 다중적인 병렬세계에 리딩 슈타이너에 대하여 인식하는 본인은 다중적인 병렬세계의 간섭에 의해 현재의 세계에 존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극장판에서 오카베 존재의 상실은 바로 현실에만 오카베 그 자신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에 존재하기에 크리스는 오카베의 어린 시절로 가서 강력한 기억을 부여한다.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이 자신이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기억을 남기고, 그것은 곧 시간적 요소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오카베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카베가 사라지는 것일까? 인간의 존재에서 분명 그가 물리적으로 존재하더라도 자신의 관념 안에 그것이 없다면 없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오카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오카베의 시간이 사라지고, 오카베의 시간이 사라지면, 오카베 주변사람들이 오카베와 함께한 시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인간의 존재성에서 자신 안의 영역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부류도 있지만, 다르게 본다면 자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있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기보다는, 자신이 존재하는 사실을 타인이 인지하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할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른 누군가와 시간적 공유로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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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3-03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타인즈 게이트...이거 처음 몇 편 보고 계속 못보고 있습니다. 나름 세계관이 괜찮은 거 같고 물리학에 대한 전문 내용이 많이 나와서 좀 집중해서 보아야 할 듯합니다. 근데, 끝에 가면 막장이라는 말이 있어 전반부만 볼 요량입니다..ㅋ

슈타인즈 게이트의 긴 리뷰를 보다니...참 반갑군요^^

만화애니비평 2015-03-04 08:50   좋아요 0 | URL
크리스티냐~~~
나름 줄이고 줄여 A4로 2페이지 정도 나오더군요.
세계관은 나름 좋으나 물리학과 더불어 형이상학이
기반되지 않으면 어렵죠
리뷰를 보면 전자를 인용하나, 후자는 전혀 고려하지 않아
아마 많이 반가울 것 같네요
 
징비록 - 국역 정본
유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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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사극드라마 <징비록>이 방영되고 있는 시기에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분명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일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정유재란까지 하여 벌써 400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까지 임진왜란이 겪은 상처는 한국의 전 지역에 남겨져 있다. 부산 기장에 가면 왜성이 있고, 그밖에 많은 곳에 왜성이 외로운 담벼락이 되어 남아있다. 임진왜란이 급박한 상황에서 벌여진 전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하면 떠오른 사람이 성웅 이순신일 것이다. 그는 조선 북경지역 오랑캐를 무찌르던 육군 장수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수군에 능한 장군이기도 했다.


 

 

<징비록>을 저술한 서애 유성룡하고 어린 시절 친구이기도 한 그는, 임진왜란 이야기에서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순신 중심으로 흘러간다면, 이에 반해 국내 정치상황과 외교, 경제 상황은 아마 서애 유성룡 중심으로 보는 게 더 적정할 것이다. 서애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학파를 이어받은 동인계 정치인이다. 당시 정치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동인은 후에 북인과 남인, 북인은 소북과 대북으로 나누어진다. 정치적인 흐름에서 훈구학파가 초기 조선의 권력을 차지한 시점에서 사림학파가 조정에 나오고, 훈구에게 억압당한 사림의 유림들이 이제는 서로 아전투구하는 상황이 발발했다.


 

 

전쟁이 나면 무릇 어떻게 하면 적을 제대로 쳐서 멀리 바다 밖으로 내쫓는 것에 대해 궁리하는 게 옳지만,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은 그런 대의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과 사익에 따른다는 점에서 역사는 항상 다른 인물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반복되는 형상을 보여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카를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거론한 것처럼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나온 게 아니었다.


 

 

<징비록>을 보면 가장 첫 단추가 잘못된 것은 일본 해적들이 국내 백성들과 결탁하여 노략질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왜국과 사신왕래를 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점이다. 선조시대에 매우 훌륭한 신하들이 많았으나, 이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임금의 어리석음, 그리고 전쟁이 나서 종묘사직뿐만 아니라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 전쟁이 끝난 후에 개인적 이익에 신하를 질투하는 한심함은 단지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조만이 아닐 것이다.


 

 

이후 등장할 인조나 정조 승하 이후 순조 역시 그러하다. 대한제국이 봉건시대의 국가 즉 왕과 귀족계급에 해당되는 사대부가 있다면,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라도 역시 그런 위와 같은 전례가 존재한다. <징비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 그런 치욕적이고 비극적이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며 후세가 무엇을 보고 배워야 하는 점이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하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악몽, 그리고 그 시기에 있었던 큰 사건을 기록하면서 단순히 기록의 위한 서적이 아니라 후세에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적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이다.


 

 

<정비록>은 생각보다 개인적 감정이 매우 배제된 상태에서 저술한 도서다. 서애 유성룡이 전쟁 시기에 적은 게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 정리한 내용이다. 그러나 개인적 감정이 배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적힌 글을 보면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피난길에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어느 자리에 앉아 홀로 우는 유성룡, 그 모습을 보는 군관과 지역주민 역시 따라 운다. 백성들이 배고픔과 질병에 힘겨워 괴로워하며 죽어갈 때 또 다시 유성룡은 눈물을 흘린다.


 

 

아마 국가정치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녹을 먹는 자라면 유성룡의 눈물만큼 값진 것이 없다고 보겠다.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은 체통과 체면이란 이름으로 눈물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한 부류다. 예기치 못한 전쟁, 계속되는 패전과 후퇴, 죽어가는 백성들, 부자와 부부가 서로 죽여 잡아먹는 행위에서 전쟁은 인륜을 파괴할 만큼 잔혹하고 끔찍했다. 전쟁이 발생하면 가장 고생하는 것은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예비식량이나 무기가 없는 백성이다. 백성을 버리고 가는 국가지도자만큼 못난 인물이 없다.

 

 

 

임진왜란에서 선조의 어리석음과 질투에 대해 논하기란 한숨만 나올 정도지만, <징비록>에선 선조에 대한 원망과 오류를 적지 않았다. 그래도 주변 신하들에 대해 적은 글이 있었다. 일본에 간 김성일이 본 왜정 상황이 적절치 못한 것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이일이란 장군이 용맹만 믿고 지략이 부족해 왜적에게 패배한 일들도 기술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수들의 판단력과 용기다. 하지만 임진왜란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우리에게 바로 지략과 상황판단이다.


 

척후병을 제대로 두지 않고, 소문으로 왜적이 온다고 하여 그 소문을 낸 사람들을 참하는 문무대신을 보면서 한심했다. 아마 이순신 장군이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원인은 바로 그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의 죽음에 많은 백성들이 통곡했고, 중국에서 파견된 진린 장군도 눈물을 흘렸다. 친구로서 장군으로 천거한 서애 유성룡 역시 그러지 아니하겠냐마는, 이순신은 지략과 담력이 뛰어난 장수이기도 하나, 밑에 있는 수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인품과 그릇이 있었다.


 

 

가장 최측근의 장수부터 밑에 있는 장졸까지 전쟁에 대한 정보와 상황판단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여보냈다. 우린 임진왜란에 이순신에 대한 업적을 아직까지 기리며, 현재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이 존재하고, 매년마다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이순신에 대한 영웅심을 대해 찬양하여 영화 <명량>,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흥행하더라도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조건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징비록>에서 유성룡 역시 친구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반영했다.


 

 

우선 그가 갑옷을 진중에서 벗지 않는 점, 쓸데없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은 점, 주변 지형지세 그리고 수군에서 해류와 바람의 형태를 잘 보고 있다는 점이다. 원균 장군은 왜적을 공격한다고 하는 오만에 수군을 출동했으나, 먼 곳에서 노를 젓고 온 병사들이 체력이 떨어져 결국 왜국의 책략 앞에 무너졌다. 전쟁의 승패에서 전술과 전략은 장수나 참모들이 세우나, 정작 적을 치는 당사자는 군졸이었다. 군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신의 계급에 도취된 고위직의 한심함이 결국 대사를 그르치게 만든 점이다.


 

 

<징비록>이 400년 이상에 벌어진 일이고, 지금 당장 그런 구시대의 무기로 싸우지 않고, 군사편제 역시 그렇지 않다. 게다가 일본과 한국은 국가적으로 외교를 맺고, 민간적 차원에서 왕래가 매우 활발한 이웃국가다. 심각한 극우성향의 아베 정권이 들어왔다고 하여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을 일본을 하든지 혹은 그 외의 국가를 한다고 해도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역시 정보력과 지도층의 능력이었다. 사실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 풍신수길이 이미 열도를 통일한 상태이고, 겉으로 완성된 것이었으나, 전쟁 이후의 군사들은 매우 사나운 점을 조선이 간파하지 못했다.


 

 

왜구가 끊임없이 해안을 침범해도 이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수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간첩들이 왜적에게 정보를 건넬 정도로 국내 내정은 엉망이었다. 선조시대 많은 문신들이 있으나 역시 내정에 문제가 있었다.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쌀이란 말이 있다. 서울경기를 제외한 타 지역에 있는 백성들은 가난과 외적들의 침입에 두려워했고, 그들이 국가를 배신하여 적에게 붙는 이유를 생각하면 역시 그렇다. 전쟁이 나더라도 백성들이 안정하지 못한 이유 역시 성을 지키는 수장들이 모두 도망쳐서 그렇다.

 

 

성에 사람들이 없다면 여러 모로 불편하고, 산 속에 숨어 있으면 식량부족과 질병에 고통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징비록>을 보면서 가장 화가 나는 점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판단력 부족이란 점이다. 그래서일까? 유성룡과 이순신의 활약이 그만큼 두드러진 이유 역시 주변 상황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임금 중심에서 별로 활약하지 않은 인물보단 격전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장과 무신사대부들의 공로가 제일 큰데, 등급은 2번째 내지 3번째다.

 

 

 

관료정치의 한계성, 관료들의 그늘 아래 목숨을 걸고 싸운 수많은 장병들과 의병에게 감사한 마음이야 느끼지만, 한편으로 이 모습 역시 현실적인 것 같았다. 군대에서 내가 복무할 때 생각한 점은 지휘관의 지휘란 전장에서 병사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사람의 생명은 단 하나이고, 그 생명을 잃을 경우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전쟁에서 지휘를 맡은 장수가 중요한 것은 바로 수많은 생명을 담보하고 있기에 그렇다. 장병이 전장에서 무너지면 성과 도시가 침범당하고 수많은 양민들이 도륙을 당한다.


 

 

아직까지 교토에서 있는 코무덤은 일본 왜적이 조선 양민들을 도륙하고 코와 귀를 베어 본국에 보낸 것을 모아진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국가는 바로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위정자들의 그 근본을 잊고,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다면 비극은 다시 국민에게 전가된다. <징비록>에서 유학을 신봉한 조선은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 공자의 가르침이란 바로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나, 그 근본을 망각했다. 그러면서 피난길에 비가 억수같이 내리자, 한국의 조상신인 단군왕검, 기자, 동명성왕에게 제를 올리는 모습에 과연 그 조상신들은 이런 생각으로 국가를 세우고 했을까?


 

 

<징비록>에서 서설부분에 번역자의 말에 인상 깊은 부분이 있다. 서애 유성룡은 동인이나, 추후에 남인으로 이어지며, 남인에서 대표적인 실학자인 성호사설을 만든 이익에 남긴 『서징비록후』에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켜 상상을 받는 것은 옛날의 도리다. 세상 사람들은 임진전란에 유성룡 선생이 자신의 힘을 다 쓴 공로가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 일을 유 선생의 경우에는 사소한 이리이고, 그 보다는 더 큰 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충무공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충무공은 한 사람의 부장에 불과했으니, 유 선생이 아니었다면 다만 군졸들 중에서 목숨만 버리고 말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회복시켜 백성을 편안하게 한 공로는 과연 누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인가. 근세에 와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킨 이런 도리는 실행되지도 않았으며, 다만 추천 등용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뒤따라 시기하고 미워하기도 했으니 아아 슬픈 일이다.”라고 한다.


 

 

이순신의 기용은 바로 서애 유성룡이 한 업적 중에 가장 큰 일이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하여 제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것만큼 좋은 정치적 업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단순히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보고 판단해야할 것이다. 정치권에 보는 인물기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품과 행적이다. 이순신의 행적은 강직하고 침착하며, 밑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안전을 고려했다. 진린 장군이 올 때 그가 사나운 것을 생각하여 진린과 그 수하에게 극진한 대우를 한 이유 역시 자신의 군사가 주둔한 지역의 백성에게 침해가 가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을 보면 각종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국민들의 경제생활은 계속 참담해진다. <징비록>에서 가장 일을 그르치는 인물이 사적인 이익에 치중하는 인물, 밑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은 인물, 병사들이 치지고 배고픈데도 진격을 명령하는 인물, 타인의 공을 시기하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징비록>을 보면 생각한 점은 이 책에서 이순신에 대한 유성룡의 마음은 애절함과 고마움으로 가득하다. 이순신이 부각한 점은 1970년대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순신은 일본이 침략할 때 목숨을 걸고 싸운 분이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본의 꼬리 밑에 있던 분이 아니었다. 최근 태극기 계양과 관련된 시사현황을 볼 때 왠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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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들
에릭 홉스봄 지음, 이경일 옮김 / 까치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에릭 홉스봄이 타계하고 나서 국내 출간된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마크르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란 명제로서 만들어진 책이다. 에릭 홉스봄은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서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초 타계 전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영미권 마르크스주의 학자였다. 그가 저술한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르크스가 살아생전부터 시작하여 21세기 초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적 배경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상적 배경 그리고 역사적 현실을 논한다.

 

 

마르크스에 대해 말하자면 한국에서 여전히 말하기가 어려운 이름이며, 하다못해 도서를 집중적으로 읽고 토론하는 모임조차 꺼내기 힘든 서적이다. 하지만 국내 유수한 대학교, 하다못해 외국의 대학교에서 마르크스의 서적은 꼭 읽어야 하는 인문고전 중에 하나다. 최근에 서울대학교 100대 서적에 마르크스의 <자본>이 등장하고,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하나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이 있었다. 이미 국내 최고의 대학교조차도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이 3%가 반영된 점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가 차지하는 지성의 세계는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 <자본> 전문번역자인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살펴보면 한국은 모더니즘 철학사상을 지나가지 못하고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성이 중심인 학문체계를 가지지 못한 채 바로 오늘 우리 사회가 이룩된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 가치와 더불어 부정적 가치가 큰 부작용이 일어났다. 독일에서 나치의 존재는 명확한 악이나, 네오나치가 자신들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 사상에서 넘어가 반이성적 사고에서 일어난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휴지조차 되지 못할 정의를 외칠 수 있는 현 시점에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온오프라인의 갈등과 심지어 테러행위 역시 이성의 시기를 보내지 못한 부작용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 이후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다시 포스트 해야 하는 새로운 가치 아래 세계를 좀 더 자세히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사상은 볼셰비키혁명으로 통해 성공하는 것 같으나, 레닌 사후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 그리고 트로츠키의 망명과 암살로 스탈린은 사회주의혁명인 10월 혁명을 이젠 <한낮의 어둠>처럼 철권정치를 실행했다.

 

 

스탈린과 자본주의 충돌은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에릭 홉스봄도 지적하다시피 마르크스와 전혀 관계없는 북한이 아직도 한국과 대치중이다. 소비에트러시아가 붕괴하고 마르크스는 그저 역사 속에 사라질 운명일까 싶었다. 하지만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서문에 놀라운 사연이 있었다. 에릭 홉스봄에게 마르크스에 대한 사상을 자문을 받는 사람들이 늘었고, 마르크스에 대한 서적을 새롭게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들이 문의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마르크스에 대해 자세히 아는 부류가 아니란 점이다.

 

 

마르크스의 대표적인 저술서인 <자본>과 <공산당선언>은 19세기에 저술된 서적이다. 19세기 저술한 서적이 21세기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가 도래한 국제사회에 큰 예언서가 된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는 이제 단순히 국가 내부의 문제를 넘어 세계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최근 대두된 문제는 역시 저출산 문제일 것이다. 한 가정에서 자녀가 최소 2인 이상 출산되어야 국가가 운영이 되는데 그것이 무리라는 점이다. 국가와 사회적 기능에서 재생산이란 시스템은 매우 중요하다. 재생산적인 기능이 저하될 경우 정치사회적인 기능이 저하된다.

 

 

당장 산업부문과 경제부문의 벽이 무너지지 않지만, 국방인력의 공급부족으로 이어지고, 추후 국가를 부양할 수 있는 인력이 없어서 고령사회로 접어든 국내경제가 매우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경제적 문제여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경제적인 문제가 결국 정치사회 더 나아가 외교적인 영역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자본주의를 집어삼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봉건영주가 있던 구체제 국가도 아니고, 소비에트연방을 만들어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도 아니다. 자본주의 그 자신이었다.

 

 

자본주의의 탐욕이 결국 인간을 잡아먹게 되고, 그 사회는 계속 쇠락을 걷게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에서 마르크스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의 사상의 조류를 보면서 딱히 답을 주는 것보다는 답을 스스로 찾아가란 식으로 결론을 낸다. 또한 이 책에서는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는데 우선 좌파에 대해 논하자면 대부분 마르크스주의로 볼 수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이외에도 다양한 점이고,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역시 모든 것이 마르크스에서 기원된 게 아니라 마르크스로 통해 보여 진다는 점이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에서 루소는 로베스피에르와 마르크스의 아버지라고 한다. 마르크스가 루소에 대해 딱히 언급한 것은 없지만, <자본1>의 주석을 보면 루소의 <경제론> 내용을 인용한다. 「자본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명령하는 노동에 대한 보수로서 (즉 너희들 수중에 있는 것을 얼마간 나에게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너희들이 나에게 봉사하는 명예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노라(장 자크 루소, <경제론>, 제네바, 1760, 페이지 70)"」

 

 

마르크스를 비롯한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자들도 루소와 특히 자코뱅당 좌파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루소의 사상을 말하면 한국에서 흔히 “자연으로 돌아가라”란 말만 알지 루소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자연적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자유의 절대성을 강조한 루소 여기에 평등의 절대성을 마르크스라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연 속의 인간은 자유와 평등 모두 가진 존재다. 우선 자유를 모두 가질 수 있는 평등이 있어야 하고, 루소의 실패한 아들인 로베스피에르는 자유라는 것은 우리만 가지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골고루 줘야지 그 자유가 유지된다고 한다.

 

 

자유가 없는 나라가 자유가 있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그 자유를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게 옳다는 점이다. 로베스피에르가 루소의 사상을 신봉한 사람인 점을 고려하면 루소의 사상이 마르크스에게 그대로 영향을 준 것은 당연한 말이다.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도처에 야만적인 무관심, 한편에서는 냉혹한 이기심, 다른 한편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 도처에 사회적 전쟁이 널려 있고 모든 이들의 집은 요새이며, 곳곳에 법의 비호 하에 약탈을 일삼은 약탈자들이 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런 문구가 있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런 것이었다. 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 이 사회와 법률이 약한 자에게 새로운 멍에를,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주어 자연의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 버렸다. 또 사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원히 고정시키고, 교묘한 찬탈로써 취소할 수 없는 권리를 만들어 일부 야심가의 이익을 위해 이후 전 인류를 노동과 예술과 빈곤에 굴복시킨 것이다.”

 

 

문장의 느낌은 다르나, 기본적으로 엥겔스의 공장노동자의 비참한 모습을 본 내용과 루소가 당시 농민과 도시빈민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던 시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는 이제까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러시아혁명 당시 많은 혁명가들은 자신들을 프랑스대혁명의 후예로 생각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적 배경에서 자코뱅당 좌파의 사상은 마르크스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 들어간 것은 당연하다. 대신 루소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미덕을 가진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면 마르크스는 그 힘의 원동력을 프롤레타리아로 보았다.

 

 

처음 마르크스 국제노동운동을 보면 지식인보단 노동자와 직접 상대하면서 이끌어 갔다면, 그가 죽고 엥겔스도 죽은 이후 20세기 초중반에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한 점이 특징이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이끄는 2차 세계대전에선 반파시스트 운동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이 참여한 점이다. 마르크스가 저술한 <자본>은 처음 과학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해 파헤친 도서라면 20세기 들어오면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경제학적으로 큰 맥락이 되었고, 그의 사상은 인류학, 역사학, 정치학, 문화사회학 등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의 서적들은 지식인들의 인문고전으로 올라가고, 그의 지식을 고스란히 남은 도서는 21세기에 닥친 위기에 대한 해석이 되었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 주변을 잘 봐야 할 것이다. 대기업이나 좋은 직장에 다니면 물론 좋겠지만, 우리 전체 인구 경제활동에서 그런 곳에 일하는 사람은 100명 중에 하나이다. 대부분 중소기업 직원, 공장노동자, 서비스산업, 소규모 영세상인 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중에 일부는 높은 임금이나 높은 매출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반 이상이 그렇지 못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력이 없어서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여 생계수단을 얻는 자들에 대해 프롤레타리아라고 한다면, 이제 소부르주아인 상인조차도 프롤레타리아 부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내수경제가 불안한 한국에서 자꾸 외국의 수입물에 의존하고, 그 대부분을 대기업(선박이나 항공 운송, 대규모 택배시스템 및 마트시스템)에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된다면 결국 저렴한 상품에 의해 중소 상인들은 몰락하게 된다. 골목상권이나 혹은 사소한 물품에 대한 시장 갈등은 21세기에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은 전자처럼 높은 임금보단 후자에 처해진 자거나 또는 그런 자와 같이 살아가는 부류라는 점이다. 공정한 시장경제에 대하여 긍정하나, 그 시장경제가 자본력에 의한 독과점이 이루어진다면 국내 경제는 하부로부터 붕괴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듣기 싫은 말 중에 “너도 성공해라 저기 성공한 사람이 있자나?”나 혹은 “로또복권 당첨되면 되지!”라는 말이다. 물론 나 하나 잘 되면 이런 문제로 고민은 없겠지만, 결론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발을 내빼고 싶은 것이다. 한국사회의 성공신화에 대한 멍청한 열망은 1명이 성공하는데 반해 2~3명 정도 되지 않는다면 납득되겠지만, 1명이 성공해도 99명 이상 성공하지 못하면 분명 그건 말이 안 맞다. 다행히 성공하지 못한 자는 99명이 아니라 9999명 이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스펙을 쌓으려면 매달 150만원이 필요하다는 뉴스를 보았다. 150만원을 매달 쓰지 않아 높은 임금을 받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활하는데 불안하지 않을 정도가 되는 게 좋지 않는가 싶다. 점차 높아져가는 비정규직으로 인해 내수경제는 축소되고, 1980년대 과소비에서 과소소비로 대체되었다. 부동산 가격 증가로 물가는 해마다 올라가는데(이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자기 집값은 오르고, 다른 집값은 내리기만 바란다. 부동산이 오르면 사회간접자본이 열악해지고, 상가의 상품은 비싸게 된다. 10만원 들고 마트에 가면 살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집값 고민은 매우 충실하다.

 

 

이런 자신들의 이기심을 찾는 게 똑똑하다고 여기기에 자기 살만 파먹고 있다. 때로 생각하면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보인 것처럼 그의 분석도 좋지만, 때로는 루소의 사상처럼 인간에게 미덕을 다시 찾는 것도 매력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미덕을 찾는 것은 거의 무리인 현실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마르크스 말대로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은 것은 그들을 속박하는 사슬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자기 몸 하나이고, 그들의 미래조차 만들 수 있는 여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을 보면 왜 그들이 난폭해지는지 이해하기보단 그저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그 사회에 길들이게 만든다. 당장의 고비는 해결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모순과 부조리는 쌓여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루소의 <에밀>에 나온 내용을 동의한다. 죄를 지은 사람을 목을 매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들게 하는 자들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루소의 말이 과격하다고 하여 그를 부정하면 처음부터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 질서를 위해서라며 힘을 휘두르는 현실에서 세상이 바뀌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꼼꼼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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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바 마틴 글,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 윌북 / 201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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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행복의 조건에서 21세기 자본주의 경제구조 사회에서는 아마 돈이 많은 사람들로 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해 돈이 없는 사람들은 아주 불행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라는 것으로 행복 그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인간의 행복은 돈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가능할지 모른다. 경제가 모든 인간의 불평등의 시작점이 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을 속박하는 쇠사슬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간다. 인간의 사회가 존재하는 곳 어디든지 문명의 이기심이 그늘지고, 누군가 부유하면 누군가는 더욱 가난해져야 하는 세계가 되었다.


인간에게 문명의 진보가 과연 도움이 되었는가? 오히려 기계의 발달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기보단 더더욱 착취와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 행복한 사람의 모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조차도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일상의 반복에 의해 기계적인 존재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그것은 정말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된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어본 타샤 튜더의 삶이 녹아있는 그녀의 집과 풍경을 소개하는 <타샤의 정원>이란 책을 보며, 왜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 생각해보았다. 타샤 튜터가 자신이 선택하고 살아온 삶은 돈이나 세견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튜더 가문의 집안, 즉 영국 왕가의 후손으로 영국에 살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녀는 미국에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 인위적인 문명의 손길보단 19세기 미국이 이제 정착민들이 힘차게 살아가던 그 건축과 생활 도구들이 즐비했다.


후기에 나오듯이 그녀의 집은 마치 1800년대 시대의 1800년대의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맨발에 의상도 fast-food가 아니라 자신의 농장에서 자란 과일과 채소로 가득하다. 책에 거론된 것처럼 타샤는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초반까지 가장 자연주의자로서 살아온 인간일 것이다. 나 역시 삶의 가치는 자연주의를 추구하지만, 그녀처럼 살아갈 수 없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는 자연주의자이기도 하나, 그녀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그녀의 집을 바라보는 풍경은 인상주의 화가가 그린 화폭과 같다.


현실의 사물들을 그대로 촬영했지만, 사진으로 보는 세계는 마치 꿈나라의 요정들이 사는 세계와 같았다. 꽃이 계절별로 시기별로 화려하게 피우고, 맛있는 산열매와 들열매는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풍요롭게 해준다. 아무런 투쟁과 혼돈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세계,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것은 나에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자연이 만들어낸 세계라고 할 것이다. 자연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타샤의 책은 당연히 아름답고 희망이 가득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녀처럼 살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그렇게 살기 위한 여유가 없을 것이고, 그런 여유가 된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살아갈 용기도 없을 것이다. 타샤의 삶이 타샤만의 것이 된 이유는 바로 그녀가 선택한 삶이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이 있는 세계에 사는 인간은 모두 평화적이고, 마음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자연 앞에 인간은 그 누구라도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다. 자유와 평등이란 정의적 가치는 항상 우리 인간사회에 이상적으로 논하지만, 실재 그것이 제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결국 인간의 마음까지 파괴하여 인간 그 자체를 파괴한다. 경치가 좋고 전망이 좋은 곳에 사람이 모이더니 결국 가게가 생기고 도로가 생기며, 마지막엔 볼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가게 테이블에 놓여있는 메뉴판이 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다. 자연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말로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으로부터 우리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예전에 읽어본 서적 1권이 생각났다.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이다.


루소는 말년에 파리사람들의 비웃음과 음해를 피하기 위해 시골로 오고, 자신의 마음에 안정을 찾기 위해 산과 들로 나가 식물을 채집한다. 가지고 가는 것은 연필과 종이가 든 가방과 자신의 몸 하나를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 루소는 산과 들로 나가 식물들을 바라보며 그 식물의 효능이나 이용성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자연 속에 있는 식물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세심하게 그린 식물의 잎과 줄기, 그 식물에 대한 묘사와 상상력으로 가득한 글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축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타샤의 집 역시 그렇다. 계절과 시기가 바뀌면, 각종 식물의 색이 바뀌고, 나무에는 많은 꽃들이 만개하며, 그 꽃이 지면 풍요로운 과실이 맺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만 먹는 게 아니라 이웃과 같이 나누어 먹고, 파티를 열어 모두 즐겁게 하루를 보낸다. 나에게 저런 삶을 찾아볼 수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와 같았다. 그런다고 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무를 좋아하는 편이다. 어느 골목길에 콘크리트 담벼락 너머로 나와 있는 목련이나 동백나무의 잎사귀와 꽃을 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봄이 다가오는 자락에 각종 색들이 만발한 산과 들을 보는 것 역시 삶의 여유와 행복을 찾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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