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0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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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고 말한다면 상당히 난감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단어는 도처에 널린 말이고, 늘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들이다. 사랑이란 것을 어떻게 말하여야 하는가? 플라톤의 <향연>은 사랑이 무엇인지 바로 그 에로스가 무엇인지 대해 다루는 철학도서이다. 철학의 모티브에서 서구는 소크라테스로 시작하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체계를 다진다. 그리스철학이 서구사상의 기반이 되고,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부철학이 성립되면서 그 철학의 중심에서 그리스철학이 상당히 깊숙이 자리 잡았다.


물론 견유학파 내지 다른 학파도 존재하겠지만, 형이상학적 관념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플라톤의 철학이 중심적인 역할이 된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서구의 사상 특히 기독교 사상은 이분법적인 가치관으로 나누어, 남성의 우월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종교적 가치관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사회 및 정치적으로 강력한 체계가 된다. 따라서 플라톤의 <향연>을 읽는 것은 사랑이란 것에 대해 다루기도 하나, 그 사랑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플라톤이 철학자이고, 그의 사상이 고대사회에서 나온 점에서 이 책을 많이 어려울 것이라 여기지만, 그래 어렵지는 않고, 오히려 대화식으로 이루어지므로 쉽게 읽을 수가 있다. 물론 <향연>을 읽는 것의 최종목표지점은 플라톤의 <국가>이다.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귀족 중심의 민주제, 즉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국가다. 특히 철인(哲人) 군주로서 이상적인 정치관을 확립한 플라톤으로서 <향연>은 그 이상적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의 기반을 다룰 수 있는 시작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서 군주란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무술을 연마해야 하며, 모든 어린 아이들은 모든 훌륭한 남성과 여성의 아이들이어야 한다. 공화국의 성립에서 가족의 개인적 이익으로부터 멀리하여 소년들은 모두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지만, 모두 형제 같은 우애를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향연>을 읽다보면 우린 문화적 충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을 말하면 가족 내지 연인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가치관을 보여준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면 아이가 생기나, 남자가 남자와 동침하면 지혜가 생긴다는 점이다.


고대그리스에서 여성의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스철학이 남성중심의 사회가 되는 이유는 그 시대는 도시국가 즉 폴리스를 중심이란 점이고, 폴리스 중심으로 각 구역다가 작은 국가들이 있었다. 국가의 존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에서 주요 임무를 담당하는 것은 남성이고, 지금처럼 무기가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전투기를 날리지 않는다. 인간 자신이 칼과 방패를 들고 직접 적 앞에서 달려들어 백병전을 겨루는 방식이다.

 

인구도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무기를 구입하고 지닐 수 있는 계급도 한정적이다. 폴리스에서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는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되는 성인남성만 가능했다. 이들이 직접 전쟁을 수행했고, 정치적인 결정을 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자기 자신이 강해야 했고, 직접 무기를 들고 적진을 향하여 돌격해야 한다면, 강한남자가 가장 이상적인 남성이 되는 것이다. <향연>에서 그런 사랑에서 남자끼리의 사랑 성인남성과 소년들의 사랑은 전투기술과 삶의 지혜를 배우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백병전을 하는 전쟁에서 병사들은 여자를 데리고 다닐 수 없으므로, 소년들을 병사를 만들기 위해 또는 성적인 불만요소를 해결하기 위해 소년을 애인으로 삼았다.


지금 현대인으로 이해할 수 없겠지만, 예술에서 인간의 미를 지금은 여성의 우아한 신체에 집중하나, 그리스시대에는 남성이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특히 헤라클레스와 같은 반인반신인 그는 완벽한 남성이고 그 자체가 미였다. 아름다운 존재는 바로 강하고 이상적인 남성인 점이고, 그들은 모험을 떠나 적들을 이기고 자신의 위용을 과시한다. 그런 점은 <향연>에서 이상적 인간상이 소크라테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던 사내는 소크라테스가 하루 종일 서있어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추운 날 다른 사람들은 온 몸을 옷으로 도배한 대신 소크라테스는 아주 간편한 차림으로 다니고, 심지어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 중에 소크라테스는 전우의 무기를 찾아오기도 한다.


보통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없는 행위들이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해내는 점에서 완벽한 인간이란 바로 소크라테스 같은 자라는 것이다. 그런 소크라테스는 <향연>에서 사랑이란 완벽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가 만나 아름다운 아이를 출산하여 그 아이가 아름다운 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생식기능이란 이상적 가치관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식기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인류의 번영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남녀 간의 사랑에 의해 아이가 탄생한다는 점이다.


그 관점이 두 사람의 사랑인지 아니면 소크라테스처럼 이상적 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랑에서 에로스의 개념이 다르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년에 대한 성인남성의 사랑처럼 우리는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와 특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데이몬이란 개념처럼 인간과 신은 분리되어 있는 존재지만, 인간이 신의 영역으로 가는 중간적 존재가 데이몬이란 말한다. 기독교에서 악마라는 데몬이 데이몬에서 시작되었으나(기독교에서 신과 인간은 완전한 분리), 신은 원래 완벽한 존재이라 더 이상의 변화는 필요 없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 완벽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랑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3가지가 있다. 개인적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에로스, 타인과 인류애적인 아가페,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필로소피아가 있다. 철학이란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고,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과정이란 것이다. 인간이 신이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나, 인간이 어떤 위대한 업적을 수행할 경우 신위를 사당에 모시고 그 업적을 기린다. 신이 된다는 것은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 존재적 위치는 인간이 지혜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모습처럼 그의 지혜로운 모습은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모습이다.

 

그것이 신에 대한 사랑이고, 그 사랑은 결코 멈출 수가 없는 과정이다. <향연>에서 말하는 사랑의 대상자는 바로 자신인 것 같았다. 아름다운 자신, 지혜로운 자신, 모든 것을 초월하려는 철인적인 인간, 그것이 바로 위대한 인간이고, 그런 인간들에게 많은 소년들이 구애를 보내어 그의 지혜를 소년들에게 전수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만든다는 점이다. 지금의 시대라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랑의 개념이겠지만, 적어도 생각해볼 점은 이상적인 삶에 대해 무엇인가에 대해 정도는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사랑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연민이라 하겠다.


철학의 개념이 현대에 오면서 다르게 되었다. 인간의 사랑이란 것은 세상에 불행한 사랑이 없어질 때까지 철학을 멈출 수가 없다고 하듯이,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다. 고통 받고 괴로운 사람이 있어서 그가 힘들어 할 때 내가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게 사랑이 아닌가 싶다. 물론 연민의 정은 내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에게 더 많이 느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후에 당분간 볼 수 없을 때 기다림에 지친 내 자신에게 연민을 느낄 것이고, 늙은 부모님의 야윈 모습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고, 뉴스에서 가난 때문에 전 가족이 죽음을 선택한 기사를 보면서도 연민을 느낄 것이다.


물론 연민의 감정만이 아니라 기쁨의 감정을 사랑에서 느끼겠지만, 연민의 감정이 나에겐 사랑이란 감정이라 본다. 왜냐하면 나와 내 주변 존재만이 아니라 나하고 전혀 관계없는 존재조차도 느끼는 연민의 감정이 있기에 우리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연민의 감정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 타인의 불행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그들의 불행에 빠진 절망을 비웃고 손가락질 하는 인간을 보면 과연 그들에겐 사랑이란 감정은 있을까? 사랑받지 못하면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사랑이란 말은 매우 단순하나 그 행위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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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31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 갈무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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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번과 마녀>에서 캘리번이란 영국의 대표 작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인물이다. 캘리번은 템페스트에 나오는 괴물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식민지 개척을 하던 영국의 당시 시대와 상당히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저자는 대표적인 여성학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노동운동가이기도 하다. 모든 세상의 착취와 폭력이 최종적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공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실비아 페데리치는 단순히 여성에게만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대한 사회적 박탈감이 남녀 간의 갈등으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남녀문제는 단순 남녀만의 성적인 문제, 즉 섹슈얼리티 내지 젠더적인 요소만 아니라 하나의 계급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 텍스트를 충실히 활용하기도 하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가난한 노동자는 각종 노동과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그 노동자의 아내와 딸은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부르주아의 놀이(창부)가 되는 시대상을 고발한다. 하지만 실비아처럼 구체적으로 여성의 지위적인 측면에서 조금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남녀평등에 대한 계기는 프랑스혁명 시기에 거론되었지만, 혁명의 주도권은 남성에 있었고,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을 저술하고, 마르크스는 남녀문제를 단순히 성에 대한 부분보단 단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갈등으로 그렸다. 하지만 너무 계급의식에 치중한 나머지 남녀문제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클로저라는 공공의 재산을 어느 특정세력이 독차지하는 현상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에선 16세기 초에 강렬한 농민의 몰락을 적고, 농민들은 도시로 가게 되어 빈곤층이 되고, 그 문제에 왕국의 처방은 거리의 거지에 대한 무한적으로 노동착취를 할 수 있게 하는 점, 그래도 거지생활을 하면 고문과 처벌하고, 최종적으로 교수형에 처한다. 마녀사냥의 시작 시점은 바로 영국에서 일어난 농지에 대한 인클로저에서 보고 있으며, 이것은 16세기부터 17세기에 광란으로 일어난 마녀사냥과 연결되는 것이다. 광적인 마녀사냥은 아마 인류문명이 시작된 이래 가장 잔혹하고 어리석고 무서운 역사다.


십자군 원정과 페스트 창궐이 유령처럼 지나가자, 인구의 감퇴, 봉건기사단의 몰락, 농지의 황폐화, 그리고 농경산업에서 무역중심의 상공업으로 변경된다. 콜럼버스나 마젤란 같은 탐험가들은 사실 탐험이 목적이 아니라 무역을 위해 세계를 누비고, 그 무역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가속화한다. 농경사회는 봉건영주의 권한이 유지되었다면, 중앙집권적인 절대왕권은 모든 것을 왕의 권한에 의해 결정되어야 했다. 경제에서 주화와 화폐의 관리는 결국 모든 것을 왕이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제공한다.

 

이런 문제는 상부계급과 달리 하부계급에 큰 부담으로 이어진다. 세금의 공납에 대한 갈등도 있겠지만, 농지의 몰수, 대규모집단 농장, 그리고 공업의 분업화는 인력을 감축하게 된 것이다. 인력의 감축으로 제일 끔찍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생명은 소중하나, 인간의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고 우리 인간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그 생명이 나오는 여성, 즉 어머니가 아이를 죽이는 일이다. 유아살해는 인류문명에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죄악 중에 하나다. 하지만 그녀들이 아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혹은 그것에 대한 대안은 여전히 최악인 것이다.


인류의 영속은 바로 어머니의 신체로부터이나, 바로 저 신체를 통제하고 관리하고 억압하는 것이 마녀사냥하고 이어진다. 아이를 죽이는 여자는 국가에서 처음에 일반적인 형벌에서 교수형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인구의 축소는 바로 무역정책을 군사작전과 연결하던 시기에 군사력을 모우는 것에 큰 방해거리다. 대외적으로 파견되는 군인들은 자국민으로 구성되어야 했지만, 그들은 갈 곳 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이었다. 그 후 식민지를 개척하고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잡아와서 노예로 부린다.


노예는 재산이고, 금전적 부담이 없으므로 기존 노동자와 농민들은 그들과 경쟁하는 구도가 된다. 가령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조선인과 중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반항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임금에 대한 갈등으로 서로 대립하게 한 방법도 있었다. 사회적 불만을 구조적인 방법이 아니라 단지 그 분노를 받아줄 대상을 억지로 만들어준 것이다. 일반 민중은 어리석었다.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에서 관념적인 판단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찾을 수 없었고, 단지 형이하학적으로 보이는 물리적 대상에 대해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자본주의 가속화는 이런 부조리를 더 키우고, 모순을 더 골 깊이 만들어버린다. 마녀사냥은 바로 그런 사회적 문제를 구조적 해결이 아니라 그 구조의 상부가 하부의 토대를 붕괴하는 것과 같다. 이 책에서 여성 중에 특히 노인여성에 대한 탄압이 심한 것으로 나오는데, 우선 노인여성들은 노인남성보다 수명이 길고 민간치료사로서 활동했으며, 특히 출산 시에 산부인과 의사 겸 의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민간에서 노인여성의 활동력은 국가지배자 입장에서 거슬리는 존재였다. 15세기에 농민반란과 봉기가 거칠게 일어난 시기다.

 

노인여성들은 그 사회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민간생활의 지혜를 알고 있었기에 국가에 대한 반란이나 봉기에서 그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많은 노인여성들이 빈곤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원한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런 노인들이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우선, 그들이 알고 있는 지혜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토지몰수와 공유지 독식으로 노인여성의 살림을 어렵게 했다. 그녀들은 이웃과 친구에게 의탁하여 생활을 영위했으나, 그것도 부족하면 구호기관에 빈민대장에 올리지만, 그것조차 무너졌다. 기독교 내 신교혁명 이후 그들의 가난을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 태만으로 여겼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뭉치고, 같이 연합하고, 이런저런 일을 돕지만, 의술을 시술했다는 이유로 반국가적인 죄인으로 몰려 사형 당한다. 기술의 발전, 특히 의학은 기존 민간치료사와 산부인의 대리자를 노인여성에서 지식인 남성으로 교대한다. 해부학의 발전, 과학의 발달, 그리고 기계론적인 철학은 인간의 자연성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감정에서 감정은 쓸데없는 것이고, 이성을 중시하며, 그 이성이란 단어는 오히려 야만에 가까운 편집증에 이르게 된다. 마녀사냥이 데카르트, 베이컨, 라이프니츠 전후로 더 심각해진 것을 보면 참으로 어이없어 보였다.


계몽주의 발달은 합리주의 과학철학에서 나오나, 그 자들이 오히려 비과학적인 방법을 유도하게 만들었고, 게다가 마녀사냥만이 아니라 동물의 감정이 없다고 여기는 데카르트식의 이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는 동물을 잔혹하게 다루고, 피지배계급인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 무작위적 착취를 인정하게 된다. 마녀사냥에서 이런 피지배계급에 대한 통제와 관리, 그리고 억압과 탄압은 피지배계급 내의 대립관계를 만들고, 여성에 대한 철저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생각하면 프랑스대혁명 시기 혁명의 운동에서 여성이 상당히 강력했으며, 어떤 헛소문(마리 앙투와네트가 외국에 도피하다 실패하여 궁에 갇히는데, 그녀가 상당히 좋은 음식을 먹고 잘 지낸다는 이야기)을 들은 시장의 아낙네들은 왕비와 근위병이 있는 궁으로 쳐들어왔다.


약 2만 명에 가까운 시장 아낙네들은 생선조리용 칼을 들고 공격하여, 길을 가로막은 근위병을 목을 자르고 궁 안까지 돌격한다. 게다가 프랑스대혁명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러시아혁명에서 혁명의 시작점은 역시 여성들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경제가 침체된 러시아에서 다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식량이 부족하자 2월 혁명이 발발되고, 그 운동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 여성들은 젊은 아가씨가 아니라 아이를 가지고 있던 주부들이었다. 혁명의 시작에서 그들은 경제적, 사회적 모순이 자신의 생명만 아니라 가족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에 과격해지는 것이다.


현실에서 보면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라는 말이 실감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을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출산만이 아니라 양육에 관여하므로 만약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아이들에게 주입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가정 내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 공장, 군대, 병원, 감옥, 회사 등 인간의 눈과 눈이 겹치는 곳에 사회성 내지 단체생활의 이름 아래 사람을 조작하고 개조한다. 감옥의 역사인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 시스템 자체가 마녀사냥의 연계성이란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인간에 대한 감시와 처벌 시스템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전략하게 되고, 과학적 인간은 중세시대 인간처럼 인간이란 신비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기계로 보는 것이다. 노동시간의 길이나 착취강도, 식량배급조차도 척도화 되고, 인간은 인간을 해방이 아니라 더 억압하고 옭아매는 것이다. 마녀사냥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교회의 권력만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주의 관계로서 파악하는 것은 마녀사냥은 16~17세기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식민지에서 원주민들은 감정이 풍부하고 서로 공동체 생활을 추구했지만, 서구사회는 이것을 반대했다.


자발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저항세력이 이어지고, 특히 현대사회처럼 아파트 같은 경우, 공간적으로 인간을 수용소에 집어넣는 효율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의 일반의지가 아니라 개인의지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인 계약이 되는 시점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인간을 분리하여 서로를 이웃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가까운 적으로 두는 것이다. 자기소유애가 강한 자본주의 경제체계에서 타인의 절망은 나와는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자신의 불행은 타인에게 그저 쇼에 불과하다. 그런 것이 마녀사냥과 이어진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발견이다.

 

마녀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마녀사냥은 누구나 마녀심판자가 될 수 있지만, 누구나 마녀로 내몰려 죽을 수 있다. 예전처럼 생물학적인 죽음은 면할 수 있지만, 대신에 사회적인 죽음으로 이어진다. 누군가 하나의 이슈로서 사회적 지탄과 비난이 지속되면 그 대상과 가족들은 살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그 지목당한 대상자가 죄를 지었다면 모르나, 오히려 부당한 일에 처하여 사회적 모순에 반발하다 더욱 더 억압당하는 일들이 넘치는 현실이다. 이 글을 적는 나도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마녀 재판관이자 마녀사냥의 희생양 후보자란 사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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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프레임 -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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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프레임>이란 책을 읽으면서 마녀는 옛날 중세이후 혹은 르네상스 시대 전후까지 존재한 자들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만들어지는 존재다. <마녀 프레임>이란 제목처럼 마녀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마녀는 단순히 선천적으로 하늘을 날고 인간을 유혹하는 무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진 피해자들이었다. 피해자들이 오히려 죄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화형이 처해지는 시대에 우린 왜 그들이 그런 비참한 운명에 쓰러질 수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

 

 

볼테르의 기록처럼 1780년대까지 마녀사냥은 존재했고, 당시 계몽주의자였던 볼테르는 마녀사냥에 대한 무지한 폭력에 큰 비난을 날린 것을 알 수 있다. 마녀는 실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지만 그래도 존재해야만 했던 자들이다. 왜 그런 것인가? 일단 마녀사냥 기원은 십자군 원정 실패와 페스트 창궐 이후 유럽의 암울하고 비관적인 사태는 당대 권력자인 왕권과 교회에 대해 심한 의문과 반발을 일으켰다. 국가가 그 당시 농노나 장인에 대해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제대로 살기가 어려웠다.

 

 

국가와 교회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면서 이단의 존재가 부각된다. 이단의 존재가 도시 한복판에서 나올 리가 없다. 그들은 자연이나 농촌 같이 외부 쪽에서 등장했다. 특히 중세의 겨울과 백년전쟁 전후에 마녀에 대한 환상은 국가와 교회의 지배 권력이 약해지면서 그 책임을 자신들의 체계가 아니라 다른 희생양을 처단하는 것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특히 그 사회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권력을 지닌 자들은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수단이란 폭력의 합법성이다. 그 합법성을 찾는 방법은 자기들만의 법칙을 만들고, 그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것이다.

 

 

특히 반국가, 반봉건, 반교회적 세력에 대한 처단 혹은 그런 대상이 아니더라도 본보기를 위해서라면 군중을 하나로 단결하기보단 그들을 각자 의심하고 불안하게 만들어 모두 권력에 의지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가혹한 마녀사냥에서 처음에 교수형으로 끝날 형벌이 참수, 능지처참, 화형 등 각종 끔찍한 사형 그리고 고문방법이 동원되었다. 지금이야 마녀가 있다고 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마녀를 찾아 처단하는 마녀심판(사냥)을 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미쳤다고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 마녀라는 이름을 가진 마녀희생자들은 사라졌지만, 그 마녀 대신 새로운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단지 그들은 마녀가 아니라 다른 올가미에 엮어 새로운 희생자들이 되어야 했다. 이택광 교수가 <마녀 프레임>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마녀의 역사보단 마녀로 몰아가는 사회다.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그것은 결국 현실 사회에 큰 모순이 새로운 변화와 흐름에 역행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구시대적 발상을 남발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란 과학적 지식이 배제된 신화화된 사회로 이어지고, 이미 검증되지 않았는데도 사회적 분란자 내지 반역자로 몰아세우고,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계속 그들을 적으로 몰고 간다. 이런 방식은 사회적 갈등과 책임소재를 지배계급의 문제점으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반대되거나 또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반대세력까지 끌어당긴다. 한국에서 마녀사냥은 최근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군사독재정권과 한국전쟁에 큰 피해를 일으켰다. 조선시대에 정조가 승하하자 노론세력은 시파인 남인들을 모두 천주교도로 몰아 유배 내지 처형시켰다.

 

 

당시 천주교가 성행한 이유 새로운 문물에 대한 지식인(특히 양반계층)들의 관심이 있었으나, 현실 정치에서 발견되는 모순에서 천주교의 확대가 널리 퍼진 것이다. 게다가 대원군 시대에는 새로운 문물이 유교국가 조선에 큰 혼란을 줄까봐 쇄국정책을 일삼고, 최후에 세계열광의 욕망 아래 집어 삼켜져버린다. 지금 우리사회에 부익부 빈익빈 역시 사회적 갈등과 모순으로 이어진다. 이런 시기에 경제적 불평등을 제기하는 순간 반국가 세력으로 지목하게 만들고, 언론의 공정치 못한 정보는 중세유럽의 마녀사냥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중세유럽처럼 사람의 사지를 찢거나 혹은 불을 태우지 않지만, 대신 육체적 죽음보단 사회적 죽음으로 몰고 간다. 사회적 약자의 몰락과 비참한 현실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현실을 비웃거나 또는 자신이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우월의식까지 느낀다. 사회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으로 과학적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이 올바른 선택지점이나 오히려 미신적 망상에 의해 엉뚱한 길로 걸어가고 있다. 이 책에서는 마녀사냥 효과를 인쇄술의 발달로 보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로 <마녀의 해머>라는 책이 널리 보급되어 과학적인 마녀식별방법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당시에 하나의 과학이라 해도 그 역시 미신적 망상에 의해 만들어진 과학이다. 이런 비과학성이 과학성으로 인정받고, 그것이 다양한 계층에 정보로 이어진다. 문자문화의 보급에서 책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면, 현대의 마녀사냥이 더욱 무서운 이유는 미디어라는 영상매체는 스펙타클로서 현실에 반영된다. 범죄를 공모한 것도 아니나, 마치 그렇게 언론(독재기관에 사주를 받은)에서 조작하여 억울하게 죽거나 고문당한 많았다. 많은 군중들은 미디어로 통해 그들이 마치 세상의 암 덩어리로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살아있으나 죽어 있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최근 21세기 경우 인터넷의 보급과 정보화시대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인터넷 매체에 개인정보 신상이 노출되어 곤혹을 치루는 사람들이 있다면, 극우사이트에는 각종 인종차별과 남녀차별, 비인간적인 욕설들이 퍼져가고 있다.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던 마녀사냥은 거의 끝났을지는 모르나, 아직까지 무고한 사람들이 계속 희생당하는 것은 여전한 비극적 현실이다. 마녀는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정신적으로 존재한다. 바로 이성의 판단과 연민의 감정을 상실하여 광기가 넘친 교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말이다.

 

 

거기서 마녀는 마녀로 지목되어 벌을 받는 자가 아니라 그 마녀를 억지로 만들어 내어 자신들의 정의를 관철하려는 광신도들이다. 전투적 메시아주의는 그런 무리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마치 순교자인양 영웅주의 행세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폭력적 광기는 인간 스스로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넘어설 때 비로소 극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더 심한 광기의 세계로 가고 있다. 정신병원을 만든 이유는 정신병원에 수감된 자가 있어서 마치 정신병원에 밖에 있는 자들이 정신병이 없다고 여긴다고 보나,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거대한 정신병원(精神病院)이 아니라 정신병국((精神病國)을 만드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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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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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를 한자 사자성어로 말하자면 인생이란 바로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허삼관이 살아온 인생이란 연속적인 희망과 좌절, 아픔과 기쁨, 산으로 올라가다 바다 아래까지 들어가는 다양한 굴곡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허삼관 매혈기>를 단순히 허삼관이란 가상의 인물에 대해 적은 글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이 소설은 시(소설)처럼 당시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요, 그것은 더 나아가 우리 같은 보통 남자의 이야기다.


물론 허삼관만 주인공이라 하여 허삼관만 중요인물만 아니다. 그의 아내 허옥란, 세 명의 아들, 허소용, 임분방, 혈두, 같이 피를 팔아 돈을 받은 사람들 모두 우리의 모습이고 이웃이다. 허삼관은 그렇게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누구보다 위대한 아버지와 남편이었다. 그의 행동을 보자면 소심하고, 때로는 잘 삐치고, 어찌 보면 너무 바보 같은 남자였다. 때로는 과감하기도 하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기도 하고, 상상 이상으로 현명하기도 했다. 모든 인간이 언제나 같은 모습과 같은 얼굴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상황에 따라 인격과 감정이 실시간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모든 것이 변해도 그가 인간적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너무 인간적이라 감정에 말려 들어가는 그는 때로는 충동적이기도 했다. <허삼관 매혈기(許三觀 賣血記)>는 제목을 보면 성이 許씨로 허락하거나 들어주는 것이고, 삼관은 3가지를 보는 것이다. 그의 이름처럼 그가 3가지를 보는 것은 바로 3아들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름은 남편과 아버지로 살아가고, 일락이와 이락이 그리고 삼락이라는 즐거움을 주는 3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은 결국 피를 팔아 가족을 만들고(결혼), 가족을 지키며(대기근), 가족을 살렸다(일락이의 간염).


한 남자가 자신의 피를 팔아 가족 안에서 보인 행동은 인생굴곡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피를 팔아보면서 단 1번도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다. 단지 허옥란과의 결혼은 자신을 위한 것이겠지만, 가족의 탄생은 어느 한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가족과 가족이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키는 것과 같다. 허삼관의 아버지는 잘생긴 남자고, 어머니는 상당한 미녀이나, 아버지 죽은 이후에 어느 대령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한다. 가족이 없던 허삼관에게 가족을 만드는 것이란 자신이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어린 시절 혼자 외로이 걷다가 작은 아버지의 구조 아래 겨우 청년이 된 허삼관은 작은 아버지 넓은 등에 업혀온 기억을 절대 잊지 않는다. 일락이가 비록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지만, 일락이의 모습과 행동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공허감과 일락이에 대한 사랑은 어린 시절 자신의 작은 아버지가 한 것처럼 일락이에게도 보여준다. 낳아주신 아버지 이상으로 길러주는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허삼관은 그래서 그 어디서나 보일 수 있는 아버지, 보통 사람이 가족이란 공동체로 어떤 삶을 사는지 보여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배고픔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피를 팔고, 자신의 생일에 아이들에게 고기를 아내에게 붕어찜을 해주는 그의 모습은 참 애처롭다. 자신의 아내가 창녀라고 모함당해 인민재판을 당할 때, 그 장소가 집으로 옮겨지자, 아들들은 어머니 허옥란 대신 인간 허옥란에 대한 비판을 한다. 그때 어머니의 과거 부정을 모두 지적하자, 허삼관은 자신이 예전에 임분방이란 여자와 정을 통한 것을 아들들에게 고백하여 아내의 허물을 자신의 허물로 덮어준다. 물론 사리로 따지자면 아내의 부정은 아내가 원한 게 아니라 허소용에게 억지로 강간당한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게 일락이었다.


일락의 정체성을 알게 되면서 화가 난 허삼관은 젊은 시절 허옥란과 임분방 사이에 고민한 것을 기억하고, 임분방과 홧김에 정을 통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직접 아이들에게 하고, 아내를 자식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준 모습에서 그의 가족사랑은 처음에 거부와 배타로 시작하나 마지막엔 포용으로 이어진다. 너무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그였지만, 때로는 인간의 감정 아래 연민의 손길을 가족에게 건네준다.


그런다고 하여 <허삼관 매혈기>는 단순히 허삼관란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 가족과 주변만 적는 게 아니다. 문화대혁명 시기와 모택동의 정치적 행위가 시골에 미치는 모습에서 당시 시대적 모순도 보여준다. 집안에 있는 모든 살림기구와 식량을 정부에서 강제로 징발하여 어느 일정한 장소에서 배급하는 점이나, 대기근시절 정부에서 아무런 조치 없이 주민들에게 알아서 해결하라는 점, 일락과 이락이 정부운영에 따라 일손으로 차출될 때 정부 관료의 부패한 모습은 허삼관의 피를 팔게 만들었다.


허삼관이 피를 판 것은 분명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지만, 때로는 피를 국민들에게 훔쳐내는 부조리한 세계도 한 몫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허삼관의 피는 가족의 존속, 국가의 약탈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생명이었다. 그러나 치아가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허삼관의 피는 더 이상 팔아넘기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피를 팔지 못한 것에 대해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눈물을 흘린다. 허삼관의 모습을 본 동네사람들은 그의 아내와 아들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자, 허삼관에게 찾아간 가족들은 그를 달랜 후 허옥란은 허삼관을 데리고 남편이 피를 판 후에 자주 가던 승리반점에 같이 간다. 그리고 허옥란은 남편이 좋아하는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시켜주자, 허삼관은 이때까지 이렇게 맛있는 돼지간볶음은 처음이라 한다.


이때까지 여기서 먹은 것은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먹었던 돼지간볶음이 이제는 자신을 위해 먹는 돼지간볶음이다. 힘들고 고된 시간을 보내고, 가족을 지키고, 아들들은 모두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잘 살아간다. 그런 허삼관에게 자신의 삶은 행복했는지 아닌지는 직접 말하지 않으나, 적어도 마지막 그가 한 말을 다르게 생각하면 그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해주고 있다. 우리 인생도 허삼관처럼 굴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에게 말해주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우리 역시 근엄한 얼굴로 언젠가 그게 인생이 아니겠냐고 떳떳하게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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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엘로이즈 2 루소전집 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책세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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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은 루소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이 있는 계몽주의 청년들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들고 있었고, 여자들은 <신엘로이즈>와 <에밀>을 읽었다. 사실 프랑스공화국이 세우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으나 그 사상적 근본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루소가 유명하게 된 동기는 <신엘로이즈>와 <에밀> 덕분이었다. 특히 <신엘로이즈>의 열풍은 상당한 열기를 만든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보수나 진보진영 그리고 그 누구라도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은 루소에 대해 찬양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인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 당통 같은 자코뱅당원들이 있었으나, 이에 반해 지롱드에서 활동한 롤랑 부인 역시 루소의 열렬한 팬이었다. 롤랑 부인은 귀족의 아내였고, 당시 여성이 정치적으로 배제된 상황이라고 했으나, 그녀는 프랑스혁명의 여걸이었으며, 단두대 아래 목이 잘려 나가기 전에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라고 외친다. 롤랑 부인이 프랑스혁명에 참가할 때 루소의 <신엘로이즈>라는 소설에 빠져들어 루소가 살아생전에도 열렬히 루소를 사모했다.


 

루소의 <신엘로이즈>는 보면 단순히 생각하면 쥘리 데탕주와 생 프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은 연애소설로 볼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소설은 현실의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생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다룬 서적이다. 겉으로 본다면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철학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책이다. 게다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에밀>을 읽다보면 <신엘로이즈>는 루소 저작의 다양한 사상과 가치가 하나의 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엘로이즈1>을 보면 보통 연애소설처럼 사랑하던 남녀가 현실적 운명 앞에 헤어지면, 남자는 멀리 여행을 가는 결말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다시 돌아와서 재회한다면? 게다가 그 재회의 장소가 그 사랑하던 그녀가 남편과 자녀들이랑 같이 사는 집이라면? <신엘로이즈2>를 읽는 순간 운명의 장난 앞에서도 과거 사랑했던 연인이 이제는 다른 인연으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거친 바다로 나간 생 프뢰, 그는 목숨을 몇 번의 위협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다. 거친 바다생활에서 세계를 바라본 생 프뢰는 루소의 자연주의적인 가치관이 그대로 편지 속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산업이라는 것이 개화된 사람을 그에게 부족할 것이 전혀 없는 은둔으로부터 끌어내어 새로운 욕망의 구렁텅이에 다시 빠트리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라고 보낸다. 문명화가 되지 않은 미개한 영토에 가서 그 영토와 그 영토의 주인인 원주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인이란 야만족들의 폭력에 생 프뢰는 깊은 아픔을 느꼈다.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을 한탄한다.


 

“자연은 인간이 눈에 자신의 진정한 매력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인간은 그 매력에 너무 둔감하고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훼손시키지요. 자연은 인간의 자주 찾아오는 곳은 피해요. 자연에 가장 감동적인 매력을 떨치는 곳은 산 정상, 깊은 숲 속, 인적이 닿지 않은 섬들이에요. 자연을 사랑하지만 그렇게 멀리 자연을 찾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자연에 폭력을 쓰게 됩니다. 말하자면 자기들에게 와서 함께 살 것은 자연에 강요하지요. 그런 일에는 어느 정도 환상이 따르기 마련이에요.”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이 파괴되면 다시 인간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말한다. 쥘리의 집을 보면 분명 쥘리는 집 주인 볼마르의 아내이나, 그녀는 먹을 만큼만 먹고 남는 것은 저장하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도와주기를 권했다. 억지로 땅을 사서 빼앗는 게 아니라 자신의 땅을 정성스레 가꾸어 그곳에서 좋은 곡식을 나오도록 했다. 집안에 하녀와 주인의 관계는 명확하나, 그 관계의 유지는 미덕과 포용에 의해서였고, 하인들이 집안에서 일한 뒤 식사를 한다면 같이 식탁을 이용하도록 했다.


 

제 아무리 계급이나 지위가 다르더라도 쥘리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그 자체로서 대해준 것이다.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에서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자라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것이 옳겠지만, 인간의 세상은 이미 사회화가 되었기 때문에 도시에 사는 사람 모두 자연으로 갈 수 없다. 루소가 말한 자연이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고, 그것은 인간의 선한 감정으로 돌아가란 뜻이다. <신엘로이즈>는 인간이 가진 이성을 우외로 두기 시작한 계몽주의 시대에 나온 소설이다. 그 자신이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 반계몽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진 루소는 이성보단 감정이란 것을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가령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감정적인 것을 배제하는 볼마르의 경우, 마지막엔 쥘리의 죽음 아래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분리할 수 없는 존재적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쥘리의 죽음에 볼마르는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성과 감정의 싸움에서 최종승리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 감정에는 쥘리의 마음에 깃든 자연적인 감정 즉 미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신엘로이즈>는 미덕을 상당히 강조한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로코코시대로 탐미주의가 문화적으로 주도했다.

 

여성은 수많은 남자 애인을 두고, 남자들은 여자꽁무니 쫓아 따라 다닌다. 파리의 사교계를 보자면 바보들의 천국이라 볼 수 있다. <신엘로이즈2>에서 “파리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교계를 안락하고 수월하게 만드는 것을 뽐내는데 이 수월성은 다름 아닌 그 거드름에 관한 규칙에서 나온다. 상류사회에는 오직 관습과 규칙밖에 없다. 이 모든 관습은 번개처럼 생기고 사라진다. 오늘날의 관습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해지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다)이 세상을 흘러가게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허망한 욕심과 이기심들이 인간과 자연을 파괴한 것이다. 그 당시 결혼문화는 쥘리의 모습처럼 어린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 시집간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다행히 쥘리는 남편의 인격에 사랑을 느낀다)과 살아가는 것은 결국 지옥과 같은 세상이고, 거기에 많은 파리의 남녀들은 타인의 부부를 탐하고 욕망했다. 이런 욕망과 이기심은 여기에 끝나지 않고, 자기 후손에게 이어졌다.


 

나이가 어린 아이에게 마치 천재로 생각하고, 억지로 밀어 넣은 지식 앞에 아이들은 자기의 본질적인 삶을 찾아가지 못하고, 이기심과 교만심만 늘어만 가고, 나중에 남에 도움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육현실을 보면 루소의 선견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신엘로이즈>에서 쥘리가 말하는 교육가치관은 후에 <에밀>에 이어진다. <에밀>을 읽다보면 쥘 리가 한 대사하고 많은 유관성을 가진다. 진정한 아이의 스승은 아버지고, 그 아버지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아이 역시 제대로 될 수 없다. 아이의 교육은 바로 아이에게 시작되는 게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에밀>과 <신엘로이즈>의 유사성은 <에밀>에서 에밀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는 독신인 남성이고, 친한 친구에게 아들을 위탁받아 교육을 시킨다. 그 친구는 가난한 귀족이나, 이제 아이를 기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친구에게 가정교사를 부탁한다. 그런 점을 본다면 <신엘로이즈>에서 쥘리는 병으로 인해 죽고, 병으로 죽기 전에 생 프뢰에게 자신의 아들을 가르쳐주기 바란다. 원래 생 프뢰는 쥘리와 쥘리의 사촌인 클레르의 가정교사였고, 결혼 후에 자신의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에밀>을 읽어보면 에밀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는 <신엘로이즈>의 생 프뢰라는 점은 그렇게 맞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이에 대한 인권을 존중하고, 아이 그 자체를 자연적 존재로 보는 <에밀>에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동등하다는 평등사상은 결국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에밀>은 인간의 자연적 그리고 도덕적 자유를 위한 도서이다. 남들에 의해 길들어진 인간은 나약하여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아마 그런 완벽한 인간은 <신엘로이즈>의 쥘리였을 것이다. 열정적인 감정과 미덕으로 자연 그 자체를 살려내어주고, 인간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유럽의 여성들은 쥘리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신엘로이즈1>에서 쥘리는 생 프뢰에게 “당신은 ‘우리 서로 사랑하기 위해 살자’라고 말했는데, 그건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아아! 이렇게 말했어야 해요. 살시 위해 우리는 서로 사랑하자‘라고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그저 허례허식과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온 여성들, 특히 로코코 시대의 불륜적인 로맨스는 상위계층 여성들이 주로 즐겼다. 하급계급 내지 가난한 사람들은 늘 생계에 고단함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18세기까지 책 1권이 매우 비싼 물건이었고, 그 가격은 보통 가정이 2주 동안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상위계층 또는 부르주아 계층의 여성 정도였을 것이다.

 

여성은 정치적으로 배제되고, 문자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어려운 시대만큼 루소의 서적은 당시 여가생활을 책으로 찾을 수밖에 없던 여성에게 매우 큰 화제가 된 것이다. 편지에서 보여주는 사심 없이 오로지 진심으로 이루어진 문체와 아름다운 글의 흐름은 그녀들의 눈을 사로잡기가 충분했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그것에 대해 뛰어넘어 보자고 했던 루소의 소설 <신엘로이즈>는 낭만주의 소설의 모태가 되었다. <신엘로이즈2>에서 번역자 김중현 교수의 해설을 읽어보면 “낭만주의자들은 루소를 ‘자연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언자, 감정과 열의 원초적 힘을 재발견하고 이를 사회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사상가’라고 평가하며, 바로 <신엘로이즈>가 그러한 평가의 시발점이 되었다.”

 

 

문명에 의한 자연의 파괴는 결국 인간에 대한 파괴로 이어지는 것처럼 루소의 가치관은 세상의 중심은 권력층이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라의 힘을 가늠할 때 재사(才士)는 군주의 궁정과 항구, 군대, 병기고, 도시들을 보러 갑니다. 반면에 진정한 정치가는 경작지를 돌아보며 농부들의 초가집으로 갑니다. 전자는 그 나라 국민이 무엇을 해 놓았는지 보고 후자는 그 나라의 국민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봅니다.”

 

 

이게 단순히 연애소설이었다면 이런 글이 나올 수가 없다. 낭만주의소설로서 정치와 사회에 대한 루소의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민주주의국가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정치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이런 문구는 평생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글이다. 루소는 시골에 사는 농촌주민들을 자연인으로 보았다. 바로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그 나라의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 본 것이다.

 

 

루소의 <신엘로이즈>를 읽어보면서 이 소설은 18세기 중반에 나온 도서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순간 21세기 인간이 나 역시 많은 깨우침을 가져간다. 물론 종교적 가치관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에 대해 부정할 수 없다. 물질문명에 빠져들어 인간성의 본질적 의식 대신 기계적인 의식만 주입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 스스로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신엘로이즈>에서 이런 대사가 인상 깊다.


 

“우리의 욕구 중 가장 큰 욕구이자 우리가 만족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욕구는 욕구를 느끼려는 욕구이며, 우리가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을 그 비참을 아는 거예요. 지혜로워지기 위해 우리는 강해질 거예요.”, “고통 없이 사는 것은 인간의 상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사는 것은 죽어있는 거예요. 신이 아니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비참한 인간일 거예요. 그는 욕망하는 기쁨을 박탈당할 거예요. 다른 모든 박탈이 이것보다는 더 견딜만한 거예요.” 우리 인간이 자연적 그 존재를 상실하고, 기계적 물질만능주의로 변모하여 스스로 삶의 의지조차 찾지 못한다. 물론 그것을 깨닫는 것은 인간 그 본인이다. 그 본인을 찾아가는 것이 곧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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