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 동백 숲길 맑은 그늘 물 끝난 곳 구름 이네
정민 지음, 김춘호 사진 / 글항아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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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동양에 있는 국가이나, 현재는 서구사회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 서구화가 되었다. 물론 국제사회 동향과 미래에 대한 움직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고, 앞으로 그런 추세를 맞추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구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 중세유럽과 르네상스 이전인 16세기까지 농업중심에서 17세기부터 목축업이 성행하였고, 19세기부터 공업이 발달하여 상업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산업구조가 농업, 공업, 상업으로 이어지고 20세기는 많은 사람들이 서비스산업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부터는 다른 산업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문화를 향유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경제단위의 확대로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게다가 대규모공업화와 농업의 기계화 도입은 대량생산으로 이어지고, 단기적인 인구증가는 직업체계에서 누구나 회사, 공장, 농사, 장사만 한다고 하여 그 수요를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직업을 찾아봐야 할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대안이 되는 사업이란 바로 문화산업이다. 문화산업은 하루아침에 바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가꾸고 자라면 크게 꽃을 피우는 과실수와 같다. 흔히 예술과 철학을 말한다면 분명 프랑스와 영국을 생각할 것이다. 미국은 자유주의 정치에서 하버드대학교를 생각하겠지만, 예술로선 유럽에 미치지 못한다.

 

파리에 위치한 베르사유의 궁이나 루브르박물관은 세계적인 예술품이 있어서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쇄도한다. 그들이 파리의 문화를 즐기면 그 거리의 식당이나 문화 상품을 파는 곳도 성행한다. 그에 따라 상업이 발달하고, 음식을 먹으면 농산업이 유지되며, 상품을 만드는 공장이나 수공업자도 이어져간다. 문화산업은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주는 경제적 돌파구다. 하지만 문화산업은 결코 무에서 유로 되는 게 아니다. 그 무의 공간을 만들어줄 기본적인 베이스가 필요하다. 한국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의 농업 국가였고, 해방이후 근대화시절에 공업과 상업이 발달했다.

 

대규모 공업은 처음에 많은 노동인력을 필요하게 되었으나, 기계의 발달은 인력을 감축하고, 서비스산업이란 사업이 발달한다. 하지만 이젠 서비스산업도 소비하는 주체인 소비자의 소비능력 감퇴로 과소소비의 한계에 도달했다. 산업구조가 더 이상 기존체계로는 무리고, 앞으로 다른 산업이 필요하고, 여기에 대한 인력과 투자개발은 새로운 직업군을 필요하게 된다. 문화산업의 기반은 바로 인문학적 소양과 창의적인 생활 그리고 문화적 베이스가 되는 그 민족만의 특이성이다. 한국에서는 아마 위에 3가지 모두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인문학 전공자가 줄어들어 그들이 사회에 나가면 생계가 힘든 세상이고, 문과계열은 취업위주의 교육을 추구하여 문화적인 소양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겁다. 이런 사회적 구조와 교육현실은 학생들에게 창의적인 사고를 모두 막아버리게 되고, 그들에게 문화적 생산력을 기대할 수 없다. 특히 한국처럼 mass culture 즉 대중문화를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다른 하위문화나 고급문화 또는 counter culture 같은 반문화를 찾을 수가 없다. 결국 다양성이 문화산업의 기반이고 에너지다.

 

세계화로 통해 우리를 서구사회의 틀이란 옷을 입는 것도 좋으나 가끔은 우리만의 옷을 찾아 입는 것도 필요하다. 옆 나라 일본이나 유럽의 국가에선 자기만의 특유문화를 살려 관광 사업으로 만들거나 또는 관련 상품으로 제작한다. 스토리텔링으로서 문학, 연극, 영화, 만화, 게임 등으로 새롭게 재생산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문화를 지키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여 다시 발굴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립뿐만 아니라 새로운 산업아이템을 만들어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에서는 각 마을의 특성을 살려 축제라는 행사를 개최하는 일이 많아졌다. 축제에서 단지 먹고 노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가치관을 부여한다면 그 행사는 더욱 값진 것으로 변한다.

 

하지만 이런 축제와 행사의 질을 올리는 것은 문화적 유산이 기반 되어야 한다. 황무지 위에 씨앗을 뿌려도 꽃이 피기는커녕 나무줄기조차 올라가지 않는다. 이번에 읽어본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은 기존에 내가 가진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대만권역에서는 다도문화에 대한 교류가 있다. 중국 운남성의 보이차, 일본의 말차 같은 것들이 유명하다. 한국의 대표차로는 작설이 있을 것이다. 다도문화와 관련하여 다산 정약용 선생은 차를 마시면 나라가 흥하고, 술을 마시면 나라는 망한다.”고 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문화의 보존만이 아니라 건강을 챙기고, 차는 선비들의 독서생활에서 즐기던 것이므로 우리 조상의 지혜에서 술보다 차를 권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가 강진 다산초당이듯이, 유배지 주변에 있던 월출산 자락의 백운동 역시 좋은 경치였다. 다산초당이나 이 책이 소개하는 백운동 별서정원이나 생각하면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 많다. 이런 역사와 문화공간이 숨 쉬는 곳이 국가에 의해서보단 그 문중의 후손에 의해 지켜진 것이다. 한국이 양반과 상놈이 없어진 곳이지만, 진짜 양반가문이라면 그런 양반의 특권의식이 아니라 양반들이 지켜오던 그 문화적 유산을 기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았다. 그 누구의 지원 없이 오로지 후손들의 손으로 지킨 문화유산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화산업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책을 읽어보면서 아름답고 경이로운 우리 문화유산이 저 멀리 일본과 유럽에 있었다는 점이 참 안타깝다. 문화재의 보존과 전승은 그 나라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문화자본으로서 그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민 교수가 저술한 이 책에서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가 당시 이 서원의 주인들과 그들을 방문한 나그네를 찾으며 우리 문화와 자연을 음미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초의선사와 완당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시대 차의 성인으로 모셔진 것처럼 강진에서 유배생활이 한국의 다도문화의 활성화 시킨 것을 생각하면 좋은 문화유산을 발굴한 것과 같다.

 

흔히 한국의 차밭이라 하면 보성차밭을 생각하나, 그곳은 일제가 대규모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기에 비록 차의 생산은 많으나, 단지 넓은 차밭을 제외하면 문화적 유산가치가 강진에 비해 부족하다. 백운산의 죽로차는 대나무 숲의 이슬을 먹은 찻잎을 따서 만든 차로 그 맛이 어떨지는 모르나 분명 깊은 세계를 가질 것이다. 대학시절 다도문화동아리에서 활동할 적에 한 번 강진의 다산초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다산 선생님이 기거하신 다산초당은 윤단의 별채였고, 거기의 후손들은 다산 선생님의 제자들이었다. 그 제자의 후손들이 계속 초당과 주변을 지키고, 다산차를 지켜왔다.

 

다산 선생님의 제자 18인이 만든 모임인 다신계에서 그 중 한 사람의 후예가 그 차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사서 마신 차는 이때까지 어느 작설차보다 뛰어나지 않았다. 구수하고 깊은 차 맛에서 다산 선생도 좋아한 백운산 죽로차 역시 상당히 좋은 차란 점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별서정원의 조경과 주변 환경은 자연에 대한 인공적 자연미가 무척 어울려 마치 신선이 된 것 같은 운치가 있을 것이다. 현대처럼 뜨거운 자동차매연 아래 콘크리트 숲을 걷는 우리에게 정신적인 안정이 없다. 맑은 물과 공기 그리고 푸른 숲과 한옥, 과거의 것이라고 하나 지금의 우리 마음에 치유로서 그 가치는 이루어 말할 수 없다.

 

그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시도 짓고 그림도 그리며, 많은 기록을 남겼으니 한국의 국문학과 미술까지 같이 자라나는 것과 같다. 그동안 한국은 먹고 사니즘에 정작 미래에 먹고살아갈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모습을 알고, 그 현재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 문화적 유산은 바로 거기부터 시작이다. 한국이란 나라가 계속 한국이란 이름을 가지기 위해서 그것이 곧 우리의 자산이 되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문화에도 중요하다. 2012년 유네스코 인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되셨다. 한국의 인물과 그 인물로 통한 문화적 유산이 세계유산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유산에 대한 관심을 가질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문화적 가치가 오르면 교류가 활성화되고, 교류가 활성화되면 상품과 시장이 발달된다. 우리의 미래는 좀 더 넓은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것은 이 책을 보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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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봤어? - 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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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봤어>라는 책을 보면서 내가 처음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품은 시절을 생각했다최근 대법원관 선정과 관련하여 청문회 증인에 선택한 사람 중에 국회의원 정형근이 있었다그 사람은 내가 사는 시의 다른 구의 국회의원이었다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학부에서 통계조사하러 가면서 일반 사무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아무 것도 모른채정형근 지역구 사무실에 들어갔고 당시 보좌관은 우리 학부생에게 쌍욕을 퍼붓으면서 우리를 밖으로 내쫓았다아마 이때부터 정형근 위원이 몸담은 당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정치에 관심없는 사람이라도 아주 어이 없거나 황당한 일에 말려 피해보거나 욕을 보이면 정치에 혐오감을 가지고그 혐오감을 주는 자에 대한 끊임없는 배타심으로 이어진다.


 

 

그런 문제의 한계는 반대의 반대로 이어질 뿐이고결국은 해결되지 않은 딜레마에 빠진다내가 만약 대한민국헌법을 모르거나 헌법의 기원그리고 프랑스대혁명을 모른다면 민주주의 국가체계를 알 수 있을까어느 보수논객은 프랑스대혁명을 범죄로 보는데한국이 자유민주주의국가라면 그 헌법의 기원이 프랑스대혁명이란 점을 보면 그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 체계조차 부정한 셈이다정치에 대한 논지에서 기본적으로 철학적 기반 없이 논하는 것은 나는 바보 혹은 거짓말쟁이라고 스스로 드러내는 셈이다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관계에서 소유권이 재산과 자신의 몸에 대한 신체란 점에서 오묘하게 돌아가는데문제는 자유의 논지는 몸과 마음이 포함되어야 하는데한국은 자본의 크기로서 비례된다.


 

 

이상하게 불리한 것은 평등유리한 것은 자유라는 슬로건은 이상한 시스템을 만들게 되었다. <생각해봤어>는 14가지의 테마를 가지고 전문가를 초빙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일반정치교양도서다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기본적으로 플라톤부터 존 롤즈까지 다양한 프레임과 관점을 보는 게 정당하겠지만그런 책들을 일일이 잡고 보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무리다그래서 <생각해봤어>는 일반인들도 진짜 이해하기 쉽게 만든 도서고어려운 단어나 내용을 최대한 배제했다거의 일반적인 상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과연 그렇구나하는 정도로 만든 도서다.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입구가 너무 화려하거나 전위적이면 보통 사람에겐 그 문을 열어볼 자신이 없다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는 우리 일반적으로 뉴스나 미디어에서 나오는 문제그리고 당장 우리가 부딪히는 시급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정치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겐 너무 낯설어 보이지만그 낯선 대상은 우리 일상생활을 철저하게 배회하고 있다단지 그 스위치가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부당함그리고 그 이상으로 분노하는 우리 가족에 대한 피해는 그동안 무감각하던 정치적 세포를 살리는 기폭제가 된다.


 

 

정치에 관심 없다며 정치혐오 내지 자신이 중립이라 선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라는 방식은 오히려 현재의 상황을 더욱 가속시키는 일이다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무관심한 사람들이 늘기를 바라며계속 프로파간다라는 선전으로 책임을 회피하려 할 것이다그러나 한국에서 상위10% 이내를 제외하면 결국 밑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상위 1%면 처음부터 걱정이 없으나나머지 9%는 99% 중에서 투쟁으로 얻어지는 자리다.


 

 

자신이 그런 좌석에 앉아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여전히 위기감을 느끼고삶을 만인에 대한 개인의 투쟁까지 이어진다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단지 그 개인들의 이권을 찾아가기 위해 만들어놓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지금 한국에서 국민 내부투쟁에서 한편으론 미래에 대한 걱정물가에 대한 걱정삶에 대한 걱정은 여전하다그렇게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남의 걱정은 쓸데없는 일이라 여긴다그러나 그 남도 당신에게 또 다른 남이란 점에서 공존 없이 경쟁으로 가는 것은 공멸할 뿐이다.


 

 

물론 선의의 경쟁은 필요하고자신의 노력이 되어 보상받는 것은 정당하다단지 그 기회나 그 결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어 문제다. <생각해봤어>는 우리 사회의 전반에 널린 문제를 다룬 도서다일일이 그 문제와 상황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겠지만다들 우리 사회가 문제라고 여기면서 그 문제에 대한 근본은 생각하지 않는다아마 그것은 <생각해봤어>처럼 우리 사회의 문제를 내 이익에 대한 관점보단 더 넓은 영역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바르다는 점이다.


 

 

내가 정치에 대한 혐오와 분노에서 정치적인 관점의 형성이 되는 과정은 바로 그런 영역이다내 친구는 나보고 너무 편파적이라 하지만중립의 기준은 판단력에 대한 기준이지윤리적 기준은 아니다미디어의 영향과 일방적인 정보게다가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심리내부의 믿음은 세상에 대한 눈을 가려버린다옛날 말에 민심은 바람에 눕는 풀보다 먼저 자리에 눕는다는 말이 있다문제는 다른 바람이 불어도 풀은 올라오는데민심은 전혀 요지부동인 경우가 많다.


 

 

아마 그것은 정체성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인간은 이성과 감정에 의해 살아가고특히 이성적 판단에 의해 선택한다고 하나사실 인간은 이성의 판단조차 자신의 정체성에 이해 결정된다정체성이란 자신이 현재 살아있는 그 자체내가 살아가는 목적혹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고귀한 존재일 것이다한국의 정체성은 아직 20세기 끝도 아닌 그 앞에 머물러 있다. 21세기가 도래하고다시 한국전통문화를 찾아가려해도 그 단절의 공간이 여전히 우리사회의 갈등을 일으킨다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여기든 결국에 그 방향은 어떻게든 우리 생활을 변화하게 만든다변화하는 것을 막지 못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거꾸로 가는 현실을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봤어>를 읽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면 과연 어떤 답이 나올까진짜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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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바고 문화사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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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가 얻은 별명 하나가 있다. 그것은 카나리아라는 새인 것이다. 카나리아라고 하면 귀엽게 생긴 작은 새로 울음소리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관상용(觀賞用)으로 자주 이용한다. 만약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위 별명에 대해 생각하면, 내가 귀엽게 생겼거나 혹은 목소리가 아름다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카나리아로 된 동기는 그렇지 못하다. 카나리아 앞에 수식해 줄 단어가 붙어야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은 탄광(炭鑛)이다. 옛날 사람들의 지혜는 바로 일상생활에서 비로소 알 수 있는데, 바로 카나리아를 탄광에 보내 이상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탄광에는 대기 중의 산소가 21% 이하일 가능성이 높고, 만약 산소가 일정치가 낮고 일산화탄소 내지 이산화탄소가 높을 경우 인간은 질식사로 사망한다. 특히 일산화탄소는 산소에 비해 인간의 헤모글로빈와 결합도가 300배 가깝다. 탄광에 카나리아가 들어가는 순간 죽게 되면 그 탄광은 매우 위험한 곳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탄광의 카나리아(목소리가 성인남자치고 굵지 않고 약간 가는 편이고 노래는 못하는 편도 아님에 불구하고)가 된 것은 바로 담배냄새에 무척 민감하다는 점이다. 집에서 잠을 자는데, 누가 대문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 바로 감지하는 점, 전에 아는 분의 결혼식장에 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몰라도 나는 담배냄새를 맡은 점이다.

 

 

결혼식장 전체가 일정구역을 제외하면 전부 금연구역인데, 누군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담배냄새로 인해 짜증나는 상태로 결혼식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결혼식장을 보고 난 뒤 식사하러 갈 때 일행들에게 담배냄새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후각이 예민한 것인지 아니면 담배에 대한 극단적인 이질감이 있어서는 모르나, 덕분에 탄광의 카나리아가 탄생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조금이라도 상한 음식이 입에 들어가면 이상한 맛과 냄새를 느끼고, 만약 그냥 넘기면 장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장염에 걸린 일들은 1년에 1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고, 담배는 일상에서 언제나 마주치는 대상이다. 담배에 대한 부분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담배냄새는 매워 내 눈을 아프게 하고, 코를 찌르는 냄새는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게 만든다. 게다가 아무 생각 없이 옆에 친구가 담배 피우면 뭔가 싶어 하나 물고 빨아보면 아무런 매력도 없고 그저 먹먹한 느낌만 난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던 잠깐 사귄 여자 친구와 키스에서는 뭔가 모를 불쾌감이 왔다. 물론 담배를 깊게 피던 사람도 아니고, 담배 자체도 순한 편인데도 말이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은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담배 하나를 잡고 흡연실에 가는 회사직원, 길가에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물고 다니는 사람들, 담배는 이제 어디 가더라도 누군가의 두 손가락과 위아래의 입술을 연결해주는 교량이 되었다. 좌우와 상하 중심에 있는 담배, 그것은 인간관계도 그렇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로선 담배를 피우는 부류의 사람들과 그렇게 대화할 일이 없다. 흡연실에서 담배 한 가치는 모르는 신입사원이나 경력사원조차도 친하게 만든다.

 

 

담배의 기발한 능력이란 바로 어색함의 무력화다. 담배의 기능 중에 사람의 마음을 진정하게 해주는 기능이 있는 것처럼 담배를 서로 피우면서 이야기하면 쉽게 친해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게다가 술자리에 특히 담배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술은 인간의 뇌를 자극하여 성격을 급하게 만들거나 혹은 아주 늘어지게 만든다. 이때 담배 하나를 피우면 잠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정신을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 된다. 이렇듯 담배는 우리 일상생활에 매우 깊숙이 자리 잡은 기호품이다. 단지 문제는 기호품이 되어도 세상 모든 사람의 기호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담배에 대한 이야기 그것은 현재 우리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 역시 마주치는 물건이다. 그런데 이 담배가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오늘 어떻게 하여 이 모습으로 하게 되었는가?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담배라는 게 일상생활에 뿌리내린 것처럼 담배문화와 관련된 것들은 누구나 1번 생각하게 될 것이다. 특히 왜 한국인들은 담배나 또는 담뱃불을 빌리는지, 왜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지, 담배의 맛을 도대체 무엇인지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문학동네 출판사에 나온 <담바고 문화사>는 우리 담배문화의 시작부터 근대까지 자세히 재미있게 풀어낸 책이다.

 

 

한국의 전통문화는 한자로 구성되어 있어 지루하거나 또는 어려워 다가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런데 이 책을 한자로 남은 조선시대 기록은 잘 정리하여 해석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즐비하게 정리해놓았다. 우리가 누구나 알만한 역사인물이 나오고, 담배는 일상생활 속의 물건이라도 그것이 조선시대 후기 정치적 갈등까지 이어지는 것도 신기했다. 개인적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 만덕산 자락에서 다산초당(茶山草堂)에 기거하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내가 그 다산초당 직접 방문할 때 주변에 야생차로 가득했으며, 높지 않으나 은근히 산세가 험한 곳이라 작은 절벽 아래로 차나무들이 이래저래 자리 잡았다.

 

 

여기서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제자와 친구들이랑 차를 만들어 마셨다. 그래서 다산(茶山)이란 호처럼 차를 사랑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남다(南茶)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남쪽의 차, 즉 담바고 담배이었던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한국위인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던 만큼 그가 겪은 유배생활은 처음 포항 쪽에 위치한 장기현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기나긴 귀양, 낯선 공간과 외로움, 개혁을 꿈꾸던 조선의 지식인은 붕당정치에 의해 비참하게 먼 길을 가야 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담배라는 점이 신기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담배애호가 정조와 정약용이 있었다는 점에서 신기했다. 담배라는 것이 조선 임진왜란 후 새로 왜국과 교역하기 시작하면서 반입되다가 어느 순간 동아시아 최고 담배생산지가 되었다. 담배는 청국과의 교역에 매우 중요한 위치였고, 전쟁 중에 담배가 없었다면 물자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2차례의 호란은 피폐한 국가제정으로 몰고 갔으며, 청국과의 관계에서 담배는 여러모로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조선의 담배가 최상의 상품이고 최고의 선물인 점에서 담배는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던 시절 제일 중요한 물건이었다.

 

 

양반들이 피우던 담배는 장죽(長竹)을 이용했고, 서민이 주로 이용하던 것은 곰방대였다. 길고 긴 장죽으로 담배를 피우던 양반들은 시간에 대한 풍류를 즐겼을 것이고, 짧지만 편리한 곰방대를 물던 서민들은 고된 하루의 일과를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담배를 맛으로 피우기도 하지만, 왜 담배에 사람들을 끌릴 수밖에 없는가? 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은 단지 담배가 가진 성능이나 효과에 치중되어 있다. 물론 담배가 가진 독성이 인간의 폐와 장기에 영향을 미치며, 담배를 횡죽(橫竹)하는 것은 못된 버릇이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는 이유란 바로 인간이 시간이란 것을 어떻게 대처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한가로운 자나 지겨운 자 모두 담배가 좋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조선시대에 놀이나 문화생활에 한계성이 있었다. 영화, TV, PC, 라디오 등 다양한 콘텐츠를 즐길 방도가 없었다. 시간은 과연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같은 24시간을 주어진다고 해도 결국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난감한 부분이 생긴다. 선비들은 대부분 독서를 하며 학문을 수행하고, 과거를 보고 관료로 등용되며, 때에 따라서는 정치를 수행한다. 혹은 자연과 집안에서 풍류와 예술을 즐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시간과의 싸움이다. 인간은 지겨운 시간을 이기기 힘들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있는 것도 지겨운 일이다. 담배는 입에 빵 대신 장미를 물게 해주는 도구라고 볼 수 있다. 담배 한 번 물고 생각이 잠기면 마음이 다시 안정을 찾는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답답한 마음에 그저 한숨만 내쉬는 것보다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밤하늘을 보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다는 점을 말이다. 한가함의 의미로 장죽은 선비의 무료하고 한가한 시간을 더욱 보배롭게 해줄 것이다. 이에 곰방대는 지겹고 힘든 일에 잠시 마음을 달래는 도구일 것이다.

 

 

담배란 그렇게 우리 민족 역사에서 등장한 것이다. 인간이라면 가만히 앉아 아무 것도 못하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이 없다. 귀양길에 오르면서 잠시 앉아 자신의 입장에 서러워하고, 헤어진 형님을 그리워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담배 장죽을 입에 물고 다시 길을 떠나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안쓰럽게 느껴진다. 유배생활 중에 길가 모퉁이에서 친구인 시보와 군보를 기다리며 장죽을 입에 무는 그의 모습은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물론 담배가 모든 이에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그때는 낭만이란 것이 있었다. 일제 강탈기가 도래하면서 담배는 원래 장죽과 곰방대가 아니라 종이를 말아 넣은 지권연이 수입되고, 지권연은 지금 형태의 담배가 되었다. 지금 우리 담배형태는 약 100년이 넘은 셈이다. 장죽과 곰방대가 당시 유교사회의 관습이 남아있었고, 일제는 그런 유교관습이 제국주의 침략에 방해되고, 경제적 수탈을 위해 지권연을 조선인들에게 판매했다. 물론 담배를 사람들이 많이 피우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담배로 보이는 우리 일상과 전통 그리고 문화가 급속히 사라진 점은 확실히 아쉬운 것은 분명했다.

 

 

담배에 대한 일화를 민화, 시조, 교지, 상소 등 다양한 역사적 기록을 참조하면서 <담바고 문화사>는 우리 담배문화를 보여준다. 그 당시 혹은 지금이라도 담배에 대한 문화적 유사성은 있었다. 담배 한 가치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주변에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담배가 개별적인 소모품이 아니라 곰방대나 장죽의 도구였다. 그래서 누군가 빌려주는 것은 다소 성적인 문란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고, 위생적으로 좋지 못했으며, 게다가 사농공사 계급사회에서 사대부가 하위계급에 머리를 숙이는 상황도 발생했다. 담배로 인해 재산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에서는 평등주의적인 요소가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유사한 문화현상을 많았다. 다소 우리 문화사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고지식하고 지루할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 책은 매우 재미있다. 시조내용도 재미있고, 해설내용도 재밌는 흥밋거리로 가득하다. 특히 김홍도와 신윤복의 민화는 그림을 보는 재미도 선사해준다. 고리타분한 지루함이 없는 <담바고 문화사>는 오늘 우리에게 다소 한국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조금 관심을 주는 도서라고 생각한다. 우리 문화는 버려지는 게 아니라 새롭게 해석하거나 때에 따라선 보전하는 것도 중요하다. 과거유물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지키는 것에서 우리 문화는 다양한 맛을 내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 맛은 애연가에게 달콤하고, 비애연가에겐 매울 수도 있지만, 아마 문화적 유산은 맵고 달콤한 맛을 가진 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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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
진중권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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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책 나오는군요! 이건 사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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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네 여자 - 그리스도 기원 이래 가톨릭교회의 여성 잔혹사
기 베슈텔 지음, 전혜정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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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네 여자>를 읽으면 그동안 우리 인류가 가지고 오던 문화유산의 암흑적인 부분을 알게 된다인류문명의 진보는 단순히 문화기술생활양식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게 아니었다때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 이전보다 못한 상황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었다이 책에서는 지금의 세계가 오면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수난을 당했는지그리고 그들의 죽음과 비참한 운명의 기록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알게 해주는 도서였다신에게 필요한 여자란 정녕 신이라고 불리는 관념적인 존재가 요구한 인간이 아니었다.

 

단지 신의 이름으로 향하는 인간들이 만든 치졸한 행위였다인간이 신의 명령에 따라 신의 진리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그 인간이 진짜 신의 말을 들었던 혹은 듣지 않았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그가 말을 하는 순간그것은 신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서 타인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신이란 존재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은 관념적 존재이므로 인간의 무의식적 내면에 있는 존재다바로 신이란 인간의 이성의 영역에 존재하기 보단 인간의 집단 무의식적으로 잔존하는 본능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군중심리에 따른 집단광기는 희생제의라는 독특한 문화적 현상을 만들고이 제의에서는 언제나 대속이란 희생양을 만들게 된다이런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적 요소들은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즉 인간이 수렵과 채취로 통해 살아가는 미개한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들은 서로 침범할 일도 없이남자나 여자 모두 평등하기에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취할 수 있었다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공동체 규모가 커지며가족단위가 부족단위 그리고 더 나아가 민족단위로 이어지면 국가라는 체계가 생겼다.

 

끊임없이 대지를 이동하며 풍요로운 자연의 은총을 받았던 인간들은 이제 그 자연의 한정적인 자원 때문에 서로에 대해 칼과 창을 겨누게 되었다플라톤이 추구하던 <국가>라는 서적처럼 인간사회는 결국 전쟁으로부터 언제나 자국을 지켜야만 했고강력한 정신력과 육체가 필요했기에 남성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이어졌다하지만 그리스폴리스 시대라도 남성중심의 사회라도 그나마 여성에게도 나름 권리가 있었다인류에서 가장 용맹하고 사나운 남성으로 스파르타 전사를 손꼽을 수 있다스파르타 용사들은 그 누구의 명령을 듣지 않고용감하게 전장을 향하여 돌진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유일하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스파르타 용사의 아내였다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진정으로 강한 남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더 강한 용사가 아니라그들보다 육체적으로 약했던 그들의 아내였다이 부분에서 <신의 네 여자>는 다소 지나친 오도를 범한 것이다루소의 <에밀>에서 여성은 남성즉 남편에게 복종하게 위해 존재해야 그를 반여성주의적 요소를 드러나게 했으나사실 <에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면가정에서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식탁에서 그 자리의 권한과 관리는 모두 여성이었다.

 

다소 부엌에 권한을 지니게 한 점이 아쉬울지도 모르나, <에밀이전에 루소의 <신엘로이즈>에서 생 프뢰와 데탕주 쥘리의 편지를 읽어보면 과연 루소가 반여성주의적 성향 혹은 남성우월주의라고 생각할 수 없다. <신엘로이즈>는 이성과 감성에서 르네상스 이후 유럽은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서 이성을 절대화를 추구했으나루소는 오히려 계몽주의자이면서 반계몽주의자로서 대변한 것이다. <신의 네 여자>가 아쉬운 부분은 바로 이런 요소다여성이 당하던 부조리와 모순들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비참하고 끔찍하다.

 

그림 한 장도 없는 책이지만여성에게 가해진 고문과 폭력을 텍스트를 읽는 순간 내 머릿속에 흘러 오르는 이미지는 소름이 끼칠 정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나치게 여성피해에 대한 강박관념이 지나치다고 여겼다물론 그 피해가 있었고그 피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여성에 대한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한다하지만 모든 문제를 과거 교회의 시작인 가톨릭 중심에서 시작되지만글을 보면 남녀 차별문제로 지나치게 강요될 가능성이 높다예전에 읽어본 <캘리번과 마녀>의 경우마녀사냥에서 여성이 당한 수모와 고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만그 원인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에 대한 모순에서 극대화되었다고 설명한다.

 

<신의 네 여자>에서도 그런 부분을 인용하고 있으나모든 부조리가 교회에서 시작되고지금의 교회가 그렇지 않더라도 예전부터 전래된 문화적 양식이 계속 덫이 되고 있음을 설명한다책의 끝은 교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하나내가 보기엔 단순히 여자의 억압하던 존재는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가 그동안 결탁해온 권력에 대해 공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책에서도 마녀사냥에 대한 본보기가 단순히 마녀사냥이 광적으로 이루어진 16~17세기만 아니라 고대국가부터 시작하여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현대의 마녀사냥이 아닌 마녀사냥의 대상은 여자들이 많이 당하고 있지만남자들도 만만치 않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의 네 여자>는 이때까지 여성이 당한 억울함을 충분히 짐작하게 되겠지만그 대안방법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현대사회에 여성들이 공직자로 오면서 고위공직에 남성이 틀어막는 모습이 있다는 것은 안다하지만 이와 다르게 계속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직업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 다투는 현실이 되었다이런 부분은 단순히 여자의 인권만 보는 것이 맞는 게 아니라 소외된 중하위층 남녀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과거 왕이 정치하고교황이 정치에 큰 압박을 가할 때는 전 근대적 사회였고이 시기에 부당한 위치에 놓인 여성이라면 그 처지는 분명 99.9% 부당하고 억울하다하지만 지금은 왕이 지배하는 세계도 아니고교황은 세계평화나 인류애를 말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물론 아직까지 꽉 막힌 사고로 말이 통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여성들은 투표권이 있고자유롭게 연애할 권리도 있다연애할 권리결혼할 권리심지어 아이를 낳을 권리마저 박탈된 게 아니라 자신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이 된다면 충분히 결정할 수 있다이 책이 2004년에 번역되었다고 하나 1990년대 말이라도 충분히 위의 조건들은 한국에서 가능했고한국보다 더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유럽이라면 두 말할 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신의 네 여자>는 과거의 여성수난사에 대한 서적으로 탁월해도 미래에 대한 여성에겐 그다지 의미가 없다유럽에서 여성들이 구교인 가톨릭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으며설령 믿고 있더라도 자신들만의 삶을 반영하여 종교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종교라면 아마 미래에 도태되어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지도 모른다여성은 남성보다 생체적 조건에서 불리하나생물학적(추위나 더위가 여자가 남자보다 강하다)으로 불리한 게 아니다경제적 조건에서 극한의 상태가 아니라면 충분히 생계가 가능하고적당한 교육과 환경이 주어지면 좋은 학자도 되고정치가도 될 수 있다.

 

교회가 만들어온 열등한 여자창부성녀바보 같은 여자들은 만들어서는 안 된다이제까지 신이라는 이름을 대는 교회에서 그렇게 만들었다면 이제는 자본주의와 미디어가 생산하고 있다교회가 신의 이름을 대신하여 돈이라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새로운 신이 되었다아직까지 그런 과거의 유산이 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다교회에선 늙은 여성들의 지식과 삶의 지혜를 두려워했다그녀들이 의학기술과 민간요법은 마을의 지도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늙은 노인들을 혐오하게 만든 것은 그녀들이 마을공동체에서 영향력을 박탈하게 하고늙은 여자는 마녀의 이미지화 시켰다.

 

디즈니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인 <백설 공주>에서 늙은 마녀가 나와 독이 든 사과를 백설 공주에게 건네준다독이 든 사과를 만든다는 것은 독 자체가 하나의 약품에서 시작되고 사과는 철분과 비타민이 많은 과일이다독이 든 사과로 독살하는 장면처럼 음식과 약초로 통해 의학기술을 가진 여자들을 악적인 존재로 전략하게 한 것과 같다백설 공주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고생식력을 가졌기에 필요한 존재였다왕자의 키스에서 모든 운명을 맡기는 것처럼 여자는 아무 것도 필요 없고남자에게만 복종하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여준 것이다.

 

물론 신화적으로 백설 공주는 근친상간을 하다 어머니에게 내쫓기고어머니는 백설 공주의 계략 아래 잔혹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신화와 동화는 겉과 속이 서로 다르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내지 민간에서 자신들의 입장에 맞게 금 전해온다문제는 현실에서 우리는 백설 공주처럼 살아가기 바라는 여성이 많다는 점이다한 번 꿈을 꾸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백마 탄 왕자는 현실에서 부르주아고그들은 일부 극소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들이다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남의 권력에 의지하는 여성도 있고아닌 여성도 있다.

 

과거의 여성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자신의 입장을 다지기 위해 여성 자신도 주체적인 존재로 되어야 하나자신의 이익에 치중한다면 마녀사냥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것이다한국에서 최근 극우사이트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일화를 들으면 지나치게 심각하나그 혐오대상이 되는 여성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단지 그것을 너무 확대하여 일반화시키는 것 자체가 논리성을 찾아보기란 무리다이런 현상에서 사회는 남녀의 대립적 관계로 몰아가기 위해 서로를 적으로 만들고서로 골을 상하게 만든다마녀사냥의 토대 역시 그러하다대부분 농민의 토지가 몰수되고한파와 가뭄으로 몰아치면 그 책임에 소재를 자연적 재해가 아니라 대속의 존재를 찾게 된다.

 

대속의 존재가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신의 네 여자>를 보면 부패한 기득권층이 행한 방식과 그 철저한 모습을 보고 반추하여 이에 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이에 대한 대안 역시 누차 강조하듯이 좋은 결말을 줄 수 없을 것 같다광신적인 행동이란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빠지고바보 같은 인간은 여성만 아니라 남성도 적용된다이성적 문명의 유지 아래 비이성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며그 죄에 의해 희생된 여성들에 대한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그런다고 하여 그것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고 해도 그 비참한 역사는 지금의 여성이 아니라 과거의 여성이 받은 것이다과거를 부정하고 잊으라는 것이 아니다그 부당함에 대한 책임에 대한 보상심리를 바라는 것이 문제다부당함 현실은 보상심리로 당장은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나그것은 다시 불화를 일으켜 다른 방식의 마녀사냥으로 도달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마녀사냥의 희생자는 항상 약자이고사회적으로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다그들의 희생을 정당화되는 점에서 그 대상자는 이제 여자만이 아니라 단지 약자인 자들이다남녀차별로 희생당한 여성들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여성의 권리만 보는 게 아니라 약자의 입장을 보는 게 타당하다. <신의 네 여자>에서 억울하게 마녀로 지목되어 참혹하게 고문당한 주부의 유언에서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걱정이 참 안타깝다마녀로 지목된 여자 중에서 처음에 늙은 여자에서 과부와 주부가 많았다그들의 죽음에도 여전히 집에는 그녀들의 아이들은 남아있고아이들은 배고픔과 외로움그리고 광기에 빠진 마을주민에 의해 고독한 삶에 분명 절망할 것이다.

 

마녀사냥이 사라진 지금도 마녀사냥이 아닌 마녀사냥에 희생된 사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그런다고 멍청하게 TV만 보고 인형처럼 살아가는 것 역시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자신의 약한 부분을 이용하여 편리를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결국 여성들은 자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삶의 주인이 되는 게 이 모든 비극을 마무리 지는 길일 것이다물론 그건 여성의 노력만 아니다한국사회에 보면 꼰대 같은 남성들이 여전히 기득권층에 속하며그들의 비논리적인 말과 행동이 하나의 법칙이 된다과거 <신의 네 여자>를 만들고 유지하려 한 자들인 만큼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나 별 반 차이는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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